***신구약 성경강해***/- 로마서 강해

로마서 연구방법

에반젤(복음) 2019. 12. 19. 09:22


                                                 로마서 연구방법

                                             김지철 교수(장신대/신약학)



로마서 연구는 단순히 본문에 대한 주석을 해 나가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본문을 설교현장에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를 묻는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말로 쓰여진 본문을 들고 어떻게 설교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생각해 보는 자리입니다. 설교의 자리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본문에 대한 신약석의 방법론적인 접근이 요청되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나서 본문이 지닌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의미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석의 방법론을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성경본문에서 석의 방법론을 통한 성서주석을 거쳐 목회현장의 삶을 직시하는 설교의 자리에로 이르러야 한다는 원칙론입니다. 그러면 로마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그러한 방법론적인 틀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러나 도식화해서 생각해 봅시다.

Ⅰ. 성경본문에서 → 석의방법론을 통한 주석으로 → 설교의 자리로!    

1) 본문확정:설교 본문이 왜 앞 뒤 본문과 구분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내용의 흐름, 문장의 구조, 문학적인 양식, 주제의 변화에 따라,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확정된 본문의 문학적인 짜임새와 주제의 흐름과 강조점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3) 가능하면 사역(필요시 본문비평)을 시도해 보고, 그럴 여유가 없으면 우리말로 된 여러 번역(개역, 새번역, 공동번역, 표준새번역등)이나, 외국어 성경을 참조하는 것도 본문을 연구 검토할 즐거움을 갖게 한다.

4) 확정된 본문의 각 절을 분석할 때, 그 방향은 언어적 분석 → 역사적 배경 → 신학적 의도 → 목회적인 적용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편의하나, 뒤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의 사항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1. 인칭의 수와 격을 염두에 두라. 동사의 내용/시제/인칭/태에 관심하라.

2. 접속사를 통한 문장의 관계성은? 반복해서 나오는 어휘가 무엇인가?

3. 구약을 어떻게 인용하며 새롭게 해석하는가?

4. 본문을 염두에 두고 있는 역사적이며 종교적인 배경은 어떠한가? 유대주의와 헬라주의와의 관계성도 고려의 대상이다.

5. 본문에서 제시하는 신학적 어휘와 사상은 무엇인가?

6. 오늘의 목회현장과 바울의 현장과는 어떤 관계성이 있는가? 지금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5) 확정된 본문을 숙독하면서 유의해야 할 것은 본문(Text)의 문자(Letter)에서부터 내용 이해(Concept??Understanding)의 지평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본문에서 그 내용적인 이해??동기??의도를 인지하는 것

2. 어휘와 문장??문장과 문장의 잇는 주제는? 복합적인 의미이해는?

3. 나무의 구성을 통한 숲의 이미지를 확대

숲의 이미지 속에 나타난 각 나무의 세밀한 분석

4. 본문이 주제적인가? 논쟁적인가?

5. 본문이 산문적인가? 시적인가? 역사적인가?

6. 암시적인가? 표면적인가?

7. 앞뒤의 문맥은 반복??확대??상승??강조??역전??대비??결과??원인적인가?

6) 신학적 주제에 대한 확대:구약학??신약학??교회사??조직신학??기독교 윤리학??실천신학(교육학??선교학??목회학??상담학??설교학 등)적인 물음과 대답이 있는가?

7) 본문에 대한 전체 제목??소제목 달기

8) 오늘의 교회??그리스도인을 위한 메시지 찾기(구체적인 적용).

9) 본문과 관계된 기도문 작성



Ⅱ. 말씀 이해에서 말씀에 대한 사랑과 순종에로!  

1) 바울은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신학자이며 선교사였으며 목회자였다. 우리가 로마서를 바울의 심정으로 읽는다면, 바울의 어떤 신학적인 의도와 목회적인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가? 그가 생각하는 복음에 대한 이해는? 자기 이해는? 그리고 그가 편지를 보낸 로마교회는 어떠한 교회였는가?

2) 우리가 관심을 갖고 수행해야 할 세 가지 석의적이며 신학적인 지평이 있다. 첫째는 본문에 대한 석의적인 관심이다. 둘째는 본문을 해석해 온 교회의 교의학적인 진술과 교회의 변화이다. 셋째는 지금을 살고 있는 회중과 설교자 자신의 모습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오늘의 회중에 대한 실존적이며 사회적 삶의 자리에 대한 관심이며 동시에 강단에 선 설교자 자신에 대한 자기 점검과 비판이다.

3) 설교가 관심 해야 할 세 가지 요소

a) 설교를 위한 신학훈련:석의적이며 동시에 교의적이며 목회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설교본문을 향한??위한??의한 접근이, 그리고 묵상과 신학적 메시지 발견이 요구된다. 여기에 신학 전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b) 설교의 접촉점으로서의 인간학적 연구:대화적이 되기 위해서 상담학, 교육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문화적 삶의 자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c) 설교학적인 접근:설교내용의 전달 형식??방법??영향 등에 대한 공부

여기서 문제되는 것:본문과 오늘의 삶의 자리를 연결시키는 일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Text와 Context의 이해와 둘째는 오늘의 회중의 Context와 그에 상응하는 Text를 찾아 나가는 일이다. 하나는 계시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문화적 격차에 대한 극복이다. 전자는 성령을 통한 깨달음을 통해, 후자는 성령에 의해 순화된 이성을 동반한 연구를 통해 연결된다.

4) 전체적으로는 본문 → 분석 → 이해 → 적용에로의 과정으로 나간다.

로마서 연구    

종교 개혁 전통에 서 있는 한국의 개신교는 신구약 성경의 여러 책 중 어느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한다면 한 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담임 목회자가 어떤 책을 주로 설교 본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목회철학의 중심방향을 어떤 책 어떤 구절에서 채택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그 대답에 따라 교회의 신학적 방향성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률적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판단은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목회자가 구약의 예언적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세우는데 관심 있음을 뜻한다. 시편과 지혜서에 관심이 있으면 예배를 통한 삶의 문제의 극복과 삶을 꾸려 나가는 생활의 지혜에 관심 있음을 뜻한다. 요한 3서의 삼중복음에 관심이 있으면 현세적인 축복신앙에 매달리고 있는 것을 뜻하고, 복음서의 여러 사건들 중에서도 치유사건에 관심이 있으면 치유사역에 관심이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로마서에 관심이 있다면 무슨 뜻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바울에 관한 관심이요, 바울이 이해하고 경험한 복음에 관한 관심이라 할 수 있다. 원시 기독교회의 첫 번째 신학자라 말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세운 선교사요, 교회를 세울 뿐만 아니라 교인들을 위해 각고의 사랑으로 목회를 한 목회자로서의 바울에 대한 관심이다. 또한 그렇게 모든 것을 드리며 순종하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닫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제공해 주고 있다. 바울의 복음은 한편으로는 당시 유대교와의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언약의 제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교적인 우상숭배와의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극복과 투쟁을 위한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서신이 바로 로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서를 그들의 신학적 과제를 위한 중심적인 책으로 선언하고 있다. 예를 들면, 멜랑히톤(P. Melanchthon)은 로마서는 "사도 바울의 신학적인 종합(Summe)"이며, "기독교 교의의 요약"(doctrinae Christianae compendium)이라고 선언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M. Luther는 로마서는 "신약성경의 핵심부분이며 가장 분명한 복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누구나 한 말씀, 한 말씀을 외워서 알뿐만 아니라 매일 그것을 통해 영혼의 양식과 같이 교제해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예찬한다.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의 서신들은 이미 원시기독교회의 초기부터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문서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참조 롬 16,25-27). 베드로후서에서 이미 바울의 문서는 교회공동체에서 권위 있는 중요한 책으로 받아 들여 졌음을 암시해 준다:"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바울의 편지대상은 로마에 있는 부름 받은 성도들이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사랑 받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1,7). 바울은 이 로마서를 주후 55??56년 아니면, 56??57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바울이 세 번째 선교여행, 즉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헌금을 모금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갖기 바로 직전이었다(15,25 이하). 바울은 아가야의 수도인 고린도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로마서를 쓰게 된다(16,1. 2. 23; 행 20,2. 3). 이러한 추정은 다음의 사실로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롬 16,1-2에 언급된 뵈뵈는 고린도의 동쪽 항구 겐그리아 있는 교회의 일군이었다(바울의 로마서를 갖고 뵈뵈가 로마교회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롬 16,23에 언급된 가이오는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세례 받은 사람이다(고전 1,14). 고린도에 머물렀던 에라스도(행 19,22; 딤후 4,20)에게도 바울이 문안하고 있다(롬 16,23).

바울은 이 서신에서 그가 로마를 방문하게 될 것을 로마 교인들에게 미리 알린다(1,10-15; 15,22-24. 28f). 이미 동방으로의 선교여행이 종결을 짓고 있기에 이제는 로마를 거쳐서 서방 스페인으로 여행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위해 로마교회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15,24).

바울은 고린도로부터 급하게 이 편지를 띄우면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를 도와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 15,30-32)

그렇다면 사도바울을 두렵게 한 것은 무엇일까? 율법에 집착했던 교회의 핍박자가 이방선교사가 되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기독교 선교의 주창자가 되었던 이래, 바울은 그의 과거의 유대신앙을 가진 동료들로부터 위험스러운 배교자로서 낙인찍히며 동시에 엄청난 협박과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려고 하면서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두려운 마음을 표시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잘 보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행 21,27 이하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율법과 성전이해에 대한 모독자라는 판정을 받고 그들에게 죽임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된다. 행 23,12 이하에서는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하며 금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40여명이나 결성되었다고 보도해 준다.

또 하나의 바울의 걱정이 있었다. 그것은 이방교회,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의 교회에서 모금한 헌금을(참조 고전 16,1-4; 고후 8-9 장)­이것은 적어도 사도회의에서 바울에게 위탁된 책임이었다(참조 갈 2,10)­예루살렘 교회가 기꺼이 수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였다. 바울은 원시기독교회가 유대교의 중심부분에서 출교 당하게 되려는 압력이 점점 가중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주후 62년경에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된다. 야고보가 보고하는 것과 같이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행 21,21)고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회의(갈 2,1-10; 행 15장)와 안디옥에서의 갈등(갈 2,11 이하) 이후에 이러한 유대적인 색채를 더욱 강하게 띤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적대자들의 공격은 더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종교적 선동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회의 때에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통해 진행되는 이방 선교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장로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원시기독교회가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선교의 길을 가는 바울과 그를 통한 헌금을 거부하려는 위험성을 바울이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서를 집필할 때의 바울의 상황을 언급해 보자.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가 이방교회의 성립을 지켜보면서 안디옥에 보낸 사람이다(행 11,22). 그리고 바울을 다소에서 안디옥으로 불러들인다(행 11,25). 바울은 아마도 안디옥에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 복음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신학적으로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사도회의에서 예루살렘의 기둥 되는 사도들은 안디옥 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게 된다(갈 2,7-9). 그러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별도로 서로 공존하도록 허락된 것으로 보인다. 즉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켰을 것이며,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준수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지역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주의적인 적대자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의 진정성에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특히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를 받도록 요구하는 것은 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갈 5,2).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위치와 복음의 진정성을 변호하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참고 고전 15,8-10; 갈 1,13 이하). 바울은 그들을 향해 '거짓형제들'(갈 2,4), '거짓사도들'(고후 11,5)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갈라디아교회뿐 아니라, 고린도교회와 빌립보교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바울의 헌금모금은 이러한 상황에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 헌금을 통해서 보여주려 하는 것은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복음 안에서 하나됨에 대한 명백한 증거라는 사실이다. 바울의 헌금모금의 목적은 분명하다:"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2-13).

롬 15,31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바울의 교회들이 복음에 순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원시기독교회가 기뻐하며 감사할는지에 대한 확신이 바울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그를 비방했을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즉 그는 원사도들과 일치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복음과도 맞지 않는 율법에서 자유로운 선교실천을 함으로 교회를 오도하고 있다고 말이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교회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면,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복음을 제시해야만 했다.

바울은 그가 선포하는 복음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을 근거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의 율법 비판적인 신학으로 말미암아 그가 여러 가지로 비방 받고 있다(롬 3,1-8)는 점도 숨기지 않고 있다. 로마서에서의 복음증거에서도 유대주의적인 적대자들과의 논쟁과 회당 안에서의 변증적인 대화의 징조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적대자들의 신학적 방향성은 바로 예루살렘의 유대 적대자들과 상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 여행에 앞서 바울이 지닌 염려는 매우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롬 1,15) 그것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는 복음으로, 먼저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는 헬라인에게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롬 1,16)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그 복음 안에 있다'는 강력한 증언은 바울이 로마를 방문한 후에 제시하려고 보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로마서 자체에 명백하게 제시하게 된 것도 이해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로마서에는 내용적으로 같은 복음의 내용을 증거하는 갈라디아서의 격렬한 음조는 숨겨져 있다. 복음의 내용은 명백하지만, 진술의 방향은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고, 비난과 꾸중보다는 타이르는 권면으로 시종 일관한다. 즉 바울은 자기의 사도성과 복음의 내용을 지성적인 한 편의 논문을 써 내려가듯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를 먼저 사도적인 권위와 복음의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1,1-5; 참조 12,3; 15,15). 이 강력한 긴 서신을 기록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서 그가 편지를 쓴 이유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만 기억나게 할뿐임을 강조한다. 이는 그들이 이미 복음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바울이 제시한 복음의 진정성을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롬 15,14.15). 바울은 이제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온전한 기쁨으로 올 수 있을 것을 희망하며 복음을 제시한다(롬 15,32). 마치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바울이 그의 복음을 제시했다(롬 15,16).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의 공통된 근거는 복음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증거 하면서 로마서의 대단원을 맺으려 한다(롬 15,19:복음이 시작된 동쪽 예루살렘으로부터 바울이 세우려 했던 서쪽 일루리곤까지의 교회).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그의 소원을 언급한다. 그것은 당시 서방 세계의 끝으로 알려진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하겠다는 바울의 열망이다(15,23-24). 이 일을 위해 로마교회가 선교의 후원자가 되어 바울을 보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바로 그 선교의 길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도,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는 지름길로 이해했던 것이다.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채워질 때(11,25-26), 유대인의 완악함이 종료되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소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회  

로마교회는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았다(롬 15,20에서 다른 사람의 터 위에는 복음을 증거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복음을 증거하려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아마도 49??50년) 로마로부터 축출 당한 유대 그리스도인 부부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함께 만남으로 로마교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롬 16,3; 행 18,2).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유대인과 유대 그리스도인을 로마에서 쫓아내게 된다. 이는 로마회당에서 기독교 선교선포로 말미암은 심각한 소요를 일으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로마의 역사가인 Suetonius가 120년경에 쓴 기록에 의하면 Claudius황제가 로마에서 Chrestus의 선동으로 소요를 일으킨 유대인들을 추방했다고 기록한다(Claudii Vita 25.4). 몇몇 Chrestus들이 로마의 유대인들을 선동한 폭도들이며, 극단주의자인 것처럼 비추어졌다.

로마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생겼을 가능성은 몇 가지가 있다. 먼저는 예루살렘을 오순절 때에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거기서 회심한 유대 디아스포라의 성지 순례자들을 통해서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행 2,10:로마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된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아니면 로마에 의도적으로 온 어떤 무명 선교사들을 통해서 생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얼마나 일찍이 로마에 복음이 증거되어 교회가 세워졌는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명백한 것은 로마로부터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행 18,2.3)이다. 이 연대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이라 할 수 있다(참조 카돌릭의 전승에 의하면:행 12,17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말한 것이 바로 로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로마에서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추방 후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교회의 성장에 보다 강력한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54년에 죽은 후에 네로가 황제로 취임을 하면서 선임자의 칙령을 해제하게 된다. 그 후에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로마로 되돌아오게 되었다(참조 롬 16 장).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모두 합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로 지칭하고 있다(롬 1,6; 11,17).

이제야 비로소 바울도 로마로 가는 오랫동안의 숙원 계획(1,14)을 구체화 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아마도 로마에 소개하려고 한 것 같다. 바울이 고린도에 마지막 체류하는 동안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에 대한 여러 소식들을 그의 친구들이 바울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교회(롬 16,5에 보면 많은 가정교회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가 이방, 그리고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연합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로마교회의 편지 수신인들이 결코 이방 그리스도인들만으로도, 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서 어떨 때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으로(11,17), 어떨 때는 아브라함이 우리의 육신의 조상이라고 말함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롬 4,1)도 함께 포함시킨다. 우리는 롬 9,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을 보면 혼합된 교회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어쩌면 롬 14,1-15,13(참조 고전 8,1-13; 10,23-11,1)에 나타나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갈등이란 율법의 충실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롬 15,14-16,27은 롬 1,1-15와 다시 연결된다. 바울의 선교 여행계획이 등장한다(15,14-29). 이방 사도로서, 예루살렘에 헌금을 위탁한 후에는 동방에서의 선교 사역을 지속시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며 로마교회에 로마서를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를 위해 중보기도를 요청한다(15,30-33).

로마서를 기록한 이유를 다시 간단히 살펴보면,

1)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1,10. 11).

2) 로마교회를 방문해 그들과 함께 편히 쉬기 위하여(15,32).

3) 로마서를 통해서 그들과 교제하기 위하여(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9;  자기를 위해 기도를 요청한다:15,30).

4)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1,15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15,24). 이를 위해 바울은 그의 복음의 내용을 자세하게 피력한다.

5) 15,24:스페인에로의 선교여행에 로마교회가 협력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6) 이러한 선교적인 열정은 유대인의 구원에로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는 것과 관련된다(롬 9-11 장).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와 유대인의 완악함이 풀리기를 바란 것이 아닌가?

7) 교회 내의 연약한 자와 강한 자들의 갈등을 해결해 주기 위하여(14,1-15,13).

8)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그를 죽일는지도 모른다(15,31)는 염려나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이방교회가 제공하는 헌금을 거부할지도 모른다(참조 행 21,17:바울을 따뜻하게 맞았다)는 바울의 염려는 잘 극복된 것으로 행 21,17에서 보여준다("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함께 생각할 문제

1. "로마서"하면 내게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은?

2. 롬 1,1-7??8-15; 15,14-21??22-33 본문을 읽고 바울의 심정을 추론한다면?

바울은 왜 로마서를 썼는가?

3. 로마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유대인??이방인)

4. 우리말로, 특히 다음 사항에 주의해서 로마서를 한 번 읽으라.

ㄱ. 주어의 변화:나(우리)­너(너희)­그(그들):유대인??헬라인(이방인)

ㄴ. 접속사??서술어(동사??형용사 등)에 관심하면서 읽으라.

ㄷ.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성령이 나오는 부분을 표시해 보라.

ㄹ. 다음과 같은 주요 어휘를 주의하면서 읽으라(복음??믿음??의??율법??   죄 등)

5. 로마서 전체의 구조를 각자의 이해대로 크게 단락 구분해 보라. 일관된

해석학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왜 그렇게 단락지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6. 바울의 신학적??목회적인 태도에 대해 본받을 것이 있다면?

로마서의 구조    

서문:롬 1,1-7

서론:롬 1,1-15

중심주제 선언:롬 1,16-17: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o& deV divkaio" e*k pivstew" zhvsetai­

*해석학적 관점: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한 바울의 인간론 이해

Ⅰ. 하나님과 화해되지 못한 인간:1,18-3,20

   1. 그리스도 없는 이방인의 범죄(3인칭 복수:1,18-32).

   2.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의 범죄(2인칭 단수:2,1-3,9)

   3. 모든 인간의 범죄(1인칭 복수:3,10-20); 문학적 복수

     ­인간의 의도적인 범죄행위이다.

Ⅱ.  하나님과 화해된 인간:3,21-5,11

   1.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3,21-25)

   2. 믿음을 통한 의(3,26-31)

   3. 믿음의 모범자 다윗과 아브라함(4,1-25):포괄적 우리

   4. 의롭게(화해) 되었으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5,1-11):그리스도인

Ⅲ. 아담과 그리스도(화해되지 못한 인간과 화해된 인간을 구별하는 두 가

  지 모형적인 인격):5,12-21:우주적인 화해사건

Ⅳ. 화해된 인간의 삶: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6,1-23:우리 그리스도인

   1.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 그리스도인:6,1-14

   2. 거룩함에 이르는 의의 종:6,15-23

Ⅴ.  갈등하는 인간:아담적 인간의 갈등:7,1-25(나??너희??포괄)

Ⅵ. 승리하는 인간:그리스도적 인간의 승리의 확신:8,1-39(너희??포괄)

   1. 성령을 통한 새로운 존재:8,1-30

   2.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찬양

Ⅶ. 이스라엘인의 운명:이방인과 이스라엘:9,1-11,36(나??너??그들??포괄)

   1.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함:9,6-29:참조 3,1-4의 질문과 9,6의 대답

   2.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방인 ?? 율법을 통한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의

      좌초:9,30-10,21

   3. 하나님의 비밀:이스라엘의 구원:한시적인 이스라엘의 완악함:11,1-36

Ⅷ. 화해된 인간인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12,1-15,13

    1. 이웃과 함께 하는 삶:12,1-13,14

    2. 교회의 하나됨:약한 자와 강한 자

결론:15,14-33

문안인사:16,1-27

빚진 자로서의 간절한 바램:"내가 너희를 보기를 원함은…" (본문:롬 1,8-15)

Ⅰ. 중심적인 어휘와 짜임새  

먼저 수신자의 신앙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놓여진 따뜻한 사랑의 교감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기도 하다. 서론에 등장하는 것은 보통 다음의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1) "내가 감사한다"(eu*caristw'):로마서 1,8??고전 1,4??빌 1,3??골 1,3??살전 1,2; 살후 1,3??몬 4(참조 엡 1,15.16)

2) "찬송하리로다"(eu*loghtoV"):고후 1,3-11(찬송의 노래가 마지막에는 감사로 마무리 짓는다)??엡 1,3

  그러나 갈라디아서(1,6-9)에는 이러한 감사와 찬양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의 신앙상태에 대한 바울의 꾸짖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바울이 증거한 복음에서 떠나 복음을 왜곡하는 자리에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심 갖고 읽어 나갈 것은 '나'와 '여러분'이라는 두 대화의 대상이 서로 교차하면서 병행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주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바울의 생각과 결심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내가 감사한다, 내가 섬긴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간구한다, 내가 너희에게 간다, 내가 여러분 보기를 원한다, 내가 영적 은사를 나누기를 원한다, 내가 시도했다, 내가 열매를 얻는다, 내가 빚진 자다, 내가 선포하기를 원한다,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등이다. 그뿐만 아니라, 속격으로 구성된 표현('나의')도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나의 하나님(8), 나의 증인(9), 나의 영으로(9), 나의 기도에(10)" 등이 있다.

시간과 우선권을 나타내는 부사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먼저(9), 항상(9), 쉬지 않고(9)" 등이다. 이런 표현은 결코 상투적인 과장법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바울의 사상과 의도가 표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위의 언급된 바울의 모습은 바울과 로마교인들과의 감성적이고 영적인 관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서두인사에 이어 편지 도입부에서 로마교회를 생각하며 그 동안 간직해 왔던 그의 마음을 고백한다. 복음을 맡은 사도로서 솟아오르는 감격을 억누르지 못하듯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소원을 제시한다. '첫째는'(8:둘째로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는다)이라는 어휘는 억제할 수 없는 우선적인 기쁨과 감격을 지닌 선언적인 '먼저'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 자체가 바울이 보여주는 신앙의 우선적인 본이다(고전 1,4; 엡 1,16;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몬 4; 참조 고후 1,11).

계속해서 감사의 대상과 이유가 나타난다. 대상은 다름 아닌 바울에게 있어서는 '내 증인이 되신 내 하나님'이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고 복음을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분으로서, 바울은 그분을 향해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언어로서 '나의 하나님'(빌 1,3; 몬 4:시 3,7; 5,2; 7,1.3.6; 13,3; 18,2. 6. 21. 28-29; 22,1. 2. 10 등)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을 그의 영으로 전심을 다해 섬겼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중개자:8,26 참조)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어느 순간이라도 기독론적인 중심적 주제를 놓치지 않고 있다(5,11; 7,25; 고전 15,57; 골 3,17 등)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듯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것은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로마교회의 믿음이 온 세계에 알릴 만큼 성장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9). 그러나 이는 이미 복음이 전 세계에 증거되어 더 이상 선교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바울은 스페인으로 복음선포를 위한 선교여행을 꿈꾸고 있다:15,22-24).

여기서 바울은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곧 로마 한복판에서 세계사적인 사건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과 더불어 기도를 올린다(고전 1,4; 엡 1,16; 빌 1,3-4; 골 1,3; 살전 1,2-3; 2,13; 살후 1,3. 11; 2,13; 몬 4; 딤후 1,3). 그 기도는 한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바울은 유대적 관습을 따르다:단 6,11; 행 3,1; 10,3:하루 세 번) 드린 바울의 간구인 것이다. 이제 그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10).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맡은 것이나, 지금 그로 하여금 로마를 향해 가도록 불일듯 마음을 일으키는 것(15,30-32)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과 더불어 복음의 풍성한 은사들을 나눔으로 그들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질 날이 속히 오기만을 간구하고 있다(11). 그 이유는 서로의 믿음을 통하여 위로와 격려를 받고 힘을 얻기 위함이다(12). 그리하여 바울은 보지도 못한 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자들이라 부른다. 또한 로마로 부단히 가기를 원해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좌절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 모든 노력들을 언급한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로 가기를 원한다. 바울의 생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복음 그 자체가 열매를 맺기 원함이다. 그것이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다(15). 그 이유는 복음 안에서 그가 그리스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모든 자에게 다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바울은 로마서의 전체 주제인 '죄인을 의롭게 하는 복음'의 내용(16-17절)을 진술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Ⅱ. 사역:8-15절    

8. 나는 먼저 나의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 모두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믿음이 온누리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9. 그분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나의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나는 항상 나의 기도 중에 쉬지 않고 여러분을 기억하며,

10. 어떻든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나아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11. 나는 여러분들을 만나 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선물을 나눔으로 여러분들이 (더욱) 단단히 서기 위한 것입니다.

12.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의 믿음과 나의 믿음, 즉 서로의 믿음을 통해서 위로 받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자주 여러분에게 나아가기를 시도했습니까? 그러나(kaiV) 지금까지 방해를 받았습니다. 이는 내가 (바로)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와 같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어떤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14. 헬라사람들이나 야만인들에게나(외국인들에게나), 지혜로운 사람들이나, 미련한 사람들에게나 나는 빚진 사람입니다.

15.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대로(ou@tw" toV kat * e*meV)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Ⅲ. 각 절에 대한 간단한 해설  

8절

먼저:연차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두 번째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이라기보다는 우선적인 강조점을 말하려는 표현이다.

감사하다: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바울의 신앙의 우선적인 본이다(고전 1,4; 엡 1,16;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몬 4; 참조 고후 1,11).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이고, 감사를 하게 되는 역할??도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감사의 내용은 로마교회??교인들이다.

나의 하나님(빌 1,3; 4,19; 고후 12,21; 몬 4; 참조 시 3,7; 5,2; 7,3. 6; 13,3 등)이란 바울의 친밀한 기도의 대상으로서 호칭이다. '우리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공동성에서 개별성으로, 포괄성에서 친밀성으로의 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예수 그리스도는 기도의 중재자이시다(참조 롬 8,26). 그 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시다(롬 8,34).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중재자이시다. 로마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바로 기독론(롬 5,11; 7,25; 고전 15,57; 골 3,17등)에 기초한 것이다.

여러분 모두에 대하여:로마 교회 안(참조 롬 14,1-15,13)의 인간적인 어떤 차별도 바울은 넘어선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한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다.

로마 교회의 믿음이 온 세계에 증거되었다는 것(엡 1,15-16; 골 1,3-4; 살전 1,2-3; 살후 1,3-4)은 모든 기독교회가 로마교회를 알게 되었다는 뜻일 수도, 아니면 전 세계와 관련된 복음의 사건이 로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선언일 수도 있다(롬 15,19: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여기서 질문할 것은 이는 롬 1,15의 바울의 말("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기 원한다")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롬 15,20. 21("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이다.



9절

'나의 증인':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성을 농축해서 표현한 언어이다(삼상 12,5-6; 레 19,3; 고후 1,23; 빌 1,8; 살전 2,5.10; 참조 고후 11,31; 갈 1,20)

섬기다:롬 12,1; 15,16

나의 영:롬 8,16; 고전 5,3-5; 16,18; 고후 2,13; 갈 6,18; 빌 4,23

여러분을 생각하고 기도한다:고전 1,4; 엡 1,16; 빌 1,3-4; 골 1,3;살전 1,2-3; 2,13; 살후 1,3.11; 2,13; 몬 4; 딤후 1,3

끊임없이:바울은 유대적 관습을 따른다(단 6,11; 행 3,1; 10,3:하루 세 번:홀로 하는 예수님의 기도:막 1,35; 6,46; 14,32-42).



10절

하나님의 뜻:롬 12,2; 15,32; 고전 1,1. 고후 1,1; 8,5; 갈 1,4; 골 1,1; 4,12; 살전 4,3; 5,18

바울의 사도직이 하나님이 뜻이라면 그로 하여금 로마로 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로마에로의 여행을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지중해 동부 지방에 복음을 증거하느라(롬 15,19: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로마나 서방지역에 전도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롬 11,13) 로마에서도 복음의 열매를 얻고 싶어한다(참조 13 절)

로마에 가는 일:문명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를 방문하는 계획에 대해 롬 15,30-32(참조 행 19,21:"내가 거기(예루살렘)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에 잘 설명되어 있다.



11절

간절히 보고자 한다:참조 살전 3,6; 고전 16.7; 빌 1,27. 바울은 여기서 롬 16 장에 언급된 옛 친구들을 만나 보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적인 은사(cavrismata pnewmatikoVn):롬 12,6이나 고전 12,4-10에 항목별로 언급된 영적인 은사를 말하기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영적인 선물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여기서 교회의 설립자가 아니라, 로마 교인의 믿음을 북돋아 주기 위한 조력자일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살전 2,8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다.



12절

서로 위로 받는다:바울은 교회에 위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 마치 고후 1,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믿음을 언급함으로 바울은 일방적인 시혜자로 서기를 원치 않고 있다. 믿음이란 서로 각자 다를 수 있다. 그것은 서로 대화적으로 교환 가능하다. 서로의 믿음이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적이다. 믿음이란 함께 모이면 더 커지는 것이다. 나누면 커지는 것이 믿음이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는 나누면 줄어들고 쇠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눔의 법칙은 서로 상승한다. 그것이 믿음과 사랑일 때는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한다.



13절

나는 여러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롬 11,25에서도 다시 사용한다. 이는 바울의 상용적인 표현이다(살전 4,13; 고전 10,1; 12,1; 고후 1,8). 비슷한 표현으로 '내가 알게 하겠다'(갈 1,11; 고전 12,3; 15,1; 고후 8,1)가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롬 7,1. 4; 8,12; 10,1; 11,25; 12,1; 14,10. 13. 15. 21; 15,14. 30; 16,14. 17. 23. 이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의 일원임을 말하는 호칭이다(참조 막 3,31-35:예수와 제자들과 무리들과의 관계)

열매를 맺다:선교적인 행위를 통한 열매를 말한다. 곧 바울의 복음 증거를 통해 로마교인들의 신앙이 견고해 지는 것을 의미한다(롬 1,11. 15). 로마교회는 이방인들 가운데 서 있기에 그들에게 선교적인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것이 바울의 자연스런 소망이 될 수 있다.



14절

내가 빚졌다:두 가지 의미에서 바울은 빚지고 있다. 첫째는 바울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동시에 로마의 시민권을 지닌 사람으로서 헬라적 문명권에서 배우고 자라났다(행 22,25-28).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위탁받은 복음(고전 9,16)이 온누리에 전해져야 할 것이라는 명령을 바울은 빚진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태도였다(롬 11,13). 그리스도가 바울을 위하여 죽으신 복음 때문에 바울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는 그가 사랑한 사람들을 위한 의무가 되는 것이다.

헬라인과 야만인:언어, 문화, 종교가 하나로 묶여진 그리이스 민족을 지칭한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정복 이후에 헬라말을 사용하고 헬라의 문화와 교육을 받은 비 그리스인들도 다 헬라인으로 불리웠다. 야만인이란 헬라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칭하나, 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주위국가의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헬라말은 주후 1세기의 로마인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헬라어로 쓴 것으로 증명된다. 다음과 같은 병행 도식이 있음직 하다:롬 15,14-33에서 예루살렘, 로마, 스페인이 틀과, 롬 1,13- 17에서 유대인, 헬라인, 야만인의 틀의 병행.

지혜있는 자나 미련한 자들:헬라인과 야만인의 반복인가? 아니면 인류전체를 확대한 대비인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바울의 복음 증거를 듣고 받아들이는 데 차별 받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15절

내가 할 수 있는 대로(ou@tw" toV kat * e*meV):바울의 삶의 자세이다. 곧 능력껏,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로마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

복음증거하다:로마 교회는 이방인 한 가운데 서 있다. 그들 모두 다 '여러분'이라는 말의 범주에서 쓴 것이 아닌가? 즉 로마의 불신자를 다 포함한 폭넓은 뜻이다.

Ⅳ. 바울의 마음으로 다시 써 보는 로마서  

8절:나는 여러분은 생각하면 먼저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습니다. 감사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나의 우선적인 임무일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나의 삶의 모든 것은 나의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나의 관한 것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 관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내게도 들려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계신 곳은 바로 이 세상의 중심이며, 모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기초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나에게까지 들렸다는 것은 곧 여러분의 믿음이 이 모든 세상에 알려졌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기쁘게 했습니다. 나와 함께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구나. 나와 함께 복음의 증거를 감당할 사람들이구나 하는 안도감과 기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증거했기 때문입니다(롬 15,19). 여러분은 바로 나의 동역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감사였습니다. 여러분과 나를 묶게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은 늘 내 편이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9-10절:이 모든 것에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십니다(참조 살전 2,5.10; 빌 1,8; 고후 1,23:삼상 12,5-6; 창 31,50; 삿 11,10)).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의 생각과 눈치만 보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나의 생각과 삶과 행위를 판단하실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내가 하나님을 나의 증인으로 세운 것은 나의 행동에 대해 부끄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일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한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일해 왔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 곧 그것은 나의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내가 곧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며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롬 15,15-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은 바로 문명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는 여러분을 만나는 일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을 생각으로 떠올리곤 합니다(살전 1,2; 몬 4). 여러분을 위한 기도가 곧 나의 사도직을 감당하는 사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내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길 오늘도 기도하며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11-12절:나는 여러분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고 있고, 지니고 있는 영적인 선물들을 여러분에게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강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영적인 은사들을 나누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분을 돕기 위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보고 싶고,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자랑을 나도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서로가 위로 받고 격려를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은 여러분의 믿음에 힘을 주고, 여러분의 믿음은 나의 믿음에 힘을 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주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사람일뿐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돕고 격려할 수 있다면, 여러분도 나를 돕고 격려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주고받는 나눔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을 활력 있게 하는 힘입니다.

13-15절:로마서에서 처음으로 여러분을 형제 자매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나 나 바울 역시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이 잊으셨을까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모른다면 내게는 너무 섭섭한 일일 것입니다(참조 고후 1,8). 내가 여러분에게 나아가기를 원해서 여러 번 이러한 일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대해 여러분은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편지로 알렸는가? 아니면 인편으로 알렸는가? 롬 16장의 여러 사람들을 열거한 것을 보면, 적어도 바울의 심정이 로마교회의 중심 인물들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도할 때마다 그것은 방해에 부딪쳐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사탄의 장난인지도 모르겠습니다(참조 살전 2,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를 반복해서 하는 이유는 다른 이방지역에서 나의 사역이 열매를 맺은 것처럼 바로 로마교회에서도 이런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복음 안에 들어온 믿음의 사람인데 내가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복음을 교정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분의 복음사역에 동참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복음을 증거한 데는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다(롬 15,20-21)는 바울의 선교전력과 위배되는가?).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방인 한가운데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롬 1,6).

14-15절: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은 다른 야만인들과 비교하면 문화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 복음을 증거하는 데는 의미가 없습니다. 문화와 교육의 차이로 만든 인간차별을 넘어서 인간이면 누구나 복음을 들어야 하고 믿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사도로 부르신 이유는 이들 모두, 곧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들에게 다 복음을 증거하려 하심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복음을 여러분들에게 전해 주라고 맡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진 빚입니다. "내가 복음을 증거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라고 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위임에 대한 엄청난 나의 부담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복음을 맡기셨습니다(고전 4,1-2; 갈 2,7; 살전 2,4; 딤전 1,11; 딛 1,3). 청지기직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나의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의무는 곧 그분이 사랑하여 죽은 사람들을 위한 나의 의무로 바꾸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이 복음은 결코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로마에 있는 여러분을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복음을 이웃에게 알릴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의무만으로 내게 다가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자발적인 의사이기도 한 것입니다(15절). 나는 여러분을 만나 이 복음의 내용을 보여주려 합니다. 따라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이 복음을 증거하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증거할 복음의 내용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16-17절).

Ⅴ. 구체적인 적용을 위하여

1) 전도자이면서 사도인 바울의 마음에 새기는 두 개의 중심원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 교회 성도들과 자기와의 관계이다(8절).

하나님을 향해서는, 감사(8절)와 기도(9절)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며(10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선교의 삶을 준비한다(10절).

교인을 향해서는, 성도의 신앙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기도의 내용이다. 성도를 만나 그들에게 영적인 선물을 나누는 기쁨(10-11절), 서로가 위로와 격려를 받음(12절),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선교의 열정(14-15절)이 바울의 생각과 삶을 감싸고 있다.

2) 바울의 감사는 교회가 성장하여 그 믿음이 드러남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전도자와 사도의 감사이다(8절). 목회자의 궁극적 관심과 감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3) 본문을 해석하면서 설교를 향한 신학적인 접근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위에서 밑으로 보는 관점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모습이 잘 부각되어 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바울의 증인이 되신 하나님, 시간과 사건의 의미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뜻 등을 살펴보는 일이다. 두 번째 접근 방법은 바울(인간)의 입장에서, 즉 밑에서 위로, 또는 앞뒤로 보는 것이다. 즉 교인의 믿음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사람, 하나님을 예배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운 사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과 그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또는 온누리에 믿음이 증거되어 바울의 칭찬 받는 교회가 된 로마교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