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에반젤(복음) 2019. 12. 19. 09:20


                                        

 

-로마서 강해-

 

1. 저자와 기록연대

 

본서의 저자가 바울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초대교회때 교부들과 심지어 말시온이라는 이단과 현대의 신학자들도 본서의 저자가 바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저자가 바울인 가장 확실한 증거는 롬 1:1에서 바울 자신이 저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서의 기록연대는 대략 A.D.55-58사이입니다.

 

 

2. 로마서의 역사적 배경과 기록목적

 

바울은 동방선교를 마친 후(15:23a) 서바나로 가려고 했습니다(15:23b). 그런데 서바나로 가기 전에 로마에 들러 위로와 파송을 받으려했습니다(15:24). 또한 로마에 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러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15:25). 이러한 시점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유대주의자들의 위협과(15:31), 로마교회 안의 문제들을 염두해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복음의 변증과 방문하게 될 로마교회를 염두 해 두고 이 로마서를 썼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로마서는 2종류의 수신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할례)으로, 혈통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이나 할례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1-5). 그리고 유대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9-11)

 

둘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로마의 클라우디스 황제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좇아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추방된 유대인들 중에는 로마교회 안에 있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네로가 즉위하고서야(주후54) 비로소 그 추방령이 폐지되고 유대인들은 로마로의 귀환이 허용되었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로마를 떠나 있는 사이에 이방인들이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해버린 기독교공동체 내에서 자신들이 소수가 되어 버렸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다수의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소수의 유대파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자유하는 복음을 강조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메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전자를 믿음이 강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고(15:1), 후자를 믿음이 약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14:1). 로마교회 안에 이들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다수를 차지하는 믿음이 강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약한 유대파 그리스도들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인이며(3:9),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두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16,17. 3:29-30). 또한 바울은 이들이 사랑으로 서로 하나될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13:8, 14:1-15:13).

 

 

 

 

 

 

 

3.구조

 

) 1:1-7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 1:8-17 복음에 관한 바울의 세 가지 입장

 

1)복음에 빚진 자(1:14)-의무감

 

2)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1:15)

 

3)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라(1:16)

 

) 1:18-5장 바울이 자랑하는 복음-복음만 하나님의 의가 담겨 있음

 

1:18-3:20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모든 인간은 죄인이라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고 심판과 진노아래 있다

 

3:21-3:31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

 

4:1- 25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예

 

5:1-11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 결과

 

5:12-21 아담 안에서 죄인됨과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됨(전반부 결론)

 

) 6-8장 성화의 복음

 

6:1-23 복음으로 의의 종된 그리스도인

 

7:1-25 율법과 성화

 

8:1-17 성령과 성화

 

) 9-11장 유대인(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

 

) 12-16장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

 

 

 

 

1:1-7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바울

 

1.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으니(1-4)

 

1-7까지는 로마서를 쓰는 바울의 인사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1). 여기서 바울은 특히 자신을 복음을 위한 사도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삶의 목적이 되는 하나님의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서 미리 약속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성경의 약속대로 다윗의 혈통가운데 나셨습니다(3). 그리고 성경의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십니다(4). 바울은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을 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2. 그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5-6)

 

바울은 자신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직분(사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일입니다(5). 그리고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의 사명의 대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6).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로 말미암은 직분(사명)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직분(사명)은 무엇입니까?

 

3.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바울은 모든 서신이 그러하듯이 로마서에서도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리고 평강이란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온 결과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임을 알게 하소서

2.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깨닫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바울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2. 바울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직분(사명)은 무엇입니까?

 

 

1:8-17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

 

 

1. 내가 너희를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8-13)

 

8-13까지 로마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8). 둘째로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두고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9). 셋째는 로마 교인들을 보기를 심히 원하고 있습니다(11). 바울이 로마 교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먼저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로마 교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입니다(양육). 또한 서로 믿음으로 안위함을 얻으려 함입니다(교제). 바울은 동방선교가 끝난 후 서바나로 갈 계획이 있었습니다(15:23). 그런데 서바나가 가기 전에 로마에 들르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교제함으로 동방선교로 피곤했던 바울이 위로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15:23,24). 지금 당신에게도 이러한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늘 누구와 이런 위로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2. 복음전하기를 원하노라(14-15)

 

여기서 바울은 복음전도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빚진 자의 태도입니다(의무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해야하는 자들에게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5). 또한 바울은 복음전도에 대해 자원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데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6) 이와 같이 우리도 복음전도에 관한 두 가지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3.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하니하노니(16-17)

 

바울은 복음에 관한 자신의 태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랑한다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16). 또한 복음안에서만 하나님의 의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살리라”(17)

 

 

기도제목

1.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 사랑과 위로의 교제가 풍성하게 하소서.

2.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을 위하여(이웃,친구,친척 등)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로마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2. 복음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1:18-25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인간

 

1. 하나님의 진노가-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8)

 

1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만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3:21) 그러면 왜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까? 그 이유는 설명해 주는 것이 117부터 320절까지입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도리어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아래 놓여져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2.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19-23)

 

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납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 때문입니다(18). 여기서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을 마음속에 두셨고(종교심), 또한 모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셨습니다(자연은총).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고, 오히려 허망하여져서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리고 있습니다(19-23). 이로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 위에 내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심판하십니까?”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마음과 만물을 통해 나를 보여 주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나게 돌려야 할 영광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 않았느냐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 대하여 핑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20). 당신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이 없습니까?

 

3. 내어버려 두사(24,25)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들을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둠으로 나타납니다(24). 오늘 하루 동안 나의 불의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버려두신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나 나를 간섭하셔서 때리심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 증거입니다.

 

 

기도제목

1.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이여 나와 나의 삶을 철저히 간섭하여 주옵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납니까?

2.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핑계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26-32 하나님의 내어 버려두심

 

 

1.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사(26,27)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사람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심으로 나타납니다(26).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사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성적인 타락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순리대로 성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26,27). 이러한 타락한 성문화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기를 기도합시다.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속 일어나는 음란한 마음조차도 철저히 차단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5:28).

 

2.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28,31)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들 마음가운데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어 버려두십니다(28). 이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각종 불의한 일들입니다(29-31).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종교적 타락이 결국 윤리적인 방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신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분주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둘 여유조차도 없지 않습니까?

 

3.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32)

 

사람들의 타락의 극치는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계속 불의한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32).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선악간에 심판(판단)하실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갑시다.

 

기도제목

1. 타락한 성문화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소서

2.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버려 두지 마시고 간섭하여 주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내어 버려 두사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2. 사람들이 불의한 일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2:1-5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 임할 심판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2)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그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1). 그래서 결국 불의한 일을 행한 사람이나 그 일을 두고 판단하는 사람 모두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2). 그러므로 남을 판단 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들보보다 내 눈 속의 티가 더 크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남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나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2.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

 

불의한 일을 행한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합니다(3). 왜냐하면 외견상으로 봤을 때 판단하는 사람은 의인의 입장에 서 있고, 판단을 받는 사람은 죄인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장차 임할 하나님의 판단을 피 할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고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더 큰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3).

 

3. 그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4,5)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와 그를 판단하는 자를 왜 당장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4).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사람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계속 쌓는 사람입니다(5). 그러므로 우리의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을 꺽고 심판의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당신이 오늘 구체적으로 회개할 제목이 무엇입니까?

 

기도제목

1. 남을 판단하기 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소서.

2. 회개의 영을 부어 주사 회개의 눈물을 강같이 흘리게 하옵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받는 하나님의 판단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2. 하나님께서 왜 당장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십니까?

 

 

 

 

2:6-16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1.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6-11)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6).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는 노와 분으로 갚으십니다(7).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보응은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1).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우리가 선을 행함으로 영생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결국 말하려는 것은 이 세상에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3:12) 결국 우리는 모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당신 주위에 자신의 의를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2.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12-16).

 

세상에는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유대인). 또 한 사람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양심이 율법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이방인). 그러나 이들의 결과는 동일합니다. 눈에 보이는 율법을 가지고 있든지, 양심의 율법을 가지고 있든지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14,15). 결국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율법대로 살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은밀한 모든 죄까지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16). 이러한 심판의 주님 앞에서 날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기도제목

1.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면서 살게 하소서.

2. 이 불의한 세상 속에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리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행한대로 어떻게 갚으십니까?

2. 심판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2:17-29 유대인의 허구성

 

1. 유대인이란 칭하는 네가(17-20)

 

유대인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좋아하며, 진리와 지식의 규모를 가진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17-20). 이것은 바울이 유대인을 비꼬는 말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와 같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2. 네가 도적질 하느냐(21-26)

 

유대인들은 그들의 거창한 자랑과 달리 그들의 실상은 비참합니다. 그들은 도적질하는 자들이고, 간음하는 자들이고, 신사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자들이고,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들입니다(21-23). 그래서 오히려 경건한 이방인들에게 판단을 받을만한 자라고 바울은 비꼬고 있습니다(24).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면서 우리보다 더 경건하게 보이는 불신자들에게 판단을 받지 않습니까?

 

3.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28-29)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28). 또한 육신적인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고 합니다(29). 이와 같이 우리도 종교적인 외양만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종교적 외식주의와 무의미한 형식주의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없습니까?

 

기도제목

1. 우리의 영적인 실상을 보게 하소서.

2. 진정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유대인들의 헛된 자랑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가?

2.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란 무엇입니까?

 

 

 

 

3:1-8 유대인의 나음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뇨(1,2)

 

바울은 유대인의 허구성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유대인의 나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 비록 유대인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제 몫을 다 하지 못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그들의 존재가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2).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 하여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그리스인적인 가치관들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입니다.

 

2.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3-8)

 

유대인이 하나님말씀을 지키지 못함이 문제지만 하나님의 말씀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의 미쁘심조차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3).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십니다(4). 사람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존엄성까지 무시한다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는 드러나는 것입니다(5) 그런데 이렇게 사람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가 손상되지 않는다 하여 불의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5-7).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8). 우리 주위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대한 무차별한 비판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들이 혹 그리스도와 교회의 존엄성조차도 손상이 가게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하나님 말씀과 교회의 존엄성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봅시다.

 

기도제목

1. 우리 안의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영광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옵소서

2.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입니까?

2.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3:19-18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1.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9)

 

바울은 118-32까지 사람들이 종교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말했습니다. 21-16까지는 이방인 중에서 남을 판단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도 같은 죄를 짓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2:17-3:8까지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음을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인, 도덕가(이방인), 유대인 모두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음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그들과 다른 사람들입니까? 결코 아닙니다(9). 여기서 바울은 왜 우리라는 표현을 썼습니까? 그 이유는 이 글을 쓰는 바울이나 이 글을 읽는 로마 교인들이나, 또한 이 로마서를 읽는 우리 모두가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당신도 그 죄인입니다.

 

2. 기록한바(10-18)

 

사람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은 단순한 오늘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은 모든 구약성경이 증거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성경의 역사적인 증언을 들어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10-18).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4:1-3, 5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5:9),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하고(140:3),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10:7),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59:7),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36:1) 함과 같으니라”(10-18) 이와 같이 구약성경의 긴 역사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사실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진노하고 계시고, 장차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피할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장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라면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기도제목

1. 하나님이 저도 죄인입니다.

2.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주의 은혜 감사드립니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우리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2.“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3:19-31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

 

1.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19-20)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만듭니다(19,20).

 

2.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21,22)

 

이제 바울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21). 여기서 율법 외에란 사람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모든 행위 외를 말합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란 사람의 행위를 제외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 주는 것을 공로로 여깁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어지는 통로에 불과합니다(2:9).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24-31)

 

바울은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두 가지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속과 화목제물이라는 말입니다. 구속이란 값이나 대가를 지불하여 노예나 형벌의 속박된 상태에서 풀어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의 대가(형벌)를 치루어 주기 위해 값을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24). 화목제물이란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사람의 죄를 대신 하여 죽은 화목제물로 인하여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화목제물의 피로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목을 이루어 주십니다(25). 이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간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25).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납하시면 하나님은 불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의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에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간적인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자들입니다(27).

 

기도제목

1.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의 삶을 살게 하소서

2. 인간적인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란 무슨 말입니까?

2. 구속과 화목제물이란 무슨 말입니까?

 

4:1-12 아브라함의 믿음(1)

 

1.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1-3)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의 예로서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라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로 여기신바 되었습니다(3). 여기서 의로 여기다라는 말은 실상은 의롭지 않지만 의로운 자로 간주한다란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니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2.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4-12)

 

일하는 자가 삯을 받으면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4). 그런데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라고 여기심을 받으면 은혜이자 복입니다(6-8). 이 복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9,10).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던져 줍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것이 할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아브라함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할례자의 후손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긴바된 것이 무할례시에 되었다는 사실은 유대인의 주장에 대한 중요한 반박이 됩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은 단순한 유대인(할례자)의 조상일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11).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라면 너무나 피곤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의로워져야 안심하겠습니까? 또 날마다 어떤 고행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얽어 메어야 편안하겠습니까? 이 모든 일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일하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이 하나님의 은혜아래 참된 행복을 누리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우리를 의롭다라고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2.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은 받은 자의 행복은 어떠합니까?

2. 아브라함은 할례시에 의롭게 되었는가? 무할례시에 의롭게 되었습니까?

 

 

 

4:13-25 아브라함의 믿음(2)

 

1.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13-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언약을 하셨습니다(17:7). 그러면 이 언약의 복을 어떻게 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13,14).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고, 믿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됩니다(16). 예수를 믿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모든 복을 우리가 이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17-25)

 

이 본문은 창17:14-22절의 말씀을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17:16). 그때 아브라함은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고 말합니다(17:17). 이때 웃음이라는 말은 피식 웃는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보면 아브라함은 전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용기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19-22)”,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용기나 자신감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나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루실 줄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믿는 믿음입니다. 또한 인간적으로 할 수 없지만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좌절한 적은 없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능히 이루실 전능하신 하나님(17:1)을 바라보면 살아갑시다.

 

 

기도제목

1.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2. 바랄 수 없고, 할 수 없는 가운데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누가 아브라함의 후사가 됩니까?

2.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5:1-11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

 

1.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2,)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은 얻었은즉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1).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2). 지금 당신은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로서 얼마나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계십니까? 그의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습니까?

 

2.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3,4)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롭게 된 자로서 환난과 고난도 있음을 알아야합니다(3). 그런데 우리에게 환난이 있다는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4). 만일 우리에게 환난이 없으면 신앙적인 성숙은 있을 수 없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환난을 괴로워하지 말고 기쁘게 잘 이겨냅시다.

 

3.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5-11)

 

환난가운데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한 것은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5). 하나님의 사랑이란 경건치 아니한 자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사랑입니다(6,7).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고(8),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 느끼게 해주셨습니다(5).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소망가운데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심판)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9,10).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난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짐으로 하나님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나라에 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소망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1.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2. 환난가운데 소망을 가지며, 소망가운데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1.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결과는 무엇입니까?

2. “다만 이뿐 아니라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5:12-21 아담과 그리스도

 

 

1.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2-14)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전반부 논증의 결론입니다. 118- 320절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담의 대표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합니다(1:18-3:20).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함으로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12). 또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율법이 있을 때는 율법으로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3:20). 그런데 율법이 있기 전, 율법이 없으므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을 때에도 죄와 사망이 있었습니다(13,14). 왜냐하면 그때 사람들도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5:3). 이로서 아담은 예수님이 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14).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자임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2.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15-21)

 

아담 한 사람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예수님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17).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18). 이와 같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20). 이 말은 죄의 권세보다 은혜의 권세가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죄는 사망으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운데 생명으로 역사합니다(21). 우리는 이와 같이 죄와 은혜의 두 권세 아래 살고 있습니다. 아직 당신의 삶 가운데서 죄 아래 살고자 하는 습성은 없습니까? 당신이 끊어야 하는 죄의 권세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물러납니다. 죄보다 은혜가 강합니다.

 

기도제목

1. 우리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필요함을 알게 하소서.

2. 오늘 하루도 죄 짖는 자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죄가 이 세상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2.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6:1-14 죄에 대하여 죽은 자

 

1. 그럴 수 없느니라(1,2)

 

바울은 앞에서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심하면 심할수록 은혜는 더욱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2).”

 

2.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3-14)

 

바울은 은혜 아래 있는 우리가 죄에 거할 수 없음을 세례를 근거로 이야기합니다. 세례란 믿음의 외적인 표현합니다. 그래서 세례의 의미를 알기 위해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겠습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항상 “in"이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고, 그 뒤에 믿음의 대상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은 내가 예수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와 연합되었음을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었고, 예수님의 행동이 나의 행동이 되었음을 믿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행동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는 말은 내가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되었다는 뜻입니다(5).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표현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시에 물은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물 속에 나옴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태어나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3-5. 참조 고전10:2. 고후5:14-17). 그래서 바울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고백했던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2).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옛 자아가 죽은 자입니다(6. 참조 갈2:20).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합당하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 가야합니다(11). 그리고 이제는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13) 오늘 하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로 살아갑시다. 더 이상 죄가 우리의 삶 가운데 침범하지 못하도록 합시다.

 

 

기도제목

1.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나 ( )가 죽었음을 알게 하소서.

2.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왜 죄에 거할 수 없습니까?

2.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6:15-23 의의 종

 

1. 그럴 수 없느니라(5)

 

바울은 앞에서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6:14)”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라고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5).”

 

2.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되었느니라(16-23)

 

사람은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드리느냐에 따라 삶이 좌우됩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릅니다. 어떤 사람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릅니다(16). 원래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름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17,18).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우리 몸을 의의 종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19,22). 여기서 의란 3장에 나오는 칭의의 의와는 다릅니다. 3장에 나오는 칭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의는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옳은 행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로운 삶을 위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오늘 나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행해야하는 옳은 행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기도제목

1. 죄와 불의와 더불어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소서.

2. 의의 종이 되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은혜 아래 있으니 왜 죄를 지을 수 없습니까?

2. 의의 종이란 무엇입니까?

 

 

 

 

 

 

 

7:1-6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1)

 

1.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1-6)

 

오늘 본문은 율법과 성도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6장에서 우리가 의의 종되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은혜아래 있다하여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은혜아래 있는 자로서 의롭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롭게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이 7장의 관심입니다. 우리는 먼저 의롭게 사는 방법으로 율법을 떠 올립니다. 그래서 그 율법의 문자에 메여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7장 전체에서 나타난 바울의 고백은 율법은 선한데 육신이 약하여 율법대로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8:3).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얽메여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지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4). 또한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합니다(6, 8:4).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혼인관계를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남편의 법이 아내를 지배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 것처럼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다른 이 곧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가야한다고 합니다(1-4).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율법을 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3;31). 그러면 왜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율법에서 벗어 나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율법이 필요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은 결코 폐할 수 없고, 악한 것도 아니고, 성도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기능만 할 뿐 아니라, 성도의 바른 삶의 지침을 제시해줍니다. 그런데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우리가 그 율법에 메여서는 율법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맺고, 성령하나님을 좇을 때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8:4) 그러므로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주를 섬길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를 섬기면서 살아 가야합니다(6). 이것이 율법을 이루는 삶이며, 의로운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생명의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생명의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하소서

2.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혼인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의문의 묵은 것과 영의 새로운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7:7-13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2)

 

1. 율법이 죄냐

 

7:1-6까지에서 바울은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를 섬기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마치 율법이 성도에게 필요 없고, 잘못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7). 그리고 율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만일 율법이 아니면 죄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7).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지 못했다고 하면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를 통하여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9-11). 이것을 통해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말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성도에게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율법대로 살려고 했습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사망, 곧 죽음의 절망이 올 정도로 율법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얼마나 지키려고 합니까? 그리고 그 계명들을 지키지 못함으로 죽음의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까? 요즈음 시대는 너무나 적당히 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아래 있다고 하여 죄 짖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감각하게 살지 않습니까? 특히 음란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리고 미움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음란한 마음조차도,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계명을 어긴 것으로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5:21-32). 오늘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될 계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기도제목

1.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소홀히 하지 않게 하소서.

2. 하나님 오늘 내가 지켜야 될 계명이 무엇입니까?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왜 바울이 율법이 죄냐라고 반문합니까?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7:1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1.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14-24)

 

바울은 율법이 생명을 주는 것이며(7:10), 신령한 것이며(14), 선한 것(16)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한 율법이 자신에게 사망이 되었다고 합니다(10).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원인을 자신이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17,20). 바울은 자신의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18,19). 이러한 사실을 통해 바울은 자신 속에 있는 하나의 법(원리)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율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원리)이 있어 속 사람의 뜻(마음)과 더불어 싸워 자신을 죄 아래로 이끈다고 합니다(23). 이와 같이 죄의 법이 자신을 얽메어 사망으로 이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24)”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두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내 마음 속에는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다툼이 있습니까?

 

2.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며, 사도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이 사망의 몸이며, 절망의 몸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때 절대 절망, 절대 사망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때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절대 절망과 감사사이에 있습니다. 자신을 볼 때 한없는 절망과 탄식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목하게 된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절망스러운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기도제목

1. 내 속의 죄의 법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2. 나 자신의 절망스러운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감사하게 하소서.

 

 

 

 

 

 

 

 

8:1-11 성령을 좇아 사는 삶

 

1.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8)

 

7장에서 바울은 최선을 다해 율법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7:23). 그런데 8장에 보면 이와 같은 죄에서 해방된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2). 그가 육신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었는데, 예수 안에서 있는 성령을 의지함으로 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즉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율법의 요구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4). 그러면 여기서 육신을 좇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7,8). 당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2.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9-11)

 

바울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9).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인 속에 성령이 거하시게 되었습니까? 10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 안에 거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11). 할렐루야!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사실입니까?. 성령은 거룩하신 영이기에 우리의 죄악된 몸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6:3).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 속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성령이 사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종말의 날에 우리 죽을 몸도 영광의 몸으로 부활시켜주실 것입니다(11).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 썩을 몸이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을 소망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기도제목

1. 우리 안에 성령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2.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바울이 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까?

2. 육신의 생각()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8:12-17 성령에 빚진 자

 

1. 우리가 빚진 자로되(12-13)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 빚진 자라고 합니다(12).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없고, 성령이 아니면 우리가 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8:4). 그래서 우리는 빚진 자로서 육신의 뜻대로 살지 말고, 성령의 뜻대로 살아야합니다. 또한 성령으로서 육신의 생각(몸의 행실)을 죽여가면서 살아 가야합니다(13). 당신의 삶 가운데 성령으로 죽여야 할 육신의 뜻은 어떤 것입니까?.

 

2.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14-17)

 

이와 같이 성령(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5). 이제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원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영광스러운 축복들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입니까? 그런데 이것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영광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될 것입니다(17). 오늘 우리가 누리게 될 아들로서의 영광과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또한 아들로서 감당해야 될 고난은 어떤 것입니까?

 

기도제목

1. 육신의 뜻을 죽이고, 성령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2.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과 함께 고난도 받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우리는 무엇에 빚진 자입니까?

2.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8:18-25 현재의 고난, 장래의 영광

 

 

1.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과 함께 고난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8:17). 그런데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장차 올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장차 올 영광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현재에 당하고 있는 고난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도 썩어짐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도 썩어짐에서 해방될 소망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1).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더욱더 고난과 탄식가운데서 장래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23,24). 우리는 종종 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고난이 있어야합니까? 라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은 고난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들이기 때문에 고난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5:3).

 

2.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24,25)

 

고난 받는 가운데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24). 그래서 소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도 어렵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참음으로 기다려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25). 참음, 곧 인내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아래에 가만히 있다라는 말입니다. 즉 고난가운데 그것을 피하거나 조급한 마음으로 있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내 가운데서 우리는 연단이 됩니다. 그리고 연단은 우리를 소망으로 이끕니다(5:4). 우리에게 당한 고난을 피하지 맙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잊어버리지 맙시다.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며 살아갑시다.

 

기도제목

1. 내가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2.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이 왜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까?

2. 고난가운데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8:26-30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1.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26-27)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 고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가운데서 참음으로 영원한 나라를 소망해야합니다(8:25). 그런데 이런 고난가운데 우리는 연약하여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26).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간구는 두 가지의 차원의 간구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위한 간구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간구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성령의 뜻을 잘 헤아려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 속에는 하나님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일도 있고, 생각하기도 싫은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선을 이룹니다(28).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입니까? 그러면 여기서 선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모든 고난이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하십니다. 할렐루야. 둘째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29,30). 아멘.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이 선이 될 줄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기도제목

1. 성령이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소서.

2.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성령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데, 여기서 모든 것이라 무엇입니까?

 

 

 

8:31-39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1.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34)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31)”에서 이 일이란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이 일이란 28절에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8:28).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셋째, 아들과 함께 것을 은사(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넷째,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32-34). 당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있습니다. 그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2.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39)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35).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 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등, 이 땅의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는 없습니다(35-39).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37). 현재 당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넉넉히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께서 우리의 후원자가 되심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31절에 이 일이란 무슨 일입니까?

2. 성도가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9:1-13 하나님의 택하심

 

 

1.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1-5)

 

1-8장까지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도리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난 다음 믿지 않는 자신의 동족에 관한 이야기를 9-11장까지에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3, 10:1). 이것은 바울 자신이 저주를 받음으로써 동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의 불에서 피어난 불꽃입니다(데니스). 나의 믿지 않는 골육의 친척, 친구, 이웃을 바라보면서 큰 근심과 고통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2.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진 것같지 아니하도다(6-13)

 

바울이 자신의 동족에 관해 큰 근심과 고통을 가지게 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4). 그들에게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4). 그것은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17:7, 8:10). 그런데 이러한 약속이 현재의 이스라엘에게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제기되는 의혹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약속)은 폐하여졌는가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약속)은 폐하여진 것같지 않도다.” 라고 말합니다(6).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조건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스마엘이나 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혈통적인 이스라엘백성이 모두 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6,2:28,29).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이삭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삭의 자손 중에 야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택하심(선택)때문입니다(11). 여기서 택하심이란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혈통으로 말미암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1:13).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폐하여진 것 때문이 아니라고 변증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참 이스라엘백성(이방인 중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중 택하신 백성)들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선택하신 참 이스라엘백성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약속)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제목

1. 나의 믿지 않는 친척과 친구들에 대한 구령의 열정을 주옵소서.

2. 혈통적인 조건과 행위상에 구원받을 이유가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믿지 않는 골육의 친척을 향한 바울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2. 하나님의 택하심이란 어떤 것입니까?

 

9:14-18 하나님의 긍휼

 

1.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14-18)

 

9:11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택하심(선택)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롭지(공평치) 못한 분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러한 의혹에 대해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구원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원치 않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15,16).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9:19,20). 둘째, 하나님이 모두를 구원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대로 한다면 사실상 우리 모두 멸망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도 구원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15). 셋째, 택하심을 받지 않은 불신자들은 아무도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넷째, 믿지 않는 자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17,18). 그러므로 이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이 온 세상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의 교리는 하나님을 의혹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건없이 선택받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기 위함입니다(1:6,13).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합시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의심치 않게 하소서.

2.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2.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9:19-33 토기장이 하나님

 

 

1.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19-29)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대하여 하나님의 허물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19). 그런데 이런 사람은 자신의 본분과 지위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20).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질그릇들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로 귀히 쓸 그릇(택하심 받은 사람)을 만들 권한도 있고, 천히 쓸 그릇(택함 받지 않은 사람)을 만들 권한도 있습니다(21).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셨고, 택하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보여주셨습니다(22,23).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기에 사람들은 아무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택함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이것은 우리가 따질 문제가 아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그릇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24). 우리가 어떻게 귀히 쓸 그릇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 할 사람, 사랑을 받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셨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25,26) 이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사랑이기에 우리는 그 은혜와 영광을 감사하고 찬송할 것밖에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2.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30-33)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여,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30-32). 이것이 그들에게 부딪치고, 거치는 돌(반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33). 아직까지도 나의 삶 가운데 나의 힘과 뜻을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나의 삶의 거치는 돌과 반석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달려 있음을 매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평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나의 삶을 주관하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기도제목

1.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대적하지 않게 하소서.

2. 나의 모든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겨 드립니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토기장이 비유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2. 이스라엘에게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무엇입니까?

 

 

10:1-13 믿음으로 구원에 이름

 

 

1.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1-3)

 

바울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1). 바울이 이스라엘백성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식(복음)을 쫒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헛된 지식 때문에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3). 자신의 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도 나의 모든 의와 자랑을 철저히 부인하며 살아갑시다(3: 8,9)

 

 

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4-13)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완성)이 되셨다는 말은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길은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1).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어주셨고, 우리가 그를 믿으면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길은 끝났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길이고 하나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길입니다(5,6). 이 두 가지 길 중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믿음의 길입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길은 우리에게 그렇게 먼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늘에 올라가고, 음부에 내려가려는 것은 어리석고 잘못된 일입니다(6,7).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14:17).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워지려면 하늘과 음부로 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으면 됩니다(9).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습니다(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13).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의를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하루도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갑시다.

 

 

기도제목

1. 나의 모든 의를 포기하게 하소서.

2.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시인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2. 복음이 왜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차별이 없습니까?

 

 

 

10:14-21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1.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4,15)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이 소식을 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소식을 전하는 이가 없으면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 없고, 믿지 않으면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결국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14). 구원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미리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혹자는 우리가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다해도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물론 택함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라도 복음을 듣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발은 전도자의 발입니다. 오늘 내가 복음을 전해야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2.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16-21)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17).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말씀을 듣지 아니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말씀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말씀(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16).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었고, 하나님을 구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문의하지도 않은 자들이었습니다(19,20). 하나님은 이들에게 전도자를 통하여 찾아가셨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게 됨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시기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구원의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21).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쉽게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복음의 내용을 지식적으로 알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 대해서도 항상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도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기도제목

1. 복음전도에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 전도가 잘 되지 않는 자들에게 쉽게 포기하지 말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습니까?

2. 하나님께서 종일 손을 벌리고 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11:1-12 남은 자

 

1.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6)

 

9,10장을 보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중단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1,2). 여기서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백성이란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이란 말로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모든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기 백성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백성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엘리야시대에 남은 자(remnant)들입니다. 엘리야시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않은 자들을 남겨 두셨습니다(4). 마찬가지로 현재의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음을 믿지 않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자들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들이 남은 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남은 자가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됩니다(5,6). 우리도 이 불신과 우상의 시대에 그들 가운데 굴복하지 않는 남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2.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느니라(7-12)

 

이스라엘 중에서 택하심을 입어 구원을 받은 자도 있지만, 거기서 제외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5절에서 남은 자는 구원받은 자들이고, 7절에서 남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이들은 완악하여 심령이 어두워져 있고, 영적인 눈과 귀가 가리워진 자들입니다(8).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가게하기 위함입니다(11). 그래서 이방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영적인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방인을 부요케 하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부요케 하실 것입니다(12). 사람은 실패하고, 완악하여져도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중단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시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이 시대의 우상에게 무릎끓지 않는 남은 자가 되게 하소서.

2.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5절의 남은 자와 7절의 남은 자는 누구입니까?

2. 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습니까?

 

 

11:13-24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

 

 

1.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15)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경륜(계획)을 잘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불신앙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됨으로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십니다. 결국 나중에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바울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14). 이것을 통해서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자신의 직분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동족을 구원케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직분(사명)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왜 직분(사명)을 맡기셨는가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2.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16-24)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과 이방인의 구원을 감람나무의 접붙임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더 이상 열매 맺지 않는 감람나무를 야생 감람나무(돌 감람나무)의 어린 가지와 접붙여서, 나무의 수액이 이 야생 감람나무의 품위를 높여 주고 그 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도록 함으로써 감람나무를 소생시키는 관례가 있습니다. 바울은 열매를 맺지 않아 잘려진 참 감람나무의 가지를 이스라엘에 비유하고 있고,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를 이방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잘려난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이었고, 이방인이 접붙여진 이유는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인 우리들은 결코 교만하거나 자긍하지 말아야합니다(20).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자르셨는데, 우리도 믿음이 없고 교만하면 잘라버리십니다(21).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인자(사랑과 긍휼)에 의지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엄위가 임하게 됩니다(22).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한 순간의 행동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계속 되어져야합니다(1:17). 오늘 하루도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주만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기도제목

1. 우리의 직분이 영광스러움을 알게 하소서.

2. 교만하지 말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왜 바울이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깁니까?

2. 감람나무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1:25-36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1.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25-32)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를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린 것도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섭리였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밀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25).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28). 하나님께서 한번 부르신 백성들을 결코 놓치지 아니하십니다(29).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된 것이므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될 것입니다(31,32).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방인 중에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중에 택하신 백성)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26). 우리의 삶들 가운데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감사하고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33-35)

 

이스라엘의 불신과 이방인의 구원, 그리고 궁극적인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하여 바울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33). 우리의 짧은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현 상황을 임의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지혜로우십니다.

 

3.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33)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인류의 모든 역사와 개인의 모든 삶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매일 인정하고 고백할 때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와 섭리를 알게 하소서.

2. 나의 모든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2. 26절에 온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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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

 

 

1. 그러므로(1,2)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란 사랑을 베풀만 하지 않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9:25). 이것이 로마서 전반부의 주제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을 권면하고 있습니다(1).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영적 예배란 구약시대의 예배와 대조를 이루는 말로서 죽은 제물로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산 몸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삶으로서의 예배를 말합니다. 이러한 삶으로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야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삶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2.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기 위해 먼저 내게 주신 믿음의 분량이 무엇이냐를 깨달아야합니다(3). 여기서 믿음의 분량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말씀의 은사(예언, 가르침, 권위)와 섬김의 은사(섬김, 구제, 다스림, 긍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개인에게 구체화되어지고, 실재화되어진 것을 말합니다(6). 그러면 내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1:11,15). 둘째, 공동체가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부족하지만 그것을 해야되겠다라고 생각하는 불타는 사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20:24). 이것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과 은사를 비교하지 맙시다. 비록 내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아낌없이 남김없이 후회없이 주님을 위해 사용합시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소서.

2.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사를 알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2. 각 은사에 합당한 삶은 어떠합니까?.

 

 

12:9-13 사랑하는 삶

 

1. 형제를 사랑하여(9.10)

 

그리스도인의 삶은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5:5, 8:35,39).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요일4:8).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할까요? 첫째는 거짓 없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다는 말은 위선이 없다는 말로서 어떤 목적이나 수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 진실된 사랑을 말합니다. 둘째는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악을 용납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거짓 없는 진실된 사랑과 아울러 악을 미워하는 사랑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형제를 우애해야합니다. 여기서 우애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들을 연합시켜 주는 다정하고 따스한 애정을 말합니다. 넷째는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여기서 존경이란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해주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랑을 말합니다.

 

2.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11-12)

 

우리는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열심을 내어야합니다. 여기서 열심이란 참된 지식을 버린 광신적 열심이 아니라 종이 주인에게 하는 참되고 지속적인 헌신을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 대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합니다. 소망의 핵심은 주님의 재림과 그에 따르는 영광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기대를 말합니다. 그 소망가운데 우리는 참고, 기도를 쉬지 않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3.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

 

우리는 단순히 믿는 형제(성도)들만 사랑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형제우애에 낯선 사람(손님)에 대한 사랑을 더해야합니다(벧후1:7). 여기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은 단순히 손님이 올 때 수동적으로 대접하라는 말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낯선 사람을 찾아내도록 알아보고, 추구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랑은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깊이 깨닫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합시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깊이 알게 하소서.

2.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거짓이 없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2.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2:14-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1.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14-16)

 

사랑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합니다(15,16).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기쁨과 고통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하며 살아감으로 서로를 결속 시킵니다. 또한 사랑은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16). 사랑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의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2:7).

 

2. 선으로 악을 이기라(17-21)

 

오늘 말씀에는 원수를 이기고 악을 이기는 비결이 나옵니다. 첫째,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입니다(14). 저주는 원수에 대해서 악과 해로움을 비는 것입니다. 축복은 반대로 원수에 대해서 선과 안녕을 비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우리에게 가르치신 명령입니다(6:28). 둘째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합니다(17). 이 말은 악을 방조하거나 용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악을 분별하되 그것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또 하나의 악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도리어 선한 일을 추구해야합니다. 우리는 가급적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해야합니다(18). 셋째는 원수 갚는 일을 포기해야합니다(19). 왜냐하면 원수를 응징하는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원수를 내가 갚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포기하고 도리어 원수를 선대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사랑해 주어야합니다(20). 이것은 원수에게 상처와 수치를 주어서 소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부끄럽게 해서 회개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의 방법으로 악을 이겨야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원수 되었던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고, 그의 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기도제목

1.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하소서.

2. 악을 선으로 이기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우리가 왜 원수를 갚지 말아야합니까?

2. 숯불을 머리 위에 쌓아 놓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13:1-7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1. 권세들에게 굴복하라(1-5)

 

1절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세는 국가 및 국가의 공식적 대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국가는 교회와 아울러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났고,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기에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입니다.(1,2). 이것은 부정하게 세워진 정부도 하나님께로 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 땅의 부정한 현실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신적 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정부도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아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는 하나님 앞에서 고유한 임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징벌을,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주어야합니다(3,4). 이로서 세상의 악이 다소 억제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가 이런 책임을 다 할 때 우리의 양심으로 굴복해야합니다(5). 그 이유는 그 국가의 징벌과 보상은 하나님께 위임받아 우리에게 내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국가가 이런 임무를 저버리고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보상하면 우리는 무조건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잘 분별해야합니다.

 

2. 공세를 바치고(6,7)

 

국가가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 권선징악의 임무를 충실히 해나갈 때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감당해야합니다. 우리가 내어야 할 세금뿐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잘 감당해야합니다(7).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만을 인정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온 세상에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가 이러한 의무를 충실히 행할 수 있도록 감시와 격려와 책임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주권아래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는 나라가 되게 하소서.

 

기도제목

1. 정부가 하나님의 공의를 잘 세우게 하소서.

2. 교통법규를 잘 지키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1절의 권세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2. 국가의 임무와 책임은 무엇입니까?

 

 

 

13:8-14 사랑은 율법의 완성

 

1.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8-10)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은 사랑의 빚진 자로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해 공세로 바칠 빚은 갚음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이 만큼 사랑하면 사랑의 빚을 다 감당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로서 계속해서 사랑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중단하지 말하고 살아 가야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삶이 바로 율법을 이루는 삶입니다. 구약에서 주로 무엇을 하지 말라라는 부정적인 명령을 하신 것은 사랑하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간음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살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도적질하거나 탐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모든 율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혹 사랑하면 간음할 수 있고, 사랑하면 탐내어도 된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에게 악을 행하거나(10), 무례한 일들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13:5,6).

 

2. 자다가 깰 때라(11-14)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종말론적인 근거를 말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국가에 복종하며, 사랑의 빚진 삶을 살아 가야하는 이유는 지금이 자다가 깰 종말()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밤은 그리스도가 오기전의 때이고, 낮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입니다. 낮의 때에서 바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구원의 날)() 가까왔다는 것입니다(11). 그러기에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의 옷을 입어야합니다(12). 어두움의 일은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이고 낮의 일은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13).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단순함과 사랑과 겸손과 고난과 인내의 옷을 입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곧 오시기 때문입니다(고전7:29)

 

 

기도제목

1. 늘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2. 종말적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사랑의 빚진 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2.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4:1-12 믿음이 약한 자, 강한 자(1)

 

1.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1-12)

 

바울은 이제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당시 유대파 그리스도들로서 이들은 구약의 관습에 메여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체소만 먹고(2), 안식일만을 중히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4). 그리고 믿음이 강한 자는 주로 당시의 이방인 그리스도들로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1).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말은 사람들을 교회의 교제권과 마음의 중심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3). 하나님의 하인된 우리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받으신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믿음이 연약한 자도 주님을 위해서 사는 자이기에 그들을 받아들여야합니다(9). 믿음이 약한 자가 체소만 먹고, 한 날만을 귀중히 여기는 것도 그들 나름대로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한 그들의 믿음을 무시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 모두는 같이 주님을 위한 자들입니다(8). 셋째는 믿음이 약한 자도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10).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두를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도 예수를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 우리의 형제들이기에 그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10). 이 말씀은 누구든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관됩니다(7:1).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분별하지 말하는 말이 아닙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형제에게 대한 분별이 정죄나 미움과 판단으로 가서는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10). 거기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의 기준으로 형제를 판단한 것에 대해 반드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신앙의 틀과 기준을 가지고 쉽게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기도제목

1. 믿음이 약한 자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2. 주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되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믿음이 연약한 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2. 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들여야 합니까?

 

 

 

 

14:13-23 믿음이 약한 자, 강한 자(2)

 

 

1. 서로 판단하지 말고(13-23)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향해 판단하지 말아야합니다. 고기를 먹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립적인 것입니다(아디아포라). 주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면 그것도 거룩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함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것도 거룩합니다. 식물자체가 스스로 거룩하거나 속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자가 양심으로 그것이 속되다고 하면 그 식물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속되다하는 그에게는 속되게 됩니다(14,20). 이와 같이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좀 더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만일 믿음이 강한 자가 자기는 자유하다고 하여 마음대로 믿음이 약한 자들 앞에 먹고 마신 다면 그것 때문에 형제를 근심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망치게 합니다. 결국 이것은 믿음으로 인한 자유는 있지만 사랑이 없는 행동이고,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는 행동입니다(15). 이와 같이 믿음이 강한 자의 선한 것(믿음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 믿음이 약한 자를 상하게 함으로 비방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16). 하나님나라의 본질은 무엇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성도가 서로 의와 화평과 희락을 이루는 일입니다(17).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화평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19). 우리가 비록 자유하지만 믿음이 약한 자를 생각하여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여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21).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도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그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들 때문에 평생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고전8: 4-13).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양심입니다. 믿음의 양심은 강한 면과 약한 두 가지의 측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으로 인한 양심을 남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또는 양심대로 행동해야합니다. 만일 믿음이 약한 자가 무조건 강한 자의 본을 따라 자신의 믿음과 양심에 거리끼면서까지 행동한다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23) 둘째는 공동체적 사랑과 유익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양심)으로 인해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그것이 사랑들에게 거리끼게 한다면 우리는 사랑을 인하여 자제해야합니다.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기도제목

1. 우리의 자유를 사랑을 위해 절제하게 하소서.

2. 공동체 안에 진정한 화평과 사랑이 있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2. 하나님나라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15:1-13 믿음이 약한 자, 강한 자(3)

 

1.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1-3)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로서 약한 자들에 대한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들을 버리거나 짓밟기 위해 자신의 힘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약점을 너그럽게 보아주라고 합니다(1). 진정한 강함은 약한 사람을 안아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합니다(1).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참된 강함을 그것을 이기고 자기의 유익과 기쁨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이웃)의 기쁨을 체워 주는 자입니다(2). 이렇게 강한 자로서 약한 자를 돌아보는 모범으로서 바울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시게 하는 대신에 성부 하나님과 인간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분을 기쁘시게 하도록 할 만한 가장 큰 권리를 가지고 계셨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고 종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약한 자를 위해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2,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하노라(4-13)

 

바울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 한 뜻을 갖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5). 우리가 이렇게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서로 받아 주어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6). 이것이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아 주어야하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셨습니다(7).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과 화평하게 지는 것이 단순한 인간관계의 회복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서 누구든지 예배를 드리기 전에 형제(자매)와 다툰 일이 있으면 화해하고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5:24).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됨을 통하여 주의 이름에 영광과 찬송이 돌아가게 합시다.

 

기도제목

1. 약한 자를 잘 돌아보게 하소서.

2.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믿음이 강한 자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2.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15:14-21 바울의 선교적 사도직

 

1.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14-21)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각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 교인들이 비록 선함과 지식이 충만한 자들이지만 바울이 한번 더 확실하게 복음의 기초를 상기시키기 위해 로마서를 썼습니다(1,2). 또 하나는 자신의 이방인을 향한 사도직 때문에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사도의 직분을 은혜로 여기고 있습니다(15,16). 둘째,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적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6). 이것은 오늘날의 복음사역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을 제물로 바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복음전파와 예배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제물이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게 됩니다(17). 셋째,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성령의 능력에 의한 사역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믿어 하나님께 순종케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사역을 했습니다(18). 그것은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었습니다. 여기서 말과 일이란 말과 행동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입으로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증거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표적을 행했습니다. 표적이란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표적입니다(4:23,24). 능력은 바울의 사역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초자연적인 특성입니다. 또한 기사는 이 모든 일들의 결과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바울의 사역은 철저히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크리소스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의 사도적 제사장직을 나타내는 표시는 옛 제사장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긴 옷과 종 혹은 주교가 쓰는 관도 아니며, 그것들보다 더 장엄한 표적과 기사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사역은 개척선교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은 남의 터 위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 선교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0). 고린도 전서에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였다(고전3:6)”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전도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사역합시다.

 

 

기도제목

1. 우리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이 될 수 있도록

2.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개척지를 위해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바울은 무엇을 두고 은혜라 합니까?

2.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게 합니까?

 

 

 

 

15:22-23 바울의 선교 여행계획

 

1.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22-29)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그가 방문하려던 세 곳을 언급합니다. 첫째 장소는 로마입니다(23,24). 바울은 여러 번 로마로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서 개척선교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 갈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동방개척선교가 끝이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서바나로 갈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러 교제를 통하여 쉼을 얻고, 또한 로마교회의 파송을 받으려고 로마에 방문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로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습니다(25-27). 그 이유는 이방교회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해 바친 구제헌금을 나누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바울은 최종 목표지인 서바나(스페인)으로 가려했습니다(28,29)

 

2.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30-33)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을 말해놓고 이제 기도를 요청합니다. 바울이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예루살렘방문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려던 것은 단순히 구제헌금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제헌금을 주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에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31). 그렇게 해야지 바울이 기쁨으로 로마를 방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같이 로마 교인이 힘을 합하여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30).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사역의 중요한 측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선교사역에 있어서 중보기도의 중요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믿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전도를 위해 힘을 다해 기도해야합니다.

 

기도제목

1. 우리가 가야할 미개척전도지역을 위해

2. 세계 각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바울이 로마를 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바울이 왜 기도를 요청합니까?

 

 

 

 

16:1-16 바울의 인사말

 

1.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1,2)

 

뵈뵈는 바울의 편지를 로마의 목적지로 가지고 가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녀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추천장을 가지고 가야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뵈뵈를 천거하고 있습니다(1). 그녀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자, 재산가로서 교회와 사도 바울을 후원하는 일에 자신의 재산을 사용했던 자입니다.

 

2. 모든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3-16)

 

 

 

 

 

 

 

 

 

 

 

 

 

 

 

 

 

 

 

 

 

 

 

 

 

 

 

 

 

 

로마서 성경공부 문제

 

1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인간

1:1-3:20

 

1. 시작하면서

 

로마서만큼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책은 없습니다. 로마서 공부를 통해서 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가, 복음이 무엇인가, 그리고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등을 새롭게 정립하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복음에 관한 바울의 고백(1:1-17)

 

바울은 여기서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로마교인들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전도)에 관한 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1:1)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2) 1: 1-4절에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3)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받은 직분(사명)은 어떤 것입니까?(1:5,6)

 

 

4) 1:8-13에서 바울은 로마교인들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5) 1:14-16에서 복음(전도)에 관한 바울의 태도를 세 가지로 말하시오. 이 중에서 특히 당신에게 필요한 태도는 어떤 것입니까?

 

 

3.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인간들(1:18-3:20)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1:16). 또한 복음만이 유일하게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1:17). 이것이 로마서의 핵심주제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 3:21에서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앞서 1:18-3:20까지는 왜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왜 나타납니까?(1:18-23)

 

어디에서 -

 

누구에게-

 

-

 

 

2) 2:1-16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누구에게 내려집니까?

 

 

3) 유대인이라 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2:17-29)

 

4) 39절에서 바울은 "그러면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여기서 당신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4. 마치면서

 

이상의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왜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가를 공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온세상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진노가 온 세상사람들 위에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머물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진노)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종교심을 가진 사람이나(1:18-32), 이방인 도덕가(2:1-16),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2:17-3:8), 그리고 바울과 나 자신을 포함한 온 인류들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진노)가운데 처해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 내용을 다음 주에 공부할 것입니다.

 

2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

3:31-5:21

 

1. 시작하면서

 

기독교복음의 핵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신칭의입니다. 전반부에서는 이신칭의가 왜 필요한가를 공부했습니다. 사람의 어떤 행위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셔야만 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행하신 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에 대해서도 공부하겠습니다.

 

2. 이제는 율법 외에(3:21-31)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를 이야기하려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로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1) 3:21에서 "율법 외에"란 무슨 말입니까?

 

 

2) 바울은 이제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로워지는 방법 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3"22).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1:12)

 

 

3)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하신 일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속과 화목제물이라는 말입니다(3:24-26). 이 말의 본래의 뜻이 무엇이며, 그 의미가 예수그리스도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말해보시오.

 

 

구속(3:24)-

 

화목제물(3:25,26)-

 

 

4)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을 의롭게 해줄 수 있는 구원자임을 믿고 있습니까? 믿는다면 당신 입술로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해보십시오.

 

 

3.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예(4:1-25)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은 받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까?(4:1-3)

 

 

2) 4:6에서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행복"이란 무슨 말입니까?(4:4-9)

 

 

3)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4:10-12)

 

 

4) 4:18-23에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5)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4. 우리를 의롭다하신 결과(5:1-11)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5:1-2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결과를 3가지로 말해보십시오.

 

 

2)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5:1-2). 그런데 이뿐 아니라 우리는 무엇도 받아야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3) 당신은 지금 얼마나 하나님과 화평과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5. 마치면서-아담과 그리스도(5:12-21)

 

바울은 5:12-21에서 전반부의 결론을 짓습니다. 1:18-3:30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5:12에서는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죄인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즉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우리가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일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로서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화평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의의 종된 그리스도인

6:1-23

 

1. 시작하면서

 

로마서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 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결과와 목적을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의의 종이 되었는가에 대해 공부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의의 종된 삶이 어떠해야하는가에 대해서도 공부하겠습니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자(6:1-14)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은혜아래 있다하여 죄를 수 없습니다.

1) 바울은 5:20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라고 말합니다. 이에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왜 은혜아래 있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습니까?(6:2)

 

 

2) 바울은 5:21-11에서 은혜아래 있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의미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합니까?(317일자 날주 해설참조)

 

 

세례의 의미-

 

세례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

 

 

3)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십니까?

 

 

* 읽을 거리 - 한 번은 영화초대권을 받아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재미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크게 웃고 떠들면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영화는 원래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크게 웃으며 영화를 봤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영화는 "공짜영화"였기 때문입니다. 그 영화가 공짜영화라서 나는 내 마음대로 웃고 소란을 피우면서 영화를 봤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는 구원의 극장에 공짜티켓을 가지고 들어가서 자기 마음대로 웃고 노는 것을 구원받은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값싼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극장에 들어가려 합니다. 그때 문에서 하나님이 지키고 서 계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때 십자가의 공짜티켓을 내어 보여줍니다. 그때 십자가의 공짜티켓을 가진 우리에게 하나님은 십자가의 작두로 우리 머리를 자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들고 있는 십자가의 티겟은 너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너는 십자가와 함께 네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러니 이제 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 구원의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함이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4,15,17)

 

3. 의의 종(6:15-23)

 

이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고,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1)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의 종이 되었습니까?(6:17,18)

 

 

2) 6:17"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훈의 본을 마음에 순종하여"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이 앞에서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교훈과 같은 말입니까?

 

 

3) 6:19-22에서 의의 종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해보시오.

 

 

4) 당신이 의의 종으로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의의 행동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4. 마치면서

 

그리스도인이 은혜아래 있다고 하여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함께 옛 자아가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실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지 말고, 불의와 더불어 싸우며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4 성령을 좇는 그리스도인

7:1-8:39

 

1. 시작하면서

 

이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의의 종으로 살기 위해 기준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계명)입니다. 그리고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가려고 해도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잘 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오늘은 이것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2. 율법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7:1-25 - 8:4)

 

바울은 7:1-6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잘못 오해하면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하게되었는가를 알아봅시다.

 

1) 다음 구절을 통하여 율법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말해보시오.

 

긍정적인 면-7:7-10, 12, 14

 

부정적인 면-7:10, 13

 

 

2) 율법은 분명 그리스도인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율법이 필요하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율법은 선하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그리스도인) 자신에게 있습니다. 바울(그리스도)인 속에는 두 가지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7:21-23)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떠합니까?(7:23,24)

 

 

3) 바울은 7:1-6에서 그리스도인이 율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율법은 필요한데 우리가 율법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가져야한다고 합니다(7:4). 그리고 성령을 의지해야합니다(7:6)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가고, 성령을 따를 때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됩니까?(8:2,4)

 

 

4)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어떤 것입니까?

 

 

3. 성령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8:5-27)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는데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의지함으로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8:4)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좇아서 살아가야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1) 육신을 좇는 자와 성령을 좇는 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8:5-6)

 

 

2) 성령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8:9-11. 아래 읽을거리 참조)

 

 

* 읽을 거리 -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신(성령)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3). 그런데 어떻게 성령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해 거하시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는 임금이 거하실 자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집에 임금님의 옥좌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더러운 집이지만 옥좌로 인해 그 집에 들어오시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 모든 자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이 거하여 계십니다.

 

 

3) 8:12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하나님께 빚졌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빚진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합니까?(8:12-14)

 

 

4) 바울은 갈리디아서에서 육신(육체)을 좇는 일과 성령을 좇는 일을 대조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육신(육체)를 좇는 일은 어떤 결과로 나타나며, 성령을 좇는 것은 어떤 결과로 나타납니까?(5:16-24)

 

 

5) 당신의 삶 가운데 성령으로 죽어야 하는 육신의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4.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8:29-39)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는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28). 여기서 말하는 모든 일이란 무슨 일이란 무엇이며, 선이란 무엇입니까?(326일 날주참조)

 

 

2) 8:31에서 말하는 "이 일"이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아무도 방해 할 자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8:31-35)

 

 

3) 그리스도인이라 하여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환난이 있고, 기근이 있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7:37)

 

 

4) 현재 당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들은 무엇입니까? 그 어려운 일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계십니까?

 

 

5. 마치면서

 

그리스도인은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입니다. 그 자신의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후에도 우리는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의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과의 사랑 속에서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으로 우리는 세상의 어떤 어려운 일들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5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폐하여 진 것 같지 않도다

9:1-29

 

1. 시작하면서

 

바울은 롬1-8에서 온 인류(유대인,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의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신의 문제를 9-11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9장은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와 관계된 세 가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냐 입니다(1-13).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에 대하여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느냐 입니다(14-18). 세 번째 질문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하나님이 허물이 있지 않느냐 입니다(19-29). 오늘은 이 세 가지 질문 중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폐하여졌는가(1-13).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바울은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까?(1-2,10:1)

 

 

2) 바울이 상한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동족이 이스라엘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4,5)

 

 

*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열정은 단순한 동족애에서 나온 것만이 아닙니다. 바울의 관심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조상들을 통하여 "나는 너와 너의 후손의 하나님으로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현재의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비록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약속)은 폐하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6).

 

 

3) 이스라엘의 불신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모두 참된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6). 여기서 참된 이스라엘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6-8)

 

 

3. 하나님의 자녀된 이삭과 야곱(9-13)

 

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녀 중에서 이삭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삭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9:9(참조,4:28)-

 

 

* 약속의 자녀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참된 이스라엘)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1:12,13).

 

 

2)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까?

 

선택의 시기(11a) -

 

선택하신 이(11b) -

 

선택하신 이유(13) -

 

 

3) 구원이 우리의 행위나 혈통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으로 되어짐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참조, 4:27)

 

 

4. 마치면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그의 가슴에 심한 근심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아파했던 이유는 첫째, 믿지 않는 동족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스라엘을 향한 약속과 축복)의 신실성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백성에게 "나는 너와 너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어 줄 것" 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깨어진 듯이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약속)은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부터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 육신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 중 선택된 자(약속의 자녀)들에게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영적인 이스라엘(이방인 중 선택하신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이 지금 우리에게도 내려져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으로 인한 구원에 대해서 공부해보겠습니다.

 

 

6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9:14-29

 

1. 시작하면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신다면 하님이 불의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에 대한 바울의 변증을 공부하겠습니다.

 

2. 하나님이 불의하신가(14-18)

 

1)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에 대해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는가 라고 사람들은 반문을 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어떠합니까(14,15)

 

 

2)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긍휼히 여지시지만 어떤 사람은 강팍하게 버려두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16-18)

 

 

* 우리는 선택의 문제를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에서 다루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왜 모든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잘못된 발상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에서 구원과 선택의 문제를 다룬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합니다(1:18,2:16). 그래서 선택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의 관점에서 바라 보아야합니다(16). 선택받지 않은 자 뿐 아니라 선택받은 우리도 공의의 관점에서는 모두 버림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하심에 의해 우리가 선택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15).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황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3. 하나님이 허물이 있으신가(19-29)

 

1) 구원과 선택에 관한 하나님이 주권에 대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허물을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변증은 어떠합니까?(19-20)

 

 

2) 토기장이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3) 호세아의 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25(참조, 2:23) -

 

 

4) 이사야의 글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27-29(참조,10:22) -

 

 

 

5) 이상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에 의해서 되어진 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합니까?(참조, 1:3,6,11,14)

 

*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선택하심과 예정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혹의 대상으로 볼 것 아니라, 감사와 찬송의 대상으로 보아야합니다(1:6). 특히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대해서 황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4. 마치면서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택하심(선택)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롭지(공평치) 못한 분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러한 의혹에 대해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15,16).

 

둘째,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구원해야할 책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대로 한다면 사실상 우리 모두 멸망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공의)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도 구원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15).

 

세째, 믿지 않는 자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17,18). 그러므로 이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이 온 세상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의 교리는 하나님을 의혹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건없이 선택받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기 위함입니다(1:6,13).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합시다.

 

다음 시간에는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을 선택하지 않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으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공부해보겠습니다.

7 이스라엘의 잘못과 구원

9:30-10:21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신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이로서 아직까지도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은 이스라엘(9:30-10:5)

 

1) 그리스도인(이방인 중 예수를 믿는 자)들이 따른 의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른 의는 무엇입니까?(30,31)

 

그리스도인이 따른 의-

 

이스라엘이 따른 의-

 

 

2)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무엇을 가리킵니까?(32-33)

 

 

3) 당신의 삶 속에 부딪치는 돌과 반석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 얻은 우리들은 성화의 삶에 있어서도 계속적인 믿음이 요구되어집니다. 우리의 삶 속에 진정한 성화의 열매가 없고, 부끄러운 열매가 있다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합니다.

 

3.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심(10:1-3)

 

1)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10:2,3)

 

 

2)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3)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두 가지의 길은 무엇입니까? 이 두 길 중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합니까?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 완성)이 되셨다"는 말은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길은 끝이났다는 말입니다(1).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어주셨고, 우리가 그를 믿으면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길은 끝났다는 말입니다.

 

4.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고 음부에 내려 가야하지 않느냐라고 합니다(6,7).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가까이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신명기 32:11-14 말씀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바울이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한 의도는 무엇입니까?

 

* 신명기30:14은 율법으로 의에 이르는 말씀이고, 로마서10:8의 말씀은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말씀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초점을 둘 것은 의에 이르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합니까?(9,10)

 

-

 

마음 -

 

 

3) 10:13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며 고백해야합니까?(참조,16:16)

 

5.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10:14-21)

 

1) 왜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다운 발입니까?(14,15)

 

 

2)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16)

 

 

3)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19)

 

 

4) 21절에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는 누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엇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까?

 

 

5. 마치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라도 당장 이스라엘이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복음의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 졌지만 그들은 지금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도 그들을 향한 구원의 손을 닿지 않고 계십니다.

 

다음 시간에는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8 이스라엘의 미래

11:1-36

 

1. 시작하면서

 

9-11장은 모두 이스라엘의 불신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사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불신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0장에서는 불신의 이스라엘이 지금이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11장에서는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이기에 결국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섭리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남은 자의 구원(1-12)

 

1)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1,2)

 

 

*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백성이란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이란 말로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신랑과 아내와의 관계로 이스라엘백성을 알고 사랑했다고 말합니다(1:2).

 

2)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구약역사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까?(2-7)

 

어느 시대(2) -

 

어떤 상황(3) -

 

누구를 구원하셨나(4,5) -

 

어떻게 구원하셨나(5-7) -

 

 

3) 이스라엘 중에서 택하심을 입어 구원을 받은 자도 있지만, 거기서 제외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완악하여 심령이 어두워져 있고, 영적인 눈과 귀가 가리워진 자들입니다.

 

4)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11,12)

 

 

* 5절에서 남은 자는 우상을 섬기지 않고 남아서 구원받은 자들이고, 7절에서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 제외된 남은 자를 가리킵니다.

 

 

5)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남은 자를 통해 구원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의 남은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3. 이방인의 구원(13-24)

 

1)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1). 왜 그렇습니까?(14,15)

 

 

2)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과 이방인의 구원을 감람나무 접붙임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유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17-24)

 

참 감람나무 -

 

돌 감람나무 -

 

가지에서 잘리움 -

 

접붙임 -

 

* 팔레스틴에서 더 이상 열매 맺지 않는 감람나무를 야생 감람나무(돌 감람나무)의 어린 가지와 접붙여서, 나무의 수액이 이 야생 감람나무의 품위를 높여 주고 그 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도록 함으로써 감람나무를 소생시키는 관례가 있습니다.

 

3) 구원받은 이방인인 우리들이 교만하지 말하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20-24)

 

4. 온 이스라엘의 구원(25-34)

 

1)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25-32)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를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린 것도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섭리였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입니까?(25)

 

 

2) 26절의 "온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3)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아니하십니까?(28-32)

 

 

4) 이스라엘의 불신, 이방인의 구원, 그리고 궁극적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33-36)

 

 

*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이라"는 것은 성경의 중심되는 사상입니다. 나의 모든 삶과 역사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면서 살아갑시다.

 

 

5. 마치면서

 

이스라엘의 불신의 문제로 바울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믿게 됨으로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십니다. 결국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돌아오면 나머지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지혜를 바라볼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들 속에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들이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에 의해서 이끌어지며,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12:1-13

 

 

1. 시작하면서

 

바울은 1-11장에서 복음에 관한 교리적인 면들을 다루고 있고, 12장부터는 그 교리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권면하고 있습니다(1).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란 롬1-11장의 주제로서 "사랑할 만하지 않는 사람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사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2. 영적 예배(1,2)

 

1)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예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적예배란 구체적으로 어떤 예배를 말합니까?

 

 

*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예배라고 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경배하여 엎드려 섬긴다는 뜻으로 성경에서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식으로서의 예배이고, 또 하나는 삶으로서의 예배입니다. 의식적인 예배는 삶으로서의 예배가 의식적으로 집약된 형태입니다. 그리고 삶으로서의 예배는 의식적인 예배가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2)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 것과 마음을 새롭게하고 변화를 받을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할 세대(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 하나님의 뜻을 찾는 비결-그리스도인의 최대의 과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 분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에 있어 세 가지의 점검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마음의 점검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적인 것들에 분리된 정결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성경의 점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주는 제일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셋째는 상황의 점검입니다. 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합의해도 상황이 준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결한 마음, 성경, 상황이 서로 일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3. 은혜대로 받은 은사(3-8)

 

바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우리가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직분)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은사의 통일성은 어떤 것입니까?(4,5)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다양합니다. 그리고 은사에 따라 하나님의 뜻도 다양합니다. 은사에 따른 다양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6-8)

 

 

 

3)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개인에게 구체화되어지고, 실재화되어진 것을 말합니다(6). 그러면 내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1:11,15).

 

둘째, 공동체가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부족하지만 그것을 해야되겠다라고 생각하는 불타는 사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20:24).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는 무엇입니까?

 

 

4. 사랑하는 삶(9-13)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합니까?

 

11

 

12

 

21:15-17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합니까?

 

9-

 

10-

 

13-

 

 

3) 내가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섬겨야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 모든 계명의 축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며, 그 구원을 기억하는 차원에서 지켜져야 할 계명입니다.

 

5. 마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합니다. 내게 주신 믿음의 분량이 무엇인가. 또한 은사가 무엇인가를 잘 분별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10 그리스도인의 바른 관계

12:14-13:14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어진 모든 관계를 바로 잡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5:1).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과의 관계가 한 몸의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1:13-15). 이렇게 그리스도 말미암아 회복된 관계들을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나가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른 관계를 맺어야 될 것들을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른 관계들을 이루어나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관계들을 이루어 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원수와의 바른 관계(12:14-21)

 

하나님께서는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원수들을 사랑해 주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의 도리입니다(7:48).

 

1) 사도 바울은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은 이야기합니까?

 

12:14 -

 

12:17 -

 

12:19 -

 

12:20 -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으리라(12:20)는 말씀은 우리가 원수에 대해 단순히 보복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해줄 때 마치 숯불을 그의 머리 위에 쌓아둔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사랑해 주어야합니다(20). 이것은 원수에게 상처와 수치를 주어서 소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부끄럽게 해서 회개시키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2) 원수를 보복하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것도 어려운데, 그를 선대해 준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2. 권세와의 바른 관계(13:1-7)

 

1) 1절에서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불의한 정부는 어떻게 보아야합니까?

 

 

* 13:1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세"는 국가 및 국가의 공식적 대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2)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에게 맡기신 임무는 무엇입니까?(3-4)

 

 

3) 세상의 권세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바른 임무를 수행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5-7)

 

 

3. 이웃과의 바른 관계(8-10)

 

1) 우리는 이웃에 대해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빚을 갚는 것처럼 "나는 이만큼 사랑했으니 사랑의 빚을 다 갚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빚진 자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 “빚졌다라는 말은 의무를 감당할 책임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2) 구약의 율법은 주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언명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이 모든 계명들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까?

 

 

4. 때와의 바른 관계(11-14)

 

1) 사도 바울은 11-12에서 때, 또는 시기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때(시기)가 어떤 때(시기)라고 합니까?

 

 

2) 낮의 때란 구체적으로 어떤 시기를 말합니까?

 

 

 

3) 낮의 때에 합당한 자의 삶은 어떠해야합니까?(13,14)

 

 

* 우리는 구원(하나님나라)"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적인 구원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더 완전한(종말적)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8:23,2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속에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13:12-13, 참조 빌2:12-15)

 

 

5. 마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입니다. 심지어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까지라고 사랑하는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세우신 권세들에 대해서 복종하며,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잘 담당해야합니다. 또한 이웃에 대해서 끊임없는 사랑의 부담감속에서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시기를 잘 알고 빛 된 생활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바른 관계의 삶을 기뻐하십니다.

 

 

 

 

 

 

 

 

 

 

 

 

 

 

 

 

 

 

11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14:1-15:13

 

 

1. 시작하면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당시 유대 그리스도들로서 이들은 구약의 관습에 메여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체소만 먹고(2), 안식일만을 중히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4). 그리고 믿음이 강한 자는 주로 당시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 안에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와의 갈등과 긴장이 있어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2. 믿음이 약한 자를 받아 들이라(1-12)

 

1)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받고 그들을 비판하지 말하고 합니다(1). 왜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합니까?(3).

 

 

2) 하나님이 받으신 자들을 사람이 받지 않으면, 받지 않은 그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됩니까?(4)

 

 

3) 믿음이 약한 사람은 한 날을 다른 날보다 중히 여기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깁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22, 참조 롬12:3)

 

 

4) 우리 가운데 한 날을 다른 날보다 더 중히 여기는 자가 있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어떠할 때 용납해야 있습니까?(6-8)

 

 

5) 형제를 자신의 믿음에 근거해서 임의로 판단하면 종말에 어떻게 됩니까?(10-12)

 

 

6) 우리 교회 안에 믿음이 약한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 1절에서 "받으라"는 말은 직역하면 "안으로 받아 들인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을 교회의 교제권과 마음의 중심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의심하는 바"라는 말은 "의심스러운 점들,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이라는 말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가들은 이것을 "아디아포라", "중립적인 일, 어떻든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불렀습니다.

 

 

3. 서로 판단하지 말라(13-23)

 

1) 사도 바울은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 서로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이 없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제 사이에 서로 부딪치고 거치는 일은 왜 일어납니까?(13)

 

 

2) 고기를 먹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립적인 문제입니다(아디아포라). 주님의 위하여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면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함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것도 거룩합니다. 식물자체가 스스로 거룩하거나 속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식물의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할 때 속되게 됩니까?(14)

 

 

3) 식물의 문제로 형제를 망치게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15)

 

 

4) 16절에서 말하는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한 것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5) 하나님나라는 무엇을 먹어야 하며, 먹지 말아야 하는 문제가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의 본질은 무엇입니까?(17,19)

 

 

6) 21절에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형제를 거리끼게 하는 일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 말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7) 만일 믿음이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따라서 양심에 거리낌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신다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됩니까?(23)

 

 

4.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15:1-13)

 

1) 바울은 결론적으로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어떻게 대해 주어라고 이야기합니까?

 

15:1,2 -

 

15:7 -

 

 

2)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술, 담배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이 어떠해야하는가에 대해서 토론해보시오.

 

 

5. 마치면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 안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들간의 계속되는 긴장과 갈등이 있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서로의 믿음을 존중해 주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믿음과 양심에 합당한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 것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바울은 자신이 믿음이 강한 자로서 약한 자를 이해하고 사랑해 줄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 윤리의 두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믿음에 의한 양심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따라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면 죄가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그리스도인 윤리의 원리는 믿음에 따른 양심과 자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내가 제사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믿음과 자유가 있지만, 그것을 보고 시험들 형제들을 인하여 평생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고전8:4-13).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양심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고전13:13).

 

 

 

 

 

 

 

 

 

 

 

13 바울의 사도직과 로마방문계획

15:14-33

 

 

1. 시작하면서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온 몸을 불태우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선교 열정을 따라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려 합니다. 그리고 로마를 방문하기에 앞서 그가 들러야 할 곳과 거기서 그가 해야 할일들을 소개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뜨거운 선교적 열정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바울의 선교적 사도직(14-21)

 

1)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15,16. 참조 엡3:7-8)

 

 

2) 바울은 그가 복음의 일군된 것을 구약시대의 무엇에 비유하고 있습니까?(16)

 

3)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어떻게 감당했습니까?(18)

 

 

* , , 표적, 기사-말과 일이란 말과 행동을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입으로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증거했습니다. 표적이란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표적입니다(4:23,24). 능력은 바울의 사역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초자연적인 특성입니다. 또한 기사는 이 모든 일들의 결과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입니다. 크리소스돔은 바울의 제사장적 사역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의 사도적 제사장직을 나타내는 표시는 옛 제사장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긴 옷과 종 혹은 주교가 쓰는 관도 아니며, 그것들보다 더 장엄한 표적과 기사들이었다."

 

 

4)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까?(20,21)

 

 

5) 바울의 선교사역에서 당신이 특별히 배워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3. 바울의 로마방문계획(22-33)

 

1)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그가 방문하려던 세 곳을 언급합니다. 방문하는 순서대로 말해보시오(22-28).

 

 

2)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24. 참조 롬1:10-15)

 

 

3) 바울은 로마로 가기 전에 왜 예루살렘을 먼저 방문하려 했습니까?(25-27)

 

4) 바울의 최종적 선교목적지는 서바나(스페인)입니다. 왜 바울은 최종 선교목적지를 서바나로 삼았습니까?(28. 참조 롬1:14, 1:8)

 

5) 바울은 예루살렘방문을 앞두고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왜 바울이 이러한 기도를 요청합니까(30-32)

 

 

4. 마치면서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선교적 열정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동방선교가 끝 난 후(15:19)에도 중단하지 않고 이방선교사역을 준비합니다. 이러한 사역의 계획 속에 바울은 이방의 중심지인 로마와 당시의 땅 끝인 서바나를 방문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기에 앞서 구제와 전도의 일로 예루살렘을 먼저 방문하려 합니다. 이러한 선교를 향한 바울의 열정은 단순한 바울의 인간적 열정이라기보다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로 말미암은 열정이었습니다.(15:18, 1:8). 우리도 바울의 선교열정을 본받아 아직 남아있는 땅 끝을 향한 선교적 열정을 불태우시기 바랍니다.

 

 

 

 

 

 

14 바울의 문안 인사와 경고

16:1-27

 

 

1. 시작하면서

 

바울은 로마로 가기 전에 로마 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문안인사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개인적인 관심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글을 맺기 전에 그들을 향한 마지막경고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지막 인사와 경고를 통해서 교회를 향한 바울의 구체적인 사랑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바울의 문안인사(1-16)

 

1) 뵈뵈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바울은 뵈뵈를 로마 교인들에게 천거하였습니까?(1,2)

 

 

2) 바울은 어떻게 방문하지도 않은 로마 교인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었습니까?

 

*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바울이 있을 당시에 여행이 휠씬더 빈번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주후49년에 로마의 글라우디오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쫒아버렸습니다. 그후 추방령이 폐지되고(주후54) 유대인들은 로마로의 귀환이 허용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바울은 로마교인들과 접촉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3) 바울은 문안인사를 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문안인사에 나타난 사람들의 계층에 따라 구분해보시오(513일 날주 해설 참조).

 

부자 -

 

노예 -

 

유대인 -

 

왕가의 후손 -

 

4) 바울은 문안인사에서 당시에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보게됩니다. 문인인사에 나타난 여성들은 누구이며, 그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말해보시오.

 

 

* 당신이 섬기는 교회의 사람에게 바울과 같이 한 사람씩 문안의 편지를 뛰어 보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의 마지막 경고(7-20)

 

1) 바울이 마지막으로 로마교인들에게 경고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17-18)

 

 

2) 바울은 분쟁을 일삼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까?(20)

 

 

*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4. 마지막 문안과 송영(21-27)

 

1) 21-23에는 마지막 문안인사가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문안인사와 앞에 나오는 문안인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 바울은 로마서의 끝을 복음을 한번 더 정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25-27에 나타난 복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3) 로마서공부 전체를 통하여 특히 당신이 배운 바를 말해보시오.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 마치면서

 

로마서의 끝 부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복음적 삶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로만 복음으로 말미암은 화평과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인사말을 통해서 바울이 얼마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형제들과 친밀하게 사랑해왔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인사말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사랑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랑의 권면과 아울러 마지막 경고를 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화평을 일부러 깨려는 사람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쳐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화평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바울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공부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을 떠 올리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복음적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