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개론

에반젤(복음) 2019. 12. 12. 20:40



               

자유하게 하는 참 복음


I. 유사품 주의!

  대학 입학 원서 넣으면서 처음 서울 땅을 밟아보았고 지하철역도 구경했다(타는 법을 몰라서 표만 사고 다시 나왔다). 어른들은 그런 내가 못내 못 미더워 ‘서울은 눈 뜬 사람 코도 베어가는 곳’이라고 단단히 일러주셨다. 실제로 ‘거시기’라고만 말해도 무조건 믿어온 이 촌놈은 확신에 찬 거짓말에 여러 번 속아보고는 자기 코를 지키기 위해 매사에 긴가 민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참과 거짓의 구분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모호해진 지금은 더욱 ‘정신 챙기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처럼 절실하게 다가온다. ‘네가 신이고 네가 기준이니 네 맘대로 하라’고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젠 옳고 그름의 구분 자체를 구태의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진품과 똑같은 유사품이 더 화려한 포장과 광고로 사람을 속이는 것과 같은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서글프게 한다. 현기증이 날만큼 감동적인 예화와 현란한 수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설교와 책들 속에 얼마나 유사복음이 많이 들어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매번 힘겹다. “복음이 아니라 교회 건물이 가장 많이 전도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면서 상업화된 유사복음,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한 유사 그리스도인의 양산을 염려한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고 그분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고백한다고 다 복음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도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그 사랑에 겨워 주님 말씀 따라 착하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그 대신 예수님 자녀인 것으로 자족하지 못해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너무 많다면, 십자가의 은혜를 따라 나도 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으로 부족하여 다른 온갖 종교적인 짐들을 지운다면, 그것은 유사품이다.


  지금 우리의 교회들처럼 갈라디아의 교회를 유린한 것이 바로 이 유사복음이다. 예수님을 말하지만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은혜를 말하지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믿음을 말하지만 그리스도만 믿는 것은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절반의 진리는 거짓이며(1-4장), 그것은 진리가 주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육체의 소욕을 따라 썩어질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한다(5-6장)고 말한다.


II. 대적자들의 정체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소위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는 바울이 그들의 주장을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고, 교인들도 바울의 복음과 잘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했기에 ‘속히’(1:6) 떠난 것, 또한 바울이 굳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권위의 근거였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은 예수를 믿는 자일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우선 할례부터 행해서 유대인의 계보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들만이 아브라함-사라-이삭-예루살렘에 계보에 속하기 때문에, 이 계보에 들어오기 위해 하갈-이스마엘에 속한 이방인들은 먼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눈에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을 부분적으로 지키고 있을 뿐, 정작 그들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할례나 음식법 혹은 절기 등은 지키지 않는 등 선별적으로만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토라를 완성하러 오신 새로운 모세이기 때문에, 이같은 바울의 가르침을 복음의 왜곡으로 보았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도권을 부여받았으면서도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잠깐의 방문만으로는 바울 복음의 전반적인 것을 다 듣지 못했던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에 대한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성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할례마저 기꺼이 행하고 음식법이나 유대교 절기 등도 지키게 되었다. 하지만 이 대적자들은 실제 예루살렘 사도들이 보낸 자들이 아니며, 사도들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바리새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높다.


III.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Ⅰ. 인사말(1:1-5)

Ⅱ. 본론(1:6-6:10)

  1. 요지(1:6-10)

  2. 변론 및 권고(1:11-6:10)

   A. 변론(1:11-5:1)

    1) 복음의 기원에 대한 변론: 사람과 관련하여(1:11-2:14) ...4가지  a

    2)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변론(2:15-4:11)...4가지                    b

    3) 사람과 관련한 변론(4:12-20)                                a'

    4)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변론(4:21-5:1)                           b'

   B. 권고(5:2-6:10)

  3. 요지(6:11-16)

Ⅲ. 인사말(6:17-18)


갈라디아서는 대적자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반박하는 신학적 변증서다. 여느 서신과는 달리 감사나 칭찬 없이 곧바로 시작하는데, 이는 속히 복음을 떠난 자들을 책망하고 설득하려는 바울의 급박한 심정을 보여준다. 다른 복음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새창조만 있다는 요지를 처음과 끝에 말하고(1:6-10, 6:11-16), 그 중간에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가르침을 훼손하는 대적자들의 주장에 맞서 자기 복음의 기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만으로 충분한 복음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1:11-5:1),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참 복음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촉구하고 있다(5:2-6:10).


IV. 갈라디아서의 주요 주제

1. 바울 복음의 기원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배웠으면서도 그들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대적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이나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자신의 복음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을 예루살렘 사도들도 인정했으며, 심지어 대표적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이 복음에 어긋나는 외식을 범했을 때 책망하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또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부도덕한 일을 일삼는 대적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해산하는 수고로 갈라디아교인들을 대했던 일을 상기시킨다(4:16-20).


2. 바울의 율법 이해

  옛 언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언약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 대적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2:21). 다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율법 없이 믿음으로 이미 누리고 있는 성령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3:1-5).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언약 체결과 그 언약에 믿음으로 반응함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새롭게 생긴 구원 방법이 아니다. 율법이 있기 전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실 때부터 존재하였고, 율법이 있는 동안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변치 않고 미쁘신 언약의 약속과 그 언약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 원리는 변함이 없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통치 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저버린 이들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언약에 신실함(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여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후손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친히 이루시고, 또 아브라함처럼 믿음(신실함)으로 이 아들에게 반응하는 자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하지 않고 새언약을 맺어주셨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것으로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은 저주를 받을 ‘다른 복음’이 된다.


3. 성령 안에서의 자유와 열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율법의 행위를 통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영의 도움 없이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령의 도움이 없기에 육에 속하여 썩어질 것을 거둘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가두고 매는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 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을 통해서 이제 자신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도록 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도 아니요, 할례와 무할례의 여부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새롭게 창조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는지 여부일 뿐이다.


V. 나가는 말

  지금 우리에겐 율법을 지키라고 회유하는 사람도 없고,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다른 복음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게 만드는 유사복음은 있다. 바울이 우리 시대를 향해서 편지를 쓴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은혜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지 않고 이 세상의 가치에 한 눈 팔게 하는 복음,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인정보다는 이 세상에서 더 크고 높고 많은 것을 소유하라고 부추기는 ‘번영의 복음’(prosperity Gospel), 내 소욕을 잠재우고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십자가 복음 대신에 방종과 부도덕에 눈감고 심지어 조장하는 ‘할인된 복음’을 향해 ‘다른 복음’이요, ‘저주를 받을’ 복음이라고 호통치지 않을까.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는 동안 세상과 갈라서고, 내 욕심을 합리화하는 말씀과 갈라서고, 세상이 환호하는 흔적을 지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며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