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2장20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신비주의적 이해를 반대하면서-
갈라디아서2장20절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요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참으로 복된 이 구절, 이 귀한 구절이 오용되고 혹은 남용되고 있는 것을 간혹 보곤 합니다. 이 구절이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신자라는 존재나 의식 혹은 그 기능이나 활동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런 식으로 신자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내장이나 영혼이나 혹은 신체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신비주의적 경건주의의 해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건의 동기나 의도는 높이 살 수 있을 지 몰라도 결코 권장할 만한 해석도 아니고, 또한 그런 해석에 기초한 어떤 실행들도 절대 권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문법적 주석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그런 오용이나 남용의 이유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생각해 보던 중에, 인간론 자체에 무언가 결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잠정적으로나마 결론을 내리면서, 그것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1장8절에서 빌립보지역의 교인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의 "심장"이라는 말은, "스프랑크논"이란 말입니다. "염통, 위, 혹은 창자 등의 내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심장'이 그 내장들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내장으로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그리스도의 심장"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곧 육체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그 육체의 한 부분인 '심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의 육체가 몇 개이며, 그 육체의 심장이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 사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었다면, 바울사도의 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그래서 두 개의 심장이 있는 셈이고, 바울 사도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게 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최소 14만4천개는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서의 그 육체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사랑하게 될 때에 바울사도 자신의 심장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빌립보서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면, 왜 그렇게 두근거리는 지를 헤아려 보게 되곤 합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그 심장을 보면서, 곧 자신의 감정의 밑바닥을 헤아려보는 중에, 그것이 단순히 바울자신의 기호나, 습관이나, 어떤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님이시요, 또한 빌립보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크고 높은 그 은혜로 인한 감격이요 그 감격에 기초해서 자신이 빌립보교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 자신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그런 사랑인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심장의 두근거림을 묘사할 때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빌립보교회교인들을 향한 사랑은,한편으로는 바울의 사랑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바울의 그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면서 바울 자신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염통이 바울 안에서 두근거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빌립보서1장8절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갈라디아서2장20절의 올바른 이해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과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며, 또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 등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라디아서2장20절을 이해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는 그 신비를 이해할 때에,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신체의 한 부분, 곧 그의 인성이 실제로 들어와서 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잘못된 출발, 잘못된 전제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주의식의 이해를 지양하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실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곧,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신자의 책임을 무시하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하나가 되고 연합이 되었다고 해서, 신자가 신자로서, 곧 신자 그 자신으로서의 도덕적인 경건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마치 그리스도가 신자의 믿는 바를 대신 믿어주거나, 신자가 사랑해야 할 것은 대신 사랑해 주거나 신자가 선을 행해야 할 것은, 마치 그렇게 연합해 있는 그리스도가 대신해 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경건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도덕적 무책임주의식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믿음의 근거가 되시고, 믿음의 동기를 제공해 주시지만, 그래도 내가 믿는 것이고,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오해해서는,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자의 말이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비난입니다. '나'를 이야기할 때에, 옛 자아로서의 '나'를 주장하고 나 중심의 나를 강조하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내 자신입니다. 엣 자아로서의 내가 새 자아로서의 내가 되는 것이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내 아닌 전혀 다른 존재, 혹 천사나 어떤 제3, 제4의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옛자아가 새자아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아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이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이전과 똑같은 세상이지만 그 똑같은 세상에도 불구하고 새 세상이 되는 것이고, 이전과 똑같은 자이지만, 그 똑같은 자아에도 불구하고 새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는가?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선하고 거룩한 것이로되 그것이 성령이 없는 채로, 그리스도가 없는 채로, 작용하게 되면,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 율법에서 도망갈 자가 아무도 없이 너무나 살인적입니다. 율법이 잘못되었고 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율법으로 인하여 판단받게 되는 인간의 잘못과 흠때문에, 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합니다. 율법은 정금같이 귀하고 꿀과 송이꿀보다 단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운 법이 되고, 생명이 법이 되고, 복음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죽이던 것이 이제는 율법이 살리는 것이 됩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율법 속의 복음이, 율법의 보장을 받고, 율법의 증거를 받아왔던 복음이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힌 존재로서의 신자들의 삶이 그러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자의 삶이 이전과는 다른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없고 성령이 없을 때는 영원히 저주 가운데 있게 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바로 이전의 그 존재가,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이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제는 오히려 살리는 복음이 되는 것처럼, 죽을 수 밖에 없던 옛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새자아가 된 것입니다. 자아가 그 자아이되, 전혀 다른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율법이지만, 전혀 다른 율법이 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돌판이 새겨졌던 율법이 마음판에 새겨지는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법이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성령이, 내 밖에 있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해서 이뤄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갈라디아서2장20절을 한 구절 한 구절 주석해 가게 되면 더욱 분명해 지게 될 것입니다. 기회되는 대로 그렇게 주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holyjoy
갈라디아서2장20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신비주의적 이해를 반대하면서-
갈라디아서2장20절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요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참으로 복된 이 구절, 이 귀한 구절이 오용되고 혹은 남용되고 있는 것을 간혹 보곤 합니다. 이 구절이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신자라는 존재나 의식 혹은 그 기능이나 활동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런 식으로 신자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내장이나 영혼이나 혹은 신체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신비주의적 경건주의의 해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건의 동기나 의도는 높이 살 수 있을 지 몰라도 결코 권장할 만한 해석도 아니고, 또한 그런 해석에 기초한 어떤 실행들도 절대 권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문법적 주석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그런 오용이나 남용의 이유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생각해 보던 중에, 인간론 자체에 무언가 결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잠정적으로나마 결론을 내리면서, 그것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1장8절에서 빌립보지역의 교인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의 "심장"이라는 말은, "스프랑크논"이란 말입니다. "염통, 위, 혹은 창자 등의 내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심장'이 그 내장들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내장으로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그리스도의 심장"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곧 육체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그 육체의 한 부분인 '심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의 육체가 몇 개이며, 그 육체의 심장이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 사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었다면, 바울사도의 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그래서 두 개의 심장이 있는 셈이고, 바울 사도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게 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최소 14만4천개는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서의 그 육체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사랑하게 될 때에 바울사도 자신의 심장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빌립보서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면, 왜 그렇게 두근거리는 지를 헤아려 보게 되곤 합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그 심장을 보면서, 곧 자신의 감정의 밑바닥을 헤아려보는 중에, 그것이 단순히 바울자신의 기호나, 습관이나, 어떤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님이시요, 또한 빌립보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크고 높은 그 은혜로 인한 감격이요 그 감격에 기초해서 자신이 빌립보교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 자신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그런 사랑인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심장의 두근거림을 묘사할 때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빌립보교회교인들을 향한 사랑은,한편으로는 바울의 사랑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바울의 그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면서 바울 자신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염통이 바울 안에서 두근거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빌립보서1장8절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갈라디아서2장20절의 올바른 이해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과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며, 또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 등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라디아서2장20절을 이해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는 그 신비를 이해할 때에,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신체의 한 부분, 곧 그의 인성이 실제로 들어와서 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잘못된 출발, 잘못된 전제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주의식의 이해를 지양하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실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곧,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신자의 책임을 무시하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하나가 되고 연합이 되었다고 해서, 신자가 신자로서, 곧 신자 그 자신으로서의 도덕적인 경건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마치 그리스도가 신자의 믿는 바를 대신 믿어주거나, 신자가 사랑해야 할 것은 대신 사랑해 주거나 신자가 선을 행해야 할 것은, 마치 그렇게 연합해 있는 그리스도가 대신해 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경건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도덕적 무책임주의식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믿음의 근거가 되시고, 믿음의 동기를 제공해 주시지만, 그래도 내가 믿는 것이고,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오해해서는,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자의 말이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비난입니다. '나'를 이야기할 때에, 옛 자아로서의 '나'를 주장하고 나 중심의 나를 강조하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내 자신입니다. 엣 자아로서의 내가 새 자아로서의 내가 되는 것이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내 아닌 전혀 다른 존재, 혹 천사나 어떤 제3, 제4의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옛자아가 새자아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아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이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이전과 똑같은 세상이지만 그 똑같은 세상에도 불구하고 새 세상이 되는 것이고, 이전과 똑같은 자이지만, 그 똑같은 자아에도 불구하고 새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는가?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선하고 거룩한 것이로되 그것이 성령이 없는 채로, 그리스도가 없는 채로, 작용하게 되면,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 율법에서 도망갈 자가 아무도 없이 너무나 살인적입니다. 율법이 잘못되었고 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율법으로 인하여 판단받게 되는 인간의 잘못과 흠때문에, 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합니다. 율법은 정금같이 귀하고 꿀과 송이꿀보다 단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운 법이 되고, 생명이 법이 되고, 복음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죽이던 것이 이제는 율법이 살리는 것이 됩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율법 속의 복음이, 율법의 보장을 받고, 율법의 증거를 받아왔던 복음이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힌 존재로서의 신자들의 삶이 그러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자의 삶이 이전과는 다른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없고 성령이 없을 때는 영원히 저주 가운데 있게 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바로 이전의 그 존재가,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이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제는 오히려 살리는 복음이 되는 것처럼, 죽을 수 밖에 없던 옛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새자아가 된 것입니다. 자아가 그 자아이되, 전혀 다른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율법이지만, 전혀 다른 율법이 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돌판이 새겨졌던 율법이 마음판에 새겨지는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법이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성령이, 내 밖에 있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해서 이뤄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갈라디아서2장20절을 한 구절 한 구절 주석해 가게 되면 더욱 분명해 지게 될 것입니다. 기회되는 대로 그렇게 주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holyjoy
갈라디아서2장20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신비주의적 이해를 반대하면서-
갈라디아서2장20절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요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참으로 복된 이 구절, 이 귀한 구절이 오용되고 혹은 남용되고 있는 것을 간혹 보곤 합니다. 이 구절이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신자라는 존재나 의식 혹은 그 기능이나 활동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런 식으로 신자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내장이나 영혼이나 혹은 신체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신비주의적 경건주의의 해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건의 동기나 의도는 높이 살 수 있을 지 몰라도 결코 권장할 만한 해석도 아니고, 또한 그런 해석에 기초한 어떤 실행들도 절대 권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문법적 주석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그런 오용이나 남용의 이유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생각해 보던 중에, 인간론 자체에 무언가 결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잠정적으로나마 결론을 내리면서, 그것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1장8절에서 빌립보지역의 교인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의 "심장"이라는 말은, "스프랑크논"이란 말입니다. "염통, 위, 혹은 창자 등의 내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심장'이 그 내장들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내장으로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그리스도의 심장"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곧 육체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그 육체의 한 부분인 '심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의 육체가 몇 개이며, 그 육체의 심장이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 사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었다면, 바울사도의 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그래서 두 개의 심장이 있는 셈이고, 바울 사도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게 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최소 14만4천개는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서의 그 육체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사랑하게 될 때에 바울사도 자신의 심장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빌립보서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면, 왜 그렇게 두근거리는 지를 헤아려 보게 되곤 합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그 심장을 보면서, 곧 자신의 감정의 밑바닥을 헤아려보는 중에, 그것이 단순히 바울자신의 기호나, 습관이나, 어떤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님이시요, 또한 빌립보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크고 높은 그 은혜로 인한 감격이요 그 감격에 기초해서 자신이 빌립보교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 자신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그런 사랑인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심장의 두근거림을 묘사할 때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빌립보교회교인들을 향한 사랑은,한편으로는 바울의 사랑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바울의 그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면서 바울 자신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염통이 바울 안에서 두근거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빌립보서1장8절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갈라디아서2장20절의 올바른 이해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과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며, 또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 등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라디아서2장20절을 이해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는 그 신비를 이해할 때에,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신체의 한 부분, 곧 그의 인성이 실제로 들어와서 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잘못된 출발, 잘못된 전제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주의식의 이해를 지양하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실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곧,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신자의 책임을 무시하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하나가 되고 연합이 되었다고 해서, 신자가 신자로서, 곧 신자 그 자신으로서의 도덕적인 경건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마치 그리스도가 신자의 믿는 바를 대신 믿어주거나, 신자가 사랑해야 할 것은 대신 사랑해 주거나 신자가 선을 행해야 할 것은, 마치 그렇게 연합해 있는 그리스도가 대신해 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경건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도덕적 무책임주의식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믿음의 근거가 되시고, 믿음의 동기를 제공해 주시지만, 그래도 내가 믿는 것이고,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오해해서는,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자의 말이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비난입니다. '나'를 이야기할 때에, 옛 자아로서의 '나'를 주장하고 나 중심의 나를 강조하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내 자신입니다. 엣 자아로서의 내가 새 자아로서의 내가 되는 것이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내 아닌 전혀 다른 존재, 혹 천사나 어떤 제3, 제4의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옛자아가 새자아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아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이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이전과 똑같은 세상이지만 그 똑같은 세상에도 불구하고 새 세상이 되는 것이고, 이전과 똑같은 자이지만, 그 똑같은 자아에도 불구하고 새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는가?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선하고 거룩한 것이로되 그것이 성령이 없는 채로, 그리스도가 없는 채로, 작용하게 되면,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 율법에서 도망갈 자가 아무도 없이 너무나 살인적입니다. 율법이 잘못되었고 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율법으로 인하여 판단받게 되는 인간의 잘못과 흠때문에, 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합니다. 율법은 정금같이 귀하고 꿀과 송이꿀보다 단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운 법이 되고, 생명이 법이 되고, 복음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죽이던 것이 이제는 율법이 살리는 것이 됩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율법 속의 복음이, 율법의 보장을 받고, 율법의 증거를 받아왔던 복음이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힌 존재로서의 신자들의 삶이 그러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자의 삶이 이전과는 다른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없고 성령이 없을 때는 영원히 저주 가운데 있게 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바로 이전의 그 존재가,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이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제는 오히려 살리는 복음이 되는 것처럼, 죽을 수 밖에 없던 옛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새자아가 된 것입니다. 자아가 그 자아이되, 전혀 다른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율법이지만, 전혀 다른 율법이 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돌판이 새겨졌던 율법이 마음판에 새겨지는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법이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성령이, 내 밖에 있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해서 이뤄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갈라디아서2장20절을 한 구절 한 구절 주석해 가게 되면 더욱 분명해 지게 될 것입니다. 기회되는 대로 그렇게 주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holyjoy
갈라디아서2장20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신비주의적 이해를 반대하면서-
갈라디아서2장20절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요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참으로 복된 이 구절, 이 귀한 구절이 오용되고 혹은 남용되고 있는 것을 간혹 보곤 합니다. 이 구절이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신자라는 존재나 의식 혹은 그 기능이나 활동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런 식으로 신자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내장이나 영혼이나 혹은 신체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신비주의적 경건주의의 해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건의 동기나 의도는 높이 살 수 있을 지 몰라도 결코 권장할 만한 해석도 아니고, 또한 그런 해석에 기초한 어떤 실행들도 절대 권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문법적 주석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그런 오용이나 남용의 이유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생각해 보던 중에, 인간론 자체에 무언가 결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잠정적으로나마 결론을 내리면서, 그것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1장8절에서 빌립보지역의 교인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의 "심장"이라는 말은, "스프랑크논"이란 말입니다. "염통, 위, 혹은 창자 등의 내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심장'이 그 내장들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내장으로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그리스도의 심장"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곧 육체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그 육체의 한 부분인 '심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의 육체가 몇 개이며, 그 육체의 심장이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 사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었다면, 바울사도의 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그래서 두 개의 심장이 있는 셈이고, 바울 사도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게 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최소 14만4천개는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서의 그 육체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사랑하게 될 때에 바울사도 자신의 심장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빌립보서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면, 왜 그렇게 두근거리는 지를 헤아려 보게 되곤 합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그 심장을 보면서, 곧 자신의 감정의 밑바닥을 헤아려보는 중에, 그것이 단순히 바울자신의 기호나, 습관이나, 어떤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님이시요, 또한 빌립보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크고 높은 그 은혜로 인한 감격이요 그 감격에 기초해서 자신이 빌립보교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 자신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그런 사랑인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심장의 두근거림을 묘사할 때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빌립보교회교인들을 향한 사랑은,한편으로는 바울의 사랑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바울의 그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면서 바울 자신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염통이 바울 안에서 두근거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빌립보서1장8절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갈라디아서2장20절의 올바른 이해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과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며, 또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 등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라디아서2장20절을 이해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는 그 신비를 이해할 때에,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신체의 한 부분, 곧 그의 인성이 실제로 들어와서 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잘못된 출발, 잘못된 전제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주의식의 이해를 지양하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실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곧,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신자의 책임을 무시하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하나가 되고 연합이 되었다고 해서, 신자가 신자로서, 곧 신자 그 자신으로서의 도덕적인 경건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마치 그리스도가 신자의 믿는 바를 대신 믿어주거나, 신자가 사랑해야 할 것은 대신 사랑해 주거나 신자가 선을 행해야 할 것은, 마치 그렇게 연합해 있는 그리스도가 대신해 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경건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도덕적 무책임주의식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믿음의 근거가 되시고, 믿음의 동기를 제공해 주시지만, 그래도 내가 믿는 것이고,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오해해서는,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자의 말이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비난입니다. '나'를 이야기할 때에, 옛 자아로서의 '나'를 주장하고 나 중심의 나를 강조하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내 자신입니다. 엣 자아로서의 내가 새 자아로서의 내가 되는 것이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내 아닌 전혀 다른 존재, 혹 천사나 어떤 제3, 제4의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옛자아가 새자아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아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이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이전과 똑같은 세상이지만 그 똑같은 세상에도 불구하고 새 세상이 되는 것이고, 이전과 똑같은 자이지만, 그 똑같은 자아에도 불구하고 새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는가?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선하고 거룩한 것이로되 그것이 성령이 없는 채로, 그리스도가 없는 채로, 작용하게 되면,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 율법에서 도망갈 자가 아무도 없이 너무나 살인적입니다. 율법이 잘못되었고 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율법으로 인하여 판단받게 되는 인간의 잘못과 흠때문에, 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합니다. 율법은 정금같이 귀하고 꿀과 송이꿀보다 단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운 법이 되고, 생명이 법이 되고, 복음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죽이던 것이 이제는 율법이 살리는 것이 됩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율법 속의 복음이, 율법의 보장을 받고, 율법의 증거를 받아왔던 복음이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힌 존재로서의 신자들의 삶이 그러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자의 삶이 이전과는 다른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없고 성령이 없을 때는 영원히 저주 가운데 있게 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바로 이전의 그 존재가,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이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제는 오히려 살리는 복음이 되는 것처럼, 죽을 수 밖에 없던 옛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새자아가 된 것입니다. 자아가 그 자아이되, 전혀 다른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율법이지만, 전혀 다른 율법이 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돌판이 새겨졌던 율법이 마음판에 새겨지는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법이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성령이, 내 밖에 있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해서 이뤄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갈라디아서2장20절을 한 구절 한 구절 주석해 가게 되면 더욱 분명해 지게 될 것입니다. 기회되는 대로 그렇게 주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holyjoy
갈라디아서2장20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신비주의적 이해를 반대하면서-
갈라디아서2장20절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요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참으로 복된 이 구절, 이 귀한 구절이 오용되고 혹은 남용되고 있는 것을 간혹 보곤 합니다. 이 구절이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신자라는 존재나 의식 혹은 그 기능이나 활동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런 식으로 신자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내장이나 영혼이나 혹은 신체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신비주의적 경건주의의 해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건의 동기나 의도는 높이 살 수 있을 지 몰라도 결코 권장할 만한 해석도 아니고, 또한 그런 해석에 기초한 어떤 실행들도 절대 권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문법적 주석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그런 오용이나 남용의 이유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생각해 보던 중에, 인간론 자체에 무언가 결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잠정적으로나마 결론을 내리면서, 그것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1장8절에서 빌립보지역의 교인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의 "심장"이라는 말은, "스프랑크논"이란 말입니다. "염통, 위, 혹은 창자 등의 내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심장'이 그 내장들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내장으로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그리스도의 심장"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곧 육체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그 육체의 한 부분인 '심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의 육체가 몇 개이며, 그 육체의 심장이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 사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었다면, 바울사도의 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그래서 두 개의 심장이 있는 셈이고, 바울 사도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게 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최소 14만4천개는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서의 그 육체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사랑하게 될 때에 바울사도 자신의 심장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빌립보서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면, 왜 그렇게 두근거리는 지를 헤아려 보게 되곤 합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그 심장을 보면서, 곧 자신의 감정의 밑바닥을 헤아려보는 중에, 그것이 단순히 바울자신의 기호나, 습관이나, 어떤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님이시요, 또한 빌립보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크고 높은 그 은혜로 인한 감격이요 그 감격에 기초해서 자신이 빌립보교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 자신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그런 사랑인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심장의 두근거림을 묘사할 때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빌립보교회교인들을 향한 사랑은,한편으로는 바울의 사랑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바울의 그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면서 바울 자신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노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염통이 바울 안에서 두근거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빌립보서1장8절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갈라디아서2장20절의 올바른 이해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과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며, 또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 등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라디아서2장20절을 이해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는 그 신비를 이해할 때에,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신체의 한 부분, 곧 그의 인성이 실제로 들어와서 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잘못된 출발, 잘못된 전제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주의식의 이해를 지양하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실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곧,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신자의 책임을 무시하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하나가 되고 연합이 되었다고 해서, 신자가 신자로서, 곧 신자 그 자신으로서의 도덕적인 경건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마치 그리스도가 신자의 믿는 바를 대신 믿어주거나, 신자가 사랑해야 할 것은 대신 사랑해 주거나 신자가 선을 행해야 할 것은, 마치 그렇게 연합해 있는 그리스도가 대신해 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경건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도덕적 무책임주의식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믿음의 근거가 되시고, 믿음의 동기를 제공해 주시지만, 그래도 내가 믿는 것이고,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오해해서는,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자의 말이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비난입니다. '나'를 이야기할 때에, 옛 자아로서의 '나'를 주장하고 나 중심의 나를 강조하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내 자신입니다. 엣 자아로서의 내가 새 자아로서의 내가 되는 것이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내 아닌 전혀 다른 존재, 혹 천사나 어떤 제3, 제4의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옛자아가 새자아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아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이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와 동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이전과 똑같은 세상이지만 그 똑같은 세상에도 불구하고 새 세상이 되는 것이고, 이전과 똑같은 자이지만, 그 똑같은 자아에도 불구하고 새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는가?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선하고 거룩한 것이로되 그것이 성령이 없는 채로, 그리스도가 없는 채로, 작용하게 되면,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 율법에서 도망갈 자가 아무도 없이 너무나 살인적입니다. 율법이 잘못되었고 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율법으로 인하여 판단받게 되는 인간의 잘못과 흠때문에, 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합니다. 율법은 정금같이 귀하고 꿀과 송이꿀보다 단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운 법이 되고, 생명이 법이 되고, 복음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죽이던 것이 이제는 율법이 살리는 것이 됩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율법 속의 복음이, 율법의 보장을 받고, 율법의 증거를 받아왔던 복음이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힌 존재로서의 신자들의 삶이 그러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자의 삶이 이전과는 다른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없고 성령이 없을 때는 영원히 저주 가운데 있게 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바로 이전의 그 존재가,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이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제는 오히려 살리는 복음이 되는 것처럼, 죽을 수 밖에 없던 옛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새자아가 된 것입니다. 자아가 그 자아이되, 전혀 다른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율법이지만, 전혀 다른 율법이 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돌판이 새겨졌던 율법이 마음판에 새겨지는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법이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던 성령이, 내 밖에 있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해서 이뤄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갈라디아서2장20절을 한 구절 한 구절 주석해 가게 되면 더욱 분명해 지게 될 것입니다. 기회되는 대로 그렇게 주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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