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개요

에반젤(복음) 2019. 12. 12. 20:39



 

갈라디아서

 





1. 배경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이방인들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행13:1-3;14:25-27). 그 소식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도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유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구원을 얻는 데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믿음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고 곧 유대적 의식들, 특히 할례도 역시 불가결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무리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방인들의 회개 소식에 항의를 하였다(행15:1). 이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를 누비면서 이방인들도 구원의 한 방법으로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사도의 직분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따라서 바울의 복음은 간접적으로 전수된 것이며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힘쓰며 만약 조건만 부합하면 자신도 할례를 전한다고 주장함으로 바울의 신뢰성에 도전을 하였다.
가만히 들어온 이 사람들의 소리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자 바울은 기독교적 자유의 교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2. 저자

본서의 저자는 바울이다. 본서에서 기록자는 자신의 이름을 바울이라고 밝히고 있다(1:1). 그러나 튜빙겐 학파와 부르노 바우어, 로만, 피어슨, 나벨 그리고 반 마엔 등이 바울의 저작권을 부인하지만 이 모든 것은 주관적 추론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것에 그친다.
이들은 갈2:11-21에 묘사되어 있는 바울의 기독교와 유대주의자의 기독교간의 날카로운 갈등은 사도 바울 당시와 같이 그렇게 일찍 커져 있을 수 없었으며 갈라디아 사람들의 기독교정신은 비길 데 없이 숭고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세비우스 갈라디아서를 바울의 서신 목록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오리겐, 터툴리안, 알렉산더의 클레멘트, 그리고 이레니우스 등은 자신들의 서신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초대교회의 인물들이 본서를 저자를 바울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서가 저자를 바울임을 자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서신은 매우 인간적이며 전체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사람"을 보이고 있는데 바로 다소의 바울이다.



3. 수신지

본서 3:1을 보면 본 서신의 수신자들을 갈라디아 사람들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갈라디아인들이 누구인지에 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북갈라디아설과 남갈라디아설로 요약할 수 있다.

(1) 북갈라디아설
갈라디아는 지리적인 위치로 볼 때 로마령인 갈라디아의 북쪽 지역으로 바울이 이 지역에 여러 교회들을 세웠고 갈라디아서는 그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한다.
북갈라디아설은 여러 가지의 증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갈라디아 사람들'이란 말의 통속적 사용을 볼 때에 북갈라디아 지역을 말한다고 한다.
북갈라디아 지역에는 본래 브루기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후에 고을족이 정복하여 자신들의 호칭으로 자기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본다.
그리고 누가가 사용한 행13:13,14과 행14:6, 그리고 행16:6의 일반적 용법과 남갈라디아 여러 도읍들에 관한 누가의 설명, 행16:6과 행18:23의 의미를 볼 때에 갈라디아란 행정구역이 아니며, J. Moffatt는 누가가 사용한 '통과했다'는 말을 18:23에 사용된 같은 단어와 관련지어 볼 때 이 말은 '통과했다'는 의미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며 통과했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어를 모패트와 같이 이해를 한다면 바울이 북쪽 지역에 몇 개의 교회를 세웠다는 견해를 지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지역이 아니고 두 지역이 언급된 것을 볼 때 갈라디아는 브루기아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갈라디아란 행정구역이라 할 수 없다라고 주장되어 왔다.
제3차 전도여행 초기에 북쪽 지역을 방문했을 때 세운 교회라고 본다. 그러나 북갈라디아설은 이제 남갈라디아설에 의해 매우 광범위하게 논박되고 있다.

(2) 남갈라디아설
이 남갈라디아설은 19세기 이후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견해이다.
① 사도행전에 그 당시 중요한 논쟁이 있었던 북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볼 때에 남갈라디아설을 지지한다.
② 갈라디아서에는 바울이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에 갈라디아 교회들을 처음 방문하였다고 하였는데(갈4:13), 이는 건강의 회복기에 있는 환자로서 지형이 매우 험악한 북쪽 지역을 말하기 보다는 남쪽지역일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준다.
③ 바울은 자기 세운 교회들을 언급할 때 교회가 위치해 있는 행정 구역의 명칭들을 사용하였으므로 '갈라디아 사람들'이란 그 행정구역에 속해있는 교회의 사람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④ 바나바의 이름이 갈2장에 세번이나 기록되었는데 이는 그가 남갈라디아 교회들에 개인적으로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갈라디아설에 대하여는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람세이(Ramsay)경은 세계 제1차 대전 전에 소아시아에서 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 로 바울 사도가 전혀 북쪽 갈라디아를 방문한 때가 없으며, 그러므로 남부 갈라디아인들에게 갈라디아 편지를 썼으며, 만일 북쪽 갈라디아를 방문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역점은 남쪽 갈라디아라고 했다(원용국, 성서고고학 신약편,p.260.). 그 실례로 본도인(행18:2), 알렉산더인(행18:24), 아시아인(행20:4) 등이다.
이상과 같이 수신지인 갈라디아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 이론들을 종합해 볼 때에 남갈라디아설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4. 저작장소 및 저작연대

저작연대는 수신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먼저 두 견해를 살펴 본후 저작연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북갈라디아설에 따른 연대
처음의 저작연대는 갈1:6의 타케오스(quickly)라는 단어에 의해 갈라디아를 바울이 방문한 직후에 씌어졌다는 것인데 이 단어는 갈라디아인들의 변절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므로 옳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직후에 기록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주장은 갈라디아서가 로마서보다 먼저 씌어졌으며 고린도 후서가 기록된 후에 씌어졌다고 보고 제3차 전도 여행 말기에 고린도에서 보낸 서신으로 보고 있다.

(2) 남갈라디아설에 따른 연대
남갈라디아설도 갈4:13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예루살렘 공회 후에 기록되었다는 견해와 예루살렘 공회 이전에 기록되었다는 견해로 나뉘게 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저작연대에 관한 결정은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 언급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살펴봄으로써 결정지을 수 있다고 본다.
예루살렘 방문에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즉 갈라디아서 2:1-10이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 방문이었다는 견해와 갈라디아서 2:1-10이 사도행전 11:30에 나오는 방문과 같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전자의 견해는 전통적인 견해로 두 본문의 유사점을 들어 설명하지만 갈2:1에 나오는 "다시"라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를 방문하기 전에 그곳에 두번 방문한 사실 - 첫 번째 방문은 행9:26 이하의 바울이 회심한 직후에 있었고, 두 번째 방문은 11:30에서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구제기금을 가지고 갔을 때에 이루어졌다-은 구제기금을 가지고 방문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5장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 15장에 언급된 공회기간에 합의를 보았다는 법령에 관한 것들이 갈라디아서에는 빠져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갈라디아서 2:6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더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식사 문제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은 그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한 예루살렘 공회 후에 있은 사건이었다기보다는 공회 이전의 사건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반박들로 인하여 갈2장과 행15장이 동일하다는 견해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한수 교수도 그의 저서 [바울신학연구] p.97.에서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안디옥 교회로부터 예루살렘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전하는 자로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함께 교제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교제를 나누던 중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을 피한 일이 있어 책망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안디옥 교회에 대표자들을 급히 보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는 이러한 일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바울 등의 사람들을 보내고 이 결정을 위하여 회의가 소집된 것으로 본다(행15장).
이와 같은 주장들을 볼 때에 본 서신은 바울이 공회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쓰여졌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저작 연대는 A.D. 49년경이라고 보여진다.

5. 저작동기와 저작목적

동기는 그 당시 율법과 할례에 대하여 지나친 열심을 가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분쟁의 근원을 제공하여 갈라디아에서 기독교적 자유의 교리가 위기에 처하게 된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자극을 받은 것이 그 이유라고 본다.
그리고 목적은 바울이 교회 안에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는 반대되는 율법을 통한 정의를 강조함으로써 교회 안에 혼란이 일어난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율법과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재강조하고,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생활로써 그 믿음의 순전함을 입증하려는 권면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6. 내 용

(1) 인사와 사도직의 권위(1:1-5)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과 기원을 말하고 있다. 즉 자신의 사도직은 자신으로 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신적인 기원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2) 변절자들에 대한 저주(6-10)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에게는 저주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3)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1:11-24)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말미암을 것으로서 자신이 직접 받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복음이 철저한 율법주의자요, 광신적인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간증하고 있다.
(4)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는 바울(2:1-14)
여기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로부터 사도로 인정 받는 겸손한 동역의 모습과 복음 진리를 확신 있게 수호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5) 믿음으로만 얻는 의(2:15-3:14)
사람들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짓밟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바울은 사람의 의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을 말하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의롭게 된다는 구원을 핵심을 가르치고 있다.
(6) 율법이냐? 약속이냐?(3:15-29)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과 약속의 목적과 의미를 바로 지적하고 있다. 언약은 변경할 수 없고 중요하다. 그리고 율법의 목적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없지만 죄를 드러냄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인도하는 개인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7) 종에서 아들이 됨(4:1-11)
과거에는 우리가 종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있는 아들 되었다는 사실을 바울은 종과 아들을 대조시켜서 은혜의 복음 아래 있는 신자의 축복의 특권을 가르쳐 준다. 또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있다.
(8) 바울과 갈라디아인들과의 관계(4:12-20)
그리고 갈라디아인들의 무너진 믿음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바울 자신의 목자 심정과 영적 어머니로서의 헌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해산의 수고라는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9) 이삭과 이스마엘(4:21-31)
아브라함의 꾀에 따라 얻은 하갈의 자녀와 하나님의 주신 자유를 누리는 여자 사라의 자녀와의 비유를 통해서 은혜(약속) 아래 사는 생활과 율법(의지) 아래 사는 생활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10) 자유인으로 살라(5:1-12)
지금까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말한 바울은 5장부터는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자유를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참 자유란 어떤 목표와 욕심을 추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굳게 서서 사는데서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11) 자유의 본질(5:13-15)
신앙은 얽매임이 아니라 자유에로의 부르심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인 하나님 앞에 거리낌없이 나갈 수 있는 자유요, 사랑과 섬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2) 성령의 열매(5:16-26)
복음을 믿음으로서 얻은 자유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온전해 지는 것이다. 즉 성령의 소욕에 헌신적으로 순종할 때에 열리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13) 낙심치 말고 끝까지 선을 행하라(6:1-10)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낙심치 말고 끝까지 선을 행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러므로 심는 대로 거두게 해 주신다고 신뢰로 행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의 자유는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섬길 때에 완성되어감을 말하고 있다.
(14) 십자가를 자랑하라(6:11-18)
이제 바울은 편지를 끝맺으면서 친필로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자들처럼 그들이 자랑으로 일삼는 율법도 지키지 않는 모순에 빠진 그들을 본받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예수의 흔적을 가지는 성도가 되라고 하는 권면으로 끝맺고 있다.

7. 평 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서신서 중 최초의 것으로서 "종교적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불려온 서신서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고 그를 통한 자유의 복음을 말한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본서의 주제는 한마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 아래 본서는 복음에 대하여 그 핵심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서신서이다. 본서를 통하여 율법과 분리된 믿음에 의해 의로와진다는 이신득의의 칭의 교리는 교회에 의해 인정되고 수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