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배경과 주제

에반젤(복음) 2019. 12. 12. 20:31



          

갈라디아서

- 모든 것을 대치하는 그리스도 -

1. 배경과 주제


<갈라디아서 1장 1~10절>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A. 배경


  갈라디아서는 AD60년 이전에 쓴 것이라고 한다. 40년에 썼다는 사람도 있고 50년에 썼다는 사람도 있는데, 바울이 옥에 갇히기 전에 사역의 초기에 쓴 글이다.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에게 문제가 생겨서 쓴 것이다.

  그 문제들은 아주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긍정적인 계시가 나오게 되었다. 언제든지 성경은 긍정적인 것에서 보다 부정적인 것에서 더 완전한 계시가 나오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의 부정적인 역사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것이 계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은 부정적인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깊은 것이 계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말과도 연결되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결코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고 더 잘나고 마음에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부정적인 상황이 하나님 백성이 되도록 만든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사람의 생각 같으면 우수한 것을 뽑아 쓸 것인데, 하나님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완전함을 증명해내고 계시해내게 되었다.

  여기의 배경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율법적인 종교가 들어와서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경향이 생겨 바울이 마음이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것이다.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보면 유태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소아시아 지방인 유럽으로 나온다. 거기에는 여러 사람이 섞여 살게 되었다. 희랍인들도 있고 유태인들도 있었다. 유태인들은 전통적으로 자기들이 갖고 있는 유태교라는 뿌리 깊은 종교가 있는데, 이 종교를 100% 완전하게 버리고 기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그 잔재가 남아있어 거기에 뭘 추가하고 추가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복음이 어느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 지역의 문화나 종교나 역사가 항상 그 위에 페인트칠을 자꾸 했다.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상황이기도 하고 환경이기도 했다. 불교가 인도에서 출발하여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가는 동안에 색깔이 많이 변했다. 불상의 모습만 보아도 변했다. 일본 불상은 우리나라와 색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만큼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힘이 큰 것이다. 유태인들은 그 문화가 아주 깊다. 왜냐하면 유일한 하나의 종교가 수천년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하게 뿌리 뽑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 안에 유태주의자들이 계속 들어와서 이것도 해야 된다, 저것도 해야 된다고 요구하던 시대적 상황이다.


1)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미혹된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미혹되었다. 안식일도 지켜야 되고 할례도 행해야 되고 유태교에서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고, 또 유태교의 율법은 대단히 우수한 율법이다. 고대 사회에서도 유태인이 갖고 있는 율법만큼 완벽한 율법이 없다. 이방인들에게 다른 종교도 있고 계율도 있지만 조잡하다. 그러나 유태인의 율법만큼은 지금 보아도 완벽하다. 그런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이 좋은 율법을 왜 폐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나쁜 것이 없고 좋은 것인데 지켜야지 폐할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할례도 꼭 해야 된다,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것들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고 내용이 다 좋은 율법인데 그대로 지키면 되지 그것을 굳이 문제를 삼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2) 그리스도로부터 유대교로 빗나간 갈라디아 교회들


  바울의 의도는 이런 것들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대치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그런 것으로 빗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율법은 눈으로 보인다. 사람은 눈으로 보이는데 끌려가기 마련이다. 문화나 종교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문화나 율법이나 종교가 보이니까 그런 것이 좋게 보이므로 자연히 그쪽으로 따라 가게끔 된다. 이것을 보고 여기서는 다른 복음이라고 한다. 유태교나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다른 복음이다.

  복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어 복음이 왔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율법으로 할 수 없는 모든 인류를 한꺼번에 매장하고 율법을 가지고 지키면 결국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인류를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율법을 지켜서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 인간이 죽어야 된다. 죽고 하나님을 마음을 가진 새로운 인류가 태어나야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율법은 참 좋은 것이지만 율법은 복음을 대치하는 것이니까 율법으로 안 된 것을 복음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복음이 왔는데 다시 율법으로 하면 그 복음은 무효화되는 것이다. 흑백TV를 대체하기 위해서 칼라TV가 왔는데 흑백TV를 같이 본다면 칼라TV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취미에 따라서 흑백TV가 더 좋아서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내가 내 힘으로 지키는 일이다. 복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것을 제쳐놓고 내가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할 필요가 없다. 밥 먹는 것은 내가 하는데 하나님께 먹여달라고 하겠는가?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니까 하나님에게 먹여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하실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안 되니까 끝내고 다시 시작해야 되겠다고 해서 왔기 때문에 율법으로 안 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복음이다. 내가 아무리 해도 안 될 것이고, 결국 나는 저주로밖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인데 전혀 새로운 방법이 생겼다. 그 새로운 방법이 복음이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를 포함하고 죽으시고, 그가 다시 사실 때 우리를 포함하고 다시 사신 것이 복음이다. 나를 죽게도 하고 나를 살게도 하는 새로운 인류로 태어나게 한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이다. 이런 복음을 놔두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면 복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무엇인가? 은혜이다. 내가 할 수 없어서 해 준 것이 복음이고, 율법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율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내가 돈을 잘 버는 사람이라면 돈을 잘 버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돈을 잘 벌지를 못하는데 누가 나를 도와주었다면 그것이 은혜이고 그것이 복음이다. 율법을 지킨다면 복음은 필요가 없다. 또 복음이 있다면 율법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3)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


  그래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한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에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은혜이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고 끊어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자신이 은혜이니까 은혜에서 끊어진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 사랑의 수단이라고 했다. 하나님 사랑의 수단에서 끊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는 수단에서 이탈된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려고 한 수단에서 이탈되면 인간의 방법밖에 없다. 인간의 방법이 만일 가능했다면 하나님께서 왜 은혜를 베풀겠는가? 인간의 방법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 은혜에서 이탈하면 나는 다시 내 방법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은혜이기 때문에 은혜에서 끊어진다.


  a.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율법에 의해 의롭게 되려함

  은혜에서 끊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율법에 의해 의롭게 되려고 사람은 노력하게 되어있다. 은혜가 없어지면 나는 다시 노력해야 된다. 하나님의 만일 해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해야 된다. 왜 율법주의가 일어나게 되는가?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물이 잘 흘러내려오면 무엇 때문에 돈을 들여 우물을 파겠는가? 물이 없으니까 땅을 판다. 지금 우리나라에 온천이 여러 군데 있다. 이 온천들은 천연적으로 솟아오르는 온천이 아니라 땅 밑을 깊이 파서 나온 온천들이다. 천연적으로 솟아오르는 온천이 몇 군데 있었는데 물이 너무 작아 파고 파서 지금은 천연적으로 나오는 온천이 없다. 옛날에 천연적으로 나오는 온천은 은혜이고, 지금 있는 온천은 억지로 퍼낸 것이므로 율법이다. 그런데 이것이 천연적으로 놔두면 몇 만년 몇 억년이 가도 계속 그대로 나오는데, 이렇게 땅을 파서 퍼내기 시작하면 점점 고갈되어 결국 온천이 없어진다고 한다. 일본은 노천 온천이기 때문에 몇 억년이 가도 계속 나온다. 우리나라는 온천이 부족하여 땅을 파기 시작했으므로 결국은 온천은 없어지고 만다. 지금은 온천을 허락할 때 25도만 되면 허가가 나온다고 하는데 진짜 온천이 아닌 셈이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온천이 없어진다는 것이 율법의 말로이다.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면 율법으로 돌아간다. 우리나라도 온천이 펑펑 솟아나는 것이 많았다면 굳이 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수안보에 가면 조금씩 나오고 백암에 가면 조금씩 나오니까 50m 파면 나왔는데 지금은 100m 파야 되고 또 150m 파야 되고 계속 깊이 뚫는 경쟁을 하고 있다.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의 말로이다. 옆집에서 파 버리면 우리 집은 나오지 않으므로 그보다 더 깊이 파야 되고, 그 집에서는 또다시 더 깊이 파야 된다. 율법주의가 바로 그런 것이다.


  b. 할례를 행함(참 할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힘임)

  그들은 결국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는데,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태인을 유태인으로 규정짓는 가장 확실한 것이다. 누가 유태인인가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으면 유태인이고, 할례를 받지 않으면 유태인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색출해낼 때 무엇으로 색출했겠는가? 바지를 벗겨서 확인했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태어난지 8일 만에 모두 할례를 받기 때문이다. 죽을 줄 알아도 한다. 그만큼 할례는 그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할례를 무엇이라고 했는가? 이것은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했다. 할례는 왜 하는가? 육적 몸을 벗기 위해서다. 아브라함이 언제 할례를 했는가? 이스마엘을 낳고 이삭을 낳기 직전에 할례를 행했다. 왜 이삭을 낳기 직전에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 이스마엘을 낳기까지는 모두 육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인 이삭이 올 때는 육을 벗어야 된다. 온 집안 식구에게 명하여 남자는 할례를 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난 후에 이삭이 왔다. 육적 몸을 벗는 것이 할례의 정신이다.

  참 할례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힘이다. 진짜 할례는 무엇인가? 진짜 육적 몸을 벗는 것은 어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것이 진짜로 할례를 받는 것이다.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고 했다. 할례를 받는다고 새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새 사람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유태인의 표시를 하는 것에는 관계가 있었지만 새 사람이 되는 것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새 사람이 되는 데는 오직 십자가만 필요하다.

  육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처리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도 처리가 불가능하다. 할례를 행한다고 해서 육이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팔을 자른다고 육이 없어지겠는가? 그것도 안 된다. 내 몸을 불사른다고 해도 육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는 우리의 육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

  율법과 복음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율법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할례는 결국 자기 육체를 잘라내는 것인데, 육체를 제거하기 위해서 한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고 사람 자체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율법의 효력이 그렇다. 아무리 좋은 율법이라도 이 이상의 효력을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은 진짜로 육을 처리한다. 사람의 육을 진짜로 처리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니까 복음과 율법은 비교가 안 된다. 율법은 단지 그림자였을 뿐이다. 율법은 단지 오실 자를 위해서 올 것을 위해서 미리 예표로 보여준 것이다. 은혜인 이삭이 올 때는 할례를 행해야 했던 것처럼 은혜이신 그리스도가 올 때는 육을 벗는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었더라면 할례는 여전히 지금도 할례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를 잘라내는 할례를 가지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을 것이니까 얼마나 가짜인가! 그러면 우리는 전부 가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날 이 문제는 왜 심각한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천당 가고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이 참 많다. 이런 사람들은 할례를 행했으면 하나님 백성이고, 할례를 하지 않았으면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진짜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어제 저녁에도 TV를 보니까 어떤 목사님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헷갈린다. 그 전날에도 평화방송을 보니까 어떤 신부님이 유머러스하게 충청도 사투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으시죠?’, ‘예’ 하니까 ‘그런데 지금 당장 오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한다. 천국에 다 가고 싶다는데 지금 오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신부님이 한 가지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무슨 약속인가 하면 나는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기 전에는 가지 않을 것이고, 오라 할 때는 안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하는 말이 천국은 상태라고 한다. 명백하게 말하면서 개신교 목사님은 왜 자꾸 천국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너무 답답하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으면 마치 할례를 해놓고 나는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자부심을 갖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 한심한 일이 세상에 많고, 그 한심한 일이 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공인되게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c. 육체로 완전해지려 함(자기 노력)

  유대교적인 율법주의에 미혹된 갈라디아 교회들이 바로 그런 교회들이었다. 율법은 쉽고 하나님의 은혜는 어려운 것 같다. 사실은 은혜는 받기 쉬운 것인데 내가 비워있기만 하면 쉬운 것인데 그것은 어렵고 율법은 쉽다. 그래서 보다 더 율법적인 교회가 잘 된다고 한다. 교회에서 뭘 해라고 하는 할 것이 많은 교회가 잘된다고 한다. 우리 교회가 잘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다른 교회가 우리 교회처럼 하면 교회가 안 된다. 하라는 것이 없으면 교회가 안 된다. 보다 더 보수적인 교회가 보다 더 잘된다. 우리나라 교인 분포를 보아도 보수적인 교단이 훨씬 숫자가 많다. 루터가 말한 대로 사람은 나면서부터 율법적이다. 율법은 자기가 지키면 될 것 같다. 어려울 것 같지만 새벽 기도를 하면 천당에 간다고 하면 쉽다.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다. 이것을 믿으면 고쳐진다고 하면 어려울 것 같은데 쉬운 것이다. 아무리 어렵다하더라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면 쉽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어렵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나님은 멀고 율법은 가깝다.

  갈라디아서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축소시키고 제거해야 함을 계시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리스도 아닌 것은 다 축소시켜야 되고 그리스도 아닌 것은 다 제거해야 된다. 어떤 영적인 것이나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직접 준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 너무 오래 머무르도록 하면 안 된다. 만나가 분명히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우리 집에 하루이상 머물면 안 된다. 썩어버린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도 인간 속에 와서 하루이상 머물면 썩어버린다. 왜? 인간화되어 버린다. 사람은 그렇게 하는 재주가 있다. 안정을 원하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자기 자리를 만든다. 새가 둥지를 틀듯이 어찌하든지 자기 자리를 만든다. 개가 자기 집에 들어가서 앉는 것을 보아도 지푸라기를 가득 갖다 주면 어떻게 부벼서라도 자기 자리를 만들어 앉는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안정을 원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원하는 것으로 자기 집을 지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리를 가지려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교리라는 것은 하나의 공식적인 공인된 이정표이다. 이정표를 가지면 가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정표를 주지 않는 분이다. 광야에서 40년을 갈 때 만일 이정표가 있었더라면 40년을 왜 가겠는가? 이정표가 없으니까 40년을 갔다. 왜 하나님은 이정표를 주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이정표대로 사람을 끌고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합하여 사람을 데리고 가기 때문에 자신과 합한 만큼만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정표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고 싶어서 주지 않겠는가? 그림을 그려놓고 그 길로 가라고 하면 쉬울 텐데 왜 주시지 않는가? 그것은 가는 길이 어디인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인데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이 동행해야 되는 길이다. 사람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고 싶을 때 가야 되고, 가기 싫을 때는 가지 않아야 된다. 그런데 이정표가 있으면 하나님도 이정표에 매여 그대로 가야 된다. 하나님 자기가 답답하니까 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정표에 매이기 싫으니까 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정표에 매일 수가 없는 분이다. 사람은 육신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일 수가 없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이것이 갈등이 된다. 우리는 자꾸 이정표를 원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정표가 없는 분이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10년을 기다리라고 했으면 쉽다. 120살 먹은 사람이 10년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언제 아들을 준다는 말이 없다. 아들을 줄 것이고 창대케 할 것이라고 했는데 언제 준다는 말이 없다. 기다린 것이 10년이 된 것이다. 사람이 10년을 기다리다 보면 누구든지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허탈하게 되었다. 언제 줄 것인가? 그때는 이미 포기가 되고 이삭이 올 때는 믿음도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어졌다. 처음에는 네 몸에서 낳을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는 믿었다고 한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이삭이 올 때는 그 믿음마저 없어졌던 것이다. 100살이 되어서는 그 믿음이 없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그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전혀 가능성이 없어졌다. 아브라함에게도 믿음이 없었고, 사라에게도 믿음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주었다. 아브라함의 계산과는 전혀 맞지 않는 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서 가장 어렵고도 쉬운 일이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얼마만큼 기다리는 것이냐,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자꾸 묻는다. 하나님은 얼마를 기다리라는 말이 없고 그냥 기다리라고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하면 그냥 간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것이지 다른 것이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더 율법적인 더 왕성한 이유는 그곳은 그림을 그려놓고 가니까 사람들이 쉽게 간다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어려울 것 같은데 그곳에 가면 할 일이 너무너무 많다. 새벽 기도도 해야 되지 구역 예배도 봐야 되지 철야 기도도 해야 되지 감사 기도도 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더 많이 간다. 왜? 쉽기 때문이다.

  어떤 영적인 것이나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오래도록 머물게 하면 안 된다. 율법도 신령한 것이지만 너무 오래 머물렀다. 이스라엘 백성 속에 너무 오래 머물다보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박을 오래오래 갖다 두면 속은 말라비틀어지고 껍데기만 남는다. 그때 타서 바가지를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안 된다. 그때는 쭈그러들어서 안 된다. 생생할 때 타서 속을 긁어내고 삶아서 말려야 바가지가 된다.

  그리스도만 영원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이외의 것은 설사 그것이 잠시 지나갈 수는 있지만 어디든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보수라고 하는 것이 딱한 것이다. 나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이지만 신앙에서는 혁명적이다. 우리는 혁명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왜? 하나님이 매일 다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보수이면 안 된다. 보수이면 망한다. 신앙은 보수를 하면 망한다. 정치는 날마다 혁명하면 망하는 것이다. 계속 혁명만 하면 나라는 망하므로 정치는 보수적이어야 된다. 그런 나라들이 지금 다 안정적이다. 일본 같이 내각책임제가 오래 가는 이유는 내각책임제는 보수적이다. 세상은 자꾸 뒤집기를 하면 안 되고 조금씩 고쳐 나가야지 한꺼번에 고치면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조금씩 따라가면 안 된다. 확 바꾸어야 된다. 요즘 확 갈아엎는다고 하는데 어디를 갈아엎는가? 얼굴을 갈아엎어 새 사람을 만든다. 여기를 고쳐놓았더니 저쪽이 이상하고 저쪽을 고쳐놓았더니 다른 쪽이 이상하니까 확 갈아엎는다고 한다.

  하나님에 관한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래 머물면 안 된다. 그리스도만 영원하다. 교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처음에는 다 이유가 있어 생기는데, 그것을 자꾸 보수하려고 한다. 1년만 보수해도 문제가 생기는데 500년을 보수해놓으면 무엇이 되겠는가? 500년을 보존하면 썩어도 보통 썩었겠는가? 살아있는 것을 500년 동안 놔둘 수가 없다. 우리는 신앙은 혁명적이어야 하고, 정치는 보수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만 영원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다른 것은 늘 갈려야 된다. 할례가 필요하면 할례를 행하지만 또 어느 날 할례를 하지 않으려면 하지 않아야 된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야지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돼가 되면 안 된다. 어떤 것도 절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갈 때 천막생활을 했는가? 그 천막생활을 기념하는 것이 장막절이다. 왜 천막을 쳐야 했던가? 하나님이 언제 가자고 할지 언제 머무를지를 모르는 것이다. 구름 기둥이 뜨면 떠야 되고, 구름 기둥이 앉으면 앉아야 된다. 열흘일지 한달일지 언제일지를 모른다. 만약 벽돌로 집을 지어놓았으면 어떻게 가겠는가? 천막을 쳤으니까 가자고 하면 후닥닥 갈 수 있다. 요즘 천막 중에 던지면 천막이 쳐지는 원터치 천막이 있다. 아마 애굽에 나올 때 그런 천막이 있었으면 잘 팔렸을 것이다. 뜯을 필요도 없이 뭉치면 되고 탁 던지면 천막이 되니까 하나님 따라 가기가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장막절을 지키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은 장막생활이다. 우리는 나그네라는 말이 그 말이다. 옛날에 어떤 분들이 신학토론을 하는 곳에 가보았는데, 한쪽은 진보적인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보수적인 교수가 나왔다. 보수적인 교수가 진보적인 교수에게 비웃기를 ‘교수님은 언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는 이 말을 하더니 언제는 저 말을 하고 뭘 주장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분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나그네 아닙니까?’ 하는 것이다. 그때는 나도 보수적인 사람이라 날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사람 말이 맞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것이 계속 새로운 것이 나온다. 이 사람은 첨단 신학만 보고 그것을 발표하는 사람이다. 연세대학교 교수인데 새로운 저널에서 새로운 사상이 나오면 그것을 이야기하고 또 다음에 다른 것이 나오면 그것을 이야기하니까 보수적인 사람이 볼 때는 자기 것은 없고 남의 것만 나열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진보적인 사람의 생각이 맞는 것이다.

  머물 것이 하나도 없다. 학문도 계속 발전하고 있으므로 머물 것이 없다. 지금 과학의 세계는 계속 발전하고 있으므로 조금만 머무르면 뒤지고 만다. 신학의 세계는 조금만 어떻게 하려면 이단 혹은 잘못된 신앙이라고 난리다. 왜? 보수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발전이 안 된다.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어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르겠다. 나는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인데, 진짜 과학을 아는 사람은 과학이 어디까지 갈지 더 놀란다고 한다. 그렇게 과학도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도 끊임없이 발전해야 되지 않겠는가! 어떻게 사람이 다 알았다고 하겠는가? 날마다 달라질 수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영이신 하나님을 교리로 규정해놓고 정의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날마다 새로워진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야 날마다 새로워지지 딱 고정되어 있는 분을 따라간다면 날마다 새로워질 수가 도저히 없다. 옛날 사람 하던 것을 다시 하고 다시 할 것이다.

  우리 대구교회는 늘 달라져야 된다. 30년 전보다 지금은 완전히 다르고 또 달라져야 한다. 30년 전에 우리 교회를 본 사람들은 그 교회는 이러이러한 교회라고 말하고 갔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20년 전에 본 사람은 또 그 사람대로 이러이러한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10년 전에 본 사람은 또 이러이러한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그때 그대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30년 전에서 20년 전으로 20년 전에서 10년 전으로 10년 전에서 5년 전으로 어제에서 오늘로 계속 달라져야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혁명적이어야 된다. 어제 생각했을지라도 오늘 버릴 수 있어야 되고, 어제 붙잡았던 것이라도 오늘 버려야 된다. 왜? 하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이다.


B. 주제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아까 말한 대로 악한 세대로부터의 우리를 구출하는 것이다.(갈1:4) 그 악한 세대는 무엇인가? 이 세대는 우리가 말하는 세상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고, 종교를 말한다. 왜냐하면 종교 안에는 그리스도 이외의 많은 것이 있다. 기독교를 생각해보더라도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이 너무 많고, 그 많은 것들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가려버리고 없다. 그리스도는 없는데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봉사가 있고 기도가 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이상하다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없다고 이상하다고 한다. 기도를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이상하다고 한다. 말을 하려면 ‘그리스도가 없네, 예수가 없네’라고 말해야 옳은 말이 되는데 기도를 별로 하지 않는다고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이지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어느 종교에나 다 있다. 사랑도 어느 종교에나 다 있다. 믿음도 어느 종교에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에 대한 믿음 이외의 모든 믿음은 성경이 말한 그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되물려주신 것, 구속하신 것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 이외의 다른 믿음이 더 많다. 믿고 성공하는 믿음이 더 많다. 믿고 나은 그 믿음이 더 많다. 믿고 잘되는 그 믿음이 더 많다. 믿고 형통하는 그 믿음이 더 많다. 그 믿음과는 관계가 없다. 물론 조금씩은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더 크기 때문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은 어디로 가고 없고 이제는 누가 믿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문제이다. 옛날에 내가 고민하던 것도 어떤 사람은 믿음이 좋아서 큰일을 하는데 나는 왜 그 믿음이 없을까하는 것이 고민이었다.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아무나 성공할 수 없다. 하면 된다는 그 믿음, 기도하고 나가면 된다는 그 믿음을 굳게 가진 사람들이 성공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다. 세상에서도 그 신념을 가진 사람이 성공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 신념을 가진 사람이 성공한다. 그 신념이 약한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 죽어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붙잡는 사람이 언젠가는 뭐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주영씨가 조선소를 만들면서 가졌던 신념, 종잇장 한 장 가지고 돈 빌리러 가는 그 신념, 배짱이 오늘날 저런 세계적인 조선소를 만들어놓았다. 무일푼으로 바닷가를 막아 그림을 그려 돈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니까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 정말 그 사람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것은 모두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이다. 다른 종교에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큰일을 이루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말미암아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대치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이다. 이 악한 세대라는 말이 이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했다. ‘악한’이라는 말은 ‘포네로스’라는 말인데, ‘수고하다’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수고한다는 것은 참 좋은 말인데, ‘힘들다, 고되다, 쓰라리다‘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참 어원이 이상하다. 세상에서는 참 좋은 말인데 수고하고 애쓰고 힘들고 이런 일들이 존경받을 만한 일인데 이 악하다는 말이 거기에서 나왔다. 왜 그렇겠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그는 수고하는 사람이 되었다. 네가 수고하여야 먹고 살 것이다. 이마에 땀이 흘러야 될 것이다. 이것은 전부 수고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담이 행한 모든 일들은 다 악한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수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은혜 안에서 동산에서 넉넉하게 살 사람인데, 그 은혜를 거절하고 나니까 수고해야 된다. 그러니까 수고하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1) 후견인 격인 율법으로부터 놓여나게 함(갈3:23)


  율법은 무엇인가? 마치 후견인 같다는 말을 했다. 후견인 같은 율법으로부터 놓여나게 해야 되는 것이다. 후견인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어렸을 때 상속을 받을 자격이 없을 때 재산을 관리하는 자격이 없을 때 뒤에서 그것을 맡아주는 사람이 후견인이다. 삼촌 같은 사람이 후견인이 되는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분명히 후견인이 필요하다. 다섯 살밖에 안 되는 아이가 아버지 재산을 수백억을 받았다면 그때는 후견이 필요하다. 후견인이 재산관리를 하다보니까 자꾸자꾸 욕심이 날 것이다. 그러면 이 상속자가 크는 것이 싫다. 상속자가 크면 자기는 물러나야 되니까 빨리 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 크니까 속으로 불안할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오랫동안 관리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을 것이다. 꼭 그와 같이 율법도 그렇다는 뜻이다. 여기서 벗어나면 죽어, 여기서 벗어나면 안 돼, 아직은 보호가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초창기에 시작할 때도 아직은 율법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사람이니까 전적으로 은혜만 가지고 안 돼, 전적으로 생명만 가지고 안 돼, 율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후견인들의 말이다. 20살이 되어 내가 관리해도 될 것 같은데 삼촌이 하는 말이 아직 안 돼,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네가 관리하다고 망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겁을 주어 1년을 참고 또 1년을 참다보면 잘못하면 평생을 간다. 

  “믿음이 오기 전에”, 이것은 무슨 믿음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구속의 은혜가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건져내어야 된다. 율법으로 사람을 묶고 있는 것이 악한 세대라고 한다.


2) 양 무리로부터 벗어나게 함


  양 무리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된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생명의 초장으로 인도하는 주님이 모습이 보인다.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 아이가 눈이 떠졌다. 사방에 다니면서 예수라는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했더니 그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그 보수적인 사람들이 유태인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누가 너의 아들의 눈을 뜨게 했느냐고 하니까 예수가 뜨게 했다고 하니까 예수가 누구길래 눈을 뜨게 하느냐, 죄인이 어떻게 눈을 뜨게 하느냐, 그가 제사장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눈을 뜨게 하느냐고 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 아들 눈을 뜨게 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했더니 이 놈이 죄악 중에 태어나 우리를 가르치려고 한다고 꾸짖었다. 그러면 본인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여 본인에게 물어보니 또 나는 누구인지 모르는데 내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분명하다고 한다. 요한복음 9장까지 보면 그 한사람을 이렇게 끌고 다닌다.

  요한복음 10장에 오면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한다. 내가 양의 문이니까 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들며나며 꿀을 먹는다. 거기서 보니까 분위기가 바꾸어져서 생명의 초장이다. 요즘 얼마나 울타리를 강하게 쳐놓았는지 매일 하는 소리가 잘못되면 안 된다거나 이단으로 가면 안 된다는 소리이다. 자기가 잘하면 될 일이다. 자기가 잘하면 왜 가겠는가? 그런데 왜 가지 말라는 소리만 계속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공포에 싸여있어 조금만 색다르면 불안하게 생각한다. 혹시 이단이 아닌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닌가, 재산 다 팔아서 바치라는 곳이 아닌가로 생각한다. 우리나라 이단하면 재산을 다 팔아 바치거나 사람을 잡아다가 때리거나 죽이는 곳이라는 관념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런 공포를 계속 주니까 사람들이 조금만 달라도 듣지 않으려고 한다. 죽을까봐 망할까봐 새로운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의문의 목장이다. 울타리를 쳐놓고 밖에는 푸른 풀이 나고 있는데 양들이 내다보니 새파랗게 풀이 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인이 옛날 여물만 말라빠진 풀만 갖다 주는 것이다. 나가면 고생하고 풀 뜯어먹으려면 고생하니까 걸어다닐 필요 없이 내가 주는 풀을 먹으라고 마른 풀을 계속 갖다 주고 있다. 양들은 푸른 초장에 가면 맛있는 것이 있는데 목이 마른 것이다. 이런 양들을 해방시켜야 된다. 생명의 초장으로 해방시켜야 된다. 모든 교회가 문을 열어놓고 생명의 초장으로 나가서 풀을 뜯게 해야 된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게 해야 된다.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서 사방에서 먹을 수가 있는데, 하도 막으니까 아예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이 악한 세대이므로 악한 세대로부터 구출해야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자기가 기껏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해놓았는데 와서 보니 가라지를 뿌려놓은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상당히 속으로 분노해서 쓴 것이다. 우리도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분이 나야 된다. 왜냐하면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다.


3) 종교적 전통에서 구출해야 함


  이 악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려고 자기 몸을 드리셨다. 자기 몸을 드리신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았는데 자꾸 다른 것을 찾는다. 전통을 만들고 다른 것을 만들어낸다.

  종교적인 전통에서 구출해 내야 한다. 사람에게 전통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이다. 쉬운 것이 아니라 아주 무서운 것이다. 아까 말한 대로 사람은 날 때부터 율법적이고 날 때부터 보수적이다. 그래서 전통이라는 것을 만들기를 좋아하고 한번 만들면 그 안에 안주하기를 좋아하고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종교적인 전통은 더 무서운 것이다. 세상의 다른 것들은 그런 대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기도 한데, 종교적인 전통이라는 것은 하나님 은혜를 말살시켜 버리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자기들의 전통과 율법 때문에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무나 그것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한 새 사람을 창조하기 위하여 계명의 율법을 폐하신 것이다. 새 사람을 창조하려고 하니까 이 계명의 율법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옛 사람은 누구인가? 계명의 율법에 갇혀있는 사람이 옛 사람이다. 왜 계명의 율법에 갇혀있는가? 육이기 때문에 갇혀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이 계명이 필요 없다. 그런데 육이기 때문에 이 계명이 필요하다. 계명의 율법을 폐하신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자기가 죽으심으로 폐했다.


2. 유일한 복음(다른 복음은 없음)(갈1:6~10)


  유일한 복음!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고 했다.


1)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복음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복음이다. 사실은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 전체가 은혜이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로 되었다. 내가 태어난 것도 은혜로 되었고 내가 양육 받은 것도 은혜로 되었고 전부 은혜로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은 묻혀버리고 없고, 율법만 나온다. 다시 말하면 은혜는 다 없어지고 자기의 능력, 자기의 힘만 남게 된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능력이 있어 태어났겠는가? 아무리 내가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나올 수는 없다. 내가 양육 받을 때 내 힘으로 양육되었는가? 내 힘으로 양육되었다. 내 힘으로 양육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전부 은혜이다.


  a. 양심시대에도 구원은 은혜로 받았음(창 3장~11장)

  성경 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양심시대를 보면 창세기 3장 이후부터 11장까지이다.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벨탑을 쌓을 때까지이다. 그 시대를 보면 언제 구원을 받았는가? 무엇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창6:8)고 한다. 이 ‘그러나’라는 말은 그 시대를 이야기한다. 그 시대가 전부 거역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고 한다. 구원을 받은 노아는 무엇으로 구원 받았는가? 은혜로 구원 받았다. 율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종교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


  b. 부르심의 시대에도 구원은 은혜로 받았음(창12장~50장)

  부르심의 시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4대를 가리켜말한다. 이때도 구원은 은혜로 받았다. 이것은 창세기 12장 이후이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받았다. 이것은 은혜로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땅과 자식이다. 하나님이 약속할 때 땅과 자식을 약속했다. 그런데 그 땅도 은혜로 받은 것이고, 자식도 은혜로 받은 것이지 자기의 노력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이삭은 가는 곳마다 창대했다고 한다. 그 창대한 것이 무엇 때문에 창대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창대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부 은혜이다.

  야곱이 형통했다. 아주 어려운 길을 갔지만 결국은 야곱은 형통하고 형통했다. 아주 까다롭고 교활한 외삼촌을 만났지만 그래도 거기서 자기 양떼를 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이고, 마지막에 죽을 자리에서 살려준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다. 야곱이 형통한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했다.

  요셉이 영광을 얻은 것도 역시 은혜로 얻은 것이다. 부르심의 시대에도 구원은 은혜로 받았다.

     

  c. 율법시대에도 구원은 은혜로 받았음(출애굽기~말라기)

  율법시대는 출애굽 이후부터 말라기까지이다. 이것도 역시 구원은 은혜로 받았다. 유월절로 인해서 출애굽을 했다. 이것은 은혜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에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알고 보면 우리 능력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해방되었다. 그러면 감사한 백성이 되어야 되는데 아무도 감사하는 사람이 없다. 그때 당시에는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 세대 사람들은 왜 우리를 해방시켰는가, 왜 미국사람들이 와서 분단을 시켰느냐고 생각한다. 우리 힘으로 해방이 되는가? 안 된다. 독립군이 상해에 있다고 해방이 되는가? 절대로 안 된다. 만일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아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연합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하게 은혜로 해방되었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해방된 백성이므로 감사해야 된다. 누가 애국가(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잘 지어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나도 생각할 때 아주 위태로울 때마다 우리나라가 도우심이 있는 것 같다. 그때 조금 더 갔다면 언어가 다 없어졌을 것이다. 우리 때는 학교에서 한국말을 못하게 했다. 그렇게 지나서 지금까지 몇 십년을 지나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다 일본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큼해서 36년간이 길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긴 것도 아니고 그 정도에서 맛만 보고 해방이 되었다. 필리핀은 80년, 인도는 300년을 식민지 생활을 하였다. 그 정도 되니까 그 사람들은 근성이 식민지 사람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때 자기들 힘으로 되었는가? 아니다. 전적으로 은혜로 되었다. 홍해를 건널 때 자기들 힘으로 건넜는가? 전적으로 은혜로 건넜다. 만나와 생수를 먹을 때 자기들이 노력하여 농사지어 먹었는가? 전적으로 은혜로 되었다. 구원을 받을 때는 전부 은혜로 되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시점에 오면 항상 은혜밖에 없다.


  d. 은혜의 시대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왔음

  이제 은혜의 시대가 왔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왔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고, 17절에 보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고 한다. 은혜의 시대! 진짜 은혜, 은혜 자체가 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 자체가 은혜였다. 왜? 우리를 구속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되물려주었다. 예수 안에 와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괴물에서 인간이 되었다. 예수 안에 와야 진짜 인간이 된다. 예수 바깥은 괴물이다. 왜냐하면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 온갖 감투를 다 써서 이상하게 꾸며서 전혀 죽지 않는 불사조처럼 만들어놓았다. 이것이 괴물이다.

  예수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십자가에서 되찾고 보니까 우리는 그냥 피조물인 것이다. 우리 정체가 바로 그것이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이방인도 없고 유태인도 없다. 그것을 가지고 유태인 이방인을 갈라놓고, 높고 낮음을 갈라놓고 온갖 것을 다 갈라놓았다. 이것이 괴물들이다. 진짜로 예수 안에 오니까 진짜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가 사람된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몰랐더라면 우리는 괴물이 괴물인지도 모르고 살 뻔했다. 괴물이 괴물인줄 알고 있는 괴물은 아무도 없다. 도깨비가 자기가 도깨비인줄 알고 있는 도깨비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괴물이면서도 괴물인줄 모르고 살았다. 아주 으스대고 잘난 척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오심으로 사람이 되었다. 은혜가 다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된 이것이 은혜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 받아도 은혜이다. 다른 사람은 암에 걸렸다가 살아났으니까 얼마나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될까, 나는 왜 이렇게 은혜가 없는가가 아니고 암은 고쳐져도 또 죽는다.

  사람이 된 것이 은혜이다. 내 정체성을 알게 된 이것이 은혜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이것이 은혜이다. 이것을 그냥 했는가?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은혜이다.

  또 이 자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올 수 있는 통로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은혜는 구약시대의 모든 은혜를 완성하며 모든 것을 대치함


  그리스도의 은혜는 구약시대의 모든 은혜를 완성하고, 모든 것을 대치하는 것이다. 양심시대의 구원도 부르심 시대의 구원도 율법 시대의 구원도 다 은혜였다. 그렇지만 이 은혜들은 어느 면이었지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홍해에서 나왔지만 광야에서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고, 노아 홍수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 사람들이 바벨탑을 또 쌓게 되었다. 이런 것이므로 어느 면은 은혜이지만 온전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사람을 사람되게 한 은혜는 아니었다. 종된 자리에서 해방시켜 준 것도 되고 죽을 자리에서 살려준 것도 되기는 되었지만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왜 모든 은혜를 완성하는 것인가? 우리를 사람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은혜 중의 은혜이다. 아무리 내가 모든 것을 다 받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아닌 상태가 되면 어찌 하겠는가. 내가 홍해에서도 살아남고 온갖 것에서 다 구원을 받아 구원의 훈장이 주렁주렁 달렸다 하더라도 내가 사람이 아니면 어찌 하겠는가. 말(馬)에도 훈장을 달아놓은 말이 있다고 하는데 어차피 말은 말이다. 우리는 아무 훈장이 없어도 우리가 사람이 되었다. 인간이 되었다. 옛날에 인간이 되라, 인간답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말하는 사람도 그렇고 듣는 사람도 그렇고 도대체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이 은혜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 율법이나 의식이나 전통이나 이런 것들은 전부 사람되게 하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 수 있는 통로였다. 네가 이렇게 이렇게 행하면 이렇게 이렇게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율법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전달될 수가 있었다. 그것이 은혜를 대치하고 있었다. 그때는 율법이 아니면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 길이 없었다. 종교적인 의식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였다. 전통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결국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되지 않으면 다 헛일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는 구약의 모든 은혜를 완성하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은혜라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은혜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는 모든 은혜를 다 완성하는 것이다. 어머니에서 태어난 것, 양육 받은 것, 교육 받은 것은 다 은혜이다. 이 모든 은혜가 만일 사람이 안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사람이 되는 이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고, 이것은 비교할 수 있는 은혜가 아니고 이 은혜 안에 모든 은혜가 흡수되는 것이다. 다른 은혜는 없어져버린다. 태양이 비치니까 촛불이 어디에 가고 없다. 그래서 촛불시위를 밤에 한다. 햇빛 쨍쨍한 낮에 하면 안 된다. 태양에 다 흡수되어버리므로 사람들이 태양을 바라보지 촛불을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촛불들, 우리 인생의 모든 촛불들, 그 어두운 것을 밝혀주었던 촛불들은 태양이 비칠 때 없어져버린다. 사라져버리고 만다. 우리 집에 태양열로 발전하는 조그마한 것이 있는데, 낮에는 아무것도 없고 어두워지면 불이 밝아진다. 그것은 어둠이 올 때만 필요한 것이지 낮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율법이나 의식이나 전통이나 종교와 같은 이 모든 것들은 태양이 올 때까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필요했던 것이지 그리스도가 오면 다 흡수되어 없어져버린다. 모든 은혜는 은혜로 다 들어가버리고 참된 은혜로 들어가버린다. 할례를 행하는 것은 육을 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니까 할례가 흡수되고 없어져버렸다. 그러니까 할례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두 할례를 해야 된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었으면 계속 물속에 담궈서 죽기 직전까지 넣었다가 꺼내야 된다. 옛날에 침례식을 해보니까 물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래서 누르면 안 되니까 안고 확 집어넣는 것이다. 나는 불쌍해서 그렇게도 못하고 앉으라고 하여 잠깐 할 텐데 무서워서 못 들어간다. 물에 잠깐 담구는 것도 힘든데 생사람 잡는 것이 쉽겠는가. 참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것들이 다 어디에서 없어졌는가? 십자가 안에서 저절로 다 없어졌다. 할례도 없어지고 침례도 없어지고 다 없어졌다. 왜냐하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함축되어 버리고 나니까 그런 것들은 촛불이 되고 말았다. 지금 태양이 빛나는 이 날에 와서도 다른 것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좋은 율법, 좋은 의식, 좋은 전통을 왜 반대하는가? 태양이 비쳤는데도 그것을 잡고 있으면 태양을 무시하는 것이다. 은혜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참 은혜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찾고 있으면 참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다. 아들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거부하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모독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구속에 대한 믿음도,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믿음의 종교라고 하고 불교는 자력 종교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믿음의 종교가 빗나가서 신념의 종교가 되고 말았다. 신념의 종교를 벗어버리고 구속에 대한 믿음, 나를 나되게 한 그 구속에 대한 믿음, 그 믿음 이외의 다른 믿음들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그 믿음들을 강조하다 보면 구속에 대한 믿음은 간 곳이 없고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이 더 많다. 교회들을 가보면 다른 믿음에 취해서 ‘될 줄로 믿습니다’하면 ‘아멘’한다. 오직 유일한 믿음만 있어야 되는데 믿음이라는 것이 너무 많다. 너무 많다보니까 진짜 믿음이 가려져 버리고 없다.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는 길 이외의 다른 복음은 없다. 인간이 인간되는 다른 길은 없다. 외우고 암송하고 부르짖고 기도하고 별 것을 다해도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길을 빗겨서 가는 것은 우회 도로이다. 우회하더라도 다시 오면 되는데 돌아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길이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은즉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는 이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절대로 없다. 이것은 너무너무 확실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단인가? 참 이상한 일이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데,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다는데 이것이 왜 이단인가? “다른 복음은 없나니”, 절대로 다른 복음은 없다. 유일하게 이 한 복음밖에 없다.

  우리를 사람되게 하는 복음! 이것만이 유일한 복음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혼란한 세대에서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유일한 복음 안으로 구원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많은 복음들 속에서 참된 복음 안으로 인도해주시고, 많은 믿음들 속에서 참된 믿음 안으로 인도해주시고, 많은 은혜들 안에서 참된 은혜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유일한 복음! 다른 복음이 없는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을 이름이 없는 이 유일한 길로 우리를 안내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