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복음 .
갈3:13-14, 98.102.404장.A
모든 인간에게 종교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을 행17:22절에서는 종교성이라고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에게 나타난 현상들은 자기 나름대로 신(神)를 찾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찾는 신은 자신의 머리로 고안해 낸 신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生命)을 가져다주는 참 신(神)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제외한 나머지 신(神)들은 다 거짓 신(神)이요, 우상(偶像)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들에게 계시되었습니까? 또한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였습니까? 하나님의 계시와 요구의 핵심(核心)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啓示)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하나님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떠한 계시도 은총도 주신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구약과 신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과 그 믿음의 고백적(告白的)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로나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수준에 이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자신들의 노력(努力)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들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로 이런 점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과 너 사이에 오직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구원에 있어서 중보자요, 기도에 있어서 그분은 중보기도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변호사 역할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너 사이에 나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자리에 앉은 이단적인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구원을 받았고 어떤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묵상하는 그런 계기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1.복음의 기원-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갈라디아 초반부는 두 이론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복음을 설명하는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두 이론의 기원이 ①사람으로부터 나왔는가? 아니면, ②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는가? 이 두 기원에 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1) 그 하나님의 복음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사도권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그 복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1:8절에 보시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강조합니다. 저주와 구원의 기준은 우리가 전한 복음이 기준입니다.
저주와 구원의 판별 기준이 자신이 증거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장 네가 뭔데라고 따질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때 다른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말합니다.(1:10).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착각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다 하나님이 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려면 내가 원하는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십니까?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의 기원이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담대히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1:12절 말씀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르친 내용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증거하고 있는 복음의 권위는 그 복음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말씀이라는데 있습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까? 복음을 증거할 때 혹은 설교를 할 때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까?
거기에 생명이 있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복음을 증거 하기보다는 입담 좋은 설교자가 하는 강연처럼 그런 강연이 설교를 대치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과연 하나님의 복음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고 반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福音)을 증거(證據) 하면 성도(聖徒)들이 원치 아니하기 때문에 온갖 세상 이야기로 설교를 진행한다고 하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고백했습니다.
2.갈라디아서에 등장한 복음의 적대자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설득하고 유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그런 거짓 선생들로부터 갈라디아 교회를 보호하고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거짓 복음,다른 복음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 거짓 선지자들이 누구이며 어떤 다른 복음을 소개하고 있는지 그들의 주장과 정체에 관해서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는 구체적으로 그 적대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지 않숩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런 적대자들을 논박하고,변증하는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면 그 적대자들이 과연 어떤 자들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거짓 선생들로부터 갈라디아 성도들을 보호하려는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과 그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율법과 유대교의 의식(예식)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①갈2:16절에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②갈3:2절에 성령 받음은 율법의 행위냐 믿음으로냐. ③ 갈4:21절에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④갈5:4절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 ⑤갈5:2절에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무익함.
⑥갈6:12-13절에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이상과 같은 말씀으로 보아 복음의 적대자들이란 유대인들이 율법과 그들의 의식을 강요하고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는 자들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무조건 율법과 복음은 다르다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들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 사실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율법의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는 말씀으로(눅24:44)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대인들이 그런 율법을 왜곡했습니다. 그 율법은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율법을 지키고 그 율법에서 말씀한바 할례를 행해야 하나님의 택함 받은 구원의 백성들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이 두 조건에 충실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정죄합니다. 저주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갈1: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둘째, 바울의 사도직이 무효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1-2장에서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이 바울이 증거한 복음인 오직 믿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허물기 위하여 바울의 사도직을 걸고 넘어집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이 증거(證據)하고 있는 복음(福音)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셋째, 세상의 초등 학문으로 유도하려는 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여 진노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다시 세상의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킴으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여기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유대인들의 월력에 의한 절기를 말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갈4:3절에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갈4:9절에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3.바울의 변증과 복음 증거입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에 대한 변증을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거짓 진리, 다른 복음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과 사도직의 출처입니다.
바울은 유대주의 자들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개인적인 도전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 총회(總會)의 지도자(指導者)들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한 거짓 복음은 바른 복음에 대한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오직 믿음 만이 아닌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 그 자체로는 구원 얻는데 불충족하다고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갈2:21절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합니다.
4.구약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등장한 복음의 적대자들은 율법주의자, 혹은 유대 주의자들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말씀한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구원받은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의 행위를 강요(强要)했습니다.
그때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역행하여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3: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장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더욱 강한 어조로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3:2,5)라고 하면서 반문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육체로 마치는 의미 없는 일입니다.(3:3절) 그러면서 구약의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3:6)고 합니다.
이제 누구든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 있는 자는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녀인줄을 알아야 합니다.(3:7) 이제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임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행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인한 저주를 친히 짊어지셔서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 받게 하셨습니다.(3:13-14). 이제 우리들에게는 율법의 저주 대신 믿는 자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복과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고 했습니다. 이 같은 약속의 복은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4:6)고 했습니다.
5.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 자유인입니다. 5: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저주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약속을 따라 났기에 저주의 정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근원을 두게 됩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우리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제 육체의 소욕(마음)을 멀리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바로 투쟁의 모습입니다. 5: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5:24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聖徒)들에게 자랑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십자가(十字架)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世上)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고 했습니다.
6.말씀을 정리합니다. 복음의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보는 그런 세상인 것 같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복음의 효력에 우리들에게 미치는 결과에 관해서 이야기 하기보다 빈 껍데기에 관심을 더 많이 갖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외쳐지고 있습니까?
그 복음이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 사는 그런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말입니다. 우리들은 영광의 십자가만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율법주의자들의 구원관을 갖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신앙의 관점에서 복음을 훼손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발견됩니다.
왜 그리 비결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비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연결시키면 좋으련만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허영심으로 연결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복음을 알고 믿고 있습니까?
그 복음(福音)의 실천자(實踐者)입니까? 아니면 그 복음을 헛되게 하는 자들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영접하고 바로 전하여서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되어서 믿는 자들로 이 세상이 가득차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3:13-14, 98.102.404장.A
모든 인간에게 종교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을 행17:22절에서는 종교성이라고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에게 나타난 현상들은 자기 나름대로 신(神)를 찾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찾는 신은 자신의 머리로 고안해 낸 신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生命)을 가져다주는 참 신(神)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제외한 나머지 신(神)들은 다 거짓 신(神)이요, 우상(偶像)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들에게 계시되었습니까? 또한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였습니까? 하나님의 계시와 요구의 핵심(核心)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啓示)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하나님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떠한 계시도 은총도 주신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구약과 신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과 그 믿음의 고백적(告白的)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로나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수준에 이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자신들의 노력(努力)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들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로 이런 점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과 너 사이에 오직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구원에 있어서 중보자요, 기도에 있어서 그분은 중보기도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변호사 역할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너 사이에 나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자리에 앉은 이단적인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구원을 받았고 어떤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묵상하는 그런 계기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1.복음의 기원-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갈라디아 초반부는 두 이론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복음을 설명하는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두 이론의 기원이 ①사람으로부터 나왔는가? 아니면, ②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는가? 이 두 기원에 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1) 그 하나님의 복음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사도권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그 복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1:8절에 보시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강조합니다. 저주와 구원의 기준은 우리가 전한 복음이 기준입니다.
저주와 구원의 판별 기준이 자신이 증거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장 네가 뭔데라고 따질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때 다른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말합니다.(1:10).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착각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다 하나님이 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려면 내가 원하는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십니까?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의 기원이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담대히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1:12절 말씀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르친 내용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증거하고 있는 복음의 권위는 그 복음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말씀이라는데 있습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까? 복음을 증거할 때 혹은 설교를 할 때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까?
거기에 생명이 있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복음을 증거 하기보다는 입담 좋은 설교자가 하는 강연처럼 그런 강연이 설교를 대치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과연 하나님의 복음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고 반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福音)을 증거(證據) 하면 성도(聖徒)들이 원치 아니하기 때문에 온갖 세상 이야기로 설교를 진행한다고 하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고백했습니다.
2.갈라디아서에 등장한 복음의 적대자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설득하고 유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그런 거짓 선생들로부터 갈라디아 교회를 보호하고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거짓 복음,다른 복음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 거짓 선지자들이 누구이며 어떤 다른 복음을 소개하고 있는지 그들의 주장과 정체에 관해서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는 구체적으로 그 적대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지 않숩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런 적대자들을 논박하고,변증하는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면 그 적대자들이 과연 어떤 자들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거짓 선생들로부터 갈라디아 성도들을 보호하려는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과 그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율법과 유대교의 의식(예식)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①갈2:16절에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②갈3:2절에 성령 받음은 율법의 행위냐 믿음으로냐. ③ 갈4:21절에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④갈5:4절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 ⑤갈5:2절에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무익함.
⑥갈6:12-13절에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이상과 같은 말씀으로 보아 복음의 적대자들이란 유대인들이 율법과 그들의 의식을 강요하고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는 자들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무조건 율법과 복음은 다르다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들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 사실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율법의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는 말씀으로(눅24:44)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대인들이 그런 율법을 왜곡했습니다. 그 율법은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율법을 지키고 그 율법에서 말씀한바 할례를 행해야 하나님의 택함 받은 구원의 백성들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이 두 조건에 충실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정죄합니다. 저주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갈1: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둘째, 바울의 사도직이 무효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1-2장에서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이 바울이 증거한 복음인 오직 믿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허물기 위하여 바울의 사도직을 걸고 넘어집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이 증거(證據)하고 있는 복음(福音)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셋째, 세상의 초등 학문으로 유도하려는 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여 진노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다시 세상의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킴으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여기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유대인들의 월력에 의한 절기를 말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갈4:3절에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갈4:9절에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3.바울의 변증과 복음 증거입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에 대한 변증을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거짓 진리, 다른 복음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과 사도직의 출처입니다.
바울은 유대주의 자들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개인적인 도전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 총회(總會)의 지도자(指導者)들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한 거짓 복음은 바른 복음에 대한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오직 믿음 만이 아닌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 그 자체로는 구원 얻는데 불충족하다고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갈2:21절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합니다.
4.구약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등장한 복음의 적대자들은 율법주의자, 혹은 유대 주의자들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말씀한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구원받은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의 행위를 강요(强要)했습니다.
그때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역행하여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3: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장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더욱 강한 어조로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3:2,5)라고 하면서 반문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육체로 마치는 의미 없는 일입니다.(3:3절) 그러면서 구약의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3:6)고 합니다.
이제 누구든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 있는 자는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녀인줄을 알아야 합니다.(3:7) 이제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임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행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인한 저주를 친히 짊어지셔서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 받게 하셨습니다.(3:13-14). 이제 우리들에게는 율법의 저주 대신 믿는 자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복과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고 했습니다. 이 같은 약속의 복은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4:6)고 했습니다.
5.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 자유인입니다. 5: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저주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약속을 따라 났기에 저주의 정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근원을 두게 됩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우리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제 육체의 소욕(마음)을 멀리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바로 투쟁의 모습입니다. 5: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5:24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聖徒)들에게 자랑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십자가(十字架)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世上)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고 했습니다.
6.말씀을 정리합니다. 복음의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보는 그런 세상인 것 같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복음의 효력에 우리들에게 미치는 결과에 관해서 이야기 하기보다 빈 껍데기에 관심을 더 많이 갖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외쳐지고 있습니까?
그 복음이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 사는 그런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말입니다. 우리들은 영광의 십자가만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율법주의자들의 구원관을 갖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신앙의 관점에서 복음을 훼손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발견됩니다.
왜 그리 비결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비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연결시키면 좋으련만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허영심으로 연결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복음을 알고 믿고 있습니까?
그 복음(福音)의 실천자(實踐者)입니까? 아니면 그 복음을 헛되게 하는 자들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영접하고 바로 전하여서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되어서 믿는 자들로 이 세상이 가득차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주는 포도나무 나는 가지 글쓴이 : 이종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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