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스크랩]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우리의 문제

에반젤(복음) 2019. 12. 12. 20:21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우리의 문제

[서평] 티모시 켈러 <갈라디아서 : 복음을 만나다>

12월이다. 교회에서 다음 해 사역 헌신자를 찾는다. 일할 곳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 새벽 6시에 고용 시장에 나와 자신을 데려갈 주인을 기다리는 일꾼이 적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품꾼들은 너무나 일하고 싶어 새벽 6시뿐만 아니라 11시(저녁 5시)까지도 기다렸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는 마음으로. 성도가 많이 모이는 대형 교회에서는 다를지 모르겠지만(강원도 삼척에 있는 교회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왜 그럴까?

당연한 질문을 해 보자. 교회에서 헌신해야 할까? 성령의 열매를 읊조리며 참고, 웃고, 모임에 나가며, 충성해야 할까?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왜 해야 하나? 복음이 나를 이끈다면 헌신으로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헌신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 일이라서 할 수 없이 하진 않을 것이다.

'형편상 하지 못하지만' 찜찜해하고 죄책감 갖지도 않을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이다. 형편 때문에, 체면 때문에, 지금까지 해 왔으니 등등 이런 이유는 하나님이 일꾼을 부르는 기준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이유로 일할 때가 많다. 지금까지 열심히 헌신했는데 지금 안 한다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일하는 사람도 있다. 신앙생활 잘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화를 내실 테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여럿 만났다.

우리가 헌신하는 진짜 이유는 무얼까? 주의 궁정에서 문지기를 서더라도 입에 웃음이 가득한 이유는 복음 때문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뜻에 따라 은혜로 나를 구원하셨다는 생명 같은 진리인 복음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갈라디아 성도 역시 같은 문제에 빠졌다. 열심히 봉사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하고,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를 썼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더 시간을 내서, 더,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으니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정도로 일해야 수준 높은 제자 아닌가? 이런 식이면 눈에 보이는 헌신과 충성이 믿음 수준을 결정한다.

'누가 더 은혜를 받았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누가 더 헌신하는지 보면 된다. 이런 교회에서는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한다(갈 5:25 참고). 저자는 존 스토트의 해설을 참고해서 '격동'을 우월감으로, '투기'는 열등감으로 설명한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자아에 집중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해 주신 복음이 이런 걸까?



▲ <갈라디아서 : 복음을 만나다> / 티모시 켈러 지음 / 김성웅, 이미정 옮김 / 베가북스 펴냄 / 428면 / 1만 6000원

티머시 켈러는 이렇게 전한다

바울은 이런 식의 생각에 대해 화를 낸다. 갈라디아 교회를 덮친 '신자다운 삶에 대한 오해'를 두고 볼 수 없어서 분노를 폭발시킨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가장 화를 내면서 쓴 편지이다. 자기 손으로 직접 글씨를 크게 써서 보냈다(갈 6:11). 바울은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으니(갈 6:17)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까지 말한다. 이단의 공격이나 바울 자신의 사도권을 문제 삼는 교회에 보낸 편지보다 더 강력하게 말한다. 좋은 것을 지나치게 욕망하는 태도는 복음을 변질시킨다. 바울은 복음을 열심과 바꾸는 것이 죄악에 발을 담그는 것보다 위험하다고 보았다.

갈라디아서 강해는 '더 열심히'를 요구하는 율법주의에 대해 복음을 다시 설명한다. 갈라디아서 강해를 쓴 다른 저자들도 이걸 말한다. 티머시 켈러 역시 존 스토트를 비롯한 다른 분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인용하는데 논점이 같다. 그렇다면 티머시 켈러가 쓴 갈라디아서 강해는 누가 읽어야 할까? 뭐가 다를까?

첫째, 일단 쉽다. 귀에 쏙쏙 들어온다. 내가 읽은 강해서들은 성경 원어 해설과 딱딱한 신학 지식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았다. 신학(졸업)생에겐 좋겠지만 나 같은 평신도가 읽기엔 턱턱 막히는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은 시리즈 서문에도 쓰인 것처럼 쉽게 풀어 썼다. 어려운 낱말은 책 뒤의 단어 해설집에서 설명했다. 배경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서 바울이 말하는 바가 귀에 잘 들어온다. 한 예로, 디도가 할례받지 않은 일을 왜 언급했는지 알려줘서,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다.

글씨 크기와 편집 형태도 보기 편하다. 갈라디아서를 본문 순서에 따라 13부분으로 나눠서 차례대로 설명한다. 각 부분은 본문을 충실하게 해설한 앞부분과,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바꾼 '더 나아가'라는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 해설은 당시 배경에서 어떤 뜻인지 말할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앞뒤 내용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성경에서 같은 뜻이나 같은 인물을 다룬 이야기를 연결해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둘째, 은혜를 계속 말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율법주의에 빠진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엔 복음이 곧 하나님 은혜라는 깨달음이 가득했다. "복음은 그렇지 않은데, 제발… 복음을 이렇게 바꾸다니, 도대체…" 하는 바울의 마음이 저자가 쓴 글에서도 느껴진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저자 역시 같은 마음으로 안타까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잘못된 마음에서 나온 헌신과 열심에 허덕이는 성도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회복을 소망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갈라디아서'라는 책을 해설하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이 주는 진리 안에서 살라고 외치는 마음이 전해져서 좋았다. 나 역시 평소에 '노력의 결과가 곧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수준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서 이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서평에 쓰기에 적당하지 않은 말이지만 줄을 좍좍 그으며 감탄하며 읽었기에 이렇게 표현한다.

셋째, 본문을 충분히 설명하면서도 줄곧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해석에서 적용으로 넘어간다. 박사·목사·저자인 분 중에 일부는 결론을 먼저 주장하고 결론에 맞게 본문을 맞춰서 설명한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무리하게 예화를 넣거나 비약하기도 한다. 저자는 차근차근 이치에 맞게 설명하고 계속 '하나님 은혜, 복음'으로 돌아간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갈 2:20上)"를 감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문제에 빠진 갈라디아 교회에 이 말씀이 왜 복음인지 설명한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말씀이라고 알려 준다.

새롭게 만나는 복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인정하시는 삶의 방식 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그분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분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해서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이지,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다. '노력해서 구원을 얻어라'는 교리를 가진 어떤 세계관과 종교로도 자유와 공동체를 향한 갈망을 결코 채울 수 없다.

우리가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속하게 된 자유를 만끽하고, 국경이나 문화적 경계에 상관없이 하나 됨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다. 복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이기 전에 역사적인 사건들에 관한 선언이다. 우리에게 내려진 지시이기에 앞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이 행해졌다는 선포이다.

그럼 율법은 왜 주어졌을까? 율법은 구원이 아니라, 죄에 관해 알려 주려고 제공된 것이다. 우리가 불법자임을 드러내고, 우리가 완전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결국 우리에게서 해결책이 나올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 바로 율법의 주요 기능이다. 율법은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필요함을 알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약속에 반대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약속을 지지한다. 율법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여 준다.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가치와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구원의 체계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한다. 복음은 우리가 더 이상 행위로 구원받기 위해서나 거절의 두려움 때문에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될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에서는 벗어났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세 문단은 모두 본문에 있는 내용을 골라 연결해서 썼다. 저자는 줄곧 이렇게 율법과 복음, 복음과 은혜, 복음 안에서 하나님 자녀 됨의 의미, 복음과 자유․성품․관계를 말한다. 책을 읽으며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서 기쁘고 자유로움을 느꼈다. 동시에 율법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저자가 잘 설명했기 때문이다.

꼭 읽어야 하는 사람들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깝지만' 헌금하는 지체가 있다. '하나님 그렇게 째째한 분 아니라고' 말해 줬다. 헌금 안 해도 되지만, 지체의 믿음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건 알아야 한다. 십일조와 헌금은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고백의 표현, 내가 살아가며 누리는 것들이 주님 은혜라는 감사의 표현이다. 십일조와 헌금을 짐으로 여겨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읽어 보시라!

주일을 지키기 위해 한 번도 가족여행을 가지 못한 지체도 있다. 어느날 목사님이 주일을 포함해서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걸 보면서 마음이 무너졌다. 안 믿는 가족과 싸우며 눈치 보며 주일을 지켰는데 여행 가면서 성지순례라는 이름을 붙여 놀러가는 걸 보고 화가 났다고 한다. 우리가 밟는 땅 어느 곳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족이 주일에 여행을 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분도 읽어 보시라.

나를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감격과 믿음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날마다 살아간다면 갈라디아서는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계시록에서 칭찬받은 두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되었을 것이다. 복음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오해해서 잘못 적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당연히 복음으로 풀어야 한다. 티머시 켈러는 이걸 잘 설명해 준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다. 맞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그러나 믿음을 증명하려고 행동을 조장할 수는 없다. 이게 바로 갈라디아 교회가 빠진 함정이다.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나지만 행동으로 믿음을 판단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우린 주로 행동을 본다. 유교 문화의 옷을 입고 사는 우린 겉모습에 지나치게 기댄다. 그래서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하려고 발버둥친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모습을 복음이 아니라고 한다. 행동을 지나치게 내세우지도, 행동을 무시하지도 않고 둘 사이에 난 길을 균형 있게 걸으려면 역시 복음뿐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의무와 두려움, 거절감에 힘들어하는 지체에게 권한다. 복음의 능력을 잃고 일과 인간관계에 허덕이는 분에게도 권한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혹시 자유가 지나쳐 방종으로 빠진 지체에게도 권할 만한 책이다. 저자는 갈라디아서를 다이너마이트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러 누리게 하신 복된 삶, 즉 깊은 존재감과 안전과 만족의 전제 조건이 되는 기쁨과 자유가 폭발한다고 말한다. 읽는 분들이 이걸 맛보면 좋겠다.

"우리는 스스로 구세주가 되고자 안달한다. 우리 마음은 스스로를 위한 영광을 만들어 낸다. 종교적이건(이 규칙들을 지키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다), 세속적이건(이것들을 붙잡으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자기 구원의 메시지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다. (29쪽)

권일한 / 강원도 시골에서 20년째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과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재미로 살아가는 책벌레. 아이들이 써 준 글 덕분에 <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책 이야기>를 썼다. 월간 <좋은교사>에 책 소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