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위선적 영성에 빠진 교회를 향한 사도의 권면
(권연경 교수,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갈라디아서에 대한 교회의 침묵)
많은 사람들이 의외라 느끼겠지만, 갈라디아서는 인기가 없는, 무관심의 그늘에 있는 책 중 하나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종교개혁의 선봉장 루터에겐 갈라디아서가 자기 아내처럼 소중한 책이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정수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학자들 역시 갈라디아서를 좋아한다. 비교적 짧아 건드리기가 수월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논쟁할 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건 학자들끼리의 게임이다. 신학이라는 별세계의 문을 나서서, 일상과 교회라는 현실로 돌아오면 갈라디아서의 용도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사용되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적용할 일이 없는 갈라디아서 메시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갈라디아서가 별로 인기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갈라디아서의 메시지가 별 필요가 없어서일 가능성이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라는 꾸지람이 필요한 경우가 별로 없다. 내가 “사고를 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내 행위를 보지 마옵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하고 기도할 일은 있겠지만, 바울처럼 이 구호로 다른 사람들을 야단칠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율법을 행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라는 바울의 질책을 우리 삶에 적용하려면 우선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겠다는 “빗나간”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서 그런 “사고”(?)를 치는 사람은 없다. 목회자나 회중을 막론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많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갈라디아서의 상황과는 반대다. 실제 우리가 고민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믿는다고 큰소리는 치지만 뒤로 호박씨를 까먹는” 경우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위 믿음에 행위가 따르지 못하는 “야고보적” 문제이지, 믿음이 무색할 정도로 행위에 집착하는 “바울적”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율법주의적” 태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경험해본 율법주의란, 정말 율법을 잘 지켜서 그것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말씀공부 등의 도드라진 항목들을 놓고 그것으로 신앙의 척도를 삼는 사람들, 하지만 타인을 향한 따스한 동정심과 사랑보단 엄정한 판단과 냉정한 심판에 더 빨랐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얼핏 “행위”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율법에서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 같은 “행위”들에는 무관심한 사람들, 곧 예수께서 비판하신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흡사한 그런 부류들이었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
엄밀히 따진다면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행하여 의롭게 되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에 가깝다. 목회서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초에 건실한 신앙을 지키던 성도들이 점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할례나 절기 준수와 같은 무가치한 계명들에 집착하면서, 오히려 더 중요한 믿음-성령의 삶을 팽개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성령을 떠나 육체로 기울어지는 어리석음이라 부른다(3:3). 생명의 원천인 성령을 버리고 죄가 다스리는 육체의 영역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성령의 유일한 통로인 믿음을 버리고, 성령을 매개할 수 없는 “율법의 행위들”에 의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3:2, 5). 따라서 “율법의 행위들”은 정확히 말해 믿음과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순종의 삶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생명을 매개할 수 없는 외적인 조건들 혹은 그 조건을 이루기 위한 “육체적” 규정들에 집착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와 절기 준수,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식탁규정 등의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 세 가지는 실제 당시 사회에서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구별해주는 가장 두드러진 정체성의 표지들이기도 했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실수는 이런 외면적 표지들이 마치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지라는 교설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때 아닌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로마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외면적 유대인”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롬 2:28).
물론 문제의 핵심은 이들이 외면적 유대인이 되려고 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할례나 무할례나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갈 5:6; 6:15). 실제 문제의 핵심은 외면적 유대인이 되겠다는 헛된 열정에 사로잡혀 정작 중요한 믿음의 표현들, 성령을 따를 때 맺게 되는 열매들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본 본질이었다. 곧 성령의 삶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삶은 그들이 기다리던 “의의 소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의로움의 소망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기다리는 것이며(5:5), 그들의 바라는 성령이란 “성령 안으로 씨를 뿌리고” 또 “그 성령으로부터 거두게 될” 선물이기 때문이다(6:8). 그래서 바울은 외친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이렇게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려고 합니까?”(3:1, 3)
한마디로 말해 갈라디아의 위기는 위선적 영성의 유혹이다. 물론 이런 갈라디아의 위기는 오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바로 그 문제이기도 하다. 나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믿음의 삶은 피하면서도 여전히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고 싶은 유혹이다. 역설 같지만, 나 자신을 포기하며 사랑으로 타인에게 종노릇하며 사는 것보다는 한 번의 할례가 더 매력적이다. 안식일을 얼마든지 철저히 지킬 수 있지만, 타인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의 자존심을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의 사람들에게 할례나 절기준수나 음식규정 등이 진정한 자기포기의 대체물 노릇을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여러 모양들을 찾는다. 물론 그 자체로는 나쁠 것도 없는, 아니 오히려 유익한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참된 신앙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텅 빈 내 영성의 빈자리를 감추기 위한 위장막으로 활용한다. 교회 생활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이들이라면, 우리 문제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쉽게 수긍할 것이다. 위선적 영성이라는 안경을 바로 끼고 보면, 갈라디아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갈라디아서 개관)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발생한 신학적, 목회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갈라디아교회에 발생한 위기 상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바울의 해법 역시 간단하다. 다만 그 간단한 해법을 지탱하는 논증들이 다소 복잡하고 얽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를 읽어가는 좋은 방법은 우선 바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단순명료한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바울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반제적 혹은 이항대립적 뼈대를 파악하는 일이다. 시종일관 바울의 논증은 “A 아니라 B”라는 선명한 반제적 틀 속에서 전개된다. 바울의 논증을 처음부터 따라가 보면 우리는 대략 다음의 반제의 목록을 만들 수 있다.
1장
·바울의 사도직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음(1절)
·바울은 사람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사람임(10절)
·바울의 복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음(11-12절)
2장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임(16절)
·율법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감(19절)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살아계심(20절)
3장
·성령은 율법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받음(2, 5절)
·갈라디아인들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고 있음(3절)
·율법은 저주를 이루지만 그리스도는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10-13절)
·유업은 율법이 아니라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것임(15-18절)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19-24절)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씨요 유업의 상속자가 됨(25-29절)
4장
·종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됨(1-5절)
·종이 아니라 아들이요 상속자임(7절)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이 다시 세상의 초등학문에 종노릇 하려 함(9절)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자녀와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약속을 따라 난 아들(22-23절)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함(29절)
·유업을 얻는 것은 육체를 따라 난 자녀가 아니라 약속-성령을 따라 난 자녀임(30-31절)
5장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므로 종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됨(1절)
·할례-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은혜에서 끊어짐(2-4절)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임(6절)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 되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함(13절)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육체의 욕심을 피할 수 있음(16절)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됨(18절)
·서로 상반되는 삶의 방식인 육체의 행위들과 성령의 열매들(19-23절)
6장
·육체에 심으면 육체에서 썩어진 것을, 성령에 심으면 성령에서 영생을 거둠(8절)
·거짓 교사들은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서 할례를 강요하려 함(13절)
·거짓 교사들은 육체를 자랑하지만,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함(13-14절)
·할례나 무할례는 무의미하고 오직 새로운 창조만이 중요함(15절)
위에 요약한 바울의 논증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좀 더 자세히 개관해보자.
1:1-5은 서신의 도입부로서, 송신자, 수신자 및 인사말이 나온다. 5절은 4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께 대한 송영이 첨가된 것이다.
1:6-9은 통상 감사와 기도가 나오는 대목이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감사 대신 질책의 말로 바뀌어 있다. 서신의 구조상 이 대목에서 대개 서신 전체의 핵심적 관심사가 언급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관심사는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복음을 좇고 있다는 배교적 상황이다(1:6). 1:8-9에서는 이런 위기 상황의 원인이 되는 선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저주의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사실상 갈라디아인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1:10은 이어질 긴 자전적 회고의 서문 격으로 복음의 진리에 어긋난 적이 없이 자신의 신적 사명에 충실했던 바울 자신의 입장을 천명한다. 1:11-2:21은 전체적으로 긴 자전적 회고라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의 핵심은 1:11-12에서 밝히는 바대로 자기의 복음이 사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인 사례들, 곧 부르심을 받을 때의 정황(1:12-17), 첫 예루살렘 방문 당시의 정황(1:18-24), 두 번째 방문 시의 정황(2:1-10)에 관한 기록은 모두 바울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이라는 사실, 그러면서도 동일한 복음이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이다. 2:14-21은 안디옥 사건에 대한 보고인데, 여기서는 베드로의 위선적 행동이 이신칭의라는 복음의 진리를 분명히 설파하는 하나의 발판으로 활용되고 있고, 바울은 은혜를 폐하지 않는 자신의 면모를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과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2:15-21은 흔히 이신칭의에 관한 진술로 구분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자전적 회고는 여기서 끝이 난다.
3:1-5은 직접적인 질책이다. 바울의 질책은 갈라디아인들이 성령을 떠나 육체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매개할 수 없는 율법의 행위들에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통로가 되는 믿음으로 돌아와야 한다.
3장의 나머지 부분(3:6-29)은 아브라함 사건을 바탕으로 한 긴 성경적 논증이다. 3:15-18은 약속이 율법보다 우선이므로 진정한 언약이며, 따라서 유업은 율법이 아니라 약속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3:19-22은 율법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죄를 다루는 부정적 기능만 담당한다는 사실을, 3:23-25은 율법의 부정적 기능 역시 믿음이 올 때까지로 정해진 한시적인 조치였음을 밝힌다. 3:26-29은 율법에서 벗어나, 아브라함과 함께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씨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우리 역시 아브라함의 씨가 되고, 따라서 유업을 상속할 자가 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4:1-7은 일상생활의 유언 관습을 유비로 삼아 3장에서 동일한 결론을 재차 확증하는 새로운 형태의 논증이다.
뒤따르는 4:8-20은 갈라디아인들을 향한 직접적인 질책과 호소다. 여기서 율법 언약 아래로 들어가려는 그들의 행태는 회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4:21-31은 3장의 논증을 이어받는 것으로 아브라함 전통을 근거로 한 또 하나의 신학적 논증을 통해 3:15-29과 4:1-7에서 제시된 결론, 곧 육신(율법)이 아니라 약속-성령(믿음)이 유업의 확실한 보증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증한다.
5:1-12은 직접적인 질책과 권고에 해당하지만 여기서는 앞에서 제시된 신학적 논증의 결과들이 함께 얽혀 있다. 바울의 주장은 한 마디로 할례-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이 성실한 달음질을 방해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경고가 주어진다. 5:13-26에서 이 권고는 자연스럽게 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권면으로 이어진다. 성령은 율법 아래서의 삶, 곧 육체의 욕망을 이루는 삶의 유일한 대안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이라는 미래를 두고 “육체의 행위들”과 “성령의 열매”가 대조되어 제시된다. 6:1-6은 마지막 심판의 문맥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의 핵심인 사랑을 보다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6:7-10은 이 권면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적인 신학적 원칙을 성령-육체의 반제를 통해 천명한다. 곧 육체에서는 멸망을, 성령에서는 영생을 거둔다는 원칙이다. 이는 갈라디아서 혹은 바울 복음 전체를 아우르는 대원칙이라 말할 수 있다.
6:11-18은 서신의 결론 부분이다. 이 대목의 핵심은 육체를 자랑하는 거짓 교사들과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신의 행보를 대조함으로써, 십자가를 근거로 주어지는 “새로운 창조”라는 삶의 원칙을 분명히 한다(6:15). 육체적 삶의 방식에 대한 효과적 대안인 성령과 새 창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갈라디아서 전체 논증을 요약한다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자기 입장과 다른 신학자들과 벌이는 신학적, 교리적 논쟁이 아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엉뚱한 길로 빠지려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목회적 권고다. 따라서 바울 논증의 핵심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이다. 곧 복음의 진리를, 그 진리에 합당한 삶의 자태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성령을 따라 살아가십시오”라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3-4장의 여러 논증들은 이 권고를 지탱하고 있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바울의 궁극적 요점은 어떤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참 길인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렇게 갈라디아서는 지금 우리 삶의 현실에 직접 말을 걸어온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느낀 위선적 영성의 유혹은 오늘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는 유혹이기도 하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호소는 오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호소가 된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빛 좋은 개살구”들에 현혹되거나 집착하지 말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참 생명을 알고, 그 생명에 발맞추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라는 호소다. 그 삶의 끝에, 어렵지만 보람된 그 달리기의 마지막에, 우리는 우리가 소망하던 의로움과 영생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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