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그가 죽고 난 다음에 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장 1절을 다시 보시면 “벧후 2:1상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구약시대에도 거짓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신약시대는 거짓선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거짓선지자와 거짓선생을 구별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구약의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멸시는 자들에게도 평안이 있으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이 완악하게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하리라고 하십니다. 또 완악하게 행하는 자는 재앙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 거짓 선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밖을 넘어가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판단의 기준이 성경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사람들은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고린도교회 거짓선생들은 그들의 기준을 따라서 사도바울조차도 거짓 사도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런 거짓선생들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고후 10:12하-그러나 그들이(거짓선생)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평가하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이야기를 했다고 했습니까?
“고후10:13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벗어나면 거짓선지자나 거짓 선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도 “벧후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사로이 푼다는 말은 개인적으로, 또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절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또 그 다음에 “벧후1:21. 예언(성경)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고 합니다.
또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뜻대로 해석해서는 되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바를 따라서 해석해야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거짓선지자나 거짓선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이단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표적으로 신천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모두 비유라고 하면서 성경을 모두 비유로 풀이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나중에 어떻게 될 수밖에 없습니까? 벧후 2장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벧후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기서 “그러나” 라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앞에서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들과 거짓선생들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결국 멸망하게 할 이단을 끌어들이게 되고,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을 부인하게 되고, 임박할 멸망을 스스로 취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모두 자신들이 제일 성경적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지금도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성경을 자기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성경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하고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문자적으로 바르게 해석해야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자연스럽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단어연구가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베드로후서를 볼 때도 지식 또는 앎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벧후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여기서 앎이란 에피그노시스라는 말로서 체험적인 앎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벧후1: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그런데 여기서 지식이란 공부하여 얻은 지식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단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문맥입니다. 이단들의 제일 큰 문제는 성경을 문맥으로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항상 문맥을 잘 살펴야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 7장 12절입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앞에서 7장 7절부터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리고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고 난 다음에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란 결론적으로 라는 말입니다. 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기도의 결론이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 즉 모든 성경의 내용입니까?
여기서 말씀하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기도는 모두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남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나 자신을 위한 기도도 있지만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 기도란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로 남을 대접하는 자는 결국 자신도 대접을 받게 됩니다. 또 이렇게 남을 대접하기 위한 중보기도가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 있는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압축하면 어떤 말씀이 되겠습니까?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렇게 먼저 남을 위한 중보기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이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문맥적으로 보면 어떻게 해석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 중보기도란 남을 대접함으로 내가 대접받는 것이다. 중보기도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완성한 것이다” 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항상 문맥을 따라서 해석해야합니다.
두 번째는 역사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항상 성경이 쓰게 된 그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동시에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 성경이 어떤 역사적인 배경과 상황가운데 쓰여졌는가를 이해해야합니다. 심지어 시편이라도 그것의 역사적인 배경과 사건을 이해할 때 바르게 해석이 됩니다. 또 우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먼저 지금 우리를 보고 쓴 서신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 7교회에게 쓴 서신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9절에 보면 “계1: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이 당하신 환난과 그 나라와 환난 가운데 참음에 동참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상하고 어려운 책이 아니라 초대교회박해의 상황가운데 당시의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위로를 주기위해 쓰여진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신학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또 역사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해석해야할 필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만일 구약성경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또 역사적으로만 해석하면 유대종교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것과 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는 예수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구약성경전체)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을 볼 때는 항상 이 말씀이 어떻게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보아야합니다.
네 번째는 영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에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하나님의 감동하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벧후1장 21절에서도 벧후1:21. 예언(성경)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도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요즘 많이 외부강사로 나가지 않지만 한 번씩 밖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청년대학생들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겠습니까? 여러분들입니다. 청년들은 세상으로는 여러분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다보면 청년대학생보다 우리교회 연세 드신 분들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달아 갈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으로 행위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문자적 해석, 역사적 해석, 또 신학적 해석, 그리고 영적해석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절대 성경은 완전히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에서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비로소 그 말씀이 완전히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입으로만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행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하시고 난 다음에 가르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제일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그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절에서 “그리하면” 이 무슨 말입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염려가 기도가 되게 하면” 이라는 말입니다. 또 염려를 가지고 기도 할 때 “염려가 더 되면 더 간절히 기도하면” 이라는 말입니다. 또 염려를 가지고 기도할 때 “염려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감사하면서 기도하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이 성경을 보면서 이 말씀을 연구해도 절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저도 20년 전에 우리 아이의 미래가 너무 염려가 되어서 잠을 잘 자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염려가 되는 상황가운데서도 무조건 이 말씀대로 감사를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정말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밤 세도록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이 말씀대로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목요 제자반에서 한동대 전영순 집사님의 간증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단순히 성경을 머리로만 보지 않습니다. 삶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삶으로 해석된 말씀이 얼마나 있습니까? 저는 삶으로 해석된 말씀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삶으로 해석된 말씀이 얼마나 많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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