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한계시록 강해

[스크랩] 계시록 연구를 위한 준비

에반젤(복음) 2019. 11. 9. 16:32




   계시록 연구를 위한 준비


요한 계시록의 총 주제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계시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제를 파악함으로써 계시록 전체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또 해석의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계시록의 총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세교회의 사명, 환난, 승리이다. 특별히 계시록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해석도 교회론적 입장에서 시도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더구나 성경 계시의 수신자가 교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은 더욱 더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몇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영적 해석 방법 : 상징적-신비적으로 해석하는 방법
② 과거적 해석 방법 : 계시록의 말씀이 과거, 즉 1세기에 이미 일어났다고 보는 해석 방법
③ 미래적 해석 방법 : 4장부터를 주님 재림 직전에 일어날 말세지말의 현상으로 보는 해석 방법
④ 교회사적 해석 방법 : 초대교회때 부터 주님 재림때까지의 교회역사로 해석하는 방법
Ⅰ. 계시록의 기록 목적
계시록의 주된 목적은 악의 세력과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적 교회를 위로하는 데 있다. 구체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다.
① 말세의 변천을 이해시키기 위함.
② 말세 교회의 사명을 깨닫게 함.
③ 말세 교회의 받을 환난을 미리 보여주기 위함.
④ 말세 교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
⑤ 영광과 구원과 심판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함.
⑥ 교회의 궁극적 승리와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
※ 말세의 개념 :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전체를 말세라고한다(행2:17). 바울서신에도 그 당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처럼 묘사되어 있고, 예수님 자신도 말세 개념을 이미 사용하고 계셨다. 이로 보건대 이미 초대 교회에서부터 벌써 말세 개념을 사용하였고 지금도 우리가 그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용될 것이다.
Ⅱ. 계시록의 기록자
저자는 자기의 이름이 요한임을 밝히고 있다(계1:1, 4, 9; 22:8) 이 요한이 사도 요함임을 여러 학자가 지지하고 있다(윌리암 헨드릭슨, 박윤선, 이상근).
1. 계시록이 사도 요한의 저서임을 반대하는 견해
1) 문체와 논조에 차이가 있다.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읽어 보면, 요한복음은 저자의 사상이 순조롭게 흐르고 있으나 계시록에서는 갑작스럽게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그 다음에 무엇을 말하게 될른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요한복음은 아름다운 관용구적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계시록은 거칠고 귀에 거슬리는 히브리풍의 헬라어로 쓰여졌다.
2) 교리상 현저한 차이가 있다.
요한 복음은 포용력이 크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복음과 은혜로 구원받는 교회를 전한다. 그러나 계시록은 포용력이 작고 특정적인 구원의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신약성경 중에 유일한 묵시 문학에 속한 책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차이점은 당연한 결과이다.
2. 계시록이 사도요한의 저서인 외증과 내증
1) 외증: 동방교회의 파피아스, 순교자 저스틴이 본서를 요한의 저작으로 인정하였고, 계시록의 일곱교회의 하나이 사데교회의 감독이었던 엘리도는 '성 요한의 계시록'에 관한 주해를 썼다. 키브리안은 본서와 요한 복음 간에 차이점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 밖에 클레멘트,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등이 본서의 저자가 사도요한임을 증명하고 있다.
2) 내증: 자신의 이름이 요한임을 네 번이나 밝혔고(1:1, 4, 9; 22:8), 복음서는 예수를 요한복음 1:29에 '하나님의 어린양(amnos)'으로 또한 계시록도(arnion) 29차례에 걸쳐서 같이 부르고 있다. 또한 요1:1과 요일1:1에는 주님을 '로고스'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계시록에서도 19:13에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 하나님의 전능과 이 땅의 능력 등에 대한 대조가 계시록과 요한의 다름 기록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1
이와 같은 외증과 내증을 고려할 때 계시록을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기록했음은 의심함 여지가 없다.
Ⅲ. 계시록의 기록 시기
주후 69년과 96년 두 가지 연대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연대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으며, 후기 연대(AD 96년)가 가장 유력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레네오(Irenaeus)는 '그것은 과히 오래지 않은 거의 우리 세대인 도미티안(Domitian AD 81-96) 통치 말년에 이를 때쯤에 나타났었다'고 했다. 더구나 게2:4에 보면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 버렸다고 했는데, 네로 황제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욱 더 희박한 것이다. 또한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것은 도미티안(AD 81-96) 치하에서는 흔히 있는 처벌 방법이었다. 그 밖에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유세비우스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Ⅳ. 계시록의 기록 장소는 어디인가?
본서의 기록 장소는 계1:9에 밝혀져 있는 대로 밧모섬이다. 밧모섬은 밀레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56㎞ 지점에 위치한 소아시아 해안의 불모의 바위섬이다. 해안이 굴곡이 심하고 길이가 약 16㎞, 폭이 약 10㎞이다. 이 곳에는 채석장이 있었고 당시에 죄인들을 유배보내는 곳이었다. 지금도 이 섬에는 '계시의 동굴'이라 불리우는 요한의 유적이 남아 있다.
17세기에 밧모섬은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터키 황제의 보장 허락을 받아 자치적으로 통치하였으나 1832년에 터키의 통제를 완전히 받게 되었다. 1912년에 이탈리아에 귀속되었다가 1947년에 그리소에 다시 양도되었다(2장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지도 참조).
Ⅴ. 계시록의 구조
표1-2

Ⅵ. 계시록의 내용 개용
표 1-3


Ⅶ. 계시록의 칠대 축복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가지 축복은 다음과 같다.
(1) 1장 3절 :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
(2) 14장13절 : 주 안에서 주는 자의 복
(3) 16장15절 : 깨어 근신하는 자의 복
(4) 19장 9절 : 어린 양의 잔치에 청함받은 자의 복
(5) 20장 6절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6) 22장 7절 :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7) 22장14절 : 두루마기를 빠는 자(회개하는 자)의 복
Ⅷ. 창세기와 계시록의 비교
표1-4
Ⅸ. 인 나팔 대접재앙 정리
표 1-5
Ⅹ.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 도표 표1-6
제 1장 주
1. William Hendriksen, 계시록 주석, 김영익. 문영낙 공역, pp. 11.
2. 이상근, 계시록 주석, pp. 13
3. 신성종, 신약총론, pp. 313
4. 신성종, 신약총론, pp. 314
5. William Hendriksen, 계시록 주석, 김영익 문영탁 공역, pp. 15.
6. 신성종, 신약총론, pp. 315
7. 정인찬, 성서대백과, 제3권, pp. 186
8. 이상근, 계시록 주석, pp. 44
9. Jensen Mears 라마 66 성경공부, 박광석 편저, pp. 193
10. Jensen Mears 라마 66 성경공부, 박광석 편저, pp. 195
11. Jensen Mears 라마 66 성경공부, 박광석 편저, pp. 193
2. 요한계시록 1장 연구
■ 주제 : 계시의 시작
■ 요절(1:3)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 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 내용분해
Ⅰ. 요한계시록의 성격........................................................................................................1:1-3
Ⅱ. 계시의 경로.....................................................................................................................1:1-3
Ⅲ. 사도 요한의 인사..........................................................................................................1:4-8
Ⅳ. 사도 요하나의 삼대 참여.................................................................................................1:9
Ⅴ. 주의 날................................................................................................................................1:10
Ⅵ. 성령에 감동하여 계시를 받음................................................................................1:10-20
■ 내용 연구
Ⅰ. 요한 계시록의 성격(1:1-3)
1. 계시의 책이다.
1) 계시의 정의
계시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아포칼립시스( )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숨겨진 것, 가리워진 것을 벗겨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성경에 쓰여진 용도는 다음과 같이 여섯가지 용도가 있다.
(1) 이방을 비추는 빛(눅2:32). '비추다(uncovering)'의 뜻으로 쓰였다.
(2) 의로운 심판이 나타남(롬2:5). 여기에 나타난다는 것은 감자기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데(revelation), 같은 로마서 3:21에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 '나타났으니'는 헬라원어로 '파네로우( )'인데 명확치 않은 것이 밝게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이 낱말은 성육신을 표시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딤전3:16, 딤후1:10, 벧전1:20, 요일3:5, 8 등) 역사적으로, 점증적으로 완성된 사실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롬2:5의 아포카리프시스( )는 커튼을 젖히면 뒤엣 것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3) 지금까지 몰랐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엡1:17, 갈1:12). 이미 주신 말씀도 과거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새로 깨닫게 되는 것도 계시이다.
(4) 주의 영광이 나타날 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 짐(벧전4:13).
(5) 주의 재림이 나타남(행1:7, 벧전1:7, 13).
(6)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롬8:19).
2) 계시의 구분
(1) 일반 계시 혹은 자연 계시라고 하는 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① 자연 계시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시19:1, 사6:3. 롬1:20).
②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행17:23-29), 단2:20-23, 삼하7:14, 삼상17:47, 사10:5-6).
③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빌2:13, 잠4:23, 벧전3:21. 인간의 지 정 의 또한 문화 교육 과학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2) 특별 계시 혹은 초자연 계시라고 하는데 구약과 신약시대에 그 계시 방법이 달랐다.
① 구약 시대 : 꿈, 환상, 음성, 우림과 둠빔, 제비, 비의적 현상, 이적과 기사, 선지자 등을 통해서 계시를 하셨다.
가. 비의적 현상 :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상수리나무 아래 나타난 것,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한 것 등이다.
나. 이적과 기사 : 이들의 차이점은 이적은 완전 초자연적 현상이고 기사는 자연을 이용한 현상을 의미한다.
〈예〉 홍해를 가른 것은 기사에 속하고 만나를 먹은 사건은 기적에 속한다. 그런데 초자연적 이적에는 신령한 의미가 대개 함축되어 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신약에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했고, 오병이어(五甁二魚)의 표적은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미하고 있다.
② 신약시대 :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있다.
가. 행동을 통한 계시 : 성육신은 하나님 계시의 최고 절정이다. 또한 예수님이 이적 행동을 통하여 영적 진리를 계시하셨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통해서 계시를 하셨다.
나. 말씀을 통한 계시 : 먼저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다(요1:1). 여기에서 세 가지 형태의 말씀이 있다. 첫째, 살아 있는 인격적 말씀(예수 그리스도)이고 둘째, 기록된 문서화된 말씀 즉, 성경이고(엡3:1-5, 2:20), 셋째는 선포되고 있는 말씀인데, 이것이 설교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이고,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발견하여야 하며, 선포되고 있는 말씀도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엡3:5에 있는 말씀과 같이 사도들 이후에는 성경계시가 종료된 것이다.
(3) 인격 계시
이 인격 계시는 앞에서 살펴본 일반 계시나 특별 계시가 독립적이고도 객관적 계시임에 반하여 이것은 주관적이고 보조적인 계시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성령의 조명계시를 뜻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경을 살펴보자.
가. 마태 11:26-27에 있는 말씀과 같이 계시의 절정인 그리스도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바로 깨닫는 정도가 개개인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인격 계시의 차이).
나. 요한 14:26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인격 계시).
다. 요일 2:20, 27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여기서 기름 부음이란 성령을 뜻하고 이는 바로 성령의 조명 계시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작금 유럽 신학에서는 이를 따로 취급하여 인격 계시(Personnal Revelation)로 분류하고 있으니 오해가 없도록 해야겠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인격 계시는 왜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사55:7-9, 고전2:9-10). 인간이 아무리 학적으로 준비가 다 돼 있어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는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갈1:16, 마16:17). 또한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렘17:9, 롬3:10-18). 예를들면, 태양이 아무리 빛을 발하고 있어도 장님에게는 그 빛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따라서 성령이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깨닫게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격 계시의 지도를 받는 자세와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마11:25-30) 둘째는 기도이다(시119:18, 엡1:16-18). 우리는 성격을 펴놓고 읽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하여야 할 것이다.
3) 계시의 발전성과 종결성
계시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타나 있지 않고 점진적이고 발전적으로 되어 있다. 계시의 발전성은 구약의 예언과 율법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구약의 예언이 문자적으로는 유대인 중심적이고, 구약의 율법은 의식적으로 이스라엘 국가적이였다. 즉, 다른 민족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사항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각각 문자적인 것이 복음으로 진전되고 유대인 중심이 만민 중심적으로 발전이 되고 율법은 도덕법으로 발번이 되어서 신약 시대에도 적용이 되게 되었다.
메시아 예언도 여인의 후속(창3:15) → 가죽 옷(창3:21) → 아브라함의 자손(창12:1-4) → 동정녀 탄생(사7:14) → 수난의 죽음(사53) → 이새의 줄기(사11:1-2)와 같이 점증적으로 발전이 되었다.
성경 계시의 종결성은 히1:1-2, 엡3:5에 있는 바와 같이 이미 종결되었다. 꿈 환상 음성은 개인적 계시, 주관적 계시이므로 성경과 같은 권위도 없고 객관적으로 교회에서 인정받는 계시도 될 수 없다. 다만 성경 계시를 이해하고 순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잘못하면 마귀에게 이용을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매우 조심하여야 한다(고후 11:14 이하).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과 환상 등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에스겔13:1-9) 마귀에게 이용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겠다.
특별히 에스겔 13:1-9에 보면, 심령 예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심령 속에 있는 것이 예언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영을 분별하는 일에 조심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범죄한 사실을 알아맞힐 수가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성경의 예를 살펴보면 다윗의 범죄를 다윗 자신과 하나님 외에는 안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서 그가 다윗을 책망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매우 드문 일로써 이런 능력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귀나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만약에 그런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에게도 불행이고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보다는 대부분 마귀로부터 온 것임이 틀림없다.
4) 주관적 계시와 객관적 계시
주관적 계시는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원하시는 뜻을 말한다. 이것은 숨겨져 있고 은밀하기 때문에 신앙인 자신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
① 성경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시119:105, 요16:13).
② 자연 계시와 병행해야 한다(시19:1-5, 마24:20).
③ 신앙 경험과 지식을 참고해야 한다(전1:1-5).
④ 신앙 지도자와 상담한다(삼상9:6, 행8:31).
⑤ 양심의 소리에 청종하라(벧전3:21, 딤전1:19).
⑥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라(간절히,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이기심이 없이).
⑦ 순종의 자세를 가지라(요7:17).
이 마지막 단계는 매우 중요하다. 비록 자기에게 불이익이 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태도가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발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객관적 계시는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교회에 주신 공적인 계시이다. 여기에는 자연 계시와 성경 계시가 있는데, 자연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 신실 능력 거룩 사랑 그리고 진리를 나타내고, 성경 계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계시로써 인격적인 살아 있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있고, 기록된 계시로써의 성경과, 선포되고 있는 말씀인 설교가 있다.
2. 축복의 책이다.
요한 계시록은 무서운 재앙, 환난의 책만이 아니고 축복의 책이기도 하다. 창세기에 기록된 축복의 약속이 예순 네 번이 나오고, 계시록에도 축복의 약속이 일곱 차례나 나오고 있다. 세상에 기록된 책 중에 축복이 가장 많이 약속된 책은 성격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 계시는 말씀의 형태로 남고 이 말씀도 또한 약속의 형태로 된 문서로 기록된 계약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계약의 중요한 내용은 첫째, 구원의 약속 둘째, 축복의 약속 셋째, 병고침의 약속 넷째, 기도응답의 약속 다섯째, 승리의 약속이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약속들을 간추려 보면 약 백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을 압축하면 위의 다섯가지가 될 수 있다. 신 구약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의 축복을 약속한 책이다. 그 축복의 내용은 우선 순위가 영적이고 내세적이고 인격적인 것이지만, 물질적이고, 땅에 속한 것(문화적인 것)을 영적 축복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축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첫째, 말씀을 통한 축복의 책이다(계1:3).
둘째, 주안에서 죽는 자의 복에 관한 책이다(계14:13).
셋째, 깨어 근신하여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의 복에 관한 책이다(계16:15).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롬13:13에 '주 예수로 옷 입으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주 예수를 닮는 생활을 뜻한다. 계9:8 에는 옷을 성도의 옳은 행실로 표시했으니 이것이 자기 옷을 지키는 생활이다. 선교 일세기를 지낸 오늘의 한국교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교인들의 성화와 착한 행실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민 네 명중에 한 명은 크리스챤인데, 이들이 우리 사회의 개혁세력으로 부상치 못하고 오히려 우리 사회 각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범죄사건에 현금 서울 시내의 대형교회 직분자들이 관여되고 있음을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범양사건, 형제복지원 사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등).
넷째,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의 축복(계19:6-9).
다섯째,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축복(계20:67).
여섯째, 말씀을 기키는 자의 복(계22:7).
일곱째,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계22:14).
두루마기를 더럽히지 않는 자가 아니고, 두루마기를 빠는 자라 한 것에 주의하자.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한다. 두루마기를 더럽히지 않을 수는 없으나, 두루마기를 빨수는 있기 때문이다.
3.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기록한 책
영어성경에 MUST를 사용했는데 이는 가장 확실히 이루어져야 할 일에 이 단어를 쓴다. 마5:18에는 일점 일획이라도 성취된다고 하였다. 또한 속히 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이와 같이 반드시 속히 될 일에서 일이라는 이 용어를 성경전체에서 1,153번 사용하였고 계시록에는 42번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계시록에 사용된 경우를 살펴보자.
① 말세의 교회에서 발생될 일(2장, 3장).
② 하늘 보좌에서 발생될 일(4장, 5장).
③ 세계의 전체에서 말세에 발생될 일(6장, 8장, 9장).
④ 말세 교회의 사명(7장, 10장, 11장).
⑤ 말세 교회의 수난 받을 일(12장, 13장).
⑥ 세상이 심판 받을 일(14장-18장).
⑦ 예수님이 재림하실 일(19장).
⑧ 천년 왕국 건설과 사탄의 심판에 관한 일(20장).
⑨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될 일(21장, 22장).
4. 종들에게 보이려고 주신 책이다.
성경에는 종이라는 말이 신약에 111번, 계시록에 12번 나오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종이라는 단어가 쓰인 용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종은 값에 팔린자이다(고전7:23).
② 종은 주인을 위해 산다(롬14:7).
③ 종은 주인의 소유이다(롬14:8).
④ 종은 주인의 소유로 산다(마4:4, 시24:1).
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절대 순종한다(십계명, 요5:3).
⑥ 종은 주인을 기쁘게 해야 한다(롬12:2, 히11:6).
⑦ 종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눅16:13).
5. 말세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1) 읽자(Reading)
성경 말씀을 모범적으로 읽은 인물을 살펴보자.
(1) 다윗은 주야로 묵상하였다(시1:2, 119:87).
야경이 깊기 전에 깨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다고 하였다(시119:148). 그 결과 그는 만사가 형통하였고 스승보다 명철케 되었다. 이런 분이 한국에도 계셨다. 이분은 김현봉 목사님이시다. 이분은 저녁 6시에 주무셔서 밤 10시에 기상하여 계속 안주무시고 깨어서 성경을 연구하고 새벽 4시가 되면 뒷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그 분이 사시는 곳은 아현동이었고, 교회는 아현교회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기도하셨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감동을 받고 불신자인 그들이 그분을 위해 조그만 기도의 집을 만들어 줄 정도가 되었다.
이분의 신앙신조는 양심순종, 삼가조심, 전심전력이였다. 또한 생활의 근검절약을 강조하였고, 또 오후예배는 2시에 보는데 전교인이 오전 예배후 교회내 지하실에서 국수틀을 놓고 여기서 나온 국수로 전교인이 점심을 먹었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밀가루를 담았던 부대가 많이 나오게 되어서 이 밀가루 부대에 꺼먼 물감을 들여서 두루마기를 해 입곤 하였다. 머리는 백호를 치고 신발은 까만 고무신을 신고 옷은 이와 같이 해 입었기 때문에 돈을 쓸 곳이 별로 없었고, 여기서 모인 돈으로 집을 사서 (51동)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집을 빌려주고, 또 그들에게 장사밑천을 대주는데 주로 참기름 장사를 권장하였다. 당시에 약 1,000여명의 교인이 모인 큰 교회가 되었고 한국교회의 한 모퉁이에 그 발자국을 남겨놓고 가신 분이시다.
(2) 다니엘은 일백이십도나 되는 큰 나라의 수석총리로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단9:1-5) 민족의 소망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우리나라 크기만한 도가 120개 되는 나라의 총리보다 더 바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는 성경과 기도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독서시간의 65%를 성경 읽는 일에 투자하였다.
(4) 죤 아담스(John Adam, 6대 미국 대통령)는 매일 1장씩 50년간 성경을 읽었다.
(5) 윌리엄 이 그라스톤(William E Gladstone, 영국 수상 4번, 27년간)은 성경을 1년에 1독씩 하였다.
가. 성경을 읽는 법은 한글 성경이 1,754페이지이므로 매일 5페이지씩 읽으면 1년에 한번 성격을 일을 수 있다. 지 캄벨 몰간(G Cambell Morgen)은 유명한 주석가, 설교가 였는데 그는 성경을 30∼40번 읽고야 설교준비를 했다.
나. 성경 연구 12가지 방법
① 경건 생활을 위한 공부 - 실천 중심
② 각장 요약식 공부 - 각장 요약
③ 특성 중심의 공부 - 성품에 관계되는 것
④ 주제 중심 공부 - 주제별 연구
⑤ 인물 중심 공부 - 인물 연구
⑥ 제목별 연구 방법 - 제목별 연구
*주제별 연구와 차이점 - 주제별 연구는 좁고 제한된 연구이며 제목별 연구는 광범위하다.
예) 기도에 대한 연구 - 제목별 연구
예수님의 기도, 금식 기도, 구약의 기도 - 주제별 연구
⑦ 단어 연구 중심의 방법 - 단어의 의미 연구
⑧ 배경 연구 중심의 방법 - 역사 지리 문화 연구
⑨ 개론식 연구 방법 - 각 권의 개론 연구
⑩ 각장 분석 연구 방법 - 각장의 내용 분해 연구
⑪ 종합적 연구 방법 - 각 권의 종합적 연구
⑫ 주석적 방법 - 각절 주석 연구
다. 성경 연구의 가치
성경연구의 가치로써는 첫째, 영적 가치가 있는데 이는 영생(요5:39), 삶의 원동력(마4:4), 죄를 씻음(엡5:26), 죄를 이김(시119:9) 등이고 둘째, 인격적 가치는 지혜(시119:19), 승리와 소망(시119:54), 성결(요15:3) 등이다. 셋째로 현실적 가치는 경제(시112:1-5), 건강(출15:26, 신7:15), 평안(시119:164), 인내(시119:105) 등이다.
2) 듣자(Hearing)
(1) 하나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하는가?
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자(살전2:13).
② 믿음으로 듣자(살전2:13).
③ 성령의 귀로 듣자(계2장, 3장).
④ 순종할 자세로 듣자(요7:17).
⑤ 긍정적으로 받자(비판적, 부정적으로 받지 말자).
⑥ 겸손한 마음으로 받자.
⑦ 기도하고 듣자.
(2) 들음의 축복은 무엇인가?
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요5:25).
② 진리를 깨닫는다(마3:14-23).
③ 믿음이 생긴다(롬10:17).
④ 성경을 많이 기억할 수 있다(요14:26).
성경을 반복해서 공부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일반 광고의 원리가 반복이고 공산주의의 세뇌교육은 이 반복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반복해서 배우는 것을 더 열심히 하고 또 교인들에게 성경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도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가르치도록 하자.
3) 지키자(Keep)
성경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첫째는 듣고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교리 또는 선험적 요소(기본 교리)이다. 예컨데 3위 하나님,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적, 구속의 죽음, 부활, 재림 등이다. 둘째는 듣고 행동으로 지켜야 한다. 이는 성황에 이르고 축복을 받는 요소이다. 이것들은 경험적 요소가 대부분이데 윤리, 인격, 실천의 규범 등이다(십계명 등). 성경은 대부분 경험하고 행동으로 지켜야만 한다. 그래야 이해가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적 생활, 성경적 문화 그리고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을 생활에 실천함으로써 받는 축복이 무엇인가?
(1) 현실적 축복 : 신명기 28:1-14, 래26:1-13, 신7:12-15, 시112:1-5
(2) 인격적 축복 : 마5장 ∼ 7장
(3) 내세적 축복 : 마5:19
4) 성경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때가 가까운 증거를 같이 살펴보자.
(1) 거짓 선지자의 대량 출현(마24:5, 11, 24-25): 기독교계의 혼란과 타락
(2) 전쟁 소문과 전쟁의 발발(마24:6-7): 국제 정치의 혼란
(3) 천변, 지진, 기근(마24:7): 자연계의 혼란 및 경제의 혼란
(4)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마24:13): 이방인의 충만한 수 확보(롬11:25).
(5) 이스라엘의 독립과 예루살렘의 회복(마24:32): 이방인의 때가차고 유대인이 구원받음(후에 자세히 논함).
(6) 불법이 강성하여 사랑이 식어짐(마24:10): 사회혼란
(7) 여성과 아이들의 권세가 높아짐(사3:4, 12):전통과 가치의 혼란
(8) 인간의 타락, 짐승의 마음을 가짐(딤후31-5, 단4:16, 20):도덕의 혼란
(9) 교통, 통신, 지식(단12:4): 절대적 신앙의 혼란
(10) 건축 발달(사5:8):내세 신앙의 혼란
Ⅱ. 계시의 경로(1:1)
지금까지 우리는 요한 계시록의 다섯 가지 성격을 공부하였다. 지금부터는 계시의 경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계시의 경로는 계시록 1절에 보면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 천사 →사도 요한 → 종들 → 일곱 교회로 나타나 있다. 이들을 하나 하나 연구해 보자.
1. 계시의 원천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모든 참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다(마11:25, 요17:7-8).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것이다(마4:4, 신8:3).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입 기운을 불어넣은 것이다(딤후3:16).
여기서 성경의 영감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의 영감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기계적 영감설(Mechanical Inspiration)
영감의 과정이 가끔 기계적 방법으로 고찰되어 왔다. 이 견해에 의하면 성서의 저자들은, 성서를 쓸 때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썼다는 것이다.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선택한 말씀으로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고 있는 성령의 필기자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정신 활동은 중지되어, 그들 저작의 내용과 형태에는 어느 면에서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성서의 문체까지도 성령의 문체이라는 견해다.
그러나, 더욱 깊이 연구한 결과, 위와 같은 입장은 전혀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저자들이 그들의 저작을 쓸 때, 다만 피동적인 기구가 아니라, 참된 저자였다는 사실은 성서 자체에서 밝혀졌다. 어떤 때에는 그들이 역사적 연구의 결과를 명백히 제시하여 주기도 하였다.
곧 그들은 누가복음 1:1-4에서와 같이, 조사한 것을 말하였고, 때로는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등, 여러 책에서와 같이 그들의 사료(史料)를 기재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또한 시편이나 예언서, 사도행전이나 서간 등에서도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록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각각 자신의 개인적 문체로 성서를 기록하였다. 이사야의 문체는 에스겔의 그것과 같지 않고, 바울의 문체도 요한의 그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2) 동력적 영감설(Dynamical Inspiration).
18, 19세기의 많은 학자들은 기계적 영감설을 반대하고 동력적 영감설이라 하는 것을 옹호하였다. 이 학설은 성서 저작에 있어서 저자의 일반 영감을 주장하고,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이 있었다는 것, 곧 저술에 있어서 그 목적을 정확히 발견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관념은 부정하고 있다. 이 일반 영감은 저자들의 영원한 특징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감은 우연하게 그들 저작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신자의 영적 개발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정도의 차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성서의 모든 부분에 미쳤으나, 그 정도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꼭 같은 것이 아니다. 성서의 역사서는 교리서와 꼭 같은 분량으로 그것을 나누어 받지 못했다. 이 학설은 일반적으로 성서 저작에 신빙성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오진의 가능성을 특히 역사서 에서 인정하고 있다. 이 학설은 분명히 영감에 대하여 확증해 주는 성서의 보도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에서 초자연적 특징을 박탈하고 성서를 일반계시의 선까지 끌어내려 성서의 무오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3)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
오늘날 일반적으로 개혁파권 내에서 용납하고 있는 영감설은 어떤 학자들 중에는 그것을 동력적 영감설이라 부르는 자도 있지만, 보통 유기적 영감설이라 불리우는 학설이다. "유기적"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저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들 자신의 내적 존재의 법칙과 잘 조화시켜서 유기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저자들의 성품과 기질, 은사와 재능, 교육과 교양, 용어, 어법, 문체 등 이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셨으며, 저자들을 격려하여 저술케 하였고 저자들의 문서 활동에 미치는 죄의 영향을 억압하였으며 또한 저자들을 인도하여 그들의 언어를 선택하고, 그들의 사상을 표현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견해는 분명히 성서의 표현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학설은 성서의 저자를 단순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참 저자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 학설에 의하면, 성서의 저자들은 가끔 하나님의 직접적인 전달을 기록하면서도 그들 자신의 역사적 탐구의 결과를 써 내려갔고, 또한 그들의 죄와 사죄, 희열과 비애, 위험과 은혜로우신 구원 등의 체험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 학설은 또한 각 저자가 그들 자신의 문체에 따라 썼고, 그들 자신의 개인적 특징과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특징을 그 문학적 창작에서 나타냈기 때문에 성서 각 권에는 개체성이 있음을 설명해 주었다. 영감의 성질 뿐 아니라 그 범위에 관해서도 역시 여러 가지 견해의 차이가 있다.
(1) 어떤 학자는 언어의 영감이 아니라 사상의 영감이라고 주장한다.
성서의 영감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와 같은 완전부정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다소 수정해야 한다고 느끼며, 언어 영감보다는 사상 영감을 더 많이 강조한다. 그들에 의하면, 사상은 신적으로 영감 되었으나, 언어는 단순히 인간 저자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견해가 못 된다. 사상은 언어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올 박사(Dr. Or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상은 반드시 형태를 취하며, 언어로써 표현된다. 만일, 영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상과 함께 언어에도 침투하여 표현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로 하여금 전달될 관념의 산 매개체로써 사용되게끔 해야 할 것이다."(Revelation and Inspiration, p. 209)
(2) 영감이 성서의 어떤 부분에만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8세기의 합리주의 영향을 받아, 영감에 관한 막연한 학설들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것은 성서의 역사적 부분의 영감을 부정하고, 공통적으로 교리적 문서에만 영감을 한정시켰다. 이와 같이 교리적 문서에만 한정시킨 영감마저도, 그들은 처음에는 성질상 그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으나 결국에 가서는 순수하게 자연적인 과정으로 곧 특수한 영적 계발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저자들로 하여금 신빙할 만한 증인으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역사적이고 연대적이며 및 과학적인 모든 종류의 오류에는 반증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영감의 정확한 범위에 관해서는 그들 사이에서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잇다. 어떤 하자는 그것을 교리적 사건에 한정시키고, 어떤 학자들은 신약 성서에만 한정시키고, 또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만 한정시키고, 심지어는 산상 보훈만이 영감 된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잇다. 그리고 각자는, 성서의 어떤 부분은 영감 되었으나 어떤 부분은 영감 되지 아니하였다고 제멋대로 단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 성서를 사실상 상실하게 될 것이다.
(3) 성서에 의하면, 영감은 성서의 모든 부분에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 성서의 책들을 "성서" 혹은 "성서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교훈을 보장하기 위하여 자주 성서에 호소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서"에 호소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과 꼭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모든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위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신약 성서의 저자 몇 사람은 반복적으로 구약 성서의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성령의 말씀으로 인용하였다. 이 사실은 특히 히브리서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을 구약성서의 문서들과 동일하게 보았다. 그리고 신약 성서에는, 구약 성서 중 25권의 성서에서 끌어온 인용문이 있는데, 비록 그 인용문의 얼마가 역사서에서 취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 모두가 "성서"로 간주되었다. 우리는 성서를 두 부분으로, 곧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는 휴식하고 정신은 활동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성서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은 휴식하고, 신적인 것은 활동한다든가 혹은 그 반대로 말한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두 면은 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호 침투의 결과로 성서는 한 편은 인간의 작품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창작품으로 그 완전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4) 영감은 성서의 언어 하나 하나에까지 미쳤다.
성서는 축자적으로 영감 되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말이 기계적으로 영감 되었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이 둘을 꼭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축자 영감의 교리에서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성서의 말씀을 받아쓰도록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서 저자로 하여금, 그들의 용어와 표현을 선택함에 있어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그들의 단어를 무시하거나 문체와 표현의 개성을 억제하든가 하지 않고 보호하셨다는 것을 전체로 한다.
어떤 학자는 이 학설을 기계적 영감설과 동일시될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완전 영감설(Plenary Inspir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학설은 성서의 충분한 확증을 받고 있다. 몇 가지 실례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주께서는 기록해야 할 사건들을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출3장; 4장; 6:2; 7:1; 12:1; 래4:1; 6:1;24; 7:22, 28; 수1:1; 4:1; 6:2).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 입에 그의 말씀을 위탁하시고 (렘1:9),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말하도록 자기들을 교도하신다고 말하였다(겔3:4, 10, 11). 바울은 자기의 말을 영이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고전2:13). 그리고, 예수님과 그는 다 같이 단수어의 용어를 사용하였다(마22:43-45; 요10:35; 갈3:16).
성경이 축자 영감인 것을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계시록 9:12 이하에 보면 네 천사가 유프라테스 강에 결박되었다가 그 년, 월, 시에 놓여져서 세계의 ⅓을 파괴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년, 월, 시 앞에 그라는 글자가 있음으로 해서 뜻이 보다 확연해지고 있다. 또 창세기 13:10에 보면, 롯이 맨 처음에 요단들을 바라보니 롯의 마음에 굉장히 좋아 보였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롯이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하였다. 여기서까지에는 롯이 어디까지 타락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의 말씀 일 점 일 획이라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감동 된 것임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만약에 단지 사상만이 영감 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영감된 지의 여부를 판단하겠는가? 인간의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결국 성경은 인간에 의해서 낱낱이 분해되고 파괴될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계시의 원천이다. 계시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이를 주의하여, 우리가 영을 분별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데 혼돈이 없도록 해야 한다.
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 벧후1:21
② 인간의 마음 혹 영으로부터 오는 계시: 겔13:1-7, 16-23. 렘23:16-26, 사40:20
③ 마귀 혹 사탄의 영으로부터 오는 계시: 왕상22:21-24, 삼상18:8-10, 행16:16, 딤전4:1, 요일4:1-5
특별히 오늘날 인간의 마음 또는 사탄의 영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인 양 착각을 하여 대단히 혼란을 일으키는 사례가 대단히 많이 있다. 더구나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계시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인 것으로 오해를 하여 가끔 물의를 빚고 하는 경우가 왕왕 있음에 주의해야겠다.
2. 계시의 주체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주체이다.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계시의 목표이며 완성이다. 특히 요한 계시록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며 주관자이시다.
3. 계시의 중간 중개자는 천사이다.
하나님은 가끔 천사를 계시의 전달자로 사용하셨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의 예언에도 천사를 사용하셨고(창18:1, 16:28, 19:1, 12, 15), 야곱에게 축복을 하실 때도 천사를 보내셨다(창32:24-32, 호12:3-4). 율법을 모세에게 주실 때도 천사를 통해 주셨다(행7:53, 갈3:19).
4. 계시의 최종 중개자는 사도들이다.
첫째, 사도의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부름을 받은 제자들이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한 자들이며 셋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권능을 부여 받은 자들이다. 신약계시는 사도들을 통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말씀을 기록하기 위하여 사도들에게 특별한 권능을 부여하셨고, 신약 성경을 사도들로 완성시켰다. 사도 이후에는 성경을 기록할 계시는 중단되었다(엡3:5)
5. 계시의 수신자들은 주의 종들이다.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른 손으로 붙잡고 특별한 일꾼으로 부르신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정확하게 해석하여 교회에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들의 제일 큰 사명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 일과 해석한 계시를 전하는 방법들도 깊이 연구하고 다듬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인 것이다. 교인들이 잘 깨닫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효과적인 설교에는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가? 첫째는 전하는 표현 기술이 필요하고 둘째는 인격적 감화력이고 셋째는 성령의 능력이다. 이 세가지로 예수님은 자신의 전달코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셨다. 그의 실생활 주변에서 나온비유들 그리고 성찬식 등은 실예가 될 수 있다(본인이 저술한 '교사이신 예수님'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인격적 감화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는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에 항상 실천하는데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성령이 같이 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듣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전하는 자신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귀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요소가 결여되면 성령의 역사가 없는 죽은 설교가 된다.
6. 계시 최종 수신자는 아시아 7교회이다.
아시아 7교회는 신약시대의 모든 교회를 뜻하고 있다. 신약시대는 말세인데 이는 예수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의미한다. 7은 하나님의 완전수이다.
참고로 계시록에 나타난 숫자의 의미를 살펴 보자.
* * 계시록 및 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신령한 의미 * *
1 - 하나님의 유일성의 수.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딤전6:15).
2 - 증거의 수, 전도의 수(마10:1).
3 - 3위 하나님의 수.
4 - 땅의 수(동, 서, 남, 북).
5 - 10의 반 수, 환란 수(계9:5), 노아 홍수 때 물의 기간(창8:3).
6 - 육체의 수 마귀의 수(계13:18, 창1장).
7 - 하나님의 완전 수(게1, 창2:2-3, 7:2).
10 - 인간의 만수, 육체의 만수, 10일간의 환란(계2:7).
12 - 하나님의 인간 구원 수 (3X4).
24 - 유대인 구원 수와 이방인의 구원 수의 합
24장로(계4:4): 모든 교인의 대표.
40 - 고통의 수 : 모세의 금식, 예수님의 금식, 40년 광야 생활.
42 - 고통의 수, 42개월 짓밟히는 기간(계11:2, 13:5), 예수님의 족보 대수(마1장).
1,000 - 굉장히 많은 수(시84:10, 벧후3:8).
1,260 - 복음 전파의 기간, 예언기간의 수(계11:3, 12:6).
144,000 - 12X12X1,000 = 유대인 구원 수 X 이방인 구원수 X 굉징히 많은 수 =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총수 = 셀 수 없는 무리(계7:9).
3½(3.5) - 7의 절반, 특별 환란의 기간(계12:14, 단7:25, 12:7, 계11:9, 단9:27).
Ⅲ. 사도요한의 인사(1:4-8)
사도요한은 3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를 하고 있다. 이 은혜와 평강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가?
1.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계1:4, 4:8).
성부 하나님은 이제도 계셨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가르치는 것이다(신33:27, 욥36:26, 시135:13, 시145:13, 딤전1:17, 사57:15).
2.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계1:4 하, 3:1, 4:5, 5:6).
계시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 영, 등불, 뿔, 눈이 나온다. 이들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성령의 네가지 표현
(1) 7영(Seven Spirits): 7은 하나님의 완전 수이므로 성령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2) 7등불(Seven Lamps): 완전한 빛의 사명을 뜻하고 보좌 앞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있을 수 없다.
(3) 7뿔(Seven Horns): 완전한 권세를 의미하고 하나님의 보좌는 완전한 권세와 주 권을 가지고 있다.
(4) 7눈(Seven Eyes): 완전한 지혜를 뜻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시며 꿰뚫어 보신다.
2) 7영의 다른 성경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 7영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또한 성령이다.
3.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계1:5-8).
성자 예수에 대한 열가지 묘사는 다음과 같다.
1) 충성된 증인은(Faithful Witness) 선지자 직분을(계3:14, 19:11,요14:6) 나타낸다.
2)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는(The first -born of the dead) 제사장 직분을(히4:16, 고전15:20, 골1:18) 나타낸다.
3) 땅의 임금들의 머리는 왕의 직분을(계17:14, 19:16) 나타낸다.
4)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는(He loved us) (갈2:20, 롬8:37) 그의 사랑을 나타낸다.
5) 우리의 죄를 그의 피로 해방하신 이는(혹은 씻으신 이) (마26:28, 요일1:7) 그의 속죄 역사를 나타낸다.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시다(계5:10, 20:6).
7)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가진 분이시다(단7:14, 롬11:36).
8) 재림 하실 분이시다(단7:13, 살전4:17).
그 분이 오실 때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구름을 타고 - 영광을 상징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눅17:24, 34-35).
그를 찌른 - 그리스도와 교회(성도)를 핍박한 사람(행9:4, 마25:32).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마24:30, 계6:14-15).
9) 영원하신 존재이시다(히13:8, 계21:6, 22:13).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자 이시다.
10)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사9:6).
※ 아멘(7절)
(1) 성경에 78번 사용되었다.
(2) 히브리어의 뜻은 진실한, 그러하다, 동의하다의 뜻이다.
(3) 성경에 사용된 대표적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① 성경 말씀을 들을 때(느8:5-6)
②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될 줄 확실히 믿을 때(고후1:20-21)
③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을 진심으로 강조할 때(마13:17, 요5:24)
④ 말씀에 찬성을 요구할 때(민5:22, 신27:15)
⑤ 기도와 찬양에 동감할 때(대상16:36, 고전14:16, 마6:13)
※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 보자.
성서는 한 하나님이 3위(인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이며, 인간 이성으로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인 것이다.
(1) 이 교리의 진술
하나님의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나, 이 한분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삼인격)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 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시며, 또한 성령을 파송할 수 있으시다. 이 삼위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여기에 삼위일체의 참된 신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적본질이 삼위로 분할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삼위는 각자가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를 이루고 있어, 그것은 위(인격) 밖에서나 위를 떠나서를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그 위들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 위가 다른 위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의 질서로 보아 성부가 제일 위요, 성자가 제 이위요, 성령이 제 삼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순서는 역시 창조와 구속사역에 있어서도 보여지고 있다.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곧, 성부는 성자를 발생(generate)하고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발생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proceed)된다. 이 교리는 신앙의 위대한 신비들 중의 하나로, 인간의 이해를 춸씬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2) 삼위일체 교리의 성서적 증거
① 구약의 증거
구약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더러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에게는 일위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으며(창1:26, 11:7),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인격(위)으로 묘사되었으며(창16:7-13, 18:1-21, 19:1-22), 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졌다(사48:16, 63:10). 이 외에도 삼위가 다소 명백히 지시된 곳도 약간 있다(사48:16, 61:1, 63:9, 10).
② 신약의 증거
신약의 증거가 구약의 증거보다 더 명확하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성자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가 명백히 언급된 구절들이 여러 군데 있다. 곧 예수님의 세례에서(눅3:21, 22), 예수님의 고별 강화에서(요14-16장), 예수님의 대명령에서(마28:19), 사도의 축복에서(고후13:13), 또는 그외 구절에서(눅1:35, 고전12:4-6, 벧전1:2) 언급된 것이다.
(3)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그릇된 사상
초대교회의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세 신적존재로 보고 사실상 삼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싸벨리우스 파(Sabellian)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현현(神的顯現)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수여(律法授與)에서는 성부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 위로 축소되어 버렸다.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과 종교개혁기의 소씨니안 파(Socinian)와 오늘날의 유니태리안 파(Unitarian)와 근대주의자들은 다같이, 삼위일체는 성부이신 하나님과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신적 세력으로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도 역시 하나님을 존재에서 뿐만 아니라, 위에 있어서도 한 분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사실상 삼위일체의 교리를 파괴해 버렸다.
정리하면 삼위의 하나님 혹은 복수의 개념은 창1:1-3, 1:26-27, 11:7, 마3:16-17, 마28:19-20, 고후13:13, 요17:22 등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신6:4, 시83:18, 고전8:6, 딤전6:15 등에 언급되었다. 삼위가 일체임은 7영(계1:4), 그리스도의 영(3:1, 5:6), 하나님의 영(4:5, 요17:21-22, 요10:30, 요일5:6-8)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추적 설명으로는 태양을 들 수 있고(본체, 빛, 열↔성부, 성자, 성령), 물체로도 설명할 수 있다(공간, 실체, 시간↔성부, 성자, 성령).
4. 은혜와 평강(1:5)
1)은혜
은혜와 평강을 주신분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신앙에서 은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웨슬레 신학은 은총에 중점을 둔 은혜신학이고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인간에게 구원이 있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1) 은혜의 원천
은혜의 원천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계1:4-5). 약1:17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라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라고 하였고, 요1:14-17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라고 했다. 또 히10:29에는 은혜의 성령을 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상은 신약에서 살펴본 것이고 구약에서는 지성소가 은혜 베푸는 곳이었다. 따라서 지성소가 다른 말로는 '시은소'라고 하기도 한다.
(2) 은혜의 정의
헬라어로는 카리스( )인데 은혜에 대한 신학적 정의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인간에게 거저 베푸시는 특별 호의 및 선물이다.
(3) 은혜의 종류
① 일반 은총
모든 인류에게 공동적으로 혹은 특별하게 베푸시는 은혜이다. 공통적인 은혜는 자연적인 혜택인데, 공기, 땅, 하늘, 비, 태양, 바다는 누구든지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마5:45, 시136:5-8). 개인적인 은혜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주신다. 예를 들면 수명, 경제적 축복, 일반적인 축복(전5:18-20, 9:9, 11) 등을 들 수 있다.
일반 은총은 일반 계시(자연계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자연계시는 세가지 수단으로 시행된다. 자연법칙, 역사, 인간의 마음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 은총을 잘 이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잘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거의 이 일반 은총과 자연계시를 통하여 역사하고 계신다.
즉 자연법칙을 무시하면 그에 상응하는 응징을 받게 된다. 신명기 23장에 보면 대소변에 관한 위생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고 마태복음 이십 사장에 환난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했는데 이는 겨울은 일반계시를 어기는 것이 되고 안식을도 계시를 어기게 되는 것이다. 겨울의 피난은 얼마나 어려운 것이 되겠는가? 따라서 이러한 자연법칙을 어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 가운데 위장병, 간질환, 신경질환이 많이 있는데 이는 자연계시를 무시한 채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게으르면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기도와 더불어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을 충분히 이용하여야 개인생활이 풍성하여지고 교회도 부흥할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에게 수단이 된 것은 물매돌의 솜씨였다. 이것은 그의 직업에 따른 기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매개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능력을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통로를 제공하는 것은 인간 자신인 것이다.
② 특별 은총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에게만 특별히 베푸시는 은혜인데 (롬9:11-24) 여기에 두가지 종류가 있다.
가. 공통적인 은혜(딛2:11)
모든 선택받은 사람은 공통적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 이 구원에는 다음과 같은 삼단계 과정이 있다(고후1:10). 첫재는 과거적 구원인데 이는 중생, 회심, 믿음, 칭의, 양자된 것이고, 둘째는 현재적 구원인데 성화를 말한다. 이는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어지는 구원이고, 셋째는 미래적 구원으로써 영화 및 부활이다.
나. 개인적 은혜(롬12:3-4)
개인에 따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여 각자의 할 일을 찾아 하나님께 충성할 때 우리 인생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인지 믿음의 분량이 얼마인지를 정확히 깨닫고 인생을 설계하여야 실패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특강 : 성령의 은사
1. 성령 은사의 본질
성도의 영적 생활과 관련된 성령의 교리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경험에서 더 직접적이며 긴박한 주제는 없을 것이다. 교리적 관점과 성령의 정확한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보다 중대한 여러 주제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성령의 사역은 신자들의 경험의 모든 실제성이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보다 우선적 위치를 점령하는 것은 없다. 신자들의 성화, 구원의 확신, 영적 이해, 봉사, 기도, 예배 등 이 모든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신자들에 대한 성령의 사역의 교리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영적 축복과 유용성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며, 따라서 이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이들의 의무는 이 교리를 연구하고 선포하는 일에 각별히 유의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는 초기부터 영적 ㅇ사의 교리에 대하여 상극하는 두 개의 극단에 의해 괴로움을 받아 왔다. 처음부터 고린도교회처럼 영적 은사의 남용이 있어 왔다.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이 교리와 관련된 거친 유형의 남용들이 발견되어 진다. 그러나 반면에 교회의 사역을 결정하고 모든 결실에 있어서 본질적인 이 영적은사의 중요성을 감사하지 못한 심각한 실패도 함께 존재하여 온 것이다. 이 교리에 대한 적절한 균형이 성경에서 발견되는데 교리의 남용은 성경이 참으로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태만히 한 때문임이 두드러지게 지적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성경계시에 있어서 월부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성령의 은사와 본질은 성경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렇게 해야만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수 있다.
둘째로 기독교 시대에 분명히 존재하는 영적 은사들은 잘 검토되고 분석되어야만 한다. 이들이 없이는 구원받은 신자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은사들이 제공된 것이다.
셋째로 사도시대에 발견되는 영적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에도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포함되어야 하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사도들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졌다가 그 이후에는 중지된 일시적 영적 은사들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퍼얼만(Pearlman)은 바울이 세 가지 면에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째로 성령의 은사는 카리스마타( )인데, 이것은 성령이 주신 여러 가지 은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둘째로 성령의 역사는 디아코니아( )인데, 이는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주어진 여러 가지 봉사(직임)를 가리키며, 셋째로 성령은사는 에네르게마타( )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여러 면을 가리켜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Roy B. ? 는 성령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 성경을 살펴볼 대, 모든 교인들이 제각기 어떠한 은사든지 소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12:11, 롬12:3, 벧전4:10, 엡4:7).
㉡ 은사들은 아주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이 있다(고전12:4-5, 롬12:6-8, 고전12:4-11, 28-30, 엡4:7-12).
㉢ 영적인 은사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베풀어진다(고전12:11, 18, 롬12:3).
㉣ 사도 시대에만 구사된 일시적 은사도 있었지만, 영속적인 은사도 있다.
㉤ 영적인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덕을 세우도록 주어진다. 따라서 은사마다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구사해야 한다.
2. 성령의 은사의 성질
신령한 은사의 본성에 대하여 신약 성경에 이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단어들이 나타나 있다. 은사의 주제에 대한 신약의 가장 중요한 본문은 고리도전서12-14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본문이 시작하는 처음 구절에는 "신령한 것"(The Things of The spirit)이라는 표현이 정관사와 함께 등장하는데, 원문에는 프뉴마티콘( ) 이라는 단어로 소개되었다. 이 단어는 은사들의 원천이요, 영력이신 성령께 주의를 끌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단수를 뜻하는 카리스마톤( )이라는 표현이 언급되어 있는데 "은혜의 한 선물이라는 말로써 영적 은사들 즉 비상한 권능들, 어떤 그의 영혼 속에서 성령에 의해 역사된 신적 은혜의 능력 때문이다. 이 말은 신령한 은사들의 근거와 본질을 나타낸다.
이들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 받을 자격이 전적으로 없는 이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능력과 이들의 작용은 완전히 하나님 그 분 한 분 때문인 것이다. 이 사상은 "주는 것"을 뜻하는 동사 디도타이( )가 사용됨으로써 또한 강조되었다(고린도전서12:7). 이런 신령한 은사에 대한 모든 개념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이나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어떤 영적 특성을 떠나 오직 하나님이 초자연적 역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몇 가지 요소들이 분명히 증거한다.
영적 은사(Spiritual Gifts)와 은사있는 사람(Gifted Man)에 대한 구별을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개념을 분리할 수는 없으나 영적 은사는 개인들에 의해 소유된 초자연적인 능력들과 은사를 지닌 사람들은 몸인 교회를 섬기기 위한 목적들로 교회 내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사람들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12-14장의 중요 사상은 영적 은사들에 대한 것이다. 에베소서 4장11절에는 교회에 주신 은사를 지닌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고린도전서가 영적 은사와 은사를 지닌 사람들에 대하여 다 언급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엄격하게 분리된 개념들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 은사가 제삼위 인격의 사역임에 반하여 은사를 지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나 혹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영적 은사의 영역이 특히 성령의 교리에 속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연구의 주요 관심사이다.
영적 은사에 대한 핵심 단어인 카리스마( )라는 단어를 우리는 자주 신약에서 발견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서 보는 은사들은 고리도전서 12-14장의 중요 본문에서 다 볼 수 있는 것들로 이 본문에 추가할 별다른 것이 없다. 베드로전서의 한 구절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것들은 바울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상당히 많은 은사들은 비상한 권능으로 나타나는 영적 은사들과 무관하다. 로마서 5장 15-16절에 나타나는 은사는 칭의의 은사이며 로마서 5장 23절에서는 영생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각 개인을 향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을 따라 어떤 이들이 결혼을 해야 하느냐, 안 하는냐 하는 것도 고린도전서 7장 7절에 은사로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로부터 결과되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축복은 고린도후서 1장 11절에 은사로 칭호되고 잇다.
로마서 1장 11절에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겠다고 말한다. 이 은사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타나날 뚜렷한 축복의 의미나 특별한 권능을 베풀어 주는 특별한 뜻에서나 혹은 적절한 영적 은사를 뜻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은 아마도 디모데에게 신령한 은사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측면에서 비범한 권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여기서 안수의 행위는 하나님에 의해 이미 제공된 은사를 엄숙히 인정하여 이 은사가 완전히 활용되도록 구별하려는 뜻으로 사용된 것 같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지 사도시대 이후에는 하나님 외의 어느 누구도 이 영적 은사들을 나눠 줄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근거는 전혀 없다.
그 밖의 은사들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은혜의 표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사역에서 개인의 사명이 성취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비상한 권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영적 은사의 독특한 성격
① 주권적으로 수여되는 영적 은사들
신령한 은사들은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허락된 것으로 계시되어 있고, 따라서 이들은 인간이 추구할 대상이 못된다. 더 중요한 은사들을 등한히 하면서 덜 중요한 은사들을 높이는 고린도인들에게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린도전서12:31, 최선의 은사를 추구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서신에서 신령한 은사를 구하라는 문제에 침묵을 한 것을 보면 분명히 이는 권면할 만한 명제는 못 된다.
은사의 수여는 주권적이기 때문에 이는 영성(靈性)의 문제가 아니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더 큰 영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음에 반하여 주님께 순복한 사람이 더 작은 영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11)고 하였다. 물론 신자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적절한 적응은 은사의 적절한 활용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영성(靈性) 그 자체가 영적 은사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영적 은사들은 구원과 동시에 최초의 은혜를 소유할 때 함께 받는 것인지, 아니면 그 후에 얻는 후속적 사역에 속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어 왔다. 성경은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나 신생(新生)의 순간에 일어나는 성령의 세례(침례)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성질에서 볼 때, 비록 이 은사들이 즉각적으로 관찰되거나 활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적 은사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성령 세례(침례)의 때와 일치하여 주어진다고 추론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은사의 수여가 세례(침례)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할지라고 영적 은사는 성령의 세례(침례)에 수반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자연적 능력과 은사의 요소들이 신생아에게 잠재되어 있는 자연인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적 은사와도 비유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거듭날 때 영적 은사가 수여된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적 영적 영역에서 양자 다 동일하게 어떤 부수적 은사를 얻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문제는 은사의 적절한 사용과 개발인 것이다.
②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종의 영적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11)고 하였고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11)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체의 각 부분"(고전12:27)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 것"(롬12:5)이다. 그 은사가 얼마나 적은 것이든 또한 그리 중요한지 않은 것이든 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필수적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뿐 아니라 몸이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한 것"(고전12:22)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신적 목적이 있으며 영적 은사들은 이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사역을 성취하도록 성경의 도전을 받고 있다(벧전4:10).
③ 은사는 가치가 다르다.
기독교 신앙의 특권은 동등하지만 은사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 은사의 성격상 어떤 은사들은 다른 은사보다 더 효과적이며 필수적인 것이다. 바울은 예언은 은사와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14:5)고 하였고, 또 다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하였다.
④ 영적 은사는 사랑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증거하는 대로 영적 은사가 유익하려면, 사랑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영적 은사 그 자체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열매인 신적 사랑에 감화되어 적절한 방법으로 활용될 때에만, 효과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를 맺는다.
⑤ 어떤 은사는 일시적(Temporary)이다.
어떤 영적 은사의 특성은 그 수여와 사용에 있어서 일시적이다.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이 초대 사도 tles 영적 은사들을 오늘날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어떤 은사는 완전히 현재의 시대에만 특징을 짓고 있다. 따라서, 이 각각의 은사에 대한 분류는 개별적(個別的)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⑥ 영적 은사와 자연적 은사는 다르다.
영적 은사들에 대한 결론적 특색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 은사와 자연적 은사 사이의 분명한 대조이다. 하나님께서 자연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선택하시기도 하나 영적 은사는 자연적 출생이 아닌 영적 출생에 속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신령한 은사의 특질은 구원받기 전에는 개인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영적 은사는 옛 성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 성품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은사는 자연적 능력의 확대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이는 한 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할 때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여 받는 초자연적인 선물인 것이다.
우리는 자주 위대한 자연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전혀 그 재능을 사용치 못하고 있는가 하면, 반면에 자연적 재능이 별로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영적 은사란 비록 유리한 상황 아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주실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4. 영적 은사의 목적(고린도전서 14장 중심으로)
고린도전서 14장에는 적어도 성령께서 나타내 주시는 은사의 다섯 가지 윤곽이 분명하게 세워져 있다. 은사는 성령에 속하지만 인간을 통해서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성도들에 의해서 규정되고 판단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 나타나는 은사의 다섯 가지 윤곽도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첫째로 성령께서 은사를 나타내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높이신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6장 13,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라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몰갠(G.C. Morg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성령과 사귀는 정도를 측정하는 데는 우리가 성령을 아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서 그리스도를 알려 주려고 오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어느때든지 참으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때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은사는 결코 개인을 높이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을 많은 사람이 두려워 하는 이유는, 어떤 이들이 하나님을 찬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그 사람을 찬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좋다고 인정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다른 데 주시지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영광을 받으실 그 임재와 능력을 억제하실 것이다.
둘째로 성령께서 은사를 나타내 주시는 것은 항상 교회의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에는 교회는 한 몸이며 모든 교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한 덩어리가 된다. 성령의 은사의 목적은 이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눈은 귀보다 위에 올라서서 그 자체를 높이지 못한다"고 했다. 눈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유익을 위해서 한다. 발은 발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온 몸을 위해서 일한다. 손은 손만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온 몸을 위해서 활동한다.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것은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이 점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전서 14장 12절에서, "무엇보다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구하시오"라고 말하며, 5절로 돌아거사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린도전서 12장 5절에 나오는 "직임"은 헬라어로 디아코니온( )으로 이것은 "섬기는 일"이라는 말로서 식사를 감독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식량을 준비하는 일에 관련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식사를 준비하고 식단을 짜는 일에도 관련되는 말이다. 이 말은 누가복음 10장 40절에 마르다가 접대하는 일에도 쓰여졌고,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후에 천사가 예수님께 시중든 일에도 쓰여졌다.(마4:11, 막1:3).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명확하게 해 주는 점은 원시 기독교가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한 모든 중요한 행동을 디아코니아( )라는 말로 생각하여 묘사할 줄 알고 있었고(엡4:11 이하), 이 공동체는 은사가 활동하는 양태를 따라 구별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배와는 따로 수행되는 것이다.
어느 때든지 교회에 축복이 되지 못하고 덕을 세우지 못하고 은사를 나타내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의 마음에 합당하게 은사를 나타내는 것은 유익하고 적절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으로 영적인 가치를 가지기를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둘이 공적으로 가져주기를 원한다. 만일 여러분이 개인적인 잔치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골방에서 개인적으로 예배할 때 하라.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지 않는 영적 잔치는 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같이 먹지 않는데 그 앞에서 먹는다는 것은 버릇없는 행동이다. 성령께서 은사를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하고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셋째로 성령의 나타나심은 성도의 유익과 성도를 온전케하기 위함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라고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서 바울이 밝히고 있다. 영적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들의 영적 직무를 마치 편리한 도구를 가지고 일하듯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은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보다 더 용이하게 자신들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 자신들의 영적 은사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기운찬 자존심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이 말은 결코 그들이 자신들을 과대 평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은사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고전12:6)."라고 말하는 일이 없게 된다. 자신들을 "지혜롭게 생각하기" 시작할 때, 열등감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한 일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겸손도 도를 지나면 곤란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지나치게 겸손한 나머지 몸에 실질적인 유익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잘못된 겸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겸손은 흔히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는 것이 오만한 일이라 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은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를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계략적인 동기에서 은사와는 연관을 맺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경우 겸손은 불순종을 은폐하는데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영적 은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러한 부정적인 자세로 인해 수렁에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비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또 이런 살사람들은 자신들의 그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그 은사에 대하여 감사하며, 몸의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 효과적으로 일한다.
성령 은사의 개인적인 유익의 또 다른 목적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이 제시한 대로 성도를 온전케 하려 함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 인격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15). 성령이 각 성도들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신 가장 큰 목적은 성도들 각 사람이 예수의 형상을 이루며, 인격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함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에 대하여 계속 설명하고 13장에 가서 은사의 사용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인데,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제시한 사랑의 사람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넷째로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성경의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하기 위함이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것은 결코 성경의 지위를 손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 은사들은 언제나 성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난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 분은 거의 40명의 사람들로 1,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책을 쓰도록 영감을 주신 분이다. 성령은 성도들의 교사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와 있는 학생인 것이다. 성령은 선생님이시며 성경은 교과서이다. 그 선생님은 그 교과서의 저자이다. 성도들은 이 결론과 충돌하는 자리에 뛰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성경은 이것을 아주 명백히 해주고 있다. 갈라디아서 1장 6-9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이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성령께서 나타내 주시는 것은 성경과 일치한다. 계시를 받은 성경의 여러 책들이 있고 그 계시는 특히 요한 계시록에 해당되지만, 내 생각으로는 성경 전체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본다. 요한계시록 22장 18,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 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을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령께서 나타내 주시는 것은 언제나 성경과 조화된다.
다섯째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목적은 전도를 위한 것이다. 성령께서 나타내 주시는 은사는 항상 직접 또는 간접으로 잃은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를 통해서 성령께서 은사를 나타내 주신 책이다. 사도행전은 복음전도의 책이다. 사도행전 속에는 전기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전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