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예언서와 요한계시록의 해석 -안유섭 목사(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1. 구약 예언서의 해석 흔히 예언서를 읽으면서 어렵다고 한다. 그 까닭은 예언에서 미래적인 요소를 발견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언서가 누구를 위하여 씌어진 책인지를 생각하면서, 이스라엘 당시대의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것이다. 예언의 사전적인 개념은 앞에 되어질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모든 예언서의 관점은 매우 현실적이다. 즉, 예언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민족에게 멸망당하기 직전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의식이 강하게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언이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애절하게 회개를 부르짖는 선지자들의 외침인 것이다. 그들이 비록 미래의 일을 말하고는 있어도 그것은 먼 훗날의 인류를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당장에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위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긴장감 넘치게 외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언은 일차적인 의미로 끝나지 않고,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즉, 일차적으로는 선지자들의 활동 당시라고 할 수 있는 북 이스라엘왕국과 남 유대왕국 백성들에게 절박한 심판과 회개 촉구의 메시지이지만, 이로부터 영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교훈을 남기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인류 최후의 심판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여야 한다. [선지자들의 시대적 배경] 최초의 선지자를 모세라고 말하기도 하나, 그는 율법시대를 연 주인공으로서 후대의 선지자들과는 다른 형태의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왕국분열 이전까지 몇 명의 선지자들이 등장하지만 사역이 활발하지는 않았다. 실제적으로 선지자들이 활발하게 사역하기 시작한 것은 왕국이 분열된 이후부터이며, 그 중에서도 북 이스라엘의 7대왕으로 가장 악한 아합왕 시대인 BC 850년경 활약한 엘리야 선지자는 후대 선지자들의 대선배격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도 못지 않은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한 백년쯤 지난 다음인 BC 760경부터 400년경까지 삼사백년간의 기간은 선지자들이 가장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이다. 먼저 북 이스라엘 말기(末期)에 호세아 선지자와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북 왕조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 시절 최고의 번영기를 누리던 때부터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를 말한다. 그때 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빈부의 차이는 심해졌다. 또 종교사회적으로는 지도자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도덕이 문란하였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형식적인 신앙만이 존재하였다.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심판의 칼을 드실 때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와 아모스(남쪽 출신)선지자를 보내어 백성들에게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님은 한편으로 그들의 적국이었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에도 요나 선지자를 보내어 심판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니느웨는 금식하고 회개하였는데, 이스라엘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북 이스라엘 말기가 남 왕국 유다에게는 웃시야왕부터 히스기야왕까지에 해당한다. 이때 남 유다에서는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였다. 남 유다 역시 히스기야왕 전후에 솔로몬 시대를 능가하는 제 2전성기를 누렸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형식적 종교 행위로 인하여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유대주의적 문화가 붕괴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사야 같이 유능한 선지자가 열심히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심지가 다 된 촛불처럼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에 또 나훔 선지자를 보내어 심판을 선포하시는데, 이는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나타내신 것이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남조 유다 왕국만 남았다가 그들도 결국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고 만다. 남 유다가 멸망으로 내리달리는 시대인 요시야왕부터 시드기야까지 말기(末期)에 예레미야와 하박국 그리고 스바냐 선지자가 활약하였다. 이때는 유다의 격동기라고 할 수 있었는데, 선지자들은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지금 당장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자고 부르짖었다. 특히 예레미야의 경우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여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선포하다가 매국노의 누명을 쓰기도 하였다. 드디어 남 유다 마저 멸망당했을 때,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민족의 이주정책으로 혼합되어 단일민족의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사마리아 족이 되고 말았으나, 그래도 남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었다. 그제야 유대인들은 깨달았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율법을 저버리며 우상숭배의 결과로 인하여 그들에게 남은 것은 나라를 빼앗기고 온 세상을 떠도는 거지와 같은 모습이 된 자신들의 실체를...... 멸망 직후에 제사장과 서기관을 비롯하여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자들과 백성들 중에서도 유능한 사람들은 모조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빼앗긴 땅 팔레스타인 에 남은 자들은 힘없고 소외된 백성들뿐이었다. 그때 거기 남아서 활동한 선지자는 요엘과 오바댜이다. 오바댜는 에돔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면서 유다가 언젠가 회복될 것을 예언하였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도 선지자가 있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활동하였는데, 바로 에스겔과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꿈의 해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었다. 에스겔은 많은 환상을 통해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야 왕국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새로운 성전의 개념과 새로운 에배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무엇인지 환상을 통해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포로 귀환시대에 활약한 선지자들이 있다.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유다 민족에게 본토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바사 제국 시대에 세 번에 걸친 귀환이 있게 된다. 1차 귀환 때는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이 급하였다. 이때 활약한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이다. 1차 귀환을 영도한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였는데, 성전을 짓던 중 아닥사스다 1세 때 방해로 중단되었는데, 다리오 1세 때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다시 중건되어 마침내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된다. 2차 귀환은 에스라가 영도하였는데, 그는 유다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법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율법 회복과 이방족속과의 혼인을 강하게 금지시킨다. 돌아온 유다족속들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감행하였다. 이때부터 매우 유대인들이 매우 율법적인 사람들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3차 귀환은 느헤미야가 영도하였는데, 그는 종교지도자라기 보다 정치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무튼 그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고 유다 왕국이 회복되기를 강하게 소망하며 에스라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회복에 앞장섰다. 끝으로 말라기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새 성전을 짓고 율법을 회복하며 하나님께 일시적으로 순종하다가 또다시 그 열정이 식어가고 있는 어느 때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곧 타락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그후 신약 시대까지 선지자는 더 이상 없었다. [예언의 범주와 종류] 유대인들의 성경인 타나크(ךנת)에 의하면, 예언서인 네비임(םיאבנ)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소선지서 12권의 순수한 예언서뿐만 아니라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까지 포함한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언을 미리 말한다는 개념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율법을 삶 속에서 적용하던 모든 것을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즉, 율법의 해석과 그 적용을 모두 예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셉투아진트(70인역)의 배열법에 따라 대선지서 5권과 소선지서 12권을 합한 17권의 책만을 예언서로 간주한다. 비록 기독교가 이처럼 예언적인 요소만을 고려하여 예언서를 별도로 분류하였을 지라도 예언서에서 역사적인 면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관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17권의 예언서의 내용 가운데 미래에 되어질 일에 대하여 직접 예고한 것은 전체의 10 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예언서의 대부분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예언을 통해 당시대 백성들에게 임박한 심판의 긴박한 상황을 말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회복하도록 교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예언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앞에 되어질 일을 미리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장래의 일을 예견하고 예고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예언들은 성취 여부에 따라 다음의 다섯 가지 정도로 분류한다. 첫째는 즉각적으로 성취된 예언으로 예고가 있은 후에 곧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바로에게 십재앙을 선포하고 그 즉시 이루어진 것 등이다. 또 렘 38:18에서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예언은 BC 586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곧 이루어졌다. 둘째는 구약시대에 성취된 것들인데, 아마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예언서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에 관한 예언은 모두 구약 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끔찍한 예언이지만 신 28:53에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국에게 둘러싸이고 그 성읍에서 자식의 고기를 먹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애 4:10에 보면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 수 6:26에서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는 예언은 약 600-700년 뒤에 왕상 16:34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즉,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가 말해주고 있다. 넷째는 구약의 예언이 신약시대에 성취된 것들이다. 이는 메시야 예언을 비롯하여 여호와의 두려운 심판의 날과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예언들로서 주님의 성육신과 공생애 사역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하여 대부분 성취되었다. 이 범주에 드는 예언들 역시 구약시대 성취된 예언 못지 않게 많을 것이다. 그 다음 신약시대 예언이 신약시대에 성취된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예언하신 것이 그렇다. 마 16:21에서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 주님이 마 24:2-3에서 예언하신 예루살렘 멸망과 인자의 오심과 세상 끝에 관한 예언도 신약시대에 이루어졌다. 즉, 주님께서 마 10:23을 비롯하여 마 16:28과 마 24:34에서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서 인자가 다시 오리라’는 예언을 하셨는데 AD 70년의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주님의 심판을 통해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는 요 14:18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오리라’는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문자주의자들도 주님의 예언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예언은 말씀의 의미는 문자적과 영적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신약시대에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여기서 말한 인자의 오심과 세상 끝은 모든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두려운 날(야곱의 환난의 날)에 대한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그 날은 전 인류에게 최후가 도래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세상이 끝났으며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셨다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예언은 성격상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날은 인류 최후의 말의 모형(Type)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 시간과 공간이 완성되고 모든 자가 하나님 앞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 최후의 날은 올 것이다. 그때 주님은 마지막으로 우리 앞에 임하셔서 모든 자를 심판하시고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 또 마 27:24-25에서 빌라도가 주님을 놓아주지 못하고 자신은 주님의 피에 대해 무죄하다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그 피 값을 자신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돌리라고 부르짖었다. 이는 그들이 예언의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 말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한 예언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 후에 제일 천대받는 종족으로 세상을 떠돌았으며 끊임없이 학대와 핍박을 당하다가 1,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의 나치 정권에 의하여 수백만명이 끔찍하게 학살당하는 피 값을 치르였다. 마지막으로 어떤 예언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주님의 최후의 심판과 성도들이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될 것에 대한 모든 예언들이다. 즉, 궁극적인 영원한 나라의 도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인류에 대한 최후의 날이 기다리고 있으며, 주님의 최후의 심판이 남아있다. [예언의 형식들] 예언을 성경의 한 문학 장르로 이해하기 위하여 어떤 형식이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문학 양식을 채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의 세 가지 형식이다. 첫째는 예언이 소송(Lawsuit)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언의 형식이 마치 소송을 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그래서 처음에 피고인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소환되고, 이어서 그들의 죄악에 대한 고소장이 낭독되면서 증거로서 죄악의 모습이 낱낱이 고발된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심판을 언도하시는 것으로 완결되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사 3:13-26을 보면, 13-14절에서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라는 말씀은 법정이 소집되고 유다 족속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는 장면이다. 다음 14절 하반절부터 16절까지 고소장이 낭독되고 증거들에 의해 유죄가 입증된다.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결국 하나님은 유죄인 그들에게 17-26절에서 심판을 언도하신다. 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언약에 명시된 질병과 기근과 결핍과 죽음 등 온갖 종류의 형벌이 그들 위에 내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소송이라는 비유적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유다 민족이 극심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전하는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 소송예언은 호 3:3-17과 호 4:1-19 등이 있다. 둘째는 화(Woe) 예언의 형식이다. 화(禍)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이나 죽음에 직면하여 슬퍼하며 ‘화로다’라고 외치던 언어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잘 아는 화의 개념을 통해 임박한 멸망을 예고함으로써 곧 얼마나 심각한 상태가 올 것인지 누구나 알아차리도록 만드셨다. 이 형식에서는 화의 선언과 화의 원인 그리고 화의 임박한 예고의 세 가지 요소로 특징 지어진다. 예를 들어 미 2:1-5를 보면, 1절에서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화를 선언하시는 내용이다. 그리고 2절에서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라는 말씀은 화의 원인이다. 다음 3절의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씀부터 5절까지는 화가 임박하였음을 예고하시는 내용이다. 그밖에 합 2:6-8이나 습 2:5-7도 화 예언으로 되어있다. 세 번째는 약속(Promise)으로 된 예언이다. 이는 구원의 약속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도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먼저 미래에 대하여 어떤 날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 날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며, 끝으로 축복을 약속한다. 예를 들어 암 9:11-15을 보면, 11절에서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라고 할 때 ‘그 날’이 언급된다. 다음은 11절과 12절에서 다윗의 퇴락한 장막을 일으키고 에돔의 남은 자와 만국을 기업을 얻는다는 말씀을 통해 새로운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13-15절에서 축복의 상징인 생명과 건강, 경제적 번영과 농산물의 풍성한 수확, 존경과 안전과 보호 등이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그밖의 약속 예언으로는 호 2:16-22나 사 45:1-7, 렘 31:1-9 등이 있다. [예언의 원천] 선지자들은 어떻게 예언을 하게 되었는가? 즉, 예언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계시하시거나 혹은 꿈과 황홀경 등을 통해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예언을 말하게 하셨다. 즉,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그들과 접촉하셔서 하나님의 비밀을 가르치시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조차 거짓 예언과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온다. 렘 14: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면 예언의 원천이 되는 각각의 방법들은 어떤 특징을 가졌으며,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예언의 원천은 말씀과 환상이라는 두 가지 재료로부터 나온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거나 아니면 환상을 봄으로써 예언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방법은 다시 직접계시를 통한 방법과 무의식상태에서 주시는 방법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직접계시(Revelation)는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직접 접촉하여 받는 것이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다. 또한 그 원천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제일 중요하게 여김을 받는다. 선지자들은 대부분 의식상태(Conscious)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말씀을 듣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그들에게 임하여 예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왕하 20:1-6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기도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라는 표현은 선지자들에 의해 빈번하게 사용되는 문구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상태에서 뿐 아니라 무의식상태(Unconscious)에서도 주어졌다. 무의식상태는 수면 시에 꿈(Dream)을 꾸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경우도 있다. 민 12:6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꿈으로 말씀하기도 한다고 하셨다. 창 20:2-6에서는 블레셋 그랄 왕인 아비멜렉이 모르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꿈에서 그에게 죽음을 경고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환상(Illusion)을 봄으로써 비밀을 깨닫고 예언을 하는 경우인데, 환상이란 실제가 아닌 어떤 환영(幻影)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상(異像)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환상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보는 것과 무의식상태에서 보는 것으로 구분된다. 많은 경우 환상은 꿈속에서 주어졌다. 꿈은 수면을 취한 상태에서 무의식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구약의 요셉과 다니엘은 꿈속에서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밖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환상을 통하여 예언을 하였다. 마지막은 황홀경(Ecstacy)을 통하여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경우이다. 황홀경이란 수면을 취하지 않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무의식 세계로 빠져들어 경험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아지경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겪은 황홀경은 보통의 경우처럼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비합리적 방법으로 날뛰는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홀경 상태에서 그들은 오히려 정신력이 상승했으며 영적 능력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바울 사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홀연히 빛과 소리로 임하신 주님을 만날 때 다른 사람들은 뇌성치는 소리와 번쩍이는 빛만 보았다(행 9:7, 행 22:9). 그러나 바울은 분명한 의식 속에서 하늘로부터 비취는 빛을 보고 또 주님의 음성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는 황홀경 상태에서 주님을 만난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참된 예언이 있으며 참된 선지자들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 참된 선지자와 참된 예언이 있다면 그들의 말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것이므로 성경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히 1:2에서 ‘이 모든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주님의 사역이 완성됨으로써 종말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큰 범주의 종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완성된 성경을 통해서 아들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예언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다. 예언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면 성도들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14:1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며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는 구절을 근거로 지금도 예언이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자신이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속이는 자들도 여기저기에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그러한 속임에 넘어가고 있는데, 보통은 좀 이상한 사람들이 그런데 빠지게 되어있지만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언의 참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언의 은사는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말을 너도나도 하고 있다면 성도들이 얼마나 큰 혼란에 빠지겠는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예언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예언의 은사인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네비임이 토라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면, 참된 예언과 그렇지 않은 예언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꿈에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꾸며서 나타나는 개꿈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간절한 소원이 꿈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사랑이나 미움과 증오가 꿈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전 5:3에는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긴다고 하였는데, 대부분의 꿈은 그저 자신의 잠재의식이 반영된 헛 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근거로 억지해몽을 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조작하는 것은 큰 죄악을 저지르는 행위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예언의 특징과 해석] (예언의 다중적 성취) 예언에는 내용 면에서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이 있으며, 또한 시간적으로 가깝고 먼 원근 통시적(通時的) 성취성이 있다. 먼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이란 하나님께서 백성을 심판하신다고 할 때는 거의 항상 그들에게 구원도 베푸실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예언할 때 임박한 심판과 회개를 선포하고 구원도 함께 선포함으로써 남은 자들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다음 원근 통시적 성취성이란 한 가지 예언이 시간적으로 차이나는 두 개 이상의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 7:14에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은 사 8:3에서 홀아비로 있던 이사야가 처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됨으로써 일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라, 메시야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서 마 1:23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즉, 이사야의 아들의 출생은 메시야의 모형이었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심으로써 원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예언이 시간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건으로 성취된 것을 원근 통시적 성취라고 말한다. 또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마치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경우도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사건을 한 사건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하나로 보이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선지자들은 예언을 하면서 두 개의 사건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본 예들이 많다. 구약의 모든 예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은 심판에 관한 예언이다. 심판은 여러 차례 예고되었는데, 심판에는 멸망과 회복의 양면성이 있을 뿐 아니라, 단회적인 심판이 아닌 몇 차례에 걸친 심판이 오버랩(Overlap)되어 원근 통시적으로 예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북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 예언이다.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 심판을 예고할 때, 그들에 대한 회복의 메시지도 함께 전파하게 하셨다. 그 때만 해도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그들이 회개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키시거나 적어도 심판의 시기를 늦출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므로 심판과 동시에 구원의 예언이 동시에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사야가 예언(28장)할 때는 회복의 메시지는 없었다. 이미 그들의 죄악은 심판을 부르기에 충분한 양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심판은 남 유다가 멸망하는 예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사야를 비롯하여 미가, 예레미야, 스바냐 등의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 이들은 여호와의 날을 예언하였는데,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며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는 그 날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많은 백성들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남은 자들에 대해서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도 동시에 선포하게 하셨다. 한편 그 날은 일차적으로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의미하지만, 멀리는 신약시대인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되고 성전이 파괴되는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 번째 심판에 대한 예언은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 선지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두려운 날이 올 것을 예언한 것이다. 요엘을 비롯하여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등이 그 전무후무한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다. 그 날은 야곱 족속의 환난의 날로서 그들이 전에 보지 못한 큰 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그 날은 바로 AD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인 것이다. 이는 신약시대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신약시대에 주님께서 마 24장에서도 예언하신 그 날이다. 그러나 그 날은 육적 이스라엘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되겠지만 영적 이스라엘에게는 회복의 날이며 구원의 날인 것이다.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승리하는 날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날은 궁극적으로는 인류 최후의 심판과 성도의 마지막 승리의 날의 예표이기도 하다. 즉,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언한 여호와의 날은 일차적으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질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시공간이 완성되어 영원한 나라가 드러나는 최후의 순간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언에는 시간의 다중적 성취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문자적인가 상징적인가) 예언의 해석이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그 표현들이 직설적이지 않고 비유적인 표현이 많으며 상징과 모형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예언된 경우도 있다. 이렇게 표현방식이 일정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에 해석에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대부분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잘 살펴보면 예언을 해석하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들이 있다. 미 5:2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는 말씀은 마 2:6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됨으로써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이다. 또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떡의 집’이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그러한 이름을 가진 곳에서 탄생하시고 또 요 6:48에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문자적인 의미가 그대로 성취된 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슥 9:9에서 메시야가 겸손하여 나귀를 타실 것이라는 예언도 마 21:5에서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또 시 22:18에서 다윗이 악인들을 향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무의식중에 예언한 것이 요 19:23-24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군인들이 주님의 옷을 나누려고 제비뽑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다음은 상징적으로 성취된 예언들이 있다. 시 118:22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할 때 버린 돌과 머릿돌은 행 4:11에서 베드로가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또 사 22:22의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는 예언에서 그는 계 3:7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또 슥 13:7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치시는 목자는 마 26:31에 보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들이 나중에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성취된 것이 많다. 또 암 9:11에서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라고 할 때, 다윗의 천막은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 곧 교회를 상징한 것이었다. 이처럼 예언은 문자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성취되므로 어디에 속하는지 잘 분별하여야 한다. 만일 서로 반대로 해석한다면 큰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는 지혜인 것이다. (무조건적인가 조건적인가) 예언은 무조건적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조건부 예언도 있다. 요나서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실 수 있는 것이다.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개하자 뜻을 돌이켜 용서하신 것이다. 그와 같은 예는 성경에 종종 있었다. 렘 18:7-10에서도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고 하였다. 또 겔 18:21-24에서도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고 함으로써 같은 의미가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조건부 예언에서 예언의 성취가 마치 사람의 반응에 달린 것처럼 된 것은 하나님께서 미래를 예측하시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불변의 현재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완벽하게 아시고, 모든 것의 결과를 아신다. 하나님께서 최종 결과를 모르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마치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인간의 현재의 노력을 가치있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고 뛰어난 지혜와 지정의(知情意)의 인격을 부여받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놀라운 특권을 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는 대로 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를 알지 못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지금 현재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결과를 인간들도 알 수 있다면 간절함과 열심 그리고 소망은 모두 필요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모르는 미래에 대하여 어떤 것은 말씀해 주시고 어떤 것은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 즉, 하나님 나라의 확정적인 사건으로 나타나게될 예언들과 인류 역사의 흐름의 큰 줄기 같은 것은 모두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인간이 모르는 것이 유익한 것은 모르게 하신다. 따라서 조건적으로 예언하는 경우는 확정된 사건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민족의 축복과 저주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 개인의 구원을 놓고 예정이냐 아니냐 논쟁하는 것은 매우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정은 하나님께는 완전한 지식으로 드러나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진리로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개인적인 예정 여부에 대하여 각 개인은 누구도 알고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명록에 자기 이름이 녹명되었는지를 알고 싶어하며, 안심하며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구원을 확인하고 나서 믿음이 변질되고 순종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의 최종 결과를 현재적으로 알고 계시지만,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예언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최종적인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를 현재로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각 개인의 구원과 직결시켜 해석하는 것은 마치 관상을 보거나 손금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운명론자의 팔자타령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예정 여부를 확인받을 수는 없다. 설령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가변적인 인간으로서 지금 현재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여야 한다. 영원함이 없이 항상 변하며 썩어가고 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가변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구원이 영원히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착각한 것이다. 자신의 구원이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솔직히 말해서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태한 신앙에 빠지다가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선민의식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경계의 거울이 된다. 따라서 성경은 도처에서 개인적인 구원이나 민족적인 구원은 모두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 때문에 나태해져서 멸망에 이르기를 원치 않으신다. 물론 그러한 과정을 거쳐 멸망당하는 자의 최종적인 결과도 하나님 안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지만,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정 여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우리의 의지를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고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순종하는 자라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2. 요한계시록의 해석 신약에 들어와서 맨 끝에 있는 요한계시록을 만나면, 그동안 읽어오던 복음서나 서신서들과 너무 다른 표현양식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상징적 표현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어렵고, 시간상으로 현재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기 어려운 묵시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땅에 속한 세계의 일을 다루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인 영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묘사함으로써 더욱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구약에는 예언서가 난해하였지만, 요한계시록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며, 복음서와 서신서들에 간혹 나오는 난제들과 비교해도 훨씬 난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의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 같은 책을 예언서(Prophecy) 중에서도 특히 묵시록(Revel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칼빈처럼 위대한 성경학자가 주해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또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해석함에 따라 역사상 많은 기독교 유파를 만들어내게 한 원인을 제공한 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가끔 보면 자기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만큼 다루기 어렵고 조심스러운 책이다. 그래서인지 요한계시록은 정경으로 확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묵시적 표현들이 많고 천년왕국 등에 관한 논쟁이 계속 야기되었기 때문에 쉽게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이다. 특히 이단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인용하는 예가 많아서 정경화 작업이 더욱 늦어졌다. 그러나 성령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사도적 권위가 입증되면서 결국 영감받은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계시록의 기록배경] 성경의 기록배경을 파악하는데는 외증과 내증이 사용된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말할 것도 없이 내증이다. 요한계시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기록시기에 대해서는 보통 외증을 많이 참고하여 년대를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레니우스 교부의 견해인 AD 95년경 기록설이 유력하게 주장되었다. 그는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 때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졌으며, 이때 요한도 밧모 섬에 유배되었는데 거기서 기록한 것이 계시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서신과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대부분 AD 50-60년대인데, 유독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만이 30년 이상 나중에 씌어졌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렇다면 요한의 나이가 너무 많고, 다른 성경과 비교하여 기록시기가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증보다 내증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성경 자체의 내증으로 보자면, 요한계시록 내에서 때(시기)를 가리키는 문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먼저 1장에 보면, 1절에서 ‘속히 될 일’이라고 하였고, 3절에는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7절에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19절에도 ‘장차 될 일’이라는 말씀이 있다. 다음 2장에는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 중에 10절에서 서머나교회에게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고, 25절에는 두아디라교회에게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하셨다. 또 3장에서도 3절에서 사데교회에게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하셨으며, 11절에서 빌라델비아교회에게 ‘내가 속히 임하리니’라고 하셨다. 한편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6장에는 17절에서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상의 말씀들은 가만히 살펴보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씀들이다. 곧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주님께서 종말에 대하여 가르치신 말씀과 같다. 주님께서 예언하신 종말의 날은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두려운 날이며 야곱의 환난의 날로서 예루살렘이 멸망(마 24:2, 막 13:2, 눅 21:6)하는 날을 뜻한다. 주님은 그 날이 전무후무한 심판의 날(마 24:21)로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눅 21:22)이 될 것이며,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이 죽거나 잡혀가겠고(눅 21:23-34), 하늘에는 일월성신의 징조가 있을 것(눅 22:25-27)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날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AD 70년)에 이루어질 것(마 24:34, 막 13:30, 눅 22:32)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내증을 종합할 때 요한계시록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쓴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내용의 전반부(4-11장)는 AD 70년 예루살렘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묘사한 것이다. 즉, 주님께서 심판주로 영적으로 강림하셔서 로마를 심판의 도구로 삼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완전히 진멸케 하신 그 사건을 영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기록한 편지인 요한일서는 2장 18절에서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시기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오히려 예루살렘 멸망 후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예루살렘이 심판받은 AD 70년 이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렇지만 요한계시록은 때가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즉, 심판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슨 때가 가깝다는 말인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에 버금가는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는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엄청난 심판보다 더 큰 박해사건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황제숭배를 거부함으로써 교회가 당할 박해를 예고하기 위해서 계시록을 주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 주님이 언제 오신다는 말씀인가? 주님이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AD 70년 예루살렘 심판 때 심판주로 영적 강림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계시록의 기록시기가 만일 AD 95년경이라면 이미 심판이 지나갔는데, 주님께서 언제 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다는 것인가? 주님은 복음서에서처럼 계시록에서도 곧 오신다고 하시고 또 속히 오신다고도 하셨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오시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분명한 논증에도 불구하고 다른 주장을 한다면 정말 곤란하다. 그것은 건전한 해석을 포기하는 태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해석의 유형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거주의 해석이다. 이는 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다 성취되었다고 보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 견해는 천사가 전하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모든 묵시가 AD 70년의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중심으로 1세기 당시의 교회와 로마 당국과의 영적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교회가 승리할 것을 상징적으로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상황에만 너무 집착하여 모든 내용을 1세기에 국한된 예언이라고 하는 점에 무리가 있다. 다음 역사주의 해석은 현재주의 해석이라고도 하는데, 계시록의 모든 묵시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즉, 계시록의 묵시는 1세기의 상황을 비롯한 그 후의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와 이교적 세상의 끊임없는 영적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교회가 승리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예언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교회 역사와 세계사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결시키려고 함으로써 무리하게 역사적 사건에 꿰어 맞추려는 시도를 하다가 오히려 이상한 해석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다음 미래주의 해석은 다시 온건한 미래주의와 극단적 미래주의로 나뉜다. 온건한 미래주의는 처음 세 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내용이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종말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고 본다. 이를 주장하는 파는 휴거설을 반대하고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도 하지 않는다. 한편 극단적 미래주의는 세대주의라고도 하는데,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세상의 모든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4장 이후의 내용은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7년 대환난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계시록은 요한이 살던 당시의 성도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내용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해주의 해석은 상징주의라고도 하는데, 계시록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원리를 상징을 통해서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선으로 상징되는 교회와 악한 세력간의 영적 전쟁에서 선이 승리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냄으로써, 계시록은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럴 듯 하지만 역사성을 너무 무시하였고, 또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전통적인 해석방법들을 살펴보았는데, 제각각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약간 또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일까? 그것은 절충적이고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인데, 여러 가지 방법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단점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제가 되는 사항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계시록의 모든 내용은 요한 당시의 1세기의 교회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계시록에는 분명히 그들을 향한 어떤 메시지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계시록의 내용을 편지로 써서 각 교회들에게 써서 보내라고 하였으므로 그들과 전혀 무관한 내용일 리가 없다. 다음은 성경의 본질상 모든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공시성과 통시성이 있으므로 계시록의 묵시 역시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게 보편적으로 주시는 원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성과 함께 상징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예언의 원근 통시적 성취에서 설명하였지만, 계시록 역시 원근통시법을 사용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짐승에 대한 해석에서 일차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의 황제나 로마제국의 개념이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동시에 세상 세력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라는 사실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시록의 예언은 1세기의 사건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계시록의 내용] 절충적이고 종합적인 방법으로 계시록을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입장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오직 성경을 근거로 문자해석과 영적 해석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계시록은 전체 22장으로 되어있는데, 내용을 크게 나누어 보면 1-11장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으로 되어있고, 12-22장은 세상 세력에 대한 심판 예언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보면, 네 구분을 할 수 있다. 먼저 1-3장까지는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교회에게 임박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 1장에서 요한 사도는 주님이 보내신 천사를 통하여 주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는다. 그리고 2-3장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이 나오며, 각 교회에다 예언의 말씀을 적어 보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다음 4-11장은 AD 70년에 실제로 이루어진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다. 4-5장은 하늘에서 어린 양으로 묘사된 주님이 심판을 준비하는 장면이다. 6-7장은 인봉을 떼심으로써 예루살렘에 대하여 큰 환난이 시작된다. 그리고 8-11장은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붊으로써 심판이 본격화되고, 마침내 11:15에서 주님의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다음 12-19장은 세상에 대하여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예언하였다. 12-13장에는 용과 열 뿔 가진 짐승이 나오는데, 이는 매우 묵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서 해석에 주의를 요한다. 12장에 용이 태양을 입고 있는 여인을 공격하는데, 이는 사단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하늘에도 미가엘과 사단의 세력이 동시에 전쟁을 벌이게 된다. 13장에는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이 나타나서 이적을 행하고, 다른 짐승도 출현하여 이적을 행한다. 이는 교회와 이교 세력들간의 영적전쟁에서 처음에는 이교 세력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득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14장에서 천사가 세상 세력에 대하여 주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결국 성도와 교회가 승리하고 세상이 패배할 것임을 미리 선언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15-18장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15장에서 심판을 위하여 일곱 대접이 준비되고, 16장에서 진노의 대접들이 쏟아부어진다. 17장은 세상세력을 상징하는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하여 설명해주고 있고, 18장은 큰 음녀 바벨론이 망하는 것 곧 세상이 멸망하게 되는 것을 예언한다. 19장에서 세상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고 성도가 승리를 얻었음을 확인한다. 결국 교회와 세상과의 싸움에서 성도와 교회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완전한 승리를 얻었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0-22장은 결론 부분이다. 20장은 이제 세상이 완전히 끝난 상태에서 인류 최후의 종말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또 20장에는 주님의 십자가 구원사역을 통하여 성도가 첫째 부활(엡 2:1)에 참여케 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 해왔다(벧전 2:9)는 것도 가르치고 있다. 21장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뜻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22장은 1장에서 말씀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반복하고 있다. 즉, 계시록은 수미쌍괄식으로 전개된 것이다. [계시록의 해석] 계시록 역시 성경해석의 일반원리를 따라 해석하면 된다. 주해와 적용의 균형, 문자와 영적 의미의 조화 그리고 보편과 상황진리의 분별을 전제로 하고 문맥적, 역사적, 문법적 해석의 틀을 그대로 적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묵시문학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좀더 고려할 점이 있다. 우선은 묵시문학의 특징이나 형식, 상징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를 무시하면 이단의 경향을 낳게 한 자의적인 사고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이단들이 계시록과 다니엘 등 묵시문학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상징을 해석할 때는 부분적으로 세세하게 해석하기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상징의 해석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다음은 성경의 유비(類比)의 개념을 지나치게 사용하여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유비(Analogy)란 쉽게 말하면 성경의 해석을 성경의 다른 구절을 가지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는 매우 타당해 보이지만, 문맥과 관련 없는 관주에서 설명했듯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특히 요한 사도는 구약과 당시의 묵시문학을 상당히 인용하고 있는데, 그 자료들이 원래 의미했던 것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세는 자체 본문 내에서 문맥적으로 이해하면서 배경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장르에 속하기는 하지만 당시에 유행하던 일반적인 묵시문학과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보통의 묵시문학은 저자의 이름을 숨기고 에녹이나 에스라 같은 과거에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다. 그러나 계시록은 요한 사도의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또 묵시문학은 사변적이면서 세상의 종말과 징조와 최후의 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반면, 계시록은 교훈적이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채워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시기의 임박성을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즉, 당시에 박해받는 교회에게 임박한 심판에 대해 알려둠으로써 영적으로 깨어서 대비하도록 권고하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묵시문학적 요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되 동일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출처 :아르케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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