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빌레몬서 강해

빌레몬- 각권 연구

에반젤(복음) 2019. 10. 13. 22:16




사랑과 용서의 복음.
몬1:10-14절, 324.327.209장.&

인간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 땅위에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와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에 대한 적대감은 우리들을 더욱 한 많은 인생을 살도록 하면서 우리들을 파멸의 길로 몰아갑니다.

우리 주변에는 상처의 아픔을 딛고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상처와 함께 절망으로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쪽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하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지나 않습니까? 사랑과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들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시기와 미움과 질투가 나를 더욱 괴롭게 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이러한 분들에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큰 희망과 빛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랑과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1.본문의 내용 줄거리입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권의 성경책을 기록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부터 빌레몬서까지 13권을 기록했습니다. 분량으로 봐서 로마서가 제일 두껍고 빌레몬서가 제일 짧은 서신입니다.

내용의 분량을 기준으로 해서 편집 순서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바울서신 맨 앞부분에 놓이게 되고 마지막 부분에는 가장 짧은 서신인 빌레몬이 있습니다. 이 빌레몬서는 다른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와 함께 옥중에서 기록되었다고 해서 옥중서신으로 분류됩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의 가장 짧은 서신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책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은 진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인인 빌레몬 부부(夫婦)와 그 집에 모였던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등장 인물은 세 사람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보낸 바울사도와 이 편지를 받아본 빌레몬과 이 편지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오네시모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감동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살벌했던 노예제도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도망친 노예에 대한 형벌은 십자가의 처형까지 가능했습니다. 또한 도망 중의 노예를 숨겨 준 사람은 도망(逃亡) 기간(其間)동안의 노임을 그 주인(主人)에게 갚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도망 나온 노예(奴隸)를 받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엄청난 재산상의 손해를 가져옵니다. 빌레몬은 부유한 층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노예 가운데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도망하여 감옥 안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목적은 도망친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주안에서 같은 형제로 받아 줄 것을 바라는 의미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또한 받아 줄 뿐 아니라 오네시모를 자신을 시중 드는 일꾼으로 다시 보내 줄 것을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램과 기대를 가지고 빌레몬에게 서신을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건과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계시하는데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오네시모의 신분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노예인 오네시모의 신분의 변화를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1-12절에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오네시모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빌레몬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고 단순히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그 노예가 도망 나왔으니 무엇이 유익했겠습니까? 이제 오네시모가 바울의 전도(傳導)를 받고 예수를 영접한 이후에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노예라는 차원을 떠나서 같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에서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는 한 형제입니다. 따라서 무가치한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소모품 인생을 살고 있었던 오네시모는 한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그 주인에게서 도망 나왔습니다.

주인에게 잡히면 언제 그 무서운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죽을지 알지 못한 불안한 생활을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눈물로 불안한 밤을 지새우면서 꿈속에서도 주인이 나타나서 자신의 목을 조이는듯한 그런 경험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오네시모, 살아갈 기쁨도 행복도 없던 그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容恕)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주인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서일까? 그 가는 길에 바울의 편지 한 통이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그 편지 속에는 이런 말도 쓰여져 있었습니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오네시모가 바울 사도의 심복이라고 하니 어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처벌하겠습니까?

비록 부유층에 속해 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바울은 21절에서 이렇게 확신합니다.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누구시기에 이처럼 엄청난 신분의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엡5:8). 또한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이런 권세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이런 권세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이런 권세를 지닌 신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천하를 호령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런 신분의 변화가 바로 우리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3.결과가 좋으면 그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빌레몬서는 모든 일에 동기가 선하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의 중요성도 중요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3-14절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福音)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承諾)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좋은 결과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과정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결과만 좋으면 그만입니다. 그 결과(結果)만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方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직 실적이요, 업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경제 원리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원리는 그런 세상적인 원리와 법칙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만이 지배할 뿐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희생과 헌신과 순종입니다. 사랑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실적과 좋은 결과 앞에는 인간의 능력 과시는 있을지 모르지만 형제의 사랑과 일의 과정 속에 참여하게 되는 신앙의 아름다운 체험들은 없습니다. 벼를 무르익기 전에 베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교회 행정 역시 온 교회가 조금이라도 실망에 떨어질 우려가 있을 것 같으면 기다려야 하고 연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주님의 교회 내의 사랑을 일의 최종적인 열매로 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면 안 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원하건만 우리들은 자꾸 통계자료를 끄집어 내놓고 브리핑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들의 진심입니다. 성실입니다. 헌신과 믿음과 진실된 봉사를 원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계3:8절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의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4.관계의 방정식 - 사랑과 용서입니다.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가운데 두고 사도 바울이 기대하는 믿음과 사랑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5절).

우리들의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본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나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믿는 성도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끼리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목사님과는 관계가 좋은데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자녀들과 원수가 된다면 목사님이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꺼?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떠난 이단자(異端者)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적대하고 원수 관계로 지낸다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 관계의 진리를 빌레몬서가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빌레몬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내가 주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으로 확인되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섬김과 사랑과 교제와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가진 자 빌레몬이나 못가진 자 오네시모나 할 것 없이 차별 없이 복음이 증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내에서는 편가르기는 복음의 기본 정신에 위배됩니다. 이런 복음의 증거자인 바울의 설교에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철저하게 변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설교에 성도들이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목회자는 낙심이 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경험과 이력서는 가지고 있어도 변화의 체험에 관한 경험이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8-9)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직분자에 대한 권위와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잘 이야기해 줍니다. 이것은 사랑과 용서의 복음의 위력입니다.

5.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이런 용서와 사랑과 교제가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쟁이 있습니까?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빌레몬서는 도전을 줍니다. 삶의 변화와 신앙 체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아름다운 열매와 반응들을 요구합니다. 생명에는 열매와 반응이 있습니다. 또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은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켜줍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여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이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충만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