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도행전 강해

초대교회 10대 박해사

에반젤(복음) 2019. 10. 5. 12:31




초대교회 10대 박해사

 

 

1. 네로 황제의 박해 (Nero A.D 54-68년)

 

클라우디우스(Claudius) 의 네 번째 아내의 아들인, 그리피나(Agripp-ina)는 황제를 독살하고, 그의 아들 네로를 로마 황제에, 올려놓았다. 네로는 황제가 된 뒤, 처음 5년 동안 가정교사였던 세네카(Senca)의 영향을 받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령을 만들며, 성공적인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되어, 위대한 꿈과, 향락 욕에 빠져, 그를 사랑하던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증오를 받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로 인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 생모와 아내 옥타비아 등 친척들을 살해하고, 기독교인들의 급속한 확장을 두려워하여, 박멸하고자 할 때, 때마침 64년 7월18일 로마시에, 대 화재가 발생하였다. 대부분이 목조건물이었던 로마시는 6일 동안 3분의 2 이상이 불에 타고 말았다. 평소 황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은 이 화재가 미친 네로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일로 인하여, 네로 황제는 화재사건에 연루되게 되었고, 이 소문은 계속 확대되어, 로마시 전체에 걷잡을 수없이 퍼져 나갔다.

 

네로는 이때 로마 시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화재가 발생하게 된 모든 책임을 유대교에서 갈라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하여,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맹견이나, 사자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에 처형되곤 하였다. 그러나 네로는 결국, 그 일로 인하여, 로마 원로원의 처형결정으로 위협을 느끼자, 부하 4명과 함께 어느 시골의 지하실로 피하여, 도망을 갔다. 69년 네로는 체포하러온 군인들의 발굽소리를 듣고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세상에,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구나.”

 

네로는 그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스스로 자신의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네로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네로 황제의 죽음 이후, 1년간은 내란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내란이 종식된 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가 잠시 황제가 되어 통치를 하였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많은 관용을 베풀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곳곳에서 끊임없는 반란을 일으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진압하지 못하고, 자신의 장남인, 티투스(79-81)에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 하라는, 명령을 내리었고, 티투스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내려가, 성을 포위하여,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어, 유대인들의 생활과, 삶의 중심이 되었던, 헤롯성전은 로마의 대 화제 사건에 연류 되어, 결국 AD 70년에, 성이 함락된 뒤,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티투스장군은 돌아가서,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나,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갑작스런 열병으로 죽었고, 티투스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도미티안이 황제가 되었다. [역사자료] 로마제국의 광기 4편(클라우디우스와 보티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황제 친위대의 선택으로 된 사람이 클라우디우스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이래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개인비서격인, 역사가 수에토니우스 란 인물이 기록해 놓은 걸 보면, "잔혹하고, 유혈을 좋아하는 사람" 이라는 말처럼..

 

 

2.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Domitian A.D 81-96년)

 

티투스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관심하였다. 그는 황제가 된 뒤, 로마전통의 신들을 재건하려 노력하였으나,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신이라 호칭하여, 수도(首都) 로마에, 금은(金銀) 형상을 만들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유대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들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 역시도, 이것을 거절하자, 도미티안 황제는 별도의 법률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풍습들을 대부분 좇았기 때문에, 로마 당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같은 종파로, 간주하여, 박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미티안 황제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로마의 모든 신들이 노했다고, 주장을 하며,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을 하거나, 불순분자로 몰아, 맹수들과 결투하도록 하여, 핍박을 가했는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도 이때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일로 인하여,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외로이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다, 장래 이루어질, 요한계시록을 받아쓰게 되었다.

 

도미티안 황제는 네로와 같이 독재자가 된 결국은 자신의 궁전에서, 비참하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도미티안 황제가 암살된 뒤, 5현세 시대를 맞이하여, 1세기 동안은 평화로운 통치가 이루어졌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

 

① 네르바(96-98), ② 트라야누스(Trajan 98-117), ③ 하드리아누스(Hadrian 117-138), ④ 안토니누스(138-161), ⑤ 파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다.

 

예루살렘성이 함락된 뒤, 유대인들이 외국에 나가든지, 고국에 있든지, 그들이 꼭 찾아보는 성지가 두 곳이 있는데, 그 하나가 통곡의 벽이요, 또 한 곳이 맛사다 성이다. 맛사다 성은 예루살렘의 멸망 시, 성을 빠져 도망 나온, 960명의 유대인들이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예루살렘 남쪽 약100km 의 위치에 있는, 천연적인 군사의 요새지이다. 이곳은 해발 600 m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헤롯 대왕이 유사시를 대비하여, 자신의 궁전까지 지어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3년 동안이나, 로마의 군대들과 대치하며, 자신들을 지키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지였다. 그러나 로마의 10군단의 실바 장군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자. 로마인들의 손에 죽는 수치보다는 스스로 죽자.” 이렇게 최후를 택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나중에는, 남자들이 모여, 10명씩 조를 짜서, 제비뽑고 한사람이 9명을 죽이고, 마지막 남은 자가 죽은 시체를 가지런히 뉘어 놓은 뒤 자신도 죽음으로서 택함 받았다는 의를 지켰던 믿음의 성지라고 하여 해마다 유대인들은 맛사다를 찾는다.

 

 

3. 트라야누스의 박해 (Trajanus 98-117)

 

트라야누스는 5현세 중의 한사람으로, 제위 기간 동안 제국의 영토를 계속 확장시켰는데, 라인강과, 도나우스강, 유프라데스강 까지 확장 시켰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 하였고,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음모를 꾀하는 비밀 결사대로 오인하여 하여 박해를 가했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이름도 사용할 수 없게 하고, 112년에는, 법조문을 만들어,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로마에 대하여 해로운 단체로 지목이 되어, 인정받지 못함하고, 모임조차도 가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트라이야누스 황제 때, 시므온이 120세에 십자가에 처형이 되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감독이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된 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겨 순교 당할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안디옥 교회는 스테반의 신앙을 따르던 무리들이 세운 교회로 바나바가 초대 감독이었고, 이그나티우스가 2대 감독이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그나트우스는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품에 안기어 사랑을 받았던 어린아이가 바로, 그였다고, 한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될 정도로, 믿음이 있는 교회였으며, 안디옥은 기독교회의 동방의 수도요, 항구라고 할 정도로 일설이 있는 교회이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가면서, 7개의 서신을 남겼는데, 7곱 통의 서신은 서머나에 있는 폴리감에게, 에베소, 막네시아, 트라이야, 로마에 있는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보낸 것들인데,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단을 경계하라. 2) 교회의 조직에 통일 3) 감독과, 장로의 구분으로, 감독의 우위 4) 순교는 영광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최초로 카톨릭(='고대' 카톨릭 '지금'의, <"천주교">란 뜻이 아님.)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다.

 

 

4. 하드리안의 박해 (Hadrian 117-138년)

 

 

하드리안은; 티투스 장군의 아들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열정이 남다르며, 다재다능한 황제이다. 그는 군대와 함께 있을 때에는, 병사와 함께 훈련을 받으며, 똑같은 급식을 먹고, 행군할 때에도 똑같이 행군을 하는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뜨거운 종교 열로, 신비의 종교에 입문하였으며, 아테네 시에서는 새로운 구역을 추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의적이고 대범한 조각가이기도 하였다.3)

 

하드리안은 A.D 120-130년까지, 10여 년 동안 셀 수 없는 많은 개혁을 통하여, 산발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으며, 125년에 발표한 칙령에서는, 할레나 안식일에, 회당에서 읽는 율법을 금지하고, 예루살렘 성전 터에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고, 우상제사를 강요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박해를 가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죄가 된다고 보았다. 이때,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델레스푸로스가 순교당하고,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이 순교를 당하였다. 폴리감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폴리감은 2세기에 알려진 최고의 성자요, 순교자이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다. 폴리감은 죽음 앞에서, 유명한 한마디를 남겼다. 네가 만일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저주한다면, 너를 살려 주겠다고 제안을 한 총독 앞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분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Marcus Aurelius 161-180년)

 

A.D 161년 황제가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시대 계몽사상의 지성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황제와 같이 허영에 들뜬 사람이 아니라, 개인의 수양을 위하여, 텐트 생활을 하며, 국정을 수행하였으며, 명상록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점차 이성주의인 스토아 이념에 사로잡혀, 미신을 믿는 점성가들에게 빠져, 기독교를 미신으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중요한 행사를 치를 때에는 반드시 희생 제사를 드렸는데, 국가의 재해나 질병의 원인들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하여, 비밀정보원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잡아 들였고, 심한 고문을 가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많은 변증가들이 순교를 당하였는데, 저스틴(Justin)이 순교를 당하고, 리옹에서도 50여명의 순교자를 냈으며, 포티너스(Potinus178)감독도, 그들과 함께 고문 끝에, 순교를 당했다. 쌍투스라는 소년은 죽음 앞에서도,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대답하며, 죽어갔다. 이것을 지켜보던, 많은 신자들도, 용기를 얻어,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자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6.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Septimius Severus 191-211년)

 

아프리카 출신의 군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하여 무관심 하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함께 금지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세례교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전도하여 얻은 그리스도인의 입교를 불허하는 금지령을 내려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일어난 박해를 통하여 사도 시대의 정신을 속사도 시대로 계승하여 온 교부 중의 제 일인자였던, 이레네우스(Ireraeus)가 순교를 당하였고, 유명한 신학자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마스가 죄인으로 몰려, 참수형을 당하였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는, 페루페투아(Perpep-tua)와, 펠리키타스(Felicitas)여인의 순교는 매우 유명하다. 이 두 여인은 노예였는데, 맹수들이 들끓는, 원형경기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기독교의 위대함을 온 천하에 증거 하였다.

 

 

7. 막시미누스 황제의 박해(Maximinus 235-288)

 

막시미누스 황제는 군 출신 폭군으로 정치개혁을 통하여, 성직자를 처형하고, 즉위한지 3년이 되는 해에 모든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공개적으로 신전에 나와 희생 제사를 드릴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지도자들을 유형과 투옥을 통하여 제거하였으며, 막시미누스 황제의 임기 동안에는, 사형을 당하는 순교보다는, 감옥에 투옥시키는 방법을 썼다. 당시 로마 감독이었던 힙포리티스와 폰티아너스는 사르디니아 금광에 유배되어, 노예로 죽음을 당하였다. 또한, 이때 히플리투스와, 우르술라가 순교를 당하였다.

 

 

8.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Decius 240-251년)

 

데키우스는 네로황제처럼, 옛 로마 정신을 열정적으로 일깨우며, 모든 총독들에게 칙령을 내려, 전국가적으로 기독교를 잔인하게 금지하고, 박해를 가하게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기독교 때문에, 로마 나라가 쇠퇴해 졌다고 보아,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다. 그는 날짜를 정하여 신전에 제사를 지낸 사람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해주며, 만약 돈을 주고 증명서를 사지 못한다면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2년이 못되어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들의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와 오리겐 같은 학자가 고문을 당하여 같은 저명인사들이 순교를 당해야 했다. 로마 감독 파비안(Fabian)과 안디옥 감독 바빌라스(Babylas)가 그중에 들었고,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하며 지냈다.

 

 

9.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Valenian 253-260)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처음3-4년 동안은 기독교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왕궁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어려움이 오고 국난과 흉년이 계속되자 이를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들이 분노를 하였다고 전가를 하여 교회의 제산을 압수하고 집회를 금지하고, 특히. A.D 258년 기독교에 대한 처벌을 성문화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귀족들은 그들의 직위가 박탈되었고, 재산은 몰수를 당하고, 사무원들은 강제노동과 수용소로 보냈다.

 

이때 카르타고의 카푸리아누스(Cyprian 200-258)가 순교를 당하였으며, 스페인의 타라고나 지방 감독 투루투어스와 부 감독들이 이 무렵 순교를 당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페르시아의 샤프르 1세와 전쟁을 하여, 마침내, 포로가 되었고, 그는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 가 황제에 즉위한 뒤, 기독교는 잠시 동안, 번영의 시기를 맞기도, 하였었다.

 

 

10.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Diocletian 284-305년)

 

디오클레시안 황제는 본래 비천한 노예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권력을 획득한 그는 군의 추대로 로마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20년 동안, 뛰어난 행정력과 조직력으로, 로마를 통치하였지만, 기울어져가는 로마를 살리기 위하여, 제국을 4개로 분할하고, 군대를 강화하고, 경제를 개혁하고, 기독교에 대하여는 관용정책을 베풀었다. 당시 그의 부인을 비롯하여 내시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의 말에 따라, 그는 종교정책을 바꾸어, 궁내에 기독교인들을 제거하고, 아폴로신전에 제사를 강요하였으며, 이에 호의적이지 못한 기독교인들을 제국의 전역에서 말살하는 초치를 내렸다. 성경을 압수하고, 교직자를 투옥시키고, 교회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305년 건강이 악화되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사위였던 동부의 황제 갈레리우스에게 계승하여 기독교인들을 더욱 혹독하게 박해를 하므로, 그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과 타협을 하였다.6)

 

그러나 311년 그가 사망하기 직전,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칙령을 표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꿋꿋한 지조에 감명을 받고, 마지막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오랜 동안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을 로마 교외에 있는 카타쿰의 지하 묘소에 장사를 지내주기도 하였으며, 결국, 로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택한 자들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하여 믿음의 자유를 선언하게 하셨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즉위하면서 신앙을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선포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게 되므로 초대 교회사 250여 년 동안의 길고 긴 어두운 세월의 핍박과, 순교의 터널을 뚫고, 번영의 자유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