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Golden Rule)을 아시지요. 마태가 전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그런데 구약에도 황금률에 버금가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황금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선지자 미가가 전한 메시지 중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선지자 미가의 예언은 심판과 희망이 교차하여 나타납니다. 또한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야일 것입니다. 그 메시야의 탄생지를 단정적으로 베들레헴이라 밝힙니다. 이 예언이 쉬운 예언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지역을 공개적으로 거명할 경우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메시야가 태어날 지역으로 거론된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예언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소를 가리켜 예언한 선지자는 거짓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러니 쉽사리 장소, 그것도 메시야가 태어날 곳을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의 시샘과 눈총도 예사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지자 미가는 놀랍게도 베들레헴이라 콕 집어서 말합니다. 그가 예언을 하고 수세기가 흐릅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 몇 사람이 나타나 회오리를 일으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부터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결단하고 경배하기 위해 먼먼 곳을 찾아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셨기에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지레짐작합니다. 상식이 반드시 진리는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나타나 당돌하게 질문합니다.
그들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왕궁을 찾습니다. 당시 통치자였던 헤롯 - 일반적으로 그를 헤롯 대왕이라 부릅니다. 박사들은 뜬금없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시냐고 묻습니다. 왕에게 “왕으로 나신 이”를 물으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왕으로 나신 이”란 차세대 왕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의심이 많은 의뭉스런 헤롯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득달같이 성경학자들을 소집합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들에게 메시야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가를 묻습니다.
불똥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만약에 메시야의 탄생지를 모른다면 난감해 집니다. 영적으로 뒤틀린 집단인데도 약간의 성경 지식은 갖고 있었나 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그 만큼의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가요? 당시 미가서는 선지서의 한 권으로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가서의 전달자인 선지자 미가는 어떤 인물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선지자에 대해 그리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선지자 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가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그 정보들을 통해 재구성해 볼 수는 있습니다. 우선 이름입니다. 미가란 이름은 “미가야”의 축약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미가야”는 “야훼와 같은 분은 누구인가?”란 질문 형태의 이름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불의 말씀을 토해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그러자 여호야김은 분노에 치를 떨며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선지자를 죽이려면 그 죽임이 정당해야 합니다. 백성의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선 이들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입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왕의 아첨꾼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처형을 선동합니다. 그 때에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죽임이 불가함을 말합니다. 그 지방의 장로들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을 향해 고증을 합니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렘 26:18-19)
선지자 예레미야를 살리기 위해 고증한 사례의 인물이 모레셋 사람 미가입니다. 그는 선지자입니다. 미가는 그의 예언 앞머리에서 자신의 출신지를 밝힙니다.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1:1)
미가의 사역 시기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히스기야 시대입니다. 미가의 사역 시기는 선지자 이사야와 맞물려 있습니다. 거의 동 시대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선지자의 예언이 하나의 쟁론으로 떠오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두 선지자의 예언 중 닮은꼴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저 많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누가 누구의 예언을 차용했나가 관건이 됩니다. 이런 논의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사역시기입니다. 누가 앞서서 사역을 했는가에 따라 차용자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논의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미가가 이사야의 예언을 차용했을 가능성입니다. 반면에 이사야가 미가의 예언을 차용했을 가능성도 남아 있지요. 또한 절충안으로 제 3의 예언서를 상호 차용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마치 복음서 상호간에 일어나는 문제점과 복사판입니다. 아니 구약 예언서이니 원조라 해야 되겠지요. 마태복음 우선설이나 마가복음 우선설, 혹은 Q문서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러한 논쟁의 뒤끝은 언제나 허무함만 남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을 외면한 탁상공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본래 그런 지엽적인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섬세함과 집요함이 필요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예리함이 필수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본질, 그 자체입니다. 미가서와 이사야서의 상호 관계를 규명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미가서 자체의 예언 연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언어의 유사성, 혹은 동일성은 같은 시대의 사역에서 오는 현상으로 정리할까 합니다.
미가서는 충분히 독자적인 신학 사상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미가서의 독특성은 문체의 구조에 있습니다. 책망과 징계, 회복과 축복이라는 예언의 두 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가서만큼 이러한 체계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는 글쓰기도 드믑니다. 따라서 문장 구조만으로도 미가서의 독자성은 방증이 됩니다. 그렇다면 미가서가 담고 있는 예언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책망과 징계가 연이어 터져 나옵니까? 북 이스라엘은 차치하고라도 남 유다의 신앙 꼴을 보십시오. 이젠 약소국가에 불과한 남 유다의 상황을 보십시오. 신앙회복만이 유일의 살 길인데도 정작 통치자들은 다른 길을 찾습니다. 개혁적 성향을 지닌 히스기야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신앙중심으로 통치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히스기야도 세속적 방법을 동원합니다. 군사력은 형편없고 국가경제도 말이 아닙니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남 유다를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침략을 하여 남 유다를 초토화시킵니다. 그럴 때마다 남 유다는 항복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항복을 하지 않으려면 더 강력한 나라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그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판입니다. 국고는 점점 비어갑니다. 말 그대로 약소국의 비애입니다. 강대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꿈은 애초부터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까요? 현실이 그렇다보니 점점 더 세속적인 방편에 익숙해져 갑니다. 남 유다가 하나님의 나라란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나라란 사실을 놓치고 삽니다. 히스기야도 초기엔 그랬습니다. 그러나 세속적 방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자 비로소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아무리 늦었더라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일이 소중합니다. 그 늦음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남 유다를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수만 명의 군사를 하루아침에 물리치신 것입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만 히스기야는 더 철저하게 신앙으로 반응합니다.
신앙제일주의로 통치하는 왕이 있다는 것은 선지자에게 복입니다. 미가의 활약은 그 시대를 위한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미가의 활동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가의 예언 메시지가 책망과 회복에 대한 희망으로 교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지자의 일차적 사역은 그의 시대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책망은 그 원인이 그 시대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잘 아는 대로 히스기야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왕입니다. 그 히스기야 앞에서 미가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의 말씀을 외칩니다. 물론 히스기야는 마음을 겸비하여 회개의 옷을 찢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미가 선지자가 그토록 치명적인 예언을 외친 것일까요? 우리는 히스기야의 잘못을 별로 알지 못합니다. 고작해야 병문안을 온 바벨론 사신들에게 왕궁의 보물창고를 열어 보여준 것을 압니다. 그는 자신의 창고만이 아니라 성전의 보물창고까지 열어주어 자랑합니다. 우리가 아는 히스기야의 실수는 이것뿐입니다. 그런데 미가의 외침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미가서의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이 대 유행을 합니다. 그래서 온통 칭찬 일변도입니다. 심지어는 잘못과 실수마저도 책망이 아닌 칭찬의 말로 탈바꿈할 때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미가와 같은 선지자입니다. 목사들이 미가 선지자의 마음으로 사회를 보고 성도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부패상을 철저하게 해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처방전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미가의 메시지가 너무도 강렬하기에 모두를 지면으로 옮기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시고 미가의 예언을 찬찬히 묵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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