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미가 강해

미가서 개론

에반젤(복음) 2019. 9. 30. 20:19




미가서 개론                                   


 

I. 초라한 하나님?

 

  반듯한 아이를 보면 그 부모가 보고 싶어진다. 대체 어떤 분들이길래 자식이 저리 자랐을 까, 싶은 게다. 가난해도 감사하겠고 병약해도 견디겠고 좀 모자라도 상관없으니, 부디 이 못난 부모 때문에 행여 자식이 하늘 아버지 마음 아프게 하는 이로 자라지 않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하는 아비이니, 이보다 더 부러울 순 없다. 날 보고 사람들이 어떤 하늘 아버지를 떠올릴까 생각할수록 내 자식 키우는 게 두려워진다. 하얀 도화지 같은 이 녀석이 내게 본 그대로 따라 하고 들은 그대로 그려 넣을 텐데, 과연 나 사는 모습을 보고 내 아들이 하늘 아버지께서 보이신 ‘선한 것’(미 6:8) 추구하는 삶이 자기 전부를 걸어야 할 만큼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게 될까 자문하니,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그분 나라 백성 됨의 영광이 유명한 아파트 브랜드나 일류대학 학위나 선망하는 대기업의 영광에 비하면 너무 헐거워 보이는 이 시대를 너무 불편하지 않게 살고 있는, 나는 초조하다. 하나님의 이름보다는 교회나 교회 지도자의 이름이 더 유명하고 더 소문나고 더 대접 받는 것을 보면서도, 내 자존심이 상하고 내 밥그릇이 위협 받을 때보다 덜 서운하고 덜 속 쓰리는, 나는 위태롭다. 남들이 날 알아봐 주고 그래서 차별 대우 해주길 바라면서 고개를 쳐들고 발꿈치를 들고 사는 동안, 부당한 권력이 드리운 차별과 소외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는 이들과 그들에게 폭력을 들이대는 이들의 이중적인 얼굴을 보고도, 분노를 행동으로 옮길 때 내가 치러야 하는 대가를 알기에, 의롭지만 너무 부정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안 줄 만큼만 그들의 허위를 폭로하고 배설하듯 욕하고 끝나는, 나는 비겁하다. 그런 아비니 자식 키우기는 두렵고 설교는 버겁다. 내가 이렇듯 하찮은 아성을 쌓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당하고, 그분의 영광스런 나라는 미국 시민권보다 헐값으로 매겨지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는 진부한 관용어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음 아프지만 인정할 것이 있다. 세상은 지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를 향해, 하나님 아들처럼 섬기는 종이 되어 사랑하라고 외치는 지도자들을 향해,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미 7:10) 묻는다. 그들은 더 이상 교회 건물이나 교인 숫자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비아냥거린다. 들을 귀 없으니 그런다고 건성으로 듣지 말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허접하게 대접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숱한 내 관심사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가 필요할 때만 호출당하는 사환으로 전락했기 때문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세상이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게 된 것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했기 때문은 아닌가? 겉과 속이 다르고, 안과 밖이 다른 위선으로 하나님을 속이려 들었기 때문은 아닌가? 그렇다. 내 탓이다. 내게 초라해진 하나님을 세상은 극진히 대접하고 인정하길 기대했으니, 난 ‘지나치게’ 믿음이 좋았던 거다. 그러니 멸망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 미가 선지자가 던진 이 매서운 질문들을 지금 우리도 들어야 한다. 

 

 

II. 미가와 미가의 시대

 

1. 미가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 선지자지만, 왕궁 예언자였던 그와는 달리 유다 남부의 시골 모레셋 출신이었다(1:1). 자기 고향 마을까지 가닿은 권력자들의 사회, 경제적 횡포를 직접 보았기 때문인지, 그의 현실 인식은 실감나고, 그의 비판은 실제적이며, 그의 심판 선언은 신랄하다. 그는 사회개혁가도 아니고 혁명가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이런 불의를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되는 것은 결코 양립될 수 없다는 사실만은 거칠 것 없이 지적하고 있다. 유다의 작은 시골에 있으면서도, 그에게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형편(1:2-7) 뿐 아니라 이 두 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으며(1:8-16), 아모스의 ‘공의’와 호세아의 ‘인자’와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을 종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개할 만큼 연구하는 선지자였다. 미가는 불의에 눈감지 않을 만큼 당당했고 담대했으며, 어떤 선지자보다도 통렬한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차가운 분노가 아닌 성령의 권능으로(3:9) 죄인들을 돌려세우려고 안간힘을 썼던 예언자였다. 동시에 그는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을 통해 말씀이 주는 심판의 충격(1:10-16; 7:1-6)과 죄악의 심각성(2:1-2; 3:1-4)과 언약적 소망(4:1-5; 7:14-20)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뛰어난 설교자였다. 그는 조그만 시골에서,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든 시대에 맞서서 ‘여호와 같은 신이 어디 있느냐’-‘미가’의 뜻-고 큰 산이 울리도록 하나님을 변호했던 선지자였다.


2. 미가의 시대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 열국들이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고 조롱할 만큼 총체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였다.

 

1) 국제 정세

  미가가 활동하던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주전 742-687년)는 그 이전 아모스 선지자의 활동 시기와는 달리 신 앗수르 제국이 다시 융성하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백성들은 조공을 바치느라 경제적으로 시달렸고, 왕들과 정치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했고, 히스기야가 다스리는 유다는 선지자들로부터 최후 통첩을 받는다.

 

2) 사회, 경제적인 타락

앗수르의 압박과 계속되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지만, 소수의 특권층들은 오히려 자기 권력을 이용하여 마치 폭력배처럼 동족 약자들을 착취하였으며(2:1-5; 6:10-12), 사회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할 이들이 도리어 불의의 한 중심에 서서 하나님의 법을 유린하였다. 강대국 앞에서는 굽실거리면서도 힘없는 백성들은 도살할 짐승 다루듯 잔혹하게 굴었고(3:1-4), 피와 불의로 사회를 건축하였으며(3:9-10) 뇌물로 재판을 왜곡하였다(3:11; 7:3). 지도자의 부패는 모든 계층의 타락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인신매매와 유괴가 횡횡하고(2:8-10), 이웃과 친구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 간에도 믿음이 사라진 채 온통 거짓과 속임수만 난무하는 불량한 나라가 되고 만다(7:2-6).

 

3) 종교적 타락

  불의에 침묵하고, 불의와 영합하고, 불의를 부채질 한 것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수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물론이고 나라 곳곳에서 음란한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경배하였으며(왕하 15:32-36), 아하스왕 때는 인신제사까지도 서슴지 않았다(왕하 16:3). 백성들은 듣기에 불편한 예언은 사전에 봉쇄하였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리 없다는 근거 없는 자기 신념을 맹신하였다(2:6,7). 예언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종교지도자들에겐 더 이상 참된 환상이나 계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3:5-7) 거짓 평강과 거짓 안전의 약속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할 뿐이었다(3:11).

  심판과 회복의 진자 운동을 되풀이 하던 두 나라의 운명은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적 교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위기는 열강들의 위협에 직면한 국제정세나 이로 인한 경제적인 곤란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미가 선지자 눈에 비친 이스라엘의 참된 위기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멸시한 신앙의 결핍 때문이었다.


 

III. 미가서의 구조와 핵심 메시지

 

1. 구조

 

  미가는 하나님을 외면한 시대를 재판정에 불러 세운다. 하지만 그 재판정에 소환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뿐 아니라 온 세계이며(1:2), 첫 언약 때의 증인이던 산과 작은 산과 땅의 지대를 증인으로 세운다(6:1b-2a; 참조. 신 31:28; 32:31). 세 번에 걸쳐(1:2-2:11; 3장; 6:1-7:6)사회, 경제, 종교적 타락과 지도자들의 잘못을 고발한 후 그들에게 임할 재난을 선고한다. 동시에 미가는 다시 세 번에 걸쳐 심판을 넘어 남은 자들을 통한 메시아 왕국의 회복을 소망으로 준다(2:12-13; 4-5장; 7:7-20). 이 세 싸이클은 모두 ‘들으라’는 부름으로 시작한다(1:2; 3:1; 6:1).


I.  서론(1:1)

II. 첫째 싸이클(1:2-2:13)

  1. 심판(1:2-2:11)

  2. 구원(2:12-13)

III. 둘째 싸이클(3-5장)

  1. 심판(3장)

  2. 구원(4-5장)

IV. 셋째 싸이클(6:1-7:20)

  1. 심판(6:1-7:6)

  2. 구원(7:7-20)


2. 핵심 메시지

 

1) 심판의 먹구름

  언약의 하나님은 하늘 성전을 나와(1:2-3) 언약을 깨뜨린 자기 백성의 죄를 고발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이 절대 분노하시지 않고(2:7), 재앙을 내리지도 않으시리라 장담하였지만(3:11) 하나님은 불의로 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1:6-7) 오직 애통과 애곡만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1:8). 예언으로 돈벌이하던 이들에게 영적인 어둠이 내리고(3:6-7), 공의와 정직을 굽게 한 권력자들의 소굴인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게 하실 것이다(3:12). 부정한 저울로 모은 재물을 결코 그 사람이 누리지 못하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을 땅도 멸시하고 외면할 것이다(6:13-15; 참조. 레 26; 신 28).

 

2) 구원의 서광

미가 선지자에게 심판 선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회개의 촉구이며, 구원과 새로운 메시아 왕국으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멸망으로 치닫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다고 해도, 팔레스틴의 경계를 넘어 온 세계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실 하나님 나라 계획만은 심판의 시련을 거친 후 회개하고 돌아온 ‘남은 자’(5:3)를 통해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주목 받지 못한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메시아를 왕으로 삼은(5:2) 이 나라로 목자가 양떼를 모으듯 자기 백성을 모으실 것이고(2:12-13), 쫓겨나고 환난 받던 ‘남은 자’(5:6-8)를 ‘사자 같고 젊은 사자 같은’ 장수로 삼아 하나님의 대적을 심판하고 시온에서 통치하게 하실 것이다(5:7-9).

 

3) 주권과 언약의 하나님

  배은망덕한 언약 백성 때문에 멸시를 받으면서도(7:10),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내 백성으로 불러주시고(6:3), 첫 언약 때의 신실함 그대로(6:4-5), 심판을 뛰어넘는 언약적인 사랑과 용서의 은혜(7:18-20)로 다시 언약 관계를 회복하실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열국의 조롱을 잠재우시고(5:7-9), 그들이 부끄러워 제 입을 가리고 제 귀를 막게 하시며, 여호와께 돌아와서 그분을 경외하게 하실 것이다(7:16-17).


 

IV. 우리 시대를 향한 메시지

 

   이스라엘이 눈에 안 뵈는 하나님보다 눈에 뵈는 열강들을 의존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성령보다 손에 잡히는 ‘돈’과 ‘권력’을 사모하고,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 ‘마음’보다 간편하고 손쉬운 종교의식을 중시하는 동안,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초라한 우상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 천천의 수양과 강수 같은 기름과 심지어 인신 제사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겠다는 얄팍한 거래마저 서슴지 않았다(6:6-7). 후레자식들인가? 그런데 임마누엘의 약속보다 신용카드를 더 든든하게 생각하고, 인스턴트 종교행위와 돈 몇 푼으로 ‘하나님 의식’(the consciousness of God) 없이 산 시간을 만회해보려는 우리와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

 

   내 편한 밥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내 우아한 커피향기를 위해 착취당하는 아이들, 내 근사한 교회 때문에 문 닫는 지하실 교회들, 내 집값 올라가는 동안 새벽잠을 설치는 세입자들, 경쟁에 떠밀려 아파트 옥상을 배회하면서 죽음을 떠올리는 아이들, 이제 개방이 확대되고 외국쌀이 더 쉽게 들어오면 세계화할 경쟁력이 없어서 퇴출되어 마땅한 나의 늙은 농사꾼 아버지,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의 조롱을 받지 않고 여전히 사랑과 인자와 공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가?


  미가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종교 권력 중심지인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을 가두지 말라고 저 모레셋 시골에서 외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에게는 교회 안에만, 또 별 특징 없이 반복되는 종교의식 안에만,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편한 관계 안에만, 하나님을 가두지 말라고 하실지 모른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자비에 대한 요청에 이제 우리가 대답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 만유의 주 되신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언약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가지고 와야 하는 선한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 자신이라고 한다(6:8). 그런 나를 통해 초라해진 하나님이 참으로 영광스런 하나님으로 찬양 받길 바라시는 것이다.

 

<출처: 웹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