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6-7(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랑의 힘)
성경본문 : 아가서8:6-7
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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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
어느 블로그에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로는 돌이 있다. 그러나 돌은 쇠에 의해 잘려지고, 쇠는 불에 의해 녹아버린다. 그러나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하고 구름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또한 구름은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닌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불어 날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공포에 의해 비참하게 위축된다. 공포는 술에 의해 사라진다. 술은 잠을 깨면 깬다. 그러나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죽음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이 글은‘반듯한넘’이란 닉네임을 가진 형제님이 이스라엘 사람의 지혜를 모아놓은 <탈무드>에서 옮겨놓은 글인데,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사랑이라는 이 말을 증명해주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인 1988년 12월7일, 아르메니아에서 최악의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으로 무려 5만 5천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그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수잔나라는 한 여인이 네 살 난 딸 가이아니와 함께 시누이 카린의 아파트에 갔는데, 집안에 들어 간지 약10분이 지났을 때,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9층인 이 아파트는 성냥갑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수잔나와 딸, 그리고 시누이 카린 이 세 사람은 건물더미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시누이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딸과 엄마 수잔나는 다행히 건물더미 사이에서 목숨은 건졌으나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점점 고통스러워 갔습니다. "엄마, 목이 말라요. 물을 마시고 싶어요. 제발 마실 것을 주세요." 딸이 소리를 질렀지만 엄마가 딸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수잔나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서 700g쯤 되는 딸기잼을 발견하여 그것을 통째로 딸에게 주었습니다. 수잔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딸만은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옷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 위에 딸을 눕게 했습니다. 12월의 한 겨울 날씨로 인해 너무나 추웠지만, 그녀는 자신의 스타킹까지 벗어 그것으로 딸이 춥지 않도록 감싸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그들은 8일이나 갇혀 있으면서 서서히 모든 감각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딸은 신음하면서 "엄마, 물. 엄마, 물"하고 엄마에게 보챘습니다. 그러나 수잔나는 어디에서도 물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문득 TV에서 손에 상처를 내어 흘러내리는 피를 갈증으로 죽어가던 동료에게 먹이던 장면을 떠 올렸습니다. 그녀는 깨어진 한 유리 조각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팔뚝에 상처를 내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피를 딸의 입에 흐르게 하였습니다. 엄마는 자신의 팔뚝을 몇 번이나 그었습니다. 이렇게 2주일이 지나서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엄마의 희생이, 엄마의 사랑이 딸을 살린 것입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사랑에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죽음을 뛰어넘는 강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솔로몬 왕이 내린 사랑의 정의인데, 사랑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강할 뿐 아니라,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죽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자녀와 남편과 아내와 친구, 등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가 자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남편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친구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진짜 사랑은 많은 물로도 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홍수로도 진짜 사랑을 휩쓸고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세상의 어떠한 권력과 재물로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게 되면 재물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을 다 주고 사랑을 사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진짜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리는 줄로 믿습니다. 진짜 사랑은 물이나 불이나 권력이나 물질로도 끊을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진짜 사랑이란 누구의 사랑일까요?
친구간의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부부간의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부모의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진짜 사랑이 없습니다.
여러분, 친구가 배반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친구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배반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가 실망시켰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남편이나 아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식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부모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장 38절과 3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도 아니하고, 결코 끊어지지도 않는 줄로 믿습니다. 핍박으로도 환난으로도 칼로도 끊지 못하고, 하다못해 사망이나 권세자들이나 천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3년 동안의 공생애를 마치실 즈음,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아놓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찬양하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 종려주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대신, 친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2,000여 년 전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로마제국의 압제아래에서 고난 받고 있는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 후 제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고 수차례나 강조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죽하면 수제자라고 불리 우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사단’이라고 책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 5장 8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를 NIV 영어성경에 보면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확증한다’는 말은 ‘나타낸다‘,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몇 년 전 유승준이라는 가수가 온 국민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수가 비난을 받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가 군대를 교묘한 방법으로 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교묘한 방법으로 군대에 가지 않은 가수나 배우나 탤랜트들도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가 군대에 가지 않아서 비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난 받은 이유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참 인기를 얻었던 시절, 꼭 군대를 간다고 늘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초창기에 가수로 데뷔할 때는 해병대에 지원 입대하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몰래 숨어서 대마초나 피우고, 남여 관계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별의별 방법으로 군대를 가지 않으려는 가수나 영화배우나 탤랜트 등의 연예인들에게 잔뜩 실망해있는 국민들에게 정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 그는 군대에 꼭 가겠다는 그 말 한마디로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댄스가수가 되어, 국가가 주도하는 각종 홍보행사에 참여하며 다른 연예인이 누리지 못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무슨 상을 받을 때나 어떤 행사에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챤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었고, 실제로 저도 유승준이라는 가수를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꼭 군대를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미국시민권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렇게까지 배신감이나 실망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의 남아로서 군대는 꼭 갑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그가 미국 시민권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군 입대를 피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던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현역병으로 입대했더라면, 아니 현역병으로 입대하지 않고 공익근무요원으로라도 입대해서 열심히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가수생활을 했더라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군대 가지 않는 연예인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어,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그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아빠로서, 엄마로서, 자식으로서, 친구로서, 집사로서, 목사로서 우리들이 입으로 내놓은 말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월말에 봉급 받으면 맛있는 것 사준다, 다음 달부터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나오겠다, 다시는 화내지 않겠다, 성적 오르면 플레이 스테이션 사주겠다, 매일매일 성경 3장씩 읽겠다, 배운 말씀대로 실천하겠다, 등등의 말을 해놓고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에 책임을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여 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멋진 자동차를 사줌으로써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줌으로써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 데리고 감으로써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보다 가장 귀한 것은 목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자 이것을 봐라!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너희들을 위해 이 십자가에서 죽게 했단다. 이 십자가는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다는 증거란다."
이처럼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도록 도와주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은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죽음같이 강한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다 내어줍니다.
가슴속에 애절한 사랑으로 남아 있는 엘리스 공주(Princess Alice)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엘리스 공주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디프테리아 병에 걸렸습니다. 왕실 주치의는 엘리스 공주에게 디프테리아 병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딸과 절대로 신체적인 접촉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딸의 신음 소리를 듣고 공주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엘리스 공주는 딸에게 달려갔습니다. 딸은 펄펄 끓는 고열로 인해 헛소리를 하며 엘리스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뽀뽀해 줘요(Mamma, kiss me!)" 순간 엘리스 공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딸에게 뽀뽀를 했습니다. 얼마 후 엘리스 공주는 딸로부터 디프테리아 전염병이 감염되었고, 나중에는 죽기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의사는 엘리스 공주에게 “공주님,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라고 책망하며 물었습니다. 그러나 공주는 “내 딸을 살릴 수 있다면 앞으로 열 번이라도 키스 할 것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엘리스 공주는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엄마의 사랑이 하늘을 움직여 그 딸은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스 공주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영국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까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돈도 명예도 물질도 포기합니다.
사랑하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목숨까지도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다 포기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낌없이 포기하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릴 때 동화책에서 읽어 보신 분들도 있고, 전에 제가 금요집회에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어서 그 때 들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옛날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매일같이 나무에게로 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속의 왕자처럼 흐뭇해했습니다. 때로는 그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열매도 따먹곤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나름대로 숨바꼭질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소년은 그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나무대로 소년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무척이나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습니다. 세월은 흘러 소년은 점점 나이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옛날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모처럼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놀아. 그네도 타고, 열매도 따먹고, 그늘에서 놀며 그렇게 즐겁게 지내." "나는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많이 커 버렸어. 이젠 어렸을 때완 좀 다르게 물건을 사면서 놀고 싶어.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나무야 나에게 돈 좀 줄 수 없겠니?" "미안하지만, 내겐 돈이 없는걸. 하지만 내겐 나뭇잎과 사과는 있어. 얘야, 내 사과를 따다가 도시에 갖다 팔지 그래? 그러면 돈이 생길 거야. 그리고 너는 행복해지지 않겠니?" 이 말을 들은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사과를 한 움큼 따 가지고는 가 버렸습니다. 소년이 모처럼 놀러 왔다가 같이 놀아주지 않고, 사과만 따 가지고 가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과를 따 가지고 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한동안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청년이 되어 나무에게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 나무는 기쁨이 넘쳐 몸을 흔들면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즐겁게 놀아." "난 이제, 나무에 올라 그네 타고 놀 만큼 한가하질 않아. 앞으론 결혼도 해야 하고, 아기도 가지기 위해서는 난 집을 먼저 준비해야 돼. 나무야, 나에게 집을 좀 줄 수 없겠니?" "난 집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걸. 아, 그렇다! 넌 내 가지들을 잘라서 집을 지으면 되겠구나!" 그래서 소년은 그 나무의 가지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집을 짓기 위해 자른 가지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나무는 가지가 다 잘렸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중년이 되어 다시 나무에게 돌아왔을 때 나무는 너무 너무 기뻐했습니다. "얘야, 오랜만이다! 어서 와! 나랑 같이 놀자!" "나는 놀기에는 너무 지쳤어! 이제 나에겐 배가 필요한데. 나에게 배를 좀 줄 수 없겠니?" "그래? 그럼 내 줄기를 잘라서 배를 만들어 보렴. 그러면 너는 그 배를 타고 멀리 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소년은 그 나무의 마지막 남은 몸통을 싹둑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소년은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이빨이 나빠서 이젠 사과도 먹을 수 없어."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탈수도 없고 어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기에는 난 이제 너무 늙었어."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기어오를 수도 없고." "나는 이제 기운도 없어서 줄기에 기어오를 수도 없어." 그 때 나무가 한숨쉬며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해! 뭘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고 남은 것이란 늙어 버린 나무 밑둥뿐이라서 미안해." "그래? 괜챦아. 난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그저 조용히 앉아서 쉴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몹시 피곤하거든." "그래? 그렇다면 자,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지. 이리로 와서 앉아 쉬어."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나무가 시키는 대로 이제 마지막 남은 나무 밑둥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쉘 실버스타인(Shell Silverstein)이 지은『아낌없이 주는 나무(Giving Tree, 1964)』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아낌없이 다 주었습니다. 잎사귀도 주고 열매도 주고 가지도 주고 줄기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 남은 밑둥까지 다 주면서도 행복해 하며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도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기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다 주고도 기뻐해하고 행복해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우리에게 다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시지 않고, 말씀하신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직접 보여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랑의 힘으로 자녀와 형제와 친구들의 허물을 감싸주고, 소망 가운데 끝까지 인내할 때, 우리의 가정이 변하고 우리 교회가 새로워지고 세상이 바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에는 살리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에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2006년도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속죄와 사죄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이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낌없이 포기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은사보다도 가장 귀하고 복된 이 사랑의 은사로 충만하여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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