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아가서 강해

아가서의 해석 문제

에반젤(복음) 2019. 9. 21. 10:40



아가서의 해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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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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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으로 보는 해석법이다.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부부간의 사랑"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는 책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부부 생활의 축복을 발견하려고 했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성인이 되기 전에는 읽지 못하게 했다. 솔로몬 당시의 여성은 노예나 소유물, 또는 쾌락의 대상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에 이 책에 포함된 동등한 남녀간의 사랑의 정신은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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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레고리(Allegorical)적 해석

하나님과 유대 민족 사이의 확장된 은유 관계로 보려는 풍유적 해석법이다.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해석할 때에 솔로몬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술람미 여인을 이스라엘로 해석하였다.

3. 모형론적 해석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모형론(豫表論, typology)적 상징으로 보는 해석법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솔로몬을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술람미 여인을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등으로 아가서를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솔로몬을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술람미 여인을 우리 성도로 말하는 것으로 보고 아가서를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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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학적 해석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 목자 등을 주요 등장인물로 하는 아름다운 드리마로 보는 해석법이다. 최근에 제기된 해석 방법이다. 최근의 구약 학자들 중에는 아가서를 1) 사랑을 노래하는 연극의 극본, 2) 결혼식 때에 불렸던 결혼 축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희극적인으로 보는 해석 방법도 있다. 아가서에는 대화, 독백, 합창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2인설("델리취"), 3인설(에발트(H. Ewald)가 제기하고, 드라이버(S. R. Driver)가 각색함)이 있다. 2인설은 2명의 남녀 주인공(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등장하는 연극의 대본으로 보고 아가서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 견해는 그 동안 줄곧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3인설은 3명의 등장인물(솔로몬, 여인, 목동)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견해는 아가서가 한 여인이 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솔로몬의 유혹을 뿌리치고 진정한 사랑(목동)을 찾아가는 것을 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솔로몬을 사단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해석과 다르며, 전통적으로 이렇게 해석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아가서가 결혼식의 노래로 보고 있지만, 아가서 중에는 결혼 축가의 내용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가서 전체가 다 결혼 축가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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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의적(cultic) 해석:

일부 학자들은 이 노래가 우상의 축제 때에 부른 예식적인 노래였다고 주장한다. 연인 사이의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닌 가나안 신화에 나오는 여신과 왕과의 신성한 혼인 노래로 보는 해석법(왕과 여신은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가운데 갈등과 시련과 가뭄과 죽음 등을 극복하고 최종적인 승리의 찬가를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우상을 반대하는 이스라엘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 들려지지 않고 있다.

 



아가서 연구

 

 

아가서는 유대인의 절기 중 첫 번째 절기인 유월절에 낭독되었다. 이 책의 명칭은 쉴 하쉬림(םירישׁה רישׁ ,Song of songs)이며 그 뜻은 노래들 중의 노래혹은 가장 훌륭한 노래이다. 이 책은 전통적으로 솔로몬을 저자로 인정되고 있다. 아가서에서는 페르시아어(4:13, סדרפ, park, forest, 과수)와 헬라어(3:9, ןוירפא, sedan-chair, ) 등 일부 외래어가 사용 된 것은 솔로몬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일치한다. 솔로몬 시대에는 국가 간의 교역이 잘 이루어지던 시대로서 솔로몬의 작품 가운데 외래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외에도 아가서에 나오는 여러 지명들이 솔로몬 통치시대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과 아가서 저자의 박식함(아가서에 15종의 동물과 21종의 식물이 언급되어 있음)은 솔로몬이 아가서의 저자임을 말해 주고 있다.

 

아가서는 솔로몬, 술람미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딸들 사이에 대화 형식으로 불린 사랑의 노래다. 아가서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사랑은 즉흥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고 여러 시련을 극복해 가며 이루어가는 온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세상의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8:6,7). 이처럼 아가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며 더 나아가서는 이웃을 사랑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아가서의 내용은 단순하여 내용 자체만으로는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언어들 가운데 표현된 사랑의 시어(詩語)들은 듣는 자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 감동을 주고 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를 한 쌍의 연인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의 꿈은 술람미의 형제들로 인하여 이룰 수 없었다. 그의 형제들은 그 녀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다(1:1-2:7). 이로 인하여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그리움만 더해만 갔다. 28절부터 시작되는 다음의 아름다운 시는 이때 술람미의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2:8-3:5).

 

술람미 여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솔로몬은 용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술람미를 찾아갔다. 여기 묘사된 솔로몬의 위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모습에 압도당하게 하여 이들의 재회를 막을 수 없게 하고 있다. 술람미의 형제들도 더 이상 이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쁨으로 다시 만나서 서로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재회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술람미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이들의 기쁨이 깨어졌기 때문이다(3:6-5:1). 술람미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는 이유로 밤에 찾아온 사랑하는 사람을 문밖에 세워 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솔로몬은 밤이 늦도록 문을 두드리며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맞아주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인이 일어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문을 열었을 때에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였다. 술람미 여인은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를 태웠다(5:6). 이제는 반대로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한 밤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그는 거리를 헤매는 중에 때로는 성을 순행하는 자들을 만나 상하기도 했지만 결코 사랑하는 이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사랑하는 자가 어디 있는지묻었다. 술람미는 결국 양치는 곳에서 사랑하는 이를 만났다. 솔로몬은 자신에 대하여 무관심 했던 여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를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어떤 허물도 책망하지 않았고 오직 다시 만난 그것만을 기뻐했다. 이들의 재회는 이들 모두에게 잃어버렸던 사랑의 노래를 다시 찾게 했다(5:2-8:4).

 

이렇게 모든 장애를 극복한 이들의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라고 말하며, 이와 같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즉 온전한 사랑은 온전한 연합을 가져다주는 힘이다. 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힘은 어떤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를 분리해 놓을 수 없게 했다. 온전한 사랑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온전한 일치와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아가서는 외적으로 볼 때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시(). 그러므로 다른 성경들처럼 직접적으로 주는 영적 교훈들은 없다. 8:6에서 여호와라는 단어가 한번 사용 되었지만 이 성호(聖號)는 주체로서 하나님을 계시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랑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수식적(修飾的)으로 사용 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구약에서 에스더와 아가서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는 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아가서는 초기 사람들로부터 정경으로서 가치를 의심받기도 하고 단순히 연애시(戀愛詩)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아가서야말로 심오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아가서가 극()과 극으로 평가 받는 것은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이 책이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해석의 문제다.

 

아가서를 연구할 때에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세 가지 해석 방법이 있다. 첫째 문자적 해석법(Literal Interpretation)이다. 이 해석법에 따르면 아가서는 단순히 인간의 사랑을 노래한 시일뿐이다. 둘째, 풍유적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이다. 풍유적 해석법은 고대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방법으로서 오리겐(Origen)에 의해 그리스도교에 도입되었다. 이 해석법에 따르는 유대인들은 이 시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로 믿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나타낸다고 여긴다. 셋째 상징적 해석법(Typical Interpretation)은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법과 풍유적 해석법을 중재하는 견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솔로몬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술람미 여인은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계시해 준다. 이처럼 상징적 해석은 풍유적 해석이 가져오는 단점을 극복하고, 문자적 해석으로 인한 세속성도 피하게 해 준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Merrill F.Unger, 구약개론, PP.143,144참조)

 

따라서 여기 세 가지 해석들 가운데 상징적 해석이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가장 바람직한 해석이다. 상징은 언제나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현재 언급된 사건이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그것은 또한 그 사건 자체를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계시한다. 우리는 이런 예를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을 때 그 예언의 말씀을 역사성을 갖는 동시에 또한 세상의 종말을 계시하고 있다. 실제로 주님의 예언대로 로마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멸망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은 역사적 예언의 성취로 끝이 난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상장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인류의 종말을 계시해 주고 있다. 즉 우리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하여 세상의 종말을 내다보는 것이다. 이것이 상징적 해성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이다.

 

이와 같이 아가서를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은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 인정됨과 동시에 또한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 해 주시고자 사용하시는 상징적 도구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모든 시대 자기 백성들에게 온전한 사랑에 따라 살도록 교훈해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역사적 사실을 상장적인 도구로 사용하시므로 주님과 교회와의 사랑의 관계를 계시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확신할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이웃에 대하여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