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תלהק; Ecclesiastes)
합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김성수 교수 전도서 강의안...
전도서부터 시작합시다. 왜 전도서부터 시작하는가 하면 전도서는 인생의 가장 궁극적이고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전도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실 허무한 감이 듭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아름답고 인생은 의미가 있다는데 계속 허무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얼핏보면 성경에 이런 글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제대로 알고 보면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근본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1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왕 전도자의 말이니라’라고 해서 솔로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상 가장 지혜로왔던 인물이라 일컫는 솔로몬이 내린 결론이 ‘인생은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생은 헛되다’는 결론으로 끝나고 마는가? 1장부터 이런 결론을 복선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결론이 나오는 것은 그냥 내뱉어진 것이 아니라 전도자가 이전에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가 나름대로 잘 추구해서 내린 결론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품었던 의문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3절에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해서 자기가 품었던 의문이 무엇인지를 제시합니다. 즉, 쉽게 풀자면 사람이 일평생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에게 남는게 무엇인가?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 여기에서 ‘해 아래서’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즉,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풀어가면서 가장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글입니다. 도대체 성경은 인생의 의미를 뭐라고 가르쳤으며 그 해답은 어떤 과정을 통해 결론으로 이끌어지는가? 그 과정 속에는 이제까지 세상에서의 모든 종교, 도덕, 철학 등에서 그 나름대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방법과 과정들이 몽땅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이와같은 질문을 제기해 놓고 1차적으로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헛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쓰여진 의미는 수증기, 입김이라는 의미입니다. 기껏 인생 60, 70년을 살았더니 남는게 없더라는 이야기 입니다. 어떻게 솔로몬이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요?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인생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하여 전도자는 지적인 방법과 경험적인 방법 두 가지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전도자가 시도했던 이 모든 방법 외에 혹시 여러분이 알고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고 저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있다면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저희 신학생들끼리 모여 여기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궁리해도 전도서에 나오는 범주를 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선 전도자는 첫번째 방법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여기서 둘로 나누어 우선 자기 바깥 세계, 우주의 피조계에 대해 살펴보는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4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에서 땅에 대해서 우선 생각합니다. 5절 ‘해는 떴다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해는 보통 천체를 상징할 때 쓰이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반복되는 흐름을 갖고 있다는 특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6절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이라 하면 보통 신비하고 알 수 없는 특성으로 이해되어집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나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니라’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네번째로 7절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즉 물의 운행에 대해 관찰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자연계, 우주계를 살피고 관찰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줄만한 것이 있는가를 관찰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발견한 공통점은 8절과 같이 만물이 피곤하다는 결론입니다. 이 말은 피곤해서 지친 상태라기 보다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뺑뺑도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른 보기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같지만 가만보니 그 나름대로의 법칙과 굴레가 있어서 반복된 질서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없고 법칙과 질서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따라서 9절 내용과 같이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이전에 있던 것을 생각지 못해서 새로운 것처럼 생각할 따름이지, 근본적으로는 한계와 법칙의 굴레에 갖혀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피조계를 살펴본 결과 여기서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그 두번째의 방법으로 이제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합니다. 즉 인간에 대해서 말입니다. 12절에서 18절까지가 이 내용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과 이 부분을 연결시켜 생각하면 좋습니다. 창세기 1장은 자연계와 우주계를 먼저 다루고 그 다음으로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인간에 대한 부분입니다. 전도서도 이와 마찬가지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이 내용이 12, 13절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최선의 인간 즉, 이상적인 인간을 두고 생각합니다.
13절에는 ‘궁구하며 살피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여 깊이 있고 넓게 애쓰는 사람을 말하는데 13절 중간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즉,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도대체 이 땅에서 왜 사는가?라는 것을 마땅히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궁구하며 살도록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을 수단으로 해서 그것을 생각하느냐 입니다. 여기나온 13절에 ‘지혜를 써서...살핀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지혜를 사용해서 삶의 의미를 생각했음을 알게 됩니다. 역사상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취한 방법은 자기가 가진 지혜, 이성을 가지고 찾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즉, 15절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에서와 같이 지혜를 그 수단으로 하여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다가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르네상스 시대를 아시죠? 그 시대에는 중세 때와는 달리 이성이 모든 것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이성이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모든 것의 의미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교육만 잘 시키고 이성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리라는 생각이 편만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생각이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되고 결국 이성으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철학자 ‘칸트’가 바로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칸트에 이르러 비로소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에 비해 벌써 몇 천년 전에 성경이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다 해답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성에 대해, 그것이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풀 수 없다고 가장 지혜 많았던 솔로몬의 입을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인생의 거대한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다고 하면, 최소한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미친 짓인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17, 18절에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18절에 보면 많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며 마음만 괴롭고 고통만 더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정리해 봅시다. 처음, 문제제기를 한 것은 삶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방법으로서 우선 자기 주위의 세계를 살펴보니 거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 방법은 포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가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서 알아보려니 여기에도 한계가 있어서 결국 찾지 못했더라는 이야기가 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지혜를 써서 연구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제 실제적으로 몸으로 부딪히면서 삶을 경험해 봐서 내 인생의 참 즐거움을 줄만한 것이 있는가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방법 즉, 경험적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2장 1절부터의 내용입니다. 한계에 다다른 이성으로서의 방법은 포기하고 실제 삶으로 들어가서 내 인생에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가를 모두 시험에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혹시 남들이 미친 짓이라고 하더라도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줄 수 있다면 경험하겠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3절부터 시도한 방법이 다양하게 제시됩니다. 첫번째, 술독에 빠져보는 것입니다. ‘술’은 쾌락의 대명사로 보통 언급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것은 세상적 방탕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거기에 어떤 인생의 즐거움이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방탕한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그만둘 자세로 술독에 빠져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이정도 술에 빠지면 머리 속에 지혜가 없어지기 마련인데 3절을 다시보면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이 말은 즉, 이것이 어떤 인생의 의미가 있는가를 마음에 생각하면서 술에 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지혜는 여전합니다.
두번째 방법으로 3절 후반에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리석은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모두 해보았다고 합니다.
세번째로 남자들이 보통 많이 쓰는 방법이 나옵니다. 4절 ‘나의 사업을 크게 하며...’ 이것을 현대말로 풀어보겠습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기업을 하나 세웠는데 현대그룹과는 비교도 안되는 어마어마한 기업입니다. 즉, 사업성취를 해서 대궐같은 궁전을 지었습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지은 궁전을 아시죠? 그러고 또 에덴동산 같은 큰 정원도 가꾸고 거기에 온갖 아름다운 나무도 심고 또한 무역을 크게 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팔레스틴 밑에는 이집트가 있고 위쪽으로는 바벨론이 있습니다. 일상 4대문명이라고 하면 어디를 꼽죠? 인도문명, 중국문명, 애굽문명, 그 다음으로는 바벨론문명 이렇게 꼽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인류의 거대한 두 문명권인 애굽과 바벨론의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한 것입니다. 중간에서 중계무역도 하고 통행세도 받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이 강해지면 이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쳐들어오고 바벨론도 그랬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숙명적으로 이리 맞고 저리 맞게 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고, 이것을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더 강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모든 권세를 쥐고 부를 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돈도 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노래하는 남녀를 항상 두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지금 유명한 사장들이 가든파티를 할 때 밴드를 부르곤 하지요? 그러나 이건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속으로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8절 이후를 봅시다. 솔로몬이 처와 첩을 몇 명이나 두었는지 아세요? 굉장히 많습니다. 즉,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가 있느냐를 찾으려 애썼던 것입니다.
자! 솔로몬은 이 정도로 권력도 가지고 모든 것을 성취하고 누리면서 해 볼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어느 정까지냐? 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다른 말로 하면 생각나는대로 원없이 하고 싶은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것들은 다 해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정도로 호강하면 일반 사람들은 생활의 안락함으로 지혜가 없어지게 마련인데 지혜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1절에 보면 모든 것을 다 해봤지만 모두 헛되다는 결론으로 갑니다. 전도자는 왜 이 모든 것을 다 해보면서 어떤 과정을 통해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는가? 하는 점입니다.
1차적으로는 가만히 살펴보니 이 땅에 살면서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사는 것 같지만 종말을 보니 결국 똑같이 죽더라는 것입니다. 즉 허무하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일반으로 똑같이 죽어서 땅에 묻힌다는 겁니다. 또한 이렇게 전도자가 자기 시대에 큰 일을 했더라도, 영원히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날리기 위해 산다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전도자는 사는 것은 헛될뿐 아니라 혐오스럽기까지 하다고 합니다. 23절까지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일평생 잠도 안자고 고민하며 지혜를 짜서 나름대로 업적과 기업을 이루어 놓았는데 이것을 지혜자가 물려 받을지 우매자가 물려 받을지도 모르고, 내가 열심히 이루어 놓았지만 결국 누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렇다면 그나마 삶에 즐거움을 주는게 무얼까를 생각해 본 것이 24절에서 26절까지에 나옵니다. 먹고 마시고 쉬면서 인생을 즐기는게 최고가 아닌가? 하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벌은 만큼 잘 먹고 잘 살기라도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조차 마음대로 안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것도 하나님이 주셔야하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 인생에서 내 손에 있는 것같은 재물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도 내 손에 달려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2장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는 모든 것을 다 시험해 보았지만 결국 내 인생이 내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절박하게 느끼고 26절 ‘이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하는 것 같다’라고 합니다.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전도자는 우선 이 땅에서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1차적으로 그것을 찾기 위해 첫번째로 피조계를 관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일정한 법칙과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다음, 지혜, 이성을 수단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자 그 다음 실제적으로 생활하고 경험하면서 큰 사업을 성취하고 쾌락을 즐겨 보았으나 그것도 모두 헛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죽고 난 다음에 자기 업적이 기억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이루어 놓은 것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 잘먹고 잘살기라도 하자고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그 스스로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는 것이 1, 2장까지의 설명입니다.
여기까지에서 전도자가 좌절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어떤 한계 안에 갖혀 있다는 것을 본 때문입니다. 삶의 적극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인생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잘먹고 잘살자는 시도를 해보았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자 삶의 허무를 논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전도자는 놀라운 것을 발견함으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3장부터 유명한 구절이 나오지요? ‘만사에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시작해서 11절까지 계속 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생각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해 줍니다. 전도자가 좌절한 근본 이유는 한계 때문이었는데 그 한계가 왜 생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 때문에 좌절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다는 사실이 11절에 나옵니다. 똑같은 내용을 두고 예전에는 그것을 생각할 때 좌절과 허무로 밖에 갈 수 없었던 것이 관점이 바뀌니까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고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 것입니다. 전도자의 표현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스릴 때 그 뜻과 계획에 따라 그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에 맞는 한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한계는 나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드셨다는 이야기이고, 그러면 그 한계를 왜 정하셨는가를 알아가면 오히려 허무로 가는게 아니라 그 한계를 통해 내게 가르쳐 주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장 이전까지는 ‘하나님’ 이야기가 한 번도 안나옵니다. 그리고 3장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즉, 이전까지 삶의 의미를 생각하되 내가 바라보는 안목을 세상과 자신에게만 두고서 찾으려니까 한계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한계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 없는 사고체계와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자리까지 들어가는 내용이 3장의 내용입니다.
자기를 좌절케 하였던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그 속에서 찾아나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방법임을 깨닫고 그래서 의미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는 아름다운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관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불교의 철학입니다. 그것은 반복, 즉 윤회사상이 골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한계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없는 것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한계에 대해 그 우주질서 자체에서 우연히 생긴게 아니라 그렇게 만드신 분이 있고 그 한계를 만드심으로 온 우주를 다스려 나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삶의 한계 안에서만 보면 숙명론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점성술이고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계관이 취하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라 그 한계를 느끼게 하고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 한계를 두신 이유를 찾아 나간다는 것,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섭리하셔서 아름답게 만드신다고 말합니다.
모든 세계의 한계 자체만을 볼 때는 분명히 비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무 의미없이 그렇게 만드신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생을 의미있게 하려고 하신다는 의미에서 전도자는 ‘만사에 다 때가 있다’고 고백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섭리하시기 때문에 좌절을 느꼈던 한계가 하나님 안에서 의미있게 되는 것이라고 전도자의 결론이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없는 세계관에서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 좌절했지만 이제는 그 한계는 마음대로 생긴게 아니라 그것을 정하신 그분의 뜻과 섭리를 이루어 나가시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알게 되어서 내린 결론이 3장 14절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라고 본론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까지 지나온 과정을 봅시다. 처음에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부딪혔던 벽이 인간의 한계였습니다. 문제는 그 한계 때문에 좌절한 것인데 그러나 새롭게 깨달은 것은 그 한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잘 다스리시기 위해 만드신 것이며 아름다운 계획이 있어서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자리까지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려 나가시되 그 방법으로서 우리 인생에 한계를 두시고 자연에도 법칙과 한계를 두셨으며,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그대로를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름답게 때를 따라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도자는 이제까지 하나님 없이 생각하다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기로 합시다. 여러분 가정이나 국가의 문제, 혹은 생활상의 여러가지 문제나 내가 처한 상황에서 부딪히는 한계라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참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없이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려 나가시며 우리의 생각을 바로 잡아 놓으려고 하신다는 것, 자신이 처해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면서 겸손하게 하시며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고백했습니까?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솔로몬의 입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는 지혜가 최고로 많았고 또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강의에서 우리는 사람이 일평생 동안에 사는 동안의 삶의 의미와 목표에 대하여 진지한 답변을 시도하였습니다. 전도서는 우선 헛되다는 표현을 5번이나 반복하면서 삶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추적합니다. 먼저 이 세상 바깥의 우주를 관찰, 연구해 보았으나 움직이는 세상의 법칙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것 같지만 그것은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만 그렇게 느낄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라 이것은 새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않으니 앞으로 올 세대가 우리 세대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우주와 세상으로부터 이제 인간 자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의 창조순서를 따르고 있는 셈이기도 하지요. 인간 자신을 살펴보아도 거기에서 엄청난 한계를 느낍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은 생각하는 능력인데 그 능력도 무한한 것이 아니라 역시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서 인생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결핍과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기독교와 전혀 상반되게 인간으로서 가지는 그 한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뛰어 넘으려는 다양한 형태의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불교에서 윤회사상이라고 언급하는데 인생이 부딪히는 여러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노력을 피눈물나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다음으로 시도했던 전도자의 방법은 삶의 현장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찾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술에 만취해 보기도, 방탕해 보기도, 돈을 원하는 대로 벌어 보기도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모두 다 시도해 봅니다. 그런 시도를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내가 술을 마시고 방탕하면서도 방탕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거기서나마 나의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혹시 있지 않을까?라는 입장에서 방탕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헛되었다고 전도자는 고백합니다. 모든 인생이 부러워할 만한 또한 아직도 많은 인생이 솔로몬이 누렸던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열심히 살아나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헛되더라는 솔로몬의 자전적인 고백은 우리에게 큰 경종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무엇 때문에 헛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고백합니까? 가만히 살펴보니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세와 부를 가지고 살았다손치더라도 그 인생의 마지막을 보니까 모든이가 똑같이 죽음으로 끝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뛰어 넘을 수 없는 필연적 한계로 인하여 좌절하다가 그럼에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을 살아보려고 애썼지만 종국에 가서 그렇게 산 사람이나 그냥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나 똑같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한계에 부딪히니 얼마나 헛된 인생인가?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이 염세주의적 인생관을 가질수 밖에 없으나 솔로몬은 바로 이런 헛된 삶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제시하는 과정이 전도서 3장 이하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을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 이 문제를 다시 풀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는 한계는 우리 인생을 좌절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아름다운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조성하신 한계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뜻은 아무렇게나 생긴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한계 때문에 허무하고 좌절하고 말았다면 이제는 그 한계 때문에 인생은 의미 있을 수 있다는 대역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한계는 의미없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계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면 오히려 인생을 아름답고 의미있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느냐는 솔로몬의 깨달음입니다.
세상의 종교들과 인간들의 철학들은 그 한계를 넘으려고 애쓰고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단지 현실도피적으로 야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나가시는 방법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없을 때는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부딪히는 한계에 대하여 일차적으로 원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라고 믿을 때 오히려 그 한계로 인하여 감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놓고 신자와 불신자가 정반대의 해석을 내리고 정반대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와 인간 그 자체만 또한 세계와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당연히 좌절,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하나님이 없는 인생관 및 세계관에서 드디어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 및 세계관으로 바뀌어지는 분기점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떠한 처절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옵니다. 하나님의 크신배려 속의 계획과 그의 간섭을 믿고 인정하면서 그 한계와 좌절을 아픔과 한숨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아나가는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는 세상적인 좌절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이 때에 따라 아름다게 하신다는 그분의 뜻과 섭리 안에서 큰 기쁨과 감사를 발하는 찬송으로 전도서는 2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까지의 복습입니다만 여기서 덧붙여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에 대한 두 가지 형태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통한 섭리적 인도와 또 다른 하나는 본인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인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곤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까 그때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는데 지내고 보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였다고 말입니다. 이 때는 그 사건을 당하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무지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으로 섭리적 인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또한 있을 수 밖에 없으나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자각하는 분량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섭리적 인도만으로는 그 사람 스스로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유아기적 신앙으로 배고프면 울고 불편하면 징징대는 형태가 많은 것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했느냐고 물으면 사실 오랜 세월 후에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였다는 결과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신앙 형태는 그 어려움에서 대부분 처절한 좌절과 슬픔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있다가 지내고 나서야 분명히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발견하곤하는 것입니다.
여기 전도자도 천하의 범사에 때가 있어서 나의 한계로 인한 좌절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오히려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과 인간 자체만 놓고 - 하나님 없는 세계관 - 생각하다가 그래서 전도서 2장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거기서 허무감과 좌절감을 발견하고 드디어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 생각하던 자리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서 생각하는 관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연법칙 또는 우리 인생이 처한 모든 한계들은 우리를 좌절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에서 외쳤던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라고 감사, 찬양하는 자리에까지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처음에는 감격이 넘치고 참 좋습니다. 실패했을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발견하면서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몇 년 정도 다니고 나면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실망감이 사람을 사로잡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나서 한없이 계속 즐거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솔직하게 가만히 자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름답게 다스려 나가신다고 했는데 신실하게 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쁜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팽개치고 예수를 안믿겠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아름답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전도자 솔로몬이 딱 부딪힌 것입니다. 요전까지는 비신앙인이 고민하는데서 신앙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신앙인으로서 가지는 중요한 고민과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성경이 제시하는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의미있게 다스릴 것이라고 믿지만은 마음으로는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로는 믿지만은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그렇다’는 것이 없이 그냥 그냥 살아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기형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들을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아주 잘 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의 뜻대로 아름답게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믿는 사람에게 생겨난 새로운 문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로 요약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있는 한계를 두셔서 우리를 다스려 나가신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이 뜻은 아름답고 멋있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처해 있는 문제에서 과연 하나님께서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상황에 처해있게 하실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 아름답다손 칩시다. 그것을 우리가 또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바로 이 문제에 부딪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신다 하더라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3장 11절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시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야만이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가만히 살펴보니까 문제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가 많다는 솔로몬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만 우리 인간 스스로는 그 뜻을 알아서 찾아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없다’는 이야기를 이 전도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아무리 좋은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저 아무 의미도 모르고 그냥 살아 간다면 단지 알지 못한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삶이 꼭둑각시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드디어 하는 겁니다. 그것이 1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더하거나 제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이 그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두번째 문제제기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 인간 스스로는 내가 처해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또한 가만히 살펴보니까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고 싶으신대로 다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하나님 하시고 싶으신대로 다 하실텐데 내가 이 땅에서 열심히 한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이 하시고 싶으신대로 하신다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린 하나님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꼭둑각시에 불과한가? 하는 심각한 문제를 여기 14절에서 제기시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는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번째는 정말 더 심각한 문제제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12장까지 대부분의 이야기를 세번째 문제로 삼은 걸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다하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도 많고 뒤죽박죽인가 하는 문제제기 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면서 이 땅에서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악인들이 더 출세를 하고 잘사는 것이 현실로 보이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다스리신다는데 왜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은 바르게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뒷구멍으로 하는 일이 더 잘되는가 말입니다. 그 부조리한 내용을 이제 하나 하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뽑아서 보면,
������내가 보면 이 세상에는 잘못된 것이 많이 있다. 법정에도 악이 있고 반드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3:16)
재판이라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것을 판별하는 자립니다. 가장 공의로워야 되고, 가장 공평해야 되고, 가장 의로워야할 자리에 악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순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악과 부조리가 공의를 행해야 될 곳에 만연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우리 사회를 보아도 피부로 느끼는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부조리한가?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학대와 슬픔을 보았다.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려도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학대하는 자에게는 권세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자보다 더 행복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아 이 세상의 악을 보지 않은 자이다������(4:1-3)
여기 내용은 세상의 여러 부조리한 문제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느니라’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이에게는 위로해 주지 않고 포악과 아픔과 학대만 준단 말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잘 봅시다.
잘 차려 입은 사람만 반대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권력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것으로 그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엄청난 비리가 폭로 되었음에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속성이 아닙니까? 반대로 약자는 위로를 주기는 커녕 짓밟는다 말입니다. 또한 포악하게 하는 자가 더 큰 권세를 가지고 행사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전도자는 아주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정말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포악한 사람이 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가 있느냐? 하고 이 전도자는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생기는 심각한 고민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민과 갈등은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제기하고. 거기에 대해 어물쩡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 이런 부조리도 있습니다.
������나는 또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고자 하는 동기가 자기 이웃에 대한 시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 이것 역시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팔짱을 끼고 스스로 굶어 죽는 바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별로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이 편안한 것이 많은 것을 가지고도 정신없이 일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낫다������(4:4-6)
여기 내용은 온갖 수고와 노력을 다하여도 칭찬은 커녕 온갖 욕만 당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한 사람이 자기가 한 만큼의 수고에 대해서 인정을 안해주는 사회란 말입니다. 경쟁사회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삶의 정당한 능력과 가치를 평가하기 보다는 어찌해서든 깎아내려 놓아야만 속이 시원한 사회란 말입니다. 또한 실력으로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편법이 동원되는 것이 인간 사회가 아니냐는 심각한 지적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나는 이밖에도 세상에서 또 헛된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나 형제도 없이 혼자 살면서 억척스럽게 일하면서 자기 부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즐거움도 마다하고 누구를 위해서 그처럼 열심히 일하는가? 이것도 다 헛된 것이며 불행한 일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은 협력하므로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 중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그를 도와 일으킬 수 있으나 혼자있다가 넘어지면 그를 도와 일으켜 주는 자가 없으므로 그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추운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진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겠는가? 한 사람으로서는 당해낼 수 없는 공격도 두 사람이면 능히 막아낼 수 있으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외로움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인류가 타락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생기는 일이 창세기 4장의 사건으로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죽이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살인으로까지 가는 것이며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살인의 진정한 의미를 지적하심으로 죄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을 위해서라면 형제도 아니다. 아무리 형제애 뭐라해도 자기가 손해를 보는 일은 안하려고 합니다. 우리 현실에 널려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인간은 결국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간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이런 문제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지혜로운 소년은 모든 조언을 거절하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 낫다. 그런 소년은 감옥에 있어도 나와서 성공할 수 있으며 비록 가난하게 태어나긴 했지만 왕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앞으로 왕이 될 그와 같은 소년을 따르는 것을 보았다. 왕이 다스리는 백성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 다음 세대는 그를 좋아하지 않으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4:13-16)
이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왕이 젊었을 때는 백성들을 참 지혜롭게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늙었다고 이제는 왕을 쫓아 내려는 것입니다. 민심이 소위 말해서 조변석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로에 대한 신실함이 없고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까 인간이 혼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인간이 혼자일 수 밖에 없느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4장 마무리에 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 제기했던 문제를 뒤집어서 추적해 보면 어떤 일관성 있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살펴 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고 서로 협력할 수가 없으니까 개인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으니까 경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경쟁을 하다가 보니까 강자가 약자를 잡아 먹을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약육강식의 사회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입니다.
4장 제일 처음에서 제기했던 문제가 약육강식의 사회문제였는데 그 문제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신의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마무리 합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다스려 나가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부조리가 많고, 불의가 많고,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천대를 당하고 또 포악한 사람이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고, 또 끊임없이 사람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못잡아 먹어서 으르릉 거리고 또 신의가 없는 이런 사회냐는 말입니다.
5장에서 몇 가지 문제를 더 제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학대받는 것과 정의가 무시 당하는 것을 보아도 너는 놀라지 말아라. 모든 관리는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의 감시를 받고 있다. 모든 사람이 농산물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왕도 밭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산다. 돈을 사랑하는 자가 그 돈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부유하기를 바라는 자가 그 수입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니 이것도 헛된 것이다. 재산이 늘면 그만큼 소비도 많아진다. 그 소유주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노동자는 먹을 것이 많든 적든 단잠을 잘 수 있느나 부자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것 저것 걱정하다가 잠을 자지 못한다. 나는 또 하나의 다른 심각한 문제를 보았다������(5:8-12)
가난한 자가, 빈민이, 집 없는 사람이 학대 당하는 현실적인 모습을 이야기 한 후에, 어떤 사람이 어렵게 재물을 모았는데 재물이 많으니까 손 벌리는 사람만 많아져서 결국에 재물은 눈요기감이 되어버렸다. 또 힘쎈 사람에게 결국은 빼앗겨 버리고 재물을 관리하느라 신경만 쇠약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로,
������사람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수고를 하지만 식욕을 다 채우지는 못한다.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가난한 자가 처세술을 잘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낫지만 이것도 역시 헛된 것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6:7-9)
지혜가 많은 자가 등용될 기회가 정당하게 주어지지 않아서 지혜를 사용할 기회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연줄도, 재산도 없어서 가난한 지식인의 설움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취직이 어렵고 비정상적인 사회의 부조리를 적발하며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로,
������나는 헛된 세상살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의로운 사람도 젊어서 죽은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오래 사는 사람이 있으니...������(7:15)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업신여김과 조롱을 당하고 인간사회에서 뒤지게 되며, 온갖 술수를 부리는 악인은 사회의 유력한 위치에서 오래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로는,
������내가 세상을 살펴보니 빨리 달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경주에서 언제나 일등하는 것이 아니며 강하다고 해서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생활비를 많이 버는 것이 아니며, 총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부를 얻는 것이 아니고, 유능하다고 해서 언제나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불행한 일을 당할지 그 때를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이 사람도 갑자기 재앙이 밀어 닥치면 거기에 걸리고 만다.
나는 지혜의 좋은 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은 조그만 성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강력한 왕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 성을 포위하고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이때 그 성 안에 가난하지만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가 지혜로 그 성을 구했으나 그 후에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혜가 힘보다 낫지만 지혜로운 자가 가난하면 무시를 당하고 그가 하는 말을 인정해 주는 자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9:11-16)
전도자는 원칙대로 마땅히 있어야 할 순리대로 되지 않는 여러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원칙이 없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불안을 깔고 있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기하는 네번째 문제는 우리로 더 심각하게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케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또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결국 사람에게나 짐승에는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죽으면 저것도 죽는다. 사람과 동물은 다 같이 호흡하는 동물일 뿐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사람과 짐승은 다 같은 곳으로 가게 되는데 모두 흙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영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입증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삶은 죽음으로써 다 끝난다면 아무리 그가 멋있게 의미있게 살았다고 해도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9장 4절을 보면 ‘그래도 살아 있는 자가 희망이 있는 것은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자가 아무리 용감하다지만 죽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차라리 살아 있는 개가 죽어 있는 사자보다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우리의 삶이 다 끝나 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삶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까, 그렇다면 기껏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어떤 물질을 주신 것은 어떤 적극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인생 자체가 허무한 것이니까 잠시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쉬운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마약을 사용하는 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위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라고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쾌락주의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쾌락을 즐기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셔도 이 땅에는 막 돌아다니니까 그런 것을 잊으려고, 그것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서 쾌락이나 즐기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했다기 보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을 보내는 철학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첫번째 강의에서도 어떤 한계들에 부닥쳐 가지고 그런 한계성 속에 부닥쳤다면 기껏해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런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즐기는 것이 낫지 않느냐? 하는 방식으로 여기서도 결국은 이 문제들이 만약에 풀리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순간마다 즐기면서 사는게 최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냉소적 쾌락주의의 결론을 내리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하는 결론은 사실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인정을 하더라도 참으로 풀어야할 문제들을 풀지 못했을 때,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다 여기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제기했던 네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이제 전도자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전도서의 결론인 것입니다. 전도서의 서론이 인생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것인가? 의미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그 결론을 바로 이런 삶이라고 제시하기까지 그 고민의 과정을 우리도 정당하게 추적한 다음에야 솔로몬이 내린 결론을 나의 인생관으로 의미있게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부분인 12장 13-14절을 보시면,
������이제 모든 것을 다 들었으니 결론은 이것이다 :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선하건 악하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은밀한 것까지 다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정당한 삶이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지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이 정당한 삶이냐? 여기서 첫번째 제기했던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안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명령을 지킬려면 우선 그 명령을 내리는게 있어야 그 명령을 지킬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시면서 우리에게 모르게 담아 놓은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의미있게 다스려 놓는 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르쳐 주신다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열심히 깨닫고 궁구하고 연구해야 할텐데 그것을 안하더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시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첫번째 말씀이 뭐냐면 선악과 금령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공부를 통해 선악과 금령의 말씀을 잘 깨우치는 기회도 다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을 우리에게 안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해서도 우리가 쓸데없이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성경을 좀 잘못 배워가지고 이상한 말세론이 자꾸 유행해서 모든 말세론에서 모든 이론이 다 나옵니다. 항상 요한계시록을 강의한다 하면 사람을 공포에다 몰아넣고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면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환난이 일어나도 성도에게는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내리면 아무리 환난이 일어나도 우리에게는 털 끝만큼도 까딱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괜히 환난의 정당한 의미를 모른체 공포에 몰아 넣는데 유혹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실 때에 역사가 어떻게 끝나고, 세상이 어떻게 움직여 나갈지 그 큰 흐름들을 구체적으로 상세한 것들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서 본인이 깨닫게 하셨고, 근본적인 역사의 큰 흐름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안배우려는데 있지 하나님께서 안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첫번째 제기했던 문제는 여기서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 하더라도 인생이 거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것이 거꾸로 우리를 질책하는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의미있는 아름다운 뜻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일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뜻을 제대로 배우고, 그 말씀을 배운데서 인생이 올바로 의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참으로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인생의 기본자세가 아니냐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미있는 아름다운 뜻을 가르쳐 주시되 우리는 목석같이 꼭둑각시처럼 있는 것이 아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두번째 제기했던 문제도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되 계명의 형태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계명’의 형태라는 의미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꼭둑각시처럼 자동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참으로, 그것이 참으로 옳고 바르다고 생각해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순종을 할 때 그 계명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은 절대로 강제로,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찌 하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 마음대로 된다면 우리는 로보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실제로 로보트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문제는 그런 다음에야 정당하게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듣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결정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자발적인 순종을 내려서 행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일생은 그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로보트처럼 아무런 결정력도, 사고의 과정도 없이 움직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은 꼭둑각시가 아닌 책임있는 존재로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명령에 대해서 ‘너는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는데 왜 하지 않았느냐’고 나중에 충분히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려 나갈 때 로보트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계명이 참으로 옳음을 알아 감사함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서 인생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정했다는 말씀을 이해해서 자기는 가만히 로보트처럼 있고 무슨 신비한 능력이 내 의식과 상관이 없이 그냥 죽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우리 머리로 잘 이해되지 않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그 인격으로 결정하여 인생을 살게 하시면서도, 그 인생과 역사에 대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요, 그의 엄청난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자기 생활에서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순종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성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순종해서 가정에서 가장으로 성실히 살았으면 그만큼 그 가정은 편안할 것이고, 10년 동안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 몸을 아무렇게나 굴렸으면 그 사람 몸에도, 가정에도 나타는 큰 불안과 어려움 가운데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잘못되었다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그 죄 문제에 대해서 그가 용서 받았을지라도, 그가 이제까지 낭비한 모든 것은 회개했다고 해서 원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용서 받았지만 이때까지 알았던 죄로 인한 여러 결핍이 그 사람의 속에 남아서 말할 수 없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진작 그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걸 하고 후회합니다. 바로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되 기계적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인격자로 대하시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고귀하게 대하시는 고귀한 존재임을 깨우쳐서, 고귀하게 대하실 때 하나님에 대해서도 고귀한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되 그 뜻을 배워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냥 기계적으로 억지로 로보트처럼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좋아서, 그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깨달아서, 순종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꼭둑각시가 아닌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옳고 좋아서 정말로 그렇다라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결정한 수준까지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올라가는 것이 인생의 참 목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데 왜 이렇게 부조리가 많으냐? 이 세상에서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겁니다. 우선 14절 말씀을 보십시요. 이 세상 그 자체만을 볼 때는 불의와 부조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정말 악인이 받아야 할 보응을 의인이 받고, 선인이 받아야 할 보응을 악인이 받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을 살 때 억울하게 판결받고, 억울하게 살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은 이 세상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내세가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리들은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되 대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것까지도, 그때는 옳은 것은 옳다고 말씀하시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공포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한 평생의 의미가 단지 이 땅에서의 한 평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의 나그네 삶을 끝내고 이어지는 내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삶이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면 우리가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도 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촛점이 내세로 옮겨가니까 현실도피적인 삶의 태도를 부추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과는 상관이 없고 내세로만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사실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내세를 말하는가는 전도서의 처음 문제제기를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 자체만을 바라보고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로 인하여 심령이 상하고 오히려 허무한 생활로 빠져서, 허무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어서 결국 그 사람의 삶은 쾌락주의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쾌락은 어떤 적극적 의미에서의 쾌락이 아니라 괴로움과 슬픔을 잠시 잊기 위해서 즐기는 것 밖에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올바로 인식한 인간 석학들의 자살행렬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 대부분이 그렇게까지 삶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지 않기에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세가 없이 이 세상 자체만을 바라본다면 그 삶이 어찌된 것인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오늘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창세전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이며, 우리를 그 시민으로 부르시고 있고 그 시민답게 지금 만드시며 완성시키실 것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그 나라와 그 안에서 완성될 삶을 참으로 소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모든 부조리와 부정, 모든 것에 대해서 낙담치 않고 올바른 평가기준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나라와 그 땅에 대한 소망이므로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필요 이상으로 낙담하지 말고, 이 세상에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세상의 종국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이것으로 끝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즐기면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최선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내세가 있는 동시에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내세의 소망 속에서, 현재를 참으로 의미있게 만들 수 있다고 전도자는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그러나 기가막힌 내용입니다. 내세의 삶이 있기에 현재의 삶이 의미있게 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전도자는 이 땅에서 사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출발했다가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의 인생관이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생을 보는 모든 것이 달라졌고 새로운 인생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출발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내세에 비춰서 현재를 살 때에 현재의 삶에서 불의가 득세하는데 낙담치 않고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살 수 있는 것이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 땅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억울한 사정을 아무도 몰라주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 같고, 바로 살려고 애쓸수록 괴로움만 더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은밀 중에 갚으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때에, 현재의 삶을 방탕하거나 좌절, 낙담치 않고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그 많은 지혜와 권력과 권세를 맛본 솔로몬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 땅에서 참으로 의미있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삶 자체에만 눈을 고정시켜서 살펴보면 절대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없고, 오히려 눈을 들어서 나와 나의 밖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한 내세를 바라보는 삶을 진정으로 소원할 때, 진정 이 땅에서의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이 결론만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심각한 고민의 과정을 그가 가진 심정으로 추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결론이 얼마나 아름다운 결론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이 다스리는 뜻과 내세의 삶과 소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서는 이런 헛된 삶이 신자들의 삶이 될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역설적으로 초두에서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런 식의 사고와 삶은 헛된 것이라고 강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전도서라면 헛된 것이라고 기억하시지 마시고 이 땅에서 가장 의미있게 사는 삶을 소개한 것이며, 내 인생의 참다운 가치와 삶의 방향을 정해주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제공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생각해 봅시다.
1. 솔로몬이 생각해 본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2. 이 세상과 인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 보려했던 솔로몬은 무엇 때문에 허무하고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까?
3. 솔로몬이 좌절의 벽에 부딪혔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4.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4가지 문제는 무엇입니까?
5. 솔로몬은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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