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가복음 전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 사역의 지리적 요소에 근거하여 마가복음의 뼈대를 분석해 내고, 다른 학자들은 신학적 주제를 근간으로 구조를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8장 26절부터 시작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데에는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마가복음 7장은 예수의 공적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다음 세 이야기가 묶여있다: (1) 말씀과 전통에 관한 논쟁과 교훈(1~23절) (2)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24~30절) (3)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치유 (31~37절). 첫째 이야기는 말씀과 전통에 관한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의 논쟁(1~13절)과 이에서 유발된 주제인 부정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의 교훈(14~23절)으로 더 세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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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본문의 주해와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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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로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1~13절)
장 로들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1~23절)는 크게 이에 관한 예수와 유대인 지도자 사이의 논쟁 부분(1~13절)과 뒤이은 무엇이 부정한 것인가에 대한 예수의 설명(14~23절)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이야기의 발단(1~2절), 주제에 대한 저자의 삽입적 설명(3~4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고소(5절), 이에 대한 예수의 반박과 역 고소(6~13절)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부분은 예수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미 행한 반박의 내용에 대해서 예수 자신이 설명하는 것인데 이 부분도 그 설명의 대상에 따라 무리에게 행한 설명(14~16절)과 제자들에게 행한 설명(17~23절)으로 나뉘어 진다.
마가는 장로들의 유전에 관한 논쟁 이야기를 이전 기사와 시공간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단순히 “또”(개역 성경에는 이 단어가 번역되어 있지 않다)라는 접속사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마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몇몇 서기관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을 보도한다(1절). 이 보도 속에는 이들과 예수 사이에 일종의 충돌이 있을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를 죽이는 도시이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주 논적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목도한다(2절). 여기서 “부정한 손”이라는 것은 유대 관습에서 제의적으로 깨끗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데 이 어구 뒤에 씻지 않은 손이라는 뜻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에 대한 배려인 것 같다.
이야기의 진행을 잠시 멈추고 마가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된다는 내용을 삽입한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않는데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이다(3~4절).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핵심 논제인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전통”(유전, 전승)이라는 단어는 “구전”(oral tradition)을 가리키는 것으로서(갈 1:14 참조) 에스라 이후 성문 율법(written Law)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서기관들에 의해 작성된 것인데 후에는 이것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져서 성문 율법과 같은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드디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어 왜 “장로들의 전통”을 거슬려 행동하고 있는지를 예수께 따져 묻는다 (5절). 여기서 이들은 예수의 제자들의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행동을 문제삼아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보다 큰 주제로 대화의 이슈를 옮겨간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예수는 먼저 이사야 29장 13절을 인용하여 질문자들의 외식을 책망한다(6~7절). 질문자가 겉으로 말하는 것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 스승에게서 배운 교훈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섬김은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치되는 인간들의 전통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수는 앞에서 언급된 “장로들의 전통”과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질문자들을 논박한다. 여기서 이들의 문제는 더 이상 외식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해 버린다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8절). 이 구절에서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구절은 “사람의 유전”(9절, 13절에서는 “너희 유전”)이라는 말로 바뀌어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강력히 대비되어 있다. 결국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은 것을 유대인들이 비난한 것에 대해 예수는 이러한 비난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논박한다.
이어서 예수는 질문자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9절). 그리고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이를 논증한다(10~12절). 모세의 율법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부모에게 욕을 하는 자는 죽이라고 했는데, 이 계명에 대해 이들은(예수의 말로 하면 “너희들은”) “고르반”(헌물)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이것이 면제될 수 있다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행동이다(13절). 여기서 예수는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너희의 전통”(9, 13절)이라고 하여 이것을 하나님의 율법(혹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모세의 율법)과 대비시킨다. 특히 13절에서 이 전통이 “너희가 전한 전통”이라고 하여 질문자들이 수동적으로 이것을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 전통의 적극적 실천자임을 보여준다. 사실 이들은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31b절).
한마디로 말해, 마가복음 7장 1~13절은 예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유대 지도자들이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비난을 하는데 예수가 이를 논박하는 내용이다. 예수는 이들이 위선자라는 것(6~7절)과 장로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대체하려 하는 자라고 말함으로써 (8~13절) 이들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시대와 뒤이은 초기 교회 시대에 있었던 유대인의 “전통”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주로 낮은 계층을 차지하고 있던 예수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승을 억지로 지키게 하려는 것에 대해 예수는 이러한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된, 인간적인 기원과 전통에 의한 것이라고 교훈하여 제자들이 이러한 “전통”을 지킬 필요가 없음을 가르친다. 이 이야기는 초기 교회에서 유대인의 전통이 교회 안에서도 계속 고수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에게 치명타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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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정한 것”에 대한 예수의 교훈 (14~23절)
예 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기한 제자들의 “부정한 손”에 대한 문제가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문제로 이슈화되어 논쟁을 한 후 예수는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 무엇이 참으로 부정한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한다. 이 구절(14~23절)은 앞 구절(1~13절)과 “부정”이라는 주제로 서로 묶여 있다(2, 5, 15, 18, 20, 23절). 마가는 “무리”라는 일반 청중과 “제자들”이라는 특별 청중을 구별하여 이 교훈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14~16절; 17~23절). 첫 번째는 무엇이 참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가에 대한 일반 대중에게 행한 보다 일반적인 비유 형태의 교훈이다(15~16절). 마가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의 설명이 뒤따르는데(막 4:10~13, 33~34, 6:52; 7:18; 8:14~21) 여기서도 예수는 제자들을 따로 불러 이 비유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한다(17~23절).
첫 번째 교훈에서 예수는 무리를 불러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하라고 말한다(14절). 그리고 뒤이은 구절에서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본래 “부정”이라는 주제는 7장의 처음 부분에 제기된 주제였다가(2절)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이슈로 초점이 옮겨진 후(3~13절) 이것에 대한 예수의 설명이라는 형태로 다시 주요 주제로 다루어진다. 예수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15~16절). 여기서 “무엇”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후의 설명으로 보면 이것은 음식을 가리킨다(19절). 앞의 구절과 연관지어 볼 때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 구절 자체만으로는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 말은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구절을 포함시킴으로써 마가는 예수의 두 번째 설명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한다(17~23절).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특별한 설명을 요할 때 흔히 제자들을 따로 불러 말하는데(4:13, 33~34) 이러한 특징이 이 구절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는 먼저 제자들이 예수의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한다(18절). 예수가 제자들을 따로 불러 집안으로 들어가 설명하는 것을 통해 마가는 어떤 중요한 교훈이 나올 것임을 예시한다. 예수는 무리에게 했던 말(15절)을 의문문의 형태로 바꾸어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상기시킨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18절). 그 이유는 먹는 음식은 배로 들어가 소화되고 남은 것은 배설되는 것이므로 어떤 음식이든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9a절). 이어서 예수는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한다(19b절). 예수는 무리들에게 한 말을 거의 그대로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참으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20절). 이어서 예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행들을 열거한다. 그것들은 한마디로 말해 악한 생각들인데 구체적으로는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22절) 같은 것들로서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와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다(23절).
부정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14~23절)은 앞 구절(1~13절)과 “부정하게하다”라는 주제어로 묶여있지만, 마가는 청중을 바꿈으로써 앞 구절과의 구별을 꾀한다. 여기에서는 이 앞에서 다루어졌던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주제를 넘어 무엇이 참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가에 대해서 예수님이 교훈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5절에 의외로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후의 구절은 이것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마음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음식이 부정한가하는 논쟁은 레위기 11~15장에 금지되어 있는 음식을 포함하여 음식에 관한 초기 교회 논쟁에서(행 10:14~15; 15:28~29; 롬 14:14; 갈 2:11~14; 골 2:20~22 참조)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마가복음은 이미 예수의 말로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어서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교훈을 하는데 사람의 전적 부패성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후에 바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롬 3:9~18 참조).
위 구절의 의미를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되새겨 보자. 모든 종교는 거룩한 것을 추구하고 거룩한 장소(성전), 거룩한 사람(성직자), 거룩한 의식(예배)을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실제로 거룩하다고 선언하고 그 이외의 것은 부정하다고 여긴다. 실제로 구약의 성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제사장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구약적 제의를 이제 더 이상 따르지 않는 기독교에서도 실제로 새로운 형태의 거룩한 것을 많이 만들어냈다. 교회는 거룩하고 교회 밖은 그렇지 않으며, 성직자는 거룩하고 평신도는 그렇지 않으며, 제의적 요소를 갖춘 예배는 거룩하고 삶으로서의 예배는 그렇지 않다는 새로운 형태의 거룩과 부정의 개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위 본문을 통해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특정한 제도나 사람이나 장소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또 이것이 부정한 것도 아니다. 참으로 부정한 것은 타락한 사람의 마음이다. 거룩은 사람이 만든 제도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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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24~30절)
참 으로 부정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 기사 뒤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는 기사가 나온다. 얼핏 보면 이 기사는 앞의 내용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이 기사가 “더러운” 귀신에 들린 사람의 정결케 함에 대한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부정”이라는 주제로 이 기사는 앞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흔히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 여인과 대화를 함으로써 예수 스스로가 앞에서 천명한 원칙, 즉 어떤 특정 사물(음식을 포함하여)이나 종족이 부정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이 부정한 것이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는 어떻게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치유에 초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측면으로 보면 예수와 이 여인과의 대화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기사는 예수의 치유 기적과 여인과의 대화가 잘 엮어져 있어 그 양식에 있어서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치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뒤이어 나오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친 기사(막 7:31~37)와 유사하고 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기사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가 유대인들과 부정한 것에 대한 논쟁을 끝내고 장소를 옮겨 두로 지역으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24절). 예수는 거기에서 어떤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있으려 하셨으나 예수의 소문이 널리 퍼져 자신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예수가 자신을 숨기려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다는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은 마가복음의 주요 신학적 모티브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1:44~45; 5:43; 9:30 참조).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자마자 달려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사건이 발생한다(25절). 이렇게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엎드리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어떤 자비를 구하는 몸짓이다(막 1:40; 5:23 참조). 이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성립되는 것은 이 여인이 헬라인, 곧 이방인이라는 데 있다. 마가는 이 여인이 헬라인으로서 수로보니게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기록한다(26절). 예수를 만나자마자 이 여인은 곧바로 귀신들린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예수께 요청한다.
여인의 요청이 간절한 반면 이에 대한 예수의 첫 번째 반응은 의외로 냉담하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겉으로 보기에 예수의 이 말이 여인의 요청과 잘 부합되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여인의 요청은 자신의 딸을 치유해달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는 이것을 “떡”과 연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가복음 문맥에서 보면 이 기사는 앞뒤로 예수의 급식 이적(막 6:30~44; 8:1~10)과 음식의 부정에 관련된 기사(7:1~23)와 떡에 관한 논쟁 기사(8:14~21)와 잘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위 선언은 이 여인에게는 굴욕적이며 희망을 꺾는 것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자녀’(출 4:22; 신 14:1; 렘 31:9)이고, 이방인은 ‘개’(신 23:19; 삼상 17:43; 24:14; 삼하 9:8; 16:9; 왕하 8:13; 잠 26:11)라는 것이며 예수의 사역은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바울의 선교 원칙도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나서 이방인에게”(롬 1:16)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의 사역이 유대인에게 ‘우선적으로’ 집중된다는 말을 사용한 것은 예수의 사역이 이방인에 대한 것을 전적으로 배제시키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는 하지만(27a절)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방인들에게 구원 사역을 베풀 수 없다는 뒤이은 예수의 말(27b절)은 결국 이 여인에게 절망만을 안겨줄 뿐이다.
유대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는 예수가 흔히 그들의 외식과 거짓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는 계속된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을 우선시 한다는 예수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예수가 말한 비유와 연관시켜 자신의 요청을 굽히지 않는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기서 “주”라고 한 것은 신앙 고백적으로 예수를 “주”로 부른 것이 아니라 남자 어른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이 여인은 이방인을 개라고 여기는 유대인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예수가 자녀들이 먹는 비유를 한 것에서 착안하여 이 여인은 집안의 개들도 상 밑에서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다는 기묘한 말을 통해 자신의 요청을 굽히지 않는다.
이러한 이방 여인의 태도와 말을 듣고 예수는 이 여인에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예수는 “이 말 때문에” (29절) 여인의 요청을 들어준다고 한다. 병행 기사에서 마태는 이 여인이 “큰 믿음”의 소유자였다고 기록한다 (마 15:28). 이어서 예수님은 “돌아가라”라는 병 고치는 자에게 행하는 전형적인 명령을 하시면서(막 2:11; 5:19, 34) 이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음을 선언한다(29절). 이러한 선언을 들은 이 여인이 집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딸이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예수가 선언한 대로 귀신이 그 딸에게서 나가 그 딸은 치유되었다(30절).
마가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를 현재의 문맥에 위치시킴으로써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한 것 같다. 첫째,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리는 없지만 겸손히 그 부스러기라도 얻으려하는 여인의 태도와 특권만을 의식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장로들의 전통”을 강조하는 태도와(7:1~13) 대비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 마가는 인간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려 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고 있다. 둘째, 참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교훈이 이 이야기 바로 앞에 나오는데(14~23절) 이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여인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정결례로 말하면 “부정한 손”과 같이 그 자체로 부정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오히려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이 여인의 딸이 치유를 받은 기사를 기록함으로써 마가는 어떤 외향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정결과 부정이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방인 선교의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겸손하고 끈질긴 신앙 태도로도 읽어낼 수 있다. 이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지만 특히 그녀가 예수께 요청하는 것이 오늘날의 신자가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볼 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끈질긴 간청의 기도이다. 이러한 인간 편에서의 간청의 기도에 대한 교훈은 주로 누가복음의 기도에 대한 비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밤에 찾아온 비유(11:5~8)는 강청하는 기도를 격려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롯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그 소용대로 주리라.”(8절). 불의한 재판관관 과부의 비유(눅 18:1~8)도 기도할 때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1절)에 대한 교훈을 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강청하는 기도의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7~8). 수로보니게 여인의 예수께 대한 간청은 누가복음의 기도에 대한 비유에서 말하는 끈질긴 기도에 대한 하나의 좋은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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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치유 (7:31~37)
수로보니게 여인 기사 뒤에 마가는 예수가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과 데가볼리 중앙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지역에 이른 것을 기록하는데(31절), 이것은 아마도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시작된 예수의 이방인에 대한 호의가 계속되어 예수가 이방인 지역에서 선교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다. 예수는 갈릴리에 이르러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유한다(막 7:31~37).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 안수를 청하자 예수는 그 사람을 무리에서 분리시켜 데리고 간다(32~33a절). 예수가 사람들로부터 왜 이 사람을 분리시켜 따로 데리고 갔는가에 대해서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 제안을 한다. 마가의 신학적 의도를 분석해 보면 그 이유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인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헬라적 주술 치료와는 달리 예수의 치유가 인격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 것이다.
예수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 사람을 치유한다. 첫째, 예수는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댄다(33b절). 둘째,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34a절). 셋째, 예수는 “에바다”(열리라)라는 말을 한다(34b절). 먼저, 이 치유에서 침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동시대 헬라 세계와 유대 문화에서 침은 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예수가 이 사람을 치유할 때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일은 당시로 말하자만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었다(막 8:22~26; 요 9:1~7 참조). 또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는 것은 치료 의식이라기보다는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출 2:24; 6:5; 롬 8:22~27 참조). 마지막으로 예수는 주술적인 행위보다는 주로 권위 있는 말로써 환자를 치료하는데 “열리라”는 말은 환자의 병이 여러 가지에 얽매여 있다는 것과 관계 있는 것이고 예수는 환자를 그 모든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말을 한 것이다.
예수가 “열리라”라는 말을 하자마자 이 환자는 즉시로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35절). 그리고 나서 마가는 예수는 이 환자가 치료되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엄하게 말할수록 그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다고 보도한다(36절). 이것도 마가복음의 중요한 모티브인 소위 ‘메시아 비밀’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서 마가는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반응을 보도한다. 사람들은 완전히 압도되어 말하기 시작한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잘했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들은 말하게 한다.”(37절). 첫 번째 문장은 창조에 대한 마지막 보도인 창세기 1장 31절을 생각나게 하고, 두 번째 문장은 이사야 35장 5~6절에 있는 메시아 도래 시대의 소망과 관계된 것이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즉 예수는 소경이 눈을 뜨게 함으로써 타락한 피조물을 깨끗케 함으로 일종의 새 창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신 예수의 치유 기사(막 7:31~37)는 다음 장에 나오는 맹인을 고치신 기적과 내용에 있어서 짝을 이룬다(막 8:22~26). 첫째, 둘 다 치유이적으로서 하나는 귀머거리를 듣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맹인을 보게 한 것이다. 둘째, 그 치료 방법 중에 두 기사 모두에서 침을 뱉고 손을 댄 것이 발견된다. 셋째, 두 기사 모두 치유 받은 후에 예수의 침묵 명령이 뒤따른다. 예수가 귀머거리를 치유한 것에는 침을 바르고 기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헬라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예수는 이방 지역인 데가볼리의 한 가운데서 이 방법으로 치유 기적을 행했다. 하지만 치유 기적은 예수의 말씀에 의해 완성되어진 것을 볼 때 이것도 전형적인 예수의 치유 이적에 해당되는 것이다.
귀 먹고 어눌한 사람의 치유 이야기는 문맥에서 볼 때 예수의 이방인 선교라는 주제와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다. 또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눈먼 사람의 치유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봉사를 가르치기 위한 예수의 사역임을 볼 때(요 9:35~41 참조) 이 구절도 이러한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히 앞 구절에서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 것을 볼 때 예수는 이들이 영적 소경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소경과 귀머거리를 치유하신 예수는 영적 소경과 귀머거리도 치유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관복음 전체의 주제와 연관시켜 볼 때 이 치유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막 1:15). 하나님 나라가 주제인 마가복음 내용의 약 삼분의 일이 치유와 축사에 관한 것이다. 치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표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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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본문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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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한국교회의 적절한 설교 주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전통에 관한 문제는 이제 한국교회에서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할 주제가 되었다. 다음으로, 성과 속에 대한 주제도 중요한 설교 주제 중 하나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신약보다는 구약의 성전과 제사장 모델로 거룩과 속됨을 이해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예수의 가르침대로 어떤 특정 제도나 사람에게서 거룩이나 속됨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에서 거룩을 찾고 인간의 마음속에 속됨이 숨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천명해야 할 것이다. 또 한국교회에서 발견한 기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인 강청하는 기도의 모습이 점점 더 사라지는 이 때, 수로보니게 여인의 겸손하면서도 기지가 넘치고, 끈질긴 간청의 기도의 모습은 우리에게 다시금 성경적 기도의 모델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치유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때 귀머거리를 고치신 예수의 치유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고해 보는 것은 좋은 설교의 내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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