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4장 연구

에반젤(복음) 2019. 8. 17. 13:57



마가복음에는 흔히 행동의 복음서라는 이름이 따를 만큼 이적기사들이 주를 이룬다. 그에 비해 비유가 차지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적다. 마가복음 전체에서 단지 4개의 비유만이 소개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3개가 4장 속에 들어 있다. 3개의 비유를 소개해 놓고도 마가는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가르치셨다고 말한다(4:33). 이는 마가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을 양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요약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 비유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크고 중심적인지를 압축적으로, 또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부분에서의 그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 --> 

I. 배경: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에 관련된 논란

) --> 

1. 심각한 오해와 도전

마 가복음의 전체적 흐름은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긍정적인 선언 및 고백과 부정적인 오해 및 음해들이 되풀이되는 방식으로 엮어지고 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첫 선언(1:1)에서 시작하여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백부장의 종결적 고백(15:39)으로 마쳐지는 마가복음의 전체 구도는 그 속에서의 반복되는 바른 고백들과 잘못된 오해들의 밀고 당김을 감싸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3장에서는 예수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가 미쳤다는 친속들의 오해(3:21)뿐만 아니라, 바알세불의 이름을 빌어 그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3:30)고 말하는 서기관들의 공격이 그것이다. 4장은 이런 3장과의 연속선 위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3장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오해들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기대들이 생겨나는가 이에 대한 보다 강화된 대응이 따를 것을 기대하게 되는데, 과연 마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에 대한 결정적 도전이 주어지는 곳에 예수로 말미암아 운명이 뒤바뀌며 생사가 판가름나는 결정적 중심추로서의 예수의 역할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 --> 

2. 강화된 대응

마가의 대응은 3장 후반부와 4장 전체에 걸쳐 세 가지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먼저 331~35절에서 새로운 관계가 규정되고 있다. 기존의 혈육 관계를 넘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3:33)이 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관계 개념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새 관계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그에 대한 자세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됨을 판가름 짓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두 번째로 4장의 비유들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로 말미암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점에 대해서는 곧 이어서 상세한 해설을 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4장 후반부의 기사는 새로운 두려움의 대상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저가 뉘기에”(4:41)라는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모든 일들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가 이 모든 새로운 일들 속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를 중심으로 이제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분명한 분기점이 형성되고 있다.

) --> 

II. 비유를 통해 제시된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

) --> 

1. 가르침의 주변 환경과 특성(4:1~2)

예 수님의 가르침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마태복음과 달리 마가복음에서는 가르침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4장과 13장에 집중되어 있음을 본다. 4장의 가르침이 갈릴리 사역의 중반에 놓여져 있다면, 유사하게 13장의 가르침은 예루살렘 사역의 중반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점증되어 가는 반대와 오해의 배경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집중된 두 번의 가르침의 주된 목적을 이룬다.

4장의 가르침은 갈릴리 바닷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수님은 배에 올라 무리와 다소 사이를 두는 독특한 가르침의 세팅을 만드신다. 주변의 환경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한 야외 교육장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 역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익숙한 소재들을 사용한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무리를 가르치셨다고 마가는 서론적 요약을 붙인다.

여러 가지 비유로라고 번역된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양한 비유들을 가르치셨다는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보다 엄밀하게 보면 여러 가지 것들을’(polla) ‘비유들로’(en parabolais) 가르치셨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들(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중심적이다)과 그 가르침의 전달 방식을 구분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히 비유를 가르치는 교사라는 데 그 초점이 있지 않고, 그 가르치는 것을 비유들로’(en parabolais) 가르치는 분임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설명을 해서 이해가 되면 다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적 가르침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하더라도 여전히 그 귀와 눈이 닫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와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비밀을 앎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구분의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들의 특징이다. ‘비유들로말씀하심은 하나님나라의 진리가 체험적 진리임을 말해준다. 깨달음 속에서 그 나라에 속하는 사람이 가지는 기쁨과 혁명적 변화 속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자리로 나아감에 있어서 우리는 제자들의 입장에 서서1질문하기도 하고, 아는 듯한데 여전히 몰라서 실패하기도 하는 그들을 넘어 마침내는 그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하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것이 비유들로말씀하신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지적 귀만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러 나가는 사람들이 될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영혼의 귀를 동원하며 온 삶이 따른 응답의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서 듣는 사람들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이 비유적 가르침들을 이끌어 가는 전체적 구조 가운데 하나로 말씀하심들음에의 요청의 구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2절의 저희에게 이르시되”(kai elegen autois)로 시작해서 9절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hos echeita akouein akouet )로 마친다. 21절의 등불에 대한 이야기도 저희에게 이르시되”(kai elegen autois)로 시작해서 23절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ei tis echeita akouein akouet)로 마치고 있다. 24절은 이 두 요소를 함께 포함시켜서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kai elegen autois, blepete ti akouete)고 말씀하고 있다. ‘말씀하심들음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비 요건이다.

) --> 

2.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해석(4:3~20)

첫 번째 비유는 사람들의 주목을 환기시키는 강한 두 단어로 시작되고 있다. ‘들으라’(akouete)보라’(idou)가 그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말을 동시에 사용하는 예는 마가에게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귀만이 아니라 마음의 눈까지 열어서, 듣는 가운데 또한 보고 깨닫고 변화되는 반응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첫 번째 단락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무리들에게 일러준 비유 자체의 부분(3~9)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부분(10~13), 그리고 비유에 대한 설명의 부분(14~20)이다. 비유 자체에도 셋의 쌍들이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을 때 그 씨들을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 세 가지이다. 굳은 땅과 돌들, 그리고 가시덤불이다. 이에 비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이루는 성공적 결과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세 번 점진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누가복음은 백 배만을 단숨에 이야기하며(8:8), 마태복음은 백 배부터 시작하여 삼십 배로 감소하는 역순을 취하고 있다(13:8). 마가의 순서의 배열은 세 번의 실패와 대조적으로 세 번의 점증적인 성공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비유 자체 부분과 그 설명 부분 사이에는 비유의 의미를 묻는 제자들에게 비유들로’(en parabolais, 4:11)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나온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 인용되고 있는 이사야 69~10절의 말씀은2 비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은 의미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주어진 너희’(hymin)외인들’(ekeinois tois eks)을 구분하고 있다. 외인들에게는 씨의 풍성한 결실에 해당하는 세 가지 결과 깨달음돌이킴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양자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생기게 된다. 리쾨르(Ricoeur)가 말하는 것처럼 이 격차는 수량화할 수 있는 양적 간격이 아니라 도저히 잴 수 없는 질적 간격이다.3 하나님나라에 속하는 자들은 비유들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얻지만, ‘외인들의 경우에는 이 비유들 때문에 오히려 더 멀어지게 된다. 특히 씨 뿌리는 자가 뿌리는 씨앗은 이런 구분을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이 첫 비유의 의미는 예수님의 설명 속에서 그 해석의 포인트가 제공되고 있다. 씨앗은 곧 말씀을 의미한다. 말씀이 전하여지는 상황과 또 그 때에 나타나는 다양한 결과들을 보다 생생히 나타내기 위해 말씀은 씨앗이라는 메타포적 알맹이를 비유적 이야기체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밭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고 이 비유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밭은 씨에 비해 부차적 성격을 가진다. 밭이 어떤 종류의 밭이냐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씨와의 접촉을 통해서이다. 얼핏 보기에는 다 비슷해 보이는 땅이지만 씨가 뿌려졌을 때에 비로소 그 밭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 씨가 뿌려지기 전에는 그다지 심각한 구분이 생기지 않지만 씨가 뿌려진 이후에는 심각한 구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예 싹을 내지 못하게 되는 땅도 드러나고, 싹은 내어도 곧 말라죽게 되는 땅도 드러나며, 어느 정도 자라기는 하지만 결실에는 이르지 못하게 되는 땅도 드러난다. 이 모든 땅들은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내는 땅과 확연히 구별되기 시작한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다름 아닌 씨앗이다. 하나님나라의 말씀의 씨앗은 그만큼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바로 그런 말씀을 전하는 자이며 또한 말씀 자체이신 분이다. 비록 그 씨앗이 땅 속에 가만히 파묻혀 있는 것 같지만, 또 때로는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별된 좋은 밭들 속에서는 결코 실패하지 아니하며 마침내는 상상치 못하였던 놀라운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것이 씨앗의 운명이며, 말씀의 비밀이며, 예수님 자신의 길인 것이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가, 이것의 이해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이 감추어진 메시아의 길, 그것은 결코 작은 결과를 낳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되고 큰 것이 허무하게 허물어지는 반전의 결과가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이 씨 뿌리는 자와 씨와 밭에 대한 비유는 감추임과 나타남이 교차되는 마가복음의 하나님나라의 성격과 관련해 해석돼야 할 것이다.4

) --> 

3. 스스로 자라는 씨와 겨자씨 비유(4:26~32)

이 어지는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다라는 형식을 취함으로 보다 분명히 비유들과 하나님나라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땅에 뿌린 씨앗은 그 스스로 자라난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내며 자라서 마침내 결실에 이르게 된다. 그 결실의 때가 이른 것을 볼 때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을 거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씨앗의 생명력과 그 활동의 현재성이다. 이미 약동하고 있는 그 놀라운 생명력은 결실의 때에 이르기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땅 위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은 생명력으로 스스로 자라날 것이다. 그 자라는 것이 비록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이 다 자라난 뒤에는 피할 수 없는 추수의 낫이 다가옴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 그것이 감추인 듯이 보이지만, 항상 그것은 감추인 채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이 드러날 때의 갑작스러운 결과 앞에 놀라움으로 서지 않기 위해서는 뿌려진 씨앗의 현재의 자람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씨앗의 숨은 생명력에 비해, 겨자씨 비유에서는 씨앗의 작음이 강조된다. 그것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4:31)이다. 물론 이 표현의 정확성이 이 비유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앗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생물학적 관심에 매달리는 사람이나, 이 표현 하나에 성경 무오설을 걸려고 하는 사람들은5 이 씨앗이 등장하는 비유적 맥락이나 비유가 가지는 문학적 특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6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는 마지막 번성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이 다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덮고도 남는 것으로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와 같은 모습으로 그들 가운데 임하여 있는 것에 대해 그들은 알지 못한다. 과연 십자가에서 죽게 될 작은 한 인물 가운데서 온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을 큰 나무를 볼 수 있을까 한 무리의 작은 제자들과 빈약한 교회를 통해 그런 원대하고 영광스러운 완성을 볼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의 상황 속에서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조차 않는 겨자씨의 모습과 같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현재에 이미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주의가 요구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완성된 최종적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온다면 사람들은 쉽게 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사람들은 쉽게 이를 놓치고 만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큰 사람들이요 권위자들이 바알세불의 이름을 빌어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는 그런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나라의 기대를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야만 한다. 현재의 작은 것 속에서 하나님나라 씨앗의 생명력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큼에 대한 허황된 꿈과 함께 그들 자신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 속에서 큼을 보는 사람들은 그 큼이 온전히 펼쳐지는 순간에 진정한 영광과 기쁨을 경험할 것이다.

) --> 

4. 비유들 속에 나타난 반전과 역설

이런 반전과 역설이 이 비유들 속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런 면은 그 형식은 다른 비유들과 같이 내러티브의 구성을 가지지는 않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비유적 성격을 가지는 등불에 대한 이야기와 헤아림에 대한 이야기(4:21~25)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등불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러내어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등불이 지금 일시적으로 감추어져 있으며 숨기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드러내어질 수밖에 없다. 등불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등불은 지금 그 참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7 세상 속에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반드시 드러나고야 만다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와 같이 현재에는 보잘것없이 작은 모습으로, 예상 밖에 감추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그것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의 결과는 나중에 그것이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결코 메울 수 없는 질적 차이를 빚고 말 것이다. 큰 것을 주는 자는 큰 것을 되받고 작은 것을 주는 자는 작은 것을 되받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비록 현재는 작은 것일지라도 거기에 큰 것을 담아서 주는 사람은 마침내 큰 것으로 되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진 자는 점차 더 가지게 되겠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있는 것까지 다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작은 것 때문에 빚어지는 최종적인 결과의 차이는 이와 같이 엄청난 것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말씀의 씨앗이다. 이 작은 것이 작은 것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나중에는 100배까지의 결실을 맺음으로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반전을 이루어낸다. 크고 왕성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에 그들 가운데 주어지는 말씀의 사역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들은 오히려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되는 역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반전과 역설의 중심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다. 비록 당시의 사람들은 극심하게 예수를 오해하고 모함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크고 작은 것을 재는 잣대로 그들 가운데 존재한다.

이와 같은 반전의 실례는 마가복음의 다른 부분들 속에서 예시되고 있다. 한 예로 12장 후반부에 기록된 두 렙돈 드린 과부의 일화 속에서 이 반전을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은 큰 왕 다윗보다 더 크신 분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시고(12:35~37), 이 바탕 위에서 권세 있는 판정의 말씀을 통해 그 권위의 시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2:43~44). 큰 부자들이 갑자기 작은 자가 되고, 작은 자인 가난한 한 과부가 큰 자가 되는 이런 반전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판정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세상 속에 새로운 질서를 도입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존의 세상 질서는 더 이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 질서의 관점에서 볼 때는 가장 작은 것밖에 안 되는 씨앗 하나가 온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뒤바꾸는 큰일을 내고 있다. 반면 그 작은 씨앗을 마음의 밭에 소중히 품는 사람은 예상치 못하였던 큰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의 핵심에는 십자가에 가리어져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서 계신다.

) --> 

III. 새로운 두려움(4:35~41)

) --> 

1. 제자들의 강조된 두려움

비 유들을 통한 가르침에 이어서 소개되고 있는 이야기는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신 기적기사이다. 제자들은 이 부분에서 다시금 악역을 맡고 있다. 편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두려움에 질려 안절부절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음 없는 자라고 꾸짖고 있다. 제자들의 모습은 때로는 깨달음이 있는 자들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믿음이 있는 자들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믿음 없는 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외인들과 달리 예수님의 비유의 뜻을 남달리 설명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지만, 풍랑 이는 바다에서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의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마가는 이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동참을 구하고 있다. 풍랑 이는 현실의 바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 

2. 새로운 두려움

그 래서 이 기사는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4:41)라는 질문으로 마감된다. 본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직접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독자들이 답해야 할 문제로 남겨지고 있다. 이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마가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다 읽은 다음에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그 대답은 더욱 뚜렷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제자들의 새로운 두려움이다. 풍랑 이는 바다를 보고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며 아우성 쳤던 이전의 모습과 달리 이제는 그들의 속에 새로운 두려움이 형성되고 있다. 마가는 이 두려움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큰 두려움으로 두려워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은 곧 이어 소개되고 있는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친 이후 사람들의 반응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5:15). 그러나 제자들의 두려움은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압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그들을 사로잡았던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두려움이다.

예수님의 권능을 접하는 곳에는 새로운 두려움이 형성된다. 사람들을 주체치 못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던 바람과 바다조차 순종하는 분 앞에 엎드리며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던 이전의 것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다. 그 무서운 것들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 일이 되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모시게 될 때 이전 우리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지 못한다.

) --> 

IV. 오늘에의 적용

) --> 

이상에서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시작된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질서, 그리고 새로운 두려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심을 발견한다. 현재에는 이 예수님이 그 참 모습이 가려진 상태로 세상 속에 계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후에 나타날 모든 결과들은 현재의 이분으로 말미암아 결정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외향적 가치 중심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외모나 외적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회이다. 미용이나 성형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미 이것이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고, 사회 전체가 큰 돈, 큰 집, 큰 차 등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부자되기 위한 열망은 어떻게의 질문을 넘어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상으로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 가려지고 무시당하는 것은 작으나 위대한 것들이다. ‘부자 아빠에게 기대되는 것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는 것에 대하여 사례는 고사하고 원망을 들어야 할 판이다. 작지만 그 위대한 것들이 사람을 바꾸고 오늘의 내가 있도록 만드는 것들이 아닌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리고서도 부자들의 큰 헌금에 가려서 그 순결하고 고귀한 믿음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던 한 과부 여인과 같이 작고 사소한 것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함정이다. 여기에 빠지는 사람은 십자가의 주님을 알아볼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던 작은 것 속에 깃들인 진정한 위대함을 드러내어 주시던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이것이 이 시대의 희망이다.

예 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진정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외면적 이나 성장 또는 성공의 신화를 과감히 벗어나서 진정한 위대함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돼야 한다. 작은 씨앗 속에 들어 있는 뒤집음의 힘’(subversive power)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결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누구의 제자인가 우리가 아는 그분은 과연 누구인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9:7)”고 한 것처럼, 과연 우리는 세상의 말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그의 제자들인가

) --> 

1.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단순히 역사적 인물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에 이

르게 함에 있어서 독특한 역할이 주어지고 있다. 그들의 무지나 오해, 믿음 없음이나 실패 등을 넘어 어떻

게 참 제자의 길을 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잣대의 역할을 한다. 마가복음에서의 제자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참고, Pheme Perkins, “The Synoptic Gospels and Acts of the Apostl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 ed. John Bart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246~48; Ernest Best, “Mark’s Narrative Technique,” JSNT 37 (1989),

43~58.

2. 마가복음에서의 구약의 인용은 대부분 예수님의 직접 담화 속에 담겨 있다. W.S. Vorster는 이것이 독자

들로 하여금 관련 인물들이나 상황을 어떤 시각에서 보아야 할지를 지시해주는 주석적(narrative

commentary) 성격을 가진다고 지적한다. 보라, Willem S. Vorster, “Meaning and Reference:

The Parables of Jesus in Mark 4,” in B.C. Lategan

and W.S. Vorster, Text and Reality: Aspects of

Reference in Biblical Texts (Atlanta: Scholars Press,

1985), 41~43.

3. Paul Ricoeur, “The Bible and the Imagination,” in

Figuring the Sacre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159. 이 논문의 첫 출전은 The Bible as a

Document of the University, ed. Hans Dieter Betz

(Chico: Scholars Press, 1981), 49~75.

4. 이에 관해서는 참고, W.H. Kelber, The Kingdom in

Mark: A New Place and a New Tim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33.

5. R.C. Sproul은 이런 사람의 실제적인 예를 언급하고 있다.

보라, 쉽게 쓴 성경해석학, 이세구 역 (서울: 아가페 출판

, 1993), 52.

6. 참고, George Eldon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98.

7. Robert A. Guelich, Mark 1~8:26, WBC 34A (Dallas:

Word Books, 1989), 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