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1장 연구

에반젤(복음) 2019. 8. 17. 13:39



마가복음 1장은 마가복음 전체의 토대를 형성하는 일련의 사건들과 주제들을 매우 박진감 넘치게 소개해 준다. 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서언(1:1~13); 2) 예수의 메시지의 요지(1:14~15); 3) 예수의 갈릴리 초기 사역(1: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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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1: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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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째 단락은 세 개의 소 단락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세례 요한의 사역(1:1~8); 2) 예수의 세례(1:9~11); 3) 예수의 시험(1:12~13). 본 단락은 예수의 공생애에 바로 앞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진술해 줌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앞으로 복음서에서 전개될 내용의 이해에 필수적인 몇 가지 단서/열쇠들을 제공해 준다.2

본 서언 단락이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첫째, 본 서언에서 인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환상과 하늘로부터의 음성(1:10~11), 9장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 본 서언에서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특징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성령과 사단의 활동은, 3장에서 그들에 관한 논쟁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본 서언에서 그처럼 자주 언급되고 있는 광야(헤 에레모스)에 대한 언급(1:3, 4, 12, 13)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3 넷째, 마가는 유독 이곳에서만(1:2~3) 진행되는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40:3)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4 다섯째,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서는 예수가 누구인가가 줄곧 감추어진 모습으로 소개될 것인데 반해(참조. 1:25, 34, 44; 7:36; 8:30 ), 본 서언 단락에서는 예수의 신분이 수차에 걸쳐 명백히 진술되고 있다. 아마도 마가는 본 단락에서 독자들이 복음서를 읽어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줄곧 유념해야 할 예수의 정체에 관한 지침을 제공해 주고자 한 것 같다.5 이러한 사실들은 본 서언이 단순한 하나의 시작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와 그의 사역의 의미에 관한 집약적인 기독론적 단락으로 의도되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오늘날 마가복음 독자들도 본 서론 단락에서 이러한 독서 지침들을 주목하는 것이 복음서 전체를 적절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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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례 요한의 사역(1:1~8)

11절의 표제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묘사한다.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8:29; 9:41; 12:35; 13:21; 14:61; 15:32),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호칭적 의미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 초두에서 예수께서 구약이 내다보았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다. 예수의 이러한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부연에 의해 그 차원이 더욱 고조된다. 마가는 그의 책을 예수 그리스도의6 ‘복음이라고 규정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져 왔지만, 그는 이제 그 내용을 책으로 기록하여 전하려 하는 것이다.

표제에 이어, 본 단락은 메시아의 오심과 연관된 구약 성경의 두 구절들(3:1; 40:3)을 연결하여 인용한다(1:2~3). 그런데 이 인용구는 메시아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선행자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메시아 자신이 아니라, 그의 선행자로 예견된 한 인물, 즉 엘리야에 의해 성취되어야 하였다(참조. 4:5~6). 그런데 그 예언이 세례 요한에게 적용됨으로써, 그가 예견된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임을 시사한다(참조. 9:13; 1:17). 이러한 시사점은 세례 요한의 복장에 대한 묘사(1:6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가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케 해 준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명확해 진다(참조. 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그는 엘리야로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는 요한의 선포(1:7~8)는 그 자신이 인용구의 예언을 성취하는 자임을 확증해 준다. 이는 단순한 사건의 묘사가 아니라, 요한이 내다보는 인물이 다름 아닌 구약 성경으로부터 기대되어 왔고, 그 당대의 사람들이 그처럼 고대해 왔던(참조. 1:5),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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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세례(1:9~11)

본 단락은 요한이 내다보았던 분이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라고는 사실을 밝힌다. 본 단락의 제목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세례라고 붙여지지만, 실제로 예수의 세례에 관한 내용은 19절에서 간단히 언급될 뿐이며, 110~11절은 그 세례 사건 직후 예수께 일어난 현상을 묘사하는데 할애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례 직후 예수께 일어난 계시적 현상은, 다른 복음서들의 그것과 달리(참조. 3:21~22), 예수께 한정된 경험으로 묘사되고 있다.

계시 현상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하늘이 갈라짐은 곧 선포될 예수께 대한 진리가 천상적 성격을 띄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둘째, ‘성령강림은 메시아적 성령 강림으로서(참조. 61:1),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임을 시사해 준다. 셋째,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은 메시아의 신분을 확증해 준다. 이러한 삼중적 계시는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이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된 것임을 밝혀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 단락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인격의 비밀(,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을 감지하도록 돕는다.

11절 표제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지위가 그의 사역 초입에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재확인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1:10; 참조. 2:7; 42:1).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이 예수의 사역 말미에, 그의 십자가 죽음에 직면하여, 땅에 있는 한 이방인의 입으로부터 재확인되고 있다는 점은 더욱 흥미롭다(15:39). 어쩌면 마가는 그의 표제에서 밝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분을 예수의 사역 처음과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확증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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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의 시험(1:12~13)

끝으로 본 단락은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적을 대적하기 위해 광야로 나가시는 모습을 소개한다. 사실 마가의 묘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마태(4:1~11)나 누가(4:1~13)의 묘사보다 훨씬 더 간략하다. 하지만 그는 이 짧은 단락 안에서 광야주제를 시험주제와 인상적으로 연결해서 제시한다. 광야는 예수의 대적들인 사단들짐승들의 장소이지만, 예수는 그곳에서 그의 후원자들인 성령천사들과 함께 그들에 대한 전쟁을 수행해 나간다. ‘사십 일간에 걸친 예수의 광야 체재는 모세의 사십 일 시내산 체재(24:18; 9:9 ), 엘리야의 사십 일 광야 여정(왕상 19:8), 그리고 사십 년간에 걸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사십 년 간에 걸친 광야 생활의 목적이 그들을 시험하는데 있었다는 점은(참조. 1~11) 예수의 사십 일 광야 체제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7 예수와 그의 대적들 사이의 이러한 대면은, 복음서가 계속 진술해 나갈, 그리고 16장에서 그 최종적 승리를 선포하게 될, 사단에 대한 예수의 전쟁을 예시해 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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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메시지의 요지(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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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단락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많은 제안들이 있어왔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본 단락을 서언의 결론부로 보고자 한다. 많은 학자들은 본 단락을 새로운 대단락9의 도입부로 본다.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본 단락이 앞뒤의 단락들과 긴밀한 연관성을 공히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 때문에 생겨난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사실 본 단락은 서언부와 본론부를 잇는 교량 역할을 적절히 수행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 단락은 단순한 교량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복음서 전체의 주제를 요약적으로 제시해 주는 주제 선포 단락으로서의 고유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10

본 단락은 11절에서 언급되었고, 12~13절에서 그 어렴풋한 그림이 그려졌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그리스도 자신의 선포를 기술함으로써 명확히 제시해 준다. 예수의 선포의 첫 부분은 때가 성취되었다’11는 사실을 선언한다. 여기서 는 문맥상 메시아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선지자들이 내다보았던 메시아 시대가 예수의 사역 상황 가운데 이미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메시아 시대는 더 이상 미래적이거나 임박한 상황이 아니라, 이미 그 성취가 현존해 있는 것이다.

첫 부분의 이러한 의미는 선포의 뒷 부분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예수의 선포의 둘째 부분인(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의 해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대적 논의에서 긴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세히 논의한다는 것은 지면상 불가능하지만, 오늘날 신약 학계에서 공감하고 있는 입장은 명확하다. ,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시간이나 장소나 사건이나 상황 등과 같은 어떤 단일한 지칭 대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혹은 왕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2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완료형 동사(엥기켄, ‘가깝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먼저 이 동사는 진행적 동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간적으로 이미 완결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가 시간적으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 또한 아니다. 이러한 이해는 선포의 첫 부분과 명백히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선포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의 연결된 의미는 무엇일까 그 대답이 단순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존해 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시간적으로 이미 종결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 현장에서 계속 진행되어 가는 그러한 역동적인 실체인 것이다.13

선포의 마지막 부분은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 반응은 회개믿음이다. 이 두 가지 반응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제자도의 기초이다(참조. 11:17, 18; 20:21; 6:1 ). 본 선포에서 회개는 구약에서 자주 요청되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는 단순한 마음의 변화, 후회, 참회와 같은 문자적 의미 이상의, 삶의 의미와 방향과 목적의 철저한 전환을 의미한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 이상의,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이 복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의 논의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 졌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현존해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라는 것이다.14

이 짧은 단락에서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제시된 예수의 이 선포 내용은 앞으로 복음서 전체를 통해 그 세세한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되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러한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마가복음을 읽어 나가는 것이 복음서를 적절히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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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갈릴리 초기 사역(1: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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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마가복음의 본론의 첫째 대단원을 대개 116~826(21)로 구분하며, 그 첫째 대단원의 처음 대단락을 116~36(12)로 구분한다. 1장의 나머지 부분을 다루기에 앞서 그 부분이 속해 있는 전체 단락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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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0 제자들을 부르심

1:21~28 권위 있는 가르침과 귀신 축출

1:29~31 베드로의 장모 치유

1:32~34 치유 및 귀신 축출 사역 요약

1:35~39 갈릴리에서 지속적인 설교 사역

1:40~45 문둥병자의 치유

2:1~12 가버나움에서 중풍 병자의 치유,

죄를 사하는 권세

2:13~17 레위를 부르심, 죄인들과의 식사

2:18~22 금식에 대한 질문, 옛것과 새것

2:23~28 안식일에 이삭을 꺾음, 안식일의 주

3:1~6 안식일에 손마른 자의 치유,

예수를 죽이려는 공모

3:7~12 무리가 예수를 좇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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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대단락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잘 기술해 준다.

첫 째, 본 대단락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사역을 소개해 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1:15),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며(1:16~20; 2:14), 권위 있게 가르치시며(1:21~22, 27; 2:2, 13), 권위 있게 치유하시며(1:23~26, 30~31, 32~34, 40~42; 2:3~12; 3:1~5), 자신의 메시아적 권위를 선포하신다(2:5, 10 - 죄를 사하는 권세; 2:28 - 안식일의 주; 참조. 1:24).

둘째, 본 대단락은 (특히 후반부2:1~3:6에서) 예수의 사역으로부터 비롯된 예수께 대한 적대감의 진전을 보여 준다: 26~7절에서는 마음 속 질문이 제기된다; 216절에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이 제기된다; 218절에서는 예수 자신에게 질문이 제기된다; 224절에서는 예수께서 힐문을 당한다; 32절에서는 그의 대적들이 예수를 송사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주목한다; 36절에서는 그들이 예수의 죽음을 계획한다.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사역은 서기관들이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의 그것과 같지 않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1:15, 27; 2:21~22, 28). 이러한 그의 사역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기존 종교 체제 안에서 아무런 적법성도 갖추지 않고 나타났는데도, 그의 권위와 능력과 그로 말미암은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일반 사람들은 서로간에 이 사람이 누구냐’(1:27)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으며,15 종교적 지도자들은 분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16, 24; 3:2,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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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자들을 부르심(1:16~20)

114~15절의 중대한 선언 이후, 사람들은 곧 전격적인 우주적 변화나, 최소한 국가적 변혁을 기대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본 단락에서 발견하는 그림은 그러한 기대와 전혀 다르다. 예수는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동떨어진 갈릴리 해변에서 하찮게 보이는 몇몇 어부들을 자신의 선교사역을 위해 동참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메시아적 선교가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참조. 10:42~45).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주목하게 되는 과시적인 방법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별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점진적인 방식으로 임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이러한 특징은 겨자씨 비유(4:30~32)에서 잘 설명될 것이다.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 복음서 이야기 전개에서 맨 앞에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의 선교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사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 제자들은 이 시점으로부터 겟세마네에 이르기까지 줄곧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더불어 언제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비록 그들이 연약하고, 따라서 실수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왕권을 시행해 나가신다. 그리고 마가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의 독자들도 (그리고 오늘날 독자들도) 자신들의 제자도를 점검해 보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17

본 단락은 제자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사실을 보여 준다. 첫째,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풍습과 달리, 제자들이 선생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제자들을 선택한다(1:17, 20). 둘째, 제자들은 제자도를 위하여 두 가지를 시행한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관계들을 버려야 한다(1:18a, 20b). 이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제자도의 대가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예수를 따라야 한다(1:18b, 20c). 이는 그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그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1:17). 제자들은 예수를 수행할 뿐 아니라, 그의 선교 사역에 동참할 것이 기대되는 것이다(참조. 3:14; 6: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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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권위 있는 가르침과 귀신 축출(1:21~28)

본 단락과 다음 세 단락은 가버나움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만 하루의 시간 범위 내에서 기술하고 있다(참조. 1:29, 32, 35). 이들 네 단락에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특징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들이 모두 나타난다: 가르침(1:21~22, 27), 귀신 축출(1:23~26, 32, 34, 39), 치유(1:30~31, 32~34), 선포(1:38~39). 이처럼 이 단락들은 예수의 전반적인 사역의 그림을 하루의 일과 가운데 인상적으로 그려 나간다.

본 단락은 예수를 무엇보다도 선생으로 제시한다(1:21). 바로 앞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의 모습이 선생으로 묘사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많은 선생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는 당대의 랍비들이나 서기관들과는 다른 선생으로서, 그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가르침인 것이다(1:22, 27).

그의 선생으로서의 권위는 그의 귀신 축출 기적에 의해 입증된다(1:27). 귀신 축출은 예수에 관한 마가의 기술에 있어서 아주 두드러진 일면이다.19 마가복음에는 네 개의 귀신 축출 이야기들이 있는데(1:23~27; 5:1~20; 7:24~30; 9:14~29),20 이들 중 두 개는 예수와 귀신() 사이의 대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대화들은 예수의 신분에 대한 귀신들의 놀라운 지식을 드러내 보여 준다(1:24; 5:7). 특히 본 단락에서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1:24)라는 귀신의 진술은, 11절의 표제와 111절의 하나님 자신의 선포에 의해 확증된 예수의 신분이, 이제 귀신에 의해서까지도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이 귀신 축출 기적은 이미 112~13절에서 예시되었던 사단에 대한 예수의 전쟁을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다. 예수의 귀신 축출 기적이 갖는 메시아적 전쟁으로서의 의미는 322~30절에서 예수와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서기관들 사이의 대화에서 명백해진다.

예수의 귀신 축출은 사단의 속박, 즉 사단에 대한 예수의 메시아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12:28; 11:20). 그 결과 무리들은 다 놀라며, 서로에게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라고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1:27). 마가복음의 이야기 흐름에서 계속 제기되어 나갈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이미 그 첫 번째 이야기에서 무리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의 제기와 더불어 그의 명성은 갈릴리 전역에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1:28). 사실 첫 번째 대단락에서는 그의 명성에 대한 언급들이 자주 나타난다(1:33, 37, 45; 2:1~2, 3:7~9).

마 가복음의 전형적인 비밀 주제(1:24~25; 참조. 1:34; 3:11~12)와 더불어, 인기 있는 선생과 치유자 주제 또한 함께 공존하며 흘러가고 있음은 흥미롭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인 열광은 진정한 이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피상적인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이 4(특히 4:10~12)에서 명확해질 것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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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드로의 장모 치유(1:29-31)

귀 신 축출 이야기에 이어, 이제 치유 이야기가 제시된다. 흥미롭게도 이들 두 이야기 바로 뒤(1:32~34)에서는 치유와 귀신 축출 기적들에 대한 요약적인 언급이 뒤따라오고 있다. 그렇다면 본 단락은 앞 단락과 더불어 예수의 그러한 일반적인 활동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을 제공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본 치유 기적 이야기는 앞의 귀신 축출 이야기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앞 단락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는데, 본 단락은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앞 단락은 공개적인 상황을 다루는데, 본 단락은 집안에서의 상황을 다룬다. 앞 단락은 열광적인 질문과 반응으로 종결되지만, 본 단락은 차분한 섬김으로 종결된다. 두 예들의 이와 같은 차이는, 예수의 기적들이 어떤 정형화된 형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술(技術)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필요를 채우시는 예수의 메시아적 관심과 권위의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22

회당에서 나와 곧 집에 들어가시니’(1:29)라는 마가의 진술을 이 치유 기적이 안식일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준다.

예 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이 적법한가의 문제는 31~6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될 것이다.23 그러나 예수는 이미 여기에서 그 자신이 전통적인 안식일 규례에 저촉을 받지 않으심을 그의 치유 시행을 통해 명확히 하고 계신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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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치유 및 귀신 축출 사역 요약(1:32-34)

특 정한 귀신 축출과 치유 기적들에 대한 기술에 뒤이어, 이제 마가는 예수의 구속적 기적들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요약적 기술을 제공한다. 본 요약적 기술은, 다른 요약적 단락들(1:39; 3:10~12; 6:53~56)과 더불어, 복음서에 제시된 구체적인 기적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 중 지극히 제한된 몇몇 예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사실 본 단락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1:32), ‘온 동네’(1:33), ‘각색 병든 많은 사람’(1:34), ‘많은 귀신’(1:34) 등과 같은 표현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하였으며, 얼마나 폭넓게 행해졌는가를 인상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저 물어 해 질 때에’(1:32)라는 마가의 언급은 흥미롭다. 특히 해 질 때에는 앞의 사건들이 진행된 안식일의 종료를 의미하며, 따라서 이와 때를 맞춰 사람들이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데리고 온 것은, 그들 입장에서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한 관심의 결과로 보인다.25

예수 자신은 안식일에 귀신 축출이나 치유 기적을 행하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시지만(1:21~28, 29~31), 무리들은 아직도 안식일 규례에 제재를 받고 있는 모습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이와 관련하여 223~ 36절에서 안식일을 성취하신 안식일의 주로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실 것이다.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1:34)는 마가의 진술은 앞의 124~25절의 경우보다 명확히 메시아적 비밀 주제를 도입해 준다(참조. 1:44; 7:36; 8:30 ). 예수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가지만, 정작 예수 자신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하신다. 이 두 가지 상황은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는 동안 계속해서 하나의 긴장을 형성해 나간다.

(5) 갈릴리에서의 지속적인 설교 사역(1:35~39)

본 단락은 121절에서 시작된 예수의 24시간 가버나움 사역을 마무리짓는다. 분주한 하루의 사역 후 예수는 좀더 쉬어야 하셨을 것이지만, 그는 자신의 그러한 육체적 필요를 뒤로하시고, 주변의 분주함과 번잡함을 피하여 이른 아침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다(1:35; 참조. 6:46; 14:32~42).

예수의 기도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의 겟세마네 기도(14:32~42)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간구였을 것이다. 본 단락은 예수의 계획과 제자들의 기대 그리고 무리들의 관심이 얼마나 다른지를 잘 보여준다. 그 차이는 예수께서 제자들보다 한 걸음정도 앞서가시는 그러한 차이가 아니다. 하나님의 왕권을 시행하시려는 예수의 관심은 제자들의 기대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26 제자들은 세상적인 흐름에 따라 인기와 성공을 향한 계획을 한 단계씩 진척시켜 나가고자 한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1:37).

그러나 예수는 그것이 자신의 사역의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 제자들의 성공 지향적 관심과 하나님의 왕권을 시행하시려는 예수의 관심 사이의 차이는, 이후 이야기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보다 더 분명해질 것이다(참조. 특히 8:31~33; 10: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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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둥병자의 치유(1:40~45)

본 단락은 문맥상 이중적 기능을 한다. 한편으로, 본 단락은 121~45절 대단락의 절정을 형성한다. 그에 대한 소문은 온 가버나움(1:21~34)에서 그 주변 도시들(1:35~39), 그리고 이제는 갈릴리 모든 도시들에까지 퍼져 나가서, 예수는 더 이상 도시들에는 들어가지 못하시고, 한적한 시골들로 피해 다니셔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45). 다른 한편으로, 본 단락은 21~36(12) 대단락을 위한 도입 역할을 한다. 본 단락은 율법 문제와 관련된 긴장(1:41, 44)과 무리들의 왜곡된 기대로 인한 압박(1:45)을 시사함으로써, 21~36(12)에서 발전되어 나갈 논쟁과 충돌 이야기들의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27

문둥병자의 치유는 단순한 질병 문제뿐 아니라, 정결 문제까지를 포함한다. 예수는 문둥병자를 만지심으로써(1:41), 그 자신이 더 이상 정결 관련 율법(14:46~47; 참조. 11:24~40; 19:11~16 )에 얽매이지 않으심을 시사하신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71~23절에서 보다 일반적인 정결례와 관련한 말씀에서 명확히 밝히실 것이다. 하지만 그는 깨끗케 된 자에게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1:44)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정결 관련 율법(14:1~32)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으셨음을 시사해 준다. 물론 예수 자신은 정결 관련 율법을 지키는데 아무런 관심도 없으시다. 그러나 그는 그 깨끗케 된 자가 당시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율법 조항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율법에 대한 자유가 오히려 사람에게 불편과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굴레가 되도록 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문둥병자 치유는 그 종말론적 의미가 두드러진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하나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병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문둥병자의 치유는 다른 몇몇 기적들과 더불어 메시아 시대의 특징으로 기대되고 있었던 것이다(참조. 11:5//7:22).28) 그렇다면 본 단락은 앞에 기술된 예수의 가르침과 귀신 축출 및 치유 기적들과 더불어 114~15절에서 선포된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보다 확고하게 입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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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의 범위를 1~13절로 할 것인가 아니면 14~15절도 포

함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들이 있다. 전자의

견해는 Cranfield, France, Hooker, Lane, Lohmeyer,

Schniewind, Schweizer, Taylor 등에 의해 받아들여지

고 있으며, 후자의 견해는 Anderson, Gnilka,

Grundmann, Guelich, Mann, Pesch 등에 의해 받아들

여지고 있다.

2.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 단락은 요 1:1~18의 역할과 유사

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 서언은 이야기 체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의 서언은 철학적 진술로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언들은 공히 앞으로 두 복음서들이 제시할

예수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주는 것

이다(. 하나님의 아들/로고스; 세례 요한과의 비교 및 우

월성). 참조. M.D. Hooker,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BNTC; London: A & C Black, 1991), p. 31.

3. 물론 1:35, 45; 6:31, 32, 35, 35에서도 에레모스가

사용되지만, 그곳들에서는 명사형(’광야’)으로서

가 아니라 형용사형(’한적한’, ‘외딴’)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 서언에서 광야가 갖는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R.T.

France, The Gospel of Mark (NIGTC; Carlisle:

Paternoster Press, 2002), pp. 56~59를 보라.

4. 다른 구약 인용들은 대개 예수님 자신의 인용들(. 4:12;

7:6~711:17; 12:10~11; 13:24~25; 14:26)이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한 인용들(. 11:9~10)이다.

5. 참조. Hooker, Mark, pp. 31~32.

6. 속격 예수 크리스투는 주어적 용법이나

목적어적 용법으로 공히 이해될 수 있다. 혹자들은 이 두 용

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R.A.

Guelich, Mark 1~8:26 WBC, 34a; Dallas: Word

Books, 1989, p. 9), 상당수의 학자들은 이중적 용법의

타당성을 설득력 있게 제안한다; H. Anderson, The

Gospel of Mark (NCBC;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6), p. 67; France, Mark, p. 53.

7.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묘사들은 신 6~8장을 보다 명시적

으로 반향함으로써, 예수의 광야 시험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사이의 관계를 보다 인상적으로 강조해 준다.

8. 참조. C.E.B. Cranfield,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The Cambridge Greek Testament

Commenta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1959]), p. 33.

9. 본 단락이 이끄는 대단락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도 의견

들이 나뉘어 있다. 1:14~3:6 - Cranfield, Mark, pp.

11~12, 61; 복음서 전체(1:14~16:8) - Guelich,

Mark, pp. 41~42; 참조. A.M. Ambrozic,

The Hidden Kingdom. A Redaction-Critical Study of the References to the Kingdom od God in Mark’s

Gospel (CBQMS, 2; Washington: The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 1972), pp. 3~31.

10. 참조. Ambrozic, Kingdom, pp. 3~31; France,

Mark, p. 90.

11. 페플레로타이에 대한 한글개역의 찼다라는 번역은

오역은 아닐지라도,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개념을 반영

하는데는 미흡한 번역이다.

12.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대적 논의에 대해서는 많은 책들이

나와 있는데, 한국말로 번역되거나 집필된 것들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죠오지 래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이태훈

; 서울: 엠마오, 1985 [1974]); 헤르만 리델보스, 하나

님 나라(오광만 역; 서울: 엠마오, 1987 [1950]); G.R.

비슬리-머리, 예수와 하나님 나라(박문재 역; 서울: 크리

스찬 다이제스트, 1991 [1986]); 노먼 페린, 예수의 가르

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이훈영, 조호연 역; 서울:

솔로몬, 1992 [1963]); 김균진, 역사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 .

13. Ambrozic, Kingdom, p. 23; Guelich, Mark, pp.

43~44; France, Mark, pp. 91-93. 사실 이 동사가 이미

현존해 있는 상황을 진행적으로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다른

예를 막 14:42~43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이 경우 예수께서 가까이 왔다고 말씀

하시는 시점과 유다가 시점이 실제로 겹치고 있음을

주목하라.

14. Guelich, Mark, pp. 44~45; France, Mark, pp. 93~

94.

15. 사실 죄인들과 병든 자들을 포함한 무리들은 예수의 사역

에 대해 놀람과 더불어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한 것으

로 보인다(1:22, 27~28, 32~33, 37, 39, 45; 2:1~2,

12, 15~16).

16. 참조. Hooker, Mark, pp. 52~53.

17. 참조. France, Mark, pp. 94~95.

18. Guelich, Mark, pp. 52~53.

19. 예수의 기적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귀신

축출, 치유, 죽은 자를 살리심, 자연 기적. 마가복음에서 기

적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 처음 10

47%정도가 기적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분명해 진다. 참조. Cranfield, Mark, p.

82.

20. 마가는 이들 네 개의 이야기들 외에도 보다 일반적인 귀신

축출 기적들에 대한 언급들을 제공해 준다: 1:32~34,

39; 3:11~12; 참조. 3:22~30.

21. 참조. France, Mark, p. 106.

22. 참조. France, Mark, p. 107.

23. 3:1~6에 대한 필자의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양용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서울: 이레서원, 2000), pp.

297~327을 보라.

24. 양용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pp. 378~81.

25. 참조. 양용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pp.382~84.

26. France, Mark, p. 111.

27. Guelich, Mark, p. 73.

28. Guelich, Mark, pp. 74,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