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2장 연구, 지붕뜯기의 믿음, 그리고 인자의 죄사함

에반젤(복음) 2019. 8. 17. 13:48



2:1-3:6본문주해와적용

조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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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이전까지 예수의 사역은 크게 인기를 몰고 오는 성공으로 보인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몰려 예수는 그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숨어 다니며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찾아야 할 정도였다(1:35). 본 단락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사람들이 몰려있는 마을을 피해 외진 곳으로 갔으나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1:45). 그러나 마가복음 2장에 들어오면서 예수에 대한 인기 한가운데로 종교지도자들과의 신학적 갈등이 침투한다. 그래서 사실상 21절에서 36절은 논쟁 이야기들(controversy stories)의 집합으로 한 단위를 구성한다. 나오는 일화(逸話)마다 중요한 신학적 쟁점을 놓고 예수와 그의 반대자들의 생각이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다. 따라서 본 단락의 메시지는 이러한 갈등 소재를 축으로 해서 찾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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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지붕 뜯기의 믿음, 그리고 인자의 사죄 권세(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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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내의 배경

사건 은 가버나움 집에서 발생했다(1). 누구의 집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이 잡히고 난 뒤에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사셨다고 한다(4:13).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장소로서 갈릴리 사역의 본부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1:21). 그러니 여기서 이라 함은 예수 자신의 집일 수 있고, 아니면 시몬의 집을 가정할 수도 있다(1:29).

그 동안 한적한 곳에 피신했다가 본거지로 돌아온 격이었다. 역시 비집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예수는 확실히 사역 초기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인기인이었다. 많은 무리를 몰고 다녔고 그것이 일종의 권력으로서의 영향력을 형성했다. 당시의 인기인 예수를 잠시 상상해 본다. 사람들은 인기인이 되었을 때 그 인기의 노예가 된다. 어떤 재능이 있어 그것이 인기를 몰고 오면 재능 자체와 그것을 통해 하는 일보다 재능이 가져다 준 인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면서 하늘이 준 선물과 그 선물의 역할보다는 인기를 관리하느라고 인기의 노예가 된다. 인기, 즉 대중의 인정이란 것은 턱없이 허무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말년을 잠깐 미리 내다보아도 곧 확인된다.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 이 극성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아마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폭도들의 일부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본연에 침착하게 집중하시는 것 같다. 모인 사람들 한 가운데 놓여 찬찬히 말씀을 가르치셨다(2). 개역 성경에서 도()라고 한 것은 헬라 원문에서 그냥 로고스, 즉 말씀이다. 동양의 노장 사상을 기대한다면 억지 해석이 될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아마 138~39절의 일환이었고 그 주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을 것이다(1:15). 예수는 인기에 매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인기의 이유가 되는 내용을 함구시켰고 사람 없는 때와 장소를 찾아 기도하셨다(1:35). 그는 전도를 사람들의 인기에 우선했다(1:37~38).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도 그는 말씀을 전했다. 사건은 이때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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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 뚫기

황당한 일이었다. 이런 기이한 장면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절박하면서도 기발하다. 이 일에 관계한 사람들은 네 명 이상이었다(3). 중풍병자를 메는 일을 한 사람이 넷이었다. 이들에게는 중풍병자를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이웃 병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컸음에 분명하다. 그들은 같이 한 마음이 되어 이 아픈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상황이 그다지 썩 좋지 않다. “안 되겠다. 돌아가자. 이런다고 되겠냐하는 귀찮아하는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절박함과 의지는 더 강렬했다.

결국 네 사람을 시켜 지붕으로 기어올라가 뜯어 구멍을 내기로 결정을 했다. 반대 주장도 있었을 것이다. 남의 지붕을 걷어내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더구나 예수는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이 양반이 놀라서 화라도 내면 어쩔 것인가. 병을 고치기는커녕 되레 저주나 퍼부으면 일이 오히려 악화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열망은 장애 상황을 넘어설 만큼 충분히 강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을 예수께 보여야겠다는 집념을 가졌다. 지붕이야 나중에 문제가 되면 사과하고 고쳐주면 될 것이다. 예수께서 혹 노하시더라도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이해하실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고 결국 지붕을 뜯어내는 일을 결행했다(4).

예수께서는 이 황당한 행위를 즉각 믿음으로 간주했다(4). 신약의 믿음(피스티스)은 여러 가지 함의를 갖고 있다. 우선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경우로 주어진 메시지를 수용하여 지적인 동의를 보이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3:6; 고전 15:2; 10:9~10). 다음으로 충성, 신실 등으로 번역이 되는 바 일관성이 있어 신뢰할 만한 특성을 뜻한다(5:22, 1:5; 16:26; 11). 그런가 하면 기적과 능력을 일으키는 강한 신념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의 기적의 능력을 누리는 데 필요한 마음의 자세로서 자주 언급되고(9:23~24; 11:22~24)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피스티스를 사용한다(고전 13:13; 살전 1:3). 물론 여기서 강한 신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trust)를 암시한다. 그러다 보니 피스티스는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삶의 총체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피스티스의 풍성’(고후 8:7)이나 피스티스의 증가’(고후 8:7) 또는 피스티스의 부족함’(살전 3:10) 등의 표현은 피스티스를 시작되어 자라고 발전되어 열매를 맺는 쪽으로 진행하는 역동적인 삶의 현상으로 보는 신약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을 주로 믿는 자들’(pisteuvwnte")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는 다소 특이한 점들이 있다. 예수가 본 것은 병자 당사자의 믿음이 아니었다. 영향을 입은 것은 중풍병자였지만 예수께서 가상히 여겨 변화를 일으키는 매개가 된 것은 이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그것은 이웃을 돕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었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지 않고 그 방법을 찾아내는 기발한 지혜와 끈질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의 능력에 대한 신뢰였다.

이 들이 이렇게 기상천외의 일을 벌이면서 중풍병자 친구를 지붕을 통해 들인 것은 예수께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들이 예수의 진정한 정체를 알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했다. 이런 마음의 상태와 행동을 두고 예수는 믿음이라 했다. “인간적 한계와 장애를 넘어서거나 사회적 경계를 초월하는 행위를 동반하는 하나님/예수에 대한 신뢰라고 요약해도 좋을 것이다.1 이러한 믿음에 대한 예수의 반응 또한 그들의 기발한 행위 못지 않게 엉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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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엉뚱한 반응

예수는 종종 엉뚱하다. 엉뚱함으로서 기묘하게 허를 찌르는 예수이시다. 이런 데 예수의 멋이 있다. 재치가 있고 구태의연함을 견디지 못하시는 신선한 사람의 아들이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향하여 하신 말씀은 상황으로 볼 때 대부분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의 행위로 기대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병 고침이었다. 그에 적합한 발언이 기대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나왔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5b). 헬라 원문에서 이 문장은 수동태로 되어있다. 그래서 문장 상 나타나지 않은 죄 사함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보는 주석가들이 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본문의 맥락에서 10절을 감안할 때 여기서 죄를 사하는 존재는 분명히 예수이다(10절 발언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병 고침이 필요한 사람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은 양자가 같은 성격의 일이었기 때문이다(103:3). ‘사유’(赦宥)치유’(治癒)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41:4, 3:22, 14:4). 죄 사함과 병 고침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당연히 양자 모두 하나님 나라 임재의 특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는 것이 신학적 정설인 마당에 굳이 죄 사함을 노골적으로 선언해 버리는 일은 다분히 의도적 도발성을 담고 있었다.

우선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서 인자’(=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조용히 병을 고쳐주었으면 그만이었다. 예수에 대한 기대가 기상천외의 행동을 유발할 정도로 열정적인 순간에 그는 오히려 죄 사함의 중요성을 앞으로 끌어냈다. 도발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것이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우선적 사역이었기 때문이다(10:45). 그는 이사야 53장에 입각한 대속적 죽음을 사역의 핵심에 두고 온 메시아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폭적인 죄 사함의 은혜 안에서 임한다. 문제의 소지가 많은 죄 사함의 선언을 직접적 신유의 이적 이전에 위치시킨 것은 전자가 후자보다 좀더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가까이 놓였기 때문이다. 양자 모두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온전한 인간 복지의 상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양자 모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죄의 전적인 용서가 필요했다.

죄 사함의 선언과 치유의 명령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예수의 질문(9)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일상의 경험적 검증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죄 사함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외적인 검증의 척도가 없다. 눈에 띄어 가늠할 수 있는 아무런 외적 변화가 없을 수 있다. 따라서 말 자체로서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쪽이 쉽다. 그러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효과를 경험적으로 가져오지 못하면 빈 말이 된다. 검증이 분명히 가능하기 때문에 함부로 내어놓을 수가 없다. 당연히 후자가 어려운 발언이다. 예수는 어려운 후자의 발언이 지닌 유효성을 증명함으로써 사실 신학적으로 영혼에게 더 중요한 전자 발언의 유효성을 확증한다. 이 병자를 치료함으로써 예수는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10). 그리고 중풍병자는 예수의 말에 즉각 일어나 자기 병상을 들고 걸어 나갔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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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의사 메시아(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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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들의 역사적 신분을 살펴보니

이 일화에서는 사회적 신분이 이슈가 되고 있다. 분석 자체를 등장인물들의 사회적 신분에 대해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

예 수. 사람들은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이해했다(10:47~48). 이른바 왕족이기는 하지만 몰락 왕가의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조상을 따져보면 다윗이지만 그 흔적은 현재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을 뿐이다(6:3). 부끄러운 직업은 아니었지만 자부할 만한 것 또한 없었다.

레위. 이름이 어째서 레위였을까 아마 레위 지파에 속해서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일단 그렇다고 가정을 해 보자. 레위인들에게는 기업으로 주어진 땅이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 고백하고 살았었다(18:20, 10:9).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이제 세금을 거둬들여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에게 바치는 것이 자신의 기업이 되었다. 당시 세리는 믿지 못할 부류의 사람으로 사회적 천대를 받았다. 여호와의 성례를 책임져야 할 신분에서 남의 눈총을 받는 주변인으로 전락한 사람이다. 신세가 이렇게 바뀔 수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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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발단

사람들이 몰락 왕가의 목수를 많이 따르고 있다. 확인하기도 힘든 옛 족보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있는 현재의 카리스마와 그로 말미암아 우러나오는 자생적 권위 때문이었다.

이 몰락 왕가의 목수가 신세 전락한 레위를 만나게 되었다. 레위의 마음이 복잡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 일을 계속해야만 되는 것인가 아마 세관 2에 앉아있는 동안에 이런 회의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가 다가와 자신을 따라 오라 했다. 그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한 마음이 되어 같이 일을 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이것은 레위에게 하나님의 음성처럼 뇌리를 쳤다. 주저함 없이 따르겠다고 좇아 나섰다.

예수가 세리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말했다는 것은 분명히 특이한 일이었다. 종교적으로 경건의 외양을 유지해 오던 사람들의 상식과 통념을 부수는 행위였다. 이제까지 예수를 통해 발생하는 일을 보건대 그는 범상한 선지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특별한 하나님의 종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선포하며 회개를 요구했다(1:5, 39). 축귀와 신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고 힘을 발휘할만한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드디어 주의 나라가 임하게 되며 예수가 기다리던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메시아라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경건을 위해 노력하던 의인들을 불러모아 힘을 합칠 것이다. 그 나라를 위해 예비하면서 율법에 충실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이나 경건한 제사장, 또는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결집하여 당을 만들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절대로 가까이하거나 수용해서는 안 되는 세리와 전과자 같은 한량들이 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것이 아닌가.

레위는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가 고맙기 그지없어 잔치를 베풀었다(2:15). 물론 그 자리에는 동료 세리들과 비슷하게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부류의 사람들도 동석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자신들을 끼워주는 예수가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세리를 제자로 부르는가 싶더니 함께 어울리기에 민망하고 어색한 도당이 예수와 식사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예수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제자들에게 불평을 했다(16). 이를 전해들은 예수는 한편 맞으면서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말씀을 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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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로서의 메시아

의원이 건강한 자가 아닌 병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말은 유대와 그레코-로마 세계 문헌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격언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의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병자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이유는 없다.

그 러나 이것을 전제로 한 예수 자신의 역할 정의는 메시아를 고대하던 의인들에게는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메시아는 의사와 같다는 것이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정치-군사적 지도자로서 현재의 모순과 질곡을 풀어낼 정의의 사도이어야 했다. 쿰란 공동체 같은 곳에서는 또 한편으로 아론의 메시아즉 순결한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기도 했다. 의사로서의 메시아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개념이었다. 물론 구약의 선지서를 조금만 주의 깊게 읽으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치료하겠다는 메시지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19:22; 53:5, 8:2; 30:17, 6:1; 14:5, 11:16 등 다수). 깨어진 옛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들은 고침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의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분명히 메시아는 의인들과 같이 일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의인들을 모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메시아가 오셨을 때 당연하게 기대되던 소망이었다. 속담을 그대로 유추하면 예수에게는 의인이 필요 없고 의인들은 예수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칭찬인가 비아냥인가 분명히 칭찬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마음을 열면 이것이 예수가 부르는 대상에 제한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명임을 곧 알아챌 것이다. 의인을 배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온 백성의 회복에 있지 의인들에 제한된 동아리를 만드는 것에 있지 않다는 진리의 표방이었다. 의인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배제시킨 주변인과 하층민까지 넉넉하게 포괄하는 하나님 은혜의 설파가 의사 메시아의 사명이었다.

메시아 예수는 의인과 같이 거사를 일으킬 두목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메시아 예수는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한 희생의 대속제물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일부 열성분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끝까지 견뎌온 율법의 의인들이 의기투합하여 분명한 선을 긋는 제한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훨씬 더 광범위한 차원의 모든 사람을 품는 그런 나라였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세리와 죄인까지 용납하는 하나님의 광대하신 은혜가 적용되었다.

이들을 어떻게 포함시킬 수 있을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엶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예수는 그들의 세속적 왕초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됨으로써 그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주는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다(10:45). 그러니까 나는 죄인들을 위하여 온 의사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의사로 왔지 의혈단의 큰 형님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고침을 받아야 할 세리와 죄인들이 의사와 같이 식사하는 것 갖고 뭐라 하지 말라. 당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여 내가 필요 없다고 느끼면 할 수 없다. 난 여전히 세리 및 죄인들과 같이 어울려야만 되겠다. 죽일 터이면 죽여라(3:6 참고). 그러나 내가 바로 그렇게 죽으러 왔다’(10:45).

예수는 지금도 죄인을 부르려고 죄인들 가운데 계신다. 예수는 지금도 세리를 부르려고 세리들 가운데 계신다. 그래서 여전히 오해를 받는다. 말끔하고 세련된 종교지도자들에게 오해를 받는다. 권력자들에게도 오해를 받는다. 똑똑하고 잘났으며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예수를 따라야 한다. 교회는 너무 거룩하여 하나님보다 더 거룩해진 것은 혹시 아닐까 교회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온상이 되어있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열려야 한다. 품어야 한다. 문화적으로도 바뀌어야 한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찾기에 불편하지 않은 장소와 공간, 분위기를 갖추어야 한다. 교회는 병자들을 위한 의사의 집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아픈 사람들을 고치기 위한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불편하고 힘이 든다. 어색하고 버겁다. 그래도 그쪽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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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복음의 새 술을 담을 기독교를 향해

(2:18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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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배경

본 문에서 이념적 긴장의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금식’(禁食)이다. 구약에서 금식이 요구되는 경우는 연중 단 일회로서 속죄일(贖罪日) 뿐이다(20:10; 16:1~34; 23:26~32; 35:9; 29:9~11). 이 날은 음식을 금하여 몸과 영혼에 고통을 가하면서 회개하여 죄를 씻고 속죄제를 올린다. 따라서 금식의 성서적 의미는 참회를 위한 고행과 그를 통한 죄로부터의 정결이다. 그래서 율법으로 요구된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참회가 요구될 때(삼상 7:6; 3:5), 위기에 처해 간절하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할 때(삼하 12:21~23; 4:16) 사람들은 금식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과 소원을 표현했다. 그 외 애도(哀悼)를 위한 금식도 있었다(삼상 31:13).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며 하나님께 구하는 금식이 일년에 네 번 있었다(8:19).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금식하는 사람들은 (, 죽음, 또는 어려움 등으로 인한) 마음의 슬픔을 표현한다.

1세기를 전후해서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한 주에 두 번씩 자발적인 금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18:12; 디다케 8.1; 미쉬나 타하니트 1.4~5 ). 그 관행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개인과 세상의 죄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담은 경건과 헌신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6:16; 18:12).

일반 대중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관습은 당시 경건을 추구하던 사람들에 의해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규칙적인 금식은 회개의 전파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구하는 의미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예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던 마가 공동체도 규칙적인 금식을 실행했다는 것이 20절에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금식을 놓고 왈가왈부했던 종교적 갈등은 마가 공동체의 것이 아니라 예수 당시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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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아 운동의 축제적 성격

이때는 아마, 특별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바리새인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슷하게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하는 종교적 무리로 이해되었을 예수와 그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이들이 예수께로 와서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18b). 당시에 금식을 하고 있던 이들이 힐난조로 던진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금식은 율법의 규정을 넘어서 좀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자발적인 열심을 반영하는 관행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발성이 어느새 고정된 전통의 의식(儀式)으로 전환되어 다른 이들의 경건과 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어있는 것을 본다. 저들은 이미 금식을 수행하는 동기와 목적에 충실하기보다는 그것 자체의 준수에 많은 것을 걸어놓고 있는 듯하다. 예수는 그렇게 본래의 취지를 망각하여 수단이 목적으로 전화(轉化)된 인간의 전통에 별반 심각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왜곡하고 경건의 근본정신을 화석화한 인간의 전통이라면 오히려 벗어버려야 마땅하다. 더구나 메시아 예수의 때는 금식의 계절이 아니었다.

예수는 지상에 있을 때 금식과 금욕의 사람으로 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먹보술꾼이라고 비난을 받을 정도로 잔치와 축제의 메시아였다(11:19; 7:34).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의 잔치를 수반하는 환희와 행복의 사건으로 비유된다. 이곳 본문에서는 예수가 즐거운 혼인잔치의 신랑으로 제시된다(19~20). 유대의 혼인잔치는 음악과 야단 법석한 행렬이 이어지는 기쁨과 축제의 현장이었다(마카비상 9:37 이하를 보라). 예수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하는 사건은 그 자체로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는 혼인잔치의 기간이다. 예수의 존재는 인간의 모든 암울한 억제를 타파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강력한 진입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분명히 회개를 외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1:15). 죄를 위한 참회와 가슴을 치는 애통함,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의 결단이 수반되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회개로 시작한 그 나라의 삶 자체가 침침한 억제와 구속(拘束)의 소극적 퇴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회개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활력이 넘치는 새로운 창조’(고후 5:17; 6:15). 신랑과 같이 있는 혼인잔치에서 인상을 찡그리며 금식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신랑의 사람들’(’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19, 개역성경의 혼인집 손님들”)의 모습은 하나님나라의 창조적 활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왜곡된 종교인들에 대한 패로디(parody)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슬픔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어두움과 그늘에 대한 부정은 자못 강경하다. ‘금식하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다. 오히려 분명하게 금식할 수 없다”(19, ‘우 뒤나타이 네스튜에인’)고 한다. 기뻐해야 한다. 그렇듯이 예수 운동은 창조성, 역동성, 축제성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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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부대가 필요하다

금식의 관행으로 시작된 논쟁은 두 비유로 이어진다. 첫 번째 비유는 낡은 옷의 헤어진 곳을 깁기 위해 새 천을 대면 그것이 낡은 옷 자체를 끌어당겨 완전히 망가뜨린다는 내용이다(21). 이 비유 상으로 볼 때, 헌 옷을 구제하는 길은 헌 옷감을 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초점은 헌 옷을 살리는 데 있지 않다. 새 천으로 상징되는 예수의 새 질서가 옛 질서에 붙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데 그 요점이 있다.

두 번째 비유도 같은 사실을 지적한다. 예수로 인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는 새 포도주이기 때문에 옛 가죽부대로 상징되는 옛 유대교가 그 혁신적인 역동성을 담지 못한다. 새 포도주를 담으려 했던 옛 가죽부대는 터져서 자신을 손상하고 만다. 두 비유 모두 새 질서를 견디지 못하여 헤어짐이 심해지거나(21), ‘터져 망가지는’(22) () 유대교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까지는 두 비유가 같은 내용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은 두 번째 비유를 마감하면서 예수운동에 새 질서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아포리즘을 더한다. 이것은 첫 번째 비유와는 상관이 없다. 개역성경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로 번역했으나 원문에서는 동사가 없이 형용사와 명사가 반복되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가 되어 운율이 있는 슬로건이 된다. 새 질서와 새 제도를 필요로 하는 예수 운동의 방향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혁신성을 지닌 예수 운동은 유대교라는 구제도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새 포도주요 새 천인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유대교라는 옛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새 부대로 상징되는 교회그리스도교라는 새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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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인간을 위한 안식일과 그 주인 인자 (2: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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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의 배경

안 식일 규정은 당시 유대인들을 구분하는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였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에 끝나는 안식일 준수로 인해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또 한 가지 드러나는 관행은 지중해 연안에서 흔하게 단백질 섭취의 수단이 되는 돼지를 기피하는 것이었다).

본래 안식일은 단어 뜻 그대로를 살리자면 쉬는 날이다. 히브리 동사 샤바트쉰다는 뜻이다. 안식일의 가장 오래된 기원은 창조에 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2:3). ‘때문에 생긴 날이 안식일임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이 일곱째 날을 축복하셨다. 복 있는 날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이 날은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날이 아니라 복이 넘치는 날이다. 복이 넘치는 날이 되어야만 한다. ‘거룩하게 하다는 말의 히브리 동사(‘카다쉬’)는 본래 구별하여 분리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니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특별히 구별해 놓은 날이다. 그 날에 복을 주심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함일까

이에 대해 브루스(F. F. Bruce)의 설명 논리가 호소력이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 휴식을 필요로 하실까 하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휴식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안식일 제정의 목적은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휴식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휴식을 위해 복을 주셔서 구별한 날이다. 안식일은 허구한 날 쉬고 놀 수 있는 유한계급(有閑階級)을 위해 복을 준 날도 아니다. , 간접으로 강요된 일의 부담과 압박으로 지치고 지칠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을 살인적 피곤으로부터 구원하는 합법적인 보호장치다(5:12~14).

기본 정신은 분명하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날에게 복을 준다는 것은 그 날로 인해 혜택을 입는 인간에게 복을 준다는 뜻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날이다. 한 랍비는 출애굽기 3114절에 주석을 달아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출애굽기 31:14에 대한 메킬타). 그러니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2:27) 선언하신 예수의 말씀에 괜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해 할 것이 하나도 없다. 말씀 그대로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노동의 과로에서 벗어나 쉴 수 있도록 사람을 위하여 제정되어 거룩하게 구별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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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안식일과 다윗의 진설병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으로 시비가 붙었다(2:23). 이번에는 민감한 안식일 문제가 걸려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량으로 추수를 한 것도 아니고 지나가다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게 정말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별반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4 예수는 오히려 안식일과 별 상관이 없는 듯한 다윗의 이야기(삼상 21:1~6)5 끄집어내어 자신이 한 일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아 그 행위를 정당화했다.

양자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유사점을 정확하게 맞추려다 나오는 학술적 논란은 거의 무익하다. 마가복음의 맥락에서 예수 말씀의 의도는 비교적 명확하다. 다윗은 율법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행위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차기 왕으로 사울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율법에 문제 소지가 있는 일이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먹였고 이에 대해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예수의 제자들도 율법 이탈의 소지가 있는 행위를 했다. 안식일의 전통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정말 안식일 규정에 위배되는지를 따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따져 논리적 우세를 점하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에게 있어 그런 논쟁은 땀 흘려 수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다윗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존재임을 확인할 뿐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28).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약간의 언어유희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창세기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안식일 규정의 주된 관심이 인간이었음을 확인한다(위의 배경을 참고하라). 그러면서 동시에 안식일 규정 해석의 주권이 인자인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한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여기서 인자를 문자 뜻 그대로 풀어 쓰면 사람의 아들이다. 당시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사람의 아들은 곧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면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고의적 애매함을 이용한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인자라는 표현이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단수처럼 쓰였기 때문에 예수가 안식일의 주인이고 그래서 안식일 해석에 대한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인간 존엄성의 우위를 정의하는 함의를 품고 있기도 한다. 만일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고 문장의 의미상 신학적 오류를 지적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면 그것에는 크게 하자될 것이 없다.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인자예수가 안식일의 주인이라 말하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진리를 재차 확인하는 반복의 효과를 갖는다. 예수 어법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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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대속적 죽음을 향하여

이런 대전제를 깔아놓고 이제 안식일의 행위에 대한 이슈로 전이한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리고 안식일 규정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보다(또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신 사람이다(시편 8). 안식일은 어떤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인가

예 수의 행위가 당시로서는 도발적이었다.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 당대의 율법학자들에게는 일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관행을 예수도 알고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3:2). 이미 제자들의 밀 이삭 사건을 통해 예수는 당시로서는 도발적인 안식일 해석을 내놓았다. 일부 예수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과연 그가 안식일에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칠 것인지를 호전적인 눈길로 지켜보았다. 예수가 손 마른 사람을 불러 일으켜 세웠다(3:3). 긴장이 감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안식일 준수에 어긋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데 온통 마음을 쏟고 있었다. 저들의 이슈는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게 을 구성하느냐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한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들이 생각하던 선악의 기준에 혼동이 왔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의 머리 속에는 안식일에 을 하는 것이 악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할 것인지 아니면 악을 행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당연히 선을 행해야 된다. 그런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것 참 묘연하다. 또한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어보니 당연히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잘못된 행태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이들에게 이 질문은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 성격의 것이었다.

예 수는 그들이 안식일의 율법주의적 준수를 고집하면 악행 또는 생명살상에 찬성하는 것이 되게끔 질문을 던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예수의 생각에 동의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는 아랑곳없이 손 마른 자를 권능으로 치료한다(3:5). 바리새인들과 권력자들 마음속에는 깊은 분노가 쓴 뿌리처럼 헤집고 내려앉았다. “이대로 살려둘 수 없다결국 예수는 자신이 온 목적인 대속적 죽음(10:45)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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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obert A. Guelich, Mark 18:26, WBC

(Dallas: Word Books, 1989), 85.

2. 로마 제국의 징세관은 기사 계급에 속한 관리였다. 복음서

에서 말하는 텔로네스’(세리)는 지방 토호의 관세를 거두

어주는 하급관리였을 것이다. 레위의 경우 갈릴리의 분봉왕

인 헤롯 안티파스에게 고용되었을 것이다.

3. 이 단원은 필자가 2001 예배와 강단을 위해 집필한 내용

을 약간 변경한 것이다. 같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기 때문에

크게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4. 율법에 따르면, 이삭을 자른 것이 낫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하자가 없다(23:25).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분

명히 손으로 이삭을 잘라 비비어 먹은 것으로 되어있다(

6:1).

5. 사무엘상 21:19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아히멜렉이다.

러나 마가의 예수는 그의 아들 아비아달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정학하게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아비아달은 아히

멜렉의 아들로서 뒤이어지는 역사 기록에서 자주 등장하면

서 아버지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