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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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가복음의 전체 틀 짓기에 있어서 지리적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복음서를 관통하는 줄이 된다: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그 지경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간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안팎에서 시작하셨고(1:14~8:26), 결국 수난 받아야 할 도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11~16장). 이 관점의 특징은 갈릴리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1 그것은 또 동시에 유대적, 예루살렘적 관점에 대립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갈릴리는 예수께서 복음 선포를 시작한 곳이고, 제자들을 얻은 곳이며, 기적을 행한 곳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주님은 그저 단 한번 기적을 행하셨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심판을 생각나게 하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신 기적이었다(11:12~14).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14:28; 16:7).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계시를 거절했다.2 이러한 대립적 관점은 마가복음의 전체를 관통하여, 하나의 갈등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우리가 다룰 3장 7~35절에 앞서 나오는, 소위 갈릴리 논쟁(2:1~3:6) 전체를 압도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다름 아닌 갈릴리 산 위에서 부르신 자들이고(13절),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자들이다(22절). 그러나 이 단락 전체는 단지 그러한 대립의 외형만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라, 내용을 특징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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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군중에서 제자로의 길(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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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앞서 묘사된 예수님의 사역, 무엇보다 치유사역을 요약하고 새로운 장면으로 넘어가는 다리역할을 한다. 우선 마가는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은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메와 요단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왔으나, 대다수가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보도한다(7~8절). 여기서 예수님의 소문에 관한한, 유대와 예루살렘은 그냥 여타의 다른 갈릴리 주변의 지역이요 도시 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유대교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마가는 다시금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갈릴리 중심의 관점을 관철하고 있다.
여기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인상적인 묘사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니라”(7절)
이 묘사에서 나타나는 ‘따르다/좇다’(akolutein)는 제자도를 그림 언어적으로 묘사하는 핵심어로 마가복음과 그 신학을 관통한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장면이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첫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 나오는 ‘제자의 길’에로의 부름이다(8:27~3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8:34).
마가는 예수님의 그 언어를 그대로 자신의 상황묘사에 사용한다. 무리가 예수님을 좇는 마가의 이 그림언어에서 우리는 분명 예수님의 요구의 외연(外延)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외연에만 머물지 않는다.
많 은 사람들(무리)은 예수님의 사역을 넓게 둘러싸고 있으며, 제자들은 좀 더 가까이서 그것을 경험한다.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듣고 그에게 나아왔다”(3:8)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모른다. 그 일이 무엇인지, 혹은 그 일을 행하는 이가 누구인지. 비록 그들이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경험할지라도, 아니 그래서 고침을 받을지라도(9절), 아직은 그것을 모른다. 엉뚱하게 그들을 그렇게 제어하고 있는 실체인 사탄은 그것을 안다: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1절).
이 ‘인식’은 분명 진실이다. 예수님의 엄중한 경계는 그 인식이 사실이란 것을 반증한다. 단지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아직은 드러내지 않으시려 할 뿐이다(12절). 분명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기적의 체험만이 아니라, 그 기적의 의미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이 ‘인식’은 분명 고백적인 ‘인식’이다. 군중의 따름은 분명 그런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따름이라면, 참다운 제자로의 길은 경험과 ‘인식’이 서로가 통합되어 있다: 예수 경험은 모든 인간을 고백적인 인식으로 인도하고, 그 인식은 참다운 제자의 길로 인간을 초대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 군중과 제자는 절대적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제자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4:35; cf. 아래).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제자들조차도 그러한 경험과 인식이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장면 이전까지는 제자들 역시 그러한 고백적인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사탄을 내어 쫓는 권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3:14). 베드로뿐만 아니라, 제자들 전체가 고백적 ‘인식’에로 초대되고, 동시에 새로운 따름에의 길로 초대된다. 그 길은 다름 아닌 고난에로의 길이다(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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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도와 제자(3: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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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기서 우리는 사도와 제자들이란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는 분명 예수님의 제자 “열 둘”을 거명한다(막 3:16~19; 마 10:1~4; 눅 6:12~16). 서방계 사본은 이 열 둘에 “제자들”(matetas)을 넣어 읽으므로 그 의미를 명확히 한다(14절). 이것은 예수님 주위에 더 많은 제자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몇몇 중요한 사본들(시내사본, 바티칸사본 등)은 여기에 덧붙여졌던 “사도”(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칭했던 기록을 전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제자들이란 분명 예수님에 대한 경험과 인식을 통해, 더 깊고 깊은 곳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일차적으로 예수께서 원하셔서 부르시고, 그 부름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른 자들이다(3:13). 굳이 구별을 한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 일반, 그러니까 선포와 치유 이적에 응답한 자들이라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구체적인 요구로서의 부름에 응답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나 사도들 모두는 언제나 ‘부름’과 ‘따름’의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부름’없는 ‘따름’이 그렇듯이, ‘따름’없는 ‘부름’ 역시 공허하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막 9:42//마18:6 cf. 눅 17:3)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사도란 말은 아주 적게 사용되고 있다(막 3:14; 6:30; 마 10:2). 반면 누가복음은 제자들이란 말도 사용하지만 사도란 용어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마가와 마태에게서 사도란 말은 분명 제자란 용어에 의해 거의 대치되고 있을 정도로 줄어든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것은 있다. 먼저, 12제자들을 지칭하는 ‘사도’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명을 예표(豫表) 한다: 예수께서는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부르시므로 하나님의 보내심의 일을 성취하신다.
더 나아가, 사도란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갖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그와 함께 했던 자들이다(행 1:21). 분명 예수께서는 그들을 “자기와 함께 하시려”(14절b) 하셨다.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험하고 아는 자들이나, 12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들”이다. 그럼 제자들이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던 자들일 수도 있단 말인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나사렛인”(마 2:23; 행 24:5)으로 불렀을 때, 이들이 모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들은 아니었다.3
그들 모두가 사도는 아니지만,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는 제자들이었다. 사도들은 그 언젠가, 지상의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예수 체험으로 제자가 된다: 그들은 오직 부활의 주를 경험함으로, 항상 임마누엘로 ‘주님과 함께’하고 있는 자들이다.
더 나아가 사도들에게는 선포사역과 치유와 사탄을 추방하는 사역이 위임된다: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14c~15절).
이 구절은 마가복음 6장 7~13절에 나오는 열두 제자의 선교파송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이 선교파송에서도 사탄을 추방하는 권세(6:7)와 선포(6:13)가 그들의 사역의 핵심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 본문을 선교파송의 단락인 6장 7~13절로부터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12제자 파송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선포와 치유사역을 이어가는 데 있다.
예 수님의 사역의 요약문인 1장 38~39절은 제자들에게 위임된 사역으로 6장 6, 13절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12제자들의 사역은, 회개를 선포하는 것(막 1:15)과 권세로 사탄을 내어 쫓는 것(1:21. 27; 2:10)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사도들은 그들의 사역의 내용에 있어서만이 예수님의 사역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의 스타일도 이어간다: 인자가 머물 곳이 없어진 것과 같이(마 8:20//눅 9:58), 그들은 길을 떠나야 했다(6:8). 그것은 가족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고, 여행을 위한 가장 간단한 차림 이외에는 허락되지 않았다(6:8b~9). 그리고 그들은 공동체의 숙식제공에 자신들의 생활을 의탁해야 한다(6:10f). 초기교회는 분명 이러한 예수의 삶의 스타일을 전수했고, 그것은 분명 특별한 부름을 받은 소위 ‘방랑선교사들’의 삶의 스타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울이 이 ‘의무’를 ‘특권’으로 받아들이고 자비량 선교사적 삶을 살아갔다는 사실은, 고린도 교회의 적대자들이 그가 사도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데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4 이것은 사도성에 있어서는 사역의 내용뿐만이 아니라,형태에 있어서도 예수를 따라야 함이 관철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예수께로부터 유래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했던 자들이며,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며,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가진 자들이다.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파송된 공동체의 위임은 오직 그들의 경험과 사명과 말씀에 잇대어 질 때만 예수님의 지상생애에 뿌리를 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마가복음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금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공동체에 예수님의 지상생애라는 ‘그 때’를 기억시켜주는 제자들이다.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기독교의 처음을 본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회고라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사도는 교회의 사도성을 지킨다. 사도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와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와의 결합이 끊어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5 이미 초대 교회는 이 결합의 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사도들이 모두 사멸해 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리어 사도들의 죽음 이후에 사도적 카리스마가 돈을 탐하는 인간적 권위에 의해 대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다케’라는 문서를 사용했던 시리아의 지역공동체는 방랑선교사들의 ‘진실성’을 시험하고서야 그들을 영접하게 할 정도였다.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사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자만이 존재한다. 다만 지금도 사도성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부름’ 받은 자들이, 그들의 선포와 치유 그리고 삶의 형태에서 얼마나 예수님의 사역 전체와 결합되어 있는가라는 것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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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적대자들에 대한 한계 짓기(3: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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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첫 단락에서 군중이 예수 사역의 넓은 울타리로, 그리고 그 핵심적 위치에서 12제자들이 묘사되었다면, 이 단락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들과 반대편에 선 적대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대변하는 율법학자들이다(3:22). 여기서 다시 한번 이루어진 장소 이동은 의미심장하다. 예수께서는 바닷가에서 군중을 대하신다(7절). 그리고는 산에 오르셔서 12제자들만을 부르신다(13절). 이제 예수께서는 집으로 들어가신다(20절). 여기서 집이라는 장소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외인들과 구별하여 가르치신 은밀한 곳을 의미한다(9:28. 33; 10:10 etc.). 독자들은 집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공동체와 외인들을 구별하여 들려주는 마가복음의 이야기 세계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 단락은 내용적 전개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장면은 식사할 겨를도 없을 만큼 되어버린 예수님의 사역의 성공(20절)에 대한 폄하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가 미쳤다는 비난으로 그 성공을 잠재우려 한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 들렸다는 것도 친족들이 들은 잘못된 소문의 한 유형일 수 있다.
그러나 논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인 사탄을 내어쫓는 “권세”(exousia)를 향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힘을 빌어서 사탄을 내쫓는 다는 것이다(22절). 예수님은 이것을 반박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격한다. 우선 예수님은 서로 분쟁하는 나라와 가정에 대한 비유(23~26절)를 통해 적대자들의 생각이 자기 모순적인 것임을 밝히신다. 분쟁하는 나라는 무너진다. 여기에서 사탄의 나라의 건재는 기정사실화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외부적 힘의 근원이 제시된다.
즉, 사탄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사역은 어떤 세계 내적인 갈등이나 반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근원이 다른 세력, 즉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싸움이다(27절). 이런 의미에서 누가복음은 동일한 단락에 결정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첨부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12:28).
더 나아가서는 마가복음 뿐만 아니라, 누가나 마태복음서도 여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심판어록을 가져온다: 예수님에 대한 그러한 비난은 성령을 모독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28~29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성령의 사역과 연관시키는 것은 부활절 이후 초대교회의 선교사들에게서 일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공동체 내에서 치유와 이적 사탄을 쫓아냄은 성령의 역사로 인정될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기 선교사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는 의미에서 동일한 사역을 행했고, 그것의 정당성을 주장했을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보는 유대교의 시선이다. 유대교는 이렇게 활성화되고 있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하나의 카리스마적 치유종파들이 확산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기를 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는 그러한 유대교에게 심판을 단언한다: 예수님의 사역과 뿌리를 같이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사역을 이와 같이 거절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근원을 둔 기독교는 이렇게 유대교와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그 경계표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고백이 존재한다: 쫓겨나는 사탄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3:11).
적 (敵)은 그의 적(敵)을 가장 잘 안다. 적의 생각은 이미 드러났다. 생각은 인간의 중심을 그리고 영적인 실존을 드러낸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의 적대자의 자리에 서 있다. 생각과 인격과 영의 중심에서 그들은 예수의 선포와 치유, 축귀사역을 거절한다. 이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나타남 자체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 사역의 확장사인 기독교의 선교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성찰해야 한다: 무엇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인가 그리고 영적인 권세의 충돌이라는 소위 ‘power encounter’에서 우리는 인간과 종교 그리고 문화를 적으로, 사탄으로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참으로 무엇이 성령을 훼방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가 이러한 세부적인 규정은 유대교에서 결의론적(決疑論的: casuistical) 성격으로 굳어졌고, 초기 기독교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6
오늘날도 그것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이어가는 공동체의 생각과 인격과 영의 중심이 만들어 나가게 된다. 건강한 신학은 무엇일까 영적인 강건함은 무엇일까 새것은 옛것의 한계 내에 갇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와 가죽은 모두 버리게 된다. 새것은 옛것의 한계를 알고, 한계를 지음으로써 그것을 넘어갈 수 있고, 그럴 때 새것은 참된 희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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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수님의 새 가족: 참된 제자들(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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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적대자들과의 논쟁이 전개되기에 앞서 먼저 나온 집이라는 상황묘사는 31절부터 시작되는 ‘예수님 새 가족’에 관한 이야기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또 이 단락에서 5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31. 32. 33. 34. 35절)도 분명 “누가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냐” 라는 주제를 부각시킨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군중과 제자에 관한 섬세한 상황묘사를 볼 수 있다. 첫째와 셋째 단락에서 모여들었던 군중들은 이제 집에 들어와 예수님의 주위에 앉아있다(32절). 여기서 마가는 공동체와 외인들을 역설적으로 묘사한다: 예수의 친족들이라고 번역된 “예수님 곁에 있는 자들”(21절)이 여기서는 “외인들”로 밖에 서 있다(31절). 그들은 율법학자들처럼 공격적으로 예수님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군중들처럼 예수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예수의 사역을 미쳤다고 비난하는 쪽에 속한다(21절).
반면 군중들은 집안에 앉아있다. 이들은 예수님과 그의 육신의 가족을 연결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가까운 청중이 되어있다. 문제는 지금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이들의 선입견이다: 비록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이 그를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닌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을 아시듯이 그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초점은 21절의 “친족들”에서 이제 그것이 섬세하게 변형된 표현 34a절의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 맞추어진다:
“보라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34b절).
마 가는 분명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가족’을 집이라는 장소적 구조와 육신의 가족들이라는 은유를 통해 묘사한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가족’을 단지 하나의 이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집과 가족을 떠나고, 소유를 포기한 자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실제로 그것을 백 배나 돌려 받게 된다(9:29f)는 약속은 이렇게 실현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가족을 잃는 대신, 새로운 ‘예수 가족’을 맞이한다. 비록 그러한 언약이 방랑하는 선교사들에게 훨씬 더 적합했다 할지라도, 공동체의 구성원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는 그 근본정신과 삶의 스타일은 모든 예수가족에게 유효했다. 예수께서 가져온 복된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을 받아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분명 육신적 가족이라는 인간의 근본 테두리는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인간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새로운 형제자매의 공동체가 세워진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이 예수를 따르는 것인가 군중으로서 예수의 청중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부름으로 선별된 ‘열둘’이 되는 것인가 예수께서 의도하신 새로운 형제 자매적 공동체의 구성원은 분명 이 두 그룹, 그러니까 군중과 사도의 긴장 가운데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은 제자들이다. 예수에 대한 경험과 인식으로 더욱 깊은 곳으로 예수를 따르는 그들 말이다.
그 럼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이 단락의 마지막은 “예수를 따르다”라는 것을 분명 이렇게 정의했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 그가 나의 형제요, 자매며 어머니이다”(3:35). 율법을 확정하는 진술의 형태로 표현된 이 말은, 분명 누가 제자인가를 확정한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이를 통해 이제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는 12제자를 넘어 더 넓은 청중으로 확산된다. 그 공동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심으로, 아버지의 뜻이 지배되는 곳이다. 그래서 주기도가 그들의 평생의 실천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하는 곳이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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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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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단락을 통해서 마가복음을 관통하고 있는 갈릴리적 관점이 예루살렘 유대적 관점과 단순히 외적인 구조로 대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대립은 오히려 내적인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와 팔레스타인 사회의 주변에서 시작된,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가져온 역동성의 산물이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사역의 성공과 함께 첨예화되고 있는 적대자들의 긴장이 용해되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매우 구체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행하셨던 그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계속할 제자 공동체를 세우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출생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을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정의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의 뜻을 땅 위에 실현 해 나가는 형제 자매적 공동체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이 오직 예수를 따르는 것이기를 소망했다.
제자됨이란, 예수님을 경험하고 앎으로 더 깊은 곳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동시에 제자됨이란 교회가 예수님과 결합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물으며, 자신들의 한계를 끊임없이 돌파해 나아가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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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1. 반면 누가는 분명 예루살렘 중심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현현(눅 24:50~53)과 예수님의 선교명령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시작된다(눅24:47; 행 1:8). 그리고 교회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행 2:5).
2. P. Vielhauer, Geschichte der Urchristlichen Literatur,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rk 1975/1985, 340.
3. 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aeus I, EKK 1/I-IV (Neukirchen-Vluyen: Neukirchener Verlag, 1985ff), 131f.
4. G. Theissen, 「사도적 정당성과 생계」 in: G. Theissen, 박명수 역, 「원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86, 274(각주 53).
5. 마태복음에서도 이러한 사상은 더욱 강하게 부각될 수 있다:cf. U. Luz, Die Jesusgescichte des Matthaeus, 박정수 역, 「마태의 예수이야기」,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2 근간.
6. G. F. Moore, Judaism in the First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I, Cambridge 1927, 465-467; J. Gnilka, Das Evangelium nach Markus, EKK 2/I,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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