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5장 연구, 거라사 지역의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

에반젤(복음) 2019. 8. 17. 13:59


마가복음 5장은 거라사 군대 귀신들렸던 청년의 사건(1~20),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기적적인 치유사건(24b~34)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린 사건(21~24a, 35~43)으로 구성되었다.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의 기적적인 치유의 사건은 독립적으로 취급되지 않고 야이로의 딸 회생 사건 사이의 샌드위치 구조(ABA)속에 삽입되었다. 이들 세 가지 사건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세상의 어떠한 권세와 능력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사건들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저자가 이들 사건을 어떠한 문맥에서 제시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세부적인 검토를 통하여 저자가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를 파악할 때 본 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적용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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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의 문맥적인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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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 기록된 세 기적사건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8:22~56)에서는 바로 앞에 기록된 풍랑사건과 함께 동일한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풍랑사건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바로 다음에 유사하게 등장한다. 반면 이와는 다르게 마태복음에서 풍랑사건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전혀 연결되지 않고 두 제자도의 교훈(8:18~22)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군대귀신 사건(8:28~34), 즉 후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다른 문맥에 기록된 들것에 실려온 중풍병자의 치유가 삽입되었다. 이 사건의 기록 후에 혈루병 걸린 여인의 치유사건과 야이로의 딸의 회상사건이 나온다. 이 같은 사실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세 사건을 비슷한 맥락에서 제시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은 세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1 그렇다고 해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이 세 사건을 한결같이 동일한 관점에서 기록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2

우리의 초점은 마가복음 5장에 있으므로 저자가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5장이 위치한 문맥은 제자들의 선택을 다루는 기사(3:13~19)로부터 이들 제자들의 사명을 다루는 기사(6:7~13)까지 이어진다. 이 두 기록 사이에 들어있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교차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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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제자들의 선택(3:1319)

B: 바알세불 논쟁과 예수님의 배척(3:2035)

C: 하나님 나라에 대한 네 가지 비유

(4:132) 3

D: 많은 비유의 사용과 제자들에게 뜻 설명함(4:3334)

C: 예수님의 네 가지 기적사건

(4:355:43) 4

B: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배척(6:17)

A: 제자들의 사명(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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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의 각 항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본 글의 초점에 따라 5장과 관련된 부분을 보자. 예수께서 4장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신 네 가지 비유(C)는 그가 행하신 네 가지 기적사건(C)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두 단위는 예수께서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것과 비유의 뜻을 그의 제자들에게만 풀어 설명하셨다는 저자의 논평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같은 연결은 우연한 배열의 결과가 아니라, 저자가 그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배열한 결과이다.

이러한 이해를 지지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보자. 첫째로, 저자는 예수께서 네 비유를 바다에서 하신 것과 같이 예수께서 행하신 네 기적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바다와 연결한다. 저자만 522절에서 예수님이 바닷가에 계시더니라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연결을 더욱 강화시킨다.

둘째로, 저자가 독특하게 사용하고 있는 항목(D)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청각적 교훈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각적 교훈(네 가지 기적사건)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라는 설명(4:34)은 곧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네 가지 기적 사건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 속에 남긴 비밀이 그가 행하신 네 가지 기적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 째로,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것과 네 가지 기적을 행하신 것은 시간적으로 긴밀하게 한 날로 연결되어 있다. 435절에 기록된 그날 저물 때에란 부사구는 마가복음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표현이다. 문맥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날(ejn ejkeivnh/ th/" hJmevra/)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 비밀에 관하여 네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날이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 비밀에 관하여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바로 그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셨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 날이 61절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세 기적도 동일한 하루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러한 세 가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5장에 기록된 군대귀신 들린 청년의 구원사건, 혈루병 걸린 여인의 기적적인 치유와 야이로의 딸 회생사건은 4장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 비밀을 담고 있는 비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구현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일반적인 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그 뜻에 관한 설명을 들은 제자들은 이들 기적사건들이 비유들 속에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무한한 능력을 나타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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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에 기록된 네 가지 비유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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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는 앞서 5장에 기록된 기적들의 바른 이해가 풍랑사건과 함께 예수님의 비유의 교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5장의 기적들을 바로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하는 네 가지 비유의 핵심을 간단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유 중의 비유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숨겨진 점진적인 도래와 이에 대한 사탄 나라의 끈질긴 저항을 보여 준다. 등불의 비유(21~25)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속에 숨겨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비밀은 은폐되기 위해서 숨겨진 것이 아니라, 드러나기 위해서 숨겨진 것임을 알려 준다. 마가복음에만 독특하게 나오는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26~29)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속에 제시된 하나님 나라의 은밀한 도래의 성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달려 있으며, 그 나라는 갑자기 단회적인 사건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임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겨자씨 비유(30~32) 역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초라한 시작과 엄청난 결과를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이 현재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형편없어 보이지만 때가 되면 엄청난 결과를 수반하게 될 것을 교훈한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러한 교훈들을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보여 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네 가지 기적 사건이다.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4:35~41), 군대귀신 들린 청년의 구원사건(5:1~20)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탄 나라의 세력과 저항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나타남을 보여 준다. 혈루병 걸린 여인의 사건과 야이로의 딸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죽음을 극복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두 여인의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고 그 도래의 현재적인 실현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5장에 기록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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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귀신 들린 청년의 사건(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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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마태복음 8:28~34와 누가복음 8:26~39에 기록되어 있다.5 세 기록 중에서 마가복음의 기록이 가장 길고 상세하다. 세 기록사이에는 상이한 차이점들이 많이 있지만 마가의 기록에서 본 사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네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첫째로, 저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두 기록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실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이것은 귀신들린 사람의 통제불능과 그의 자학성에 관한 것이다(3~5). 귀신들린 사람은 너무나 힘이 세기 때문에 어떠한 사슬로도 그를 결박할 수 없다(3~4). 저자는 이 사실을 3절 하반절과 4절 하반절에서 두 번에 걸쳐 언급한다. 저자는 누구도 그를 쇠사슬로 결박할 수 없다는 두 언급(AA)사이에 그가 여러 번 발을 묶었던 족쇄와 손을 묵었던 쇠사슬을 부러뜨린 사실을 삽입했다(B, 4절 상반절). 이러한 기록 방식을 통하여 저자는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의 세력이 얼마나 무적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힘써 보여 준다. 이 뿐만 아니라, 무적의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서 살면서 고함을 지르며 돌로 자신을 자해하는 행동을 계속해왔다(5).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는 사탄의 세력이 불패(不敗)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준다. 세상의 어떠한 방법과 능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사탄나라의 세력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인의 지방, 곧 이방인들의 땅으로 왔던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사탄의 나라는 사람들 가운데 파괴의 역사를 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풍랑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를 했고, 그곳 거라사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통하여 저항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 나라의 엄청난 세력은 결국 속박되고 만다. 저자는 귀신들린 사람이 결박 불가능한 사실을 강조함으로서 어느 누구도 결박시키지 못하는 강한 자 사탄을 결박시키는 더 강한 자 예수님을 여기서 역력히 드러낸다(3:27).

둘째로, 저자는 귀신 들린 사람을 더러운 영(귀신)” 들린 사람으로 강조한다(2, 8, 13). 본 사건과 관련하여 이 표현은 누가의 기록에 한번 나오고 마태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마가복음에는 이 표현이 11번 나오는 가운데 본 기록에서 무려 세 번이 나온다. 귀신들린 사람이 하는 행동은 모두 그를 사로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의 행동임을 저자는 이 표현을 통해 명확하게 한다. 사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과 결코 협력하거나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는다. 비록 예수님은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로부터 더러운 영(귀신)” 들린 사람으로 고소를 받았으나(3:30),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영(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에 거룩한 영으로 충만한 예수님과 더러운 영(귀신) 사이에는 결코 화해와 협력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전쟁만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들이 말할 때 침묵하게 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1:25, 34; 3:12). 예수님이 이 곳 거라사 땅으로 온 것은 더러운 영(귀신)들린 사람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를 더러운 영에게서 구출하고자 오신 것이다.

이것을 안 더러운 귀신은 그가 사로잡고 있는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대적하고자 그에게 달려나와 그에게 경배하며 굴복하는 척하면서 그에게 저항했던 것이다. 7절에 기록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소서라는 말씀에서 앞부분의 말씀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함으로 그의 의도를 좌절시키고자하는 음모와 방해의 전략이다. 더러운 귀신의 이러한 언사는 예수께서 너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명령하신 후에 한 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8). 더러운 귀신의 간교한 저항은 거룩한 영으로 완전 무장하신 예수님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지금 현재 무너진 것은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세력이다.

셋째로, 사로잡고 있던 사람에게서 추방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던 더러운 귀신들은 거라사 지방에서 추방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다. 저자는 독특하게 돼지의 떼가 약 이천 마리 정도였다고 밝힌다(13). 더러운 영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돼지는 갈릴리 바다를 향하여 비탈길로 돌진하여 모두 몰사하고 만다(13). 돼지 떼 이천 마리가 몰살한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건인가 아니면 그들 속에 들어간 귀신들이 예수님을 대항하여 일으킨 사건인가 아니면 이 둘과는 관계없는 돼지 떼의 갑작스런 발작의 결과인가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은 아주 다양하다.6 지면 관계상 상세한 논의를 생략하고 필자의 입장을 제시하면 돼지 떼의 몰살사건은 예수님께서 암묵적으로 허락하신 귀신들이 죽인 사건이다. 귀신들의 목적은 단지 돼지들을 죽이는데 있지 않고 이 사건을 통하여 이방인들의 땅인 거라사 지방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반격조치이다. 귀신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온 도시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대적하여 그 지역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한다(14~17). 이로서 귀신들이 그 지방에서 추방되지 않고 그 지역의 이방인들을 지배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지속된다(10). 예수님의 외관상 패배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에 잠정적으로 불가피한 일이다.7 그러나 사탄과 그의 귀신세력은 이방인들에 대한 그들의 지배가 머지 않아 종식될 것을 알지 못했다.

넷째로, 저자의 독특한 기록은 주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군대귀신에게서 구원을 받는 사람의 행동 속에 잘 나타난다. 마태는 귀신들에게서 자유를 얻은 두 사람의 반응에 대하여 전혀 기록하지 아니했으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귀신에게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그를 위해 사건을 사람들에게 선포했다고 기록한다. 마가의 기록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사람이 데가볼리에서 이 사실을 선포했다는 것이다(20). 데가볼리의 언급은 누가와 마태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언급은 마가복음의 기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귀신들의 세력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이 데가볼리에서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후기 사역을 준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절에 언급된 데가볼리는 헬라 10도시 연합체에 속한 도시들 전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그 지역에서 인접한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일차적인 후보 도시는 거라사 지방이고, 다른 인근 후보 도시들은 갈릴리 바다에 인접한 히보(Hippo)와 이스르엘 평야의 동남 편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수도 역할을 한 스키토폴리스(벳산)일 것이다.

정확한 지역이 어디든 간에 중요한 사실은 데가볼리에서 귀신들에게서 구원을 받은 사람의 예수 증거 활동은 예수께서 두로 지역에서 돌아오신 후에 데가볼리의 한 지역에서 이방인들에게 하신 사역을 준비했다는 것이다(7:31~8:9).8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변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한 지역에 있을 때에 많은 이방인들이 그에게 몰려온 것은 사실 귀신에서 구출 받은 사람이 왕성하게 예수를 전파한 결과이다. 예수께서 데가볼리의 한 지역에서 하신 일은 언어와 청각장애를 가졌던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과 떡 일곱 개와 생선 몇 마리로 이방인 4천명을 먹인 사건이다(8:1~10). 예수께서는 특히 그들과 함께 3일 동안 있은 후에 그들에게 이와 같은 기적을 베푸심으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이후에 이방인들이 복음의 구원양식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역의 일차적인 준비를 귀신들에게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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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건을 접하는 마가복음의 원 독자들이나 오늘의 독자들은 본 기록을 통하여 본 사건 속에서는 미래적인 요소로 남아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실현된 것을 본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보다 하나님 나라는 더욱 획기적으로 도래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민족들에 대한 사탄나라의 통치권은 결정적으로 붕괴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탄나라의 저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탄나라의 반대와 저항은 단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거슬릴 수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그 세력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패배한 세력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예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사역이 예수님의 후기 사역을 준비했던 것과 같이, 대립과 갈등이 있는 세대에 우리들이 신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한다면 주님의 재림 때에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의 축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탄나라의 간교한 반대가 아니라, 그 나라의 패배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이다. 지금은 패배한 것 같이 보이나 그것이 결코 하나님 나라의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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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루병 걸린 여인의 치유사건(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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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지적했듯이 저자는 본 사건을 독립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회당장 야이로 딸을 다시 살리는 사건의 중간에 삽입했다. 본 사건의 중간적인 위치는 이 사건이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사건을 해석하는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복음서 중에서 마가는 이 사건을 앞서 기록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장 길게 기록한다. 마태는 가장 짧게 3절로, 누가는 6절로 이 사건을 기술하는데 반하여 저자는 10절을 할애하여 본 사건을 기록한다. 마가의 기록에만 독특하게 등장하는 내용들은 이 사건을 기록하는 저자의 관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 요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저자는 앞에서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의 최악의 상태를 상세하게 묘사했던 것과 같이 혈루병 걸린 여인의 구제불능의 심각한 상태를 상세하게 기술한다(26). 여인은 병의 치유를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지만 가산만 탕진했지 호전된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둘째로, 저자는 이 여인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고 기록한다(27). 이 언급은 마가복음에만 등장한다. 이 여인의 전환점은 세상의 어떤 좋은 소식에 있지 않고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에 있었다.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식은 여인으로 하여금 내가 그의 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했다(28). 그는 자기와 같이 심각한 병에 걸린 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 나서 치료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3:10). 여인의 믿음을 창출한 것은 그의 주관적인 상상이 아니라, 그에게 들려온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었다. 예수님의 복음이 그에게 부여한 믿음의 발로 주님께 달려나오는 것이고, 복음의 소식이 부여한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던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비추어 볼 때 이 여인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로, 여인의 믿음을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좋은 소식과 연결한 저자는 다시 한번 독특하게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사건과 그의 즉각적인 치유의 사건을 연결한다. 마태는 여인의 즉각적인 치유를 언급하지 않으나 마가와 누가만 이 사실을 기록한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이 즉각적인 치유에 대한 여인과 예수님의 이중 인식을 기록한다(29~30). 여인은 친히 자신의 병이 나은 줄을 알았고(29) 예수님 역시 그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것을 알았다(30). 이 사실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믿음의 손으로 만질 때 즉각적으로 치유의 능력이 그에게서 나와 여인의 죽음의 병을 치유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 질문과 여인의 답을 통하여 그를 에워싸고 있는 무리들이 그에 대한 믿음에 도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치유 받은 여인이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나와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함으로 예수님의 의도는 실현되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 일어난 가시적인 사건을 청각적인 진리로 진술하셨다. 이것이 바로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이다(34). 이 선언에서 마지막 부분인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는 명령적인 말씀은 마가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이러한 추가적인 언급은 여인의 치유가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는 순간 완성된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시작되었고, 즉각적으로 시작된 여인의 치유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저자는 여인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님에 대한 소식에서 시작하여(27) 예수님의 말씀으로 종결한다(34). 저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그 시작도 끝도 그의 말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로, 마가의 기록에서 독특한 것은 그의 기록에만 29절과 34절에 두 번 등장하는 단어 병(마스티크스)이다.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무엇에 얻어맞은 치명적인 상처를 가리킨다. 물론 이 상처는 앞서 언급했듯이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이다. 이 여인이 가진 죽음의 치명적인 상처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인한 질병이 아니라, 사탄의 나라가 인간에게 가한 타격의 결과이다. 비록 병 자체가 사탄나라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지만 여인의 최악의 상태는 사탄의 나라에서 기인한 죽음의 상처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여인이 보인 믿음은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접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인 것이다. 여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 가는 병에서 치유를 받았다면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병보다 더 심각한 사탄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었다. 이 자유는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믿는 자에게 수여하는 선물이다. 예수님은 강한 자 사탄 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그는 언제든지 그를 믿는 자를 사탄의 속박에서 건져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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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군대귀신에 들렸던 사람을 극적으로 구원한 예수님을 배척한 거라사 지방의 모든 이방인들과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많은 무리가운데 이들 모두와 구별되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이 여인의 탁월함은 도덕도 윤리도 지성도 재물도 아니고, 복음의 좋은 소식을 통하여 들은 예수님에 대한 실천적인 믿음에 있다. 엄청난 다수 중에 한 사람만이 믿음의 발로 예수님께 나아왔고 믿음의 손으로 그의 옷깃을 만졌다. 예수님은 이 같은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놀라운 치유의 선물로 충만하게 하셨다.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많은 소식을 접하고 있는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예수님에 대한 모든 소식에 실천적인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는가 믿음의 발로는 예수님께 나오고, 믿음의 손으로는 예수님을 만지며, 믿음의 입으로는 주 예수님만이 나의 전부라고 고백하는가 주님은 그러한 믿음을 회당장 야이로와 그를 에워싼 무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요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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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로의 딸 회생사건(2124, 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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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혈루병 걸린 여인의 극적인 치유 사건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와 죽어가는 사랑하는 딸을 살려주시길 구하여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가는 노중에, 혈루병 걸린 여인의 사건 때문에 지체되어 마침내 그의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말씀으로 끝난다. 이러한 내용은 구조적으로 볼 때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기 전에 혈루병 걸렸던 여인의 절망적인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 딸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가고 있을 때에는 소망이 남아있었는데, 그의 딸이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말았다.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어찌하여 예수 선생님을 더 괴롭히느냐고 말했던 것이다(35). 이러한 상황에서 야이로는 새로운 판단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가 이미 혈루병 걸린 여인이 말씀을 듣고 가졌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흔들리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그러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다. 여기서 36절의 앞부분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라고 오역한다. 이것은 불순종하다또는 거부하다란 뜻을 가진 파라쿠오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18:17).9 36절 앞부분의 정확한 번역은 예수께서 있던 말을 거부(배척)하시고”(parakouvsa" to;n lovgon lalouvmenon)이다. 누가복음 950절에는 단지 들으시고로만 나온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저자는 있던 말을 거부(배격)하고라고 명확하게 언급함으로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과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한 말이 극대한 대조와 대립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집에서 온 사람들의 말은 그의 딸이 죽어 모든 것이 끝장났으니 예수님을 더 이상 그의 일에 참여시키지 말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두려워 말고 단지 믿으라라는 것이다(36).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촉구하는 믿음은 그의 직접적인 말씀이 아니라, 그에 관한 말씀을 듣고 그를 믿은 여인이 야이로 앞에서 보여준 믿음이다. 이로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이 단 한 사람만의 믿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야이 로의 믿음에 대한 도전은 그의 집에 당도했을 때에 더욱더 심각하게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딸의 죽음의 검은 그림자는 그의 온 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집은 어린 딸의 죽음으로 인한 소란과 심한 애곡으로 진동했다. 야이로의 믿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갈 수 있는 위협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애곡하느냐고 하면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선포했다(39).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전의 상황과 같이 소녀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기정 사실로 수용하고 예수님을 조롱했다(40). 이러한 상황에서 야이로는 사람들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 사이에 양자택일해야 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 한 말이다. 예수님은 그가 자고 있다고 말함으로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이 다시 일어날 것을 암시했다. 예수님은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고 소녀는 즉시 일어나 걸었다(42).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저자는 소녀의 다시 살아날 부활을 묘사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42절의 일어나서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니스테미는 마가복음에서 17번 중 10번이 부활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또한 마가복음만 독특하게 기록하고 있는 소녀의 회생에 대한 놀라운 반응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과 흡사하다(16:8). 한 걸음 더 나가서 소녀가 살아난 사건과 예수님의 부활 예고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과 같이 이 사건에 대하여도 말하지 말라고 한 사실에도 나타난다(43). 또한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6장에 기록된 세례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에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무리들 5천명을 먹이시기 전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예고한다(6:67).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소녀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의 사건은 미묘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저자가 이 사건을 기록한 바로 다음에 예수께서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것을 기록한 것은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한다. 예수께서 이 사건을 행하셨을 때에는 그의 죽음과 부활이 미래적인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이 기록으로 독자들에게 주어졌을 때는 소녀의 죽음과 살아난 사건 속에 예고 된 것이 모두 실현된 후였다. 이러한 이해가 타당하다면 야이로가 믿어야 했던 예수님은 단지 그의 딸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예수님이었지만 마가의 기록 속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예수님이시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셨고, 군대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했고, 혈루병 걸린 여인을 극적으로 치유했으며, 야이로의 딸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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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의 믿음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세상의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인가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은 야이로의 딸 소생사건 속에 나와 있다. 세상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은 단연 결코 만나지 않고 평행선을 그리며 대립적으로 달려간다. 믿음을 살찌우는 양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삶의 현실이 아무리 냉혹하고 죽음의 그림자와 그 실체가 그 가혹한 현실을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만 있다면 믿음은 언제든지 그의 말씀의 초대 위에서 견고하게 설 수 있다. 오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보다 더 큰 사건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이미 영적인 죽음에서 해방되어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육체적인 부활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주님께서 야이로에게 요구하신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소망의 말씀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야이로의 딸에게 주신 일시적인 생명의 회복보다 더욱더 크고 위대한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는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발하실 것이다. “믿는 자들아 내가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재림하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야이로의 딸 소생 사건 속에 희미하게 암시된 육체적인 부활의 성취를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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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관점에 대하여는 필자의 마태 89장의 주해와 적용,” 그말씀(20012), pp2839를 참고하기 바람.

누가복음의 관점에 대하여는 필자의 설교를 돕는 분석 누가복음(서울: 규장, 1998), pp136150을 참고하기 바람.

네 가지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이다.

네 가지 기적사건은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 거라사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구원하신 사건, 혈루병 걸린 여인의 기적적인 치유사건, 야이로의 딸 회생사건이다.

마 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 특성에 대하여는 각각 필자의 Jesus’ Holy War Against Satan: The Gadarene Demoniac Story (Seoul: Solomon, 1999), pp367474와 설교를 돕는 분석누가복음, pp145148을 참고하기 바람.

이에 대한 다양하고 상세한 견해에 대하여 필자의 Jesus’ Holy War Against Satan, pp415447을 참고하기 바람.

이러한 관점은 마가복음의 기록보다는 마태의 기록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731절에 나오는 데가볼리 지역을 통과하여라고 나오는 한글개역성경의 번역은 오역이다. 이것은 데가볼리의 지역 중에 있는으로 새롭게 교정돼야 한다(NASB, NRSV).

표준새번역과 개정개정판도 이를 오역하고 있으나 공동번역은 그 뜻을 풀어서 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라고 바르게 번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