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6장 연구 1

에반젤(복음) 2019. 8. 17. 14:01



마가복음 6장은 다음과 같이 대략 여섯 개의 단락을 가지고 있다: 고향의 배척(1~6a), 제자 파송 전도(6b~13), 요한의 죽음(14~29), 오병이어 이적(30~44), 폭풍진정(45~52), 치병(53~56). 그런데 각 단락은 내용 전개에 있어서 잘 짜여진 독자적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각 단락에는 아래에서처럼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 짜임새 있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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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마가복음 6장의 여섯 단락은 각각 독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후로 서로 간에 긴밀하게 연결된다. 고향의 배척(1~6a)이 제자 파송 전도(6b~13)를 야기시키고, 제자 파송 전도가 한 편으로는 요한의 죽음(14~29)을 설명하게 만들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오병이어 이적(30~44)과 연결된다. 오병이어 이적으로부터 폭풍진정(45~52)과 치병 사건 (53~56)이 파생한다.

특히 마가복음 6장에서 주의를 끄는 것은 내용전개에 있어 한 단계씩 점점 더 과거로 내려가다가 다시 한 단계씩 현재로 돌아오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제자 파송 전도(6b~13)와 요한의 죽음(14~19)과 오병이어 이적(30~44)의 흐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의 활동으로 헤롯은 예수를 자신이 목베어 죽인 요한으로 오해했다(14~16). 여기에서 한 걸음 과거로 돌아가 요한을 투옥한 것을 설명하게 된다(17). 이로부터 다시 한 단계 과거로 내려가 요한을 투옥한 것은 요한의 책망 때문이었음을 밝힌다(18~20). 이제 이야기는 다시 한 차원 현재로 돌아와 헤롯이 요한을 목베어 죽인 것으로 전진하고(21~29), 마지막으로 다시 한 단계 현재로 올라와 예수의 사도들이 활동을 마치고 보고하는 것(30)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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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활동으로 헤롯이 요한의 죽음을 기억함

(14~16)

헤롯이 요한을 투옥함(17)

요한이 헤롯을 책망함(18~20)

헤롯이 요한을 처형함(21~29)

사도들이 돌아와 활동을 보고함(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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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단락: 고향의 배척(6:1~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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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의 행선(1)

가 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향사람들에 의하여 배척 당한 일이 설명된다. 이 내용은 서론적으로 상황을 진술함으로써 앞의 단락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서론적인 진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동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예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떠나(“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셨다. 이와 같은 서론적인 진술은 예수께서 고향에서 어떤 일을 만나게 되는지 미리 생각하게 만든다. 예수의 행로에 제자들이 동행했다(“제자들도 좇으니라”). 사실 이 단락에서는 제자들의 활동이 하나도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막연하게 보이는 부연의 묘사는 이후에 제자들이 어떤 활동을 행하게 될 것을 예상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묘사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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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가르침(2~6a)

1) 예수의 가르침(2a)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무엇보다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가르침이야말로 고향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예수께서는 가르침으로써 고향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가르침은 예수의 가장 분명한 자기계시의 방법이었다.

먼저 예수께서 가르치신 상황이 나온다. 시간적으로는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안식일이 되어라는 말은 예수께서 고향에 도착하시자 바로 안식일이 되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고향에 도착하신 후에 의도적으로 안식일까지 되기를 기다렸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안식일은 예수께서 고향사람들에게 가르치시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었을 것이다. 공간적으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당시에 회당은 성경교육의 장이었으므로 예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다른 오해를 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모임이었다(2b 참조).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상 이런 현상은 마가복음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2:2 etc. 참조). 본 장에만도 이런 현상은 세 번 나타난다(2,6,34). 비록 가르치신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놀라운 말씀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무척 놀랐기 때문이다(2). 예수의 가르침에 놀람으로 반응을 나타냈던 사람들의 말로 미루어볼 때 그 가르침에는 감탄을 자아낼 만한 지혜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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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들의 반응(2b~3)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경악함으로써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첫째로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2ba).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경악이 반드시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경악은 배척을 낳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고향사람들이 예수께 보인 반응이다. 이어서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2bb~3). 첫째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유래에 관하여 질문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2bb). “이런 것은 앞 단락에 나온 소녀의 치병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가르침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낫다. 고향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디서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예수의 학습에 대한 회의적인 표현이다.

둘 째로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지혜와 능력의 성격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예수에게 두 가지 초점을 모았다. 그것은 지혜와 능력이다.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2bc). “이 사람에게 주어진 지혜라는 말은 고향사람들이 예수께서 스스로 지혜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수여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지혜를 애써 부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래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성격이 지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혜는 놀라운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 자체가 지혜다. 지혜(호크마)는 진리(에메트)를 의미한다. 예수의 손으로 이루어진 권능은 앞 단락에서 언급된 혈루병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치병을 가리킨다.

셋째로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신분에 관해 질문했다. 우선 그들은 예수의 직업을 들먹였다.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3a). 여기에 그들이 목수라는 예수의 직업을 운운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두 가지 방면으로 가족관계에서 예수의 신분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한 방면은 수직적 가족관계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3b). 여기에 예수의 모친만 언급되고 부친은 언급되지 않는 것은 요셉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가정은 부친에 의하여 성경교육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만일에 예수의 부친인 요셉이 일찍 죽었다면 예수의 성경지식의 기원은 막연해지는 것이다. 고향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2bb)라고 그 유래에 관하여 의심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3b)라고 물은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당연히 결핍된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른 한 방면은 수평적인 가족관계다. 고향사람들은 형제와 자매에 관련하여 예수의 신분에 관하여 질문한다. 그런데 형제의 이름은 정확하게 열거하고(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 3c), 자매들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는다(3d). 이것은 예수의 신분을 깎아내리기 위한 질문이다. 예수의 형제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며, 예수의 자매들은 아무도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형제들과 자매들을 가지고 있는 예수에게서 지혜와 권능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고향사람들은 예수에게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를 인하여 실족한지라”(3, 개역 예수를 배척한지라는 부적절한 번역이다). 예수께서 고향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셨다. 예수는 그들에게 은혜가 되지 않고 저주가 됐다(벧전 2:8). 고향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의심을 심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들이 되었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1:10). 빛은 어둠에게 접근하지만 어둠은 빛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므로 은혜가 도리어 저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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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의 반응(4~6a)

이 와 같은 고향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세 가지 반응을 보이셨다. 첫째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4). 이것은 일종의 속담이다. “외에서는 존경받지 않는 선지자가 없다는 이 말은 예수께서 선지자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선지자와 동등한 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이 말은 예수께서 선지자들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예수의 운명은 선지자들의 운명과 비슷하다. 마치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 것처럼 예수께서도 자신의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특히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이라는 말이 아브라함의 소명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12:1) 예수께서는 결국 고향을 떠나는 나그네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예수는 집의 사람이 아니라 길의 사람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고향사람들에게 단지 약간의 권능을 베푸셨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5). 예수께서는 행동에 제약을 받으셨다. 예수에게서 권능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를 걸림돌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권능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은혜를 받을 남은 자는 있다. 대부분이 예수를 거절할 때도 소수의 사람이 예수를 신뢰한다. 예수의 은혜를 바라는 소수의 병인에게 예수께서는 치병의 은혜를 베푸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안수를 하셨다. 이것은 친밀과 친절의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다수의 불신 앞에서 소수의 신뢰에 대하여 사랑과 은혜의 구원을 나타내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6). 바로 여기에서 고향사람들의 자세는 불신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들이 예수께 여러 가지로 보여준 반응은 근본적으로 불신의 소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에 대해 놀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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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단락: 제자 파송 전도(6:6b~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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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의 순회(6b)

결 국 예수께서는 고향에 집착하시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고향의 배척 후에 발을 넓히셨다. 여기에 예수의 활동반경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강조적인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다니시며”, “마을들을”, “두루”. 이것은 모두 예수의 활동의 확대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순회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르침을 위한 것이었다. “가르치시더라.” 마가는 여기에서도 가르침의 내용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위에 가르침이 중요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내용에 관하여는 침묵한다. 예수께서는 순회전도의 일환으로 제자들을 파송하셨다. 예수께서는 홀로 일하시지 않고 제자들을 활용하신다. 주님의 일은 사람을 통하여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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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께서 파송하심(6:7~11)

예수께서 제자를 활용하시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일을 하셨다.

먼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7a). 제자들의 활동은 예수의 소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제자들이 스스로 예수의 일에 가담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부르심이 없다면 제자들의 활동도 없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셨다(7b).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지 아니하신다(45 참조). 제자들을 예수 없이 사역하게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신뢰를 의미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시지는 않지만 대신에 권세를 주셨다(7c). 이 권세는 더러운 영들을 제어하는 권세이다. 이것은 회개와 치병을 위한 권세를 의미한다(12~13).

넷 째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을 명령하셨다(8~9). 예수의 명령은 주로 제자들의 전도여행을 위한 물질적인 면과 관련된다. 이것은 여행채비이다. “여행을 위하여제자들은 예수께서 명령하시는 방식을 따라 길을 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 긍정적인 것과 두 가지 부정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긍정적인 것은 첫째로 지팡이를 가지라는 것이다(8a). 지팡이는 방어와 공격을 위한 것이다. 지팡이는 악한 짐승을 막기도 하지만 물리치기도 한다. 둘째로 긍정적인 것은 신을 신으라는 것이다(9a). 신은 발을 보호하고 길을 안전하게 한다. 부정적인 것은 첫째로 양식, 주머니, 전대의 돈은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8b). 이것은 전도자가 배부름과 안일함과 풍요함에 주의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둘째로 부정적인 것은 두 벌 옷을 입지 말라는 것이다(9b). 이것은 전도자에게 사치와 허영을 방지시킨다. 여행채비에 관한 이 모든 말씀을 미루어볼 때 이것은 간단한 단거리 여행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이 의도하는 것은 전도자는 짧은 전도여행에서조차도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다섯째로 예수께서는 파송 받는 제자들에게 태도적인 면에서 주의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10~11). 예수께서는 우선 전도하는 제자들이 한 집에 머물 것을 당부하셨다(10).

이것은 더 편안한 곳을 찾지 말 것과 불편한 자리라도 불평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또한 예수께서는 영접하지 않고 청취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떠나라고 말씀하신다(11).

특히 제자들은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배척하는 사람들의 먼지라도 탐내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들은 배척하는 사람들의 것을 조금치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자세가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증거가 된다.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전도자의 무탐심이 복음열정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것은 먼지의 증거이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바로 이런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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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자들이 파송받음(6:12~13)

예 수께 파송받은 제자들이 한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제자들은 전파하였다”(evkhruxan, 12). 그들은 나갔다. 예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내심(7)에 대한 명백한 반응이다. 제자들이 나가서 한 일 가운데 첫째는 전파하는 것이었다. 전파는 예수(하나님)의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신적 은혜의 선포이다. 전파의 목적은 간단하게 진술되었다. “회개하도록”(ina metanow/sin). 제자들이 전파로써 도달하려는 목적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혼을 치료하는 것이다.

둘째로 제자들은 쫓아내었다”(evxeballon, 13a). “많은 귀신들을”(daimonia polla). 이것은 위에 언급한 더러운 영들”(7)을 가리킨다. 제자들의 둘째 활동은 악한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싸움이다. 제자들 앞에서는 귀신들의 수가 문제되지 않는다. 제자들은 아무리 많은 귀신들에 대하여도 승리한다. 이것은 육체의 내면을 치료하는 것이다.

셋째로 제자들은 기름을 바르고”(h;leifon), “고쳤다”(evqerapeuon)(13b). 분명히 이 두 표현(5:14와 유사)은 한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치병이다. 이것은 제자들의 셋째 활동을 가리킨다. 이것은 육적 회복이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최소한의 의술행위이다. 이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안정 (신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치료를 의미한다. 기름을 바름으로써 외상을 치료하는 것이다. 이것은 육체의 외면을 치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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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단락: 요한의 죽음(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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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 단계씩 과거로 내려가다가 다시 한 차원 씩 현재로 올라오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단락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요한의 죽음을 가장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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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롯의 반응(14~16)

제자 파송 전도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본문은 세 가지 반응을 언급한다. 첫째는 헤롯의 반응이며(14,16), 둘째와 셋째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다(15).

1) 헤롯의 들음과 말함(14)

헤 롯은 예수의 제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헤롯이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자세하게 소개된다. 헤롯의 반응은 정보입수에서부터 시작됐다(14a). “헤롯이 들었다”(14aa).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드러났기에”(14ab). 이름이 드러났다는 것은 신분의 공개를 의미한다. 예수의 제자들의 활동은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자들의 전도활동과 예수의 신분공개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 제자들의 활동은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었다.

헤롯은 예수의 이름을 들었을 때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혼동을 하였다.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14b). 헤롯의 말은 막연하기는 해도 그가 어떤 식으로든지 부활에 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롯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한 세례자 요한으로 이해한 것은 한 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말할 수 없이 강력한 것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인상(또는 영향)이 사후에도 지울 수 없이 강하게 남아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더 나아가서 헤롯의 말로부터 헤롯이 사람 속에서 활동하는 능력을 믿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헤롯의 말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헤롯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인물이지만 이적적인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무도(심지어 헤롯까지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임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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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이들의 말함(15)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의견들이 소개된다. 이것들은 두 가지로서 헤롯이 보여준 반응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헤롯과 달리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엘리야라고 생각했다(15a).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부활 엘리야 사상(Elias redivivus)은 당시의 종말론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9:9~13 참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보면서 부활 엘리야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본문이 이렇게 부활 엘리야 사상에 관한 어떤 사람들의 의견을 슬쩍 언급하고 만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런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런 개념으로만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을 넌지시 보여준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간주했다(15b).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유대교의 안팎에 다양한 선지자 사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했다. 당시의 선지자 사상들 중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 종말 선지자에 대한 기대 사상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당시에 유행하던 한 선지자로 여겼거나 종말선지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문이 간단히 이런 의견을 소개하고 만 것은 일면으로 예수를 선지자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런 이해로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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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헤롯의 의견(16)

위의 진술에 이어 헤롯의 의견이 요약적으로 다시 한번 언급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한 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헤롯은 요한이 어떤 죽음 후에 부활했는지를 설명한다. 요한은 헤롯에 의하여 목베임을 당해 죽었다. 목 베임으로 죽었다는 것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죽음을 의미한다. 헤롯은 이렇게 부인할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어 다음 부분은 요한이 헤롯에게 목베임을 당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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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한의 투옥(17)

헤롯이 요한을 목베어 죽인 사건의 전말을 진술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한 단계 과거로 되돌린다. 헤롯은 요한을 목베어 죽이기 전에 먼저 체포하여 투옥했다. 요한이 투옥된 이유는 헤로디아 때문이었다. 헤로디아는 본래 헤롯의 형제 빌립의 아내였는데 헤롯이 그녀와 혼인했다. 헤롯의 결혼과 요한의 투옥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한이 감금된 원인은 헤로디아에게 있었다. 그 사실이 바로 다음에 자세히 설명된다. 사실상 이 단락의 모든 설명은 헤로디아가 가장 악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심지어 헤롯은 헤로디아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저질렀다. 이것은 여성 앞에서 헤롯의 유약함을 보여주기보다는 남성 앞에서 헤로디아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은 의로운 인물로 묘사되고, 헤로디아는 극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본문의 주제는 의인이 악인에게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공의를 따르는 자는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 고난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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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한의 책망과 헤롯/헤로디아의 반응

(18~20)

이제 이야기를 다시 한 단계 과거로 후퇴시켜 헤로디아 때문에 요한이 투옥된 것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설명한다.

1) 요한의 책망(18)

사 건은 요한이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 것에서 비롯됐다. 의는 자신을 공개할 뿐 아니라 불의를 공격한다. 의는 자신을 은닉하지도 않으며 불의를 간과하지도 않는다. 요한은 최고의 권력자인 헤롯의 불륜을 강도 있게 비판하였다. 가장 낮은 자라고 해서 의인의 공격적인 시각을 벗어날 수 없듯이 가장 높은 자라고 해서 의인의 비판적인 안목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초야에 사는 평민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듯이(1:4~5), 왕궁에 사는 군주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헤롯의 죄악의 가장 중심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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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헤로디아의 반응(19)

그런데 이와 같은 요한의 비판 앞에서 정작 분노한 것은 헤롯이 아니라 헤로디아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했다. 악인은 의인을 기뻐하지 않는다. 불의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 죄악을 비판하는 의인을 원수로 여기고 죽이고자 하는 것이 불의한 세상의 원리이다. 그래서 의인이 악인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만큼 악인도 의인의 비판에 강력하게 반응한다. 헤로디아는 요한 살해 계획에 실패했다. 헤롯이 요한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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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헤롯의 반응(20)

헤 롯은 요한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나타냈다. 무엇보다도 헤롯은 요한을 두려워했다(20a). 그 이유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이 말은 의롭고 거룩한 요한이 뿜어내는 위엄과 기풍 앞에서 헤롯이 압도를 당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헤롯이 실제로 요한을 두려워했다기보다는 의롭고 거룩한 요한을 상해할 때 나타날 백성들의 비난을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어쨌든 불의한 헤롯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요한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헤롯은 요한을 보호했던 것이다(20b). 사실상 요한의 지적 앞에서 헤롯은 두 가지 모순적인 반응을 보였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듣고 한 편으로는 번민하면서(20c), 다른 한 편으로는 달게 들었다(20d). 이것은 헤롯이 요한의 말을 내면적으로는 반발하였지만 외면적으로는 수긍하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모두 정치적인 제스처였다. 결국 헤롯은 의롭고 거룩한 요한의 말까지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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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헤롯이 요한 처형(21~29)

이 단락은 헤롯의 생일잔치(21), 헤로디아의 딸의 무희(22a), 헤롯의 요청(22b~23), 헤로디아의 조언(24),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25), 헤롯의 사형허락(26~28), 요한 제자들의 장사(29)로 이어진다. 결국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 단락은 요한이 죽임 당한 것에 관하여 어떤 다른 복음서보다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세한 설명은 요한을 죽이기 위하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일시(헤롯의 생일, 21), 증인(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 21), 동기(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대한 보답, 22~25), 정치적 제스처(요한 처형에 대한 근심과 허락, 26~28).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의인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의인은 악인들에 의하여 장난거리로 죽임을 당한다. 헤롯은 소녀의 춤 때문에 요한을 죽인다.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귀인들은 요한의 죽음에 대해 침묵한다. 헤로디아는 딸의 춤의 대가로 요한의 목숨을 요구한다. 많은 경우에 의인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도리어 의인은 보통사람보다도 못하게 죽는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의인이 이렇게 장난거리처럼 죽는다 해도 그는 악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두려움으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들었을 때 자신이 목베어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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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단락: 오병이어 이적(6:30~44)

오 병이어 이적은 네 복음서가 모두 증거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오병이어의 이적이 초대교회에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앞에 언급한 제자 파송 전도(7~13) 단락과의 연결 속에서 두 가지의 서론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사도들의 귀환과 예수의 배려(30~32)이며, 둘째는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의 심정(33~3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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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도들의 귀환과 예수의 배려(30~32)

1) 사도들의 귀환(30)

제 자들은 전도를 마치고 예수께 모여서 두 가지를 보고했다. 그것은 그들이 행한 것”(osa evpoihsan)과 그들이 가르친 것”(osa evdidaxan)이었다. 결국 이것은 12~13절에 언급된 제자들의 사역을 요약하는 말이다. 제자들의 사역은 행위와 교훈이 철저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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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배려(31)

예수께서는 제자들로부터 행위와 교훈에 관한 보고를 받으신 후에 휴가를 허락하셨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3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한 이유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31). 사역에 휴식이 동반되는 것이 좋다. 휴식은 결코 낭비나 사치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휴식을 배려하시면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따로”(kativdian) 휴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휴식의 방식에 관한 설명이다. 휴식이란 것은 사람들과 격리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휴식은 특별한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한적한 곳”(eivj e;rhmon topon)에서 휴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휴식의 공간에 관한 설명이다. 휴식은 복잡한 일상생활을 떠날 때 주어진다. 그러므로 휴식은 변화된 생활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잠깐”(ovligon) 휴식할 것을 권면하셨다. 이것은 휴식의 정도에 관한 설명이다. 휴식은 제한된 정도로 취해져야 한다. 제한된 정도를 넘어선 휴식은 이미 휴식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휴식은 일시적인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배려에 따라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갔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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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의 심정(33~34)

1) 사람들의 반응(33)

사람들은 제자들이 가는 것을 보고 달려가 제자들보다 먼저 행선지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은 모든 고을로부터”(33) 나와서 큰 무리”(34)를 이루었다. 그 수효는 후에 자세히 언급된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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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심정(34)

예수께서는 이 무리가 마치 목자 없는 양 같기에 불쌍히 여기시면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물론 이 단락에서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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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병이어 이적(35~44)

이 제 본격적으로 오병이어 이적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간다. 가장 먼저 상황이 설명된다.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는 동안에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개역: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했다. 시간적으로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공간적으로는 빈들에 처해 있었다(35). 모인 무리의 수는 남자만 오천 명이 될 정도로 많고(44), 제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양식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38).

1) 제자들의 방식(36)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무엇을 사먹게 하라는 것이었다(36). 제자들의 판단력은 대단히 뛰어난 것이었으며 해결책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뛰어난 판단력과 합리적인 해결책에 대하여 만족하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저 인간의 차원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결코 이적과 역사를 일으키지 못한다. 땅의 가장 높은 부분도 하늘의 가장 낮은 부분보다 아래 있으며, 인간의 가장 지혜로운 것도 하나님의 가장 미련한 것보다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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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방식(37~38)

예 수께서는 제자들이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요청하셨다(37). 이것은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왔기 때문에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영의 양식뿐 아니라 육의 양식도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신학이며 이것이 예수의 사회학이다. 이것이 예수의 기독교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책임져야 할 영역을 영적인 것에만 제한시키지 않고 물질적인 것에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금전으로 해결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37). 제자들에게 영악하고 민첩하게 금전적인 계산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바라시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여기에 언급된 이백 데나리온은 틀림없이 예수 운동의 공금을 의미할 것이다. 제자들은 공금을 털어 무리를 먹이려고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의 소유를 내놓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7)고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38)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문제는 과연 제자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최후의 소유라도 무리를 위하여 내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이적과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자신의 것을 손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은 언제나 인간의 차원에 머물고 만다. 인간이 가장 작은 것까지 포기할 때 하나님은 가장 큰 것까지 허락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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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의 이적(39~44)

예 수께서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시면서 몇 가지 선행 작업을 하셨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무리를 오십 명에서 백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셨다(39~40). 예수께서는 놀라운 이적 시행에 앞서 무리에게 질서를 확립하셨던 것이다. 이적은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41). 이것은 예수께서 작은 물질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적은 감사와 동행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적 시행에 동참시키셨다(41). 예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기를 좋아하셨다. 이적은 사람의 참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이 선행한 후에 오병이어의 이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로 풍성한 이적이었다(42~44). 예수의 은혜 앞에서 사람의 숫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언제나 풍성하고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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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단락: 폭풍 진정(6:45~52)

1. 예수의 행적(45~46)

오병이어 이적 이후에 예수께서는 세 가지 일을 하셨다. 첫째는 제자들을 벳새다로 보냈고, 둘째로 무리를 해산시키셨다. 셋째로 자신은 산으로 가셨다.

1) 제자들을 보내심(45a)

예 수께서는 오병이어 이적에 여운을 남기지 아니하셨다. “즉시”. 이 단어는 마가가 예수의 행적을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이 이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이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시다. 제자들은 이적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께 순종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바다 건너 편 벳새다로 보내셨다. 제자들에게 완전히 다른 장소로 가게 하신 것이다. 때때로 장소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 장소를 떠나지 못하면 생각도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는 것을 강요하셨던 것이다(개역 재촉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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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리를 해산시킴(45b)

오 병이어의 이적에 여운을 남기지 않기는 무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해산시키셨다.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이적을 체험한 무리는 맹신적인 집단이 되기 싶다(6:15 참조). 이적이란 것은 무리에게 맹신을 위한 절대적인 보증수표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무리를 제 것으로 장악하는 가장 매력적인 미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적을 무리 장악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아니하셨다.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맹신의 기회를 주지 아니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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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의 산행(46)

오병이어 이적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가 이적에 연연하지 않도록 떠나보내고 해산시킨 다음에 홀로 산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를 이적의 장소에서 떠나게 하실 뿐 아니라 자신도 이적의 장소를 떠나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더 이상 이적의 장소에 연연하지 아니하셨다. 예수께서도 장소를 바꾸셨다. 예수께서는 산을 택하셨다. 산은 사람의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보일 필요가 없는 장소를 택하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산으로 가신 것은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이적을 떠나 기도를 택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적의 장소를 떠나 기도의 장소를 택하셨다. 사람이 환호하는 이적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택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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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자들의 고난(47~52)

제자들은 바다 가운데서 풍랑의 고난을 만난다. 이 단락에서 예수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이 첨예하게 대조된다. 예수와 제자들의 대조는 장소의 차이에서부터 시작한다. 제자들은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육지에 계신다(47). 물론 장소의 차이는 대조의 시작에 불과하다. 예수께서는 기도함으로써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만(46), 제자들은 괴로이 노를 저음으로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48).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지켜보시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다(48). 제자들은 예수를 유령이라고 생각하지만(49),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적 인물로 소개하신다(50). 제자들은 예수를 보고 놀랐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50). 이렇게 모든 점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대조적으로 차이가 난다.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진정한 소망은 오직 예수께만 있다.

그런데 이 단락에서 더욱 흥미로운 대조는 제자들의 고난이 심화되는 것과 예수의 구원이 심화되는 것이다. 제자들의 고난은 이렇게 심화된다. 날은 저물고(47), 배는 바다 가운데 있으며(47), 바람이 그들을 거슬렀다(48). 제자들은 시야와 방향을 놓치고 말았다. 제자들은 나아가기도 어렵고 되돌아가기도 어려운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제자들은 방어하기 힘든 자연의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제자들의 상황은 자꾸 악해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제자들을 구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점점 더 적극적인 행위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47),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48), 그들을 향하여 오시고(48), 그들에게 말씀하시고(50), 그들의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셨다(51). 예수의 구원은 더욱 심화된다. 제자들은 점점 더 절망에 빠져들지만 예수께서는 점점 더 구원을 베푸신다. 제자들에게는 절망이 깊어지고 예수께는 은혜가 깊어진다. 갈릴리 바다는 제자들에게 고난과 절망의 장소였지만 예수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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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단락: 치병(6:53~56)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게네사렛 땅에 도착하셨다. 예수의 도착은 게네사렛 지방(“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56) 전체가벌집 쑤신 것처럼 소란스럽고 흥분되게 만들었다. 이 단락의 장면은 매우 긴박하게 진행된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54). 사람들이 온 지방으로 뛰어다녔다(55). 예수께서 오신 사실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알린 것이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침상 채로 메고 나아왔다(55). 병자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길 겨를 없이 신속하게 데리고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시장에 두었다(56). 병자들을 치료하기에 좋은 장소를 물색하여 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 병자들이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했다(56). 그들은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일일이 병자들을 만져주시기를 기다릴 만큼 한가로운 마음을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는 사람은 구원을 얻었던 것이다(56).

예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유익을 얻는다. 예수 때문에 흥분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수여된다. 예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진다. 예수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