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사기 강해

사사기 중심사상, 사사기 연구

에반젤(복음) 2019. 7. 31. 06:25



사사기 중심사상


세겜에서 거행된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 다짐은 여호수아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는 정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인도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하나님이 곧 인도자요 지도자임을 여호수아는 천명했기 때문입니다.(여호수아 24:12-13) 광야언약에 대하여 여호수아가 확인한 것이 바로 이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확인을 가나안 땅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붙이시매 이기는 전쟁이었습니다.(여호수아24:8)


비로소 우리는 사사기의 주제가 여기에 있음을 파악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여러 번 백성들에게 다짐을 한 바는 약속의 땅이 갖는 특수한 속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특수한 속성은 기존의 가나안 민족들이 알고 있는 우상과는 어떠한 접촉점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여호수아 24:15-20)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이 언약에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과 도저히 타협될 수 없는 神이시기에 여호와를 섬긴다는 말은 이방신을 이미 제거했음을 전재로 한 행동에서 나와야 합니다.(여호수아 24:23) 선조들에게 약속한 바를 기어이 지키신 약속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에서 길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의 정신에 복종하는 것뿐입니다.


정복이란 곧 여호와의 정신에로의 귀속을 의미합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들을 몰아 내는 행위는 비언약적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이 그 언약의 이름으로 친히 통치를 수행하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온전히 그 언약적인 차원에서 정복하지 않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언약적 통치를 고수하겠다고 재확인합니다. 이는 불순종 했을 때 저주 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두고 말합니다. 그 저주의 방식은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치는 가시 노릇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일관성에 낙심하여 목놓아 울게 됩니다.(2:1-5) 이방나라의 미 철수는 군사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세대 이후,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이방민족의 존속을 신앙적 이유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상호 우호적인 문화교류가 곧 자기들에게 평화를 제공하리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방민족도 역시 여호와의 손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방 민족을 통한 괴로움이 이스라엘에 도달 되었습니다.(2:15)


여기에 사사가 등장하는데 사사의 등장은 모세언약 어디에도 약속된 바가 없는 특별 조치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구원자로 등장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바른 길로 가지 않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2:17) 사사의 임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신앙공동체가 정상으로 유지되는데 동원됩니다. 그 수행에는 전쟁과 그 전쟁에서의 사사의 위치를 조상의 타락에 대하여 무지한 후대사람들에게 재현시킴으로서 완수됩니다.(3:1-2) 결국 사사란 인간의 타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존속되어 지는가를 통해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그들에게 교육시켜 주는데 있습니다. 언약대로라면 이스라엘은 범죄 즉시 그 땅에서 추방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거기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마다 다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세언약이 지닌 또 다른 면을 발견케 해 줍니다. 도대체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제기한 그 언약이라는 것이 어떤 의식을 지닌 언약일까요?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사자의 등장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새로운 사명을 확인하는 경우에 등장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일은 결코 자신의 일일수가 없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으로서 임무수행에 차질이 없기를 당부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입니다.(출3:1-5, 수5:13-15, 삿2:1-5, 13:3-20) 따라서 여호와의 사사가 방문하고 난 뒤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스라엘이 제대로 구원받을 수 없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에서 해야될 여호와의 종의 노릇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즉 종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종된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사항은 구원이라는 것은 과연 인간의 도움이나 노력의 결실과 무관함을 보이는 것이며 구원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경우는 구원의 대상인 이스라엘이 완전히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고 전적으로 여호와께 매달릴 때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등장된 사사의 위상은 그 자체가 부르짖음에 대한 표상의 차원에서만 설명됩니다.


즉 부르짖음이 갖는 언약적인 가치성을 통해 언약이 갖는 이미지를 파악할 수 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백성들이 사사를 볼 때마다 의지하는 생각을 포기해야 되고 또 사사는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전쟁의 특성, 즉 붙이시매 비로소 이기게 되는 전쟁을 치러 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전쟁이란 여호와에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3:28/ 4:7, 14/ 7:9, 15/ 18:10/ 20:28, 참조: 출 14:14, 신 1:30, 수 10:14, 삿 20:35)


언약은 사사의 등장으로도 유효하게 이어져 내려갑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

사들의 개인 하나 하나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이 다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신이 어떤 관점에서 언약 수행에 동참하고 있느냐를 보여 주는 것이 됩니다. 즉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들은 결코 여호와의 신이 남다르게 일할 수밖에 없는 어떤 비범한 재질이나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사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모든 구원의 결실은 그 사사 개인의 공로로 돌릴 수 없었다는 데서 모세언약을 그 시대에 구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거룩한 분에 의한 열매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 열매를 인간의 공로

로 돌리려는 시도가 일어나면 그 잘못된 시도 때문에 억울한 죽음이 그 주변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1:34-4)에 나타난 입다의 무남독녀의 억울한 죽음) 마찬가지 이론에 의하여 반대로 자신의 무절제와 방탕으로 사사의 일이 방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사를 오해한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 그가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 그가 죽을 때 죽인 사람이 많다는 점으

로 미루어 보아(16:30) 사사 개인의 자질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사기에 흐르는 정신은 비단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전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냐민 지파의 반윤리성을 책벌 하는 과정에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이 처음 두번은 오히려 무지무지한 참패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연합군 생각에는 그들은 자동적으로 正義의 편이라고 여겨 하나님의 승리가 무조건 우리에게 보장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의 땅이 갖는 특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든지 여호와 전쟁의 속성을 이해 못하면 멸절 당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그들이 세번째 올리는 기도 가운데서 전적으로 자신의 정의로움을 의지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난 뒤 여호와께서 "붙이시매" 비로소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20:28) 이는 진정코 이 땅의 왕은 사사나 또는 다른 연합군이 될 수 없고 여호와만이 왕임을 천명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대가 끊겨 멸절하는 상황을 또 염려해

야 했습니다. 이것은 힘에 의한 정복만이 언약의 완성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고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자유 하게 한 그 정신의 구현만이 진정 여호와의 왕의 정신에 부합됨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사기 9장에서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사사를 보내면서 까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그 여호와의 사랑만이 언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한 인간에 의해 다른 인간을 통치 지배 하는 것은 희년 사상에도 어긋날 뿐더러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실체에도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분명히 밝히기를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기드온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소명 받을 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와 가진 경험 때문입니다.

6:20-24 에서 그는 여호와의 사자와의 만남에도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음을 통해 (여호와 샬롬)이스라엘의 구원도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이 보존된 것과 동일하게 구원받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왕이 되심이 이방민족에게는 심판의 왕이지만 언약의 민족에게는 은혜의 왕이 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남은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왕이 가지는 은혜의 면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