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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이로의 살리는 믿음 (막 5:21-25)

에반젤(복음) 2024. 5. 6. 12:35
야이로의 살리는 믿음 (막 5:21-25)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이 시간 “야이로의 살리는 믿음”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작부터 조금은 딱딱한 이야기지만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합리주의 운동으로 인간의 이성의 힘을 낙관하여 모순된 현실의 사회제도를 개조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가리켜 계몽운동라고 합니다. 계몽(啓蒙)이란 '일깨워 준다.’는 의미의 글자대로라면 좋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당시 계몽주의가 과학발전에는 많은 공헌을 했지만 함부로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비판하고 잘못된 자연신론이나 유물론 무신론 등을 탄생시켰기 때문에 카톨릭의 부패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를 더욱 어둡게 만들어 갈팡질팡하게 한 암흑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를 종식시키고자 하나님께서 프로이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보내셔서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이 최고 존재에 대한 탐구를 착수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함으로 철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된지 깨닫게 함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처럼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는 절망 속에서 죄악으로 죽어가는 심령들을 살려 이 어두운 시대를 밝혀줄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것을 본문의 예수님을 모시고 그 딸을 살려낸 회당장 야이로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살리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22절에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라고 성경이 그 이름을 부각시키고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에 대해서 학자들 중에는 ‘그는 빛난다.’는 의미의 “야일”에서 온 말이라. 혹은 ‘깨어나다’는 히브리어 “야이르”에 근거한 이름이라는 등의 주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든지 그의 이름은 빛을 비쳐주고 깨워주는 사건을 알리기에 적합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딸을 살린 그 사건은 오늘날 죽어가는 심령들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엡5:14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야이로입니다.


그럼 심령을 살리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1. 예배가 심령을 살립니다.


21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여기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계셨는데 그것은 해안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바닷가는 바로 강단이요 교회였습니다. 여기를 야이로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 하에서 오늘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 죽은 심령들이라면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가인의 예배가 아니라 아벨의 예배와 같이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배 잘 드려야 합니다. 더 준비된 예배, 더 영광 돌리는 예배, 더 뜨거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오면 집에 돌아가기 싫을 만큼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우리 모두 준비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열납 되는 예배를 통해서 참여한 수많은 영혼들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겸손이 심령을 살립니다.


22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당시 유대의 회당장이면 상당히 존중 받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명의 예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처럼 겸손이 심령을 살립니다. 그래서 사57:15에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낮은 골짜기에 물이 흘러 옥토가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그 심령을 소성시키시는 것입니다.


3. 기도가 심령을 살립니다.


22-23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유대의 회당장이라면 바리새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화를 선언하실 만큼 외식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봐도 예수 믿을 것 같지 않는 사람인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하고 간곡히 간구하여 죽은 딸을 살렸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랑하는 어린 딸 때문이었습니다.


야이로가 어린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본문의 “어린 딸”이라는 원문을 보면 ‘뒤가트리온’이라 했는데 그 낱말은 딸에 대한 사랑과 강한 애정을 보여주는 용어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니 그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자기 신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 역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괴롭힌다는 미안함도, 사람들이 많아 주님 만나기 어렵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살려야겠다는 그 일념 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심령을 살리기 위해서 눅 18장에 나오는 원한 맺힌 과부와 같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세에 참된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충실한 기도생활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 기도가 잠시라도 간절함을 잃을 때 우리는 쓰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렘2:19에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살려면 기도의 제단부터 쌓으시기 바랍니다.


4. 참고 계속하는 믿음이 심령을 살립니다.


24-25절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참으로 딱한 상황입니다. 아이는 죽어 가는데 상황은 악해져만 갑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보행조차 어렵습니다.


더구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한 여자가 있어 시간을 지체합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가슴 터지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금방 은혜 받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 경외함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수증기가 올라가면 쏟아질 날이 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듯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도수와 골격이 완전히 잡힐 때까지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분량이 차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렘29:12-13에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실망하지 말고 믿음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5. 말씀이 심령을 살립니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야이로에게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완전히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셨습니다.


이 때 야이로는 비보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믿었습니다. 믿음이 좋아서라기보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의 말씀을 더 믿고 싶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통곡소리가 들립니다. 아이가 누웠는데 보자기에 덮여 있습니다. 그래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의 말씀에 기대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믿음직한 수제자들만 데리시고 아이에게 다가 가셔서 손을 잡고 “달리다굼(딱 한 마디)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랬더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고 예수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녀가 살아나자 말자 먹을 것부터 찾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이 살려면 말씀에 끝까지 서고 또 말씀을 계속 먹어야 합니다. 말씀에 배고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그런데 살리기 전에는 어린 딸이라 했는데 살린 후에는 열두 살이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아이는 만 13세에 여자아이는 만 12세에 성인식을 치룬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씀에 서야 장성한 신앙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어린이입니다.


그래서 엡4:14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말고 말씀을 믿을 뿐 아니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한 구절이라도 수백 번이고 외우시면 거기에서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죽은 심령들이 잠자는 데서 깨어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회당장 야이로처럼 내 영혼이 살아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으로 체면도 나이도 연약함도 무엇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예배 열심히 드리고, 기도생활 잘하고, 강한 믿음에 서서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은혜를 받아 어두운 내 심령이 살아나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