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창/- 믿음의 사람

[스크랩] 하나님의 선물 마태 (눅 5:27-29)

에반젤(복음) 2024. 5. 6. 12:34
하나님의 선물 마태 (눅 5:27-29)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이 시간에 “하나님의 선물 마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마태는 신약성경의 첫 책인 마태복음을 쓴 기자입니다. 본래의 이름은 레위였고, 흔히 세리 마태라고도 불리는 사람인데 특이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일과 마태복음을 쓴 것 말고는 그의 행적을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 역시 레위가 마태로 바뀐 기록을 발견할 수 없지만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봅니다. 시몬이 예수 만나 베드로가 된 것과 같이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버림 받아 마땅한 인생이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였다는 것입니다. 그걸 아주 강하게 체험한 사람이 바로 마태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는데 따랐을 뿐 아니라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사람들 다 모아놓고 큰 잔치를 했습니다. 그가 예수 만나고 그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감격은 그동안의 고통과 절망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완전히 밑바닥 인생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1. 그는 지식의 절망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27절에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는 세리였습니다. 세리에 대한 배경을 연구해보면 당시 로마는 아무나 세리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수학에 능숙해야 할 뿐 아니라 적어도 3개 국어인 아람어 헬라어 그리고 그 지역 용어인 히브리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세리가 되었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살거나 무역을 하는데 외국어 모르면 세리하겠습니까? 세리는 고학력자였습니다.



그런데 세리하겠다고 공부했을까요? 여기에는 그의 학문에 대한 심한 좌절과 실망감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어려운 과정을 다 겪으며 학위 땄더니 고작 할 것은 세리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지식이 그에게 영원하고 복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니까 교만하지 알면 교만할 수 없습니다.


17세기 유럽에서 계몽주의라는 합리주의가 나타나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까지 논했지만 후에 임마누엘 칸트가 나타나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과연 최고 존재에 대한 탐구를 착수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함으로 철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 깨닫게 함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세상지식이 그처럼 초라한 것입니다.

2. 그는 인간에게서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먼저 자신의 악함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잘못되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 스스로 체험했습니다. 민족의 피를 빨아 먹는 자라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매국노라는 별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가버나움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라 그 곳을 통과하는 물건들에게 세금을 받아 냈는데 문제는 로마에 상납하고 남은 것은 착복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에게도 과중한 세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욕을 먹는 직업이었습니다.



마21:31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하셨을 만큼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돈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딤전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습니다.


사람들의 악함도 알았습니다. 잘못 가는 그를 올바르게 이끄는 사람 없었고 오직 비난과 증오뿐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고향 가버나움은 교만하기 이를데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마11:23-24) 하셨습니다. 소돔보다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자기는 물론 사람들에게서 어떤 희망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3. 그는 율법에서도 실망했습니다.


27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이 말씀처럼 그의 본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막2:14에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 라 했습니다. 이름을 보면 그의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이름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어떤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제사장 지파의 명칭이기 때문에 아무나 붙이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름을 짓는데 제일 나쁜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과 '성령'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명칭은 하나님께만 붙일 이름인데 사람이 예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쓰고 있다면 기도할 때 자기 이름을 부르며 찬송할 때 자기 이름을 찬송하는 격입니다. 중심은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레위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제사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아주 열망하지 않고는 붙이기 어려운 이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부모가 마태가 장차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봉사하기를 서원할 만큼 열망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되려면 30세까지는 율법과 여러 학문에 대하여 공부합니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건훈련을 받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입니다. 빌3:5-6에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런 마태가 세리가 되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깊은 회의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레위가 세리가 될 수 있었는지 그건 율법을 체험한 자가 아니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마태는 율법이 자기 인생 문제의 해결책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넘어지게 만들고 정죄하고 저주와 심판 아래 두는 것임을 체험했습니다. 율법의 결론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구세주의 필요성을 제시해주는 것인데 그러기까지 혹독한 실패와 참혹한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롬3:19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정죄 때문에 화평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정죄 받은 심령은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심령이 눌리고 상상할 수 없는 난처함에 빠지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정죄 속에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고통만 당하나요? 악령이 기회는 이 때다 하고 누르기 때문에 인격에서 활기와 생명력을 잃고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알기 전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8:24) 몸부림쳤습니다. 이로서 예수를 알기 전 마태의 영적 형편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걸 빨리 깨달을수록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율법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한다면 크게 절망할 날이 옵니다. 그가 세리가 되어 세관에 앉은 것은 하늘 같이 믿었던 율법의 난폭감과 무력감에서 온 실망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레위가 세리가 됩니까? 지금도 예수 믿다 타락하면 답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율법에서 실망했다면 당시로서는 믿음을 버린 것이나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리가 된 것은 그 사회에서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도 해보았다. 저것도 해보았다. 다 해봤다. 다 헛된 것이다.' 바로 이 상태였습니다. 그가 세리가 되었던 것은 양심에 거친 것이 없었다는 것이고, 양심에 거친 것이 없었다는 것은 율법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도 양심도 무엇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비방할 때 눅5:31-32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신 말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지옥의 문턱까지 갔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평안하진 않았을 것이고 어둠의 터널 속에서 방황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절망과 타락에 빠져버린 죄인 레위가 구세주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한 것은 그의 감격을 말해줍니다. 영원한 절망과 죄악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인생을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큰 잔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구원에 대한 감격이 넘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세상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엡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태와 같이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인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죄인을 불러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