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에 담긴 예수님의 교훈 (요 19:25~30)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 시간에 “가상칠언에 담긴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가상칠언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셨던 일곱 말씀을 사자성어로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최후의 순간, 가장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가상칠언에 담긴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사랑의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눅23:34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죄 없이 무고히 고난당하면서 이런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당했다고 한다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이 위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도 위대합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보통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위대하지만 기도도 위대합니다. 알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가 안 될 때 예수님의 이 기도를 생각하면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강도를 구원하심도 사랑입니다. 눅23:43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강도 중 하나가 죄를 뉘우치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는 부탁을 드릴 때 예수님은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말씀입니다. 마27:44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한 말씀을 참고해보면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중 한 강도가 뉘우치고 다른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의 옮음을 주장한(눅23:41) 다음에 자기를 예수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이것은 인품의 감화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감화력의 기초는 생명이고 사랑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그 정치범수용소에서 살아서 나온다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만큼 악한 상황이었지만 그가 얼마 있는 동안 죄수는 물론 간수들까지 모두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요즘도 교도소에서 기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일이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아들 재용씨도 감옥에서 죄수가 부르는 찬송에 감동되어 신학교를 지망했다고 합니다. 비판할 필요 없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에 감동될 자격이 있고 예수 믿고 일군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 감화에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13:1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까지 사랑하셨습니다. 2. 효성에 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끝까지 효도하셨습니다. 요19:26-2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간 여인은 4명이었습니다. 귀신 들렸지만 고침 받은 막달라 마리아, 이모인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마리아, 살로메라고도 합니다(막15:40), 살로메는 동정녀 마리아의 자매간으로 봅니다.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예수님의 모친이신 동정녀 마리아입니다. 여인들 특히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축복하면서 눅2:35에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그 말씀대로 칼이 찌르듯 아팠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여기 “여자여”는 원문으로 ‘귀나이’로 극존칭이라고 합니다. 이 호칭은 극존칭이면서 공적 칭호입니다. 공적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가나의 혼인집에서 어머니를 ‘귀나이’라고 부른 것처럼 여기서 공적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육신의 아들로 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즉 아들에 대한 연민보다 죽음으로서 이루어지는 구속사적 의미에 관심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인은 신앙으로 말해야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그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때 어떤 슬픔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얀마에 군부구데타에 대항하여 민주화시위가 일어나고 있는데 한 경찰이 발포명령을 거부하다가 사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장하다. 우리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사라질 민주화도 그렇게 장한데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 아들의 일이 어찌 장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친 어머니처럼 모셨습니다. 주의 모친이기도 하고 촌수로도 이모이기에 당연히 모셔도 됩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11년간 예루살렘에 살다가 마리아가 59세에 죽어 겟세마네 동산 입구의 동정녀 무덤에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라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잊지 않으신 예수님의 효성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심방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는 한눈에 목사인걸 알아보고 “목사님, 지금 우리 가족은 다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나만 못 나가고 있지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형제가 모두 7남매인데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입원하게 되어 치료비를 7남매가 협력해서 조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병인을 둘 형편이 못 되어 7남매의 딸과 며느리들이 교대로 어머니 간병을 하기로 하자 교회 안 다니는 딸과 며느리들은 간병하겠다고 하는데 교회 다니는 딸 며느리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집사람도 포함됩니다. 설득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불신의 4가정이 돌아가며 간병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평신도도 아닌 권사님들이 부모의 고통을 외면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이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 주시면 저도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그 말에 목사님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교인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불효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3. 순종에 대한 교훈입니다. 마27:46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을 보면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철저하게 외면하시는 모습입니다. 왜 버림을 당하셨습니까? 첫째는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시22:1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2:1의 성취입니다. 다음은 우리 대신해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사53:6에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했고, 고후5:21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고통을 참으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고통까지 참으셨습니다. 요19:28에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6시간을 십자가 위에 달려 계셨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피와 땀으로 갈증이 나셨겠습니까? 다른 고통도 심할 텐데 목마름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극도의 갈증을 암시합니다. 이 때 로마 병정들이 신포도주를 해융에 적셔서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댓습니다. 이 때 신포도주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쓸개 탄 포도주와는 다릅니다. 몰약이나 쓸개 탄 것은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취효과를 주기 위해 예수님께 주었지만 예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이 신포도주는 고통을 덜어주는 포도주가 아닙니다. 이처럼 영육간의 고통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4. 구원사역의 완성입니다. 요19:30에 “다 이루었다” 이 외침 속에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이 이루어졌음을 발견합니다. 부활은 아버지의 하실 일이고 예수님으로서 하실 일은 끝났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공로로 죽는 일에만 힘쓰세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와 함께 사는 은혜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5. 승리에 대한 교훈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 눅23:46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큰 소리를 절대 낼 수 없는 상황이지만 큰 소리로 기도하셨습니다. 최후의 순간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이 그랬다면 우리도 따라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어찌할 수 없을 때 이렇게 믿음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천사가 곁에 있다면 곁에 있다고 말씀하세요. 아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면 넘친다고 말씀하세요. 모두 예수 잘 믿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모두가 삽니다.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구원하고 나는 구원하지 못하면 천하를 가진들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지금부터 기도로 주님의 손에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가상칠언을 생각하면서 십자가 위에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더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예수를 나를 구원하신 주로 믿을 뿐 아니라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도 그 뒤를 따라가는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문학의 창 > - 믿음의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에스더와 영권의 비밀 (에 2:5-7) (0) | 2024.05.06 |
---|---|
[스크랩] 인도자 아나니아 (행 22:12-16) (0) | 2024.05.06 |
[스크랩] 땅꼬마 삭게오집사Ⅲ (0) | 2024.03.27 |
[스크랩] 땅꼬마 삭게오집사Ⅱ (0) | 2024.03.27 |
땅꼬마 삭게오집사Ⅰ (0) | 2024.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