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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자훈련교회 제자교육 교재 (제 2권)

에반젤(복음) 2023. 2. 2. 15:52

제 자 훈 련 2권

< 목 차 >
제19장 성경 21
제20장 교회 45
제21장 교회정치 50
제22장 하나님의 종 62
제23장 교회직원 91
제24장 하나님의 성도 98
제25장 은사 108
제26장 기독교절기 115
제27장 예배 121
제28장 하나님의 은혜 123
제29장 축복과 저주 128
제30장 목사들의 축복 135
제31장 헌금 145
제32장 기도 153
제33장 기도원 158
제34장 전도와 선교 163
제35장 성례 205
제36장 교회건축 211
제37장 부흥집회 219

제자훈련 2권
제19장. 성경.

1. 성경의 정의.

계시적 차원에서의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반면에 기독교적 차원에서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곧 <하나님의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완성 되어진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예표이고 상징으로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법을 진행하고 집행하는 <하나님 섭리역사>의 <진행역사>이고 <집행역사>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에 대한 예표이고 상징인 몽학선생이라고 해서 구약성경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약성경을 통하여 세워지고 계시되어진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졌으므로 보다 차원 높은 것으로 승화되었지만 그 본래적 의의는 여전히 살아서 완성된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섭리진행 및 집행>에 그대로 적용 되어진다.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명령하시고 진행하시고 집행하시는 것이다.

2. 성경의 역사.

1) 성경의 시작.

(1) 구약성경의 시작.

구약시대 초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성경, 또는 정경등과 같은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기록한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율법책 또는 율법서<תודצ-eduth><הדות-torah><דמס-sepher>라고 명칭 하였고 특히 <토라>라는 명칭을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신28:61; 29:21; 30:10; 31:24,26> <왕하11:12; 14:6; 22:8,11> <대하17:9;25:4;34:14-15> <느8:1-3,8,18; 9:3>
구약시대 후기에 이르러 율법서 이외에 다른 것들이 등장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그것을 <네비임-Nebiim-예언서> <케투빔-Kethubim-성문서>등등으로 명칭 하였다.

(2) 신약성경의 시작.

아직 신약성경이 형성되지 않았던 신약시대 초기에 <성경>이라는 명칭은 오직 구약만을 의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승천 후 사도들에 의하여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4복음서가 기록되었고 이어서 사도행전을 비롯한 각종 신약 성경들이 기록되었다.

2)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구분.

2세기 말엽에 이르러 유대교 경전과 기독교 경전을 구분하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이란 명칭이 사용되어지게 되었다. 이때에 헬라어 용어인 <디아데케-διαθὴκη- 계약, 언약>와 히브리어 <브리트-Brit-언약>를 역하여 <신약>과 <구약>을 구분하였는데 <AV-영어흠정역 성경-英語欽定譯聖經-Authorized Version.-A.D. 1611>은 <Testament>라는 용어로 역하여 구약을 <Old Testament>로 하고 신약을 <New Testament>로 하였다.

3) 성경의 저자와 기록기간.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성경 66권은 약 1600년간에 걸쳐서 40여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저자와 기록연대 및 장소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가 정확하지 않다. 학자들 중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다. 성경의 저자와 기록연대 및 장소는 성경해석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학자들의 이러한 의문들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보다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저자와 기록연대 및 장소에 대하여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신 하나님의 배려를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4) 성경에 사용된 언어.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나 그중에 아람어가 사용된 경우가 있다. <단2:46-7:28><스4:8-18><막5:41; 7:34; 15:34>등은 아람어로 기록된 것이다. 이 아람어는 갈대아어라고 지칭되었었는데 바벨론 유배기 이후에 점차로 유대인들의 구어<口語>로서 히브리어와 함께 사용되었던 관련방언<關聯方言>이다. 구약성경에 사용되어진 히브리어는 본래 구두점이 없었고 띄어쓰기와 같은 문법도 적용되지 않았으며 글자들은 모두 <언시얼체-unciial form-획의 폭이 일정하고 모가 나지 않은 글자체>로 씌어졌기 때문에 읽거나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특히 외국어로 번역하는데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주후 5-9세기 사이에 활동했던 맛소라파 학자들이 히브리어 모음 부호를 만들어 붙임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신약에 사용되어진 헬라어는 코이네<koine-헬라주의적 형태>로서 당시에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던 헬라어 방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는 코이네가 거의 국제적 공용어로 사용되어졌는데 그것은 주전 4세기에 근동일대를 헬라문화, 헬라 언어로 통일시킨 알렉산더 대왕의 전략적 정책에 의한 결과였다.

5) 성경의 사본.

인쇄기술이 발명되기까지 성경은 손으로 쓴 것들이었다. 구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성경도 무려 1400년 동안 손으로 옮겨 기록한 것이다. 원본을 그대로 옮겨 기록한 것을 사본<寫本-manuscript>이라고 하는데 고대사본은 중세기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주로 파피루스<요이1:12-갈대로 만든 것>와 양피지<딤후4:13-양이나 염소의 가죽>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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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원본은 현재 남아있지 않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로마의 디오클레시안 황제가 모든 그리스도교 문서를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소각되었을 가능성과, 다른 또 하나는 파피루스나 양피지 자체가 견고한 것이 아니므로 자연적으로 소멸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원본이 전승되어지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다. 만약에 성경의 원본이 남아있다면 무엇인가를 숭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성경원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박물관, 또는 유물관 같은 것을 만들어 원본성경을 신중하게 보관하는 가운데 원본성경은 물론이요 그것을 보관하는 곳 자체를 신성시하고 성역화 하여 참배한다거나 심지어는 경배하는 비 진리적인 일들을 행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가 진행된 장소들을 성역화하고 <성지순례>라는 명분 하에 그곳을 방문하면서 3류 종교적 우상숭배 행사들을 계속하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우상 숭배적 신앙이 조성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원본성경을 남겨 주시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5) 성경의 번역본.

(1) 구약 번역본.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아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만 기록되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전 세계의 언어와 문자로 기록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에 의하여 성경이 각 나라의 언어와 문자로 번역 되어지게 되었는데 고대역본<古代譯本>이란 원본 성경을 각 나라 언어와 문자로 번역한 사본들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구약 번역본들은 <아람어 탈굼역> <70인 역> <라틴어 역> <시리아어 역> <콥트어 역> <고트어 역> <아르메니아어 역> <그루지아어 역> <이디오피아어 역> <아랍어 역> <슬라보니아어 역> 등등, 많은 것이 있으나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70인 역>과 <라틴어 역>이다.

① 헬라어 70인 역 성경 <LXX>.

유대인들의 바벨론 유배로부터 시작되는 유대인들의 분산과 필립대왕과 알렉산더대왕에 의한 근동일대의 헬라 문화정책, 그리고 로마의 유대 식민지정책과 기독교탄압, 등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히브리문화는 점차 말살되어져 갔고, 따라서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비록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히브리어를 읽고 쓸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팔레스틴 이외의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에 의하여 히브리어 구약 원본을 헬라어로 번역하게 되었는데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70인 역이다. 이집트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2세, 필라델푸스<Ptolemaios, II-Philadelphus-B.C.285-246재위>는 유대인들에게 유화정책을 적용하였고 그들을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게 하였다. 대왕은 유대의 12부족에서 각 각 6명의 학자들을 선발하여 총 72명으로 하여금 성경을 번역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필사본 성경의 정확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였고 다른 또 하나는 성경의 숫자를 위해서였다. 학자들은<2명 1개조, 또는 6명 1개조>로 구성되어 각기 흩어져서 성경을 필사본 하였는데 필사본이 종료되었을 때에 그것들을 대조해 본 결과 모든 필사본들이 전혀 오차 없이 동일하여 이집트 국왕과 정부 관리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② 라틴어 불가타 역본.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주후 2세기말 경, 북 아프리카의 칼타고<Carthago>로 추정되지만 고대 역본은 이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여겨진다.
헬라문명이 쇠퇴하고 로마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헬라어 사용이 감퇴되는 반면에 라틴어가 공용화되어지기에 이르렀을 때 성경사용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헬라어 성경보다는 라틴어 성경이 더욱 요구되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헬라어와 라틴어를 알고 헬라어 사본이 있으면 누구라도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번역이 통일되지 않고 오역<誤譯>이 만연하게 되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A.D. 382년경에 로마의 감독이었던 다마서스1세<Damasus. I>가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의 유명한 성경학자였던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vmus-A.D.345-419 현재는 제롬-Jerome으로 알려져 있다>에게 표준적인 라틴어 번역본을 만들도록 위촉하였다.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번역본은 라틴 불가타<Latin Vulgate>역이라고 명칭 되었는데 영어로는 벌 게이트 번역본이라고 부르며<Vulg> 표시한다.
라틴어 역본은 라틴어 고대역본과 라틴어 불가타 역본으로 구별되어지는데 제롬이 번역한 것을 라틴어 불가타 번역본이라고 하고 그 이전에 번역된 것을 라틴어 고대역본이라고 한다.

(2) 중세의 성경번역.

① 로마 카토릭의 성경번역 금지.

중세시대란 그레고리 1세<Gregory I>가 교황으로 즉위한 주후 590년부터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었던 <1517년>까지의 약 1천년간을 말한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이미 중세시대 이전부터 성경의 일반화를 금지하였다. 저들은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1:20>을 오해하여 <무식한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게 되면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함부로 해석하거나 오해하여 비 진리에 빠지게 될 것이며 뿐만 아니라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서 일반성도의 성경읽기와 지참을 금지하였고,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의 전유물이 되게 하였다. 때문에 로마 카토릭은 성경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절대 금지하여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고집하였으며 사제들만이 그것을 소지하거나 읽도록 하였다.

② 개혁주의자들의 성경 번역.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땅 끝까지 보급되고 전파되어 천하 만민 누구에게나 제한 없이 읽혀져야 하는 것은 논의나 설명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금지하는 로마 카토릭의 정책은 정죄 받아 마땅한 <대죄>라고 생각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확신하였다. 그중에 특별히 기억해야할 사람이 바로 영국의 위클리프<Wyclif>이다. 그는 1382년에 최초로 영어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어 번역 성경은 로마 카토릭에 의해 <이단의 세력(종교 개혁자들)을 유도한 저주받은 죄의 연료>로 정죄 받아 1415년에 이르러 거의 대부분이 몰수되고 소각 당하였으며, 1428년에는 그의 시체<1384년 사망>까지 다시 꺼내어져 불태워졌다. 아울러 로마 카토릭은 <모국어로 성경을 읽는 자는 땅과 생명과 재산을 영원히 몰수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의 강압조치에도 불구하고 성경 번역의 불길은 오히려 거세게 타올랐다. 위클리프가 사망한지 100년 후에 태어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번역을 감행하였다. 그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그들의 모국어로 볼 수 있게 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진리 가운데 세울 수 없다.>고 천명하면서 <유식한 자>를 자처하는 로마 카토릭의 사제들을 향하여 <만약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살려 주신다면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나는 쟁기를 끄는 소년이 당신들보다도 성경의 진리에 대해 더 많이 알도록 만들겠다.>고 장담하였다.
틴데일의 번역본 성경은 평신도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며 순식간에 일반 대중사회에 퍼져 나갔다.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교회의 가르침보다도 더욱 깊은 성경적 지식을 얻게 되었고 따라서 사제들의 성경해석과 가르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지금까지 강압적으로 미러부쳤던 교회와 사제단의 비 진리적 권위들이 속속, 들어남에 따라 위기를 느끼게 되자 1543년에 이르러 <노동계급이 성경을 읽는 것은 전혀 허락되지 않으며 이를 어기는 자는 투옥한다.>는 방침을 다시 선포하였다. 틴데일 번역본 성경을 비롯한 모든 번역본 성경들이 압수되어 불태워졌고 영국에서만도 이 무렵에 300여명의 종교개혁자들과 성경 번역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틴데일도 1536년 10월에 교수형을 당한 뒤 다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의 만행은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정의구현의 역사적 위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려는 사단의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로마 카토릭의 악행에 하나님의 섭리가 정지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진리자들의 순교에도 불구하고 성경번역의 불길은 날로 날로 더욱 거세게 타올랐으며 도처에서 자국어 성경 번역본이 출간되어지게 되었다. 성경 번역사는 곧 종교개혁사와 그 맥<脈>을 같이 하였다. 성경번역은 종교개혁에 불길을 당겼고 종교개혁을 이끌어 나갔으며 드디어 종교개혁이 결실을 맺게 되었을 때 그 결과로 인하여 자유롭게 성경번역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3. 성경의 권위.

1) 성경의 신적 권위.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 일체에 대한 계시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의하여 수립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진행되어진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절대적 권위를 행사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인 성경을 다만 아멘으로 믿고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피조들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거나 또는 자신의 뜻과 다르다하여 성경에 어떤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하거나 거부하는 등등의 불경스러운 행위를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를 다음과 같이 불허하셨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2) 성경의 필요성.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의 <계약법전>이고 <교통통로>이다. 그리고 성경은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영원한 역사>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하나님의 종들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며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지침을 또한 하달 받는다. 성경은 하나의 구절로 그들에게 주어지지만 그들은 그 한 구절 속에서 다양한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계약과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지침들을 듣고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의 구절을 통하여 각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다양한 약속들을 받으며,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의 구절을 통하여 각자에게 부여되는 다양한 사명과 다양한 은사들을 확인하며 자신들에 전개해 나가야 할 사명의 방법론을 또한 깨닫고 배우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필요성은 또 다른 차원에서도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진다.
하나님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으로 인하여 모든 면에서의 절대적 완전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종교가 갖추어야 할 필연적인 요소들을 완벽하게 갖추어, 모든 종교들의 권위위에 좌정하여야하며 언제나 출현하게 되는 사이비 이단들의 비 진리를 꾸짖고 퇴치해야할 현재적인 근거자료를 존재시켜야할 필연적, 필요성을 갖는 것이다.

3) 성경의 명료성.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난해성을 주장하고 있다. 저들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부분들을 난해한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특별하고 독특한 해석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떠한 구절에서도 난해함이 없다. 성경이 난해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총체적인 집합계시 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 <특히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상세하게 열려지고 알려지고 이해되게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경의 여러 부분들이 완전하게 열려지지 않고 묵시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직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들에게 그 부분들을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계시하실 것이다.

(2)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다.

성경이 난해한 것은 실제로 성경이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 때문에 성경이 난해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신학적 경지를 갖추어야 한다.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능력을 갖추기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역사를 깊이 연구하여야하며 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을 포괄적으로 섭렵하는 가운데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3)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총체적 집합계시이다. 따라서 성경은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되지 아니하고 인간에 대한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진 결과들이 증거 한다. 오늘날 많은 학자 <특히 자유주의 학자>들에 의하여 성경이 인간의 구속사적 차원에서 해석되어 왔다.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어느 사이엔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신학>에서 빗나가 <인간을 위한 인간의 학문>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어졌고 또한 존재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에만 집착한다.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자신>들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성경의 이와 같은 오류적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은 도처에서 난해한 것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하면 지극히 당연하고 간단한 것이 인간적 차원에서 해석하려니까 도무지 이상하고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그리하여도 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4) 성경의 충족성.

하나님의 말씀<성경>의 완전함과 충분함은 성경 스스로의 선언에서도 증거 되지만 성경의 내용을 통하여 입증 되어진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일체가 전혀 빈틈없이, 전혀 하자 없이, 완전무결하게 그리고 참으로 충분하게 수록되어 있다. 우주의 출발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서 종결까지,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충분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조직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이점에 대하여 전혀 이의가 없다.> 성경의 충족성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어떤 것에서 보충하려고 하는 자들은 성경을 보는 방법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성경을 하나님의 주권적 입장에서 보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입각하여 성경을 보면 성경은 참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충분하다. 그러나 성경을 인간의 주관적 입장에서 보면 성경은 너무나도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존하는 신앙적 삶을 살고 있다. 특히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신앙형태가 많은데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원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신앙형태이다. 기독교의 신앙원리는 기독교의 신학을 기초로 하여 형성되어지는 것이 원리이고 원칙이며 기본이고 기초이다. 그리고 그것<기독교의 신학>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위에 세워진다. 따라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위에 세워진 신학으로부터 출발 되어지며 그 신학적 토대위에 신앙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에 대한 보증적 선포이기도 하다.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은 독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말씀<성경>과 병행하여, 혹은 말씀 안에서 진행되어진다. 이러한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말씀보다는 <기도, 또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존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이거나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섭리 자체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행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기도와 성령의 초자연적인 계시>만을 선호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세운 법을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앞장서서 무시하고 거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당당하고 단호하게 선포하신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4. 성경의 특성.

1)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기록되어졌다.

종교의 경전은 인간에 의하여 세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 종교의 신에 의하여 세워져야한다. 인간은 신이 알려주지 않는 한 신에 대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으며 신이 목적하고 의도하는 바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전은 오직 그 종교자체의 신적존재에 의하여 세워져야 한다는 절대적 불문율<不問律>을 스스로 가지고 있게 되며 또한 경전은 신의<신적지식과 신적지혜와 신적안목과 신적완전성>을 토대로 하여 수립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수립한 경전은 인간이 수립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신의 말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며 신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법이며 신적계시가 아니라 인간적 계시이며 신의 섭리에 대한 총체적 집합이 아니라 인간의 소망과 목적에 대한 총체적 집합이다. 따라서 이것은 신적목적이나 신적속성들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다만 인간적 <경험, 감정, 소망, 목적> 등등으로 구성되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한 경전은 결국 종교적 경전일수 없는 것으로서 다만 인간들의 철학적인 사상이 될 뿐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종교적 경전으로서의 필연적 특성을 완전히 갖추었다. 성경은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나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으나 그들의 전반적인 부분 <지혜 ,지식, 특성,>에 간섭하시고 조명하시어 성경을 기록할 수 있게 하시고 또한 기록하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성경은 인간이 기록했으나 인간이 성경의 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가 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며 인간적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며 인간적 <경험, 감정, 소망, 목적> 등등에 대한 철학적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하나님의 신적속성에 의한, 하나님 섭리의 총체적 집합이 되는 것이다.

2) 성경은 독립적이다.

종교의 경전은 지극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종교적 경전은 결코 인간에 의하여 세워질 수 없으며 또한 타종교의 경전을 인용한다거나 적용할 수 없고, 오직 그 종교가 섬기는 신적존재의 직관<直觀>에 의하여 완전히 독립적으로 수립되어져야 하는 절대적 필연성을 갖는다. 종교의 경전은 신적 경전이기 때문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 최고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만약에 타종교의 경전에 비하여 열악하다면 그 열악성 자체로 인하여 이미 종교적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신적존재란 최고, 최대, 최상의 완전성을 필연적으로 요구받게 되며 따라서 경전 역시 최고, 최대, 최상의 완전성을 필연적으로 요구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의 경전을 인용한다거나 적용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최고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를 자증하는 것으로 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학자들은 인류 역사의 수많은 종교들 중에 기독교, 힌두교, 불교, 유교, 회교를 가장 차원 높은 5대 종교로 구분한다. 그러나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차원이 지극히 열악하다. 때문에 기독교는 그 종교들과 같은 위치에 세워지는 것을 거부한다.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경>은 종교 경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다. 불교의 경전인 <불경>은 누구나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종파마다 다른 경전을 만들어 사용하므로 불교 교주인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수없이 수록하였거나 또는 석가모니의 교훈을 서로 다르게 기록하여 통일성이 없다. 유교의 경전<사서삼경-사서육경>은 종교적 경전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집이다. 회교의 경전인 <코란>은 기독교의 성경을 도용<盜用>하여 각색, 편찬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독립적인 계시로서 인간의 어떤 요소나 또는 타종교의 어떤 요소들을 인용하거나 적용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참고조차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포하심으로서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적존재를 단호하게 거부하신다. <일단의 고고학자들 중에는 구약 <특히 모세의 율법서>가 하무라비 법전을 모방하고 인용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을 능가하는 어떤 신적존재란 있을 수도 없으며 실제로 있지도 않다. 따라서 성경을 능가하는 종교적 경전은 있을 수도 없으며 실제로 있지도 않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경이 언제나 인류역사상 최고의 경전으로 인정된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되어진다.> 때문에 일반종교의 어떤 것들을 인용한다거나 적용할 만한 것들도 없지만, 또한 이용하거나 적용할 만한 이유도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법, 계시, 섭리> 등등의 총체적 집합으로서 더 이상 추가하거나 삭제할 것이 없는 오직 유일한 최고, 최대, 최상의 완전무결한 독립적 경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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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The Law of Hammurabi>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벨론 제1왕조 제6대왕, 하무라비<주전1729/28-1686재위>에 의해 발포된 것으로서 현존하는 고대 오리엔트 최고의 성문법전<成文法典>이다. 당대 최고의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고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아는데 중요한 것으로서 석주<石柱>에 새겨져 있다. A.D.1902년에 페르샤의 고도<古都>인 <수사>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루브루>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석비는 원추형<圓錐形>으로서 높이 2.25m. 상부의 주위 1.65m, 하부의 주위 1.90m인데 상부에 태양신으로서의 정의의 신<神> 샤마쉬<Shamash>가 하무라비에게 법을 주고 있는 정경<情景>이 있고 그 아래에 표리<表裏> 약 3000행의 설형문자의 법전이 새겨져 있다. 하무라비 법전은 282조로 되어있고 당시의 <사회, 경제, 생활>의 전체를 규정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과 유사한 곳이 많아 모세의 율법이 하무라비 법전을 모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모세의 율법은 종교적, 윤리적인 것으로서 하무라비 법전의 수준을 크게 능가한다. <참고문헌-G.R.Driver & J.C. Miles: The Babylonian Laws, vol. I. 1952>

3) 성경은 하나님의 신적목적이 선포되어져 있다.

경전에는 신이 목적하고 추구하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하게 증거 되어져야 한다. 경전에 신의 목적이 분명하게 증거 되어 않으면 그것은 신적 경전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 것은 신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며, 또한 그것은 신을 믿고 섬기는 자들에 대한 기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경전에 신의 목적이 분명하게 증거 되어 있지 않으면 신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 목적하는 바를 알지 못함으로서 신을 바르게 섬길 수 없으며 따라서 오해와 혼돈 속에서 신이 목적하는 바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경전에는 신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한다.

(1) 경전에는 신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

경전에는 신의 근원, 신의 속성, 신을 섬기는 방법, 신의 섭리와 그 섭리에 순종하는 방법에 관한 일체가 완전하게 들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신을 섬기는 자들이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하여 온전히 알아 신을 바로 섬기게 하여야 하고 신의 섭리를 바로 알아 신이 추구하고 목적하는 바를 온전히 알아 신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존원리>에 의한 자존하심과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 등등, 하나님의 신적속성이 완전하게 증거 되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에 의하여 수립되어진,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제반 규정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선포되어져 있다. 때문에 기독교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사명적, 신앙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 경전에는 신과 섬기는 자와의 역사적인 관계가
증거 되어 있어야 한다.

경전에는 신과 섬기는 자의 신분적 상호 관계와 역사적인 관계가 분명하게 정립되어져 있어야 한다. 신과 섬기는 자와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신과 섬기는 자와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의 관계가 아니라면 신은 다른 신의 피조물을 착취한 것이 되므로 신적속성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신을 섬기는 자들은 경전을 통하여 그러한 관계를 확인하여야 하며 그러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신을 섬길 이유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신분적 상호 관계와 역사적인 관계가 명시되어져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 와 피조의 관계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이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를 구체적이면서도 적나라하게 증거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적 전개를 증거하고 있다.

(3) 경전에는 피조에 대한 모든 것이
증거 되어 있어야 한다.

경전에는 피조에 대한 모든 것, <피조의 근원,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것이 분명하게 증거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것이 증거 되어 있지 않다면 피조는 신을 믿을 수 없으며 따라서 신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없다. 특히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 신을 믿고 섬길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시작과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이 완전하게 증거 되어 있다. 성경에는 특히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 되어진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위에 아름답게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유감없이 살게 되는 것이다.

(4) 경전에는 피조간의 관계에 대한 제반 문제들이
정립되어져 있어야 한다.

인간은 신과의 관계 못지않게 인간과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여야 하며 또한 자연과의 관계도 바르게 유지하여야 한다. 신에게만 모든 초점을 맞추어 인간 <가족, 사회, 국가, 세계>과의 관계나 자연 <우주, 동, 식물, 조류, 물고기, 치산치수>과의 관계를 도외시하거나 함부로 홀대하게 되면 신의 섭리자체가 무시되어지고 거부되어짐으로서 모든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붕괴되어지게 된다. 법과 질서, 윤리도덕, 등등이 무너짐으로서 무질서, 성적문란, 약육강식, 등등의 사태가 발생하여 무법천지가 되고 자연의 관리부족으로 인하여 각종 재해가 발생하여 결국은 모든 세계가 붕괴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피조는 경전을 통하여 피조세계의 모든 문제를 배우고 익히며 피조세계가 신의 섭리 하에서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류사회에 대한 제반규정과 질서를 선포하고 있으며 윤리적 도덕적 규범들을 또한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시행함에 있어서 법률적인 차원보다는 <사랑>의 실천원리를 선포하고 있다. 최초의 인간에게 주어진 <번성, 충만, 정복, 통치, 관리>의 절대적 사명<창1:28>은 자연세계와 인류세계에 모두에게 적용되어지는 사명이며 그 사명의 구체적인 적용은 우주정복과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이르는 자연적인 것과 <정치, 경제, 과학, 종교, 예술, 문화> 등등은 물론이요 인간의 <정신세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힘<力>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것이라는 진리를 성경은 선포하고 있다.

4) 성경은 완전하다.

종교의 경전은 완전해야 한다. 경전은 신에 의하여 저작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절대적 완전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어떤 것이 보강된다거나 또는 중간에 어떤 것이 삭제된다는 것은 경전의 완전성을 무효화하는 것으로서 경전으로서의 권위와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완전하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하여, 인간이 알아야할 모든 것이 완전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완전하게 들어 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더 이상의 어떤 것을 추가한다거나 또는 제한하는 것을 엄중하게 금지하셨다.<계22:18-19>

5. 성경의 정경 정립.

1) 정경<正經>의 의미.

정경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 두 번 나온다. <고후10;12-16><갈6:16> 정경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로는 <카네>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카논-Kanon>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본래 <막대기> 또는 <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서 석공<石工>이나 목수가 사용하는 자<尺>와 같은 도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겔40;3>이 용어를 <고후10:12-16>에서는 직분상의 한계<限界>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였고 <갈6:16>에서는 성도들이 행하여야 할 규례의 표준으로 사용하였다. <카논>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것을 조절하고 확실하게 하는 의미로 사용되어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어떤 것의 표준이 되는 단어로 결정되었다. 초대교회는 신앙과 행위의 규칙으로 받아들여진 교리를 지칭할 때에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주후 266년 안디옥 종교회의는 사모사타의 바울의 교리<The Doctrine of Paul of Samosata>를 <교회교리-Kanon-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정죄할 때에 이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주후 325년에 열렸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정통주의 교리>를 <카논>이라고 하였으며 4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모든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규범들을 <카논>이라고 하였다. 성경에 <카논>이라는 용어를 적용시킨 최초의 사람은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350>였으며 제59차 라오디게아 종교회의<A.D.363>에서는 카논을 <표준적 성경>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특히 교회가 외경과 위경을 성경으로부터 제외하게 될 때에 성경을 지칭하는 용어<정경>로 사용하였다.

2) 정경 결정의 역사

(1) 구약정경의 정립

현재 사용되어지고 있는 39권의 구약성경이 정전화<正典化>된 것은 1천년 가까운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약성경의 정경형성은 역사적, 또는 내용적 차원에서 3개로 구분된다.

① 제1차 정경. < 율법서-토라>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등의 율법서는 구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정경화된 것으로서 기원전 400년경에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바벨론 포로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생활하게 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서가 삶의 기본적 규칙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되었다. 율법서중에서도 신명기는 이미 기원전 621년에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경전화 되었다.

② 제2차 정경. <선지서 -예언서- 네비임>

전기예언서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와 후기예언서<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12소선지서>들은 기원전 200여년 경을 전후하여 결집되어 정전으로서 공인되었다.

③ 제3차 정경 <제서諸書-케스빔>

<시편> <잠언> <욥기> <아가>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서> <다니엘서> <에스라> <느혜미야> <역대상,하> 등등은 기원전 300년경에서부터 결집되기 시작했으나 기원전 150년에 이르러서도 일부만 정경으로 받아들여졌고 기원전 90년에 구약정경이 총체적으로 결집되었던 얌니야 회의에서 경전으로 채택되었다.

① 얌니야 회의

기원전 90년경에 텔아비브의 남쪽 20km지점에 있는 성읍 얌니야에서 구약정경 정립을 위한 <랍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현재의 구약성경 39권이 정경으로 확정되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그대로 적용되어지고 있다.

(2) 정경의 정립.

신약성경은 현재의 27권이 정경으로 정립되었는데 신약성경의 정립에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다. 학자들 중에는 4복음서가 모두 정경으로 채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고 바울서신들을 정경으로 채택하는 것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종교회의를 통하여 현재의 27권이 정경으로 인정되었는데 그 종교회의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히포회의<Councils of Hippo>

A.D. 393년에 북아프리카의 히포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신약의 정경을 확립하였다.

② 카르타고 회의<Councils of Carthago>

A.D.397년에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신약의 정경확립을 재확인하였다.

③ 퀴니섹스틴 회의<Quinisext Synod/Trunan Synod>

A.D. 692년에 동방의 주교들이 제5차 및 제6차 종교회의의 결정들을 재확인하기 위해 교회 규율법령을 통과시킨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동서양교회가 현재의 신약 27권을 다함께 쓰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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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토릭교회는 현재의 정경 외에 <토비트> <유딧> <에스더서추기> <솔로몬지혜서> <집회서> <벤시락의 집회서> <바룩서> <세 청년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마카비1,2서>등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3) 정경결정의 원리.

현재의 성경들이 정경으로 확정되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정경으로 인정받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리가 적용되었다.

(1) 구약정경의 결정원리.

① 성서의 증거.

구약성경의 정경결정에 있어서 가장 우선하는 원리는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성경의 기록들은 시내산 언약이후로 계속하여 발전하고 있으며 이 기록들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할 의무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에서 그 모든 것들이 성경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보증되어지고 증거 되어질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구약성경의 36권들은 이러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관계를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분명하게 보증해 주고 있다.

② 외부 문헌과의 비교.

구약성경의 정경성은 그것들이 근동일대의 역사에 의해서 보증 받을 수 있느냐?하는 것 이었다.주전 15-14세기의 힛타이트 문서들을 살펴보면 고대근동의 종주권<從主權>형태를 볼수 있는데 이것은 구약의 계약문서들에 대한 구조적인 형태와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각종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 근동일대의 역사문서들을 통하여 보증되어지고 있다.

③ 성경의 구조적 단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에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내려진 말씀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각각의 구약성경들을 통하여 전해질 때에 거의 같은 구조적 문맥을 형성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에 시대와 장소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같은 구조적 문맥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단일한 구조적 문맥은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④ 그리스도의 입증.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서 언제나 구약성경을 인용하였고 또한 구약성경의 신적권위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마4:4,7,10;5:17,18;11;10;21:13,42;26:31> <막12:10,11,24> <눅24:25,44> <요10:35>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구약성경 인정과 인용은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2) 신약정경의 결정원리.

① 그리스도의 말씀.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결정함에 있어서 그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말씀이냐? 하는 것은 당연한 요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심에 있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였으나 구약성경의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는 대신 하나님과 자신의 말이 곧 하나임을 천명하였다.
<....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22>라는 식으로 <권세 있는 자-막1;22>로서 가르치셨던 것이다.
복음 전파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파하였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정경결정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어떠한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② 사도적 권위.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로 선발되어진<진리의 보수자> <진리의 보존자> <진리의 보전자>들이다. 그들의 전하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그들의 기록 문서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정경 결정은 그것이 곧 <사도들의 말씀>이냐? 하는 것과 그것이 곧 <사도들의 기록>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③ 내용의 보편성.

신약성경의 정경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하나의 원리는 그것의 내용이 과연 보편타당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성경의 보편성<Universality>이란 그것이 기독교 전체에 보편적으로 인정 되어지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주로 교회의 통일된 <신조>나 <교리>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문서의 내용이 과장되어진 것이나 전설적 신화적인 것, 그리고 비상식적인 것 등등은 정경에서 제외되어졌으며 교회회의들을 통하여 확립되어진 신조나 교리에 어긋나는 것도 정경에서 제외되었다.

④ 성경의 영감성.

성경이 정경으로 정립되어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또한 최종적인 원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과연 <성령하나님>의 영감<조명>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기록문서의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결코 정경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6. 성경의 해석.

1) 성경해석의 역사.

(1) 유대인들의 성경해석.

구약시대에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은 서기관들과 랍비들의 임무였다. 서기관들과 랍비들은 선민사상에 의하여 성경을 해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 맞추어 해석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비극을 자초하였다. 저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했더라면 다윗과 솔로몬 같은 자들을 성군으로 받들어 섬기지 않았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구약 시대 마지막 교법사였던 힐렐<Hillel> 가말리엘<Gamaliel> 샴마이<Shammai> 등등의 성경 해석을 통하여 입증된다. 힐렐은 탈무드 체계를 창시한 사람으로서 가말리엘의 스승이며 조부<祖父>이다. 그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언제나 이스라엘과 연관된 하나님을 전제하였고, 따라서 절대적 왕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힐렐의 신학 사조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힐렐학파의 후계자이며 손자인 가말리엘에게서 신학을 전수 받았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한 것은 그들의 주장이 이스라엘적인 성경 해석과 완전히 반대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스라엘적 성경 해석을 고집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거부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 해석은 서기관과 랍비들의 성경 해석과는 정반대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적 차원에서 성경을 해석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 섭리의 핵심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제한하는 유대인들을 크게 책망하였고 그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거부하였던 것이다.

(3) 사도들의 성경해석.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교육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신학적 경륜이 없었다. 때문에 저들의 성경 해석은 랍비들의 해석과 같은 차원에 속했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 중에 공식적인 랍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그러나 바울을 제외한 다른 사도들도 성경 해석에 있어서 랍비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들의 종교생활 자체가 랍비들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는 랍비주의적인 해석 방법들이 등장한다<롬9:25> <갈3:16> <히2:1>.

(4) 교부 시대의 성경해석.

초대교회 시대 교부들의 성경 해석은 유대적이거나 사도적인 것이 아니라 헬라 철학적이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중심의 동방 교부들은 성경을 헬라철학으로 해석함으로서 기독교 신학을 크게 오류 시켰다. 반면에 칼타고와 힙포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부들은 교회의 전통과 권위에 입각하여 성경을 해석함으로서 교권주의적 기독교 신학을 발전시켰다.

(5) 중세기독교의 성경해석.

중세시대<어거스틴에서 종교개혁까지> 동안의 성경 연구는 거의 수도원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당시의 수도원 관계자들은 대체적으로 학력이 짧았으며, 신학보다는 신앙 중심이었고 교회 중심이었으며 교권주의 적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성경 해석으로 인하여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는 크게 확장되었던 반면에 성경의 진리는 점점 오류되고 왜곡되었다. 교회는 완전히 교권 주의적 독재가 성행하는 가운데 성경의 메시지는 실종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6) 스콜라 신학자들의 성경해석.

A.D. 1천년 경에 이르러 후대의 르네상스<Renaissance>를 예고하는 지적 각성 운동이 종교계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 각성 운동은 전통적인 교권주의의 한계를 초월하지는 못했고 다만 헬라 철학의 원리에 의존한 영역적<演繹的>인 종교 철학을 산출하였는바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스콜라 신학이다. 이 운동은 사실상 교부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전통과 해석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스콜라 신학은 거의 전적으로 우의적 해석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더 나아가서 헬라철학의 변증법을 적용함으로서 성경의 진리를 더욱 왜곡시켰다. 스콜라 신학을 주도한 사람은 캔더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Anselmus>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였다.

(7) 종교 개혁자들의 성경해석.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와 전통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의 중심을 성경에 두었고 성경의 해석을 교회의 전통에 두지 아니하고 성경 자체에 두었다. 종교 개혁자들 중에 대표적인 성경 해석학자는 루터와 칼빈이었다.

① 마틴 루터<Martin Luther>

루터는 로마교회의 전통주의를 통렬하게 반박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부시대의 영향권아래 있었으며 특히 어거스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루터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자적 의미를 중요시 했으며 문맥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여 성경을 좀더 폭넓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② 죤 칼빈<John Calvin>

칼빈은 성경을 인본주의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적용하여 해석한 신학자였다. 그는 특히 역사적인 면을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그것은 그의 저작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역사적 자료의 부족 때문에 보다 훌륭한 성경 해석을 하고자하는 열망에 버금가는 성경 주석을 쓰지는 못했으나 본문의 역사적 관련성을 언제나 강조하였다. 칼빈의 성경 해석에 의하여 <기독교의 본질><기독교의 사명><기독교적 국가관> <기독교적 사회관> 등등의 신학 사상들이 보다 성경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계시의 점진성과 구약 성경에서 신약 성경으로 계승되는 하나님의 섭리적 메시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기독교 신학 역사상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많이 찾아 낸 신학자로 인정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분명하게 규명하지는 못했다.

(8) 현대의 성경해석.

현대에 이르기까지 개혁주의 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자들<특히 칼빈>이 수립한 하나님 주권주의적 성경 해석을 전통적으로 지켜왔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는 성경을 오직 구속사적 차원에서만 해석함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 계시인 성경의 메시지를 지하실에 매장시켰다. 그리하여 현대 기독교는 칼빈에 의하여 수립된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사명> <기독교적 국가관> <기독교적 사회관> 등등의 신학사상을 더욱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크게 후퇴시켰다.

2) 성경해석의 방법.

기독교 역사에는 앞에서 고찰한 것 이상의 다양한 성경 해석의 역사들이 있었다. 기독교 역사의 성경 해석들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지식과 상식을 주는 것이며 또한 성경 해석의 방법론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논증하고자하는 것은 성경 해석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보다는 성경 해석의 적절한 방법론이다. 따라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증하지 않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성경 해석의 방법론을 논증하기로 한다.

(1) 문법적 해석법.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으로 주어졌을 때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할 때에 당연히 인간의 언어로 주어진 원리에 의하여 문법적인 해석이 필요하게 된다. 성경을 문법적으로 해석할 때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문장이 어떤 것을 설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고찰하여야 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성경이 어떤 문법으로 기록되어 있는가를 고찰하여 그 문법이 의미하는 바를 살리어 해석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가장 유의할 것은 문장을 형성하는 품사<品詞>인데 그 품사의 사용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따라서 성경을 문법적으로 해석할 때에 그 점에 유의해야 한다.따라서우리는성경을기록한히브리문학,헬라문학을특별히연구해야한다. 성경은 특히 하나님의 섭리를 계시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문법적 특성이 있다.

① 교리적....신학적 정립을 요구하는 교리적인 내용
② 신앙적....신앙적 정립을 요구하는 내용
③ 교육적....윤리적, 도덕적, 교훈적 내용
④ 소명적....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시는 것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소명의식을 일깨워 주는 내용
⑤ 사명적....하나님의 종 또는 교회에 주어지는 사명적 내용
⑥ 명령적....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
⑦ 비유적....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비교적인 예화를 사용하는 방법
⑧ 풍유적....하나님의 뜻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방법
⑨ 은유적....하나님의 뜻을 지정된 자들에게만 알리기 위하여 은밀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
⑩ 묵시적....하나님의 섭리를 공개하지 않기 위하여 일정기간 동안 감추어 두는 방법
⑪ 강조적....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문법
⑫ 환유적....정신적인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문법
⑬ 제유적....물질적인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문법
⑭ 상징적....어떤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문법
⑮ 예표적....미래의 어떤 것을 의미, 또는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
* 점진적....일시에 확정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진행시키는 방법
* 역사적....실제적인 사실성을 증명하는 방법
* 전통적....실제적으로 계승 되어지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

(2) 역사적 해석법.

성경이 하나님의 섭리적 계시라는 것은 이미 전제되어진 것으로서 의심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해석자는 성경의 역사성을 면밀하게 고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의 역사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역사성을 상세하게 고찰함으로서 성경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참 메시지를 바로 알기 위함이다. 따라서 해석자는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지리적, 국가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예술적, 종교적, 풍습적, 전통적, 등등의 역사성들을 고찰해야 한다.

(3) 신학적 해석법.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 중에 절대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것이 신학적 방법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총체적인 집합이므로 성경 해석자는 성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적 섭리를 교리<조직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앞장에서 논증한 성경해석 방법들이 무시되어져서는 안 되지만, 그 방법들은 사실상 참고 되어져야하는 반면에 신학적 해석방법은 절대적 필연성을 갖는다. 기독교가 일반 종교와는 당연히 구분되는 또 다른 차원의 종교적 특별성을 갖는 것은 기독교는 일반 종교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완벽한 절대적 교리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완벽하고 절대적인 교리 체계는 오직 성경에서 인출되어진 것이다.

3) 성경해석의 원리.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은 독자적, 독립성을 가질 수 없다. 성경의 해석이 만약에 독자적, 독립적 특성을 갖게 된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와는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경이 문자적, 또는 문법적인 차원을 참고로 하여 교리적, 조직 신학체계를 이루는 해석을 통하여 매우 훌륭하게 정립되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에 하나님의 목적하는바가 제외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경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이와 같은 원칙을 무시하여 왔다.

거의 대부분의 성경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외면하고 오직 <하나님의 인간구원>에 입각한 성경 해석만을 고집해온 것이다. 물론 때때로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했으나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을 위한 섭리>로 인식하지 않고 <인간을 위한 섭리>로 격하시켜 버렸다. 때문에 수많은 성경 주석들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류구원>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로 결론지어져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아야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성경 해석의 원리를 제시한다.

(1) 하나님의 주권.

우주 만물의 역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존재한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떠나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성경은 언제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있으며 인류 역사를 포함한 우주적인 역사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또한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하는 해석일 때에 비로소 바른 해석이 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일점일획의 하자라도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해석이다.

(2) 하나님의 속성.

성경 해석의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속성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존성, 영원성, 불변성, 불멸성, 완전성, 절대성, 무한성, 무량성, 유일성, 거룩성, 공의, 자비, 사랑,> 등등의 절대적 속성들을 선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이 제외되는 성경 해석은 절대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하나님의 속성이 제외된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섭리.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오직 순수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이 아담으로 시작되는 인간의 역사를 말하고 있고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있으며 사도들로부터 출발하는 복음의 역사를 말하고 있으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되어지는 하나의 영역적 역사일 뿐이다. 성경은 결코 그들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아우르고 이끌어가면서 당신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성경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예표하고 상징하며 신약 성경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죄제를 중심으로 하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고 선포하고 있지만 성경이 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당신의 섭리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곧 성경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목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가 배제되어진, 그리하여 인간의 구속적 차원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차원에서 성경이 해석되어 진다면 그것은 기독교와 무관한 것이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다.

7. 한글성경.

1) 한글 성경의 기원.

한국<조선>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 될 때에 여러 경로를 통하여 한국에 성경이 전래되었으나 그것은 모두 한문성경 이었으므로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움이 많았고 따라서 한글 성경의 번역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게 되었다. 초기 한글성경 번역은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인데 한글 성경 번역은 선교사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바 그 대표적인 것이 <로스-Ross>역 성경과 <이수정>역 성경이다. 로스목사는 백홍준, 김진기, 서상륜등과 함께 1882년 봉천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출판하였다. 한편 이수정은 홍문관 교리로서 농학<農學>연구를 위하여 일본에 갔다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쯔다>박사에 의하여 기독교인이 되었고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enry Loomis>목사의 권고로 한글성경 번역을 착수하였다. 그는 1883년에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를 완역하였고 이어서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번역하였다.
1885년 초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가 동경에서 이수정에게 한국말을 배운 후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에 왔다.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한글성경의 번역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 아펜셀러, 스크랜튼이 1887년에 한국성서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893년에는 언더우드, 아펜셀러, 스크랜튼, 트롤롭, 게일, 레이놀즈, 등이 주축이 되어 공동성서 번역 위원회를 조직하여 성경번역을 전개하였다.

2) 공인번역 성경.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글성경이 출간되었으나 오늘날과 같은 신, 구약 정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미흡하였다. 그리하여 1900년에 신약성경을 완역하였으나 사정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완전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고 1908년에 김정산, 김명준, 이창직 등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성경번역 위원회가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1910년 4월 2일 오후 2시에 드디어 한글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완료되었고 1911년에 그것이 출간되었으며 동시에 신약성경과 합본된 성경전서가 출간되었다. 그 후 1912년에 성경개역위원회를 결성하였고 1937년에 드디어 공인개역 성경을 완간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제20장. 교회.

우리는 이미 앞장<제3장 기독교>에서 범 기독교적 차원의 <교회>에 관한 신학적인 문제들을 정립하였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개 교회 중심에 관한 신학적인 문제들을 정립한다.

1. 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님 자녀들의 가정이다.

일반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에 교회는 하나의 집단사회이다. 그러나 교회는 일반적인 조직사회와는 구별된다. 교회는 하나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구원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자녀로 삼으셨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하나님 자녀들의 가정이다. 성경은 성도들을 피차에 형제라고 선포함으로서 교회가 하나님 자녀들의 가정임을 다양하게 증거 한다<마23:8><행15:22><롬9:28><고전6:5><고후6:15><벧전2:17><벧후5:9>.

(1) 성도들을 자녀 삼으신 이유.

①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가장 확실하게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고 선포하시고 또한 <피의 값으로 사신 자녀-행20:28;고전6:20;고후6:18연합>라고 선포하신다. 인류 사회에 현존하는 관계에서 가장 최고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법률적인 것이나 행정적인 것으로는 분리될 수 있으나 인륜<人倫> 또는 천륜<天倫>으로는 절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부모 자녀의 관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법적, 행정적으로 불가능하며, 신분과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로고스 신학>을 통하여 인간과 부모 자녀의 관계를 성립하셨다.
로고스 신학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성을 선포하는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하나님의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② 성도들 간의 관계를 가장 확실하게 하심이다.

인류 사회에 현존하는 관계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 다음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는 형제자매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녀로 삼으신 것은 성도들이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자매의 혈연적 관계 하에 있게 하심이다. 로고스 신학 안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모든 자녀들은 당연히 피차에 형제자매가 된다. 그리고 이때의 형제자매 관계는 성도와 하나님의 부모자녀 관계가 다만 법적 행정적 차원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맺어진 천륜적 혈연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형식적, 법적, 행정적 관계 하에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한계를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라-레19:18;마22:39>고 정해 주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웃보다도 더욱 긴밀하고 절대적인 천륜적 혈연 관계인 형제자매에 대하여 어떠한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2)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자녀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만고불변의 사랑이다. 성경은 자녀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세세하게 증거한다.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에 대한 선포이며 계시이지만 성경 전편에 흐르는 하나님의 자녀 사랑은 헤아리기 민망할 정도로 지극정성이시다.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 주셨던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용서하셨던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얼마나 무한한 사랑을 주셨던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그 누구도 감히 따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자녀 사랑은 정녕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 기록한다 할지라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3) 교회는 형제들의 가정이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으므로 각 교회들은 피차에 형제들의 가정이 된다. 따라서 각 교회들은 다음과 같이 형제로서의 우애를 나누어야 한다.

① 기쁨과 아픔을 공유해야 한다.

교회는 형제로서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 형제 교회의 기쁨은 곧 모든 교회들의 기쁨이며, 형제교회의 아픔은 곧 모든 교회의 아픔이다. 따라서 형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는 모든 교회들이 한마음으로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형제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교회들이 그 교회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형제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다.

②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돌보아야 한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돌아보는 것은 형이 아우를 돌보는 것이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자로 호의호식하는 형이 가난한 아우를 돌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다.

③ 모든 행사를 연합하여 진행한다.

모든 교회는 크고 작은 행사를 연합하여 진행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연합하여 일하면서 기쁘고 즐거워 하는 것을 또한 기쁘고 즐거워 하신다.

2)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성경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선포한다. <렘2:22><겔16:23><호3:1-3><아가서><마9:15;22:10;25:1-13><요3:29><고후11:2-4><엡5:21-31><계17:,18장>
이와 같은 성경의 선포는 교회가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음을 법적 행정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우상숭배는 곧 신학적, 신앙적 간음죄에 해당된다. 교회의 신실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혼 준비를 예표하며,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림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 예표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혼인잔치로 예표 되고 결혼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으로 예표 된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매했다고 한 것<고후11;2>과 고린도 교회가 다른 복음을 택하였다고 책망한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오직 유일무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만 존재해야 한다.

3) 교회는 사단의 침략을 막는 보호성이다.

교회는 나날이 흉폭 해 져가는 사단의 궤계로부터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는 견고한 성이다. 사단은 아담을 격침시킨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자녀를 공격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사이비 이단들을 사주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 오류 시키고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였으며, 공명과 부귀영화에 심취하여 눈과 귀가 멀어버린 비 진리자들을 사주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하고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였다. 교회는 이러한 사단의 궤계로부터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자녀를 보호, 보존, 사수, 보전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하나님의 보호성이며 방주인 것이다.

4)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진행하는 도구이다. 교회가 다양한 사명과 은사와 능력을 부여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진행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1) 교회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고도 당신의 섭리를 진행하실 수 있다. 천사를 동원하실 수도 있고 당신이 직접 진두지휘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고 교회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에는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다.

① 자녀들의 형편을 고려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인류 사회에 직접 개입하시거나 또는 천사들을 동원하시어 섭리 역사를 진행하신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발생하게 된다.

A.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자는 죽음을 당한다.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뵈면 죽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인간은 아담과 하와뿐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은 그들이 범죄로 인하여 징계 받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기 이전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래 모든 인간은 영적 무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죽게 되었다.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 모세, 야곱 등등을 비롯한 몇몇이 직접 대면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실체가 아니라 천사로 낮추어 오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영적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류사회에 개입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이다.

B. 천사들이 강림하면 혼란이 발생한다.

천사들이 강림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면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a. 천사를 섬기게 된다.

천사들이 강림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면 많은 사람들이 천사를 섬기게 되며 이때에 하나님의 자녀들도 천사를 섬기게 된다.

b. 천사와 야합한다.

천사들이 강림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면 사이비 이단, 비 진리자 등등이 천사와 야합하여 각종 종교를 설립하거나 또는 천사를 가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등등의 혼란을 야기 시킨다. 특히 영상 매체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컴퓨터, 영상, 녹음기술 등등의 기능을 총동원하는 종교적 첨단 사기행위가 난무할 것이다.

② 자녀들의 성품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완전하게 성화되지 않으므로 상태적으로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자녀들의 삶은 아직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본성의 영향을 받는다.

A. 교만.....인간은 자신의 실력, 능력, 지혜, 지식, 외모, 등등에 대하여 과신하여 각종 교만함에 스스로 도취해 있다.

B. 욕망.....인간은 재물, 명예, 권력, 권세, 이성, 등등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욕망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다.

C. 시기 질투.....인간은 타인이 자신보다 우월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시기, 질투, 중상, 모략, 갈등, 경쟁, 반목, 투쟁, 분열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이러한 인간적 본성들로 인하여 교만, 욕망, 갈등, 경쟁, 반목, 투쟁, 분열적인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러한 삶은 자녀들을 독단과 독선으로 몰아 부치어 자녀들의 사회를 불화, 황폐, 병폐, 무질서하게 하여 결국은 패망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하나의 조직체인 교회로 묶으시고 그 교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으로 연결시키신다. 성경은 이러한 교회 연합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각각의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룬 유기체-지체>라고 선포한다<롬12:5><고전12:27><엡1:22-23><골1:18>. 이와 같은 진리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교회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A. 하나님과 교제한다.....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문제를 기도한다.

B. 하나님을 바로 안다.....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실하게 정립한다.

C. 자신을 바로 안다........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가운데 자신의 속성, 신분, 지위, 위치, 등등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실하게 정립하여 그 신분, 지위, 위치, 등등에 적합한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산다.

D. 한 민족임을 안다.........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가운데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한 민족인 것을 깨달아 동족으로서의 공동체적 삶을 산다.

E. 형제임을 안다...........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가운데 모든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임을 깨달아 형제자매로서의 가족적 삶을 산다.

③ 자녀들에게 백보좌의 심판을 예비하게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교회를 통한 사명적 삶을 살게 하시어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 때에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신다.

(2) 도구의 명칭과 위상.

도구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호칭이 아니다. 도구라는 명칭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들이 자신을 스스로 낮춘 겸손한 명칭이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종들을 예우하시고 높이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역사에 부름 받아 세운 자들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명칭하신 <나의 종> 곧 <하나님의 종>은 노예나 하인과 같은 반열의 <일반적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와 능력과 속성에 대비<對比>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은 인류사회에 현존하는 어떤 직분자들 보다도 높은 위상과 명예와 권위와 권세와 권력을 소유한 영광스러운 존재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모든 교회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최고의 위상과 명예와 권위와 권세와 권력을 소유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의 도구적 위치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으로 존재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법과 질서와 섭리에 따라 행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모든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구로 존재하고 사용될 뿐, 결코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 교회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방법.

하나님 종들의 위상과 권위가 아무리 높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일 뿐 하나님께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다만 명령에 절대 순복하는 종들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종들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통치하시면서 그들을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절대 주권으로 다스리거나 통치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 위에 무소불위의 절대적 주권으로 군림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시지 아니하시며 당신의 종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명령에 복종하는 것도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종들이 어떤 보상을 바라는 차원에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종의 입장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녀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기 위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종의 위치에 두시기보다는 자녀의 위치에 두셨고, 심지어는 동반자의 위치에까지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예우하고 존중하시기 위하여 상명하복의 주종관계를 진행하시지 않고 그들에게 각종 은사와 능력을 부여하셨으며, 그들의 사역 현장에 항상 함께하시어 그들의 사역을 영광스럽게 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예우하시고 존중하시어 교회가 거룩하고 존귀하고 영광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에게 각종 은혜와 은사와 능력을 부여하시며 그리하여 교회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위상을 높이고 존귀와 영광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게 하는 불의와 비 진리를 행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아끼시고 존중하시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그러한 교회들을 즉시즉시 징계하시지 않고 참으로 오래 참으시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기다리신다.

5) 교회는 복음전파의 사령부<전진기지>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전진기지이며 사령부이고 총독부다. 모든 개교회들과 국내외의 선교 단체들은 복음 전파의 전진기지 들이며 교회들의 각종 연합기관들은 복음 전파의 크고 작은 사령부들이고 각국에 설립된 교회의 총연합체는 하나님 나라의 총독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무조직하에서 무질서하게 독단적으로 각개 사역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제도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연합사역하는 것을 원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 그리스도는 종들과 교회의 합력을 명령하였고 사도들도 종들과 교회의 합력을 촉구하였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께서는 현존하는 모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단일체계로 연합하는 가운데 일사 분란한 합력 조직체계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과 질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단일체제를 이루어 일사 분란한 합력체제를 이루어 모든 일을 진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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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독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한 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고 있다. 저들은 각자의 취향과 욕심에 따라 수많은 교파로 분열하였고 교파는 다시 교단으로 분열하였다. 한분 하나님의 기독교가 한분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하에 있어야 할 기독교가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된 것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며, 자신들의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는 어서 속히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의 단일 체제를 이루어 하나님의 섭리에 충실해야 한다.

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서 한 몸이다<롬12:4-5><엡4:25><고전6:15> <고전12:12-27>. 따라서 모든 교회는 한 몸으로 공존<共存>하며 공분<共分>하며 공생<共生>하며 공유<共有>하며 공활<共活>해야 한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에게 너그러운 형, 자비로운 누나, 사랑의 형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큰 교회는 작은 교회와 연합하여 일할 때에 작은 교회가 소외감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고 다독여 주어야 하며 큰 교회 목회자들은 작은 교회 목회자들 앞에 군림하거나 과시하거나 나타내는 언행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언행은 작은 교회들에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며 그리하여 한 몸을 이루는 연합을 파괴한다.

2. 교회의 종류.

하나님의 교회는 두 가지의 유형으로 현존한다. 하나는 천상의 교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상의 교회들이다. 천상의 교회는 오직 단 하나로서 지상 교회를 통하여 영입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완전하고 영원하다. 반면에 지상의 교회는 장차 천상의 교회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종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완전하고 임시적이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각각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고 있으나 언제나 영적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 반면에 지상교회는 영적 유기체로만 형성되어져서는 안 되며 반드시 실제적, 현재적 유기체로 구성되어져야 한다. 만약에 지상교회가 영적 유기체로만 존재하고 실제적, 현재적 유기체로 구성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단체에 불과할 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각각의 지체적 교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천상교회에 부여된 사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제약을 받는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천상교회를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으며 따라서 천상교회는 우리들에게 불가견적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교회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직접적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또한 지상의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적 삶을 살게 되므로 지상교회는 우리에게 가견적 교회이며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현장 교회이고 존귀하고 고귀한 사역적 현장이다.

3. 교회의 사명.

교회의 사명은 제2장의 기독교 사명을 통하여 정립되었지만 교회 사명의 현재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장에서 다시 한번 상세하게 정립한다. 그러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이미 정립한 것은 생략한다.

1) 진리의 사수와 보존.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에게 진리<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주시고 교회로 하여금 비 진리자들과 사이비 이단자들로부터 진리를 사수하고 보존하게 하셨다<딤전1:3,4><딤후1:13><딛1:9-11>. 따라서 교회는 비 진리자들과 사이비 이단자들이 진리를 오류, 왜곡할 때에 즉시 그들의 오류와 왜곡을 신학적으로 지적하여 그들의 오류와 왜곡을 근절하고 추방하여 진리를 사수하고 보존해야 한다. 교회는 또한 비 진리자나 사이비 이단자가 아닐지라도 신학적 경륜이 부족한 자들이 진리를 오류, 왜곡하면 즉시 그것을 경계하고 지적하여 바로잡아 줌으로서 진리를 사수하고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이 신성한 책임과 의무를 온전하게 이행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 수세기 동안에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성경에 대한 적대적 비평을 받아들였고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에 동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자에 이르러서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이 도처에서 마구잡이로 오류 되고 왜곡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근절하고 바로 잡아야 할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은 자들이 침묵하거나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과 연합하고 야합한다. 신학이 없는 부흥사들이 비 진리를 마구 쏟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기가 있는 부흥강사라 하여 그들을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여는가 하면 그들과 함께 부흥강사로 활동하는 것을 오히려 명예와 자랑으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 신문사, 기독교 잡지사, 기독교 출판사들은 광고를 게재하기 위하여 수많은 비 진리자들을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로 소개한다.
기독교 관계 언론들이 광고 때문에 성락교회 김기동, 구원파 박옥수,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등등을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2) 진리의 보전.

진리의 보전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대한 <생육, 번성, 충만>으로서 모든 교회가 에덴교회를 통하여 일률적으로 받은 공동적 사명이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일률적으로 받은 공동적 사명이다. 성경은 이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따라서 모든 교회는 전 세계에 진리<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전파하여 온 세계가 진리로 <생육, 번성, 충만>하게 해야 한다. 진리의 보전 사명은 결국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것으로서 전도 및 선교의 사명이다.

3) 복음에 의한 정복과 통치.

복음에 의한 정복과 통치는 모든 교회가 에덴교회를 통하여 일률적으로 받은 공동적 사명이다. 성경은 이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모든 교회에는 진리<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로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사명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진리로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으로만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 사회에는 기독교인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비 기독교인들이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진리와 기독교인들의 실천 신앙적 삶을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사명을 진행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교회적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쫓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리<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로 무장시켜 그들을 사회 각 영역에 빛과 소금의 전사들로 파송함으로서 그들을 통하여 밝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온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금까지 오직 구원 문제에만 매달려 이와 같은 사명을 외면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여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와 사회를 구분하여 교회가 사회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진리는 기독교, 비기독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에 적용되며 특히 교회에 부여된 복음에 의한 정복과 통치는 기독교, 비기독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에 동일한 원리로 적용된다. 문제는 모든 영역에 투입되는 하나님의 종들의 <신학과 신앙과 인격과 사명감>이다. 각 영역에 투입되는 하나님의 종들이 진리로 완전무장하여 <빛과 소금>의 <신앙적 군사>로서 <하나님의 성정>을 본 받은 <인격적 삶>을 살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사명적 삶을 산다면 세상은 현세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천하 만민이 <하나님의 영광>을 외칠 것이며, 드디어 온전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각 영역에 투입되는 하나님의 종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하는> 적 그리스도적 삶을 산다면 세상은 부패와 타락 속에서 더욱 암담하고 참담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결론을 이룩한 지역의 교회들로부터 촛대를 옮기실 것이며 이때에 사명을 외면한 교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결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4) 복음의 교육과 성도의 관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교회들에게 성도의 복음 교육과 신앙적 관리를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교회는 <마28:19-20>의 명령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사명을 이행한다.

(1) 세례의 시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에 따라 성도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 교회가 세례를 시행하는 것은 성도에 대한 법적 행정적 관리이다. 성도들은 세례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법적, 행정적으로 보증 받고 확인받는다.

(2) 복음의 교육.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에 따라 성도들에게 복음<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가르친다. 교회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과는 다르다. 교회 교육은 신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그 학문은 하나님에 관한 것으로서 일반 학문과는 전혀 다르다. 신학은 어떤 이론이나 학설이나 사상 등등의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이다. 따라서 교회가 가르치는 신학은 절대수직의 신학 원리에 근거하여 주입식 교육이 되며 교육받는 자는 다만 아멘으로 응답하게 된다. 교회 교육은 또한 교회의 역사를 가르치지만 그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로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요 이미 예고되어진 미래까지를 포함하는 전 우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이론, 상식, 역사적 진실, 등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이고 어떻게 결론되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교육은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가 왜,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그렇게 시작되고 진행되고 결과 되어진다는 것을 가르친다. 교회 교육은 결국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증거이고 선포이다. 따라서 교육하는 자는 오직 진리<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로고스 신학>를 가르쳐야 하며 교육 받는 자는 오직 아멘으로 순종해야 한다.

① 교육의 대상.

교회는 영아에서 장년에 이르기까지, 요람에서 장례에 이르기까지 초신자에서 직분자에게 이르기까지의 모든 성도들에게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 직분자들 중에 기독교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이 매우 많다. 그것은 교회가 그들에게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이 교육에 불참했기 때문이다.

② 교육의 범위.

교회 교육은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기독교 신학, 기독교 신앙, 기독교 역사, 기독교 사명 등등을 교육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 성도들 중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이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오류에 빠진 자들도 매우 많다. 그것은 교회가 지금까지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③ 교육의 구분.

교회는 성도들을 교육할 때에 교육의 대상에 따라 교육의 질<質>과 양<量>이 달라야 한다. 교육의 대상인 성도들의 입장과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일관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을 하면 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실시해야 한다.

A. 일반 성도에 대한 교육.

교회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반면에 일반 성도의 교육은 다음과 같은 구분 하에 실시되어야 한다.

a. 신앙의 경륜적 구분. b. 년령적 구분. c. 학력적 구분.

B. 직분자들에 대한 교육.

교회는 직분자들에 대한 특별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물론 직분자들이라 하여 일반 성도들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성도들에 대한 교육을 일차적으로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반면에 그들은 직분자로서 교회 행정을 비롯한 전반적인 영역에 종사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그들에게 교회법, 교회 행정, 교회 회의, 선거, 헌금 집행, 등등을 비롯한 특별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직분자들에 대한 특별 교육은 교회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실시할 수도 있으나 교회 연합적 교육 기관을 통하여 교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C. 지도자들에 대한 교육.

교회는 성도들 중에 지도자적 사명을 받은 자들을 구별하여 그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지도자라 함은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로서 하나는 교회적 지도자로서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이고 다른 또 하나는 사회적 지도자로서 <정치, 경제, 교육,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등의 사회적 영역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다. 교회는 이러한 지도자들을 특별히 구별하여 그들의 사명에 적합한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그들을 특별 관리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야 한다.
지도자들에 대한 교육은 교회 내부에서 실시하는 교육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들은 교회 내에서 실시하는 일반 성도에 대한 교육과 직분자들에 대한 교육을 이수한 후에 그들의 사명과 적성에 따라 전문 교육기관에 위탁하여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 지도자들 중에 <목사, 전도사>는 정규 신학교를 통하여 교육하고 <장로, 권사>와 <정치, 경제, 교육,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등의 사회적 영역을 이끌어 가는 사회적 지도자들은 노회 또는 총회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신학 교육과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실시한다. 따라서 노회 또는 총회는 그들을 교육할 수 있는 상설 교육장을 설립하고 전문 교육자들을 양성하여야 하며 교육 대상들의 형편에 맞는 교육 계획을 수립하여 년중 무휴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3) 성도의 관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에 따라 성도들을 관리한다. 교회의 성도 관리는 물리적인 관리가 아니라 진리<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로고스 신학>에 의한 관리이다. <로고스 신학>에 의한 관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 신학에 입각한 관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빈들을 숙소로 하고 광야를 식탁으로 하는 근검절약<勤儉節約>의 청빈한 삶을 살았고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까지<요13:4-10>의 철저한 실천 신학을 통하여 성도 관리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로고스 신학>에 의한 관리는 곧 진리<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로고스 신학>에 대한 교육의 연장이며 결론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로고스 신학>에 의한 성도 교육 및 관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 도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눅9:5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8:10>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실천적 삶을 통한 교육 방법에 따라 교회의 성도 관리는 교육자<지도자-목회자>들의 <로고스 신학>적 실천 신앙을 통하여 진행되어진다. 성도들을 신학으로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적 삶을 인도하는 교육자<지도자-목회자>들은 신학적, 학문적, 논리적으로만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본을 보여 주셨던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을 통한 실천 신앙적 교육과 성도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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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대교회는 <로고스 신학>에 의한 성도 교육 및 관리 사명을 대부분 이행하지 않는다. 현대교회 교육자<지도자-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은 가르치지만 <로고스 신학>적 실천 신앙을 통한 성도교육 및 관리 사명은 이행하지 않는다. 현대교회 교육자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로고스 신학>적 삶과는 전혀 대조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현대교회 교육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3-7>

5) 교회의 설립.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땅 끝까지의 전 세계에 교회를 설립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위의 말씀 속에는 땅 끝까지의 전 세계에 교회를 설립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초기 신약교회 시대에 사도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이 로마 제국의 극심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한 것은 그것이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에게 부여된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사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성도 개인이나 또는 신앙적 단체들에 의하여 설립될 수도 있으나 교회의 법과 질서에 의하면 노회 또는 총회 주관 하에 설립되는 것이 원칙이다. 개인이나 신앙 단체들이 교회를 설립하면 그들이 교회의 재정이나 운영에 관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개인이나 신앙 단체들이 교회를 설립할 뜻이 있으면 자신들이 직접 교회를 설립할 것이 아니라 노회나 총회에게 일임하여 노회나 총회로 하여금 교회를 설립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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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는 이러한 교회 설립의 사명을 외면하거나 또는 교회설립 원리를 무시한다. 때문에 교회 설립으로 인한 여러 가지 비 진리적 오류들이 발생하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노회, 총회의 교회설립 외면.

군소 교단의 노회나 총회들은 노회나 총회가 연약하여 교회를 설립할 능력이 없으므로 군소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은 거의 대부분 사비<私費>로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큰 교단에서도 당연한 것처럼 실시되고 있다.

*. 비 진리적 관행.

목회자 개인들이 교회를 설립할 지라도 교회 설립 예배는 노회가 주관한다. 이때에 노회나 총회 임원들이 예배 순서를 맡아 참여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예배 순서를 맡은 자들에게 사례비를 지불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받은 사례비를 헌금하기도 하지만 어떤 교단의 노회에서는 사례비를 선불로 요구하기도 한다.

4. 교회의 형태.

1) 교회의 외적형태.

기독교 역사 중 최초로 건축된 교회는 이스라엘의 광야교회였다. 이스라엘의 광야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작고 간단하며 검소하였으나 교회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과 영광이 나타났다. 한편, 이스라엘의 광야교회 이래 현대교회에 이르는 동안 교회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그리고 인류 역사의 문화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외적 형태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뜻을 더욱 고집하였고 교회의 본질보다는 자신들의 취향을 내세웠으며 교회의 사명보다는 자신들의 목적에 더욱 충실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교회의 외적 형태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다. 따라서 기독교의 역사 속에 천차만별의 모습을 갖춘 교회들이 존재했으며, 그중에 수많은 교회들이 웅장함과 화려함과 예술적 아름다움과 가치 등등을 자랑하였다. 과거 로마 카토릭의 교회들도 그랬지만 현대 기독교 중에도 최고, 최대, 최상의 교회를 자랑하고 싶은 자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영광과 권위는 교회의 외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영광과 권위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에 비로소 나타난다. 교회의 외적 웅장함과 화려함과 예술적 아름다움과 가치 등등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다. 교회의 사명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의 외적 형태와 규모에 대한 기준을 함부로 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의 외적 형태와 규모가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에 충실하지 않고 인간적 취향과 욕심에 충실한 것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2)교회의 내적 형태.

교회의 외적 형태와 규모에는 어떤 특정한 규범을 제정하기 어려우나 교회의 내적 형태에는 일률적이고 이상적인 제도적 규범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교회의 내적 형태는 교회의 본질, 교회의 사명, 교회의 권위, 등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내적 형태에 존재하는 일률적이고 이상적인 제도적 규범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서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육 번성하여 충만함을 이루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육 번성하여 충만함을 이루지 못하고 철학, 문학, 과학, 등등이나 또는 인류 역사에 존재하는 영웅적 존재들의 교훈들을 더욱 선호하고 인정한다면 그곳은 이미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되어야 한다.

교회에 주어진 권위는 2가지로서 첫째는 제반법규와 질서이고, 다음은 도구<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권위는 오직 하나의 원리요 유일한 법률인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입각하여 행사되어진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어느 특정인의 물리적인 수단이나 또는 인간적인 권위, 권세, 명예, 등등에 의하여 정복되거나 장악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3) 하나님의 말씀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운영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운영되지 않고 어느 특정인의 물리적 수단이나 또는 인간적인 기술과 방법에 의하여 운영되고 관리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5. 목회자의 심방.

1) 목회자 심방의 원리.

목사가 성도들을 심방 하는 것은 목자가 양을 돌아보고 살펴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목사에게 주어진 당연 하고도 필연적인 사명이다. 그것은 성도에 대한 목사의 의무이고 책임이며 하나님께 부여받은 직분과 직무에 대한 순종이요 헌신이다. 목사가 성도에 대한 심방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며 직무태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한편 목사의 성도 심방은 교회성장에 많은 영향을 준다. 목사가 성도 심방을 열심히 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는 반면에 목사가 성도 심방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하면 교회가 침체 되거나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목사의 성도 심방은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로서 양을 돌보는 차원에서 진행 되어져야 한다.

한편 목회자의 성도 심방은 곧 하나님의 성도 심방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심방할 때에 그 심방의 실제적 주역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하나님은 두 가지 차원에서 성도들을 심방하신다.

(1) 성부 하나님으로 심방하신다.

하나님의 성도 심방이 성부 하나님의 심방이 되는 경우는 성도에게 권위와 능력으로 심방하실 때이다. 하나님께서 심방하는 성도에게 어떤 직분이나 직무를 부여하실 때에는 성부 하나님의 권위로 심방하시어 그들에게 직분이나 직무를 부여하신다. 이때에 하나님의 권능은 당연히 절대적인 것이어서 절대 거부할 수 없다. 따라서 목회자의 심방을 통하여 어떤 직분과 직무가 부여되면 성도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권위로 부여하신 것임을 알아 아멘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즉 목회자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때의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의 입장에서 성도를 심방하며 말씀도 종의 입장에서 선포한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목회자가 어떤 개인적 계략과 방법에 의하여 그러한 심방을 의도적으로 행사할 때가 있다. 이러할 때에 성도들은 그것을 양심의 자유<신앙의 자유> 원리에 의하여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목회자의 인간적 책략인가? 하는 것을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행사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은 지극히 순리적인 반면에 목회자의 인간적인 책략은 비 진리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심방하는 성도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실 때에는 성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심방하시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목회자의 심방을 통하여 성도의 질병이 치유되고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심방하시어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의 심방을 통하여 성도들의 문제가 풀렸을 때에 성도들은 그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만약에 목회자가 그 감사를 받으면 그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감사를 대신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 된다.

(2) 아버지 하나님으로 심방하신다.

하나님의 성도 심방이 아버지 하나님의 심방이 되는 경우는 성도에게 자비와 사랑으로 심방하실 때이다. 하나님께서 심방하는 성도에게 위로, 평안, 훈계, 교육, 권면, 등등을 하시기 위하여 심방하실 때에는 자비하신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심방하시어 그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즉 목회자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때의 목회자는 형제로서 성도를 심방하며 말씀도 형제의 입장에서 한다. 때문에 이러한 심방의 하나님 말씀은 선포가 아니라 권면이고 위로이다.

2) 목회자 심방의 방법.

목회자 심방의 신학 원리에 따라서 목사의 성도 심방은 다음과 같은 원칙 하에서 실시되어져야 한다.

(1) 계속적인 심방.

목사는 성도에 대하여 항상 주시하고 있어야 하며, 계속적인 심방을 통하여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평안을 누리도록 보살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춘계 대 심방> 또는 <추계 대 심방> 등등의 정기적인 심방제도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심방제도는 잘못된 것이다. 목사의 성도 심방은 정기적인 것이 아니라 수시적인 것이어야 하며 또한 계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목사의 성도 보살핌은 목자가 양을 보살피는 것과 같다. 목자가 양을 보살핌에 있어서 수시적이고 계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을 두어 정기적으로 보살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양<성도>을 무단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 인 것이다. 특히 정기심방 <춘계 대 심방, 추계 대 심방>의 진행 과정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가 형식적이다. 예배하고 성도의 근황 몇 마디 물어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심방은 심방이 아니라 차라리 목사의 순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공평한 심방.

목사의 심방은 모든 성도들에게 동등하고 공평하게 실시되어져야 한다. 목사의 심판이 공평하거나 동등하지 못하고 편애적 이거나 편파적인 것이 되면 교회 내에 편파적 편애적 불만감이 조성되고, 교회의 질서와 화평이 무너지게 된다. 심방은 부자와 가난한자, 직분자와 비 직분자, 신앙의 경륜과 연륜 사회적 지위, 등등에 구별이 없어야 하며 특히 교회나 목사에게 협조적이냐 비협조적이냐 하는 것에 영향 받지 않아야 한다. 목사는 오히려 여러 가지 차원에서 유약하고 부족한 성도들을 더욱 열심히 심방하여 그들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상처 받지 않게 해야 하며, 교회나 목사에게 비협조적인 성도를 더욱 열심히 심방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 불만을 갖지 않고 충성 봉사하게 해 주어야 하며, 어려움을 당한 성도를 더욱 열심히 심방하여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어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승리적 삶을 살도록 해 주어야 한다.

(3) 검소한 심방.

목사의 심방은 권위주의적 거창함이나 집권자의 초도순시 같은 위세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창한 심방 행렬은 비 기독교인들의 비난을 자초 할 뿐만 아니라 심방을 받는 성도에게도 부담을 준다. 심방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사람만 동행하게 하며, 거창한 식사나 호화스러운 접대 등으로 인하여 심방의 본래적 목적이 변질되지 않게 해야 한다. 목사의 성도 심방은 언제나 일상적인 부모형제의 방문과 같은 차원의 심방이어야 하는 것이다.

(4) 성실과 진심의 심방.

목사의 성도 심방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심방을 통하여 성도의 가슴에 그대로 전이 <轉移>되어지는 성실함과 진실함이 수반 되어진 것이어야 한다. 목사는 동역자들<교구장 또는 구역장>을 통하여 이미 심방할 가정의 근황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고 있어야하며, 그리하여 그 가정에 합당한 말씀을 통하여 위로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용기와 소망을 주고 감사하며, 그 가정의 문제가 교회 전체의 문제인 것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여, 온 교회가 그 가정의 아픔을 함께 나누게 하고 그 가정을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심방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실제적으로 힘을 합하여 그 가정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조처를 강구해야 한다. 형식적인 심방이나 의무적인 심방은 성도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주며, 특히 말씀의 교훈을 빙자하여 그 가정을 의도적으로 책망 하거나 비판 하거나 비난하는 심방과 자신의 감정을 은근히 적용하는 심방은 그 가정에 심한 충격과 분노를 유발 시키게 된다. 따라서 목사의 성도 심방은 진실로 그 가정을 위하고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이어야 하되, 지혜롭고 아름다운 것이어서 어떤 오해나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5) 사랑과 은혜의 심방.

목사의 심방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심방 이어야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또한 넘쳐야 하며 심방을 받는 자나 하는 자가 모두 기쁘고 즐거운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선포 되어지는 심방이어야 한다. 심방을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심방하시듯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심방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며, 그리하여 심방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심방을 받듯이 기쁘고 즐거워하며 다음 심방을 고대하고 기다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은혜와 자비가 풍성한 말씀으로 그 가정에 평안과 기쁨을 주고 하나님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로 그 가정을 위하여 축복하고 기도하며, 그 가정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고 그 가정의 아픔에 함께 고뇌하는 심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그리하여심방을마치고돌아서는목회자를보내는성도의마음이진정으로아버지하나님을배웅하는심정이되게해야한다.목사가 이러한 심방을 하게 되면 성도들은 목사의 이러한 심방을 통하여 용기와 소망을 갖게 되고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며 그러한 가운데 신앙의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승리적 삶을 살게 된다.

3) 심방의 오류.

현대 기독교 목회자들의 심방 중에 심방의 원리를 무시한 심방이 있는바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편파적 심방.

목회자들 중에 어떤 자들은 자신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성도들과 그렇지 않은 성도들 사이의 심방에 차별을 둔다. 자신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성도들에 대한 심방은 예배, 기도, 권면, 가족에 대한 관심 등등의 제반 문제에 세심한 배려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성도들에 대한 심방은 지극히 형식적이거나 또는 아예 심방 자체를 외면하기도 한다. 때문에 심방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상처 받는다.

(2) 보복적 심방.

목회자들 중에 어떤 자들은 자신에게 충성, 순종하지 않거나 또는 반대하는 성도들을 심방이라는 명목 하에 찾아가서 설교로 보복한다. 이때에 저들은 심지어 계획적으로 저주성 설교까지 함으로서 그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3) 형식적 심방.

목회자들의 심방이 지극히 형식적인 경우가 있다. 대부분 <춘계 대 심방> <추계 대 심방> 등등의 년례 심방의 경우, 형식적인 심방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정해진 시간에 심방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어 그러한 결과가 되기도 하지만 심방 자체가 년중 행사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4) 권위적 심방.

목회자들의 심방이 지나치게 권위적이어서 주위의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고 심방받는 본인도 상처받는 경우가 있다. 권위주의적 심방자들은 자신의 심방이 곧 하나님의 심방이라는 개념 하에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심방 받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영접하듯 자신의 심방을 맞이하라고 한다. 때문에 성도들의 대접이 소홀하면 매우 불쾌해하면서 그에 대한 책망을 한다. 이러한 권위주의 심방은 일반인들로부터도 많은 비난을 받는다. 근래에는 차량을 통하여 심방하기 때문에 눈에 잘 띠지 않지만 과거에는 도보로 심방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심방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었다. 목회자들이 심방할 때에 특히 <춘계 대 심방> <추계 대 심방>의 경우에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데 이때에 목회자들의 권위주의적 모습은 일반인들에게 오히려 혐오감을 주었다.

(5) 부담적 심방.

목회자들의 심방이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가 있다. 목회자들의 심방에 많은 인원이 대동하는데 특히 <춘계 대 심방> <추계 대 심방>의 경우에 많은 인원이 동원된다. 이때에 생활이 어려운 성도들과 재정적으로 약한 구역은 심방자들에 대한 접대 문제로 인하여 많은 부담을 갖게 된다.

(6) 심방 헌금 착복.

목회자들이 심방 때에 드려진 헌금을 착복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은 심방 헌금은 목회자의 분깃이라고 주장하면서 임의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분명 불법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을 착복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교통비나 도서비 명목으로 목회자에게 별도의 용채를 주는 것은 목회자의 분깃이지만 헌금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의 분깃이 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불법이며 악행이다. 그것은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저지른 범죄와 동일한 것이다.

6. 교회의 비 진리적 상태.

현대 기독교 교회에는 각종 비 진리와 오류적 상태들이 만연되어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교회 운영의 오류,

(1) 목회자들의 독단적 운영.

현대교회의 비 진리적 상태중 가장 심각한 것은 목회자들이 혼자서 독단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목회자 혼자 독단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교회에는 기관 조직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또는 기관 조직이 구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유명무실하여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교회의 기관들은 대부분 목회자의 독재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들러리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교회의 목회자는 특히 교회 재정을 목회자가 임의로 집행하며 구역도 목회자가 직접 관리한다. 목회자 혼자 교회를 이끌어 가는 교회는 성도들에 대한 교육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며 특히 초신자들에 대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목회자 혼자 교회를 이끌어가는 교회는 교회로서의 제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따라서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더 이상 성장하거나 발전하지 못한다. 이러한 교회의 목회자들은 교회가 성장 발전하지 못하는 점을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목회자 하나에게 주어진 성도 관리능력은 300명 이상을 절대 초월하지 못한다.> 저들은 교회가 각 기관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이외의 다른 직분자들이 교회 운영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러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목회자의 교회에 불과하다. 이러한 교회는 성도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참다운 기독교 성도가 아니라 목회자를 섬기는 목회자의 성도들에 불과한 것이다.

(2) 설립자들의 기득권 주장.

목회자들의 독단적 교회 운영과는 반대로 교회를 설립한 자들이 독단적인 교회 운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개인 또는 몇몇이 뜻을 같이하여 교회를 설립한 경우 그들이 교회 운영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교파 또는 교단에 가입하지 않고 교회를 사유화하면서 교회 운영을 자신들이 주관한다. 교단에 가입한 교회 중에도 교회 설립자들이 교회 운영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은 교회법을 무시하고 임의로 목회자를 교체하거나 또는 자신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목회자는 교묘한 벙법으로 퇴출시키며 성도들도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3) 교회 연합의 외면.

현대 기독교는 거의 모든 교단들이 자교회<自敎會> 위주의 교회 운영권을 행사한다. 따라서 모든 교회들이 자교회 위주의 정책을 시행하므로 교파 간, 교단간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같은 교파 같은 교단 안에서도 교회적인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총회, 노회 등등의 상급 기관에 교육국, 선교국을 비롯한 각종 기관들이 있으나 그 기관들은 유명무실한 상태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교회들은 성장하면 교회건축, 교육관 건축, 기도원 설립, 묘지 구입 등등의 사업을 개교회적으로 진행하므로 교육, 봉사, 선교, 등등에 대한 연합적인 사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대 기독교는 <합심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합심하면 분쟁을 이루는> 것이다.

2) 교회 사명의 오류.

(1) 교회설립 외면.

교회 설립은 모든 교회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연합적, 공동적 사명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는 교회설립 사명을 외면하므로 목회자 개인들이 교회설립을 한다. 때문에 교회들이 개인 소유화되어 있으므로 종교 법인에 소속되어 연합체계를 이루지 못하며 교단의 지휘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2) 교회교육 외면.

교회들이 자교회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예산, 교육자, 등등의 부족으로 인하여 교회 교육이 외면되거나 부실하다. 특히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성인 위주의 목회를 지향하기 때문에 교회학교 교육이 매우 부실하다.

(3) 목회전문 사역자 양성 거부.

교회는 자체적인 직분자들을 양성해야 함은 물론이요 목회전문 사역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교회는 목회전문 사역자를 양성함에 있어서 그들의 생활비와 교육비는 물론이요 자녀의 교육비까지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이 목회전문 사역자 양성을 외면하거나 거부한다.

(4) 전도의 오류.

기독교 전도는 <복음전도>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전도보다는 이미 타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을 끌어 드리는 비 진리적, 오류적, 전도를 하고 있다.

3) 교회의 우상화.

현대 기독교 교회 중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보다 교회적인 것을 더욱 섬기고 추종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교회를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하고 자랑하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목회자 우상화.

소속교회 목회자의 외모, 학력, 은사, 능력, 활동, 등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그것을 사랑하고 자랑한다.

(2) 예배 우상화.

소속교회 예배의 장엄함, 웅장함, 찬양대의 찬양, 영상예배, 등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그것을 사랑하고 자랑한다.

(3) 교회건물 우상화.

소속교회 건물의 내, 외부에 대한 규모와 시설, 각종 장식들과 기구, 강단의 규모와 화려함, 조명시설, 파이프 오르간 등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그것을 사랑하고 자랑한다.

(4) 교회의 전통과 역사 우상화.

소속교회의 교파, 교단,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그것을 사랑하고 자랑한다.

(5) 성도의 숫자와 수준 우상화.

소속교회 성도들의 학력, 권력, 재력, 능력, 등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그것을 사랑하고 자랑한다.

(6) 교회사업 우상화.

소속교회가 전개하고 있는 선교, 봉사, 사회사업 등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그것을 사랑하고 자랑한다.

4) 사업적 오류.

현대교회가 진행하는 각종 사업 중에 비 진리적인 것들이 많은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각 기관의 장사.

많은 교회에서 <특히 여선교회> 선교비를 마련한다는 명분 하에 농수산물, 생활용품, 각종 장사를 한다. 이러한 관행 때문에 근래에 이르러서 <학생회>를 중심으로 <일일 카페>가 운영되고 있는가 하면 졸업식 때에 꽃다발이나 입학기 때에 찹쌀떡, 엿, 등등을 판매하는 장사가 연례행사처럼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각종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교회가 상업의 도구로 사용되어져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상업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강력하게 책망하셨다<마21:12-13>.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목적이 선하다 하여 비 진리가 진리로 둔갑될 수 없다. 교회의 각종 장사는 비 진리일 뿐만 아니라 예배의 경건성을 훼손하고 특히 거의 강매<强賣>와 후불거래로 인하여 성도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다.

(2) 마을금고 운영.

대형교회에서 운영하는 마을금고들이 있다. 교회의 마을금고들은 여선교회의 각종 장사들보다 더욱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다. 특히 대부받는 문제에 있어서 연대 보증과 상환 문제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여 성도들 간에 불화가 일어나며 교회적인 책임 문제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된다.

(3) 각종 계 조직.

여선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계모임으로 인한 폐해도 심각하다. 계원들이 고의 또는 실수로 인하여 계가 깨어지거나 또는 피차에 사채를 빌려준 것이 실패하여 각종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4) 사조직.

성도들이 범 기독교 차원에서 교파 교단을 초월하여 등산, 음악, 미술, 체육, 등등의 동호회를 조직하고 그 동호회를 통하여 아름다운 신앙적 연대를 갖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동호회가 건전하게 운영될 때에 그 동호회는 오히려 범 기독교적 차원에서 후원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동호회들이 배타적, 비판적, 단체가 된다면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 근래에 이르러 대형 교회들에서 학연, 지연, 등등의 사조직들이 조직되고 심지어는 학벌이나 직업 또는 재정적인 차원에서의 사조직들이 조직되고 있는바 그것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비 진리이며 악행이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따라서 한 가족이다. 가족 간에는 학벌이나 직업 또는 재정적인 차원에서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가족은 오히려 피차의 부족함과 약함을 채워주는 사랑의 지체인 것이다.

제21장. 교회정치.

1. 교회 정치의 역사.

기독교가 아직 조직화되지 못했던 당시, 이스라엘 부족교회는 족장들과 장로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기독교 운영이 최초로 조직화 된 것은 초기 광야교회 시대이다. 출애굽 한 이후의 광야교회는 모세가 혼자 이끌어 갔는데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교회 운영을 조직화하셨다<출18:13-26>. 그러나 이때의 조직은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조직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교회 운영에 관한 본격적인 조직화는 성막교회 건축에 대한 규례와 함께 제정된 제사장 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교회에 성막교회를 세우시면서 아울러 제사장 제도를 수립하시어 교회로서의 위상을 갖추어 주셨다. 이때부터 교회 운영은 전적으로 제사장들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모세는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였으나 교회는 전적으로 제사장들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정치적, 군사적 지휘권만 행사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제사장들에게 교회를 운영하도록 맡겼다고 하여 그가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히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모세는 오히려 제사장들과 긴밀한 유대와 협력 체제를 유지하면서 이스라엘 민족 및 교회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모세는 교회 운영에 대한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전임자로서 하나의 고문<顧問>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규례로서 <국가와 종교>에 대한 규례였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국가와 종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피차에 대한 독립 체제를 이루면서 동시에 상호 긴밀한 유대와 협력 체제를 이루는 <국가와 종교의 이원적 제도>에 대한 규례를 세우신 것이다.
한편 모세는 이스라엘 12부족들의 장로들을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 세웠다<70인 장로제도-민11:16 이하>. 이스라엘 민족은 <70인 장로제도>를 근거로 하여 인구 120명 이상의 성읍에 <7장로 제도-성읍의 7인-seven of a city>를 수립하였는데 그들은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 제사장, 유사, 랍비, 서기관, 등등과 연대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갔다.

초기 신약교회 시대에 이르러 제사장 제도가 종료되자 교회는 사도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그러나 과부들에 대한 구제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자 사도들은 자신들의 교회 운영이 부당하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하여 즉시 7집사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운영하게 하고 자신들은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전념하여 교회 운영을 이원화시켰다. 즉 목회자는 목회에 전념하고 교회 운영은 교회 직원들에게 일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규례로서 <목회와 치리>에 대한 규례이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들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과 기도하면서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게 하셨고 교회 운영은 장로들을 비롯한 교회 직분자들에게 일임하는 <목회와 치리의 이원적 정치제도>를 정립하신 것이다. 사도들이 세운 <7집사 제도>는 이스라엘 민족 교회를 통하여 수립된 장로 정치의 근원으로서 모세가 세운 <70인 장로제도-민11:16이하>와 7장로 제도<성읍의 7인-seven of a city>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사도들이 승천하고 로마 제국의 박해가 종료된 후에 로마가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을 때 로마 카토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 교권주의자들은 사도교회를 통하여 수립된 <목회와 치리의 이원적 정치제도>를 퇴출시키고 자신들의 권위와 유익을 위하여 교회 운영을 사제들의 독단적 사역으로 제도화 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토릭은 교회의 위상이 높아지자 국가정치에 대한 욕심까지 발동하여 모세를 통하여 수립되어진 <국가와 종교의 이원적 제도>에 대한 규례를 무시하고 교황을 모든 국가들의 수장으로 좌정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들은 하나님의 섭리 위에 자신들의 과욕을 세우려는 악행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하였다. 로마 카토릭의 오만과 오류는 교회를 타락시키고 부패시키는 가운데 성도들로부터 거부되었고 국가들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제157대 교황 그레고리 7세<Gregorius,VII, 1073-1085,재위>와 독일의 국왕이며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가 충돌하여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 발생하였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교황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으나 그로 인하여 로마 카토릭의 몰락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프랑스 국왕 필립 4세에 의하여 제195대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s.V, 1305-1314,재위> 시대로부터 제201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II, 1370-1378,재위> 시대까지 교황청이 프랑스에 머무는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 또는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 사건이 일어났고, 70여년 동안 로마 카토릭의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6세기에 이르러 루터, 쯔윙글리, 칼빈 등등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주의자들에 의한 기독교 개혁이 진행되었고 로마 카토릭은 기독교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었다.
개혁주의자들은 기독교 개혁을 진행하면서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적 교회 운영 정치제도를 퇴출시키고 사도들을 통해서 정립된 <목회와 치리의 이원적 정치제도>를 근거로 하는 <장로들에 의한 의회 민주정치 제도>를 재수립하였으며 아울러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도 모세를 통한 <국가와 종교의 이원적 제도>를 재수립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장로들에 의한 <의회주의 정치제도>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 정치제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당회 정치제도는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의회주의 정치제도>와 동일하다.

2. 교회정치 원리.

교회정치 원리는 이미 앞장에서 소개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수립하신 <목회와 치리의 이원적 정치>를 근거로 하는 <장로들에 의한 의회 민주정치>이다. 목회자들은 예배 인도, 교육, 기도, 성도관리, 등등의 사역에 전념하며 교회의 치리는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에 의하여 진행된다.

3. 교회정치 제도.

기독교 교회 정치제도는 교파, 또는 교단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이 가장 모범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정치제도와 가장 일치하는 것은 장로교 정치제도이다. 장로교 정치제도는 <당회 정치제도>이며 <노회정치 제도>이다. 장로교의 최고 상급 기관은 총회이지만 행정적 관리와 정치제도는 <당회>와 <노회> 중심으로 진행된다. 당회는 각 지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교회의 모든 문제를 심의하고 결정한다, 따라서 당회 정치제도는 당연히 <의회주의 정치제도>이다. 반면에 노회는 각 교회 항존직에 대한 인사 관리와 당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심의, 중재, 결정한다. 따라서 모든 지교회와 항존직 교회 직원들은 노회에 소속되며 노회의 인사관리를 받는다. 노회는 각 지교회로부터 파송된 각 지교회 대표자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노회 정치역시 당연히 <의회주의 정치제도>이다.

4. 한국 기독교 정치실태.

현대 기독교에서 <의회주의 정치제도-당회 정치제도>는 헌법에 명분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거의 시행되지 않으며 담임목사<당회장>에 의한 <독단정치>가 실행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당회는 목사의 목회 계획을 승인하는 기관으로 전락되었고, 장로들은 목회자를 보좌하는 하급적 직분자로 인식되어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당회원들인 장로들이 신학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목사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의 종-목사>의 신적 권위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이미 오랫동안 목사의 제사장적 권위 체제를 유지해온 한국 기독교의 교회적 병폐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목사의 권위를 확립시켰고 근자에 이르러서는 당회장 또 담임목사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좌정시키어 로마 카토릭의 오류를 재현하였다. 때문에 신학적으로 무지한 성도들은 목사의 독단적 전횡에 익숙해져서 목사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 것으로 믿고 있으며 목사의 독단적 전횡이 비 진리라는 것을 아는 성도들이 그것을 반대하면 목사의 편에 서서 목사의 비 진리를 오히려 옹호한다.

5. 성경적 교회정치.

우리는 이와 같은 한국 기독교의 비 진리적 교회 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 성경을 근거로 한 교회 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교회 운영의 2원화

이미 앞장에서 정립한바 있듯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목회 전문직 분자 <목사, 강도사, 전도사>와 치리전문 직분자<장로, 집사>들에 의한 2원적 운영 제도에 의하여 운영<정치>되어야 한다. 목회전문 직분자<목사, 강도사, 전도사>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과 기도하고 성도를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며 치리전문 직분자<장로, 집사>들은 행정과 재정 등등에 관한 교회 운영<정치>를 전담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2원적 정치 규례가 어느 한쪽을 견제하기 위하여 수립된 것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임을 절대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목회전문 직분자들은 치리전문 직분자들의 교회 운영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아야 하며 치리전문 직분자들은 목회전문 직분자들의 목회 사역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목회전문 직분자들은 치리전문 직분자들을 신학적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그들이 바른 교회 운영을 할 수 있도록 지도 편달하며 치리전문 직분자들은 목회전문 직분자들이 소신 것 목회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을 다하여 협력해야 한다. 치리전문 직분자들이 목회전문 직분자들의 지도 편달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목회전문 직분자들의 신학적 경륜이 치리전문 직분자들의 신학적 경륜보다 높고 앞서기 때문이며, 치리전문 직분자들이 목회전문 직분자들이 소신 것 목회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을 다하여 협력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사명이 치리와 운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신 이유와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진행하시기 위함이며 하나님 섭리의 진행은 목회를 통하여 진행된다. 따라서 순서적으로 정리할 때에 목회를 지원하고 협력하기 위한 운영<정치>를 해야 한다. 운영<정치>를 위한 목회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리는 목회전문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목회를 할 때에 한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 목회전문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목회하지 아니하고 비 진리와 오류에 의한 목회를 한다면 치리 전문 직분자들은 목회전문 직분자들의 비 진리와 오류에 협력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로 그들에 대한 법적 행정적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반면에 치리전문 직분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회 운영<청치>를 실시해야 한다. 만약에 치리전문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회 운영<청치>를 실시하지 않고 비 진리와 오류에 의한 교회 운영<청치>를 실시하면 목회전문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로 그들에 대한 법적 행정적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2) 교회 기관의 조직.

교회는 부여된 사명에 따라 다양한 기관을 조직하고 각 기관에 지도자들을 세우며 각 기관이 상호 합력하여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근거와 현존하는 교회 기관들을 참조하여 교회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회기관 조직을 제시한다.

① 교역자회.

교역자회는 목사, 강도사, 전도사, 등등의 목회전문 직분자들로 구성된 기관이다. 교역자회는 정기 또는 수시로 회의를 열어 목회전반에 대하여 의논하고 기도하면서 바른 목회를 위한 노력에 전심전력한다.

② 원로회.

원로회는 장로, 권사들로 구성되는 기관으로서 현재의 당회와 같은 기관이다. 원로회는 현대교회는 물론이요 기독교 역사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기관으로서 우리가 처음으로 제시하는 기관이다. 우리가 원로회라는 기관을 제시하는 것은 현대 기독교의 비 진리와 오류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기독교장로회라는 이단 종파가 여자 장로 제도와 여자 목사 제도를 실시한 이래 감리교를 비롯한 몇몇 교단들이 여자 장로 제도와 여자 목사 제도를 실시해 왔고 근자에 이르러 각종 교파와 교단들이 여자 장로 제도와 여자 목사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장로교는 전통적으로 여자 장로 제도와 여자 목사 제도를 반대하여 규제해왔는데 <통합측 장로교가> 여자 장로 제도와 여자 목사 제도를 실시하게 됨에 따라 합동측 장로교단들 중에 몇몇 교단들도 이 문제로 인한 진통을 겪게 되었다. 여자 장로 제도와 여자 목사 제도는 성경에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는 제도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자 장로 제도와 여자 목사 제도를 주장하는 자들의 배경에 있는 <여자 직분자>들에 대한 오류에 주목한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 지도자<목사>들은 <여자 직분자>들을 홀대해 왔다. 장로교를 기준으로 할 때에 권사<權師>라는 직분은 여자 직분자들 중에 가장 상위 직분자로서 장로 직분과 버금가는 지도자적 직분자였다. 그러나 그동안 장로교회는 권사<權師> 직분자들을 <勸師-勸士-勸使-勸事> 등등으로 인식하였으나 그들을 지도자로 세우지는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원로회를 통하여 권사<權師>들이 교회 운영<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원로회는 장로와 권사로 구성되는 교회 치리기관으로서 모든 지교회들과 노회, 총회, 등등의 기관에도 적용된다. 즉 교회의 모든 치리는 장로들과 권사들로 구성된 원로회를 통하여 진행되는 것이다.

③ 집사회.

집사회는 안수 집사를 비롯한 모든 집사들로 구성된 기관이다. 집사회는 원로회와 같은 권위와 기능을 갖지는 않으나 원로회의 독단과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충분한 권위와 기능을 갖춘다. 따라서 집사회의 결의사항은 원로회, 노회, 총회, 등등의 기관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④ 제직회.

제직회는 지교회의 교역자회. 원로회. 집사회에 소속된 직분자들의 연합기관으로서 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로 구성된다. 따라서 제직회는 지교회에만 존재하며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심의하고 의결한다.

⑤ 공동의회.

공동의회는 지교회들의 총회로서 성인 세례 교인으로 구성되는 기관이다. 각 지교회는 <목회자의 부임, 사임> <장로, 권사, 안수집사, 투표> <교회사업> <교회 건축> 등등을 비롯한 중대 사항을 공동의회를 통하여 결정한다.
(2) 교회 기관의 활동.

교회는 교회 내에 구성되어 있는 각 기관들이 기관의 특성에 따라 활동할 수 있도록 범 교회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며 특히 재정적인 지원을 한다.

(3) 교회 기관의 연합.

교회의 각 기관들은 항상 연합하는 가운데 기관들의 사업을 돕고 후원한다. 기관들이 사업을 추진할 때에 기관장 회의를 통하여 지원, 후원한다.

6. 치리와 권징.

교회 안에는 진리에 입각한 아름다운 성도들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비 진리에 입각한 사이비 이단자들과 오류에 빠진 비 진리자들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들을 가라지<마13:24-30>, 염소<마25:32-33>, 불법을 행하는 자<마7:23;13:41>라고 선포하며, 특히 비 진리자들 중에 목회자들을 삯군 목자<요10:12-13>, 이리<마7:15; 행20:29>, 외식하는 자<마23:13>, 소경된 우맹 인도자<마23:16-17>, 회칠한 무덤<마23:27>, 독사의 새끼<마23:33>로 선포한다.

이러한 비 진리자들은 항상 교회에 각종 갈등과 분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 진리자들을 징계하시는 과정에서 <알곡-하나님의 성도>들이 다치는 것을 싫어하시어 그들에 대한 심판과 징계를 잠시 유보하신다<마13:24-30>.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비 진리자들이 만행을 계속하여 교회에 어려움이 있게 되면 그들을 퇴출하도록 명령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8>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하여 비 진리자들을 퇴출시키는 바 그, 법적 행정적 절차는 다음과 같다.

교회는 먼저 목사, 장로, 권사, 등등의 지도자들 중 하나를 보내어 비 진리자들에게 권고한다. 이때에 비 진리자들이 교회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2-3명의 지도자들을 보내어 권고하면서 비 진리자의 주장을 모두 녹음한다. 다음에는 제직회, 집사회, 당회 등등의 기관에서 그 문제를 심의한 후 그를 퇴출시킨다. 그러나 교회의 항존직은 노회에 인사권이 있으므로 노회에 그 문제를 상고하여 노회의 재판국에서 심의 결정하게 한다. 노회의 결정에도 불복할 경우에는 총회 재판국을 통하여 최종 결정한다.

제22장. 하나님의 종.

1. 하나님의 종에 대한 정의.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부름 받아 세워지고 사용되어진 모든 존재들에 대한 총칭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섭리 사역을 진행하기 위하여 부름 받아 세워진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들이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내 종>이라고 불러주신 것 외에 하나님의 사역에 부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겸손을 표하여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종, 또는 주의 종이라고 고백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하의 신분으로 성육신하셨으며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고난 받으셨던 것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 받은 자에 대한 명예와 영광의 호칭이 되기도 하였다.

2. 하나님의 종의 명칭.

성경은 하나님의 종을 <하나님의 종> <주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등등으로 명칭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 중에 <하나님의 종> <주의 종>은 합당한 명칭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명칭은 합당한 명칭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하나님의 종. 주의 종.

하나님의 종이란 명칭은 성부 하나님의 종임을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학에서 모든 주권은 성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모든 것의 주권주이신 성부 하나님의 종이다. 주의 종이라는 명칭은 주<主> 하나님의 종임을 말한다. 따라서 주의 종이란 곧 모든 것의 주권주이신 성부 하나님의 종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 주의 종에 대한 주권<主權>은 성부 하나님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종, 주의 종들은 성부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종, 주의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은 바울 사도가 즐겨 사용한 명칭이다.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선택되어 세워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세운 12사도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특히 당시의 사람들이 바울이 사울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섰던 인물임을 주장할 때마다 그리고 12사도들이 바울과 지신들의 사도성을 구별하려고 할 때마다 변증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바울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직접 세워진 사도가 분명하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사도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직접 세워진 것임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변증하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울 사도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또 다른 이유는 그에게 아직 삼위일체 하나님 신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성경은 12사도를 사도라고 선포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제자>로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들을 자신의 종으로 부르지 않고 <제자>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형제>라고 호칭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 주의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종이다.

3)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명칭도 같은 차원에서 정립된다. 사도<使徒>라는 명칭은 <파견된 자> <사자>라는 히브리어 <살리아-מילשׁ>에서 유래되었고, 헬라어의 <아포스톨로스-αποστολος>의 동의어이다. 사도에 대한 가장 정확한 신학적 의미는 <전권이 위탁된 자-요13:16;히3:1>이다. 따라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메시야>로부터 <전권이 위탁된 자-하나님의 종, 주의 종>이 아니라 주권주이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이 위탁된 자-하나님의 종, 주의 종>이라고 정립하는 것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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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는 바울 사도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명칭으로 표현한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의 사도성이 그가 말한 바대로 사람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워진 것임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그러한 표현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 주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 대한 신학적 정립은 훗날의 주의 신실한 종들에 맡기셨던 것이다.

3. 하나님 종의 구분.

1) 영역적 구분.

하나님의 종은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국가, 민족, 사회, 군대, 등등을 포함하며 그들은 또한 반드시 선한 자들만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까지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부족이 형성되는 과정에 크게 일조하였던 애굽이나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바벨론, 앗수르, 등등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들어 쓰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사단도 하나님의 종에 속한다.

2) 신분적 구분.

영역적 구분에 의한 하나님의 종들은 피조 세계 전체이며 악한 자들까지를 포함하지만 신분적 구분에 의한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로 제한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학적, 신앙적, 사명적, 인격적으로 충성, 헌신하는 자들에게로 특별히 제한된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의 하나님 종들에게는 신분적, 계급적, 직분적, 직무적. 서열이나 우열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은 신분, 직분, 직무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종들이며 그들 사이에는 신분적, 계급적, 직분적, 직무적. 서열이나 우열이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무에 따르는 직분적, 직무적, 질서가 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지휘 계통과 법규와 규례가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교회적 지휘 계통과 법규와 규례에 절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 종의 신분.

하나님의 종은 현존하는 모든 자들 중에 최고, 최상의 영광과 존귀와 명예를 갖춘 존재이지만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 앞에 철저하게 도구적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종<엘리에셀-창24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빌2:6-8>을 통하여 하나님 종들의 신분과 직무 수행에 대한 규례를 세워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엘리에셀의 교훈을 전제로 하여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1)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보다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보다 앞서가거나 하나님보다 더한 예우를 받으려고 하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은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위치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하와는 하나님과 같은 위치를 욕심내어 범죄 함으로서 인류를 죄악에 몰아넣었다. 엘리에셀이 주인인 아브라함에게 철저하게 순종한 것과 성자 하나님께서 비하의 신분으로 강림하신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지켜야 할 본분에 대한 전통적 규례이다.

(2)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섭리보다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일하거나 자신의 뜻을 더욱 고집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하나님이 받으실 경배와 찬양을 가로챈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자신은 철저하게 종의 본분을 지켰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종의 본분과 위치를 지켜야 한다.

(4)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기쁨보다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 종들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이 전제된 기쁨이어야 한다.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기뻐하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기쁨을 통하여 기뻐하신다면 순서가 바뀐 것이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후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보다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지 아니하고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를 세운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된다면 그는 하나님께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우는 사명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우는 일에 걸림돌이 되어서도 안 된다.

2) 교회와의 관계에서.

(1)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교회보다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보다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들은 교회의 안녕과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충성된 종이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포기해야 한다. 만약에 자신이 억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교회의 안녕과 평화와 질서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억울함과 수모를 감내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억울함과 수모를 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2)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자녀보다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최고 최상의 존귀한 직분자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종의 신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지 하나님 종의 성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종들을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원리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홀대한다거나 착취한다거나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자들을 양의 탈을 쓴<이리-마7:15;요10:12>라고 선포하였다.

5. 하나님 종의 권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직무와 관련된 법적 행정적 권위를 부여하셨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종들의 권위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여한 종들의 권위는 곧 하나님의 법과 질서와 규례에 자신이 먼저 절대 순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명을 이행할 때에 비로소 그에게 부여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6. 하나님 종의 자격.

하나님의 종은 직분과 직무에 따라서 때로는 세상적 학문, 직업, 경제적 능력 등등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종들은 성경 <딤전 3장>이 요구하는 바에 충실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1) 신학적으로 온전해야 한다.
2) 신앙적으로 온전해야 한다.
3) 인격적으로 온전해야 한다.
4) 사명적으로 온전해야 한다.
5) 윤리적, 도덕적으로 온전해야 한다.
6) 제반법규와 질서를 충실히 지켜야 한다.

7. 하나님 종의 위상.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그들은 최고의 명예와 영광을 갖춘 자들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직무자 모든 직분자들보다 존귀하고 거룩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위상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과 질서와 규례에 절대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명을 이행할 때에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고 존경받을 수 있다. 하나님 종들이 하나님의 법과 질서와 규례에 절대 순종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거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명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종이 아니며 따라서 그는 존귀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예우 받을 이유도 없다.

8. 하나님 종의 삶.

하나님의 종들은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섬기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양편으로부터 신뢰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존귀히 여기시어 막중한 책무를 부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신뢰받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존귀하게 여기어 그들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뢰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자신을 섬기는 존재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는 존귀한 자들로 여기어 그들에게서 신학, 신앙, 인격, 사명, 등등의 기독교 근본원리들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직분과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삶이 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요구되는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은 다음과 같다.

1) 정직한 삶.

(1)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 어떠한 문제에서도 오직 진실과 진리적인 언어 행동을 하며 거짓되고 위선적인 언어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이 거짓과 위선적이면 그 책임이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악이 되며 사람들이 그를 신뢰할 수 없게 됨으로 직분과 직무 수행을 할 수 없게 된다.

(2)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와 감사를 가로채어 자신이 받지 않는 반면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어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것과 이웃의 것을 탐내어 자신의 것으로 착복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착복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것을 욕심내어 착복하거나 착취하지 않는다.

(4) 하나님의 종들은 동역자들의 영광과 공로를 가로채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의 공로와 영광을 동역자들과 함께 나누며 오히려 그들의 것으로 양보한다.

2) 근면한 삶.

하나님의 종들은 맡은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임무의 크고 작음이나 어려움 등등에 관계없이 항상 최선을 다한다. 새롭고 진취적인 것을 계발하며 역동적인 결과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한다. 하나님께서는 나태하고 게으른 자들을 매우 싫어하시며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자각하지 못하고 잠자는 자들과 깨어 기도하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셨다<마25:13; 26:39-43>.

3) 성실과 성심의 삶.

하나님의 종들의 성실과 성심적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형식적 삶을 책망하셨고 사두개인들의 이중적 신앙을 경고하셨다<마12:1-,마15:1-,마23:1->. 하나님께서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기뻐하시어 적극적인 것을 즐거워하시고 미지근한 것과 희미한 것을 싫어하신다<마11:17-18; 6:24>.

4) 충성의 삶.

하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을 기뻐하신다.<마8:21-22;10:38-> 엘리에셀의 충성<창24장>은 하나님 종들의 충성에 대한 표본이다. 따라서 하나님 종들의 삶은 오직 하나<죽도록 충성하는 것>이다. 목화자들이 안식년 제도를 도입하여 6년 사역한 후 7년째에는 안식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6년 사역하고 7년째에는 안식한 하나님의 종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명적 삶을 살았다. 성경에는 하나님 종들의 안식년 제도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안식년 제도란 토지에 대한 제도이지 사람에 대한 제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도 없는 목회자의 안식년 제도를 누리고 즐기는 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악한 자들이다.

5) 청렴결백의 삶.

하나님의 종들은 모든 일에 청렴결백하여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역을 진행하는데 스스로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이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비 진리적인 입장이 되면 지도자로서의 위상이 무너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진행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종은 오직 <아닌 것은 아니다>하고 <옳은 것은 옳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6) 검소 검약의 삶.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고 안내하는 자들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배운다. 하나님의 종들이 현세적인 부귀영화와 쾌락 등등에 심취하면 성도들은 그러한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현세에 대한 모든 욕망들을 절제하면서 검소하고 검약한 삶을 살아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해야 한다.

7) 지혜와 순결의 삶.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들을 향하여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가르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하나님 종들의 사역 현장에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사단의 역사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며 특히 하나님의 종들을 무차별 공격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지혜롭게 사명을 진행하여 사단의 올무에 걸리지 않아야 하며, 순결한 삶을 살아 사단의 궤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방심하지 않기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여 영적 무장을 해야 한다.

8) 담대와 과감의 삶.

하나님 종들이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거나 평온한 길이 아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때로는 가파른 험산 준령이고 때로는 길 없는 심산유곡이며 때로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쳐오는 망망대해이며 때로는 폭풍한설 몰아치는 허허벌판인가하면 때로는 폭양이 내려쬐고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도처에 사이비 이단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사단의 흉계가 틈을 노리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고 단 한번의 실수로 형설의 공이 졸지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이러한 각종 위험적 요소들 앞에 굴복하거나 위축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들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제압하고 굴복시키어 다스리면서 자신의 사명을 진행함으로서 하나님 종다운 멋진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승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멋진 승리를 전제로 하여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삼하2:7, 대상22:13, 마10:19-20; 28:20, 요16:33, 딤후4:7-8, 요일5:4-5>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항상 강하고 담대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과감하고 용맹한 지휘력을 행사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보장하신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9) 희생과 순종의 삶.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진행하는 것은 결코 쉽고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것에는 철저한 자기희생과 절대적인 순종이 수반되는 것이다. 자신의 희생을 거부하고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자에게 아름다운 승리는 없으며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멋진 승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승리는 오직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잠4:27; 딤후4:7-8>

10) 사랑과 용서의 삶.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원천이시다. 기독교의 원리가 사랑과 용서인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용서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베드로를 통하여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명령하신 목회 원리가 사랑이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곧 사랑과 용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사랑과 용서의 사역을 진행해야 하며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 신학과 신앙이 일치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11) 화해와 단결의 삶.

하나님의 종들은 모든 영역,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화해와 단결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화해와 단결을 기뻐하시며 대결과 분열을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화목하신 것과 이미 구약시대부터 화목제를 제정하시어 사회적인 화목을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화목과 단결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녀로 삼아주시고 그들에게 교회라는 조직 사회를 부여하신 것은 자녀들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화목하고 단결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평안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들의 사역적 현장과 삶을 화해와 단결의 것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12) 섬김의 삶.

하나님 종들은 자신의 일상적 삶 자체가 곧 섬김의 삶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까지<요13:4-9> 섬김의 삶을 살면서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道>를 명령하셨던 것<마23:11-12>은 하나님의 종들이 섬김을 위하여 부름 받고 세워졌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입으로는 섬김을 말하면서도 온갖 섬김을 요구하면서 심지어 보이는 목사를 섬기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것이다.

9. 하나님의 종에 대한 현대교회의 오류.

현대 기독교는 오랫동안 신학 부재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인도되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오류에 빠져 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데 그중에 특히 심각한 것이 목사에 대한 오류이다. 목사에 대한 성도들의 오류는 신학적으로는 심히 무식한 반면에 목사의 직분에 대해서는 특별한 권위 의식을 갖은 목사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높여 가르치면서 성도들의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정립되어진 오류이며 비 진리이다.

1) 목사의 직분에 대한 오류.

(1) 목사의 3직론.

목사의 3직론이란 목사들에게 그리스도의 3직 <선지자직> <왕직> <제사장직>이 위임되었다는 것이다. 목사들에게 그리스도의 3직이 위임되었다는 것은 성경에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도 전혀 전례가 없고 교회 헌법에도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3직론은 많은 현대 기독교 목사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으며 일부 신학교에서조차 공공연하게 강의되고 있다.

① 목사의 선지자 직.

선지자는 현재의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백성들에게 고지하거나 또는 미래적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백성들에게 고지하기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선지자들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무와 직분을 예표 하였다. 선지자들은 주로 구약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선지자들의 활동이 거의 없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등장한 선지자는 세례요한으로서 그는 신약시대 최초의 선지자였다. 신약시대 선지자는 세례요한 이외에 뚜렷한 인물이 없었고 사도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그들의 직무가 점점 소멸됨에 따라 선지자 직분 자체가 종료되었다. 선지자들의 직무와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와 직분을 예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선지자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셨고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가 성경을 통하여 완전하게 정립되었으므로 선지자의 직무가 자연적으로 종료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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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선지자 직분을 행사한다는 것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이다. 반면에 목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치고 전파하는 자로서 선지자 직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직무는 목사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수행하는 선지자 직무이다. 따라서 목사들이 선지자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결코 선지자 직분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을 목사들이 위임받았다는 주장은 거짓이고 사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무는 인간 선지자 직무와 다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은 인간 선지자 직분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무와 직분은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목사가 감히 행사할 수 있는 차원의 선지자 직분과 직무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을 목사들이 위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과 직무를 무시하고 가로채는 악행이다.

② 왕.

성경이 말하는 왕 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반적 국가 통치자들의 왕 직이고 다른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영적 통치권인 왕 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현존하는 영역 전체를 총괄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의 왕 직을 <만왕의 왕>으로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에게 주어진 고유 권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 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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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 직을 위임받아 행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 직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거나 또는 목사의 통치권을 예수 그리스도의 왕 직과 같은 차원으로 높이고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대죄이며 악행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은 언제인가는 통일교의 문선명이나 전도관의 박태선처럼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최후의 심판을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③ 제사장.

제사장은 구약 시대에 인간들의 제사를 대신하여 드리는 직분자였다. 따라서 제사장은 제사장의 원형으로서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예표하는 직분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인류에 대한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죄제를 드렸을 때에 지금까지의 모든 속죄제사가 종결되었고 따라서 구약시대 제사장 제도는 종료되었다. 이제 모든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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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위임받아 여전히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과 직무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거나 또는 목사의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과 같은 차원으로 높이고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장은 아직도 기독교에 제사장제도가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 대속죄제를 완성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대죄이며 악행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은 언제인가는 통일교의 문선명이나 전도관의 박태선처럼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하심을 대신하여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사자.

많은 사람들이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목사에게 구약시대<하나님의 사자>의 권위를 부여한다. 저들은 특히 목사가 설교할 때에 목사 자신은 다만 도구로 사용되어질 뿐이며 실제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는 인간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목사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대표자라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대표자인 목사에게 절대 순종해야 하며 목사가 아무리 잘못한다 해도 목사의 잘못은 오직 하나님만 말씀하실 수 있으며 성도들은 다만 위하여 기도만할 뿐 목사의 잘못에 대하여 일체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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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주장들은 로마 카토릭의 교황 무오설을 흉내내는 것으로서 어리석고 교만한 것이며 목사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와 동등하게 하려는 것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대죄이며 악행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은 언제인가는 통일교의 문선명이나 전도관의 박태선처럼 자신들이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2) 목사의 직무에 대한 오류.

현대 기독교에서 많은 자들이 목사에게 교회의 전권이 위임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목사에게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있으며 목사의 최종 결정권은 당회, 제직회, 공동회의 <교회총회>의 결정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 진리와 오류들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목사의 파행과 불법으로 인하여 갈등과 분란을 겪고 있으며 심지어는 법정 투쟁까지 벌이는 가운데 교회가 사분오열되고 있다.

3) 장로에 대한 오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장로의 직분과 직무에 대해 오류와 오해하고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장로는 평신도를 대표한다는 주장.

많은 자들이 목사가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전제 하에 장로는 평신도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목사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고 장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며 장로는 교회의 운영과 치리에 전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저들은 그러한 신학적 의미에서 목사의 하나님 대표권과 장로의 평신도 대표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저들의 주장은 단지 목사의 권위를 높이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장로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파렴치한 수작에 불과하다. 저들은 편의에 따라 어떤 때는 목사가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때는 목사가 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함으로서 스스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2) 장로는 목사를 보좌한다는 주장.

많은 자들이 장로의 직분과 직무가 목사를 보좌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의 주장은 <출17:12>의 아론과 훌에 대한 기사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출애굽기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아론과 훌의 직무 수행은 모세를 보좌한 것이 아니라 모세와 협력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성경에 나오는 장로들은 제사장이나 목사와 같은 목회자들을 보좌하는 직분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구심점이었으며 지도자들이었다. 장로들을 목회의 보좌역으로 강등시킨 자들은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자들이었다. 로마 카토릭은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장로들의 직무와 직분을 제한하였고 나중에는 아예 폐지시켜 버렸다. 기독교에 장로 제도를 부활시킨 것은 16세기 기독교 개혁자들이었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을 비롯한 의회주의자들은 기독교에 장로 제도를 부활시켰고 장로들에 의한 <의회주의 교회 정치제도>를 수립하였다. 개혁주의자들은 모세를 통한 장로정치 제도와 <딤전5:17>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 가르치는 장로들의 구분을 근거로 하여 목사와 장로들의 직무를 구분하였다. 즉 다스리는 장로들은 현재의 장로들로서 교회를 치리 운영하는 직무자들이며 가르치는 장로들은 현재의 목사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목사들은 이와 같은 개혁주의자들의 교회조직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였고 성경의 원리도 자신들 마음대로 뜯어 고쳐 버렸다. 저들은 장로들을 평가 절하시켜 목사들의 보좌관으로 전락시켰고 나아가서는 장로 직분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게 있는 것으로 바꿔버렸다. 이제 현대 개혁주의 교회의 장로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담임 목사들의 종으로 전락되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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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사역적 기능

목회자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역할 때에 그는 기능적 차원에서 하나의 도구이며 특히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통로-Pipe-Line> 역할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통로로 하여 말씀, 계시, 섭리, 명령, 등등을 공급하며 사랑, 은혜, 강복, 등등을 공급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신이 오직 통로 역할을 담당한다는 원리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자신을 통해서 공급되고 전달되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신이 공급하는 것으로 내세워서도 안 되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서도 안 된다. 반면에 통로<Pipe-Line>가 녹슬면 녹물이 나오듯이 목회자<통로-Pipe-Line>가 부패하면 오염, 오류, 왜곡, 변질된 신학과 신앙과 인격과 사명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공급된다. 그리고 통로가 심히 부패하여 망가지면 물이 새듯이 목회자가 심히 부패하여 망가지면 하나님께 드려진 교회 재정이 새어 나간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신<통로>을 항상 청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오염, 오류, 왜곡, 변질되어 공급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교회 재정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제23장. 교회 직원.

1. 교회 직원의 역사.

1) 구약교회

구약시대 교회의 직원조직 형태는 민족교회 시대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 내에 특별한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았고 따라서 교회 내에 어떤 형태의 조직이 세워지지 않았다. 부족 교회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당연히 족장들이었다. 족장들은 부족의 영수<領首>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이며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였다. 때문에 부족교회의 모든 것은 족장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었고, 족장들이 대소사<大小事>를 계획하고 진행하고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구약시대 교회가 민족적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을 때부터 교회 내에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야곱의 12부족 교회가 애굽의 고센에서 정착하는 동안 민족교회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을 때 부족교회의 문제들은 부족의 족장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을 진행해 나갔고 부족교회 차원을 넘어서 민족교회적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에는 각 부족의 족장들이 모여서 그 문제를 협의하여 처결하였다. 그러나 부족교회들이 크게 성장함에 따라 민족교회도 아울러 성장하였을 때 족장들이 부족교회와 민족교회를 이끌어 가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교회 내에 직원 조직제도가 세워지게 되었다. 구약시대 교회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직원조직 형태는 장로<출3:1619:7,22; 24:1>였다. 당시의 장로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근동 일대의 부족들은 거의 대부분 장로들을 세워 족장들과 함께 부족을 이끌어 가게 하였다<창50:7;민22:7>.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명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70명 이상의 장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민족교회는 이미 장로라는 직분자들을 세워 교회를 운영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민족교회는 애굽을 떠난 후 몇 차례에 걸쳐 교회를 조직화한다.
제1차 교회조직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충고에 의하여 실시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출18:13-26> 등등의 제도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 혼자서 이스라엘 전체 교회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 발생하는 각종 문제점들을 지적한 후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등의 조직체계를 수립하도록 충고하였고, 모세가 그것을 받아들여 교회를 조직화한 것이다. 그러나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등은 교회 직원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일반 사회적 직무를 행하는 자들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교회조직이나 국가적 조직이 결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도자들은 교회적 직분과 국가적, 민족적, 사회적 직분을 함께 행사하였다.
제2차 교회 조직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 제도이다<출28장>. 하나님께서는 광야교회를 건축하신 후 모세와 아론이 소속되어 있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지정하시어 교회를 이끌어가게 하셨다. 이때에 아론을 전체 제사장의 수장인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셨고 아론의 아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등등을 일반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제3차 교회 조직은 재판관과 유사 제도이다<신16:18>. 재판관과 유사들은 각 지파별로 세워졌는데 그것은 모세를 통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하여 세워졌다. 재판관과 유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제도이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세워진 제도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통하여 세워진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신16:18>을 근거로 하여 12지파들에게 재판정<裁判廷>을 설립하였고 각 재판정마다 7명의 재판관을 두었으며 그들을 돕는 유사들을 세웠다. 이때의 재판관들은 장로들이었고 이 제도가 훗날 70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예루살렘 공의회-산헤드린-Sanhedrin>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직원들 중에 실질적인 교회 직원은 제사장들이었고 그 이외의 직원들은 처음에는 교회 직무에 관여하였으나 나중에는 일반적인 차원의 민족적, 정치적, 행정적인 일들에만 종사하였다. 구약교회 시대에 교회적조직이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그들에게 10계명이 주어지고 성막교회라는 외적 형태의 종교적 구심점이 세워진 이후였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여러 계층의 제사장들을 세우셨고 또한 레위 부족들로 하여금 교회를 섬기는 직책을 담당하게 하시어 교회를 조직화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구약교회의 조직은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분리된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남왕국 유다는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이루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전<그리심 산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스라엘은 비록 남북 왕조로 분리되었으나 여전히 제사장 제도 중심의 교회 조직형태를 유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남북 왕국이 패망하고 유대인들이 본국을 떠나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게 되었을 때의 교회 조직 형태는 그와 같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남북 왕조가 멸망하였을지라도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 본토의 국민들은 나중에 성전들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는 나름대로의 제사장 중심적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제사장들은 레위 지파에 의하여 세습되어지던 관행이 사라지고 정치적 이유와 매관매직<賣官賣職>에 의하여 레위인 아닌 자들이 제사장이 되었다. 때문에 대제사장들이 수시로 바뀌었고 대제사장들은 재임기간 동안 권력과 결탁하여 각종 유익을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북 왕국 이스라엘은 정복자들의 정책에 의하여 이방인들과의 통혼<通婚>으로 전통적 신앙생활이 유명무실하였고, 따라서 제사장 제도도 같은 상황이었다. 반면에 남 왕국 유다는 아직도 여전히 제사장 제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당시의 제사장 제도나 신앙적 형태는 이미 과거와 같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종교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관료적인 직분자였고 백성들의 신앙 역시 야훼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민족 중심의 신앙이었다.

한편 국외로 나가 흩어져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제사장 중심적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회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이끌어 가는 구심점은 회당장이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장로들이었다. 회당장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신앙적 구심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를 지도하는 정치적 행정적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2) 신약교회.

예루살렘, 또는 안디옥으로부터 출발한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들이 세워졌을 때, 처음에는 교회 내에 직원조직이 구성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교회를 조직적으로 구성하여 관리 운영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성도들은 다만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배우며 애찬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교회를 조직적으로 운영하시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설립되자 즉시 교회에 직원들을 세우셨다. 신약 교회 최초의 직원조직은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이며 유일한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루살렘 교회에 성도들이 점차 늘어가는 가운데 교회 내에 직분자들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행6:1-6>.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이때에 7명<스데반,빌립,브로고로,니가노르,디몬,바메나,니골라,>의 직원들을 안수하여 세웠는데, 사도들이 교회에 직원들을 세우게 된 동기는 과부들에 대한 구제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원들을 세우시는 역사적, 섭리적 제도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 학자들은 이때에 세워진 7명을 장로로 주장하는 자들과 집사로 주장하는 자들로 양분되는데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그들은 장로가 아닌 집사<현대 장로교회의 안수 집사>였다.
한편 초기 신약시대의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사도들을 비롯한 전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지고 운영되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지휘를 받았다. 이때에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한곳에 계속하여 머무르지 않고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의 기틀을 갖출 정도로 성장하면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교회들을 세워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돌보았다. 때문에 교회는 그들을 <순회 사도> 또는 <순회 전도자>라고 불렀다. 순회 사도 또는 순회 전도자들이 계속하여 교회를 설립해 나감에 따라 더욱 많은 지역에 더욱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자 교회들은 순회 사도 또는 순회 전도자들의 보호로부터 차츰차츰 격조<隔阻>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들은 자체적인 지도자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교회 내의 직원 조직의 필요성도 아울러 절감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곧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고 성도들이 계속하여 늘어나면서 교회가 하나의 집단 사회로 성장하게 되었을 때에 교회 직원조직의 필요성은 더욱 시급하게 요구되었다. 이에 사도들은 각지 교회에 집사들과 장로들과 감독들을 세워 그들이 자체적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함으로서 교회가 안정을 누림과 동시에 발전하고 성장하게 하였다<딛1:5-9>.

2. 교회 직원들.

1) 구약교회.

구약교회 시대의 교회 직원들은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제사장 중심이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대제사장과 차석 제사장과 평 제사장의 3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구약 교회시대 말기인 왕국 교회시대 이후부터는 제사장 외에 또 다른 직분자들이 있었다. 구약시대 교회의 직분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사장.

구약시대 제사장 제도는 모세 인도하의 광야교회 시대에 공식적으로 수립되어지지만 제사장 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구약 성경들을 통하여 예시되어 지고 있다. 가정교회 시대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도 제사장적 기능이 보여지고 있고 부족교회 시대에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욥, 등등의 족장들도 제사장적 직무를 행사하였다. 야곱의 12부족 교회가 애굽에 거할 때에 그들은 애굽의 종교적 제도를 본 따서 자신들의 종교에도 제사장직을 세웠다<출19:22>. 그러나 기독교의 제사장직은 인류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예표 하는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창14:17-20>을 통하여 이미 예고되어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약교회에 공식적인 제사장 제도를 세워주신 것은 모세 인도하의 광야교회 시대 때부터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0계명을 주시고 또한 성막교회를 세우시어 교회의 외적 형태를 갖추신 후에 그들에게 제사장을 세워 교회의 내적형태인 조직 체계를 갖추신 것이다. 구약교회의 제사장 제도는 대제사장, 차석 제사장, 평 제사장 등등의 3가지였는데 그중에 가장 막중한 직무를 행하며 전체 제사장직을 대표하는 것은 대제사장이었다<왕하25:18><대하31:13><느11:11>. 하나님께서 구약교회에 최초로 세우신 대제사장은 아론이었고 그 외의 제사장들도 모두 아론의 후손들로 세워졌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제사장들을 아론의 반차를 따라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며 따라서 모든 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되었다.

(2) 장로.

구약교회에 장로 제도가 처음 세워진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교회를 더욱 조직화하였을 때이다<신16:18>. 그러나 그 당시 모세가 장로들을 교회 내에 세운 것이 아니라 이미 세워져 있던 장로들을 부족교회 또는 민족교회의 유사와 재판장으로 세운 것이었다. 당시의 장로들은 근동 일대에 산재하였던 대부분의 부족들에게 존재하는 장로들과 같은 형태의 장로들이었다. 당시 근동 일대의 장로들은 학식이나 군사적 지도력을 겸비한 경우도 물론 있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삶의 경륜이 있는 연장자들로서 부족들을 이끌어가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었고 따라서 부족들로부터 존경받고 추앙받는 지도자들이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부족들의 회의에서 추대된 존재였다. 이와 같이 야곱의 12부족 교회에 존재하고 있었던 장로들도 기름부음 받아 세워진 훗날의 장로들과는 달랐지만 그들은 이미 민족 또는 부족들을 이끌어 가는 민족적,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장로들은 사실상 교회적인 직원들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차원의 민족적, 정치적, 행정적, 지도자들이었다. 당시의 이스라엘 12부족들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섬김은 다만 하나의 종교적인 전통이요 신앙적인 것이었을 뿐 아직 그들에게는 기독교라는 조직적 형태의 종교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장로들은 매우 중요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 모세는 특히 70인의 장로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대표하게 함으로서 민족교회로서의 조직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구약교회 시대에 교회적 조직이 세워지고 제사장 중심의 교회 조직체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을 때부터 장로들의 지도력은 일반적인 것으로 제한되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남북 왕국이 멸망하였을 때부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다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의 위치로 복귀하였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정복자들이 세운 분봉왕들을 섬기게 되었지만 그들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분봉왕들과 정치적으로 결탁한 비 진리적 제사장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이 추대하여 세운 장로들을 더욱 믿고 의지하였다. 때문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백성들의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호수아시대 때부터 구성된 성읍의 7장로<재판장>제도와 그것이 발전하여 수립된 <예루살렘 공의회-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은 모두 장로들이었다. 장로들의 역할은 이스라엘 남북 왕조 멸망 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더욱 중요하였다. 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신앙적 구심체였던 회당의 지도자<회당장>로서 예배를 인도하고 율법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의 대소사를 해결해 주는 오직 유일한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삶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3) 서기관.

서기관들은 본래 교회직원으로 세워진 자들이 아니라 왕국 궁정의 사관<史官>들과 함께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는 관리들이었다. 서기관 제도는 다윗 시대에 세워졌으나 그 기원은 여호수아 시대에 세워진 재판관들의 보좌관<유사>이다. 다윗은 애굽 왕정의 관리 제도를 도입하여 왕국 관리 제도를 세웠는데 그때에 세워진 관리중 하나가 곧 서기관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국가 역사의 기록자로서의 임무와 국왕의 비서 임무를 맡았는데 이러한 직무적 특성 때문에 율법을 필사하는 임무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율법을 필사하는 임무를 수행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임무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남북 왕조가 멸망한 후 분봉왕들이 세워졌을 때부터 서기관들은 왕국 관리로서의 직무에만 충실하는 자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나뉘어졌는데 그중에 왕국 관리들은 유대 민족들로부터 거부되어진 반면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더욱 존중되었다. 종교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서기관들은 거의 대부분 레위지파 출신의 제사장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만의 집단을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이때로부터 서기관으로 불리어지지 않고 선지자 또는 율법학자로 불리어졌는데 그중에 제1인자는 <에스라>였다. 포로기가 종료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됨에 따라 제사장 중심의 신앙생활이 복원되자 제사장들의 직무가 본격화되었고 제사장들은 더 이상 서기관<율법학자>의 직무를 겸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로부터 제사장 계열과 율법학자 계열의 분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기관 <율법학자>가 되기 위해서 오랫동안 율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훈련을 쌓았다. 따라서 율법학자가 되려는 자들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공부했다. 율법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는 어릴 때부터 율법 교육을 받아 이미 14세 때에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율법학자 지원자는 교사의 개인적 가정이나 율법학교에서 수학한 후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치어 그 실력을 인정받으면 보조교사<補助敎師>가 되었고 40세가 되면 안수 받은 후 정식 교사<율법학자>가 되었다. 율법학자들은 <랍비> <교법사>라는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능력있는 자들은 학파를 형성하여 율법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가장 유명한 율법학파는 샴마이<Shammai> 학파와 힐렐<Rabbi Hillel>학파였는데 힐렐 학파의 문하에 가말리엘이 었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에 사도 바울이 있었다. 그들은 산헤드린의 회원으로도 활약했으며 지방 도시의 재판관의 직무도 수행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내적 직분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국민적인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조차도 그들의 권위적 자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4) 선지자.

구약교회 시대의 중요한 직분자중 하나는 선지자<선견자>였다. 선지자들의 직무는 제사장들의 직무와는 달리 교회 내의 직무가 아니라 교회 밖의 직무이었지만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오히려 제사장들보다도 더욱 중요한 직무였다. 당시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신학적, 신앙적 지도자의 역할을 겸임하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구분할 때에 제사장들은 신앙적 지도자들인 반면에 선지자들은 신학적 지도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현재적인 상황을 선포하는 동시에 미래적인 것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구약교회 시대를 이끌어가는 신학적 지도자로서 제사장들보다도 오히려 더욱 중요한 직분자 들이었다. 선지자들은 사무엘 시대 이전에도 활동했지만 선지자들의 단체가 등장한 것은 사무엘시대 때부터였다. 한편 선지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것은 남북 왕국이 분열한 이후부터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엘리사, 미가야, 아모스, 호세아, 등등의 선지자들이 활동하였으며 남 왕국 유다에서는 이사야, 미가, 나훔,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등등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시대에는 에스겔, 학개, 스가랴, 오바댜, 요엘, 말라기, 등등의 선지자들이 활동했다. <B.C. 8세기>이후 선지자들의 활동은 문서로 기록되어 구약 성경에 전승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술선지자<記述先知者>로도 불리어진다.
한편 선지자들은 교회의 행정조직에 편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무에 있어서는 제사장들의 직무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전념하는 특별 직무를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은 일반 정치에 대하여서도 관여하지 않는 특별한 직무자들이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이후의 선지자로서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의 선지자 직무를 겸임하였다.

2) 신약교회.

(1) 신약교회 직원의 역사성.

바울 사도의 증거에 의하면 기원 1세기 말경의 교회에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다양한 직분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8>

바울이 증거하는 교회 직분자의 중요함을 순서적으로 말하면 사도가 첫째요 선지자가 둘째이며 교사가 셋째이고 그 다음은 능력이고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교회의 직분에 대한 중요성대로라면 첫째가 사도이고 둘째가 선지자이며 셋째가 교사였다.
한편 이그나티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기원 2세기 초에 이르러 안디옥을 비롯한 아시아 교회들에는 집사, 장로들과 함께 왕적인 권한을 가진 감독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는 사도들이 모두 소천 하였을 때이며 선지자들의 직분도 거의 종료되었을 때였다. 따라서 교회의 교직 제도에는 사도나 선지자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고 집사나 장로나 감독들의 체제로 전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클레멘트의 서신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집사와 장로의 두 직분자들이 있었는데 이때의 장로가 감독의 호칭으로도 불리어졌던 것으로 보아 장로들 중에 감독 직분을 겸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이중적 직분 제도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통해서도 증명된다.<행20:17><빌1:1><딛1:5-7>
한편 디다케에 나타나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보면 당시에 집사, 장로, 감독, 등등의 교직자들이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관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디다케에 나오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주께 합당한 자들을 감독과 집사들로 지명하되, 온유하고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진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할 것이니, 이는 그들이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임무를 감당하는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그들이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예를 함께 나누는 자들이니라.

따라서 성경과 역사학자들과 디다케 등등이 전하는 모든 것들을 근거로 할 때에 우리는 기원 1-2세기의 교회들이 다음과 같이 운영되어졌음을 추론하게 된다.

*사도들과 전도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들은 처음에는 사도들의 순회목회 하에 인도되었으나 교회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사도들의 인도함이 격조<隔阻>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체적인 지도자<집사, 장로, 감독>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인도 관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많이 지남에 따라 사도나 전도자, 그리고 선지자들은 이제 그 임무를 다하고 소천하였으며 그들의 직분은 그들의 직무 자체가 완결되었음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에 따라 완전히 종료되었다. 한편 교사 직분은 그 직무가 여전히 계속됨으로 여전히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장로 또는 감독들이 교사의 직무를 이행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별도의 존재적 의의가 없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교사라는 직분도 역시 종료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모든 교회들은 전적으로 자체 지도자들인 집사, 장로, 감독들에 의하여 운영되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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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다케.

“디다케”<Didache-12사도의 교훈> 또는 <사도들의 가르침-Teaching of the Apostles>은 명칭 그대로 12사도들의 교훈을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져 왔다. 이 책은 많은 초기 교부들에 의해서 성경과 다름없이 사용되었는데 한때 사라졌다가 1883년 대주교 브리엔니오스<Archbishop Bryennios>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1056년경의 사본으로부터 인쇄하여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디다케가 작성된 연대와 목적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디다케에 나타나는 교회의 질서에 관한 내용을 근거로 할 때에 그것은 <A.D.70-11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사람은 디다케가 <바나바서-Epistle of Barnabas>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여 보다 더 후대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디다케는 처음부터 교회적인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디다케는 기독교에 새로 입문하는 성도들을 도덕적으로 권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일부는 유대인들의 소책자인 <두 가지의 길-The Two Ways>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디다케에는 그밖에 세례의 방법과 수요일과 금요일에 행하던 금식 문제와 하루에 세 번씩 시편을 낭송하던 것과 주기도문의 정확한 형태 및 성찬식 때의 기도 등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지역 기독교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에 대한 것과 선지자들 및 기타 방문객들을 대접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들어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사이비 비 진리자들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반면에 디다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속죄적 죽음을 치룬 것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2) 신약교회 직원의 구분.

신약초기 기독교에서 교회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세워진 직분제도는 집사, 장로, 감독, 목사였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부터 집사와 장로와 감독과 목사를 한꺼번에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직분자들은 교회의 성장 발전과 아울러 함께 이루어졌던 교회 조직의 확대 과정에서 점진적, 단계적으로 세워졌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약교회 직원들을 구분하여 고찰함으로서 교회 직분자들의 본래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 사도.<使徒-αποστολος-apostolos> <αποστολη-apostole>

교회의 직원 조직을 논증함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소개해야 할 것은 당연히 사도 직분이다. 사도직은 구약교회 시대의 제사장 제도를 비롯한 모든 교직제도가 종료된 이후 교회에 최초로 세워진 교직이었다. 사도라는 직분은 <파견된 자>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리아-חילשׁ-shaliach>에서 유래된 것이고 헬라어의 <아포스톨로스-αποστολος-apostolos>와 동의어<同義語>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직분의 정확한 뜻은 <전권이 위탁된 자>이다. 사도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요13:16>과 <히3:1>에 있다. 따라서 사도란 일정한 사명을 위해 절대적 권위자<하나님>로부터 파견된 <대표자-사자>이다. 즉, 사도는 하나님에 의해 직접 세워진 특별한 직분이었다. 따라서 사도의 권위는 매우 특별한 것으로서 여타 하나님 종들의 권위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② 교부.

교부<敎父>는 사도<使徒>들의 직무를 직접적으로 계승하였던 자들에 대한 호칭이다. 교부들은 사도의 뒤를 계승하였다는 차원에서 <속사도-續使徒>라는 호칭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한편 어떤 역사학자들은 속사도와 교부를 구별하기도 한다. 그들은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이 사도들의 뒤를 계승하였다는 차원에서 <속사도-續使徒>라고 호칭하고 반면에 속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을 <교부-敎父>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속사도와 교부의 호칭은 사도 이후 초기 신약교회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용되어졌다. 신약교회 초기 시대에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들은 사도들에 의하여 임명된 교회 지도자들이 사도들의 직계 제자로서 사도들의 직무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사도-속사도-교부> 등등으로 계승되는 교회적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에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지지 아니하고 다양한 전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들은 사도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전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지도자들에 의하여 인도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교회적 전통이 세워지지 못했다.
사도 이후 초기 신약교회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사도들을 계승하였다는 차원에서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내세웠다. 특히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사도의 권위와 동일한 것으로 선포하였고 서방교회는 로마 감독의 권위를 사도적 권위와 동일한 것으로 주장하여 로마의 감독을 교황의 지위에 추대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사도들의 권위와 교부들의 권위를 구별하였으며 특히 로마 교황의 사도적 권위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이 거부한 것은 교황과 교부들의 비 진리적 권위 즉, 그들의 권력적 권위였다. 개혁주의자들은 교부들과 교황이 사도들의 권위를 내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교회와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사명적 권위는 오히려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들은 교부들의 사명적 권위가 사도들의 사명적 권위를 계승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권위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서 교부들의 사명에 대한 아름다운 권위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③ 집사.

사도 직분 이외에 교회에 처음 세워진 직분은 집사였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교회에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교회 내에 직원들을 세움으로서 교회를 조직화하였다. 그 첫 번째 조직은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세워진 7집사이다<행6:1-6>.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7명의 집사를 세운 것은 구약교회 시대의 <성읍의 7장로>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당시에 로마교회나 소아시아 교회들은 기원 3-4세기 경까지 7집사 제도를 존중하였다. 교회가 처음에 집사들을 세운 것은 장로 후보생을 전제로 하여 선출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들은 다만 교회 조직의 필요성과 교회 사명 완수의 필요성에 의하여 집사들을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집사들은 자연스럽게 장로들에 대한 후보의 위치를 지켜 나갔다. 기원 4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사들은 순차적인 승진을 거쳐서 장로나 감독의 지위에 올랐고 이러한 관행은 교회의 질서와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집사들 중에는 장로나 감독으로 승진되지 않고 종신적 집사로 일한 경우도 많았다. 로마와 같이 큰 교회에서는 집사 직분이 매우 중요하였다. 로마 교회들의 집사 직분은 지방의 작은 교회 장로들보다 더욱 권위가 있었다. 한편 교회가 커지고 집사들이 많이 세워지게 됨에 따라 집사직에도 차등이 있게 되었다. 집사직 제도의 차등이 기록상의 문헌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 4세기 초 북아프리카 교회에서였다. 북아프리카 교회 역사에는 집사직이 평집사<평집事>와 대집사<大執事>로 구분되어 나타나는데 대집사는 집사장<Archdeacon>으로도 명칭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러한 집사 직분 제도는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에서도 시행되어졌다. 기원 4세기 경 교회의 대집사, 또는 집사장들은 교회의 행정적, 재정적, 책임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장차 장로 또는 감독으로 승차되었다. 그들은 서열상으로는 현대교회의 안수집사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직무는 오히려 현대교회의 장로들보다도 권위 있고 막중하였다. 당시에는 장로 또는 감독들이 대부분 현대 교회의 목사와 같은 직무를 행하였고 따라서 대집사, 또는 집사장들이 현대교회의 장로직무를 행하였던 것이다. 일반 집사<평집사>에는 여자 집사들도 세워졌는데 그들은 예배의식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구제를 비롯한 교회행사에만 봉사하였다.
한편 집사들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초기 신약교회는 거의 대부분 장로와 감독들에 의하여 인도되었고 집사들은 감독과 장로들을 보좌하였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집사들이 감독이나 장로들이 하는 직무에 사용되어지기도 하였다. 저스틴 마터의 기록에 의하면 <A.D.150년경> 로마에서는 집사들이 투옥당한 성도들이나 부상, 또는 노환 등등으로 인하여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한 성도들에게 감독이나 장로들이 교회에서 집례한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를 갖다 주어 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게 해주었으며 일부 교회에서는 집사들이 예배 때에 복음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또한 기원 3세기 경에 이르러 성도들이 증가하게 되자 북아프리카 교회에서는 성찬식 때 집사들이 잔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집사들은 또한 장로나 감독들의 명을 받아 교회로부터 먼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심방하여 돌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사들의 비 진리적 직무가 성행하기도 했는데 일부 집사들이 장로나 감독의 지휘를 받지 않고 임의로 성찬식을 거행하거나 또는 심방하면서 설교를 하거나 함부로 안수 기도하는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일부 교회들에게 문제가 발생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체 교회로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 교회는 더 이상 그 문제를 방관하지 않고 교회회의<아를르 회의-A.D.314년> <니케아 회의-A.D.325년>를 열어 집사들의 그러한 활동들을 정지시켰다. 그리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일이나 성찬식을 거행하는 임무는 전적으로 장로와 감독들이 맡아 수행하였다.

④ 장로.

신약교회 시대의 장로들은 구약교회 시대의 장로들과 달랐다. 신약교회 초기의 장로들은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하나는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 갔던 장로들<행11:30; 15:2>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각 교회들이 세운 장로들이었다. 바울은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웠다<행14:23>. 그들은 한 지방 교회의 감독으로서<딛1:5>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지도했고 회중을 가르쳤다<딤전3:1-5><딛1:9><약5:14><벧전5:1-4>. 당시에 한 지방의 교회에는 몇 명의 장로<행11:30> 또는 감독<빌1:1>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안수받아 임직된 정규의 교사들이었고 목사들이었다<딤전4:14>. 당시의 장로들은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하였는데<딤전5:17-> 칼빈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두 종류의 장로 제도를 수립하였다. 칼빈은 두 종류의 장로 중에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로 세우고 다스리는 장로를 현대교회의 장로로 세웠던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는 24장로가 소개되는데 신학자들은 그것을 구약교회의 12지파와 신약교회의 12사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⑤ 감독.<監督-superintendent>. 주교<主敎-bishop>

예루살렘 교회에는 처음부터 교회의 수장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베드로가 수장이었다가 베드로가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인 야고보가 그 직분을 계승했고 야고보가 순교한 후에도 또 다른 자들이 그 직분을 계승하였다. 이그나티우스의 기록 문서들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도 이러한 교회 직분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사도들이 퇴진한 이후, 초기 기독교 지교회의 수장들은 처음에는 장로들이었으나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감독들이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감독 또는 주교라는 직분은 헬라어<에피스코포스-επιςκοπος>를 직역한 단어적 명칭이다. 이 직분은 장로와 동일시되는 직분자들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직분은 거의 장로들에게 사용되었으며 신약 성경에서 이 직분은 교회의 목회자들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초기 시대의 초창기에는 교회에 감독이라는 직분 제도가 없었으며 교회에 대한 감독권은 오직 사도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A.D. 1세기 말>에 이르러 사도들이 모두 소천<所天>하고 교부들이 교회들을 인도하게 되었을 때부터 교회는 자체적인 운영을 해야만 하였다. 사도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던 당시의 교회들은 어떤 하나의 특정적 지도자에 의해서 운영되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여러 명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운영되어지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교회는 점차 조직화 되어갔다. 이때에 교회들은 집사, 장로, 감독들을 세워 교회를 조직화하였는데 초창기에는 장로와 감독간의 뚜렷한 구분이 없었다<딤전3:2><딛1:7>. 그러나 사도들이 없는 상태에서 로마 제국의 극심한 탄압과 각종 이단주의자들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던 교회들은 강력한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따라서 감독들을 세우게 되었다. 감독제도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첫째 여러 명의 장로들 가운데 수석 장로를 세워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때에 교회들 간에 서신을 주고받아야 할 경우라던가 또는 교회회의에 대표를 파견해야 한다던가 하는 등등의 대외적인 문제와 또한 교회안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때에 교회 안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할 필요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교회들은 교회를 대표하는 직위를 가지고 교회를 일사분란하게 이끌어 가야할 대표적 지도자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둘째 영지주의를 비롯한 각종 이단자들이 범람함에 따라 교회의 통일된 권위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졌다. 따라서 개 교회들을 대표하는 권위적 지도자와 지역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권위적 지도자와 기독교 전체를 대표하는 권위적 지도자들이 요구되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이유들로 인하여 지교회들이 감독들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감독들은 교회를 더욱 조직화하여 지방감독 제도와 대감독 제도<교구 감독제>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하여 감독들로 하여금 개 교회를 감독하게 하는 동시에 지방교회들을 아울러 감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서 교회에는 집사-장로-감독의 교직제도가 수립되었고 감독은 다시 개 교회 감독-지방교회 감독<교구 감독>-대교구 감독의 단계적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이때로부터 감독들은 각급 교회들의 수장<首長>들이 되어 교회들의 대소사를 처결하게 되었다. 당시 대교구는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의 세 교구였다.
초기 신약교회 시대에 감독직이 장로들과 같은 직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의 권한위의 직무를 행사하였던 것은 이와 같은 교회의 조직체계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감독들은 대부분 존경받는 장로들 중에서 선출되었고 교회의 확장과 발전에 따라 더욱 강력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각종 교회회의들은 감독들에 의해서만 소집되었고 운영되었으며 때때로 장로들이 교회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그들에게는 대표권이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다만 감독들의 수행원이나 또는 참관인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의 감독들은 개별적인 행동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렸으며 각 교회들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감독들을 선출하였다. 때문에 감독들은 자신들의 임지를 마음대로 결정하여 옮겼으며 새로운 감독을 선출할 때에도 독단적으로 감독을 임명하여 세우거나 또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감독들의 권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며 상대적으로 비 진리적 관행들이 속출하였다. <A.D.325년>에 열린 니케아 회의에서는 이러한 비 진리적 관행들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감독들이 다른 교구로 옮겨가는 것을 법으로 규제하였으며 새로운 감독들은 그 지역 교구의 모든 감독들의 결정에 의하여 세워지도록 하되 최소한 3명 이상의 감독들의 추천과 결정에 의하여 감독이 세워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각 지방의 행정수도에 소재한 대교구<大敎區-또는 대주교구-大主敎區>의 대감독<大監督-또는 대주교-大主敎>들에게는 다른 감독들의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규는 대교구 감독들의 권위를 더욱 높인 결과를 초래하여 또 다른 비 진리적 폐해들을 양산하게 하였다. 종교개혁 시대에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루터파 교회들은 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감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로마 카토릭 교회가 사용하는 주교라는 명칭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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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들의 권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게 되었을 때 감독들로 인하여 비 진리적 만행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의 감독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는 것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A.D.?-98/117>였다.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카토릭 교회(보편적 교회) 하나 밖에 없으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려면 누구나 반드시 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감독은 사도의 계승자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선택받은 사람이며 실제로 제사장과 같은 존재이다. 감독은 지상교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대표자이며 천국에 대응하는 지상의 그림자이므로 성도들은 주님을 대하듯 감독들을 대해야 한다. 성례전을 집전하는 중대한 직무는 오직 감독들에게만 주어진 고유적 권한이며 따라서 교회 밖에서 행하는 어떤 성례전도 무효이다. 교회의 모든 결정권은 오직 감독들에게만 있으며<마16:18>,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감독들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감독들에게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감독들의 결정에 불순종하는 분파주의자들은 이단이며 그들을 따르는 자들도 모두 저주받을 사단의 수하들이다.>

이러한 그의 교회론은 어거스틴에게 그대로 전수되어서 보다 확고한 서방교회의 감독정치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고 그것이 더욱 발전되어 훗날에 교황정치 체제를 이루는 발판이 되었다.

감독들의 이러한 오류적 주장들은 결국 교회를 교권주의적 행정체제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교권주의적 행정 체제하에서의 교회들은 교권주의자들의 독재와 만행의 통치로 연계되어졌다. 교회는 드디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교권주의자들의 교회로 전락되어져 갔던 것이다,

⑥ 목사.

신약성경에 목사라는 직분적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엡4:11>이다. 그리고 목사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또한 오직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사라는 직분은 이미 <목자> <목양자> 등등을 통하여 예표 되어진 교회의 지도자였다. 목사라는 직분을 교회에 도입한 개혁주의자들은 <목자> <목양자> 등등에서 목사의 직분을 찾음과 동시에 <딤전4:14><딤전5:17->에 나타나는 두 종류의 장로 중에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의 근원으로 세운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체계적인 조직을 요구하게 됨과 동시에 전문적인 지도자들을 또한 요구하게 되었을 때부터 가르치는 장로<목사>와 치리하는 장로<현행의 장로>들로 구별되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적 원리에 의하여 개혁주의 교회들은 목사와 장로를 같은 반열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초기 개혁주의 시대의 교회들은 목사와 장로를 같은 반열에서 존중하였으며 목사들은 <행6:1-6>을 근거로 하여 오직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과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 전념하는 목회 전문의 사역을 하였고 장로들은 교회 운영의 전반적인 사항을 돌보는 치리하는 사역을 전문적으로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되었다.

3. 교회 직원들의 선출 역사.

1) 구약교회.

구약 교회 시대의 교회 직분자들은 거의 임명제이거나 또는 세습제였다. 민족교회 시대 이전까지의 구약교회 지도자들은 족장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때까지의 교회 지도자는 당연히 족장들에 의한 세습제였다. 민족교회 시대에 이르러 교회가 크게 성장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족장들이 연합하여 교회를 이끌어갔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모세시대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모세시대의 광야교회로부터 제사장 제도가 수립되어지고 장로들의 역할이 크게 신장되어짐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도 아울러 크게 신장되었다. 이때에 제사장 제도는 레위 지파에 의한 세습제였고 장로들은 임명제였다. 모세는 70 장로들을 세워 민족교회를 인도하게 하였는데<민11:16>, 그 역시 족장들 중에서 선발되어졌기 때문에 세습제와 임명제의 연합이었다. 구약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한 선출방법은 신약교회 시대 이전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패망 후 정복자들에 의한 분봉 왕 제도가 실시되었을 때에 제사장이나 장로들의 전통적 선출 방법이 무시되었다. 레위지파 아닌 자들이 금품으로 왕을 매수하여 제사장이 되는가 하면 정치적 이유에 의하여 왕들의 측근들이 제사장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로들조차도 족장들의 반열에서 세습되어지지 않고 재력과 권력에 의하여 장로가 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특히 장로들의 정치적, 종교적,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의회가 명예와 권력을 행사하게 되자 산헤드린 회원이 되기 위하여 많은 비 진리적 행위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2) 신약교회.

신약교회 시대 최초의 교회직원이었던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임명하였다.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임명하여 세운 사도였다. 반면에 사도 이후의 교회 직분자들은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지거나 또는 속사도 및 교부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초기 신약교회 시대의 집사, 장로, 감독들은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다. 성경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에 처음으로 집사들이 세워졌던 <행6:1-6> 경위를 근거로 할 때에 그리고 사도 바울이 집사와 장로와 감독들에 대한 자격을 명시한 <딤전3:1-13>을 근거로 할 때에 초기 신약교회의 교회 직분자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로와 감독들의 선출은 성직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선출했으며 전체의 만장일치 찬성에 의하여 선출하였고 선출이나 임직식은 주일날에 거행하였다.
그러나 교회 직분자들의 권위와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지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특히 교회에 감독의 직분이 세워지고 그들에게 교회 지휘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이 주어졌을 때, 그리하여 감독들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을 때부터 교회 직분자들의 선출 문제에 이상 기류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감독들은 집사나 장로들을 세움에 있어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위주로 하였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제외시켰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감독을 선출할 때에도 독단적으로 감독을 임명하여 세우거나 또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교회 직분을 받기 위해서 감독들의 눈치를 보거나 감독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교회 직분자들을 선출함에 있어서 황제를 비롯한 정치 권력자들의 비 진리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와 정치 권력자들은 교회 직분자, 특히 감독들을 세우는 일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기중심의 사람들을 교회 직분자로 세웠던 것이다. 기원 4세기 경에 이르러 황제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내분이 있는 교회들이나 큰 도시 교회의 중요한 감독들은 황제가 임명하는 제도를 신설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황제의 감독 임명이 편파적인 것이 됨으로 교회 내에 더 큰 갈등과 내분을 야기시켰고 그로 인하여 교회의 갈등과 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3) 교회 직분자들에 대한 안수.

교회 직분자들을 세울 때에는 안수례<按手禮>가 거행되었다.
안수례에 대한 역사적 증언은 히폴리투스<Hippolytus:A.D.200?-220>의 저작인 <사도의 전통-Apostolic Tradition>을 통하여 전승되어진다. <사도의 전통>에는 성경 이외의 안수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집사 안수.

집사에 대한 안수에는 장로들이 동참하지 않고 감독 혼자만이 안수하였다. <사도의 전통>은 그 이유를 <집사들은 사제직분으로 안수 받는 것이 아니라 감독을 보좌하는 직분으로 안수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 장로 안수.

장로에 대한 안수에는 장로들과 감독들이 함께 동참하였다. 당시에 교회에서 장로 안수식이 있을 때에는 타 교회의 장로들과 감독들도 초청되어서 함께 안수하기도 하였다.

(3) 감독 안수.

처음으로 감독이 세워지게 되어 감독을 안수하여 세울 때에는 장로들이 안수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감독을 안수하여 세울 때에는 장로들과 감독들이 함께 안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독들이 많아지게 되었을 때에 장로가 감독을 안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감독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감독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는데 물론 장로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감독에 대한 장로 안수 문제는 로마 카토릭 교회가 교황권을 포함한 교직자 제도를 크게 강화하기 전까지는 종전대로 유지되어 장로와 감독들이 함께 감독을 안수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는 3세기 경까지 장로와 감독들이 함께 감독을 안수하였다. 한편 로마교회에서는 감독을 세울 때에 자체적으로 안수하지 아니하고 타 교회에서 감독들을 초청하여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독들을 안수하게 하였다.

4. 직원의 위치와 권위.

교회 직원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 나라의 직원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관리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따라서 그 직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직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와 영광과 명예>의 권위와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원들에게는 직분적 우열이나 서열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고유한 은사와 사명이 있으며 그 은사와 사명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여 받은 직무를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무를 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직원들과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요8 : 28>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을 홀대하거나 무시할 수 없으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최고의 예우와 최대의 존경과 최상의 섬김을 받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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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다수의 교회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외면하고 교회 직원들을 계급적으로 분류하여 담임목사를 최고의 자리에 앉히고 동역하는 목사들과 강도사, 전도사들을 담임목사의 부하 직원으로 만들며, 또한 장로와 권사들을 목사를 보좌하는 보좌관으로 취급하고 있는바 그것은 참으로 야단맞아 마땅한 행악이다. 심지어 어떤 부흥강사 목사는 <목사가 가는 천국과 장로가 가는 천국이 같은 줄로 아느냐?>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 같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이 작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을 무시하고 경시하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자신의 신학적 무지를 스스로 들어내는 한심한 작태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한 모든 종들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오직 <착하고 충성된 종-마25 : 23>으로 예우하고 있으며 그들의 사역에 대하여 크고 작은 것, 많고 적은 것을 구별 하지 않고, 다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마25 : 23>고 칭찬하면서 그를 높이시고 예우하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 이렇듯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교회의 직원들은 하나님의 종이지 목사의 부하가 아니며, 그들은 모두가 같은 반열<하나님의 종의 반열>에 위치함으로서 우열이 없으며, 그들의 권위와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으로 우열도 있을 수 없다. 교회의 모든 직원들은 동등한 예우를 받으며 동등한 존경을 받으며 동등한 섬김을 받아야한다. 따라서 호칭부터 바로 정립하여야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와 동역하는 목사들을 <부목사> 또는 <부교역자>로 호칭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호칭 앞에 <부>라는 용어가 붙을 이유가 없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직책과 직무에 맞는 명칭으로 호칭되어야한다.

5. 직원의 자격.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일반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들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신체적인 결함까지 제한적 요소가 되었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 : 32>의 원리에 의하여 자격에 대한 일반적인 구속력이나 제한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직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보다 더욱 강하고 엄격한 구속력과 제한성을 받게 된다. 성경 <딤전 3장>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자격을 요구한다.

1) 신학적인 온전성을 갖추어야 한다.

교회 직원들은 먼저 신학적으로 온전하여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진리와 비 진리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하며, 특히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정확하게 정립하여야한다. 자신의 사명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할지라도 신앙의 선배로서 특히 초신 자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정도의 신학적 온전함을 갖추어야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학적인 개념이 바로 정립되어져 있어야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은 어떤 존재이며 <가정, 교회, 이웃, 직장, 사회, 민족, 국가> 등등에 대한 자신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신학적 차원에서 바로 정립하여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신학적 삶을 살수 있도록 하여야한다.

2) 신앙적인 온전성을 갖추어야한다.

교회 직원들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이 정립되어져 있어야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신앙이 있어야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는 일이 없이 항상 범사에 감사하고, 범사에 만족하고, 범사에 행복하고, 범사에 평안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보다는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신앙의 온전성을 갖추어야하는 것이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의 온전성을 갖추어야하며 교회적, 가정적, 사회적, 국가적인 제반 법규와 질서<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도>들을 준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고 규범이 되는 신앙의 온전성을 갖추어야한다. 교회 직원의 신앙은 반드시 실천적인 신앙이어야 한다. 가정, 교회, 직장, 사회 등등 자신이 소속된 영역에서 어떤 경우에나 누구에게나 교회 직원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실천 신앙적 삶을 살아,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자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직원들의 신앙이 이중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교회 내>적인 것과 <교회 외>적인 것으로 구분되어지며, 그 정도의 차이가 심지어는 극과 극의 교차를 이루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특히 교회 직원>들의 삶은 이중적일 수가 없다. <교회 내>적인 것과 <교회 외>적인 것의 구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직원들의 삶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오직 동일하여야 한다.

3) 인격적인 온전성을 갖추어야한다.

교회 직원의 신학과 실천 신앙적 삶은 당연히 내면적으로 다져져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외면적으로 표출될 수 있어야한다.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세련되고 품위가 있어야하며 그야말로 멋이 있어야한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반면에 강하고 담대하여야하며 차분하고 여유가 있되 결단성과 추진력이 있어야하고 사랑과 자비가 넘치되 의와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기개가 넘쳐야한다. 교회 직원에게 이와 같은 인격이 요구되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증거 되고, 선포되기 때문이다.

4) 사명 완수를 위하여 노력하는 자이어야 한다.

교회 직원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이어야 한다. 사명 완수를 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은사를 끊임없이 계발하고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말씀에 정진하는, 사명자로서의 노력적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자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며,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소홀히 여기는 자를 준엄하게 책망하신다<마25 : 14-30>.

6. 직원의 사명 완수.

교회의 직원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다양한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사명은 다양하지만 사명을 완수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교회 직원의 사명 완수에 있어서 반드시 유념해야할 몇 가지를 고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보다 그 신분이 우선 할 수 없다.

교회 직원들 중에 하나님의 섭리보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존심과 명예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종>의 도<道>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여야한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증거하고 선포한다<빌2 : 5-8>.

2)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보다 종의 입장이 우선 할 수 없다.

교회 직원들 중에 하나님의 교회보다 자신의 입장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은 마치 자신을 위하여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교회 직원을 위하여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교회 직원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직원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고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적인 사명을 완수하여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입장보다 아버지의 입장을 더욱 귀히 여겼다<마26 : 42>.

3)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보다 종의 입장이 우선할 수 없다.

교회 직원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세워진 존재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세워진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직원들을 세우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섬김의 정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는 <종>과 <자녀>의 신분의 차이에서 명백하게 증거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 받은 <상속자>이고, 교회 직원은 그 상속자들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종>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정도를 가르치셨고<요13 : 4-5>,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25 : 35-40>.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직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모르고 오직 섬김을 받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는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없다. 성경은 섬길 줄 모르고 섬김 받기만을 즐거워하는 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 한다 <저희는 이미 자기상을 받았느니라.-마6 : 16>

4)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이다. 따라서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한다.

교회 직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도구이다. 도구에게는 도구로서의 역할만 강조되어질 뿐 그에게 어떤 칭찬이나 감사나 사례가 돌아가지 않는다. 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실지라도 <종>은 다만 도구의 위치를 철저하게 고수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모든 영광을 오직 아버지께 드림으로서 이와 같은 진리<종의 위치 고수>를 몸소 이행하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 직원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온갖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고 있는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으로서 정죄 받아 마땅한 행악이다. 교회 직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름다운 결과는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고, 불미스러운 결과들은 자신의 실책으로 돌리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요 자신은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의 위치를 고수하여야한다.

5)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법에 근거하여 맡은바 사명을 완수하여야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는 불의를 싫어하며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는 오직 정의<正義>와 준법<遵法>만을 요구한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딤후2 : 5>이라고 경고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 : 23>고 호령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제목 하에 온갖 불의, 불법, 탈법, 편법, 위법을 자행하고 있는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자 는 이러한 불법을 오히려 미화 하여 <꿩 잡는 것이 매다 > 라고주장하면서 결과만 좋으면 되었지 방법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고 한다. 그러나 꿩을 잡아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먹을 수 도 없고 박제를 만들 수 도 없게 꿩을 잡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잡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낳다. 불의, 불법, 탈법, 편법, 위법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법대로 일하지 않고 온갖 불의한 일들과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것은 물론 신학 부족에서 비롯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보다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자랑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법까지 무시하고 외면하는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다.

6) 교회 직원은 다투거나 혈기를 부려서는 안 된다.

교회 직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투거나 혈기를 부려서는 안 된다. 비록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고 진리이며 따라서 자신의 주장대로 하지 아니하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언성을 높인다거나 혈기를 부린다거나 다투어서는 안 된다. 비 진리적 사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되 온유하고 논리적이며 결코 품위를 잃지 않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여 주어진 법과 질서 하에서 끝까지 비 진리에 대항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진리가 채택되고 진리가 거부되면 남은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물러나야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지 않게 하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만약에 <정의에 불타는 사명감에 의해서> 혈기를 부리거나 어떤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다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께 맡겨야한다. 그리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들의 욕심을 책망하실 것이며 비 진리 자 들의 일시적인 승리를 오히려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7. 직원의 전출.

교회 직원들이 전출하게 될 때에 교회는 그들에 관한 행정일체를 전출하는 교회에 보내주어야 하며, 교회 직원을 맞아들이는 교회에서는 전임 교회에서의 그의 직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교회 직원은 <비록 담임목사에 의하여 임명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 직분의 본래 임명 자 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하나님의 종들을 당연히 받아들여야한다.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종들을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결정권이 없다.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종들을 받아들여야하는 의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이비 또는 이단>에서 받은 직분이나 또는 정상적인 기독교 교회에서 받은 직분이라 할지라도 불법적으로 받은 경우에는 교회가 그것을 심사하여 거부해야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무시하고 적법 절차를 밟아 하나님께 임명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거부하고 무시하는가 하면, 오히려 불법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없이> 직분을 받아 행세하는 자들을 교회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우들이 허다한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아니할 수없다.

8. 현대교회 직원.

1) 직원의 종류.

현대교회 직원은 교파와 교단에 따라 다르나 대부분의 경우 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이며 집사는 안수집사와 평집사<서리집사>로 구분된다. 그중에 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항존직으로서 노회 소속이다. 평집사<서리집사>는 교회 소속으로서 임기는 1년이다.

2) 직원의 선출.

현대교회 직원선출 방법은 직분에 따라 다르다. 장로교회를 기준으로 할 때에 목사는 목회자로서 정규 신학과정을 이수한 후에 노회의 시험과 인준을 거친 후 노회 주관 하에 안수 받아 장립된다. 강도사, 전도사는 정규 신학과정을 이수한 후에 노회의 시험과 인준을 거친 후 노회 주관 하에 안수 받아 장립되지 않고 임명된다. 장로, 안수 집사는 남자에 국한되며 공동회의<교회총회>를 통하여 선출하고 노회의 시험과 인준을 거친 후 노회 주관 하에 안수 받아 장립된다. 반면에 권사는 여자에 국한되며 공동회의<교회총회>를 통하여 선출한 후 노회로부터 임명받아 세워진다. 평집사<서리집사>는 당회에서 심사하여 임명한다. 장로와 안수집사가 남자로 제한되는 것과 권사가 안수 받아 장립되지 않고 임명되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 여자가 안수 받아 장립되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직원 제도는 근래에 이르러 크게 바뀌었다. 최근의 어떤 교단에서는 권사를 세울 때에 안수하여 세우고 있다.

9. 현대교회의 직원 선출에 대한 오류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직원 선출과정에서 심한 비 진리와 오류적인 관행들을 계속하고 있는바 그중에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들은 디음과 같다.

1) 장로, 권사 선출.

(1) 선출과정.

① 정책적 오류.

장로와 권사를 선출하는 과정에 교회적인 정책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A. 교회건축을 비롯한 교회의 각종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정책적 차원에서 장로와 권사들을 세우는 경우.

B.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적 권세와 권위를 도모하기 위하여 측근들을 장로와 권사로 세우는 경우.

C. 성도들이 목사의 파행과 전횡을 막기 위하여 바른말 하는 자들을 장로와 권사로 세우는 경우.
② 목회자들의 농간.

장로와 권사를 선출하는 과정에 목회자들이 농간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현대교회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교회에 장로나 권사를 세움에 있어서 자신의 측근들 위주로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이나 비협조적인 자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자신의 목회에 어려움을 준다고 하여 아예 장로들을 세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부 목사들 중에는 목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교회에 장로들을 세울 수 있으나 목사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교회에 장로들을 안 세울 수 있다는 자체적인 규약까지 세워서 장로들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이러한 목사들의 만행이 교파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시행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교단<침례교>에서는 장로들이 목사의 목회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장로 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장로제 폐지에 대한 자신들의 내면적인 이유를 감추고 장로 직분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근거로 제시한다. 저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로와 감독과 목사를 목사, 한 사람에 대한 다양한 호칭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목사가 곧 장로요 감독이기 때문에 교회에 장로를 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장로 직분에 대한 유권해석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저들의 주장이 사실은 장로들을 세우지 아니하려는 거짓된 주장이라는 사실을 그들 자신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교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증명된다. 저들은 교회의 장로제도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장로를 세울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교회에 장로 직분자들을 존재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자기 모순을 입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침례교회에서는 장로를 세우기도 한다. 저들이 장로 직분을 불법이라고 하면서도 장로들의 전입을 허용하거나 심지어는 교단법을 어기면서까지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는 불을 보듯 뻔하다. 장로들이 내는 거액의 헌금과 장로들로 인한 교세의 확장 때문이다. 한편 어떤 목사는 자신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장로와 권사를 세우고자 할 때에 문제 있는 자들을 의도적으로 장로와 권사로 세워 교회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2) 금품의 요구.

장로와 권사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금액의 헌금이 요구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장로와 권사로 세움 받은 자들은 교회가 <묵시적으로> 지정하는 일정액을 교회에 헌금하는데 그것은 거의 강제적이다. 어떤 교단에서는 장로와 권사로 추대되었으나 교회가 지정해주는 헌금을 하지 않는 경우 그들을 장로와 권사로 세우지 않는다.

(3) 안수문제.

초기 신약교회는 장로와 집사를 안수할 때에 장로들이 그 직무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주의자들은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장로들의 안수를 크게 제한하였다. 감독<현재의 목사>과 장로는 장로와 안수 집사를 안수할 수는 있으나 장로는 감독을 안수할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정되었다. 그러나 현대 목사들 중 일부는 목사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목사와 장로는 장로를 안수할 수 있으나 장로는 장로와 안수 집사는 안수할 수 있는 반면에 목사는 안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들이 이와 같은 규례를 만들은 것은 목사들의 권위를 장로들의 권위위에 두고자 한 것이다. 저들은 목사와 장로가 같은 반열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장로들을 목사의 권위 하에 두기 위하여 이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목사의 권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의 권위는 목사가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목회하며 그 진리의 말씀에 동행하는 실천 신학적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다. 비 진리와 오류로 일관된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살면서 제아무리 목사의 권위를 세우려 한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시지 아니하시며 성도들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비 기독교인들까지도 그러한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2) 여자목사 여자장로에 대한 오류.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는 성경에 없으며 기독교 역사에도 전혀 유례가 없다. 현대 교회에서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의 기독교들 중에 소규모 이단교파들이 여자목사, 여자장로를 세우고 있으나 그들의 활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는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만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 여자목사 여자장로 장립의 역사.

한국 기독교에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가 최초로 거론된 것은 1920년대 초였다. 기독교를 통하여 유입된 서양문화는 한국의 전통적인 남존여비 문화를 서서히 무너뜨렸고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신장되면서 여자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여자들의 활동은 특히 교회를 통하여 확장되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감리교회가 가장 먼저 여자 장로들을 세웠고 1930년에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하면서 14명의 여자목사를 세웠다. 장로교회는 1932년 제21차 총회에서 여자장로 제도에 대한 의제가 상정되었으나 거부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하여 그 문제가 상정되었으나 여전히 총회에서 부결되었다. 해방 후 이단으로 정죄되어 장로교단으로부터 축출된 기독교 장로회가 여자장로를 합법화하였으나 장로교단은 여전히 여자장로 제도를 거부하였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는 감리교에만 존재하였고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등등의 교단에서는 계속하여 거부되어 왔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등장한 순복음 교회가 최자실을 목사로 장립하면서 여자목사 여자장로 문제가 더욱 활발하게 거론되었고 군소 교단들이 그 제도를 채택함에 따라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였다. 특히 여자목사들로 구성된 교단들이 설립되어지고 여자목사가 되려는 자들이 신학교에 대거 입학하면서 여자장로 문제보다 여자목사 문제가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결국 20세기 말에 이르러 장로교 <통합 측>이 여자장로 제도와 여자목사 제도를 합법화함에 따라 다른 교단에서도 그 문제로 인하여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 여자목사 여자장로 장립에 대한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에 대한 근거와 전례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여자목사 여자장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거부한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하노니 오직 종용할 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 2:11-14>

이 말씀은 여자의 가르치는 직무 <복음 전파 및 성경의 교육> 자체를 불허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가르치는 직분 <여자목사 여자장로>을 불허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서>를 통하여 말하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장로>를 말하는 것으로서, 현대교회의 <목사>를 말하는 것이며 <여자의 남자를 주관 하는 것>은 <치리하는 장로>를 말하는 것으로서 현대교회의 <장로>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에 교회에 남녀평등 사상이 주입되면서 여자들의 직분과 직무에 대한 의견이 분분 하였고, 드디어는 여자들의 직분과 직무에 대한 주장들이 강력하게 제기됨에 따라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하여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정립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왜 여자목사와 여자장로가 세워 질수 없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통하여 선포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대표로 아담 <남자>를 먼저 창조 하신 후 여자<이와-하와>를 창조 하셨다. 때문에 아담 <남자>는 이와 <여자>로 인하여 죄가 인류사회에 도입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대표자로서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구약시대의 장로나 제사장들은 모두 남자로 세워 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남자들에 비하여 진실과 성심으로 순종하는 여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사도>의 반열에 세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신을 저주까지 하면서 불순종한 남자들을 제자<사도>로 세우셨다.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오직 남자들만을 교회의 지도자<목사 장로>로 세워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전통이 현대교회 <특히 한국의 기독교>에서 무너지고 있다.

(3) 한국기독교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거부한 근거.

지금까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거부한 자 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거부하지 않고 교회 헌법을 근거로 하여 거부해 왔다. 장로교 교단을 예로 들면 <장로교 교회 헌법 제5장 제3조, 장로의 자격>에 <만 35세 이상 된 남자 중....>으로 명시되어 있다. 반면에 <장로교 교회 헌법 제4장 제2조, 목사의 자격>에는 남자로 제한한다는 내용이 문자적으로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딤전3:1-7>라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남자라는 것이 묵시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은 교회법 보다는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에 의하여 여자에 대한 비하적 개념 때문에 거부한 것이었다. 만약에 저들이 하나님의 섭리, 성경, 교회법, 등등에 의하여 지금까지 그 제도를 거부해 왔다면 이제 와서 그 제도의 시행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거니와 여자장로 여자목사들을 세운 후에도 여전히 그들을 무시하고 홀대하여 중요한 직무를 함께 하지 아니하는 명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지금까지 그 제도를 반대했던 성경적 근거는 과연 무엇이며, 이제 와서 그 제도를 시행하는 성경적 근거는 또 무엇이냐고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의 변명을 내어놓고 있다. 하나는 <시대와 문화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요 다른 또 하나는 <성경을 자세히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 이었다>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법화시키기 위하여 여선지 <드보라>의 사사 직무 수행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 할 것이요-행2:18>를 근거로 제기한다.

(4)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근거.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근거로 제시한다.

① 미리암의 여선지 직<민12:9-16; 신24:9>
② 드보라의 여선지 직<삿4:5-23>>
③ 남종과 여종<<행2:18>
④ 시대와 문화가 여자목사와 여자장로를 요구 한다.
⑤ 하나님의 남녀평등
⑥ 그동안 성경을 잘못 보았다.

우리는 저들이 제시하는 근거들을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반박한다.

① 미리암의 여선지 직<민12:9-16; 신24:9>에 대하여.

성경에는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여선지자들의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여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고하고 가르치는 직무를 행하였으나 교회, 국가, 민족, 등등을 대표하는 수장<首長>적 직분자는 아니었다. 미리암이나 드보라를 비롯한 여선지자들은 남자 선지자들이 행하는 선지자의 직무는 행하였으나 교회, 민족,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직분과 직무는 허락되지 않았다. 구약시대의 교회 대표는 대제사장들이었고 민족대표는 장로 또는 국왕이었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은 미리암의 여선지직<민12:9-16; 신24:9>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저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이 자신들의 지위가 모세와 대등한 것으로 착각하여 월권을 행사하자 즉시 그들을 징계하셨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여 범죄하였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지도자 위치를 세워주시기 위하여 아론과 미리암을 즉시 징계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징계에도 차등이 있었다. 아론은 다만 책망을 받은 반면에 미리암은 문둥병의 징계를 받았다. 그것은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교회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② 드보라의 여선지 직<삿4:5-23>에 대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은 드보라의 여선지 직<삿4:5-23>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그것 역시 오히려 저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 사사 시대에 여선지 드보라가 선지자의 직무를 행할 때에 가나안과의 전쟁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에 여자 <드보라>를 대표로 세우시지 않고 남자 <바락>를 대표로 세우신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한 바락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여선지자들이 선지자 직분을 받아 선지자 직무를 행사하지만 교회의 대표로 세움 받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③ 남종과 여종<행2:18>에 대하여.

<그때에 내가 내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2:18>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은 <행2:18>의 남종과 여종을 목사로 내세워 여자목사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2:18>의 남종과 여종에 대한 저들의 오류는 저들의 신학적 무지함을 더욱 자증 한다. 이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미 <요엘2:28>을 통하여 말씀 하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능력을 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남종과 여종은 목사와 장로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 되는 것이다. 따라서 <행2:18>을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학적 무지를 스스로 들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목사에게만 국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④ 시대와 문화가 여자목사와 여자장로를 요구 한다는 것에 대하여.

시대와 문화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 제도를 세운다는 변명은 신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규례와 법도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해석 원리와 적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규례와 법도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해석 원리와 적용이 달라진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은 그분은 영원한 능력과 절대적 능력과 완전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와 계시록의 기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 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2-13>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시대와 문화의 요구에 부응하는 차원까지도 모두 감안하시어 기독교의 법과 질서를 완전하게 세우셨다. 따라서 이제는 시대와 문화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자목사 여자장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을 부인하는 악행이며 자신들이 소경 적 지도자임을 자증하는 것이 될 뿐이다.

⑤ 하나님의 남녀평등에 대하여.

하나님의 남녀평등을 근거로 내세우는 것도 역시 마찬 가지로 자신들의 성경적 무지함을 스스로 들어내는 어리석은 짓이다. 인류사회의 남녀평등 원리는 모든 면에서 적용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을 동시에 대표로 세우시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남자>를 대표로 세우셨다. 그것은 대표가 둘이 되면 사회질서가 성립 되지 않기 때문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은 사회의 질서원리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함을 스스로 자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남녀평등 원칙을 세워주셨지만 교회의 질서를 세우심에 있어서는 남자를 대표로 세우셨다.

⑥ 그동안 성경을 잘못 보았다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거부하다가 그 제도를 합법화 하는 자들 중에 성경을 자세히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그동안 성경을 잘못 보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신학적 무지함에서 비롯되어 진 것 이라기보다는 참으로 악함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는 책망을 받아 마땅하다. 이미 논증 한바 있듯이 성경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오히려 그것의 확실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 진리적 주장을 하는 것은 사실상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진리를 비 진리로 바꾸려는 악행이 되는 것이다.

3) 여자장로, 여자목사 장립에 대한 반대.

우리는 지금까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시행하여 왔던 자들이나 여자목사 여자장로가 된 자들이나 앞으로 여자목사 여자장로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신학적으로 무지한자 들이요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 둘은 결국 하나이다. 신학적으로 온전한 자라면 성경이 그 제도를 절대 불허 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온전한 자들 이라면 하나님의뜻을 거부 하면서 자기욕심을 채울 수도 없다. 신학적으로 온전한 자들 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뜻을 거부 하면서 까지 자기욕심을 채우는 것이며 욕심 때문에 신학이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둘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둘러싸고 욕심에 휘말린 자들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여자목사 여자장로가 되어 권위와 권세를 누리려는 자들이고 다른 또 하나는 그 제도를 통하여 어떤 유익을 얻으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욕심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만 목사나 장로의 직분을 부여하신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경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부족한 것이 수없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남자를 교회의 대표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였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피조가 그것을 찬성하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오직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반대되는 것은 목숨을 다바쳐 물리쳐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절대 순종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다음과 같이 거부한다.

(1)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대표권을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고, 그에게 모든 대표권을 부여하셨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동역자, 동반자>로 창조되어졌다. 남자가 대표권을 갖는 것은 여자가 먼저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모든 책임을 진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증거 되어진다.

(2) 성경이 증거 한다.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주장하는 자들은 미리암, 드보라, 등등의 여자 선지자들의 활동을 근거로 내세워 여자 장로 및 여자 목사의 합법성을 주장하고 있으나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오히려 여자 장로 및 여자 목사장립의 불법성을 증거 해주고 있다. 미리암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으나 대표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당시의 대표자는 분명히 남자<모세>였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이 모세의 대표권에 맞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모세가 지도자답지 않은 행동을 하였을 때, 미리암이 그것을 통하여 모세를 대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은 것이 증거하고 있다<민12 : 1이하>. 뿐만 아니라 여선지자 드보라에 대한 성경 역시 여자 장로 및 여자 목사의 불법성을 증거 한다. 여선지자 드보라는 사사로서 재판장의 위치에 까지 있었으나 국가적인 행사<가나안과의 전투>에는 남자<바락>을 대표로 내세웠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구약 시대는 물론이요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자가 안수 받아 <기름 부음 받아> 장로 또는 목사가 된 전례가 없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 장로, 왕, 등등의 부족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지도자<대표>들은 모두가 한결 같이 남자였으며 신약 시대의 사도, 장로, 목사들도 모두가 남자였다. 여자는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3) 성경에 전례가 없다.

오늘날 여자 장로, 여자 목사장립 문제로 인하여 교회 회의<총회>들이 상당한 논란을 벌이고 있는데 여자 장로, 여자 목사안수와 같은 제도는 교회 회의 같은 것을 통하여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제정되어지는 것이며 교회는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된다. 그것이 만약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허용된 것이라면 성경에 반드시 그에 대한 전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찰한 바 있듯이 성경은 그러한 전례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만약에 여자 장로, 여자 목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단 한명의 여자 제사장이나 여자 장로들을 세우지 아니하셨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찌하여 12제자들 중에 단 한명의 여자도 허용하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사도 시대교회는 물론이요 현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여자 장로, 여자 목사가 안수되어 장립한 바가 없는 교회의 역사와 전통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전례를 따라야한다. 성경의 전례를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불충이요 대죄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하는 불충한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4) 신학 부재 때문이다.

과거에 일부 교파에서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안수하여 장립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하는 불충이요, 대죄인 것을 알지 못했던 신학 부재에서 비롯되어진 불미스러운 결과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전혀 알지 못하였고 더욱 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상상조차 할 수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안수하여 장립한 교파의 신학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저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그 주권적 섭리에 의한 예정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것을 적용하지 못하고 주저하면서 신앙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장로 여자목사 제도가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그리하여 여자장로 여자목사 제도를 성경적인 것, 합법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5) 욕심 때문이다.

여자장로 여자목사가 되기 위하여 고군분투 하는 자들 중에 대부분은 신학적 부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장로 여자목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여자장로 여자목사가 되려고 한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궤변이다. 저들에게는 여자장로 여자목사에 대한 욕심만 있을 뿐 하나님의 섭리는 전혀 안중에 없다. 물론 저들은 이와 같은 우리의 주장을 단호하게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양심을 속이지 말고 묵상하며 기도하여 보라> 만약에 진정으로 욕심 때문이 아니라면 그들은 신학을 모르는 자들이다.

(6) 양심의 문제이다.

여자 목사, 여자 장로를 안수하여 장립하였던 과거의 전례가 신학 부재에서 비롯되어진 결과였던 반면에, 그것을 목숨 걸고 반대했던 교파 및 교단들이 이제 와서 그것을 슬그머니 허용한 것은, 신학적인 문제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신앙의 양심을 내다버린 한심한 작태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저들은 현대의 시대적 환경과 문화적 발전이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반대할 명분이 없게 되었다고 너절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저들이 여자 목사, 여자 장로를 안수하기로 결정한 것은 여자들이 그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이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총회에서 결정해야 할 문제이지만, 사실적으로 말하면 여자 장로문제는 교회적인 문제요 여자 목사문제는 신학교의 문제이다. 교회들은 여자 장로를 세움으로서 얻어지는 유익 때문에 그리고 신학교는 여자 목사 안수로 인하여 얻어지는 유익 때문에 그들을 세운다. 그리고 그 유익이란 신학적, 신앙적 차원의 유익이 아니라 순전히 금전적 유익이다. 금전적 유익을 위하여 일부 교회에서는 교단을 옮기면서까지 여자 장로를 세우고 있고 일부 군소 교단신학교에서는 총회의 반대 결의에도 불구하고 여자 목사를 세우기까지 한다. 저들에게는 이미 신학적 양심이나 신앙적 양심 같은 것은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쳐진지 오래이다. 저들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섭리 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유익만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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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들은 성경에 여자 장로 또는 여자 목사를 세우지 말라고 한 것이 없다고 항변한다.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은 항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세우라고 한 적이 있는가?>
뿐만 아니라 성경은 미리암, 드보라를 통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선포하였고 오직 남자로만 구성된 장로, 제사장, 12사도를 통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선포하였으며, 특히 <딤전 2:11-14>을 통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하노니 오직 종용할 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 2:11-14>

<딤전 2:11-14>에는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창조 원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선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자목사, 여자장로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대들이 성경이 문자적으로 그것을 금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대들의 주장에 맞게 충고한다. 성경이 어떤 것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분명히 정해주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에 증거 된 역사적 또는 전통적 증거들을 따르면 된다. 성경 어디에 여자목사, 여자장로들이 존재하였던가? 성경이 증거 하는 역사적 전통적 전례들은 이미 논증한 바대로 여자 장로 여자목사의 장립불가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오직 욕심에 눈이 멀어 성경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있도다. 악하고 불쌍한 자들이여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진리에 바로 서라.>

제24장. 하나님의 성도.

1. 성도의 신분.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직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성도이다. 하나님의 성도는 행정상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도 호칭되지만 가장 확실한 법적 호칭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그 호칭<하나님의 자녀>은 그 어떤 호칭과도 비교되어질 수 없는 최고, 최대, 최상의 호칭이다. <하나님의 자녀>보다 더 높고 더 나은 호칭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종>이 성도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도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는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최고, 최대, 최상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자녀를 섬기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존재이다.

2) 교회와의 관계에서.

성도가 교회직원<하나님의 종>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최고의 법적 신분을 가지며 따라서 주의 종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존재이지만, 반면에 교회와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교회의 직원<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는 <하나님의 전권 대사>들로서의 권위와 권세를 갖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지휘 체제 아래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존경하고 섬겨야하며 그 권세와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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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관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종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최고의 존재임을 명심하고, 또한 자신들은 그들을 섬기기 위하여 세움 받은 존재임을 명심하여, 그들<하나님의 자녀들>을 최선을 다하여 섬기고, 존중하고, 사랑할 것이며, 반면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직분 자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존재임을 명심하고, 또한 자신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그들의 지휘 통제를 받게 되어 있다는 진리를 명심하여, 하나님의 종들을 존경하고, 섬기고, 사랑하며, 그들의 권위와 권세를 존중하고 순종해야한다. 이렇듯 피차에 대한 섬김과 사랑함과 존중함과 순종함이 굴절 없이 순전하게 양립될 때에, 교회는 영광과 승리를 얻을 것이며, 교회의 영광과 승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선포되어질 것이다.

3) 성도와의 관계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 자매의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유기적 가족관계는 그러나 법적, 행정적 관계가 아니라 실제적관계이다. 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하여 혈맹<血盟>되어진 가족<家族>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윤리적, 도덕적, 의무적, 신앙적>인 차원의 사랑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서 즉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어야한다.

4) 사회적 차원에서.

성도는 기독교인임과 동시에 사회의 일원이며 국가와 민족의 일원이다. 사회도 국가와 민족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의 한 영역이며 모든 성도가 그 사회, 그 국가, 그 민족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사회와 국가와 민족의 일원으로서 그 영역의 제반 법규와 질서에 순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와 질서와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한다. 특히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게 될 때에는 생명을 다 바쳐 그 위기에 대처해야한다.

2. 성도의 권리와 임무와 자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권리와 임무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권리와 임무와 자유의 행사는 세례 교인이상<유아 세례자는 입교 후>으로 제한되어지며, 또한 교회의 내규에 의한 제한을 받는다.

1) 선거권, 피선거권

성도는 교회 직원 선출에 있어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에 대한 권리와 임무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2) 참정권.

성도는 교회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임무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3) 발언권.

성도는 교회의 각종 사업과 운영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밝힐 수 있는 발언권에 대한 권리와 임무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4) 잔존권.

성도는 어떤 사태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남아 잔존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5) 전출권.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를 떠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6) 순종.

성도는 교회의 각종 정책과 법규와 지도에 순종하고 참여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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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이러한 권리와 임무와 자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당하거나 침해당하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거나 제한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양보하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영광과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 제한하고 양보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3. 성도의 속성.

성도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로운 자이며 거듭난 자로서 거룩한 자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여전히 타락한 본성의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매우 특별한 속성들이 있다.

1) 순전...순수, 순전, 감동, 눈물, 애정, 동정, 순정,
2) 순종....하나님, 말씀, 목회자, 교회질서와 제도, 등등에 순종.
3) 충성 봉사..하나님, 말씀, 목회자, 교회질서와 제도, 등등에 충성, 봉사.
4) 욕심....물질, 강복, 권력, 권세, 권위, 지위, 직분, 명예, 미모, 등등에 대한 욕심.
5) 자랑....물질, 문벌, 학벌, 권력, 권세, 권위, 지위, 직분, 명예, 지식, 지혜, 미모, 등등에 대한 자랑과 과시.
6) 질투....모든 것에 대한 상대적인 유약함과 자존심에 의한 질투.
7) 착각....자신이 매우 똑똑하거나 잘하거나 잘난 것으로 착각함.
8) 유약....판단부족, 불신, 호기심, 신비주의 유혹, 미혹, 오류, 이탈, 연약, 질병, 오해, 비관, 소외감, 자기비하, 외로움, 염세주의, 두려움, 무서움,
9) 고집....고집, 독선, 이기주의, 과신, 맹신, 외골수,
10) 혈기....포악, 무례, 난폭, 투쟁, 분파, 분당,
11) 기타...약자무시, 강자에 아부, 호들갑, 수선, 무책임, 무성의,

4. 성도의 삶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신분에 적합하고 합당한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바 성도가 마땅히 행하고 지켜 살아야 할 삶을 고찰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신앙에 있어서.

(1) 예배적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는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의 삶에는 교회 안과 교회 밖의 삶이 구별되어져서는 안 된다. 성도의 삶은 또한 예배 시간과 일상 시간의 삶으로 구별되어져서도 안 된다. 성도의 삶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일관되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오해하여 항상 교회에 엎드려 찬송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도의 삶이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그리고 순전히 일치되는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삶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2)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어야한다.

성도들은 법률적, 행정적으로 온전하고 순전하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원죄는 물론이요 그 밖의 일생적 삶 속에 일어나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일체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법률적, 행정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온전하며 순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현세적 삶은 사실상 실제로 온전하며 순전할 수없다. 성도들은 현세에서는 온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도들의 삶이 법률적, 행정적으로만 순전하고 온전할 뿐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모독하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망극하신 사랑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성도들이 현세를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조명하시어 그들을 순전하고 온전하게 하신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에 철저하게 순응하여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야한다.

(3) 기도 생활을 해야 한다.

성도는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서 영육 간에 깨어있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가 기도를 게을리 하면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서 하나님께 범죄 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불충, 불효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도의 기도는 삶을 통한 기도이어야 한다. 성도의 삶 자체가 곧 기도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며, 기도를 통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받아야한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푯대가 되고 지주가 되고 방법이 되어야한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음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공적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익힐 것이며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 배우는 일을 등한히 하면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며 사이비 이단들의 비 진리에 빠져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게 된다.

2) 가정에 관하여

성도는 가정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며 또한 협력과 상부상조의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은 가정을 분리시키고 파괴시키는 악행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며 상부상조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되 법률적, 의무적, 책임적 차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행하여야한다. 가정이 내게 어떤 존재인가? 와 가정이 내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를 계산하지 않고 내가 가정에 어떤 존재인가? 와 내가 가정을 위해서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는 또한 가문의 훌륭한 전통과 고귀한 명예를 자랑으로 여기고 존중하여 후대에 길이 전하여야 하며 더욱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가문의 전통과 명예를 세워 후대에 전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가문의 의미를 바로 살려야한다. 따라서 성도는 가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신앙적 삶을 살아야한다.

(1) 부모에 대하여.

성도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여야한다.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 중 제 5계명이며 인류 사회 간에 주신 계명 중 첫째 계명이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의 계명은 인류간의 계명 중 최고, 최대, 최상의 계명이다. 때문에 부모에 대한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부모에 대한 불효의 죄를 범하는 것인 동시에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이 때에 있어서 부모라 함은 자신의 직계 부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부모에 대한 개념은 자신 가문의 모든 선대<先代>를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비록 자신 가문의 조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반열적 차원의 모든 이들의 조상이 곧 자신의 부모의 반열이 되는 것이다.

(2) 형제에 대하여.

성도는 형제자매가 자신의 분신인 것을 알아 그들을 대할 때 자신에게 하듯 하여야한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어야하며 형제자매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의 형제가 되어야 한다. 이 때에 있어서 형제의 개념도 부모에 대한 개념과 마찬가지로 같은 반열의 모든 이웃이 나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3) 자녀에 대하여.

자녀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적 개념에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자녀들이 곧 나의 자녀인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육하고 지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삶을 살게 하여야한다.

(4) 배우자에 대하여.

성도는 배우자가 자신의 일부인 것을 알아 그를 대할 때에 자신에게 하듯 하여야한다. 배우자의 모든 것<부모, 형제, 기쁨, 슬픔, 고통, 아픔, 등등>을 곧 자신의 것으로 여기어 함께 나누어야하며 배우자를 위하여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한다.

3)사회에 대하여.

성도는 자신이 소속한 모든 사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삶을 살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1) 빛과 소금의 직분 감당.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빛과 소금의 신앙적 삶을 살아 세상을 밝히고 정화시키며 그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다<마5 : 13>. 따라서 성도는 빛과 소금의 직분적 삶을 살아 자신이 소속된 사회를 진리에 입각한 아름답고 깨끗한 사회로 만들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아울러 자신의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할 중대한 사명 완수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2) 사회의 법과 질서에 순응.

성도는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제반 법규와 질서를 솔선수범하여 지켜야하며 또한 그 사회의 윤리와 도덕에 일점의 하자가 없는 삶을 살아 타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어야한다. 성도가 불법, 불의, 편법, 위법, 탈법, 등등을 행하거나 윤리도덕 등등을 준행하지 않는 것은 사회에 대한 범법행위이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불순종하는 행악이다. 따라서 성도는 사회의 제반 법규와 질서를 솔선수범하여 준행함은 물론이고 법률로 정해지지 않은 문제라 할지라도 사회가 통상적으로 요구하는 제반질서를 반드시 준행해야 한다.

(3) 상부상조.

성도는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모든 사람들과 상부상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덕을 세워야하며, 특히 각종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돌보아 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 성경은 성도의 이웃사랑에 대한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0-48>

이 말씀은 기독교의 이웃 사랑에 대한 원리이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윤리적, 도덕적, 종교적 차원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적 차원에서 시행되어져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5:40-48>에 합당한 형이상학적 이웃 사랑을 시행해야 한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의무나 책임이 아니며 종교적 선행도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신앙적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이웃 사랑을 선한 사마리아인<<눅10:30-37>을 통하여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며 섬김이다.<마25:34-45>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 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25:34-45>

3) 국가에 대하여.

국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부름 받고 세움 받은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이며 하나님의 종이다. 모든 성도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1) 애국애족<愛國愛族>

① 모든 기독교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자신보다 더욱 우선시하며 자신보다 더욱 사랑한다. 국가와 민족이 있음으로 내가 존재할 수 있으며 국가와 민족이 없는 나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②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조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세계의 열강들과 당당히 맞선다. 강대국들 앞에 열등의식을 갖지 않으며 그들에게 비굴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그들을 사대<事大>하지 않는다.

③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조국과 민족을 버리지 않으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조국과 민족에게 해가 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며, 조국과 민족의 안녕과 안전과 명예와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희생적 삶을 산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사지<死地>라 할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며 조국과 민족이 위기에 처하면 비록 해외<海外>에 나가있다 할지라도 만사를 제쳐놓고 즉시 달려와 목숨을 다 바쳐 헌신하고 충성한다.

(2) 법과 질서 준수.

모든 기독교인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법률로 제정한 모든 것을 솔선수범하여 지키어 국민의 의무를 철저하게 이행하되 책임과 의무적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성장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준수한다. 또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질서와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며 정의와 진리에 빛나는 삶을 살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도모하고 아름다운 복지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최선의 국민적 삶을 산다.


제25장. 은사<恩賜>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 기독교에 은사<恩賜>위주 신앙이 발생하였다. 은사위주 신앙은 21세기 현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선호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위에 신앙을 정립하지 못하고 은사위주의 신앙을 선호하게 된 것은 신학부재의 부흥강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무시하고 은사 체험위주 신앙을 더욱 강조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는 각종 체험적 신앙을 더욱 좋아하는 성도들이 부흥강사들의 은사체험 주의를 대대적으로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 위주의 설교자들보다는 각종 은사들이 강조되고 나타나는 부흥 강사들을 더욱 받들어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으로부터 멀리 이탈되어진 3류 무속 신앙적 종교 형태로 낙후되어져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들은 모두 신학 부재의 부흥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은사 체험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 진리들이며 특히 사이비 이단들과 각종 사기군들이 끼어들어 활동하는 가운데 오류되어진 한국 기독교의 안타까운 병폐적 역사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병폐와 오류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은사에 관한 신학적, 신앙적, 진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은사<恩賜>의 정의<正意>

은사<恩賜>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어떤 것을 하사<下賜>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은사가 종교적 용어로서 사용될 때에는 신으로부터 <각종 은혜가 하사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용어가 기독교에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에게 부여하시는 각종 능력들을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능력들이 사역 현장에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능력> 또는 <하나님 종들의 은혜로운 사역적 능력>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는 하나님의 종들이 부여된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 <부수적, 보조적, 지원적, 후원적, 보완적,> 차원에서 부여된 제반능력을 의미하며 또한 그 능력들이 실제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은사 부여의 목적.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에게 존재하는 은사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 하에서 부여하신 능력들이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은사들을 부여하신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1) 자녀들을 위한 은사부여.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시는 목적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이다. 성도들은 인간적인 속성에 따라 이론<신학>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현상<기적, 이적,>을 더욱 선호한다. 때문에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체험적인 것을 더욱 갈망하고 신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도들의 특성을 고려하시어 그들의 신앙을 정립, 확립하시기 위하여 다양한 은사들을 그들에게 부여하신다.

2) 종들을 위한 은사부여.

하나님의 종들이 맡은바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는 경우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등등이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현상<기적, 이적,>을 더욱 선호하고 신뢰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능력을 행사하게 하시어 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이 하나님 종들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등등을 보고, 알고, 깨닫고, 믿게 하시는 것이다.

3. 은사의 구분.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부여하시는 은사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6-1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1) 지혜의 말씀.

지혜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풀어 적용하는 것으로서 신학자, 설교자, 교사, 전도자, 신앙 상담자, 등등에 부여되는 은사이다. 지혜의 말씀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아름다운 설교, 감동적인 설교, 감격적인 설교, 은혜로운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때로는 회개하고 때로는 감사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충성과 순종을 다짐하는 신앙적 결단을 하게 한다.

2) 지식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정립하는 것으로서 신학자, 설교자, 교사, 전도자, 신앙 상담자, 등등에 부여되는 은사이다. 지식의 말씀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차원높은 신학으로 해석하고 정립하여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를 다양하고 절묘하게 풀어 가르친다.

3) 병 고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는 특별한 은사이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종 질병을 고치며 귀신을 퇴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병행을 통하여 진행한다.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부여한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병 고치는 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이점을 명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병 고치는 은사를 뒤에 따르게 해야 한다. 많은 자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병 고치는 은사를 뒤에 따르게 하다가 나중에는 병 고치는 은사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뒤따르게 하다가 종래에는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병 고치는 은사를 전문으로 행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능력으로 오해하고 착각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악행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서 병 고치는 은사를 거두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짓 은사를 진행하거나 사이비 이단적 오류에 빠져 3류 무당으로 전락한다. 이 분야의 한국 기독교 역사상 대표적인 전례가 전도관의 박태선이다.

4) 능력 행함.

능력 행함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각종 질병 고치는 은사와 귀신을 퇴치하는 은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각종 능력에 대한 은사를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5) 예언함.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언에 대한 은사를 오해하여 3류 무속인들이 행하는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러한 3류 무속적 차원의 예언을 오히려 금지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언은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적 삶에 오히려 해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미래를 안다는 것은 때로는 사고나 위기에 대한 사전예방을 위하여 필요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오히려 성도의 삶을 비 진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면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한 각종 방법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에 누구나 보다 더 좋은 미래를 세우기 위하여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각종 불의한 방법까지도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도들의 인간적 성향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예고해 주는 차원의 예언은사를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것으로서 장차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별하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은사와 병행된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중대한 일이 발생하거나 또는 성도들의 일신상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될 때에 꿈, 환상, 환청, 등등의 비상섭리를 발동하시어 교회와 성도들이 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게 하신다.

6) 영들 분별함.

영들 분별함이란 하나님의 영<성령>의 역사하심과 귀신<사탄> 역사함을 분별하는 은사를 말한다. 사단은 매우 교활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유혹한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신학>을 알지 못하면 사단의 흉계를 하나님의 계시로 오해하여 비 진리에 빠지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종말론에 성도들이 미혹당하거나 또는 비 진리 이단들의 주장들에 현혹되어 그들을 추종하는 것은 모두가 신학을 모르기 때문d다. 1990년대 초 하방익, 권미나, 이장림, 등등의 종말론에 많은 성도들이 미혹되고 심지어는 목회자들까지 그들을 추종하였던 것과 성락교회 김기동, 예루살렘교회 이초석,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구원파, 박옥수,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등등을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신학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진리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말씀<신학>을 알면 하나님의 계시와 사단의 흉계를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종과 사단의 종들을 분별하게 되고 비 진리에 빠지지 않는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교회에 진리<말씀-신학>을 가르치라는 사명을 일률적으로 부여하신 것이다.

7) 각종 방언 말함.

각종 방언 말함의 은사는 두 가지 차원에서 부여되는데 하나는 개인적 신앙을 확립시켜 주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위하여 <도고-대도>하게 하기 위함이다. 초신자나 믿음 약한 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립한다. 한편 타인을 위하여 은밀하게 도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시어 기도의 내용을 감추어 주심으로서 기도하는 대상의 수치를 가려주신다.

8) 방언들 통역함.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는 각종 방언에 대한 통역의 은사를 말한다. 그러나 방언 통역의 은사는 특별한 경우에만 부여될 뿐 일상적으로 행사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통역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더욱 많기 때문이다.

9) 믿음.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서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되는 은사이다. 믿음은 성도 본인의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느끼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리하여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믿음의 은사는 믿고 신뢰하는 차원의 종교적인 신앙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경륜적 신앙이다. 따라서 믿음의 은사는 가장 큰 <3대 은사>에 속한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믿음의 은사보다는 체험적 은사를 선호하여 하나님을 위한 경륜적 신앙을 갖지 못하고 3류 일반종교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

10) 소망.

소망의 은사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소망이고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순간마다 함께하시므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망의 은사는 믿음, 사랑과 함께 가장 큰<3대 은사>에 속한다. 소망의 은사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부여되는 은사로서 믿음에 의한 결과적 은사이다. 성도들은 소망의 은사에 의하여 현세를 사는 동안에 발생하고 조성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

11)사랑.

사랑의 은사는 믿음, 소망과 함께 가장 큰 <3대 은사>에 속한다. 사랑의 은사는 소망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전제로 하여 부여되는 은사로서 믿음에 의한 결과적 은사이다. 사랑의 은사는 기독교 은사 중 최고의 은사이다. 사랑의 은사가 기독교 은사 중 최고의 은사인 것은 기독교의 모든 것에 대한 원인과 과정과 결론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진행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결론된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섭리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나타나고 정립되고 확인되며 피조가 하나님 섭리의 동반자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승귀됨을 통하여 나타나고 정립되고 확인된다. 이와 같은 하나님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사랑의 은사를 부여하시고 사랑의 은사를 이행하게 하신다. 따라서 기독교 성도의 사랑은 사는 신앙의 결산이고 사명의 결산이다.

4. 은사의 우열.

은사주의 신앙자들 대부분은 은사에 대한 우열을 주장한다. 그들은 특히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예언의 은사를 능력의 은사로 평가한다. 반면에 또 어떤 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개인적인 것, 또는 믿음 약한 자들을 위한 것 등등으로 폄하하여 무시하기도 한다. 한편 <고전13장,14장>은 사랑을 강조하고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반면에 방언의 은사를 폄하하는 듯 하다. 그러나 <고전13장,14장>의 내용은 예언의 은사와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고 방언의 은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전체적인 문맥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모든 은사가 우열의 구분 없이 동일함을 강조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높이 평가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다독이기 위하여 방언의 중요성보다는 예언<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예언<하나님의 말씀>안에 행사되어질 때에 비로소 그 <의의>가 살아 역사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의 강조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는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던 교회적인 것이던가에 관계없이 어떤 우열이 없이 모두가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부여하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 특히 한국 교회에는 말씀의 은사보다 신유의 은사를 더욱 강조하는 풍조가 있다. 그리하여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들을 선호하여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신유의 은사를 비롯한 특별한 은사들은 모두가 말씀을 전하는 것에 대한 보조적 수단으로 주어진 것들이다. 교회의 모든 사명은 오직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각종 은사와 이적과 기적들은 말씀을 보좌하고 보조하는 도구들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수차, 강조하고 있으며 가르치는 자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몰지각한 자들은 말씀은 등한시하고 눈에 나타나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특히 예언을 선호하여 소위<예언하는 자> <기도하는 자>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들을 <영안이 밝은 자> <영적인 자> 등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기도원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무당들이 속출하여 독버섯처럼 암약하고 있다.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는 자들 중에는 신학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은 자들이 많고 심지어는 전혀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 때문에 말씀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가운데 3류 종교의 무당들이 하는 짓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섭리, 모든 계시를 성경에 담아주셨다. 성경의 하나님 계시는 완전하여 더 하거나 제할 것이 없다<계22 : 18-19>. 따라서 모든 것은 성경, 곧 말씀을 통하여 증거 되는 것이지 3류 종교의 무당들과 같이 점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예언의 은사란 무당들이나 점쟁이들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며, 영적으로 밝다는 것은 성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와 능력은 기도만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연구와 기도가 병행되어졌을 때에 비로소 주어진다. 말씀에 대한 구별의 기초가 되어있지 않은 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진행되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특별하고 다급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또는 직접 들려 주시기도하고 보여주시기도 하는 가운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시기도 하며, 종들에게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하사 어떤 일을 진행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계시와 섭리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아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선포하셨다. 그러나 말씀<성경>이 정립된 후에는 모든 일은 말씀<성경>을 통하여 진행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들에게 무당이나 점쟁이들과 같은 형식으로 일하게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에게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무속 신앙인들은 점쟁이나 무당들의 <예언>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은 과거의 일들은 때때로 잘 알아 맞추지만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순전히 엉터리이다. 종교 심리학자, 또는 종교학자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과거의 일들은 어느 정도 감지하지만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들을 찾고 그들의 말을 신봉하는 것은, 좋은 것을 원하는 어떤 기대심리와 나쁜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들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무당이나 점쟁이들의 예언들은 무엇을 아는 것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추측과 어떤 경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당과 점쟁이들이 오로지 추측과 경험에 의해서 예고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자들도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은 어떤 존재를 통하여 예언한다. 그 존재는 사단이거나 아니면 사단의 휘하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존재<사단 또는 사단의 졸개>는 사실상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존재이다. 사단은 능력이 있어 과거의 일은 알지만 미래의 일은 전혀 모른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단에게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자신에게 닥칠 고통을 알면서도 아담을 타락시키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에게 닥칠 무서운 심판을 알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미 끝난 싸움을 아직도 계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무당이나 점쟁이들에게 역사하는 존재들은 미래의 일들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그러한 역사를 전개하는 것은 사실상 미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에, 즉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가 나중에 얼마나 많은 심판을 받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싸움이 처음부터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기회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유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5. 은사의 수여자.

은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행사되지만 그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시고 그들이 은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은사를 수여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은사를 <적용하시고 진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을 통하여 행사되어지는 은사를 과시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쓰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은사를 통하여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았다는 그 자체가 곧 영광이다.

6. 은사의 진행원리.

모든 은사를 전개함에 있어서 진행 원리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그리스도>가 기독교의 출발이며 핵심이고 결론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좌하고 보증하는 방법이고 수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우선이고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각종 신비한 은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뒤따르며 보좌하고 보증하는 방법이고 수단인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고 순서가 바뀐다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가 무시되거나 약화되고 은사들이 우선적으로 강조되면 기독교로부터 오류 되고 변질되는 비 진리에 빠지게 된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이나 이단자들이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원리를 알지 못하는 신학 부재의 부흥강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그리스도>보다 은사체험 위주신앙을 강조함으로서 기독교 신자들을 기독교로부터 이탈시키고 변질시킨 것이다.

7. 은사의 진행방법.

모든 은사를 전개함에 있어서 진행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기도, 명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예수 그리스도>가 곧 은사 진행의 법적 행정적 근거<말씀-법-로고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자들은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하지만 개념은 <안수> 또는 <안찰>을 통하여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1) 안수.

안수는 구약시대에서부터 전승되어온 관례이다. 구약시대의 안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축복할 때에 머리에 손을 얹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관례이고 다른 하나는 임직에 대한 의례로서 의례<儀禮>적 관례이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영력>이 안수를 통하여 전달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신약시대의 안수례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졌는데 후기신약 시대의 안수례는 하나님의 종들을 임직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은사를 진행할 때에 시행하는 안수례는 그, 안수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력이 전달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 진행의 법적 행정적 근거인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은사 진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의 결과는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것이고 그러한 역사적 진행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안수례를 시행하는 것이다.

2) 안찰.

안찰이란 용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기독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수와 안찰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은 분명한 오류다. 안찰<按擦>이란 용어는 누르거나 비비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환자의 경직된 신체를 풀어주는 것이다. 반면에 무속인들은 안찰을 귀신을 쫓아내는 무속적 행위로 사용하는데 이때에 주로 대나무, 소나무, 복숭아나무 등등으로 때리고 훑어냄으로서 귀신을 쫓아낸다. 기독교를 자처하는 <그러나 전혀 기독교가 아닌> 일부 기도원들이 환자를 치유한다거나 또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묶어놓고 안찰하는 가운데 사고를 일으킨다. 심하게 누르고 때려서 부상을 입히거나 사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들은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할 때에 각종 능력이 나타난다는 원리를 모르고 안수 또는 안찰을 통하여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무지에서 발생된 것이다.

8. 은사 활용에 대한 원칙.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은사를 활용할 때에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신 목적은 자녀들과 종들과 교회에 덕이 되고 유익이 되게 하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은사를 진행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1) 은사의 분별.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은사가 나타날 때에 먼저 그 은사가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은사인가 하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같은 은사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한 은사가 있고 사단의 음흉한 계략에 의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는 은사를 부여받은 본인은 물론이요 성도들과 교회 전체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주는 은사이다. 따라서 그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은사이며 그 은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 등등이 나타난다.

(2) 사단의 음흉한 역사.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다. 때문에 사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가장한 교묘한 역사를 진행한다. 그러나 사단의 역사는 교묘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불의와 비 진리적 상황을 전개하므로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소위 <투시의 은사>라고 하여 성도들의 일상적 삶이나 또는 성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단은 성도들의 일상적 삶이나 또는 성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하여 성도간의 갈등과 분열과 불화를 일으키고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의 갈등과 불화를 조성한다. 뿐만 아니라 거짓 <투시의 은사>를 제공하여 성도들을 이간하고 분열하여 교회 전체를 어지럽게 만들기도 한다. 사단은 또한 말씀이 전혀 정립되지 않은 자들에게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기도의 은사, 등등을 가장한 여러 가지 유형의 능력을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분열시키기도 한다. 말씀이 전혀 정립되지 않은 자들이 사단의 역사에 휘말리어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기도의 은사, 등등을 가장한 여러 가지 유형의 능력을 제공받으면 교회 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능력을 제공받은 자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인 것으로 믿는 가운데 그 은사를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기어 열심히 활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부여한 은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교회에 각종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에 목회자를 비롯한 주변의 성도들이 그들에게 말씀으로 충고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를 떠나 개인적인 활동을 계속하는데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3류 무속인들과 같은 자들이 되고 만다.

3) 교회 질서에 순응.

은사를 부여받은 자들은 그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교회의 질서에 순응해야 하는바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목회자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은사자들이 은사를 활용할 때에는 반드시 담임 목회자의 지도와 지시를 받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담임 목회자의 지도와 지시없이 활동하지 않으며 만약에 담임 목회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부득이한 사정이 될 때에는 장로나 전도사 등등의 지도자들과 상의하거나 또는 그들과 함께 활동한다.
한편 담임 목회자는 동역자나 성도들 중에 은사자가 있으면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이 되게 한다. 교회에 은사자가 많을수록 교회가 부흥되고 발전한다. 특히 담임 목회자 자신에게 없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는 경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목회 동역자로 주신줄 알고 그들의 활동을 지혜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반면에 사단의 역사에 휘말린 자들이 있게 되면 교회는 심한 몸살을 앓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함부로 활동하면 담임 목회자는 지혜롭게 그들을 다스리어 교회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
성도들은 은사자들의 활동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할 때에 그것이 사단의 역사인 것으로 알아 그들을 초청하거나 그들을 추종하지 않아야 한다. 즉, 은사자들이 담임 목회자의 지휘를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활동할 때에 그들을 초청하거나 추종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들의 래방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2) 자랑하지 않는다.

은사자들은 자신의 은사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 특히 담임 목회자에게 없는 은사를 받은 자들은 교회의 질서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담임 목회자의 목회 권위와 권세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삼가고 주의해야 한다. 은사자들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거나 담임 목회자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는바 그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결과이다.

(3) 사례받지 않는다.

은사자들이 은사를 활용할 때에 어떠한 경우에도 사례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마10:8>,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은혜 입은 자가 사례를 하고자 하면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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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위 <기도원> 또는 <기도하는 자>들이 은사 활용을 빙자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하고 그것을 자신들이 착복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3류 무속적 행위이며 하나님을 상품으로 팔아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들이다.

제26장. 기독교 절기.

기독교는 구약교회 시대이래 전통적으로 다양한 절기들을 지켜왔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지켰던 절기들은 신약시대 기독교에서는 거의 대부분 지켜지지 않는다. 구약시대의 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드려짐에 따라 종료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시대의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에 의하여 폐지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모든 것을 완성한 것이지 폐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장에서는 구약교회 시대의 절기들은 생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 안에서 완성되어진 신약교회 시대의 절기들만을 정리한다.

1. 주일<主日>

1) 주일의 의미.

현재 기독교가 역사적, 전통적으로 지켜온 주일<主日>은 <신학>적으로는 <주권주 성부 하나님의 날>이며 <신앙>적으로는 <완성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다. 주의 날이란 명칭을 삼위일체 하나님 신학으로 정립하면 그날은 <주권주이신 하나님의 날>로서 곧 <성부 하나님>의 날이다. 현존하는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은 곧 창조주 하나님의 날로서 <성부 하나님의 날>인 것이다.
한편 현재 기독교가 지키는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구약기독교의 <안식일>을 의미한다. 반면에 그 <주일-안식일>은 구약 기독교의 <안식일>과는 의미가 다르다. 구약 기독교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 간의 창조 역사를 마치시고 제7일 째 되는 날에 안식하시면서 그날을 성별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약 기독교의 안식일은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곧 <주권주 하나님-창조주 하나님>의 날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신약 기독교의 주일은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완성하신 원리에 의하여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성부 하나님의 날임을 자신들의 신앙적, 실제적 삶을 통하여 증명하고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적, 실제적 삶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진정과 신령의 예배와 기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신앙 원리에 의하여 주일<主日>은 그날을 완성하신 <완성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명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일<主日>은 <신학>에서는 <주권주 성부 하나님의 날>이며 <신앙>으로는 <완성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다. 주일<主日>이 <신학>에서는 <주권주 성부 하나님의 날>인 것은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성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며 주일<主日>이 <신앙>으로는 <완성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되는 것은 기독교인들은 오직 주일 하루만을 <하나님의 날>로 기념하고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현실적인 다양한 문제들로 인하여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못한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 특히 주일<主日>을 온전하고 순전하게 지키는 것이며 이러한 신앙적 차원에서 주일<主日>을 <완성주-말씀-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곡해<曲解>하여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기독교는 <중보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면주-성부 하나님>을 믿는다. 신앙적 차원에서 주일<主日>을 <완성주-말씀-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정립하는 것은 그날에 대한 주권이 <중보주-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중보주-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킨 안식일의 주인<완성주-마12:1-8>라는 신학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2) 주일의 유래.

신약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첫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날로 정하여 <주의 날>로 지켰다. 기독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전 세계로 확산되어지는 가운데 모든 기독교인들은 <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하하고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주일 성수>를 하였다. 그들은 지하 묘지와 성도들의 가정들을 순회하면서 열심히 주일 성수를 하였다. 콘스탄틴 대재에 의하여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종료되었을 때 콘스탄틴 대제는 A.D. 321년에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였고 기독교인들의 예배일이었던 <주의 날>을 법적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기독교의 <주의 날>은 로마력의 <sunday>였는데 이날은 로마인들의 전통적 종교 중 하나인 <태양신 숭배>의 날이었다. 콘스탄틴 대제의 가문 역시 태양신을 섬겼는데 주일의 유래를 오해하는 자들<특히 안식교>는 이러한 점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의 주일이 우상 숭배의 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식교의 주장은 기독교의 <주의 날>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모르는 무지와 자기들의 안식일에 대한 합법성을 내세우기 위한 고의적 계략으로서 오히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자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유대교의 안식일로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의 날로 완성된 날이기 때문이다.

3) 온전한 주일성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주일날 하루를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로 보내는 것이 곧 온전한 주일 성수로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온전한 주일 성수는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온전한 주일 성수로 이해하며 심지어는 주일날 물건을 사거나 팔지 않는 것이 온전한 주일 성수인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개념 때문에 주일을 <안식일>로 이해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의 주일 성수는 기독교의 온전한 주일 성수가 아니라 유대교적, 율법적, 안식일 성수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한 주일 성수는 유대교적, 율법적, 안식일 성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서 3류 무속 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사상일 뿐이다. 기독교에는 <소속교회>는 있으나 <본 교회>는 현세에는 없고 내세의 <하나님 나라 교회-천상교회>가 곧 <본 교회>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주일 성수는 예배 위주의 주일성수나 기도 위주의 주일성수가 아니다. 기독교의 주일성수는 오직 주일 하루만을 <하나님의 날>로 기념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법 <말씀-로고스-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실천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다양한 문제들로 인하여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송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는 사명감으로 특히 주일<主日> 하루만이라도 온전하고 순전하게 지키는 것이 곧 기독교인들의 주일성수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주일 성수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한다.

(1)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것으로서 창조 사역을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기념하고 예배하는 날로서 현재의 토요일이었다. 구약 기독교의 안식일을 지키는 의식은 율법적인 것으로서 제사 중심이다. 반면에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완성하신 원리에 의하여 제사 중심으로 성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적, 실제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실천 신앙적 삶으로 성수한다. 따라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 등등만을 삼가는 제한적 율법주의로 주일 성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과 신령의 예배와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일에 전념하는 온전하고 순전한 주일 성수를 해야 한다.

 

 

(2) 주일은 일요일만이 아니다.

주일<주의 날-하나님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일요일 하루 만이 아니다.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주의 날-하나님의 날>이며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일요일 하루 만을 주의 날로 지킬 것이 아니라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주의 날-하나님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지켜야 한다.

2. 성탄절.

1) 성탄절의 유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지키는 관례는 <A.D.354년>에 편집된 <필로칼루스 월력>에 최초로 나타난다. 이 달력은 <A.D.336년>에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가 있었다고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 축하>는 <A.D.380년>부터 콘스탄티노플에서 지켜졌고 <A.D.430년>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지켜졌다. 성탄 축하는 초기에는 <1월 6일>이었다. 당시에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켰던 것은 영지주의자들을 비롯한 일부 종파들이 그날을 주현절<主顯節-epiphany>로 지켰기 때문이었다. 주현절은 여러 가지 의미로 지켜졌는데 예수 그리스도 탄생시 동방 박사들이 방문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것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이적을 베푸신 것<요2:1-11> 등등에 대한 날자로 지켜졌다. 기원 6세기 경부터 성탄절은 12월 25일로 변경되었다. 12월 25일은 본래 정복되지 않은 태양신의 탄생일로서 기원 274년부터 지켜진 로마의 축제일이었다. 로마교회가 무엇을 근거로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켰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역사가들은 로마교회가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적 축제를 없애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들의 태양신 축제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변경시켰을 것으로 추정한다.

2) 성탄절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온 인류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날로서 영원히 기념하고 감사해야 할 <축제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날을 감추셨다. 우리는 그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에만 광분할 것을 염려하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매년 성탄절 때가 되면 기독교인들은 물론이요 비기독교인들 조차 성탄절 축제에 광분하면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의를 모독하고 있다. 도처에서 술판, 도박판, 춤판, 등등이 벌어지며 문란하고 음탕한 성의 축제가 벌어지며 선물을 빙자한 각종 뇌물이 주고 받아진다. 이제 성탄절은 아예 <선물 받는 날> <뇌물 받는 날> <술 취하는 날> <노래하고 춤추는 날> <sex하는 날>이 되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신 것은 그러한 것들을 위함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인류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으며 인류사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와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의를 살리는 성탄절 축제를 실행해야 한다.

3. 부활절.

1) 부활절 유래.

기독교는 사도시대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였다. 사도시대의 기독교가 언제를 부활절로 지켰는지에 대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2-3세기에 일부 카토릭 교회들과 로마 교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당시의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날을 부활절로 할 것인가? 아니면 그로부터 3일 후인 부활의 날을 부활절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쿠아르토데키마니-Quartodecimani>로 알려진 동방교회 집단은 부활절을 유월절 <니산월 14일-태양력으로 3-4월 14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다른 교회들은 반대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2세기 말경에는 그로 인한 갈등이 너무 심하여 로마 주교 빅토르가 쿠아르토데키마니 주의자들을 이단으로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부활절 논쟁은 니케아 교회회의<A.D. 325년>를 통하여 종결되었다. 니케아 교회회의는 춘분 후 만월<보름>이 지난 후 첫 번째 주일을 부활절로 결정하였고 <니산월 14일>에 부활절 지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2) 부활절의 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하나님 섭리 회복의 완성이다. 따라서 부활절의 의미는 당연히 하나님의 승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기독교의 승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승리이다. 그리고 그 승리는 곧 영광의 승리이며 완전한 승리이며 영원한 승리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승리는 부활절이라는 절기의 승리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의 승리이며 영역적으로는 하나님의 전 피조 영역에 대한 승리이며 특히 기독교인들의 삶 전체에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존재하는 승리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으로 감사하고 영원히 감사하는 승리의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4. 사순절.

1)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이란 부활절로부터 40일 이전의 기간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은 후 40일간 금식한 것을 대비<對比>시켜 40일간 금식하는 것에서 유례되어 사순절이라 하였다. 기원 3세기 경에는 이레나이우스에 의하여 부활절 앞두고 2-3일간 금식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사순절이 되었다. 사순절에 대한 기록은 니케아 교회회의<A.D.325>의 제5법령에 나타난다. 그러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에 금식기간이 달라서 서방교회는 3주간 금식하였고 동방교회는 7주간 금식하였는데 7세기 경에 이르러 40일 금식으로 통일되었다. 사순절 기간의 금식은 매우 엄격하여 하루에 한 끼만 허용되었고 모든 육류의 살코기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의 금식으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여 8세기부터는 금식이 크게 완화되었다.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하는 각종 행사들과 기도회가 열렸고 매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전례가 되었다.

2) 사순절의 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 대속죄제 만의 고난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의 생애 전체가 모두 고난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육신적 고난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고난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고난과 무관하시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고난 받으실 수 없으며 고난 받으셔서도 안 된다. 때문에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며 또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와 우리에게 적용될 때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고난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고난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구속사적 고난을 받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종 순전한 종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교육적 차원에서 고난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 따위에게 시험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종들이 사단의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40일 간을 금식한 후 사단에게 시험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군왕도 살아보지 못한 최고의 궁전에 사신다 하여도 부족한 분이셨지만 하나님의 종들에게 가장 검소한 삶을 전승하시기 위하여 광야를 숙소로 하는 삶을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무죄하시었으나 정죄 당하셨고 비천한 자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수모와 천대를 받으시면서도 털 깎는 자 앞에 엎드린 양과 같이 묵묵히 그 모든 고난을 감내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와 같은 고난을 감내해야 함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만 육신의 고난으로 이해하여 금식같은 육체적 고난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정립해 주신 하나님 종으로서의 사명적 삶을 살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며 금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일생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헌신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결국은 승리의 영광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고난도 승리의 영광이 되게 한다.

5. 오순절.

1) 오순절의 유래.

오순절은 유월절의 2일 째로부터 계산하여 50일째 되는 날에 지켜진다 하여 오순절이라는 명칭으로 지켜지는데 7일씩 7번째 날에 지킨다 하여 <칠칠절>로도 명칭되며 보리 추수를 끝내고 밀 추수를 시작하는 날로서 <맥추절>이라고도 한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는 3대 절기중 하나로서 유월절을 매듭 짖는 날이기도 하다<신16:16>. 신약 초기 기독교에서는 오순절 날에 성령 강림이 있었던 것<사도행전 2장>에 연유하여 오순절을 <성령 강림절>로 지켰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오순절을 세례 받는 절기로 지켰고 이때에 세례 받는 자들이 흰옷을 입었기 때문에 <흰 일요일>이라고도 하였다. 개혁주의 교회들도 처음에는 오순절을 <성령 강림절>로 지켰으나 성령 강림에 대한 바른 신학이 정립되면서부터 오순절에 대한 의미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오순절 계통의 교파들은 여전히 오순절을 <성령 강림절>로 지킨다.

2) 오순절의 의의.

오순절은 본래 유월절을 마무리하는 절기이며 밀을 추수하는 맥추절 절기였다. 한편 사도행전 2장의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 이후부터 오순절은 그 <성령 강림절>로 지켜졌는데 오순절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은 신약 기독교에서 의미가 없다. 구약시대 기독교의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이후 모든 율법적 의식<儀式>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으므로 <진리 안에서의 자유> 원리에 따라 의미가 없게 되었고, 신약 기독교 시대의 오순절은 <성령 강림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오순절을 지켜야 할 명분이 없다.

6. 추수 감사절.

1) 추수 감사절의 유래.

현대 기독교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은 성경에 없는 절기로서 미국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영국 청교도>가 거행한 최초의 추수 감사는 1621년 플리머스 식민주<植民州>에서 첫 추수를 한 후에 브래드퍼드 총독의 명령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1649년에는 코네티컷에서도 추수 감사가 있었고 1789년에 죠지 워싱턴이 추수 감사제를 국가 절기로 선포함에 따라 뉴잉글랜드 전 지역에서 추수 감사제가 거행되었다. 추수 감사제는 1863년에 링컨에 의하여 연례 절기로 선포되었고 1941년에 국회에서 법령으로 제정되어 11월 넷째 목요일로 제정되었다. 미국의 추수 감사제는 교회 예배로 지켜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가족 단위의 축제일이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1904년에 이르러 한국의 모든 장로교가 추수 감사절을 지키기로 협의함으로서 11월 11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켰다.

2) 추수 감사절의 의의.

추수 감사절은 미국에 건너간 영국 청교도들이 첫 추수를 감사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것은 신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추수와 관련된 지역 교회에서는 의미가 있겠으나 추수와 관계없는 지역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일부 목회자들은 추수 감사절의 의미를 농경적 추수에 대한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일년간의 모든 소득을 추수로 간주하는 추수 감사제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억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매달의 소득에 대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릴 뿐만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감사 예물을 드리기 때문이다. 또 어떤 목회자들은 추수 감사절을 더욱 확대해석하여 일년 동안의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감사절로 주장하는데 그것은 더욱 해괴한 억지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미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적 삶을 살 뿐만 아니라 한해가 시작되는 첫날과 한해가 종료되는 마지막 날을 통하여 하나님께 지나온 일년간의 모든 것과 지나온 생애의 모든 것을 감사하며 또한 앞으로의 일년과 앞으로의 일생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현대 기독교의 추수 감사절은 추수 감사제가 아니라 헌금을 독려하기 위한 추수 감사절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밀농사도 경작하지 않으면서 <맥추 감사절>을 지키는 자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기독교는 이제 이러한 의식적 관행들을 종료시켜야 한다. 기독교는 오직 진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기독교로서 3류 무속 종교들이나 하는 의식적 관행들을 거행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추수 감사절 같은 것을 통하여 헌금을 독려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신앙적 삶을 살도록 독려해야 한다.

제27장. 예배.

1. 예배의 정의.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행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령 전체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시며 종들에게 사명과 능력과 은사를 부여하시며 자녀들에게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이며 기본이고 대 전제다.

2. 예배의 본질.

일반 종교의 제사는 제사를 통하여 섬기는 대상을 위무하는 가운데 무엇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예배는 그와 같은 종교적 개념을 초월한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위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신학적 차원에서의 예배와 신앙적 차원의 예배로 구분된다. 신학적 차원에서의 하나님 예배는 창조주와 피조의 관계 하에 진행되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과 명령권을 가지신 주권주<主權主>로서 예배를 받으시고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피조의 입장에서 주권주<主權主>에게 법적 행정적 차원에서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차원의 예배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법률적 관계 하에서의 예배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신앙적 경배와 경외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예배는 법적 행정적으로는 신학적 예배와 신앙적 예배로 구분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신학적 차원의 예배가 아니라 신앙적 예배로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예배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다.

2) 예배는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한다. 기독교는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그러한 삶이 전제되고 반영된 사명현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을 통하여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이행 자체이다.

3) 예배는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한다. 기독교는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그러한 삶이 전제되고 반영된 사명 현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을 통하여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의 진행이다.

4)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을 이행하는 가운데 그 사명현장과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의 현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사명의 진행이며 빛과 소금의 실천 신앙적 삶이다.

5)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피조의 책임이며 의무이고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피조로부터 경배와 경외를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권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권과 권리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의 경배와 경외를 기뻐하시지 않고 아버지로서 자녀가 드리는 진실과 진심의 경배와 경외를 원하신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서의 진실과 진심의 경배이며 경외이고 사랑이며 존경이다.

6)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피조로서의 의무이고 책임이며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피조로부터 기쁨을 취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권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권과 권리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예배를 통한 기뻐하심을 원하시지 않고 예배를 통한 자녀와의 함께하심을 통한 기쁨을 원하신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아버지와 자녀간의 만남의 기쁨이며 대화의 기쁨이고 화평의 기쁨이다.

7)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교회의 교육이며 성도에 대한 관리이다. 따라서 그것은 교회와 성도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원활하게 이행하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자녀와 종으로서의 충성이며 순종이다.

8)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으실 권리가 있으며 기독교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권리에 의한 찬양과 의무에 의한 찬양을 기뻐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찬양을 기뻐하신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효<孝>와 사랑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녀들의 효<孝>이며 사랑이다.

10)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속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며 하나님의 종들이 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며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다.

11)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이며 주의 종들이 주 하나님께 드리는 보고이며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문안<問安>이고 간구이다.

12)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이다.

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속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들은 섭리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한다.

3. 진정과 신령의 예배.

구약시대의 하나님 예배는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예배가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드려진 제물의 불완전성 때문이었다. 반면에 신약 기독교의 하나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완전한 예배> 그리하여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제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성도들은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한 예배>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지만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신앙적으로는 여전히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예배에 함께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역사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한 예배> <진정한 예배>를 드리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신령의 예배>를 드리게 된다.

4. 예배의 오류.

현대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하여 기독교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설립 되어진 것으로 인식 하고 있다. 때문에 기독교의 모든 중심을 <하나님 예배>에 집약 시키고 있으며 심지어는 <예배를 위한 예배>를 드리기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교회의 오류적 예배 실태를 고찰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제사적 예배.

구약 기독교 예배는 제사였다. 당시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제사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식에 다양한 의미의 제물이 요구되었고 따라서 그 의식도 드려지는 제물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신약시대 기독교와 같은 차원의 예배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모든 제사의식이 완성됨에 따라 기독교의 하나님 경외의식은 제사의 차원을 넘어 <경배와 찬양> <예배와 기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배의식은 <피조의 경배> <백성의 경배>가 아니라 <자녀의 경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차원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여전히 구약 기독교 시대의 제사적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다. 제사적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사용하는 용어 자체부터가 제사적이다. 저들은 주일을 <안식일>이라 하고 강단을 <제단>이라 하며 예물을 <제물>이라 하고 목사를 <제사장>이라 한다. 그리고 예배의 경건한 외적 분위기를 거룩한 것으로 인식하여 예배하는 자세와 찬양하는 음성을 거룩하게 변조한다. 이러한 자들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새벽예배에 적용하여 새벽제단에 제물을 일천 번 드리면서 자신의 서원을 하나님께 기도한다.

2) 강복이 전제된 예배.

현대 목회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강복을 전제로 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아브라함이 예배 한번 잘 드리고 얼마나 복을 받았는가 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면서 예배와 하나님의 복을 연계 시키고 있다. 예배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개념으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배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특히 <복과 관계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예배에 불참하면 하나님께 복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징계나 책망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3) 영상 예배.

20세기에 들어서서 시청각적인 예배가 주장 되어 지는 가운데 교회는 점점 예배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 하였다. 강단이 점점 호화 로와 저 갔고, 성가대가 점점 화려하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는 근래에 이르러 방송을 통한 예배, 인터넷을 통한 예배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거창한 영상 예배까지 등장하였다. 목사가 설교 할 때에 시각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대형 TV가 설치되어 지는가 하면, 청각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음향효과를 전담하는 특별 요원들이 투입 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성도들은 예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시청각적인 분위기를 즐기고 누리는 예배를 즐거워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분위기를 즐기는 예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드린 자들의 공통된 감정은 <오늘 예배 분위기 참으로 은혜로웠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은혜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예배 분위기의 은혜>이다.

4) 사람을 축하하는 예배.

예배를 즐기는 것에 심취한 자들은 이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배>를 주장하기 시작 하였다. 예배는 받으시는 하나님만 즐거워서는 안 되고 드리는 사람도 기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가볍게 들으면 대단히 진리적인 것 같은 이 주장은, 그러나 참으로 망령된 주장이다. 물론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예배하는 자에게도 기쁨이 충만 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배 하는 자의 기쁨이 결여된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쁨인 예배가 되어야지 예배를 통하여 나도 기뻐해야 된다는 전제가 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그것은 예배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예배 의식으로 인하여 더욱 비 진리적 예배가 도처에서 진행 되어지고 있는바 <XX교회 창립 축하 예배> <OO교회 창립 O주년 기념 축하 예배> <XXX 회갑 축하 예배> <OOO 박사 학위 영득 축하 예배> <XXX 총회장 취임 축하 예배>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과 전혀 관계없다. 예배의 명칭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축하 하는 것이며, 예배의 내용 자체도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축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명칭도 내용도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을 축하하기 위한 모임을 예배라고 명칭 할 수 없으며, 사람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였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 예배를 사람축하의 들러리로 세우는 망령된 행악이다. 교회 창립이나 회갑이나 또는 어떤 지위를 획득한 것에 대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 하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려 한다면 예배의 명칭도 <감사예배>라고 해야 할 것이며, 예배 내용도 오직 <하나님께 감사>이어야 한다.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축하>의 시간을 갖는 것이 옳은 것이다. 처음부터 목적 자체가 사람에 대한 <축하>이고 예배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 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무시로서 책망 받아 마땅한 악행이다.

5) 헌금을 목적으로 하는 예배.

현대 교회들의 오류 적 예배 중에 또 하나는 헌금을 목적으로 하는 예배이다. 추수와 전혀 관계없는 교회들이 추수 감사예배 또는 맥추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추수감사와 맥추감사 예배를 실시하는 자들은 그 예배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옹색한 변명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정직해야 하며 진실해야 한다. 전혀 농사를 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추수도 하지 않으면서 추수 감사예배 맥추 감사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저들은 추수감사 또는 맥추감사절 예배를 일년에 대한 총체적인 감사 예배라고 변명 하는데 그렇다면 예배의 명칭과 내용을 바꿔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천번 만번을 드려도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감사예배를 드려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얼마나 드리느냐 하는 것 보다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하고 정직하게 드려야 하며 형식이나 의식이 아닌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 명분 없는 절기를 형식적 의식적으로 드릴 것이 아니라 참으로 <진정과 신령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점을 분명히 하시어 사도 바울을 통하여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라고 정립하여 주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이와 같은 예배의 본질을 무시하고 추수 감사예배 또는 맥추 감사예배를 통하여 헌금을 유도 하는가 하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건축헌금이나 또는 어떤 목적 있는 헌금을 유도해 내기 위한 전략적 예배를 드리기 까지 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악이며 하나님을 능멸하는 죄악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경외와 감사이지 헌금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 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6) 축제위주 예배.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왜곡되어 축제적 예배가 성행되고 있다. 찬양 예배라는 명목 하에 굉음적 악기들이 동원되어 빠르고 요란한 찬양과 현란한 춤이 광란적으로 진행되는 예배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미국의 흑인 교회와 중남미 카토릭 교회들의 축제적 예배에서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적 기쁨을 추구하는 축제에 불과하며 그것도 <광란적 축제>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각종 악기들이 동원되고 박수와 율동이 어우러지는 찬양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찬양 예배는 인간의 감정과 흥분을 표출하는 축제 마당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때에 비로소 찬양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흥분시킬 뿐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 찬양은 결코 예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통하여 사람이 기뻐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곧 예배이지 하나님의 기쁨 없이 다만 사람만 기뻐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제28장. 하나님의 은혜.

1. 하나님 은혜에 대한 정의.

은혜<恩惠>라는 용어는 혜택<惠澤>이나 특혜<特惠>에 대한 차원을 나타나는 용어이다. 혜택 또는 특혜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가 지나치게 과다했을 때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은혜라는 용어는 혜택이나 특혜보다도 더욱 과다한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용하는 은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 자비, 긍휼, 사랑, 용서, 강복, 신앙, 등등의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용어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 하나님 은혜의 특성.

1) 과거적이다.

기독교의 하나님 은혜는 일반 종교의 은혜와는 그 성격과 본질이 전혀 다르다. 일반 종교의 은혜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것으로서 현재 받는 은혜와 앞으로 받을 은혜를 말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 은혜는 과거적인 것으로서 이미 받은 은혜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창세전에 하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신앙적 행위를 근거로 하여 시시때때로 은혜를 하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의 신분을 전제로 하여 창세전에 조건 없는 <자녀를 조건으로 하여> 은혜를 하사하셨다. 그리고 그 은혜는 일회<一回>로 끝나는 은혜가 아니라 자녀들의 일생동안에 계속하여 공급되는 영원한 은혜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거는 물론이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모든 은혜를 이미 창세전에 받은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은혜받기 위한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즉, 날마다 순간마다 이미 주신 은혜를 그때그때 <예금통장에서 현금 찾아 쓰듯이> <냉장고에서 음료수 꺼내 먹듯이> 즐기고 누리는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2) 완전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하게 유효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부족하거나 미완성적이지 않고 충분하며 완성적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유는 두 가지로서 첫째는 아담 이래의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거역한 원죄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진정한 이유는 두 번째 이유로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도 하나님 은혜를 헤아릴 수도 없이 거부하고 모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징계 받아야할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고 그 <자녀>라는 것을 이유로 하여 참으로 받자옵기 민망한 은혜를 하사하셨다. 우리는 본래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밑빠진 독>이었고 지금은 아예 물을 퍼부을수도 없는 <깨어진 독>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당신의 <은혜의 바다>에 던져 버리시어 우리가 은혜 안에 빠져 살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들이나 하나님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얼마나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며, 어떤 것이 귀중한 은혜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 패역한 자들이며, 더 큰 은혜를 욕심내는 망령된 자들이다.

3. 하나님 은혜의 종류.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적이며 포괄적인 것으로서 그중에 중요한 것을 정립하면 다음과 같다.

1) 창조의 은혜.

(1) 인간으로 창조된 은혜.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모든 피조들 중에 가장 특별하고 우수한 존재인 인간으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신체의 균형과 미모, 생활관습 등등에서 다른 피조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으며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아하고 고매한 인격과 자유의지를 하사받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사회를 통하여 입증된다. 인류 사회에는 다른 피조들의 영역에는 없는 문화와 문명이 있으며 정치, 경제, 군사, 예술, 학문, 과학, 스포츠, 가정, 등등의 각종 영역이 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피조 세계가 다만 무에서 말씀으로 창조된 것과 달리, 흙이라는 재료를 통하여 창조된 것을 통하여 입증된다. 인간 창조에 흙이라는 재료가 사용되었다는 것 자체도 은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지으신<빚으신> 은혜를 하사하신 것이다.
(2) 대자연을 주신 은혜.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는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삶을 위하여 선물로 하사하셨다. 해, 달, 별, 산, 평야, 시냇물, 강, 바다와 각종 생물들은 모두 인간에게 하사된 하나님 은혜의 선물들이다.

2) 신분적 은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중 가장 최고의 은혜는 신분적 은혜이다.

(1) 하나님 나라의 백성.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현세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살지만 장차에는 하나님 나라<천국>에서 최고 최상의 영원무궁한 삶을 살게 된다.

(2) 하나님의 자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과 긍휼 안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산다.

(3) 하나님의 종.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섭리 역사에 귀한 존재로 쓰임 받으며 하나님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 받으며 각종 능력과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영광의 삶을 산다.

4. 하나님 은혜에 대한 성도의 자세.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도록 전체적이고 포괄적이며 완전하고 영원하다. 따라서 성도들은 더 이상의 은혜를 간구하거나 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무지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무시하는 패역이며 어리석고 지나친 욕심이다. 성도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거나 또는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사는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고 행복하고 그리하여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으로 기도하고 감사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산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하고 평안하다. 때문에 그들은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으로 기도하고 감사로 기도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재물, 명예, 권세, 부귀, 영화, 쾌락 등등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것들로부터 초월하고 자유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재물, 명예, 권세, 부귀, 영화, 쾌락 등등으로부터 초월하고 자유하지 못하는 자들은 반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때문에 행복하고 평안하지 못하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지 못하고 항상 은혜를 갈망하며 은혜를 받기 위하여 전전긍긍하며 기도원이나 부흥집회를 배회하느라 동분서주하게 된다.

제29장. 축복과 저주.

1. 축복<祝福>

1) 축복의 정의.

축복<히- 바락 󰕖󰙝󰔯> <헬- 율로게오 ευλοϒεω> <영-Bless, Blessing> 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복을 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면에 한국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축복<祝福> 이라는 단어는 순전히 어떤 존재로부터 복이 내려질 것을 원하고 부탁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인간이 피차에 하나님의 은혜 또는 하나님의 복이 하사되어지기를 기원 할 때에는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 또는 복<福>을 하사하시는 것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강복<降福>으로 표현해야 한다.

2) 축복의 오류.

한국기독교는 하나님의 강복<降福>을 하나님의 축복<祝福>이라는 용어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강복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용되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향하여 <복을 내려주소서>하고 빌었다.
<하나님께 축복 받았다.>.....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향하여 <복을 빌어 주셨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소서>.....하나님 우리에게 <복이 내려지도록 빌어 주시옵소서.>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무서운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째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강판시키게 된다. 하나님이 강복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면 하나님은 복을 비는 존재로서 복을 주시는 어떤 지고의 존재보다 열등함을 스스로 증거 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자리를 거부하고 강판 시키는 망령된 언어이다.

둘째 :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타의 추종이나 이의 같은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을 주지 못하고 복을 비는 정도의 하나님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에게 절대적 주권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기만이요 사기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망령된 언어이다.

이러한 논증에 대하여<비록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당연히 강복인 것이며 따라서 용어 하나를 가지고 너무 비약하는 것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의는 당연히 그리고 단호하게 야단맞아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과연 아무렇게나 함부로 불려져도 되는 분이신가? 그 분의 이름이 인간의 말이나 인간의 글로 불려지고 씌어진다고 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그렇게 대충, 불려지고 씌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자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는 최상, 최고, 최대의 예를 갖추어 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해석만 바로 하면 된다는 자세는 하나님께 참으로 무례하고 무엄한 악행이다.

2. 저주<詛呪>

1) 저주의 정의.

저주<詛呪-히-מר󰖒-cherem-히-הללק-qlalah-헬-αναθεμα-anathema>는 축복에 대한 반대 용어로서 상대방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저주.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저주와 무관하시다.

(1) 하나님께서는 신분상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서 최고, 최상, 최대의 존재이시다. 아니 그러한 용어로 표현한다 해도 부족한 것이 하나님의 신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저주와 같은 저속한 것과는 전혀 무관하시다.

(2) 하나님께서는 주권주로서 저주와 무관하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로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권주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세계를 저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는 속성상서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의 속성<거룩, 자비, 긍휼, 사랑,>은 저주와 전혀 무관하시다.

(4) 하나님께서는 섭리주로서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행하시는 섭리주로서 당신의 섭리 역사 하에 있는 것들을 저주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실 수 없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어떤 제약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주와 무관하시다는 것이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주를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3) 기독교와 저주.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저주와 무관하다.

(1)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다.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도 당연히 저주와 무관하다.

(2) 하나님께서 저주를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싫어하시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는 저주를 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저주를 금지하셨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금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는 저주를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피차에 축복할 것을 명령하신 대신에 저주를 금지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그 저주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고 선포하셨다<창12:3><출21:17>.

(4) 기독교인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의 저주 하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면 받은 자이기 때문에 저주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도 저주아래 있었던 자들로서 용서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5)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인격, 거룩, 자비, 긍휼, 사랑> 등등의 하나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로서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상 저주와 무관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저주한다면 그는 하나님 자녀의 품위와 인격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것이다.

(7)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자들로서 어떤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특히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것을 하나님의 종이 저주할 수 없다.

4) 저주에 대한 성경해석.

(1)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해석.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저주의 관계를 근거로 할 때에 하나님의 저주란 곧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2) 사도들의 저주에 대한 해석.

사도 바울은 저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9>

바울의 말은 자신이 저주를 한다거나 또는 성도들에게 저주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롬9:3>은 동포의 구원을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열정의 표현이며, <갈1:8-9>은 비 진리를 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3) 사람의 저주에 대한 해석.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저주를 금지하셨으며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선포하신다<창12:3><출21:17>. 따라서 모든 사람, 특히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용서와 관용, 사랑과 긍휼, 자비와 축복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비 진리가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심란하게 한다. 대부분 기도원을 차려놓고 무당 노릇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괴이한 비 진리들을 남발하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조상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가문에 내려진다>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 괴상한 주문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저들이 이러한 비 진리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요 다른 또 하나는 <출34:6-7>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6-7>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조상의 죄를 가문에 대대로 내리실 이유가 없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 19-20>

따라서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과 <출34:6-7>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이 혈통을 따라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원죄로 인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징계 받으며 또한 부패한 본성에 의하여 범죄하는 일상죄에 대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징계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없이 다만 아담의 범죄를 연대적으로 저주<징계>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들의 죄에 대한 징계를 받는 것이다.

(2) <출34:6-7>

<출34:6-7>의 말씀은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대대로 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 한다는 말씀에서 증명된다. 반면에 <겔18:19-20>은 분명히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전가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출34:6-7>의 말씀은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대대로 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 분명하다. 따라서 성도들은 기독교를 빙자한 3류 무당들의 비 진리에 속아 심란할 필요 없다. 기독교에 저주란 허용되지 않으며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절대 보호하심 하에 있으므로 사단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침노할 수 없다. 따라서 3류 무당들의 저주와 주문 따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혀 해당이 없는 것이다.

제30장. 목사들의 축복권과 저주권.

한국 기독교 목회자 중에 목사들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로마 카토릭이 주장하는 <매고 푸는 권세-마16:13-19>를 근거로 하여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 <목사의 매고 푸는 권세> <목사에게 부여된 천국문을 열고 닫는 열쇠> 등등을 주장한다. 한국 기독교의 많은 성도들은 이 해괴한 주장들로 인하여 목사들의 온갖 공갈 협박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목사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목사의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하여 목사에게 절대 충성한다. 우리는 저들의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의 성도들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 <목사의 매고푸는 권세> <목사에게 부여된 천국문을 열고 닫는 열쇠>에 대한 문제를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1. <마16:13-19>.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3-19>

1)<마16:13-19>에 대한 로마 카토릭의 주장.

로마 카토릭은 교황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다양한 오류를 조작해 내었다. 저들은 사도 베드로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좌정시켰다. 그리고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좌정시키는 과정에서 <마16:13-19>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하였다. 로마 카토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매고 푸는 권세>와 <천국문의 열쇠>를 주었으며 그것은 곧 교황에게 준 것으로서 오직 역대 교황에게 대대로 내려지는 권세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매고 푸는 권세>와 <천국문의 열쇠>가 오직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곧 교황에게만 주어진 권세라는 주장은 <마18:18>을 통하여 억지 주장임이 들어난다. <마18:18>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이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그러나 로마 카토릭은 <마18:18>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무시하였다. 로마 카토릭은 <매고 푸는 권세>와 <천국문의 열쇠>를 교황의 절대적 권세로 확립시키기 위하여 그것이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에 대한 권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주장은 인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교황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질 수도 있고 거부될 수도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은 교황의 권위와 권세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위에 두는 망령되고 패역한 악행이다.

2) <마16:13-19>의 신학.

(1) 교회에 대한 신학.

<마16:13-19>에는 교회에 대한 신학이 다음과 같이 정립되어 있다.

①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다.
②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야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
③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 세워진다.
④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운영된다.
⑤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에 의하여 세워지고 인간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세워지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되는 권위와 권세에 의하여 운영되므로 사단의 역사가 범접하지 못한다.

(2)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신학.

<마16:13-19>을 하나님 종들에게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복음<천국 열쇠>이 주어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해야 한다. 복음<무엇이든지>을 비 진리로 가르치면<매면> 하나님의 징계<하늘에서도 매일 것>를 받을 것이요 너희가 복음<무엇이든지>을 진리로 가르치면<풀면>,하나님의 상급<하늘에서도 풀릴 것>을 받으리라.

2. 매고 푸는 것.

<마16:13-19>에는 <매는 것>과 <푸는 것>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그것을 <매는 권세> <푸는 권세>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매는 권세> <푸는 권세>는 로마 카토릭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는 것을 교황에 대한 절대적 권세로 적용하기 위하여 조작해 낸 것이다. 즉 로마 카토릭은 교황에게 교회의 수장<首長>권을 부여하면서 교황의 수장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확립시키기 위하여 <천국 열쇠>를 천국에 들여보낼 수 있는 교황의 절대권한으로 조작했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매는 것>과 <푸는 것>에 권세를 부여하여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국 문을 열수도 있고-풀 수도 있고> <천국 문을 닫을 수도 있는-맬 수도 있는> 절대적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매고 푸는 권세>를 더욱 확대해석하여 교황에게는 <축복권>이 부여되었으므로 교황이 축복하면 하나님께서도 강복하신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카토릭은 본래 <교황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주장하였지만 저주권에 대한 반대가 심하여 저주권에 대한 주장은 슬그머니 후퇴하고 축복권만 주장한다. 이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만행은 당연히 하나님께 징계받아 마땅하므로 기독교로부터 분리되는 허용적 징계를 받았지만 로마 카토릭보다 더 악한 자들이 있는바 그들은 바로 그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주장을 자신의 권세로 적용하여 <목사에게 축복권 저주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다. <마16:13-19>에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부여된 두 가지의 특별한 사명이 명시되어 있는 반면에 그들이 그 사명을 바로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서운 징계가 있음이 선포되어져 있다. 그러나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주장하는 자들은 <마16:13-19>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무서운 경고를 알지 못하고 오직 목사의 권세에 대한 욕심만 가득하다.

1) <마16:13-19>과 관련된 사명.

<마16:13-19>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사명은
두 가지로서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명.

① 하나님 진리<말씀>의 보존.
② 하나님 진리<말씀>의 사수.
③ 하나님 진리<말씀>의 보전.
④ 하나님 진리<말씀>의 교육.
⑤ 하나님 진리<말씀>의 전파.

(2) 하나님의 성도 양육에 대한 사명.

① 하나님 성도에 대한 용서.
② 하나님 성도에 대한 사랑.
③ 하나님 성도에 대한 교육.
④ 하나님 성도에 대한 보호.
⑤ 하나님 성도에 대한 인도.
⑥ 하나님 성도에 대한 축복.
⑦ 하나님 성도에 대한 기도.

따라서 <마16:13-19>에 명시된 목사들의 사명은 목양자로서의 사역적 권세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대한 권세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권세>이다. 그리고 그 권세는 <통치적 권세나 군림적 권세> <권위적 권세-세우는 권세>가 아니라 <임무적 권세-사역적 권세>로서 <섬기는 권세-봉사의 권세>이다.

2) 땅에서 매는 것.

땅에서 매는 것이란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를 통하여 진행하는 사명을 바로 이행하지 않고 비 진리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대하여 매는 것.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맨다는 것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보존, 사수, 보전, 교육, 전파하지 않거나 또는 오류, 왜곡, 변질시켜 비 진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목사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러한 오류를 범한다.

①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에 의해 매는 것.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목사들은 신학적 무지와 무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왜곡, 변질시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 사수, 보전하지 못하며 잘못 가르치고 잘못 전한다.

②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의도적으로 매는 것.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는 욕심을 발동하여 의도적,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왜곡, 변질시킨다.

③ 게으르고 나태하여 방관적으로 매는 것

사명감 부재의 목사들은 누리고 즐기는 것에 심취하거나 또는 게으르고 나태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 왜곡, 변질되거나 또는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 이단과 각종 비 진리자들이 횡행하고 난무하여도 수수방관한다. 저들은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하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이 진리 안에 있음을 과시하고 자랑한다.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 이단과 각종 비 진리자들이 횡행하고 난무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 왜곡, 변질되는 것은 가슴이 저미도록 아픈 일이며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고 하나님의 존귀하고 거룩한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며 수많은 교회들이 무너지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련과 고통과 아픔을 겪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이행하기 위하여 비 진리자들과 이단자들의 횡행과 난무를 근절시켜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 왜곡, 변질되는 것을 생명을 다 바쳐 막고 퇴치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 사수, 보전하고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존, 사수, 보전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성도 양육에 대하여 매는 것.

<마16:13-19>의 땅에서 매는 또 하나는 목사들의 하나님의 성도 양육사명을 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바로 섬기지 아니하는 제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즉, 목회자들이 하나님 성도에 대하여 용서, 사랑, 보호, 인도, 축복, 기도, 등등의 섬김적 사명을 이행하지 않고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그것을 제한하거나 또는 하나님 성도들을 착취하거나 갈취하거나 편애하거나 상처를 줌으로서 그들을 슬프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유리방황하게 하는 비 진리적 제반 행위들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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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땅에서 푸는 것.

(1)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대하여 푸는 것.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푸는 것은 매는 행위에 대하여 상대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푼다는 것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최선을 다하여 보존, 사수, 보전, 교육, 전파하는 것이며 열심히 공부하여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오류, 왜곡, 변질시키지 않고 바로 전하고 바로 가리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성도 양육에 대하여 푸는 것.

하나님의 성도 양육 사명을 푼다는 것은 매는 행위에 대하여 상대적인 것이다. 즉, 목회자들이 하나님 성도에 대하여 용서, 사랑, 보호, 인도, 축복, 기도, 등등의 섬김적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이행하고 그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과 행복과 영광의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4) 하늘에서 매는 것.

<하늘에서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바르고 진실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이행하지 않고 불법과 악행을 범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상대적인 징계를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맨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것으로서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징계를 말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대하여 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16:13-19>을 통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나태하고 게으른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셨다. <땅에서 매는 자들이 하늘에서 매일 것>이란 말씀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목사들이 무지와 무식에 의하여, 또는 목사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또는 나태하고 게을러서 하나님의 말씀<진리>를 오류, 왜곡, 변질시키거나 또는 잘못 가르치거나 잘못 전하거나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의 범람을 수수방관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 보전, 사수하는 사명을 바로 이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하신다.>

.(2) 하나님의 성도 양육에 대하여 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16:13-19>을 통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비 진리를 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셨다. <땅에서 매는 자들이 하늘에서 매일 것>이란 말씀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목사들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양육함에 있어 하나님 성도들을 용서, 사랑, 보호, 인도, 축복, 기도 등등으로 바로 섬기지 않고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그것을 제한하거나 또는 하나님 성도들을 착취하거나 갈취하거나 편애하거나 상처를 줌으로서 그들을 슬프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유리방황하게 하는 비 진리적 행위들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하신다.>

5) 하늘에서 푸는 것.

<하늘에서 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바르고 진실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상대적인 보상을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푼다>는 것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하사되는 상급과 면류관을 말하는 것이다.

3. 천국문의 열쇠.

<마16:13-19>의 천국 열쇠는 <매고 푸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천국<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완성되어졌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섭리이다. 따라서 목사에게 천국문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것은 <열을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열려진 <천국문-구원>으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라는 것이다. 열쇠는 열기 위한 도구이지 잠그기 위한 자물쇠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열쇠를 말하였을 뿐 자물쇠를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천국문을 <열을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진 것으로 주장한다거나 또는 축복을 할 수도 있고 저주를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목사에게 부여되지도 않은 그러한 권세를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기만하고 협박하는 악행이다. 만약에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완전하게 열어놓은 천국<구원>을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제한한다거나 또는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강복을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제한한다면 그것은 결코 제한되지 않는 반면에 그것을 함부로 제한한 그 목사는 하나님께 <불법을 행한 악한 자>라는 책망과 함께 영원히 정죄될 것이다.

4.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강복권과 징계권은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절대 고유의 특권이다. 한편 목사에게는 실제로 축복권이 부여되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를 축복하라는 특별한 권세를 부여하셨다. 그러나 그 권세는 <권위적 권세-세우는 권세>가 아니라 <임무적 권세-사역적 권세>로서 <섬기는 권세-봉사의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피차에 서로를 축복하고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따라서 그와 같은 <축복과 사랑의 삶>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절대적 법령으로> 제정하여 주셨다. 특히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고 양육해야 할 사명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강복이 내려지기를 사명적 차원에서 <그러나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차원에서> 원하고 간구하는 <축복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목사들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축복권은 그러한 축복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강복권>이다. 목사의 축복권을 주장하는 자들의 개념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목사에게 하나님의 강복하시는 권세와 저주<징계>하시는 권세와 같은 권세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신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며 신앙적 사명적으로도 전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강복하심과 저주<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특권이지 목사들에게 위임되거나 부여된 권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또 하나는 목사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강복하시는 반면에 목사가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도 책망 받아 마땅한 악행이다. 만약에 목사의 축복과 저주에 따라 하나님께서 강복하시고 징계하신다면 하나님은 목사의 부하가 되는 것이다. 저들은 이와 같은 우리의 책망에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목사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부여하신 것은 목사들의 권위를 세우시기 위함이며 따라서 목사의 축복과 저주에 따라 하나님께서 강복하시고 징계하신다하여 하나님께서 목사의 부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망언이라고 변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증도 같은 악행이다. 목사의 축복과 저주에 따라 하나님께서 강복하시고 징계하신다는 주장은 결국 목사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조작해 낸 비 진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저주라는 용어를 기독교에 허락하지 않으셨다. 때문에 저주하는 자들은 오히려 그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무지와 무식을 스스로 자증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권한과 권위와 영광을 가로채려는 망령되고 패역한 악행자들이다.

제31장. 헌금.

1. 헌금의 정의.

헌금 제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 되어진 것이지만 구약시대의 헌금과 신약시대의 헌금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1) 구약시대의 헌금.

구약시대의 헌금<헌물 제물 예물>은 두 가지의 큰 의미를 내포하였다. 하나는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소유가 본래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천명 하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물<특히 십일조>을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것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갖게 하였다.<창14:20;28:22> <민18:21-> <신12:17;14:23>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 <아브라함, 욥>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구약시대 예물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적 의미로 드려진 것이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속죄제, 화목죄 등등의 제사를 부여 하셨으며 제사 때에 동물이나 곡식 등등의 제물을 사용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와 제물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제사를 예표 하는 것이었다. 한편 구약시대 예물 중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위한 예물이 드려지기도 하였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 예물이 드려진 것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배상적 의미가 포함되지만 하나님과의 화목을 전제로 하는 차원에서 화목 예물을 드린 것이었다.

2) 신약시대의 헌금.

신약시대의 예물도 그것이 본래 하나님의 것이라는 근본적인 의미는 구약시대와 동일하다. 반면에 신약시대의 예물 드림은 이제는 중보적인 의미로 드려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중보자로서 완전한 제물이 되어 완전한 중보의 제사를 드리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했던 제물과 제사는 종료 되어졌고, 이제는 오히려 차원 높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예물로 승화 되어졌다. 이제 예물은 제단에 드려지는 의식적 차원의 의미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의 자유> 원리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를 위하여 드려지는 모든 행위로 승화 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예물은 보다 차원 높은 의미로 드려지게 된다. 신약시대의 예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전개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자신의 모든 것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드리는 신앙의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하나님을 향한 모든 순종과 충성과 봉사가 곧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물>이 되며, 따라서 물질과 시간 까지도 예물에 포함되는 것이다.
화목적 의미로 드렸던 예물도 신약 시대 기독교에서는 드려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예물로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예물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위한 예물이 드려지지 않는다. 반면에 신약 기독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은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실천적 신앙으로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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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시는 것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포함 되어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 당신의 종들이 그 예물 드림을 통하여 장차 하나님께 받을 상급을 예비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종들이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과 순종과 봉사와 충성> 등등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그 모든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시어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입국 할 때에 <착하고 충성된 내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그들이 드린 예물에 비하여 참으로 비교 할 수 없는 상급과 면류관을 선물로 하사 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예물은 헌금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과 순종과 봉사와 충성>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예물드림의 원리>에는 세 가지의 원칙이 있다.
첫째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것이며 <출25:2>
둘째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것이며<신16:10>
셋째는 분수에 맞게 드릴 것이다.<신16:10>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충족시켜 드리기 위한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드려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드려야한다.

1) 하나님의 것임을 명심하여 드린다.
2)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다.
3) 하나님의 섭리에 드림이 되기 위하여 드린다.
4)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드린다.
5)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에게 순종하고 충성하기 위하여 드린다.
6)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린다.
7) 즐거움으로 드린다.
8) 분수에 맞게 드린다.
9) 욕심이나 사심이 없이 드린다.
10)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건 없이 순수하게 드린다.
11) 허례허식 없이 드린다.
12) 최선을 다하여 드린다.

3. 현대교회의 헌금 종류.

1) 십일조헌금.
2) 감사헌금. <각종 명목의 감사헌금 및 특별 감사헌금>
3) 주일헌금.
4) 주정헌금.
5) 월정헌금.
6)절기헌금. <신년, 부활절, 성탄절, 맥추절, 추수 감사절 기타>
7) 구제헌금.
8) 전도헌금.
9) 선교헌금.
10) 건축헌금.
11) 서원헌금.
12) 회개헌금.
13) 직분헌금.
14) 안수헌금.
15) 은혜 사모헌금.
16) 성미.
17) 일천번제헌금.

4. 오류된 헌금.

위에서 고찰 하여 본 바에 의하면 현대교회의 헌금은 예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독재자들에 의하여 징수되는 세금이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그것은 헌금의 종류에서도 나타나거니와 현대 교회의 헌금에 대한 강조<강요>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현대교회에서 드려지는 헌금의 실태를 보면 거의 다음과 같다.

1) 목적 있는 헌금.

헌금 강조자들은 <성령, 체험, 은혜, 강복, 은사, 등등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고 부추기며 <받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감사하므로 드리는 것>이라는 궤변으로 헌금을 유도한다.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성령, 체험, 은혜, 강복, 은사, 등등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헌금을 한다. 그러나 헌금 강조자들의 목적은 성도들에게 진정과 신령의 헌금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순전히 많은 헌금을 거두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어떤 무엇을 받기 위한 목적이 전제되어 있는 헌금은 온전한 헌금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기쁨으로, 자의적으로 참여하는 신앙으로 드려야 한다.

2) 조건적인 헌금.

성도들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린다. 이러한 헌금은 목적을 전제로 한 헌금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헌금이 아니라 3류 일반종교의 헌금이다. 3류 일반종교에서는 항상 목적적, 조건적, 헌금이 드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헌금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어떤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죄제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성도들의 조건적, 목적적, 헌금의 정당성을 합법화한다. 즉,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료하게 명시하여 기도하면서 헌금하는 것이 바른 헌금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성도의 감사이며 예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3류로 하락시키는 망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감사와 예의에 대한 기준을 헌금으로 책정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뢰, 진심의 감사, 자원의 순종, 기쁨의 충성 등등을 기뻐하신다.

3) 의무적인 헌금.

직분자로서 교회 운영에 대한 의무감에서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교회 재정이 어려울 때나 또는 교회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 교회직원으로서의 의무감으로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헌금이 불의한 헌금일수는 없으나 진정과 신령의 헌금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역시 정당한 헌금은 아니다.

4) 책임적인 헌금.

의무적인 헌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직분자로서 교회 운영에 대한 책임감에서 헌금을 드리는 경우이다. 이러한 헌금 역시 진정과 신령의 헌금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역시 정당한 헌금은 아니다.

5) 두려움에 의한 헌금.

하나님께 헌금 드리지 아니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는 두려움에서 드리는 헌금이 있다.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공경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시거나 또는 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헌금한다. 하나님 공경의 방법을 헌금으로 인식하는 개념은 일반 종교적 개념 특히 무속 신앙과 불교적 개념에서 전이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경외에 대한 기준을 헌금으로 책정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군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의 아버지로 자녀들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이다.

6) 체면과 위신에 의한 헌금.

직분자로서의 체면이나 위신을 지키기 위하여 드리는 헌금이 있다. 이러한 헌금 자세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에 의하여 드리는 헌금보다 더욱 비 진리적이다. 그것은 허세이며 형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7) 자기 과시적 헌금.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드리는 헌금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허세이며 위선이고 자기 자랑이며 자기 과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8) 타산적, 계산적인 헌금.

헌금을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어떤 대가가 주어지리라는 계산에서 드리는 헌금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목적이나 조건이 포함되지만 그보다도 계산적이라는 이유에서 하나님께 더욱 불경이다. 하나님은 계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9) 아까움이 있는 헌금.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헌금을 드리면서 아까워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포함되는 반면에 진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적 헌금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헌금이다. 따라서 이러한 헌금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는 것이다.

10) 준비되지 않은 헌금.

헌금할 신앙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의식에 따라 드리는 무심히 헌금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의식<儀式>적 헌금이며 성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헌금이 아니다. 헌금은 준비하고 기도하면서 드리는 것이다.

11) 무리한 헌금.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비하여 과하거나 또는 빚을 내어 드리는 헌금이 있다. 대개의 경우 교회가 이전, 건축, 증축, 기도원 설립, 등등의 큰 행사를 목표로 하여 성도들에게 작정헌금을 명령하므로 성도들이 무리한 헌금을 하게 된다. 삯꾼 목회자들은 의도적으로 부흥 집회를 개최한 후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성도들의 무리한 헌금을 요구한다. 이때에 순박한 성도들은 부흥집회의 분위기와 부흥 강사들의 교묘한 술책에 휘말리어 충동적인 헌금 작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이 충동적으로 무리한 헌금 작정했음을 깨닫고 후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작정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목회자들의 강압적 협박 때문에 결국은 헌금을 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이 아니며 헌금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일종의 사기 행각이기 때문에 헌금하지 않아도 무관하며 오히려 헌금하지 않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러한 헌금은 불법적 헌금이므로 헌금하지 않는 것이 옳으며 헌금하지 않아야 그러한 불법자들의 악행을 근절시킬 수 있는 것이다.

12) 무례한 헌금.

헌금을 던져 넣는다거나 헌금으로 장난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헌금자세는 하나님께 무례한 것으로서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행악이 된다. 헌금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예의를 갖추어 진정과 신령의 헌금을 드려야 한다.

13) 불의한 수입에 대한 헌금.

윤리적, 도덕적, 사회 통념상 용납될 수 없는 각종 불의한 수입에 대하여 드리는 헌금이 있다. 불의한 헌금은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따라서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악행이다.

14) 강제에 의한 헌금.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때에 성도들은 목회자의 강요를 거절하지 못하여 마음에 없는 헌금을 드리게 된다. 강요에 의한 헌금은 헌금이 아니다. 특히 그것이 목회자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착취다. 따라서 그러한 헌금은 드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목회자의 명령에 맹종적으로 순종하여 헌금을 드리는바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목회자에게 바치는 뇌물이다.

15) 사죄의 헌금.

하나님께 속죄받기 위하여 헌금하거나 또는 회개하면서 헌금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잘못된 헌금이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사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에 예물이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죄제의 의의<意義>를 모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다. 헌금은 사죄와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드리는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다.

16) 종말론적 신앙에 의한 헌금.

하나님의 심판이 즉시 임하게 될 것으로 믿고 현세의 것이 모두 무의미 하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사단의 사주 하에 있는 사이비 비 진리자들과 이단들은 종말론을 선포하면서 성도들의 재산을 갈취한다. 성도들은 그러한 자들의 술책에 휘말리어 자신의 전 재산을 그들에게 바치는데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모든 것이 종료되기 때문에 재산은 그들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들이라면 그러한 자들에게 사기 당하지 않는다.

17) 미신적 신앙에 의한 헌금.

재앙에 대한 예방책으로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기도원을 차려놓고 무당질을 하는 자들에게 속아 그러한 헌금을 드리는 자들이 있는데 이러한 헌금은 예물의 진정한 의미를 오류, 왜곡하는 것으로서 십자가에 완전한 예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죄제를 무시하는 헌금이다. 따라서 이러한 헌금은 드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바른 신앙이다.

18) 일천번제 헌금.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일천번제<왕상3:4>에 근거하여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행위는 기독교적 행위가 아니라 유대교적 행위이다. 기독교적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며 유대교는 율법 중심이다. 유대교가 본래 기독교였으나 스스로 유대교로 분리되어 나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거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진행한다. 일천번제나 일천번제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 행위가 아니라 유대교 행위인 것이다. 일천번제나 일천번제 헌금은 신학을 모르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서 유대교적일뿐만 아니라 3류 무속 종교적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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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적인 헌금은 대부분 기도원이나 부흥집회를 통하여 드려지게 되지만 일반 교회에서도 목사들의 강압적 또는 기복 신앙적 설교에 의하여 드려지고 있다. 현대교회 목사들 중에는 신앙의 척도를 헌금에 비례하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 재정에 집착하며 특히 돈을 사랑하는 자 들이다.

5. 교회 재정의 집행

목사는 교회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교회 재정을 관장 하여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적 책임자로서의 확인이고 감사<監査>인 것이지 재정에 대한 독단적 행사나 일체적인 간섭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는 교회 재정의 지출과 관리에 대하여 엄정하고 공정해야 한다. 교회법에 따라 집행하고 관리하되 재정부의 기능이 살아있는 집행과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적법 절차에 따라 집행되고 관리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1) 교회 재정 집행의 원칙.

교회 재정은 액수나 드린 자의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드려진 그 자체로서 이미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 재정을 집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집행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 재정의 집행은 다음과 같은 3 가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집행 되어져야 한다.

(1) 하나님의 주권이 세워져야 한다.

교회 재정 집행은 교회의 법에 근거하여 집행 되어야 한다. 교회마다 헌금 집행원칙이 다를 수는 있으나 그 원리는 같다. 즉,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 재정 집행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된다는 것은 교회가 정한 교회 재정 집행 원칙을 준수한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교회 재정 집행 원칙을 무시하고 독단적 임의적으로 교회 재정을 집행하는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재정 집행 원칙을 무시하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속성이 증거 되어져야 한다.

교회 재정 집행에는 하나님의 공의 사랑 자비 긍휼 등등이 나타나야 한다. 교회 재정이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하지 않고 어느 특정인들의 속성대로 집행되어 비 진리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만홀히 여기는 행악이다.

(3)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 하여야 한다.

교회 재정 집행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 재정은 교회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공익을 위해서 집행되어져야 하며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비 진리적인 것을 위하여 집행 되어져서는 안 된다.

2) 정당한 교회 재정 지출과 관리.

교회 재정의 집행은 위와 같은 집행의 원칙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집행 되어져야 한다.

(1) 교회의 합의를 이루어 집행한다.

교회의 예산에 의거하여 집행하며 예산에 들어있지 않은 것은 교회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집행한다.

(2) 질서와 절차에 따라 집행한다.

반드시 재정부의 승인을 거쳐서 집행한다.

(3) 검소하게 집행한다.

낭비적인 집행을 하지 않으며 작은 것 하나라도 아끼고 절약한다.

(4) 규모 있게 집행한다.

반드시 필요한 것에만 집행한다.

(5) 과감하게 집행한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것에는 과감하게 집행한다.

(6) 정직하게 집행한다.

공과 사를 구분하여 집행한다.

(7) 기관의 재정은 기관의 자율에 맡긴다.

각 기관의 재정은 각 기관의 자율 하에 관리 되어지게 하며 오히려 교회적인 차원에서 기관을 지원함으로서 기관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한다.

(8) 특별 헌금은 별도로 관리 집행한다.

교회 건축, 선교사업, 구제, 장학회 등등의 특정 사업을 위하여 드려진 특별 헌금은 일반 재정과 구분하여 별도로 관리하며 원래 드려진 목적대로 집행한다.

3) 비 진리적 교회 재정집행.

현대 교회의 재정집행 실태를 고찰하여 보면 지극히 비 진리적인 경우가 많은바 그 실태를 예로 들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질서와 절차 무시.

교회의 예산과 정책에 관계없이 재정부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집행한다.

(2) 특정인이 임의로 사용.

재정부의 합의나 승낙 없이 특정인이 마음대로 사용한다. 어떤 목사는 <목사는 교회재정의 70%를 임의로 사용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그것을 막으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3) 불법 불의한 곳에 사용.

부동산투기, 사채놀이, 관광, 오락 등등에 사용한다.

(4) 규모 없는 과소비.

교회 재정은 쓰면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면서 함부로 과다하게 사용한다.

(5) 심방헌금 착복.

심방 헌금을 착복하는 자들이 있다. 목회자들 중에는 <심방 헌금은 목회자의 분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6) 부흥회 헌금 착복.

부흥집회 때 드려진 헌금 을 부흥강사와 담임목사에게 사례비로 주는 교회가 있으며 심지어는 아예 전액을 부흥강사와 담임목사가 나누어가지는 자들도 있다.

(7) 연말연시의 헌금 남용.

연말연시 및 명절 때에 선물 구입에 교회 재정을 지나치게 집행하는 경우가 있다. 일년 동안 수고한 교회 직분자 들에게 선물을 주는 관례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검소한 선물 이어야 한다. 어떤 교회 에서는 명절이나 연말연시에 교회재정으로 목회자에게 과다한 선물이나 사례비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관례는 퇴출 되어져야 한다.

(8) 빚 얻어 집행 하는 것.

교회가 행사를 위하여 또는 교회 건축을 하기 위하여 빚을 얻어 집행 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가 특별한 경우에 금융기관을 통하여 대출 받을 수 는 있으나 무리한 행사, 또는 교회건축을 위하여 빚을 얻어 집행하는 것은 교회를 환란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한다.

(9) 교회 내 외부에 대한 과다한 치장을 위하여 교회 재정을 허비하는 것.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은 좋으나 과다한 비용을 들여 교회를 호화롭게 치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교회 건물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난다.

(10) 과다한 목회비 지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목회자에게 과다한 목회비를 지출하는 바 이와 같은 관행은 하루빨리 퇴출되어야 한다. 현대 목회자들 중에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은 너무 어렵게 사는 반면에 대형교회 목사들은 지나치게 호화로운 삶을 산다.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정립시켜 주신 목사의 삶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목사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면 존경받으나 반대로 현실적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면 비난받고 비판받는다.

(11) 기도원 구입.

많은 교회들이 기도원 및 수양관을 설립하는 것에 막대한 교회 재정을 투입하고 심지어는 성도들에게 특별 헌금까지 강요하고 있는바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얼마나 많으며 돌아보아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이행하지 않고 그러한 일에 교회 재정을 집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으로서 지탄받아 마땅하다. 교회가 개교회적으로 기도원 및 수양관을 설립하는 것은 교회 재정을 낭비하는 것이며 <합하여 선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기도원이나 수양관은 범 기독교적 차원에서 설립 운영해야 한다.

(12) 교회 묘지 구입.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묘지를 구입하기 위하여 교회 재정을 집행 하는 것은 기독교의 부활 신학을 스스로 무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죽음은 곧 하나님 나라의 입국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현세적 죽음에 대하여 결코 슬퍼하지 않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를 위하여 묘소를 세우고 가꾸는 일에 시간과 재정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도처에 돌아보아야 할 어려운 이웃들이 산재해 있는데 교회 공동묘지를 구입하는 것에 귀중한 하나님 교회의 재정을 집행하는 것은 기독교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망령된 행위이다.

제32장. 기도.

1. 기도의 정의.

일반 종교에서의 기도<祈禱>는 섬기는 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섬기는 존재에게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그와 같은 차원을 초월한다.

1)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대화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대화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아뢰며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을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하실 때에 그들에게 기도하게 하신다.

2)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3)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곧 신앙적 생각이며 언어이고 행동이며 삶이고 사명의 진행이다.

2. 바른 기도.

기도는 신앙으로 하지만 신학에 근거하여 기도할 때에 바른 기도가 된다. 따라서 기도는 다음과 같은 신학 원리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1) 성부 하나님께 기도.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반드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주, 주 하나님, 하나님, 등등의 명칭을 부를 수 있으나 그 대상은 언제나 성부 하나님이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신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기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죄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하고 완전하고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에 <예수 이름으로-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거나 또는 <예수님 이름으로-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예수>는 단독으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주님_구주-중보자-메시야>가 될 수 없고 다만 제물이 될 뿐이며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에 <주님_구주-중보자-메시야>가 되는 것이다.

3)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기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이 기도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다음과 같다.

(1) 성부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받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2) 성자 하나님께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서 기도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시며
(3) 성령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은 기도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한다.

4) 온전한 기도.

기독교 성도들은 초기 신앙 때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며 배운다 하여도 실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초기 신앙 때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리하여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기도만 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해짐에 따라 기도에 대한 개념과 방법도 성숙해져서 점차 기도의 지경이 넓혀지고 그리하여 이웃, 교회, 국가와 민족, 등등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며 드디어는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온전한 기도란 기도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면 기도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기도로 발전하게 된다. 과거에는 자신, 가족,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기도를 하였고 이웃, 교회, 사회, 국가, 민족, 등등을 위한 모든 기도 역시 현세적인 안녕과 유익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간청의 기도였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차원 높은 형이상학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3.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를 직접 들으시며 그 기도에 직접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의 방법과 시기는 다음과 같다.

1) 응답의 방법.

(1)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응답.

① 말씀으로 응답.

기도의 응답이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것으로서 분별, 깨달음, 정립의 필요성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신학>을 통하여 응답하신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설교, 성경, 상담, 등등을 듣거나 보게 하시고 그 과정을 통하여 분별하고 알고 깨닫고 감동받고 믿고 정립하게 하시는 것이다.

② 환상, 꿈, 환청, 감동, 등등으로 응답.

기도의 응답이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것으로서 분별, 깨달음, 정립이 요구되어질 때에 응답이 더욱 구체적이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환상, 꿈, 환청, 등등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듣게 하시므로서 기도에 응답하신다.

(2) 삶에 관한 응답.

기도의 응답이 경제, 건강, 사업, 직장, 학교, 등등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삶과 연관된 것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합당한 응답을 실제적, 현제적으로 주신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사업을 번창하게 하시며 직장문제 학교문제 등등을 실제적, 현제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2) 응답의 시기.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경우와 상황에 따라 즉시 응답하실 때가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응답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녀와 종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시기를 조정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즉 일찍 응답해 주시어야 할때에는 일찍 응답해 주시고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나게 될 때에는 시간을 조절하시어 좋은 결과가 될 때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3) 거부적 응답.

하나님께서 기도에 전혀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모두 자녀와 종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으로 선포하는 바<마7:7-11> 그것은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종들이 간구할 때에 언제나 그들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종들이 간구할 때에 주어서는 안 될 것을 구하면 주시지 않는다. 그들의 안목과 생각에 의하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므로 간구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오히려 그것이 해악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허락하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다.

4. 기도의 오류.

현대 기독교 성도들 중에 많은 자들이 기도의 원칙을 벗어난 오류적 기도를 하고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되는 기도.

목회자들이 관광지나 호텔에 모여 기도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목회자들의 그러한 기도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진다.

2) 의례적인 기도.

독재적 위정자를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독재자를 찬양하는 기도를 하는 것과, 비 기독교인들의 행사에 들러리를 서는 기도회, 각종 사회단체들의 행사에 참여하는 기도회 등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3) 무례한 기도.

하나님께 항의적인 기도를 하거나 시위적인 기도를 하거나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은사와 능력을 함부로 요구하면서 무례한 언어와 태도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의 언어와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존경의 예의를 갖춘 것이어야 한다.

4) 과시적인 기도.

하나님께 받은 복과 능력과 은사를 자랑하고 과시하거나 또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기도를 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였다<마6:5>.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지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다.

5) 일방적인 기도.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욕심과 취향에 따라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놓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기도는 언제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어야 한다.

6) 무질서한 기도.

예배의 대표 기도를 할 때 중언부언하거나 오랫동안 많은 문제를 열거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배의 대표 기도를 하는 자는 미리 기도하는 가운데 준비하여 간단명료하게 기도해야 한다.

7). 거짓 기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오직 진실과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진실을 은폐하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8) 조건적인 기도.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면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9) 품위 없는 기도.

기독교인은 기도 할 때에도 경건함과 품위를 지켜야 한다. 기도 할 때에 우상숭배 자들과 같은 미신적인 기도, 광란적인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도회에서 북을 정신없이 두드리거나 또는 단상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발로 구르고 하면서 <주여 주여 주여>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가운데 광란적인 기도를 유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비기독교적인 기도 모습이다. 기도하기 전에 <주여 주여 주여>를 크게 삼창하고 기도하는 것도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한 것은 하나의 형식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무형식 이면서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절도와 질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녀들이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하는 것 까지도 알고 계시며 이미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마6:5-8>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며 <시121:3-4>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가 부를 때에 언제나 즉시 응답하신다. 절망적인 것은 언제나 우리의 입장이지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은 아니다. 하나님 우리아버지께서는 오히려 절망 가운데 품위를 잃고 울부짖는 우리를 안타까워하신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너와 함께 있거늘 어찌하여 나를 신뢰하지 않고 절망 하는가?>하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절망할 이유 없이 광란적으로 구할 것 없이 품위 있고 절도 있게 기도해야 한다.

10) 금식 기도.

사람들은 금식 기도 하는 자들을 경건한 신앙인으로 알아 존경하지만 금식기도 하는 자들 중에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고 있다. 특히 일방적으로 날자를 정해 놓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하면서 밥 안 먹고 떼쓰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7일 금식, 10일 금식, 심지어는 40일 금식을 정해 놓고 금식 기도를 하는 바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단식 투쟁이다. 인간은 정상적인 식사를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만 금식해도 건강에 지장을 받는 것이 인간의 육체다. 인간이 7일 10일 40일을 금식하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무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소유한 분이시므로 40일이 아니라 400일도 금식할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 금식하셨다하여 인간도 40일 금식하는 것은 참으로 무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금식 기도를 요구하시지 않았고 무지한 금식 기도를 금지하시어 금식 기도에 대한 신학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하셨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마9:14-15>

이와 같은 신학 원리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은 함부로 금식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tm도의 통치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고 슬퍼하며 괴로움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며 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영광의 삶, 기쁨의 삶을 누리고 즐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반면에 기독교는 다음과 같을 때에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1) 교회에 절대적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2) 국가와 민족에게 절대적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3) 하나님께 사명받은 자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 할 때에.

우리는 금식 기도할 때에 자신이 과연 무엇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만약에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즉, 경제, 건강, 사업, 직장, 학업, 등등의 일상적인 문제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한다면 그는 즉시 금식 기도를 중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문제에 연연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문제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살며 비록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연연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독하는 망령된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25-33>

11) 목사의 중보기도.

현대 기독교 목사들 중에 신학이 없는 자들이 도고<禱告-대도-代禱-딤전2:1>를 착각하여 <중보기도>한다고 말한다. 저들은 중보 기도는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라는 신학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도고<대도>를 <중보기도>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들의 오류가 점점 확산되어 많은 성도들이 도고를 중보기도로 오해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들도 중보기도 한다고 말한다. 비록 모르고 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중보기도 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이행한다고 하는 것으로서 심히 망령된 것이다.

12) 기도 받는 것.

기도에 관한 오류 중 또 하나가 기도 받는 것 기도해 주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유명한 목사들의 기도를 받으면 질병이 고쳐지고 은사를 받고 축복을 받는 것으로 믿어 유명 목사들을 찾아가 기도를 받는가 하면 기독교 방송국에서는 아예 그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유명한 목사들에게 기도 받기를 권장하고 있다. 목사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목사에게 주어진 고유한 책임이며 의무다. 목사는 특히 아직 기도에 익숙하지 않은 성도들을 위하여 도고<대도>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유명목사에게 기도 받으면 질병이 고쳐지고 은사를 받고 축복을 받는 다는 것은 목사들<특히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오류, 왜곡, 변질시킨 비 진리이다. 그들은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 때에 안수 기도를 받으면 각종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게 되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성도들에게 유명 목사의 기도 받는 관습을 유행시켰다. 하나님의 종들이 부흥집회와 같은 특별 집회를 인도할 때에 말씀을 선포하거나 안수하거나 기도할 때에 각종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게 되고 축복을 받는 등등의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언제나 바른 신학을 가르치어 그들이 정상적인 신앙을 유지하게 해야 한다. 즉, 그러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역사라는 원리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은 방송시간 같은 것을 통하여 기도 받으려는 자들과 유명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기도 받으려는 자들에게 <기도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에 대한 응답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을 위하여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해야 할 때에는 유명 목사들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소속교회의 담임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즉, 유명 목사의 기도에 따라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응답은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므로 담임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바른 질서인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기도해 주어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고 축복을 받는 것으로 주장함에 따라 분별없는 성도들이 유명목사에게 기도 받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도대체 <기도해 준다>는 것은 무엇이며 <기도 받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내용에 관계없이 용어 자체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 않는가? 기도를 해주는 자는 자신이 기도를 해주므로 역사가 일어났다는 차원에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욱 내세우고 있으며, 기도를 받은 자는 유명 목사에게 기도 받아 역사가 일어났다는 차원에서 하나님보다 목사를 더욱 받들게 되므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기도해 준 목사가 하나님보다 더욱 받들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비 진리적 만행들이 언제가 돼야 기독교에서 사라지고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세워질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13) 헌금이 첨가되는 기도.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에서 발생한 기도의 오류 중에 헌금 첨가를 원칙으로 하는 기도가 있다.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에서는 회개할 때에나 안수 받을 때에 반드시 헌금을 드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나 또는 어떤 문제로 목회자들에게 안수 기도를 받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무와 원칙으로 주장된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오류이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근거로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완벽한 예물로서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드렸기 때문에 그 예물<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오직 유일하면서도 영원히 완벽한 예물<중보>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회개할 때에 또는 안수 받을 때에 예물을 필수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히 완벽한 십자가 대속죄제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요구대로 헌금을 하는 자들도 같은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그랬겠지만 이제 기독교인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자들의 범죄에 더 이상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

제33장. 기도원<祈禱院>

1. 기도원의 역사.

기도원의 역사는 수도원<修道院>으로부터 유래되었고 수도원들은 수도사<修道士>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기독교에 수도사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지만 크게 집약하면 세 가지다. 첫째는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규율이 문란해지자. 오직 신앙적 삶에만 전념하고자 하는 자들이 수도사가 된 것이고 둘째는 교회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한 가운데 독단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자 이에 반발하여 평신도적 순교자가 되겠다는 영웅 심리에서 수도사가 된 것이며, 셋째는 신비주의 사상에 의하여 수도사가 된 것이다. 수도사들은 이러한 이유들에 의하여 교회, 또는 일상적 삶으로부터 스스로 격리하여 광야나 묘지등에 은둔하면서 철저한 금욕적, 경건적 신앙의 삶을 살았다. 수도사들이 계속하여 증가하자 그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 이제 수도사들은 광야적, 개인적 수도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원에서 더욱 엄격하고 경건한 규율을 지키는 신앙적 삶을 살게 되었다. 그들은 자급자족 규율에 따라 노동을 하면서 식생활을 해결하였고 노동을 통하여 얻어지는 수입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다. 수도사들의 경건함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여 수도사가 되었고, 도처에 남녀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 한편 수도사들은 본래 신앙은 경건하였으나 신학이 없었다. 특히 그들은 기도와 찬양에만 열중하였을 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매우 등한하였기 때문에 신학이 전혀 없었다. 반면에 그들은 나름대로의 체험적 신앙 때문에 신비주의적 신앙에 젖어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수도사들이 신학적으로 무지한 점을 공격하였고 수도사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하고 변질된 신앙을 공격하였다. 이로서 수도원과 교회, 수도사와 교회 사이에 충돌과 반목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교회와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혐오하던 많은 사람들은 수도사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귀족들과 국가도 수도원을 더욱 신임하여 교회에 내던 헌금과 각종 지원을 수도원으로 돌렸다. 그리하여 수도원들은 귀족들과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재정이 풍요하게 되었다. 반면에 수도사들에 대한 존경과 재정의 풍요로 인하여 수도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였다. 처음에는 엄격한 규율과 경건적 신앙으로 철저한 금욕주의적 삶을 유지하던 수도사들이 점점 풍요해지는 재정과 자신들을 존경하는 것에 크게 매료되어 명예와 권세를 욕심내게 되었고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로 노동을 비롯한 금욕주의적 삶을 스스로 버렸다. 그들은 고기와 포도주를 탐하였으며 금지하였던 결혼까지 하였다. 이제 그들은 금잔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금대접에 담긴 각종 고기들을 먹는 것이 진정한 수도사들의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지나친 음주와 육식으로 인하여 그들의 몸은 심히 비대해졌고 호화로운 삶으로 인하여 각종 질병이 만연하였다. 수도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자 이를 우려한 교회 지도자들이 수도원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수도원 개혁으로 인하여 참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 수도원 개혁자들은 수도원의 부패와 타락 원인이 <신학 부재>에 있었음을 명심하여 수도원을 신학의 요람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수도원은 기독교 신학의 산실이 되었고 훗날 신학교의 전신이 되었으며 세계 복음 선교의 주체가 되었다. 수도원들은 이제 어느 개인의 명성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범 교회적 차원에서의 집단 체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기독교 개혁 이후에 기독교의 완전 자유가 확산되면서 수도원들은 다시 개인적 수도원으로 환원되었고 그로 인하여 신학보다는 신앙 위주의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특히 기독교 개혁이후에 각 교파와 교단이 난립되어지는 가운데 아무도 통제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상황이 됨에 따라 신학 부재의 개인들이 명예, 권위, 재물, 등등에 대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수도원들을 건립하게 되었고 그러한 수도원등이 도처에 난립하면서 수도원은 기독교를 타락시키고 부패시키고 오류시키는 비 진리의 산실이 되었다.

2. 기도원의 필요성.

기도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기독교에 절대 필요하다.

1) 복음의 전파.

기도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한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기도원 집회를 통하여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사업, 건강, 가정, 등등의 각종 문제를 당한 사람들이 심신을 달래기 위하여 또는 어떤 막연한 기대에 의하여 기도원을 찾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를 해결 받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평안을 얻고 소망을 가짐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2) 신앙의 확신.

성도들 중에는 신앙적 연륜이 짧아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적 기쁨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와 열정적 충정도 없다. 이러한 성도들은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강한 불만과 안타까움에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한 심령으로 기도를 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현장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그러한 기회를 제한할 때가 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기도원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며 그들은 그러한 여건 속에서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의 기도를 하는 가운데 방언, 환상, 환청, 등등의 하나님 은혜를 체험하며 때로는 말씀 안에서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체험하며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그리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수립하는 것이다.

3) 신앙의 점검.

현대 기독교인들은 매우 바쁘고 복잡한 현실 속에 살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할 만한 시간적 장소적 여유가 없다. 반면에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싶은 안타까움을 안고 산다. 기도원은 그러한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한다. 성도들은 기도원의 특별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에서 자신의 싱앙을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후회와 참회의 기도를 하고 심기일전의 새로운 신앙적 삶을 수립하고 다짐한다.

4) 성도의 휴식.

현대 기독교인들은 매우 바쁘고 복잡한 현실을 살면서 심신이 항상 피로하다. 성도들이 모든 것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의 복잡다난함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심신의 피로를 누적시킨다. 기도원은 이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심신의 평안과 영적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한다. 성도들은 기도원이라는 특별한 영적 휴양지에서 최고의 명약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받고 치유 받는 가운데 심신의 피로를 완전히 풀고 건강한 영적, 육적,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기도원은 특히 하나님 종들의 휴식처로서 최적지이다. 하나님 종들은 계속되는 사명의 진행으로 언제나 심신이 피로하다. 그러나 그들은 부여받은 사명의 특수함 때문에 마음 놓고 휴식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다. 따라서 기도원은 그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상의 휴양지이다.

5) 최고의 기도처.

기도원은 최고의 기도처이다. 성도들은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기도를 통하여 극복하고 절제한다. 성도들은 삶 자체가 기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간적 공간적 여유 하에서 마음 놓고 기도하고 싶은 열정에 심히 안타까워한다. 새벽예배, 금요철야예배 등등이 계속되고 있으나 성도들은 그와 같은 기도시간보다도 더욱 기도에 전념하고 싶은, 그리고 그렇게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기도원은 최고 최상, 최적의 기도처이다. 기도에 갈급한 성도들은 기도원이 제공하는 특별한 시간적 공간적 분위기하에서 마음껏 기도하고 충분히 기도함으로서 그동안 못 다한 기도를 함과 동시에 기도 못한 안타까움을 풀게 되는 것이다.

6) 말씀의 교육장.

기도원은 기도 처소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할 수 있는 교육장으로서 최고의 시간과 장소이다. 성도들은 개인적, 교회적 사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기도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훌륭한 교육장인 것이다.

3. 기도원의 오류.

현재 한국의 전국 각지에는 그 숫자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기도원들이 난립되어져 있다. 그러나 기도원들은 대부분 기도원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시설은 물론이요 내용에 있어서 심히 열악하다. 특히 1980년대 이후부터 도시 각처에 난립되어져 있는 개척교회 형식의 기도원들은 기도원이라기보다는 다만 하나의 기도처소에 불과하다. 반면에 그 수많은 기도원들은 기독교를 오류시키고 왜곡시키는 비 진리의 산실들이다. 기도원을 운영하는 <원장>들은 거의 대부분 신학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자들이며 개중에는 아예 신학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자들도 있다. 때문에 그들은 신학으로 기도원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기도원을 운영하며 특히 체험적 신앙에 의하여 기도원을 운영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를 오류시키고 왜곡시키므로서 기독교와 성도들을 비 진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 기도원들을 통하여 오류, 왜곡되어지는 비 진리적 실태 중에 심각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신학적 오류.

기도원들이 도처에 난립되어지고 대형화 하면서 기도원들은 기도원에 대한 특색과 능력을 갖추려 하였고 그리하여 시도된 것이 각종 체험과 은사에 대한 강조였다. 기도원들은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을 기도원의 특별 능력으로 내세웠고 어떤 기도원은 금식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성들은 모두 <성령 체험>이라는 공통분모로 집약되었다. 하나님의 은사인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이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취득된다는 주장 하에 <방언 연습><예언 훈련><신유 학습> 등등이 시행되어졌고, <우리 기도원에서는 개도 방언 받는다>는 망언이 등장하였으며 성령 체험이 강조되는 가운데, <성령 받아라><성령충만 받아라><저기 성령 간다 붙잡아라><저기 불 간다 불 받아라-불 불 불 불 -불 받아라>하는 망령된 외침이 성도들의 통성 기도와 북소리에 맞추어 계속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영광>에서 <하나님의 축복-강복>으로 강등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기독교의 핵심인 <신학-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히 오류되고 왜곡되고 비 진리로 변질되었다. 저들은 방언, 예언, 신유, 금식, 축복<강복> 등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고 성령 체험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그리고 함부로 바꾸고 고치고 빼고 더하는 각종 비 진리적 만행을 시도 때도 없이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기도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신학>이 무수히 오류, 왜곡, 변질되는 비 진리적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의 신학이 사라져 버리고 <기복 신학><현세위주 신학> <인본주의 신학> <체험주의 신학> 등등이 만연하게 된 이면에는 이와 같은 기도원들의 각종 비 진리적 만행이 있는 것이다.

2) 신앙적 오류.

기도원이 신학적 오류의 산실이 되면서 성도들의 신앙이 동반하여 오류되었다. 하나님의 축복<강복>이 강조되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는 현세적인 강복에 더욱 전념하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의미는 크게 퇴색된 반면에 질병을 고쳐주시고 사업을 번창하게 하시고 승진, 진학, 취직, 경제 등등의 현세적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기도 제목이 되었다. 방언, 예언, 신유, 등등에 대한 체험이 강조되면서 방언 못하는 성도들은 성령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시되었고 성령 체험이 없는 신앙은 곧 성령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어 죽은 신앙<구원받지 못한 신앙>으로 확대해석 되었다. 특히 목회자들은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은사를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성행하였고 그러한 은사를 받지 못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그러한 은사가 있는 목회자들은 더욱 받들어지고 존중되었으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받으려는 성도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때문에 목회자들은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은사를 받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하였고 그러한 틈을 노리고 사기꾼들이 범람하여 <방언체험 학교> <예언은사 취득 학교> <신유은사 취득 방법> 등등이 등장하였으며 그에 관한 각종 세미나가 열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은사를 받지 못한 목회자들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거짓 방언> <거짓 예언> <거짓 신유> 은사를 행사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고 사이비 목회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무당 사역>이 시작되었다. 성도들이 은사 열풍에 휩싸여 자신들의 앞날에 대한 문제를 알기 위하여 동분서주함에 따라 <기도하는 자>를 자처하는 사이비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성도들의 앞날을 예고해 주는 <무당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성도들은 신학적인 목사의 설교보다는 <예언자>들의 말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예언자들을 찾아 기도원을 전전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입신<入神>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는 신앙 간증들이 급증하였다. 입신자들에 의하여 천국에 대한 각종 모습이 부흥회, 기도원 집회를 통하여 소개되어지자 천국에 대한 호기심이 성도들을 자극하였고 그것이 종말론적인 집회들로 연계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다는 자들의 집회가 성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시간과 장소가 선포되었다. 이장림, 하방익, 권미나, 등등에 의한 종말론이 주장되어지는 가운데 1992년 10월 26일 휴거설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설이 선포된 것이다. 이때에 수많은 성도들이 미혹되어 교회와 가정을 버리고 종말론자들의 집단에 뛰어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기복신앙, 체험주의 신앙, 종말 신앙 등등의 신앙적 오류와 변질들은 모두 기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것이다. 지금도 기도원들에서는 여전히 각종 신학적 오류들이 남발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 오류들이 양산되고 있다.

4. 해결책.

기도원들에 의하여 비롯되어지는 신학적, 신앙적, 오류, 왜곡, 변질, 등등의 비 진리를 근절시키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파, 교단에 대한 아집<我執>과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집착<執着>을 버리고 <하나의 기독교>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기도원들을 모두 흡수, 통합하여 범 기독교적 차원에서 관리 운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원들이 기도원으로서의 기능만 발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교육, 휴양, 복음전파, 등등을 수행하도록 확장하고 개편해야 한다. 전국 각처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기도원들을 많이 설립하고 능력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 배치하여 성도들이 주기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기도하고 휴양함으로서 차원 높은 신앙적 삶을 살게 해야 한다. 물론 그와 같은 범 기독교적 차원의 기도원들이 설립되고 운영된다하여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고 양심이 마비된 자들에 의한 교회적 또는 개인적 기도원들이 여전히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더욱 추구하는 자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 기독교적 차원의 기도원들이 차원 높게 운영되면 그들은 자연히 퇴출될 것이며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여도 기도원을 통한 비 진리가 현재와 같이 극성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제34장. 전도와 선교.

현대 기독교는 전도와 선교를 구분하지 않는다. 때문에 전도와 선교가 혼동되는가 하면 전도를 오해하여 타 교회의 성도들 끌어 모으는 것을 전도로 착각하기도 한다.

1. 전도<傳導>.

1) 전도의 정의.

전도<傳導>란 기독교를 영접하지 않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어 그들을 기독교에 입문하게 하는 일체의 방법과 수단에 대한 총체적인 용어이다.

2) 전도의 방법.

기독교 전도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된다.

(1) 언어 전도...설교, 성경공부, 권고, 등등을 통한 전도.
(2) 찬양 전도...찬양 집회를 통한 전도.
(3) 문서 전도...설교집, 성경 강해집, 간증집, 신문, 잡지, 등등을 통한 전도.
(4) 봉사활동을 통한 전도...각종 사회 활동을 통한 전도.
(5) 예술을 통한 전도...시, 수필, 소설, 미술, 음악, 무용, 영화, 스포츠, 라디오, TV, 등등을 통한 전도.
(6) 삶의 현장을 통한 전도...가정, 직장, 동우회, 등등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적 삶으로 전도.

3) 전도의 오류.

현대 기독교는 전도의 원리와 방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보다는 타교회의 성도들을 끌어 드리는 일에 더욱 열심이며 심지어는 경품까지 내걸면서 타교회 성도들을 영입한다. 그리고 전도의 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총동원 주일, 전도 주일, 등등을 설정하여 전교인 1명 전도하기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 방법은 좋은 결과보다는 나쁜 결과를 더 많이 이룬다. 그러한 전도 방법을 통하여 새로운 성도들이 기독교에 입문하기도 하지만 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임시방편으로 친척이나 친구중 하나를 교회로 모셔가는 와중에 타 교회 성도들을 하루 동안 임대하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행사는 교회의 재정을 축내는 결과만 만들뿐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2. 선교<宣敎>.

1) 선교의 정의.

선교<宣敎>는 전도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대부분 가까운 곳이나 국내에 대한 경우에는 전도라고 표현하고 국외의 경우에는 선교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군대나 교도소 같은 특수한 영역에 대한 전도 활동은 선교로 표현한다. 한편, 현재 한국 기독교는 도시의 개척교회와 농어촌의 미자립 교회들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때문에 각 교단들과 도시 교회들 및 개인들이 미자립 교회를 후원하고 있는데 미자립 교회들의 문제는 전도 차원에서 풀어나갈 문제가 아니라 선교 차원에서 풀어나갈 문제이다.

2) 한국 기독교 선교 현황.

선교에 대한 문제를 정립하기 전에 먼저 한국 기독교 선교 현장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 기독교가 어느 정도 자립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한국 기독교는 세계 복음에 대한 사명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세계 복음 선교는 사명감과 열정만을 가지고 진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해외 복음 선교에 대한 경험 부족과 선교 현장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한국 기독교 해외 선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일으켰고 그로 인한 실패의 거듭 속에서 깊은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복음 선교에 대한 사명감과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였고 21세기 현재에 이르러 세계 각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교 활동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 선교에 대한 지나친 열정과 빗나간 사명의식,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인간적 욕심들이 한데 어우러져 교단, 교파 간의 선교 경쟁이 일어났고 독자적인 활동을 고집하는 개인, 교단, 교파 간의 선교 활동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 기독교 복음 선교는 복마전<伏魔殿>처럼 얽히고설키어 완전히 이전투구<泥田鬪狗> 현장이 되어지고 말았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가꾸어온 해외복음 선교 현장이 황폐해지는가 하면 선교 지역 주민들로부터 선교 자체가 거부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해외 복음 선교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국내 복음 선교 역시 매우 심각하다. 한국 기독교 선교 현장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그중에 중요한 것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1) 국내 복음 선교현황.

① 미자립 교회.

한국 기독교 교회들의 실태는 천태 만별이다. 수만 명의 성도가 몇 차례에 나누어 주일예배를 드리는 초대형 교회가 있는가 하면 목회자가 자기 부인 한명을 상대로 설교하는 미자립 교회도 있다. 이러한 미자립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지하실이나 상가 건물을 월세로 임대하여 교회를 설립하며 그중에는 교회 안에 목회자 사택까지 마련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뿐만이 아니라 목회자들의 건강 문제도 매우 심각한 실정이다. 미자립 교회는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어촌에도 많다. 특히 1960년대 이후 많은 농어촌 주민들이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농어촌 교회들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자립 교회의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로서 하나는 재정적 어려움이고 다른 또 하나는 성도의 부족이다. 1960년대 까지만 하여도 미자립 개척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신앙으로 여겼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천막치고 가마니 깔은 교회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편하고 안정된 삶에 익숙해진 성도들은 이제 개척교회, 미자립 교회를 부담스러워하고 기피한다. 때문에 많은 미자립 교회들이 재정난, 인력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자립 교회들은 소속 교단이나 큰 교회 또는 개인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매우 극소수에 불과하고 오히려 얼마 안 되는 재정 지원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아픔을 겪으므로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② 군부대 교회.

현재 한국군 부대에는 교회들이 설립되어져 있고 군인 목사들이 상주하면서 군부대 교회 목회를 하고 있다. 때문에 직업 군인이나 의무병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군부대 교회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군부대 교회들은 복음 선교에는 관심이 없고 스스로 찾아오는 성도들을 관리하는 일에만 주력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군목들은 국가로부터 생활비를 비롯한 일체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교회 성장과 발전에 노력하지 않고 현재에 만족한다. 군부대 교회가 일반 교회의 지원을 받아 복음 선교를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군인들에게 세례를 시행하는 행사를 갖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의 대부분 실적을 과시하기 위한 일회적 행사로 끝날 뿐 진정한 의미의 복음 선교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사후의 성도 관리가 아예 계획조차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군부대의 형식적인 성도 관리 때문에 군부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예편을 하면 신앙 생활을 지속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③ 교도소 선교.

현재 교도소 선교는 선교 능력을 갖춘 전문 선교부의 정책 하에 실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명자들이 교도소 재소자들에 대한 선교 열정과 사명감에 의하여 복음 선교를 진행하는 경우가 더 많은 실정이다. 때문에 선교 활동을 하는 자들이 매우 열심히 고군분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력에 비하여 열매가 작은 실정이다. 특히 재소자들이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후의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들이 출감한 후 신앙생활을 계속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2) 해외 복음 선교현황.

한국 기독교 해외복음 선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진행되고 있으나 그것을 집약하면 대략 4가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첫째는 법인체 해외 선교부 지휘하의 선교이고, 둘째는 각 교파 및 교단 선교부 지휘하의 선교이며, 셋째는 각 교회 선교부의 선교이며, 넷째는 개인들로 구성된 선교 단체 및 개인들에 의한 선교이다. 이와 같이 선교가 통일적인 지휘체제하에 진행되지 않으므로 하나의 지역에서도 다른 교파들 및 교단의 선교가 진행되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는데 그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선교지에 교파 및 교단의 난립이 초래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난립된 교파 및 교단들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자기 교파, 자기 교단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상대 교파를 비판하므로 선교지가 갈등과 혼란에 빠져서 심지어는 어떤 교파, 어떤 교단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이다. 이러한 난립과 경쟁으로 인하여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일어나고 드디어는 선교사들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또 다른 문제는 선교지를 방문하는 선교 관계자들이 문화적, 경제적으로 낙후된 선교지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과시함으로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정확한 언어 소통이 않되는 가운데 행동을 통하여 나누는 대화 속에서 굴욕감을 느낀 선교현장 성도들이 선교사들에게 항의하면서 선교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경쟁적 선교의 와중에 물량 공세로 인하여 선교의 본질이 왜곡되는 가운데 수많은 선교비만 낭비하고 선교가 거부된 경우도 많다. 어떤 교회 해외 선교부는 중국에 엄청난 선교비를 투입하였으나 말씀을 전하는 복음 선교에는 열심이지 않은 반면에 교회를 세우고 신학교를 세우는 등등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선교에 열심하는 와중에 선교 현지인들의 반감을 사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3) 선교의 방법.

선교의 방법은 전도의 방법과 동일하지만 군대, 교도소, 국외 등지의 선교에는 전문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해야 한다. 그리고 국내 문제지만 미자립 교회들에 대한 문제 역시 선교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선교는 전도와 달리 범위나 체계에 있어서 범 기독교적인 차원이어야 하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체계 하에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선교는 다음과 같은 원칙 하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1) 한국 기독교 선교부 창립.

한국 기독교 선교는 이제 더 이상 개인 또는 교단, 교파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국에 기독교가 입국할 당시의 상황과 세계 선교 역사를 통하여 선교가 개인 또는 교단, 교파적 차원에서 각개적으로 분리되어 진행될 때에 발생하는 각종 문제들을 충분히 보았고 그로 인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한국 기독교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모순을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는 범 기독교적 차원에 입각한 선교를 진행해야 한다. 교파와 교단을 총망라한 단일 선교부<한국 기독교 선교부>를 구성하여 모든 선교가 <한국 기독교 선교부> 주관 하에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교파, 교단, 교회, 단체, 개인 등등의 선교 활동은 <한국 기독교 선교부>로 총괄이전 되어야 하며 교파, 교단, 교회, 단체, 개인 등등은 더 이상 개별적인 선교를 중단하고 <한국 기독교 선교부>의 지시를 받고 지원하고 후원하는 선교 후원자들이 되어야 한다.

(2) 전문가들에 의한 선교진행.

현재 한국 기독교 선교는 거의 대부분 선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 선교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선교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자들이 선교부를 이끌어가고 있고 선교사로 파송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는 자들이 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선교 아닌 관광을 즐김으로서 선교 현장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선교현장의 언어, 문화, 풍습, 등등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자들,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는 자들이 각종 선교 깃발을 휘날리며 선교 현장을 누비는 와중에 선교사들이 수많은 세월동안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선교 현장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선교는 선교 전문가들에 의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 선교부>는 선교 전문가들에게 전적으로 일임되어야 한다. 단지 기독교계에 널리 알려진 자라는 이유로 선교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자들을 <한국 기독교 선교부> 지도부에 추대해서는 안 된다.

(3) 선교 정책의 일원화.

선교부는 선교 현장의 언어, 문화, 전통, 풍습, 등등을 연구하여 선교 현장에 적합한 선교 정책을 수립하되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장기적인 선교 정책을 수립해야하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선교 정책은 함부로 바꾸지 않고 일관성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선교 정책이 조령모개<朝令暮改>가 된다거나 일관성 없이 수시로 수정되고 변개되고 추가된다면 선교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들은 선교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사정에 의하여 집행부가 교체된다 하여도 선교 정책은 항상 일원화되고 일관성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선교 정책뿐만 아니라 선교부를 이끌어가는 집행부와 현지 선교사들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함부로 교체하여 선교 정책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4) 절대적 지원.

선교는 선교비 뿐만 아니라 선교사 개인에 대한 생활비, 자녀 교육비, 노후에 대한 문제 등등에 대한 절대적 지원, 적극적 지원 하에 진행되어야 한다. 선교사들이 불타는 사명감에 의하여 생사를 초월한 선교사명을 이행한다 할지라도 그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특히 가족에 대한 문제로 인하여 흔들릴 수 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 대한 휴가, 여행, 교육, 등등도 절대 필요하다. 선교사들은 그러한 정책적 지원과 배려에 의하여 심기일전하는 가운데 의욕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4) 선교사 양성.

선교<특히 해외선교>는 선교사들의 사명감과 능력에 비례하여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나 선교사의 사명감이 아무리 높고 강해도 선교사의 능력이 선교 현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선교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선교는 해외 선교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은 높은 반면에 해외 복음 선교의 특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선교에 대한 전문지식은 고사하고 선교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자들이 선교사로 파송되는가 하면 선교지의 언어, 풍속, 풍습, 관습, 문화, 전통, 국민성, 역사, 사상, 등등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선교에 나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는 자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단기 선교>라는 깃발아래 선교 현장들을 누비고 있다. 이와 같은 행위들은 해외 복음선교를 마치 방학여행이나 휴가여행 정도로 착각하여 추억거리를 만들고자하는 백치<白痴>들의 어리석은 망동<妄動>이다. 한국 기독교 해외복음 선교가 오랫동안 수많은 시간과 재정과 열정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선교 열매를 얻지 못한 이면<裏面>에는 자질결여의 선교사들이 선교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기독교 선교부는 해외 복음 선교사 전문 양성소를 수립하여 최고의 선교사들을 훈련 양성하고 그들을 선교현장에 파송하여 해외복음 선교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5) 북한선교.

한국 기독교는 장차 북한이 개방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북한 선교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북한 개방을 허락하시지 않으신 것은 어쩌면 한국 기독교가 북한 선교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에 근래에 북한이 개방되면 어떠한 상황이 일어날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각 교파 및 교단들이 북한 선교의 깃발을 휘날리며 북한으로 달려갈 것이고, 수많은 교회들, 선교 단체들, 개인들이 앞을 다투어 북한으로 달려갈 것이며 기독교를 표방하는 각종 사이비 이단들까지도 거기에 합세할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 선교는 완전히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선교 각축장<角逐場>이 될 것이다. 각, 교파 및 교단들은 자기 교파, 자기 교단을 세우기 위하여 혈안이 될 것이며 북한에 신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건축하는 등 대대적인 물량 공세를 펴나갈 것이고 재력이 있는 큰 교회들도 같은 상황들을 연출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가운데 북한 선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망령된 역사로 일관할 것이다. 그것은 선교가 아니다. 그와 같은 사태는 일반시장 경제 원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북한 선교에 대한 선교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교파, 교단을 초월한 <한국 기독교 북한 선교부>를 수립하여 북한 선교가 단일체제, 단일정책 하에서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선교단체도 각개적인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해야 하며 선교에 대한 모든 지원을 <한국 기독교 북한 선교부>를 통해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북한의 기독교가 처음부터 바르게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만약에 이러한 정책에 불응하여 개인적인 선교 활동을 하는 자들이 있다면 한국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죄하여 기독교로부터 축출해야 한다. 자신의 이름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이며 사단의 괴뢰이다.

제35장. 성례.

1. 성례의 정의.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여 교회에 부여하신 규례로서 거룩한 의식이다. 성례는 또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서 신성하고 고귀한 의식이다. 성례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지는 것으로서 성도들의 신분과 구원에 대한 법적, 행정적 보증이다. 따라서 성례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효력을 보증 받는다. 반면에 성례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감사와 충성과 신앙과 순종의 의식으로서 신실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2. 성례의 구분.

1) 구약의 성례.

구약 시대에는 할례와 유월절이라는 두 개의 성례가 있었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에 따르면 할례는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으며 다른 민족들이 이 언약의 백성들로부터 할례를 도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현재 인정받지 못한다. 고대 사회에서도 이미 애굽의 사제들은 할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할례는 아시아, 아프리카, 심지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이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로부터 할례를 도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타 민족의 할례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할례는 하나님과의 은혜 언약에 대한 성결의식이었다. 구약 시대의 할례는 피의 제사의식으로서 죄책과 죄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을 상징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삶의 전 영역에 침투시킬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의미했다. 유월절 역시 피의 성례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희생을 통하여 애굽인들이 당해야했던 저주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대속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미한다<요1:29,36><고전5:7>. 구원받은 가족은 죽임당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는데, 이것은 믿음을 소유하는 신앙적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성찬 시에 떡을 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2) 신약의 성례.

신약의 성례도 두 가지로서 세례와 성찬이다. 그러나 신약의 성례는 외형적으로는 피 없는 성례이다. 그러나 내<영>적으로는 구약 시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피의 성례이다. 그리고 또한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이 상징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성례를 7개로 늘렸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에 <견진성사, 고해성사, 서품성사, 혼례성사, 종부성사>를 추가시킨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이 추가시킨 성례들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고자하였다. 그리하여 견진성사의 근거를<행8:17;14:22;19:6> <히6:2>로 하였고, 고해성사의 근거를<약5:16>로 하였고, 서품성사의 근거를<딤전4:14> <딤후1:6>하였으며, 혼례성사의 근거를<엡5:32>로, 종부성사의 근거를<막6:13><약5:14>로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서 전혀 타당성이 없는 억지였다. 로마 교회는 트렌트회의<Council of Trent> 이전에는 추가된 다섯 개의 성례가 사도들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라고 거짓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트렌트회의를 통하여 그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라고 사기 쳤다. 이러한 저들의 거짓과 사기극은 로마 카토릭 신학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었으며 사실상 로마 교회는 성례의 숫자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성례는 성경적일 때에 성례로 인정될 수 있으며 성례가 성경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되어진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정하여 주신 성례는 오직 두 가지로서 세례와 성찬이다. 따라서 세례와 성찬 이외의 것들은 모두 성례가 아니다.

3) 신구약의 성례 비교

(1) 신구약 성례의 본질적 일치

로마 교회는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로마 교회는 옛 언약의 의식 전체와 구약의 성례들 모두를 신약의 그것에 대한 모형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성례가 이룩한 성화는 내적인 것이 아니고, 다만 법적인 것으로서 미래에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거하여 인간에게 수여될 은혜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이 구약의 성례에 어떤 내적인 은혜도 전혀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약 시대에서와 같이 이 은혜가 성례 그 자체에 의하여 초래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 성례에 예표 된 은혜의 완전한 실현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하여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은 선조림보<Limbus Patrum>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성례는 객관적인 효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성례는 그 의식을 통하여 참여자를 성화시키지 못하며, 다만 참여자 자신의 작용을 통해서<믿음과 사랑으로 받을 때> 만성화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고전10:1-4>에서 사도 바울은 신약의 성례의 본질적인 요소가 구약의 교회에 기인한 것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롬4 : 11>에서는 아브라함의 할례를 믿음의 의<義>에 대한 인침이라고 선포한다. 또한 성례들은 같은 영적인 실재들로 나타난다. 신약과 구약의 성례의 명칭들이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할례와 유월절이 신약 교회에 대해서도 사용되어지고 있고<고전5:7><골2:11>, 세례와 성찬이 구약 교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고전10:1-4>.

(2) 신구약 성례의 형식적 차이

신약과 구약의 성례가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한편 차이점도 무시할 수없다. 성경은 그에 대한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① 이스라엘에서 성례는 은혜의 상징과 인침으로서의 영적인 의미 외에 국가적인 의식으로 사용 되어졌다.

② 성례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다른 많은 상징적인 규례들 <성례와 일치하는 제사 규례와 정결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약에서는 오직 성례만이 존재한다.

<3>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장차 누리게 될 은혜를 인치는 역할을 하는 반면 신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의 제사를 기념한다.

③ 구약의 성례에 따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신약의 성례들을 신실하게 받음으로서 지금 얻는 은혜보다 적었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증거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차별이 아니라 다만 시대적인-어쩔 수없는-상황이었다.>

3. 성례의 필요성.

로마 카토릭 교회는 세례가 구원받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세례 받은 후에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는 반드시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므로 신자들의 의무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성례를 기피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성례가 필수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나 그것이 구원의 절대적 필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이지 어떤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신학적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다양하게 증거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형식만을 통하여 자신의 은혜를 전달하지 않으며 <요4:21,23><눅18:14>, 구원은 오직 믿음만을 통하여 이루어지며<요3:36;5:24;6:29><행16:31>, 성례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믿음이 받아들여진 곳에서 시행되어지고<행2:41;16:14,15,30,33><고전11:23-32>, 아브라함 이전 시대의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 우편 십자가상의 강도는 성례와 무관하게 구원 받았다.

4. 세례

1) 세례의 정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의식으로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의 의를 갖는다.

(1)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대한 보증이며
인침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사 하신 은혜 언약의 보증과 인침으로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할례를 주셨다. 할례가 피의 의식이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피를 예표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피를 통한 인류의 죄 사함에 대한 하나님 언약의 보증이며, 인 치심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희생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심으로 더 이상의 피의 의식이 요구되지 않게 되었으므로 피의 의식이었던 할례도 보다 더욱 완성된 성결의식으로 완성되어야 했던바 그것이 곧 세례였다. 세례는 피의 의식으로부터 자유 하는 동시에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됨으로서 그 완전성과 영원성을 보장받는 하나님 은혜 언약의 보증이며 인침이 되는 것이다.

(2) 세례는 구원의 표징이다.

인류 구원은 인간의 어떤 조건이나 방법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원의 완전성과 영원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보증되어진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특성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보증에 의하여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보장을 받는 것이다. 세례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언약에 대한 내적, 외적 표징이다. 수세 자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되어지는 외적인 세례의식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장받으며, 세례 시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내적 정결함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정립하게 된다.

(3) 세례는 하나님 은혜의 방편이다.

수세자는 세례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적용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 카토릭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수세자는 세례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외적<법적, 행정적>으로 적용받으며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각종 은혜를 내적으로 적용받는다. 따라서 일생에 단 한번 시여 받는 세례의식이며 또한 그 순간에는 깊이 느끼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리고 또한 그때의 감동을 나중에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세례의식을 통하여 하사 되어지는 하나님의 내적, 외적 은혜는 참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 세례는 삼위 일체 이름으로 시행되어지는 성례 의식이다.

세례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당연히 신적 권위를 갖으며, 또한 거룩성과 영원성과 완전성을 갖는다. 세례가 단 한번으로 영원하며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인간들에 의하여 시여되어짐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신성한 것은 인간의 이름으로 시여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오직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천명하시고 자기를 통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께 갈 수없다고 단언하시며 오직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선포하시면서도, 세례에 대하여서는 자기 이름으로 시행하게 하지 않으시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라고 하신 것은, 이와 같은 세례의 신학적 의의 때문이었다.

(5)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는 법적, 행정적 성례 의식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는 법정적, 행정적 절차의식으로서 그 효력에 있어서 영원불변의 특성을 갖는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는 세례와 관계없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였으며, 또한 세례와 관계없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제정하여 시행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 어떤 변동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의 불완전한 믿음 때문이다.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수시로 확인 받으면서도 때때로 그 사실을 망각하고 불안해하며 필요 없는 근심을 하게 된다. 그러한 그들에게 있어 세례는 특별한 보증이며 안심을 주는 확증이다. 그들은 자신이 세례 받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안심하며 평안을 얻는 것이다.

(6) 세례는 성도들에게 신앙적 삶을 요구하는 성례 의식이다.

세례는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는 법정적, 행정적 의식으로서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한 신분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기도 한다. 수세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할 사명적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보다 활발하고 본격적인 교통을 하게 되는 거룩하고 신성한 성례의식이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의 성례의식이다. 세례를 받기 이전의 하나님의 자녀와, 세례를 받은 이후의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상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나, 상태와 사명적 차원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세례 받기 이전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응석받이 어린아이와 같은 차원일 수 있으나, 세례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충성 봉사하는 사명적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세례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 자녀들의 사명적 삶은 결국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신앙적 삶이 수반됨으로 그들이 신분상으로만 거룩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거룩한 의인적 삶이되기 때문이다.

(7) 세례는 성도들을 정결하게 하는 성례의식이다.

성도들은 세례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내적, 외적 상태를 정결하게 씻음 받는다. 세례 시에 사용되는 물은 성도의 외적 상태를 정결하게 씻는 것이요, 이때에 성도의 내면 상태<영적인 상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정결하게 씻음 받게 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요한의 선포는 세례의 본질에 대한 엄숙한 선포이다. 요한의 물의 세례는 외형적인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하나의 정결의식에 불과하다. 같은 이유에서 수세 시에 사용되어지는 물은 수세자의 외적 상태를 정결케 하는 상징적인 의식에 불과하며 또한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상징하는 의식에 불과하다. 때문에 물을 붓거나 뿌리거나 하는 외적 양식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의 본질은 세례 시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있다. 성도의 수세 시에 성령께서는 그의 내면<영>을 정결하게 씻으시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적 상태가 되게 하신다. 요한은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약 시대의 제사에 비추어 불로 태운다는 개념으로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이러한 역사하심이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완전하게 정결케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신분적인 차원에서의 정결케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 원리는 하나님께 중생의 은혜를 입은 자의 영적 상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기독교 세례와 일반 세례의 구분.

(1) 일반 종교의 결례의식

기독교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 분명하지만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서 유추할 때에 전혀 새로운 종교적 의식은 결코 아니었다. 애굽인, 파샤인, 인도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적 결례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와 헬라의 종교들은 보다 더 세련된 종교적 결례의식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적 결례의식들은 대개의 경우 물을 뿌리는 의식들이었지만, 때로는 바다에서 목욕하는 식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터툴리안<Tertullian>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그들은 특히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그러한 결례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바울이 가르친 기독교의 세례가 신비적 종교들의 입교의식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신비적종교의 입교의식과 기독교 세례의 근본적인 차이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주장이다. 종교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신비적 종교의 입교의식은 그들의 신들에 대한 순종의 맹세가 포함되어 있으나, 반면에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결례를 행하는 일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신비적 종교에서 추앙되고 있는 신들의 영적 영향력이 그 결례의식에 어떤 연관을 이룬다는 사실도 전혀 확인 된바가 없다. 그들의 입교의식은 다만 하나의 종교적 입교의식의 범주를 초월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또 다른 많은 종교학자들은 기독교의 세례의식이 <타우로볼리움-taurobolium-여신에게 황소를 바치는 의식으로서 근동 일대에서 성행하였다.>의식에서 유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 역시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의식들은 유럽 시대의 제사의식과 어떤 유사점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전하고 가르친 기독교의 세례의식과는 전혀 비교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유대인들의 결례 의식

유대인들에게도 많은 정결 규례들과 씻는 의식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성례적인 성격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의 표징이나 인침은 아니었다. 이방인들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는 할례를 받아야 했으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물로 씻는 의식<세례>을 행했다. 이러한 풍습이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유행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의 논란이 있지만, <슈에러-Schuerer> 박사는 미쉬나를 인용하여 그것에 대한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월-Wall> 박사가 그의 저서<History of Infant Baptism>에서 인용한 유대의 권위 있는 학자들의 문서들에 의하면 이 세례는 두, 세 증인 앞에서 시행되었으며 이 세례를 받은 자들의 자녀들은 정결하다고 인정되어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가 세례 받지 않은 상태 하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적령자<남자13세, 여자12세> 이전에는 아버지의 요청에 의하여 세례를 받게 되고, 적령자 이후에는 본인의 요청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세례도 역시 일종의 결례<입교>적 의식이었을 뿐 기독교의 성례 와 같은 성격의 의식은 아니었다.

(3) 요한의 세례

학자들 중에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가 이와 같은 이방인들의 입교적 세례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주장이다. 요한의 세례와 이방인들의 입교적 세례 사이에 어떠한 역사적 관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요한의 세례는 결코 이방인의 입교적 세례와 같은 차원에서 인식할 수없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회개>의 세례로서 영적 전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결례의 목적은 의식을 통하여 이방인들의 불결함을 제거함으로서 그들을 유대 공동체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에 요한의 세례는 세례를 받는 자를 새로운 영역 즉 하나님의 자녀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일반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신분으로 전환되는 기독교의 성례의식에 대한 대 전제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관계이다. 구<舊>루터파 신학자들은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목적과 효력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주장한 반면 일부 후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양자의 동질성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개혁파 신학자들의 입장도 루터파와 같이 양분되어 있다. <트랜트 회의>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요한 세례의 효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의 효력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면서, 요한의 세례는 구약의 성례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예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은 진정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들의 주장은 진리이다. <행19장>의 세례에 대한 사건은 이러한 진리를 보증하고 있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여러 세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계속되어진 주장이다. 현대 신학에서 이러한 주장은 특히 계속되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벌코프> 박사도 그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목적론에 있어서는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임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준비의 세례였다.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계속하여 회개<준비>를 선포하고 있고 자신의 세례는 다만 물로 씻는 의식적인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영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세례와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는 요한의 세례가 일반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신분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준비의 회개였지 실제적으로 전환시키는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음을 밝히 증거 하는 것이다. 벌코프 박사는 요한의 세례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의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라 하여 모두가 동일하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은 상대가 누구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명의 본질과 범위가 다른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도들이 받은 사명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신 사명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범위에 있어서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세례라 할지라도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본질적으로도 다르고 범위와 효력에 있어서도 전혀 다르다. 이미 밝힌바 있듯이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행19장>으로 보증하고 있다. 만약에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본질에 있어서나 효력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었다면 사도들은 그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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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쉬나<הנשׁט-mishnah> <영-mishnah>

미쉬나는 반복<反復>, 교훈<敎訓>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율법학자들의 구전<口傳>이며, 통상적으로 해설을 집성한 탈무드의 본문을 말한다. 주해의 부문을 <게마라>라고 하며, B.C.70-220년 경에 생존한 랍비들의 토론 문서를 통하여 작성되었다. 랍비들의 율법에 대한 토론들은 처음에는 일반적인 토론이었지만, 그것을 후대에 전해야한다는 명분에 의하여 문서화되었고, <탄나임>이라는 학자 의 노력에 의하여 계속적인 집성이 이루어졌으며 <유다.하나시-A.d.135-220>, 랍비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막7 : 3-15>의 <유전>은 미쉬나를 말한다.

3) 기독교 세례의 제정

기독교의 세례는 일반 종교의 의식적 결례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의 세례는 부활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례는 일반 종교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영적 결과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

(1) 세례의 제정

기독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제정하셨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로서의 충만한 권위로 세례를 정하셨으며 그 세례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선포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 : 18-20>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 : 15-16>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에 의한 이 선포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

① 제자들은 온 세상에 나아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약속된 구세주로 고백하게 하여야한다.

②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살아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표징과 인 치심으로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한다.

③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의 사역에 대한 지배를 받아야하는바 곧 복음의 선포와 새로운 언약의 신비와 특권과 의무에 관한 가르침을 배우고 또한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2) 세례의 형식

사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εις το ονομα του πατρος και του υιου και του αγιου πνευματος> 세례를 주도록 명령 받았다. 벌게이트<Vulgate>는 첫 번째 단어들인 <이름으로>라는 <εισ το ονομα>를 <in nomine-이름으로>라고 번역하였고 루터는 그것을 따라서 <in namen>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이 언어 들은<삼위적 하나님의 권위로>를 의미하였다. <-의 권위로>라는 개념은 <εντω ονομαπ>나 또는 보다 더욱 짧게<εν ονοματι>라는 어구로 표현되고 있다<마21 : 9> <막16 : 17> <눅10 : 17> <요14 : 26> <행3 : 6 ; 9 : 27>. 전치사<εις-안으로>는 오히려 어떤 목적을 나타내며 따라서 <-관하여> 또는 <어떤 사람을 믿거나 또는 어떤 사람에게 진지하게 순종하는 것을 고백하려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알렌<Allen> 박사는 마태복음을 주석하면서 이와 같은 해석법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그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된다.> 이와 같은 해석법은 타이어<Thayer>,로빈슨<Robinson>, 크레머, 쾨겔<Cremer-Koegel>, 발욘<Balijon> 등등의 학자들도 사용하고 있고 마이어<Meyer>, 알포드<Alford>, 알렌<Allen>, 브루스<Bruce>, 크로샤이데<Grosheide>, 반류덴<Van Leeuwen> 등의 주석가들도 역시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의 이러한 의미는 <εις τον Μωυσην-고전10 : 2> <εις το ονομα ΙΙαυλου-고전1 : 13> <εις εν σωμα-고전12 : 13> <εις Χριστον-롬6 : 3 , 갈3 : 27>과 같은 병행적 표현에 의해 완전히 입증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전치사<에이스>를 번역함에 있어서 <안으로> 혹은 <에-관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이름<ονομα>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쇔-משׁ-이름>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쇔>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는 모든 자질들을 의미하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 자들이 갖추어지기를 원하시는 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이즈만<Deissman>은 자신의 저서인 <성경연구-Bible Studies, p. 146>에서 <ονομα>라는 단어가 고대 파피루스문서에서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되어진 사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할 때에 세례의 형식은 세례를 통하여 <세례가 상징하는 것을 통하여>, 수세 자가 신적인 자기 계시 또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하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계시적 요구에 따라 살아야할 의무와 책임을 갖게 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3) 사도들의 세례 형식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에 대하여 선포하실 때에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지 않고 다만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였다<행2 : 38 ; 8 : 16 ; 19 : 5> <롬6 : 3> <갈3 : 27>. 사도들의 이러한 세례로 인하여 세례의 형식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초대 교회시대의 어떤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성을 주장하였다. 또 어떤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 일체 하나님을 대표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삼위 일체 이름으로의 세례는 디다케 <Didache-12사도의 교훈>이 기록되었던 <A.D100>에 이르러 이미 모든 교회들에서 정식적인 세례로 시행되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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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를 고찰해 보면 한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현대에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초대 교회시대에 사도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교회는 언제나 <마28 : 19>의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쫓아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해야한다는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하여 더 이상의신학적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세례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례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위하여서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 되어야 완전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세례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오직 유일한 중보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게 하지 않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게 한 근본 원인은, 그것의 영원성과 완전성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신적 권위에 의하여 시행되어져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들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지 아니하고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여하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였을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초대 교회 당시의 신학적 경륜 안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당시의 사도들에게는 사실상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학적 정립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유일한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하나님과 자신을 하나로 일치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통하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셨다. 이미 밝힌바 있듯이 디다케가 성립될 무렵 교회들로 하여금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게 하신 것이다.

4) 역사적으로 본 세례의 교리

(1) 초기 기독교.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세례를 교회에 들어가는 의식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세례가 통상적으로 죄의 용서와 새 생명의 전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례가 영혼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로는 보지 않았고 다만 갱신과정의 완성적인 요소로 간주하였다. 초대 교회시대에는 유아 세례를 시행하지 않았으며 세례는 일생을 통하여 한번만 받아야하였고 반복해서 받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2세기가 지나면서부터 세례에 어떤 신비한 효능이 존재한다는 사상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어거스틴은 유아들의 세례에 그 효능이 자동적으로 발휘되어진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세례 받지 못한 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아직 믿음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과 관계없이 세례의 효력이 발휘되지만, 성인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그는 세례가 원시적인 죄책을 제거하지만 본성의 부패를 완전하게 제거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처음에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지지하였지만, 나중에는 어거스틴의 견해에서 이탈하여 세례는 언제나 믿음과 관계없이 다만 의식을 통하여 그 효능이 발휘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학 사상 속에서 세례란 중생과 교회입문의 절대적 성례 의식이라는 로마 카톨릭의 세례에 대한 개념이 성립 되었다.

(2) 로마 카토릭.

로마 카토릭은 세례에는 세례가 상징하는 은혜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 은혜는 거부하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수여된다고 주장하였고, 이 은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세례는 교회의 회원으로서 받는 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표징을 주기 때문이며,

② 세례는 원죄의 죄책과 세례 받는 시점까지 지은 모든 죄<자 범죄 포함>에 대하여 자유 함을 주며, 욕심은 여전히 남는다 할지라도 죄의 오염은 제거되어지고, 따라서 영원한 형벌과 현세에서의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되며,

③ 세례는 성화시키는 은혜를 주입시킴으로써 영적인 갱신을 이루며 초자연적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형성시킬 뿐만 아니라,

④ 세례는 받는 자로 하여금 성도의 교통 안으로 들어오게 하며 유형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한다.

(3) 루터파 교회.

루터파의 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루터는 세례 시에 사용되는 물을 보통의 물로 생각하지 않고 그 물이 본래적으로 신적인 권능을 가진 말씀을 통하여 은혜로운 생명의 물, 중생의 씻음이 되는 물로 변환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말씀이 지닌 이와 같은 신적인 효과를 통하여 성례는 중생을 유발한다고 믿었다. 루터는 성인들의 세례는 수세자의 믿음에 의하여 효력이 발생하고 믿음이 정립되지 않은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어린이들에게 믿음을 일으켜준다고 주장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문제에 대하여서 사실상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 후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유아의 믿음<하나님께서 주입시키시고 조성하여 주신>을 세례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루터파 신학자들은 세례가 유아들에게 그와 같은 믿음을 즉각적으로 일으켜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세례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자동적으로 발생되어진다는 신학사상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의 합법성을 부인하고 거부함으로서 루터가 안고 있는 고민적 난제를 풀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 중에서 유아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받게 하였으며 그것을 재 세례라고 하지 않고 정상적인 최초의 세례라고 주장하였다. 재세례파의 개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의 권속이 될 수 없었다.

(4) 칼빈주의 교회.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세례란 신자들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며 새로운 삶을 이루어내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화시키는 것일 뿐이라는 신학사상 위에서 세례론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유아들이 어떻게 신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그들이 믿음을 표시할 수없는데 어떻게 영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난관에 직면하였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은 단순하게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은 언약의 후손들이므로 당연히 신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며, 또한 영적인 강화는 세례 시에 단번에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또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언약의 자녀들은 가정적으로 이미 중생되어진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들이 부모에 의하여 세례 받으려고 교회에 나올 때 이미 중생되어졌다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 삶을 사는 부모와의 가정적 삶을 통하여 그들이 중생된 자로 성장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립하였다. <세례는 우리에게 물을 뿌리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에만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서도 효과를 내는 것이다-제34조>

(5) 세례에 대한 오류적 개념들.

인본주의적 개념 하에 있는 신학자들은 세례란 외적인 언약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문제에서 자유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세례의 개념은 현대 교회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소시니안파, 알미니안파, 재세례파, 합리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현대 교회들 중에는 세례의 영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경우가 많다. 세례가 신적 은혜의 인침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그것을 사람 편에서 단지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신학 풍조가 현대 교회의 보편적인 실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5) 세례의 올바른 양식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제정하여 주셨지만 세례의 양식에 대해서는 제정하여 주시지 않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례의 양식을 제정하여 주시지 않았는지에 대한 참된 진리를 깨달아야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양식을 제정하여 주시지 아니한 것은 세례란, 그 외형적인 양식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내적인 것에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세례가 시행되어져야 하는 과정들의 특수성을 고려하셨기 때문이다. 세례는 성도들에 대한 법적, 행정적 인침이며 또한 성도들을 향한 법적 요구가 수반되어 있는 것이지만 성도들을 정결케 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성도들의 정결은 외형적인 어떤 양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내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외적인 양식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양식을 제정하여 주시지 않으신 것은 교회가 세례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그 양식에 어떤 의의를 두고자 하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건축 양식에 대한 제정을 하지 아니하신 원리와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양식을 제정하여 주지 아니하신 또 다른 이유는 세례가 시행되어지는 과정의 다양함이다. 일반적으로 세례는 교회 안에서 시행되어지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전쟁 시, 또는 성도의 갑작스런 임종시>에 세례를 시여하여야 하는 경우가 있다. 세례가 교회 안에서 시행되어지게 될 때에는 세례를 위한 준비가 있을 수 있음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세례를 시여해야 할 특별한 경우에는 사전에 아무런 준비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경우에 세례의 양식이 고정되어 있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며 때로는 세례를 시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특히 오직 침례가 유일한 세례의 양식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그 침례의 양식 때문에 세례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모든 점을 고려하시어 세례의 특별한 양식을 제정하여 주시지 않으셨고, 어떠한 경우에도 세례가 자유롭게 시행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것이 세례의 올바른 양식이라고 함부로 편협하게 고집하지 않아야한다. 물에 완전히 담그거나, 물을 뿌리거나, 물로 씻거나 하는 외적 양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외적 양식은 자유롭게 하되, 반드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할 것이며, 세례의 의의를 충분히 교육하고 세례를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다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세례의식을 거행함으로 그 세례의식이 거룩하고 신성할 수 있게 하면, 그것이 곧 올바른 세례양식이 될 것이다.

6) 세례의 합법적인 시행자들

로마 카토릭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사제의 부재로 인하여 세례를 받지 못함으로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여 비상시에는 다른 사람들도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특히 조산원들의 세례시행을 허용하였다. 카토릭 교회는 심지어 이단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며, 또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면 그것을 합법적인 세례로 인정하였다. 개혁 교회에서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 같은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여 가르치는 장로, 곧 목사가 유일한 세례 시행자라는 원리를 세웠다. 개혁 교회는 또한 로마 카토릭이나 다른 교파들의 세례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종파의 세례는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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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 교회에서 오직 목사만이 세례를 시여할 수 있다고 제정한 것을 목사들의 만행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사 이외의 사람<장로, 강도사, 전도사>들도 세례를 시여할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목사들에게만 세례의 시여권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목사들의 만행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위한 것이었다. 만약에 장로나 강도사, 전도사들이 세례를 시여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진다면 과연 교회의 질서가 존재하겠는가?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어떤 예외 규정을 두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별한 경우 <전쟁이나 갑작스러운 임종> 등등의 경우에, 그리하여 목사가 전혀 달려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일반 성도<물론 세례를 받은>라 할지라도 세례를 시여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을 두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 규정은 매우 엄격하게 제정되어야한다. 그것은 반드시 절대적 상황의 특별한 경우로 제한되어야 하며, 또한 그러한 특별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세례를 강력하게 요청하지 않는 자에게 함부로 세례를 시여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본인이 세례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할지라도 세례가 구원의 필연적 조건이 아니므로 반드시 세례 받지 아니하여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어, 그가 세례 없이 안심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강력하게 세례를 요청하는 경우에 한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세례를 시여하는 엄격한 규정을 두어야하는 것이다.

7) 세례의 적당한 수령자들

세례는 적절한 자격을 갖춘 이성적인 존재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신앙적 교육 하에 있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시여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로마 교회는 한 때 시계<時計>나 건물들에게 세례를 시여함으로, 세례의 본질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오류를 범하였다. 세례를 받는 자들은 성인과 유아의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1) 성인 세례

성인들의 경우에는 신앙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막16:16><행2:41;8:37;16:31-33>. 교회는 수세자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여야하며 수세자의 신앙고백에 의심이 가는 어떤 분명한 증거가 없다면 그의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그에게 세례를 시여하여야한다. 라바디에파<Labadist>는 밀실<密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마음의 밀실> 이라고 하였으며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의 밀실>에 들어가서 신앙고백을 하게 하였으며 사제들이 성도의 마음의 내적 상태를 판단하여 그 고백의 진위성을 분별 한 후에 세례를 시여 하였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내적 상태를 분별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뿐 이시며 사람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있지도 아니하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2) 유아 세례

① 유아 세례의 역사적 근거

A. 개혁 교회의 신조

a. 벨기에 신앙고백은 제34조에서 신자들의 자녀들도 <이전에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받은 약속에 의하여 할례를 받았듯이, 부모에게 주어진 언약에 의거하여 세례를 받고 인침을 받아야한다.>고 선언한다.

b.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어린 아이에게도 세례를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 왜냐 하면 어린이도 어른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에 속하여 있고, 그리스도의 피로써 그들도 죄에서 구원을 받고,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성령이 어른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도 언약의 표시로서의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목되어서 불신자의 아이들과 구별되어야한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할례에 의하여 구별이 된 것과 같다. 이 할례 대신에 신약 성경에서는 세례가 제정된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c. 도르트 신조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들어있다. <신자의 자녀들은 선천적으로가 아니고 그들의 부모와 함께 받고 있는 은혜 언약에 근거하여 거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는 이 세상의 생활에서 그들을 유년 시절에 불러내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자녀들을 또한 택하시고 구원 하실 것에 관하여 의심할 것이 전혀 없다-창17:7-행2:39-고전7:14>.

B. 개혁주의자들의 견해

칼빈은 믿는 부모들의 유아들 또는 단지 한편만이 믿는 부모의 유아들은 언약 관계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는다고 말한다<기독교 강요 제4권 16:6,15>. 16 세기와 17 세기의 개혁파 신학자 대부분은 이와 같은 칼빈의 견해에 뜻을 같이 한다. 그들은 신자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격이란 <그들이 언약 안에 있기 때문이며 중생뿐만 아니라 칭의와 새롭게 하시고 성화시키는 성령의 감화 등 모든 복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풍부한 약속의 후사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이와 같은 논리에 만족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가 약속의 인<印> 침, 곧 모든 언약상의 약속 이상의 것이며 미래의 선<善>에 대한 인<印> 침임과 동시에 현재의 영적인 소유에 대한 인 침임을 강조하였다. 유아 세례에 대한 논쟁은 19 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네델란드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그들은 아직도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네델란드 지역은 아직도 알미니우스주의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 카이퍼<Kuyper> 박사에 의하여 세례는 가정적 중생<presumptive regeneration>에 근거하여 유아들에게 시행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견해는 오랫동안 유아 세례에 대한 근거로 인정받았으나, 역시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았다. 카이퍼 박사의 제자인 호닉<Honig> 박사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는 가정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섭리에 근거하여 신자의 자녀에게 세례를 시여한다. 신자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하여 세례를 받아야한다. -Handbook van de Gereformeerde Dogmatiek, p.655>

C. 유아 세례의 역사적 근거

월<Wall>은 그의 저서 <유아 세례의 역사-History of Infant Baptism>에서 개종자의 세례에서는 개종자의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증거 한다. 그러나 에더사임<Edersheim>은 이 점에 대하여 반대한다.<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II, p. 746> 그러나 종교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개종자들의 세례에 그의 자녀들이 포함되었음이 분명하게 증거 되어지고 있다. 유아 세례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인 언급은 2 세기 후반의 저서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유아 세례에 대한 언급은 이레네우스<Ireneus>의 저서를 통하여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중생되는 모든 사람들, 즉 영아들과 소아들, 소년들, 청소년들과 노인들을 자신을 방편으로 하여 구원하려고 오셨다.-Adv. Haereses II, 22,4> 이러한 기록이 세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신학자들은 그의 이 기록 속에서 당시에 유아 세례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 하면 초기의 교부들은 세례를 중생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세례> 대신에 <중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유아 세례가 2 세기 후반부에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터툴리안과 오리겐의 저서들을 통하여 확인된다. 터툴리안은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오리겐은 찬성하였다. 오리겐은 유아 세례가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진 전통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사도들에게서 유아들에게까지 세례를 주라는 전통<명령>을 받았다.-Comm. in Epist .ad Romanos, lib V> 칼타고 회의<The Council of Carthage, A.D.253>는 유아 세례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단순히 그들이 생후 8일 이전에 세례를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만을 논의하였다. 2 세기 이래로 유아 세례는 때때로 그 실행에 있어서는 소홀함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시행되어져왔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어거스틴은 유아 세례가 사도의 권위로서 제정된 것이라는 교회 회의의 공식적인 결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 세례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아 세례는 재세례파가 등장하여 그것을 반대할 때까지 아무런 이의 없이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② 유아 세례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명시적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분명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유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다.

A. 아브라함의 언약은 주로 영적인 언약이다. 그러나 이 언약은 국가적 성격도 아울러 띠고 있다. 이 영적인 언약의 표징과 인침은 할례이다. 이 언약을 세 개의 다른 언약들 가운데 두 개를 구성하는 것으로 나누는 침례교의 방식은 타당성이 없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몇 차례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을 언제나 단일한 언약으로 말한다<출2:24> <레26:42> <왕하13:23> <대상16:16> <시105:9>. 이러한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 이 언약의 영적인 성격은 이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약의 해석 방식에서 입증된다<롬4:16-18> <고후6:16-18> <갈3:8,9,14,16> <히8:10;11:9,10,13>. 그리고 할례가 명백히 영적인 의미를 가진 의식<신10:16;30:6> <렘4:4;9:25-26> <행15:1> <롬2:26-29;4:11> <빌3:2>이었다는 사실과, 언약의 약속이 복음<갈3:8>으로까지 불렸다는 사실에서 또한 추정된다.

B. 이 언약은 지금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서 현 시대의 <새 언약>과 본질로서 동일한 것이다. 두 시대 사이의 연속성과 통일성은 중보자가 동일하다는 점에서<행4:12;10:43;15:10,11> <갈3:16> <딤전2:5-6> <벧전1:9-12>, 그리고 믿음이 또한 동일하다는 점에서<창15:6> <시32:10> <행10:43> <롬4:3> <히2:4> <히11장>, 은혜의 복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곧 칭의<시32:1,2,5> <사1:18> <롬4:9> <갈3:6> 중생<신30:6> <시51:10>, 영적인 은사들<사40:31> <욜2:28,32> <행2:17-21>, 영생<출3:6> <히4:9;11:10> 등등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날 회개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향하여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며<행2 : 39>, 바울 사도는<롬4 : 13-18> <갈3 : 13-18>에서 율법의 수여가 약속을 폐하지 못하므로 약속은 새 시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포한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맹세로 확증된 것이므로 신약의 신자들은 이 약속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고 증거 한다<히6:13-18>.

C. 유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언약의 유익을 나누어가졌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할례를 상징적인 것으로 받았다. 성경에 따르면 언약은 분명히 유기적<有機的>인 개념으로서 언약의 실현은 유기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러한 국민적 개념은 구약 시대에는 매우 보편적인 것 이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개념이 이스라엘 국가가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언약이 이른바 영화<靈化>되어 신약 시대로 전이 된 후,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나라<國家>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마21:43> <롬9:25-26> <고후6:16> <딛2:14> <벧전2:9>. 유아들은 옛 세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언약이 갱신될 때에도 언제나 동석했으며<신29:10,13> <수8:35> <대하20:13>, 이스라엘의 회중 안에서 자리를 차지했으며, 종교적인 회중에도 동석했다<대하20:13> <욜2:16>. 한편 <사54:13> <렘31:34> <욜2:28>에 나타난 풍부한 약속에 근거해 볼 때, 이 어린이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감소되었다든지, 또는 교회 안에서 그들이 차지할 위치가 없다든지 하는 개념은 있을 수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도 이들을 배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마19:14> <행2:39> <고전7:14>.

D. 새 시대<신약 시대>에 들어오면서 할례는 신적인 권위에 의하여 세례로 대치되었다. 은혜 언약에 들어오는 상징과 인의 역할을 이제는 세례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할례가 그 자체로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행15:1-2;21:21><갈2:3-5;5:2-6;6:12,13,15>. 세례가 할례의 자리를 대신 이어주지 않았다면 신약에서는 언약에 입문하는 의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할례를 세례로 대치하셨다<마28:19-20> <막16:15-16>.
세례와 할례의 영적인 의미는 같은 것이다. 할례가 죄를 끊고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지칭하듯이<신10:16;30:6> <렘4:4;9:25,26> <겔44:7,9>, 세례도 죄 씻음<행2:38> <벧전3:21> <딛3:5>과 영적인 갱신을 상징한다<롬6:4> <골2:11,12>. 특히 <골2:11-12> 본문은 할례를 세례와 연관시키면서 그리스도의 할례<곧 육신의 할례가 상징하는 마음의 할례>는 세례<곧 세례가 상징하는 내용>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가르친다<참조-갈3:27,29>. 그러나 어린이들이 옛 시대의 언약의 표지와 인을 받았다면, 그들은 분명히 새 시대에서도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구약의 경건한 자들은 더 풍성하고 더 완전한 시대를 대망하도록 약속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을 언약으로부터 제외시키려면 명시적인 성경적 증거가 필요한데 성경은 오히려 반대로 증거하고 있다<마19:14> <행2:39> <고전7:14>.

③ 유아 세례에 대한 반대.

침례교파를 비롯한 유아 세례 반대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유아 세례를 반대한다.

A. 할례가 세례를 예표 한 것이 아니었다.

할례는 단순히 육체적이고 예표적인 의식이었으므로 할례, 그 자체는 자연적으로 없어질 운명이었다. 따라서 세례를 할례의 위치에 놓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의식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그와 같은 육체적인 의식은 신약의 교회 안에서는 합법적인 자리가 없다. 예수께서 제정하신 세례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다만 성령의 세례만이 교회 안에서 차지할 자리가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은 물세례로부터 성령 세례로 전이 하는 과정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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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장은 세대주의자들인 불링거<Bullinger>, 오,헤어<O,Hair>등에 의하여 제기된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상 유아 세례 뿐만 아니라 성인 세례까지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변증되어진다.

a.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보증이며 인침으로서 세례에 대한 예표였으며, 따라서 만약에 세례로 완성되지 않았다면 폐지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교회에 존재하는 성결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는 피의 의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심에 따라 피로부터 자유 함과 동시에, 영원하고 완전한 성결의식인 세례로 완성되어지게 되어 있었다. 즉 할례는 사라지거나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세례로 완성되어진 것이다.

b. 할례를 단순한 육적인 의식으로 간주하고 세례<특히 성령 세례>를 영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할례와 세례를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구약 시대를 육적인 시대로 간주하고 신약 시대를 영적인 시대로 간주하여, 두 시대를 육적인 시대와 영적인 시대로 대립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구약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역사는 신약 시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구약 시대에도 당연히 포함된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할례는 단순히 육체적인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성결의식이었다. 즉 이방인<선택 되지 아니한 자들>과 신분적으로 구별되는 법적, 행정적 정결의식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영적인 성결의식이었던 것이다. 신약 시대의 세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대한 법적, 행정적 구별 의식임과 동시에 또한 영적인 성결의식이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순종의 서약인 것과 같이, 할례도 동일한 효력과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c. 사도행전이 물세례로부터 성령 세례로 전이하는 과정을 증거하고 있다는 저들의 주장은 참으로 비성경적이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가 종료되어지고 성령 세례가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 되는바,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비신학적 수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여 주신 세례가 사도들의 시대에서 이미 종료되어진다는 발상 자체가 저들의 신학적 무식함을 자증하고 있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의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것으로서 임시적일 수가 없는 영원성을 갖는다. 이러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세례를 시행하라고 명령하신 것<마28 : 19-20>을 통하여 증거 되어진다. 그리고 사도행전 어느 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종료되어진다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도 자신들의 신학적 무식함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세례가 아니다. 물은 다만 세례 시에 사용되어지는 의식적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되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세례인 것이다. 세례가 신성하고 거룩한 성례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물세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례이기 때문이다.

B. 성경에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명시되지 않았다.

성경에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것이 명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시행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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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유아 세례에 대하여 명시한 바가 없다는 이유로 유아 세례를 시행하는 것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저들은 오히려 성경에 유아 세례를 주지 말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유아 세례 금지를 유추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유아 세례 찬성을 유추 할 수 있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할례가 생후 8일 만에 시행되어진 것이 그 좋은 증거이다.

C. 성경에 유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전례가 없다.

신약의 사도 시대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램버트<Lambert> 박사는 모든 가능한 증거들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신약의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유아 세례는 사도 시대에 일반적으로 유행하던 관습이 아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The Sacraments in the New Testament, p. 204> 이러한 신학적 유추는 당시의 유대교 풍습<어린이를 과소평가하는>을 통해서도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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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전례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저들의 주장은 결국 저들의 성경을 보는 안목이 얼마나 좁은가? 하는 것을 자증한다. 우선 저들은 신약 성경에 유아들의 세례가 제외되었다는 사례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도처에서 유아세례의 당위성들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가정적 구원을 선포했을 때<눅19 : 9>와 사도 베드로가 가정적 구원을 선포했을 때<행2 : 39>에 그 선포에서 어린 아이들이 제외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이다. 왜냐 하면 유대 사회가 어린 아이들을 과소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전혀 제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할례의식과 자녀들에 대한 종교적 교육을 통하여 분명하게 입증되어진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은 가족적 세례를 증거하고 있는데<행16 : 15, 33> <고전1 : 16>, 이 가족적 세례에서 어린 아이들이 제외되었을 것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종교적 삶에 근거할 때에 전혀 비상식적이다.

D. 유아들에게는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만한 능력이나 믿음이 없다.

유아들에게는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 만한 능력이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세례를 시여할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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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들에게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 만한 능력이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세례를 시여할 수없다는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성인들의 세례 역시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만한 능력이나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성인들의 세례 문답 시에 그들이 질문에 충실하고 분명하게 대답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정말로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만한 능력이나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는 성인들 중에도 세례의 제도를 분명하게 이해할만한 능력과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결여되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유로 유아 세례가 거부되어져야만 한다면 성인 세례도 신중을 기하여야한다.

E. 유아들에게는 과연 중생하여 세례의 상징하는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할 수없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 그들이 성장하면서 과연 중생하여 세례의 상징하는 은혜대로 신앙적 삶을 살고 있는지를 분간할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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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장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유아들에게 과연 중생하여 세례의 상징하는 은혜가 존재하는지를 분간할 수없기 때문에 세례를 시여할 수없다면, 그렇다면 과연 성인들에게서는 그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인가? 교회에서 세례를 시여하기 전에 하는 문답은 사실상 외형적인 것이다. 물론 응답자는 진심으로 대답하겠지만, 그것은 어떤 경우에 일시적일 수도 있으며 형식적일 수도 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모양으로 중생의 은혜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은 비 진리적인 것이다. 사람에게 중생의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사람에게는 그것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F. 유아들에게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지적인 신앙고백과 참다운 회개가 없다.

유아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세례를 받을만한 지적인 신앙고백과 참다운 회개를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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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 역시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주장이다. 저들은 부패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하여 참으로 무지하다.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을 소유할만한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며 인간은 오히려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조차도 때로는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지적인 신앙고백과 온전하고 참다운 회개가 세례를 받는 전제 조건이라면 우리는 사실상 세례를 받을 수없으며, 그러한 지적인 신앙고백과 온전한 회개를 통하여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세례가 무효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생 동안 수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세례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거룩하고 신성한 성례의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G. 유아 세례를 받은 자들이 장성하여 참다운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아 세례를 받은 자들 중에 장성하여 온전한 신앙적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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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 역시 중대한 모순을 억지로 외면하고 있다. 교회가 유아 세례를 시여함에 있어서 부모의 신앙이 요구되고 또한 부모의 신앙적 교육이 전제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유아 세례의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인간의 장래는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보장할 수없으며, 특히 그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것은 비록 부모라 할지라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도 교회를 떠나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시여하는 것은 사실상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고 시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다만 수세자가 하나님의 자녀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에게 세례를 시여하는 것이다.

④ 유아 세례에 대한 신학적 정립

성인 세례가 그들의 신앙고백이나 회개를 전제 조건으로 하여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시행되듯이, 유아 세례도 부모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교육을 전제로 하여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시행되어진다. 만약에 세례가 신앙고백과 회개를 전제로 하여 시여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무관한 것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하나님과 그들의 관계가 언약과 무관한 것이 된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보장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장되고 인 침 받지 못한 구원은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확실한 보장과 인침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표징인 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하여 시여됨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한 성례의식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유아 세례라고 하여 그 본질에 어떤 차등이 있을 수없다. 유아 세례는 성인 세례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나 효력 면에 있어서 전혀 차등 없이 동등하며, 그 의의에 있어서도 물론 당연히 동등하다.

8) 세례의 오류.

(1) 침례교파의 오직 침례.

침례교파들은 다른 교파와 입장을 달리하여 수세 자를 물에 완전히 침수시켰다가 일으키는 것이 유일한 세례의 양식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아예 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침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교파의 세례를 약식 침례<또는 약식 세례>라고 말하고 자신들의 침례만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옹립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① 용어의 문제

저들은 용어 자체가 세례가 아니라 침례라고 주장한다. 저들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세례를 준다>는 용어가 <βαπτω> 또는 <βαπτιζω>로서 그것은 곧 <담그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βαπτιζω>>라는 말은 <βαπτω>의 강조형 또는 반복형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용법에서 이 단어는 반드시 구별되어 사용되지는 않는다. <βαπτω>는 종종 구약에서 사용되지만 신약에서는 단지 4회만 나온다<눅16:24> <요13:26> <계19:13>. 그러나 신약의 이 용어들은 기독교의 세례를 의미하지 않는다. 침례교파는 한때 이 동사가 오직 <담그다-dip>라는 의미로만 사용되어진다고 주장하였지만, 근래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주장을 할 수없게 되었다. 왜냐 하면 그들의 최대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칼손<Carson>이, 이 용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담그다' 라는 의미 외에 부차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즉 염색하다, 물들이다(dy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담가서 물들이다-dye by dipping) 또는 (어떤 방식으로 물들이다-dye in any manner)를 의미하게 되었고, 그 경우에 이 단어는 양식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Carson Baptism in its Mode and Subjects, pp.44 ff.>

한편 <βαπτιζω>라는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제정하실 때 사용한 용어로서 성경에 76회 나온다. 학자들은 <βαπτιζω>라는 용어가 <βαπτω>의 기본적인 의미에서 유래되었는가? 아니면 부차적인 의미에서 유래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는다. 칼손 박사는 이 용어가 <담그다>라는 의미로서 <βαπτω>에서 유래되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어근 (βαπτω)가 두 가지 의미 즉 담그다 또는 물들이다 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단 한 가지 의미만을 주장해왔다. 이 단어는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에 근거되었고 결코 부차적인 의미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 입장은 이 단어가 언제나 담그다를 의미하며 결코 양식(mode) 이외의 어떤 것을 결코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Op. cit., p. 55>

그러나 그 단어들은 고전적 헬라어와 신약적 헬라어에서 칼손 박사의 주장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 분야에서 가장 박학<博學>한 학자라고 할 수 있는 게일<Gale> 박사는 칼손 박사의 입장을 지지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칼손 박사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칼손 박사의 허구적인 주장을 입증하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윌손<Wilson> 박사는 자신의 탁월한 저서인 <유아 세례-Infant Baptism>에서 칼손 박사의 저서에 부분적으로 답변하면서 게일 박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마도(βαπτιζω)라는 말은 어떤 것을 반드시 물 속에 집어넣는 행위를 나타내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물속에 잠기든지 아니면 그 위를 물이 덮던지 간에 그것은 사실상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실로 물 속에 넣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고 가장 통상적인 방법이므로 그렇게 표현하게 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윌손이 연구 조사한 헬라어 용법에 의하면 세례가 다양한 방법으로 시행되어질 수 있음이 입증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세례는 재료로 그 대상을 둘러싸게 하거나, 또는 재료가 물인 경우에는 그 대상을 물에 담그거나 물을 붓거나, 물로 덮거나, 어떠한 방법으로 행했던지 간에, 헬라어 용법으로는 그 어떤 방식들이 합당한 세례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이어서 <βαπτιζω>가 신약에서 언제나 침수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βαπτιζω>가 오직 담근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또 다른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도 입증 된다-참조<Armstrong..., The Doctring of Baptism><Seiss....The Baptist System Examined><Ayres....Christian Baptism><HIBBARD....Christian Baptism>

<βαπτω>와 <βαπτιζω>는 씻다, 목욕하다, 씻음으로서 정결하게 하다, 등등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정결의 의식이 때로는 뿌림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했다는 사실이 성경을 통하여 입증되고 있다<민8:7;19:13,18,19,20> <시51:7> <겔36:25> <히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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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성경이 <βαπτω>와 <βαπτιζω>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졌음을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들이 오직 완전 침수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침례만을 주장하는 침례 교파들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성경을 해석할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였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아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마저 거부하는 악행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가 오직 침수였다는 주장.

침례교파는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가 모두 침례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며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침례 교파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A.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시행하였을 때에 그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침례를 행할 수 있었겠는가?

B.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을 때
<행2: 41> 과연 그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침례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C. 성경의 어떤 구절에 완전히 침수하는 침례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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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증거 하는 세례의 시행<행9:18;10:47-48;16:22-33>들은 그것이 침례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들은 침례<완전 침수>보다는 오히려 세례<뿌리거나, 붓거나, 씻음>일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직 침례였다고 주장하는 침례 교파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책망 받아 마땅하다. 왜냐 하면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을 위한 신학적<진리>의 사수가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사수하기 위한 아집과 궤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③ 신학적 의미.

오직 침례만을 고집하는 침례 교파들은 오직 침례의 당위성을 침례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성립시키고자 한다. 저들은 물 속에 완전히 잠기었다가 나오는 것을 죽음과 부활에 연관시킨다. 즉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세 자가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죽는 것이요, 수세 자가 물 속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학적 주장 외에 저들이 주장하는 오직 침례에 대한 또 다른 신학적 주장이 있다. 그것은 정결하게 씻는 것은 완전침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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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같은 저들의 주장에 우선 크게 한번 웃고자 한다. 물 속에 완전히 잠기었다가 나오는 것이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은 문학적 표현은 될 수 있겠으나, 그것이 신학적 원리가 될 수는 없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주장하려 한다면 차라리 땅속에 묻었다가 꺼내는 형식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을 것이며, 아예 십자가에 매달았다가 내려오게 하는 형식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 더욱 실감나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오직 완전침수만이 정결하게 씻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참으로 전 근대적인 발상이다. 옛날에는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식의 목욕<그러나 얼굴은 나와 있었다.>을 즐겨 행하였음으로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깨끗하게 씻는 다는 것은 반드시 물속에 완전하게 잠겨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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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침례교파의 만행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세례의 신학적 진정성을 정립하기 위하여, 오직 침례를 고집하는 저들의 악행을 성경에 근거하여 비판하고자 한다. 저들은 타 교파의 세례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정식으로 침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타 교단에서 입교한 자들에게 침례를 시행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재 세례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들의 재 세례 행위에 대한 것을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 한다.

1. 재 세례 행위에 대한 역사적 사건들

재 세례 문제는 이미 역사적으로 비판되어지고 정죄되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그 역사적 사례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고찰하기로 한다.

1) 노바티안<Novatianus-A.D200?-258?>의 사건

A.D.3 세기경 로마의 황제 데시우스<Decius-재위249-251>의 박해가 끝났을 때, 그 엄청난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고백자-Confessor>라는 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은 반면에,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신앙을 포기한 자들은 <배교자-apostat> 혹은 <변절자-lapsed>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가 끝났을 때에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신앙을 포기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크게 후회하고 다시 교회에 들어오기를 희망하였다. 당시에 그 문제를 위임 맡아 처리하게 된 책임자는 칼타고의 감독이었던 씨프리안<Cyprianus>과 고백자의 이름을 얻은 노바티안<Novatianus>이었다. 씨프리안은 교회의 특성과 세례의 본래적 의의를 근거로 하여 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교회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노바티안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노바티안은 변절자들이 교회에 다시 들어오려면 마땅히 회개한 후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세례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는데, 결국은 노바티안이 패하였다. 당시의 로마 감독이었던 코넬리우스<Corneilus>는 노바티안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노바티안은 이에 맞서서 대항하였지만 결국은 정죄 당하였다. 노바티안은 이에 불만을 품어 추종자들을 이끌고 교회를 떠났다. 이 때에 교회 회의의 결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된 세례는 한번으로 충분하며 따라서 변절자들은 회개하는 것으로 족하다.>

2) 도나투스<Donations> 사건

A.D.4 세기경 당시에 칼타고의 감독직에 선출된 카이실리안<Caecilianius>이 감독직 안수를 받을 때, 세 명의 안수자였던 감독들 중에 하나가 변절자였기 때문에, 그의 감독직이 무효라는 주장이 도나투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도나투스는 변절자 감독이 다시 세례를 받은 후에 카이실리안을 다시 안수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나투스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변절자 감독은 다시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카이실리안도 감독직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이 때의 교회 회의 결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여된 세례는 단 한번으로 영원히 유효 하며, 따라서 변절자 감독은 개인적으로 회개하면 된다.

3) 디오니시우스<Dionysius> 사건

디오니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재직할 때에 어떤 성도가 찾아와 자신이 이단자에게 세례를 받은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하면서 다시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때에 디오니시우스는 그에게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는데, 그 성도는 자기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하였다. 디오니시우스는 다시 그에게 지금까지 성찬에 참여했느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디오니시우스는 그에게 <세례는 세례를 시행한 자에게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 것이며, 또한 지금까지 성찬에 참여하였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어 돌려보내었다. 물론 다시 세례를 베풀어주지 않았음은 두말 할여지도 없다.

4) 16세기 개혁자들의 사건

16세기 종교 개혁의 와중에서 로마 카토릭에 의하여 세례 받은 것은 이단자들에 의하여 받은 세례이므로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그레벨<Conrad Grebel>, 만즈<Felix Manz>, 홉마이엘<Balthasanius Hubnaier> 등등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과격파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모든 개혁주의자들로부터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특히 쯔윙글리는 그들과의 공개 토론을 벌여 그들의 비 진리적 신학 사상을 신랄하게 공격하였으며, 시정부로 하여금 재 세례를 주고받는 자들에게 엄벌에 처한다는 경고를 선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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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재 세례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 속에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그때마다 한결같이 거부되어졌고 무시되어졌으며 오히려 이단자로 정죄되었다. 재 세례에 대한 주장이 무시되고 정죄된 이유는 언제나 같은 논리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수여된 세례는 수여자의 신학과 신앙 여부에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또한 함축하게 된다. 즉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세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잘못하셨다고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완전성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파괴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수여하신 세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다시 침례를 주는 행위는 감히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거부하는 악행으로서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다함께 용서 받을 수 없는 대죄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2) 세례의 양식에 대한 성경의 증거

성경은 세례가 오직 완전 침수와 같은 침례의 형식으로 시행되어져야 한다는 어떤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된 역사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경 어느 곳에서도 침례의 당위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침례만을 고집하는 침례교파는 사실상 신학적으로 대단히 무지한 자들이며 신학교에서 교회 역사조차 살펴보지 아니한 무식한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더욱 자신들의 재침례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어떤 대죄를 범하는 것인지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는 자들이 무슨 염치로 신학자 또는 목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와 악행에 대한 철저한 회개부터 한 후에 남을 가르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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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침례교파의 오직 침례에 대한 주장 중에 참으로 웃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을 접하게 된다. 1988년 침례교 목사<김충기>는 재 침례의 당위성을 <행19:1-7>을 근거로 하여 제시 하였다. 사도들이 그때에 잘못된 세례에 대하여 재 침례를 시행하였으므로 자신들의 재 침례는 당연히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저들의 주장에 대하여 일단 웃지 않을 수없으며 저들의 어리석음과 신학적 무지 앞에 저들을 불쌍하게 보지 않을 수없음을 고백한다. <행19:1-7>에 나오는 사건은 잘못된 세례에 대한 재 침례가 아니라 아직 요한의 세례 밖에 모르는 자들에게 정상적인 세례를 시여한 것으로서 재 침례를 시행한 것이 아니라, 첫 세례를 시여한 것이다. 저들이 억지를 부린다는 사실은 저들의 주장에서도 증명된다. 저들은 본래부터 요한의 세례를 침례로 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세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요한의 세례가 어떤 이유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이 침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에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밝힐 수가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을 밝힐 만한 신학적 지식과 경륜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행19:1-7>을 근거로 하여 자신들의 재 침례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를 들어내는 망신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19:1-7>은 결코 저들의 재침례에 대한 당위성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그 성경 구절은 신학자가 아닌 일반 성도들이 보아도, 그리고 신학적 차원에서 깊이 상고해 볼 필요도 없이 간단한 내용을 증거하고 있다. 즉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한 <요한의 회개의 세례만 받은> 자들에게 세례를 시여한 사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재침례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으니 그러고도 망신을 안 당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저 무식하고 무례한 재침례자들을 향하여 회개할 것을 선지자적 차원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5. 성만찬<성찬>

1) 구약시대에 있는 성만찬의 전형

구약 시대에 기독교 세례의 전형인 할례의식이 있었듯이 또한 기독교 성찬의 전형인 유월절의식이 구약 시대에 있었다. 물론 유월절의식 이외에도 제사를 마치고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관습들이 있었지만, 특히 유월절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의식에 대한 예표였고 전형이었다. 유월절 의식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제정하심에 따라 시행되어진 식사<食事>였다. 그러나 유월절의 본래적 의의는 식사의 범위를 초월하는 제사의식이었다. 유월절 의식은 특히 최초의 속죄의 제사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완전한 대속죄제의 예표였고 전형이었다.<출12 : 27 ; 34 : 25>.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유월절 의식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난과 그 고난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죄로 인한 고통과 그 죄로부터의 영원하고 완전한 자유를 예표 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식사와 관련하여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의식의 요소들을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의식을 성만찬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승화시켰다.

2) 성만찬에 대한 역사적 교리

(1) 종교 개혁 이전.

사도 시대에도 성찬의 거행에는 애찬이 뒤따랐다. 이때에는 애찬을 위하여 성도들이 음식을 준비해왔는데, 이 애찬이 처음에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신앙적 애찬이었으나 나중에는 변질되어 성도들 간에 위화감을 주는 것이 되었으므로 바울 사도로부터 책망을 듣게 되었다<고전11 : 20-22>. 초대 교회시대에 애찬을 위하여 가져온 음식들은 봉헌물과 희생 제물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사제가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서 이 봉헌물을 축복하였다. 이러한 관례 속에서 성찬은 사제가 드리는 희생제사로 정착되어져갔고, 성찬 시에 사용되는 요소들은 사제의 감사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것으로 성별되었다. 일부 초대 교부들<오리겐, 바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은 성례의 상징적인<영적인>개념을 유지하려 했고, 또 다른 교부들<시릴, 닛사의 그레고리,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모종의 방법을 통하여 성례의 빵과 포도주에 연합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성찬론의 실제적인 발전을 오랫동안 지연시켰다. 그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하면서도 상징과 상징이 의미하는 것을 구별하였고 본질의 변화를 믿지 않았다. 그는 악인은 비록 빵과 포도주를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성찬의 기념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이르러 어거스틴의 기념설은 점차 화체설로 대체되었다. 주후 818년에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가 정식으로 화체설을 제기하였으나,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와라트람누스<Ratramnus>에 의하여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이론은 아직까지 화체설이라는 정식 명칭으로는 정립되지 않았다. 이 교리를 화체설이라는 명칭으로 공식화 한 것은 힐데베르트<Hildebert of Tours, 1134>였다. 11 세기에 투어의 베렌가리우스<Berenger of Tours>, 랑프란크<Lanfranc> 사이에 이 문제로 인한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랑프란크는 <그리스도의 몸 그 자체가 사제의 손에 쥐어져서 쪼갬을 당하고 신자들의 이 사이에서 씹힘을 당한다>고 화체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랑프란크의 주장은 거부되었고 화체설이 성찬의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힐데베르트는 이 교리에 화체설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고, 이 명칭은 공식 명칭으로 인정되었다. 이 교리는 1215년 제4차 라테란<Lateran>회의에서 정식으로 채용되었고, 트렌트 회의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공식화되었다. 트렌트 회의는 화체설을 여덟 장과 열 한 규범으로 공식화하였다. 화체설<化體說-transubstantiation>이란 성찬 시에 빵과 포도주가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으로서 그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고 실재적이고 본질적으로 성례에 임재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는 사실은 그가 본질적이고 성례적으로 몇몇 장소들에 동시적으로 임재 하셨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봉헌의 말씀들에 의하여 떡과 포도주의 실체(substance)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온전하신 그리스도는 각 미사용 요품들(빵과 포도주)아래 또한 각 요품들 중의 각 조각들 아래 임재 한다. 성체의 한 조각을 먹는 자는 각기 그리스도 전체를 받는다. 그는 성체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communicant)이 요품들을 받기 이전에도 그것들에 임재 하신다.>

(2) 종교 개혁 동안과 그 이후.

종교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로마 카톨릭의 제의적 성찬론과 화체설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성찬론은 동일하지 않았다. 쯔윙글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 시에 육체적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면서 성찬 제정의 말씀을 하나의 비유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성찬을 기념적인 의식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례 안에서 그리스도가 신자의 믿음에 대하여 영적으로 임재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한편 루터는 쯔윙글리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성찬을 제정한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찬 시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 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화체설에는 반대하였고, 따라서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공재설은 오캄<Occam>이 자신의 저서 <제단의 성례에 관하여-De Sacramento Altaris>에서 장문<長文>으로 변증한 것으로서 그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찬시에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와 “함께, 안에, 그리고 그 밑에(in, with,andunder) 임재 하신다.>

한편 칼빈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쯔윙글리와 마찬가지로 성례 시에 그리스도께서 실체적으로 임재 한다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쯔윙글리와는 달리 성찬에서 주의 임재는 비록 영적이지만 실재적인<real> 임재임을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영적인 <덕과 효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성찬을 하나의 의식으로 보지 않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자녀들의 신앙고백이며 감사의 기념적인 의식으로 보았다. 반면에 소시니안 주의자들과 알미니안 주의자들, 그리고 메노나이트파<Mennonites>는 성찬이 다만 하나의 기념행사요 신앙고백 행위이며 도덕적 증진을 위한 방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통속적인 것으로 발전하였다. 슐라이에르막허는 성만찬이 은혜의 방편이며, 이 방편에 의하여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교제가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으로 교회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에 많은 중재파 신학자들<Mediating>은 자신들이 루터파 교회에 소속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재설을 거부하고 칼빈주의 견해를 지지한다.

3) 성만찬에 대한 성경적 명칭들

세례는 단일한 명칭이지만 성만찬은 4개의 명칭을 갖는다.

(1) 주의 만찬<성만찬-δειπνον κυιακον>

주의 만찬은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성찬 용어로서 <고전11:20>에서 비롯되어진다. <고전11:20-22>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성찬에 애찬을 연결하여 남용하는 것을 책망하면서, 성찬시의 애찬과 일반적인 애찬<당시에는 부자들이 만찬을 개설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그 만찬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기보다는 부자들의 자기과시용 잔치였다.>을 구분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주의 만찬은 그러한 부자들의 자기과시용 잔치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주의 상<床-τραπεζα κυριου>

이 명칭은 <고전10:21>에 나오는 명칭이다. 고린도의 이방인들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후에 둘러앉아서 제사음식을 나누어먹는 관습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 이러한 관습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바울 사도는 그러한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바울 사도는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여 그 음식을 나누어먹는 것과, 성찬 시에 애찬을 나누어 먹는 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3) 떡을 떼는 것<κλασις του αρτου>

이 용어는 <행2:42>에 나온다. 이 용어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할 때에 성만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찬까지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용어가 성찬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명칭은 주께서 제정하신 바에 따라 떡을 뗀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4) 축사<ευχαριστια> 축복<ευλογια>

이 명칭들은 <고전10:16;11:24>에 나온다. 한편 <마26:26-27>에서도 주께서 떡을 떼 사 축복하시고, 잔을 가지고 사례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볼 때에 이 두 단어는 상호 교대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축복과 축사를 함께 지칭하고 있다. 축사와 축복의 잔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4) 성만찬의 제정.

(1) 성찬 제정에 관한 다양한 설명들.

성찬 제정에 관한 기록은 공관 복음서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고전11장>에 한번 나오는 것을 포함하여 도합 4번 나온다. 요한은 유월절의 먹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새로운 성례의 제정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 성찬에 대한 기록들은 각각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서로를 보완하고 있다. 성찬의 제정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식사 도중에 그것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은 사실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유월절 식사의식을 통하여 이미 제정되어진 것의 완성적이며 승화적인 것이었다. 어린양과 함께 먹었던 떡은 새로운 용도를 위하여 성별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축복의 잔>으로 부리는 세 번째 잔이 완성된 성례에서 두 번째 요소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이와 같이 구약의 예표적 이고 상징적 이었던 성례가 아주 자연스럽게 신약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례로 완성되고 승화되었던 것이다.

(2) 성찬의 요소들

유월절 양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모든 피의 제사와 같이 유월절 양은 피 흘림이 죄 사함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구약의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대속죄제를 예표하고 상징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념하는 국가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어린양이 출현하여 완전하고 영원한 피의 대속죄제를 드리게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상징과 예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원형에게 자리를 내주고 은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유월절에 먹었던 어린양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떡<예수께서 자신의 몸이라고 선언하신>으로 승화되어졌다. 어린양은 피의 제사를 의미하지만 떡은 피의 제사를 초월한다. 그것은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제사를 종료시키는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것이므로 더 이상 피의 제사가 요구되지 않을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찬 시에 반드시 포도주를 사용할 이유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도주를 사용하시면서 그것이 자신의 피라고 선언하셨다고 해서 성찬 시에 반드시 포도주를 사용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피의 의미인 어린양이 피로부터 초월한 떡으로 승화되었듯이 피를 의미하는 유월절 의식의 포도주가 이제는 피로부터 초월하는 것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주를 사용하신 것은 그것이 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음료수가 포도주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포도주가 여전히 피의 의미를 가져야한다면 떡도 마찬지로 여전히 피의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일반적인 떡이 아니라 반드시 어린양이어야 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자신의 피라고 선포하셨던 의미를 붉은색의 포도주에서만 찾으려한다면, 이것이 내 몸이라고 선포하신 떡은 잘못인용 된 것이다. 그것은 어린양으로 사용되어졌어야 한다. 따라서 성찬 시에 사용하는 <잔>은 반드시 포도주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물이던 또는 다른 색의 음료수이던 관계없이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라는 사실을 명심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죄제는 더 이상의 피의 제사를 종료시켰고, 따라서 피의 요소가 속성은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피 없는 요소로 완성되고 승화되는 것은 이미 제정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인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대속죄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있던 담이 사라져버렸고, 구원의 복이 온 세상에 적용되었다. 따라서 민족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유월절 의식이 민족주의와 전혀 관계없는 차원의 성례로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며 선포이기도 한 것이다.

(3) 성찬의 시행과 용어의 의미

① 상징적 시행

성찬의 제정에 관한 모든 기록들은 <떡을 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떡을 떼는 일이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이 찟길 것을 상징한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개혁주의자들은 성찬 시에 집례자가 떡을 떼는 일을 수찬 자들 앞에서 시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면전에서 떡을 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떼신 후에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그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주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잔에 포도주를 부은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잔>을 나누는 일은 성례의 필수적인 요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윌링가<Wielingar> 박사는 오히려 떡이 떼어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잔>도 수찬 자들이 보는 앞에서 집례자가 잔에 부어야한다고 주장한다.<Ons Avondmaals Formulier, pp. 243 f.> 수찬 자들이 보는 앞에서 집례자가 떡을 떼는 일이나 잔에 붓는 시행은 성찬의 올바른 시행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의 시행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성찬과 교회의 성찬은 상황과 입장이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성찬으로서 소수의 인원 이었지만 교회의 성찬은 많은 성도들의 성찬이다. 따라서 집례자가 모든 성도들에게 일일이 떡을 떼어주고 잔을 부어준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성찬의식 제정에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직접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고 잔을 부어 주었으나 반드시 집례자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찬을 거행 하도록 제정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장차 교회의 성찬이 많은 인원에 의하여 거행 될 것을 고려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미리 떡을 나누어 놓고 잔을 부어놓는 현행의 성찬은 합당한 것이다 .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를 성찬의 재료로 사용하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에서 어떤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한다. 그러나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에서 어떤 영적인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신 것은 그때가 유월절이었으므로 누룩 없는 떡이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포도주 역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는 보편적인 음료수였기 때문이지, 그것들에 어떤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예표적이고 상징적이었던 성례를 완성되어진 실제적 성례로 선포하신 이상, 그리고 또한 그것들을 자신의 <몸과 피>라고 선포하신 이상 우리는 완성된 실제의 성례 속에서 성례의 의의를 찾아야한다. 우리가 아직도 성례의 요소들에서 성례의 의의를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그 성례가 완성된 실제의 것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미완성적인 것으로 원형에 대한 상징적이며 예표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어떤 떡과 음료수를 사용하라고 명령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한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실제의 성례에 있어서 성례의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례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 시에 누룩 있는 떡과 다른 종류의 음료수나 물을 사용하여도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찬의 요소들에 대하여 반드시 포도주만을 고집하려한다면 떡도 누룩 없는 떡을 반드시 사용하여야 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어린양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찬 자들은 반드시 비스듬히 누워서 성찬을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당시의 식사 관습에 의하여 비스듬히 누워서 떡과 잔을 받았기 때문이다.

② 명령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의 시행과 함께 말씀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 명령을 주시면서 육체적인 먹음 뿐만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소유하라고 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눅22 : 19>의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는 것에서 증거 되어진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의 본질은 외면하고 전혀 엉뚱한 차원에서 해석하여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찬이 다만 기념 식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6:32,33,50,51> <고전11:26-30>의 증거들을 근거로 할 때에 성찬은 기념이상의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만 기념정도의 것이라는 주장은 성찬의 제정 과정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에 대한 선포들을 근거로 할 때에 무시되어질 수밖에 없다. 성찬이 기념 의식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중보자로서의 구원 사역>을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잔과 관련된 말씀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떼신 뒤에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마시라>고 명령하셨다. <누가복음>은 그것을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고 증거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잔이란 <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잔에 담긴 내용물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잔 그 자체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떡<그리스도의 몸>과 잔<그리스도의 피>를 영적으로 공유하는 성례의식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은 오직 사제들에게만 허용된다는 잘못된 성경 해석에 의하여 일반 성도들에게 <잔>을 허용하지 않는 로마 카토릭 교회의 성찬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③ 설명의 말씀

A. 떡에 대한 설명

떡에 관련된 명령의 말씀 뒤에는 설명의 말씀이 뒤따른다. 이 말씀에 있는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표현이 심각한 논쟁을 야기 시켰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다양하게 해석하였다.

a. 로마 카토릭은 <이니라-is>를 연사<連辭-명제命題의 주사主辭와 빈사賓辭를 맺어 부정 또는 긍정의 뜻을 나타내는 말>적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의도는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그것이 비록 떡일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고려해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이고, 따라서 전혀 연사를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토릭이 화체설을 옹립하기 위하여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자체적으로 모순이 된다. 화체설과 부합되는 해석은 차라리 <이것이 지금 내 몸이 되어지고 있다>가 될 것이다.

b. 칼스타트<Carlstaadt>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키셨다는 기발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중성 “투토”<τουτο-“이”>가 남성 “알토스”<αρτος-“떡”>를 언급할 수없다고 주장하면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떡은 사물이기 때문에 중성으로 언급될 수 있으며 당시의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고려할 때에 그러한 주장은 매우 유치한 것이다.

c. 루터와 루터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추론하면서도 <이니라-is>에 연연한다. 그들에 의하면 비유는 하나의 은유가 아니라 제유법<提喩法-synecdoche-일부로서 전체를 보이고 전체로서 일부를 보이는 법>이었다. 그들의 개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그 떡을 가진 곳에는 너희가 그것 안에, 밑에, 함께 내 몸을 가진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자 하나님의 육체적 편재성에 대한 불가능적인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d.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은유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선포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6:35> <내가 참 포도나무요-요15:1> 등등의 선포와 같은 것으로서 이미 제자들의 귀에 익숙한 내용의 선포이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떡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쯔윙글리의 주장을 거부하고, <떡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자비를 인치고 영적인 자양분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말씀 이외에 <너희를 위하여 주는> 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준다>는 선언은 곧 하나님의 모든 자녀<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대한 메시야적 선포이다.

B. 잔에 대한 설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선포를 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눅22:20> 이 선포는 새로운 언약의 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출24:8>에 언급된 옛 언약의 피에 대한 철저한 대비이다. <출24:8>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고 예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를 위하여>라는 선포와 <새로운 언약의 피>에 대한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죄제를 의미하는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에 대한 구속의 선포인 것이다. 이러한 성찬의 의미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 이니라-고전11:26>에서 결론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대속죄제에 대한 영원한 기념적 성례의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성례의식인 것이다.

5) 성만찬에서 표징 되고 인 쳐진 일들

(1) 성례가 의미하는 것들

성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감각적이고 외적인 상징들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들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의 외적인 상징에는 가시적인 요소들뿐만 아니라, 떡을 떼고 잔을 붓는 일, 먹고 마심으로서 떡과 잔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는 것, 성도들과 친교 하는 것 등등이 포함되는 바, 이러한 것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상징한다.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 예표 된 인류 구속의 실제가 신약의 성례에 사용되는 요소들을 통하여 명확하게 표현된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또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등과 같은 성찬 제정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희생죄제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치루어지는 희생적 대속죄제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②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한다.

성찬을 시행할 때에 성찬 수찬 자들은 성찬의 상징적인 것들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또한 받아먹는다. 이와 같은 성찬 참여는 비유적으로 해석할 때에 수찬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로 먹고 마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롬6 : 8>고 선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하실 때에 자신들의 죄와 함께 같이 죽은 것이다.

③ 성찬은 성도들의 새로운 생명을 상징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사실은 곧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부여됨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롬6:8>고 선포함과 동시에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6:7>고 선포하고 드디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전5:17>이라고 선포한다.

④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성찬 시에 수찬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들이 곧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가 선포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들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결국 성령의 역사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과 영원히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⑤ 성찬은 성도들 상호 간의 연합을 상징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그들은 성찬 시에 같은 떡을 떼고 같은 잔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을 확인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사랑과 우의를 다짐하는 친교를 갖게 된다.

(2) 성찬이 인치는 것들

성찬은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인<印>침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대단히 피상적인 성례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성찬을 단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고백의 표식<badge>으로만 간주한다. 그러나 성례의 두 가지 특성인 표식과 인침은 서로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하나의 상징성으로서의 성례는 계시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보증이며 인침이다.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요리문답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리스도는 이 보이는 표징과 보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확신케 하려고 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그를 기념하는 이 거룩한 표지를 받는 것과 같이 확실하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고난과 죽음과 순종들이 마치 우리 자신들이 우리 자신의 인격 안에서 우리 죄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확실히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이러한 가견적 표징들과 보증에 의해 우리들에게 확증시키려고 의도하신다.-Lord`s Day, 29 Q.79>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에 주목하여야한다.

① 성찬은 참여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인 쳐준다. 이러한 사실은 성찬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자기 포기의 실재를 증언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임을 확신시켜 주기도 하는 것이다.

② 성찬은 믿음으로 참여하는 수찬자들에게 구속 사역의 모든 완전함에서 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약속해주며, 또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약속들과 복음의 모든 풍성한 은혜가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로서 그들의 것이 되었고, 따라서 그들이 그 선물들을 요구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까지도 아울러 보증해준다.

③ 성찬은 또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한 수찬 자들에게 구원의 복이 실제로 그들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증시켜준다. 인간의 몸이 떡과 음료수를 먹고 마심으로서 영양을 공급받아 신선한 삶을 살수 있는 것처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적으로 공급받는 수찬 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영원한 영생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④ 성찬은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 인침이다. 성찬은 성례에 참여하는 자가 하는 신앙고백의 표지이기도하다. 그들은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며 왕으로서의 그리스도께 충성을 서약하며, 그의 거룩한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서약한다. 성찬은 이러한 성도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인침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한 자는 성찬의 의의적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6) 성만찬에 있어서의 성례적인 연합과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의 문제

성찬이 시행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찬에 연합하시는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음에도 신학자들 간에 일치된 견해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앞에서 이미 논증한 바 있으나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또한 개혁주의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논증하기로 한다.

(1) 로마 카토릭의 견해

로마 교회의 견해는 화체설<化體說-transubstantiation>이다. 로마 교회는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 의미>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성찬을 시행할 때에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라-hoc est corpus meum>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에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며, 다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의 말씀과 <요6:50>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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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성례적 연합 이론은 정당화 될 수없다. 우리는 저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거부한다.

① 그리스도의 실체는 물질과 연합될 수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속죄제를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으나, 그의 본질<본체>는 <영>적 실체로서 비물질적 이다. 따라서 물질과 연합될 수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세적 삶을 사는 동안에 실체적 신체를 소유하셨지만, 그 실체적 신체가 성찬 시행 시에 떡과 포도주로 변화되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변화될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과 동시에 더 이상의 인성을 소유할 이유가 없음으로 잠시 취하셨던 인성을 더 이상 소유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② 로마 카토릭의 성경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 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는 결국 성찬에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고결한 본질을 삼류 종교적인 것보다도 더욱 저급한 것으로 퇴락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인 종교는 물론이요 3류 무속적 종교들에서도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는 식의 의식은 찾아볼 수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고 마신다는 개념은 기독교의 본질을 떠나서 일반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망령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카토릭은 이 점에 대하여 크게 회개하고 각성해야 할 것이다.

(2)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의 견해는 공재설<共在說-consubstantiation>이다.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아래> 또한 <그것들과 함께>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 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 한다. 이러한 루터파의 주장 결국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 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b presence>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적, 공간적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자 하나님의 편만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저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장소적인 임재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그리하여 성찬 시에 그리스도께서 임재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시공간적인 존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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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토릭이나 루터파의 이론들은 사실상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거의 비슷한 이론이다. 그리고 저들의 이론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전제로 한다. 즉 성자 하나님께서 아직도 인성을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 진리이며 비 성경적이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성자 하나님께서는 현재 삼위 일체 하나님의 제2 위에 계심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또한 존재하시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성자 하나님의 존재는 2중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학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의 지상 사역을 종료하시고 성자 하나님의 자리에 복귀하신 것을 선포하고 있으며,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받고 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성을 취한 예수 그리스도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성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본질<본성>로서 <영>으로만 존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재적으로 임재 하느냐? 하는 것이나 또는 성찬 시에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로 변화하느냐? 하는 것들은 처음부터 아예 성립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적인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세주이신 메시야 곧 <영원한 구세주>로서 존재하신다. 그러나 이 진리를 오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성을 부인한다거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실재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그리고 인류 역사 속에 실재적으로 존재하셨으며, 또한 현재에도 실재적으로 존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시기 전까지는 실재적 실체로 존재하셨고, 그 이후에는 <영> 곧 <그리스도의 영>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조명함을 받지 못하는 일반인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의 형이상학적인 신학적 진리요, 원리이다.

(3) 쯔윙글리의 견해.

쯔윙글리의 성찬론은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상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표식<badge>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잘못 전해진 것이다. 쯔윙글리가 <성례는 단순한 기념의식으로 서신 자들이 서약하는 표지와 상징일 뿐이다>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성찬론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성찬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에 대한 인침이며 보증>이라고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주장하고 있으며, 성찬 시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 하시어 <육적으로 임재 하는 것은 거부하고> 신자들의 믿음을 돕는 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4) 개혁주의의 견해.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을 전적으로 반대하였고, 또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쯔윙글리의 성찬론을 반대하였다.

① 쯔윙글리의 견해는 성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희생시키면서 신자들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한다.

② 쯔윙글리의 견해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을,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개혁주의자들<특히 칼빈>의 성찬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의 역사, 곧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육체적으로 또는 장소적으로 성찬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몸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임재를 하시는 것이다.>

칼빈의 표현은 사실상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신비적 연합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성찬 시에 영적인 임재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는 감화가 영적이면서도 실재적인 것이라고 가르쳤다.

7)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만찬, 또는 그 효능.

(1) 성찬에서 받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표징과 인침으로 제정하신 성찬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은혜의 방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제정하셨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은혜를 받는다.

① 구원의 확신을 받는 은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소유한 성도들도 어떤 절박한 상황을 만나게 될 때에, 그로 인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때에 그들은 성찬을 통하여 믿음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다시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는 성찬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②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가는 은혜.

성도들은 성찬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함께하심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적 변화를 갖게 된다. 이러한 역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③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는 은혜.

성도들은 성찬 예식을 통하여 영적인 힘을 얻는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확인받으며,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확고히 하는 가운데 강하고 담대한 신앙적 삶을 살수 있는 힘과 용기를 공급받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2) 은혜의 역사에 대한 방식.

① 로마 카토릭의 개념.

로마 카토릭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찬 의식은 하나의 성례일 뿐만 아니라, 제사의식이다. 로마 카토릭은 성찬의 시행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희생을 강조하며,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들의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이 제사가 죄인에게 주는 공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로마 교회 당국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윌머즈<Wilmers>의 기독교 편람<Handbook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은 로마 카토릭 교회의 많은 학교들이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는 책으로서 348p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미사의 제사가 주는 열매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는 구속과 탄원의 제사로서>

A. 자연적 은총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은총까지도 전달하며.
B. 죄와 죄에 대한 형벌의 사면을 전달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공로는 미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미사의 제사를 <구속의 제사>라고 주장함에 있어서 위에 인용한 마지막 문장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공로가 오직 미사를 통해서만 미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성찬이 <사제의> 의식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그것은 결국 성찬이 <그 자체의 힘> 또는 <사제의 집례>로 인하여 효능을 발휘한다는 것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견해에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나 수찬자의 믿음 여부가 배제되고 있다. 따라서 악한 자라도 성찬에 참여하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을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② 개혁주의의 개념.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개념은 성찬이 외형적인 의식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찬은 그 의식자체가 은혜의 원인이 아니며,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성찬의 효율적인 작용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은 수찬자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당연히 요구한다. 불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을 수는 있으나, 성찬이 상징하고 인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8) 성만찬에 초대된 대상자.

(1)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자.

주님의 상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이렇게 대답한다.

<자기의 죄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그리스도 때문에 이 죄가 용서를 받으며 그들의 남아 있는 결함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가리어지는 것을 믿으며, 또한 자기들의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고 자기의 삶을 개선할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찬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즉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2)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자.

성찬은 성례로서 교회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없다. 뿐만 아니라 성찬의 참여에는 몇 가지 제한이 더욱 필요하다.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누구나 성찬에 참여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찬 참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예외 조항이 필요하다.

① 세례를 받지 아니한 성도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없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은 수찬 자들의 신앙고백을 요구한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성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한 자이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종을 고백한 자라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에 대한 판단은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그것에 대한 판단을 세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세례를 받은 자라면, 그와 같은 자격을 갖춘 것으로 인정하는 반면에,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그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② 어린이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없다.

어린이들에게는 아직 성찬에 참여할 만한 지적인 신앙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그들은 성인이 되어 교회에 참정권이 허락되어질 때까지 성찬의 참여가 보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③ 세례 받은 성도 중에도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 자가 있다.

성찬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성찬의 참여가 제한되어야 할 경우가 있다. 성도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적인 신앙상태나 또는 외적인 신앙적 삶의 형태가 온전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을 때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나 교회와의 관계 및 성도들과의 관계가 지극히 비정상적일 때에 그들은 성찬에의 참여가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전11:28-32>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사도는 수찬 자들이 성찬에 참여 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필 것을 강조한다.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나쁜 관습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면 성찬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염려하여 수찬 자들에게 자신을 살피고 분별한 후에 성찬에 참여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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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사도의 가르침은 성찬의 참여에 대한 제한적 의미도 있지만 성도들이 언제나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신앙적 상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한 교훈적 목적도 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살피고 분별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하여 제정하신 성찬에 참여할 수 있어야한다. 한편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그리고 성도들 앞에 비록 떳떳하지 못하여 성찬의 참여를 스스로 제한하여야 하는 지경이라 할지라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더 이상의 잘못을 범하지 않을 신앙적 각오를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근거로 하여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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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이 세례에 대한 신학적 의미들을 간과하고 있는 반면에 일부에서는 세례에 대한 신비주의 사상이 일어나고 있다. 일부 교파에서는 세례를 대단히 신성시하여 수세 시에 각종 특이한 의식을 행하는가 하면 거액의 헌금이나 헌물을 강요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세례를 시여하는 목회자를 높이 받들어 섬기는 풍조까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 속에서 세례 동기회 같은 모임이 결성되고 있으며 그러한 모임들을 통한 또 다른 파벌들이 교회 내에 형성되어짐으로서 교회의 하나 됨이 서서히 무너져가기도 하는 것이다.

제36장. 교회건축.

교회건축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교회에 주어진 당면 과제이다. 교회는 언제나 교회건축 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그 문제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로마의 기독교 탄압이 종료되고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교회건축이 시작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교회건축은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공존하면서 발전하여 왔다. 기독교에 자유가 보장 되어지면서 기독교는 교회건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의 위대함을 증거 하려고 하였고, 그러한 과정에 인간적인 욕심이 개입되어 갖가지 폐단이 발생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면제부> 사건을 이끌어 낸 교회건축 이었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최고의 교회건축을 하려는 야심으로 인하여 대량의 면죄부를 판매함으로서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잘 아는 현대교회 목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토릭 교회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교회 건축에 대한 비 진리적 실태를 고찰 하면서 아울러 교회건축에 대한 바른 개념을 정립하기로 한다.

1. 교회에 대한 개념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건물 자체를 신성시 하여 <성전>이라고 호칭하고 있으며, 교회 내의 각종 기물들을 또한 신성시하여 <성물>이라고 호칭한다. 교회와 교회 기물에 대한 이와 같은 개념은 구약시대 이후 지금까지 전승되어진 신앙적 개념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앙적 개념을 오류라고 지적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오류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신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은 신앙적으로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정당하지 않다. 교회 건물은 건물 자체로서 성스러운 성전이 아니며 교회 기물도 그 자체로서 성스러운 성물이 아니다. 교회 건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장소이며 또한 기도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교회의 기물들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사용 되어지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성스러운 것 즉 신성한 것은 그러한 장소와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그 자체이다. 만약에 교회의 건물이나 도구들이 신성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만지거나 또는 그것들에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 마음대로 만들거나 고치거나 할 수도 없으며, 특히 지하실이나 또는 협소한 곳들을 교회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언어행동도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건물이나 교회의 도구들을 신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약시대의 그것은 분명 신성하게 취급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물질적인 것에 신성함을 부여하지 않고 영적인 것 신앙적인 것에 신성함을 부여하셨다.<요4:20-24> 교회와 교회의 기물을 신성시하여 그것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논증 할 때에 사실상의 우상 숭배적 개념이 된다. 따라서 그러한 시설이나 도구들에게 신성을 부여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행위에 신성함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2. 교회건축 목적

교회에 대한 오류 된 개념으로 인하여 교회 건축의 목적이 오류 된 경우가 많다.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저들 중에는 <교회를 몇 개 건축 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여 그것을 자랑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자들은 <교회 하나도 건축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 앞에 갈 자격도 없다>고 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되도록이면 최고 최대 최상의 아름답고 훌륭하고 화려한 교회를 건축 하려는 열망이 아름다운 신앙으로 인식되고 그리하여 심지어는 불법 편법 위법도 마다하지 않는 교회건축 들이 도처에서 시행되어지고 있다. 과거 로마 카토릭의 <면죄부> 판매와 같은 불의한 일까지 마다않고 행하는 것이다. 저들의 이러한 오류 때문에 성도들은 심지어 사채 빚까지 지게 되며,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심한 후유증을 겪는 가운데 가정 파탄을 맞거나 또는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성도들도 있다. 그러나 교회건축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저들에게 그러한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저들에게는 오직 교회건축을 통하여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여 하나님 앞에 와 사람들 앞에 그 이름을 과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저들의 오류는 교회건축이 끝나고 입당예배 또는 봉헌예배를 드리게 될 때의 그 감격스러운 자부심과 자랑스러운 태도를 통하여 확인된다. 저들은 교회건축 과정에서 발생한 성도들의 고통과 상처 등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의 과업을 이룩했다는 감격과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으로 인하여 교계의 많은 동료들을 초청하고 크게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교회건축은 이러한 오류 적 개념에 의하여 시도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건축은 교회에 부여된 사명을 능률적으로 그리고 충실하게 완수하기 위한 절대적 필요성에 의하여 시도 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교회건축의 필요성 또는 교회건축의 목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경건한 예배를 위하여.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장소로서의 제반 기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교회가 너무 작고 좁으면 교회학교 교육을 비롯한 각종 기능을 발휘 할 수 없게 되며 예배에도 지장을 받게 된다. 또한 교회가 너무 춥거나 덥거나 또는 비가 새거나 하면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교회 주변 환경이 너무 시끄럽거나 불결하거나 또는 유흥업소들이 밀집되어 있어도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다.

2) 기관의 활동을 위하여.

교회가 성장하면 교회의 기관들도 함께 성장하게 된다. 교회의 기관들은 교회를 성장 발전시키는 중요한 부서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시키는 또 다른 하나님의 종들이다. 따라서 교회는 각 기관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원활하게 진행 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영역을 마련하여 주어야 한다.

3) 교육을 위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고 훈련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종으로 양성해야 한다. 따라서 전천후 교육시설을 구비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다.

3. 교회건축 재정.

교회가 건축비를 마련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부분 성도들의 헌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의 실정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교회 건축헌금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들과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과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성도들은 교회 건축헌금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 건축헌금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혜롭게 이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 교회는 교회 건축비를 마련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1) 건축 재정준비.

교회는 교회를 건축해야 할 절대적 필연성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교회 건축에 대한 재정을 미리미리 확보해야 한다. 교회건축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미리미리 예비함으로서 교회건축에 무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2) 자원하는 헌금.

교회는 교회 건축비를 마련함에 있어 <출25:1><대상29:5-7>을 근거로 해야 한다.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는 것에 대하여 기뻐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드리게 하며 또한 분수에 맞게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부담되는 헌금이나 강제적인 헌금을 요구해서는 안 되며 특히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교회건축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망 하면서 건축비를 적립해 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건축헌금의 유무와 액수의 차이 때문에 성도들 간에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며, 모든 성도들이 사랑과 은혜 안에서 교회건축을 통하여 단합하고 단결하는 아름다운 교회건축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3) 불법으로 건축 재정을 마련하지 않는다.

교회는 교회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흥집회 같은 것을 열어서는 안 되며, 성도들의 집을 담보로 하거나 하여 은행이나 사채업자로부터 빚을 얻어서 교회를 건축해서는 안 된다. 교회건축이 시급하다하여 그러한 방법으로 건축비를 마련하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여 오히려 교회가 크게 어려움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회건축의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았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미 아시고 모든 대책을 세워 놓으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교회를 건축 할 때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거나 할 때를 통하여 그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무리하게 서두르다가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지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교회를 건축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야 한다.

4. 교회 건축

교회는 다음과 같이 건축 되어져야 한다.

1) 무리하지 않는다.

교회 건축을 하다보면 보다 더 낳은 교회를 세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은 예산을 초과하는 무리를 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교회적 후유증이 발생하게 되며 심하면 교회건축이 중단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설계 할 때부터 욕심을 내지 말고 형편에 맞게 건축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야 한다.

2) 교회로서의 기능을 발휘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예배 위주의 기능적 교회로 건축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기관들이 업무를 수행 할 수 있는 교회적 기능이 발휘 될 수 있도록 건축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예배 위주의 교회를 건축하여 강단 위주의 교회를 건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와 같은 교회건축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건축은 교육관과 회의실 각 기관의 사무실 등등이 구비되는 건축이 되어야 한다.

3) 검소해야 한다.

교회는 아름다우면서도 검소하게 건축 되어져야 한다. 최소의 건축비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최소한의 공간을 활용하여 최대한의 실용성을 얻는> 교회건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치스럽거나 호화롭거나 하지 않아야 하며 화려하거나 거대하거나 웅장하지도 않아야한다. 외적 화려함 보다는 내적 기능을 발휘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재건축 하지 않도록 한다.

교회건축은 교회의 규모와 관계없이 범 교회적인 사업으로서 교회의 총력을 요구하는 역사적 사업 이다. 따라서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원칙 하에 설계에서부터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재건축이나 보수 보완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조령모개<朝令暮改>식의 근시안적 설계로 인하여 수시로 설계를 변경 한다거나, 또는 2-3년 안에 보수 또는 보완하여 건축비를 2중 3중으로 낭비하게 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급한 마음으로 예배위주의 교회를 건축 한 후에 교육관 기관 사무실 기도실 식당 등등을 재건축하여 2중 3중의 건축비를 낭비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교회는 불편 하더라도 그것을 감내 하면서 기다렸다가 한번에 건축하여 교회 재정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제37장. 부흥집회.

1. 부흥집회의 역사.

기독교 부흥집회의 역사가 언제 누구로부터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미 초대교회 시대부터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복음 선교과정에서 대중 집회를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감리교를 창설한 <웨슬레>와 <무디>일 것이다. 한편 한국 기독교의 부흥집회 역사는 1903년 원산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약하였던 하디<R.A.Hardie,M.D> 목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반면에 한국인 최초의 부흥사는 아마도 새벽예배를 창설한 길선주 목사일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웨슬레, 무디, 길선주 목사와 같은 부흥사들의 후예들이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는 웨슬레, 무디, 길선주 목사와 같은 훌륭한 부흥사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학, 신앙, 사명감 등등이 전혀 없는 자들이 더 많았다. 저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자신들의 유익을 챙겼고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신학적 오류와 신앙적 비 진리를 양산하였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1960년대 이후부터 등장한 사이비, 이단적 부흥사들에 의하여 극심한 신학적 오류와 비 진리적 신앙의 범람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3류 무속종교로 전락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다.

2. 부흥집회의 필요성과 중요성.

1) 복음전파.

부흥집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부흥집회의 설교는 정규 예배의 설교가 채워줄 수 없는 요소들을 채워준다. 정규 예배의 설교는 예배의 성격 때문에 시간이나 내용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으며 따라서 신앙적이기 보다는 신학적이 된다. 반면에 부흥집회의 설교는 시간적, 내용적인 면에서 보다 자유롭다. 따라서 신학적이기보다는 신앙적인 설교를 하게 되며 특히 간증을 포함한 여러 가지 예화를 적절하게 적용함으로서 복음을 처음 접하는 자들이나 신앙적인 정립이 아직 안된 자들의 감성과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흥 집회를 통하여 질병을 치유하시거나 각종 은사들을 체험하게 하심으로 그러한 역사를 실제로 체험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보고 듣고 깨달아 하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2) 신앙의 정립.

신앙생활을 꾸준히 하면서도 아직 신앙의 확신이 없던 성도들이 부흥집회를 통하여 말씀의 은혜를 받거나 또는 각종 신앙적 체험을 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인하고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게 된다. 특히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신앙이 침체되거나 또는 낙심과 절망으로 신앙적 삶에서 벗어나 있던 성도들이 부흥 집회를 통하여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한다. 때문에 교회는 주기적으로 부흥집회를 열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성도들의 신앙을 다독여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3. 부흥집회의 오류.

부흥집회가 한국 기독교 성장에 많은 발전을 준 반면에 부흥집회로 인한 폐단도 매우 심각하다. 부흥 집회로 인한 폐단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발생하였다.

1) 순수하지 않은 목적에 의한 부흥집회.

교회가 어떤 특별한 목적 하에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 있어서 교회 전체 또는 교회 지도자들의 동의를 얻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목사의 독단에 의하여 부흥집회가 열리는 것이 상례다. 저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야심과 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기 때문에 교회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의사를 전혀 무시하고 독단으로 부흥집회를 개최한다. 따라서 자신의 목적을 채워줄 수 있는 강사를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묘히 위장된 비 진리를 전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현대 기독교 성도들은 저들의 의도적인 부흥 집회 개최를 이미 알고 있다. 이제 성도들은 부흥강사의 이름만 들어도 부흥집회의 성격과 목적을 안다. 그러나 목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적 부흥집회를 강행하여 각종 물의를 일으킨다.

(1) 건축헌금을 유도하기 위한 부흥집회.

목회자들이 교회 건축헌금 작정을 유도하기 위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교회전체가 교회 건축을 열망하는 가운데 신앙적 결단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건축 헌금을 스스로 작정하기 위하여 부흥집회 개최를 촉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목회자와 일부 몇몇이 교회 전체의 의사를 무시하고 건축헌금 작정을 유도하기 위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건축헌금 작정을 유도하기 위한 부흥집회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 건축을 반대하는 반면에 목회자와 몇몇이 그것을 강행하려 할 때에 의도적으로 열리게 된다. 이때에 초청된 강사는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요란한 박수를 동원한 열정적인 찬양을 계속하는 가운데 분위기를 고취시키고, 하나님의 강복을 미끼로 하여 성도들의 감정을 자극함으로서 그들이 일시적인 감정에 의하여 건축헌금을 작정하게 한다. 어떤 부흥강사는 아예 의도적인 계략으로 성도들의 감정을 충동한다. 에를 들면 금반지를 사서 끼고 간 후에 그것을 건축헌금으로 내놓는다거나 또는 자신이 먼저 거액의 건축헌금을 내놓아 성도들의 건축헌금 작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저가 내놓은 금반지나 건축헌금은 모두 계산하여 돌려받는다. 감정에 약하고 감동받기를 잘하는 성도들은 이와 같은 부흥강사의 계략에 휘말려 계획에도 없는 건축헌금을 작정한다. 그리고 부흥집회가 끝난 후에 자신이 일시적인 감정에 치우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작정한 것은 절대 되물릴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의하여 작정한 건축헌금을 낸다. 그러나 그들은 건축 헌금을 내면서 여러 가지로 무리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각종 문제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심지어는 가정파탄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교회건축이 종료되거나 또는 교회건축이 계속되는 과정에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비 진리들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작정한 헌금을 최선을 다하여 마련하는 대신에 더 이상 그 교회에 남아있지 아니하고 떠나는 것이다.

(2) 자신의 수입을 위한 부흥집회.

목회자들이 자신의 개인적 수입을 위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경우가 있다. 목회자들이 부흥집회 때 드려진 헌금 중에 일부를 챙기기 위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흥강사들이 기도원이나 운동장 같은 시설을 임대하여 부흥 집회를 개최하고 그 집회에서 수집한 헌금을 자신의 수입으로 챙기는 경우가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목회자와 부흥 강사가 헌금을 나누어 같기로 밀약하고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의 부흥 집회에서는 헌금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서 반감과 분노를 일으키게까지 한다.

(3) 자신의 입지강화를 위하여.

목회자들 중에 어떤 자들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부흥 집회를 개최한다. 이러한 차원의 부흥집회에는 다음과 같은 계략과 계산이 숨겨져 있다.

① 목회자가 곤경을 벗어나기 위하여.

목회자가 어떤 이유로 인하여 곤경에 처하였거나 또는 성도들로부터 불신 당하여 사임압력을 받게 되었을 때 성도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부흥 집회를 개최하는 자들이 있다. 성도들은 대체적으로 눈물과 용서와 사랑이 많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특성이 있다. 교활한 목회자는 이러한 성도들의 특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다. 즉 부흥집회를 개최하고 사랑, 용서, 관용, 등등의 방면에 탁월한 부흥강사를 초청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유하는 것이다. 이때에 특히 간특한 자들은 부흥회 기간에 자신이 철저하게 회개하고 은혜 받는 것처럼 위장하여 성도들의 동정심과 관용을 끌어내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슬그머니 넘겨버린다. 이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방법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고 진심으로 회개한 후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각오로 목회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름다운 자세일 것이다. 반면에 저들은 얼마 후 다시 악한 모습을 보이므로 오히려 성도들을 기만한 것이 발각되어 더욱 어려움을 당한다.

② 목회자에게 순종할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자신에게 충성,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에게 충성, 순종하지 않는 성도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부흥강사에게 자신에게 충성, 순종하지 않는 성도들을 일일이 가르쳐준 후 부흥강사로 하여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하게 한다. 부흥 강사들은 목회자를 대신하여 특정인들을 공격하는가 하면 목회자에 대한 충성과 순종을 강요한다. 부흥강사들은 목회자의 권위를 하늘높이 추켜세운 후 목회자에게 충성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복 받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부흥강사들이 목회자에 대한 충성과 순종을 강조하는 내용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민12장>과 저유명한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부흥 강사들의 오류를 잠재우기 위하여 특별히 이 문제를 정립한다.

A. <민12장>

<민12장>에 나오는 모세에 대한 아론과 미리암의 항의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는 목사들의 권위, 목사들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순종, 목사들에게 항의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등등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부흥강사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 아니다. <민12장>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가 선포되었다.

a.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권위.

하나님 종들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으로서 절대적이다. 본인은 언제나 종의 위치에서 겸손해야 하지만 그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은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절대적 순종을 요구받는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은 선지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는 민족적 구심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의 잘못을 비판하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모세의 권위를 세워주면서 잘못을 하나님의 법으로 충고하고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

b. 하나님의 종들 간에 존재하는 사역적 질서.

모세, 아론, 미리암은 모두가 선지자였고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계급적 서열이나 우열이 없다. 그러나 같은 선지자라 하여도 그들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적 질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선지자였고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의 동역자였다. 같은 선지라 할지라도 대표와 동역자 사이에는 지켜야 할 질서가 있다. 그러나 아론과 미리암은 그러한 질서를 무시하였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셨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아론과 미리암이 같은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미리암만 징계하신 것에서 나타난다. 아론은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워주시기 위하여 미리암만 징계하셨던 것이다.

c. 하나님의 종들의 비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모세의 비 진리를 용납하시지 않으신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은 지도자로서 결코 범해서는 안 되는 과오였다. 모세가 아직 건강하여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가나안 입성을 금지하시고 퇴진시키신 것은 모세의 과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물론 모세의 퇴진은 자신의 일생을 오직 하나님께 바친 모세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고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마음 아프신 일이었으리라. 때문에 우리는 모세의 퇴진을 모세에 대한 징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교훈이며 경고라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민12장>은 <목사를 섬기고 목사에게 충성 순종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종들의 권위>를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종들 간의 질서>와 그것을 위반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원리를 가르치시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B.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

부흥 강사들이 목사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기 위하여 적용하는 예화 중에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음은 광주개혁 신학원 이사장이며 광주 중앙교회 담임 목사인 변한규 목사가 1994년 9월 15일에 한국 로고스 연구원을 통하여 발행한 <짤막한 신학>이라는 주제 하의 저서 <목회신학> 제3장. 관계신학 제3항 <장로와의 관계-P.265>에 실린 것이다.

*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순국자 조만식 장로와의 유명한 일화에서 우리는 커다란 교훈을 얻을수 있다.

본래 조만식 장로는 주기철 목사의 스승이요 후에는 주기철 목사가 조만식 장로의 목사가 되었다. 어느 주일 낮 예배시에 조장로가 공중기도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어느 인사를 만나는 일로 예배시간에 늦게 되었다. 현관에 서서 들어오는 조장로<스승>에게 주목사는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려 현관에다 벌을 세웠다. 설교가 끝난 후에야 헌금 감사기도를 시키니 이때 조장로가 드린 참회의 기도는 너무나 유명하다.

하나님이여! 제가 거룩한 주일날 하나님 만나는 일 외에 세상사람 먼저 만나다가 오늘 이 거룩한 시간에 지은 죄를 용서하소서. 하나님이여! 제가 잠시나마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을 용서하소서. 하나님이여! 제가 이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 것을 용서하소서.

과연 순국열사다운 조만식 장로와 그 스승의 그 제자인 주기철 목사이다. 그 목사에 그 장로이다. 장로 조만식은 사랑과 관용으로 교회와 민족 그리고 동포의 단결을 강조하고 비폭력과 무저항의 정신으로 조국을 자주독립의 길로 인도한 진실한 기독교인이다. 주님의 교훈대로 산성도요 장로이다. 그가 무저항으로 조국을 지킨 것은 주 예수의 교훈대로 순종한 바로 그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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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에 대한 일화를 들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위의 내용은 처음의 내용에 비하여 몇 가지가 추가되었고 변경되었다.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 같으며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를 심히 칭송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두 사람을 사정없이 매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것으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조작된 거짓말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1988년경 서울 반포의 남서울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홍정길 목사<현재 남서울 은혜교회 시무>를 통하여 들었다. 당시에 홍정길 목사가 설교를 통하여 밝힌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만식 장로의 자녀에게 문의한 결과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었다. 조만식 장로의 자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와 같은 이야기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의 인격을 모욕하는 거짓말로서 장로들로 하여금 목사에게 순종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조작된 것이다. 조만식 장로는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예배시간에 지각한 일이 없으며 만약에 조만식 장로가 지각했다 할지라도 주기철 목사가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스승인 조만식 장로에게 그와 같은 결례를 하실 분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 조작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밝혀 달라.>

홍정길 목사의 이야기대로라면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부흥강사들 중에 누군가가 장로들이 목사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거짓말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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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부흥 강사들이 조작해낸 이야기들 중에 매우 유명했던 또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것은 현신애 권사의 입신에 관한 이야기로서 다음과 같다.

<어느날 현신애 권사가 기도하던 중에 입신하여 천국에 갔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현신애 권사가 반가이 달려가 인사를 하자 예수님은 현신애 권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에 서운한 현신애 권사가 자신이 현신애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셨다. 이때에 현신애 권사가 심히 답답하여 서울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를 아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오히려 조용기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이에 현신애 권사가 그러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아느냐고 묻자 예수님이 한경직은 안다고 대답하셨다. 현신애 권사가 정신이 돌아와 놀라운 마음으로 조용기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 이야기를 하자 조용기 목사가 크게 놀랐고 그리하여 참회의 기도를 하면서 거액을 내놓아 하나님 사업을 하였다.>

당시에 홍정길 목사가 현신애 권사와 조용기 목사에게 사실의 진위를 직접 확인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누가 무슨 의도로 이러한 거짓 이야기들을 조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한창 명성을 날리던 조용기 목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가 추측하건데 위의 두 이야기는 누군가가 감동적이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하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 낸 예화일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간단한 내용이었는데 점점 확산되면서 내용도 많이 추가되고 변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그 이야기의 진위나 내용의 발전이 아니라 그것이 목사의 권위를 내세우고 성도들의 절대적 순종을 강조하기 위하여 장로들을 의도적으로 폄하하였다는 것이다.

③ 자신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인 부흥 집회를 개최하는 자들이 있다. 목회자에 대한 섬김을 강조하는 전문 부흥강사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성경은 <왕상17:8-> 이하에 나오는 사렙다 과부의 엘리야 공궤이다. 저들은 목사의 섬김을 강조하면서 목사를 잘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 대신 목사를 잘 섬기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는 공갈 협박까지 한다. 저들은 <목사를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목사를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께 복 받는 비결이다.> <보이는 목사를 섬기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보이는 목사도 섬기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라고 호통치면서 <자가용을 사주라> <양복을 사주라> <품위 유지비를 많이 주어라> <사모님 옷 사드려라>는 등등의 목사 섬기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부흥집회의 마지막 시간에 목회자 섬기기를 작정하는 시간을 갖고 작정한 자들의 명단을 작성한 후 그들을 위하여 특별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수법이 과거에는 통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성도들이 지혜롭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로 나타난다. 성도들이 반감을 갖게 되어 오히려 목사들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나 부흥강사들이 그와 같은 성도들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와 같은 어리석은 망동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④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공명심에 눈먼 자들이 자신의 명예나 권위 등등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흥 집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자신의 <끼>를 발휘하는 가운데 만족과 쾌락을 얻기 위하여 부흥집회를 뛰어 다니는 자들이 있다. 이런 부류들은 자신을 선전하기 위하여 과장된 홍보활동을 전개한다. 자신의 집회 일정을 신문에 광고하며 해외 집회 일정을 과장되게 선전하거나 심지어는 거짓 광고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집회의 광고에까지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어 홍보한다.
이러한 자들의 부흥집회는 기독교의 부흥집회가 아니라 완전히 3류 풍각장이들의 공연장이다. 이제 우리는 저들의 괴악스러운 비 진리적 이단 사설들이 하나님의 강단에서 더 이상 난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한 자들을 부흥강사로 초청하지 않아야 하며 모르고 초청한 경우에는 즉시 중단 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기독교로부터 아예 추방시켜 버려야 한다.

2) 부흥 강사들의 무지에 의한 오류.

한국 기독교가 매우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기독교를 인도할 만한 성장을 이룬 이면에는 부흥 집회의 혁혁한 공로가 있었다. 반면에 부흥집회로 인한 폐해도 심각하다. 한때 명성을 날렸던 부흥 강사들 중에 신학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고 그들의 신학적 오류와 비 진리에 의하여 기복신앙, 은사 체험주의 신앙, 신비주의 신앙 등등이 형성되었으며 그리하여 말씀 중심의 형이상학적 기독교가 현실위주의 3류 무속종교로 전락되었다.

4. 진리의 부흥집회.

부흥집회는 성도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또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 발전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부흥집회가 그러한 순수한 목적 이외의 어떤 다른 비 진리적 목적에 의하여 개최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흥집회 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만 선포 되어야 한다. 따라서 부흥집회는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1) 순수한 목적으로 집회하라

부흥집회는 성도들과 교회의 영적 부흥성장을 위하여 회집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께 어떤 <은사>를 받기 위하여 부흥집회를 개최 한다거나 또는 건축헌금 선교헌금 등등을 위한 목적으로 부흥회를 개최 한다거나 또는 어떤 개인의 특정 목적을 위하여 부흥회를 개최해서는 안 된다. 은사는 부흥집회를 통하여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부여되는 것이며, 건축헌금이나 선교헌금 등등도 부흥집회 같은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모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흥집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과 교회의 영적 부흥성장을 도모하려는 순수한 목적 하에 개최되어야한다.

2) 하나님의 진리만 선포하라

부흥집회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만 선포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선포 되어지는 가운데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 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 등등이 또한 어떤 것이며, 그 많은 것들을 무상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께 드린 헌금 갈취하지 말라

오늘날 대부분의 부흥강사들은 부흥집회를 마치고 일정액의 강사료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담임목사들도 부흥회가 끝난 후에 일정액의 사례비를 받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부흥집회에서 헌금을 유도하기 위하여 안수 기도가 성행하고 안수 기도는 반드시 헌금을 한 후에 받아야 한다고 강조되고 있다. 필자가 전도사 때 사역한 어느 교회 부흥집회에서는 <헌금 안하고 안수 받은 것은 하나님께 외상한 것이니 외상값을 내야 하나님께 징계받지 않는다.>는 부흥 강사와 담임 목사의 경고까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8>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안수기도를 내세워 헌금을 거두고 착복하는 것은 말씀을 팔아먹는 악행이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6:10>라고 경고 하셨다. 목사는 돈으로부터 초월하고 자유 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가 돈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 정신이 더러워지고 삶이 혼탁 해진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교회의 재정을 귀중하게 여길 줄 모르고 가볍게 사용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아 마땅한 행악이다. 이제 목사들은 이와 같은 악행을 중단하고 하나님께와 교회 앞에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들은 이와 같은 망령된 자 들의 부흥집회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요 교회를 살리는 길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다.

-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