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 신학 >>>/제자훈련

[스크랩] 제자훈련교회 제자교육 교재 (제 1권)

에반젤(복음) 2023. 2. 2. 15:47

제 자 훈 련

< 목 차 >

제 1장 제자훈련 3
제 2장 한국기독교의 현실 14
제 3장 제자훈련교회와 제자훈련 18
제 4장 기독교 48
제 5장 기독교 신학 53
제 6장 기독교 신앙 83
제 7장 하나님 94
제 8장 삼위일체 하나님 107
제 9장 하나님의 섭리 117
제10장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 122
제11장 특별 섭리영역에 대한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 139
제12장 창 조 164
제13장 영적 세계의 창조 173
제14장 인간의 범죄 180
제15장 인간범죄에 대한 성부하나님의 계획 185
제16장 하나님의 인류구원 208
제17장 인류구원과 예수그리스도 229
제18장 하나님의 심판과 우주의 종말 251
제1장. 제자훈련.

1. 제자훈련의 정의.


제자훈련이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육하고 훈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과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을 향하여 자신의 제자라고 호칭하였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직분과 직무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신학적 섭리가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 유기적, 조직체이다<엡1:22-23;4:15-5:23><골1:18>.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유기적 조직체를 복음의 군대로 표현하여 기독교인들을 복음의 군사로 명칭 한다<빌2:25><딤후2:3-4><몬1:2>.
인간이 모여 조직체를 형성하면 반드시 요구되어지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계급적 서열과 능력적 우열에 의한 질서의 확립이다. 이와 같은 조직사회의 질서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기본적인 욕망 때문에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진다. 모든 인간은 높아지고 싶은 욕망과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반면에 누구에게 통제되어 지는 것과 지시, 또는 명령받는 것을 싫어한다. 때문에 인간들의 사회가 조직적, 체계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특성에 적합한 계급적 서열과 능력적 우열에 의한 질서의 확립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반 조직체와는 전혀 다른 특별 조직체로서 일반 조직체계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질서를 절대 유지하면서도 계급적 서열과 능력적 우열을 절대 배제하는 형이상학적인 평등성을 갖는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에게 인류 역사상 최고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예수 그리스도 문하<門下>의 제자들로 묶으시어 기독교 조직체의 형이상학적인 평등성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 섭리의 완전성은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이미 확인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시고 종의 몸으로 강림하셨고 모든 영광을 오직 성부 하나님께 돌리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은 항상 직위와 직무에 대한 욕심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는 사도들까지도 그것을 욕심내어 경쟁하고 다투었다<마18:1;20:20><막9:34;10:37><눅9:46>.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당시는 물론이요 장차 계속하여 세워지게 될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이 직위와 직무에 대한 욕심과 경쟁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답게 진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직위와 직무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고 섬기는 동급적 질서를 세우셨던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8>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에 하나님의 종들을 복음의 군사로 표현하면서도 종들 간의 직위와 직무를 말할 때에는 계급적인 표현을 하지 않고 항상 동역자라고 표현하였다<롬16:3,9,21;고전3:9;고후8:23;빌4:3;몬1:1,24>.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은 직무상으로는 복음의 군사들을 훈련하는 것이지만 직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훈련하는 것이다.

2. 제자훈련의 성경적 근거.

제자훈련의 성경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제자훈련과 교회에 내리신 제자훈련에 대한 명령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3년간의 공생애동안 12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을 신학과 실천신앙으로 교육하고 훈련시켰으며 부활승천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

3. 제자훈련의 목적.

교회가 제자훈련을 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것이 모든 교회에 일률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교회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교회가 존재하고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함이다. 교회가 존재,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자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에 일률적으로 제자훈련을 명령하신 것은 교회가 존재,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자훈련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목적은 결국 교회가 존재, 성장, 발전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으로 집약된다. 교회는 이와 같은 두 가지 목적을 대전제로 하여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제자훈련을 실시한다.

1) 진리의 보존과 보전.

교회에는 진리<하나님의 말씀-신학>를 보존하고 보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진리 <하나님의 말씀-신학>은 문서<성경>로 보관, 보존, 보전되지만 그것을 실제로 전승하고 전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진리<하나님의 말씀-신학>을 배우고 익혀 후세들에게 계속하여 전승하므로 진리가 보존되고 보전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종들을 진리<하나님의 말씀-신학>로 교육하고 훈련시키어 진리<하나님의 말씀-신학>를 영원히 보존하고 보전한다.

2) 진리의 사수.

교회는 사단의 사주 하에 있는 사이비 이단자들과 비 진리자들의 끊임없는 오류, 왜곡, 변질들로부터 진리<하나님의 말씀-신학>를 사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교회는 사이비 이단자들과 비 진리자들에 의한 진리 <하나님의 말씀-신학>의 오류, 왜곡, 변질들을 퇴치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들을 진리<하나님의 말씀-신학>의 파수꾼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종 양성.

교회가 제자훈련을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종들을 양성하기 위함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들을 양성하는 것은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규신학교를 통하여 전문 목회자 <신학교 교수, 선교사, 목사, 전도사,>를 양성하는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교회들이 자체적 또는 연합적 교육기관들을 통하여 장로, 집사, 교사, 일반 성도 등등을 교육하는 제자훈련이다. 하나님의 종은 정규 신학교를 통하여 양성되는 <신학교 교수, 선교사, 목사, 전도사,> 등등의 전문 목회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직분과 직무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총체적인 명칭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크게 전문 목회자와 일반 사역자로 구분된다. 전문 목회자들은 교회 직무 이외의 일반적인 다른 직무를 행하지 않고 오직 교회 직무만을 수행한다. 따라서 그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직분 이외에 다른 일반 사회적 직업을 갖지 않는다.
반면에 일반 사역자들은 교회 직무보다는 일반 사회적 직무를 더 많이 행사한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사회적 직업과 사업 등등에 종사하게 된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전문 목회자들은 정규 신학교를 통하여 전문 목회자로서의 신학 교육을 이수하지만 일반 사역자들은 직업상, 사업상,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다양한 영역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기 때문에 신학 교육이 절대 필요하다. 때문에 교회는 자체적, 또는 연합적 교육기관을 통하여 그들에게 신학교육<제자훈련>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4) 성도의 보호.

교회가 제자훈련을 하는 목적 중에 또 하나는 각종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로부터 하나님의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성도들은 언제나 각종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의 유혹과 미혹에 노출되어 있다. 각종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성도들을 유혹하고 미혹하며 특히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그럴듯하게 각색하고 편집하여 성도들의 약한 부분에 적용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들의 미혹과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기독교 신학을 정립시켜 주어 그들을 각종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의 유혹과 미혹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4. 제자훈련의 방법.

제자훈련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직접 실천한 방법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최고최상의 방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으로 제자들을 양육하셨으며 자신이 가르친 모든 것을 직접 실천함으로서 신학과 신앙이 일치된 제자훈련을 실시하셨다. 따라서 제자훈련을 실시하는 교회 또는 교육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내용을 자신들이 그대로 실천함으로서 이론적 교육이 아닌 실천 신학적, 실천 신앙적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제2장. 한국 기독교의 현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한 제자훈련을 정리하였다. 우리는 위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명령에 의하여 제자훈련을 실시한다. 한편 우리는 제자훈련에 앞서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먼저 정리한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제자훈련의 중요성과 제자훈련에 대한 사명감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한국 기독교의 신학.

1) 한국 기독교 신학의 역사.

한국 기독교는 불과 120여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성장은 양적으로는 세계가 놀라는 성장을 이루었지만 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심각할 정도로 낙후되고 오류되어 있는 실정이다. 한국 기독교가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한 반면에 질적으로는 심히 낙후되고 오류된 원인은 신학적 경륜의 부족 때문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에는 신학적 경륜을 갖춘 저명한 신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신학적 경륜이 전혀 없는 자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낙후와 오류는 한국 기독교만의 실정이 아니라 현대 기독교 전체의 실정이며 나아가서는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 이후로부터 현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의 전반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초기신약 기독교 시대에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낱낱이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고 수많은 신학자들을 세우시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섭리를 조직화하여 신학체계를 세우시게 하셨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수되어진 조직신학이 비록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섭리 일체를 완전하게 정립한 것은 못되지만 그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거의 체계화시켰으며,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신실한 하나님 종들의 불타는 사명감과 피땀 어린 노고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종들의 불타는 사명감과 피땀 어린 노고에 의하여 정립된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에 의하여 수없이 거부되고 무시되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의하여 사정없이 오류되고 변질되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헬라 철학적 사상에 매달려 성경의 계시들을 3류 일반종교의 무속 귀신론<鬼神論>으로 둔갑시켰고 중세 시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스콜라주의 사상에 연연하여 기독교 신학의 진리를 사변적<思辨的> 일반학문으로 변질시켰다. 그리고 근대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본주의 사상에 집착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발전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신학을 인간위주의 사상으로 둔갑시켰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독교 신학은 수없이 많은 오류와 변질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였으며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가 크게 제한되어졌고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멀리 이탈 되어졌다. 이러한 신학적 오류와 변질의 역사적 계속은 한국 기독교에도 그대로 전이되었다.
한국 기독교에 처음 신학을 전수해 준 것은 미국, 호주, 카나다 등등의 기독교 해외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선교사명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매우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었지만 신학적 경륜은 매우 저급하였다. 때문에 그들로부터 신학을 전수받은 한국 기독교 초기 지도자들의 신학은 당연히 저급하고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한국인기독교 지도자들의 학력 수준도 매우 저급하였다. 아직 개화되지 않은 한국인 사회에서 교육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반면에 양반들은 유교를 숭상하여 기독교를 배척하였다. 때문에 당시의 기독교는 하층 계급사회를 통하여 확장되어갔고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하층계급들 중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일제 말기에 이르러 일제가 기독교를 극심하게 탄압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을 거의 폐교 조치함에 따라 한국 기독교 신학수준은 더욱 낮아지게 되었고 오히려 비진리와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기독교 말살 정책에 의하여 해외 선교사들이 추방되거나 또는 자진 출국하였기 때문에 얼마동안 신학교 운영이 정지되었으며. 이러한 사이에 자유주의 신학을 비롯한 사이비 이단적 일본 신학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당시의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아직 자유주의 및 사이비 이단적 일본신학들을 비판하고 퇴치할만한 신학적 경륜이 없었다.
때문에 각종 사이비 이단적 신학사상들이 기독교 신학이라는 간판을 달고 범람하여도 그것이 제대로 비판되고 퇴치되어지지 않음으로서 한국 기독교 신학은 점차 낙후되어지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2) 한국 기독교 신학의 오류들.

현대 <21세기> 한국 기독교는 교파나 교단에 관계없이 총체적으로 부패되고 오류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 관계자나 비 기독교인들의 공통된 개념이다. 한국 기독교의 부패 및 오류와 비 진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것이 계속하여 발전되는 가운데 거의 체질화되어있는 형편이다. 때문에 한국 기독교를 바라보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기독교의 부패와 오류적 병폐를 치료불능<治療不能>의 상태라고 한탄하는가 하면 전면적인 개혁이 단행되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하나님께서 <한국 기독교에서 촛대를 옮기실 것이다.>라는 우려까지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는 전혀 그러한 위기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부패, 오류, 비 진리성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심각하여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낙후와 오류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의 낙후와 오류에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를 <한국 기독교 개혁>이라는 주제 하에 별도로 정리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핵심적인 문제들만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1) 신학의 부재.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것이며 기독교의 근본적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외면하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독교의 근본적 사명을 이행하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가 기독교의 본질을 외면하고 기독교의 사명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한국 기독교에 그러한 신학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는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목회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등등의 신학이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에는 이러한 신학들을 바로 가르칠만한 차원 높은 신학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한국 기독교에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양산된 각종 인본주의, 자유주의 사상들이 기독교 신학이라는 주제 하에 범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신학적 경륜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인본주의 자유주의 사상들을 분별없이 받아 들여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전수하므로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이 크게 오류되고 변질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군소 신학교에서 신학 부재의 교수들로부터 마구잡이로 길러진 수준 낮은 목회자들이 무더기로 배출됨에 따라 한국 기독교에서 차원 높은 신학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지경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현대교회 목사들은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에 입각한 목회를 하지 않고 오직 구원, 천국, 전도, 축복, 목사 섬김, 교회충성, 등등에 입각한 목회에 전념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신학적 경륜이 심히 약화되었고,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각종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의 유혹과 미혹을 분별하고 거부할 수 있는 신학을 정립하지 못한 것이다.

(2) 하나님 섭리의 제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요약되어진다. 성경은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본질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로 요약하여 선포하였고, 그에 대한 사명을 창조기사를 통하여 <정복하라, 다스리라-창1:28>라고 명령함으로서 하나님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이 기독교의 본질을 전개하는 섭리적 영역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인간 구원>이라는 <구속사-救贖史>적 신학으로 제한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온 인류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축소되고 제한되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섭리의 제한과 변경은 하나님 존재 자체를 오류시키고 변질시켰다.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을 행사 하시는 우주의 섭리자가 아니라 오직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었고 또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온갖 복을 내려주는 <강복의 하나님>이 되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에 대한 오류.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쩌다 생각이 나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란 <우주적 기독교의 주권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기독교의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다. 즉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관리하시면서 그 모든 섭리 역사를 통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면서 인류 구속사를 통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인 것이다.
어떤 자들은 이 두 가지의 문제를 같은 내용인 것으로 말하지만 이 두 가지의 신학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구별이 존재한다. <우주적 기독교의 주권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를 통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은 곧 현존하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반면에 <구속사적 기독교의 구원주 하나님>으로서 기독교의 구속사를 통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은 하나님의 섭리 영역을 인류 구속사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한 우주적 기독교 섭리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구속적 기독교 섭리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위한 우주적 섭리 영역>이 아니라 오직 <인간을 위한 섭리적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신학도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에 대한 신학과 동일한 원리이다. 구속사적인 차원에 매달려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독교인들이 사후<死後>에 가는 천국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의를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 전파 사역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도 복음전파 사역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통치되고 관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에 가는 천국은 하나님 나라 중에 하나의 영역이며, 복음 전파 사역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총체적인 사역 중 하나이다. 천국과 구원은 인간에게는 최고 최상 최대의 문제이지만 그것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빛과 소금의 전사>로 선포하면서 우리의 실천 신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라고 명령한 것<마5:13-16>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선포한 것<마6:33>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대한 전 우주적이며 전 포괄적인 신학 원리를 정립시켜준 것이다.

(5) 하나님 창조 세계의 이원화.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가 기독교의 구속사로 제한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시간적 장소적으로 이원화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주일>을 <안식일>로서 거룩한 날로 만들었고, 반면에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들은 <세속>적인 것으로서 악하고 불결한 날로 이원화하였다. 저들의 주일에 대한 개념은 구약적이며 율법적이고 유대교적이다. 저들은 주일날을 안식일로서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주일날에는 일하는 것과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T.V를 보는 것과 여행을 하는 등등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12:8>이라고 선포한 것과, <모든 것을 완성한 자-요19:30>로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선포한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구약신학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완성한 신약신학은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한결같이 거룩하다. 그러나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한결같이 거룩하다는 신학은 신약 신학에 의하여 새롭게 정립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원리로부터 유래된 신학이다. 그것이 구약시대에는 아직 하나님의 신학을 이해할 만한 신학적 경륜이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로 제한되었을 뿐이다. 모든 시간,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한결같이 거룩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창조역사 자체가 거룩하다는 이유에서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거룩한 것이다. 반면에 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거룩하게 성별한 주일<안식일>을 스스로 범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저들은 다만 주일에 일하는 것과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T.V를 보는 것과 여행을 하는 등등의 몇 가지 일을 제한하였을 뿐, 실제로는 구약적이며 율법적이고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구약적이며 율법적이고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를 제대로 지키려면 안식일 전날에 교회 앞 가까운 곳에 도착하여 안식일 전날 밤을 보내야 하며 교회를 가기 위하여 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이발소나 목욕탕 등등에도 가지 말아야 하며 음식을 먹기 위하여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안식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느냐 아니면 제대로 못 지키느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한 율법의 완성으로 인하여 안식일 제도가 주일 제도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저들은 또한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장소로서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교회 밖은 비천한 인간들의 세속된 것으로서 악하고 불결한 곳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념은 로마 카토릭이 교권주의를 확립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낸 비 진리이다. 로마 카토릭은 사제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선포하였고, 그리하여 구원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로마 카토릭의 주장이 발전하여 교회의 장소적인 거룩성과 신성성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모든 영역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 자체가 거룩하다는 이유에서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거룩하다. 어떤 시간 어떤 장소가 거룩과 신성, 악함과 불결함으로 성별되는 것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현재 어떠한 일이 진행되는가?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 주일과 교회라 할지라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일이 진행된다면 그 시간 그 장소 <주일과 교회>는 악하고 불결한 것이 될 것이며 주일 아닌 다른 날과 교회 밖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진다면 그 시간 그 장소 <주일 아닌 다른 날과 교회 밖>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 될 것이다.

2. 한국 기독교의 신앙.

한국 기독교의 신앙은 한국 기독교 신학과 동행하면서 같은 차원의 비 진리적, 오류적 역사를 이루었다. 신앙이란 본래 신학에 의하여 성장되고 발전되어진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신앙은 한국 기독교 신학의 비 진리적, 오류적 역사에 영향을 받아 같은 차원의 비 진리와 오류적 신앙을 형성하였다.
일반종교의 신앙은 자신의 현재적 길흉화복이나 내세의 삶을 위하여 신을 섬기는 신앙이다. 그러나 일반 종교의 신앙과 기독교의 신앙은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내세를 보장받은 자들로서 내세를 보장해 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며, 내세와 현세의 모든 복을 이미 받은 자들로서 이미 받은 모든 복을 누리고 즐기면서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며, 현세의 모든 복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이러한 차원 높은 신앙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현대 한국 기독교 신앙은 거의 대부분 현재적 길흉화복을 구하는 신앙이며 천국을 가기위한 신앙으로서 일반 3류 종교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 일반 3류 종교인들이 감히 기독교와 저희들의 종교가 같은 차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자신들의 신앙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
현대 기독교의 모든 성도들이 비 진리적 오류적, 이질적 신앙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현대 기독교 성도들 중에 성경적인 신앙, 아름다운 신앙, 모범적인 신앙을 소유한 이들이 많다. 성도들은 자체적으로 신앙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섬기는 교회의 목회자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진다. 따라서 차원높은 신학적 경륜과 신앙을 갖춘 목회자로부터 신학과 신앙을 배운 자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진리 안에 거하는 신앙을 형성하였고 비 진리와 오류된 신학을 소유한 목회자로부터 신앙을 배운 자들은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3류 무속 종교적 신앙을 형성하였다.
반면에 섬기는 교회 목사의 비 진리와 오류에 자극받아 오히려 모범적인 신앙을 형성하는 지혜로운 이들도 많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은 진리적 형태보다는 비 진리와 오류된 형태의 신앙이 더 많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과 신앙이 비진리와 오류로 인하여 심히 부패되고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3. 한국 기독교의 인격.

한국 기독교가 신학적, 신앙적 오류와 변질로 달려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인격도 함께 낙후되었다. 인간의 인격이란 원리적으로는 학문과 지식에 비례한다.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은 차원에 따라 차원 높고 고매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며 그 반대의 경우에 따라 상대적으로 저급하고 우매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 중에 오히려 저급하고 우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허다하며, 많이 배우지 못하고 그리하여 지식이 적은 사람들 중에 오히려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원인은 학문이나 지식이기보다는 신학과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정리할 때에 한국 기독교인들의 인격은 오류되고 변질된 신학과 신앙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오히려 비 기독교인들의 인격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하고 우매한 인격을 소유한 자들이 많다. 우리는 그러한 원인을 변질되고 오류된 신학과 그로부터 형성된 이질적 신앙에서 비롯되어 졌다고 생각한다. 변질되고 오류된 3류 무속적 신학과 그로부터 형성된 3류 무속적 이질신앙이 기독교인들의 인격을 저급하고 우매하게 만들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인격을 비판하고 비난하며 불신하고 무시한다. 그것은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비인격적인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지 못한 언행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으며 오히려 비 기독교인들의 인격보다도 저급한 언행을 통하여 자신은 물론이요 전체 기독교인들의 명예를 실추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말이기 때문에 진실로 믿었는데 오늘날에는 기독교인들의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하고 불신한다.
기독교인들의 비 진리적인 인격은 교회분규, 교회내의 갈등과 반목 등등을 통하여 드러나기도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언어행동을 통하여 그대로 나타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하대하며 자신의 지위, 권세, 재력, 능력, 부귀영화 등등을 과시하고 자랑하며 온갖 불법, 탈법, 위법, 편법, 등등을 행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경우들이 여과없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4. 한국 기독교의 사명.

기독교에 주어진 사명은 현존하는 모든 영역을 총망라하고 총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에게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에 대한 <정복, 다스림, 관리-창1:28>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빛과 소금의 전사-마5:13-16>로 선포한 것과 <모든 족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고 훈련시켜 일하게 하라-마28:19-20>고 명령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에 대한 <정복, 다스림, 관리-창1:28>의 사명을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전사들을 지도자로 양육하여 모든 영역에 투입시킴으로서 그들을 통하여 모든 영역들이 정화되고 성장 발전되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기독교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였고 이탈하였다. 한국 기독교가 사명적 오류와 이탈을 하게 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관련된다. 일제 치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이라는 3류 종교적 개념을 내세웠다. 저들은 현존하는 모든 영역이 기독교에 의하여 관장된다는 <창1:28>의 원리와 사명을 이행하지 않고 회피하였으며 그러한 자신들의 과오를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이라는 3류 종교적 개념으로 합리화시켰던 것이다.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해외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신학적 차원보다는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차원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제기하였다. 특히 장로교 선교사들은 칼빈주의 신학 원리에 입각하여 종교와 정치의 <상호 독립> <상호 존중> <상호 지원> <상호 보완> <상호 견제> 원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그와 같은 신학원리를 삼가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신학원리로 내세웠다. 이러한 역사적 오류가 해방 후에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선교사들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해방 후에도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원칙으로 세웠다. 그들은 정치는 정치가에게 일임하고 교회는 정치에 절대 간여하지 않으며 오직 복음전파 사업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기독교의 사명은 오직 복음전파로 한정되었다. 때문에 모든 기독교 사업은 오직 복음에 관련된 것으로 제한되었고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범위가 좁고 부분적인 것이 되었다.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 구속사적인 것으로 축소되어짐에 따라 제한되고 축소되어진 교회사업은 자연스럽게 지 교회 위주의 사업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전사들을 지도자로 양육하여 모든 영역에 투입시킴으로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창조영역들이 정화되고 성장 발전되게 하며 그와 같은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교회 연합적, 사업을 전개하지 못하고 각자 지 교회 차원의 사업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교회들은 교회가 부흥 성장하면 교회건축, 기도원 설립, 교회 공원묘지 설립, 선교비 지원, 선교사 파송, 등등을 진행하는 것이 지정된 사업과정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 추가하여 신학교를 설립함으로서 교회의 위상과 담임 목사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최고의 교회사업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5.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류와 부패.

한국 기독교 오류와 부패의 주범<主犯>은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다. 한국 기독교의 신학, 신앙, 인격, 사명, 등등이 전반적으로 오류 되고 변질된 근본 원인은 그것들을 가르치고 진행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류와 변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를 전체적으로 오류 시키고 변질시킨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실태를 상세하게 정리한다. 그러나 미리 밝혀 두거니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전체가 오류 되고 변질되고 타락한 것은 아니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경륜 높은 신학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고자 하는 충정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명예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순전하고 아름답고 고결한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밝히는 비진리적 지도자들은 한국 기독교 전체 지도자가 아니다.

1)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

현대 한국 기독교가 불신 당하고 비판당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와 교권을 둘러싼 패거리 싸움질이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와 교권을 둘러싼 패거리 싸움질은 일제 치하에서도 6.25동란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박정희의 유신 독재정권과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 치하를 거쳐서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점점 극심한 상황으로 치달려 왔다.
현대 한국 기독교는 미래를 향한 어떤 장기적인 안목이나 비전을 계획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류, 비 진리, 등등의 수많은 고질적인 병폐 속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상황들을 전혀 외면한 채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권력, 권위, 권세, 명예, 등등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 정치, 경제, 교육, 도덕, 윤리, 등등의 국가적, 민족적, 사회적 위기들이 닥쳐와도 심지어는 기독교를 위협하는 각종 이단주의 사상과 교회들이 발생해도 전혀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대하면서 자신들의 누리고 즐기는 삶과 부귀영화, 권력, 권위, 권세, 명예, 등등을 쟁취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이전투구를 계속하는 것이다.
한국에 <I.M.F>라는 경제위기가 도래하였을 때 온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위기 극복을 진행해 나갔으나 그들은 금강산 유람선에 몸을 실었고, 이라크 사태로 인하여 중동 국가들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정부당국이 중동 지역 여행을 삼가 달라고 통사정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 순례를 고집하여 신자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각종 어려움으로 고난 받고 신음하는 이웃들이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신자들이 고난 받고 고통 받는 것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예우 받고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는다. 때문에 그들은 교회가 아무리 어렵고 성도들이 어려워도 자신들은 여전히 그러한 삶을 누리고 즐기려 한다. 그리하여 성지 순례를 빙자한 해외여행을 즐기며 심지어는 성경의 안식년 제도를 함부로, 마음대로 오류시켜 목회자의 안식년 제도를 만들어 지키고 누리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접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기독교의 기본 원리들은 신자들의 사명이고 자신들은 <대접받고 사랑받고 섬김 받는> 대상이다.

2)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

한국 기독교가 기독교 본래의 권위와 위엄을 상실한 채 비판, 비난, 외면, 거부, 무시, 당하는 이유는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 때문이다. 역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기독교의 본질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일체를 깨달아 알고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신학적 경륜을 갖춘 신학적 지도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 이유는 이미 앞장에서 말한바 있듯이 선교사들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적 저급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책임 소재를 1960년대 이전까지로 제한하고자 한다. 1960년대 까지는 일제 치하 -해방 후의 혼란기- 6.25 동란- 4.19 의거-5.16혁명, 등등의 연속적인 사건들 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도 아울러 혼란과 갈등의 격동적 시대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1960년대부터 획기적인 신학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여건이 제공되었다.
비록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이 무소불위의 강압적 통치를 전개하였지만 당시의 정부는 국가 정부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한 기독교를 탄압하거나 강제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오랜 독재적 철권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오히려 종교적 자유라는 당근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통치에 제동을 걸지 않는 한 오히려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해 준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부터 기독교 신학에 관한 세계적 자료들이 대거 한국에 유입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학공부를 하려는 마음만 있었으면 차원 높은 신학적 경륜을 쌓을 수 있는 제반여건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비진리가 크게 양산되고 발전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학공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차원 높은 신학을 갖추어 성도들의 신앙을 향상시키려는 사명감이 없었고 다만 성도들의 취향과 기호에 맞는 설교와 목회를 통하여 성도들의 숫자를 늘리는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미 일제 치하에서부터 유포되고 있던 각종 자유주의 신학과 종말론 등등이 1960년대부터 더욱 극성스럽게 전개되었고, 순복음 교회와 부흥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복신학, 체험주의 신학 등등이 기독교 전체에 만연되었다. 이때에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자유주의, 종말론, 기복신학, 체험주의 신학, 등등에 심취하여 기독교로부터 이탈하여 그들에게 합류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신학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 기독교 신학 수준의 저급성과 오류 및 변질은 신학 부재의 신학교를 통하여 더욱 가중되었다. 1960년대부터 수많은 신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고 그러한 와중에서 갖추어지지 않은 무자격, 사이비, 목회자들이 마구잡이, 무더기로 배출되어졌다. 신학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무자격, 사이비 목사들이 교수라는 명함으로 강의를 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명함을 빛내기 위하여 가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그들에게는 신학이 없었기 때문에 신학적인 강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목회사상이나 방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강의를 대신하였으며, 그것마저도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멀리 이탈되어진 3류 종교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학교들이 교세확장을 위하여 또는 개인적 유익을 챙기기 위하여 4년-2년 <심지어는 1년>에 이르는 교육과정을 통하여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무자격 목회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목회자가 된 자들은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3류 무당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21세기 현재에도 동일하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2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불어 닥친 여자 목사 제도에 의하여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무자격 여자 목사들이 무더기로 배출된 것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는 기독교 신학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무자격, 사이비 남녀 종교인들이 기독교라는 간판과 목사라는 명함을 내세워 기독교를 자처하고 있으나 그들은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3류 종교의 무당들에 불과하다.

3) 지도자들의 신앙 부재.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앙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논리상으로는 분명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란 신앙을 가르치고 심어 주고 성장 발전시켜 주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앙 부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들의 신앙 부재를 말하는 근거는 그들의 현세적 삶에 대한 애착과 그들의 실제적 삶의 모습이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앙적 모습이 전혀 없으며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적인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종들의 신앙적 삶에 대한 지표를 세워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온 인류의 메시야이심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검소하고 검약한 삶을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현세에 연연하는 삶을 버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적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전혀 다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도 전혀 다르다. 그들의 삶은 분에 넘치도록 호화로운 경우들이 많으며 정도에 지나치도록 넉넉하고 여유롭다. 지도자들의 삶이 호화롭거나 넉넉하고 여유로우면 일반 신자들의 삶도 같은 것이 된다. 그러한 삶은 검소하고 검약한 기독교인들의 삶과 정면으로 반대되며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적 삶을 변질시키고 오류시키는 근원이 된다. 신자들은 현세의 삶을 누리고 즐기는 가운데 현세의 삶에 애착을 갖게 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세를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현세에서 누리고 즐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영적인 것이지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물질적 현세를 누리고 즐기게 되면 천국에 대한 소망적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3류 일반 종교들의 현세적 신앙과 같은 변질적인 신앙을 형성하게 된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 형태가 바로 이러한 변질적인 신앙 형태가 된 것은 지도자들의 오류되고 변질된 신앙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궁핍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될 수 있는 한 궁핍하지 않고 안정된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삶이 궁핍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우고 복음사업에 지장을 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삶이 지나치게 풍요롭고 호화로운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기독교인들은 안정된 삶을 살되 사치스럽고 호화찬란한 삶을 살지 않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검소, 검약한 삶을 살면서 이웃들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자비와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한편,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존재하는 3류 일반 종교들의 현세적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의 결여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그들은 중병<重病>에 걸리거나 또는 연로<年老>하여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도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은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며 살기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적 모습은 기독교에 대한 회의<懷疑>와 불신앙으로 연계되어진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천국에 대한 회의<懷疑>와 불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현세적 재물에 대한 무한적인 욕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설교하면서도 자신들은 돈에 대한 무한적 사랑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적 모습은 기독교에 대한 회의<懷疑>와 불신앙으로 연계되어지며 신자들의 신앙적 삶에 치명적인 오류를 제공한다. 목숨 걸고 돈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신자들 역시 돈을 사랑하고 욕심내는 신앙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4)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욕심.

한국 기독교의 병폐와 오류 중에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것이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은혜보다 목사의 법, 목사의 뜻, 목사의 권위, 목사의 은혜 등등이 더 받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목사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욱 높이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위와 권세를 행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모든 것을 가로채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욕심과 그로 인한 오류와 만행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도 있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책망한 것<마23:1-2>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오류적 전통은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자들에게로 계승되었다.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에게 무소불위의 권위를 부여하였고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직무와 권위까지 탈취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오류적 전통이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뜻 보다는 목사의 뜻이 우선되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목사의 말씀에 더욱 권위가 있다. 그리하여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을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목사를 섬기고 목사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목사의 신자들이 되어 버렸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목사의 영광과 목사의 기뻐하심으로 바꾸어졌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목사의 나라와 목사의 의로 둔갑된 것이다.

5) 지도자들의 사명감 부재.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에 대한 기독교적 사명과 함께 목회자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사명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자로 여러 번 선포하면서 부활승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라-요 21:15-18>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목회적 사명이었다. 그러나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와 신앙 부재는 그들의 사명감 부재로 연계되어졌다. 현대 한국 기독교 목회자 중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자들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이 힘들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망각하고 착각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하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받들어 섬기라고 강요하고 심지어는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온갖 상처를 안겨 주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기까지 본을 보여 주면서 가르치고 명령한 섬김의 사명은 목사들의 통치와 착취와 군림으로 바뀌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상처받고 실족하여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종들을 세우신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종들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양들을 보내주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자 하는 사명감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고자 하는 사명감도 전혀 없다. 그들은 종말론, 자유주의 신학 사상, 등등을 비롯한 각종 비 진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기독교를 엄습하여도 그것을 방관하며 기독교 지도자들이 불의, 부정, 부패, 타락을 행사하며 기독교를 오류 시키고 변질시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저들에게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사명의식도 없으며 후진을 양성하여 교회의 미래를 튼튼하게 하려는 책임의식도 없다.
저들은 오히려 바른 말을 하거나 또는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신자들이나 또는 바르고 실력 있어 교회로부터 존경받고 예우 받는 신자들은 목회에 걸림돌이 된다 하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의 교회 중직에 세우지 않으며 교묘한 방법으로 따돌리거나 추방해 버린다. 어떤 자들은 아예 장로 권사 등등의 직분을 교회에 세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저들은 오직 교회를 자기중심으로 부흥발전 시킨 후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면서 교회 위에 군림하고 교회로부터 복종 받고 예우 받는 통치자적 삶을 구가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6) 지도자들의 회개 부재.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순 중에 가장 큰 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것이다. 저들은 일제 치하에서 반국가적, 반민족적, 친일 행위와 신사 참배를 비롯한 배교 행위를 하고서도 그것을 회개하지 않았고, 6.25동란과 자유당 정권,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정치자들과 야합하면서 온갖 불의, 부정, 부패, 타락을 범하고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 저들은 자신들의 불의, 부정, 부패, 타락 등등으로 인하여 교회가 갈등과 혼란을 겪고 신자들이 고통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교회를 분리하고 자기 유익을 챙겼다. 저들은 자신들의 불의, 부정, 부패, 타락 등등으로 인하여 노회, 총회, 신학교 등등이 갈등과 혼란을 겪고 구성원들이 고통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운 노회를 설립하고 새로운 총회를 설립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면서 자기위치와 권력과 권위와 권세와 명예와 유익을 챙겼다. 저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오직 타인의 것이요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들은 자신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핍박 받고 탄압 받는 순교자적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와 같은 저들의 모습은 저들이 때때로 실시하는 범 기독교적 회개 운동과 회개기도 집회를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난다. 저들은 대대적인 홍보와 광고를 통하여 범 기독교적 회개운동과 회개기도 집회를 실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형식적인 집회에 불과하다. 저들은 그 집회들을 주관할 때에 가슴에 꽃을 달고 단상에 위엄있게 좌정한다. 저들이 촉구하는 회개는 단상 아래에 있는 신자들의 회개이지 단상 위에 좌정한 자신들의 회개가 아니다. 물론 저들도 그 집회를 통하여 회개를 한다. 그러나 저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의식적 회개, 형식적 회개, 거짓 회개이다. 왜냐하면 저들의 회개는 집회적 회개로 끝날 뿐 저들의 실제적 삶은 회개와 전혀 관계없이 동일하게 계속되기 때문이다. 저들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면 저들의 사역현장, 삶의 현장이 오류와 타락과 부패에서 진리로 복귀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의 사역 현장, 삶의 현장은 전혀 진리로 복귀되지 않는다.

제3장. 제자훈련교회와 제자훈련.

1. 제자훈련 사명.

제자훈련교회는 제자훈련교회라는 명칭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제자훈련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 사명을 받은 자들을 모아 제자훈련교회를 설립하셨고 그들을 교육, 훈련, 연단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 사명자들에게 제자훈련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사명감을 부여하셨고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도 극복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신념을 부여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양한 영역을 이끌어 갈수 있는 능력과 은사를 부여하셨다. 제자훈련 사명자들의 삶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이며 따라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제자훈련을 위한 삶이며 곧 하나님을 위한 삶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무엇에 대한 소유욕이 전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우기 위한 목표만이 있을 뿐이다.

2. 제자훈련 목적.

제자훈련교회는 다음과 같은 목적 하에 제자훈련을 실시한다.

1)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경륜을 정립한다.
2)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경륜을 정립한다.
3)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인격적 경륜을 정립한다.
4)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사명적 경륜을 정립한다.
5) 제자훈련을 통하여 교회의 갈등과 반목과 분열을 종료한다.
6) 제자훈련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를 정상화한다.
7) 제자훈련을 통하여 세계 선교를 진행한다.
8) 제자훈련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를 세계 기독교의 중심으로 발전시킨다.

3) 제자훈련 결과.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경륜, 신앙적 경륜, 인격적 경륜, 사명적 경륜이 정립되면 한국 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발전할 것이다.

1) 한국 기독교의 위상이 크게 신장될 것이다.
2) 한국 기독교인들이 존경받고 인정받을 것이다.
3) 기독교 지도자들의 비 진리와 오류가 통하지 않고 오히려 거부되어질 것이다.
4) 저급하고 오류 되고 변질된 지도자들은 설자리를 잃게 되어 자연적으로 퇴출되거나 아니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회개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바른 신학, 진리의 신학으로 복귀할 것이며 지도자로서의 순전한 신앙을 회복하고 지도자로서의 인격과 사명감을 재정비하여 소명을 다하는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5) 한국 기독교는 차원 높은 기독교의 본질과 기독교의 본래적 사명을 회복할 것이다.

6) 한국 기독교의 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에는 이제 더 이상 분열, 반목, 갈등, 투쟁 등등의 비 진리적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교회와 교회의 연합 속에서 각각의 사명을 지원하고 추진할 것이다.
7)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될 것이다.


****
이와 같은 결과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요구되어질 것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갖는다.
어떤 극단주의자들은 차라리 16세기의 기독교 개혁과 같은 극단적인 개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한국 기독교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일거에 몰아내고 새로운 지도자들로 구성된 기독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방법에 반대한다. 16세기의 기독교 개혁이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를 청산하고 새로운 기독교를 탄생시켰으나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 <로마 카토릭>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저들은 여전히 존재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기독교의 본체이고 개혁주의 기독교를 <변절자> <불 순종자>로 정죄한다.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기독교 개혁은 기독교를 모래알처럼 분열시켰다. 기독교 개혁이라는 깃발아래 수많은 교파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하였고 그 교파들은 다시 수많은 교단들로 분열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참담함을 반복할 수 없다.
어떤 착한 사람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끼고 자신들의 오류와 부패에 대하여 철저히 회개하며 진리로 복귀하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변화되어 진리로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더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 될지라도 성경에 계시되고 명령된 바대로 <제자훈련>-마28:19-20>을 통한 기독교의 회복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은 방법은 성경에도 수없이 명시되어 있지만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기독교 역사를 고찰해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오만방자한 각종 불순종들과 비 진리적 악행들을 갑자기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오랫동안 수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지도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불의와 비 진리를 행하였음에도 그것을 즉시즉시 단죄하지 아니하시고 수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시면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면서 서서히 바로잡아 나가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과 섭리역사를 보고 배운 자들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방법과 섭리에 입각하여 우리의 사명을 진행한다.

3. 제자훈련 방법.

1) 일반성도 교육 훈련.

제자훈련교회는 일차적, 기본적으로 교파, 교단, 직분 등등을 초월한 일반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으로 교육한다. 이 교육 훈련 과정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기초적이며 일반적인 신학과 신앙을 강의하며 기독교에 대한 제반 질서와 규율 등등을 강의한다. 일반 성도에 대한 교육은 일상적인 <정규 교육>과 교육생들의 형편을 고려한 <수시 교육>과 여름, 겨울방학을 이용한 <특별 교육> 등등으로 진행된다.

2) 지도자 교육 훈련.

제자훈련교회는 일반 성도들을 교육 훈련하는 과정에서 지도자 사명 받은 자들을 특별히 선발하여 지도자로 양성한다. 지도자들은 제자훈련교회와 같은 소속 하의 교육 기관인 바울 신학교에서 대학부 4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바울 신학 연구원에서 3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다. 저들은 7년 동안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목회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등등을 비롯한 전문적인 지도자 교육을 받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7년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각자 부여받은 사명에 따라 직분자로 세움 받으며 직분에 따라 지도자로서의 직무를 이행한다.

3) 청소년 교육 훈련.

제자훈련교회는 기독교에 소속된 학생들을 유치부에서 대학부까지 단계별로 구분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교육을 실시한다. 그리고 또한 종교에 관계없이 전국적인 청소년 교육을 실시한다. 이때에 기독교 학생들은 기독교적인 교육을 실시하지만 일반 청소년들은 기독교적인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청소년에 적합한 인성 교육과 국가관, 민족관, 사회관 등등에 관한 교육을 실시한다.

4) 일반 사회인 교육.

제자훈련교회는 일반 사회인들에 대한 교육도 실시한다. 일반 사회인들에 대한 교육은 일반 청소년 교육과 마찬가지로 이성교육, 인성교육, 국가관, 민족관, 사회관, 가정관 등등을 교육한다.


4. 제자훈련교회의 소망.

1) 제자훈련소 설립.

제자훈련교회는 위와 같은 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교육에 전담할 남녀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며 전국 각처에 교육시설 <제자훈련소>들을 설립한다. 전국 각처에 세우는 <제자훈련소>들은 기도와 휴양을 겸할 수 있는 시설들로 세워지며 아울러 양로원과 청소년 가장들의 삶의 터전도 아울러 세워진다. 제자훈련소에 소속된 모든 기관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무료로 사용하게 된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교육, 침식 등등의 일체를 무료로 공급받으며 각종 편의시설도 무료로 사용한다. 이와 같은 운영 방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8>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방대한 제자 훈련소를 무료로 운영하면 과연 운영이 되겠는가? 하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심 없이 정직하고 진실하게 운영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매월마다 수입과 지출 일체를 게시판에 상세하게 계시하여 제자훈련소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운영할 것이다. 제자 훈련소는 집회를 통하여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나 각종 편법, 위법, 탈법 등등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제자 훈련소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운영할 것이며 없으면 없는 대로 운영할 것이다. 결코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2) 한국 기독교 개혁.

제자훈련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가 개혁되기를 소망한다. 한국 기독교 성도들이 제자훈련을 통하여 바른 신학과 신앙을 정립하고 그 신학과 신앙에서 비롯되어진 기독교적 인격과 사명을 수립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바울 신학교와 바울 신학 연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양성되고 배출되어 한국 기독교를 기독교 본연의 위치와 권위로 회복시키며 나아가서 세계 기독교를 바로 세우게 되기를 소망한다.

****
제자훈련교회의 소망을 정리하는 우리의 마음은 심히 안타깝다. 제자훈련교회는 이제 시작하였기 때문에 제자훈련소 건립이나 한국 기독교 개혁을 하기에는 경륜이나 능력에서 매우 부족하다. 제자훈련소 건립이나 한국 기독교 개혁은 경륜과 능력을 겸비한 몇몇 대형교회들이 연합한다면 즉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제자훈련 교회가 감당하기에 그것은 너무나 큰 과제이며 따라서 언제 그와 같은 일들이 본격적으로 추진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할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을 갖춘 대형교회들이 침묵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제자훈련교회에 부여하셨으며 따라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자훈련교회는 먼 훗날, 제자훈련교회가 이와 같은 결실을 맺었을 때를 소망하면서 더욱 큰 소망을 갖는다. 우리는 이 소망을 제자훈련교회의 소망이라고 하지 않고 범 기독교적이면서 또한 국가적, 민족적 소망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가 그와 같은 열매를 맺으면 한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를 아우르고 지휘하는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세계의 열강들을 아우르고 이끌어 가는 세계의 지도국가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들의 소망을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소망이라고 비웃을 것이며 우리를 공자나 노자와 같은 이상주의자로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공자나 노자에게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원적 함께 하심>이 계시다. 우리는 이러한 승리의 역사를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로마의 기독교>를 통하여 확인하고 보증 받는다.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은 동양의 변방 팔레스타인의 작은 국가였지만 하나님의 함께하심 속에서 <시바의 여왕>에게조차 조공을 받는 세계적 국가로 부상하였고 <로마의 기독교>는 처음에 수많은 순교의 박해 속에 <카타콤 예배>를 드렸지만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세계 기독교를 지휘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문제는 국력이나 국토가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과 신앙과 인격과 사명이다. 세계를 호령하던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배교와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세계 기독교를 지휘하였던 <로마의 기독교>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배교와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기독교에서 이탈되어지는 비극을 맞았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신학과 신앙과 인격과 사명을 갖추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로마의 기독교>처럼 세계 기독교를 아우르고 지휘하는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될 것이며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처럼 세계 각국을 지도하고 이끌어 가는 세계적 지도국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결과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이러한 결과들은 적어도 백년 이상의 긴 시간과 수많은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백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 후의 승리를 소망하면서 지금 이 순간 벽돌 한 장을 만드는 신념으로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결국은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아름다운 결과를 내다보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시대에 이루어지리라는 기대와 욕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단계까지의 사명 완수에 충실하며 그 후의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다. 우리는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한마디 불평하지 않은 것을 본 받아, 초대교회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극심한 탄압 하에 죽음으로 신앙을 지켜야 했던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원형 경기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순교했던 것을 본받아 오직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 우리는 먼 훗날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를 미리 자축하면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자신이 부름 받고 쓰임 받는다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을 오해하여 우리를 민족주의자, 국가주의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다만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다.

제4장. 기독교.

기독교를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오만하고 교만한 종교, 비과학적 종교, 과대망상의 종교, 비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인 종교 등등으로 몰아 부친다. 기독교에 대한 저들의 개념은 성경에 기록된 각종 역사들이 인간적, 종교적 범주를 크게 초월하기 때문이다. 우주만물의 창조기사로부터 시작되는 성경은 출애굽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인간의 범주를 크게 초월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사들이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기사들은 지극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다. 뿐만 아니라 저들이 비난하는 기독교의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내용들은 인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지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저들의 종교야말로 허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과학적이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다. 일반 종교가 섬기는 존재들은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허구적인 주장으로 사람들을 오도<誤導>하였으며, 그들의 삶 자체도 한결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벗어나는 패륜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신들의 비논리적, 비과학적, 허구적, 비윤리적, 비도덕적, 3류 종교 교리는 절대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하는 반면에 오히려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진리인 기독교의 교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저들이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저들에게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며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미신<迷信>적 3류 종교로 무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장에서 위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대비<對備>하면서 기독교의 모든 것을 신학적, 역사적으로 정립한다.

1. 기독교의 명칭.

1) 기독교 명칭의 의의.

기독교<基督敎>라는 명칭은<영-christianity> <라-christianismos>라는<그리스도-교-敎>에 대한 한국적 명칭이다. 그리스도교<영-christianity> <라-christianismos>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인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는 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에서의 명칭은 신앙적 차원에서의 명칭이다. 기독교 명칭의 참된 의의는 신앙적 차원에서 규명되어져서는 안 된다. 신앙이란 그것이 제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명칭의 참된 의의는 신학적 차원에서 규명되어져야한다. 왜냐 하면 기독교는 사람을 위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명칭 자체가 그것을 내포하고 있듯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정점으로 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오직 유일한 통로요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한 오직 유일한 <중보자>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오직 유일한 <길>이 되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강림 하였으므로 오직 유일한 <진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됨으로서 성도들이 자신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취득하게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한 하나님 사람들의 유기적 연합<조직사회>이다.<엡1:22-23> <골1:18>

2) 기독교 명칭의 역사적 유래.

바울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생활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들의 <야훼> 신앙을 <유대교>라고 명명하였다<갈1:13>. 그리스도의 복음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어가던 초대 교회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라는 명칭은 바울이 말한 유대교와의 구별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기독교라는 명칭이 바울이 말한 유대교에 대응하여 교회 내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사도 교부-예수 그리스도 직제자들의 뒤를 이어나가는 A.D.1-2의 기독교 지도자들>시대 이후였다. 기독교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가장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의 감독<주교>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였고, 기독교인의 신앙적 삶을 특징짓는 뜻을 가진 용어로 그가 사용한 문서의 이름은 <Letter to the Magnesi>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 삶을 사는 사람들과 유대인 및 유대교적 전통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뚜렷이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용어였다.

3) 기독교 명칭에 대한 성경의 증거.

성경은 기독교라는 명칭에 대하여 사실상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또한 유일한 메시야로서,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종들, 하나님의 교회를 통치하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선포한다. 따라서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라는 명칭으로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또한 선포하는 것이다.

2. 기독교의 정 위치.

일반적인 종교 개념에 의하면 현존하는 모든 종교들을 학문적, 사회적, 차원에서 종교라고 명칭한다. 종교론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의 위치를 논증하는 것에는 대략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째... 기독교를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종교들 중 하나로 간주 하는 것.
둘째... 오직 기독교만을 종교라 하고 그 외의 다른 종교를 우상숭배로 무시하고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것.
셋째...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를 종교의 범주에 두고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서 초월하여 다만 기독교의 위치에 두는 것.

이와 같은 견해 중에 첫 번째 것은 비 기독교인들의 견해로서 지극히 일반론적인 반면에 둘째와 셋째의 견해는 기독교인들의 견해로서 비 기독교인들의 견해와 크게 충돌되는 것이다. 반면에 둘째와 셋째의 견해 중에 어떤 것이 더욱 매력적이냐 하면 그것은 당연히 세 번째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여타의 모든 종교를 전혀 무시하고 오직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함으로서 기독교의 위상을 매우 드높였으나, 실상은 세 번째 것에 비하여 오히려 약하다.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여타의 모든 종교를 종교라는 높은 위치에 좌정시킨 후,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없으므로 종교의 범주에서 초월하여 기독교라는 독립된 명칭으로 존재한다는 세 번째의 견해가 기독교의 위상을 확실하게 높인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가 인류사회에 존재하는 여타의 종교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엄금하셨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 출20:1-5>

이와 같은 선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포가 아니다.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존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포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선포는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존재이심을 선포하시는 동시에 기독교만이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종교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인류 역사에 존재하였던 수많은 종교 중에 그 어떤 종교도 이와 같은 선포를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 종교들에게 <하나님>에 버금가는 신이 없었음을 자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종교들이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종교가 못됨을 스스로 자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종교로서 일반종교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다.

2) 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하였던 모든 종교들은 인간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인간들이 신을 만들어 내었고 제사 방법과 제물을 만들어 신을 섬겼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위하여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섬기는 제사 제도와 제사 방법을 만들어내었으며, 또한 신과 자신들 사이에 중계자들을 세워 그들을 통하여 신과 교제하고 신을 섬기다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더욱 능력 있는 신들을 새로이 만들어 낸 후 병행하여 섬기거나 새로운 신을 섬기고 먼저의 신은 퇴장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수많은 종교의 이름 하에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어떤 종교는 그 수명이 불과 반세기도 되지 못할 만큼 짧은가 하면, 어떤 종교는 계속하여 신들이 보강되고 첨가되어지는 가운데 수십 세기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하였다. 반면에 그러한 종교는 계속되는 보강과 첨가로 인하여 본래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에 의하여 설립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된 종교는 인간에 의하여 설립된 종교와 본질, 품위, 권위, 등등에 있어서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을 찾아오셨으며 모든 의식들과 규례들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과 의식들은 여타의 종교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의 신학은 일반 종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특별성을 갖는다.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교리와 <로고스>의 동정녀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한 인류구원의 교리, 등등은 일반 종교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교리 들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예배 의식은 타종교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룩성과 신실성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선포하셨을 때, 그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의 오직 유일한 중보에 의한 예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일반 종교적 의미로 말한다면-신의 이름으로 신에게 예배드리는>것으로서, 일반 종교에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일반 종교들과 같은 반열에 있을 수 없고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3) 오직 기독교에만 우주적인 창조가 있다.

신은 모든 면에 있어서 절대적 존재이어야 하며 신의 절대성은 그가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신의 통치 하에 있는 것들은 자연히 그의 소유이며 그 소유권은 그것이 그 신에 의하여 창조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창조란 모름지기 절대 무<無>에서의 창조일 때에 비로소 완전한 창조의 예우를 받을 수 있으며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창조일 때에 창조 또는 창조주에 대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일반 종교에는 이렇듯 창조 또는 창조주로서의 예우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근거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 종교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거나 있다 하여도 지극히 초보적인 것이거나, 또는 지엽적인 것으로서 <전설>이나 <신화>적 수준에 불과하다. 그들의 우주 만물 기원과 내력에 대한 기사들을 고찰해보면 한결같이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무<無>로부터 출발되어지는 창조는 없고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부터의 분리, 파생, 진화, 발전 등등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창조 또는 창조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조물 또는 조물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는 우주 만물에 대한 전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창조를 선포하고 있다. 기독교의 창조는 하나님에 의한 무<無>로부터의 창조이며, 우주 만물의 기원과 내력은 물론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시간의 기원과 내력이 포함되어 있고, 인간의 육체와 영혼과 정신과 사상에 대한 기원과 내력까지 완전하게 포함되어진 참으로 완전무결한 창조이다.

4) 기독교는 완전무결하다.

일반 종교들은 인간들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므로 그 수준이 완전무결한 신적 차원이 되지 못하고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적 수준이다. 일반 종교의 불완전성은 저들이 제례의식과 교리들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수시로 바꾸고 계속적으로 수정, 보완하는 것에서 증명된다.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종교의 변경과 수정, 보완을 종교의 발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의 발전은 결국 그, 종교의 불완전성과 미완성을 자증하는 것이다. 종교가 완전하게 완성되었다면 결함이나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변경, 수정, 보완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되었기 때문에, 변경, 수정, 보완이 전혀 필요 없다.
종교학자들은 기독교도 발전하였다고 말한다. 물론 저들의 좁은 안목에서 보면 기독교도 발전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구약시대 기독교와 신약시대 기독교가 크게 다르며 신약시대 기독교도 초기 신약시대 기독교와 현대 기독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발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구약시대 기독교와 신약시대 기독교 사이에 차이가 있거나 또는 초기 신약시대 기독교와 현대 기독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실제로 차이가 있거나 또는 발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만한 경륜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서서히, 점진적으로 기독교를 정립시켜 주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규명되지만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입증된다. 첫째는 성경의 완전성이고 둘째는 아직도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부족성이다. 성경은 구약시대의 성경과 신약시대의 성경이 하나로 연계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신약시대를 예고하고 예표하는 반면에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이 예고하고 예표한 것을 완성하고 입증한다. 따라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리하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함께, 그리고 영원히 유효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7-19>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진리를 성경 말미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계22:18-19>

이와 같이 구약성경을 통하여 예고, 예표되고 신약성경을 통하여 완성된 성경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까지 영원히 유효하다. 이러한 성경의 완전성과 영원한 유효성은 곧 기독교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변경, 수정, 보완, 발전 등등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하게 정립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완전무결한 기독교의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함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 오류, 왜곡, 변경, 누락, 추가하는 등등의 어리석음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나는 각종 변경, 누락, 추가 등등은 기독교의 발전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오해, 오류, 왜곡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우주적인 문제.

인류에게 있어서 땅과 바다에 존재하면서 계절에 따라 생성<生成>을 거듭하며 묵묵히 자신들의 영역적 역사를 전개하는 대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지하에 매장되어 있으면서 인류에게 자원을 공급해주는 각종 지하자원들의 정체와 그들의 격동적인 운동은 한편으로는 중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운 존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주 공간에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는 은하계<銀河界>이다. 영원히 타오르면서 낮의 대자연을 주관하는 영원불변한 태양의 정체, 밤하늘을 아름답게 밝혀주면서 바다를 비롯한 대자연의 밤을 주관하는 달의 정체, 저 광활한 우주에 끝없이 전개되어 있는 별들의 존재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들이다. 인류는 유사이래 지금까지 그러한 것들의 시작과 진행, 존재 원리 등등에 대한 원인규명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우주는 자신들의 세계를 밝혀주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간섭을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철학과 과학이 우주의 생성 원리와 진행 원리를 밝혀 내기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지극히 일부분에 대한 해답을 얻었을 뿐이며 그것도 완전한 해답이 아니라 추측과 가정이 포함된 불완전한 해답이었다. 한때 일부 종교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통하여 우주의 신비를 밝혔으나 저들의 주장은 지극히 허구적인 것으로서 철학과 과학이 밝혀낸 것에 혼란만 가중시켰다. 때문에 철학은 우주를 형이상학적 존재라고 하였고 과학은 불가사의한 존재라고 하였으며 종교는 신비한 존재라고 하였다. 이러한 저들의 결론은 당연한 것이었다. 저들은 우주를 하나님의 목적 있는 창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배제한 채 우주에 대한 결론을 찾아내려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한 것이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신적 작정하에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였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관리하신다. 때문에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와 진행 원리는 철학에게는 형이상학적 존재이고 과학에게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종교에게는 신비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존재일 뿐이며 때로는 우주에 엄청난 사건이 도래하여 곧 종말이 닥칠 것 같으나 하나님의 섭리를 근거로 할 때에 그것은 곧 정리될 평범하고 일상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진 후에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우주적 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유유히 자신들의 영역을 진행해 나가도록 완전하게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적인 문제.

인류는 자신들의 문제에 대하여 항상 고심하여 왔다. 인간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존재했으며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존재되고 진행하여 현재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과 각고의 연구를 거듭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우주만물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철학은 인생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었으나 <나그네, 부평초, 뜬구름> 등등과 같은 시적 표현만 남겨 놓았을 뿐 인생의 본질을 찾는 것에 실패하였고, 과학은 인체에 매달려 수많은 시간과 정열을 기울였으나 <만물의 영장, 작은 우주론, 진화론> 등등의 학술적 용어들만 제시한 채 아직도 여전히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종교는 더욱 한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수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용감하게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으나 퇴폐적이고 허구적인 혹세무민<惑世誣民>의 3류 우상숭배 사상만 만연시켰을 뿐이다. 철학, 과학, 종교의 실패는 당연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 목적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나 철학, 과학, 종교는 이러한 진리를 거부한 채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현재까지 실패를 거듭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인간을 규명하면 매우 간단한 것을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해답을 구하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철학, 과학, 종교가 전혀 밝혀내지 못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확실하게 그리고 간단명료하게 정립시켜 준다. 인간의 근원과 출발시기, 인간의 생성원리와 목적, 인간의 현재성과 미래 등등에 대하여 완전무결하게 정리해 주는 것이다.

(3) 영적인 문제.

인류 초미의 관심사는 역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문제였다. 인간의 조그마한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두뇌<頭腦>를 통하여 전개되어지는 각종 사상과 천차만별의 개념과 이념들, 그리고 백절불굴의 정신들과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지혜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발전되어 왔을까? 또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굴복시키고 포기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절망하게 하거나 반대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환시켜 놓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저 위대하고도 숭엄한 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부모형제까지도 원수로 만들어 적대하게 만드는 미움은 무엇에서 발생하며 온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기까지 하는 저 무서운 욕망의 정체는 또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인가? 선함은 어디에서 왔고 악함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긍극적 실체인 영혼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류역사는 이러한 문제를 알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과 정열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도록 해답은 그 어떤 것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철학이 인간들의 영혼에 대하여 노심초사한 끝에 얻어낸 결론은 <이데아의 세계>라는 수식어뿐이었고 과학이 영혼과 사투를 벌인 끝에 찾아낸 결론은 <심령술> 또는 <체면 요법>이라는 한 모퉁이에 불과하였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어려움을 아예 포기하고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책임지겠다는 시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저 오만방자한 종교들이 남긴 유산은 인간의 영혼을 책임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황폐, 염세, 침체시켰을 뿐이며 인간의 영혼을 담보로 하여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3류 종교적 부류들을 양산했을 뿐이었다. 결국 철학과 과학은 인간의 영혼문제에 대한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 채 오히려 인간 영혼에 대한 혼란과 의혹만 증폭시켰으며 종교는 영혼을 미끼로 하여 인간을 혹세무민하는 3류 종교들을 무수히 양산하는 사회적 병폐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확실하고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인간영혼의 본질과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을 완전하고 분명하게 정리해 주었다. 기독교가 인간 영혼에 대하여 완전하고 확실한 정립을 해준 것은 인간 영혼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관리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인간의 영혼 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 일반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은 사기이며 거짓이다. 일반 종교들은 모두가 허구이거나 또는 사단의 영향 하에 있는 것으로서 때로는 인간의 영혼에 어떤 간접적인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인간의 영혼에 직접적인 관여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5) 오직 기독교에만 인간의 영혼 구원이 있다.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교만 중에 하나는 자신들에게 어떤 문제<특히 인생>에 대한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결코 어떤 것<특히 인생>에 대한 아무런 해답이 있지 못하며 사실상 있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의 신과 교리를 통하여 입증된다. 일반 종교의 신들은 한결같이 살아있지 않은 죽은 신들이다. 그들의 신은 가공된 것이라 지금까지 그 실체를 보여주지 못했다. 따라서 살아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죽은 신인 것이다. 어떤 종교는 현존하였던 인간을 신격화하여 섬기지만 그 역시 살아 존재하지 못하는 죽은 존재이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조차도 살아 있지 못한 존재가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교리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일반 종교의 신들은 살아 있지 못함으로서 자신들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교리가 성립될 수없다. 때문에 인생문제는 언제나 본인이 해결하게 되어있다. 본인의 선한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문제를 해결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종교의 교리에는 그 종교의 신이 인생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아무런 약속이 없다. 다만 그 종교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식으로 신도들을 이끌어가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상 거짓말이다. 한국 불교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성철>은 임종을 앞두고 한국 불교 지도자들의 그러한 거짓말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의를 허락하지 않는 증거와 선포를 단행하신다. 이스라엘과 로마의 국가적 역사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였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생>이 아니라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인류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와 섭리주로서의 주권을 통하여 인류의 생사화복을 직접 주장하시는 것이다.

6) 기독교에만 우주적인 심판과 종말이 있다.

일반 종교들에게는 우주적인 종말이라든가 또는 우주적인 심판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세계적 종교 중에 우주적 종말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언급한 것은 <힌두교>인데, 힌두교의 우주적 종말은 그들의 창조론과 연계된 것으로서 신의 목적에 의한 섭리적 종말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적 현상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일반 종교에는 우주적인 종말이나 심판에 대한 것은 없고 다만 인간의 개인적인 종말이나 심판만 존재한다. 일반 종교에 우주적인 종말에 대한 신학적 교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목적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있으며 인간의 내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장차 하나님께서 우주를 심판하시거나 종결지으신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선포한다. 그리고 그 우주적인 심판과 종결 속에 인류의 심판과 종말이 포함되어진다. 그것은 창조주로서의 주권적인 권리이며 필연적인 섭리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당연한 종결인 것이다.

3. 기독교의 기원.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유대교로부터의 독립.

종교역사 학자들은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본다. 기독교는 본래 이스라엘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였던 유대교였는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대교에 머물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하여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하였다고 이해한다. 종교역사 학자들의 이러한 개념은 기독교를 표방하는 이단자들을 통하여 더욱 발전되어진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 이단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메시야였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여 십자가에 처형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계획을 변경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메시야로 확장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저들은 만약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지 않고 메시야로 받아 들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의 메시야가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기독교<유대교>가 되었을 것인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확산 되었고, 그리하여 기독교가 세계적인 기독교로 독립하여 확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논리에 의하여 저들은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크게 감사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2) 유대교로부터의 계승.

어떤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기원을 유대교로부터의 계승으로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유대교를 설립하셨고, 그 유대교를 통하여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셨으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서 유대교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가 그것을 계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일부 기독교 역사 신학자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일부 기독교 역사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로 나눈다. 저들은 구약 시대를 유대교로 명칭하고 신약 시대를 기독교로 명칭한다.
역사 학자들이 기독교의 출발을 그와 같이 구분하는 것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배격했던 유대인들에 근거한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과거에 소속되어 있던 바리새파적 교회를 유대교로 명칭한 것<갈1:13-14>에서 비롯되어졌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의 율법적인 것과 신약 시대의 복음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 사도는 구약 시대의 기독교와 신약 시대의 기독교가 오직 하나의 기독교임을 언제나 선포하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여 분리하면 안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유대교는 유대교가 아니라 사실상 기독교이다. 아직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기독교와 구분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야훼>로 고집하고 있으나, 성경은 분명히 그들의 회심을 말하고 있으며 메시야,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하여 오시기로 작정되어 있었고, 또한 그렇게 오신 것은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독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사도의 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종교를 기독교로부터 분리시키심을 확인한다. 그들은 본래 기독교의 출발이었으나 그들이 끝내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독교로부터 분리하여 유대교에 머물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배교와 불순종에 대하여 진노하사 징계와 심판의 차원에서 그들을 추방하셨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로부터 배교하여 유대교로 분리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징계와 심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저들 스스로 그리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3)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출발.

어떤 학자들은 기독교 명칭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로 주장한다. 즉,기독교는 이스라엘 국가와 유대 민족을 통하여 시작되었으나 그들과 전혀 관계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4) 오순절 날로부터의 출발.

어떤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였으나 기독교의 운영은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이므로 성령강림 이전에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기독교가 존재할 수없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의 시작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5) 창세전부터의 기원.

기독교<교회>는 창세전에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 때에 그 작정 안에는 이미 기독교가 존재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영원하고 완전하심으로 당연히 창세에서부터 우주의 종말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것을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알고 계셨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의 기원도 당연히 영원전의 그 작정 속에 포함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창세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만약에 기독교가 유대교를 계승한 것이라거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 한다거나 오순절 날에 이르러 비로소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구약 시대의 교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가 아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당연히 구원과 무관하게 된다. 구원이 교회로부터 비롯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과 교회는 분리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며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작정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은 그것이 결과로 나타났을 때를 완성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정하신 그 자체로서 이미 완성된 것이며, 따라서 작정과 동시에 영원히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유대인들과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 한다거나 오순절 날에 이르러 비로소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구약시대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배제해야한다.

4. 기독교 창립.

1) 기독교 창립자.

기독교는 사람에 의하여 창립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기독교를 창립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다. 기독교의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며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진행하지만 기독교의 창립과 기독교의 진행 일체에 대한 주권과 섭리 일체는 성부 하나님에 귀속되어 있다.

2). 기독교 창립 목적.

일반 종교가 설립된 배경과 목적에 의하면 일반 종교는 신을 위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일반 종교가 설립된 배경과 과정에는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리하여 그,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을 위무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들이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을 위무하려는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은 결국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현재적, 미래적, 길흉화복들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신<하나님>을 의존하여 어떤 유익을 도모하려는 목적 하에 창립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섭리역사를 진행하시려는 목적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기독교 창립 목적은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사명> <하나님의 우주 창조>와 직접 관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창조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사람 창조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부여하신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기독교의 설립 목적과 직접 연결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창조를 비롯한 모든 것을 계획하실 때에 전지하신 속성에 의하여 이미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을 아셨고 그리하여 그에 따른 모든 후속조치를 세우셨으며 그리하여 기독교의 창립까지도 계획하셨던 것이다.

한편 기독교 역사학자들 및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라고 정립하였다. <주후 1647년>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결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비롯한 각종 신앙고백서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였고 기독교 각 교파의 헌법들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을 전제로 하여 수립되어져 있다.

3) 성경의 증거.

하나님께서 최초로 세우신 교회는 <에덴교회>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은 에덴교회의 지도자로서 기독교 최초의 성도이며 목회자였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2:8-14>

<창2:8-14>에는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교회로서 장차 계속하여 세워질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대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전체 교회들에 대한 모든 것을 상징하고 예표한다.

여기에서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첫 교회이며 에덴으로부터 발원하여 흘러 갈라진 네 개의 강은 에덴교회로부터 시작되어 동서남북 사방 곧, 세계로 확산되어지는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에덴교회는 문자적인 순서에 의하면 우주 창조의 마지막 날에 창립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로 신적 작정하신 목적을 기독교 설립의 목적과 같은 차원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 하에 <창1:26>을 기독교 설립의 시작과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며 증거라고 이해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반면에 성경은 현존하는 모든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어 졌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출발이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자존-自存>하셨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존하심으로부터 시작된 역사 자체가 곧 기독교의 출발이라는 역사적, 신학적, 개념을 대전제로하여 모든 것을 정리한다. 하나님의 자존하심으로부터 출발되는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우주 창조는 기독교의 창립을 전제로 하여 작정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를 통한 모든 것의 진행을 전제로 하여 우주 만물의 창조와 섭리 일체를 작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창립은 현재적으로는 에덴교회이지만 하나님의 자존 다음에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의 창조보다 우선한다. 즉 기독교의 창립은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4) 기독교의 상태.

<창2:8-14>은 기독교의 권세, 권위, 거룩성, 영광성 등등을 포괄적으로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과실 나무를 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도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상태적으로 아름다울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 훌륭한 결실들을 이룰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특히 강들이 아름답고 훌륭한 보석들로 상징되었다고 표현되는 것은 장차 계속하여 세워지게 될 하나님의 교회들에 대한 권세와 권위와 거룩성과 영광성을 아울러 선포하는 것이다. 에덴교회를 통하여 선포되어진 하나님 교회들의 권세와 권위와 거룩성과 영광성들은 훗날 기독교 역사들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입증된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기독교<에덴교회>는 실제로 최고, 최대, 최상의 권세, 권위, 거룩성, 영광성 등등을 유지하였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면서 최고 최대, 최상의 권세와 권위를 누렸고 거룩함과 영광적인 삶을 살았다. 우주 만물은 교회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아담<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반면에 인류 역사에 수많은 종교들이 범람하였지만 그들에게는 기독교 교회들에게 존재하는 권세, 권위, 거룩성, 영광성, 등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반 종교들에게는 인류의 생명을 영원히 책임질 수 있는 어떤 기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기독교의 본질.

1) 기독교 본질에 대한 역사적 개념.

(1)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의 개념.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는 기독교의 본질을 두 가지로 인식하였다. 첫째는 영원한 진리이며 둘째는 보편적인 구원의 원리이다. 저들이 말하는 영원한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 유행하였던 철학을 포함하여 윤리와 도덕과 법률과 질서를 총망라한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구원의 원리란 인간의 신분과 영적, 육적, 형편을 초월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 이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의 이러한 신학적 정립은 현대 신학의 기준으로서는 매우 미흡한 것이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모든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체계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가설들이 난무하였고, 인류 사회는 아직 자유 민주적인제도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의 계급적인 차별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매우 특별한 진리와 보편적인 구원론은 그들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2) 중세 기독시대의 견해.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을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립하였다.

첫째... 기독교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는 인간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의 모든 것을 구속사적인 차원으로 몰아갔고 교회의 모든 기능을 하나님 예배<미사>로 집약하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저들은 교회 안과 교회 밖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교회 밖에서의 구원을 절대 사절하였고, 오직 교회 안에서 만의 구원과 미사를 통한 구원론을 강조하기 위하여 각종 예배의식과 엄격한 성직 제도를 신설하고 강화해나갔다.

(3) 기독교 개혁시대의 견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 개혁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교리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지게 되었다. 개혁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교회의 형식적인 예배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선포하는 교리들을 지식으로 인정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에 있다고 정의하였다. 당시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적인 면에서 규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의 기독교 본질을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논쟁과 오랜 시간을 허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며 다만 프로테스탄트를 로마 카톨릭의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것과 구분하는 것에 만족하고 말았다. 기독교 역사에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폭넓게 규명한 것은 칼빈이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신학을 정리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진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4) 현대 기독교의 개념.

현대 기독교의 기독교 본질에 대한 개념은 오히려 종교 개혁시대 이전으로 되돌아가 로마 카톨릭의 개념으로 환원하였다. 현대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질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인간의 영혼구원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저들은 심지어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 전도에만 전념해야하며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나 교육, 상공업 등에 관여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으로서 교회의 본질을 오류 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칼빈에 의해서 천명되어진 전 우주적인 기독교의 본질을 오히려 세속적인 것이라 하여 배척해버린 것이다.

2)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증거.

(1)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성경은 기독교의 본질을 창조 기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 : 27-28>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모든 만물들 위에 더욱 뛰어난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의 목적 있는 특별하신 섭리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세계, 특히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우주 영역을 인간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게 하셨다. 물론 <창1 : 27-28>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자연에만 국한된 것으로 제한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섭리적인 차원에서 광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러한 원리에서 해석할 때에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도록 창조되어졌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통하여 정립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 : 13-16>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33>

기독교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되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신앙적 삶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이다.


1) 기독교의 본질 과 사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사명이 구령사업<救靈事業>인 것으로 이해한다. 때문에 기독교는<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종교>이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을 전파> 하는 것이 사명 인 것으로 생각 한다. 때문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그 일에 전념 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기독교의 사명과 본질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기독교의 본질.

①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성경은 기독교의 본질을 창조 기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 : 27-28>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모든 만물들 위에 더욱 뛰어난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의 목적 있는 특별하신 섭리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세계, 특히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우주 영역을 인간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게 하셨다. 물론 <창1 : 27-28>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자연에만 국한된 것으로 제한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섭리적인 차원에서 광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러한 원리에서 해석할 때에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도록 창조되어졌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통하여 정립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 : 13-16>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33>

기독교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되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신앙적 삶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이다.

****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본질을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로 제한하였다.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가중요한기독교의 본질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기독교의 본질 중에 하나의 영역 인 것이다.

(2) 기독교의 사명.

① 진리의 사수와 보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진리<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교회로 하여금 진리의 귀중한 보화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게 하셨다. 교회는 모든 비 진리 자들로부터 진리<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를 사수하고 보존해야할 막중한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은 것이다.<딤전1: 3, 4> <딤후1: 13> <딛1: 9-11>. 따라서 수많은 비진리적 도전자들이 말씀에 대항하고 오류의 세력들이 도처에 난무할지라도 교회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사수하고 보존하는 사명을 완수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과 진리는 영원히 불변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② 진리의 보전 <말씀의 생육, 번성, 충만>

교회는 진리<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보전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러한 책임과 의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사명이며<마28 : 19-20>, 뿐만 아니라 아담이 태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래적 사명<창1 : 28>에 기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되, 온 세계에 복음이 생육되고 번성하여 충만하도록 그 사명을 끝임 없이 진행해야 한다.

****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이 신성한 책임과 의무를 온전하게 이행하지 않았다. 지난 수 세기동안에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에 대한 적대적 비평을 오히려 받아들였고,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특히 근자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이 도처에서 함부로 오류 되고 변질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고 바로 잡아야할 책임과 의무를 가진 자들이, 그것을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과 연합하고 있고 야합하고 있다.

③ 복음에 의한 정복과 통치.

교회는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지위를 회복하신 것도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라는 조직 사회를 세워 주신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복음<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되고 통치되고 관리되어지는 가운데 세상이 하나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마6 : 13-16>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복음으로 무장시켜 그들을 사회 각 영역에 빛과 소금의 전사들로 파송하여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밝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함으로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하여야할 막중한 책임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완전한 독립적 체제를 이루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의 독립은 상호 불가침의 독립이지만, 교회는 국가에 대하여 선지자적 직무를 행하여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국가 정부가 비 진리적 상태에 직면하면 교회는 선지자의 직무를 행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국가 정부에 권면하고 충고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외면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와 국가 정부를 분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비 진리적 분리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적 분리

교회는 교회와 세상을 영적으로 구분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세상은 악하고 추한 것으로 구분한 것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영적 구분에 의하여 교회의 영적 순수함을 보호한다는 개념 하에 교회와 세상을 엄격히 구분하였고, 성도들의 삶을 교회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또한 구분하여, 세상적인 삶을 버리고 교회적인 삶으로 가꾸어가도록 유도하였다. 의식주와 문화적인 것을 교회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성도들의 삶을 세상으로부터 계속하여 격리시켜 나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세계를 사단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세상은 사단의 통치 하에 있는 사단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구분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결코 악하고 추한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완전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큼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상태적으로 저하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답다. 악하고 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을 운영하고 인도하는 인간이 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은 악하고 추한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악하고 추한 인간들을 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이러한 구분은 교회의 사명을 외면한 어리석은 구분이다. 교회는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정복하게 하여야한다.

2> 영역적 분리

교회는 교회와 사회를 분리시켰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상공 등등의 조직 사회로부터 교회를 분리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러한 영역에 대하여 전혀 관계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도를 통한 인류 구원에만 전념해야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격리를 추구하는 동안 교회는 사회로부터 점점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는 가운데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은사와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교회가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자초하여 ,이제는 사회로부터 정복되어지고 통치되어지고 관리되어지는 역<逆>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3> 시간적 분리

교회가 구분한 또 다른 것은 시간적인 구분이다. 교회는 시간을 <주의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주의 것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세상 것은 악하고 추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주일날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그 외의 날들은 악하고 속된 날들이라고 강조하였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그 외의 시간은 악하고 속된 시간으로 분리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구분은 시간을 하나님의 것과 사단의 것으로 구분하는 것으로서 매우 잘못된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심으로서 시간조차도 자신의 통치 영역에 속한 것임을 만 천하에 선포하셨다. 시간이나 장소에 대한 거룩함이나 신성함, 또는 악함이나 추함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느냐 하는 것에 의해서 구분되어지게 되는 것이지 그곳이 교회 안이냐? 교회 밖이냐? 하는 것과 또한 그 시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이 비록 교회 안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비 진리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곳은 악하고 추한 곳이다. 그러나 교회 밖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일들이 진행된다면 그곳은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예배가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아니라 비 진리적 예배라면 그 시간은 악하고 추한 시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아니라도 그 시간에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어떤 역사가 진행되어진다면, 그 시간은 분명히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간을 내적, 진리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고 외적 형식적 차원에서 구분하는 것은 비신학적이며 비 진리적인 것이다.

4. 복음의 교육과 성도의 관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성도의 신앙적 관리를 사명으로 부여하셨다<마28 : 19-20>. 교회에게 부여된 성도의 신앙적 관리는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세례의 집행

교회가 성도들에게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서 법적, 행정적인 것이다. 성도들은 세례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법적, 행정적으로 보증 받으며 또한 확인하게 된다.

2> 복음의 교육

교회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과는 전혀 다르다. 교회 교육은 신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그 학문은 일반적인 학문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것으로서 어떤 이론이나 학설이나 사상과 같은 학술적인 것이라,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교회 교육은 또한 교회의 역사를 가르치지만 그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서 과거는 물론이요 이미 예고되어진 미래의 것까지를 포함하는 전 우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하나의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교회 교육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또한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지고 그 결국이 어떻게 되어지리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왜 그렇게 시작되었고, 왜 그렇게 전개되어져 왔으며, 왜 그렇게 종료되어지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필연성들을 가르쳐야한다. 때문에 교회 교육은 사실상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대한 증거이고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교회 교육의 원리를 실천적 교육 방법을 통하여 전수하셨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요13 :4-10> 하시면서 철저한 실천적 삶을 통하여 교육의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사도들의 교회 교육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초대 교회들의 지도자들 역시 그와 같은 전통을 이어갔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방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철저하게 실천적으로 시행되어져야한다.

3> 성도의 관리

교회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지도 관리하여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도 관리는 사역자들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 직원들의 실천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야한다. 교회 교육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 교육의 원리이고 사도들을 통하여 전수되어진 교회적 전통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직원들의 실천적 신앙의 삶은 성도들의 신앙적 삶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된다.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과 직원들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성도들을 교육하고 관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5. 교회의 설립

교회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하여야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초대 교회시대에 사도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로마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한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절대 절명의 책임과 의무였음을 자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회 설립은 성도 개인이나 또는 신앙적 단체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노회나 총회 등의 연합 기관 주도 하에 설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이나 사설 단체들이 교회를 설립하게 되면 그들이 교회의 재정권이나 운영권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회법에 의하여 운영되어야한다. 개인이나 사설 단체가 교회의 운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설립이 교회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이나 사설 단체에 의하여 이루어지면 그러한 폐단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사설 단체가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면, 그 취지를 노회나 총회에 알리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기어 노회나 총회의 주관 하에 교회가 설립되어지게 할 것이며, 교회의 모든 재정권과 경영권이 교회법대로 시행되어지게 하여야한다.

****
현대 교회는 이와 같은 교회 설립의 원칙이 무시되어지고 있다. 특히 군소 교단들은 연합 기관들이 교회를 설립할 능력이 없음으로 인하여 개인들이 교회를 설립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따라서 교회의 재정권이나 경영권도 전적으로 설립자 개인에게 일임되어져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설립자의 의사에 따라 교회의 위치나 소속이 함부로 변경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교회의 재정과 운영 문제로 인하여 교회 내에 심각한 갈등과 내분이 발생하고 있다.









① 현대 목회자들의 개념.

일부 사이비 이단들은 교회의 사명이 <귀신을 물리치고 병자를 고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목회자들은 교회의 사명이 <복음 전도>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행1:8>에 근거하며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전제로 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사회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류의 구속사<救贖史>와 연관됩니다. 기독교는 창세로부터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결정하심에 따라 설립하기로 예정된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이 범죄 하지 않으므로 인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메시야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기독교>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인류 구원문제로 인하여 설립되어졌다고 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을 인류 구령사업<救靈事業>이라고 정립하면 않됩니다. 기독교가 인류의 범죄와 그에 대한 구속사 차원에서 설립되어졌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인류 창조의 목적과 인류에게 부여된 사명에 근거한 것입니다.

한편 기독교의 사명은 에덴교회를 통하여 전체교회에 영원히 부여되었습니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모든 교회의 선두교회이며 또한 대표교회로서 수령하였습니다. 에덴교회가 받은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육과 번성을 통한 충만 이며 그 충만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으로 압축되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어떤 신학자들은 <창1:28>을 다만 문자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것을 자연에 대한 정복과 관리와 다스림으로만 해석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창1:28>을 교회적인 사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창1:28>을 당시의 입장에서만 적용한다면 그것은 교회적인 차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신학적 무지로 인한 좁은 안목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에덴은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창1:28>이 당시의 에덴교회에게만 적용되어질 때에 그것은 우선적으로 자연에 대한 것만을 의미하게 되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간들의 숫자적인 생육과 번성을 통한 지구 전역에 대한 충만함으로 제한되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 이래의 초기 인류의 생명이 매우 장구하였던 점을 통하여 분명하게 증명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직은 오직 에덴교회 하나뿐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적인 연합이라던가 하는 유기적 조직체제하에서의 교회적 사명은 아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기독교>을 창조<설립>하신 궁극적 목적은 인간<교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세계를 주권적으로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역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확장되고 발전하여>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부여된 정복과 관리의 사명은 인류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연, 정신, 사상, 학문, 문화, 예술, 등등의 영역 사회에 이르기까지 전, 포괄적으로 적용됩니다. 반면에 그러한 정복과 통치는 일반적이며 물리적인 권력과 수단에 의하여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주어진 수직적인 권위와 권세인 하나님의 말씀<신학>과 수평적인 권위와 권세<사랑과 봉사>와 실천적인 권위와 권세인 <신앙과 사명>으로 실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입니다.

****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기독교의 사명을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로 제한하였습니다.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가중요한기독교의 사명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기독교 사명 중에 하나의 영역 입니다. 한국기독교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개혁 되어야 합니다.











6. 기독교의 권위.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인 권위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는 오직 순종만을 명령할 뿐 피조들과의 연합이나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는 법과 공의<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의하여 행사되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행사되어진다. 법과 공의는 자비, 긍휼, 사랑, 등등과 조화되기 어렵다. 법과 공의에도 눈물이 있고 자비와 긍휼이 있으며 따라서 <선처-善處>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에는 사회가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는 법적, 공의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무결하고 절대영원하기 때문에 사회가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는 법적, 공의적, 한계까지도 초월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가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행사되어지는 역사적 섭리 현장에는 그 어떤 모순이나 부조리가 없으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의 이의나 항의가 용납되지 않는다.
한편 기독교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행사되고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법과 공의<하나님의 말씀-성경-로고스 신학>로 인준되었으며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학 원리는 기독교 최초의 교회였던 에덴교회에 생명의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것을 통하여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 에덴교회에 세우신 <생명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에덴교회에 세워진 생명나무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머리이며 원리로서 모든 교회에 영원히 존재하며 곧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로 존재한다. 교회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기독교도 한시적인 생명이 존재하는 일반 3류 종교와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의 교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짐으로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또한 세워질 수 있고 보장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선포하고 있으며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바가 없다<행4:12>고 단언함으로서 교회의 권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성을 갖는다고 선포한다.

7. 기독교의 권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절대적인 교회 권위는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부여하신 권세를 통하여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이며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권세는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원리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권세가 행사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던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따라서 교회에 하달되어진 권세는 도구적 차원에 있어서는 두 가지<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종>이지만 신학적 원리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즉,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 하나인 것이다. 교회에서 가시적으로 사용되어지는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의 도구적 기능에 불과하며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할 때에 교회의 권세로서의 기능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의 범죄와 관련된 과실수<果實樹>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정리한다.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은 과실수였다. 그리고 그 과실수는 다른 과실수하고는 다른 것으로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인간의 욕심을 자극할 수 있는 특별한 것, 그것은 곧 권세중 최고의 권세인 하나님의 권세였다. 하나님의 권세는 이미 사단이 욕심내었던 권세였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자들이 탐하였던 권세였다. 반면에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탐하였던 자들의 결과를 수없이 확인한다. 사단이 그랬던 것처럼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권세를 탐한 자들은 한결같이 몰락하였다.
그러나 에덴교회에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권세<과실수>를 인간의 범죄와 연관시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우신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에덴교회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권세는 인간을 유혹하고 미혹하여 넘어뜨리는 권세가 아니라 모든 교회,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권세를 세우시는 하나님 권세의 실제이다. 따라서 그 권세는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최고 최상 최대의 형이상학적인 권세로 행사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을 무시하고 거부하면서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도-道>가 된다.

8. 기독교의 사명.

(1) 현대 목회자들의 개념.

일부 사이비 이단들은 교회의 사명이 <귀신을 물리치고 병자를 고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목회자들은 교회의 사명이 <복음 전도>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개념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행1:8>에 근거하며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전제로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사회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류의 구속사<救贖史>와 연관된다. 기독교는 창세로부터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결정하심에 따라 설립하기로 예정된 것이다. 만약에 아담이 범죄하지 않으므로 인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메시야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기독교>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인류 구원문제로 인하여 설립되어졌다고 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을 인류 구령사업<救靈事業>이라고 정립하면 안된다. 기독교가 인류의 범죄와 그에 대한 구속사 차원에서 설립되어졌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인류 창조의 목적과 인류에게 부여된 사명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사명은 에덴교회를 통하여 전체교회에 영원히 부여되었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모든 교회의 선두교회이며 또한 대표교회로서 수령하였다. 에덴교회가 받은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육과 번성을 통한 충만이며 그 충만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으로 압축되어진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어떤 신학자들은 <창1:28>을 다만 문자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것을 자연에 대한 정복과 관리와 다스림으로만 해석한다. 따라서 저들은 <창1:28>을 교회적인 사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이해한다. 물론 <창1:28>을 당시의 입장에서만 적용한다면 그것은 교회적인 차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해석될 수 있다. 신학적 무지로 인한 좁은 안목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에덴은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창1:28>이 당시의 에덴교회에게만 적용되어질 때에 그것은 우선적으로 자연에 대한 것만을 의미하게 되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간들의 숫자적인 생육과 번성을 통한 지구 전역에 대한 충만함으로 제한되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 이래의 초기 인류의 생명이 매우 장구하였던 점을 통하여 분명하게 증명되어진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직은 오직 에덴교회 하나뿐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적인 연합이라던가 하는 유기적 조직체제하에서의 교회적 사명은 아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기독교>을 창조<설립>하신 궁극적 목적은 인간<교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세계를 주권적으로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간<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역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확장되고 발전하여>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부여된 정복과 관리의 사명은 인류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연, 정신, 사상, 학문, 문화, 예술, 등등의 영역 사회에 이르기까지 전, 포괄적으로 적용된다. 반면에 그러한 정복과 통치는 일반적이며 물리적인 권력과 수단에 의하여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주어진 수직적인 권위와 권세인 하나님의 말씀<신학>과 수평적인 권위와 권세<사랑과 봉사>와 실천적인 권위와 권세인 <신앙과 사명>으로 실시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었다.

9. 기독교의 특성.

1) 기독교의 절대성.

에덴교회를 통하여 하달된 생육, 번성을 통한 충만함과 정복, 다스림을 통한 관리는 교회의 사명임과 동시에 교회에 부여된 권위이며 권세였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과 권위와 권세는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교회의 사명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며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교회의 권위와 권세가 살아 역사되어지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8-17>

이와 같은 성경의 선포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우리는 그 언약을 신학적으로 정립할 때에 <하나님의 계약> 또는 <하나님의 계약신학>이라고 하며 아담교회에 주어진 언약은 사람의 행위가 전제되어지는 것이라 하여 <행위언약> 또는 <행위계약>이라고 한다. 아담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계약>은 아담교회의 승인이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체결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언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교회의 승인이나 의사를 반영한 것 이상의 은총이 배려된 것이었다. 아담교회는 피조로서의 특성상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은총적 배려에 버금가는 어떠한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담교회는 피조로서의 부족함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하는 결과를 이루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교회에게 주신 <행위언약>은 이미 실패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실패한 행위언약에 대한 후속조처로서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언약>이 또한 전제되어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말씀은 그 나무의 실과가 그를 죽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징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때의 죽음은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권세와 권위에 대한 죽음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종하면 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찬란한 역사를 진행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풍요로운 상태 하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리는 이미 앞에서 논증한바 있듯이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법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되어질 때에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반면에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될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게 된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포였다. 그러나 에덴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서 교회에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으며 아울러 교회에 부여된 권위와 권세도 몰수당하였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3:23>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에덴교회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에덴교회는 이제 더 이상 <에덴교회> 명칭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아담교회>의 명칭으로 존재하게 된다. 에덴교회가 아담교회로 존재하게 된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에덴교회가 영원히 폐지되지 않고 아담교회로 존속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관리에 대한 특별하신 섭리를 나타낸다. 만약에 에덴교회가 영원히 폐지되어진다면 에덴교회를 근원으로 하는 기독교의 계속적인 확장도 영원히 종료되어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교회의 영원성 때문에 에덴교회는 영원히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담교회로 명칭이 바뀌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에덴교회>는 기독교의 전체교회인 <천상교회>이며 <아담교회>는 현존하는 <지상교회>를 상징하고 예표한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형적인 것이다. 외형적인 교회는 내형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에 불과하다. 따라서 교회가 폐지되는 것은 내형적인 교회의 폐지가 아니라 외형적인 교회의 폐지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들을 폐지하시는 것은 교회의 외형적인 것 즉, 그릇을 폐지하시는 것이며 내형적인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들은 또 다른 외형적 교회<그릇>들로 옮겨질 뿐이다. 이와 같은 모든 원리는 기독교에 대한 절대성을 증명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때에만 그의 의를 갖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폐지되는 교회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교회가 이스라엘의 <유대교회>이며 <로마 카토릭 교회>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는 유대교회와 로마 카토릭 교회들과 같은 전철을 밟은 교회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도 이미 폐지된 교회들이 수없이 많으며 장차 폐지될 교회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교회는 폐지되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들은 외형적 교회<그릇>들이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안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폐지될 때에 함께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외형적 교회<그릇>들로 옮겨지는 것이다.

2) 기독교의 과학성과 논리성.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기독교가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비과학적, 비논리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 비 논리적일수도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주인이 곧 과학의 창조주, 논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비과학적,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적 진행과정에 여러 차례 나타난 기적, 이적, 등등의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역사들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유한적 존재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기적, 이적, 등등의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이며 따라서 비과학적, 비논리적인 사건들이지만 스스로 자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절대적 존재 완전무결한 존재이신 하나님께는 다만 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지극히 과학적인 일이며 지극히 논리적인 것이다.

3) 기독교의 윤리성과 도덕성.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기독교가 비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비윤리적, 비도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 비도덕적일수도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주인이 곧 윤리의 창조주, 도덕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비윤리적,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적 진행과정에 여러 차례 나타난 비윤리적, 비도덕적 사건들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비윤리적, 비도덕적 사건들은 모두가 인간들에 의하여 발생한 사건이지 하나님께서 범죄하신 사건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비윤리적, 비도덕적 패륜을 범한 자들에 대하여 관용을 베푸시거나 또는 오히려 그들을 들어 쓰시는 점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며 특히 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하여 불만한다. 저들은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을 하나님께서 관용으로 용서하신 것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며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과정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무참한 공격과 일방적 승리에도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을 불만하며 만인 구원론을 지지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토기장이>를 근거로 하여 선포한다.<사45:9><롬9:21>
토기장이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정립하는 신학이지만 반면에 하나님을 독재자. 편애자 등등으로 오해하게 한다. 그러나 신학을 아는 자들은 토기장이의 비유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는다. 신학은 성경의 단편적인 부분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조화있게 적용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정립한다.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1)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

하나님께서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을 관용으로 용서하신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이며 둘째는 그러한 사건들을 교훈삼아 인간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게 하심이다. 이미 앞장에서 정리한 바 있지만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초월한다. 만약에 하나님의 법과 공의가 원칙대로 시행된다면 이 세상에 징계 받지 않을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성경은 이점을 단호하게 선포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따라서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에 대한 관용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을 관용으로 용서하셨지만 그들은 결국 그로 인한 대대적인 징계를 받았다. 이스라엘은 <다윗, 압살롬, 솔로몬> 때문에 국가적, 민족적 수난과 멸망을 당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차례 경고하시고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이 끝내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음에 이스라엘에게 매우 혹독한 징계를 내리신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사람들은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에 대한 징계가 어찌하여 그들 자신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그들의 후손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내려졌는가? 하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무지이며 오류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압살롬, 솔로몬> 등등에 대한 관용을 통하여 그들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악행적 전철을 밟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교와 불순종으로 거부하였다. 따라서 저들이 받은 징계는 그 책임이 <다윗, 압살롬, 솔로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다윗, 압살롬, 솔로몬> 등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어디까지 적용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과 솔로몬>을 위대한 성군으로 추대하며 그들 시대의 부귀와 영광을 찬양하지만 그들은 분명 국가와 민족에게 수난과 고통을 안겨준 원흉들이며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심히 죄송한 자들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적용 한계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2) 가나안 진군과정의 이스라엘 승리.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과정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무참한 공격과 일방적 승리는 하나님의 무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과정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들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과정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무참한 공격과 일방적 승리는 기독교, 비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크고 분명한 교훈을 준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능과 함께 하심을 확인시켜 주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을 갖게 하며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확인시켜 주심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한다. 반면에 당시에 죽은 자들이나 수난 당한 자들에게도 그것은 자비이며 긍휼이다. 당시에 죽은 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죽음이 곧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이고 산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거나 또는 더 이상의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니 역시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이다.

****

가나안 원주민 진멸에 대한 문제.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신20:10-18>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잔혹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의 제기는 성경을 분별하지 못함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정리함에 있어서 먼저 성경의 내용을 확인한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 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 지니라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 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 신20:10-18>

성경의 내용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는 도중에 있는 민족들에 대한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가나안 원주민들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에 입성하는 도중에 있는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게한 후 그들이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받아들이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면 진멸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원주민들에 대하여는 완전한 진멸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명령은 이스라엘이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배교의 범죄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염려는 실제로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살려두어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배교하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다.
그러나 <신20:10-18>의 하나님 명령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명령이다. 즉 모든 교회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진행할 때에 가나안 원주민<비 진리자>들과 타협하고 연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과 타협하고 연합하여 결국은 하나님을 배교한 것과 같이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이 비진리와 타협하고 연합하면 비진리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신20:10-18>의 사건은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모든 종들에게 비진리와 타협하고 연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도적, 목적적, 경고이며 명령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기로 예정하신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책망받아 마땅한 악행이다. 이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책망 받아야 한다.

① 비 기독교인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

만약에 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책망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만이라면 하나님의 품<교회>로 들어오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불만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② 기독교인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

만약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들은 더욱 크게 책망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만과 이의제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줄 모르는 악행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책임과 의무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는 하나님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은 당연히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자들의 구원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악행으로서 크게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이다.

10. 기독교의 수장<首長>.

로마 카토릭의 제45대 교황 레오 1세<Leo. I, A.D.440-461.재위>는 <A.D.445년>에서 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안 3세를 통하여 교회의 수장을 교황이라고 선포하였다. 따라서 로마 카토릭의 교회 수장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황이다. 로마 카토릭 교황은 교회 수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의 모든 결정권을 교황에게 일임하였고 교황의 의복을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의복과 같이 하였으며 심지어는 <교황 무오설> 교리를 만들어 내어 교황의 말에는 일점의 오류도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수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며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수장으로 하는 지체임을 선포한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0-22>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의 수장되심은 창세전부터 신적 작정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우주 창조 때부터 실현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후 에덴교회를 설립하셨을 때 에덴교회의 중심에 세워진 생명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며 예표였다. 이, 예표와 상징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선포하신 것을 통하여 입증되어진다<요1:4; 5:24,26; 6:33,35,48,51; 14:6>.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유기적 조직체계를 이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생명의 원리>로서 기독교의 근원이며 원리이고 또한 기독교의 오직 유일한 통치주이시며 관리주이시기 때문이다.

11. 기독교 역사.

1) 역사의 주체.

일반적 차원에서 논증하면 역사학자들의 역사 연구가 인류 역사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 논증의 중심은 당연히 인간이 된다. 저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모든 역사적 논증을 전개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출발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당연하듯이 역사의 중심 역시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우주 만물은 3류 종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느 날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며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기운이나 정신이나 운동력에 의해서 생겨나고 발전된 것도 아니고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생물들로부터 진화되어 현재에 이른 것도 아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목적에 의하여 작정되고 계획되어 창조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목적에 따라 진행되어져 왔고 계속하여 진행되어져 갈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심은 당연히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일반 역사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별한 존재임으로 인간을 모든 역사의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특별한 존재인 것은 인간이 스스로 어떤 능력을 발휘하여 자체적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하셨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세계를 역사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결국 현존하는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이며 따라서 모든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정립이 기독교 역사를 중심으로 한 것이 되지 않고 일반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된다면 일반 역사의 중심인 인간이 우선이 되고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차선이 된다. 그와 같은 역사의 정립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것으로서 창조주와 피조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의 정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피조 세계를 섭리하시는 것이 되지 못하고 인류 역사를 뒤쫓아 가면서 인류 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자신의 섭리 역사를 꿰어 맞추는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역사의 정립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거부하는 용서받지 못할 악행이다.

2) 기독교 역사와 인류 역사의 관계.

인류역사는 물론이요 인류역사와 동행한 다양한 영역의 역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역사를 전개하였으나 그 모든 역사들은 결국 하나님 섭리역사의 한, 영역에 불과하다.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섭리 역사의 주역은 기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전개하심에 있어서 그 중앙무대에 기독교를 주역으로 세우셨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들의 역사를 진행시키시고 그 인간들의 역사를 아우르시고 다듬으시면서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진행시키신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독교 역사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시공간에는 언제나 이미 인류 역사가 먼저 존재하고 있었음을 통하여 증명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역사가 진행되어질 시공간에 이미 인류역사<일반역사>를 전개시키시어 그, 일반역사<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보좌적, 준비적, 예비적, 보증적, 변증적,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3) 기독교 역사의 특성.

역사란 참으로 많은 것을 아우르고 어루만지며 전개된다. 역사는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가 하면 때로는 치사하고 더럽고 유치하여 울분을 토하게하며 처절한 슬픔과 극도의 분노를 수반하는가 하면 가슴뭉클한 감동과 전율하는 희열을 선사한다. 그리고 때때로 끝없는 절망과 견딜수 없는 고통을 밀어 부치어 피를 토하는 아픔과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역시 위대하다. 역사는 그러한 모든 것을 휘감아 안고 유유히, 전개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의 특성들을 장엄한 역사, 비장한 역사. 도도히 흐르는 역사, 등등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역사는 보는 자의 견해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다. 어떤 개념과 주관하에서 역사를 보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역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다. 일반적 차원에서 인류 역사를 보면 인류 역사는 아름다움보다는 고통이 더 많으며 희망적이기보다는 절망적인 경우가 더 많고 자부심과 긍지보다는 부끄러움과 허무함을 갖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면 역사의 전반에 흐르는 주제들은 역시 위대하고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역사를 인간적 차원에서 보면 고통, 슬픔, 절망, 분노, 허무, 등등의 연속이지만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과 사명적 차원에서 보면 역사는 위대하고 장엄하고 감동적이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 슬픔, 절망, 분노, 허무, 등등은 일시적인 것인 반면에 창조주 섭리주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영광이요 기쁨이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과 면류관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12. 한국 기독교 명칭 제정.

한국 기독교의 명칭은 1904년에 제정되었다. 1904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협의하여 한국 기독교의 명칭을 <대한 예수교>로 통일하였고 따라서 교파의 명칭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대한 예수교 감리회>로 구분하였다. 당시에는 교회의 모든 행정과 역사를 미국 선교사들이 주관하였고 따라서 모든 기록도 영어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명칭이 제정됨에 따라 이때로부터 교회회의 진행 기록을 한국어로 기록하였으며 장로 장립과 집사 임명에 대한 규칙과 교육제도가 제정되었다.

제5장. 기독교 신학.

1. 신학의 정의.

신학<神學>이라는 용어는 신에 대한 모든 것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용어는 오직 하나의 신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신<神>은 최고, 최대, 최상의 존재로서 오직 유아독존<唯我獨尊>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이라는 용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오직 기독교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 신학이라는 용어가 오직 하나님과 기독교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오직 유아 독존하는 진정한 신<神>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만이 유아 독존하는 진정한 신<神>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신4:39>
<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사45:21-22; 46:9>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왕상8:23>


반면에 일반종교의 신들은 이러한 선포를 하지 못한다. 저들은 신들의 공존과 종교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들은 결국 자신들의 신과 종교가 오직 유아독존이 아니라는 것을 자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 종교들의 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우상이라고 명칭하며 그들이 내세우고 사용하는 교리나 그 교리를 집대성한 것들을 경전<經典> 또는 신학<神學>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종교 교리라고 명칭한다.

2. 신학의 본질.

신학은 하나님께서 정립하신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1)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존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로서 현존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주권<主權>을 소유하시고 행사하신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피조들과 의논, 협의,를 하지 않으시며 다만 자신의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결정하시고 선포하고 진행하신다. 이와 같이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정립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들은 신학에 어떤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할수 없고 또한 그것을 함부로 변개하거나수 정할수 없으며 다만 <아멘>으로 순종할 뿐이다.
신학은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임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신학으로 인간에게 임재하신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적 임재를 이의 없는 순종의 신앙으로 영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학적 임재와 인간의 신앙적 영접에는 <절대적>이라는 공통분모가 전제한다. 그러나 하나님 임재의 <절대적>과 인간 영접의 <절대적>은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 임재의 절대적은 주권에 의한 <받으시는 절대적>이고 인간 영접의 절대적은 순종에 의한 <드리는 절대적>이다.

2) 신학은 하나님의 속성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임재하실 때에 신학으로 임재하시며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임재를 이의 없는 순종적 신앙으로 영접한다는 신학적 원리를 잘못이해하면 하나님을 절대적 독재자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학을 정립하실 때에 인간의 의사를 전혀 하문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정립하셨으며 인간에게 임재하실 때에도 인간의 의사를 전혀 하문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임재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정립한 신학에는 하나님의 완전성과 사랑의 속성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차원의 인간을 향한 배려와 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창조의 중심은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우주 만물의 <정복자, 통치자, 관리자-창1:28>로 세우셨던 것이다. 따라서 신학을 정립하심에 있어서도 인간에게 부여된 사명을 전제로 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이 자신들에게 부여받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배려하시고 최대한으로 예우하시는 은총을 하사하셨다. 이와 같은 은총과 배려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속성이 전제되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완전한 예지<叡智,銳智,豫智,>와 지식<智識,知識>과 지혜<智慧,知慧>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까지 세세하게 완전히 알고 계심으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게 하시고 할 수 있게 하시는 데까지 배려하시는 신학을 정립하셨던 것이다.

3)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를 전제로 한다.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총체이다. 따라서 신학에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섭리 일체가 전제되어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전제로 하여 수립되어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결과를 목표로 진행되어진다. 이와 같이 신학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정립되어졌고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3. 신학의 특성.

1)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요구한다.

신학이 인간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신학이 요구하고 명령하는 것도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빛과 소금의 전사-마5:13>로 선포하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명령한 것은 신학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2) 신학은 오직 순종만을 요구한다.

신학의 특성 중 또 하나는 신학은 오직 인간의 순종만을 절대 요구할 뿐 어떤 이의나 선택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신학적 원리에 의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신학이 때때로 인간에게 어떤 선택의 기회를 허용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11:26>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5> 등등의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두 가지 길을 인간에게 제시하시고 인간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도록 허용하신 것 같다. 그러나 그 구절 뒤에 이어지는 문맥의 내용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만이 살길이며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겐 그에 따르는 징계와 심판이 있다는 준엄한 경고이며 선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학이 절대 순종만을 요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절대적 독재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신학이 요구하고 명령하는 절대적 순종은 인간에게 살길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배려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신학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신학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라고 선언한 것은 인간이 신학에 절대 순종할 때에 비로소 인간에게 참 자유가 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인간에게 어떤 선택권이 없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신학은 분명한 독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하나님의 배려이며 은혜인 것은 신학이 하나님의 전지전능. 완전무결, 무한사랑, 등등의 속성을 전제로 하여 정립되었으므로 인간의 현재적 상황이 완전하게 참작되었기 때문이다.

4. 신학의 구분.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그리고 학문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1) 조직신학.

조직신학이란 신학의 기본적 요소로서 하나님의 섭리 일체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우주창조, 인간의 원죄, 인류구원, 성경, 교의, 교회, 우주적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 목회, 등등, 기독교의 전체적인 것이 정립되어 있다.

2) 성경신학.

성경신학에는 성경에 대한 전체적인 것이 정립되어 있다. 성경신학에는 성경 66권이 기록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정립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 성경 66권에 대한 해석원리 및 방법, 성경 66권에 대한 해석 등등이 정립되어 있다.

3) 역사신학.

역사신학에는 기독교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것이 정립되어 있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역사가 이스라엘, 로마, 유럽, 등등을 거치면서 진행되어진 역사적 과정과 신학이 정립되어진 역사적 과정과 로마 카토릭이 퇴출되고 개혁주의 기독교가 성립되어지는 역사적 과정 등등이 정립되어져 있다. 따라서 역사신학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당할 때의 순교 역사와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등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순교 역사가 포함되어 있고 각종 사이비 이단자들과 비 진리자들의 교리적 도전 역사 등등이 상세하게 정립되어 있다.

4) 목회신학.

목회신학에는 교회를 통하여 진행되어지는 목회 원리가 정립되어 있다. 목회 신학에는 하나님 예배,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 교회의 행정과 치리, 교회교육, 선교 및 전도, 등등 목회 전반에 관한 문제들이 신학적으로 정립되어 있다.

5) 실천신학.

실천신학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실천신학에는 신학이 요구하는 기독교인들의 순종적 신앙,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사명 등등에 관한 실천적인 삶이 정립되어 있다.

5. 신학의 오류.

1) 신학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 <신학>에 인간의 의견을 하문하거나 참고하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신학>에 인간의 의견이 추가되거나 반영되거나 첨가되는 것을 불허하며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누락하거나 변개하거나 삭제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계22:18-19>은 하나님께서 정립하신 신학을 인간이 추가, 누락, 변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준엄하게 다스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자신이 신학의 일점일획에 전혀 손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마5:17-19>. 신학이 이와 같이 오직 수직적인 명령 체계로 정립된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신학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정립되어졌기 때문이며 다른 또 하나는 신학이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속성을 전제로 하여 정립되어졌기 때문이다. 신학이 추가, 누락, 변개를 절대 불허하는 것은 문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에 대한 추가, 누락, 변개를 더욱 강력하게 금지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섭리를 전제로 한 신학의 내용을 추가, 누락, 변개하는 것을 절대 불허한 것이다.

2) 신학 오류의 원인.

하나님께서 신학에 대한 절대성을 강조하시어 신학의 추가, 변경, 누락, 삭제, 등등을 절대 금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지지 아니하고 수많은 신학적 오류가 발생하였던 전례가 수없이 많다. 하나님의 명령이 거부되고 신학적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주권, 속성, 섭리에 대한 이해 부족.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에 다른 여러 가지를 참조해야하지만 특히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충돌하지 않는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신학>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계시이며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만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한 형이상학적인 신학 체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인간 중심, 사회 중심, 역사 중심, 종교 중심의 일반 종교적인 학문으로 전락시켰다.

(2) 목회자들의 각종 욕심.

하나님 종으로서의 사명감보다는 자신의 유익과 권익에 대한 욕심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신학>을 의도적, 고의적으로 오류, 왜곡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적용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성경과 오히려 반대되는 주장들을 의도적, 고의적으로 조작해 내는 것이다.

(3) 오류적 사상들.

기독교 역사에는 많은 신학사상들이 등장한다. 종교학자들은 각종 신학사상들을 내용에 따라 신비주의 신학, 인본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 경험주의 신학, 합리주의 신학, 이성주의 신학, 사신주의 신학, 해방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 등등으로 분류한다. 이러한 신학 사상들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 신학에 반대되거나 오류 되어진 것들이다. 그것들은 거의 대부분 신학에 추가, 누락, 변개한 것으로서 하나님께 징계 받고 심판받아 마땅한 악한 사상들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러한 사이비 오류 사상들에 대처하여 보수주의 신학, 정통주의 신학 등등의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주의 신학, 인본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 경험주의 신학, 합리주의 신학, 이성주의 신학, 사신주의 신학, 해방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 등등을 신학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비 진리적 사상들을 신학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신비주의 사상, 인본주의 사상, 근본주의 사상, 경험주의 사상, 합리주의 사상, 이성주의 사상, 사신주의 사상, 해방주의 사상, 자유주의 사상, 등등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인간들의 사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신학>을 오류시켰기 때문이다.

제6장. 기독교 신앙.

1. 신앙의 정의.

신앙<信仰>이란 용어를 종교적 차원에서 정립하면 믿는 것<신뢰하는 것>믿고 의지하는 것, 믿고 인정하는 것, 믿고 따르는 것, 등등으로 정립된다. 한편 현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따르느냐? 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일보 전진한 것이 교회의 직분자들과 제도에 충성하고 전도하고 선행을 베풀며 하나님 나라를 앙모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 일반개념을 포함하면서도 그와 같은 개념을 초월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차원과 경륜적 개념을 갖는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따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대전제로 하여 출발한다.

첫째-자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시며 우주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어졌고 그리하여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하에 있으며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결론 되어진다.

둘째-기독교인들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신적 주권적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았고 그리하여 현세의 삶을 마치면 즉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입국하여 영원무궁한 삶을 산다.

이와 같은 대전제하에서 기독교 신앙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느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주권적 신적 작정 하에서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느냐?>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이미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신적 작정 하에서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와 같은 차원의 대전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신학적 임재에 대한 절대 순종의 영접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멘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충성이며 이와 같은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신학을 실천하는 삶 전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정의가 초신자들에게 처음부터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정의가 정립되기까지에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기독교 신앙이 정립되기까지에는 그것을 정립시켜 줄 책임을 맡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수준이 크게 반영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 성도들의 신앙 형태는 기독교 신앙의 정의와 본질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형태이다.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조차 완전하게 정립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와 같은 오류는 그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의 저급한 신학 때문이다. 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초신자나 수십 년 신앙생활한 자에 구별 없이 항상 구원 문제만을 강조한다. 때문에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계속되는 구원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오히려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마땅히 성도들에게 단계적인 신학 교육을 통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신적 작정 하에서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고부동한 신앙을 정립시켜 주고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현세에 연연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삶을 사는 존재임을 정립시켜 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삶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후원했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와 같은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항상 구원받는 문제만 강조해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하고도 오히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불안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구원 문제에만 매달린 채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적 삶을 전혀 살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의 전체적, 개인적 신앙수준이 기독교 본래의 신앙인 고차원적, 형이상학적 신앙이 되지 못하고 3류 일반종교와 같이 열악하고 저급한 신앙으로 퇴조한 것이다.

2. 신앙의 본질.

일반 종교의 신앙 본질은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일반 종교가 자신들이 섬기는 존재에 제사하고 위무하는 것은 결국은 그 존재를 위무하고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 전선에 이상 기류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또는 흉화<凶禍>는 근절시키고 길복<吉福>만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의와 같은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도 일반 종교의 범주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경륜과 개념을 갖는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일 뿐 자신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마6:31>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명령하며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와 하나님 아버지의 의를 구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마6:33>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신학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단3:18>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신앙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14:8>의 바울 신앙과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일없는 주를 위하여 죽으리라>는 폴리갑의 신앙으로 계승되어져 왔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다. 반면에 이와 같은 신앙의 소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선포하신다.

3. 신앙의 특성.

일반 종교의 신앙은 섬기는 대상에 대한 제사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고 증명되고 인정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제사<예배>를 통하여 나타나고 증명되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적 삶을 통하여 나타나고 증명되고 인정된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9:1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12:7>고 선포하심으로서 진정한 신앙에 대한 원리를 정립시켜 주셨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특성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십계명을 초월하는 새 계명으로 주어진 것에서 더욱 확고하게 증명된다. <마22:39><막12:31><요13:34>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의식이 아니라 순종이고 실천이며 법이 아니라 자비이고 긍휼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다.

4. 신학이 요구하는 신앙의 열매.

위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신학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 차원의 신앙적 열매를 요구하는바 성경은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선포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신학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하나님의 속성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적 열매는 두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적 신앙의 열매이며 다른 또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루는 실천 신앙적 열매이다. 이때에 하나님을 향한 순종적 신앙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충성, 등등의 네 가지이며 사람과 관계된 실천 신앙적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 등등의 여덟 가지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 열매에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 등등이 제한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며 사람과 관계된 실천 신앙적 열매에 충성이 누락되는 것은 성도의 충성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뿐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열매.

(1) 사랑.

① 자녀로서의 사랑.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서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며 둘째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성은<聖恩>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의 법적 행정적 관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법적 행정적 차원에서의 관계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성도들을 당신의 섭리적 동반자로 예우하셨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명령에 대한 피조로서의 복종을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의적인 순종을 원하셨으며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는 것을 요구하시지 아니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것을 원하셨다. 우리는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니시며 그와 자애로운 대화를 나누시는 하나님을 뵈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는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감당할 수 없는 성은<聖恩>이요 자비이며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심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라던가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차원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요 상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하셨고 자녀로서 사랑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② 순수한 사랑.

성도가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그 사랑은 곧 순수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실 때에 하나님의 그 사랑에는 어떤 조건이나 목적이나 계산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 목적, 계산, 요구, 바램, 등등이 전혀 제외된 사랑으로서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이었다. 따라서 성도들 역시 그와 같은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

③ 무한한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범위, 기간, 본질, 내용, 분량, 등등에 있어서 전혀 제한이 없는 영원 무한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상으로 영원 무한하며 장소적으로 영원 무한하고 본질적으로 영원 무한하며 내용과 분량에 있어서도 영원 무한하다. 따라서 성도들 역시 그와 같은 영원 무한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④ 불변의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영원불변, 절대불변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한 적이 없으며 감정에 따라 가감<加減>되지도 않았고 상황에 따라 중단된 일도 없었다. 따라서 성도들 역시 하나님께 그와 같은 절대불변, 영원불변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

(2) 희락.

성도는 자신의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희락<기쁨>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은 피조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영광과 권위적인 기쁨이며 자녀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자애와 사랑의 기쁨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삶을 살 때에 우선적으로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시며 그리하여 창조주로서의 영광과 권위의 만족함과 기쁨을 이루신다.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께서 갖으시는 기쁨은 창조주로서의 기쁨 보다는 아버지로서의 기쁨이 더욱 크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품위 있는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살 때에 아버지로서의 무한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의 신앙적 열매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자녀로서의 효도이다.

(3) 화평.

성도는 자신의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과 성도 간의 화평은 성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화평하실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법적 행정적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의 관계로서 하나님께서는 통치주요 명령권자로서 복종과 순종을 받으셔야 할 절대적 주권자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와 명령에 이의 없이 복종하고 순종해야 할 존재였다. 반면에 성도는 자격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아담이래의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피조로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하에 있으므로 법적 행정적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욕심내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 받아 감히 하나님과의 화평을 청구할 자격이 전혀 없다. 성도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법적 행정적 근거는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한 용서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화평의 손길을 내밀으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화평하실 것이 아니라 인간을 무서운 심판으로 다스리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법적 행정적 관계를 적용하시지 아니하시고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인간과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어 그들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 후 그들에게 화평의 손길을 내밀으시어 그들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성은<聖恩>을 베푸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성도의 화평은 하나님과 성도의 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성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 불만, 불평, 불순종 등등의 악행을 범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화평에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4) 충성.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들에게 충성을 명령하시며 <마24:45><눅16:10><고전4:2<딤전3:11><딛2:10> 특히 성경의 말미에는 <죽도록 충성하라-계2:10>고 강력하게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을 명령하시는 것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창조주, 통치주, 섭리주로서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명령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창조주, 통치주, 섭리주로서의 절대적 주권으로 성도들 위에 군림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성도들에게 자애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학<말씀-로고스-법>으로 성도들에게 임재하시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권위, 명령, 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 자비, 긍휼, 온유>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을 명령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향하신 <사랑, 자비, 긍휼, 온유>에 의한 배려이시며 은총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와 은총은 <충성>의 명령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후속조치에서 증명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충성>을 명령하신 후에 곧 바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마25:21;눅19:17>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라고 선포하신다. 이와 같이 자녀들에게 요구되어지고 명령되어진 충성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충성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과 권위를 세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충성을 통하여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충성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시다 할지라도 성도는 그것을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무한한 사랑을 받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성도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도는 자녀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성도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존하신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근본적인 대전제를 한시도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를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오직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신앙적 열매를 이루어야 한다.

2) 사람과 관계된 신앙의 열매.

(1)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며 종교적 사랑과도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신앙적 사랑은 사랑의 원천이며 원형인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사랑으로서 다음과 같다.

① 순수한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목적, 계산, 요구, 바램, 등등이 전혀 결여된 사랑으로서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을 해야 한다.

② 무한한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의 사랑은 대상, 범위, 기간, 본질, 분량, 등등에 있어서 전혀 제한이 없는 무한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 무한한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 무한한 사랑을 해야 한다.

③ 불변의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의 사랑은 영원불변, 절대불변의 사랑이다. 기독교 신앙의 사랑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없으며 감정에 따라 가감<加減>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중단될 수 없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 불변, 영원불변의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불변, 영원불변의 사랑을 해야 한다.

④ 용서의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의 사랑은 그 본질과 특성에 의하여 용서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용서가 동반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사랑이 될 수 없다. 한편 기독교 신앙의 사랑에 의한 용서는 기독교 신학의 사랑과 같은 차원에서 다음과 같다.

A. 순수한 용서.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조건, 목적, 계산, 요구, 바램, 등등이 전혀 결여된 용서로서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용서이다.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용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용서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용서를 해야 한다.

B. 무한한 용서.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대상, 범위, 기간, 본질, 분량, 등등에 있어서 전혀 제한이 없는 무한한 용서이다.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무한한 용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용서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무한한 용서를 해야 한다.

C. 불변의 용서.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영원불변, 절대 불변의 용서이다.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없으며 감정에 따라 가감<加減>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중단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 불변, 영원불변의 용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용서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불변, 영원불변의 용서를 해야 한다.

⑤ 이해와 관용.

기독교 신학의 사랑은 이해와 관용을 동반한다. 진실로 사랑하는 자에게 이해되지 못할 것이 없고 완전히 용서한 자에게 관용하지 못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관용을 베푸실 때에 그 이해와 관용은 범위와 내용에 있어서 무조건적, 무제한적이었으며 따라서 순수, 순전, 무한적이었고 영원하며 불변적이었다. 기독교의 용서와 이해와 관용은 기독교 신학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이해하고 관용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해하고 관용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순수, 순전, 무한, 영원, 불변적인 이해와 관용을 해야 한다.

(2) 희락.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열매는 희락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삶을 통하여 희락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현세적 삶 속에도 수많은 애환이 있으며 그로 인한 고통과 좌절이 있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희락적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희락의 신앙적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며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기쁨의 신앙적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성경의 요구는 곧 신학<하나님>의 요구이다. 성경<하나님-신학>은 결코 불가능한 신앙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충분히 가능한 신앙을 요구한다. 성경<하나님-신학>이 희락의 신앙적 열매를 맺으라고 했을 때에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언제나 기쁨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나 바울과 사도들이 사역할 당시의 상황은 결코 기쁨을 고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에 그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추방당하는 등등의 고난적 삶을 살았으며 언제 어떠한 죽음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풍전등화<風前燈火>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기쁨의 신앙적 삶을 살았고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삶을 살라고 권고한다. 그들이 기쁨의 삶을 살수 없는 고난과 고통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상황 하에서도 항상 기쁨의 삶을 살수 있었던 근거는 신학에 의한 신앙이었다. 신앙은 신학에 의하여 형성될 때에 바른 신앙이 형성된다. 그리고 신학에 의하여 형성된 신앙은 확고한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희락적 신앙의 열매를 맺고 그리하여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차원의 신학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중에 가장 큰 것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이고 다른 또 하나는 상급과 면류관에 대한 신학이다.

① 하나님 나라.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미 모든 애환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하고 자유하는 영광의 하나님 나라 <천국>이 보장되어 있으며 따라서 현세적 삶은 한시적, 잠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는 희락적 신앙의 삶을 살게 해주는 신학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무궁한 자유와 영광에 대한 소망의 신앙을 갖게 되며, 이 소망의 신앙으로 현세에서의 애환과 고통을 감내<堪耐>할 수 있게 되며 항상 기뻐하는 희락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② 상급과 면류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현세는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과 면류관을 받기 위한 시간적 장소적 기회이며 과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 입국할 때에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차원에서 사건과 장소와 시간 등등의 기회를 부여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희락적인 것이 아니라 고난적인 것으로서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현세적 삶이 때로는 평탄하지 않고 시련과 애환 속에 고통스러운 것은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이며 배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현세적 고난과 애환들을 신앙으로 극복하여 승리의 열매를 맺음으로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는 희락적 신앙의 삶을 살게 해주는 신학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를 오해하여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려고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자녀들에게 애환과 고난과 고통의 삶을 주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애환과 고난과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평안하고 순탄한 삶을 즐기고 누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불만하고 불평하고 불순종하고 항의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불화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애환과 고난과 고통을 준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단의 궤계를 모두 알고 계시지만 그것을 오히려 역<易>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 의하여 발생한 자녀들의 애환과 고난과 고통을 퇴치시키지 않으시고 그것을 허락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허락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허용섭리<許容攝理>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방관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견딜 수 있을 정도의 한계까지만 사단의 흉계를 허용하시며 그 이상의 상황으로 발전할 때에는 즉시 관여하시어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 때문에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라고 선포한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이와 같은 신학에 근거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롬8:18>고 선포하였고 <항상 기뻐하라-살전5:16>고 권고하면서 자신들의 희락적 신앙의 삶을 고백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받게 될 상급과 면류관에 대한 소망의 신앙을 갖게 되며 이, 소망의 신앙으로 현세에서의 애환과 고통을 감내<堪耐>할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항상 기뻐하는 희락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어떤 고통과 슬픔이 닥쳐올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 주신 기회요 은혜이며 배려인 것을 깨달아 슬퍼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쁘고 즐거운 희락의 삶을 살아야 한다.

③ 감사.

한편 희락의 신앙적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신앙에 기쁨이 있을수 없으며 기쁨이 없는 감사는 진실한 감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배려에 감사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삶은 애환과 고난과 고통조차도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며 배려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과 배려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신학이다.

(3) 화평.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세 번째 열매는 화평이다. 기독교인들의 화평적 신앙 열매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평하신 화평의 신학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의 화목을 유지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불순종을 비롯한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며 인간들이 수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범죄하였어도 그때마다 화목제를 드리게 하시면서 그 화목제를 구실로 하여 그들과의 여전한 화목을 유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신앙적 열매를 맺게 하신 후 이어서 사람과의 화평을 이루는 신앙적 열매를 맺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화평과 화목을 기뻐하시는 반면에 불화를 매우 싫어하신다. 성경은 성도의 화목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간에 불화한 자의 예배는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신학에 근거하여 성도간의 화목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어느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고 화평과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어느 누구와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다투거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자신이 손해를 봄으로서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는 삶을 살 것이며 타인들 간의 갈등, 반목, 불화, 다툼을 아름답게 중재하여 모든 사람들이 화평하고 화목하게 해야 한다. 만약에 너무나 억울한 경우가 발생하여 그리고 너무나 많은 손해를 보게 되어 도저히 화목할 수 없게 되거든 과연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욱 억울하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욱 많은 손해를 보았는가?>하는 것을 계산해 본 후에 다음 일을 결정할 것이다.

(4) 오래 참음.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이다. 오래 참음이란 인내<忍耐>로서 신앙적 연단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신앙적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인내의 신앙적 열매를 요구하시며 그들이 인내의 신앙적 열매를 이루기까지 다양한 차원의 시련과 고통을 허용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허용은 앞에서 이미 밝힌바 있듯이 사단의 성도를 향한 공격과 훼방에 대한 허용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허용은 자녀들이 유약하고 나약하여 작은 일에도 넘어짐으로서 신앙적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는 허약한 자녀가 되는 것을 방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이시며 배려이시다. 고난과 역경에 대한 경험 부족과 경륜의 미숙은 나약하고 허약한 신앙상태를 형성한다. 그러나 다양한 고난적 경험과 수많은 시련을 극복한 경륜은 상대적으로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형성시킨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수없이 겪은 자는 백전노장<百戰老將>이 되어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담대함과 강철 같은 의지로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영광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인내의 신앙적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에는 두 가지 차원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 하나는 <자녀에 대한 섭리>이고 다른 또 하나는 <종에 대한 섭리>이다. 앞장에서 이미 밝힌바 있듯이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평안과 희락을 누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때문에 사단은 온갖 흉계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훼방한다. 이때에 물론 성령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지만 때때로 사단의 공격으로 인한 환란과 고통을 잠시 허용하실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려는 의도적 허용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환란과 고통을 철저하게 막아 주시는 과보호<過保護>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유약한 자가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지만 그러한 자들에게는 상급이나 면류관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 과보호<過保護>하에서 오직 누리고 즐기는 무위도식<無爲徒食>적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한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그러한 삶을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사단의 공격과 훼방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시어 그들이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이기게 하시고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게 하시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한편 <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특별한 차원에서 진행된다. 현존하는 모든 역사는 인류 역사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의 흐름은 인류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되는 것이며 역사의 주체가 인류인 것 같지만 역사의 실제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역사를 진행하는 핵심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종들>이다. 사단은 완전하지 못하여 항상 실패하지만 이와 같은 원리까지는 알고 있다.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진행하실 때에 어느 정도 아는 그 지식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는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한다. 그중에 사단이 특히 공격하는 영역이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는 핵심자들인 <하나님의 종들>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공격할 때에 상황이 다급하고 중대할수록 더욱 강력하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때문에 현재 중요한 임무를 맡거나 또는 앞으로 맡게 될 <하나님의 종들>은 사단의 무차별적 공격 앞에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공격을 일일이 물리쳐 주시지만 상황에 따라서 필요할 때에 잠시 그것을 허용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크고 중대한 일을 맡은 종들일수록 강하고 담대함이 절대 필요하다. 때문에 크고 중대한 일을 맡은 종들일수록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된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수없이 겪은 백전노장<百戰老將>이 되어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담대함과 강철 같은 의지를 갖춘 종만이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영광의 승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겪게 되는 시련, 고난, 고통, 등등은 인간적 삶의 시련, 고난, 고통, 등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이 겪어야 할 연단 과정이며 훈련 과정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거치는 <하나님의 종들>을 방관하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신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게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신31:6>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던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수1:9>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그리고 확실하게 지켜졌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 속에서 오래 참음<인내>의 신앙적, 사명적 열매를 맺었고 그리하여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 결국은 승리하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 확인되는 선배들의 오래 참음<인내>의 신앙적, 사명적 열매를 본받아 자신들도 오래 참음<인내>의 신앙적, 사명적 열매를 맺어야 한다.

****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어떤 고난과 불행한 사건이 뜻밖에 발생하였을 때에 절대로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지혜롭게 그 사건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 이때에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그 사건이 자신에게만 주어진 개인적인 사건인가? 아니면 전체적, 또는 공동적인 사건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만약에 그 사건이 자신개인에게만 주어진 사건이라면 그 사건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반면에 그 사건이 전체적, 공동적인 것이라면 그 사건은 전체적, 또는 공동적 차원에서 함께 연합하여 해결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그 사건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 사건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 가운데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거나 또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하여 발생한 사필귀정<事必歸正>적 사건이거나 또는 천재지변 등등의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라면 그 사건에 맞는 적절한 해결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주어진 사건이라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이유와 사연을 깨달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에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주어진 사건은 보편적인 일반 사건들과는 전혀 다른 특별성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절대적인 순종과 적극적인 희생과 강력한 충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특히 명심해야 한다.

(5) 자비.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다섯 번째 열매는 자비이다. 자비는 사랑과 연결되는 신앙적 열매로서 사랑에 대한 구체적 실천이다. 많은 종교들이 자비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자비는 3류 종교적인 자비로서 전혀 불가능한 허구적인 자비이거나 위선적인 자비이며 도덕적인 자비로서 자기 자신을 위한 자비에 불과하다. 반면에 기독교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로서 절대 가능한 자비이며 실제적인 자비이고 자신을 위한 자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자비이다. 현존하는 각종 종교들 중에 <자비>라는 용어를 가장 남발하는 종교는 불교와 이슬람교이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억지 자비이며 사기자비<詐欺慈悲>이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구도<求道>의 길을 묻는 제자에게 분명하고 냉정하게 <그것은 오직 네게 달렸느니라> 라고 말함으로서 불교의 구도 원리인 자력구원<自力救援>을 선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의 후예들은 스승의 구도원리를 함부로 변질시켜 석가모니를 대자대비<大慈大悲> 동체대비<同體大悲> 등등으로 편집한 후 석가모니의 자비로 구도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불교 교리를 오류 시켰다. 절대 불가능한 불교의 자비교리를 오류 시켜 허구적인 자비교리, 사기적인 자비 교리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오류와 변태는 이슬람교의 자비 교리에서도 나타난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멧은 본래 교활한 사기꾼으로서 매우 무자비한 자였다. 마호멧은 자신을 추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하였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양아들의 부인을 아내로 삼는 무자비까지 행하였다. 마호멧의 무자비함은 그의 후예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들은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살해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2001년 9월 11일의 미국 테러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이슬람교의 자비는 자비를 통한 공덕<公德>을 쌓음으로 사후에 극락 또는 천국에 가기 위한 목적을 전제로 하는 자비이다. 따라서 그들의 자비는 순수한 자비가 아니라 이기적인 자비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로서 실제적인 자비이며 순수한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것은 실제적인 자비이고 구체적인 자비이며 아무 조건 없는 무조건적 자비이고 장차 요구되는 자비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지고 완성된 현재적 자비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자비는 신앙적 공덕을 목적으로 하는 자비가 아니라 아무 조건없는 순수한 자비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구원을 이루기 위한 자비의 공덕이 필요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상급과 면류관을 받기 위한 공덕을 위한 자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6:3>고 명령하시어 목적적 자비가 아닌 순전한 자비, 순수한 자비를 요구하셨으며 공덕을 위한 이기적인 자비를 행사하는 자들에게 <저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라고 선포하시어 그들의 불순한 자비에 아무런 보상이 없음을 천명하셨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자비는 순수한 기독교 사랑이 구체적 실천적으로 이루어지는 순전하고 순수한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자비의 신앙적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것이 기독교의 본분으로서 하나님의 자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신학적 요구에 순종하여 순전하고 순수한 자비의 신앙적 열매를 필연적으로 맺어야 하는 것이다.

(6) 양선.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여섯 번째 열매는 양선이다. 기독교인은 이웃과 사회에 기쁨과 유익을 주는 선량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신 19:18; 마22:39;막 12:31-33;눅10:27;롬13:9;갈5:14;약2:8>고 명령하여 기독교인의 양선을 강조한다.
한편 성경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눅10:30-37>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6:3>를 통하여 기독교의 진정한 양선의 본질을 정립해 준다. 기독교의 양선은 어떤 목적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 순수함과 순전함을 전제로 하며 자신의 양선을 자랑하는 것을 절대 엄금한다. 만약에 기독교의 자비와 양선이 구원이나 상급이나 면류관 등등을 전제로 한다거나 또는 자기과시의 수단과 방편으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것으로서 순전하거나 순수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신학적 요구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자비와 긍휼과 양선에는 하나님의 어떤 것을 과시하거나 나타내려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자비와 긍휼과 양선은 본래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창조를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궁극적 목적 하에 작정되고 진행되었다는 신학과 배치된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신학적 양립을 이해하는 신학자라면 그러한 오류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다. 창조를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궁극적 목적 하에 작정되고 진행되었다는 신학은 <하나님의 공의>를 성립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자비와 긍휼과 양선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을 성립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인류의 패역함을 용서, 긍휼, 자비, 양선, 등등의 사랑으로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준엄하게 법적 행정적으로 다스리시어 본래 세우신 공의대로 <영원한 죽음>에 처하신 후 모든 것을 새로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된다. 불순종과 패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이전에 이미 악<惡>이 스며들어간 인류에게 하나님의 용서, 긍휼, 자비, 양선, 등등의 차원 높은 사랑이 하사된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불만하고 배반하는 패역적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라리 그들을 완전히 사멸하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인류를 위하여 반대의 길을 택하심으로 모든 손해를 감수하셨다. 따라서 기독교의 용서, 긍휼, 자비, 양선, 등등의 사랑의 실천은 조건 없는 순수함과 자신을 위한 이기주의적 차원을 초월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모든 기독인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시면서 까지 자신에게 용서, 긍휼, 자비, 양선, 등등의 사랑을 베푸신 은혜에 감사, 감읍하면서 자신의 작은 선함이 하나님의 그, 망극하신 성은에 만분지일이나마 보은이 될 수 있으랴? 하는 겸손하고 순전한 신앙으로 오히려 삼가 조심하면서 양선을 시행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7) 충성.

신학이 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일곱 번째 열매는 충성이다. 그러나 이 충 성의 열매는 사람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오직 하나님께만 상하<上下>의 수직<垂直>적 관계를 가질 뿐이며 인간 대 인간 사이에는 평등 원칙에 따라 수평<水平>적 관계를 이룬다.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충성을 강요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충성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충성에 대한 신앙적 열매를 오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람에 대한 충성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성도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충성하거나 또는 교회의 제도에 충성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에 충성하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없이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위반하면서 교회의 직분자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충성은 충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고 반역이다. 성도들 중에는 이와 같은 원리를 따르지 않고 목회자를 비롯한 특정인들을 인간적 감정에서 추종하고 섬기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위반하면서까지 그들을 추종하고 섬긴다. 목회자를 비롯한 특정인들이 온갖 불법을 행하고 그리하여 교회가 파탄의 지경에 이르러도 오히려 그러한 불법자들을 추종하고 옹호하여 교회의 분란을 가중시킨다.
같은 원리에 의하여 국민이 국가의 직분자들에게 충성하거나 또는 국가의 제도에 충성하는 것은 모두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성이 된다. 그러나 국민이 국가와 민족의 유익에 관계없이 또는 국가와 민족의 법과 질서와 유익을 위반하면서 국가의 직분자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위정자들이 온갖 불법을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감정에서 그들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민족에 대한 불순종이고 반역이다.

(8) 온유.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여덟 번째 열매는 온유이다. 온유적 신앙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가 평상시에 보여준 실천 신학적 삶의 모습으로서 기독교인들의 인격과 품위를 나타내 준다. 기독교인들의 온유한 인격과 품위는 너그러움과 원만함과 부드러움과 따뜻함 등등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온유의 신앙적 열매는 기독교인들의 전체적인 인격을 대변하는 신앙적 열매이다. 성도의 성품과 인격이 온유하지 않고 과격하면 교회가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란과 다툼을 일으키게 된다. 성도의 과격함은 교회의 품위와 위상을 하락시키고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존귀한 이름을 망령되게 한다. 따라서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을 내거나 성을 내어서는 안 되며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한 언행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보기만하여도 사랑이 넘치고 듣기만 하여도 평안이 흐르는 온유한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9) 절제.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이다. 기독교인의 절제는 모든 신앙적 삶에 적용된다. 기독교인들은 술, 담배, 도박, 이성교제, 육체적인 쾌락, 등등의 비 진리적인 모든 행위들을 절제하며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되어지는 부귀, 영화, 명예, 권세, 권력, 권위, 등등의 각종 욕심과 욕망과 유혹을 절제하며, 혈기에 대한 절제, 시기, 다툼, 분란에 대한 절제 등등, 실천 신앙적 삶을 사는 과정에 일어나는 불미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제해야 한다.

5. 신앙의 오류.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의 정의와 본질과 특성에 절대 못 미치는 저급하고 오류된 3류 일반 종교의 무속적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현대 기독교의 오류된 신앙 형태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맹신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목사의 말을 무조건 추종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유에 근거하여 목사의 말에 무조건 절대 추종한다. 이러한 맹신적 맹종적 신앙은 목사들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절대적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였고 뿐만 아니라 목사의 말은 비록 그것이 잘못되어 성도를 비진리로 인도할 지라도 이의 없이 믿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저들은 한술 더떠서 목사의 부정은 오직 하나님만이 언급할 수 있으며 성도들이 목사의 부정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에 대한 불경으로서 곧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라고까지 가르쳤다. 그리고 보이는 목사에게 순종하고 충성하고 대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고 대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서 성도들의 맹신을 유도하였으며 목사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목사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목사가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고 공갈, 협박하여 성도들에게 맹종을 명령하였다. 저들은 심지어 <신앙은 덮어놓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조직 신학을 배우면 신앙을 조지게 된다.>고 까지 주장하면서 목사에게 맹종하고 맹신하게 유도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성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명령하며<수7:19-시22:23-마5:16>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추종하려는 자들에게 모든 영광을 성부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였다<요7:18-8:50;54-11:4-12:28-15:8>. 이와 같은 진리를 아는 사도들도 오직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선포하였다<행11:18-고전10:31>.
성경은 또한 비 진리를 가르치면서 맹종을 요구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고 경고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라고 선포하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명령하며 마지막 심판 때에 그들이 풀무 불에 들어가 울며 이를 갈게 된다<마13:42>고 정죄하였다.

2) 과신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전혀 오류된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많다. 저들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이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들은 질병에 걸려도 병원이나 약국에 가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고 믿는가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의 전제하에 아무런 대책 없이 사업을 시작하거나 확장하는 등등 전혀 비상식적인 일들을 벌린다. 그러나 이들의 잘못된 믿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저들은 자신의 믿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자신의 믿음이 약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심히 비관하거나 좌절하며 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아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포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문화와 역사적 흐름에 맞추어 당신의 역사를 진행하신다. 물론 21세기 현재에도 때로는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일, 보편적인 일들은 당시의 문화와 현실에 맞게 진행하신다. 과거 문화와 문명이 심히 낙후되어 있을 때에, 그리고 상황이 매우 급박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에 맞추어 각종 기적과 이적을 행사하셨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상고하면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는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이 감소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특별한 상황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역사를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진행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병원, 약국, 의사, 약사, 등등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세워진 자들이다.

3) 미신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을 일반 종교적 차원에서 많은 신들 중에 하나로 인식하여 섬기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의 신앙 형태는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무속 신앙형태이다. 저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면 무속 신앙자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를 드린다든가 예물을 드림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 받으려 한다. 이러한 자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예배에 불참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징계를 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히 불안해하며 예배에 불참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생각하여 즉시 예배를 드리고 속죄의 예물을 드린 후에야 안심한다.

일반 종교, 특히 무속 신앙자들이 섬기는 신들은 본래 자력으로 존재하는 신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세운 것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속성도 사람과 같은 수준이다. 작은 일에도 섭섭해 하고 노여워하며 항상 위무하고 받들어 섬기지 아니하면 삐지고 토라진다. 반면에 섭섭해 하고 노여워하며 삐지고 토라졌다가도 조금만 받들어 섬기면 즉시 풀어지고 좋아한다. 3류 무속 신앙자들이 섬기는 신들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신적 속성이 없다. 그것들은 가공된 존재들로서 하나의 기물<器物>에 불과하다. 저들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사단이 저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 역시 매우 수준이 낮기 때문에 저급한 신적 속성을 초월하지 못함으로서 3류 무속 종교의 우상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사단의 속성 또한 매우 저급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오직 유일무이한 지고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잘못을 범할 때마다 노여워하시거나 진노하시거나 하여 즉시즉시 징계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연연하시지 않음은 물론이요 용서할 수 없는 대죄까지도 용서하시며 사랑과 자비, 이해와 관용으로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4) 불신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고 일반 종교적 차원에서 믿는 경우가 있다. 주로 현대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들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거나 또는 심신<心身>을 위무하고 수련하는 차원의 신앙생활을 한다. 이러한 자들은 성경이 과장되게 기록되어 있거나 또는 목회자들이 잘못 해석하여 사실이 왜곡된다고 믿는다. 때문에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현대 과학에 부합되는 상식적 차원에서 성경을 이해하며 그리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지 않고 적당한 상식을 기준으로 하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간과할 것은 간과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은 다만 절대적 명령이며 따라서 무조건적 순종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결코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이지 않다. 기독교 신학이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을 완전무결한 능력의 하나님 차원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유한적 존재인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람들은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인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그것을 <기적, 이적, 불가사의, 신비, 초월> 등등의 용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 차원에서의 이해이다. 인간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인 것이며 그리하여 <기적, 이적, 불가사의, 신비, 초월> 등등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께는 다만 신적 능력에 의한 것으로서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문제일 뿐이다.

5) 편파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현세를 속된 것이라 하여 무시하거나 배타<排他>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천국>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 나라만 앙망하면서 현세의 학문, 지식, 지혜, 재물, 직업, 가정, 제도, 질서, 등등을 만홀히 여기거나 아예 무시하고 거부한다. 저들은 심지어 국가와 민족, 부모형제까지도 과감하게 거부하고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의, 식, 주, 까지도 거부한다.

그러나 현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사하신 삶의 현장이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사명의 현장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현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대비하고 기다리며 자신들의 현세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과 면류관을 준비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현세적 삶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최선을 다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6) 현세중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편중적인 신앙으로 현세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반대로 현세에 치중하는 신앙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는 현세에 매달려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꾸준히 계속하면서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현세에 연연하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섭리, 교회 등등을 버리거나 포기한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신사 참배한 것과 공산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배반했던 일들은 모두가 현세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고 배반했던 경우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현세의 삶이 순탄하고 평안하면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만 건강, 사업, 재정, 가정, 직장, 등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크게 낙심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며 신앙생활을 포기한다.

7) 이중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 나라와 현세에 대한 이중적인 신앙을 가진자 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도 현세에 연연하여 어중간한 이중적인 신앙적 삶을 산다. 때문에 저들은 어떤 신앙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매우 고민하며 어떤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고 현세적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중적 신앙자들과 현세 중심 신앙자들의 신앙형태는 대체적으로 대동소이<大同小異>한데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신앙 형태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다. 저들은 모든 것을 현세적 강복과 연관시킨다. 기복 신앙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순복음 교회의 축복 위주 교리와 부흥강사들의 축복 위주 집회를 통하여 형성되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축복 교리가 점점 강조되면서 매우 괴이한 기복 신앙들이 양산되었다. 어떤 목회자들은 현세적 강복이 구원의 빙거라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현세적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또 어떤 목회자는 현세적 강복이 하나님 나라에까지 소급된다고 주장하면서 현세에서 복을 누리는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광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복 신앙들이 점점 강조되면서 드디어는 복 받은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는 성도들도 복을 받지만 목사가 복을 받지 못한 교회는 성도들도 복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목사가 얼마나 풍요롭고 넉넉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에 비례하여 교회 성도들의 삶이 형성된다는 논리 하에 목사들의 삶이 점점 풍요롭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들 때문에 대형 교회들이 선호되는 가운데 개척교회, 작은 교회들이 외면 또는 거부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목사들의 주장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첫째는 신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식한 자들에 의한 주장이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목사들에게는 신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통하여 정립되어진 신학 원리들이 사정없이 무시되고 오류되어 그와 같은 비 진리적 주장들이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교활한 사이비 목사들의 음흉한 흉계에 의하여 그러한 주장들이 제기된 것이다. 저들은 목사라는 직분을 빙자하여 각종 사기와 공갈을 전개하는 가운데 성도들의 재물을 착취하고 갈취하면서 누리고 즐기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8) 기도중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모든 것을 기도와 연계시키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은 등한시하는 반면에 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추구한다. 저들은 어떠한 일이든지에 관계없이 오직 기도를 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다. 이러한 자들의 신앙생활은 말씀 중심이 아니라 오직 기도 중심이다. 때문에 저들은 시시때때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기도하기 위하여 기도원을 전전하고 깊은 산, 깊은 계곡, 능력봉, 능력천 등등을 찾아가 며칠씩 밤새워가며 철야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응답>이라는 용어가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의 신앙 형태는 대체적으로 무속 신앙적이며 우상 숭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성경-신학>에 모든 것을 담아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성경-신학>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말씀<성경-신학>으로 우리와 대화하시며 말씀<성경-신학>으로 우리의 문제를 풀어 해결하신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받으며 말씀<성경-신학>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답 받고 해결 받는다.
한편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영적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곧 생활이다. 기독교인들은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정립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개하는 사명적 삶을 살면서<영적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신앙적 생활인 기도로 그 모든 것을 진행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에게 말씀<성경-신학>과 기도는 절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연합이지만 우선순위는 말씀<성경-신학>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따라서 기독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하여 신앙을 정립함으로서 일반 종교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형이상학적 신앙을 정립하는 것이다.

말씀<성경-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므로 사단의 미혹과 유혹에 빠지며 그리하여 비 진리를 진리로 오해한다. 사단은 말씀<성경-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자들이 기도할 때에 그를 미혹시켜 갖가지 이상이나 환상들을 제공하여 그들을 오류와 비 진리에 빠지게 한다. 말씀<성경-신학>이 정립된 자들은 사단의 미혹을 분별하기 때문에 사단의 미혹을 받아도 넘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사단은 그러한 자들을 공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말씀<성경-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자들은 분별력이 없으므로 사단의 미혹을 하나님의 계시로 안다. 때문에 사단은 그러한 자들을 공격하고 미혹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성경-신학>을 배제한 채 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말씀<성경-신학>을 배제한 채 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들의 신앙 형태와 저들의 삶의 결과들이 언제나 비 진리로 끝나는 현실을 통하여 증명된다.

9) 율법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구약 성경의 모든 율법을 그대로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의 신앙형태는 다음과 같다.

(1) 제사중심 신앙.

율법주의 신앙자들의 예배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의 제사와 동일한바 저들의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배는 곧 제사이다. 따라서 목사는 제사장이고 강단은 제단이며 예물은 제물이다.
② 목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절대적인 권한<강대권>을 부여받았으며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인 목사에게 절대 복종해야한다.
③ 주일은 안식일로서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일해서는 안 되며 물건을 사거나 팔지 말아야 하며 특히 오락적인 것들을 절대 금지해야 하며 T.V 라디오 음악 같은 것을 금지해야 한다.
④ 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야 하며 특히 주일 대 예배는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

(2) 제물중심 신앙.

율법주의 신앙자들의 예물<제물>에 대한 개념은 매우 특별한 바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는 반드시 제물을 제단에 드려야 한다.
② 하나님께 회개할 때에는 반드시 회개의 예물을 제단에 드려야 한다.
③ 목사에게 안수 받을 때에는 반드시 제물을 드려야 한다. 이때에 드린 제물은 제사장의 분깃으로서 목사의 것이다.

율법주의 신앙자들은 이와 같은 개념에 의하여 목사와 강단을 매우 신성시한다. 저들은 강단에 장애인, 여자, 어린이들이 올라가는 것을 절대 금한다. 때문에 예배의 대표기도를 할 때에도 여자 권사, 여자 집사, 장애인 집사 등등은 강단에 올라가서 기도하지 않고 강단 아래에서 기도하며 심지어는 청소할 때에도 강단은 남자들이 청소한다.

이와 같은 율법적 신앙은 신학적으로 무식한 목사들이나 또는 비 진리적 사이비 목사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신학적으로 무식한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제사장 제도에 대하여 무식하기 때문에 목사들이 제사장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완성하신 후에 안식일 제도를 비롯한 율법들이 완성되어 차원 높은 신학으로 상향된 것을 모르고 여전히 율법에 얽매여 있다. 한편 사이비 비 진리자들은 목사라는 직분을 이용하여 온갖 자기 유익을 챙기려는 목적 하에 목사의 권위를 제사장적 권위로 주장하면서 율법적 신앙을 조장하고 있다.

(10) 자유주의 신앙.

현대 종교학자들은 현대 사조<思潮>중 하나인 자유주의 사상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학을 인본주의 사조로 변질, 오류시켰다.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 일부가 이러한 현대 사조에 심취하여 자유주의, 인본주의적인 신앙 형태를 형성하였고 특히 <진리 안에서의 자유-요8:32>를 곡해하여 <기독교인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앙을 형성하였다. 저들의 신앙 형태 중 특별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무교회주의-교회제도에 얽매이지 않으며 따라서 무소속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예배한다.
② 회개의 거부-하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므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회개할 이유가 없다.
③ 종교 다원화-구원이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는 교리는 오만하고 편협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종교에 구원의 방편을 부여하셨으며 기독교는 그중에 하나이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앙은 일제 치하에서부터 존재하였지만 무교회주의는 1920년대의 김교신이 일본인 우찌무라<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아 도입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함석헌 등등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회개 거부주의는 구원파로 알려진 권신찬, 유병언, 박옥수, 이복칠<이요한> 등등에 의하여 운영되는 <기독교 복음 침례회> <대한 예수교 침례회> 등등에 의하여 주장되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종교에 구원의 방편을 부여하셨다는 종교 다원화 주의는 현대 자유주의 종교자들에 의해 주장되며 <세계 교회 협의회-W.C.C.-World Council Church>가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이 주장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앙자들은 기독교를 표방하지만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거부하는 자들이며 <오직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출20:3>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제반 질서를 거부하는 자들로서 기독교와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다.

(11) 체험주의 신앙.

① 방언 체험.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는 체험을 통한 신앙적 확신을 강조하는 자들이 많다. 체험주의 신앙은 거의 대부분 부흥 집회와 기도원 집회들을 통하여 강조되고 형성되었다.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일단의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은 성령체험, 은사 체험을 강조하면서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였고 나중에는 영서<靈書>까지 강조하였다. 1970-1990년대에 이르러 부흥 강사들은 특히 방언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면서 성도들을 오도<誤導>하였다. 경기도 한얼산 기도원에서는 <한얼산 기도원에서는 개도 방언한다>는 망령된 주장을 하면서 성도들을 끌어 들였고 이에 미혹된 무지한 성도들은 방언을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언은 신앙적 자랑이 되었고 방언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 무렵에 방언을 위한 집회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심지어는 방언 훈련, 방언 연습이 성행하면서 방언 훈련학교까지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사이비 이단자, 사기꾼들에 의한 거짓방언 사기방언 집회들이 전국에 난무하였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에 의하면 방언이란 은사라기보다는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 신앙을 확립시켜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다<고전14:22>. 때문에 사도 바울은 방언을 은사 중 가장 마지막에 두었다<고전12:28>.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을 정립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가장 최고의 방법은 방언을 비롯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이다. 체험에 의하여 정립된 신앙은 신앙적 위기가 닥치면 흔들리거나 또는 변질되거나 오류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의하여 정립된 신앙은 차원 높은 신앙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거나 변질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별력이 있어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할 수 있으므로 절대 오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며 특히 확신 없는 성도들의 신앙 정립에 큰 도움을 준다. 한편 방언은 일반 신자들에게보다 목회자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위하여 도고<대도>할 때에 방언으로 기도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하여 도고하는 성도의 개인적 인격과 자존심을 보호해 준다.

② 성령 체험.

체험 신앙을 강조하는 부흥 집회들이 성행할 때에 발생한 오류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성령 체험 강조였다. 신학을 모르는 무식한 부흥 강사들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성령의 내주 역사하심 하에 있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외쳤고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 하나님 임재하심<행2:1이하>을 곡해하여 성령 하나님은 곧 <불>이라는 등식을 조작하여 <성령 받으라-성령 세례 받으라> <불 받으라-불 세례 받으라>를 외쳤다. 저들의 무식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는 성령 하나님이 도깨비불처럼 여기저기 날라 다니는 것으로 표현하여 <불 받으라-불! 불! 불! 불!-저기 불 간다!~불 받으라>고 외쳤다.
이와 같은 작태들은 신학을 전혀 모르는 무식에서 비롯되어진 오류이며 비 진리일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악행이다.
성령 체험이란 성령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느끼거나 깨닫는 것을 말한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따라서 본인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하려고 소망한다거나 또는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신적 작정과 약속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본인이 그것을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였을뿐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첫발을 내딛거나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자체가 곧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재, 역사하신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본인이 그것을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였을 뿐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첫 발을 내딛거나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자체가 곧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재, 역사하신 것이다. 즉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려는 마음이 발동한 그 순간 이미 성령의 내주하심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함께 하시며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하여 영원히 지켜진다.
따라서 목회자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여 계심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 부재의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은 이와 같은 신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계속 <성령 받으라>고 외쳤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라>고 강조함으로서 완전하신 성령 하나님의 임재, 역사하심을 함부로 제한하고 임의로 축소시키는 불경<不敬>까지 범하였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부분적인 임재나 미완전적, 또는 불완전적인 임재하심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완전하고 충만하게 임재 하신다.

(12) 은사위주 신앙.

신학 부재의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체험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은사체험이 크게 강조되었다.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은 특히 예언의 은사, 치유의 은사,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였고 그로 인하여 은사위주 신앙자들이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예언, 신유, 치유, 등등의 은사를 행사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은 무능한 목회자로 매도되어 거부당하고 무시당하였고 <기도하는 종> <예언하는 종> <치유하는 종> <귀신 쫒는 종>들이 전국 각지를 누비며 부흥 집회를 열었으며 전국 각지의 기도원들도 <예언집회, 치유집회, 신유집회, 귀신 쫒는 집회> 등등을 열었다. 이 무렵<1970년대-1990년대>의 전국 기도원들과 부흥 강사들은 <예언집회, 치유집회, 신유집회, 귀신 쫒는 집회>의 대성황으로 인하여 호황을 누렸고 전국 기도원들에는 <기도하는 종> <예언하는 종> <치유하는 종> <귀신 쫒는 종>들이 장사진을 치면서 성도들을 유혹하고 미혹하였다. 그리고 드디어는 <은사체험 학교> <예언은사 취득학교> <치유은사 취득학교> <신유은사 취득학교>들이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들은 모두 신학 부재의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은사 체험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 진리들이며 특히 사이비 이단들과 각종 사기꾼들이 끼어들어 활동하는 가운데 오류 되어진 한국 기독교의 안타까운 병폐적 역사였다.

(13) 신비주의 신앙.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 체험위주의 신앙이 강조되는 과정에서 신비주의 신앙이 발생하였다. 신비주의 신앙은 한국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세계 기독교 역사에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21세기 현대에도 전체 기독교에 여전히 존재한다. 신비주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사이비 이단자들에 의하여 발생하고 진행된다. 반면에 신비주의 신앙은 거의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한다.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신비주의 신앙자들이 발생하였고 그때마다 기독교로부터 정죄 당하고 퇴출당하였지만 그들이 사멸된 것은 기독교로부터의 정죄와 퇴출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자체적인 분렬과 퇴락에 의하여 붕괴되고 사멸된 것이다.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 신앙이 발생하게 되면 그들은 잠시나마 크게 흥성하고 발전한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존재하는 종교적 특성에 의한 신비주의 선호사상 때문이다. 인간들은 대체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특히 새로운 것들과 신비한 것들에 쉽게 미혹당하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 기독교에 종말론 주의자들과 김기동, 이초석, 김계화 등등을 비롯한 각종 사이비 이단들이 크게 활개치고 다니는 것은 인간들에게 존재하는 종교적 특성에 의한 신비주의 선호 사상 때문이다. 그러나 종말론주의자들과 김기동, 이초석, 김계화 등등을 비롯한 각종 사이비 이단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은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이미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정죄되고 퇴출되어진 이단 사상들이다.
신비주의 신앙이란 대체적으로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하는 각종 현상들을 선호하는 신앙 형태를 말하는데 거의 대부분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각종 교리적인 주장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거나 또는 꿈, 환상, 환청, 등등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을 매우 교묘하게 해석하거나 또는 성경에 없는 교리를 매우 그럴듯하게 조작하고 포장하여 내세운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들은 참으로 황당한 것들로서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며 이미 기독교 역사에서 정죄되고 퇴출당한 것들이다. 반면에 꿈, 환상, 환청, 등등에 의한 것들은 대부분 실제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꿈, 환상, 환청, 등등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단이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하나님께서 꿈, 환상, 환청, 등등을 통하여 임재하실 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 신앙의 확신을 정립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어떤 것을 계시하실 필요가 있을 때에 꿈, 환상, 환청, 등등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꿈, 환상, 환청, 등등을 통하여 임재하시지 않고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임재 하신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절대적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상한 주장, 신기한 주장, 꿈, 환상, 환청, 등등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한 신앙을 정립해야 한다.

(14) 개인주의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무교회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귀속되기를 거부하고 가정에서 가족끼리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또는 몇몇 친지들끼리 모여 각자의 가정을 순회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자들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한다.

①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은 경우.

성도들 중에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상처를 받은 자들은 교회와 목회자를 두려워하거나 불신하게 된다. 이러한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상처받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가족끼리 가정예배를 드리거나 또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는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한다.

② 신학과 신앙의 불일치.

성도들 중에 차원 높은 신학과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있다. 이러한 성도들은 교회나 목회자의 신학과 신앙에 만족하지 못한다. 특히 현대 교회나 목회자들이 하나님 중심이지 않고 목회자 중심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③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

성도들 중에 성격이나 신앙이 매우 특이하여 교회나 목회자에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자들은 어떤 교회, 어떤 목회자에게도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가정 또는 그룹 위주의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④ 신학 교육을 받은 직분자들.

신학 교육을 받아 목사, 강도사, 전도사의 직분을 임명받은 자들이 여러 가지 형편에 의하여 직분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에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직분을 밝히기도 곤란하고 감추기도 곤란하여 차라리 가정 중심의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예배 중심 또는 구제사업 중심이다. 그들은 예배 때에 드린 각종 헌금으로 구제 사업을 하거나 또는 선교를 지원하는 등등의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은 분명한 오류이다. 저들이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 배경과 원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용납될 수 없다. 기독교는 예배를 위한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기독교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라는 제도와 질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저들의 신앙 형태는 분명한 오류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제도>를 거부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오류이며 악행이기 때문이다.

(15) 떠돌이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한,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있다. 이러한 성도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되는데 하나는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상처를 받은 경우이다.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상처를 받은 자들은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두려움과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다는 차원에서 대형교회를 전전하면서 예배만 드리는 떠돌이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도들에게는 신앙적 기쁨이 없다. 특히 하나님께 사명 받은 성도들이나 또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싶은 성도들은 그러한 신앙생활에 만족할 수 없다. 때문에 저들은 항상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는 또 하나의 경우는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이다.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자들은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교회에 얽매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들은 교회에 소속되면 직분, 헌금, 봉사, 예배참석, 등등의 문제에 얽매이게 되므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개념에서 심한 부담을 갖는다. 때문에 저들은 대형교회를 전전하면서 예배만 드리는 떠돌이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 역시 분명한 오류이다. 특히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여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당연히 책망 받아야 한다. 저들의 신앙생활은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모독하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 통치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만행이며 악행이다.

(16) 공의부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께만 충성하면 된다는 개념 하에 국가 또는 사회의 제반 법규와 질서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의 제반법규와 질서를 위반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탈세, 병역기피, 교통법규 위반, 등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질서와 제도를 무시, 거부, 위반하면서 각종 불법, 탈법, 편법, 위법 등등을 자행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자랑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와 같은 비 진리를 강력하게 거부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임을 선포하면서도 사회 제도와 질서를 지켰으며<마22:15-21-막12:13-17-눅20:20-26> 사도들도 사회 제도와 질서를 지키라고 선포하였다<골3:22><딛3:1>. 기독교인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제반 법규와 질서와 규율과 제도를 준수해야 하며 제도적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 통념 하에 있는 도덕, 윤리, 상식, 등등에 위배되는 어떠한 언행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을 <빛과 소금의 전사-마5:13-16>로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라고 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공의적인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을 정립해 주신 것이다.

(17) 부흥집회 중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교회의 일상적인 정책과 제도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특히 체험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적 신앙을 소유한 자들은 보편적 교회의 정책이나 제도에 만족하지 못하며 보편적 목회자들의 설교에도 만족하지 못하거나 또는 적응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들은 부흥집회, 기도원 집회를 전전하면서 박수치며 찬양하고 통성기도 하면서 광분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만족한다. 저들은 그러한 신앙생활로 인하여 가정이나 교회 직분에 매우 소홀하며 심지어는 가정파탄까지 일으키기도 하지만 전혀 개념치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성도 자신의 희락<기쁨>적 신앙을 요구하지만 그보다도 하나님께 희락<기쁨>을 드리는 신앙의 열매를 요구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락은 물론 성도 자신의 기쁨적 신앙이 포함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의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드리는 실천 신앙적 신앙의 열매를 이룰 때에 비로소 진정한 희락을 안겨 드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가정을 매우 중요시하며 교회의 질서와 제도에 순종하는 신앙을 요구한다.

(18) 설교중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신앙적 열매를 이루는 실천적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설교를 듣고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있다. 이러한 성도들은 유명 목사의 차원 높은 설교를 듣고 만족하기 위하여 원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대형교회들을 찾아다닌다. 설교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설교 취향은 다양하다. 어떤 성도들은 학문적, 논리적, 설교를 선호하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강복위주 설교를 선호한다. 또 어떤 성도는 웃고 즐길 수 있는 설교를 선호하는가 하면 비판적 정죄적 설교를 즐거워하는 성도가 있고 윤리적 도덕적 설교를 좋아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사랑과 자비의 설교를 좋아하는 성도도 있다. 한편 설교 중심의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듣는 것에는 적극적인 반면에 실천하는 것에는 매우 소극적이다.
이러한 신앙은 결코 바람직한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들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열매로 결론된다. 신앙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성도들은 듣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차원 높은 설교를 듣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지만 신앙의 정립이 된 경륜 있는 성도들은 듣는 위주의 신앙적 삶에서 상승 초월하여 전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19) 목회자 추종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목회자를 섬기고 추종하는 신앙적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제로는 목사를 섬기고 추종한다. 이러한 자들은 목사가 비 진리와 불법, 편법, 위법, 등등을 행사하며 성도들을 착취하고 갈취하며 심지어는 성도들을 축출하여 교회를 파탄으로 이끌어 가도 오직 목사에게 절대 충성하며 그 목사가 임지를 옮기면 직장을 옮기고 이사하여 따라 가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며 충성하고 맹종한다. 이러한 일들은 특히 여자 성도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데 저들 중에는 자신이 추종하고 섬기는 목사가 집회하는 부흥회를 따라 다니느라 가정조차 돌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신앙은 분명한 오류이다. 그리고 성도가 이러한 신앙 소유한 것에는 목사의 책임이 크다. 목사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는 신앙을 형성시켜 주어야지 자신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신앙을 형성시켜 주면 안 된다.

(20) 귀신론자.

한국 기독교 이단 중에 귀신론 주의자들이 있다. 김기동 이초석을 대표로 하는 소위 <베뢰아> 주의자들은 모든 교리를 귀신론에 연결시키어 감기나 몸살 같은 질병도 귀신의 소행으로 주장하는가 하면 자동차에 연료가 떨어진 것까지도 귀신의 소행으로 간주한다. 저들은 아예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자체를 사단과의 전쟁으로 귀결 짖는다. 저들에 의하면 기독교의 본질은 사단과의 전쟁이며 따라서 기독교는 귀신을 박멸하여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 이러한 신앙은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 신학을 심히 오류, 변질시킨 것으로서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기독교는 사단과의 전쟁을 위하여 설립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설립되어졌다. 사단의 능력이 대단하고 또한 사단의 공격이 극심할지라도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중 하나에 불과하며 사단과 교회와의 싸움은 애당초부터 성립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교회에 대한 승부를 선포하심에 있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라고 선포하심으로서 일찌감치 교회의 승리를 선포하셨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두려워하며 그들과의 전쟁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아예 무시하고 상대조차 할 필요 없으며, 그것들이 공격하거나 접근하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능력으로 사정없이 패퇴시키는 것이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두려워하고 신경 쓰면 계속하여 공격하거나 접근한다. 반면에 아예 무시하고 상대조차 안하면 전혀 공격하거나 접근하지 못한다.

(21) 종말론적 신앙.

기독교를 표방하는 사이비 이단자들 중에 각종 종말론주의자들이 있다. 종말론주의자들의 출현은 초기 신약 기독교 역사 이래 세계적으로 수없이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기독교 교회 회의와 기독교 신학자들을 통하여 정죄되고 퇴출되었으며 기독교 교회 회의와 기독교 신학자들의 정죄 없이도 스스로 궤멸되고 사멸되었다.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의 종말론은 대체적으로 <마24장>의 예수 그리스도 경고와 <행1:4> <행1:9-11> 등등을 곡해한 것에서 비롯되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곡해로 인한 종말론 사상들은 그 성경 말씀들에 대한 조직신학적 해석이 정립되어짐으로서 정죄되고 퇴출된 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이비 이단자들에 의하여 종말론들이 다시 등장하였고 신학이 없는 일부 목회자들이 이에 가세함에 따라 크게 성황 하였다. 반면에 종말론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얼마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가 스스로 궤멸, 자멸, 하였고 어리석은 몇몇 추종자들만이 산속 깊이 은거하거나 또는 소단위 그룹을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바로 정립한 기독교인들은 각종 종말론이 극성스럽게 난무하여도 전혀 요동하지 않고 정상적인 신앙을 유지한다. 그들은 종말론주의자들의 주장이 매우 허구적인 것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의 때가 아직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알고 있는 것이다.

(22) 서원.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임의적 서원을 한 후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무리하거나 비정상적인 일들을 진행시키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재물, 사업, 자녀, 건강,> 등등을 요구하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면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드리겠다는 조건적, 임의적, 서원을 한다. 특히 아들 낳기를 소망하는 성도들과 자신의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이 한나의 서원<삼상1장>을 근거로 하여 <첫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다. 저들은 첫 아들을 낳았을 때에 그 아들이 자신의 서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과 전혀 관계없거나 또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각종 오류를 범한다. 그리하여 저들은 본인의 <신앙, 사명의식, 자질, 능력,> 등등에 전혀 관계없이 그를 목사로 세운다. 서원자들은 본인이 전혀 하나님의 종이 될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질, 능력, 등등이 전혀 목사가 될 수 없는 자이거나 심지어는 기본적인 신앙조차도 정립되지 않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억지로 강제로 밀어붙이어 목사로 만든다. 그리하여 전혀 목사가 아닌 목사,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목사들을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드리겠다는 서원이 아무런 조건이나 목적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성은에 감격한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임의로 서원하고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 한편 어떤 것을 요구하면서 그것이 요구대로 이루어졌을 때에 <무엇을 어떻게> 드리겠다는 서원은 이미 조건과 목적이 전제된 것이므로 불충하고 불순하다. 특히 하나님의 종에 대한 서원은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임의대로 서원한 것이므로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 욕심, 요청, 등등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오류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서원<맹세>를 절대 금지시켰고<마5:34-36> 하나님께 함부로 서원<맹세>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입다와 그의 딸을 통하여 정립시켜 주셨다.<사11:30-31>

6. 신학에 의해 정립된 신앙.

우리는 앞장을 통하여 신앙은 신학에 의하여 정립되어질 때에 바른 신앙이 되며 신학은 신앙의 열매를 요구한다는 것을 정리하였다. 이와 같은 신앙의 원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면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는 신앙>으로 결론되어진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오해하여 신학이 우리들에게 매우 어마어마한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를 전제로 하여 정립되었다. 따라서 신학이 요구하는 신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의하여 <우리가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신앙>을 요구하며 <우리가 충분히 행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지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전제된 신앙>을 요구한다. 신학이 요구하는 이러한 신앙은 자녀로서의 신앙이 있고 하나님 종으로서의 신앙이 있다.

1) 자녀로서의 신앙.

(1) 하나님의 나라와 하니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명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각각 두 가지로서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나라.

A. 천국.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 백성으로서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취득한 천국 시민권자로서 천국 시민의 지위와 인격과 품위에 맞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구하는<세우는> 것이다.

B. 현세.

현세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 통치되고 운영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따라서 현세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의하여 통치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세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의하여 통치되고 운영되지 않는다. 각종 불법, 편법, 위법, 탈법, 불의, 타락, 오류, 등등이 난무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빛과 소금의 특전사>로 임명하시고 그들에게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살아 현세의 각종 불법, 편법, 위법, 탈법, 불의, 타락, 오류, 등등을 정화하고 개선하라고 명령하신다. 즉, 현세를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의하여 통치되고 운영되는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가정, 직장, 이웃, 사회, 등등의 각 영역에서 <빛과 소금의 특전사>로서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살아 현세의 각종 불법, 편법, 위법, 탈법, 불의, 타락, 오류, 등등을 정화하고 개선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세우는>것이다.

② 하나님의 의.

A. 하나님의 의<義-진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의<義-진리>를 구하는<세우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법과 진리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인정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 자녀로서의 지위와 인격과 품위에 맞는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며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義-법과 진리-말씀>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반대적인 삶을 살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義-법과 진리-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자녀로서의 지위와 인격과 품위에 맞는 신앙적 삶과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살아 하나님의 의<義-법과 진리-말씀>을 구하는<세우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B. 하나님의 의<意-섭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의<意-섭리>에 절대 순종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유익과 평안을 고집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불순종하거나 저항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의<意-섭리>를 무시하는 악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인지 알 수 없다고 하거나 또는 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항변한다. 초신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충분한 변명이며 또한 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항변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여 주셨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과 또한 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항변하는 것은 야단맞아야 하는 불경<不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적용하여 그것이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유익하거나 맞으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고 반대로 그것이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어려움을 주게 되는 경우에는 갈등하면서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유익하거나 맞으면 열심이 일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어려움을 주게 되는 경우에는 자신이 과연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갈등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意-섭리>를 구하는<세우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8:22>

하나님의 의<意-섭리>를 구하는<세우는> 것은 자신의 유익과 형편을 다 챙긴 후에 남은 것으로 구하는<세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하나님의 의<意-섭리>를 구하는<세우는> 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자기를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것을 크게 세우는 것이며 많이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마6:33>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워주신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 희생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는 신앙.

① 하나님의 영광

A. 하나님 영광의 정의.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무엇에 의하여 세워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자존하심을 통하여 이미 영원히 세워졌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자체적인 영광이며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B. 하나님께서 받으시려는 영광.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받으시려는 영광은 이미 세워지고 이루어진 영광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때문에 받으시는 아픔과 고통과 희생이 계산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녀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며 은총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결과>들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매우 대단한 것>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으로 확대하시어 그들의 공로를 칭찬하시고 기뻐하시면서 그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까지 칭찬하신 <욥>이 과연 칭찬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하신 노아가 과연 의인이었을까?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예쁘고 사랑스럽고 의인이고 지혜롭고 똑똑하고 잘하는 것으로 보이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섭리적 주제 하에 오히려 온갖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자녀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② 하나님의 기쁨.

A. 하나님 기쁨의 정의.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적 차원의 기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이미 자체적으로 세워지고 이루어진 기쁨으로서

a. 주권적 차원에서 자존자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적 기쁨이며
b. 속성적 차원에서 완전무결한 자로서의 영원무궁한 기쁨이며
c. 섭리적 차원에서 통치자 운영자로서의 권위적 기쁨이다.

B. 하나님께서 받으시려는 기쁨.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받으시려는 기쁨은 이미 세워지고 이루어진 기쁨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를 통하여 기쁨을 받으시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 때문에 받으시는 아픔과 고통과 희생이 계산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기뻐하시려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녀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며 은총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하신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종하여 살라고 계속하여 명령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순종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족하시려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녀들이 그러한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지위와 인격과 품위에 맞는 신앙적 삶>과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살면 사람들은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 받기를 기뻐하시어 그들의 신앙적 삶을 재촉하시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 받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결과>들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매우 대단한 것>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으로 확대하시어 그들의 공로를 칭찬하시고 기뻐하시면서 그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들의 영광과 기쁨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받으신다는 섭리적 주제 하에 오히려 온갖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자녀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아는 자들은 결코 어떤 것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인지 알 수 없다고 하거나 또는 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항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니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는 신앙>은 결국 자신의 상급과 면류관과 영광과 기쁨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이며 사랑이고 은총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요구하는 차원의 신앙적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도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거듭난 의인들이지만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상태적인 의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충분히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 수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후원하고 지원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촌각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함께하심 속에서 충분히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게 된다.

2) 하나님 종으로서의 신앙.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들의 신앙적 삶이 개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일상적 삶에 국한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신앙적 삶으로 요구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1-33>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8-10>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실제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삶-마8:20>을 사심으로서 하나님 종들의 삶에 대한 지표를 세우셨다.
바울은 하나님 종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앞만 보고 달리는 달음질 하는 자-고전9:24>로 정의하였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하나님 종들의 삶은 현세의 <재물, 명예, 권세, 권위,> 등등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의,식,주-衣食住>까지도 초월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버리며<마8:22> 사지<死地>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달려간다<요21:19>. 그들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는 삶>이다. 때문에 하나님 종들의 신앙적 삶은 신앙적 삶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사명적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신앙적 삶>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적 삶> <빛과 소금의 전사로서의 신앙적 삶>은 인간으로서는 절대 살 수 없는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충분히 살 수 있는 삶이다. 인간으로서는 타락한 본성 때문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므로 그러한 삶을 절대 살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부여된 인격으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고자 하는 신앙으로 그러한 삶을 충분히 살 수 있다. 그리고 인간들은 성령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없으므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 문제는 오직 한 가지이다. <욕심을 버리느냐? 버리지 않느냐?>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속 거부하며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그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욕심을 버린다면 그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비 진리적 삶을 사는 것과 심지어는 그러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종들이 비 진리적 삶을 사는 것은 모두 욕심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제7장. 하나님.

1. 하나님을 아는 방법.

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알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으나 그중에 많은 신학자들이 실패하였거나 또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인식하였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시며 또한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시지 아니하시고 인간이 알아야 할 만큼만 알려 주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완전히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본래 오늘날과 같이 격조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에덴동산을 함께 거닐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성은을 입었었다. 물론 그때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지 못했으나 현재와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가려지고 감추어지게 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배반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한 후부터였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만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인간과의 관계를 지속하시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부여하셨으며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배려를 전제로 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1) 성령의 조명하심 하에 하나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조명하심 하에서 학력, 지혜, 등등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인식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없기 때문에 학력, 지혜, 등등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2) 하나님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 하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 지식, 지혜, 등등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비 진리로서 이단이 된다. 기독교를 빙자한 이단들이나 비 진리자들이 성경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범주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신학과 신앙으로 영접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여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필요로 하거나 또는 요구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다만 존재하시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신학<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입각하여 영접해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으로 영접해야 한다. 신학<하나님의 말씀-성경>의 증거와 선포를 아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고 불신하며 불만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고 불충이다.

2. 하나님의 명칭.

1) 하나님의 이름.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부를 때에 사용한 명칭들은 <엘>과 연합된 명칭들로서 < 엘리욘. 엘 솨다이. 엘 올람. 엘 벧엘. 엘 로이. 엘 브릿. 엘 엘로헤 이스라엘. 엘로힘. 엘로하> 등등이었다. 엘이란 명칭은 본래 셈 어 족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신의 이름이며 또한 신들 중에 최고의 신으로서 <피조물의 신> <인류의 아버지> <신들의 신> 등등의 의미를 가진 신이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의 이름을 <엘> 또는 엘과 연합된 이름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하신 것을 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시어 신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을 정립시켜 주시기 위함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히브리어의 <엘>을 번역하여 <데오스-θεὀς>로 사용하였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야훼-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선언하셨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확실하게 반영하는 명칭이다. 스스로 존재한 자 이상의 능력적 신은 없으며 스스로 존재한 자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며 최고의 오직 유일한 신으로서 모든 것을 섭리한다는 의미가 압축된 이름이 곧 <야훼-스스로 있는 자>인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不敬>이라 하여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 고재판하다, 지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아도나이>로 의역<意譯>해서 사용하였다. 훗날 70인 역 성경은 <아도나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퀴리오스>로 하였다. 야훼가 여호와로 명칭 변경된 것은 유대교 신학자들인 <맛소라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본래 고대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었다. 따라서 야훼는 <הזהי- YHWH>로 표기되었는데󰔘맛소라 학자들이 히브리어 모음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아도나이-י󰔷󰕌󰔣>>에 대한 히브리어 모음을 야훼<הזהי > 자음에 붙여 여호와<ה󰕳󰕜󰖾>가 되었다.
한편 한국 기독교는 오직 유일하신 한분이라는 의미에서 <야훼-여호와>의 이름을 <하나님>으로 부른다.

2)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의할 점.

하나님의 이름은 원칙적으로는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사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삼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망령되게 부르고 있다. 아무 곳에나 하나님의 이름을 적용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장난스레 부르거나 농담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불법을 저질러놓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저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또는 경제력이나 탁월한 수완 같은 것들을 통하여 얻어진 불법적, 위법적, 탈법적, 편법적 등의 불의한 유익이 하나님의 은혜요 강복하심이라고 말하면서 예물을 드려 감사한다. 또 어떤 자들은 심지어 도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나 뇌물 같은 것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으로 알고 자랑한다. 이와 같은 몰염치한 행동은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으로 매도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는 망령된 것으로서 형벌 받아 마땅한 행악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 하나님 무지하게 웃기셔> <우리 하나님 참 재미있으셔> <우리 하나님 실수 하셨어> 등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나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무결하신 하나님, 특히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섭리 주이시며 통치 주이시고 심판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는 절대로 적용되어져서는 안 되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다.
또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함에 있어서 <데오스-θεὀς>를 생략하여 첫 자인<θ-델타>로 표기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 방자한 태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을 표기하듯이 그렇게 대충 표기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나 피조물들의 그것과는 구별되어져야 하며 실제로 구별되어져 왔다. 히브리인들은 ‘야훼’ 하나님을 직접 부르지 아니하고 ‘엘’과 연관된 이름으로 부르거나 ‘아도나이’란 호칭으로 불렀으며 문자로 표기할 때에도 매우 조심하였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성경을 기록하는 자들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목욕하고 기도한 후에 그 이름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이름은 함부로 불려질 수 없는, 존귀하고 위엄 있는 것이며 또한 아무렇게나 대충 표기되어질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임을 명심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예의를 다하고 섭리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예의를 다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예의를 다하여 정중하고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한 표기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진행이시며 결과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한 무<無>에서 자존<自存>하셨고 완전한 무<無>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모든 것을 경영하시고 통치하신다.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로서 창조주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경영주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서 통치주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사45:9>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1>


4.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말할 때에 “속성”<attribut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바람직하지 못하다. 속성이라는 용어는 인간에게 사용되어지기 적절한 용어로서 하나님에게 적용하기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성”<properties>이라는 용어가 더욱 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성이라는 용어도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하게 증거 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성품을 말할 때에 속성을 사용하지 않고 특성을 사용한다고 하여도 어차피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그것과 완전하게 구별하는 방법은 되지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속성이나 특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 하기는 하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그것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드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1)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비공유적 속성은피조물에게는 전혀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속성으로서 자존성, 단순성, 무량성과 같은 속성을 말한다.

(1) 하나님의 자존성.

하나님은 어떤 근거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존재<자존> 하심으로서 우주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위치와 자격을 입증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존성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신학적 의미로 논증되어졌다.

첫째: 일부 학자들은 하나님의 자존하심을 말 할 때에<하나님은 자 기 자신 안에 자신의 근거를 가진다.>라고 말함으로서<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원인>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자존성에 적합하지 아니하다. 그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마치 하나님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어떤 느낌을 줄 수 있음으로 하나님의 자존성이 필연적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실상 그 어떤<자기 자신을 포함한>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논증 할 때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자존적 실유>인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자존하심은<자기창시_self-originated>를 의미하는 자 존성<aseitas>이란 용어로 표현되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실유 자체에만 묶어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관계되는 다른 모든 것에게도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자존성을<하나님의 독립성>이라는 신학적 용어로 대용하였고 하나님의 독립성을 하나님의<덕, 작정, 사역> 등에도 적용시켰다.
하나님의 자존성은 야훼라는 이름을 통하여 선포되어지고<출 3:14>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증거 함에서도 선포되어지며<요 5:26>
만물과의 관계를 증거 하는 <시 94:8; 사 40:18; 행 7:25>과
하나님의 사상에 대한 증거인 <롬 11:33,34>과
하나님의 의지를 증거 하는 <단4:35; 롬 9:19; 엡 1:5; 계 4:11>과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하는 <시 115:3>과
하나님의 계획을 증거 하는 <시 33:11> 등을 통하여서도 선포되어진다.

(2) 하나님의 완전성.

하나님은 모든 면 모든 부분에서 완전무결하시어서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없다. 하나님의 부족함이나 지나침은 하나님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이겠지만 그것은 피조물들로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못한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다음과 같은 분야를 통하여 증거 되어진다.

① 하나님의 불변성.

하나님은 완전하심으로 당연히 불변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하심으로 또한 모든 면에서 불변하실 수밖에 없다. 절대완전 자로서의 하나님에게는 개선, 개수, 보완, 보충, 보결, 퇴진, 퇴보, 등과 같은 추가조치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함에 있어서 몇 가지 유의하여야 할 것이 있다.

첫째 :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부동성<immobility>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더 이상 우주만물 위에 간섭하지 아니하시며 그 모든 것들이 자력에 의하여 운영되어지도록 하셨거나 또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운영되어지도록 하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하나님을 움직이지 아니하는 우주의 방관자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주만물이 당신의 섭리에 따라 자체적으로 운행되어지도록 창조하셨다. 우주공간을 가득 메운 수많은 행성들이 어딘가에 전혀 매달려 있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질서정연하게 운행되어지고 있음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운행되어지고 있는 자체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우주만물이 자체적으로 생산과 소멸을 거듭하는 가운데 오늘과 같은 발전적 역사를 이루어온 것도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운영되어지는 자체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부동의 자세로 계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전지하심에 의한 예정에 따라 결정되어진 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하심에 있어서 때로는 종들을 사용하시어 역사하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시어 역사 하시면서 우주만물 위에 영원히 살아 역사 하신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해 나갈 때에는 관람주의 입장에서 흐뭇한 눈길로 그 모든 것들을 즐기시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해나가지 아니할 때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시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전개되어지도록 하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의치 아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때에는 직접적으로 사건에 개입하시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전개되어지도록 조처하시는 것이다.
둘째 :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어떤 결정이 절대로 변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성이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전지성만을 붙들고 늘어짐으로서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적으로 변경되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때때로 마음을 돌이키시고 공의로 다스리기로 결정한 자들을 용서하시는 변함을 보여주신다<출 32:10~14; 욘3:10> 결국 하나님의 변화는 하나님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과의 관계론적 차원에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 같은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비롯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의 능력, 진실, 거룩, 무한, 무량, 등 하나님의 실유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주권적 섭리와 하나님의 약속과 같은 것들의 불변함을 뜻하는 것이다.

② 하나님의 무한성.

하나님은 어떤 근거에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여 시공간과 사상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등을 총 망라한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미 존재했던 것과, 현존하는 것과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들>의 영원한 근원이 되었음으로 참으로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시어 어떠한 것들로부터, 어떠한 제재도 결코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계산이나 측량을 결코 허용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영원히 한계를 정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③ 하나님의 무량성.

하나님의 무량성<Immensity>은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으로도 불리어진다. 그러나 무량성과 편재성은 구별되어져야 한다. 무량성은 하나님이 과거, 현재, 미래, 등의 모든 시공간적인 것들의 제한이나 제약들로부터 자유 하시어 그것들을 초월하심을 말하는 반면에, 편재성은 하나님이 그의 전 실유로 공간의 매 부분을 전혀 빈틈없이 채우심을 말한다. 즉, 무량성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선포하며 편재성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무량성<초월적>과 편재성<내재적>은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되어있다.

하늘과 땅은 그를 포함<용납>할 수 없으며<왕상 8:27; 사 66:1; 행 7:48,49> 동시에 그는 하늘과 땅을 채우시며 언제나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다<시 139:7~10; 렘 23:23,24; 행 17:27,28>
따라서 하나님의 무량성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내재성을 동시에 의식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량하신 임재를 말함에 있어 몇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첫째 : 하나님의 임재를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에 무수하게 흩어져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실유를 수 없이 많은 개체들로 오해할 수 있게 하는 범신론적 사상이다.

둘째 : 하나님의 임재를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임재 하시지만 하나님의 실유 전체로 직접 임재하시지 아니하고 우주만물에 다만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임재 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실유를 우주만물 위에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 섭리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하는 자연신론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량성을 말할 때에 다음과 같은 결론적 개념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 미래, 현재, 등의 시간이나 우주의 행성들이나, 전 우주에 존재하는 동물, 식물, 인간, 심지어는 유기물 무기물, 미생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우주 만물들이나 그러한 모든 것들의 생각, 의지, 사상, 개념, 정신 등의 혼이나 영적인 모든 부분에 전혀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실유 전체로 빈틈없이 내재하시며 동시에 그러한 것들로부터 완전하게 자유하시어 그들로부터 전혀 초월하여 임재하신다.>

④ 하나님의 영원성.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적인 개념으로만 정의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시간과의 관계로 대비할 때에 영원하심이라는 성경의 증거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영원성을 정의한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는 경우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시 90;2; 시 102:12; 엡 3:21>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적인 것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적인 것에 한정시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제한시키는 죄악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것은 물론이요, 과거에 존재하였던 모든 것들과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나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적으로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질”과 “량”적으로도 영원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 피조와의 관계에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영원히<무한히> 적용되어져야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적인 영원하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과 “량”의 영원성<무한성>을 말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영원성이 정확하게 정립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

공유적 속성은 인간들에게도 어느 정도 유사함이 있는 속성으로서 능력, 선, 자비, 등과 같은 속성을 말한다.

(1) 하나님의 인격.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인격적인 임재였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더불어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고 또한 인격적인 약속을 맺으시며 인격적인 예우로 사람을 대우하신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증거 되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이야기나, <눅 15:11-32>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인격적으로 예우하시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격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순전하시는가?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것 중에 최고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빌립을 통하여 하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선포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요 14: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성.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상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최대의 관심사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인류의 초미적인 관심사에 언제나 냉담하다. 하나님의 실존 상태를 가장 가깝게 증거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영이시라-요 4:24>이다. 신학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이 명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성>을 정립하고 가르친다. 초대교회 시대의 그노시스 주의자들이나 중세시대의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현대자유주의자들 중의 일부들은 하나님에게 실체적인 신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신체로 존재하시지 않고 영으로 존재하신다. 성경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 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 지어다-딤전 6:15-16>

성경이 하나님의 손, 발, 눈, 입, 코, 귀,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격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실유를 오해할 수 없게 하기 위한 일련의 조처일 뿐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을 인간과 똑같은 성분의 실유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상하거나 괴상한 실유로 묘사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나님의 영적 실유를 말함에 있어서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다.

첫째 : 불가시적인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의 실유 자체를 하나의 이데아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분명한 실유로 존재하며 성경은 그것을 확증한다. 아담이 타락하여 하나님께 징계 받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보았으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창 3장>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실유를 인식은 하면서도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실유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의 실유를 직면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완전한 영적 상태를 회복하였을 때 하나님을 직접 뵈옵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고전 13:12>

둘째 : 비물질적인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의 실유 자체가 실체로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분명한 실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져질 수 없는 영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현대적 오류들.

현대 기독교는 지도자들의 신학적 무지와 편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왜곡하고 오류 시켰다. 현대 기독교에 만연되어 있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오류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 심각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율법적 하나님 강조.

보수주의 정통 기독교를 자부하는 목회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근엄하심과 공의로우심에만 연연하여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징계의 하나님>으로만 선포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저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전혀 도외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들도 때로는 사랑의 하나님을 선포한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주로 심판의 하나님 징계의 하나님과 같은 율법적인 하나님을 강조하여 성도들이 사랑의 하나님은 기억하지 못하고 두렵고 무서운 율법적인 하나님만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예배<특히 주일 낮 예배>에 불참하거나 또는 헌금<특히 십일조 헌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추상같은 호령으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선포한다. 이러한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은 결국 사랑의 하나님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징계의 하나님과 같은 두렵고 무서운 율법적인 하나님만 의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만 실수하여도 하나님께 징계 받으리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게 되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각종 예배에 불참하게 되면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전전긍긍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율법적인 하나님을 강조하는 일부 목회자들 중에는 성도들이 회개할 때에 반드시 속죄의 헌금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할 때에 속죄의 헌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 결국 성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나 교회봉사를 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지 아니하고 두려움과 의무감, 또는 책임의식 같은 것들에 의하여 행하며, 특히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것을 헌금<물질 내지 돈>으로 해결하려는 신앙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자유하지 못한 채 항상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며, 한숨과 비탄에 잠겨 눈물로 간구 하고 용서를 갈구하는 고통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우러러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서 기쁨과 평안,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신앙적 삶을 살지 못하고 슬픔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의 신앙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 복음적 하나님 강조.

징계와 심판의 율법적 하나님을 강조하는 목회자와는 달리 오직 복음적인 하나님만을 선포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저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오직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강복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십자가상의 대속제를 통한 용서를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 그리고 심판과 같은 것들은 모두 다 종결되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강복의 하나님, 복음의 하나님이실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들은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 현재의 죄는 물론이고, 미래의 죄까지도 낱낱이 용서하여 주셨으며 택한 자의 죄에 대해서는 추궁도 책망도 징계도 심판도 면제하신다는 용서의 원리를 함부로 적용하여, 하나님의 성도들은 죄와 무관함으로 죄에 대한 개념에서 완전히 자유하며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된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에 일반인들과는 신분이 다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죄 같은 것에 매달려 살면서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자신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유대인에게까지 소급한다. 저들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비극은 하나님의 심판과는 전혀 무관한 민족적인 것이요, 국제적인 정치 문제라고 결론 내린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지고하신 사랑의 속성 때문에 비록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중한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을 징계할 수 없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의 원리상 유대인들에게 형벌을 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 하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오직 사랑의 하나님 강복의 하나님으로만 인식하여 죄에 대한 개념에서 지극히 자유하여 죄의식이 전혀 없는 방종스러운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으며 심지어는 하나님께 농담조차 하는 불경스러움을 보이기조차 한다.

(3) 방관하시는 하나님.

자유주의신학자들 중에 방관하시는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제반사에 일일이 간섭하시고 관여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는 모든 피조의 세계가 자연의 섭리대로 진행되게 하셨으며,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후에는 그 문제를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기시고 간섭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구원문제를 비롯한 현세적인 길흉화복은 인간들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여부에 달려 있는 것으로서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려는 생각은 하나님께 너무 염치없는 것이며 나태하고 무책임한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야하며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아니하는 것들에 대하여서만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 바른 신앙적 자세라는 것이다.

(4) 성경의 증거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 저들의 주장대로 거룩하고 공의로우시고 근엄하시기만 하여 성도들의 잘못 하나 하나를 일일이 책망하시고 형벌주시며 회개할 때에 반드시 예물을 요구하시는 율법적인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자녀들의 모든 잘못을 일체 묵과하시고 오직 사랑과 자비와 긍휼만을 베푸시며 강복과 은총과 보호하심만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후에 남은 문제를 인간에게 일임하시고 인간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만을 때때로 해결하여 주시는 가운데 인간들의 행동여부에 대한 결과에 따라 심판하시는 방관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먼저 성경의 증거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① 공의로 훈계하시고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언어행동을 할 때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으로 훈계하시고 책망하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돌아서지 아니할 때는 적절한 징계를 내리신다. 이것은 자녀의 행동을 미워하여 진노하심이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리시는 공의와 사랑의 조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자녀가 바로 서고 바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자녀들이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벋어나는 행동을 할 때에 그와 같은 조치를 내리시는 것이다.<잠 3:11; 6:23; 13:24; 22:15; 렘3:19; 30:11; 고전 11:32; 고후 6:9>

②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위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의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자녀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신다. 과거의 잘못은 물론이고 현재의 잘못과 심지어는 미래의 잘못까지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하신 용서는 철저한 회개를 요구한다.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예정과 선택하심에 의하여 결과 되어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자복의 철저한 회개가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 이전에 이미 세례요한을 통하여 회개를 재촉하심으로서 이와 같은 원리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자녀들을 향하여 여전히 회개를 촉구하신다.<시 7:12; 마 3:2; 눅 13:3; 5:32; 13:3; 15:7; 막 1:4; 1:15; 행 2:38; 11:18; 13:24; 20:21; 26:20; 롬 2:4; 고후 7:10; 딤후 2:25; 히 6:1; 계 2:5; 2:21; 9:20,21; 16:9>.
물론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상에 있어서 죄인이 아니고 의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죄에 대한 법률적인 문제이고, 행정적인 문제이지 현실적인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현세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죄인<원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죄에 대한>인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일상적인 삶 속에 있는 죄에 대한 회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 있어서 성도의 회개는 의무적인 것이나 책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서의 윤리요, 도덕이며, 효심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영원히 도말하여 주시고 일체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신다 하여 자신의 신분이 의인이라고 호언하면서 일체의 잘못에 대한 면죄의식을 가지고 당당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질 수 없는 망상이며 망언이며 망동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히려 더더욱 죄의 길에 서지 아니하려고 노력함은 물론이요, 비록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작은 죄라 할지라도 빛과 소금의 사명을 부여받은 자로서의 책임 의식과 의무감에 의하여 철저하고도 진솔한 회개가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회개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가 내려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가 뒤따른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비는 자녀들의 아픔과 괴로움에 연민의 정을 갖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워 하고 민망스러워 하는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심으로서 위로하여 주시고 자애롭게 다독여 주심으로서 자녀들의 부끄러움과 슬픔을 달래어주시어 자녀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시 49:15; 사 49:13; 51:3; 마 5:4; 막 2:5; 눅 2:25; 행 20:12; 롬 3:24; 고후 1:4; 2:7; 7:6; 7:13; 살전 3:7; 4:18; 히2:18; 10:10>

③ 기쁨과 강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현세를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각종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각양각색의 다양한 복을 내려주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진 복을 누리며 사는 자녀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도 또한 기쁨을 누리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복이 현세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강복은 현세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미래적인 것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 더욱 크고 놀랍다 .현세적 강복은 하나님 나라의 강복에 대한 작은 예표에 불과하다. 반면에 현세적 강복은 때때로 하나님 나라의 강복에 대한 장애적 요소가 될 때도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현세적 강복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자녀들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보다는 당장 눈앞의 현실적인 것이 더욱 다급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한 자녀들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당장 시급한 현세의 문제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고 매달리게 되고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게 되면,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거나 불만을 품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경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더 큰 행복을 위하여 그들의 간구를 외면하실 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녀들의 간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선포한다<마 6:7-11>. 따라서 자녀들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는 절대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녀들의 기도를 외면하시며 때로는 오히려 약간의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이 아니라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하신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보다 큰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자녀들이 보다 성숙한 신앙적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때때로 자녀들에게 약간의 고난을 주시고, 자녀들이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밀접하게 하시는 것이다<롬 8:17,18; 고후 1:5; 4:16-18; 빌 3:10-11; 벧전 4:13>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헤아려 자신의 고난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차원의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⑤ 끝까지 모든 것에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공하신 후에 그것들을 인간들에게 내어 맡기시고 수수방관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공하신 분으로서 그 모든 것들이 인간들에게 적용되어짐에 있어서 모든 책임을 홀로 지시는 하나님이시다. 특히 자녀들의 삶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시어 사소한 문제 하나조차도 배제하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보살펴주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모든 것에 개입하시어 독재하시며 간섭하시고 잔소리하시어서 자녀들을 귀찮케 하신다거나 또는 자녀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독선에 일일이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녀들을 무능하게 만드는 것이요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요 무용한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자녀들을 위축시키거나 낙후시키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함께 하시되 자녀들이 자신의 지혜와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결과들을 창출해 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의 각 영역을 조명하시면서 은밀하게 유도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자녀들이 정도와 순리에서 벋어나게 되거나 또는 어떤 위기에 처하게 되어 자녀들의 신상에 불의 한 사태가 발생할 여지가 있을 때에는 즉각, 그리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어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녀를 사랑하시며 자녀를 위하여 자녀의 편에 서신다. 따라서 성도들의 불행은 언제나 임시적인 것이며, 그 불행 뒤에는 더 크고 화려한 아름다운 결과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하여 준비되어져 있는 것이다<사 43:1-3; 54:10; 렘 323:40; 마 18:12-14; 요 6:35-40; 10:27-30; 17:11-15; 롬 5:3; 고전 1:7-9; 고후 4:6-17; 4:14,17; 12:7,9; 살전 5:23,24; 딤후 4:18; 빌 3:10>

(5) 결론.

지금까지 상고한 바대로 성경은 하나님을 증거 함에 있어서 율법적인 하나님만을 증거 하지 아니하며 또한 복음적인 하나님만을 고집하지도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방관하는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거 함에 있어서 율법적임과 동시에 복음적이신 하나님을 증거 한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 근엄하시고 준엄하시되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단호하시고 엄격하시되 부드럽고 따뜻하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으로 자녀들의 잘못을 단호하게 다스리시되 자녀에 대한 사랑하심과 하나님 자신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의하여 관용과 자비로 용서하시며, 자녀들의 불의를 준엄하고 근엄하게 훈육하시고 징치 하시되 자녀를 향하신 애틋한 사랑으로 긍휼과 은총을 베푸시어 위로하고 품어주심으로서 자녀들의 고통과 슬픔과 부끄러움 등을 달래어주시고, 자녀들에게 각종의 강복을 허락하시어 그들이 기쁨과 평안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자녀들의 일신은 물론이요, 그들의 영원한 삶까지도 영원히 책임지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앞에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리는 충성과 순종의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5.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본래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은 서로 상반되는 대립적 관계를 이룬다. 기독교 신학은 공의적인 것으로서 날카롭고 절대적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으로서 명령적으로 주어졌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순종만을 요구하고 명령한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은 신학으로부터 정립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자비, 긍휼과 용서, 온유와 화평 등등의 온유한 인격과 품위를 형성하면서 너그러움과 원만함과 부드러움과 따뜻함 등등의 실천 신앙적 삶을 영위한다.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의 절대적 법으로서 오직 순종만을 요구하고 명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신앙이 율법적인 절대적 신학에 상반되는 사랑과 자비, 긍휼과 용서, 온유와 화평 등등의 온유한 인격과 품위를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자비를 양립시키시어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를 공존하게 하시지만 당신의 섭리 역사를 진행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공의를 초월하는 자비를 베푸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의를 초월하는 자비를 베푸실 때에 하나님의 공의가 무시되거나 생략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공의를 집행하시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성립하신 후 자비를 베푸심으로서 공의 하에 놓여 있는 피조들에게 용서와 긍휼과 사랑을 통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제8장. 삼위일체 하나님.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일반 종교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교리로서 오직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매우 특별한 교리이다.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비논리적, 비과학적, 비상식적, 등등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앞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적 차원에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다음과 같이 믿고 수납해야 한다.

첫째-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둘째-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완전무결의 능력으로 존재하신다는 차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당연한 것으로 믿고 수납한다.
셋째-신학<하나님의 말씀-성경>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포하였음을 명심하여 아멘으로 믿고 수납한다.
넷째-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될 때까지 기다린다.

1.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

1) 최초의 주장.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성경은 한분 하나님을 선포하면서 또한 세분 하나님을 선포한다. 때문에 신학자들은 한분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세분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실유를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했다. 삼위일체라는 말의 그리스어인 “트리아스”<τριας-trias>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의 “테오필로스<Theophilos-안디옥의 6 대 주교 AD 160~190경 재임> 였다,
그러나 라틴어의 삼위일체라는 <트리니타스-trinitas>를 신학적 용어로 처음 사용 한 것은 터툴리아누스 <Tertullianus-AD 150/160~220/222-서방교회북아프리카의 신학자>였다.

2) 교회회의의 결정.

터툴리안이 최초로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그 교리를 형식화하였으나 그 내용은 불충분하였다. 그는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되어진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터툴리안 이후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가 정립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과 수많은 역사적 논증들이 제기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 논증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함께 논증되었고 따라서 기독론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립되었다.

(1) 니케아<Nicea>회의<AD 325-The council of Nicea>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 논쟁의 가열화 속에서 드디어 니케아 교회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니케아 교회회의는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화하였다. 아리우스가 주장하였던 성부 성자 성령의 종속설이 거부되어지고, 성부 성자 성령의 등급설도 거부되어졌으며 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상 동등하다는 것이 선포되어졌다.

(2)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회의
<AD 381-Thecouncil of Constantinople>

니케아 교회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주의자들이 계속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종속설과 성부 성자 성령의 등급설을 주장함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열렸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니케아 교회회의 결정을 재확인하였고 성령의 신성을 확립하였으며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선포하였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상호 관계가 정립되어졌다. 이와 같은 교회회의의 결론이 동방에서는 다메섹의 “요한”의 저서를 통하여 기록되어졌고, 서방에서는 “어거스틴”의 대작인 <삼위일체에 대하여>를 통하여 기록되어졌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位>.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 세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세분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位>가 삼위<三位>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위<位>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인격<人格>적 존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位>>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질 때에 그것은 신분, 위치, 위상, 등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인격<人格>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질 때에 그것은 성품, 품위, 품격, 등등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그, 용어들이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질 때에 그것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때에 있어서 <위> 와 <인격>은 하나님의 본질<본체>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 와 인격 이라는 용어가 하나님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만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실 수 없고 세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셔야 하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만 한분 하나님으로서만 존재 하신다면 위 나 인격 등등의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될 필요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유를 신학적으로 정립 할 때에 본질, 본체, 속성, 등등의 용어로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한분 하나님이 세분 하나님으로 존재해야 하는 절대적 필연성을 요구한다.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정립해야 하는 형이상학적 이유에 의하여 <위> 와 <인격> 이라는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위 와 인격 은 한분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성경에는 삼위 일체 라는 용어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위> 나 <인격> 의 용어도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종들의 지혜와 그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받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 <신학자>들은 한분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나누거나 구분하는 비 진리를 범하지 않고 한분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정립하면서도 한분 하나님과 세분 하나님이 피차에 전혀 타격을 주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정립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는 <위> 와 <인격> 이라는 용어를 형이상학적으로 다듬어 하나님께 적용하는 놀라운 역사를 통하여 정립되어졌던 것이다.

3.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오류.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멋지게 정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간적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종속론.

종속론이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께 종속되어진다는 것으로서 삼위일체 교리를 처음 구체화시킨 터툴리아누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터툴리안의 종속론은 세밀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았다. 종속론을 구체화시킨 것은 오리겐<Origenus-AD 185~254>이었다. 오리겐은 터툴리안의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질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종속된다고 주장하였다. 오리겐의 이와 같은 주장은 성부와 성자의 필연적인 신성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제공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Arius-A.D.250-336>가 성자는 성부 하나님의 최초 피조물이며 성령은 성자의 최초 피조물로서 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그로 인하여 커다란 물의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종속론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가 동등하거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다는 교리를 말한다. 이, 종속론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와 동격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나 성자보다 낮다. 종속론은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본체론적 종속론.

성자가 성부에게 본질상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고 성령이 또한 본질상에 있어 실제적으로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성자는 본질적으로 성부로부터 나왔고 성령은 본질적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 본질적인 종속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2) 사역적 종속론.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동등 하지만 사역론 적인 차원에서는 성자는 성부의 지시와 명령에 종속되어 있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도록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

종속론은 본체론적 종속론과 사역적 종속론에 관계없이 모두 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서 퇴출시키는 망령된 주장들이다. 그 무엇에게든 <비록 성부 하나님에게라 할지라도> 종속되는 하나님은 신분적 차원에 속성적 차원에서 하나님이실 수 없는 것이다.

2) 일위신론<一位神論>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三位>를 거부하고, 성부 하나님의 일 위<一位>만을 주장하는 자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사벨리우스”<Sabellius>에 의하여 제기되어 확산되어졌는데 그로 인하여 두 가지의 변형된 삼위일체론이 등장하였다.

(1) 동력적<動力的-Dynamic> 일위 신론.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만 보았고, 성령의 실체를 부인하여 신적 감화로만 인식하였다. 예수는 성부 하나님의 신적 작용에 의하여 나타난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고 성령은 실체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신적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형태적<形態的-Modalistic> 일위 신론.

양태론<樣態論>적 유일신론으로도 불리는 이 논증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단지 신격에 의하여 연속적으로 표시되어지는 세 가지 형식의 현현으로 보았다. 즉 한 분 하나님이 섭리적 필요성에 의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근래에 이르러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 다음과 같이 가르쳐지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남자가 부모에게는 아들이 되고 부인에게는 남편이 되고 자녀들에게는 아버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한분 하나님이 섭리적 차원에서 어떤 경우에는 성부 하나님이 되시고 어떤 경우에는 성자 하나님이 되시며 어떤 경우에는 성령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시라 <일위의 하나님>이시다. <양태론적 삼위일체론> 또는 <형태론적 삼위일체론>은 본래 <동력적-動力的-Dynamic- 일위신론> 또는 <형태적-形態的-Modalistic-일위신론>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일위신론<一位神論> 하나님 교리이다. 따라서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편안하게 이해하려는 방법론이 아니라 결국은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3) 침투론.

침투론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 되었는데 그들은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켜 침투론을 만들었다. 침투론 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세분 하나님과 한분 하나님의 독립적 존재하심을 거부한다. 저들은 세분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이 되고 한분 하나님이 세분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요14:9-10-고후5:19> 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한분 하나님 안에 두 분 하나님이 침투하여 존재함으로 세분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이 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침투해서 존재하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 안에 침투해서 존재하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침투해서 존재하여 세분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학 사상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만약에 그들의 주장대로 <한분 하나님이 세분 하나님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또한 그 세분 하나님은 셋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전혀 완전한 무<無>의 상태에서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오직 <자존 원리에 의하여> <자존하신 하나님>의 존재하심 이란 절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제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을 믿는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것,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거나 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불경스러운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셨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의한 자존하심이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신학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 세분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숫자적인 3신적 존재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위<位>라는 용어를 형이상학적으로 적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정립한 것이다. 저들은 이와 같은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립적 존재하심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침투>적 원리를 적용하여 하나님께 더욱 불경을 범하였다.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은 그 어떤 것의 연합이나 혼합이나 침투 따위를 용납 할 수 없다. 그것이야 말로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침투를 허용하는 하나님은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서 하나님이 아니며 또한 침투하는 하나님은 침투한 하나님이나 침투당한 하나님이나 다함께 불완전한 하나님이 된다. 한편 침투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연합 내지는 혼합이 되는 것으로서 <연합된 하나님> 또는 <혼합된 하나님>이 됨으로 역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침투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동질성을 파괴한다. 두 하나님이 한 하나님 안에 침투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처음에는 셋으로 존재 하였었는데 <그리하여 본질상 하나의 동질이 아니었는데> 침투하여 <또는 침투되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본질적 동일성을 획득하였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아버지 안에 내가> <내안에 아버지께서>라는 <안에>서의 원리를 잘못 해석하여 마치 하나님 안에 또 다른 하나님이 침투하여 존재<공존>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하게 삼위 하나님의 독립적 실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안에>서의 존재원리는 실유의 실재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을 말하는 것이다. <안에>서의 원리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너희가 내안에-내가 너희 안에>의 원리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실존재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과 실존재적인 공존을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추방시키는 이단적 교리가 되는 것이다.

4.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각론.

1) 제1위 하나님<성부 하나님>

(1) 성부 하나님의 존재하심.

성부 하나님은 완전 무근거<無根據>로부터 자존<自存>하셨다. 성부 하나님의 자존하심은 성부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능력과 절대적 주권에 대한 자증<自證>이다. 무근거로부터의 자존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며 따라서 자존에 대한 선포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자존을 선포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시었다.

(2) 성부 하나님 명칭의 의의<意義>

아버지라는 명칭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에 적용되어지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관계를 정립하는 기본적인 골격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본래적인 부격<父格-fatherhood>으로서 그가 누구를 통하여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것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근거가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제 2위의 아버지이다. 다른 이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아버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는 보다 차원 높고도 확실한 형이상학적인 명분이 있다.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상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보다 더 아름답고 유익한 존재는 없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상대에게 있어서 최고 최상 최대 최선의 존재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것이 되며, 또한 아들을 위한 모든 것이 되는 존재이다.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 이외에 더 이상의 존재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서 아버지라는 명칭을 제 1위에 부여하사 성부 하나님이라 칭하신 것이다.

한편,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는 모든 것<그것이 무엇이든지에 관계없이 참으로 모든 것>의 기획자요, 모든 것의 예정자요, 모든 것의 결정자이시다. 이러하신 제 1위의 하나님께는 다양한 그리고 수많은 직분적 명칭이 적용되어져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적용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참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순전하심을 뵙게 된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성자 하나님께만 적용되어지는 명칭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어지는 영원하신 명칭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직분에 합당하게 존재하심보다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 존재하시기를 기뻐하셨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명칭으로 우리에게 오셨음을 더욱 감사해야한다.

(3) 성부 하나님의 위치.

① 주권주 하나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성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는 전혀 주권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성부 하나님의 주권은 곧, 성자 하나님의 주권이며 성령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성부 하나님의 주권으로 정립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② 소유주 하나님.

현존하는 모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소유다. 성부 하나님은 완전한 무<無>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현존하는 모든 것의 소유주이시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 성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는 전혀 소유권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성부 하나님의 소유권은 곧, 성자 하나님의 소유권이며 성령 하나님의 소유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성부 하나님의 소유권으로 정립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③ 구속주<救贖主> 구세주<救世主>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영원히 사면<赦免>하신 구속주<救贖主>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면하여 주시고 세상을 구원하여 주신 구세주<救世主>이시다. 신학을 모르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救贖主> 구세주<救世主>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오류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救贖主> 구세주<救世主>가 아니라 대속주<代贖主>이시다. 구속주, 구세주는 죄를 용서하는 사면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법적, 행정적, 사면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따라서 사면권을 가지신 하나님은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성부 하나님>이시다. 인류의 죄,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면<赦免>할 수 있는 권한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주권을 소유하신 성부 하나님에게 있다. 구속주와 대속주는 전혀 다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속주와 대속주를 분별하지 않고 함께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거나 심지어는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④ 섭리주 하나님.

우주 만물에 대한 섭리는 성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섭리에 따라 진행된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섭리주 하나님이시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섭리가 성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전혀 섭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성부 하나님의 섭리는 곧, 성자 하나님의 섭리이며 성령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섭리를 성부 하나님의 섭리로 정립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성부 하나님은 섭리주 하나님으로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이시다.

A. 기획주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시작과 진행과 결과를 기획하신 기획주 하나님이시다. 우주 만물의 질서정연한 역사가 규명되지 않은 우연적 원인과 수십억 또는 수천 억년의 진화와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주장은 너무나 무책임한 것이다. 정교한 우주 만물의 존재함과 질서정연한 배열과 운행, 그리고 그들의 진행 역사를 통하여 발생하고 결과 되는 모든 것들은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의 목적적 섭리에 의하여 기획된 필연적인 역사인 것이다.

B. 제작주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적 섭리에 따라 기획한 모든 것을 또한 제작하신 하나님이시다. 우주 만물의 존재함과 질서정연한 배열과 운행과 진행역사는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의 제작이 아니고는 절대불가하다. 현대과학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무수한 시간과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근거로 할 때에 우주만물의 존재함과 질서정연한 배열과 운행과 진행 역사에 어떤 하자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제작되었음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C. 연출주 하나님.

우주 만물의 역사적 진행은 곧 성부 하나님의 섭리역사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모든 진행 과정을 연출하신다. 우주 만물의 역사적 진행이 다사다난<多事多難>하면서도 언제나 그 결과들이 장엄하고 위대한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대 전제하에 하나님에 의하여 연출되기 때문이다. 역사란 때로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난해<難解>와 돌연<突然>적 변화 속에서 예측불허<豫測不許>의 결과를 이루지만 그것은 이미 섭리주 하나님의 기획, 제작, 연출에 의하여 예정된 결과이다.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물결>로서 결코 <거스릴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말하면서도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된다>고 정의하였다.

D. 감독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총괄하여 감독하시는 감독주이시다.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최고의 작품이다. 우주 만물의 역사는 종교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많은 조물주들과 주관자들에 의하여 제 영역이 분리 운영되는 것이 아니며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 영역이 각각 독립적인 역사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다. 우주 만물은 제 영역들이 때로는 마찰하고 충돌하고 투쟁하면서 각각 독립적인 역사를 고집스럽게 진행하지만 결국은 섭리주 하나님의 주관적 감독 하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종합적인 역사이다.

E. 주연주 하나님.

모든 역사현장들은 곧 하나님 섭리 역사의 무대이다. 대자연은 하나님 섭리 역사무대의 소품들이고 장치들이며 모든 역사의 시간과 공간들은 하나님 섭리역사 무대의 막<幕>이고 장<章>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 섭리역사 무대의 조연들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 섭리역사 무대의 오직 유일한 주연주<主演主>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 섭리 역사의 최고 주연으로서 창조, 섭리, 심판의 역사를 주도하시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최고의 주연주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다. 우주 역사의 시공간에 출현하고 퇴장하는 모든 존재들은 주연주<主演主>이신 하나님의 역사 진행을 보좌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등용되는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종합적인 결과를 위하여 맡은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F. 관람주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하나님을 위하여 기획되고 제작되고 진행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관람하시는 가장 존귀하신 최고의 관람주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관람하시면서 만족하시고 기뻐하신다.

⑤ 받으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모든 피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A. 예배 받으시는 하나님.
B. 찬양 받으시는 하나님.
C. 기도 받으시는 하나님.
D. 감사 받으시는 하나님.
E.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도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드리는 관례가 있었으나 그것이 비 진리라는 신학원리가 정립된 이후부터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학원리를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받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드리면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동시에 그것을 받으신다. 이와 같은 원리를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영광동등>이라고 한다.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학 원리를 오해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대표로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면 오류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 원리에 의하여 성부 하나님께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 원리에 의하여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동시에 그것을 받으시는 것이다.

****
이와 같은 신학 원리를 모르는 자들이 예수 그리도, 또는 <예수님>에게 기도를 하거나 <성령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중보자>로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길>이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⑥ 응답하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피조들이 드리는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에 일일이 응답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피조들이 드리는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받으시면서 기뻐하시고 그들의 형편을 일일이, 상세하게 돌아보시며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각종의 강복과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베푸신다.

⑦ 부여하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임명하시고 그들에게 각각의 사명을 부여하시며 그들이 맡은 바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각각의 은사와 능력을 부여하신다.

⑧ 거두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하나님의 섭리대로 온전하게 준행하지 않을 때에 부여한 사명과 은사와 능력 일체를 거두신다.

2) 제2위 하나님 <성자 하나님>

(1) 성자 하나님의 존재하심.

하나님의 자존하심은 성부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단독적 역사이다. 하나님은 자존자이시며 자존자는 오직 홀로이셔야 한다. 자존자가 둘 이상이 된다면 자존자의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의 절대성이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단독적인 생성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다.

성자의 존재하심은 <자존하심>이 아니라 성부로부터의 생성이다.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는 성경의 증거<시2:7-행13:33>는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의 생성에 관한 분명한 증거이다.
성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신 자존자이시다. 그리고 자존하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이외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물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차원에서만 말하려면 얼마든지 자존자의 위상을 가지실 수 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와 같은 논리는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셋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상 당연히 하나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존자가 셋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 자존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는 성자 하나님의 칭호를 가질 수 없다. 자존자는 자존자이기 때문에 누구와의 관계에서 항상 자존자로서의 위치에 있어야 함으로 아들의 위치에 설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령하나님이 자존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는 성령 하나님의 칭호를 가질 수 없다. 같은 이유에서 성부 하나님의 영이 될 수 없으며, 성자 하나님의 영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시작부터 성립이 될 수 없게 된다. 성경은 이와 같은 점을 분명히 하여 성부 하나님을 오직 유일한 자존자로 선포하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낳으신 것으로 선포하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발생되어진 것임을 선포함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신학적 정립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로부터 생성되어 졌다고 하여 그것을 유출 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되며 또한 성자가 성부에 의하여 출생되었다고 하거나 또는 창조 되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생성되어 진 것은 인간의 출생하고는 그 <격>이 다르다. 성부와 성자는 하나님으로서 피차에 실제적으로 낳는다거나 또는 유출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서를 신학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 그러한 용어로 정립하는 것 일뿐 그것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실제적으로 이루어 질 수도 없고 이루어 저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한편 성부와 성자의 <존재하심>에는 전혀 시차가 없다. 동시 선재인 것이다. 또한 성자가 성부로부터 생성되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자는 성부에게 전혀 종속되어지지 아니한다.

(2) 성자 하나님 명칭의 의의<意義>.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제 1위의 아들이다. 다른 이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는 보다 차원 높고도 확실한 형이상학적인 명분이 있다.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상대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없다. 아들이란 존재는 상대에게 있어서 최고, 최상, 최대, 최선의 존재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 되며 또한 아들은 아버지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존재이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보다 더 이상의 존재는 없는 것이다. 성경은 특히 성자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라고 선포한다<요1-14; 요일1:1-3>. 성경이 증거 하는 <로고스>라는 특별한 용어가 성자에게 적용되는 것은 첫째 성부와 성자와의 밀접한 관계를 증거 하기 위함이며 둘째 성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증거 하기 위함이다. 철학은 <로고스>를 하나의 언어적 차원에서 다루지만 성경이 적용하는 <로고스>는 언어와 발언자의 관계를 동시에 나타내는 것으로서 로고스는 하나의 인격적 실체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적용되는 것이다

(3) 성자 하나님의 위치.

① 대속주<代贖主>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영원히 대속<代贖>하신 대속주<代贖主>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예수 <대속죄 제물-代贖罪祭物>과 그리스도 <중보주-仲保主>로 강림하시어 <救贖主>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드림으로 인류의 죄를 영원히 대속<代贖>하셨다.
대속주는 성부 하나님의 사면권을 대신하여 행사하신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을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신 분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에 <중보자>가 되신 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공로에 근거>하여 성부 하나님께 죄사함 받은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내 죄를 사하여 주셨다.> <예수가 나를 구원해 주셨다.> 등등의 표현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자신들의 <구원-救援-구속-救贖-죄사함-용서함> 등등을 말할 때에 부르는 주<主-구속주-救贖主>님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대속주-代贖主>를 말할 때 부르는 <주님-메시야-중보자>는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단독적으로 명칭 될 때에도 동일하게 <우리 구주-그리스도-메시야-중보자>가 되신다. 그러나 <예수>는 단독적으로 명칭 될 때에는 다만 <제물>일 뿐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될 때에 비로소 <우리 구주-예수 그리스도-메시야-중보자>가 된다.
그러나 구속주와 대속주를 구분한다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공로를 다만 조금이라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대속죄제를 드리셨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들의 영원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② 중보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회복시키신 오직 유일하신 중보주<仲保主>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중보주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성자 하나님 명칭을 적용하지 않고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명칭을 적용한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성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셨기 때문이다.

③ 완성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문제를 회복하고 해결하고 완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손상된 성부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셨고 성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회복하셨으며 중단된 성부 하나님의 섭리를 회복하셨다. 그러나 이때에도 중보주 하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 원리에서 성자 하나님 명칭을 적용하지 않고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명칭을 적용한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회복하고 해결하고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④ 통치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만왕의 왕으로서 교회를 비롯한 우주 만물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통치하신다.

⑤ 재림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인류 세계에 다시 오시어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성자 하나님의 재림은 초림 때와는 전혀 다르다. 성자 하나님의 초림은 유대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시었으나 재림주로 오실 때에는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세와 위엄을 갖추시고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며 재림하신다. 재림주의 강림하심은 인류 역사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그리고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장엄함과 거룩함의 재림이 된다.

⑥ 심판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의 재림은 곧 심판주로서의 강림이다. 성자 하나님은 심판주로 강림하시어 현존하는 모든 세계를 심판하시고 종료하신다.

3) 제3위 하나님 <성령 하나님>

(1) 성령 하나님의 존재하심.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출생과 동일하다. 영원 전에 성부와 성자와 동시 선재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송 되어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생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송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송되어 졌다고 할 때에 그로 인하여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 의하여 실제로 보냄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파송에 대한 표현은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존재의 질서를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표현이지 성령이 실제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그 어떤 존재로부터도 간섭 당하거나 저촉 받을 수 없는 특별성을 필연적, 절대적으로 소유한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나 성자에 비하여 어떤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성부와 성자에 비하여 어떤 열등함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동등한, 그리고 동일한 원리로 존재 하는 것이다.

② 생성의 원리에 의하여 성자는 파송의 역사에 동참하시지만 성령은 그와 같은 역사의 동참이 없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이다.

③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서 생성은 파송보다 앞서 있다.

그러나 생성과 파송 사이에는 전혀 시차 가 없으며 <동시선재>이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어질 수도 없다.

④ 성자의 생성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파송에도 신적 본질 전체의 전달 <교제>이 있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 성자와 모든 것에서 절대적으로 동등하다.

⑤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파송 되어진다는 교리는 <요 15:26; 롬 8:9; 갈 4:6> 등에 기초한다.

****
파송<派送-spiration>에 대한 신학적 정립.

파송은 삼위일체 중의 제 1위와 제 2위가 신적 실유 안에서 성령의 인격적 실체의 근거가 되어 제 3위로 하여금 분할이나 격리 또는 변화 없이 신적 본질 전체를 소유케 하시는 그들의 영원적이고 필연적인 역사이다. 성령의 파송은 성부나 성자로부터의 나뉨이 아니며 따라서 실제적인 보냄이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성부, 또는 성자>의 <영>으로서 곧, 하나님 자신<본체, 본질>이시다. 따라서 성령의 파송은 성령의 개별적인 역사하심이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의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2) 성령 하나님 명칭의 의의<意義>.

<요 4:24>에서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라고 선포되고 있지만 영이라는 명칭은 보다 특별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에게 적용되어진다. <영>의 히브리어 어원은 <루아흐-󰖙וּר>이고 헬라어 어원은 <프뉴마_πνεύμα>인데 이 두 말은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와 같이 <숨을 쉬다>는 뜻을 가진 어근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들은 또한 <호흡-창 2:7; 6:17; 겔 37:5,6]이나 <바람-창 8:1; 왕상 19:11; 요 3:8>으로 역술 될 수 있다. 구약성경은 <영>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어떤 수식어 없이 사용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영>이나 <주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령>이라는 용어는 단지<시 51:11; 사 6:10,11>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이 용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의 명칭으로 선포되어지고 있다. 두드러진 사실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반복하여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시71:22; 89:18; 사 10:20; 41:14; 43:3; 48:17>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신약성경은 드물기는 하지만 대개 <거룩하신>이라는 형용사를 하나님에게 적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적용은 대부분 성령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아버지와 아들 이외에 더 다른 관계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이외의 더 무엇은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누가 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가 성령 하나님이신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는 실제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며, 또한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당연하면서도 필연적이며, 그 명칭 이외에 다른 명칭이 불필요한 것이다.

(3) 성령 하나님의 위치와 사역.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모든 것을 실제적, 현재적으로 적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진행된다. 성령 하나님의 위치와 사역은 매우 광범위하므로 별도의 장<제10장>을 통하여 정립한다.

제9장. 하나님의 섭리.

섭리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세우신 규정이나 또는 그의 모든 피조물들의 보존과 통치를 총칭하는 것에 대한 용어이다. 섭리<Providence>라는 용어는 성경에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말은 헬라어“프로노이아”<πὀνοια>에 상응하는 라틴어<providentia>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들은 본래 “예지”<prescience> 또는 “예견”<foresight>을 의미하지만 기독교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섭리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섭리라는 용어가 기독교를 통하여 종교적 용어로 정립되어지자 다른 종교들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보편적 종교 용어가 되었지만 기독교 이외의 종교가 섭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저들의 종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섭리라는 용어는 절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존재에게만 적용되는 용어인 반면에 일반 3류 종교에는 그러한 절대적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1. 섭리교리의 역사.

초대교회 시대의 일부 신학자들은 세계가 “우연”<chance>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주장하였고 “스토익주의자”<Stoic>들은 세계가 “숙명”<fate>에 의하여 지배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저들의 교리를 모두 거부하였다. 초대교회 신학자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섭리교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세계를 보존하시며 통치하신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통치에 대하여 오늘날과 같은 절대적인 개념을 갖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섭리와 예정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조심스러워 하였고, 따라서 섭리의 교리는 언제나 예정교리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형편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스토익주의자들의 숙명론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세우려는 열망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 사람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였으며 그러한 결과로 인하여 스스로 모순에 빠져 사람의 죄악 된 행동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를 부정하려는 경향까지 있었다. 이러한 비 진리적 흐름을 바로잡은 것은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숙명과 우연의 교리들을 물리치는데 앞장섰으며 자기모순에 빠진 교부들의 신학도 바로잡아 주었다. 어거스틴은 만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지혜로우시면서도 자비로우신 통치에 의하여 보존되어지고 보전되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사단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반면에 그는 악에 대한 사람의 책임성을 강조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신적 섭리에 대한 논쟁이 거의 없었다. 종교회의에서 섭리교리에 대한 어떤 견해가 제기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정립한 교리가 모든 교회들에게 이상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구분하여 구원론적인 것은 인정하였지만 자연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반대하였다. 스콜라주의자들 중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존을 그의 창조적 활동의 계속으로 간주하여 동식물들의 생산을 하나님의 창조의 연속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개혁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어거스틴의 주장에 동조하였으나 세부적으로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를 현재와 같은 것으로 주장하였으나, 루터는 그렇지 않았다. 루터는 구원론적인 것에서만 확실하게 인정하고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강조하지 아니함으로서 펠라기안들의 견해를 따르는 듯 한 인상을 주었다.

2. 섭리에 대한 자연신론자들의 개념.

자연신론<Deism>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떤 불변적인 고유성을 부여하셨고, 그들의 세계에 또한 불변적인 법칙들을 세우셨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고유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의 법칙에 적응하면서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고 주장한다. 모든 피조는 하나님의 간섭 없이 자신들의 세계에 부여된 생존의 법칙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두 가지의 중대한 비 진리를 만들어 낸다. 하나는 세계가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진행한다는 오해를 만들어 내며,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방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범신론적인 개념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며, 로마 카톨릭의 몇몇 신학자들과 소시니안 주의자들 및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신학적 오류이다. 이 개념은 교회로부터 배척당한 후에 얼마동안 잠복해 있다가 18세기의 자연신론자들에 의하여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19세기에 이르러 진화론자들과 자연과학의 조명을 받으며 다시 살아났다. 18세기 이후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의 무시하였다. 저들은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세계로부터 손을 놓으셨다고 주장한다.

3.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입장.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 전체를 통치 운영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원사적 차원에서의 하나님 섭리만을 강조할 뿐 우주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저들의 목회현장이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교회 안으로 제한되어지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우주적인 것에서 오직 구원사적인 것으로만 제한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4. 섭리에 대한 성경의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1) 우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시 103:10] [단 5:35] [엡 1:11].

2) 물리적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욥 37:5,10] [시 104:14; 135:6] [ 마 5:45].

3) 동물계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시 104:21,28] [마6:26; 10:29].

4) 국가들의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욥 12:23] [시 22:28; 66:7] [행 17:26].

5) 사람의 출생과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삼상 16:1] [시 139:16] [사 45:5] [갈 1:15,16].

6) 사람의 삶의 외적인 성공과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시 75:6,7] [눅 1:52].

7) 외관상 우발적인 사소한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잠 16:33] [마 10:30].

8) 의인을 보호하는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
[시 4:8; 5:12; 63:8; 121:3] [롬 8:28].

9)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
[창 22:8,14] [신 8:3] [빌 4:19].

10) 기도를 응답하는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
[삼상 1:19][사 20:5,6] [대하 33:13] [시 65:2] [마 7:7] [눅 18:7,8].

11) 악인의 적발과 형벌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
[시 7:12,13; 11:6].

5. 섭리의 구분.

하나님의 섭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일반 섭리이고 다른 또 하나는 특별섭리이다. 일반섭리는 우주 만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관할하심을 말하며 특별섭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고통에서의 구출, 각종 은혜와 사랑의 베푸심, 위급한 상황들로부터의 돌보심 등등이 하나님의 특별섭리이다. 한편 하나님의 섭리 중에 비상섭리가 있다. 비상섭리는 특별섭리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서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사명현장 역사와 관련된 섭리영역이다.

6. 하나님 섭리의 특성.

1)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신다.

사람이 앞서가고 하나님께서 뒤따라가시며 불완전한 것을 챙겨주시고 다듬어 주사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일할 수 있도록 당겨주시고 의욕을 고취시키시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다. 주의 종들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기 전에 그 일을 맡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며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그를 다듬으신다. 그리고 그의 앞에 가시며 그가 일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2) 현재적이며 동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현장에 계시며, 모든 역사에 동참하신다. 뒤늦게 참여하시어서 후속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 모든 역사의 현장에 계시며, 그 사건 그 역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불행한 일이나 아름답지 못한 결과들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현재적인 역사를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건의 현장에 계셨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 사건의 현장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라거나 아름답지 못한 일들은 개인의 것이나 전체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엄청난 일이겠으나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 차원에서 논증할 때에 감수해야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 안에 개인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 개인의 역사 뒤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섭리적 결과에 의한 필연적인 것이며 모든 피조는 다만 이의 없이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할뿐이다.

3) 직접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 모든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신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위치와 권위를 내세워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을 거부하고 천사들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는 천군 천사들을 동원하시기도 하시지만 천군 천사들을 동원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역시 그 역사 그 사건의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진두지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모든 역사 모든 사건에 직접적적으로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비상 섭리.

1) 용어의 문제.

하나님의 섭리는 나타나지는 결과에서 두 가지로 구별되어 진다. 하나는 통상 섭리<providentia ordinaria>로서 지극히 상식적이며 과학적인 결과들을 말하는 것이요, 다른 또 하나는 비상 섭리<providentia extraordinaria>로서 상식과 과학을 초월하는 극단적인 결과들을 말함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이적> 또는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다. 물론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것은 기적이요 이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기적이나 이적이란 용어 자체가 성립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일상적인 보통의 능력일 뿐이다.

2) 비상 섭리의 성질.

하나님의 비상 섭리는 통상 섭리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비상 섭리는 때로는 피조 세계에 부여된 법과 질서와 특성들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성과 상식과 과학 등도 초월한다. 전혀 초자연적으로 역사 되어지는 것이다. <태양이 종일토록 중천에 머물러 있는 상황-수 10:13>과 <태양이 뒤로 물러가는 역사-왕하 20:11>와 <성령으로 잉태되어진 예수 그리스도-마 1:18> 그리고<장사한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피조의 세계에 부여된 법칙과 질서와 특성들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행하신 각종 이적과 기적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과 자녀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각종 이적과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의 비상섭리이다.

3) 비상 섭리의 목적.

하나님께서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에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비상섭리를 전개하신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불신하였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눈앞에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비상섭리가 진행되는 것을 체험한 자들까지도 조금만 지나면 곧 그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불신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열심히 가르쳐 주시고 여러 차례의 비상섭리 전개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 주셨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계속되어지고 있다.

(2)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비상섭리를 전개하신다. 자녀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또는 자녀들의 어떤 특별한 결과를 이루시기 위하여 때로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아니하고 고집을 부린다거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만용을 부린다거나 또는 어떤 절망적인 위험에 빠진다거나 또는 어떤 결과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린다거나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종들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비상섭리를 전개하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때의 비상섭리는 더욱 강권적으로 역사 되어진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여 헤매고 있을 때 또는 부름 받고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쳐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머뭇거릴 때에 또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가운데 어떤 위험에 처할 때에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더욱 큰일을 하여야 할 때에 하나님께서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시키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 섭리를 성취시키시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상섭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 되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는 그 날까지 영원히 계속되어질 것이다.

4) 비상 섭리에 대한 부정.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거부한다. 하나님 비상섭리에 대한 거부는 초대교회시대 이래 끊임없이 있어 왔으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완강한 것은 아니었다. 저들이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에게 부여된 법칙과 질서와 특성들을 위반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초기의 개혁파 신학자들에게서도 제기되었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깨트리는 것으로 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법과 질서를 스스로 무시하고 깨트리는 분이 아니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주권으로서 그리고 또한 우주의 왕,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한에 의하여 피조 세계에 현존하는 어떤 법과 질서를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무례하고는 관계가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의 원리이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의한 하나님의 역사의 창출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법과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8. 하나님 섭리에 대한 오류.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오류에 빠져 있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섭리의 차별.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차별하여 특별섭리를 중요하게 강조하는 반면에 일반섭리는 상대적으로 약화시킨다. 목회자들은 거의 대부분 우주적이며 전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고 오직 인간 구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만을 중점적으로 강조한다. 저들이 인간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 중에 인간을 특별히 우대하고 사랑한다는 성경의 증거들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참뜻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인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만 보는 것은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는 인류 구원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음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섭리는 과연 무엇인가?
둘째: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섭리는 과연 무엇인가?

이 두 가지 문제에 유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절대적 주권주 앞에 절대 순종해야하는 피조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 자녀이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 절대 순종해야 하는 피조의 입장에 선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법적 행정적 관계에 머물게 된다. 그러한 관계 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추구하는 것은 의무적인 것으로서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것이 못된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 진정한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의 반열에서 추구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 아버지의 기쁨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자녀의 반열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보게 되며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것을 보게 되며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6-30>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교훈적 말씀이지만 이 말씀 속에는 당신의 피조세계를 아끼시고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구구절절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세계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우주만물에 대한 창조기사를 통하여 증명된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 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 이더라-창1:31-2:3>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항상 기뻐하셨고 특히 모든 창조역사를 마치신 후에 특별히 기뻐하시어 일곱째 날을 강복하시면서 스스로 안식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인간들을 또한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셨다. 때문에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그들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며 그들을 자랑하시고 그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주시는 아버지가 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어 당신의 입장보다는 자녀들의 입장을 우선시하셨으나 인간은 반대로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만을 생각하였다. 때문에 인간들은 우주 만물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장차 자신들이 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만 모든 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2) 신인 협력 주장.

14세기, 유럽의 르네상스 운동 와중에서 발생한 인본주의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자아의식이 고취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더욱 강조되었고 그리하여 <신인 협력>이라는 교리사상이 주장되었다. 신인협력이란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하여 모든 일을 진행한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14세기 인본주의자들로부터 발생하였으나 16세기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에 의하여 체계를 이루었다. 신인 협력 주장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협력이 없다면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인간의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위에 좌정시킨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각별히 예우하시어 당신의 역사에 동반자로 세우신 것을 감사할줄 모르는 경거망동이다. 인간은 자신이 매우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알고 보면 매우 불완전한 상태에서 헤매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헤맴을 은밀히 바로잡아 주시고 돌려놓아 주신다. 그리고 모든 결과를 인간의 공로로 돌리시고 그들을 칭찬하시며 그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주시는 바 이것이 곧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3)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구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구별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을 감안하시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인간들에게 맡기시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둘로 나누는 것으로서 비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진행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우주 만물 전체를 운영하고 진행할 수 없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모든 시간, 모든 영역, 모든 장소에 완전하게 함께 하시어 그들이 역사를 진행할 수 있게 지원, 후원, 인도, 보호, 감독하신다. 따라서 모든 역사의 실제적인 진행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4) 사람의 노력 강조.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 중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것이며 따라서 불순종이고 불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입장은 전혀 생각 안하고 자신들만 생각한다. 인간들은 너무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 구석구석을 완전하게 살피시려면 얼마나 바쁘시겠는가?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것만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선한 생각 같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해결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만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신앙이 아니며 그러한 자세는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한 것은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신이 하지 못한 것만 하나님의 공로로 돌리게 된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완전무능력 상태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많은 부분에 손상을 입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본적 삶에 관한 부분은 넉넉하게 남겨주셨다. 때문에 인간은 때때로 자체적인 노력 하에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들을 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에 자신이 한 것은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신이 하지 못한 것만 하나님의 공로로 돌리게 된다면 인간은 거의 대부분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자랑하면서 자화자찬<自畵自讚>할 것이고 하나님께 전혀 감사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5) 하나님 섭리의 부정.

펠라기우스파와 반펠라기우스파와 알미니안파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반대한다. 저들이 이 섭리교리를 반대하는 이유는 섭리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책임적 창시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의 모든 역사, 모든 사건의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섭리역사 하신다고 한다면 사람이 죄를 짓는 과정에도 필연적으로 직접 관여하시는 것이 되며 뿐만 아니라, 사람보다 앞서 가시며 사람들의 역사를 유도하신다고 한다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죄를 촉구하시고 유발하시고 결과 시키는 원인이 되심으로 하나님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증은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보는 것에서 오는 좁은 안목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되어진 잘못된 견해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죄와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1) 죄악 된 행동들도 하나님의 관할 아래 있음이 분명하나 그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출발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하여 출발되어지는 반면에 하나님은 허용하실 뿐이다<창 45:5; 50:20; 출 14:17; 사66:4; 롬 9:22; 살후 2:11>

(2)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죄인들의 죄악 된 행위들을 억제 하신 3:6; 욥 1:12; 2:6; 시 76:10; 사 10:15; 행 7:51>

(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섭리를 위하여 악을 제어하시고 선을 일으키신다.<창 50:20; 시76:10; 행 3:13>

* 이 때에 있어서 두 가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앞서서 역사 하신다는 교리와 충돌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앞서서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고 하여 죄악 된 행동을 촉구하고 유발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고 아름다운 일만 추진하시지만 사단은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역사의 현장에 죄악을 뿌려놓는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사단의 악행을 즉시 제거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실 필요성과 같은 이유, 즉 당신의 아름다운 역사의 진행을 위하여 사단에 의하여 비롯되어진 아름답지 못한 내용들을 잠시 허용하시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보존을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증거하고 있다<마 13:24~30>

둘째는 그렇다면 선한 사람의 악행과 악한 사람의 악행에 대한 허용의 명분이 동일한가? 하는 것이다. 즉, 택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의 악행이 다함께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동일한 목적과 이유로 허용되어지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죄악에 대한 허용이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 의한 신적 작정의 결과이지만 그, 허용의 목적과 이유는 전혀 다르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의 허용은 하나님의 섭리적 목적과 이유들을 위한 허용이지만 택함을 받은 자들의 허용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은총에 의한 허용이고, 다른 또 하나는 종에 대한 섭리적 차원에서의 목적 있는 허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죄악 된 행동을 하고자 할 때에 그 마음을 주장하사 미연에 방지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허용하심으로서 더 큰 유익을 그들에게 주신다. 자녀들의 죄악 된 행동을 한 후에 크게 후회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다시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며 죄악 된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유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언제나 겸손하게 하시며 죄를 짓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종들은 더욱 높은 차원에서 그들의 죄를 허용하신다. 하나님의 종들로 하여금 자신이 직접 죄를 지음으로서 죄의 본질과 죄의 추악함을 체험하게 하시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달으며 자신도 하나님과 같이 죄를 미워하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사역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게 하시는 것이다.

9.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에 구별 없이 모두 다 중요하다. 하나님의 섭리를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구분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인간들이 자기 편위주의<偏爲主義>에 입각하여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구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사랑하시어 모든 문제를 자녀들의 입장에서 진행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점을 근거로 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 섭리만을 강조하면서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무시하거나 또는 약화시키면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안주하면서 자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감읍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자녀로서의 기본적인 신앙이며 자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사명을 준행해야 한다.

1) 기독교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

우리는 기독교를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여 기독교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다.
교회가 추진하는 각종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다. 교회는 특히 제자훈련을 통하여 각종 사회영역을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끌어가는 빛과 소금의 지도자들을 길러내어 그들로 하여금 정치, 경제, 산업, 군사, 교육, 문화, 예술, 과학, 스포츠, 등등의 사회 각 영역을 이끌어 가게 함으로서 모든 사회 영역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고 그리하여 각 사회 영역들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게 한다. 인류사회 모든 영역들이 평화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그리하여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는 아름다운 역사, 평화의 역사,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2) 대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

우리는 대자연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여 대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다. 인간들의 이기적 욕심과 각종 퇴폐적, 향락적 쾌락 추구를 위하여 개발이라는 명분 하에 사정없이 훼손되고 파헤쳐진 대자연을 아름다운 금수강산<錦繡江山>으로 회복하고 관리하여 대자연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며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찬양하게 한다. 돌을 던지면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맑고 푸른 하늘, 아름다운 구름들이 평화롭게 흘러가는 창공을 줄지어 나르는 각종 새들, 기화요초가 만발한 산과 들, 그윽한 숲 속을 수놓는 새들의 합창, 오곡백화가 풍요로운 넓은 들, 유유히 흐르는 맑고 푸른 강들과 하얀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푸른 바다, 질서 있게 정돈된 강변과 해변을 경쾌하게 달리는 기차와 자동차들, 강가, 바닷가 언덕들에 지어진 그림 같은 집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하사하신 천혜를 누릴 줄도 운영할 줄도 관리할 줄도 몰랐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불충이요 불효였다. 우리는 이제부터 지금까지의 과오를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과 대자연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선포하게 하며 그리하여 그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새로운 역사를 진행해 나가야 한다.

어떤 자들은 이와 같은 우리의 주장을 허망한 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렇게 착하고 순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한 세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착한 사람들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 욕심 많은 자들, 이기주의자들, 야심 많은 자들 등등에 의하여 항상 전쟁이 일어났고 각종 불의, 불법, 편법, 위법, 탈법, 부정, 부패, 타락, 등등이 만연하였다. 따라서 인류사회를 유토피아<하나님 나라>적 역사로 만든다는 것, 대자연을 아름다운 금수강산<하나님의 나라>로 만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인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계승한다면,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한다면 인류사회는, 대자연은, 비록 전체적인 유토피아<하나님 나라>를 이루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부분적인, 지엽적인 유토피아<하나님 나라>는 이룰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적인 <유토피아>는 처음에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할지라도 점점 확산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그러한 결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이 이루어질 것이다.

제10장.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1. 성령 하나님의 본질.

성령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정립할 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본질을 정립할 때에는 <성부 하나님의 영>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다. 이때에 성령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의 영도 되시고> <성자 하나님의 영도 되신다>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 그와 같은 표현은 성령 하나님을 두 개의 본질<영>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며>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다>라고 표현해야 정확한 신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을 두개의 영이라고 생각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립되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며>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한분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님 신학을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 불가능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차원에서 이해할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2. 성령 하나님에 대한 명칭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명칭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 하나님의 영. *주의 영. *예수의 영. *진리의 영. * 그리스도의 영.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며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다. 따라서 성경이 주의 영이라고 말한 것은 성부 하나님의 영, 성자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며, 진리의 영이라고 말한 것은 성자 하나님의 영<말씀-로고스-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영<행16:7>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예수는 단독적 명칭으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다만 <제물>로서 인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수의 영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 아니다. 바울이 성령 하나님을 <예수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이 알아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
신학의 원리를 모르는 자들은 성경에 예수의 영이라고 기록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특히 바울이 예수의 영이라고 기록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내세워 예수의 영도 성령 하나님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신학적 무지를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이유에서 무조건 받아들인다거나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교육받았다는 이유에서 특히 바울 사도가 많은 성경을 기록한 위대한 사도라 하여 그들에게 어떤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사도들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교육받았고 또한 성경을 기록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완전한 신학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세례에 관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성부, 성자, 성령-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고 명령하였으나 사도들과 초기 신약시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 등등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또 어떤 자들은 성경이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와 같은 오류를 시정하시지 아니하셨는가?> 라고 의문을 제시하며 또한 <만약에 사도들에게 오류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사도들의 오류를 시정하지 아니하시고 방관하셨는가?> 라고 이의를 제시하면서 사도들에게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사도들의 성경 기록이나 그들의 세례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그것이 정당하기 때문에 허용하신 것이 아니다. 사도들에게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신 것에는 매우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명칭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과 성령 하나님의 명칭>과 하나님의 섭리 사역현장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현장과 성령 하나님의 사역 현장>에 수많은 비 진리와 오류들이 난무하였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아셨고, 따라서 그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 때에 하나님의 종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각종 비 진리와 오류에 대한 변증을 할 수 있게 하시려고 그와 같은 전례를 허용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는 완전한 반면에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도들의 오류를 통하여 확인시켜 주셨고 그리하여 각종 비 진리와 오류들이 발생할 때에 그것을 전례로 하여 하나님의 완전성과 하나님 종들의 오류를 상대적으로 구분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자들이나 또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거나 또는 무시하면서 자신들의 권위를 하나님의 보좌 위에 좌정시켰다. 예를 들면 로마 카토릭은 교황과 사제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교황 무 오류성>을 법률로 정했고 사제들의 권위도 절대적인 것으로 법률화하였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의 일부 지도자들도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를 자신들의 교권에 교묘하게 적용하여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오류가 없다는 개념을 성도들에게 은밀하게 쇠뇌교육하고 있다.

3.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의 정의.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란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 피조영역에 행사하시는 일체의 사역<事歷-활동 역사>을 말한다. 기독교 조직신학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전, 피조영역에 시간적, 공간적, 이데아적으로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신다.>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하심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 피조 영역에 임재<臨在> 주거<住居>하심이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 피조 영역에 임재, 주거, 내주, 내재하시어 그들을 주권적으로 통치, 통제, 지휘, 관리, 보호, 인도하시는 것이다.

4. 성령 하나님 사역의 시작.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행2:1->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을 하나님의 전체적 섭리 차원에서 보지 않고 오직 구속사적 섭리차원에서만 보는 자들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에 만연하여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행2:1->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가르친다. 즉 성령 하나님의 역사적 강림이 <행2:1->의 사건을 통하여 최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날을 <성령 강림의 날>로 제정하고 가르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완성하신 모든 것을 성령 하나님께서 진행하신다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그러나 신학적 경륜이 없는 자들은 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였다. 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신다는 것이 되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전에는 아직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강림>하시지 않은 것이 된다. 때문에 저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강림하심>을 <행2:1->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구약시대부터 계속되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 창조에 동참하신 이래 지금까지 계속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신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곧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며 성자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곧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곧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고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며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곧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인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무지한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성부 하나님 섭리의 전체적인 차원과 구속사적인 차원으로 구분한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 섭리의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창조 때부터 역사하셨으나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강림하신 것은 <행2:1->이 처음이라고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차원은 성부 하나님의 전체적 섭리에 귀속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주장이 허용될 수 없거니와 저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여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미 <행2:1-> 이전부터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임재 하셨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눅1:41-44>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눅1:67>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눅2:25-27>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1: 32-34>

따라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시간적으로는 영원 전부터이며 현재적인 역사하심은 <창1:1-2>의 우주만물 창조 때부터다.

5.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의 완전함.

1) 하나님 섭리적 차원에서의 완전함.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성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완성 하신 것을 적용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완전한 역사를 이루게 되어 있다. 만약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완전하지 아니하시어 미 완성적이거나 또는 불충분하다면 그것을 완성시킨 성자 하나님의 공로가 무효가 되며 그것을 작정하시고 설계하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불신 당하신다. 이러한 사태는 절대 일어나면 안 되거니와 결코 일어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섭리 전체가 무너지므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2) 하나님 속성적 차원에서의 완전함.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의 완전성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하여 보증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모든 일에 완전무결하게 역사하신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증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2) 영역적 차원에서의 완전함.

(1) 시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시간적 영역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영역에 완전하게 역사하신다.

(2) 공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공간적 영역에서 우주 만물 전체의 현장에 완전하게 역사하신다.

(3) 사회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사회적 영역에서 정치, 경제, 군사, 산업, 학문, 문화, 과학, 예술, 스포츠, 등등의 영역에 완전하게 역사하신다.

(4) 이데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데아적 영역에서 신앙, 사상, 이념, 개념, 정신, 심령, 지혜, 지식, 재능, 능력, 등등의 영역에 완전하게 역사하신다.

6.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범위.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성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성부 하나님의 일반 섭리 영역에 대한 역사하심으로서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 영역에 대한 역사하심이고 다른 또 하나는 성부 하나님의 특별섭리 영역으로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역사하심이다. 성부 하나님의 특별섭리 영역에 대한 것은 다음 장에서 별도로 정립할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일반섭리 영역에 대한 것만 정립한다.

1) 일반섭리 영역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1) 시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시간적 영역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영역에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신다.

(2) 공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공간적 영역에서 우주 만물전체의 현장에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신다. 광활한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행성들과 은하계 그리고 계절에 따라 생육번성을 거듭하는 대자연들은 모두가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 역사하심에 의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진행한다.

(3) 사회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회적 영역에서 정치, 경제, 군사, 산업, 학문, 문화, 과학, 예술, 스포츠, 등등의 영역에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신다.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정치, 경제, 군사, 산업, 학문, 문화, 과학, 예술, 스포츠, 등등의 제반 영역들은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 역사하심에 의하여 각각의 역사를 진행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영역들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에게 지혜, 지식, 재능, 사명감 등등을 적용하시어 그들이 각 영역을 이끌어가게 하시며 그 영역에 소속된 모든 종사자, 관련자들에게도 지혜, 지식, 재능, 사명감 등등을 적용하시어 그 영역들이 발전하고 성장하도록 역사하신다.

(4) 이데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데아적 영역에서 사상, 이념, 개념, 정신, 심령, 지혜, 지식, 등등의 영역에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사상, 이념, 개념, 정신, 심령, 지혜, 지식, 등등의 영역에 내주, 내재, 역사하시어 인간들의 모든 이데아적 능력을 고취시키시고 발전시키시어 인간들의 문화적, 문명적, 성장과 발전을 이루신다.

제11장. 특별섭리 영역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

우리는 이 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섭리 영역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정립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현대 기독교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크게 와전되고 오류 되어진 상황에서 각종 비 진리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성도들의 신앙이 심히 오류, 왜곡, 변질되어 있기 때문이다.

1.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성경의 증거.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행19: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5:32>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행8: 15-18>

1)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성경의 해석.

위와 같은 성경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성령 하나님은 <주는 것>이 되고 <받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미 앞장에서 정립한바 있듯이 성령 하나님은 <보내어지는 성령 하나님>이 아니시며 또한 <받아지는 성령 하나님>도 아니시다.
하나님의 주권적 차원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정립하면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파송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정립하면 성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파송하실 때에 성자 하나님께서도 동시에 성령 하나님을 파송하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속성적 차원에서 정립할 때에는 성령 하나님은 누구에 의하여 파송되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라는 독립적 인위<位>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존재로부터의 보냄<파송>을 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보내지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실제적으로 보내심<파송>을 받아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보내다, 주다> 등등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표현한 것은 실제적인 보내심<파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반면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정립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작정된 모든 계획을, 그리고 성자 하나님에 의하여 완성된 모든 것을 실제적으로 적용하시는 집행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때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이나 또는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명령, 지시, 간섭, 영향을 받지 아니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주권으로 모든 것을 집행하시고 또한 성자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자 하나님의 만왕의 왕권으로 모든 것을 집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독자적인 역사하심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삼위의 하나님들은 각각 독립적인 위<位>로 존재하시면서 독립적인 권위와 역사를 진행하시지만 세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며 각각 혼자서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함께 역사하시며 한분 하나님으로서 홀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성경구절들은 문자적으로 직역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1) 보내심과 받는 것에 대한 해석.

성령 하나님께서는 임재<臨在>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하심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경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임재, 내주, 내재하심으로 표현하지 않고 <보내는 것> <주는 것> <받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당시의 성도들이 임재, 내주, 내재하심을 통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계시<啓示>이며 고지<告知>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계시<啓示>와 고지<告知>를 하실 때에 그것을 받는 자들의 수준을 고려하시어 그들이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차원으로 낮추어 하셨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을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경륜이 없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가시<可視>적 임재<臨在>, 느낌적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하심은 이해되거나 납득될 수 없었다. 신학적 경륜이 어느 정도 정립된 현대 기독교에서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당시의 상황은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을 <보내는 것> <주는 것> <받는 것>으로 표현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을 통한 역사하심이 조직신학적으로 정립되어 있으며 성도들의 신학적 경륜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있다. 따라서 이제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는 것> <주는 것> <받는 것>으로 이해하여 <성령 받아야 한다.> <성령 받아라> <성령 받았다> 등등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며 무례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신학적 무지이다. 이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표현함에 있어 그것을 성령 하나님께 적용할 때에는 임재, 내주, 내재하심으로 표현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게 적용할 때에는 임재, 내주, 내재하심과 영접<迎接>으로 표현해야 한다.

(2) 강림에 대한 해석.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臨在>하심을 강림<降臨>으로 표현한다. 강림이라는 용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신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전이오리이까-왕상8:2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볔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139:7-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66: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3-24>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행7:48-49>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시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7-2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시,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에서 영원까지 존재하시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오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무량<無量>하신 존재하심과 편만<遍滿>하신 존재하심을 위<하늘>로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말했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것은 아니다. 하늘이란 용어는 지구가 원형<圓形>으로서 자전<自轉>과 공전<公轉>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에 우주 공간에 적용하던 용어이다. 성경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르친 것과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한 것과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말한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에 대한 개념을 고려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말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임재<臨在>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하심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4.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의 범위.

1) 시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에게 처음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하신 순간부터 그의 임종시까지 내주, 내재, 역사하신다.

(2) 공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삶의 현장 전체에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신다.

(3) 이데아적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신앙, 사상, 이념, 개념, 정신, 심령, 지혜, 지식, 재능, 능력, 등등의 영역에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신다.

5.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의 방법.

1)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하심.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게 직접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하시어 역사하신다.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하나님 자녀들에 대한 것과 하나님 종들에 대한 것으로 구분된다.

(1) 하나님 자녀에 대한 역사하심.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들의 신앙적 삶에 내주, 내재하시어 그들의 신앙적 삶을 때로는 지원하시고 때로는 조절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게 한다.

(2) 하나님 종에 대한 역사하심.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종들의 사명 현장에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하시어 그들에게 신학, 능력, 재능, 은사, 사명감, 등등을 부여하시며 동역자들을 보내주시고 주변 여건을 조성하시는 등등 철저하고 완전하게 지원, 후원, 인도하심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여 받은 사명을 진행할 수 있게 하신다.

2) 부르심<소명-召命>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그들을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인치신 성부 하나님의 자녀, 성부 하나님의 종들을 성부 하나님 앞으로 불러내신다.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을 신학적 용어로 <소명-召命>이라고 하는데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요청이나 서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역사이며 또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따라 진행되는 역사이다.

한편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은 곧 성령 하나님의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하심의 시작이다. 성령 하나님의 내재, 내주하심은 각자의 심령에 느낌이 발생하거나 또는 실제적 행동으로 나타날 때부터 시작된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고 작정된 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첫발을 내딛고자하는 마음이 발동하는 순간이 곧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하심의 출발인 것이다. 처음 소명을 받은 자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따라서 그것이 곧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하심인 것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하심의 시작이다. 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령을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아직 교회를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길을 가다가 교회의 간판이나 종탑을 보고 한번 교회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거나 또는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찬송소리를 듣고 교회에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거나 했을 때에 그는 아직 교회문턱을 넘어서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 순간이 곧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하심을 영접한 것<성령을 받은 것>이다.

(1) 소명의 구분.

소명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일반 소명>과 하나님의 종들 <특히 지도자들>을 부르시는 <특별 소명>이 있으며 그것은 다시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으로 구분된다.

① 외적 소명.

외적 소명은 신체적, 영적, 외부에 행하여지는 것으로서 <문서, TV, 라디오, 설교, 권고,> 등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 소명은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들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

②. 내적 소명.

내적 소명은 심령에 행해지는 것이며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따라서 내적 소명은 반드시 유효하기 때문에 <유효 소명>이라고도 한다. 내적 소명은 성령 하나님께서 소명한 자의 심령을 주장하기 때문에 절대 거부할 수 없게 되는 특별한 소명이다.

(2) 부르시는 방법.

①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방법.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방법은 한편의 문학적, 예술적, 드라마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방법은 그들의 인격과 개성과 특성에 따라 각각 다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들을 부르실 때에 강제적으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인격과 개성과 특성을 존중하시어 그들을 자연스럽게 부르신다. 때로는 사람들을 통하여 부르시고 때로는 문서, TV, 라디오, 설교, 찬송, 등등을 통하여 부르시며 때로는 마음에 직접 감동을 주시어 부르신다.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주변에 다양한 사건을 조성하시어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한다. 그러나 부르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모든 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맞추어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어 있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맞추어 때로는 서두르시며 심지어는 강제적인 방법까지도 동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는데도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머뭇거리거나 또는 불응하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종의 극단적 조치를 내리시어 그들이 굴복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때의 극단적 조치는 매우 다양하여 어떤 경우에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심한 어려움이나 환란적 사건일 때도 있다.

② 하나님의 종들을 부르시는 방법.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을 부르시는 방법은 자녀들을 부르시는 방법보다도 더욱 차원 높은 예술적 드라마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다시 부름 받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A. 개인적인 이유.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는 자들은 겸손함, 두려움, 고난적 삶에 대한 거부감, 분별력, 등등의 다양한 이유에 의하여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거나 또는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러한 자들이 소명의식과 소명감을 가지고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과정들을 거치게 된다.

B.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다양한, 그리고 많은 훈련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중대한 사명을 받은 자일수록 그가 거쳐야 할 훈련과정과 연단과정은 더욱 많고 다양하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시기 전에 수많고 다양한 연단과 훈련 과정을 거치게 하시며 일단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 후에는 더욱 강도 높고 차원 높은 연단과 훈련과정을 거치게 하신다. 하나님의 종들은 때로는 길 없는 험산 준령을 밤낮없이 오르내리는가 하면 때로는 눈보라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을 속절없이 헤매야 하고 때로는 사나운 태풍과 비바람이 휘몰아쳐서 산더미같은 파도가 솟구쳐 오르는 망망대해를 일엽편주로 건너야 하고 때로는 오아시스도 없고 끝도 모르는 뜨거운 사막을 맨발로 건너야 한다. 한편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환란과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하나의 인생역경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슬픔과 괴로움에 심지어는 인생을 포기하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연단과 훈련의 과정이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항상 함께 하시면서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고 끝까지 보살피시며 인도하심으로 그들이 그 모든 과정을 헤쳐 나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종들은 비록 힘들고 고단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마친 후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진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단련하심을 통하여 정금이 되는 것이다.-욥23:10>

(3) 소명의 시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의하여 소명을 받는다. 때문에 각자 소명 받는 시간이 다르다. 어떤 자는 모태에 있을 때에 이미 소명을 받는가 하면 어떤 자는 임종<臨終> 때에 소명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소명 받는 시간의 다름에는 하나님 섭리가 적용되는데 그것은 자녀로 부름 받는 경우보다는 대부분 종으로 부름 받는 경우에 해당된다. 자녀로 부름 받는 자들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각자 본인들의 상황이 고려된다. 예를 들면 일찍 부름 받는 것이 본인에게 유익하면 일찍 부르시는 반면에 늦게 부름받는 것이 본인에게 유익하면 늦게 부르신다. 그러나 종으로 부름 받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의 입장이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적용된다. 하나님의 종들은 개인적인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진행하게 되는 동역자들과의 관계가 특별히 고려된다. 따라서 그들의 소명과 연단의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에 맞추어 조절된다. 그리하여 하나님 섭리의 진행과정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소명과 연단의 과정이 늦추어지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소명과 연단의 과정이 오히려 재촉된다.

3) 인도하심.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종들이 진리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충성하며 살아가도록 그들의 신앙적 삶의 현장과 사역현장을 돌보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도 현세에서는 아직 성화를 이루지 못하였고 또한 사단의 집요한 공격과 유혹으로 인하여 진리적 삶으로부터 이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심령을 주장하시어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섭리 안에 살도록 인도하시며 저들을 사단의 유혹과 공격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1)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 자녀의 반열에서기 까지에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또 필요하게 된다. 어떤 성도는 즉시 깨닫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오랫동안 의심과 불신을 반복하면서 따지고 불순종하고 삐지고 토라지고 수없이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그러한 자들을 책망하거나 징계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감동받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까지 기다리시면서 그들에게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도록 주변정리를 하시고 다양한 사건들을 일으켜 주심으로서 결국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반열에 서게 하신다.

①. 부여하시는 도우심.

A.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모, 형제, 자녀, 재물, 건강, 직위, 권위, 권세, 등등이 필요할 때에는 그것들을 부여하시어 그들의 신앙적 삶을 아름답게 하신다.

B.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부모, 형제, 자녀, 재물, 건강, 직위, 권위, 권세, 등등이 필요할 때에는 그것들을 부여하시어 그들의 사명적 삶을 아름답게 하신다.

② 불허하시고 거두시는 도우심.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은 때로는 주시는 것인가 하면 때로는 불허하시며 심지어는 있던 것을 거두실 때도 있다.

A.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모, 형제, 자녀, 재물, 건강, 직위, 권위, 권세, 등등이 있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들의 신앙적 삶에 이상기류가 발생하게 될 때에는 그것들을 불허하시거나 또는 있는 것을 거두심으로 그들의 신앙적 삶을 아름답게 하신다.

B.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부모, 형제, 자녀, 재물, 건강, 직위, 권위, 권세, 등등이 있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들의 사명적 삶에 이상기류가 발생하게 될 때에는 그것들을 불허하시거나 또는 있는 것을 거두심으로 그들의 사명적 삶을 아름답게 하신다.

****
성도들은 모든 것이 풍족하면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고 충성하는 삶을 살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의 형편과 입장에 따라 때로는 주시는가 하면 때로는 불허하시고 때로는 있는 것까지도 거두신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들은 모두가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다. 반면에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은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주시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고 거두어 가시는 것에 대하여 항의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된다.

6.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의 완전성.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영적, 육체적, 영역에 <시간적, 공간적, 이데아적>으로 완전하게 내주 내재하시어 그들의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의 전체를 주권적으로 장악, 통제, 통치, 지도, 인도, 보호, 관리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로부터 일순간도 떠나 계시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충만>하게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성령 하나님의 완전<충만>하신 역사하심을 힙 입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게 된다.

1)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의 완전성에 대한 보증.

(1)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보증.

성령 하나님의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심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완전<충만>하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기 때문에 그의 역사하심은 곧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완전함을 보장받는 것이다. 만약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부족함, 미완성, 등등의 어떤 하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2) 하나님의 속성에 의한 보증.

성령 하나님의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심은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의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완전<충만>하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의 역사하심은 곧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므로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의하여 완전함을 보장받는 것이다. 만약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부족함, 미완성, 등등의 어떤 하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절대적 완전성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다.

(3)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보증.

성령 하나님의 내주<內住-內主> 내재<內在> 역사하심은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의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완전<충만>하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의 역사하심은 곧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의하여 완전함을 보장받는 것이다. 만약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부족함, 미완성, 등등의 어떤 하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무너지게 될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무너짐이 되는 것이다.

(4) 성경의 증거.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하심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2: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행4:8>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 하니라-행13:52>

위의 성경들은 문자적으로 보나 하나님의 섭리적으로 보나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보나 결국은 한가지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전체적인 영역에 완전(충만)하게 내주 내재하시어 그들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신앙과 불타는 사명감과 신비한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과 연계되어진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그 성경들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하심을 보장받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면서 강하고 담대한 신앙적, 사명적 삶을 살게 되며 다른 자들에게도 그와 같은 삶을 살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러한 삶을 살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충만>속에서 각종 방언으로 복음을 증거 하였으며<행2:4>, 자신들을 핍박하는 유대의 관원들과 장로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변증하였고<행4:8><행7:55> 사울은 바울이 되었다.<행9:17>

7. 성령 하나님 사역의 완전성에 대한 오류.

1) 성령 받는 문제.

현대 기독교 성도들 중에 많은 이들이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하심을 불신한다. 이와 같은 불신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비롯되어졌다. 하나는 <성령 하나님께서 과연 자신에게 충만하게 임재하시는가?> 하는 의심과 다른 또 하나는 <성령 하나님께서 때로는 자신으로부터 떠나 계신다.> 라는 오해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차원의 불신은 신학을 모르는 기독교 지도자들 <특히 부흥 강사들>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라면 마땅히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야 한다.

(1) 모든 기독교 성도들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 예정되고 작정되었으므로 법적, 행정적으로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의 신분을 부여받은 자들이다.

(2)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부르심<소명>을 받기까지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3) 성도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부르심<소명>을 받게 되는데 이때의 부르심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다양하다.

(4) 성도들이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은 곧,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 내주, 내재하시는<성령 받는> 순간이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은 하나님의 주권, 속성, 섭리에 의하여 영원히 완전무결<충만>하다.

(5) 따라서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무결<충만>하신 임재, 내주, 내재하심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완전무결<충만>하신 인도 보호하심을 통하여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사랑, 자비, 긍휼안에 복된 삶을 살게 되며 현세의 삶을 마친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가서 아직까지 경험하거나 상상조차 못한 영원무궁한 삶을 살게 된다.

(6) 그러나 성도들은 현세를 사는 동안은 완전무결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수많은 욕심, 유혹, 등등을 절제하지 못하여 다양하고 수많은 죄를 범하게 되며 그로 인하여 잠시<때로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는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그러한 비 진리적 삶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또는 하나님 앞을 떠난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리시기 위하여 때로는 그들에게 시련, 아픔, 고통, 환란, 등등을 부여하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모든 환란고통을 이기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신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완전무결, 충만하신 은혜와 전폭적 인도 보호하심을 믿고 따르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아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신학이 없는 자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신학부재의 기독교 지도자들 <특히 부흥 강사들>은 <성령 받으라> <성령 충만> 등등의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성도들에게 <성령 받으라> <성령 충만하게 받으라>고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교회 수십년 다녀도 성령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 한다> <기도 많이 하고 은혜 많이 받아야 성령 받는다.> <성령 충만하게 받지 않으면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범죄 한다> <성령 충만하게 받지 않으면 복 받지 못 한다> <성령 충만하게 받지 않으면 은혜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저들이 이와 같이 가르치게 된 배경은 성령 하나님 사역의 완전성에 대하여 증거하고 보장한 성경들을 괴상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하심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반 3류 종교들에 존재하는 개념인 <신비적인 영적 상태의 충만함>으로 해석하여 성도들이 그러한 성령 충만적 신앙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성령 충만의 성경 구절들을 기독교적 신학으로 해석하여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하심>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내주 내재하심>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반 3류 종교적 개념인 <성도의 영적 상태>로 해석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강조로 인하여 성도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완전하게 내주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의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성령 하나님께서 과연 자신에게 충만하게 임재하시는가?>하는 의심과 <성령 하나님께서 때로는 자신으로부터 떠나 계신다.>라는 오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적 상태가 때로는 바르지 못하다는 자각<自覺>과 연합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으로부터 떠나 계심으로 자신들의 신앙 상태가 바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성도들은 자신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함> <성령 받지 못함>의 상황 하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불안감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의 비 진리적 신앙의 삶, 그리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 고통, 환란, 등등이 모두가 <성령 충만하지 못함> <성령 받지 못함>으로 인하여 발생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노력하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거나 또는 자신에게 고난, 고통, 환란, 등등이 엄습하였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으로부터 떠나 계심으로 자신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 보호하심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학적 경륜이 없는 목사들이 <기도를 쉬거나 게을리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떠나시거나 또는 돌아보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사단이 그 틈을 노리어 공격하게 되므로 각종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떠나시지 않게 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것으로 믿고 있다.
때문에 성도들은 <성령받기 위하여> <성령 충만하게 받기 위하여> 부흥 집회 참석, 각종 은사 집회 참석,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등에 전념하게 되고 심지어는 기도원, 산기도, 헌금, 사회봉사, 등등을 전전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기독교적 신앙으로 변질되거나 또는 아예 3류 무속 종교적 신앙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성령 받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일률적으로 이루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 내주하심, 내재하심>의 역사이다.

2. 그것은 <성령 충만하게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전, 무결, 영원>하게 <임재, 내주, 내재>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3. 그것은 우리가 요청하고 서원하고 기도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 내주하심, 내재하심>의 역사이다.

4. 그것은 우리가 장차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 내주하심, 내재하심>의 역사이다.

5. 그것은 상태적인 것으로서 성도들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 보호, 관리, 조명, 등등의 역사하심 하에 진정과 신령의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6. 그것은 기능<능력>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 보호, 관리, 조명, 등등의 역사하심 하에 부여받은 사명을 능력있게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게 진행하는 것이다.

****
신학 부재자들이 말하는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

신학 부재자들이 말하는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은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구원의 증표이다. 성도들은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을 통하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인, 확신하게 된다.

** 구원의 증표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 내주하심, 내재하심>의 역사를 통하여 보증 받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약속에 의하여 실행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보증 받는다.

2.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이다. 성도들은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을 통하여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은사를 받는다.

** 하나님의 은사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 내주하심, 내재하심>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에 의하여 하사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에 의하여 각종 은사를 성도들에게 부여하신다.

3. 그것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이다. 성도들은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을 통하여 신령한 영적 상태를 이루어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깨닫고 느낀다.

**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을 통하여 신령한 영적 상태를 이룬다는 것은 3류 무속 종교들의 교리이다. 즉 <신이 임재하여 사람의 영적 상태가 신령해졌다>는 3류 무속 종교의 교리인 것이다.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를 통하여 손상된 영적 기능이 회복되어 신령한 상태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현세를 사는 동안은 여전히 손상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역사>하심을 통하여 영적 기능을 발휘하며 순전한 영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4. 그것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은 성도의 간절한 기도와 사모하는 서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3류 무속 종교의 교리로서 <정성이 부족하여 호박떡이 설었다. - 정성이 부족하여 신이 강림하시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은 성도의 간절한 기도와 사모하는 서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절대필연의 역사이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은 성도와 하나님의 교제, 교통에 대한 오직 유일한 수단이요 방법이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이 없으면 성도와 하나님의 교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의 임재, 내주, 내재하심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완전하고 영원한 것으로서 곧 저들이 말하는 <성령 받음> <성령 충만하게 받음>인 것이다.

2) 성도들의 고난.

성도들이 열심히 노력하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거나 또는 성도들에게 고난, 고통, 환란, 등등이 엄습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불완전하게 내재 내주하시거나 또는 성도들로 떠나 계시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중생-거듭난 자>로서 <의인>이 되었지만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실수할 수도 있고 욕심 유혹을 절제하지 못하여 범죄 할 수도 있으며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고 넘어지기도 한다. 반면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삶과 사명 현장에 완전, 충만, 영원히 함께 하시며 그들을 절대적으로 인도 보호하심으로서 그들에게 승리와 영광의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들의 실수와 범죄와 고난과 고통과 환란을 허용하신다.

(1) 교육적 차원에서.

성도들이 실수, 실패, 범죄, 고난, 고통, 환란, 등등이 전혀 없는 일취월장<日就月將>의 진보적 삶을 살게 되면 때로는 방심, 자만, 나태, 안주, 교만, 등등에 빠질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신앙적 삶에 이상 기류가 발생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다운 삶을 살지 않게 된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육적 차원에서 그들의 실수, 실패, 범죄, 고난, 고통, 환란, 등등를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허용하신다.

(2) 훈련과 연단적 차원에서.

성도들이 실수, 실패, 범죄, 고난, 고통, 환란, 등등이 전혀 없는 일취월장<日就月將>의 진보적 삶을 살게 되면 때로는 방심, 자만, 나태, 안주, 교만, 등등에 빠질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 순종하지 않으며 부응하거나 순종한다 하여도 실수, 실패, 범죄의 경험이 없으므로 방심, 자만, 나태, 안주, 교만, 등등에 빠지며 고난, 고통, 환란, 등등의 경험이 없으므로 사명 현장에서의 각종 난관을 헤쳐 나가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한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연단과 훈련 차원에서 그들의 실수, 실패, 범죄, 고난, 고통, 환란, 등등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허용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실수, 실패, 범죄, 고난, 고통, 환란, 등등을 막아주시지 아니하시고 허용하시는 것은 결국 그들의 보다 나은 유익을 위함과 그들의 더 큰 손해와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에는 들어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께 서운함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의 고난은 오히려 유익이요 감사의 조건이라고 선포하는 성경의 증거들은 한결같이 진리이다.

3)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 방법에 대한 오류.

많은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불> <뜨거움> <방언> 등등과 연관시킨다. 일부 몰지각한 부흥 강사들은 <성령 받아라> <불 받아라>를 외치면서 심지어는 <불, 불, 불, 불 - 불 받아라 - 불, 저기 간다, 불 받아라>를 외쳐 대는가 하면 <방언 은사, 신유 은사, 예언 은사, 받아야 성령 받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언행은 성령 하나님을 3류 무속 종교의 잡귀로 격하시키는 망령된 작태로서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다. 저들이 이토록 무분별한 악행을 범하는 이유는 성경을 잘못 해석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들은 <행2:1-3>의 성령 하나님 임재를 근거로 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뜨거운 불로 임재하시는 것으로 해석한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직 불로만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며 성령 받은 자는 모두가 방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3:2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요1:32>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21:4>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하거늘-행21:10-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4-11>

이와 같이 성령 하나님께서는 상황과 목적에 따라 구름 기둥, 비둘기, 능력, 말씀, 감동, 기쁨, 등등으로 다양하게 임재시며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사명에 따라 다양한 은사를 하사받는다. 어떤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직접 목격하거나 또는 환상, 음성, 꿈, 방언 체험 등등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한다. 반면에 어떤 성도들은 기쁨, 후회, 평안, 감동, 느낌, 깨달음 등등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을 체험한다. 반면에 어떤 성도들은 평생 동안 그러한 체험을 단 한번도 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의심하거나 불순종하지 않고 절대 순종, 기쁨으로 순종,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믿음의 선물로 임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 성령의 임재하심을 불, 방언, 등등으로 제한시킴에 따라 그러한 체험을 못하는 자들은 자신에게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것으로 오해하여 근심, 낙심, 좌절을 하였고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방황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따라서 저들의 무지함은 하나님께만 악행을 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에도 많은 비 진리와 오류를 양산시켰던 것이다.

8. 성령 하나님의 세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오류 중에 또 하나는 성령 세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도 성경의 오류적 해석과 무지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성령 세례> 강조 때문에 발생하였다.

1) 성령 세례에 대한 성경의 증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 세례에 대해 언급하는 바 그중에 몇 구절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5>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행11:16>

2) 성령 세례에 대한 성경의 해석.

성령 세례라는 용어는 신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비신학적 용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하는 것으로서, 그 세례에 성령 하나님께서 당연히 함께 하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성령 하나님의 세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성령 세례가 따로 존재할 이유도 없으며 하나님의 신적 권위와 신적 속성,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성령 세례라는 것이 따로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에 있어서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는 다만 이름을 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세례에 역사하신다. 교회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여할 때에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각각 독특한 <위>에서 특별 하신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입법주, 주권주로서의 위치에서 그 세례를 인정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오직 유일한 중보주로서 그 세례를 보증하시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적용주 하나님으로서, 그 세례를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 되도록 실제적으로 역사하신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는 수세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시어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려는 충성과 순종의 신앙적 결단을 촉구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적, 외적 상태를 정결하게 씻으며 그들의 정결함을 보존하고 유지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시여되어질 때에 이미 성령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하심이 계시는 바, 성령의 세례라는 것을 따로 특별히 만들어 낼 이유도 없으며 함부로 만들어내어서도 안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세례를 부여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1) 하나님 자녀에 대한 법적 행정적 신분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부 하나님의 신적 작정과 성자 하나님의 구속 완성에 의하여 법적, 행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는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양자-성화> 등등이 적용되는데 그중에 <중생-거듭남> <칭의-의인> <양자-자녀>는 하나님 자녀에 대한 법적 행정적 조치이다. 따라서 <중생-거듭남> <칭의-의인> <양자-자녀>는 성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부여된다. 반면에 그것을 적용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 자녀들이 신분에 맞는 상태가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성부 하나님께로 불러들이시며<소명> 그들이 거듭난 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며<중생> 그들의 마음을 성부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며<회심> 그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며<신앙> 그들의 삶을 의로운 것이 되게 하시며<칭의>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시며<양자> 그들의 삶을 거룩하게 하신다.<성화>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성령 하나님의 세례로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있는 자들<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만 <거듭난 자, 의인, 거룩한 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상태적으로도 <거듭난 자, 의인, 거룩한 자,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성령 세례>를 준다고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들에게 어떤 세례의식을 행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성도들을 법적 행정적으로 <거듭난 자, 의인, 거룩한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며 하나님 자녀들의 삶이 <거듭난 자, 의인, 거룩한 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이 성도들에게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실제로 어떤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하지 말고 철저하게 영접하여 <거듭난 자, 의인, 거룩한 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내주 역사하시면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내적, 외적 상태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은 그분의 특별하신 사역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 받았다>라던가, 또는 <성령 세례 받았다>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의 보호하심> 등등으로 말하는 것이 신학적인 표현이 될 것이다.

9. 성령 훼방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자의 죄는 영원히 용서하시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막3:28-29;눅12:10>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로 인하여 하나님의 죄용서 하심과 성도들의 구원 및 견인 교리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는 물론이요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이미 용서하셨다고 선포하셨으며 성도의 구원을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책임지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선포함으로서 하나님의 죄용서와 구원에 대한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일생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심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때때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 보호하심을 거부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게 된다는 사실 앞에 성도들은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령 훼방죄는 성도들과는 무관한 것으로서 택함 받지 못한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지 않는 자들이 곧 성령의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자들이므로 성령 훼방죄는 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구원교리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알미니안적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것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했으므로 성령의 소명과 조명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령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미 원죄에 대한 정죄로부터 사면을 받지 않았으므로 성령 훼방죄로 다시 정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1:19>

한편 성경은 성령 훼방죄에 해당되는 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던 자들임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4-8>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들을 근거로 할 때에 성령 훼방죄에 해당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도들 중의 어떤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존재하므로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아니한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사면하신 것은 주권적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으로서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 훼방죄에 해당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 반열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의 반열에 속한 자들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한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녀의 반열에 서느냐? 종의 반열에 서느냐? 하는 것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녀의 반열에 서느냐? 종의 반열에 서느냐? 하는 것은 성도들의 개인적 삶에 의하여 결정된다. 성도들의 개인적 신앙적 삶에 대한 문제로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자녀의 입장이 되며 사명적 삶에 대한 문제로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종의 입장이 된다.
성도가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서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모든 일을 공의<公義>로 처리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버지로서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으로 처리하신다. 반면에 성도가 종<從>으로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법적 행정적 관계로서 하나님은 <주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때에 주 하나님께서는 종들의 모든 일을 법적 행정적 주권에 의한 공의<公義>로 처리하신다.
은혜와 자비와 사랑으로 처리하시는 것과 법적 행정적 주권에 의한 공의<公義>로 처리하시는 것 사이에는 극<極>과 극<極>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눅15장>의 자녀에 대한 경우와 종들에 대한 경우를 통하여 극명하게 나타난다. <눅15장>에서 하나님은 불의한 아들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으로서의 지극한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다. 그러나 불법을 행하는 종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주 하나님>으로서 공의의 심판을 내리신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1-42>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10:29>

따라서 하나님 자녀들의 개인적 신앙에 대한 불순종, 불의, 불법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으로서의 지극한 은혜와 자비와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용서받는다. 그러나 종들의 사명적 불순종, 불의, 불법들에 대하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저항하고 불순종한 <성령 훼방죄>가 적용되어 <주 하나님>으로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제12장. 창조

1. 창조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도 창조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창조주라는 용어는 오직 기독교의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고유명칭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우주 만물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주라는 명칭을 다른 종교들이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불허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정립할 때에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정립한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1위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 주권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로 정립하는 것을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창조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 사역이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의 창조에 함께 하신 것이다.<창1:2,26>

2. 창조의 목적.

1) 창조의 목적에 대한 일반 학자들의 견해.

“플라톤”<Platon> “필로”<Philo>“세네카”<Seneca> 등은 하나님은 자족하심으로서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여 어떤 것을 창조하실 필연적인 이유가 없으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창조의 목적을 피조의 행복, 특히 인류의 행복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결론은 많은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특히 종교개혁 시대의 인본주의<Humanism>나 18세기의 합리주의<Rationalism>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인류의 행복이라는 사상을 가장 지지한 사람은 “칸트”<Cant>와“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 “리츌”<Ritschl> 등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다음의 이유로 인하여 비판되었다.

<1>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영원불멸의 절대적 진리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과 같은 오해를 제공할 수 있다.

<2> 이 이론은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인류의 행복이 하나님의 창조 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인류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행복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론 인류의 고난을 아담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녕 인류의 행복이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까지 유념하여 조처하셨을 것이다.

2) 창조의 목적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

기독교는 하나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 이 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 찾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 안에서 찾았다. 기독교가 성경에서 발견한 하나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은 피조 세계의 찬송 <특히 도덕적 피조 세계의 찬송>을 통하여 영광 받으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의 본질은 받는 영광이 아니라 선포하는 영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피조 세계에 들어내고 나타내기 위하여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선포하시는 영광은 피조물들에 의하여 찬미되고 송축되는 과정을 통하여 그 궁극적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은 모든 피조 세계의 아름다운 역사와 그들의 행복한 삶을 통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 <존경과 경외> <신뢰와 사랑> 등등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경 전체가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에 때로는 초월하시고 때로는 내재하시는 가운데 그들을 이끌어 가시면서 기뻐하시고 만족해하신다. 그리고 모든 피조 <특히 도덕적 피조>들은 자신들 속에 언제나 내주 하시면서 자신들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고 경외하며 존경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창조에 대한 이러한 교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증거들에 의하여 보증되어진다.
<사 43:7; 60:21; 61:3; 겔 36:21-22; 39:7; 눅 2:14; 롬 9:17; 11:36; 고전15:28; 엡1:5,6,9,12,14; 3:9,10; 골1:16>

3. 창조의 방법.

하나님의 창조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첫째는 말씀에 의한 창조이고 둘째는 약간의 재료를 사용하신 창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은 무<無의> 상태에서 <있어라, 되어라, 비취라, 나뉘라> 등등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과 몇몇 동물들은 이미 무에서 창조된 <흙>을 재료로 사용하시어 창조하셨다. 이러한 하나님 창조의 방법은 인간에 대한 특별한 배려하심을 증거 한다.

4. 창조의 기간.

1) 창조의 기간에 대한 일반 학자들의 견해.

성경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가 6일 동안에 이루어졌다고 증거 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6일간의 창조에 의혹을 품었다. 특히 과학적인 차원에서 우주의 연대를 규명하려는 자들은 6일 창조를 전적으로 거부하였으며, 신학자들도 이에 동조하는 자들이 많았다.

6일 창조를 거부하는 학자들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가 현재의 24시간<1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이었을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갖게 된 근본 동기는 서로 다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다만 6일 동안에 그러한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호기심과 창조의 초기에는 아직 해와 달이 창조되어지지 아니한 상태였음으로 저녁과 아침의 사이가 현재와 같은 24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개념은 다르다. 현대의 <장기간> 개념은 지질학적인 연대와 하나님의 창조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19세기 이전에 창조의 날들은 6일간이었다는 것으로 이미 결론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질학자들이 우주의 연대, 특히 지구의 연대를 성경이 증거 하는 그것과 전혀 다른 연대로 발표함에 따라 학자들, 특히 기독교 학자들이 지질학자들이 발표한 지구의 연대와 성경이 증거 하는 지구의 연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해결하고자 창조의 기간을 <장기간>으로 하는 논증을 제기한 것이다. 저들이 창조의 날을 <장기간>으로 추산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주석적 차원에서.

① 히브리어 “욤”<םוֹי>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24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긴 날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② 히브리어 “욤”은 흑암과 구별된 광명을 의미하기도 하며 <창1:5,16,18,> 광명과 흑암을 함께 의미할 수도 있으며<창 1:5,8,13>,
또는 6일을 합하여 함께 의미하거나<창 2:4> 고통<시20:1>이나 진노<욥 20:28> 번영<전 7:14> 구원<고후 6:2>과 같은 것들에 대한 시간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어진다.

(2) 창조적 차원에서.

① 태양이 창조된 것은 제 4일이었다. 따라서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의 하루를 반드시 24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의 시간은 태양이 창조된 후의 시간하고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② 창조 당시에 대하여 언급된 날들은 하나님의 날들이며, 하나님의 날 들은 사람의 날과 같지 않다.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와 같은 것이다.<시 90:4; 벧후3:8>.

③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던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안식일 이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영원한 것으로서 끝이 없다. 따라서 그날은 수천 년이 될 수도 있다.

2) 창조의 기간에 대한 성경의 근거.

(1)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6일 창조.

하나님의 창조가 현재와 같은 6일<하루 24시간 기준>만에 완성되어 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의하여 보증되어진다. 우주만물이 제 아무리 광대무비 한 것이라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6일이 소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순간>에 모든 것을 완성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6일 창조.

6일이라는 시간이 하나님의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너무 긴 시간이라면 그럼에도 불구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긴 시간을 사용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은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규명되어진다. 하나님의 창조가 6일에 걸쳐서 완성되어진 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인간을 위하여 6일이라는 긴 시간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배려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시간의 필요성.

A. 사회의 질서와 제도유지 차원에서.

인간의 삶에는 시간이라는 영역이 절대 필요하다. 인간은 일반 피조물들과는 다른 존재이다. 인간은 지성과 인격을 갖춘 고등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일반 피조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인간에게는 가정, 사회, 국가, 등등의 조직사회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며 또한 그러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각종 제도와 질서가 절대 필요하다. 그중에 시간이라는 영역은 인류 사회의 질서와 제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다.

B. 삶의 유지 차원에서.

인간의 삶에는 <의, 식, 주,> 뿐만 아니라 <건강, 휴식, 취미, 문화> 등등의 각종 영역들이 절대 필요하다. 시간은 그러한 영역들을 인간에게 제공하고 유지시켜 주는 특별 영역이다. 인간은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의식주적 삶>을 살며 또한 <건강, 휴식, 취미, 문화적 삶>을 산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사회에 시간이라는 영역을 하사하셨고 그리하여 우주의 존재함과 운행함을 시간에 입각하여 창조하셨다.

② 시간의 구분.

A. 계절의 필요성.

a. 식생활 차원에서.

인간의 삶에는 식생활 차원에서. 4계절의 시간적 구분이 절대 필요하다. 인간 식생활의 기본적 요소인 농산물은 <파종, 성장, 결실, 수확, 휴식>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파종은 봄을 요구하며 성장은 여름을 요구하고 결실은 가을을 요구하며 겨울은 그들의 휴식에 절대 필요하다.

b. 문화생활 차원에서.

인간은 의식주를 절대 필요로 하지만 의식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각종 문화적 삶이 절대 필요하다. 동일한 기후, 동일한 환경은 인간의 정서를 위축시키고 심령을 곤혹스럽게 한다. 때문에 인간은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각종 문화를 즐기고 누리면서 차원높은 삶을 사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사회에 4계절을 하사하셨고 그리하여 우주의 존재함과 운행함을 4계절에 입각하여 창조하셨다.

③ 일년 12개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에 1년 12개월 365일이라는 시간을 주셨다. 1년 12개월은 3개월 단위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며 1개월은 30일단 위로 구성되고 1일은 주야 24시간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시간적 단위는 인간의 삶에 필연적으로 존재하여야 할 시간적 단위였다. 인간의 수명, 역사의 기록에 대한 연대, 삶의 질서와 규칙 등에 있어서 1년 12개월이라는 주기적인 시간적 단위는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시간을 하사하실 때에 이러한 시간적 단위를 주기적, 반복적으로 주신 것은 그것이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때문이었다.

A. 식생활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주적 삶을 유지시켜 주는 것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농수산물이다. 농수산물의 <파종, 성장, 결실, 수확, 휴식> 과정은 길어도 좋지 않고 짧아도 좋지 않다. 1년이라는 시간은 농수산물의 <파종, 성장, 결실, 수확, 휴식>과정에 가장 적합하다.

B. 문화생활 차원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지루함을 싫어하는 반면에 변화를 좋아한다. 이러한 인간에게 있어서 1년 12개월이라는 시간적 단위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각각 3개월마다 바뀐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지만 그것은 길어도 좋지 않고 짧아도 좋지 않다. 따라서 현행과 같은 1년 12개월의 시간 단위는 참으로 적당하다.

④ 1개월 30일과 1일 주야 24시간.

1년을 12개월로 구분한 것에는 더욱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해와 달은 1년 365일과 4계절을 주기적으로 구분하는 차원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운행하지만 그것은 피차에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한다. 해는 낮을 주관하고 달은 밤을 주관하면서 1년 365일과 4계절의 주기적인 시간 단위를 형성하는데 그들은 홀로 존재할 수도 없고 홀로 운행할 수도 없다. 해와 달은 피차에 서로를 절대 필요로 하며 공존하고 동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낮과 밤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의 모든 생태계를 주관하는데 특히 달은 바다와 연관되어진다. 바다는 달의 주기적 운행과 연관되면서 운행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밀물과 썰물을 통하여 확인한다. 이렇듯 해와 달은 우주의 생태계와 운행을 주관하는데 그것은 30일이라는 시간적 단위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1년이 12개월로 구분되는 것은 해와 달의 주기적 운행이 30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일은 다시 주야 24시간으로 구성된다. 1개월 30일 사이와 1일 주야 24시간의 구성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깊고 크신 은혜와 배려가 담겨 있다. 인간의 1일 삶은 주야 24시간이 가장 적절하다. 1일 주야 24시간은 인간의 의식주적 삶에 있어서도 매우 적절하지만 인간의 문화적 삶에도 가장 적절하다. 1일 주야의 사간은 너무 길어도 좋지 않고 너무 짧아도 좋지 않다.

****

인간들은 하루 24시간 <주야>와 1주간 <7일>과 1개월 <30일>과 1년 <12개월>과 사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을 통하여 때로는 일하고 때로는 휴식을 취하고 ,때로는 인생을 즐기면서 한평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삶을 인간에게 허락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긴 시간인 6일을 통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6일 창조를 거부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에 대하여 그것이 수천 년 간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을 쉬셔야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쉬실 때에 우주만물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님을 따라 함께 쉬었을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쉬시는 동안 수천 년을 잠자고 있었을까? 저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주장들로 인하여 어떤 신학적 문제가 발생하는지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5. 창조의 횟수.

1) 2회 창조에 대한 주장.

하나님의 창조가 단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 차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2회 창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상반된 견해를 제기하는바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창세기 2장의 문제.

진보적 고등 비평가들은 창세기 2장이 처음 창조에 대한 두 번째의 추가적 창조이거나 또는 독립적인 창조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땅은 식물이 창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르고 있으며, 사람은 동물들 이전에 창조되었으나 우선 남자만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동물들이 사람에게 적합한 동반자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적으로 창조하셨으나 동물들이 사람의 동반자가 되지 못할 것을 아시고, 여자를 남자의 배필로 창조하사 사람을 위하여 예비하신 에덴동산에 두셨다>

****
< 이 논증에 대한 변증>

창세기 2장은 사람의 역사에 대한 것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미 앞장에서 말해진 것들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논증에 대하여는 변증할 필요도 없으나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자들을 위하여 몇 가지로 반박하고자 한다. 이 논증은 우선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을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창조하실 때는 신적 작정에 의한 결과에 의한 창조이며, 그 신적 작정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지식에 의한 것임으로 필연적인 결과로 결론되어진다. 따라서 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에 대한 어떤 가능성을 시험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논증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인간의 동반자로 주시려고 작정하셨으면, 그것들은 당연히 인간들의 동반자로 창조되어지게 되어 있다. 동물들이 인간의 동반자가 과연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로 등장할 수 있다는 저들의 발상은 동물들이 인간의 동반자가 못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2) 재창조에 대한 주장.

창세기 1:1-2절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2회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천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음으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에게 징계를 내리신 후에 다시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이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에 징계를 내리신 후에 다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 근거로서 이미 창조되어진 우주만물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곳에 있다는<창1:2>을 제시한다.

2) 재창조 주장에 대한 반박.

(1) 성경 해석의 오류.

① 문학적 상식의 결여에 의한 오류.

재창조 주장은 문학적 상식이 전혀 결여된 사람들이 창 1:1과 2절을 따로따로 구분하여 해석함으로서 발생되어진 것이다. <창1:1-2>은 따로 구분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이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창 1:1>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전체적인 선포이며, <창 1:2>은 그 전체적인 선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문학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 할 수 있다.

② 편견에 의한 오류.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따라서 성경을 일거나 해석할 때에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시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을 모르는 자들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전체적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해석한다. 재창조 에 대한 주장은 성경을 전체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부분적 문자적으로만 읽고 해석한 편견에서 비롯되어진 오류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전체적인 기사를 보지 않고 다만 <창1:2>의 <땅이 혼돈 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라는 것에만 치중하여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것을 파괴 하신 후 다시 창조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들이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반란에 대한 징계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파괴하시고 다시 창조 하셨다고 주장 하는 것은 <땅이 혼돈 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파괴하셨다고 가정한 후 그것을 합리화 하기위하여 천서들의 반란에 대한 징계를 그것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기사에서 사람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증거 하지만 천사들의 반란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는 전혀 증거 하지 않는다. 만일에 천사들의 반란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창조 과정에 있었다면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증거 할 것이다.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만 증거하고 천사들의 반란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침묵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의 반란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되어진 우주만물을 훼파 하시고 다시 창조하셨다는 논증은 성립 될 수 없다.

(3) 비논리적 해석.

성경은 천사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사람의 불순종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 기사를 매듭지은 후인 <창 3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창 3장> 이 후에는 창조에 대한 더 이상의 기사가 등장하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결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2회적인 것을 의미하는 어떤 증거도 하지 아니한다. 만약에 저들의 주장대로 하나님께서 1차의 창조를 훼파 하시고 2차의 창조를 결행하셨다면 <창 1:2> 이하의 문구는 잘못된 것이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2회 째 창조는 사실상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개축>이거나 또는 <보수>이다. 훼파 되어져서 혼돈 하고 공허하며 흑암에 휩싸인 상태의 우주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이거나 개축이지 창조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저들의 주장이 옳다면 성경은 이와 같은 보수나 개축에 대하여 증거 해야지 창조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은 성경답지 못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창조에 대한 것을 증거 할 뿐 개축이나 보수 같은 것을 추론할 수 있는 여지조차 허락하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1차 창조를 훼파 하셨다는 어떤 상상조차 불허한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개축이나 보수 같은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도 전혀 어울리지 아니한다. 전능의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훼파 되어진 것들을 다시 보수하시고 개축하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모두 없애시고 다시 창조하실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창 1:2>과 <창 1:3> 사이에는 어떤 문구가 생략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도말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셨다.>라던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훼파 되어진 것들을 다시 손질 하셨다.>는 문구가 생략되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특히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아니하는 부분이나 감추어야할 부분, 그리고 신학자들을 통하여 훗날 밝혀야 할 것 등은 언제나 생략되어져 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추론한다면<창 1:1>과 <창 1:3> 사이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생략되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생략된 문구들이 결코 저들의 제 2 창조론을 합리화시켜주지는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미 <창 1:2>의 문구 자체가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며, <창 1:3> 이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증거들이 그것을 또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 1:2>의 상반절은 창조되어지는 과정의 상태를 증거하고 있고, 하반절은 창조 사역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창 1:3>부터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결과들에 대한 증거들이 기록되어지고 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재창조론 따위가 발을 붙일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고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들의 재 창조론은 성경의 내용과도 일치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아니한다. 저들의 주장이 맞으려면 성경을 다시 쓰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제 2 창조론 같은 비 성경적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 주장을 통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함과 무식함을 들어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속성에 의한 완전무결한 창조 사역을 모독하는 대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부정하는 무례함.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전지 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저들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역으로 추론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나 사람의 배반을 몰랐다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천사 또는 사람의 배반을 아셨다면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진노하셔서 그것을 다시 만들게 되는 하나님답지 않은 일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전지 하시다. 따라서 천사들의 반란이나 사람의 불순종을 이미 알고 계셨고, 거기에 합당한 조처들을 모두 준비 하셨다. 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화가 나셔서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속 조치를 강구하신 것이다. 따라서 저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전지성을 부정하는 무례한 것이다.

(4)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무례함.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답지 못하시다. 천사나 사람의 배반에 대한 분풀이를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창조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포악한 성격 파탄자로 만드는 불경한 자들이다.

6. 인간창조.

1) 인간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 26>

2) 인간 중심으로 창조.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사명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피조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인간 중심으로 창조되었음은 다음의 사실을 통하여 증거된다.

(1) 시간 - 시간이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1년-12개월-4계절> <1개월-30일-4주> <1일-주야-24시간>으로 창조되었으며 그 운행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2) 우주 - 해, 달, 별, 등등이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창조되었다. 해는 낮을 주관하면서 각종 생물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달은 밤을 주관하면서 바다와 각종 생물의 생성에 영향을 준다. 별들은 우주의 질서와 조화, 기상과 계절의 변화, 등등을 이룬다.

(3) 지구 - 인간의 거처인 지구가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 창조되었다. 지구에는 산, 바다, 강, 평야, 등등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배열되어 있고 인간에게 필요한 각종 생물들이 존재한다.

(4) 인간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인간은 만물중 최고, 최상의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다른 생물에게는 없는 <영>과 <인격, 지혜, 의지, 정신, 사명> 등등이 부여되었다.

(5) 인간과 동물 - 인간과 동물은 흙을 재료로 하여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른 피조와 구별하여 흙을 재료로 다듬어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친구들인 동물들도 흙을 재료로 하여 창조하시는 은혜적 배려를 하셨다.

3) 인간 창조의 원형.

(1) 최고의 신체와 미모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들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되는 최고의 신체와 미모를 주셨다. 인간의 신체적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었다.

(2)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창1:26,27; 5:1,3; 9:6>
인간 창조에 적용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외적 형태나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중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 창조에 적용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속성>들은 다음과 같다.

①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영>을 부여하셨다. 인간에게 부여된 <영>은 지혜, 사상, 개념, 이념, 취향, 기호, 등등의 이데아적 기능 영역이다. 인간의 그, 영적 기능들은 지식, 지능, 적성, 재능, 등등의 능력을 발생시키고 발전시키면서 학문,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예술, 체육, 등등의 인류사회 영역을 계속하여 발전시켜 나갔다.

② 인격을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인격을 부여하셨다. 인간에게 부여된 인격은 <영>에 비롯되어진 이데아적 기능들 중 하나이지만 다른 영역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영역들은 대부분 기능적 영역인 반면에 인격은 지성, 이성, 등등의 정신적 영역들을 발생시키고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중 하나인 <영>에서 발생하는 인격은 우아하고 고매한 지성과 비범하고 세련된 이성과 집중적이고 단호한 정신들을 발생시키고 발전시킨다.

③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자유의지>라는 또 다른 특별한 은사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수 영역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상명 하복의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로 예우하시는 관계이며 또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는 차원에서 부여받은 사명을 이행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자의<自意>적인 차원에서 사명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특별한 은사를 부여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우아하고 고매한 지성과 비범하고 세련된 이성과 집중적이고 단호한 정신들을 아우르고 다스리는 인격과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독자적인 자유의지를 통하여 무엇이던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으며 취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나 인간에게 부여된 인격과 자유의지는 두 가지의 법적 제한을 받는다. 첫째는 인격과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법을 초월할 수 없으며 다른 또 하나는 상대방의 인격과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법을 초월하는 인격과 자유의지는 방종이다.

4)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1) 피조 세계의 통치권 부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 창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셨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지 않는 것과 천사들을 통하여 통치하시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 창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①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 세계를 직접 통치하실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 때문이다. 피조 세계를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들과 일일이 만나게 되고 각종 불경과 망령된 저항들을 겪으시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들을 겪으셔서는 안 되며 겪으실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절대적 주권주이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 세계의 통치 운영권을 부여하신 것이다.

② 인간의 특성.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통치하시지 아니하신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통치하시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천사들의 반란을 이미 겪으셨기 때문이며 다른 또 하나는 인간들의 특성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하사 받았기 때문에 그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천사들의 통치에 저항하고 불순종하게 된다. 하나님께도 저항하는 인간이 천사들의 통치에 절대 순종했겠는가? 아마도 인간은 천사들의 통치에 저항하여 통치권을 탈취하려고 하거나 또는 천사들과 야합하거나 천사들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저항하는 죄를 범했을 것이다.

****
한편 사람들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지 않고 인간들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셨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궁금하기보다는 죄와 관련된 자유의지 문제 때문이다. 인간의 범죄가 자유의지 때문에 발생하였다는 신학 원리에 대하여 <그렇다면 인간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셨다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하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는 차원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매우 우매한 질문이다. 저들의 주장대로 인간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시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자유의지를 부여하시지 않았다면 자유의지 없는 인간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자유의지 없는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의 형상을 근거로 하는 <영혼>이나 인격이 없는 상태로서 <혼>만 있는 동물적 존재로 창조된다. 인간의 영혼, 인격, 자유의지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중에 어떤 것 하나도 제외되면 안 되는 절대 필요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③ 인간에 대한 배려.

앞에서 제기한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 통치와 천사들을 통한 통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이상 불순종과 저항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인간에게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인간에게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 목적상 필연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직접 통치하시거나 또는 천사들을 통하여 통치하시기보다는 피조들 중 어떤 존재에게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고 그리하여 그 존재를 인간으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피조 세계의 통치자로 작정하신 것은 일단 창조된 피조물들 중에 인간을 골라 선택하여 지정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즉, 우주 만물에 대한 섭리 일체를 신적 작정하실 때에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절대적 주권에 기초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작정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은혜로 정의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하신 것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자비이며 긍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세계를 통치하기 위한 목적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법률적 관계에 두지 아니하시고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에 대한 배려를 통하여 증거된다.

(3) 피조물 중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부여하셨다. 현존하는 모든 피조 세계의 지위 중에 하나님의 자녀에 버금가는 지위는 없다.

(4) 피조물 중 최고의 삶을 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의 현장인 지구에 최상의 천혜<天惠>를 하사하시었다. 주야, 4계절, 등등의 시간적 특혜를 주셨으며 산, 바다, 강, 평야, 등등을 아름답고 질서 있고 조화되게 배열하셨으며 각종 지하자원과 다양한 농수산물을 하사하시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문명과 문화와 각종 조직사회를 하사하시어 인간의 삶이 누리고 즐기는 풍요롭고 아름답고 고등적인 차원의 삶이 되게 하셨다.

(5)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현재적 삶에만 각종 혜택을 부여하시지 않고 그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특혜까지 하사하셨다. 인간들이 현재적 삶을 마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무궁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다. 인간의 현재적 삶이 아무리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불완전하고 불안전하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무궁하며 완전무결하다.

5)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

신학을 모르는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이 인간이 2번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저들은 아담과 하와 이외에 또 다른 계열의 인간들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창4:14-15>과 <창6:1-4>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제기되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3-15>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1-4>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창4:13-15>의 가인이 두려워한 자들과 <창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아담과 전혀 다른 또 다른 계열의 창조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였는데 당시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정죄되고 거부되었다. 당시의 신학자들은 <창4:13-15>의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태어난 사람들로 확인하였으며 <창6:1-4>의 하나님 아들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로 확정하였다. 한편 <창6:1-4>의 하나님 아들들을 천사라고 주장한 자들이 있었는데 천사는 영적 존재로서 결혼하지 않는 존재<마22:30>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자들에 의하여 여전히 주장되고 있다.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은 다음과 같은 신학 원리에 의하여 정죄되고 거부된다.

(1)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은 <인류의 단일성>과 <인류의 죄에 대한 단일성>을 무너뜨린다.

성경은 인류의 시조를 아담과 하와로 선포하며 그들로부터 인류가 생육 번성하였다고 선포한다. 기독교 신학은 그와 같은 성경의 선포를 근거로 하여 <인류의 단일성>으로 정립한다. 이러한 인류의 단일성은 <인류의 죄에 대한 단일성> 신학의 근거이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 이외에 또 다른 계열의 인류가 창조되었다면 <인류의 단일성>이 무너지고 아울러 <인류의 죄에 대한 단일성>도 무너진다. 성경은 인류의 범죄가 오직 아담과 하와에 의하여 발생했다고 선포하며 모든 인류는 아담의 범죄를 전가 받아 죄인이 되었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아담 이외에 또 다른 인류가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아담과 무관한 자들이므로 인류의 원죄와도 당연히 무관하다. 따라서 인간의 2중 창조론은 <인류의 단일성>과 <인류의 죄에 대한 단일성>을 함께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아담과 하와로부터 발생한 죄만을 말할 뿐 그 이외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노아 시대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노아가 그중에 가장 의인이었다고 증거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분명히 죄가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 2중 창조론자들은 그들에게 존재하는 죄의 근원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 2중 창조론자들은 인간 2중 창조론은 주장하는 반면에 그들의 죄는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은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2) 인간에 대한 2중 창조가 실제로 있었다 할지라도 노아 이전으로 종료되었다.

만약에 아담 이외의 또 다른 계열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노아의 홍수 때 까지만 살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 때에 노아와 그의 가족만 살아남았고 그들 이외의 인류는 모두 사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2중 창조론은 현실적으로 전혀 성립될 수 없다.

6) 인간의 구조<構造>

(1) 인간의 구성요소

인간은 신체<body>와 영혼<soul;spirit>의 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몸<body>

A.구약에서.

a. 바사르<ר󰙴󰔯=basar>

동물과 사람의 살을 가리키는데 127번 등장한다. 이 말은 혈족 관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하나님과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인간 및 모든 생물을 나타내기도 한다.

b. 그셈<ם󰚂ג=gsem>

후기 아람어로 된 <단 3:27; 4:30; 5:21>에 인간의 몸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c. 나드네 <ן󰕔󰔷=nadneh>

후기 아람어로 된 <단 7:15>에 인간의 몸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B. 신약에서.

a. 샤륵스<σαρ-ξ=sarks>

샤륵스 는 히브리어의 <바사르>와 가장 가까운 말로서 헬라식 철학적 개념이 깃들여져 있어서 심원한 심리학적, 신학적 의미가 따르고 있다. 성경은 이 용어를 인간의 혈족 관계나 하나님과 관계된 자들에게 적용하였다.

b. 소마<σϖμα=soma>

이 용어는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모든 사람과 동물들에게 적용되어지고 있다. 이 말은 <샤륵스>와 동의어로도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이 용어가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어 질 때에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지게 된다<막 14:22>. 바울은 <소마>라는 용어를 종교적 차원에서 대단히 다양하면서도 독창적인 것으로 사용하였다.

(예)
* 인간의 육체 전체를 말할 때에 적용하였다.
<데살로니가 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 인간의 인격성을 말할 때에 적용하였다.<고전 6:12-20>
* 인간의 몸을 성령의 전으로 묘사할 때에 적용하였다.<고전 6:19-20>
* 부부의 의무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평등의 원칙을 말할 때에 적용 하였다.<고전 7:4>
* 인간의 성적인 문제를 말할 때에 적용하였다.<고전 7:34>
* 인간의 몸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묘사할 때에 적용하였다.
<롬 12:5; 고전 6:19; 골 1:18>.
* 성도의 몸을 그리스도의 몸 자체로 증거 할 때에 적용하였다.
<고전 6:13-20; 갈 2:20>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 인간의 몸<특히 성도의 몸>은 하나의 동물적 신체라는 개념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영적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에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몸이 인간 자체로서의 개념에 머물러 있게 될 때와 하나님과의 관계론적 차원에서 논의될 때의 차이는 매우 대단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신비스러움을 보게 된다. 아울러 몸과 영, 혼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인간의 몸을 어떤 차원에서 논의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현저한 수준의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인간의 몸을 신체적인 차원에서 다만 인간의 몸으로서만 보게 되면 동물적인 개념 쪽으로 따라가게 되는 형이하학적인 것이 되는 반면에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영적 존재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② 혼<soul>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혼<soul>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명사<네페쉬-שׁ󰘵󰔻-nephesh>와 헬라어 명사<프쉬케-πψυχή-psuche>의 역어로서 인간의 정신과 인간 자체와의 관계를 설정할 때에 사용되어지고 있다. 이 때에 있어서 혼<soul>은 동물의 일반적인 정신면까지를 포함하게 된다<창 2:19>.

③ 영<spirit>-<루아하, 루아흐-󰖏וּר-ruach>
<프뉴마-πνεύμα-pneuma>

영<spirit>은 일반적으로 무형의 영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되어지거나 또는 인간성 속에 존재하는 신적인 요소를 말하고자 할 때에 사용되어지는 것이었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ch>나 헬라어의 <프뉴마=pneuma> 라틴어의 <스피리투스=spiritus>의 근본 의미들은 <공기의 움직임> <미풍> <바람> <호흡> 등으로 표현되지만 보다 더욱 넓은 의미로서는 <생명의 본질> 자체를 의미한다.

④ 영혼<soul;spirit>

성경은 때때로 영과 혼을 따로 분리하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영과 혼은 거의 같은 상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의 <네페쉬>나 신약의 <프쉬케> 또는 구약의 <루아흐>나 신약의 <프뉴마> 등은 독립상태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거의가 같은 상태,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혼을 영과 혼으로 반드시 구별하여 그것들을 하나의 독립적 실체들로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실체적 개념들을 고찰하여 신학적인 정립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A. 구약에서.

a. 히브리인들은 육체는 삶의 물질적 근거이고, 영혼<정신>은 하나님 과 관계된 존재라는 차원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둘을 완전히 분리하여 대립적 관계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동등하며 동일한 불가분리의 동거 동락적 실체로 보았던 것이다.
<레 19:28; 민 6:6>

b.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창 2:7>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동물적인 생명의 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말하고자 할 때에는 그것은 생기를 부여받은 하나의 외적 실 존재로서 곧 피와 연관되어지는 생명의 본질적 존재가 된다.
<창 9:4; 레 17:11,14; 신 12:23; 수 2:13; 왕상 19:4; 삿 5:18>

c. 히브리인들은 <네페쉬>를 사용함에 있어서 인간의 총체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에도 사용했다. 인간의 자아, 갈망, 갈등, 욕구, 감정 등의 문제들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페쉬는 인간의 갈증, 탐욕, 만족, 기쁨, 슬픔, 사랑, 증오, 희망, 절망 등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어졌다. [출 23:9; 겔 11:19;18:31;36:26].

B. 신약에서.

a. 히브리어의 네페쉬처럼 헬라어의 프쉬케도 생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 염려하다 <마 6:25> * 구원하다, 또는 잃다 <막 8:35> * 찾다<마 2:20>
* 버리다 <요 10:11> * 돌아보다 <빌 2:30>

b. 신약의 몇몇 구절, 특히 히브리서와 목회서신에서 프쉬케는 구속사적 원에서 하나님과 연관하여 사용되고 있다.
<히 6:19;10:39;13:17; 약 1:21; 벧전 1:19,22;2:11,25>

(2) 2분설<Dichotomy>과 3분설<Trichotomy>

① 2분설과 3분설에 대한 역사적 견해.

초기 기독교는 인간이 신체<body>와 혼<soul>의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신체<body>와 혼<soul>과 영<spirit>으로 구성되어졌다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계는 오랫동안 논증을 거듭 하였는바. 이 두 가지의 견해는 각각 2분설<Dichotomy>과 3분설<Trichotomy>로 명명되어졌다.

A. 2분설<Dichotomy>

2분설은 라틴계 교부들에 의하여 주장되어졌다. 저들은 인간은 신체<body>와 혼<soul>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졌으며, 성경이 그것을 증거 함으로 더 이상의 다른 개념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2분설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데오도렐<Theodoret> 어거스틴<Augustine> 등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부분의 교회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B. 3분설<Trichotomy>

3분설의 개념은 헬라 교부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3분설은 본래 헬라 철학사상에서 유래되어진 것이다. 3분설은 초기 기독교시대에 헬라 또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교부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 오리겐<Origen>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로부터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가 3분설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간성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채택한 후 3분설은 점차 거부되어졌고 얼마 후에는 거의 폐기되었다. 중세 시대에 이르러 군소 신학자들 일부가 3분설을 변호하였으나, 2분설은 교회가 지지하는 정설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 사정이 달라졌다. 독일이나 영국의 신학자들, 루스<Roos> 올스하우젠<Olshausen> 베크<Beck> 델리취<Delitzsch> 오벌린<Auberlen> 웰러<Oehler> 화이트<White> 허드<Heard>에 의하여 3분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부활되어진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a. 헬라의 철학사상은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 어떤 매개체가 있다고 유추한다. 절대자 하나님은 유한한 물질세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시지 아니하며 따라서 하나님과 물질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어떤 제 3의 요소가 있다고 유추하는 것이다. 저들은 이러한 개념을 인간의 신체와 영 사이에 도입하였다.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진 유한한 물질인 반면에 인간의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입되어진 영원한 것이며, 또한 비 물질임으로 그 둘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체<body>와 영<spirit>은 혼<soul>을 매개체로 하여 상호적인 생생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혼>이라는 매개체를 도입하는 망령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매개체를 필요로 하시지 않고 언제나 직접적으로 인간과 교제하신다.

b. 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헬라의 철학사상 중에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몸이 3개의 요소 <three part>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헬라적 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다음과 같이 구성 되어진다.

* 몸은 물질적 부분이다.<body is material part>
* 혼은 동물적 생명의 원리이다.<soul is principle of animal life>
* 영은 하나님의 영의 일부가 인간의 내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에 의하면 <Human Spirit>와 <Divine Spirit>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사상은 범신론<pantheism>적인 것이다. 본래 범신론적인 개념에 의하면 인간의 <spirit>는 실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상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범신론적인 개념에 입각하여 본다면 인간의 <body> 역시 영적인 것과 결합되어지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body>나 <spirit>는 하나의 현상<상태>가 아니라 분명한 실체적 존재이다. 삼분법 주장자들은 이러한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의 영혼을 <혼-soul>과 <영-spirit>으로 구별하여 혼은 동물적 생명의 원리로 하고 영은 인간적 정신세계의 부분으로 하여 양립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는 <창 2:7>과 <창 7:21-22>의 내용에 매우 일치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진 것 <창 1:26>과 충돌한다. 인간과 동물의 혼을 동일시하여 3분법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2중적인 것으로 창조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즉 동물적인 혼<soul>으로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또 하나의 차원 높은 영<spirit>을 덧입힌 것으로 되는 것이다.

② 성경의 증거

성경은 인간의 구조적 요소를 말함에 있어서 언제나 2분적이다. 신체<body>와 혼<soul>의 두 가지로 증거 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인간의 구조적 요소를 말함에 있어서<영-spirit>이라는 또 하나의 용어를 사용한다. 성경의 이러한 용어 때문에 3분설이라는 논증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라는 용어는 <혼>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일 뿐 혼과 별도의 또 다른 정신<영>적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3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이 <혼>과 <영>을 별도로 구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은 혼과 영이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은 혼과 영을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역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혼과 영을 교대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에 사용되어지는 혼과 영에 대한 적용을 살펴보면 <혼>은 인간의 정신 <영>적인 요소를 인간에게 적용할 때에 사용되어지고 <창 35:18; 삼하 11:11; 왕상 17:21~22; 욥 1210; 33:18,20,22; 시 31:9; 78:50; 94:17; 아 5:6; 사 15:4; 애 2:12> <영>은 인간의 정신 <영>적인 요소를 하나님께 적용할 때에 사용되어 진다. 그리고 이 때에 있어서는 통상적으로 영과 혼을 합하여 <영혼>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중에 3분설을 옹호하는 듯한 두 구절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그러나 이 구절을 해석할 때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A. 성경을 해석할 때에 문자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성경을 해석 할 때에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통상적인 해석 방법에 일치하는 차원에서 해석해야 오류에 빠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전 5:23>과 <히 4:12>을 해석할 때에 그 두 구절의 문자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성경의 모든 내용에 일치하는 차원에서 그 구절을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B. 영과 혼이 단순히 병행적으로 언급되어졌다고 하여 성경이 그것들을 두 가지 구별된 실체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들은 말할 때에 통상 하나의 주제를 몇 가지로 반복하여 표현할 때가 있다. <마 22:37>이 그 좋은 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마 22:37>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말씀하셨을 때에 그것들을 세 개의 구별된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한 합심> 또는 <온전한 예배> <온전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강조법>인 것이다.

C. <살전 5:23>에서 사도는 단순히 설명적 보충어로서 <평강의 하나님 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진술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에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국면들이 종합되어 있으며 또한 그는 여기에서 혼과 영을 함께 나란히 언급하는데 완전히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곳에서 사람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0; 고전 5:5; 7:34; 고후 7:1; 엡 2:3; 골 2:5> 따라서 바울의 그러한 표현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차원의 표현<강조법>이었음이 분명하다. 인간의 구성을 3 가지로 구분하여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강조적 표현법인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면이 연합하여 하나의 <온전한 거룩>을 이룬다는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unity-단일체> 를 이루어야 할 존재이며 또한 인간은 육체를 비롯한 영혼 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에 의하여 <unity> 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다운 표현법인 것이다.

D. 성경이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줄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섭리적 목적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려야 한다. 물론 한 구절의 말씀 속에는 적어도 하나에서 수 천 수 만 가지의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히 4:12>은 영과 혼이 다른 독립체라는 것을 증명하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말씀은 아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선포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의도하는 바의 사이를 구별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③ 성경의 구분법

성경은 때때로 혼과 영을 구분하는 듯한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원래의 구약에는 그러한 방식이 사용되지 않았다. 신약적 의미에 있어서의 대조법인 <영혼과 신체>와 같은 표현 방식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히브리어는 유기체로서의 신체에 해당되는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간성의 두 가지 요소에 대한 구약적인 구별은 서로 차이가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자 말자 <몸과 혼> <육과 영>과 같은 대조적인 표현들을 대하게 된다. 이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헬라의 철학적 사상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70인 역<LXX>을 거쳐서 신약에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④ 인간적 구조의 통일성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성의 구조는 분명히 2분 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구조적 성질을 평행선과 같은 두 개의 이중적 요소로 간주하지 아니하고 둘이 합하여 하나의 실체<전인全人>가 된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죄를 짓는 것은 혼이 아닌 인간이며, 죽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인간<전인全人>이라는,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은 혼뿐만 아니라, 신체와 혼<전인>이라는 성경의 증거는 인간은 신체와 혼을 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인간<전인>이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구조적 요소를 말함에 있어서 2분설의 입장에서지만 <인성-Human nature>의 <단일-unity>이라는 것을 파괴하는 개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즉, 신체<body>와 무관한 영<Spirit> 또는 영<Spirit>과 무관한 신체<body>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체와 혼 사이에 있는 평행선적인 개념은 헬라 철학에서 유입된 사상이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 구조의 복합적인 성질을 인정하지만, 그 복합성이 인간의 구조를 평행적인 이중적 구조 <그리하여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체와 영 사이에 혼과 같은 매개체가 필요한 것>으로 증거 하지 아니한다. 인간 구조의 이러한 통일성은 이미 구약을 통하여 증거 된다. 즉 인간의 복합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최초의 구절인 <창 2:7>에서 증거 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신체와 생령을 구분하여 사람은 두 개의 별도적 존재로 합성되어 창조되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체와 생령이 연합하여 하나의 인간이 되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⑤ 결 론

인간은 <one person> 안에 <body와 spirit>를 갖춤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구성된 전인적<whole man> 인간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인간과 죄의 관계를 통해서도 여실히 증거 된다. 죄는 몸 따로 영혼 따로 범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범죄 함으로 <one person> 안에 존재하는 <body>와 <spirit>가 함께 범죄 하여 <whole man>의 범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도 <body>와 <spirit>가 따로 따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연합하여 전인적 구원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은 개념에 의하여 그리고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여 우리는 2분법을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
인간은 신체<body> 와 영혼 <spirit>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Body -< (Soul) (Spirit) >- GOD

인간의 영적 부분을 한데 묶어서 <soul> 또는 <spirit>라고 한다. 즉 하나의 양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적 부분이 몸과의 관계를 가지고 표현될 때에는 soul <혼> 이라고 한다. 반면에 인간의 영적 부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표현될 때에는 spirit <영>이라고 한다.

⑥ 3분법 주장자들 에 대한 질문

우리는 3분법 주장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로 한다.

<인간이 신체, 혼, 영, 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생명은 과연 어느 부분에 존재하는가? 혼에 존재하는가? 영에 존재하는가? 만약에 혼에 존재한다면 영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반면에 영에 존재한다면 혼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마도 저들은 대답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생명이 혼이나 영, 둘 중에 어느 한쪽에 존재 한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다른 한쪽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혼이나 영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생명이 혼과 영에 다함께 존재 한다고 대답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생명을 두개로 나누거나 아니면 영과 혼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 이 되기 때문이다.

7. 우주 만물의 최초 상태.

우주 만물의 최초 상태는 질서 정연하였고 매우 아름다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영역은 불순한 요소들이 전혀 없었고 대자연은 해충이나 병균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건강한 아름다움을 자랑하였으며 동물들은 인간의 친구로서 인간과 더불어 즐거운 나날을 보내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우주 만물의 최초 상태를 완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고 스스로 기뻐하셨다는 것을 통하여 선포하였다.

8. 진화론<進化論-The theory of evolution>.

하나님의 우주 만물 창조를 거부하는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우주 만물 창조를 부인하기 위하여 우주 만물의 생성<生成>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제기하였는데 그중에 가장 인정받은 것이 진화론이다.

1) 진화론의 기원.

진화론은 기원전 5세기 경부터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더,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어 왔으나 A.D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철학자, 모뻬르뛰, 뷔퐁, 독일의 이성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생물학자 라마르끄 등등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진화론을 본격적, 논리적으로 집대성한 것은 영국의 박물학자에 라스무스 다윈과 그의손자인 생물학자 챨스 다윈이다.

2) 다윈의 진화론.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은 새로운 종의 형성에 대한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지 <종> 이전의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을 배제한 <이미 생명의 기원을 전제로 한> 진화론이다. 다윈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원칙을 <생존경쟁>으로 확립하였다. 다윈은 목적론적 이론의 도움을 배제한 채 순수한 기계적 과정을 통하여 생물들이 발전하여 간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의 진화론을 <기계적 생물 진화론>이라고 부른다. 그는 <종의 기원>에서 각 <종>이 독립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견해로는 모든 생물의 분류에서 볼 수 있는 생물의 변천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생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도태>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서 발전하여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기계론적 진화 이론은 적자생존 또는 자연도태<Survival of the Fittest or Natutal Selection>라고도 불려졌다. 다윈이 주장하는 진화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물질의 기원.

현존하는 생물은 원초로부터 발생하여 수많은 세월동안 생존 경쟁, 적자생존, 자연 도태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와 같은 상태로 발전 성장하였다.

① 생존경쟁.

생물은 살아남기 위하여 여타의 다른 생물과 경쟁하게 되는데, 그 경쟁은 일반적으로 습성, 체질, 구조에 따라 가장 가까운 것 사이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다. 생물은 이러한 경쟁 속에서 얻어지는 유익을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또한 자신의 후손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서 종의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② 자연도태.

자연도태설은 다윈보다 “윌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먼저 제기한 이론이었다. 자연의 운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오랜 활동으로 인하여 언덕, 계곡, 돌, 지층, 평야, 강, 같은 것들이 발생하는 동안 필요 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며 이러한 자연도태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종>이 발생되어져 간다는 것이 자연도태설이다.

③ 적자생존.

생물은 생존경쟁의 원칙 하에서 기계적 진화를 할 수밖에 없고, 생존경쟁, 기계적 진화의 제 2부 산물인 자연도태를 거쳐서 모든 것에 적응하게 되는 <적자 생존자>들이 있게 되는바 그것들이 살아남으면서 또 다른 <종>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3) 로마 카토릭의 입장.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여 영역을 넓혀가자 로마 카토릭이 진화론을 지원하였다. 진화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섭리적 창조론을 주장할 수 있는 신학적 경륜이 없었던 로마 카토릭은 과학과 타협하여 <기독교 진화론> 또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제기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물질계의 동작의 원인이시며, 진화의 뒤에서 작용하시는 영적 및 이지적 힘이라는 것이 기독교 진화론의 요지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화가 일어나게 되며 진화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 또는 창조 활동의 양식<Modus Operandi>이라는 과학과의 타협안을 내놓은 것이다. 기독교 진화론은 초자연과 어떤 가상적 형태의 자연현상을 결합시킨 혼성 이론으로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상호 협력관계에 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과거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을 인용한 것으로서 진화론을 유신론의 틀에 두드려 맞추어 하나로 합성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하나님의 신적 작정과 섭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능력까지 거부하는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과 점진적 창조론은 모두 하나님과 진화론을 융합해보고자 하는 발상에서 나왔다. 이러한 기독교 진화론은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미발트<G. Mivart 1827-1900>베르그송<H. Bergson 1854-1941> 데. 샤르뎅<T. de Chardin 1881-1955> 등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으로 갈라진다.

(1) 하나님은 첫 물질계를 창조한 후 모든 것에게 대진화 또는 거진화를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입장.
(2) 하나님은 사람이 동물조상에게서 진화할 때에 한해서만 사람에게 영혼을 심어주시는 일에 관여하셨다는 입장.
(3) 하나님은 생물계와 생활조건에 중요한 변화가 요청될 때에 한하여 자연환경에 개입하시어 진화를 도우셨다는 입장.

4) 기독교의 입장.

개혁주의 정통 보수 기독교는 당연히 진화론을 거부한다. 두노위<Du Nouy> 쇼트<A. Short> 굴드.<S. Gould> 등등의 기독교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그것의 허구성을 다양한 방면에서 지적하였는바 그것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근원적인 반대이론.<일반적인 반대이론>

① 진화론은 물질의 기원에 대하여 지금까지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하였다.
② 진화론이 내세우는 근원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물질이었다. 그것을 다만 <원초>라고 표현한다 하여 그것이 물질에서 제외 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은 그, 원초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모두가 추측이거나 가정일 뿐이다.
③ 자연은 자신을 창조할 수 없으며 다만 반복되는 생산 원리만 있을 뿐이다
④ 클락<Clark>의 “엔트로피.<Entropy> 이론은 미분자의 속도에 의한 충돌로 점진적 균등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에너지 수준의 물리적 상태의 발전이나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와 퇴화를 말함으로 진화론과 반대된다.
⑤ 자연계의 에너지 과정은 통합이 아니라 분해이다. 현대 천문학적 견 해에서 볼 때에 물질은 고도의 원자 복합성에서 출발하여 원자 단순성을 향하여 전개해가고 있고 물질은 방사성을 가지고 핵 분열화 되어가고 있다.
⑥ 진화론은 그 자체로서 모순에 빠져있다. 생명은 오직 생명에서 비롯 되어진다는 논리와 생명은 본래 무기물에서 비롯되어진다는 논리를 함께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⑦ 진화론은 지구 안에 존재하는 각종 생명체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을 뿐 지구 이외 행성의 생물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뿐만 아니라 지구를 비롯한 행성의 존재에 대해서도 해답을 주지 않는다.

(2) 사라진 고리<Missing Link.-가상적인 각 (종)들 사이의 중간 생물>에 대한 문제.

진화론자들과 지질학자들은 년차 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생물의 연계 고리를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다윈을 비롯한 진화론자들은 이점으로 인하여 매우 고심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후예들이 사라진 고리를 찾아내어 자신들의 논리를 증명하여 줄 것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고생대를 비롯한 원시시대의 동물의 화석은 있으나, 중간적인 생물이나 동물이 없음으로 점진적 진화론이 증명되지 않고 있다. 지질학자들은 진화론을 증명하기 위하여 암석의 화석에서 중간의 고리를 찾으려 하였으나, 포유류로 알려진 32 종의 고생물은 갑자기 출현하여 살다가 그 지층기가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실만을 확인하였을 뿐 아무런 것과의 연관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3) 진화적 인간론에 대한반대.

초기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침팬지, 원숭이, 등등의 포유동물로부터 진화하여 현재와 같은 고등 동물인 인간으로 발전하였다고 하였다.
동물의 세계에서 고등 척추동물의 두뇌는 물질적 형태와 모양과 구성, 성분이 인간의 두뇌와 대체로 비슷하다. 고래, 돌고래, 코끼리는 사람보다 더 큰 뇌수를 소유하고 있으며, 침팬지, 원숭이는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두뇌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두뇌의 활동 출력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뛰어나다. 인간은 생각하고 추리하며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다. 인간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동물들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인간 정신세계의 근원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발생하였고 또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을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영>이 두뇌에 지능적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고등교육 실험실에서 인간을 생리학, 심리학, 해부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여 보았으나 <영>적인 면과. <지성>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신비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영적, 지적, 신비는 진화되고 발전되어왔다고 가정하기에는 너무도 신비스럽고 모순된 것이었다.

5) 현재의 상황.

다윈 이후의 진화론은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점점 체계화되었고 세계 각국의 교육과정에 포함되었다. 진화론은 과학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시대에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과학이 본연의 자리를 찾게 되자 진화론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현대 과학은 철저한 실험을 거친 검증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검증 없는 가설에 불과한 진화론은 이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진화론에 대한 검증이 실시되면서 진화론은 전혀 검증되지 아니한 것이며 오직 추측과 가정에 의한 가설<假說>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진화론은 점점 거부되어졌고 20세기부터는 거의 퇴출되어졌으며 대부분의 국가들은 학교교육에서 진화론을 제외하였다. 반면에 최근에 이르러 일본에서 다시 진화론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화론은 N.H.K 방송국이 제작한 것으로서 기존의 진화론에 약간의 추측과 가설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10. 우주 년대에 대한 차이.

기독교는 지구의 년대를 대략<6000-7000년>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현대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지구의 년대는 대략 <40억 년-수천억 년>이다. 때문에 기독교의 주장과 현대 과학의 주장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로 인하여 타협이나 절충의 여지가 전혀 없다. 기독교는 성경이 증거 하는 아담 이래의 인류계보를 통하여 지구의 년대를 추정하였고 현대 과학자들은 지층, 화석, 등등을 비롯한 지질학적 차원에서 지구의 년대를 추정하였다. 객관적인 입장에 의하면 기독교가 추정하는 년대나 현대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지구의 년대는 모두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양측 다 검증받지 못한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현대 과학자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주장에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던 지질학에 의한 지구 년대 측정이 오류였음이 밝혀져 전혀 믿을 수 없게 된 반면에 기독교의 주장 중에 아브라함까지의 역사는 인류학자들의 고증에 의하여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 특히, 지질학자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지질학적 연대와 성경의 역사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창조의 날들이 수천 년이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들은 시 90:4과 벧후 3:8의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와 같다>를 근거로 내세워 자신들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보증 받으려 한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1) 일반적인 변증.

(1) 현대 지질학은 사실상 미숙한 실정이며 사색적인 사상에서 완전 히 벋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 지질학은 귀납적인 연구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언제나 연역적인 추리의 결과만을 내어놓는다. “스펜서”<Spencer>가 지질학을 <비논리적 지질학>이라고 몰아세운 것이나 “헉슬리”<Huxley>가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조소한 것은 지질학의 현 주소를 정확히 말해주는 것이다.

(2) 현재까지 지질학은 지구 표면에 대한 연구에 겨우 손을 대었을 뿐이며 더구나 그것도 다양한 지역 광범위한 영역에서 행해지지 아니하고 지극히 제한된 장소에서 행해졌을 뿐이다. 때문에 저들의 연구 결과는 언제나 충분한 자료를 주지 못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같은 연구 결과가 장소에 따라 상이한 결론으로 나타남으로서 자체적인 모순에 빠지고 있다. 비록 지질학이 지구의 모든 부분에서 많은 영역을 탐구하여 어떤 일치된 결과들을 내어놓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지구의 현재 상태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도움을 줄뿐이지 지구의 과거 역사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여 주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느 민족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그들의 현재적 조직과 생활 등에서 관찰된 사실들만을 가지고 그 민족의 실체가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듯이 어떤 지역들의 현재적 상태와 변천적인 흐름들이 일치되어진다고 하여 그것만을 가지고 그 지역의 과거를 이것이다 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지질학자들은 언제인가 추측하기를 암석의 지층들은 전, 지구를 통해 동일한 순서로 되어져 있음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각 지층의 형성에 사용된 시간의 길이를 측정함으로서 지구의 연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은 저들의 연구 과정에서 스스로 부정되어졌다. 저들의 실험결과

① 바위들의 순서가 지방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으며,
② 상이한 지층의 형성에 요구된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행해진 실험 들은 크게 상이한 결과들에 도달하였고,
③ 오늘의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작용은 이전의 모든 시대의 그것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안전한 안내자들이라는 “라이엘<Lyell>의” “균일설”<均一說>은 신뢰할 수 없음이 발견되었다.

(4) 다양한 지층과 암석들의 연대를 그것들의 광물적이고 기계적인 구성에 의해 결정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였을 때 지질학자들은 화석<化石>들을 결정 요소로 삼기 시작하였다. 화석학은 실재로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또한 라이엘의 <균일>의 원리의 영향 하에 진화론의 중요한 증거들 중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단순히 어떤 화석들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추상되며 또한 만일 그러한 추측이 어떤 것에 근거되느냐가 질문이 된다면 그 대답은 그것들이 보다 오래된 바위들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순환논증”<循環論證>이다. 바위들의 연대가 그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화석들에 의해 결정되고 또한 화석들의 연대는 그것들이 발견되는 바위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화석들은 언제나 동일한 순서로 발견되지 않으며 종종 그, 순서가 바꾸어지기도 한다.

(5)지질학자들이 지구의 년대를 추정하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① 화석이 발견된 장소의 지질학적 역사.
② 화석의 모양이나 상태.
③ 화석에 화학 약품을 발라서 일어나는 화학반응.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화석이 발견된 지역의 지질학적 역사와 암화석의 모양이나 상태가 서로 일치하지 않아 오히려 수천만 년 전의 것이어야 하는 화석이 반대로 수십만 년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화석에 화학 약품을 발라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도 수천만 년 전의 것이어야 하는 화석이 반대로 수십만 년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기 때문에 전혀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성경적 변증.

<1> 하나님의 하루가 인간의 천년과 같다는 <시 90:4>과 <벧후 3:8>은 하나님과 사람의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 등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인 것이다. 예를 들면 <앉아서 천리, 서서 구만리를 본다.> 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그것이 반드시 시간에 대한 것이라면 천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 영원에서 영원 속에 사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것이다. 따라서 그, 성경 구절은 결코 저들의 주장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2>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시간은 6일도 너무 길다. 하 나님께서 6일이라는 시간을 창조에 사용하신 것은 인간의 삶을 위한 지극한 배려였다. 천년은 고사하고 6일도 사실상 너무 긴 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년 이상, 아니 엄격히 말하면 6일 이상의 시간을 창조에 사용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전혀 명분이 서지 않는다.

****
외계인과 비행접시.

지구 이외의 행성에 고도로 발달한 생명체가 있다는 추측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과 그들이 타고 온 우주선을 보았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는 외계인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는 자들도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외계인을 주제로 한 영화와 TV 드라마가 대량 제작되었다.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에는 거의 대부분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 외계인들은 인간에 비하여 지능이 매우 높다.
* 외계인들은 인간에 비하여 문명과 과학이 월등하게 발전하였다.
* 외계인들은 거의 대부분 파충류이다.
* 외계인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형할 수 있다.
* 외계인들이 타고 온 비행체는 거의 대부분 원반 형태이다.

그러나 외계인에 대한 주장들은 사실상 전혀 검증되지 않은 추측과 가설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확인된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한편 많은 기독교인들은 외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부한다. 기독교인들이 외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경에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우주 전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와 같은 주장에 반대한다.

* 성경에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성경에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이유로 외계인의 실존을 거부하는 것은 오류다. 성경은 지구에 사는 인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지 지구 이외의 행성에 존재하는 생명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우주전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창조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주전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창조되었다는 주장도 오류이다. 현대 과학이 발견한 바에 의하면 모든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배열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은하 군단 중에 어떤 것들은 지구와 무관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지구와 무관하게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 저편 어딘가에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와 같은 또 다른 우주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외계인 문제에 대하여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제13장. 영적 세계의 창조.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들은 영적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영적 존재에 대한 개념도 거의 비슷하다. 선한 영적 존재는 언제나 흰옷을 입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반면에, 악한 영적 존재는 검은 옷을 입고, 험상궂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영들의 이름은 <사자> <귀신> <신> <반신> <악마> <악령> <악신> <수호신> 등으로 불려지며 수많은 신화적 설화들과 연관되어져 있다. 천사에 대한 개념은 “파사”<페르샤>인들 사이에서 가장 발전되어졌는데 비평학자들은 이점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이 파사인들로부터 천사론을 도입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태초에서부터 천사가 나타나고 있는 성경의 증거와 일치하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오히려 파사인들의 천사론이 히브리인들의 천사론을 답습한 것으로 밝혀졌다.

1. 천사들의 창조 시기.

일부 조직신학자들은 우주 만물 창조 후에 천사들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천사는 우주 만물 이전에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천사들이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욥 38:1-7>.

2. 천사들의 창조 목적.

천사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로 창조된 것이다.

3. 천사들의 성질.

1) 영적이며 신체가 없는 실유들이다.

유대인들이나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천사들의 신체를 말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와 알미니안파와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 심지어는 루터파 까지도 천사들에게 어떤 순수하고 정교한 신체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저들이 이러한 개념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피조에게 신체가 없다는 것은 피조의 신분상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요, 둘째는 순전히 영적이고 무신체적인 개념은 개념 자체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피조에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천사들이 공간적 제한들에 예속된 상태로서 각처에서 활동하는 동안 사람들의 눈에 발견되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들은 다음의 변증을 통하여 정리되어진다.

(1) 일반적인 증거.

① 피조도 신체가 없을 수 있다. 피조라 하여 반드시 신체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모순이다. 피조도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의하여 신체 없는 영적 실유로 존재할 수 있다.

② 영적이고 무신체적인 개념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피조에게 적용 될 수 없다는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무지이다. 인간의 <영>은 무신체적이면서 형이상학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피조인 인간에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지 아니한가?

③ 천사들이 사람들에게 보여 진다 하여, 신체를 소유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은 그들이 신체로 나타나는 이유를 간과한 것이다. 천사들이 신체로 나타나는 것은 신체를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타나야할 사명적 특성 때문이다. 그들은 나타나야할 필요가 없다면 결코 신체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존재를 나타내주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신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2) 성경적인 근거.

성경은 천사들이 신체가 없는 순수한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① 천사들은 살과 뼈가 없다.....<눅 24:39>
② 천사들은 결혼하지 아니한다.....<마 22:30>
③ 천사들은 매우 제한된 공간에서도 많은 수효가 임재 할 수 있다 .....
<눅 8:30>
④ 천사들은 유형적이다.....<골 1:16; 시104:4>

* 천사들은 사람보다 월등한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결국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통제되어 있다.

2) 이성적, 도덕적, 불사적, 실유들이다.

성경은 천사들이 지성과 의지를 부여받은 인격적 실유들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1) 천사들은 지성적 실유들이다.<삼하 14:20; 마 24:36; 엡 3:10; 벧전 1:12; 벧후 2:11>
(2) 천사들은 전지하지는 않으나 지식적으로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3) 천사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도덕적인 성질들을 부여 받았다. 그들은 순종에 대 하여는 상급을 받지만 불순종에 대하여는 형벌을 받는다. 충성을 다하는 천사들은 거룩한 칭호를 받으며<마 25:31; 막 8:38; 눅 9:26; 행 10:22; 계 14:10> 불순종한 천사들은 거짓천사, 범죄한 천사들로 묘사된다.<요 8:44; 요일 8:8-10>
(4) 선한 천사들은 불사적이다.<눅 20:35-36>
(5) 천사들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군대로서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시 103:20; 골 1:16; 엡 1:21; 3:10; 히 1:14>
(6) 악한 천사들은 사탄의 군대를 구성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눅11:21; 살후 2:9; 벧전 5:8>

하나님의 우주만물 창조에 천사들이 함께 한 것은 어떤 조력이 필요하여 동원되어진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추론은 천사들이 형이상학적인 자유의지를 부여받고 창조되어진 도덕적, 인격적, 실유들이라는 것을 근거로 한다.

4. 천사들의 수와 조직.

1) 천사들의 수<數>

성경은 천사들의 수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1)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시 68:17>
(2)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53>
(3)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계 5:11>
(4)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막 5:9,15>

* 위와 같은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천사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천사들은 창세 이전에 창조되었음이 분명하다. 천사들은 결혼을 통하여 후손을 생산할 수 없으며, 자생하거나 또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하여 추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천사들의 계급.

성경에는 모든 영적 실유들의 계급이나 등급에 대한 일반적인 특별 명칭이 없다. 성경은 천사들을 증거함에 있어서 <성질적 명칭-nomen naturae>으로 부르지 아니하고 <직무적 명칭-nomen officii>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욥 1:5; 2:1; 시 29:1; 89:6>, <영들-히 1:14> <성도들-시 89:5,7; 슥 14:5; 단 8:13> <순찰자-단 4:13,17,24>들로 불리우고 있다. 반면에 성경은 천사들의 계급을 가리키는 몇 가지 특별 명칭들을 사용 한다.

(1) 그룹<בוּר󰗖-Cherubim>

그룹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낙원의 입구를 지키며<창 3:24> 속죄소<시은좌>를 응시하며<출 25:18; 시 80:1; 사 37:16; 히 9:5> 또한 하나님께서 지상에 강림하실 때에 마차를 구성한다.<삼하 22:11; 시 18:10> 에스겔서 1장과 계시록 4장에서 천사들은 다양한 형태의 살아 있는 실유들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상징적인 묘사들은 단순히 그들의 특별한 능력이나 위엄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다른 피조물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계시하며, 또한 에덴동산에서와 성막 또는 성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지상 강림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2) 스랍<םי󰘫󰙜󰙺-Seraphim>

천사들과 관련된 또 하나의 계급은 스랍인데 이사야 6장 2,6절에만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역시 상징적 차원에서 인간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지만, 임무 수행에 필요한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룹들과는 달리 하늘에 계신 왕의 보좌 주위에 종들과 같이 서 있으며, 그를 찬양하며 또한 항상 그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룹은 강력한 자들이지만 스랍은 천사들 가운데에서 고상한 존재들이다.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반면에 스랍은 화목성을 수행 한다.

(3) 정사, 능력, 보좌, 주관하는 자.

성경은 천사 세계에서 권위적 지위에 있는 천사들의 계급을 몇 가지로 구분하여 증거 한다.

① “아르카이”<ἄρχαι-정사>와 “엑수시아”<έξουσία-권세><엡 3:10; 골 2:10>
② “드로노이”<θρὀνι-보좌들><골 1:16>
③ “큐리오테토이”<κυριὀτητος-주관하는 자><엡 1:21; 골 1:16>
④ “두나미스<δύναμις-능력><엡 1:21; 벧전 3:22>

이러한 칭호들은 천사들의 여러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계급이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4) 가브리엘과 미가엘<Gabriel and Michael>

성경은 특별히 두 천사의 이름을 증거 한다. 가브리엘은<단 8:16; 9:21; 눅 1:19,26>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미가엘은<단 10:13,21; 유 9; 계 12:7>에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가브리엘 <하나님의 사람>과 미가엘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의 문자적 명칭을 근거로 하여, 가브리엘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로하고, 미가엘을 제 3위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그들의 지위가 특별한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특히 <유 9>에서 천사장이라고 불린 것으로 볼 때에 그들은 천사들의 <수장>임이 분명하다.

5. 천사들의 직무.

천사들은 본래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일을 하기 위하여 창조되어졌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천사들에게는 더욱 다양한 직무가 부여되었다. 천사들의 직무를 고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대한 직무.

(1)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욥 38:7; 시103:20; 148:2; 계511>
(2) 하나님을 보좌하며<사 6:2,>
(3)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고<단 8;16; 9:21; 눅 1:19,26>
(4)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고<창 19장>
(5)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한다<왕하 6-7장; 단 10:13,21; 계 12:7>

2) 사람에 대한 직무.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섬긴다<시 34:7; 91“11; 히1:14; 눅 16:22>

6. 악한 천사들.

1) 악한 천사의 기원.

악한 천사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어떤 학자는<딤전 5:21>을 근거로 하여 선한 천사들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로서 타락하지 않도록 견인적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상대적으로 악한 천사들의 타락의 명분을 합리화시켜 준다. 즉 악한 천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견인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음으로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는 상태로 창조되어졌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모든 천사들의 처음 상태가 선하였음을 증거 한다. <요 8:44>은 악한 천사가 본래적으로 악하게 창조된 것과 같은 느낌을 주지만, <유 6>과 <벧후 2:4>은 그들이 본래 악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중간에 타락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 중에는 천사의 타락을 두 가지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사단은 천사들 중 우두머리로서 지위에 대한 욕심과 교만함으로 타락했으나, 일반 천사들은 육신의 정욕 때문에 타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근거로 <창 6:2>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얼마 후 거부되었다. 천사들의 세계에는 성적인 삶이 없다는 것<마 22:30>과 <창 6:2>에 대한 확실한 주석들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악한 천사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정립하였다.

<천사들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그 중에 천사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야망으로 인하여 일단의 천사들을 이끌고 하나님께 반역 하였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어 천사의 영역으로부터 추방하셨고 그때부터 그들이 반역의괴수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천사들이 되었다.>

2) 사탄의 명칭.

구약성경은 악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를 히브리어로 사탄<זטשׁ-satan>이라고 명칭하며 그리스어로는 70인 역에서 <디아볼로스-διαβολσ-diasbolo>로 번역된다. 구약 성경에서 <사탄>은 26회 나타난다. 신약에서는 사탄을 그리스어로 <사타나스-σατανασ-satanas>로 음역하며 사타나스 36회, 디아스볼로 36회로 나타나는데 신약에서의 디아스볼로는 마귀를 의미한다. 이밖에 성경은 사탄에 대하여 다양한 명칭으로 표현하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 사단-<대적자-욥1:6> ז
* 아폴루온-<파괴자-막 4:15>ו
* 디아볼로스-<고소자-계 12:10>
* 죄의 창시자-<창 3:1,4; 요 8:44; 고후 11:3>
* 시험하는 자-<마 4:1>
* 악한 자-<마13:19>
* 파괴자-<막4:15>
* 거역하게 하는 자-<욥2:5;마4:9-10>
* 바알세불-<마10:25,>
* 벨리알-<고후6:15>
* 아바돈-<히>아블루온<그>-<계계9:11>
* 인류의 적-<벧전 5:8; 요일 3:8; 계 12:7-17].
* 거짓의 아비-<요 8:44>
* 유혹자-<요 13:2; 고후 11:3,14,15; 엡 6:11>
* 육체에 질병을 가져오는 자-<욥 1:11-22; 2:4-7; 눅 13:16>
* 거짓을 행케 하는 자-<요 8:44; 행 5:37>
* 처음부터 범죄 한 자-<요일 3:8>
* 처음부터 살인 한 자-<요 8:44; 요일 3:12>
* 이 세상의 임금-<요 14:30>
* 이 세상의 신-<고후 4:4>
*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 귀신의 왕-<마 9:34; 12:24; 막 3:22; 눅 11:15>
* 적그리스도-<요일 2:18,22; 4:3>
* 기타 -<이리, 우는 사자, 새, 용, 뱀>

3) 악한 천사들의 활동.

악한 천사들도 선한 천사와 마찬가지로 초인간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무차별 공격한다.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이다. 성경은사탄의활동이마지막심판이있기까지계속된다고증거한다.우리는이러하신하나님의섭리를충분히이해하기어렵다. 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신적, 작정에 의한 것으로서 필연적인 이유에 의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믿을 뿐이다.

4) 사탄의 최후.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가장 먼저 심판받고 자신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 보상을 받게 된다.

5) 사탄에 대한 오류.

기독교 역사에 사탄에 대한 오류들이 수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들은 모두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여 정죄되고 퇴출되었다. 근래에 이르러 성락 교회의 김기동과 예루살렘 교회의 이초석 등등이 귀신론을 발전시켜 사탄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으며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일부 목회자들이 사탄에 대하여 전혀 근거없는 주장들을 하고 있는 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사탄의 명칭에 대한 오류.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이름을 <루시퍼-Lucifer>라고 알고 있다. 사탄의 이름이 루시퍼라고 알려진 것은 3세기의 북아프리카 신학자 터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A.D.160-215: A.D.170-220>와 제64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대제<Gregorius.I-theGreat.-A.D.590-604.재위>가 <사 14:12>이 <눅 10:18>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사 14:12>의 아침의 아들 <계명성-금성-새벽별-샛별>의 루시퍼<Lucifer>를 사탄이라고 주장한 것 때문이었다. 터툴리아누스가 루시퍼를 사탄이라고 주장하자 당시에 신학자들<사 14:12>이 <눅 10:18>을 대조하여 면밀히 검토하였는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사 14:12>의 계명성은 교만한 바벨론 왕을 지칭하는 것이며 따라서 <눅 10:18>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터툴리아누스의 루시퍼 설은 한때 크게 전해지다가 사라졌는데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후에 제64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다시 루시퍼 설을 주장하여 부활되었다. 이때에도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사 14:12>의 계명성은 교만한 바벨론 왕을 지칭하는 것이며 따라서 <눅 10:18>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루시퍼 사탄 설은 다시 퇴거 당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에 언제부터인가 루시퍼 사탄설이 다시 등장하였다.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 루시퍼 사탄 설은 아예 3류 소설로 발전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루시퍼의 본래 이름은 루시엘이었는데 그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하늘로부터 추방당하면서. 루시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탄의 본래 지위가 천사장이었다는 것에서 연유된 듯 하다. 루시퍼 사탄 설 주장자들은 사탄이 본래 천사장이었다는 점을 적용하여 사탄의 이름을 <가브리엘> <미가엘> 등등의 천사장 이름과 같은 <루시엘>로 만들어 낸 것이다.

(2) 사탄의 권세에 대한 오류.

사탄의 권세를 과대평가하는 자들은 사탄의 공중권세<엡2:2>를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의 나라<천상-天上>와 현세<지구-地球-땅> 사이의 우주적 공간에 대한 권세<공중 권세>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저들은 사탄의 권세가 하나님의 나라와 현세 사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막강한 권세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엡2:2>이 말하는 사탄의 공중 권세는 그러한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한에 의한 <나약한 권세> <허망한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사탄의 권세는 그것이 비록 때로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때도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유익을 위하여만 허용되는 지극히 별 볼일 없는 권세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사탄의 역사를 허용하시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유익으로 결론될 뿐 그들에게 손해를 주지 못한다. 이와 같은 원리는 <욥기서>를 통하여 증명된다. 욥기서를 보면 사탄의 역사는 하나님의 허용 범위를 절대 초월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탄의 역사는 결국 욥에게 영광의 결론을 이루어 준다. 기독교의 원리를 모르는 자들은 욥기서를 성도들에 대한 고난의 역사로 본다. 특히 욥의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멸절했다는 점을 심히 애석하게 생각하여 욥과 그의 자녀들에게 애도를 보낸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는 욥과 그의 자녀 모두에게 영광을 주는 것이었다. 욥의 자녀들은 더 이상 현세에서의 고난적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입국하였으니 곧 영광이요 욥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보냈으니 영광이며 사탄에게까지 신앙을 인정받고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결과를 드렸으니 영광인 것이다. 그리고 욥은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옛날보다 더욱 부유한 상황이 되었으니 또한 영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사탄의 권세란 막강한 우주적 공중권세<空中權勢>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한에 의한 <나약한 권세> <허망한 권세>의 공중권세<空中權勢>로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유익을 위하여만 허용되는 지극히 별 볼일 없는 권세인 것이다. 반면에 사탄의 공중권세를 우주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 <우주적 섭리> <우주적 권세>를 제한하고 무시하는 망령된 악행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은 <전 우주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3) 사탄의 활동에 대한 오류.

사탄의 활동을 과대평가하는 자들은 현세에서 일어나는 각종 불미스러운 일들을 모두 사탄의 역사로 주장한다. 성락교회의 김기동과 예루살렘 교회의 이초석 등등이 주장하는 귀신론이 바로 그것이다. 사탄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고 반대하는 것이지만 이미 앞장에서 정리한바 있듯이 하나님의 제한에 묶여 있다. 인류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불미스러운 일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들의 실수, 인간들의 욕심, 인간들의 부패성, 등등에 의하여 일어난다. 물론 그러한 역사에 사단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사탄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사탄의 활동은 특히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게 매우 제한적이며 나약하고 유치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을 때에는 사탄이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그 반대의 삶 속에 있을 때에 사탄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결국은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유익을 도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허용 하에 있다.

(4) 수호천사에 대한 오류.

성락교회의 김기동과 예루살렘 교회의 이초석 등등에 의하여 수호천사 교리가 등장하였다. 수호천사 교리는 천사들이 성도 개개인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호천사 교리는 김기동, 이초석에 의하여 처음 세워진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시대와 중세 기독교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신봉되었던 교리이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성도 개개인에게 수호천사를 지정해주어 그 천사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수호천사 교리는 성령의 보호하심을 무효화 시킨다는 차원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거부되어 점차 사라졌다. 천사들이 수호천사로서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와 같은 주장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충돌된다.

(5) 귀신의 생성에 대한 오류.

성락교회의 김기동과 예루살렘 교회의 이초석 등등은 수호천사들이 잘못되어 귀신이 된다는 것과 악한 자들이 죽은 후에 귀신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17세기의 스웨덴 과학자로서 신비주의 신앙자였던 <스웨덴벜>이 제기하였던 천사 교리를 각색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당시에 <스웨덴벜>이 그러한 주장을 하였을 때에 신학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스웨덴벜>을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그의 주장은 기독교로부터 퇴출당하였다. 김기동과 이초석은 수호천사들이 성도들을 잘못 보호하여 그들이 범죄 하게 되면 수호천사가 귀신이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악한 자들 중에 많은 자들이 죽은 후에 귀신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3류 무속종교에서나 주장될 수 있는 저급한 것으로서 기독교와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귀신은 사단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한 천사들이 변한 존재들이다.

(6) 사탄과의 전쟁에 대한 오류.

성락교회의 김기동과 예루살렘 교회의 이초석은 사탄의 활동을 매우 대단한 것으로 과장하여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과의 싸움을 위하여 강림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절대적 사명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에 대한 모욕이다. 저들은 하나님을 사단과 전쟁하는 3류 존재로 비하시켰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을 사단과의 전쟁으로 비하시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독교의 사명을 사단과의 전투로 비하시켰다. 사단 따위와 전쟁을 할 정도로 허약하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3류 신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사단과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하여 성육신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이나 메시야가 될 자격이 없고 3류 신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하에 사단과 전쟁하는 기독교라면 그 역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3류 무속 종교 중에 하나이다.

6) 기독교와 사탄의 관계.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훼방하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공격, 미혹, 유혹, 하는 역사를 끊임없이 전개한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에 사탄의 활동 역사는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사탄의 관계는 사탄이 아담을 공격한 직후부터 기독교의 일방적인 승리로 선포되어졌고 따라서 기독교는 사탄과 전쟁을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이러한 선포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계속하여 공격할 것이지만 사탄의 공격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하여 무참하게 패배하리라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게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부여하시어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자녀와 종들을 보호하셨으며 아울러 그들의 사명을 승리로 인도 하시는 바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예수께서 그 열두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이와 같이 기독교와 사탄의 관계는 처음부터 기독교의 승리로 결론되어져 있으며 따라서 사단의 위력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결코 이길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사단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사단이 유혹하고 미혹하고 공격할 때에 오히려 그를 적당히 어르고 구슬리고 데리고 놀면서 즐기다가 싫증나면 야단쳐서 쫓아 보내는 것이다.

7) 사탄의 실체.

사탄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상 매우 미련하고 비천한 약졸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이겨 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오히려 항상 하나님의 섭리에 일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에 사용되어지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된다. 사탄은 아담을 유혹하여 인류 역사에 죄를 도입시키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離間>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가 되는 결과를 이루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완성>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유혹, 미혹, 공격하여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훼방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강하고 담대한 <빛과 소금의 전사>가 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멋지고 아름다운 최고의 인격체들이다. 하나님께 권능을 받은 최고의 능력자들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전진하는 하나님 섭리 역사의 주역<主役>들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사명적 차원에서 사탄과 같은 멍청한 자와 전투를 할 만큼 한가하지 않으며 신분적 차원에서 사탄과 같은 비적<卑賊>과 싸움을 할 만큼 비천한 신분이 아니다. 또한 능력적 차원에서 사탄과 같은 약졸<弱卒>과 시비할 만큼 연약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사탄이 범접할 때에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을 다스리고 꾸짖고 책망해야 한다.

한편 사단의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진리 안에 거할 때에는 사단의 위력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비 진리 안에 거하게 될 때에는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 의하여 패배할 때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 의하여 패배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는>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살아야 한다.

제14장. 인간의 범죄.

1. 인간에게 금지된 것.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최상, 최대, 최고의 형이상학적 특혜를 하사하신 반면에 인간에게 두 가지를 금지하셨다. 그것은 욕심과 불순종이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위를 욕심내어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을 절대 금지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천사들이 하나님의 지위를 욕심내어 하나님께 도전하였던 전례를 근거로 한 것이지만 인간이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저항할 것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심에 의하여 인간이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저항할 것을 이미 아시었던 것이다.

1) 선악과에 대한 의혹과 불만.

사람들은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과 불만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심에 의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미 천사들이 하나님의 지위를 욕심내어 하나님께 도전하였던 전례가 있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그와 같은 조치를 내리셨는가?>

이와 같은 의문과 불만에 의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에덴동산에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고의적인 조치라는 의견이 주장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이 범죄하게 하시어 인간이 하나님께 영원히 굴복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거부된다.

(1) 하나님의 주권적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주권주로서 그러한 조치 없이도 인간을 임의로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명령 불 복종자를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적 주권으로 다스리실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다.

(2) 하나님의 속성적 차원에서.

그러한 방법은 매우 치사하고 졸렬한 것으로서 인간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과 달라서 그러한 방법으로 인간을 굴복시키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명령 불복종자들을 공의로 다스리시며 또한 자비와 인격으로 다스리신다. 이와 같은 진리는 지금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인격을 통하여 증명된다.

(3)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불완전한 방법으로 섭리하시어 피조들로부터의 혹과 불만과 항의를 받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완전무결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섭리 역사를 진행하신다.

2) 선악과를 세우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에덴동산에 세우신 것에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특별 섭리 때문이었다.

(1) 하나님의 주권적 차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관계론적 차원에서 어떤 구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만약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역을 틀림없이 침노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의 경우와 같은 공의적 조치를 내리셔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선악과라는 법과 질서를 세우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역을 욕심내지 않게 하셨다.

(2) 하나님의 속성적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욕심내지 않는 존재로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전혀 무관한자로 창조될 수밖에 없다. 즉, <영혼, 인격,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기계적 존재로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다만 절대 복종하는 기계적 존재는 영적, 인격적 존재일 수 없으며 지혜, 지능, 재능, 사고, 취미, 취향, 적성, 기호, 등등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존재에게는 다만 명령에 따른 복종만 있을 뿐이며 따라서 창의, 개발, 발전, 등등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존재는 하나님의 섭리적 동반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 등등의 예우를 받을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의 속성은 섭리적 동반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을 인격적으로 예우하시면서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이루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적 존재로 창조하시지 아니하시고 <영혼, 인격, 자유의지>를 소유한 고등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한편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된 이상 인간은 그 자유의지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지위를 욕심내게 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선악과라는 법과 질서를 세우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역을 욕심내지 않게 하셨다. 어떤 자들은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자유의지를 소유하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창조는 두 가지를 전제해야 한다. 하나는 결국 하나님을 창조하는 것이다. 완전한 자유의지와 완전한 순종적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조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은 무로부터 자존하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자유의지 없는 인간에게는 영혼과 인격이 부여될 수 없다. <영혼, 인격, 자유의지>는 상호 밀접한 관계 하에 서로가 서로를 절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 인격,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에게는 지혜, 지능, 재능, 사고, 취미, 취향, 적성, 기호, 창의, 개발, 발전, 등등이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존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의>를 세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혼, 인격,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 반면에 인간은 <영혼, 인격, 자유의지>로 인하여 사단이 이미 범하였던 차원의 범죄를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세우시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최소한 의죄를 범하게 하는 은혜를 베푸셨다. 선악과는 인간의 편에서는 그것을 먹을 때에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취득한다는 의미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선악과 먹는 것을 엄금하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한다는 의미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단과 같이 하나님의 지위와 권위를 욕심내는 중대한 범죄를 범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하셨던 것이다. 법적 차원에서 정립할 때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에 피조가 불순종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의 권위와 지위를 욕심내는 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죄이다. 그러나 가엾은 사단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갖게 된다고 유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함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되게 하셨다. 아담이 죄를 범했다는 것만 문제 삼으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죄를 조성하는 고의적 섭리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이 범할 수 있는 더욱 큰 죄를 작은 죄로 낮추어 주셨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적 섭리를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의적 섭리를 주장한다면 그는 바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은혜를 하사하시지 아니하시고 다만 인간의 범죄를 법대로 처리하시는 섭리를 진행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행사 하실 수 있는 몇 가지 조치들을 정리한다.

① 하나님께서는 범죄자들을 공의로 다스리시어 멸절하시고 다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인간은 같은 상황 하에서 같은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께서는 범죄자들을 공의<사망>로 다스리시면서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섭리를 진행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인간이 같은 상황 하에서 같은 죄를 범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반복될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의 절대적 징계<사망>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진정과 신령의 순종> <진정과 신령의 감사> <진정과 신령의 예배> <진정과 신령의 영광>을 받으실 수 없다.

③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 선악과를 세우실수 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인간이 다양한 상황 하에 서다양한 죄를 범하게 됨으로 <원죄>의 유형이 매우 다양하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징계도 일률적일 수 없다.

****
결국 선악과는 인간의 죄를 가장 작은 것으로 낮추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적 섭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섭리에 당연히 감사 감읍해야 한다.

2. 거부되어진 하나님의 은혜.

1) 거부의 주체.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국 인간에 의해 거부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최초로 거부한 것은 하와였고 아담의 거부는 그 다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거부의 주체는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인 아담을 최초로 창조하사 인류의 대표자로 세우셨고<창2:7> 아담에게 피조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전권을 위임하셨으며<창2:19-20> 선악과에 대한 금지 명령도 아담에게 주셨기 때문이다<창2:16-17>. 따라서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그리고 은혜 거부의 주체로서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다.

2) 거부의 원인.

(1) 의심과 불만.

하와의 은혜 거부는 비록 사단의 유혹에 의한 것이었지만 고의적인 것이었다. 하와는 이미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지한 것에 대한 의혹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창2:3>

(2) 욕심.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직접적인 원인은 욕심이었다. 하와는 사단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고 유혹했을 때 하나님과 같은 지위, 권세, 권위, 영광, 등등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명령에 불순종했던 것이다.

(3) 방심.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배경은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아담이 하와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분별없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먹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아담은 마땅히 하와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살펴보고 분별한 후에 먹었어야 한다.
다른 또 하나의 추정은 아담이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알고도 하와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먹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아담은 마땅히 하와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먹지 않음은 물론이요 하와의 행위를 책망하고 하나님께 보고하며 회개함으로서 그 사건을 지혜롭게 해결했어야 한다.

****
아담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받아먹은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교훈을 준다. 아담은 인류의 시조이며 또한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크고 작은 대소사에 관계없이 매사에 주의하고 조심해야 한다. 지도자는 특히 지위, 권세, 권위, 영광, 등등에 대한 욕심과 유혹을 초월해야 하며 동역자들이 그와 같은 일들로 범법행위를 했을 때에 그들을 책망하는 한편 지도자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보고하며 회개함으로서 그 사건을 지혜롭게 해결해야 한다.

3. 거부의 결과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불순종함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에게 각각 문제가 발생하였다.

1) 하나님께 발생한 문제.

(1)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 손상.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금지하시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면 죽음으로 다스리신다고 선포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의한 선포로서 그것을 위반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권위를 훼손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권위가 실제로 훼손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실제로 손상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권위와 영광은 완전무결한 것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피조들에 의하여 훼손되거나 손상될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와 권위와 영광이 훼손되고 손상되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 인간에 의하여 거부되었다는 것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다.

(2) 하나님 섭리의 차질.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차질이 발생하였다. 하나님 섭리의 차질 발생은 두 가지로서 법적 행정적인 것과 상태적인 것이었다.

① 법적 행정적 차질.

인간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받음으로 하나님께 부여받은 각종 특권과 사명을 몰수당하였다. 따라서 이제 그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비롯한 모든 것을 완전히 잃었다.

② 상태적 차질.

죄로 오염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된 영적 기능을 완전히 몰수당하였고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도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러한 상태하의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하나님을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2) 인간에게 발생한 문제.

(1) 인간의 죄 발생.

① 원죄<原罪>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죄가 도입되었다. 인간에게 도입된 최초의 죄를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원죄<原罪>라고 한다. 따라서 원죄는 인류에게 존재하는 죄의 근원과 기본이다. 인류는 아담의 원죄에 오염되어 영원히 죄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불순종한 것에 크게 진노하시어 그들의 범죄를 인류에게 영원히 대물림시켰다고 불만 불평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죄를 인류에게 영원히 대물림시킨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섭리에 의하여 인류 전체가 조상의 죄에 오염된 것이다. 즉 인류는 오직 아담으로부터 유래된 <단일성>을 갖기 때문에 아담의 죄 성이 모든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오염>된 것이다.

② 일상죄<日常罪>

일상죄<日常罪>는 인간들의 일상생활에 수시로 발생하는 모든 죄들을 말한다. 일상죄는 원죄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성을 그대로 전가 받고 오염되어 현세를 사는 동안 각종 범죄와 불법을 행하게 된다. 죄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에 크게 다르다. 비 기독교인들은 범죄가 실행된 것만을 죄로 인정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마음속에 스쳐가는 죄악적 의식 자체를 죄로 인정한다.<마5:28>

5.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징계.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금지하실 때에 그것을 먹게 되면 죽게 된다고 경고하셨다<창2:16-17>. 하나님은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법으로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필연성을 갖는다. 때문에 하나님은 경고하신대로 법을 집행하셔야 했다. 하나님의 징계는 피조세계 전체에 집행되었다. 그것은 아담이 인류의 대표일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 전체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으므로 그들만 죄인이 되게 하고 그리하여 그들만 징계하지 어찌하여 모든 피조세계를 정죄하고 징계하는가? 라고 불만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비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기 때문에 그들만 징계한다면 그 후의 인간들은 과연 범죄 하지 않겠는가? 이미 앞장에서 정리한 바 있듯이 인간들은 계속하여 범죄 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하여 징계해야 할 것이다. 이때에 인간의 범죄는 구구각색일 것이며 그에 대한 징계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를 모든 인간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시어 인간들의 보다 큰 범죄를 막아주셨고 그에 대한 일률적인 징계를 통하여 공평한 공의를 집행하신 것이다.

1) 자연에 대한 징계.

하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자연계에 대하여 징계하셨는데 특히 인간의 삶의 터전인 지구 전체에 대한 징계를 하셨다. 그리하여 지구는 본래 창조되었을 때보다 약간 나빠진 상태가 되었으며 지구에 존재하는 각종 동식물들도 약간 나쁜 상태가 되었다.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최소한의 징계이다. 그것은 다만 <가시덤불과 엉겅퀴-창3:18> 정도의 가벼운 징계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지구가 매우 황폐해졌고 동물들도 인간을 적대하고 공격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와 같은 증거가 없으며 하나님의 속성상 그러한 징계가 내려질 수도 없다.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하나님의 피조 세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한 보복으로 그것들을 황폐케 하시거나 그들에게 악함과 사나움의 징계를 하실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자연에게 내리신 징계인 <가시덤불과 엉겅퀴-창3:18>는 사실상 자연에 대한 징계라기보다는 아담이 땀 흘리고 수고하여 의식주를 해결하게 하신 것으로서 곧 아담에 대한 징계였다. 자연이 황폐해지고 동물들이 사나와진 것은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들의 자연 관리 부족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징계는 비록 <가시덤불과 엉겅퀴-창3:18> 정도의 가벼운 징계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징계 받기 이전의 자연은 본래 참으로 아름답고 순전했었기 때문이다.

2) 인간에 대한 징계.

(1) 인간의 육적인 면에 대한 징계.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인간의 육체는 본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크게 격하되었으며 육체적인 기능도 전체적으로 크게 저하되어 늙고 병들며 종래에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비극적 운명이 되었다.

(2) 인간의 삶적인 면에 대한 징계.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인간의 삶은 매우 고단하게 되었다. 남자는 직업을 가지고 일해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게 된 반면에 자연<세상>은 인간의 노력에 저항하여 인간의 삶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단하게 하였다. 특히 여자는 남자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고 해산의 질고를 겪게 되었다.

(3) 인간의 영적인 면에 대한 징계.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인간의 영적인 면이 크게 손상을 입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 형이상학적이었던 지혜, 지식, 지능, 사고, 인격 등등이 크게 손상을 입어 현저하게 저하된 반면에 시기, 질투, 중상, 모략, 욕심, 분쟁, 등등의 비 진리적인 것들이 인간의 심령에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물이었던 인격과 자유의지가 크게 손상되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4)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징계.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징계 중 가장 크고 중대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영역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사하셨던 <영>의 영역중 하나님과 관계된 부분을 몰수하셨고 사명과 지위를 몰수하셨으며 인간을 교회<에덴동산>으로부터 축출하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완벽하게 단절하시어 격리하셨다<창3:24>.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영적으로 무능한 상태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고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인간에게는 현세적 삶을 사는 동안에 필요한 정도의 영적 기능과 인격과 자유의지만 남았을 뿐 하나님과 관계된 영적 기능은 완전히 몰수되었다.

(5) 하나님의 자비.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사단과 같은 반역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도록 조처하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는 창조주 하나님<절대주 하나님>과 피조의 관계에서 정립하면 피조가 감히 창조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순종한 것으로서 최고, 최상, 최대의 큰 죄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대 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담의 범죄를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로 다스리시는 한편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통하여 구제하시는 섭리를 세우셨다.

제15장. 인간의 범죄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계획.

1.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회복.

훼손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은 필연적으로 회복되어야 했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손상된 공의를 회복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손상된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범죄한 자의 속죄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죽어야 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범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대표로 속죄하게 하여 하나님의 손상된 공의를 회복하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

2. 신적 작정의 시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처음부터 인간의 불순종 범죄를 알고 계셨다. 때문에 인간의 불순종 범죄에 대한 후속 조치를 강구하셨는데 이러한 신적 작정은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창세전에 완성된 것이다.

3. 성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성자 하나님의 자원.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 뜻을 아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로 자원하셨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의 자원을 기뻐하시었다. 성경은 그와 같은 두 분 하나님의 뜻을 <평화의 의논>이라고 선포한다.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6:13>

이 성경구절은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서 <여호와의 전-하나님의 나라> <영광-메시야의 영광>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만왕의 왕으로서의 통치> <제사장-영원한 대제사장>에 대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평화의 의논-무언의 의논>을 선포한다.

그러나 평화의 의논을 오해하여 인간들의 의논과 같은 차원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두 분 하나님의 의논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의한 무언의 의논이다. 즉, 성자 하나님은 무언으로 대속죄제의 제물<예수>이 되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그리스도>가 되실 것을 결의하셨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인간에게 발생하였다면 그것을 학문적으로 정리할 때에 성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청원>하신 것으로 정리하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신 것으로 정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피차에 <청원> <허락> 등등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문구가 적용될 수 없다.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는 <무언의 결의>라는 문구를 적용하고 성부 하나님께는 <무언의 기뻐하심>이라는 문구를 적용하는 것이다.

4. 성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야 하는 필연성.

1) 제물<예수>의 필요성

손상된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제물,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오직 성자 하나님 외에는 없었다.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제사는 신성해야 하므로 다음과 같은 신성한 제물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1)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제물.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은 반드시 인간이어야 했다. 인간이 범죄 하였음으로 인간이 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의 동물제사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면서도 진정한 속죄의 제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동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할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 무죄한 제물.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은 전혀 무죄한 제물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 제사는 신성해야 함으로 제물도 신성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는 인류 전체를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무죄한 제물<인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무죄한 제물<인간>이 전혀 없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3) 무흠한 제물.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은 전혀 무흠한 제물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 제사는 신성해야 함으로 제물도 신성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는 인류 전체를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무흠한 제물 <신성한 인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무흠한 제물<신성한 인간>이 전혀 없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서 <완전한 인간, 무죄한 제물, 무흠한 제물-예수>로 오셔야 했다.

2) 메시야<그리스도>의 필요성.

손상된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속죄의 제사,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사는 일반적 제사하고는 다르다. 그 제사는 다만 제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제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의의<意義>를 이루어야 하는 제사였다.

(1) 하나님의 영광 증거.

하나님의 영광을 실제로 증거하는 방법은 <죽음의 제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제사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증명해야 했다. 따라서 속죄 제사의 제물은 죽음의 제사를 드리면서 또한 반드시 다시 살아나고 또한 영원히 살아 존재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야 했다.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과 인간 사이 중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고 연결시키는 중보 사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인간은 신분, 능력, 상태, 등등의 전반적 영역에서 <영원한 존재, 완전한 존재, 무흠한 존재, 무죄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시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은 전혀 없었다.

(3) 사망 권세로부터의 승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제사는 죽음으로부터의 사면을 위한 제사이기 때문에 사망 권세로부터의 승리<부활>을 전제로 하는 제사이다. 그러한 제사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제사이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은 전혀 없었다.

5. 비하의 신분.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속죄의 제물로 자원하셨기 때문에 그는 종의 신분으로 강림하셔야 했다. 성경은 성자 하나님의 강림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조직신학은 그와 같은 성자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 강림을 <비하의 신분>으로 강림하심이라고 정립한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 강림은 신분적으로만 종의 신분<비하의 신분>이 아니라 실제적인 <비하의 신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비하의 신분>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증명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완전하고 철저한 삶을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고<마4:1-10> 청렴결백과 근검절약의 삶을 살았으며<마8:20> 성전세<마17:24-27>와 국세<마22:15-21>를 납부함으로서 아무에게도 비난 받거나 문책 당하지 않는 모범적 삶을 살았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종의 위치를 지켰다. 그는 자신이 곧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선포하면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시작되고 진행되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선포하였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통을 두려워하였으나 결국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6.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문제들을 완전하게 해결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는 아담 범죄이전의 모든 상태로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1) 하나님에 대한 회복.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명령이 거부되는 결과가 발생되었다. 이때에 거부되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명령의 거부-공의의 상실-무너진 주권>으로 연계되어진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된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에 불과한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주권주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인 아담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을 받으면 되지만 하나님의 <거부된 명령-상실된 공의-무너진 주권>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나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인간이 그에 대한 형벌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그가 받은 형벌로 무너진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 발생한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서 해결하셔야 했다. 이것이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를 통하여 <다 이루신-요19:30> 문제의 해결이었다.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 대속죄제를 치루시었을 때 그 대속죄제의 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그리스도<로고스>의 회복이었다. 이때에 예수의 죽음은 육체적<신체적> 죽음으로서 <형벌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회복은 <로고스의 회복-하나님 공의 회복-하나님 주권회복>이었다.

(1) 하나님 영광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제>를 통하여 손상된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었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다시 이루어졌다. 성경은 이 회복을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선포한다.-마3:17; 17:5, 막1:11, 눅3:22, 벧후1:17>

(2) 하나님 섭리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가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제>를 통하여 진노를 거두시었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시어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하신 것이다.

2) 인간에 대한 회복.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류에게 매우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인류에게 발생한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서 첫째는 매우 아름다운 사회<하나님의 나라-천국-에덴교회>가 종료된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며, 셋째는 인류 역사에 타락, 범죄, 무질서, 등등이 도입된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되었다<엡2:4>. 그러나 그 회복은 원래 상태와 같은 회복이 아니라 제한된 회복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회복이었다.

(2) 지위와 사명의 회복.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하여 몰수하셨던 인간의 지위와 사명을 회복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지위를 회복하였으며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사명을 회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새로운 권능과 은사를 부여하시어 지혜, 지식, 지능, 사고, 인격 등등을 회복하셨다.

3) 영원히 함께 하심.

하나님의 회복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완전한 회복이었으나 상태적으로는 완전한 회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태적인 완전회복이 허락되었을 때 인간은 다시 재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상태적 완전 회복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게 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함께하심 속에서 부여된 사명을 진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증명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함께 하시어 그들을 민족별로 분산시키시어 대자연을 정복하는 가운데 세계 전역에 충만하게 하셨고 그들의 역사에 함께하시어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예술, 체육, 등등의 발전적 역사를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기독교를 통하여 본래의 사명을 진행하게 하셨다.

7. 성자 하나님의 속죄를 통한 인류 구원.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어 손상된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셨을 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손상된 공의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하여 인류의 구원이 2차적인 것이라거나 또는 부차적인 것으로 정립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죄제의 대전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는 <하나님의 공의 회복>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이라는 동일한 명제가 신적 작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 회복>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은 다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중요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8. 회복에 대한 법적 행정적 근거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순종 범죄를 영원히 용서하시고 그들의 모든 것을 회복하신 법적, 행정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이다. 로마 카토릭과 신학적 경륜이 부족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인간의 불순종 범죄에 대해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류 구속사와 교회적 회복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모든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이루어진 때부터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하나님의 신적 작정 하에 예정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실제로 이루어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유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작정 때부터 유효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면에서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적이며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에 의하여 신적 작정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이 곧 현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구약시대 기독교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하여 모든 것을 적용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 이후의 신약시대 기독교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이루어진 것을 근거로 하여 모든 것을 적용받는다. 즉 기독교는 구약시대 기독교와 신약시대 기독교가 다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법적, 행정적, 근거로 하여 모든 것을 적용받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원리로 구약시대 기독교와 신약시대 기독교의 머리<수장>이며 영원한 만왕의 왕으로서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시다.

제16장. 하나님의 인류구원.

1. 인류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선택>.

1) 예정<선택>의시기.

하나님께서 구원자들을 선택한 시기는 인간이 범죄 한 이후가 아니라 창세 전이다. 하나님의 예정<선택>은 하나님의 섭리 전체에 대한 신적 작정이 이루어졌을 때에 함께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시작에서 종료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 섭리 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따라서 모든 것에 대한 섭리를 계획하고 준비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문제도 모두 알고 계셨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작정<예정-선택>도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 놓으셨다.<마13:35> <마25;34> <눅11:50> <요17:24> <엡1:4> <벧전1:20>

2) 예정<선택>의 범위.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구원 계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 중에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신적 작정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지 않고 그중에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러한 하나님 작정을 <하나님의 예정 또는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며 예정된 자 또는 선택된 자들을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3) 예정<선택>의 조건.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에 몇몇을 <구원받은 자><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의 어떤 조건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적 주권에 의한 것이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롬9:11-13><롬11;6><엡1:4-12>.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신앙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인도 보호하심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선포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믿음조차도 우리에게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하사 하신 것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엡2:8>. 기독교 신학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예정 또는 선택>을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고 정립한다.

****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확실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야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성경적 진리를 전혀 모르는 초신자들에게 처음부터 <당신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였다>고 가르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과연 누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 되었는지를 구별할 수 없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니 교회로 오시오 >라는 전도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예수 믿고 천국가자>라는 보편적인 전도방법은 일반적인 전도의 방법으로는 타당 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의 교육이나 설교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은 일단 하나님의 자녀라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교육과 설교가 실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언제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과 의무와 사명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교육과 설교가 실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대한 반대.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오랫동안 많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어 왔으나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신학자는 16세기 기독교 개혁의 선구자였던 프랑스 신학자 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었다. 당시의 모든 교회들은 칼빈의 <하나님 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칼빈이 사망한 후 16세기 네델란드의 신학자였던<알미니우스-James Arminus-1560-1609>에 의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교리가 반대되었다. 알미니우스는 인본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반대하면서 5개 항목으로 구성된 인본주의적 예정론을 제기하였다. 알미니우스의 인본주의적 예정론은 당시에 종교회의 <돌트회의>를 통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인본주의자, 자유주의자, 등등에 의하여 더욱 오류 되었으며 현대 기독교에서도 침례교를 비롯한 많은 교파들이 여전히 추종하고 있다.

(1)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예지 예정론>

알미니우스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으나 구원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부하느냐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자들을 미리 아심<예지하심>으로 그들에 대한 구원을 결정하셨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을 <예지 예정론>이라고 한다.

(2) 예지 예정론의 중심 내용.

① 자유의지 또는 인간의 능력.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여 오염되었지만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무능하지 않다. 인간은 여전히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인의 선물이며 구원에 대한 인간의 공헌이다.

② 조건적 선택.

구원에 대한 선택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구원하시기로 예정<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가 응답할 것을 미리 예견하신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 것이다.

③ 보편적인 구속, 또는 일반적인 속죄.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어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구원을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나 모든 사람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구원받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받아 드리는 자들에게만 효력이 있다.

④ 성령은 충분히 저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부르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로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다.

⑤ 은혜로부터의 탈락.

믿고 구원을 받아들인 자들이라고 해서 구원이 반드시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도 자신의 구원을 지키는 것에 실패하여 중도 탈락하는 자들이 있다. <현대 알미니안 주의자들 중에는 구원의 중도 탈락을 반대하여 구원을 선택한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중도 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3)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구절.

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②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들의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③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롬11:2>
④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2:11>
⑥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벧전1:2>

⑦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4) 돌트 기독교 회의의 결정.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론에 반대하면서 구원이 인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주장을 제기함에 따라 당시의 교회들이 심한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때까지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성에 의하여 완성된 것으로 믿어 구원에 대한 확신적 신앙을 가졌던 기독교인들은 구원이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주장됨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므로 심한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독교 회의를 소집하였고 1618년 11월 13일, 네델란드의 돌트에서 국제 종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84명의 네델란드 신학자들과 독일, 신성 로마제국, 스위스, 영국에서 27명의 신학자들이 참석하였으며 네델란드 정부에서도 18명의 위원들이 참석하였다. 돌트 회의는 하나님의 예정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냐 하나님의 예지에 의한 것 이냐 하는 문제를 정립하기 위하여 성경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신학자들은 7개월간에 걸쳐서 154차례 회의를 열었고 드디어 1619년 5월 9일에 결론을 발표하였다. 돌트 회의가 내린 결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인간의 행위를 예지하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며 예지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훼손시키는 이단적 교리다.>

이때에 돌트회의는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의 교리가 다시는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알미니우스의 <5개 항목>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변증하였고 그것을 <칼빈주의 5대 강령>으로 선포하였다. 돌트회의의 결정이 <칼빈주의 5대 강령>으로 선포된 것은 그것이 이미 칼빈에 의하여 정립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5) 칼빈주의 5대 강령.

① 전적 타락.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관한 영적 영역을 완전히 몰수당했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으므로 자력으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악한 본성에 억눌려 있기 때문에 마음은 죄를 싫어하면서도 욕심의 유혹에서 자유하지 못한다.
<창6:5; 8:21><전9:3><렘17:9><막7:21-23><요3:19; 8:44><롬8:7-8>
<고전2:14><엡2:1-2; 4:17-19; 5:8>

②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태 하의 인간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 중에 몇몇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시어 구원하셨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선포한다.
<출33:19><신7:6-7><대상29:10-12><욥42:1-2><시115:3><단4:35><마20:15><요15:16><행13:48;18:27><롬9:11-13,16;10:20;11:4-7,33-36> <고전1:27-29><엡1:5,12;2:10><빌1:19;2:12-13><살전1;4,5><살후2:13,14><딤후2:10><약2:5>

따라서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자의적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하사하신 신앙에 의한 것이다. 성도의 신앙은 그들 자신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③ 제한적 속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출33:9><신7:6-7><시33:12><마20:15><막13:20><눅18:7>

④ 불가항력적 은혜.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소명> 받아 교회<하나님께>로 나오며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앙적 삶을 살게 된다. 성령 하나님은 거부당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따라서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할 수 없다. 특히 구원 받도록 선택된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절대 저항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거부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대죄이다. 거부되는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은 거부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⑤ 하나님의 견인.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절대성과 완전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영원히 유효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을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보장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고 선포한다.
<사43:1-3; 54:10><렘32:40><마18:12-14><요3:16,36; 5:24; 6:35-40,47; 10:27-30;17:11,12,15><롬5:8-10; 8:1,29,30,35-40><고전1:7-9; 10:13>
<고후4:14-17><엡1:5,13,14; 4:30><골3:3,4><살전5:23,24><딤후4:18><히9:12,15; 10:14; 12:28><벧전1:3-5><요일2:19-25; 5:4,11-13,20><유다1:24,25>

인류 구원이 완전한 보장을 받는 것은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에 의하여 중도에 탈락될수 있다는 것은 감히 하나님의 약속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이다.

2. 구원의 서정<단계>.

구원의 서정은 구원의 순서 또는 구원의 단계를 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서정에 대한 교리를 논증함에 있어 먼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구원의 서정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여 논증 하고자 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적용의 역사를 논증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이 반드시 그러한 시간적, 또는 단계적 과정을 거쳐서 완성 된 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성되어진 것이며 그것이 개인에게 적용 되어질 때도 경우에 따라서는 오랜 시간과 절차가 적용 되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순간적으로 적용 되어질 때도 있다.

1) 소명<召命>

(1) 소명의 정의.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녀와 종들을 <부르시는>것이다.

(2) 소명의 필요성.

성도들은 영적 무지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된 것을 전혀 알 수 없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불러 내시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한다.

(3) 소명의 종류.

① 외적 소명

외적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외향적인 모든 방법을 말한다. 외적 소명은 선택받은 자와 유기 된 자 모두에게 구별 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소명> 또는 <보편적인 소명>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따라서 반드시 유효하지 않다.<마10:15; 11:21-24><마22:2-14><요3:36><요5;40; 16:8-9><행13:46><살후1;8><요일5:10>

② 내적 소명

내적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내향적 사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완성한 구원을 각 개인들에게 적용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한다. 내적 소명은 구원의 적용에만 한정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당신의 종들을 부르시는 것에도 적용되어진다. 이와 같이 내적 소명이란 성령의 초자연적인 특별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부르시는<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신학적 용어인 것이다. 한편 내적소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 또는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 받은 자 들에게만 적용되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유효하며 따라서<유효적 소명>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행13;48><롬8:30;11:29><고전1;23-24> <살후2;13-14><딤후1:9><엡1:17><벧전2:9>

(5) 소명의 방법.

① 외적 소명.

A. 대자연을 통한 부르심.

우주 만물의 질서 정연한 존재 자체와 그들의 생성과 결실의 반복과정 속에 나타나는 아름답고 신비하고 오묘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의 비상함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는다. 바울은<롬1:20>을 통하여 이와 같은 진리를 선포하고<저희가 핑계치 못 할 것이라>고 단언 한다. 우주 만물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결국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B. 실제적 삶을 통한 부르심.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환경들과 경험들과 사건들과 변화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인식하게 된다<시19:1-4><행16:16-17;17:27><롬1:19-21;2:14-15>. 이와 같은 인식들은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통하여 비롯되어지는 것으로서 결국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C. 복음 전파를 통한 부르심.

복음 전파를 통한 부르심은 TV, 라디오, 문서, 등등의 각종 전도와 전도자들에 의하여 진행된다.

D. 찬양을 통한 부르심.

아름다운 찬양은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찬양을 들으면서 그 찬양의 가사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사내용에 전혀 관계없이 그 찬양의 곡조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그것이 찬양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에 일어나는 결과들이다.

E. 성도들의 신앙적 삶을 통한 부르심.

외적 소명 중에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한 부르심이다. 사람들은 성도들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 의하여 현세적인 모든 욕심에서 초월되는 고결한 신앙적 삶을 영위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도 하나님 나라를 동경하게 되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이상학적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흠모하게 되며, 성도들이 이웃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버리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알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진리적인 신앙적 삶은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② 내적 소명.

A. 성도 각자의 삶을 통하여 부르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 들의 삶 속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어 구체적인 역사를 전개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깨달아 하나님께 나오게 한다.

B. 언제나 유효적이다.

내적 소명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적용되며 또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적용되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유효하다.

C. 권고적이다.

성령 하나님은 택함 받은 자들의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인 요소들을 자극하여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신다. 택함 받은 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을 차츰 인식하게 되고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차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느껴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D. 인격을 존중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나올 수 있도록 그들을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 성령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을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으로 휘몰아쳐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기뻐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들을 제공하시며 기다려주시며 참아주시며 인도하시는 것이다.

E. 개성과 특성을 존중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의 특성과 개성을 존중하여 그들의 특성과 개성을 자극하고 조명함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즐거이 나올 수 있도록 계기와 방편을 마련하여 주신다. 그들에게 부여되어진 개성과 특성들을 개발하게 하시고 또한 재능과 은사들을 부여하시어 그들이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시며 또한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F. 때로는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인도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 할 때에 다양한 고난과 역경을 제공하여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은 자들은 처음에는 그 고난과 환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지만 결국은 그 고난과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알게 됨으로서 하나님께 나아오게 된다.

G.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적용된다.

소명은 성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개인적 성격과 특성과 인격, 기호, 취향, 등등을 존중하신다. 따라서 그들을 강제적으로 무릎을 꿇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기다리신다. <물론 그러한 지경을 만들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일단 부르심에 응하여 하나님 앞에 나온 자들 중에도 쉽게 신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갈등을 겪는 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기다리시며 그들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여 주시고 사건을 만들어주시며 그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스스로 순종하게 만드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때이다.

H. 강제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머뭇거리거나 불순종하면 강압적으로 역사하시어 그들을 하나님께로 불러들이신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깨닫는 것에 몹시 둔하거나 또는 의심이 많아 쉽게 따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 들은 성령하나님의 다양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아니하고 머뭇거리거나 또는 여전히 저항하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시어 그들을 강하게 휘몰아치심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굴복하고 두 손 들고 나아오게 하신다. 이때에 있어서 성령하나님의 강력한 휘몰아치심은 대부분 그들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적용되어진다.

2) 중생

(1) 중생의 의미.

① 신분적 중생.

신분적 중생이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취득한 법적, 행정적, 자격을 신분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죄제를 통하여 죄인의 신분에서<무죄한 신분>으로 변환된다. 따라서 신분적 중생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무관한(죄책으로부터 면죄 되어진) 새로운 피조물의 신분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나다><새사람><새 출발><새로운 피조물><소생> 등등으로 표현한다<마19:28><딛3:5><요1:13; 3:3-8><벧전1:23><요일2:29; 3:9;4:7;5:1,4,18><약1;18><고후5;17;갈6:15><엡4;24><엡2;5><골2:13>

② 상태적 중생.

상태적 중생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하고 인격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서 <완전한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신분적으로는 완전한 중생을 이루지만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상태적 중생<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거듭난 삶<상태적 중생>을 이루려는 노력 속에 사는 것이다.

(2) 중생의 원리.

중생의 법적, 행정적 원리는 성부하나님의 신적 작정이다. 성부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택<작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취득한 새로운 신분은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에 의하여 취득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하사된 것이다.

(3) 중생의 근거.

중생의 법적, 행정적 근거는 로고스 곧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대속 죄제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이 수없이 오직<예수 안에서>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완성자 이심으로 모든 것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4) 중생의 적용.

중생의 적용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 개개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성부 하나님의 중생을 일일이 부여하신다. 이와 같은 중생의 적용 역사에 있어서 사람의 협력이란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께만 허용 되어지고 일임 되어진 독단적, 고유적 사역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의 상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스스로 감지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하심도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깨닫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은 중생을 다만 수혜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뿐이지 성령의 중생역사에 아무런 협력도 할 수 없다.

(5) 중생의 완성 시기.

성도가 중생을 하사받는 시기는 법적 행정적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택정하신 순간이다. 따라서 그것은 창세전이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완전성과 속성적 완전성과 섭리적 완전성에 의하여 보증된다.

(6) 중생의 필요성.

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중생은 절대 필요하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요3:3>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죄인의 신분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죄인의 신분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성립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무관하신 분으로서 죄인과 교제하시지 않으시며, 또한 죄인들과 교제하실 수도 없는 분이시다. 아담과 하나님의 밀월 관계가 종료되고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담이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 이래 단절 되어진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가 회복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절대적인 것은, 사람이 죄인의 신분에서 벋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대속 죄제를 치르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사람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키어 그들이 죄인의 신분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벋어나게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②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중생은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로부터 자유한자, 즉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무죄한 자들만의 세계이다. 따라서 죄인의 신분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대속 죄제를 치르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③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중생은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죄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 하여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대속 죄제를 치르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④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중생은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으려면 죄인의 신분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벋어나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대속 죄제를 치르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7) 중생에 대한 오류.

① 세례 받을 때 중생된다는 개념.

성도가 중생을 하사받는 시기를 세례 받을 때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개념은 중생이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개념으로서 로마 카토릭과 영국의 성공회, 그리고 루터파 교회의 공통된 개념이다. 따라서 저들은 구약시대 성도들의 중생을 거부한다.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죄제 이후에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② 계속하여 중생된다는 개념.

성도의 중생이 계속하여 반복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개념은 성도들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성령 충만, 성령 세례를 강조하면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중생의 거듭>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중생은 신분적으로는 완전을 이루지만 상태적<완전 성화>으로는 완전을 이루지 못하므로 계속하여 중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③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한다는 개념.

성도의 중생을 완전한 것으로 주장하여 중생된 자는 하나님께서 범죄 하기 이전의 첫 사람 아담과 같은 상태의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주장자들은 성도는 죄와 무관한 의인으로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오류다. 성도의 중생은 신분적으로는 완전하지만 상태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므로 항상 범죄하고 실수하며 산다.

3) 회심.

(1) 회심의 정의.

회심이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회심은 회개하고는 다르다. 회개는 과거의 비 진리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되어지는 후회이며 앞으로는 그러한 후회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회개는 또한 비 진리적인 과거로부터의 탈출이며 그것에게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결국 회개는 비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지는 경계선이며 진리 안으로 들어서는 출발선이다. 반면에 회심은 죄악된 삶으로부터 마음을 완전히 돌리어 오직 하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회개의 결과로서 다시는 범죄 하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2) 회심의 필요성.

구원은 사람의 어떤 요소와 전혀 관계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다. 그러나 죄인에 대한 사면에 있어서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통회 자복하며 개정<改訂>의 자세를 갖추지 않는다면 사면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회심은 성도들의 신분에서도 절대적,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택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하사받기 위해서는 회심이 절대적,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려놓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회심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3) 회심의 특성.

① 회심은 신자들을 새로운 삶으로 출발 시킨다.

회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옛사람을 벗어버리게 하며 죄를 회피하게 하고 그들이 새 사람으로서의 아름답고 거룩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다. 신자들은 회심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이 전의 죄악 된 생활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충성하는 헌신적, 신앙적, 생활로 나아가는 것이다.

② 회심은 신자를 하나님에게로 안내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일반적인 회심은 인간들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스스로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기독교의 회심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어 택한 자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려놓는 것이다. 기독교 회심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역사를 통하여 신자들을<종교적인 존재>,또는<종교적인 개념><종교적인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회심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마음을 죄악 된 것에서 완전히 돌이키게 하심이며 그들의 삶과 의식자체를 죄악 된 것에서 돌이키어 영원히, 완전히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법적, 행정적인 것이 아니라 상태적인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③ 회심은 일회적이며 반복될 수 없다.

회심은 단 한번으로 완성되어지며 따라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비롯되어지는 회심은 수없는 반복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회심은 단 한번으로 완성되어 진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 할 때에 사람에 의하여 비롯되어지는 회심은 후회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반면에 하나님에 의하여 비롯되어지는 회심은 후회를 포함하지만 영적 각성 속에서 새로운 심령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심령은 하나님의 완전성에 의하여 단 한번으로 완성되어짐과 동시에 전혀 변질되지 않고 영원히 유효하다. 성도들이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회심의 변질이나 무효가 아니라 <방황> 또는 <미혹에 빠짐>으로서 신앙 궤도에서 잠시 이탈하는 것이다.

④ 회심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이다.

인간적 입장에서 회심은 때로 돌발적 일 때도 있고 점진적 일 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즉시 회심하는 돌발적 회심을 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사건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 서서히 회심하는 점진적 회심을 하기도 한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경우들을 근거로 하여 돌발적인 회심과 점진적인 회심을 구분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레미야, 세례요한, 디모데>같은 경우는 점진적인 회심이었다. 반면에 <삭개오, 바울, 루디아>같은 경우는 돌발적인 회심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회심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단 한번으로 완성되지만 적용과정에서는 점진적이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때로 돌발적인 회심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의 회심을 즉각적인 것으로 이루시지 아니하시고 점진적인 것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자녀들의 개성과 특성들을 존중하시어 그것에 맞게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4) 회심의 중요성.

회심의 필요성에서 이미 밝혔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서정에서 회심은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단계적으로 진행이 될 때에 모든 단계적인 것들은 이전의 것과 또 다음의 단계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한결같이 중요한 것임으로 어떤 단계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모든 단계들은 곧 다음 단계를 완성하는 절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회심의 중요성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회심은 신앙을 촉진<促進>한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신앙은 회심을 전제로 한다. 회심이 없으면 신앙이 형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신앙은 일반 종교적인 신앙과 달라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며 또한 진실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회심<과거의 죄에 대한 무한한 통회자복과 미래의 삶이 오직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것이어야겠다는 확고부동한 돌이킴>이 없이는 형성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신실하고 절대적인 신앙을 촉진시키는 필연적인 요소인 것이다.

② 회심은 중생과 신앙을 연결하는 필수적인 고리이다.

법적으로 새로운 신분이 된 신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은 새로운 신분에 적합한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는 이제 오직 하나님만을 앙망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삶은 그들이 죄악 된 삶에서 내적, 외적으로 완전히 돌아섰을 때에 비로소 형성되어 진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 역시 사람들에게서 자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만약에 신앙이 사람으로부터 자생되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죄악 된 것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되는 것일 때에 죄로부터 아직 돌아서지 못한 자에게 부여되는 신앙은 뚜껑 닫힌 항아리에 물을 붙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회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신자들의 구원의 서정은 신앙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중생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5) 회심의 조성자.

① 회심의 조성자이신 하나님.

회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의하여 작정된 하나님의 필연적 역사이다 따라서 회심의 조성자는 당연히 오직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와 같은 원리를 다양하게 증거하고 선포한다.

* <시85:4>에서 시인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라고 기도한다.
* <렘31:18>에서 에브라임은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라고 기도한다.
* <행11:18>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선포한다.

죄인의 회심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은 일반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율법을 통하여 회개를 일으키시고 <시19:7><롬3:20> 복음을 통하여 신앙을 촉구하시며<롬10:17> 또한 초자연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주장하시어 그들의 회심을 이루시는 것이다.

② 회심에 대한 인간의 협력.

회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인 것이나 또는 법적, 행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응답 속에 이루어지며 신자들의 자발적인 응답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눈물어린 감동과 그 감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감사에 의하여 비롯되어진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회심을 강제적으로 집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적극적인 그리고 감동적인 참여를 통하여 완성하시는 것이다. 신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저절로 감격하여 눈물과 회한의 심정으로 회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사람이 협력했다 하여 회심에 대한 사람의 공로를 내세우면 안 된다. 사람의 행동이 회심에서 매우 활동적인 것은 분명하지만<사55:7><렘18:11><겔18:23,32;33:11><행2:38;17:30>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활동에 불과하다.<애5:21><빌2:13>

4) 신앙.

신앙에 대한 교리는 구원의 서정론에서 중심적인 의의<意義>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앙은 회심을 불가분리의 대 전제로 하면서 또한<칭의>교리와 절대 불가분리의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신앙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교리로 논증하게 된다.

(1) 신앙의 조성자.

신앙의 조성자에 대한 역사적 개념을 고찰해보면 대략 세 가지이다.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을 신앙의 조성자로 보았고, 어떤 학자들은 사람을 신앙의 조성자로 보았으며 또 어떤 학자들은 신앙의 조성자를 하나님과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조성할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의 조성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신앙은 하나님에 의하여 심기어지고, 가꾸어지고, 열매 맺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인간의 노력적인 참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배려하심 속에서의 참여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란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2) 신앙의 필요성.

① 구원의 서정에서.

신앙은 구원의 서정에서 회심 다음이며 칭의 직전의 위치에 있다. 회심과 칭의 사이를 연결 하는 하나의 고리인 것이다. 신자들은 회심 다음에 중생에 근거한 법적, 행정적 칭호인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신자들이 거룩한 자<의인>의 칭호를 받기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다. 거룩한 자란 하나님의 법 안에서의 거룩한 자이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거룩한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거룩한 자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자라는 칭호<칭의>를 부여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가 정립된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는 자는 곧 하나님과 무관한 자임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자라는 법적, 행정적 칭호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은 그들이 하나님께 법적, 행정적으로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다.

② 신자들의 삶에서.

신자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만 <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거룩한 자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적 삶을 살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들이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요구 되어진다. 하나님의 법과 섭리와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의지와 순종의 신앙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지는 것이다.

(3) 신앙의 중요성.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과 동시에 또한 매우 중요하다. 신앙의 필요성은 구원과 사명에 관계되는 반면에 신앙의 중요성은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과 관계된다. 신자들의 삶은 그들 자신의 신앙 형태와 수준에 크게 영향 받는다. 그들의 신앙의 형태와 수준에 따라 그들의 삶의 형태와 수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신자들의 신앙에 의한 삶의 형태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신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의 차이에 따라 신자들의 삶의 형태가 달라진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절대적인 사람은 현세의 삶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현세의 삶을 전혀 무시한다거나 또는 과소평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현세의 삶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사명의 현장이며 기회라는 점을 중요하게 여기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현세의 삶을 살아간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되 현세의 것에 대한 미련과 욕심을 갖지 않으며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기뻐하며 때로, 고통과 고난과 슬픔과 애통의 순간이 닥쳐올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그것을 인내하고 견디며 극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약한 사람들은 그와 전혀 상반되는 삶을 산다. 언제나 현세의 삶에 연연하여 현세의 것에 대한 미련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들의 포로가 되어 그것들에 집착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전혀 하나님의 사람답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을 얻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언제나 불만과 다툼을 일으키는 가운데 작은 실패에 스스로 좌절하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삶을 산다.

②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신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을 소유한 자들은 언제나, 그리고 무슨 일에나 자신만만한 삶을 산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리고 무슨 일에나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 있고 진취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있다는, 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 안에서 적극적인 삶을 살며 또한 대부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와 반대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무슨 일에나 부정적이고 자신이 없으며 따라서 매우 미온적이며 소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는 대부분 승리의 삶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승리의 허락이 유보되어지기 때문이다.

③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 신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 하게 되며 또한 현존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저들은 사랑의 원리를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방법을 알며 사랑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영원히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저들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용서하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이해하며 또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인내하고 아우르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듯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사랑을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또한 사랑을 받을 줄도 알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을 할 줄도 안다. 이와 같이 사랑 속에 사는 저들의 삶은 언제나 기쁨과 평안이 넘치며 화평과 행복이 쏟아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한다. 저들은 사랑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하며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며 사랑할 줄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일을 할 줄도 모른다, 그리하여 저들의 삶 에는 언제나 진정하고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없으며 따라서 삭막하고 적막하다.

5) 칭의.

(1). 칭의의 정의<稱義>

칭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대한 법적, 행정적, 선포이다. 즉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자들에게 <의로운 자>란 법적, 행정적인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부여된 칭의는 믿음<신앙>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자들은<믿음으로 의롭다.>는 칭호를 받았다는 차원에서 칭의를 <이신칭의-以信稱義> 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2) 칭의의 부여자.

칭의는 성도들의 법적, 행정적인 신분에 대한 법정적 부여임과 동시에 선포이다. 죄인 된 자가 죄인의 신분에서 벋어나 죄와 무관한 새로운 <의로운>신분이 되었음을 부여하고 선포할 수 있는 법정적 권한은 절대적 주권자에게만 존재한다. 따라서 칭의의 부여자는 당연히 성부 하나님이시다.

(3) 칭의의 근거.

칭의는 인간의 어떤 덕목이나 선행을 통하여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덕목이나 선행에 의하여 발생하는 의는 불완전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순전한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그리스도의<의>가 죄인에게 전가 되어지는 것이 유일한 칭의의 근거인 것이다.

<롬3:24; 5:9,19; 8:1; 10:4><고전1:30; 6:11><고후5:21><빌3:9>

(4) 칭의 부여의 시기.

① 그리스도 부활시의 칭의.

죄인들이 그리스도 부활 시에 칭의 된다는 사상은 일부 율법 폐기론 자들과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근거들에 기초한다.

A. 그리스도는 속죄 사역을 통하여 백성을 위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켰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요구가 선택 된 자들을 위하여 이루어졌다고 공적으로 선포하셨으며 따라서 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셨다.

B. <롬4:25>의 증거><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C. <고후5:19>의 증거.<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 하셨느니라.>

② 신앙에 의한 칭의.

칭의가 성도의 신앙을 근거로 하여 부여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증거들을 근거로 내세운다. <롬3:25,28,30; 5:1><갈2:16><빌3:9>이 성경 구절들은 대체적으로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다는 칭함을 받는다.>고 증거 한다. 또한 <롬4:3,9,22><갈3:6> 등등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으며 <약2:14-26>은 성도의 행위가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로마 카토릭은 이러한 성경의 증거들을 근거로 하여 칭의가 신앙을 근거로 하여 부여됨으로 칭의의 시기를 세례 받을 때라고 주장하였고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칭의가 성도 개인의 신앙에 의하여 부여됨으로 반드시 세례 받을 때 칭의가 부여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여 칭의 시기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③ 영원전의 칭의.

칭의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선택하셨던 그 때<영원 전>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자녀로 예정 하셨다는 것은 그들의<의로움>을 전제로 한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이미 그 때에 법적, 행정적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칭의의 시기는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영원전이 된다.

(5) 칭의의 영역.

① 법적 칭의.

법적 칭의는 하나님에 의하여 선포 되어지는 법정적인 것으로서 하나님 자녀들의 신분에 대한 칭의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법정적 선포에 따라 영원 전부터 죄인의 신분이 아닌 의인의 신분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인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 <의로운 자>로 불리어진다. 이러한 호칭은 원죄는 물론 일반적인 죄와도 관계된 호칭들이다. 즉 원죄와 일반 죄 모두<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면 받은<거룩한 자> <의로운 자>인 것이다.

② 실제적 칭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법정적 선포에 의하여<거룩한 자><의로운 자>가 되지만 그것은 신분적인 것이지 상태적으로 <거룩한 자>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상태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신앙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현세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입국할 때 까지는 실제적인<의인>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성도들은 칭의를 부여 받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범죄 한다. <약3:2> <요일1:8>

(6) 칭의의 성질과 특징.

칭의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에 관한 율법의 모든 요구들이 만족되어 졌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 칭의가 구속역사의 적용에 있어서 특이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 즉 죄인에 관한 선언이며, 중생이나 회심, 성화와 같은 갱신<更新>의 행동이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칭의는 죄인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의 내적 생활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죄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의 신분에 영향을 미치며, 그 점에서 구원의 순서의 다른 모든 중요한 부분들과 다르다. 칭의는 죄의 용서와 신적 은총에로의 회복을 내포하고 있다.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며 <롬5:1-10>, 또한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되는> 것이다<행26:18>

(7) 칭의의 필요성.

칭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절대적인 필연성을 갖는다 .죄인들이 죄로부터 면책되어 지는 것으로서 모든 것이 마무리 된다면 칭의는 필요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적인 결과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나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거룩한 자><의로운 자>라는 법적 신분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다만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갖는 것이다.

6) 양자.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물론 이것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신자들이 본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 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본래 하나의 피조의 위치로 창조되어 졌다.<우리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본래적으로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여 주신 것이다.
<출4:22-23><신14:1><사63:8><렘10:20><렘31:20><잠14:26><마6:32><요1:12><롬8:15><고후6:18><엡1:5><갈4:6><히12:6>

(1) 양자의 근거.

신자들이 죄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근거는 칭의이다. 죄인의 신분으로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거룩한 자. 의로운 자라는 칭의가 부여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러나 칭의는 예수그리스도의<의>에 의하여 부여된다. 따라서 결국 양자의 궁극적인 근거는 예수그리스도이다.

(2) 양자의 시기.

신자들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에 몇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그 작정 속에는 이미 그들에게 자녀의 권세를 줄 것까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양자의 시기는 성부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택정 하셨을 때이다. 결국 신자들은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무죄한자의 신분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인의 신분으로 창조되어진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창세전<영원 전>에 그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으로 현세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바꾸어진 의인의 신분에 의해서, 현세에 의인 곧<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3) 양자의 특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권들이 주어진다.

1>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롬8:15><갈4:6>
2>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를 받는다.<애3:31>
3> 구하는 대로 얻게 된다.<마6:30-32>
4> 하나님의 약속 안에 산다.<히6:12>
5>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가 된다.<벧전1:3-4>

7) 성화.

성화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의 심령과 삶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의 심령과 삶으로 변화되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성화를 <상태적 중생-거듭난 자의 삶>이라고도 한다.

(1) 성화의 창시자.

성화는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들의 현재적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자녀적 삶이 될 수 있도록 작정하신 것이다.

(2) 성화의 조성자.

로마 카토릭, 알미니안 주의자, 및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성화가 인간의 신앙적 노력에 의한 업적으로서 신앙적 공로라고 주장한다. 특히 미국 기독교 성도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사람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는 행동주의<Activism>자들은, 성화를 신자들의 신앙적 열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화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출발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따라서 성화의 조성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 자녀들의 과거 신분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되어 새로운 신분을 하사받은-<롬6:6>, 그들에게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라-골3:9>고 명령한다. 옛 사람이란 죄로 인해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롬6:6><갈5:24>.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육신의 행위와 성령의 역사를 대조시키며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선포는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영혼을 지배하신다는 것에 대한 선포로서,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의 부패와 타락을 점진적으로 제거 하신다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의 열매이며, 칭의 없는 성화는 절대 불가능하다. 칭의와 성화는 다 함께 죄인들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들인 것이다. 신자가 성화에 협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성령하나님께서 날마다 순간마다 그들에게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그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신자의 영적인 발전은, 그들 자신의 인간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한편 사람은 자신의 성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회개와 자성<自省>과 자숙<自肅>을 계속하면서 성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성화에 협력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내 세울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겸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협력하는 것까지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이다.

(3) 성화의 특성.

① 성화는 인간의 전역
<몸, 영혼, 지성, 감성, 의지>에 영향을 준다.

성화는 인간의 내면적인 삶<심령>에서 발생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인간의 전역<全域>을 변화시키게 된다. 인간의 심령 변화는 그의 내적인 부분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적인 부분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그의 육체적 건강에까지 변화를 주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진리를 분명하게 선포한다. <겔36:25-27><롬6:12><고전6:15,20><고후5:17><살전5:23><갈5:24>
<빌2:13> <딛1:15> <히9:14>

② 성화는 신자들이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지만 신자들이 성화에 참여한다. 그러나 신자들이 성화에 참여하는 것을 오해하여 신자들이 성화에 독립적으로 참여 한다고 생각함으로서 성화를 두 부분, <하나님의 사역과 신자의 행위>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신자의 참여란 엄격하게 말하면 성령의 역사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4) 성화의 완성.

① 성화는 현세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화는 신자의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긴 과정이며, 현세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현세에서는 아무도 죄에서 자유 할 수 없다.>고 증거하며 <왕상8:46> <잠20:9> <롬3:10,12> <약3:2> <요일1:8>, 또한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증거한다<롬3:10>. 신자의 성화가 현세에서 완성되지 아니하는 것은 신자들의 부패된 본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그 원인이 있다. 신자들의 성화가 현세에서 완성된다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무결한 <범죄 하기 이전의 아담과 같은 존재>가 된다. 신자의 그와 같은 상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조화되지 못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현세에서의 신자들에 대한 완전한 성화를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다.

② 성화는 영혼의 죽음과 동시에 완성된다.

신자의 성화는 현세의 육체적 죽음과 동시에 완성된다. 성경은 신자들의 성화가 육체적 죽음과 동시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완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12;23> <흠이 없는 자들-계14:5>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는<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계21:27>는 선포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과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는 선포를 통하여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5) 성화의 방편<수단>.

① 하나님의 말씀.

성령께서 신자들의 성화를 이루어 가실 때에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거룩한 실천과 행위들에 대한 모든 객관적 조건들을 제시하는 유일한 진리이다. 그러나 진리 <말씀-성경>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말씀-성경>진리가 성령에 의해서 사용되어질 때에 그 진리 앞에 들어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무릎 꿇지 않는 것이 없다.

② 섭리적 인도.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과 연관되어 하나님의 섭리는 신자들의 내적 감정과 심령에 자극을 주며, 따라서 그들을 차원 높은 신앙적 열매들에게로 인도 한다.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다양함이 존재한다. 부드러움이 있는가 하면 강함이 있고, 자율적인 인도하심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절대적 강제성이 있는 것 이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인도하심과 자율적인 인도하심이 있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저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강한 인도하심과 절대적 강제성 인도하심이 있는 것이다.

8) 성도의 견인<牽引>

(1) 견인의 정의.

견인이란 성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은 성부 하나님의 은혜, 자비, 사랑, 등등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성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한 신적 작정이다.

(2) 견인의 완성자.

견인이 성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한 신적 작정인 반면에 그것을 진행하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견인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고유적인 사역이며 또한 특별한 사역인 것이다.

(3) 견인의 방법.

성령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심령 안에 내재, 내주하시면서 그들의 심령에 자극을 주시고 조명을 주시어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 하게하며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한 본성의 발동으로 인하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저항하거나 불순종하고, 특히 그 틈을 노리고 유혹과 미혹의 역사를 전개하는 사단의 활동에 의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려놓으신다.

(4) 견인에 대한 신자들의 협력.

이미 여러 차례 밝힌바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주권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전개하시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강권적, 독재적인 역사를 진행하시지 않으시고 자녀들과 종들의 인격을 각별히 존중하시고 예우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기뻐하시고 즐기시는 역사를 전개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섭리는 성도에 대한 견인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 하게하시는 역사를 전개하시면서도 그와 같은 섭리의 결과를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하시지 않고 성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공로로 하사하시어, 그들을 기뻐하시고 자랑하시면서 상급과 면류관까지 예비하시는 은혜의 극치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견인하심에 협력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게 하며 하나님의 자랑스러움이 되게 하는 것이다.

3. 구원의 완성.

1) 구원의 완성시기.

지금까지 교회가 가르치고 전해온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것은 알미니안 주의적인 것으로서 성경의 증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작정하셨을 때에 이미 완성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가기 위한 자들>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천국 백성이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작정 그 자체로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자녀는 창세전에 결정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는 그가 출생 하였을 때에나, 그가 신앙생활을 시작 하였을 때나,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나, 그가 세례를 받았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작정에 의하여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있었다<마13:35><마25;34><눅11:50><요17:24><엡1:4><벧전1:20>.

(2) 하나님의 자녀는 창세전부터 의인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가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했을 때나, 그가 세례를 받았을 때나, 심지어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대속죄제를 드렸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죄가 용서되어지고, 그리하여 그 때를 기점으로 하여 죄인의 반열에서 의인의 반열로 옮기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의인의 반열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고 작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 완성된 구원의 적용.

성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영원히 완전한 구원은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통하여 각 개인들에게 적용 되어진다.<특별은혜> 또는 <특별사역>이라고 정의 되는 성령의 적용은 구원의 서정 8 단계를 통하여 개인들에게 적용 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우편 강도의 경우에서처럼 일순간에 적용 되어지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수십 년의 오랜 과정을 통하여 적용 되어 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구원의 적용과정이 길다고 해서 구원의 완성 자체가 오래 걸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성된 것이며, 다만 그 완성된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이 길수도 있고 짧을 수 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하여 왜? 그렇게 되는 것이냐?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것이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률적으로 강제적으로 오직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당신의 역사를 휘몰아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천태 만별인 자녀들의 속성과 상태와 의지를 존중하시어 그들의 입장에 맞는 시간과 방법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적용 하시는 것이다.

3) 완성된 구원의 상태<영화>

(1) 영화의 차원.

① 법적, 행정적 완성.

영화를 구원의 완성이라고 정립함에 있어 영화를 이루기 이전의 상태를 구원의 미완성 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들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이미 완성 되어졌다. 때문에 그들은 영원 전부터 이미 법적 행정적으로 영화로운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현세에서의 삶을 사는 동안에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 영화로운 상태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의 구원이 미완성 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② 영적 부활에서의 영화.

하나님의 자녀들은 현세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법적, 행정적으로는 분명히 영화로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상태적으로는 영화로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의 영화는 그들이 현세의 삶을 종료하고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부활하는 순간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때의 영화는 영적 상태의 영화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적으로 영화로운 존재가 되어 장차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37은 이와 같은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신자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 중에 들어가고, 그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부활 할 때까지 무덤에서 쉰다.>

③ 영화의 최종.

하나님 자녀들의 영화의 최종은 그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연합되어 완전한 실체가 되어질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전, 피조 세계를 심판하시기 전, 그들의 육체가 부활되어져서 영혼과 연합하여 완전한 실체를 이루게 될 때에, 그들의 영화는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영화의 상태.

성경은 하나님 자녀들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하여 어느 정도만 언급하고 있을 뿐,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삼가고 있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실제성을 거부하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오해이다. 제한된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정확하게 인식 할 수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곳에서의 우리들의 영화로운 상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구체성을 명확하게 계시 하시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것의 실제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 할 수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하여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장차 우리가 이루게 될 영화로운 상태는 범죄 하기 이전의 아담의 상태보다도 더욱 완전한 상태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4.구원의 완전성.

오늘날 교회에서 교육되고 설교되는 것 중에 또 하나의 심각한 오류는, 우리가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죄악 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의 반열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 설교를 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성경은 주로 야고보서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교육과 설교로 인하여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지 못 하고 있으며, 때때로 불안과 좌절에 빠져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와 교육들로 인한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완전성이 거부 되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섭리에 의하여 영원히 유효하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을 수 없이 선포 하셨고,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절대적 속성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지켜지게 된다. 앞장에서 이미 밝혔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로고스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무결하게 영원히 유효 한 것은, 구원의 근거가 곧 영원히 완전무결하신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칫하면 구원의 반열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식의 개념을 갖게 하는 교육과 설교들은 잘못 된 것이다.
야고보서가 말 하고자하는 것은, 구원이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거나 존속 된다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 사도가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약2;26>라고 준엄하게 선포하는 것은 행위적 신앙이 뒷받침되지 않는 신앙, 즉 신학적인 것에 불과한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러한 신앙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서 낙오되어 진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히브리서 바로 뒤에 연결 시킨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된다. 대체적으로 히브리서는 신학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으며, 야고보서는 신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독교의 신앙은 신학적<이론적>인 신앙과 인격적<실천적>인 신앙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온전한 신앙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를 나란히 연결하여 배열하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차원의 문제를 교육하고 설교 할 때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나태해지고 강퍅해지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교회적 고충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왜곡 할 수는 없다.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 구원의 영원한 완전성을 가르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만을 신뢰하고 믿으면서, 안심하고 태만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부응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육하고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제17장. 인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

1. 인류 구속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위치.

인류 구속 역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위치는 대속주<代贖主>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사하여 주었고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 알고 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속주<救贖主> 또는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救世主>라고 명칭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는 비논리적이고 비 성경적이다.

1) 비 논리성.

인류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예수>과 메시야 <중보자-그리스도>로 오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속을 위한 <대속죄 예물-예수>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고 연결시키는 <중보자-그리스도>이시며, 인류 구속의 <법적 행정적 근거-로고스>이시다. 논리적으로 정리할 때에 <대속죄 예물-예수> <중보자-그리스도> <법적 행정적 근거-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세상을 자유하게 하는 권한<사면권>이 없다. 그러한 권한은 오직 절대적 주권자이신 성부 하나님에게만 있다.

2) 성경의 증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하나님의 종> <비하의 신분>으로 표현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모든 주권과 영광을 성부 하나님의 것으로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의 표현과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구속주<救贖主> 또는 구세주<救世主>가 성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2. 대속주<代贖主>에 대한 명칭들.

1) 예수.

예수라는 명칭은 히브리어 “예호수아” <צושׁוהי-여호수아> <수1:1> <슥3:1> 나 “예수아”에 대한 헬라적 명칭으로서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라는 명칭이 대속주로서의 직무에 적용될 때에는 단순히 제물의 성격을 갖는다. 반면에 제물로서의 예수는 <완전한 제물>로서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의를 갖는다.

(1) 완전한 인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반드시 인간이어야 했다. 인간의 죄는 인간 자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의 동물 제사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면서도 인간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동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할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었다. 기독교 역사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실제적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가현설> <현현설> <환상설> 등등을 주장하였지만, 성경은 예수가 실제로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며 로마 역사도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 로마 제국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카에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식민지에 대한 호구조사를 실시한 것<눅2:1-2>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로마 제국을 통하여 입증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2) 무죄한 제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전혀 무죄한 제물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죄로 오염된 제물은 자신의 죄 조차도 사함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났기 때문에 죄로 오염된 인간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으므로, 죄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제물이었다.

(3) 무흠한 제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전혀 무흠한 제물이어야 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원죄와만 무관해서는 안 되고, 일상적인 죄와도 전혀 관계없는 완전무흠의 사람이어야 했다. 예수는 일생동안 단 한번의 죄도 경험하지 않은 완전무흠의 사람이었다. 당시에 예수를 제거하려는 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으나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아무 흠도 찾아내지 못했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역시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아무 흠도 찾아내지 못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운명할 때에도 하나님께 자신을 모함한 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탄원을 함으로서 자신의 무흠을 입증하였고, 그리하여 예수를 모함한 자들도 예수를 인정하였다.

****
예수라는 명칭의 신학적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예수라는 명칭에 보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를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 <주> 등등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라는 명칭의 종교적 의미인 <구원자>를 높이 받들어 그의 지위를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 <주> 라고 하는 것은 비 신학적 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며, <주>도 아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될 때에 비로소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명칭 상으로는 다만 <제물>일 뿐이지만,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에는 <제물>로 정립되지 않고 메시야로서 <대속주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2) 그리스도.

예수가 제물로서 메시야의 개인적인 명칭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중보자 메시야의 공적인 명칭이다. 이 명칭은 구약의 “마쉬아흐” <חישׁט, חשׁמ-기름부음을 받다 .에서 유래됨>와 동일하며 따라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 구약시대의 선지자, 왕, 제사장들은 부름 받아 세워 질 때에, 반드시 기름부음 받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출29:7><fp4:3><삿9:8><삼상9:16,10:1><삼하19:10>. 그러나 선지자, 왕, 제사장 등등이 기름부음 받은 것과,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 받은 것은 전혀 다르다.
선지자, 왕, 제사장 등등이 기름 부음 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영원한 선지자, 영원한 왕,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기름 부음 받은 것에 대한 예표와 상징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메시야<그리스도>라는 명칭이 부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 기름 부음 받았다. 때문에 <그리스도> 라는 명칭은 영원 전부터 오직 그에게만 부여된 유일한 고유적 명칭이었다.
예수라는 명칭은 단독적으로 <주-主>가 될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단독적으로 <주-主>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한 대속주<代贖主>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메시야로 선포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 것은 메시야가 갖추어야 할 필연적 자격 때문이다. 메시야는 인류 구원의 구속주<救贖主>가 아니라 대속주<代贖主>이다. 따라서 메시야는 인류 전체에 대한 대속죄제<代贖罪祭>를 치루어야 할 제물<祭物>로서의 자격과 대속주<代贖主>로서의 자격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자격을 갖춘 자는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자격을 갖고 계시다. 반면에 대속주<代贖主>는 구속주<救贖主>를 전제로 하여 존재한다. 구속주<救贖主> 없는 대속주<代贖主>는 전혀 의미가 없다. 이때에 대속주<代贖主>는 당연히 하나님이어야 하지만, 구속주<救贖主> 하나님과 의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질서는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성자 하나님>보다 더욱 훌륭한 질서는 없다. 왜냐하면 대속주<代贖主> 하나님은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을 초월하지 않는 질서 안에 하나님이셔야 하는바, 그러한 존재는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성자하나님>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성자 하나님>

4) 인자.

인자라는 명칭은 예수께서 가장 통상적으로 사용하신 자기 칭호 <自稱> 이다. 인자라는 명칭은 구약에서 <시8:4><단7:13><에스겔서> 등등에 나타나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라는 명칭을 40회 이상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일단의 학자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근거로 하여 그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 직분을 들어내시지 않고 의도적으로 은폐하려 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어떤 신학자들은 인자라는 명칭에 신적 권위를 포함한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어진 주장들이다. 인자라는 명칭은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라는 명칭에 어떤 특별한 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비 진리이며 오류이다.
반면에 우리는 구약 성경이 이미 메시야의 존재를 인자라고 선포하면서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했던 이유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의 아들로 선포했던 것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 사이에는 연계될 수 없는 간격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인 반면에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의 존재를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미 앞장에서 정립한 바 있거니와 메시야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어야 하는 특별성을 필연적으로 요구 받는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신성>과 사람에게만 있는 <인성>을 다함께 소유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 <예수>로 오심으로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어야 하고,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필연성을 모두 충족시킨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의 제반 여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정립해 주셔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따르기보다는 의심과 거부를 먼저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것을 조직신학적으로 정립할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지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의심과 거부로 인한 신학적 투쟁을 오랫동안 전개하였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적 속성에 대비하시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또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점을 조직신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인자>로 선포한 것이다.

한편 인자라는 명칭은 문자상으로는 다만 <사람의 아들>일 뿐이지만,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에는 일반적인 사람의 아들로 정립되지 않고 메시야로서 하나님에 의해 <취하여진><사람>이 된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과 관계없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처녀의 몸을 빌리어 출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5) 메시야<Μεσαις-Messias>

메시야라는 명칭은 구약의 “마쉬아흐” <חישׁט, חשׁמ-기름부음을 받다>에 대한 헬라어 명칭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직분적 명칭이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메시야 직위에 세움을 받으셨고 성령으로 잉태 되었을 때와, <눅1:35> 세례 받으실 때에 <마3:16><막1:10><눅3:22><요1:32, 3:34>기름부음을 받으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수행 하셔야 할 사명에 대한 직분적 자격의 수여였다.

6) 주 <主-κυριος>

“주” 라는 명칭은 70인 역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 적용된다.

(1) 여호와와 동일한 명칭으로.
(2) 아도나이<ינדא>에 대한 표현으로.
(3) 하나님께 적용된 인간의 경의적 칭호에 대한 표현으로
<주로 아돈-נדא>으로 적용된다<수3:11><시97:5>.

신약 성경에서는 “주” 라는 명칭이 그리스도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적용 된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중하고 경의적인 인사의 형식으로.
<마8:2; 20:33>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소유권과 권위의 표현으로. <마21:3; 24:42>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에 대한 최고적 함축어로서
<막12:36,37> <눅2:11; 3:4> <행2:36> <고전12:3> <빌2:11>



<주> 라는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질 때 그것은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주> 하고는 다른 것으로서 신적 권위자에 대한 종교적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 라고 부르도록 종용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계속하여 선포한 것을 근거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 로 부르도록 종용한 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라고 가르쳤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계속하여 선포한 것이나, <아버지의 영광이 곧 자신의 영광> 이라고 주장한 것은, 자신이 <주> 라고 추대되어지기를 원함이 아니라 메시야에 대한 신학적 선포 들이며,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선포 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버지 안에 자신이, 그리고 자신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라는 선포를 통하여, 보다 확실하게 증거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 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를 즐거워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주> 라는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것은 사람의 종교적 관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의 결과라는 결론을 주저 없이 내린다.

7) 중보자<仲保者>

중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에 대한 용어다. 그러나 중보자라는 명칭은 종교적 명칭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때문에 일반 종교에서는 중보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중보자가 없기 때문이다. 중보자라는 명칭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명칭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화해-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적, 직무적 명칭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중보적 직무를 수행했다고 믿으며, 특히 모세나 사무엘 같은 대선지자들이 중보적 직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아브라함도 언약의 당사자로서 중보적 직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주장들을 더욱 발전시켜 목사들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보 한다고 하여 목사를 중보자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을 오해한 자들이 전도하고 도고<禱告>하는 것까지도 중보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고 선포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이와 같은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근거로 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구약시대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중보적 직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직무를 예표 한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중보적 직무를 수행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성은 그 의미를 잃게 되며 따라서 그는 중보자로 오실 이유가 없었다. 특히 목사들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보 한다고 하는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유일한 중보를 거부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유일한 중보를 목사들이 가로채려는 악행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유일한 중보는 거부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가로챔 당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이외에 더 있을 수 없으므로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8) 로고스<λογος-logos>

로고스라는 용어는 말<언어>을 의미하는 헬라 철학적 용어인데, 헬라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는 일반적인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권위를 갖는 법적 언어를 의미한다. 요한 사도가 로고스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법적 권위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비롯한 모든 사역은 로고스<하나님의 절대적, 법적> 권위에 의하여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유효하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1) 성육신의 주체.

비하의 신분으로 강림하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육신의 주체를 <로고스-logos>라고 선포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로고스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유적 이면서도 특별한 명칭이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면서 아버지의 영광이 곧 아들의 영광이요 아들의 영광이 또한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선포함으로서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이 동일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선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동일하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한편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선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행정적, 권위와 권세를 선포한 것이다.

2) 성육신의 필요성.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다음과 같은 절대적 필연성을 갖는다.

(1) 하나님의 영광 회복.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기쁨이 훼손되었으므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속죄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 속죄의 제물은 죄로 오염된 피조세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 완전무결한 제물로 강림하시기 위하여 성육신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2) 하나님의 섭리 회복.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공의적 징계가 내려짐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에 차질이 발생하였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인간의 속죄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 속죄의 제물은 죄로 오염된 피조 세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 완전무결한 제물로 강림하시기 위하여 성육신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3) 성육신의 방법.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1) 동정녀 탄생.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반드시 정상적인 인간으로 출생해야 한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인간의 자연적 생산법칙에 의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 출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리어 이루어졌다.

(2) 이스라엘 왕가<王家>의 후손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이스라엘 왕가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 강림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다윗 가문의 후손인 요셉의 가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출생 당시의 이스라엘 왕은 헤롯이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두매<에돔>인으로서 로마의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그의 가문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없다.

(3) 대제사장으로서의 출생.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해야 하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서 출생해야 하지만, 아론의 반차를 따를 수 없었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예표하고 상징하는 것일 뿐,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인간인 아론의 대제사장직과 무관한 것으로서 영원한 것이어야 했다. 때문에 성경은 멜기세덱이라는 특별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직의 영원성과 완전성을 선포하였다. 성경은 멜기세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2-3>

이 성경말씀은 멜기세덱이 실제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직을 예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와 관계없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출생하신 것이다.

(4) 겸손한 출생.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 강림하시지만, 그는 모든 것을 완성하기 전에는 비하의 신분<하나님의 종의 신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때문에 그의 출생은 겸손과 검소의 상태로 출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이스라엘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으로 예고된 것<미5:2>과, 예수 그리스도가 마굿간에서 출생하였던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종의 신분으로서 겸손과 검소의 출생이어야 하는 제반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4) 성육신에 의한 변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신학적 과제이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변할 수 없는 신적 특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따라서 성육신으로 인한 하나님의 어떤 변화는, 그 논증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어떤 변화가 발생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초대교회의 어떤 신학자들은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성육신을 하나님의 실제적인 성육신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영적 현현으로 대체 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실 때에 신성을 하늘 보좌에 두고 오셨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실제적인 성육신 이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하나님 속성의 불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은 절대적인 완전성과 영원적인 불변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본질적인 변화나 속성적인 변화가 발생되지 않는 것이다.

(2) 삼위일체 하나님 지위의 불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 할 때에, 세분 하나님 중에 한분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셨음으로 하늘 보좌에는 두 분 하나님만 계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삼신론<三神論>으로서 하나님을 셋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삼위일체론에서 이미 논증되었지만 하나님은 세분이시지만 결국은 한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 위<位>라고 표현하는 것은 세분 하나님이 실유로 존재하시지만 셋이 아니라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할 때에 한분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사양하시고 비하의 신분으로 성육신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강림하셨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의 신성을 하늘 보좌에 두고 오셨다는 주장은 자신의 신학적 무지를 스스로 증거 한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정립하였으며, 그러한 신학적 정립은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두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만약에 신성을 하늘 보좌에 두고 오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일 수도 없고, <그리스도>로서의 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1) 예수그리스도 고난의 성격.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 종들의 고난에 대한 예표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메시야로서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고난이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는 섭리적 도구들로서, 그 사역을 감당함에 필요한 연단과 훈련이 요구되어 진다. 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연단과 훈련의 과정은 그들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고난의 과정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매우 다양하면서도 특별한 방법으로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신다.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의 삶은 일반 성도들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의 종들의 삶에 대한 예표였기 때문이다.

(2) 예수그리스도 고난의 직접적인 사례들.

① 유년시절의 고난.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의 공생애적 고난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증거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미 출생 때부터 시작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유추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베들레헴의 마굿간 에서 출생하여 말구유에 뉘어졌다.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출생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는 헤롯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했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부유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했다.

② 사단의 시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의 본격적 고난은 사단의 시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단의 시험은 그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최악의 상태였을 때 찾아왔다. 성령께서는 사단의 시험에 대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강건하게 무장시키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최악의 상태로 인도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인도되어 40일 간의 금식을 한 후에 굶주린 상태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았다고 증거 한다. 사단의 시험은 당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로서는 가장 넘어지기에 적합한 것들이었다.<마4:1-10>

****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에 대한 고난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상 사단의 시험을 받아야 할 이유와 명분이 없었다. 그는 사단에 의하여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 이었고, 그에게 존재하는 신성은 사단의 시험 따위를 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단의 시험을 받았다. 그것도 최악의 상태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았으며, 그 최악의 상태는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결과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여러 가지의 모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진행된 사건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하의 신분인 <종>의 신분으로 시험을 받은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과 그 시험에 대비하는 성령의 준비하심은 하나님의 종들이 반드시 거쳐야하는 시험에 대한 전형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받게 될 시험에 관한 명분과 종류와 상태와 심각성을 계시 하셨고, 그 시험에 대처하는 방법과 자세를 또한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또한 선포하셨다<마4:1-11>.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 대한 계시적, 교육적 차원에서 시행된 것이었다.

③ 광야적 삶.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 삶은 거의가 광야적 삶이었다. 그에게는 밤이 되어도 돌아갈 만한 지정된 처소조차 없었다<마8:20><눅9:58>. 그는 언제나 빈들에 있었으며 광야에 있었다. 팔레스틴의 광야는 아라비아 사막과는 다른 것이지만 사람의 거주지로서는 적합할 수 없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광야에서 자신의 공생애 삶을 살았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광야적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고난을 대신하기 위하여 오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광야적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고난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고난으로 종결 되어질 것이며, 그 죽음이 그가 받아야 할 형벌의 궁극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그의 삶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에 의한 삶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하의 신분 곧 하나님의 종의 신분으로 왔다. 그리고 종으로서의 삶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살았다. 그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종의 삶의 전형이었고 원형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살아야 할 삶의 원리였고 실제였던 것이다. 그는 섬기는 자의 원리와 위치와 삶의 정도<程度>를 논리적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적 삶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종들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교육이었고 교훈이었다.

④ 로마 법정에서의 재판.

예수그리스도께서 로마 법정에 서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고난의 수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과 죽음은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가야바 대제사장이나 헤롯 대왕<헤롯.안디바-Herod.Antipas> 에 의하여 진행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과 죽음을 로마법정에 맡겼다. 만약에 가야바 대제사장이나 헤롯대왕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과 죽음이 맡겨졌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 하였을까? 그들은 틀림없이 예수그리스도를 정죄하였을 것이고, 자신들의 방법대로 목을 베거나 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살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된 메시야의 재판과 죽음에 조화되지 않는다<신21:23><마20:19>.
예수그리스도의 재판과 죽음은 무죄한 자로서의 정죄에 의한 죽음이어야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재판을 로마 총독에게 맡기셨던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로마법정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충족시켰다. 당시의 로마법은 매우 공정했으며, 따라서 로마의 재판에 대한 권위는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본디오 빌라도의 로마법정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정죄 받았고 로마법에 의하여 정죄되었다.

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무 십자가에 의한 죽음이었다. 성경은 나무 위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적 죽음으로 선포한다<신21:23>.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라 하여 금기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훼손된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시키는 법적 공의에 의한 심판적 죽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무<십자가>의 속죄적 죽음이어야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형제도는 유대적인 것이 아니라 로마적인 것이었다. 십자가의 사형제도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이었고 치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 시민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정복지에서도 가장 비천한 죄수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에 의한 죽음은 일반적으로는 유대교와 로마제국 정부의 종교적 정치적 입장이 묘하게 연합된 결과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결과였던 것이다.

A.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범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곧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로고스<성자 하나님>이시다. 인간 예수는 죽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로고스-성자 하나님>은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별된다. 예수는 실제로 죽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적인 죽음이지만 예수와 같은 죽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중보적 죽음으로서 사망 권세를 이기기 위한 사역적 죽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들의 죽음과 같은 차원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전제로 하는 죽음으로서 <생>과 <죽음> 두 가지를 모두 초월한 차원의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잘못 이해하여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형상적인 죽음, 가시적인 죽음, 환상적인 죽음, 신화적인 죽음, 등등으로 인식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히 실제적인 죽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을 초월한 죽음이다. 신학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신적 속성과 신적 능력과 신적 섭리에 의한 죽음으로서 부활을 전제로 한, 그리하여 <생사를 초월한> 죽음이라고 정립한다.

B. 삼일간의 장사.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는 아리마대 요셉에 의하여 치루어졌다<마27:57-60>. 본래 유대인들의 장례기간은 그의 신분에 따라 다르지만 팔레스틴의 기후가 몹시 덥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사망 당일에 장례를 치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서 삼일동안 장사 지내어져 있었다. 이러한 삼일간의 장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예고한 장사 기간 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기까지 삼일간이나 무덤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그의 사역적 차원과 그의 신적 속성으로 볼 때에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자신의 장사 기간을 삼일이라고 선포했던 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증거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하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히 죽지 않았고, 따라서 장사된 후에 제자들에 의하여 치료된 후 건강이 회복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당시에서부터 제기되었던 주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일간의 장사는 이러한 거짓 주장에 대한 대비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언급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기념하라고 분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베다니의 시몬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당시로서는 최고급품 이었던 <나드> 향수 한 근을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었다<마26:6-13><막14:3><요12:3-8>. 제자들, <특히 가롯 유다>는 이와 같은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비난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놀랍게도 평상시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마리아의 자기 섬김을 칭찬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서 반드시 함께 전하고 기념하라고 분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답지 않은 분부는 그리스도의 장례와 관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향유를 통한 자기 섬김을 자신에 대한 장사로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장례에 대하여 어떤 분부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장례에 대한 분부를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뜻밖에도 마리아의 행위를 자신의 장사에 대한 것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장례의 의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장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로고스로서의 장례>이고, 또 하나는 <예수로서의 장례>이다. 로고스로서의 장례는 부활이며, 예수로서의 장례는 매장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으로 죽음 자체로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는 것이며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으로서 어떤 죽음과도 비교 될 수 없는, 웅장하고도 장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장례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고 후례도 없을, 그러한 장례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비하의 신분으로서 그런 장례를 용납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장례에 대한 사실상의 최고성을 선포 하면서도 또한 가장 조촐한 장례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C. 음부에 내려가심.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 3일 간의 활동에 대한 비 진리적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신학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장사된 후 3일 동안 음부 <지옥>에 내려가 노아시대에 죽었던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 했다고 주장 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정죄되고 퇴출되었으나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에 의하여 근래에도 여전히 주장되고 있다. 저들의 주장은 다음의 성경을 근거로 한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 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시니라.-벧전3:18,19>

<이를 위하여 죽은 자 들에게도 복음이 전파 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4-6>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a. 그렇다면 죽은 자 들에게도 다시 한번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
b. 뿐만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도 음부 <지옥>에 갈수 있다.
c. 노아의 시대에 죽은 자 들에게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 위배된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매우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이 성경이 증거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것 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외적 소명>을 말하는 것이며, 노아 시대에 살았던 자들에게도 이미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⑤ 제자들의 배신.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경을 괴롭게 했음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야바에게 심문당할 때에 그의 곁에는 놀랍게도 단 1명의 제자조차 없었다.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던 제자들이 단 1명도 없었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한 배신감과 외로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배신 행위였다. 그는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결국에는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배신하였다.

****
우리는 제자들의 배신 기사를 통하여 적어도 두 가지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종들은 아무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람은 믿고 의지 할 존재가 아니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더욱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들을 버린 제자들을 일일이 찾으셨고 그들이 끝내는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조차 버릴 수 있도록 다독여 주셨다.
하나님의 종들은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어떻게 선, 후배, 및 동료, 동역자들과 협력을 유지해야 하는가를 정립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은 물론이고 동역자들간에 관계에서도 배신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며, 반면에 어떠한 배신행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포용하고 관용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야 한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1) 하나님 나라 선포.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먼저 전개한 사역은 하나님 나라 선포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지금까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된 하나님의 약속을 메시야 직분으로 확증하고 보증하는 것이었다.

2) 메시야 선포.

예수 그리스도가 두 번째로 전개한 사역은 메시야 선포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선포는 지금까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된 메시야 선포를 메시야 직분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3) 보혜사 선포.

예수 그리스도가 세 번째로 전개한 사역은 보혜사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선포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보혜사 성령의 존재와 그의 사역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 직분으로서 자신이 부활 승천한 후에 하나님의 섭리를 적용하게 될 보혜사 성령의 존재와 그의 사역을 선포한 것이다.

4) 제자훈련.

예수 그리스도가 네 번째로 전개한 사역은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고 교육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종 세움과 교육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승천한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계속하여 진행하게 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앞으로 교회가 계속하여 하나님의 종을 세우고 교육하는 것에 대한 모범적 규례를 정해주신 것이다.

(1) 하나님의 종 세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을 세움에 있어서 지위, 권세, 권력, 명예, 학력, 경력, 등등을 고려하지 않는 전례를 세웠다.

(2) 하나님의 종 교육.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들을 교육함에 있어 신학, 신앙, 인격, 사명, 등등을 교육하였으며 이론적인 교육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실제적 삶을 통하여 완전하게 교육하는 전례를 세웠다.

5) 성례 제정.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번째 사역은 성례<세례, 성찬> 제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 제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과 직무에 대한 영원한 기념으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과 직무에 대한 영원한 인정과 순종<신앙>에 대한 명령이었다.

6) 십자가 대속죄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역은 십자가 대속죄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역을 마친 후에 드디어 자신의 본례적 사명인 십자가 대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지금까지 선포된 메시야 직무에 대한 실행<實行>으로서 기독교의 근본원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점을 오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 이전에는 기독교의 근본 원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미 앞장에서 정리한바 있거니와 기독교의 근본 원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신적 작정하셨을 때에 이미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그것을 인간에게 확인시켜 주고 보장해 주는 의식이다.
.

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1) 부활의 의의.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의 차원 높은 인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의 부활에서 어떤 신학적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으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아예 거부하거나 아니면 관념적인 차원에서의 부활을 거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것에 달린 문제가 아니며, 또한 신학자들이 그것을 어떠한 차원에서 어떻게 정립하느냐? 하는 것에 의존 하지도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그것을 선포한다. 우리는 성경이 선포하는 바에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행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 이래 성자 하나님과의 구속언약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은혜언약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요3:16> 에 집약 되어진다. 성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약속은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완성 되어졌고, 그와 같은 완성의 결과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증명 되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언약의 이행을 증거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의한 결과이며 결론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구속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완전하게 완성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종결 된다면 인류의 구속은 실패로 끝난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만을 선포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부활을 약속하고 선포하였다. 성경은 이와 같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15:20><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골1:18> 등등으로 선포한다. 성도의 부활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보증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 부활에 대한 약속과 선포는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증거 되었으며, 당시의 성도들의 부활을 통하여서도 증명 되었다.<마27:52-53>

(4)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증거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그가 다시 살아나서 육체와 영혼이 재결합 되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그와 같은 상태적인 의미에서 끝난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피조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니고데모>에게 거듭난 자를 설명한 것<요3:1-8>과 사도들이 계속하여 선포한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중생 되어진 성도들의 신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새로운 영적, 육적 존재 <현세의 것과는 전혀 다른>를 의미하는 것이다<고후5:17><갈6:15><엡4:24><골3:10>.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전혀 새로운 상태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속죄함을 받은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의 삶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은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의 부활은 자체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부활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부활에 참여 하는 것-빌3:10; 계20:6>으로 선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역사의 출발이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여 이제 옛것을 벗어버리고<고후5:17><빌3:10> 새 하늘 새 땅 <계21:1> 에서 영원무궁한 삶을 살게 된다.

2) 부활의 창시자.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선포하였고<요11:25>, 자신이 성전, 그, 자체임을 선포하셨다. 자신이 그것을 헐었다가 다시 세울 것 이라고 호언함으로서 자신의 부활을 선포하며<요2:19-21>, 심지어는 자신에게는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선포 한다<요10:18>.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선포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독적인 능력적 역사로 인식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능력적 역사로 증거 한다<행2:24, 32; 3:26; 5:30><고전6:14><엡1:20>. 특히 <롬6:4><갈1:1><벧전1:3> 등등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성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선포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 할 때에 성부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하심을 말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삼위일체적 역사하심을 선포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3) 부활의 범위.

어떤 학자들은 예수는 제물로서 취함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대속죄제를 완성한 후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죽음으로 종료되었으며 메시야인 그리스도만 부활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고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의 활동을 통하여 증거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한 후에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먹으므로 자신의 완전한 부활을 증거 하셨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고 메시야인 그리스도만 부활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부활 교리에 대한 오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대하는 자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인간의 신체는 사후<死後>에 자연적으로 부패되어 붕괴되어짐으로 특히 3일이나 경과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체가 다시 복원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매킨토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예수의 지상적 몸을 구성했던 탄소, 산소, 질소 및 여타의 원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편 래쉬달 박사<Dr.Rashdall>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이보다 50배나 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가설도 그리스도의 부활보다는 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도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실제이다.

(1) 부활의 사실을 교묘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들.

① 허위 설<The falsehood theory>

허위 설은 제자들이 무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도적질해 간 다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고 거짓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허위 설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 대표자격인 켈서스<Celsus>는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허위 설을 주장하였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하는 주장들 중에 제일 먼저 제기된 것이 허위 설이다. 허위 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에 의하여 즉시 유포되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일 두려워한 것은 가야바를 비롯한 제사장들과 헤롯, 및 바리새파 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수시로 선포한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그의 부활이 사실로 나타날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봉쇄하도록 요청하였고, 빌라도가 그것을 거절함에 자신들의 병사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였고, 이에 당황한 그들은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허위 설을 유포시킨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병사들의 허위 설 보다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소식이 더욱 강하게 전파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에 의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유대는 물론이요 사마리아를 비롯한 근동 일대에 순식간에 전파되어진 것이다. 결국 허위 설을 유포한 자들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나, 유대교도들은 자신들의 자존심 때문에 허위 설을 억지로 믿었다.

② 기절 설. <The swoon theory>

기절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아예 3류 소설을 써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한 상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자들이 병사들이 졸고 있을 때에 그의 시체를 훔쳐내어 치료함으로 다시 살리었다는 것이다.

****
기절 설은 많은 반대를 받았다. 여자들 몇몇이 어떻게 무덤 문을 막고 있는 그 큰 돌을 굴려내고 예수그리스도의 시체를 훔쳐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대와, 병사들의 창에 의하여 물과 피를 거의 다 쏟아 버린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을까? 하는 것과, 만약에 살아있었다 할지라도 어떻게 3일 만에 회복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등등의 반대를 받은 것이다.

③ 환상설.<The vision theory>

A. 주관적 환상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오직 구세주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구세주가 약속한대로 돌아오실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자신들이 구세주를 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구세주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앙으로 인하여 신경과민 상태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러한 환상적 현상이 일어났고 그 환상의 불길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
이 환상설도 많은 반대를 받았다. 먼저, 제자들이 구세주에 대한 그토록 강한 믿음을 가졌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행동을 보여주었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잡혀 갔을 때 제자들이 한결같이 배반하고 도망한 것을 증거하며, 그들이 일상적인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 간 것을 또한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며 애통해 했던 것은 오직 여자들 몇 명뿐 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과연 그렇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동일한 내용의 환상적 현상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또한 그러한 현상이 3일 만에 일률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다.

B. 객관적 환상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복음 전파를 계속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이적적인 환상들을 제공하시어 제자들이 그, 환상을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
객관적 환상설은 주관적 환상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되었으나 역시 많은 반대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한 초자연적 현상들을 제공 하셨다면 어찌하여 보다 실직 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 <부활>을 택하시지 않고 그보다 약하고 속임수에 불과한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인가? 하는 반대를 받은 것이다.

④ 신화설.<Mythical theories>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대하는 새, 신화학파<new mythiccal school>가 일어났는데, 이 학파는 환상설이나 유령 설을 부정하였다. 저들은 바벨론이나 동양의 여러 나라로부터 전달되어진 전설적 이이야기들을 도입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의 신화적 전설로 만들었다. 저들이 제기한 신화 설은 몇 가지 형식으로 조성되었으나 모두가 황당한 것으로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의 지지도 받지 못하였다.

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사역.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 사십 일간 현세에 머무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 하였고, 제자들을 독려하였으며 특히 베드로를 통하여 사랑의 목회원리를 세워주셨다<마28장><막16장><눅24장><요20-21장><행1:1-9>,

7.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스도는 부활한지 사십일 후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부활만큼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충분하게 증거하고 선포한다<막16:19> <눅24:50-53><요6:62;14:2,12;16:5,10,17,28;17:5;20:7><행1:6-11><엡1:20; 4:8-10><딤전3:16><히1:3; 4:14; 9:24>.
조직신학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승귀의 신분>이라는 주제 하에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승천의 의의<意義>.

(1) 부활에 대한 보증과 완성.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에 대한 보증이며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다 높은 영광의 생애에로 이전 하신 것은 부활에서 시작되고 승천에서 완성되었다.

(2) 성육신의 종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제자들과의 남은 교제<마무리>를 위해서였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인성을 제하여 버린 상태로 제자들을 찾으셨다면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스승으로 인정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는 승천하기 까지는 인성을 소유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승천하면서 성육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제하였다. 이제 그에게는 성육신으로서의 잔존함이 전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제물의 필요성 때문에 <취하였던> 예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제한 것이다.

(3) 로고스<성자하나님>의 복귀.

중보자로서의 모든 사역을 완성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제 지상의 생활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로고스 <성자 하나님> 으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가 승천이라는 가시적인 방법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는 어떤 절차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시적인 승천은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전설적, 또는 신화적 방법이었다.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가 가시적인 승천이었던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였다. 인간의 유한성은 언제나 가시적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가시적인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를 믿게 되며, 자신들의 승천을 확신한다. 그리고 또한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게 된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는 가시적인 것이 되었으며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라는 천사들의 선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승천한 로고스는 우리에게는 영원히 구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로고스 <성자 하나님>으로 말하지만 구원과 관계된 로고스를 말할 때에는 로고스, 또는 성자 하나님으로 말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한다. 그는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이시며 교회의 영원한 머리이시며, 장차 심판주로 재림하실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신, 인 예수 그리스도<神人-God man-Jesus Christ>가 아니라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Logos-Jesus Christ>이시다

2) 승천의 범위.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메시야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었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메시야의 승천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메시야의 부활과 승천은 다르다. 메시야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지만 메시야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예수는 제물로서 취함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대속죄제를 완성한 후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나 성도의 부활을 보증해야 하기 때문에 부활까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메시야의 승천은 성자 하나님으로의 복귀이기 때문에 예수의 승천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 승천의 주체<본질>은, 신인<神人-God man>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로고스 <성자 하나님> 이시다.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도들의 승천을 확증시켜 주고 보증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따라서 거기까지만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었고 그리스도가 성자 하나님으로 복귀하실 때는 예수는 포함되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취함 받았다가> 사명을 다한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운명 하실 때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였다<눅23:46>.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승천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승천하였다면 성자 하나님 안에 인간 예수가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성자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는 승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부탁한 영혼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 영혼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스도는 일위<one Person> 안에 2성<two Nature>을 소유하셨지 2영혼<two Spirit>을 소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부탁한 그의 영혼은 인적 영혼<Human Spirit>이다. 그리고 그, 인적 영혼은 자연적인 출생에 의하여 존재하는 일반인들의 영혼과 같은 영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특별한 영혼이었다. 조직신학은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취했다>라고 표현한다. 그 영혼은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의 과업을 완수 했을 때 임무를 다하였음으로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없게 됨에 따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혼이 소멸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성육신이나 부활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발생하고 종료 되어지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섭리들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섭리에 전혀 결례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취했다>라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등등의 표현을 적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한편 우리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영혼<Divine Spirit>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하여 대답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존재하는 신적 영혼<Divine Spirit>이란 결국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대답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적 영혼, 곧 성령 하나님은 결국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이시다.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은 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신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편재하심> 또는 <하나님의 편만하심>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육신하시기 전이나 성육신하신 후에나 동일하게 <영>으로 존재하신다. 성육신하시기 전의 성자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후의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는 동일한 성자 하나님 곧<로고스>이신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 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실제로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중보자로서 <다 이루어진-요19:30>자신의 사역완수를 주권주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보증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며.
둘째. 중보자<대표자>로서 자신의 대속죄제를 통하여 구원받는 모든 자들의 영혼을 사면권주 이신 성부 하님께 맡기는 것이다.

8.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예수 그리스도는 가야바 대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장차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실 것을 선포 하였다<마26:64>. 베드로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선포를 주제로 하여 아름답고 멋진 설교를 전개한다<행2:33-36; 5:31>. 이외에도 성경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선포하고 있다<엡1:20-22><히10:12><벧전3:22><계3:21; 22:1>.

1)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의 의의.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이라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마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매우 훌륭한 옥좌<玉座>를 놓고 그 위에 위엄을 갖추어 앉으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시, 공간을 초월하여 편재, 편만하심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와 같은 개념은 성립조차 될 수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로고스적 직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단순히 신적인 권세와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의 중보적인 사역을 계속하신다.

(1)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 하셨을 때에, 그 <다 이루었음>은 그의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무를 다 이루었음이 아니라 그의 성육신을 통한 지상에서의 직무를 완성했다는 것이었다. 성자 하나님으로 복귀한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영원히 수행한다. 그는 하나님과 백성들의 교제를 연결하며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하여 언제나 간구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안전하게 보호되도록 하나님께 서원하며, 하나님의 종들의 수고와 충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영원히 중재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제사장 직무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슥6:13><히4:14; 7:24,25; 8:1-6; 9:11-15,24-26; 10:19-22><요일2:2>. 성도가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기 때문이다.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받는 것은 영원하고 완전한 중보자<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기 때문이다.

(2) 왕 으로서의 사역.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만왕의 왕으로서 다음과 같은 통치권을 행사한다.

A. 천군 천사들을 지휘하고 통치한다.
B. 우주만물의 생성과 결실을 주관한다.
C. 그의 성령으로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을 통치하고 보호한다.
D. 지상의 세계 만국을 통치한다.

(3) 선지자로서의 사역.

그리스도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선지자적 직무를 계속한다. 그는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육을 시행하였고 그들에게 복음전파를 비롯한 교회의 직무를 부여하였으며, 제자들이 그 직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약속하였다<요14:26; 16:7-15>. 그리스도의 약속은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고 그날 이후로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선지자적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2) 로마 카토릭의 오류.

로마 카토릭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지상의 권력자들처럼 옥좌에 앉아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저들의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마리아 승천 설에서 절정을 이룬다. 저들은 마리아의 위상을 드높여 영원한 동정녀의 위치에 좌정시켰고, 성모<聖母>라는 호칭을 부여하였으며,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드디어는 마리아를 불사신으로 추대하여 살아 승천한 것으로 조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옥좌를 그리스도 우편에 마련하였고, 그가 그리스도의 직무에 직, 간접 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로마 카토릭이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욱 효과가 있다는 저들의 허무맹랑한 교설 때문이다. 로마 카토릭은 마리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가설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 처녀설, 마리아 무흠설, 마리아 승천설이다.

(1) 마리아 무흠설.

저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에게 죄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마리아 무흠설<무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리아 무흠설<무죄설>은 마리아의 실존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를 거부하는 결과를 도출한다. 아담의 후손 중에 죄 없는 자는 없으며 따라서 마리아가 죄 없는 존재라면 그는 실존재가 아니라 <어떤 존재>의 현현이나 임재가 되고,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도 <현현>이나 <임재>가 되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2) 마리아 처녀설.

저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가 인간과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마리아가 영원히 처녀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마리아가 낳은 자들로 보지 않고 요셉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이복형제로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역시 전혀 비성경적이며 비논리적이다.

(3) 마리아 승천설.

저들은 마리아의 무죄설을 옹립함과 동시에 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마리아는 죽을 수 없는 성스러운 존재이므로 죽지 않고 승천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편에 앉아 예수 그리스도의 정사를 돕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리아<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추가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낳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여 그를 죽음 가운데 버릴 수 없었으며 따라서 마리아가 죽지 않고 살아서 승천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승천 할 때에 하늘로부터 땅에까지 황금빛 주단이 내려 깔리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옥좌에서 내려와 마리아를 영접하여 자기의 옆에 마련해 놓은 보좌에 앉혔다는 것이며, 효성이 지극한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기도 할 때에 들어주지 않으려 하다가도 옆에서 마리아가 들어주라고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준다는 것이다. 때문에 로마 카토릭은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다하여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다.<그러나 현대의 카토릭 사제들 중에는 이와 같은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며 일반종교 <특히 불교>에서 도입한 것으로 일종의 우화나 전설과 같은 3류 소설에 불과한 것이다.

제18장. 하나님의 심판과 우주의 종말.

하나님의 심판은 2차례에 걸쳐서 진행된다. 첫 번째 심판은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이고 두 번째 심판은 우주 만물의 종료 때이다. 따라서 첫 번째 심판은 이미 진행되었고 두 번째 심판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

1. 하나님의 첫 번째 심판.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를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포하신대로 아담에게 형벌의 심판을 내리셨다. 그리고 그것은 아담에게만 내려진 심판이 아니라 아담 이래의 모든 인류에게 일률적으로 내려진 심판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심판은 완전한 심판이 아니라 많은 것이 두 번째 심판 <최후의 심판> 때까지 집행 보류되고 집행 유예되는 <징계적, 형벌적, 제한적> 심판이었다.

1).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

(1) 육체적 죽음.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행위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였을 때, 그는 이미 선포되어진 형벌을 받게 되었는바 그 형벌은 곧 죽음이었다<창2:17; 3:19>. 그리고 그가 받은 형벌은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지게 된다. 이 형벌에 의한 육체적 죽음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육체와 영<靈>의 분리이고, 다른 또 하나는 육체적 기능의 일시적 종료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가 흙으로 지음 받았음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포하신다<창3:19>. 그러나 인간의 육체적 죽음은 인간의 육체가 영원히 멸절<annihilation>된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죽어서 땅에 묻히거나 또는 화장<火葬>되어지거나 또는 다른 방법에 의하여 소멸 되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우주적 종말 즉 하나님의 심판 때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적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으로서 다만 그 기능이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 일시적으로 정지 되어지는 것이다.

2) 영적죽음.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여 죽음의 형벌 받았을 때 그의 육체적 죽음은 즉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적 죽음은 즉시 이루어졌다. 이때에 아담에게 내려진 영적 죽음은 영의 멸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멸절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단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내려진 영적 죽음의 형벌은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지게 된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하였던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거절당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없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조치를 내리시지 아니하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두절되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형벌의 상태를 <막힌 담-엡2:14>으로 증거 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과 마찬가지로 영적 죽음도 완전하고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다. 인간의 영적 죽음은 2차에 걸쳐서 부활 된다. 1차 부활은 법적, 행정적인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죄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1차적인 영적 부활을 <영적회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1차적인 영적 부활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완전한 반면에 현재적, 상태적으로는 완전하지가 않다. 인간은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영적회복 상태>를 이룰 수 없고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조명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완전한 영적회복은 2차 부활로서 그의 개인적 종말 후에 하나님 나라에 입국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직접 뵈옵게 되며 첫 사람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에게만 적용 되어진다.따라서 인간의 영적 죽음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택함 받은 자들의 영적 죽음은 일시적인 것인 반면에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의 영적 죽음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되는 것이다.

2) 인간에 대한 죽음의 구분.

인간에게 내려진 죽음의 형벌은 집행과 동시에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성도들의 죽음이고 다른 또 하나는 일반인들의 죽음이다. 성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사면이 전제된 죽음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죽음의 형벌을 받음과 동시에 사면 받음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어지는 죽음이다. 반면에 일반인들의 죽음은 사면 없는 죽음으로서 죽음과 동시에 지옥으로 옮기어지는 죽음이다.

(1) 성도들의 죽음의 의의<意義>

성도들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상 형벌이 아니라 은총이다.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슬프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강복으로서 기쁘고 감사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어떤 학자들은 성도들의 죽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성도들을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산채로 데려 가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죽음을 거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지 않는 것에는 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사이의 형평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주권적 의지로 택한 자들을 산 채로 불러 가실 수 있다. 에녹과 엘리야의 경우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증거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시지 않고 성도들이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현실적인 섭리 역사 때문이다. 만약에 성도들이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고 할 때에 인류의 현세 역사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어질 것인가? 하는 것을 상상한다면 하나님의 그와 같은 섭리의 필연성을 충분히 납득하리라. 반면에 최후의 심판 때는 성도들이 죽음을 거치지 않고 산 채로 휴거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것이 종료됨으로 현세에 대한 어떤 혼란도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에녹과 엘리야의 휴거는 최후의 심판 때에 성도들이 휴거 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며 보장이다.>

(2) 일반인들의 죽음의 의의<意義>

일반인들의 죽음은 형벌의 시작으로서 곧 고통의 시작이다. 일반인들은 현세의 고통이 아무리 혹심하다 할지라도 지옥에서의 삶에는 절대 못 미치기 때문이다.

2. 사후의 상태.

1) 성도의 사후 상태.

(1) 성도의 사후 상태에 대한 성경의증거들.

① 구약성경의 증거.

구약성경은 신자들이 육체적 죽음을 맞은 후에 그들의 영혼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누리게 될 아름다운 삶에 대하여 선포한다<욥19:25-27><시16:9-11;17:15;73:23-26>. 뿐만 아니라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초월하여 승천하였다.

② 신약성경의 증거.

신약성경은 신자들이 죽은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더욱 복된 삶을 누릴 것을 선포한다. 신약 성경의 이러한 선포는 구약이 증거 하는 그것보다 더욱 구체적이며 사실적이다<마13:43; 25:34> <롬2:7,10> <고전15:49> <빌3:21> <딤후4:8> <계214; 22:3-4>.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선포하셨다.

③ 의인의 사후 처소에 대한 성경의 증거.

* 천부의 집 <요14:1>
* 낙원 <눅23:43> <고후12:4>
* 하늘 <시103:19> <엡4:10> <히7:26>
* 셋째하늘 <고후12:2>
* 광활한 땅 <사33:17>
* 새 하늘과 새 땅 <시102:26> <사51:6; 65:17> <마19:28>
<히12:27> <벧후3:12,31> <계21:1>

④ 천국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증거.

성경은 천국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 현세의 모든 것보다 좋은 곳 <마13:44-46>
* 사망과 애통과 눈물이 없는 곳 <계21:4>
*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마5:8><고전13:12><고후3:18><계21:3>
* 속됨과 거짓이 없는 곳 <계21:8,27>
* 최고의 아름다운 곳 <계212,8,10-21>
* 어두움이 없는 곳 <계21:23-26>
* 영영히 사는 곳 <마25:46>
* 썩지 않는 곳 <롬2:7>
* 거룩하고 흠이 없는 곳 <엡5:27>
* 상함과 해함이 없는 곳 <사65:25>
* 현세의 삶과는 전혀 다른 곳 <막12:18-27> <눅16:19-31>
*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곳 <요12:26; 14:2,3,18이하, 16:16이하>
<행7:59> <롬6:8-11; 8:17,29; 14:7-9> <고후4:14; 15:8> <빌1:21-23> <요일2:28; 3:2> <계7:17; 20:4; 21:23-24; 22:3-5>

(2) 성도의 사후 상태.

위와 같은 성경의 증거들은 성도들이 죽음과 동시에 그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약속된 영광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2) 일반인들의 사후 상태.

(1) 일반인들의 사후 상태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

성경은 악인의 계속적 존재함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으며<마24:5; 25:30,46><눅16:19-31> 그들의 영원한 처소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 지옥불 <마13:42>
* 불못 <계20:14-15>
* 옥 <벧전3:19>
* 무저갱 <눅8:31>
* 어두운 구덩이 <벧후2:4>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들은 죽음과 동시에 그 영혼이 지옥에 들어가서 고통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3) 중간기 상태.

중간기 상태란 인간의 죽음과 부활 <최후의 심판> 사이에 대한 시간적 공간적 개념들을 말한다. 이러한 중간기적 개념들은 사실상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아직 신학적으로 완전할 수 없었던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들과 로마 카토릭이 자신들의 어떤 필요성을 채우기 위하여 일반 종교들로부터 유입한 비 진리적인 것이다. 로마 카토릭이 주장하는 중간기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연옥<煉獄-purgatory>

로마 카토릭은 중간기 상태에 대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개념과 이교도들의 연옥교리<특히 아시아 종교의 연옥교리>를 종합하여 연옥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로마교회의 연옥교리에 의하면 현세를 사는 동안 전혀 범죄 하지 아니한 의인들은 죽음과 동시에 즉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영원 복락의 삶을 살게 되지만, 비록 택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현세에 사는 동안 범죄 하여 온전하지 못하고 순전하지 못한 자들은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정결의 장소인 연옥에 들어가서 자신의 죄에 합당한 정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천국에 즉시 입성하는 자들은 순교자들을 비롯한 성자들로서 소수에 불과하며 성도들 대부분은 사실상 연옥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연옥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정결의 장소이다. 그러나 그들은 연옥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을 즉시 뵈옵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아픔을 겪는바 이러한 아픔은 영혼을 괴롭히는 실제적인 고통인 <감각의 형벌>로서 매우 강한 것이다.
그들이 연옥에 머무는 기간은 그들이 현세에서 범한 죄에 비례한다. 그러나 그들의 연옥생활은 현세에 있는 성도들<특히 친지>들의 기도나 선행 그리고 미사와 헌금 등등에 의하여 경감될 수 있다. 따라서 연옥의 삶은 즉시 끝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최후의 심판 때까지 계속될 수도 있다. 한편 연옥에 대한 사면권은 교황에게 있다. 교황은 연옥에서의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또는 종료하게 할 수 있는 고유한 특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근거는 <마카비 후서12:42-45>이다.

(2) 선조<先祖> 림보<The Limbus Patrum>

중세교회 시대에 라틴어의 “림부스”<limbus-가장자리>라는 용어는 지옥의 가장자리, 또는 변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선조 림보-limbus patrum>와 <유아 림보-limbus infantum>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어졌다. 로마 카토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3일 동안 죽음에 머물러 계셨던 이유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데스>에 내려가셨다는 성경의 증거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림보>교리를 만들어내었다. 로마교회는 구약시대 성도들의 영혼이 죽어서 곧 바로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선조 림보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할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된 후 3일 동안 선조 림보에 가서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로마 카토릭의 주장에 의하면 <하데스>는 의인과 악인들이 임시로 거처하는 두개의 상반된 영역들이며 선조 림보는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해방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곳이다. 저들에 의하면 천국은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이행하기까지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3) 유아 림보<The Limbus Infantum>

로마 카토릭은 세례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한다. 따라서 세례 받지 못하는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주장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로마 카토릭의 주장대로라면 그들은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당연히 구원에서 제외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원에서 영아들의 구원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교도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할 기회 없이 죽었을 때에 그들의 영혼은 억울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로마 카토릭 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고심할 수밖에 없었고 나름대로의 변증들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부모들의 신앙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특별히 파송하여 그들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더욱 많은 문제점을 수반하였으므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로마 카토릭 신학자들은 드디어 하나의 묘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유아 림보 교리였다. 저들은 세례 받지 못한 유아의 영혼들이 지옥도 아니고 천국도 아닌 곳 <림보>에서 살게 된다고 함으로서 이 문제로부터 도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은 유아 림보에 대한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아 림보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 더욱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하나님 나라.

1) 하나님 나라의 구분.

(1) 하나님 섭리적 차원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표현은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통치하는 제반영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광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에 적용되어진다. 우주 만물의 물질적 정신적 사상적 시간적인 영역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지옥까지도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에 <영역>이라는 용어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귀속되지 않는 영역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사단의 통치 영역을 구분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영역을 통치하시고 사단은 육<현세>적인 영역을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사단의 권세를 <공중권세>라 하여 우주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드디어는 사단이 하나님과 끊임없는 싸움을 전개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단과의 한판 승부를 위하여 강림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사단과 영적인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사단과의 싸움에 동참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망령된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왜곡하는 무식한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죄를 범하는 행악이다. 사단의 활동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허용된다<욥1:12>. 사단의 공중권세<空中權勢>를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 공간적 권세로 이해하는 것도 신학적 무지에서 발생한 오류이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편만하신 하나님이시며 편재하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 영역과 통치 영역은 전 우주적이라는 표현으로도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의 존재 영역과 통치 영역은 전혀 제한이 없는 것이다. 사단이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 공간적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은 미신적 개념이며 비기독교적 개념이다. 그곳도 당연히 하나님의 존재 영역이며 통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단의 공중 권세라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 공간적 영역에 대한 <공중 권세>가 아니라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허상<虛像>적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사단의 권세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언제나 무릎을 꿇게 되어있는 빈약하고 허약한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창3:15>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종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을 통하여 증거 한다.

(2) 하나님 구속사적 차원의 하나님 나라<천국>.

구속사적 차원에서 통상적으로 언급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 하에서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현세의 삶을 종료하고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삶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되고 보장된, 완전하고 순전하며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1) 천국의 종류.

과거에도 그러하였지만 현대의 일부 몰지각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중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과 낙원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낙원>은 상대적으로 낮은 상태의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낙원을 로마 카토릭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연옥> 또는 <선조 림보>차원의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와 같은 구분은 성경을 오직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1) 천국.

천국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同義語>로서 <딤후4:18>을 제외하면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사용되어진 용어이다. 후기 유대교는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매우 주저하여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복음서이다. 마태는 후기 유대교의 이러한 신앙적 정서를 고려하여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 대신에 <하늘>이라는 의미인 <천국>을 사용한 것이다.

(2) 낙원.

낙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인 <파라데이스오스>는 고대 페르샤어 <파이리다에자-pairidaeza>에서 온 외래어로 원래는 <울타리를 두른 곳-enclosure>을 의미하였고, 과수<果樹>등을 심은 동산<garden>을 지칭하는 용어였다<느2:8><전2:5><아4:13>. 그러나 그리스어 역 구약성경인 70인 역에서 이 용어가 <에덴동산>에 대한 역어로 사용되어짐으로서 <창2:8> 파라다이스가 낙원을 의미하게 되었다. 묵시문학에서는 파라다이스를 의인의 영혼이 옮겨지는 장소로 표현하고 있으며, 외전<外典>에서는 지상적인 낙원으로 간주한다<에녹서>. 신약 성경에서는 파라다이스가 3회 등장하며<눅23:43> <고후12:2-4> <계2:7>, 낙원으로 의역되고 있다.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2종류의 파라다이스 상<像>이 있는데 하나는 낮은 차원의 것으로서 천국에 대한 준비단계인 것<음부>과, 다른 또 하나는 높은 차원의 것인 <완전한 천국>이었다. 성경에 사용되어진 낙원<눅23:43> <고후12:2-4> <계2:7>들은 모두가 높은 차원의 파라다이스로서, 즉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세째 하늘>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 등등을 <파라다이스-낙원>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 등등은 실제적인 표현들이고, <하늘> <낙원> <세째 하늘> 등등은 상징적, 또는 상태적인 표현들이다. 그러나 그 용어들의 의미는 동일하다. 그리고 동일할 수밖에 없다.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이중적이거나 구분되어지거나 차등이 존재하지 않는 단일하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천국의 위치.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과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최대적인 관심사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눅17:21>, 또 어떤 사람들은 현세<신약교회 시대>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장차 지구<地球>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성도들은 죽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현재적, 실재적으로 존재하며 성도들은 죽음과 동시에 즉시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분명하고 확실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며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눅17:20-21>라고 말씀하신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눈으로 보여 질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 장소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적 문화적 수준이 제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개념으로서 이해할 수 있거나 수납되어 질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저 광활한 우주조차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는 위치를 가르쳐 준들 그것을 이해하고 수납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눅17:20-21>을 통하여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에 연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신앙 안에 소유하라는 교훈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명심하여 우리들의 신앙 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4.하나님의 두 번째 심판<최후의 심판>

1) 그리스도 재림.

(1) 그리스도 재림의 주체.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때의 그리스도는 중보자 그리스도가 아니라 <로고스-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법-로고스>이시며, <심판주-그리스도>이시며, <만왕의 왕-성자 하나님>이시다.

(2) 그리스도 재림의 목적.

① 사단의 단죄.

그리스도는 사단을 단죄하기 위해 재림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단과 그의 수하들에 대한 단죄가 있을 것을 선포한다<마13:29-30>. 사단과 모든 악의 세력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들어간다.

② 세상의 심판.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한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생, 사 간을 불문하고 현존하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는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24:30,31; 25:31,32>.

③ 새 천지 건설.

그리스도는 새 하늘, 새 땅을 건설하기 위해 재림한다<사65:17; 66:22; 계21:1>. 대자연을 비롯한 우주 전체는 하나님의 심판 때에 완전히 종료되고 새로운 세계가 건설될 것이다. 따라서 대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실상 새로운 역사의 출발이다.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세계의 건설에 대하여 구체적인 계시를 하지 않고 묵시적인 계시만을 남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를 묵시적 계시로 남기신 것은, 그 새로운 세계를 구체적으로 계시한다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세계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임이 분명하다. 반면에 성경은 그 세계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새롭게 창조되어 진다는 어떤 암시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 새로운 세계는 이미 창조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그리스도 재림의 시기.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의 재림을 선포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촉구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선포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그리고 불시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직전에 일어날 대사건들에 대한 언급 때문에 어떤 사건들 <예를 들면 큰 지진이나 기근, 또는 거짓 선지자들의 범람과 신앙적 탄압과 박해 등등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닥쳐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로부터 2천 여 년이 가까워 오도록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언급한 재림 직전의 사건들이 아직도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근래에는 이루어지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재림을 그렇게 선포했을까? 그리스도께서 매우 다급한 어조로 자신의 재림을 선포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재림에 대비하게 한 것은 성도 개인의 종말에 대한 준비를 촉구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과 관계없이 성도 개인의 종말은 예측불허의 순간에 닥치기도 한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그것을 준비시킨 것이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재림과 함께 전개되어지는 우주적인 심판의 때를 묵시적으로 선포하였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라고 선포하심으로서 그것이 전혀 예측불허의 사건으로 닥쳐 올 것을 묵시적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그것이 분명하게 선포되어짐에 따르는 모든 가능성을 일체 배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준비의 촉구와 묵시적인 선포의 의미를 지혜롭게 받아들여 우주적인 심판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언제 닥치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개인적인 종말과 심판이 바로 목전에 있다는 신학적, 신앙적 개념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한다.

(4) 그리스도 재림의 방식.

① 실제적 강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천사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이와 같은 성경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실제적인 재림이 될 것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② 육체적 강림.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는 성경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실제적인 재림임과 동시에 육체적인 재림이 될 것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논증한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은 실재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육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강림하신다고 할 때에, 그의 육체가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드리기 이전과 같은 <인성을 소유한> 육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셨던 <인성이 포함된 육체>는 대속제물로서의 필연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로고스-성자 하나님>께서 취하신 것이었고, 그가 십자가의 대속죄제의 사역을 완수하고 부활승천 하실 때에 이제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는<중보자-로고스-그리스도>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며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고스-메시야>로서의 직함<職銜>이다. 반면에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는 <메시야-로고스-그리스도>가 아니라 <심판주-로고스-그리스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육체로 재림하시는 것은 두 가지의 특별한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심판주-그리스도-로고스-성자 하나님>이 만왕의 왕과 심판주의 영광을 획득하신 것은 메시야로서의 직무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에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모습으로 재림하시는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그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 모습이며, 따라서 우리가 보고 알고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또는 어떤 미래에 재림하시는 주님이 과연 마리아를 통하여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인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당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실재적인 자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식언을 하시지 않으시며 약속을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약속하신 그대로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재림에 대하여 당시의 성도들 <천국에 있는>이 증인이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림을 <로고스-성자 하나님>의 재림으로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하는 것이다.

****
재림 때의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를 정립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할 때에 예수의 승천은 불가하므로 예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만 승천하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재림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재림한다면 그때의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심판주로서의 그리스도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곧 만왕의 왕 성자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는 인성을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로 재림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재림하는 것은 성경이 약속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재림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예수는 성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재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성을 가진 예수가 아니며 현현<顯現>적 예수도 아니다. 이때의 예수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인류세계에 강림하실 때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예수다. 즉, 이때의 예수는 필요에 따라 다시 <취해진> 실제적 예수이지만 인성을 가진 예수나 현현<顯現>적 예수가 아닌 형이상학적 차원의 예수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요1018>고 선포하신다.

③ 가시적 강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행1:11>이 증거 하는 바대로 실재적인 것이며 또한 육체적인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국 모든 사람이 보고 알 수 있는 가시적인 재림이 될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많은 곳에서 증거한다<마24:30;26:64><막13:26><눅21:27><행1:11><골3:4><딛2:13><히9:28><계1;7>.

④ 돌연적 강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재림을 예측할 수 있는 대사건들이 재림 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증거 하면서 또한 자신의 재림이 전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불시에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한다<마24:37-44; 25:1-12><막13:33-37><살전5:2-3><계3:3; 16:15>.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선언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진의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선포는 이중적인 것이거나 모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적용하고 있다. 언제나 깨어있는 신앙적 삶을 사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하여 그의 재림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깨어있는 신앙적 삶을 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삶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으르고 나태한 자들은 깨어 있는 신앙적 삶을 살지 못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삶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함에 따라 주님의 재림은 결국 갑작스러운 것이며 당황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준비되고 예비 되어있는 자들과 반대로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상급과 심판으로 적용되어질 것이다. 따라서 돌연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섭리에 지극히 합당한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의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에 의하여 그것을 이미 알고 준비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지 못한다. 따라서 <마25:1-12>의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깨어있는 신앙적 삶을 사는 자들>은 택함 받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기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미련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자들>은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⑤ 영광과 승리적 강림.

이미 앞에서 논증한바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재림이 아니라 심판주 <로고스-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재림이시다. 따라서 그의 재림은 마굿간 말구유의 초라한 비하<卑下>적 강림이 아니라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만왕의왕, 심판주로서의 영광과 존귀와 위엄의 강림이 되시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 주님의 영광과 존귀와 위엄은 그 누구도 보거나 알거나 느끼거나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하늘의 구름들이 우리 주님의 마차가 될 것이며<마24:30>, 천군천사들이 우리 주님의 근위병이 될 것이며<살후1:7>, 천사장들은 우리 주님의 전령들이 될 것이며<살전4:16>, 하나님의 성도들이 우리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행원이 될 것이다<살전3:13><살후1:10>.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이 우리 주님의 발아래 엎디어 떨 것이며<고전15:25><계19:11-16>,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심판.

(1) 죽은 자들의 부활.

그리스도가 재림하면 인류 역사상 존재하다가 죽은 모든 자들이 일제히 부활한다. 이때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다. 한편 인류 역사상 존재하였던 모든 자들의 육체들이 부활할 때에 그때까지 천국과 지옥에서 살고 있던 그들의 영혼들이 각각의 육체와 결합한다. 이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생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최고, 최상의 아름다운 모습과 상태로 변화되어 부활한다. 즉 천국에서의 삶에 적합한 상태로 변화되어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반대로 형벌을 받기에 적합한 형태와 상태로 변화되어 부활한다.

(2) 공중휴거<空中携擧>.

그리스도의 심판이 진행되기 이전에 먼저 당시에 살아있는 자들의 공중 들림<휴거>가 있다<살전4:17>.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때까지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산채로 들림<휴거>받는다. 이때의 휴거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적용되며, 그들은 현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최고, 최상의 아름다운 모습과 상태로 변화되어 휴거된다. 즉 천국에서의 삶에 적합한 상태로 변화되어 휴거되는 것이다.

(3) 일반인들에 대한 심판.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현세의 삶을 사는 동안의 선악적 공적을 근거로 하는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천국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공적은 천국에 가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는 근거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공의적 심판을 받아 지옥에서 살게 되는 형벌을 받으므로 악한 행위가 크고 많을수록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며, 선한 행위가 많을수록 가벼운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매우 선하여 가벼운 형벌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의 지옥 삶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고통스럽다.

(4)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심판.

하나님의 자녀들도 현세적 삶의 공적을 근거로 하는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현세적 삶의 공적에 대한 것은 심판의 근거가 되지만 죄과에 대한 것은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죄는 영원히 사함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현세적 삶의 공적에 따라 이미 예비된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된다. 성경은 그것을 흰 보좌<백보좌> 심판이라고 선포한다<계20:11>. 이때에 그들은 두 가지 차원에서 보상적 심판을 받게 된다.

① 자녀로서의 보상.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녀의 신분으로서 최후의 심판 때에 모두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선한 행적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이때의 선한 행적이란 도덕적, 윤리적, 준법적, 등등의 일반적인 선행적 삶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삶을 살은 자들은 그에 따르는 상급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들은 <생명의 면류관>만 받을 것이다.

② 종으로서의 보상.

택함 받은 모든 자들은 하나님 종의 신분으로 선한 행적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이때의 선한 행적이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삶>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자녀들이 받는 기본적인 상급의 차원이 아니라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등등이다. 저들은 직분에 관계없이, 그리고 사명현장의 규모와 시간에 관계없이, 오직 그의 사명적 삶의 질<質>에 근거하여 상급과 면류관을 받는다. 초대형 교회에서 수십 년 동안 목회를 한 목사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명을 이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 면류관도 받지 못할 것이요 농어촌의 작은 교회에서 말없이 충성 봉사한 집사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명을 이행하였다면 그는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5. 최후의 상태.

1) 일반인들의 최후 상태.

(1) 일반인들의 영원한 처소.

현대신학은 종말론에서 영원한 형벌의 개념을 분명히 배제하고 있다. 특히 재림파와 천년여명론자<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제7일 안식일 교단 등등의 종파들이 대표하는 영혼멸절설자들<Annihilationists>과 조건적 영혼불멸성을 지지하는 자들은 악인의 지속적 존재를 부정함으로서 영원한 형벌의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 <지옥>이라는 용어는 지상에서 겪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고통들에 대한 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이 장차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한다<마25:40><눅16:19-31>. 뿐만 아니라 성경은 악인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선포한다. 성경은 악인들이 거하게 될 고통의 장소를 <게헨나-γὲεννα>라고 선포하는데 이 명칭은 히브리어<게-יג-땅, 혹은 골짜기>와 <힌놈-מנה> 또는<뻬네힌놈-מנה ינב-힌놈의 아들들>에서 유래되어진 말이다. 이 명칭은 원래 예루살렘의 서남 골짜기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이 장소에서 악한 우상숭배자들은 자기들의 자녀들을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서 <몰록>에게 제사를 드렸었다. 따라서 그곳은 매우 불결하고 악한 곳으로 간주되었으며, 나중에는 <도벳-침의 골짜기>라는, 전적으로 멸시받는 지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곳은 예루살렘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 되었으며, 쓰레기들을 태우기 위하여 언제나 불이 타고 있었고 구더기가 들끓었으며 쓰레기 타는 냄새와 쓰레기 썪는 냄새로 악취가 만연하였다. 결과적으로 그곳은 악인들이 장차 거하게 될 영원한 고통의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다. <마18:9>은 <텐 게엔난 투 푸로스-τὴν γὲεναν του πυρος-불의 게헨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이 강력한 표현은 앞 구절에 있는 <토 푸르 토 아이온니온-τὸ πὺρ τὸ αὶωνιον-영원한 불>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성경은 역시 <풀무불-마13:42>과 <불 못-계20:14,15>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계4:6>와 대조를 이룬다. 이 밖에도 <옥-벧전3:19> <무저갱-눅8:31> <어두운구덩이-벧후2:4> 등등이 지옥에 대한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이 성경의 증거에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은 지옥이 실제적<장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곳의 상태가 지극히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또한 선포하는 것이다.
만약에 지옥이 여화와의 증인들이나 제7일 안식일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다만 상징적인 것으로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면 성경이 그곳을 그렇게 분명하게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결코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의 존재가 죽음이라는 것으로 완전히 종료되기 때문이며, 그들의 존재가 완전히 종료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악행에 대한 면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옥이 여화와의 증인들이나 제7일 안식일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다만 상징적인 것으로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이 더욱 악하게 살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악한 사람들이 <어차피 한 세상 사는 것으로 끝나는 인생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 보고 끝내자>라고 생각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물론이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 하다.
따라서 성경이 증거하고 선포하는 대로 악인들이 장차 거하게 될 영원한 처소인 지옥은 실제적 <장소적>으로 분명히 존재하며 지옥은 또한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는 비참한 곳임이 분명하다.

(2) 일반인들의 영원한 상태.

성경은 일반인들의 영원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 하나님의 은총의 완전한 결여
* 죄가 완전히 지배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생활의 무궁한 혼란.
* 육신과 영혼의 극심한 고통과 고난.
* 양심의 가책, 고뇌, 절망, 비통, 이를 갊, 등등의 주관적 형벌.
<마8:12; 13:50><막9:43, 44, 47, 48><눅16:23, 28><계14:10; 21:8>

(3) 영벌의 등급.

악인의 영벌에는 분명한 등급이 있다. 성경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인의 행위에 따른 차등적인 형벌을 부여하실 것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고라신><벳세다><가버나움>의 형벌이 다른 성<城>들의 그것과 다른 것임을 선포하셨고<마11:22-24>, 종들의 형벌과 서기관들의 판결에 차등이 있을 것임을 선포하셨다.<눅12:47-48; 20:47>
악인들의 형벌에 어떤 차등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근거한 것인 반면에, 또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악행의 과다<過多> 또는 경중<輕重>에 관계없이 동일한 형벌이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허락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비록 악인들의 선행일지라도 그것을 귀히 여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4) 일반인들의 형벌의 기간.

성경은 악인들의 형벌기간이 일시적이거나 유한적인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으로서 영원한 것임을 선포한다<마18:8;25:46> <막9:43,48> <눅16:26> <요10:23> <계14:10-11; 19:20; 20:10-11; 21:8>.

2) 의인의 최후상태.

(1) 의인들의 영원한 처소.

지옥이 실재적이며 현재적인 것과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 역시 분명히 현재적이며 실제적인 장소로서 존재한다. 성경은 그곳을 많은 처소들을 가진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증거하고 있으며<요14:1>, 성도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고 증거하고 있고<마22:12-13; 25:10-12> 도처에서 그곳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선포하고 있다.

(2) 의인들의 영원한 상태.

우리가 증거 받은 바에 의하면 그곳은 영원무궁한 곳이며 현세에서와 같은 삶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곳 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사실을 <마6:20 > <마13:44-45> <눅16:19-31> 등등을 통하여 소개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들의 천국적 삶에 대하여 보다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을 삼간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어떤 체험을 근거로 한 천국을 신바람 나게 소개하기도 한다. 저들의 소개에 의하면 천국의 삶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으며 직분의 서열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 하는 천국은 그러한 곳이 아니다. <마20장>을 비롯한 많은 구절들은 천국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분명하게 증거 한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들을 통하여 우리가 확인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우리의 상식과 지식과 지혜 같은 것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 등등의 원형이요 극치요 본질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시는 것은, 사실대로 설명해 주셔도 우리들의 유한성에 의하여 오히려 천국의 본질이 축소되고 제한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왜곡되고 오류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3) 상급과 면류관.

성경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의인들이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딤후2;5><약1:12><벧전5:4><계2:10>.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그것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딤후4:7-8>. 반면에 성경은 의인들이 받을 상급과 면류관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여 여러 가지 낭설을 유포하기도 한다. 특히 일부몰지각한 부흥사들이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목사와 성도들이 가는 천국이 다르고 받는 상급과 면류관도 다르다고 주장하는가하면 목사들 사이에도 천국의 삶과 상급과 면류관에 차등이 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주장들에 반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도 어긋나거니와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천국에서의 삶은 공평하고 보편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상급과 면류관은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많이 신앙생활을 하고 또한 하나님의 일을 했느냐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으로 했으며 누구를 위하여 했으며, 어떠한 자세로 했느냐 하는 것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하사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떠한 상급과 면류관을 예비하셨는가? 하는 것에 연연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세가 아니다. 상급과 면류관을 바라는 차원에서 신앙적 삶을 산다거나 또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유익을 위한 신앙적 삶이나 사명적 삶은 오히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야 하며, 심지어는 사명에 대한 욕심까지도 당연히 버리는 신앙적 사명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급과 면류관에 대한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언급을 생략하신 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것에 연연하여 하나님 앞에 불경을 범하지 않게 하시려는 배려이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된 것을 최고의 상급으로 알아야하며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또한 최고의 면류관으로 알아야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더 바랄 것 없는 영광으로 아는 신학적, 신앙적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3) 천국과 지옥의 위치.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복락의 장소는 그들이 올려다보는 하늘에 있다. 과거의 기독교 성도들 <특히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중세시대의 성도들까지>도 이러한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대의 성도들조차도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개념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는 최고의 존재를 <하늘님> 또는 <하느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로마카토릭 까지도 같은 형편에 속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가시적으로 이루어 질 때에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올라가심은 하늘로 올라가심이 아니라 다만 장소적인 이동이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적용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분명 올라가심이 아니라 내려가심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하늘이라는 것은 사실상 어떠한 하나의 장소라기보다는 광활한 공간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하늘나라>라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것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천국의 현 위치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이 그곳의 현 위치를 우리에게 명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곳의 위치를 명시하여 주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의 위치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 대한 개념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신학이 정립되지 않고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대에 지옥은 지구의 땅속 지하였다. 그러나 지옥은 지구의 땅속 지하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이 지옥의 현 위치를 우리에게 명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의 현 위치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할 수 없다. 그러나 천국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그곳의 위치를 명시하여 주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의 위치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재림 이전의 대사건<大事件>들.

1)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발생하는 사건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1) 복음의 완전 전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복음이 인류 세계 전 지역에 완전히 전파될 것이다<마24:14> <막13:10> <롬11:25>.현재 세계전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 같지만 아직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이 많으며 복음이 전파되었던 지역들 중에 복음이 거부된 지역도 많다. 복음의 완전 전파는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복음이 전파된 지역이라 할지라도 현재 복음이 거부되어져 있다면 그곳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으로 간주해야 한다.

(2) 이스라엘의 회심.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으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은 성경과 구약시대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며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가 그것을 증명한다<슥12:10; 13:1><롬11:25-26>.

2) 인류사회의 문명적 발전에 의하여 발생하는 사건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인류 문명의 지나친 발전으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각종 사건들이 발생할 것이다.

(1) 국가적 전쟁 및 기근과 지진의 발생.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국가적 전쟁과 기근, 지진, 화산폭발, 등등의 자연적인 재앙들이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지금까지도 무수하게 반복되었지만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전쟁과 각종 재난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지금까지 인류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다<마24:7-8><막13:8><눅21:10-11>.

(2) 성도들에 대한 신앙적 박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로마 제국의 박해나 또는 일본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와 비교가 안 되는 박해일 것이다. 이러한 박해는 기독교에 대한 타종교의 박해, 정치적 이유에 의한 박해, 민족적 갈등, 문화적 갈등, 등등의 요소들을 포함할 것이다<마24:9><막13:13><눅21:17>.

(3) 인류사회에 만연되는 증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인류 사회에 미움과 증오가 만연될 것이다. 인류 사회에 미움과 증오가 만연되는 이유는 종교, 정치, 국가적 경쟁, 민족적 갈등, 문화적 갈등, 등등의 요소들 때문이다<마24:10> <막13:12> <눅21:16>.

(4) 불법의 만연과 사랑의 소멸.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인류사회에는 극도로 발전된 개인주의 사상들로 인하여 각종 편법, 위법, 탈법, 등등의 불법들이 난무할 것이며 그로 인한 무질서와 혼란이 가중되어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게 될 것이고 사랑과 자비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은 잊혀지고 사라질 것이다<마24:12>.

3) 사단의 흉계에 의하여 발생하는 사건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눈치 챈 사단은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며 그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각종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1) 거짓 선지자들의 범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사단의 수하들이 인류사회 전체에 범람하여 선지자 행세를 하면서 각종 비 진리와 오류의 이단 사설들을 만연시키면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미혹하고 유혹할 것이다<마24:11> <막13:6> <눅21:8>.

(2) 대 배교와 대 환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사단의 흉계로 인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배교와 이탈이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기독교는 심한 혼란 속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끝까지 책임지실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배교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마24:21> <막13:9> <눅21:22-24>.

(3) 적그리스도의 출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드디어 적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사단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 각종 비 진리와 오류의 이단사설들을 만연시키면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미혹하고 유혹하면서 그들의 배교와 이탈을 획책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실패하자 드디어 직접 나타나 휘하 졸개들을 진두지휘하는 가운데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단의 마지막이다. 사단의 최후 발악이 시작되면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마24:24> <막13:6> <눅21:8>.

7.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오류적 주장들.

기독교 역사에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오류적 주장들이 수없이 등장하였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7년 대 환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종말론에 있어서 <7년 대 환란>이라는 사건에 대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 7년 대 환란은 다시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으로 구분되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7년 대 환란이나 전 3년 반, 또는 후 3년 반의 사건들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사건들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러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는가? 그것은 <단9:24>에 나오는 <70주>와 <단9:27>에 나오는 <한 이레-7일>과 <한 이레의 절반>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단9:24>에 나오는 <70주>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 한번 허락되는 은혜의 시간에 대한 상징적인 기간이며, <단9:27>의 <한이레>와 <한이레의 절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과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막을 내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신앙적 종료의 기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종말론에 적용하여 <70주> 또는 <한이레-7일>을 7년으로 간주하여 7년 대 환란이라는 등식을 설정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등식이 성립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겠으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로마 카토릭의 술수를 개혁주의자들이 분별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로마 카토릭에 의하여 전개되어진 비 진리적인 역사를 소개한다.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로마 카토릭은 일반 성도들에게 성경을 금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면죄부 제도> <연옥교리> <미사제도> <성직제도> <유물숭배 및 성자숭배와 성상예배> <고백성사와 고행 및 헌금을 통한 속죄> <마리아의 중보>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헌금> <성찬에서의 미신적인 화체설> <마녀사냥을 빙자한 각종의 잔인무도한 종교재판> 등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로마 카토릭의 이러한 만행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하는 사단적인 악행임을 깨달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 <개혁주의자>들은 로마 카토릭에 대항하여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고 특히 로마 카토릭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하여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자신들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들어나게 된 로마 카토릭은 당황하게 되었으며, 특히 로마 카토릭의 최고 권위자인 교황이 적그리스도로 간주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540년에 조직된 예수회<the Jesuits>와 이탈리아 출신의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회의가 1545년 트렌트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트렌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대항하는 각종 방법론들이 제기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로마 교황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주로 <예수회> 소속의 신학자들에게 맡겨졌는데 그들은 이 일을 위하여 오랫동안 연구하고 노력하였다. <미래주의 해석자>로 대변되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신학자인 리베라<Francisco Ribera-1537-1591>는 1590년에 500페이지 분량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출판하여 교황이 결코 적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였고, <과거주의 해석자>로 대변되는 또 다른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신학자인 알카자<Luis De Alcazar-1554-1613>는 40년에 걸친 연구 노력 끝에 900페이지 분량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통하여 교황을 변호하였다. 리베라는 요한계시록에 예고된 사건들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기 때문에 교황과 관계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교황을 변호하였고, 알카자는 요한계시록에 예고된 사건들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사건들이라고 주장하여 또한 교황을 변호하였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 방법들이 세대주의자들을 통하여 교묘하게 인용되었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역사를 <7세대주의>로 나누어 분류하였고 신약시대의 교회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역사적 도구로 보지 않고 배신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기까지의 과도적인 존재<세대>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중심으로 하는 지상천년 왕국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세대주의자들의 비성경적인 주장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에 슬그머니 도입되었고 어느 사이엔가 7년 대환란 설이 개혁주의 종말론에 본격적인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
우리는 이러한 7년 대 환란설에 반대한다. 그것은 7년 대 환란에 대한 성경의 증거가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7년이라는 유예기간을 성도들에게나 택함 받지 못한 자들에게나 부여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증거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로부터 시작되는 최후의 심판은 불시에 닥치면서도 다급하고 단호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7년과 같은 유예기간 같은 것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성경은 다만 환란을 비롯한 여러 가지 대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전에 전개되어진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2) 천년왕국론.

천년왕국론은 요한계시록 20장 2,4,7절을 기초로 하여 유추되어진 신학사상이다. 일단의 신학자들은 <계20:2,4,7>을 근거로 하여 세계의 종말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세상을 지배할 것이며 사단은 하나님에 의하여 천년 동안 결박당한 채 무저갱에 갇힐 것이라는 신학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년왕국론은 통일된 것이 아니었다. 천년왕국론은 <전천년왕국론><후천년왕국론><무천년왕국론> 등등의 여러 가지 견해로 나뉘어 주장되어졌고 나중에는 세대주의자들에 의하여 또 다른 차원의 천년왕국론이 주장되어지기도 하였다.

(1) 전천년왕국론.

전천년왕국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먼저 있은 후에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신학사상이다. 전천년왕국론은 주후 2세기의 기독교 지도자였던 이레네우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그의 전천년왕국론은 초대교회 시대의 전천년왕국 신학사상으로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전천년왕국론의 확고부동한 신학사상이 되었는바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 세계는 창조의 6일에 해당하는 6천년간 지속될 것이며 이 시기의 종말에 이르러 성도들의 고난과 신앙적 박해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사단이 적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등장하여 선한 세상을 파괴하고 악하게 만들은 후에 무례하게도 하나님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시 재림하시어 사단을 패퇴시킬 것이며, 성도들의 육체적 부활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천년동안 함께 즐기고 누리는 (천년 지상 왕국)이 시작될 것이다. 천년기 후에 사단이 무저갱에서 나와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이 때에 모든 악인들의 심판이 또한 있을 것이다. 그 후에 새로운 창조세계가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질 것이며,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 새로운 창조세계에서 영원복락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 후천년왕국론.

후천년왕국론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성도들이 천년동안 현세를 지배한다는 개념이다. 후천년왕국론은 기독교의 복음이 왕성한 현재를 천년왕국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현재의 기독교 시대가 앞으로 얼마동안 계속된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후천년설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천년왕국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영향력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또 하나는 그것이 자연적 진보과정을 거쳐서 실현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3) 무천년왕국론.

무천년왕국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한 천년왕국의 존재를 거부하는 신학사상이다. 그러나 무천년 주의자들의 이러한 신학사상을 오해하여 그들이 요한계시록의 증거들을 부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한 천년왕국을 상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전<全>기간을 천년왕국으로 보는 것이다.

3)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

현대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은 대체적으로 전천년왕국론을 기초로 한다. 현대 세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이중적인 임재사이를 구별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대사건<大事件>의 서로 다른 두 국면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개념의 통일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저들의 종말론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일차적 재림은 지상 재림이 아니라 공중 재림이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에 잠자던 성도들과 살아 존재하던 성도들이 함께 들림 받아<휴거>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이때의 휴거를 <은밀한 휴거-secret rapture>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 사건이 전혀 아무런 징조나 예고 없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예고하고 있지 않다.> 불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후에 7년 동안의 공백이 있는데 이 기간 동안에 세상이 완전히 복음화 되고<마24:14> 이스라엘이 회심하고 기독교에 귀의하며<롬11;26>, 대 환란이 일어나고<마24:21-22>,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크게 활동한다.<살후2:8-10> 7년 대 환란이 끝난 후에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함께 지상에 강림하시어<살전3:13> 모든 열국을 심판하며 그때로부터 천년 동안 지상을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천년의 다스림이 끝난 후에 마지막 심판이 있게 되고 그 심판이 끝난 후에 새 하늘 새 땅이 건설되어 진다.

이 부분에 있어서 세대주의자들 간에 의견이 다르다. 어떤 자들은 천년왕국 자체를 천상적인 것으로 주장하여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을 거부하는가 하면 또 어떤 자들은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심판을 3중적인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을 근거로 하여 이미 앞장에서 소개한 <현대적 전천년왕국론>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4) 새 하늘과 새 땅.

성경은 최후의 심판 후에 도래하게 될 새로운 세계를 선포한다. <마19:28>은 그것을 <세상이 새롭게 되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고 <행3:2>은 <만유를 회복하실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히12:27>은 <만든 것들의 변동>으로 <벧후3:12-13>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증거 한다. 특히 <계21:1>은 환상 중에 본 <신천지>를 선포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하여 성경은 자세한 언급을 생략한다. 때문에 루터파 신학자들은 <벧후3:7-13><계20:11; 21:1>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창조에 의한 새로운 세계를 주장하며 개혁주의자들은 <시102:26-27> <히12:26-28>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세계가 다듬어져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우리는 최후의 심판 후에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하여 함부로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한다. 하나님께서 묵시적으로 덮어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펼쳐 주시기까지 함부로 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어떠한 결론을 내려야한다면 현재의 세계가 다듬어지는 <신천지> 보다는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신천지>를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능성을 고려할 때에 오히려 그것이 참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신천지>는 이미 하나님의 우주창조 때에 창조 하셨으리라 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 하시며 완전무결하시기 때문이다.

5) 6. 6. 6.

한국기독교에 한때 <666> 에 대한 괴이한 주장이 전개 되어 졌었다. <666> 에 대한주장은 매우 다양 하였으나 그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후의 심판 전에 사단이 현세적인 모든 권세를 장악 할 것 이며, 모든 사람은 이마 또는 팔에 짐승 (사단)의 숫자인 (666)의 표를 받는다. 이 숫자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의,식,주)를 전혀 해결 할 수 없으며 전혀 어떤 활동을 할 수 없고 드디어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은 (666)의 숫자를 받는 배교행위를 하거나 아니면 사단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성도의 수난은 전 후 각각 3년 반씩 7년간 있게 되며, 7년 대 환란이 끝난 후에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심판이 있게 된다.>

당시에 <666> 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순식간에 한국 전역에 퍼져나갔고 더욱 구체적인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상품의 일련번호나 심지어는 전화번호에 이르기까지 <6>자리로 된 숫자들은 모두 <666>과 연관된 숫자로 인정 되었고 따라서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666>에 대한 주장의 최초 적 근원지가 과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666>에 대한 주장은 <계13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조직신학에 어두운 자들에게 있어서 <계13장>은 사실상 그와 같은 빌미를 제공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직신학을 아는 사람들은 <계13장>을 그런 식으로 해석 할 수 없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