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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하나님의 섭리.

에반젤(복음) 2023. 2. 2. 15:57
제9장. 하나님의 섭리.


  섭리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세우신 규정이나 또는 그의 모든 피조물들의 보존과 통치를 총칭하는 것에 대한 용어이다. 섭리<Providence>라는 용어는 성경에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말은 헬라어“프로노이아”<πὀνοια>에 상응하는 라틴어<providentia>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들은 본래 “예지”<prescience> 또는 “예견”<foresight>을 의미하지만 기독교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섭리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섭리라는 용어가 기독교를 통하여 종교적 용어로 정립되어지자 다른 종교들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보편적 종교 용어가 되었지만 기독교 이외의 종교가 섭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저들의 종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섭리라는 용어는 절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존재에게만 적용되는 용어인 반면에 일반 3류 종교에는 그러한 절대적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가. 1. 섭리교리의 역사.


  초대교회 시대의 일부 신학자들은 세계가 “우연”<chance>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주장하였고 “스토익주의자”<Stoic>들은 세계가 “숙명”<fate>에 의하여 지배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저들의 교리를 모두 거부하였다. 초대교회 신학자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섭리교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세계를 보존하시며 통치하신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통치에 대하여 오늘날과 같은 절대적인 개념을 갖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섭리와 예정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조심스러워 하였고, 따라서 섭리의 교리는 언제나 예정교리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형편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스토익주의자들의 숙명론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세우려는 열망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 사람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였으며 그러한 결과로 인하여 스스로 모순에 빠져 사람의 죄악 된 행동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를 부정하려는 경향까지 있었다. 이러한 비 진리적 흐름을 바로잡은 것은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숙명과 우연의 교리들을 물리치는데 앞장섰으며 자기모순에 빠진 교부들의 신학도 바로잡아 주었다. 어거스틴은 만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지혜로우시면서도 자비로우신 통치에 의하여 보존되어지고 보전되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사단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반면에 그는 악에 대한 사람의 책임성을 강조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신적 섭리에 대한 논쟁이 거의 없었다. 종교회의에서 섭리교리에 대한 어떤 견해가 제기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정립한 교리가 모든 교회들에게 이상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구분하여 구원론적인 것은 인정하였지만 자연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반대하였다. 스콜라주의자들 중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존을 그의 창조적 활동의 계속으로 간주하여 동식물들의 생산을 하나님의 창조의 연속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개혁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어거스틴의 주장에 동조하였으나 세부적으로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를 현재와 같은 것으로 주장하였으나, 루터는 그렇지 않았다. 루터는 구원론적인 것에서만 확실하게 인정하고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강조하지 아니함으로서 펠라기안들의 견해를 따르는 듯 한 인상을 주었다.


나. 2. 섭리에 대한 자연신론자들의 개념.


  자연신론<Deism>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떤 불변적인 고유성을 부여하셨고, 그들의 세계에 또한 불변적인 법칙들을 세우셨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고유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의 법칙에 적응하면서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고 주장한다. 모든 피조는 하나님의 간섭 없이 자신들의 세계에 부여된 생존의 법칙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두 가지의 중대한 비 진리를 만들어 낸다. 하나는 세계가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진행한다는 오해를 만들어 내며,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방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범신론적인 개념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며, 로마 카톨릭의 몇몇 신학자들과 소시니안 주의자들 및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신학적 오류이다.  이 개념은 교회로부터 배척당한 후에 얼마동안 잠복해 있다가 18세기의 자연신론자들에 의하여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19세기에 이르러 진화론자들과 자연과학의 조명을 받으며 다시 살아났다. 18세기 이후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의 무시하였다. 저들은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세계로부터 손을 놓으셨다고 주장한다.


다. 3.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입장.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 전체를 통치 운영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원사적 차원에서의 하나님 섭리만을 강조할 뿐 우주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저들의 목회현장이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교회 안으로 제한되어지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우주적인 것에서 오직 구원사적인 것으로만 제한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라. 4. 섭리에 대한 성경의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1) 우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시 103:10] [단 5:35] [엡 1:11].


2) 물리적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욥 37:5,10] [시 104:14; 135:6] [ 마 5:45].


3) 동물계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시 104:21,28] [마6:26; 10:29].


4) 국가들의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욥 12:23] [시 22:28; 66:7] [행 17:26].


5) 사람의 출생과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삼상 16:1] [시 139:16] [사 45:5] [갈 1:15,16].


6) 사람의 삶의 외적인 성공과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시 75:6,7] [눅 1:52].


7) 외관상 우발적인 사소한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잠 16:33] [마 10:30].


8) 의인을 보호하는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
       [시 4:8; 5:12; 63:8; 121:3] [롬 8:28].


9)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
      [창 22:8,14] [신 8:3] [빌 4:19].


10) 기도를 응답하는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
      [삼상 1:19][사 20:5,6] [대하 33:13] [시 65:2] [마 7:7] [눅 18:7,8].


11) 악인의 적발과 형벌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
      [시 7:12,13; 11:6].


마. 5. 섭리의 구분.


  하나님의 섭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일반 섭리이고 다른 또 하나는 특별섭리이다. 일반섭리는 우주 만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관할하심을 말하며 특별섭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고통에서의 구출, 각종 은혜와 사랑의 베푸심, 위급한 상황들로부터의 돌보심 등등이 하나님의 특별섭리이다. 한편 하나님의 섭리 중에 비상섭리가 있다. 비상섭리는 특별섭리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서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사명현장 역사와 관련된 섭리영역이다.


바. 6. 하나님 섭리의 특성.


(1) 1)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신다.


  사람이 앞서가고 하나님께서 뒤따라가시며 불완전한 것을 챙겨주시고 다듬어 주사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일할 수 있도록 당겨주시고 의욕을 고취시키시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다. 주의 종들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기 전에 그 일을 맡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며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그를 다듬으신다. 그리고 그의 앞에 가시며 그가 일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2) 2) 현재적이며 동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현장에 계시며, 모든 역사에 동참하신다. 뒤늦게 참여하시어서 후속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 모든 역사의 현장에 계시며, 그 사건 그 역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불행한 일이나 아름답지 못한 결과들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현재적인 역사를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건의 현장에 계셨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 사건의 현장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라거나 아름답지 못한 일들은 개인의 것이나 전체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엄청난 일이겠으나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 차원에서 논증할 때에 감수해야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 안에 개인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 개인의 역사 뒤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섭리적 결과에 의한 필연적인 것이며 모든 피조는 다만 이의 없이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할뿐이다.


(3) 3) 직접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 모든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신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위치와 권위를 내세워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을 거부하고 천사들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는 천군 천사들을 동원하시기도 하시지만 천군 천사들을 동원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역시 그 역사 그 사건의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진두지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모든 역사 모든 사건에 직접적적으로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사. 7. 하나님의 비상 섭리.


(1) 1) 용어의 문제.


  하나님의 섭리는 나타나지는 결과에서 두 가지로 구별되어 진다. 하나는 통상 섭리<providentia ordinaria>로서 지극히 상식적이며 과학적인 결과들을 말하는 것이요, 다른 또 하나는 비상 섭리<providentia  extraordinaria>로서 상식과 과학을 초월하는 극단적인 결과들을 말함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이적> 또는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다. 물론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것은 기적이요 이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기적이나 이적이란 용어 자체가 성립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일상적인 보통의 능력일 뿐이다.


(2) 2) 비상 섭리의 성질.


  하나님의 비상 섭리는 통상 섭리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비상 섭리는 때로는 피조 세계에 부여된 법과 질서와 특성들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성과 상식과 과학 등도 초월한다. 전혀 초자연적으로 역사 되어지는 것이다. <태양이 종일토록 중천에 머물러 있는 상황-수 10:13>과 <태양이 뒤로 물러가는 역사-왕하 20:11>와 <성령으로 잉태되어진 예수 그리스도-마 1:18> 그리고<장사한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피조의 세계에 부여된 법칙과 질서와 특성들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행하신 각종 이적과 기적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과 자녀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각종 이적과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의 비상섭리이다.


(3) 3) 비상 섭리의 목적.


  하나님께서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에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비상섭리를 전개하신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불신하였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눈앞에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비상섭리가 진행되는 것을 체험한 자들까지도 조금만 지나면 곧 그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불신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열심히 가르쳐 주시고 여러 차례의 비상섭리 전개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 주셨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계속되어지고 있다.


(2)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비상섭리를 전개하신다. 자녀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또는 자녀들의 어떤 특별한 결과를 이루시기 위하여 때로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아니하고 고집을 부린다거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만용을 부린다거나 또는 어떤 절망적인 위험에 빠진다거나 또는 어떤 결과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린다거나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종들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비상섭리를 전개하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때의 비상섭리는 더욱 강권적으로 역사 되어진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여 헤매고 있을 때 또는 부름 받고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쳐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머뭇거릴 때에 또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가운데 어떤 위험에 처할 때에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더욱 큰일을 하여야 할 때에 하나님께서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시키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 섭리를 성취시키시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상섭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 되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는 그 날까지 영원히 계속되어질 것이다.


4) 비상 섭리에 대한 부정.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거부한다. 하나님 비상섭리에 대한 거부는 초대교회시대 이래 끊임없이 있어 왔으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완강한 것은 아니었다. 저들이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에게 부여된 법칙과 질서와 특성들을 위반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초기의 개혁파 신학자들에게서도 제기되었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깨트리는 것으로 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법과 질서를 스스로 무시하고 깨트리는 분이 아니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주권으로서 그리고 또한 우주의 왕,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한에 의하여 피조 세계에 현존하는 어떤 법과 질서를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무례하고는 관계가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의 원리이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비상섭리를 전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의한 하나님의 역사의 창출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법과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아. 8. 하나님 섭리에 대한 오류.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오류에 빠져 있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 섭리의 차별.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차별하여 특별섭리를 중요하게 강조하는 반면에 일반섭리는 상대적으로 약화시킨다. 목회자들은 거의 대부분 우주적이며 전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고 오직 인간 구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만을 중점적으로 강조한다. 저들이 인간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 중에 인간을 특별히 우대하고 사랑한다는 성경의 증거들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참뜻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인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만 보는 것은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는 인류 구원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음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섭리는 과연 무엇인가?
둘째: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섭리는 과연 무엇인가?


이 두 가지 문제에 유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절대적 주권주 앞에 절대 순종해야하는 피조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 자녀이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 절대 순종해야 하는 피조의 입장에 선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법적 행정적 관계에 머물게 된다. 그러한 관계 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추구하는 것은 의무적인 것으로서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것이 못된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 진정한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의 반열에서 추구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 아버지의 기쁨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자녀의 반열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보게 되며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것을 보게 되며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6-30>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교훈적 말씀이지만 이 말씀 속에는 당신의 피조세계를 아끼시고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구구절절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세계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우주만물에 대한 창조기사를 통하여 증명된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 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 이더라-창1:31-2:3>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항상 기뻐하셨고 특히 모든 창조역사를 마치신 후에 특별히 기뻐하시어 일곱째 날을 강복하시면서 스스로 안식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인간들을 또한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셨다. 때문에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그들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며 그들을 자랑하시고 그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주시는 아버지가 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어 당신의 입장보다는 자녀들의 입장을 우선시하셨으나 인간은 반대로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만을 생각하였다. 때문에 인간들은 우주 만물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장차 자신들이 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만 모든 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2) 2) 신인 협력 주장.


  14세기, 유럽의 르네상스 운동 와중에서 발생한 인본주의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자아의식이 고취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더욱 강조되었고 그리하여 <신인 협력>이라는 교리사상이 주장되었다. 신인협력이란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하여 모든 일을 진행한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14세기 인본주의자들로부터 발생하였으나 16세기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에 의하여 체계를 이루었다.  신인 협력 주장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협력이 없다면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인간의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위에 좌정시킨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각별히 예우하시어 당신의 역사에 동반자로 세우신 것을 감사할줄 모르는 경거망동이다. 인간은 자신이 매우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알고 보면 매우 불완전한 상태에서 헤매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헤맴을 은밀히 바로잡아 주시고 돌려놓아 주신다. 그리고 모든 결과를 인간의 공로로 돌리시고 그들을 칭찬하시며 그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주시는 바 이것이 곧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3) 3)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구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구별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을 감안하시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인간들에게 맡기시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둘로 나누는 것으로서 비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진행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우주 만물 전체를 운영하고 진행할 수 없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모든 시간, 모든 영역, 모든 장소에 완전하게 함께 하시어 그들이 역사를 진행할 수 있게 지원, 후원, 인도, 보호, 감독하신다. 따라서 모든 역사의 실제적인 진행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4) 4) 사람의 노력 강조.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 중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것이며 따라서 불순종이고 불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입장은 전혀 생각 안하고 자신들만 생각한다. 인간들은 너무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 구석구석을 완전하게 살피시려면 얼마나 바쁘시겠는가?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것만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선한 생각 같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해결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만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신앙이 아니며 그러한 자세는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한 것은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신이 하지 못한 것만 하나님의 공로로 돌리게 된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완전무능력 상태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많은 부분에 손상을 입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본적 삶에 관한 부분은 넉넉하게 남겨주셨다. 때문에 인간은 때때로 자체적인 노력 하에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들을 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에 자신이 한 것은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신이 하지 못한 것만 하나님의 공로로 돌리게 된다면 인간은 거의 대부분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자랑하면서 자화자찬<自畵自讚>할 것이고 하나님께 전혀 감사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5) 5) 하나님 섭리의 부정.


   펠라기우스파와 반펠라기우스파와 알미니안파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반대한다. 저들이 이 섭리교리를 반대하는 이유는 섭리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책임적 창시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의 모든 역사, 모든 사건의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섭리역사 하신다고 한다면 사람이 죄를 짓는 과정에도 필연적으로 직접 관여하시는 것이 되며 뿐만 아니라, 사람보다 앞서 가시며 사람들의 역사를 유도하신다고 한다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죄를 촉구하시고 유발하시고 결과 시키는 원인이 되심으로 하나님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증은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보는 것에서 오는 좁은 안목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되어진 잘못된 견해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죄와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1) 죄악 된 행동들도 하나님의 관할 아래 있음이 분명하나 그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출발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하여 출발되어지는 반면에 하나님은 허용하실 뿐이다<창 45:5; 50:20; 출 14:17; 사66:4; 롬 9:22; 살후 2:11>


(2)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죄인들의 죄악 된 행위들을 억제 하신  3:6; 욥 1:12; 2:6; 시 76:10; 사 10:15; 행 7:51>


(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섭리를 위하여 악을 제어하시고 선을 일으키신다.<창 50:20; 시76:10; 행 3:13>


   * 이 때에 있어서 두 가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앞서서 역사 하신다는 교리와 충돌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앞서서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고 하여 죄악 된 행동을 촉구하고 유발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고 아름다운 일만 추진하시지만 사단은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역사의 현장에 죄악을 뿌려놓는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사단의 악행을 즉시 제거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실 필요성과 같은 이유, 즉 당신의 아름다운 역사의 진행을 위하여 사단에 의하여 비롯되어진 아름답지 못한 내용들을 잠시 허용하시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보존을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증거하고 있다<마 13:24~30>


   둘째는 그렇다면 선한 사람의 악행과 악한 사람의 악행에 대한 허용의 명분이 동일한가? 하는 것이다. 즉, 택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의 악행이 다함께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동일한 목적과 이유로 허용되어지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죄악에 대한 허용이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 의한 신적 작정의 결과이지만 그, 허용의 목적과 이유는 전혀 다르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의 허용은 하나님의 섭리적 목적과 이유들을 위한 허용이지만 택함을 받은 자들의 허용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은총에 의한 허용이고, 다른 또 하나는 종에 대한 섭리적 차원에서의 목적 있는 허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죄악 된 행동을 하고자 할 때에 그 마음을 주장하사 미연에 방지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허용하심으로서 더 큰 유익을 그들에게 주신다. 자녀들의 죄악 된 행동을 한 후에 크게 후회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다시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며 죄악 된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유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언제나 겸손하게 하시며 죄를 짓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종들은 더욱 높은 차원에서 그들의 죄를 허용하신다. 하나님의 종들로 하여금 자신이 직접 죄를 지음으로서 죄의 본질과 죄의 추악함을 체험하게 하시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달으며 자신도 하나님과 같이 죄를 미워하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사역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게 하시는 것이다.


자. 9.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에 구별 없이 모두 다 중요하다. 하나님의 섭리를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구분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인간들이 자기 편위주의<偏爲主義>에 입각하여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구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사랑하시어 모든 문제를 자녀들의 입장에서 진행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점을 근거로 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 섭리만을 강조하면서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무시하거나 또는 약화시키면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안주하면서 자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감읍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자녀로서의 기본적인 신앙이며 자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사명을 준행해야 한다.


(1) 1) 기독교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


  우리는 기독교를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여 기독교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다.
  교회가 추진하는 각종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다. 교회는 특히 제자훈련을 통하여 각종 사회영역을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끌어가는 빛과 소금의 지도자들을 길러내어 그들로 하여금 정치, 경제, 산업, 군사, 교육, 문화, 예술, 과학, 스포츠, 등등의 사회 각 영역을 이끌어 가게 함으로서 모든 사회 영역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고 그리하여 각 사회 영역들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게 한다. 인류사회 모든 영역들이 평화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그리하여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는 아름다운 역사, 평화의 역사,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2) 2) 대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


  우리는 대자연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여 대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다. 인간들의 이기적 욕심과 각종 퇴폐적, 향락적 쾌락 추구를 위하여 개발이라는 명분 하에 사정없이 훼손되고 파헤쳐진 대자연을 아름다운 금수강산<錦繡江山>으로 회복하고 관리하여 대자연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며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찬양하게 한다. 돌을 던지면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맑고 푸른 하늘, 아름다운 구름들이 평화롭게 흘러가는 창공을 줄지어 나르는 각종 새들, 기화요초가 만발한 산과 들, 그윽한 숲 속을 수놓는 새들의 합창, 오곡백화가 풍요로운 넓은 들, 유유히 흐르는 맑고 푸른 강들과 하얀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푸른 바다, 질서 있게 정돈된 강변과 해변을 경쾌하게 달리는 기차와 자동차들, 강가, 바닷가 언덕들에 지어진 그림 같은 집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하사하신 천혜를 누릴 줄도 운영할 줄도 관리할 줄도 몰랐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불충이요 불효였다. 우리는 이제부터 지금까지의 과오를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과 대자연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선포하게 하며 그리하여 그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새로운 역사를 진행해 나가야 한다.


  어떤 자들은 이와 같은 우리의 주장을 허망한 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렇게 착하고 순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한 세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착한 사람들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 욕심 많은 자들, 이기주의자들, 야심 많은 자들 등등에 의하여 항상 전쟁이 일어났고 각종 불의, 불법, 편법, 위법, 탈법, 부정, 부패, 타락, 등등이 만연하였다. 따라서 인류사회를 유토피아<하나님 나라>적 역사로 만든다는 것, 대자연을 아름다운 금수강산<하나님의 나라>로 만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인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계승한다면,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한다면 인류사회는, 대자연은, 비록 전체적인 유토피아<하나님 나라>를 이루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부분적인, 지엽적인 유토피아<하나님 나라>는 이룰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적인 <유토피아>는 처음에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할지라도 점점 확산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그러한 결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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