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교회 제자훈련교재 Ⅱ
정기적으로 영적 훈련에 시간을 투자하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경건의 시간이라 하고, 혹은 헌신, 개인적인 경배라고도 하는데, 나는 영적 훈련이라는 용어를 가장 좋아한다. 말 그대로의뜻이기 때문이다. 영적 훈련은 몸이 신체적 훈련을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내면의 영에 적용된다. 아무리 천성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 해도, 훈련받지 않으면 전세계적인 경기에서 승리할 수 없듯이 말이다. 애플 컴퓨터사의 경영 최고 책임자인 존 스컬리(John Sculley)는 예전에 일했던 펩시콜라 회사의 공동 훈련에 대해 쓰고 있다. 그 회사의 신체적 훈련은 바로 몸을 중히 여기는 것이었다. 그 훈련에 대한 열정적인 변론을 보자. 그 훈련은 우리 모두가 최상의 컨디션, 정신적으로 민첩할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점심 시간이면, 유리벽으로 된 회사 건강 센터는 그 회사의 떠오르는 별들로 만원이 되었다. 나처럼, 그들은 모두가 평범한 육군보다는 도전적인 해군에 있을법한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운동하는 것까지도 경쟁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게시판에 붙은 벽보에는 간부들의 진전 상황이 도표로 그려져 나왔다.(Odyssey) 쫓겨다니는 생활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이야기를 미화할 의도는 없다. 다만, 제값을 하기 위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충분히 믿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 몸이 직업적인 성공과 회사의 성공으로 이끄는 집단적 노력의 한 부분임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몸을 훈련받고 조절하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아는 것이다. 다른 일을 더 하고싶을 수도 있지만 만약 몸을 단련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그들은 아마 운동하기를 택할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컬리의 동료들이 직장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처럼 생활에서 축복과 성숙을 갈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들은 큰 잘못으로 이끄는 유혹이나 동기의 대상이 되지 않으리라 열렬히 소망하고 있다. 그들과 말해 보고 나서,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그들이 주님의 “잘했다”라는 칭찬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을 ‘천국이 보증하는 성공’이라고 부르자.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끔씩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성공’을 얼마나 절실히 바라고 있는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기꺼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종종 거리가 있지 않는가? 우리는 그 ‘성공’을 스컬리와 그 동료들이 원하는 것만큼 절실히 원하고 있는가? 우리 내면 세계의 핵심인 영을 훈련시키는 데는, 적군의 공격이 시작될 때 방어하는 훈련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방어를 위해서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영을 정비하기 위하여 매일 상당한 양의 시간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이 바로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의 요지였고, 그 책에서 설명한 규율을 조금도 바꾼 적이 없다. 영적 훈련에는 성경 공부, 중보 기도, 묵상, 영적인 주제를 가진 책들을 읽어나가는 것 등이 포함된다. 쉽게 되는 사람도 있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할 때가 되면, 우리의 영혼을 할퀴려 드는 공적 세계의 온갖 소음들로부터 한 발짝 비켜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리, 위로를 주시는 속삭임을 청하여 균형감각과 안내를 회복하고, 천국의 관점에서 우리의 개인적 가치를 재확신함으로써 어떤 다른 원천으로부터 가치를 찾아 헤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악을 잘 살피고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영적 훈련의 결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만나야 한다. 다시 존 번연으로 가 보자. 가장 유명한 작품 ‘천로역정’에는 크리스챤이 사자 아볼루온에 맞서 맹렬한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끈질긴 싸움의 전후에, 크리스챤은 자신의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움이 끝나자 크리스챤은 말했다. “사자의 입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시고 마귀 아볼루온과의 싸움에서 나를 도와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생명나무 잎을 가져다 크리스챤에게 주었고 그것을 받아서 싸움 도중에 얻은 상처 위에 붙였더니 순식간에 씻은 듯이 아물어 버렸다. 그는 또한 그 자리에 앉아서 얼만 전에 얻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이렇게 해서 다시 원기를 회복한 크리스챤은 빼어든 검을 그대로 손에 쥐고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또다른 적이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Pilgrim's Progress) 번연은 크리스챤의 여행 대부분을 자서전적인 관점에서 썼고, 이 점에서 그의 PDI 프로그램에 대해 명확히 말하고 있다. 영적 훈련은 무너진 세계를 방어하려는 그의 단 하나의 소망이었다. 날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경과 중보를 통해서 천국의 인도를 받는데 특별한 시간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크나큰 위험을 마주하게 된다. 기독교 공동체의 치유적 요소 올바른 기능을 가진 기독교 공동체는 그 속에 강력하게 역사하는 치유의 원동력이 있다. 이것은 간과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다.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은 참된 교제가 경험되는 곳으로서 치유의 과정에 있어서 특히 도움이 된다. 교회는 치유의 주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기독교 공동체의 치유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사랑, 수용, 용서의 분위기 * 긍휼 *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임하도록 한다. *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향한 소망과 믿음의 분위기 * 찬양과 경배 * 가르침 * 성찬 *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 슈러의 교회성장의 원리 1.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헌신 2. 교회성장의 비전을 가져라 3. 교회의 성공적인 관리체계 4. 성공적인 성장목표를 설정 5.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가능성의 사고를 가지도록 해야한다. 6. 교우 전체에 목표를 잘 주지시켜야 한다. 목표결정에 통합시킨다. 7. 지도력의 강화가 필요하다. 교회성장의 일반원리 1. 삼위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과 구령애가 교회안에서 강조되어 있는가? 2. 성서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의 목표인 “모든 사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아 교회의 능동적이고 책임적이고 생산적인 교인이 되게 하는 일”을 교회성장의 목표로 분명하게 교회전체에 인식시키고 있는가? 목적의식이 강한 곳에 전략이 개발된다. 3. 리더쉽훈련은 이론훈련보다도 직접적인 시범을 통한, 경험이라는 실습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하며 선교의 목표와 밀접한 관계위에서 수행되고 있는가? 4. 교회전도구역에서 복음에 대한 수용과 저항의 분포도를 만들고, 반응이 좋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전도하며 “구원받을만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 때 우선 구원하자”고 효율적인 전도를 하고 있는가? 교회는 각 지역에 대한 주의깊은 진단이 필요하다. 5. 동질사회단위(Homogeneous unit)에 대한 전도에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고 있는가? 지역사회에서 동류집단전도는 바람직하다. 왜냐면 교회 안에서 그들은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이다. 6. 지교회(Daughter Church)설립은 가장 훌륭한 교회성장의 원리다. 큰 교회가 교인 일부와 재정의 일부를 떼내어 자녀교회를 세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교회개척방법인 것을 알고 있는가? 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에서 도시 외각에 인구분산현상이 일어나는 한국의 대도시에서도 바람직한 방법이며 어머니교회는 끊임없이 젊은 정열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7. 현대전도는 개인전도와 대중전도를 기초로 해서 그 위에 가족전도 방법을 사용하여 가정의 결정권자(Decision maker)를 중심으로 전도해야 한다는데 착안하고 있는가? 가족 전체가 같이 믿게하되 가정의 결정권자가 신앙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은 가족들의 신앙생활에 안전감을 준다. 8. 피풀무브멘트(People movement)는 개인을 그가 속해 있는 그룹이나 사회단위에서 고립이나 소외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가족단위 전도와 마찬가지로 개인을 그가 속한 그룹의 한 대표로 보며 그의 영향을 통해서 그 집단이 그리스도에게 오도록 훈련시킨다. 이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친구들과 관계를 끊지않고 교회와 친구집단, 친척들과의 교량역할을 계속하게 한다. 여러 사람들과의 의견교환, 신앙고백, 권유를 계속하게 하는 일종의 신앙적 민중운동을 유발해야 한다. 한국 초대교회와 오늘의 운동은 이와 비슷하다. 이것을 멀티인디비주얼(Multi-Individual)결심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9. 토착화 교회운동은 자치, 자급, 그리고 자력전도하는 교회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토착화 교회는 그 이상의 것이다. 한국문화 속에서 서구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문화권 속에 알맞은 교회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는 선교받는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고 하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10. 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이 타나난 국가에서는 대도시와 신흥도시전도가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이다. 인구이동은 교회의 전도에 가장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집중적인 전도대책을 세우고 실시하고 있는가? 11. 교회부흥회를 교회성장운동을 시작하는 영적인 확신운동으로 삼고 있는가? 부흥회가 곧 교회부흥이라는 사고방식은 철저히 시정되어야 한다. 부흥회는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 교육을 강화하는 시동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부흥회의 계획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부흥회 이후의 전도운동을 전개시키는 서론으로 생각해야 한다. 본론은 교회성장운동의 전개요, 결론은 교회확립, 지교회설립, 또는 선교사파견 등으로 삼아야, 부흥회는 올바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12. 믿음으로 모험적이고 대담한 교회성장 목표를 수립하고 있는가? 교회는 교회 전체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결의하고 채택한 교회성장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없는 곳에 목표달성의 노력과 기도도 없으며 전략의 개발도 없다. 믿음으로 수립한 교회의 성장목표를 성령은 능력으로 같이하시고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인류구원의 목적에 교회가 적극적인 목표설정을 하여 동참하기를 바라신다. 성화(Sanctification) 처음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을 때, 대부분의 우리들은 큰 기쁨과 함께 우리의 구원에 대해 감사한다.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이 변화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의 본질적인 성향과 특성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전에 우리는 악한 습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악한 습관들과 잘못된 행동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 마땅한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이다. 낙담과 의혹을 품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될 새로운 삶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더불어 성화를 이 세상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못하는 과정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생’, ‘칭의’, ‘양자로 받아들여짐’ 등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있어서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이다. 성화의 의미와 특징, 그 교훈과 수단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성화의 의미 한 마디로 말해서 성화란 죄의 오염에서 해방된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는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죄악된 성향을 제거하는 것이고(롬6:6;갈2:20;롬5:24), 적극적으로는 거룩하여져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롬6:11;갈2:29).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그의 로마서 6장 주석에서 성화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죽는 일 곧 옛 사람을 벗는 일로서 그것은 과거의 사람, 과거의 행실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는 것(롬6:2), 죄가 지배하지 않는 몸이 되도록 마음에서 죄악의 우상을 내쫓는 것(롬6:6), ‘골치 아픈 주인’(quondam)인 죄에 대하여 죽어서 죄와 관계를 끊는 것(롬6:11), 죄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것(롬6:12),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바치지 않는 것(롬6:13)이다. 둘째, 살리는 일 곧 의에 대하여 사는 것으로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롬6:4), 모든 애정과 바램이 하나님을 상대로 살아 있는 것(롬6:11),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롬6:13),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롬6:13)이다. 2. 성화의 특징 성화의 과정, 영향, 결과, 완성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① 성화의 과정 죄의 오염에서 해방되어(롬6: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점점 나아가기로(롬6:6-11) 작정한 성도는 필연적으로 육신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서 겪는 심각한 내적 갈등에 봉착하게 되는데(롬7:23,24)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성령의 법에 온전히 의탁하여야만 비로소 이 갈등은 해소되고(롬8:1-10) 성화에의 진전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도가 거룩하여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가능하다(빌1:6;살전5:23). 그러나 이는 중생과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단독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인간과 협력하여 이루어진다(롬12:9,16,17;갈6:7,8,15). ② 성화의 영향 성화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에게 영향을 미친다(롬6:12;고전6:20;살전5:23). ③ 성화의 결과 성화는 칭의나 양자같이 법적 지위 또는 신분상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불안, 공포, 절망 등을 몰아내고 기쁨, 소망, 평강을 증진시키는 현실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④ 성화의 완성 시기 완전한 성화는 현세에 완성되지 않으며(롬3:10;왕상8:46;잠20:9;약3:2;요일1:8), 개인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 때 완성된다(히12:23;계14:15). 3. 성화의 교훈 출애굽의 감격을 쉽게 잊어버리고 광야 여정 동안 불순종을 거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성도들 중에는 구원의 뜨거운 감격과 주님과의 첫사랑의 희열을 망각한 채(계2:4) 광야 같은 세상을 방황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한 순간에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고 헌신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참으로 어렵고도 숭고한 길은 ‘늘’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성화의 길이라 하겠다. 4. 성화의 수단들 확신과 성경 공부, 성례 및 기도와 묵상 등이 있다. ① 확신 확신은 성화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확신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한 그가 진정 우리 안에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는(Luther) 확신이 없는 마음은 흔들리는 그릇과 같아서 원하는 것을 담기가 힘들 뿐 아니라 그릇 안의 것까지 쏟아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② 성경 공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 중요한 초석이 되는 성경과 확신과 지식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활동의 동기와 목적 및 행동 방향을 제시하는 거룩한 생활의 객관적 표준이다. ③ 성례 하나님의 말씀의 가시적 상징인 성례는 성화에 도움을 준다. ④ 기도와 묵상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거룩함을 증진시킬 수 있다. 기도는 어떤 종교적 경험을 단순히 수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토레이(Reuben A. Torrey)는 기도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며 실제로 그분의 현존 안에서 그분께 요청하고 받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닌 특권”이라고 말함으로써 기도가 성화의 효율적인 수단이 됨을 지적하고 있다. 주의 만찬 공동 식사와 연관되는 “빵을 떼는” 관습은 기독교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바울 시대부터 이 의식을 그리스도 자신이 명하신 것으로 믿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이 의식은 그리스도와, 또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특별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성서 이외에 주의 만찬을 언급한 저술물은 이레니우스 이전에도 세 가지나 발견된다. 그 중 ‘교훈 집’은 가장 초기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먼저 만찬은 간단한 감사 예식으로 시작된다. “당신은 우리에게 영적 양식과 마실 것과 영생을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주셨나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지식”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에 이보다 더 신비성을 부여하는 해석을 찾아볼 수 있다. 요한복음 6장 47-58절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실 것을 가르친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만찬을 가리켜 “불멸을 가져오는 약이요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해독제”라고 말하였다. 저스틴은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빵이나 마실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으사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살과 피를 취하신 것을 기억함으로써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때까지 가르침을 받아온 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축도에 의해 축복된 음식물은 우리의 피와 살을 변질시키고 자양을 공급해 주는, 육을 입으신 예수 그 자신의 살과 피인 것이다.” 저스틴 시대(153년)에 와서 주의 만찬이 이미 공동 식사와는 분리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주의 만찬이 “생명”을 가져다 준다는, 요한복음과 이그나티우스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땅에서 생산된 빵이 하나님의 기원을 받게 되면, 평범한 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찬(Eucharist), 즉 땅과 하늘의 두 실체를 겸비한 물질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도 성찬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썩어지지 않고 영생에로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2세기 중엽에 이르러 만찬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하신다는 사상이 편만해 있었음을 말할 수 있겠다. 초대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신자들 자신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한 거룩하고 살아 있는 제물”이 될 뿐 아니라, 모든 예배 행위가 다 제물의 성격을 가진다는 관념이 발견된다. 주의 만찬을 하나의 희생제사로 보는 실재론적 관념이 발전되는 과정에서 작용한 요인은 여러 가지이다. 처음에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성직자들을 위한 돈과 물질의 헌납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가현설(Docetism)과의 투쟁을 거치는 동안 만찬에 부여되는 그리스도 수난의 실재성이 점차 강조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성례전의 상징과 그 내적 실재성 사이에 신비하고 생동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고대 사상이 이런 식의 사고를 한 층 발전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기독교인의 순교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는 사실도 성찬의 제사적 의의를 강화하는 데, 한 몫을 담당하였다. 또한 기독교가 생장하던 세계의 모든 종교가 이러한 제사적 관념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제사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 터툴리안에 이르러 sacerdos(사제)라는 용어는 비로소 일반화되었다. 주의 만찬을 한 사제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로 이해하는 교리가 완전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시프리안에 의해서였다. 기독교 사제의 임무는 “제단을 봉사하고 하나님의 희생을 거행하는 것이다.” 터툴리안 시대에 이미 죽은 자를 기념하는 주의 만찬이 집행되었다. 우리는 “카톨릭”교회에서의 만찬 사상의 발전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a) 성만찬은 그리스도가 실재로 임재하는 의식이며(임재 방법에 관한 논의는 중세기까지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이를 통해 신자가 그리스도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개조된다는 것, (b) 성만찬은 사제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로서, 하나님은 이 의식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많은 것이 모호한 채로 남아 있긴 하였으나, 대략 253년경에 성만찬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본질적인 관념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결:굳세게 하는 은혜 온전히 성결한 성도일지라도 타락할 가능성은 있다. 이는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더욱 악화된 연약성을 가지고 있고, 죄인들로 구성된 사회 속에 살고 있으며, 더욱이 유혹하는 마귀가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3:17)라고 미리 경고하고 있다. 웨슬레는 그의 설교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위대한 특권”에서도 신자의 타락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즉 신자는 죽음이나 지옥보다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타락케 하는 죄를 더욱 무서워해야 한다. 그는 성결한 성도가 실족하지 않기 위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충고를 주고 있다. 1) 교만을 경계하여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라. 2) 열광을 경계하라. 3) 율법 무용론을 경계하라. 4) 태만의 죄를 경계하라. 5)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추구하지 말라. 6) 분열을 경계하라. 7) 모든 일에 남의 모범이 되라. 성결한 성도에게 타락의 가능성이 있지만, 성결은 타락을 방지하는 가장 강력한 보호자이다. 성결은 성도의 신앙을 유지하고 보호하여 준다. 토마스 쿡(Thomas Cook)은 신자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절대적인 보장(absolute security)은 이 세상에서는 바랄 수 없으나, 성결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안전한 자리에 앉게 한다”고 하였다. 성결의 은혜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죄 지을 가능성은 가장 최소화하고, 승리의 가능성을 가장 극대화시켜 준다. 이 점에 대하여 메쯔(Donald S. Metz)는 “성결은 사람을 무오하게 하지는 않지만, 타락이나 배교의 가능성을 가장 최소화 한다”고 하였다. 성결 신학자들은 성결을 “굳세게 하는 은혜”(establishing grace)라고 즐겨 부른다. 성결한 성도는 자신의 성결을 흠이 없게 유지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고 간구하였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면서”(고전10:12),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갈5:1) 주의하면서, “늘 깨면서 기도해야 한다”(살전5:17). 웨슬레는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 영혼 속에서 계속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1:10). 성결은 마음 속에 있던 죄성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케 하며, 동기의 순수성을 가져오기 때문에 사람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 성결의 은혜 또는 성결의 신앙은 성도의 승리의 원동력이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성결의 신앙으로 승리하는 성도는 “나는 온전히 성화되었다”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는 지금, 신앙으로 나를 성화케 하시는 분이시다”라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전15:57). 성결은 유혹을 이기고 범죄치 않게하는 가장 강력한 은총과 신앙이다. 성삼위일체 “이러하므로 내가…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성령님)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14-21). 이 구절들은 종종 이 땅위에서의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나타내는 최고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관점이 그러한 경험은 매우 예외적이고 멀리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할 우려가 있으며, 그래서 그런 경험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분명하고 즉각적인 특권이라는 축복된 진리를 가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모든 신자는 “내 아버지께서 오늘도 저를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지금 이 시간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할 권리와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우리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앎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진 생활로 만족해야 합니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는 역사가 우리 안에 계속되며 성취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의 능역을 믿는 믿음 안에서 강해져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능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말씀들 중에서 이 말씀들은 그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 성삼위일체의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 때문에 주목할 만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해나감에 있어서 여러 가지 경우에 삼위일체의 세 위격에 특별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옳고 또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여러 가지 진리들을 함께 묶는 일과 세 분이면서 한 분이신 분께 경배하는 법을 알기가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 장의 본문은 그 놀라운 관계와 완벽한 연합을 계시해 줍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그분은 우리의 뜻이나 그분 스스로의 뜻대로 일하시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영광의 부요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성령님)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존재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절대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의지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말이암아서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진리 - 성령님의 내주를 경외와 신뢰 속에서 깊이 의식하는 것과 그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 -를 묶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경우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자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목적,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되기를 위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강건하게 해 주십사고 그분께 간구합니다. 그와 같이 성자께서는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자를 계시하십니다. 성자께서 마음에 계심에 따라 그 마음은 사랑 가운데서 뿌리를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자신의 토양과도 같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그 생명을 이끌어 내오며 열매를 맺고 사랑의 역사를 하게 되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삼위일체께서 교대로 일하시는 복된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실 수 있는 그분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이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지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영을 우리 속에 불어넣으셔서 그분의 날로 새롭게 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처소가 되기에 적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고 형성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본성과 성향과 성격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성자는 자신의 생명의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매일의 경건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온전한 믿음으로 경배합시다! 우리의 성경 공부와 기도가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든지 이것이 언제나 우리가 여기에서 나가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중심지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는 구원은 내적인 구원입니다. 만약 구원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 곳에서 향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다름 아닌 당신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경배하면서 기다립시다. 믿고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에베소서에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끊임없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주목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1:3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신령한(성령님) 복 1:12,13 그의 영광의 찬송,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1:17 영광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지혜와 계시의 정신 2:18 저로 말미암아… 나아감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2:22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성령 안에서 3:4-9 그리스도의 비밀,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성령 으로 나타내신 것 4:4-6 성령이 하나, 주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5:18-20 성령의 충만, 하나님께 감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6:10-18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 하나님의 전신 갑주, 성령의 검, 성령 안에서 기도 이 구절들을 공부하고 비교해 보고 우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참되고 겸비한 개념을 얻게 되기를 구하시면서, 특히 이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진리가 얼마나 실제적이지 주목해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 가운데 있는 신비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와 경험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참된 믿음은 우리를 강건하고 총명하며 하나님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것입니다. 성령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의 생명 및 내적 존재와 연합시키십니다. 복되신 성자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령님과 성자로 말미암아 당신의 목적 -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 -을 이루십니다. 성부 하나님께 무릎을 꿇읍시다! 그러면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Massmedia 활용의 장단점 이러한 Massmedia 활용의 기독교적인 긍정 또는 그 장점은 복음 선교적 차원에서 생각할 점을 갖게 된다. 즉 복음전파의 전통적 패턴이라 할 수 있는 지역교회에서의 예배, 설교, 교육 등을 상당한 정도의 공간의 제한적 역할을 뛰어넘어 그 능력을 무한히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데 그 장점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극동방송의 한국어 복음설교 방송은 중국에 있는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간접설교를 가능케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방송국의 역할이나 기독교 언론매체인 신문과 잡지들의 간접적 선교의 영향력 행사는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 우리의 관심을 전제하고 있는 녹화 설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고 그 역할의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굳이 우리가 녹화설교의 가능성을 Massmedia 활동의 측면과 간접선교란 측면에서 볼 때 개 교회의 공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병자, 노약자나 그 외 특수한 상황에 있는 자들에게 확대 적용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또한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필자가 말하는 복음적 선교의 간접적인 기능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대중매체(Massmedia) 그 자체가 인간의 회심을 불러 일으키는 주체가 아니란 점에서 Massmedia를 통한 선교의 확대란 간접적인 것으로 보아야 함을 뜻한다고 하겠다. Massmedia의 간접선교의 기능은 오늘날 다원화 된 사회와 대중화 된 사회 속에서 교육적 기능과 상담적 기능에 능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Massmedia가 되고 있음을 본다. 즉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복음적 위로와 부부간에 어려움을 가진 자들의 문제해결에 지혜를, 세대간에 갈등과 직업에 의한 고민과 문제 등등 기독교적 신앙의 삶에 새로운 정보를 제시함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게 된다. 나아가서 Massmedia는 올바른 공중여론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긍정이 또한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Massmedia는 자주 정치 권력가에 의하여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3공, 유신체체, 5공시절 권력가의 정치 Ideologie 선전매체로의 악용) 여기 사회 정치적인 기독교 책임수행을 위하여 기독교적 언론매체(Massmedia)는 정치권력가의 언론매체 남용의 방지와 공중여론의 올바른 인식을 계몽하고 판단하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Massmedia를 통한 사회적 구제와 봉사에 대한 호소나 초교파적인 대화의 광장형성, 신앙강좌의 개최를 통한 계몽에 기여하는 일 등은 Massmedia의 도움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인 것이다. 본문을 묵상하라 만일 우리의 본문이 연속 강해의 일부이거나 혹 다른 이유로 해서 몇 주 혹은 한 달 가량 계속하려고 결정해 왔던 것이라면, 우리는 긴 기간의 ‘잠재 의식적 잉태 과정’(Subconscious incubation) 또는 ‘성숙 과정’을 갖는 셈이 된다. 주일 설교의 본문은 적어도 그 전 월요일에 선택되어야 잉태 과정이 있을 수 있다. 잉태 과정의 기간을 길면 길수록 좋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언젠가 자신에 관하여 ‘나는 내 알을 오랫동안 침묵으로 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항상 자신의 본문을 아주 적절한 시기에 선택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날마다 그것을 묵상하면서, ‘그 본문 속에 깊숙이 잠겨 실로 그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애썼다.’ 조만간에 보다 집중적으로 준비할 시간이 오게 된다. 이제 설교자는 무엇을 설교해야만 하는가? 본문을 읽고, 다시 읽고, 다시 읽고, 또다시 한 번 읽으라. 그것을 마음 속에 숙고하고 또 숙고하기를 마치 목자들이 말했던 모든 이야기를 의아해 하면서도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한’(눅2:18,19) 마리아 같이 하라. 마치 봄 꽃을 찾는 벌같이, 무궁화꽃 즙을 찾기 위해 윙윙거리는 벌새같이 당신의 본문을 탐색하라. 개가 뼈다귀를 물고 뒤흔들 듯이 그것에 고심하라. 아이들이 오렌지를 빨아먹듯이 그것을 빨아들여라. 소가 새김질 감을 씹듯이 그것을 씹으라. 이 비유들에 덧붙여 스펄젼은 곤충과 목욕통의 비유를 들고 있다. ‘마치 곤충이 열매의 배아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애써서 길을 파는 것과 같이 설교자의 자아로 하여금 본문의 정신과 골수까지 침투하여 그 신령한 음식에 의하여 그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이다. 또한 ’사랑하는 형제여 복음으로 흠뻑 적셔지기 위해 노력하라. 나는 항상 내 본문에 잠겨 흠뻑 젖어있게 될 때, 가장 잘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본문을 선택하여 그 의미를 찾아낸다. 그리고 나서 그것에 목욕을 한 후에 거기에 누워 그것이 내 속에 스며들어 오도록 깊이 잠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생생한 은유들로써도 설교자가 그의 본문을 묵상하는 동안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명백하게 표현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그의 본문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다음 두 가지를 묻는다. 첫째,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 그것이 처음 말하여지거나 기록될 때 무엇을 의미했었나라고 묻는 것이 더욱 분명할 것 같다. 히쉬(E.D.Hirsch)가 ‘본문은 그 저자가 의미하는 바를 의미한다’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우리는 본문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그것의 문화적 상황 속으로 우리 자신을 소급시킴으로써, 저자의 정신과 의도를 파악하는 사색의 훈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확인시키려 하고, 정죄하고, 약속하고, 명령하려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두 번째 질문은 그것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 본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고대의 말씀과 현대 세계를 관련시키고, 그 본문을 오늘날의 문화적 술어로 번역하는 ‘다리 놓기’(bridge-building) 훈련을 포함한다. 이 두 가지 질문을 서로 구별하고, 함께 유지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다. 오늘을 위한 본문의 메시지 혹은 (어떤 신학자들이 즐겨부르는 것처럼) 본문의 ‘중요성’(significance)을 식별하지 못한다면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순전히 학문적 흥미로서만 국한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현대적 의미만을 탐구하는 것은 금지된 지름길을 찾는 시도이다. 그것은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계시하시는 그 분 자신의 선택적인 방법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이고, (성경을 역서나 마법 주문처럼 취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경 해석법에 관하여 혼란을 야기함으로써) 회중들을 잘못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의미와 메시지에 관하여 본문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할 때 당연히 우리는 원어 사전(lexicon)과 성구 사전 및 도움이 되는 주석 등도 살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 구절을 잘못 해석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본문을 조명하여 그에 대한 우리의 사색에 자극을 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보조 자료 이상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것들이 본문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개인적 접촉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그 본문을 반대심문(cross-examine)하고 또한 그것이 우리를 반대 심문하도록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 년 동안 성경 연구를 해왔으므로 우리는 성경 본문을 완전한 문외한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이전의 명상의 조명 하에서 접근하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는 진리의 영께서 조명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겸손히 부르짖으며 기도해야만 한다. 우리는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라고 한 모세의 간구와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10)라고 한 사무엘의 간구를 되풀이 하여야 한다. 기독교적 명상이란 연구와 기도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명상들과는 구별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매우 근면한 연구가들이다. 그들의 책상에는 시학적 연구물들로 높이 쌓여 있으며, 그들은 본문 해석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감을 위해 좀처럼 기도하지 않는다. 다른 어떤 이는 매우 경건하게 기도하지만 진지한 연구는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연합하신 것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나의 경우를 말한다면, 나는 가능한한 무릎을 꿇고, 앞에 성경을 펴놓고, 기도적 연구를 통해서 나의 설교 준비를 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았다. 이것은 내가 성경 광신자(bibliolater)이거나 성경책 숭배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이고, 내 자신을 겸손하게 그 분과 그 말씀 앞에 낮추고자 함이며, 심지어 내가 본문 연구에 마음 쏟을 때조차도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엡1:18). 기도와 사색의 이러한 조합에 대하여 다니엘은 훌륭한 구약의 예를 보여준다. ‘서책으로 말미암아…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그 이유로 그가 주 하나님을 향하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계속하는 중에 가브리엘이 그에게 와서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9:1-3, 20-23)라고 말했던 것이다. 또한 잇따른 환상 속에서 한 사람이 그에게 나타나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10:1-14) 신약 성경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2:7) 이 두 경우 모두 한편으로는 책을 읽고 진지하게 사색하여 이해하려고 결심하는 마음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기도와 고백으로 되는 자기 겸손이 있다. 오직 연구와 간구 양자에 대한 응답으로서만이 괄목할만한 통찰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데일(R.W.Dale)이 고대 영국의 작가를 인용하여 썼듯이 ‘기도 없는 연구는 무신론주의이며 연구 없는 기도는 주제넘는 짓이다.’ ‘명상’이라 불리는 이러한 기도적 연구의 기간 동안, 비록 우연적일지라도 마음 속에 명료해진 단상들을 적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기간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합니까?’라고 내게 묻는 이들이 가끔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될 수 있는대로 오랫동안’이다. 본문을 가지고 시간을 소요하는 것을 대치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필요한대로 길게 가져라. 한 방울의 꿀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꽃을 탐색하라. 말라 없어질 때까지 열매를 빨아마셔라. 지금까지 나는 우리의 본문 연구가 은밀하고 개인적이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또한 협동 설교준비를 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 점에 대하여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자신이 남인도 마드라스의 추기경으로 있을 때 행했던 그의 실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몇 명의 목회자들이 반나절 혹은 한나절 동안 모였다. 그들은 문제가 되었던 주일의 성경 본문에 대한 면밀한 주석적 연구로 시작했다.’ 이것은 전체 모임(plenary session)과 너댓 그룹이 다음 한 달의 각 주일에 행할 설교의 개요를 준비하기 위해 질의 응답하는 모임이었다. ‘설교 개요는 평가, 비판, 토의를 위하여 전체 모임에 제출된다. 일반적으로 설교 본문은 남인도 교단에서 출판된 성구집(lectionary)으로부터 택하여졌다. 그러나 때때로, 특히 교회나 국가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룹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어떠한 기독교적인 응답이 마땅할 것이며, 사건이 일어난 그 주일 예배의 본문은 어떤 것이 적절할까에 대해 질의 응답 했다.’ 뉴비긴 추기경의 마지막 평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각자는 집에 돌아가서 자신의 설교 준비를 해야 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훈련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사건 자체로 있었을 경우보다 그 훈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구원의 순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심으로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다. 성도 각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근거로 하여 구원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고 이때 비로소 구원받는 자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의로 구원에 참여할 수 없으며 구원의 열쇠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가지셨다. 구원의 순서라 함은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구원을 적용시키는 순서이며 또한 그것은 단순한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를 말한다. 특히 구원의 순서를 계단식 도표로 그린 것은 마치 계단의 처음 칸이 없이는 둘째칸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앞의 내용과 다음의 순서가 철저히 연관되어 있으며, 구원의 각 단계들이 밀접한 연관 속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날 때 비로소 온전히 성취될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1. 예지(Foreknowledge)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경륜 가운데 미리 은혜의 눈길을 던지신다. 로마서 8장 29절에 나오는 ‘미리 아신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돌아본다’,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말씀 속에는 선택될 자를 미리 아셨다는 뜻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 ‘하나님께서 관여하신 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시1:6;144:3;호13:5;암3:2;마7:23;갈4:9). 2. 예정(Predestination)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을 미리 선택하셨음을 가리킨다. ① 예정의 조건. 인간 자체의 우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된 것, 즉 온전히 하나님의 의지로만 된 것이다(창8:20-22;9:12-16;15:12-21;신7:6-11;삼하23:5). ② 예정의 목적.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의를 얻고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형제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롬8:29). 3. 소명(Vocation, Calling) 그리스도에 의하여 준비된 구원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이 초청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① 외적 소명. 성령은 전도자를 통하여 복음을 죄인에게 전파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부르심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마22:14;막16:15;행13:46). ② 내적 소명. 외적 소명이 구원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인 감동하심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인 감동이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 유효한 소명이다(행13:48;고전1:23,24). 4. 중생(Regeneration)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성령의 역사이다(요3:3,5).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통한(약1:18;벧전1:23) 중생의 역사가 없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 갈 수도 없다. 5. 회심(Conversion) 중생으로 생겨난 새로운 성향으로 세상과 죄악을 향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새로운 각오이다.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① 소극적 요소.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지적 요소, 롬3:20), 자기의 죄를 미워하며(감정적 요소, 고후7:9,10), 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의지적 요소, 롬2:4) 회개를 가리킨다. ② 적극적 요소.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여(지적요소, 딤후1:12), 그 말씀을 구원의 진리라고 찬동하며(감정적 요소) 그 말씀을 신뢰하며 그대로 살아가려는 결의(의지적 요소, 히6:11)인 신앙을 가리킨다. 6. 칭의(Justification) 인간은 죄인이므로(롬3:10;욥9:2;전7:20)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롭다 인정받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즉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의를 전가받아 영생에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롬3:24). 7. 양자(Adoption) 마귀의 자녀였던 죄인을 칭의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 즉 하나님의 법적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상속권과 자녀의 친서를 부여하여 주신다(롬8:17;벧전1:4). 8. 성화(Sanctification) 중생한 성도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오염을 점차 제거하여 완전히 성결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요16:13;벧전2:2;벧후3:18;요일2:27) 성도들을 인내하도록 하며(롬5:4) 연단하여(히5:14;벧전1:7) 경건의 연습을 시키는 것이다(딤전4:7). 즉 성화란 지금 여기에서(now & here) 그리스도의 형상을 점차 닮아가는 것이다(고후3:18;골3:10). 9.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성령의 역사로 내적 소명을 받음으로 중생하여 진실한 성도가 된 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완전 타락하거나 배교할 수 없다(요10:28,29;딤후1:12;4:18). 10. 영화(Glorification)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인하여 성도는 천국에 들어가며(엡4:30) 장차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고(빌3:21), 영원히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나눌 것이다(계21:3). 즉 영화란 그때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닮는 것이다. 갈릴리에서의 3대 사역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갈릴리를 당신의 선교 중심지로 삼으시고 활발한 천국 확장 사업을 전개하셨다. 그런데 그 사역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① 회당에서의 ‘가르침’, ②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 ③ 모든 병과 악한 것들을 ‘고치시는’ 것이었다. 즉 그분은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시는 선생으로(마7:28,29), 복음 전도자로(마9:35), 또 영육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의원으로서(마8:3) 활동하셨던 것이다. 이는 오늘 예수 제자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교회의 3대 사명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교회는 말씀 ‘교육’(διδασκαλια, 디다스칼리아) 와 ‘선교’(κηρυγμα, 케뤼그마)와 ‘봉사’(διακονια, 디아코니아)가 조화될 때 그 본래적 기능을 감당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가득찬 ‘교제’(κοινωνια, 코이노니아)의 지속적 실현이다. 어쨌든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서 보여주신 바 이러한 세 가지 사역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질과 독립적 성격를 지니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최종적 지상목표를 향해 그 각각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땅에 현존하는 교회들이 지상 목표와 모든 활동의 방향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 건설에 집중되어져야 한다(마6:33). 미국의 십대교회 연구 1. Church on the Way 2.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 3. 뉴져지 평안교회와 패러미스 커뮤니티교회 4. Saddleback Church 5. Crystal Cathedral 6. Calvary Chapel 7. New Life Community Church 8. Focus on the family 9. 빌리그레함 박물관 10. Moody Church Church on the Way L.A 타운에서 북쪽으로 약 30분가량 운전해 가면 밴 너이스(Van Nuys) 지역에 위치한 '처치 온 더 웨이(Church on the Way)'가 있다. 이 교회는 최근 미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틀림없이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잭 헤이포드(Jack Hayford)가 훌륭한 목회자요, 설교가이며, 지금 미국교회에서 존경받는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면 우선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 약 만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이 교회의 주일예배는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심을 느끼는 찬양과 말씀, 그리고 미국 신자들 가운데 보기드문 충만한 기도가 있다. 또한 잘 정돈된 주일학교(Sunday School)및 인근 주민들을 위한 다양하고 효과적인 전도 프로그램 등을 들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한 잭 헤이포드의 설교는 미국 전역에 걸쳐 방송되고 있으며, 그 사역의 크기는 가히 놀랄 만하다. 현재 앞서가는 많은 미국 교회들 가운데 한국교회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회 스타일을 꼽는다면 바로 이 'Church on the Way'라고 는 생각한다. 1. 잭 헤이포드(Jack Hayford), 그는 누구인가? Church on the Way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이 교회의 담임인 잭 헤이포드를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잭 헤이포드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좇아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청년기 시절에 국제 포스퀘어 복음주의 교단(International church of Foursquare Gospel)의 멤버로 가입을 하였다.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있는 라이프성경대학(Life Bible College)에 입학, 성경을 배운 후 LA근교 대학에서 1956년도에 학사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후 곧 미중부지역에 있는 오랄로버츠대학에서 목회학 석사를 마친 뒤 목사가 되었고, 또한 캘리포니아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아 훌륭한 목회자이자 신학자가 되었다. 그가 중생의 체험을 한 것은 청년기로서 그 당시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전도자 오랄로버츠목사가 주관한 '텐트 부흥집회'에서였다. 당시 수많은 병자들이 기도를 통해 치유받는 모습을 보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됨으로써 살아 역사하시는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하는 설교자로 자라게 된 것이다. 1960년부터 5년간 포스퀘어교단의 전국 청소년 사역 총재 및 국제 부총무직을 훌륭히 감당해 낸다. 이때의 경험이 현재 Church on the Way의 주일학교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위의 청소년 사역을 간단히 설명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이스카웃이나 걸스카웃과 같은 형식으로, 유니폼을 입고 철저한 성경규칙을 갖고 공동체 훈련을 하는 것으로서 선교사, 혹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학을 잘 감당하는 프로그램이다. 초등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의 학생들이 받는 훈련인데 국제 잼버리대회와 같은 대형집회를 1년에 한번씩 가진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남학생들에게는 로얄 래인저(Royal Rangers), 여학생들에게는 미셔네트(Missionett)라 부른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모교인 라이프 성경대학에서 교수로 또한 학장으로 일하다가 1977년부터 1982년까지는 그 대학의 총장직을 역임했다. 이러한 많은 사역을 통해 지금의 교회인 Church on the Way를 1969년부터 목회해오고 있다. 이 교회는 1920년부터 있어온 교회이지만 잭 헤이포드목사가 부임하기 전까지는 이렇다할 성장을 보이지 못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가 담임하면서부터는 큰 성장이 이뤄졌다. 잭 헤이포드목사의 개인적인 사역활동도 화려하다. 60년대 유명했던 "모든 가정에 그리스도(Every Home For Christ)" 운동 본부장을 맡았었고, 국제교회 성장 본부장 등을 맡아 훌륭히 수행해 낸 능력자이다. 대다수 미국인이 시청하는 텔레비젼 프로에도 여러번 출연, 특히 '메리 그리핀 쇼'나 데스카폴의 '프라임 타임'에도 출연하였다. Church on the Way에서 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성경교사로 미국 전역에 알려져 있으며(- 이 라디오 사역을 통해 들어오는 헌금 액수는 연간 수백만불을 초월한다), 세계적 대회인 로잔세계복음화대회 위원장직을 역임했다. 또 1985년에는 그 해의 성직자상-베스컴부-을 수상했고, 1988년도 미국의 종교인상을 수상했으며, 그외 다수의 인물상을 수여받은 목회자이다. 그가 집필한 20가지 이상의 저술서 가운데 베스트셀러가 여러 개이며, 그 중에는 'Taking Hold of Tomorrow' , 'Rebuilding the Real Yoy', 'Worship His Majesty'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음악가로서 그가 작곡한 곡은 350여곡이 넘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곡은 '영광의 주님 찬양하세(Majesty)'와 'We life our voices rejoicing'등이 있다. 특히 영광의 주님 찬양하세'와 같은 곡은 전세계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애창되고 있으며, 그의 교회에서는 예배 때마다 거의 매번 불리워지고 있다. 이 곡이 쓰여지게 된 동기는 그가 영국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영국 왕궁을 방문했을 때,. 수많은 호위병들의 호위와 군악대의 음악이 퍼지면서 영국 왕가들이 받는 그 웅장함에 경탄하는 순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받으실 그 호위는 영국 왕가의 것보다 훨씬 더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날 저녁 밤새워 기도하면서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설교 가운데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영감적 이야기(Spiritual Impression)를 종종 하는 것으로 보아 작곡, 설교 등 목회의 근본을 성령님의 영감에 의존하는 섬세하고도 예민한 영적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다. 한 예로 그가 Church on the Way를 담임하고 몇 년동안 큰 성장을 이루지 못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낮에 차를 몰고가는 도중 인근 교회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는 당시 근방에서 가장 큰 교회인 벤너이스침례교회였다. 잭 목사의 마음에는 질투가 생기면서 그 교회를 쳐다보기도 싫었다고 한다. 그 순간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이 교회는 너의 교회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끼면서 마음의 질투심을 주님앞에 고백하며 회개하였다. 그후 10여년이 지난 지금 당시 최고의 교회였던 벤너이스침례교회를 Church on the Way가 인수하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성령님의 감동을 간증하면서 실제 벌어진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Church on the Way는 1920년에 세워진 포스퀘어교단의 교회중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1969년 잭 헤이포드목사가 시무하기 전까지는 별 특징이 없던 조그마한 교회였었으나, 1970년 초기부터 그 교회가 위치한 지역인 산페르난도 전역에서 일어난 '예수운동(Jesus People Movement)'의 구심점이 되었다. 2. 교회의 특징 1) 교회의 이름들 교회의 원래 이름은 '밴나이스제일포스퀘어교회'였으나 잭 헤이포드목사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교회의 이름부터 본당의 이름 등 특별한 이름을 명하는 특징이 있다. 교회 주보의 겉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우리를 Church on the Way(번역하면 길도주중회)라 부르는 이유는, ⇒ 지역 : 벨리 전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셔먼웨이(Sherman way) 길의 도중에 있으며, ⇒ 방향 : 오늘도 사역의 길 도중에 있으며, ⇒ 강조점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본당이 두 곳임도 특기할 만한데, 한 곳의 이름은 '거실(Living Room)'이며, 다른 곳의 이름은 '왕궁(King's Place)'이다. 이름대로 '거실'의 의미인 아기자기하며 사랑의 분위기가 넘치는 곳이 곧 예배당이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계신 곳이 '왕궁'의 예배실임을 표현할 때 잭 헤이포드목사의 목회관이 엿보인다. 2) 예배시간과 장소 주일 아침 9시에는 3천여명 좌석의 본당 두 곳(거실과 왕궁)에서 각각 동시예배를 가진다. 아침 9시 예배때는 잭목사가 '거실'에서 예배를 인도하다가 중간 기도시간에 차를 타고 '왕궁'으로 가서 설교를 한 뒤 '거실'에서 축도를 하면서 예배를 마친다. 물론 대형 스크린으로 양쪽에서 진행되는 예배가 TV 중계된다. 11시 예배는 '거실'에서만 갖는데, 주위에 많이 거주하는 스페인계 소수민족을 위한 동시통역 예배를 함께 가진다. 얼마 전부터 토요예배를 가지기 시작했는데 저녁 5시에 갖는다. 이것이 주일 1부 예배. 토요일 저녁 주일 1부 예배는 요즘 미국교회의 새로운 양상인데, 주일에 행해지는 예배 형태와 설교, 찬양등이 동일하게 엮어지는 예배이다. 토요 저녁 주일 1부 예배의 광고 문안은 이러하다. "언제부터 주일 아침 예배가 토요일 저녁에 Church on the Way에서 행해졌는가? 언제부터? 그것은 - 사람들이 주일에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 사람들이 주일에 타지역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 주일 예배에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초청하기 시작하면서 - 그저 주일 예배를 토요일 저녁에 갖기 원하는 그 때부터. 그리하여 Church on the Way는 토요일 저녁 왕궁예배실에서 예배를 마련했습니다. 토요 저녁예배를 왜 주일 예배라 부릅니까? 그 이유는 주일 아침 에배의 모든 내용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배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그래서 주일 예배이며, '주일 1부 예배'라 부릅니다. 나오셔서 토요일을 주일 아침의 일부로 만드십시오!" 3) 예배 도중 '기도서클' 예배는 약 20분 정도의 찬양과 경배로 시작하고, 말씀 전에는 항상 '기도서클'로 통성기도를 한다. 기도서클은 3-5사람씩 손을 잡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인도자의 제목에 따라 기도한다. 약10-15분 정도 기도하면서 인도자의 기도로 마치게 되는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서 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라고 말씀을 선포하며 보이지 않은 영의 세계에서 우리가 기도함으로 많은 역사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하게 외칠 때 많은 신자들은 은혜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감을 체험한다. 4) 주 보 대부분 미국교회가 그렇듯 주보의 어느 곳도 예배의 순서와 담당자 이름을 기입해 놓은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주보는 항상 여러 가지 내용을 담아 두툼하다. 항상 있는 것은 당일 설교의 요약지가 삽입되어 신자들에게 설교자의 메시지를 쉽게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대부분의 주보 내용은 오는 주간에 일어나는 갖가지 행사와 성경공부 및 훈련 모임들의 광고지로 쓰여지는데 그 사역 모임을 알리고 있다. 많은 경우 본 교회 모임 광고 외에 주변 기독행사의 전단 등 내용을 삽입하기도 한다. 5) 설교 전 생일카드 읽기 잭 헤이포드목사의 유머감각은 프로급이다. 그는 항상 설교를 생일카드 읽기로 시작한다. 유머스런 생일카드를 읽음으로 청중들로 하여금 폭소를 자아내게 하며 예배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 진다. 잭 목사의 이 방법을 매 주일 약 10여년 이상이나 해왔는데 그것은 본인이 받은 유머스런 생일카드를 설교 전에 한 번 읽은 것이 히트를 친 것이다. 그 후 또 한번 하면서 신자들이 생일이건 아니건 간에 유머스런 생일카드를 발견하여 담임목사에게 보내주게 되었다. 본인이 보내주는 카드가 읽어질까 해서이다. 3. 교 회 론 이 교회의 안내 책자에 실린 내용은 자세하며, 따라서 그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1) 교 단 Church on the Way가 속한 교단인 포스퀘어 복음주의 교단은 4가지 진리를 강조한다. '포스퀘어'란 말을 직역하면 '4개의 정사각형'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4개의 진리를 상징적으로 그림을 그려 4개의 정사각형을 넣고 교단의 로고를 쓴다. 본단 두 곳도 강단위에 이 네 개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 십자가 :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요 3:16, 행 4:12) - 비둘기 : 세례자 예수 그리스도 (막 1:8, 행 2:4) - 기름병 :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 (히 13:8, 약 5:14-15) - 왕 관 : 재림자 예수 그리스도 (요 14:3, 살전 1:16-17) (2) 신약시대 교회로서의 강조점 a, 말씀 우선주의 (Adherence to the Word of God) : 교회 역사적으로 볼 때 말씀이 경시될 때마다 영적으로는 평형을 잃게 되고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b. 예수 찬양주의 (Exaltation of the Lord Jesus Christ) : 삶의 모든 영역에 예수의 장엄함을 인식하며 구원자, 세례자, 치료자, 재림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정한다. c. 성령 사역주의 (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 : 성령의 사역은 예수를 높임에 있고, 성령님께 반응하는 자에게 풍성하고 풍만한 삶으로 인도 하신다. d. 초교파 주의 (Interdenominational Fellowship) : 믿음으로 중생한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인식한다. e. 신자들의 사역주의 (The Ministry of the Believers) : 성령충만한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전권대사임을 인식하며 목격한다. (3) 교회로서의 기본적 진리를 수호한다. a. 회개와 용서 (Repentance and Forgiveness) 예수께서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선포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부르심은 죄를 고백하기 위함이요 새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며 현재와 미래의 영원 가운데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요3;16, 10:10, 마10:32, 행4:10-12, 롬 5:1, 8:1) 예수 안의 '생명의 길'에 대해 들려 달라고 누구에게라도 여쭤주세요. b. 물 세례 (Water Baptism) 예수 그리스도의 물 세례를 본받으라 했습니다.(마 28:19)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고 했습니다. 세례 받기 원하시면 저녁예배시간 1시간 전에 교회 사무실로 오세요. (주일 4:30pm, 수요일 6:00pm, 왕궁예배실로. 타올과 갈아 입을 겉옷과 흰색 속옷을 준비하세요.) c. 성령 세례 (Baptism in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1장 5절의 약속은 불변하신 예수님의 현실적용 내용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행 2:38, 39)의 약속이 진실로 받아 들여져야 합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축복은 우리의 것으로 받도록 되어야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경험하셨습니까? 오늘 예배후나 주중 언제라도 Church on the Way 목사님들은 이에 대해 상담이나 기도로 도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d. 신유와 자유케 함 (Healing and Deliverance) 믿음의 기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시는 능력이 병든 자와 연약한 자를 고치심을 믿습니다. 교회 장로님(목사도 장로의 한 사람으로 봄)들과 스탭들은 야고보서 5장 14-16절에 의거한 하나님의 은혜를 위한 기도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일과 수요 예배후 "기도 사역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약한 상태는 보다 깊은 필요나 안내를 받음으로 치유되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준비 했습니다. 도움을 원하시면 전화 주십시오. (818) 779-8000 이와같이 말씀과 사역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교회로 평생을 잘 유지하는 교회론을 가졌다고 볼 수 있으며, 흔히 볼 수 없는 깊은 성경 해석과 훈련을 겸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담임 목사의 자라온 배경과 학력 등 그의 지도력이 표출된 것이라 하겠다. 4. 목 회 철 학 잭 헤이포드목사의 성공적 목회생활에는 바탕에 깔려 있는 세가지 목회 철학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왕국, 둘째는 예배의 개혁이며, 셋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다. 하나님 왕국은 예수를 통하여 교회가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내용임을 강조한다. 곧 현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와 있고, 그것을 깨닫고 체험한 자는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때 세상 사람들은 천국을 이 세상에서 바라보며 결국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항상 가르친다. 천국생활의 삶 가운데 잭 목사가 가장 잘하는 것은 그의 투명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본인의 실수나 잘못을 솔직 담백하게 설교때 털어 놓는다. 예배는 녹화되어 미전역으로 방영된다. 이때 특별히 편집하지 않고 예배의 상황이 그대로 방영되는데 오히려 그를 통해 예수의 모습이 비쳐진다고들 한다. 예배의 개혁은 '의무중심의 예배'를 배척하고, '찬양과 경배'를 통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예배를 선호한다. 예배인도자가 꼭 찬양인도를 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리는 모습을 성도들이 봄으로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설교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왕적 제사장이요, 제사장인 목회자의 자세를 강조한다. 그래서 그 교회는 OHP를 양쪽에서 비추면서 얼굴을 들고 찬양을 하게 하며 찬송가는 쓰지 않는다. 성가대의 찬양은 있으나 자연스러운 복장을 하고 다양한 스타일의 선곡, 전통적인 모양을 탈피한다. 예배 도중의 회중 '기도서클' 등은 예배 철학에서 나온다. 심지어 예배도 TV나 비디오를 통한 메시지나 광고를 사용하기도 한다. 현대적 감각 적용에 뛰어나다. 하나님 나라 확장은 성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며 성도들이 힘을 합쳐 교회적, 교단적 차원에서 한가지 일을 해 나갈 때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는 개교회 차원에서의 선교는 지양하며 교단으로 선교헌금을 보내 교단선교 프로그램을 돕는다. 포스퀘어교단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선교를 많이 하는 교단으로 명성이 높다. 5. 교회의 사역 이 교회는 다양한 사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부흥회나 심방사역은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a. 새로운 남성 모임 (New Men, Ic.,) 담임목사와 함께 하며 한달에 한 번 모이는 모임으로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기도, 봉사 등을 친교 형식으로 갖는다. 파트너식 기도 채무자 관계를 강조한다. b. 여성 모임 (Women On the Way) 모든 여성이 참여할 수 있으며 영적 성장과 동참사역, 전도등을 통한 여성들의 삶의 극대화를 꾀한다. 여성 강사들의 특징을 통한 성장과 소그룹 활동을 통하여 관계를 증진시켜 여성의 은사를 발견, 봉사하게 한다. c. 왕의 사역학교 (The King's Institute) 2년제 대학 과정을 이수하면 졸업장을 수여하는 평신도 사역학교(훈련소), 성경 사역 신학교라고 할 수 있다. 수업시간을 주중 오후시간과 토요일을 이용, 직장인들에게도 유용하게끔 되어 있다. 20여명의 신학박사 및 교수진으로 구성되어 보통 신학교 수준을 능가하며 수많은 훌륭한 사역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학장은 본교회 수석 부목사가 맡고 있으며 학비는 상당히 저렴하다. d. 기혼 부부모임 (Marriedcouples) 이 사역부에서는 여섯가지의 단계적 사역팀이 있다. ① 미혼 그룹 (Pre Married ) - 건강한 결혼을 준비하며 공부한다. ② 약혼 그룹 (Threshold) - 결혼 수주 이전의 약혼자 그룹이다. ③ 신혼 그룹 (Newly Married) - 하나됨과 대화법을 배우며 부부로의 길로 안내해준다. ④ 젊은 기혼자 그룹 (Young Married) - 1년에서 10년까지의 기혼자이거나 20대, 30대 기혼자들의 모임이다. ⑤ 중년 그룹 (Middle Married) - 35세 이상의 부부 혹은 10년이상 결혼한 기혼자들이다 장년 그룹 - 45세이상의 기혼부부 모임이다. ⑥ 청년부 (Young Adults, 25-29세) - 차세대 모임으로 목적을 가르친다. 예수를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법을 배우며 그리스도 안의 풍성한 삶을 살게 하며 자라나면서 기쁨을 만끽하도록 배우는 모임. ⑦ 대학부 (College, 28-24세) - "컬리지 컨넥션"이라는 명칭으로 주님과의 성장 단계를 배우고 타인과의 파트너쉽을 기르는 모임. 도시내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고 손길을 건네는 귀중한 모임. ⑧ 싱글청년 (Single Adults, 30세 이후) - 미혼의 극대화 성경공부, 소그룹 활동, 특별 세미나, 친교, 전도 혹은 봉사활동을 통하여 예수를 전하고 가까이 하는 그룹. 중등부 (7-8) -인생의 특별한 시기! "Rock Solid" 명칭으로 중등부 사역감당. ⑨ 고등부 (9-12학년) - 목적지향, 주체성 확립, 그리스도 안에서의 확고한 삶 등을 토론 하고 모임, 제자훈련, 영적 성장을 통하여 매주 재미있는 모임. ⑩ 어린이 사역부 (Children) - 영아에서 6학년까지의 사역, 게임과 활동 등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초 단계 사역. 신생아 돌보는 사역은 모든 예배 때마다 준비하고 있음. ⑪ 장년부 (50세 이상) - 장성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하며 특별한 필요 충족의 모임.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마음껏 뿜어 낼 수 있는 모임. 르네상스 성가단, 새찬송 가스펠 성가단, 여리고 콘서트 밴드부, 예루살렘 오케스트라 등의 그룹들은 성도들의 예배에 불씨를 당기는 사역을 하며 그외 어린이들에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음악 프로그램 사역. 음악사역부(Musci) - 르네상스 성가단, 새찬송 가스펠 성가단, 여리고 콘테스트 밴드부, 예루살렘 오케스트리 등의 그룹은 성도들의 예배에 불씨를 당기는 사역을 하며 그외 어린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수 남ᄒ은 음악 프로그램사역. ⑫ 체육, 오락 사역부 - 건강한 육체와 영적 성장, 친구 전도 등이 목적임. 기쁨으로 즐기면서 불신자 전도율 만점! ⑬ 라디오 TV사역 ⅰ. USA 라디오 사역 : 현재 미국 43개주에서 260여개 방송국에서 1년 365일 주말만 제외하고 30분짜리 "리빙웨이(Living Way)"가 방송되고 있다. ⅱ. 인터네셔널 사역 : 해외 4개주 15여 방송국에서 잭의 설교가 통역되어 방송되고 있다. ⅲ. TV사역 : 미 전역에 걸쳐 1시간짜리 프로그램과 30분짜리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으며 방송국은 약 300여군데에서 방출한다. ⅳ. 해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두 군데 방송국에서 송출한다. 특기할 사항은 라디오, TV사역의 총책임자는 잭 헤이포드의 아들이 책임을 맡고 있으며, 방송국 본부는 교회 본당 지하실에다 장비를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한 헌금은 엄청난 액수이다. ⑭ 목회자 세미나 - 1년에 한번씩 4일간 열리는 목회자 세미나는 미국 전역에서 목회자들이 참석하고자 하는 유명한 세미나이다. 세계적인 강사들이 주 강사로 참석하며 매번 약 1500-2000여명이 참석하고 금년은 28번째 맞이하는 해이다. 매해 11월 중순경에 열린다. ⑮ 서점, 서적 사역 - 이 교회의 서점은 LA지역에서 기독교 서적을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타 서점에서의 할인가격보다 저렴하게 판매함은 잭 헤이포드목사의 목회철학이기도 하다. 잭 목사의 무수한 저서들이 많은 가운데 신간된 성경공부 교재가 나와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전권 24권으로 되어있는 성경공부 교재가 "성령 충만한 시리즈"로 발간 되었고, "성경발굴 안내 시리즈와 왕국 다이나믹 안내"(Bible Discovery Gukdes & Kingdom Dynamics Study Guide)의 두 부류의 성경공부 교재 중 미흡한 부분이었던 성령의 역사에 관해 충분히 보강된 교재로 주목을 받고 있다. 연락처: The Church on the Way 14300/14800 Sherman Way Van Huys, CA 91405-2499 Internet - http://www. Livingway.org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 - 하나님 방식으로 주님의 몸을 이뤄가는 교회 - 과정지향적 목회로 구도자에게 초점을 둔 목회현장 미국의 교회들이 새롭게 움직이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에 한국교회 지도자 그룹들의 미국교회 견학도 줄을 잇고 있다. 최근 급부상한 미국교회들은 대부분 베이비 부머 세대 (Baby-Boomer Generation)들이 교회의 준거그룹(reference group)을 형성하고 있으며, 베이비 부머 세대의 문화적 옷을 입고서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다. 이중 대표적인 교회가 서부에서는 남부 오렌지카운티에 위치한 새들커뮤니티교회라고 할 수 있고, 동부지역에서는 시카고에 위치한 윌로우크릭교회라 할 수 있다. 윌로우크릭교회는 빌 하이벌스목사(Bell Hybels)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이다. 윌로우크릭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구도자에게 초점을 두고 사역하는 교회(providing a service for seekers)라고 할 수 있다. 윌로우크릭교회를 들어서면 교회라는 느낌보다는 큰 공원에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넓다란 잔디밭과 인공 호수, 그리고 교회의 분위기가 나지 않는 현대식 건물이 잘 조화를 이룬다. 대단위 연구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학교 캠퍼스와 같은 느낌도 든다. 물론 교회의 파킹량도 수천대를 수용할 수 있으리만큼 넓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공항의 터미널에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사인판과 예배 및 각종 모임을 알리는 모니터이다. 공항의 이착륙을 알리는 모니터와 흡사한 모니터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로비에는 자연스럽게 교제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약 3백 여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비신자라도 쉽게 그런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게 되어 있다. Sunday School은 어린이들의 꿈나라(Dream Land)와도 같은 분위기, 예배시간은 늘 공연장과 같다. 설교의 서론 (Intro-Duction)이 늘 드라마(Skit Drama)로 시작하는 교회, 찬양... 이런 특징들을 열거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윌로우크릭교회는 과정지향적(Precessoriented) 프로그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먼저 다리 놓기(bridge-building)를 통해 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Relationship이 다져지면 입술로 증인이 되어(sharing a verbal witness) 관심을 보이는 자들과 초신자들에게 맞게 프로그램된 예배를 제공한다. 이 관계에서 좀더 성장하게 되면 기존 신자들을 위한 주중예배에 참여하게 되며, 나아가 소그룹에 참여하게 된다. 이 교회는 2천여 개의 소그룹이 있다. 다음 단계는 각자의 은사에 따라 봉사에 참여하고, 궁극적으로는 청지기 정신을 지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케 하고 있다. 현재 출석교인은 2만여명, 예배당 크기만도 3에이커 정도의 규모에 달하는 대형 교회이다. 오늘의 윌로우크릭이 있기까지 숨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교회의 담임인 빌 하이벨목사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벨은 미시간주에서 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그도 장차 기업을 잇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안정적인 미래를 의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데 있었다. 그에게는 돈의 가치도 중요했지만 그를 사로잡는 것은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모험심이 대단히 강했다. 하이벨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던 것은 어버지의 사랑이었다. 하이벨은 말한다. “아버지는 정말 날 믿으셨다. 그리고 내가 나의 인생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셨다.” 그의 아버지는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기보다 때로는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그것이 하이벨을 준비시키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하이벨이 1학년일때 픽업 트럭을 운전하게 했고, 5학년 때는 혼자서 30여마일 떨어진 스키장엘 보내기도 했다. 7학년 때는 45피트 보트를 몰았다.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혼자서 아프리카와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여행 같은 큰 일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아들을 그렇게 훈련시켰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잔인한 행동으로 비칠 정도였다. 또한 그가 몸 담았던 개혁장로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가 그에게 성경의 귀중함, 가정의 중요성, 믿음의 충실함과 인내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선물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이벨이 17세 되던 해, Awand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회상한다. “사랑으로 인한 거져주는 구원의 선물을 깨달았을 때 가슴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이 때부터 그의 가슴에 심겨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그의 삶에 혁명을 이루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을 계획으로 대학교에 진학, 공부하던 중 회의를 느끼며 8주간의 남미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또 한 번 그의 삶을 하나님의 소명에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브라질 리오드자네로의 코파카바나 해변이 보이는 한 호텔 방안에서 무릎을 꿇고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영원한 것에 헌신하겠다는 헌신의 기도를 하게 된다. 남미에서 돌아온 후 시카고에 있는 어와나 본부에서 일하면서 그는 Dave Holmbo라는 신앙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한 'Son City'라는 전도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3년에 약 150명으로 시작된 모임은 2년후인 1975년에는 약 1,200명까지 참석하는 규모로 커졌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계를 느낀 하이벨은 그 당시 사도행전과 Robert Schuller목사의 책을 읽으며 마침내 현재 윌로우크릭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교회를 23세 나이의 신학생으로 윌로우크릭극장을 빌려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교회 형태의 전통적 개념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목회 철학과 사역을 꿈꾸는 목회 비젼을 펼치게 된 것이다. 1978년, 그는 담임목사가 되면서 첫 당회를 조직, 3명의 장로가 선출되었다. 그후 윌로우크릭교회는 한 차례 어려운 시련을 맞게 된다. 창립동역자인 Dava Holmbo목사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고, Holmbo 목사는 그 다음해인 1979년 당회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때부터 1981년까지 1,800명 교인 중 약 2백여명이 교회를 떠났고, 교역자들중 4분의 1, 리더들중 3분의 1 정도가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상황은 빌 하이벨목사에게 목회철학과 비젼을 다시 점검하며 갱신하는 계기가 되었고, 윌로크릭커뮤니티교회의 장래를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는 견인차 역할이 되었다. 그는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나의 약점과 한계를 너무나도 깊이 느끼며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한 번만 더 일할 기회를 주시면 바르게 하겠습니다. 나는 윌로크릭커뮤니티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의 깊은 서원이 되었다.” 그후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는 이런 빌 하이벨목사의 비젼과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교회”로 주님의 몸을 이뤄가게 된다. - 하나님을 높이고 영적 은사 개발, 세상에서 빛이 되게 - 관계형성→ 증거→ 구도자 예배→ 주중 예배→ 소그룹→ 봉사케 1. 목적 윌로우크릭교회는 하나님을 높이고(Exalation), 신자들을 교화하며(Edification), 복음을 전하고(Evangelism), 사회에 기여하는(Social Action) 4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1) 하나님을 높임 :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2) 신자들의 교화 : 신자들에게 성경적인 이해의 기초를 닦고, 헌신적인 삶을 확립하며, 영적 은사를 발견, 개발하며,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원이 되도록 돕는다. 3) 복음전도 : 그리스도 없이 내세를 맞이할 사람들을 전도한다. 교회는 성경께서 믿지 않는 자들을 찾음같이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찾아 나서도록 도와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찾도록 격려한다. 4) 사회활동 : 말과 행위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실증함으로 세상의 양심으로서 행동한다. 2. 철학 교회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 그러나 철학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그 철학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윌로우크릭교회는 다음의 기본적인 원리 위에 기초하고 있다. 1)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동행하며 자신의 믿음을 증거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 복음전도의 영적 은사를 받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소명을 느끼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의 책임이다. 비 신자들을 전도하는 교회의 효율성은 우리가 전도자로서 은사를 받지 못한 95%의 신자들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적극적으로 증가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전도 노력을 도운다면 그들을 움직일 수 있다. 윌로우크릭은 신자들의 믿지 않는 친구들이 교회에 올 때 그들이 거부감 없이 쉽게들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그들의 삶에 적절하게, 창조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의 스타일로 전달하도록 설계된 예배를 제공함으로서 신자들의 복음전도 노력을 보완하고 있다 2) 구도자들이 갖는 필요들은 기존 신자의 필요들과는 다르다. :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용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꺼린다. 만약 참석을 한다 해도 기독교 원리들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이들에게 사역을 할 때 교회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행해져야 한다. 윌로우크릭은 처음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특별하게 디자인된 예배(주말 새신자 예배)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편 이미 믿는 신자들의 필요도 잘 채워져야 하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주중 예배도 잘 디자인하고 있다. 이 예배는 성경강해설교를 통해 삶에 도전을 주고, 성찬식을 나누는 등 창조적인 방식으로 신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한다. 3) 신자들은 처음 신앙을 갖는 사람이 믿음을 결정하는 과정과 그리스도안에서 성장하는 개인의 신앙 여정을 존중해야 한다. : 신학적으로는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태어나는 때가 있음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러한 사건은 개인이 기독교인이 됨으로서 치러야 할 대가를 검증하고 살펴보는 일련의 과정 이후에 일어난다. 회심의 순간은 그 과정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고 새로운 신앙에서 성숙의 과정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그 결과로서의 윌로우크릭은 실제로 사건중심보다 과정지향이 되도록 힘쓰고 있다. 4)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은사를 받은 사역자이다. : 윌로우크릭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고 자라나게 하는 절대적인 지체로서 하나님에 의해 은사를 받은 자들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봉사와 사역에 참여하도록 이들을 동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교인들이 사역과 봉사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하며, 그것을 사역과 봉사를 통해 사용하도록 도전함으로서 이뤄진다. 3. 특징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를 특징 짓는 것은 앞에서 다룬 4가지 목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개발된 7가지 전략에 있다. 1) 관계를 형성함 (Bridge Building) 비신자들을 교회의 생명력 있는 생활속으로 이끄는 것은 신자들이 이들 개인과 성실한 관계를 세울 때에야 이뤄질 수 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비신자 친구들과 성실한 관계를 세우도록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다. 비신자들은 기독교로부터 고립될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기독교 라디오 채널이나, 전도 스티커에 잘 감동되지 않는다. 자칫하면 그들에게 주어진 전도 문서들이 쓰레기통으로 던져지기 쉽다. 이들에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비신자들과 성실한 관계의 개발을 통해서 가능하다. 2) 입술로 증거함 (Sharing a Verbal Witness) 일단 비신자들과 성실한 관계가 세위지면, 신자들은 그들이 간증을 나눌 기회를 갖는다. 이런 기회는 노력하는 사람에게 먼저 주어진다. 그러나 비신자들은 이런 간증에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는 어렵다. 이들이 적절하면서도 창조적이고 그들에게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주장들을 생각하도록 계속적인 도전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 이들을 데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3) 초신자를 위한 예배를 제공함 초신자를 위한 예배(a service for seekers)는 그리스도를 믿으려는 결심의 과정속에 있는 사람들과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는 사람들, 그리고 최근에 그리스도에게로 자신의 삶 을 헌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주말에 갖는 이 예배는 기존의 신자들이 비신자 친구들인 '해리', '메리'와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만들어진 이들의 복음적인 노력들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해리'와 '메리'는 전도대상을 삼는 비신자 남성과 여성을 대표적으로 통칭하는 이름) 세상 생활방식에 젖은 비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급진적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메시지가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편안한 환경 속에서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기존 신자들을 위한 주중예배에 출석 (Attending the New Community Service) 한 번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일정 기간동안 주말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주중 신자들을 위한 예배에 참석하도록 권유를 받는다. 윌로우크릭에서 “New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 예배는 신자들에게 공동의 예배에 참여하게 하고, 그들이 성숙할 수 있도록 의도된 성경강해를 듣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예배는 온전히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5) 소그룹에 참여함 (Participating in a Small Group) 주중 예배에 참여한 신자들은 다음 단계로 소그룹에 참여하도록 권유받는다. 소그룹 참여는 참여자에게 상호책임성, 제자도, 격려와 후원은 물론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소그룹은 2년의 기간동안 매주 모이며, 8-10여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이 기간동안 소그룹의 멤버들은 윌로우크릭의 소그룹 사역에 의해서 기획된 교과과정을 공부한다. 6) 봉사에 참여함 (Involve in Service)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를 자신이 뿌리내릴 모교회로 여기는 신자들은 그들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하며 봉사의 어떤 형태로든 그 은사를 사용하기를 권유받는다.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확인하고, 개발하고, 사용함이 없이는 그들의 영적인 잠재력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7) 청지기 의식 (Stewardship) 신자들은 돈을 관리하는 영역에서 교육받고 그들의 돈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방법으로 관리하는 개인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신자들은 빚지는 것을 거부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을 중지하며, 자신의 수단 내에서 살고, 자신의 소유물에 인색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며, 주님의 일에 너그러이 주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모든 신자가 청지기 의식이 제자도의 한 형태이며, 헌금이 예배의 한 형태임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윌로우크릭은 이 7가지 전략을 가지고 '보조사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보조사역들은 윌로우크릭 사역의 핵심이다. 이 보조사역은 7가지 전략을 가지고 신자들을 돕는 역할을 한다. 약 85개의 보조사역들은 교회 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데, (1) 복음전도사역 (1-2단계) (2) 구도자를 위한 예배 (3단계) (3) 기존 신자를 위한 예배 (4단계) (4) 소그룹 사역 (5단계) (5) 네트웍 사역 (6단계) (6) 청지기 사역 (7단계) 등이다. 윌로우크릭 지도자들은 교회 내에서 수행되었던 전략은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를 향하신 성령에 의해서 개발된 청사진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전략은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의 지도자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들의 은사와 정열들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7가지 단계별 전략이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에 효과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성경을 믿는 모든 다른 교회들에 대한 성령님의 청사진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의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 지도자들은 하나의 예배라는 제한 속에서 복음도 전하고, 신자들도 양육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각각의 영역에서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사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1. 설문조사와 분석 구도자 예배는 1975년 교회의 설립에 앞서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취해진 지역사회 조사의 결과로부터 발전되었다. 질문은 "당신은 지역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까? 하는 것이다. 조사 결과 교회출석에 전혀 흥미를 갖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무관심의 다섯가지 강력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1) 교회는 언제나 돈을 요구한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것도 돈의 사용을 통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2) 교회예배는 지겹고 생명력이 없다. 3) 교회예배가 판에 박은듯이 뻔하며 동일한 것을 마냥 되풀이 하는 것과 같다. 4) 설교는 현실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상생활에 부적합하다. 5) 목사가 사람들에게 죄책감과 무지함을 느끼게하고 그래서 불신자들은 그들이 교회 문을 들어올 때 보다 나갈 때에 더욱 비참한 감정을 가지고 교회를 떠난다. 이런 조사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지도자들은 교회를 포기한 사람들의 삶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교회예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지도자들은 누구를 이 예배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막연히 비신자 모두를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불충분했다. 그래서 예배 대상의 폭을 좁히고 특정적인 사람을 구도자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당시 교회 주변의 지역사회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25세에서 50세까지의 남성 전문 직업인을 주말의 구도자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어려우며, 교회에 대한 그들의 요구가 보다 강경하기 때문에 예배는 이들을 중심으로 디자인 되었다. 여자들은 교회의 문제들에 보다 마음을 열고, 용서하며 쉽게 포옹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구도자 예배가 남성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된다면, 여자들에게도 물론 전해질 것이다. 뿐만아니라, 전통적으로 남자는 가정의 모범역(RoleModel)이기 때문에 만일 남자가 가정의 영적인 생활에 참여하지 않으면 가정의 영적인 성장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2. 구도자 예배의 철학적인 원리들 기본적인 가치와 원리들은 어떤 중요한 노력을 시작하기 전에 확인되어져야 한다. 구도자 예배에서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않을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예배의 모양과 구도자들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기본적인 철학적 원리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는 다음의 철학적인 원리 위에 세웠다. 1)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에게도 중요함에 틀림없다. 2) 길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져야 하며 발견되어져야 한다. 3) 복음전도와 신앙교육은 기존 신자의 필요와 비신자들의 필요가 크게 다를 때 동일한 예배에서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4) 교회가 구도자의 영적인 여정을 존중한다는 것이 구도자들에게 전해지고, 허용되며, 정당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5) 구도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교회의 분위기에) 당황하게 되거나 자신의 의사와는 다른 (무엇을 말하거나 헌금 따위의) 외적인 압력을 받거나 신분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6) 탁월함 (교회의 모든 것에 탁월함을 유지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며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진다. 3. 전 략 비신자가 교회에 오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과 예배의 철학적인 원리를 파악함으로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는 구도자 예배를 위한 전략들을 적극적이면서도 사려 깊게 개발하도록 하였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관해서 경험하는 모든 면들이 이러한 장애물과 원리들을 통하여 걸러져야만 이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방법들을 결정할 수 있다. * 초신자 예배의 요소들 1) 우리 자신의 지역사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복음화하라고 하는 성경의 명령을 믿음. 2) 하나님의 왕국에서 어떤 사람도 결코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는 열망. - 이를 위해서 동시대적이고 창조적인 것에 전념. 3) 구도자들의 익명성을 깊이 존중. 4) 구도자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시간이 필요함을 이해. - 그러므로 강조점은 구도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행사에 있지 않고 영접하는 과정에 있음. 5)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탁월함의 필요성을 인지함. - 특별히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전달하는 것들에 있어서 6)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 재능, 그리고 재물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두려는 것을 이해함. 그런 원인이 탁월하게,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다루어질 때 예수 믿는 결과를 낳게 된다. 7) 기독교와 구도자들의 일상생활 사이를 적합하게 연결하는 일에 전념. - 구도자들이 기독교를 실생활화 할 수 있도록 전념. 구도자들은 교회의 시설물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면에서 비판거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직원이나 자원 봉사자들은 모든 일에 탁월함을 유지하도록 전념한다. 어떤 구도자가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를 방문할 때 만나는 경험은 다음과 같다. ☞ 처음에, 교통정리를 위해 마당 입구에 서 있는 경찰을 만나게 된다. 마당은 깨끗하며 잔디는 정돈되어 있고, 나무나 꽃들이 심겨져 있으며, 보이는 전체가 눈에 흡족함을 제공한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밝은 오렌지 유니폼을 입은 교통정리팀에 의해 주차를 도움 받는다. 그리고 교회에 다가가면 또 다시 안내원에 의해 도움을 받으며 건물 안에서는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질문이든지 기쁘게 대답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예배드리는 장소로 들어가면서 구도자는 구도자로서 그에게 필요한 활동 정보를 담은 안내지를 받는다. 그가 자리에 앉으면 그는 그에게 평안함을 주도록 만들어진 녹음된 음악을 듣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침묵은 불안감을 주기 때문이다. 앉아서 예배시설물을 돌아보면서 그는 기분을 상하게 하는 혹은 미심쩍은 것들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를 산만하게 할 십자가도 없고 종교적인 상징물들도 없다. 이 모든 경험들은 그에게 평안함을 주고 구도자가 메시지를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구도자들에게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의 리더쉽이 세상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고 있음을 음악, 드라마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알리는 것은 중요하다. * 구도자 예배의 구성요소 음악과 드라마와 성경읽기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모두 설교자의 메시지에 적합하도록 기획된다는 것이다. 음악 : 공연되는 음악은 경쾌하며 현대적이다. 예배중에 모두 함께 부르는 시간, 뮤지컬도 있다. 드라마 : 설교의 서론 역할로 현재의 논쟁거리와 관심들을 유머스럽고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민감하게 다룬다. 성경읽기 : 개인적인 스토리나 시사 사건들과 관계되는 구절들이 읽혀지며 성경이 오늘날의 문화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예시한다. 알림 : 구도자 예배에서의 알림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며, 교회에 관한 부가적인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도록 만들어져 있다. 헌금 : 구도자는 그가 손님이며, 이 순서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 구도자는 그 자체로 환 영을 받으며, 물질적인 기여 때문에 환영 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메시지 : 메시지는 오늘날 구도자와 기존 신자들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적합성을 강조하며 현재의 논쟁거리나 문제들을 다룬다. 익명성 : 구도자 예배의 전체 순서에 흐르는 신념은 구도자가 익명성을 바란다는 것이다. 참석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번의 짧은 코러스를 부르는 시간에 함께 참여하고 자신이 앉아 있는 주위에 인사하는 정도이다.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에서는 사건 지향적이 아니라 과정 지향적인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간증을 통해서 대개 교회에 발을 딛고, 예수 믿기까지 6개월에서 8개월의 기간이 걸리는 것을 인지시키고 있다. - 사 역 의 인 력 - ☞ 사역의 인력 1. 담임목사 (Senior Pastor) 담임목사의 중요한 책임은 윌로우크릭의 신자들에게 리더쉽, 양육(nourishment), 비젼을 제공하는 것이다. 주중, 주말 예배의 중요한 설교자이며, 이사회의 의장이며, 당회의 일원이다. 이와함께 사역하는 직원들에 대한 총 관리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2. 부목사 (Associate Pastor) 부목사는 보조사역의 책임자들이 리더쉽을 가지고 각각의 보조사역을 부흥시키는 것을 감독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또 직원들을 모집하는 것, 고용하는 것, 그리고 해고하는 것을 책임지고 있으며, 주말과 주중 예배에 필요에 따라 가르치며, 사역진들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책임이 있다. 그리고 부목사는 담임목사에게 직접 보고한다. 3. 기획 책임자 (Director of Programming) 기획책임자는 모든 예배와 특별 프로그램 행사에 다양함과 영감을 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기획팀의 전체적인 비젼을 감독하며 담임목사에 의해 주어지는 메시지와 시행되는 프로그램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매년 기획 부서에서 제시되는 음악 연출의 총 연출자의 책임을 맡고 있다. 담임목사에게 직접 보고한다. 4. 경영 관리팀 (The Management) 경영관리팀은 담임목사, 부목사, 기획책임자, 한 명의 장로로서 구성되며 여기에 부목사에게 보고하는 5-6명의 스텝 멤버들이 더해진다. 이 그룹은 기획과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주기적으로 만나며 위원회와 장로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5. 장 로 (Elders)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는 8명의 장로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가지고 있다. 이 위원회에 속한 각각의 멤버들의 책임은 다음과 같다. 교인들을 전도하고 지도하고 보호하는 것, 성경적인 모범역을 제시하고 질서있는 삶의 모범을 보이는 것,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과 훈계를 통해 자라는지 감독하는 것, 진리를 오도하는 자를 징계하는 것, 신앙의 돈독한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 감독하는 것, 교인들의 영적인, 육적인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장로들은 또한 담임목사와 이사회, 스탭들과 함께 교회 공동체를 살피는 일을 한다. 6. 이사회 (Board of Directors) 이사회는 17명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멤버들은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의 법적, 재정적 문제들을 감독하는 책임을 부여 받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소유한 모든 재산들의 보호, 관리, 유지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목적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높이고, 신자들을 교화하며, 복음을 전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4가지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1) 높임(Exaltation) :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빌2;8-11) 교회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값으로 사신 바 되었다는 것, 즉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권위를 가지시고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모든 충성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에서 성경에 나타난대로 그의 뜻을 따라서 그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힘써야 한다.(빌 2:8-10, 엡 1:220-3, 고전6:19, 골1:18, 2:8-10, 벧전 1:18-19, 요 19:21, 막 14;16장, 마 27-28장) 2) 교화 (Edification) :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엡4;11-13) 교회의 주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교회에 속한 교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가르치고 제자도와 개인적인 복음 전도 훈련을 시키는 강력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신자들은 서로를 섬기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상호 의존적인 지체들로서 구성되며 각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전체의 몸을 세우고 서로의 영.육간의 짐들을 지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것"을 알고 서로간에 각 사람의 능력의 개발과 사용을 격려하기를 심히 바라고 있다.(엡 4:11-13, 4:16, 딤후 4:2-4, 딛 2:15, 3:14, 갈 6:1-2, 신 6:1-2, 고전 12:-14장, 롬 12;4-8, 히 10:24-25, 3;13, 행 4:34-35, 2:42, 수 1:8) 3) 복음전도 (Evangelism) : 교회는 복음 선포를 위해 존재한다.(마28:19-20) 우리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교회와 개인의 최우선 순위로서 받아들이며, 가능한 널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무장시키시고 다양한 직업과 사역 속으로 들어가서 각 사람의 영역내에서 말과 행위로써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을 증거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며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받은 능력을 충실히 사용 하기를 바라신다. 복음 선포에는 모든 사람에 대한 참 사랑과 관심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마 28:19-20, 5;13-16, 9:36, 22:37-39, 행 1:8, 골 4:3-6, 막 16:15, 롬 10:14-17, 엡3:16-19, 4:13) 4) 사회봉사 (Extension) : 교회는 사회 봉사를 위해 존재한다.(마 25:34-36) 복음선포와 함께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서 그리스도의 긍휼을 베풀고 악에 대한 선지자적인 항거를 하도록 그리스도에 의해 사명을 부여받았다. 교회는 성경의 명령에 따른 해결책과 개입이 필요로 하는 도덕의 타락, 정치의 부패와 억압, 폭력, 범죄, 불의, 자원의 이용과 부의 분배, 그리고 다른 사회적인 재앙에 의해서 난파된 세상에서 자신의 편안함에만 결코 안주할 수 없다. 교회는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에 기독교의 표준을 강제적으로는 부과하지 않으면서도 말과 희생적인 행위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나타냄으로 세상에 양심으로서 행동하도록 명령받았다.(눅3:10-14, 4:16-21, 행 4:34-35, 고후 10:4, 갈 6:10, 약2;14-26, 5:1-5, 요일 3:16) ☞ 왜 교인 자격을 강조하는가? 지역 교회의 헌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의 한 부분인가? - 질 문 - 최근에 나는 정교인이 되는 것에 대해서 교회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5년동안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역교회(Local body)에 "가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세례를 통하여) 나 자신이 우주적인 교회(entire body)의 일원이 됨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지역교회의 일원이 되라고 하는 성경의 명령이 어디에 있는가? - 대 답 - 어떤 상업 광고가 우리에게 "회원으로 가입하시면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것에 가입하는 것을 꺼린다. 그중에서도 특히 격식을 갖춘 헌신은 우리가 종종 저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 가입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가입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성경에 교인 자격(membership)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단어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에 그 단어가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에서는 지체가 되는 것(being members)에 관해 많이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회심할 때 일어나며 종종 우주적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자격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지역 교외의 교인과 연결될까? 흥미롭게도, 보편적인 신약의 양식은 우주적인 교회에 속하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마치 신자가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일반적인 양식인 것처럼) 지역교회에 속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지역 교회에서의 맴버십을 상정하고 있다. 지역 교회는 "실제하는" 교회이다. 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의 기념을 이해하여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몸에 비유하여 지체를 설명하고 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지역 교회에 속한다는 개념을 마치 로타리 클럽에 속하는 것과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클럽에 속하는 회원은 그의 회원 자격을 포기해도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를 잃지 않지만, 몸의 지체는 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교회의 일원은 몸의 다른 지체와 적극적으로 밀접하게 상호관계를 하고 있다. 불행히도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의 교인 자격은 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많은 교인들은 관계를 가지지 않고 봉사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전혀 출석조차도 하지 않는 교인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윌로우크릭에서는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교인을 기대한다. 즉 지체와 연결되어 있고 헌신하는 교인 말이다. 이제 정반대의 물음을 물을 수 있다. "내가 기능적으로는 교회의 일원이지만 공식적인 교회의 일원은 아닐 수 있습니까? (즉 교회의 활동에 참여하면서도 교회의 공식적인 교인 자격을 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의 공식적인 교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헌신된 부분으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장로들과 인터뷰를 통해 개인적으로 공인을 받고 교회 앞에서 공표되고 매년 교인 자격 갱신을 위한 헌신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이 당신을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지체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사적인 헌신에 의미있는 공적인 증거를 준다. 이와함께 이것은 상호 책임성의 중요한 척도(근거)를 제공한다.(교인 자격은 위한 프로필에 서명함으로써 교회가 그들에게 신안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교인 또한 교회에 개인의 영적인 성장의 보장을 요구할 수 있다.) 기능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기 위한 절대적인 요건이며, 형식은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방식이다. 신자들은 그들에게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도록 보장하는 형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예를 들면 복음전도는 타협할 수 없는 모든 교회의 기능이지만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각 교회가 결정한다. 교인자격 - 지체로서의 연결과 헌신 - 은 지역 교회의 기능이다.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에서의 공식적인 교인 자격 과정은 우리가 그 기능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이다. 그것을 통해 성경적인 교인 자격 내용이 개인에게 뿐만아니라 의미있는 방식으로 명시되는 것이다. 헌신을 기피하는 사회에서 헌신 서약서의 서명은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지역 공동체의 헌신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1. 교인자격의 허가절차 모든 사람과 자유롭게 교제의 폭을 넓히는 것은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의 간절한 바람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헌신의 원리들이 그리스도 몸에서 참된 지체 의식을 동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면서 신자로서 세례를 받고 신자들로 구성된 지역교회인 윌로우 크릭에 헌신하기를 바라는 18세 이상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음과 같은 절차를 통해서 윌로우 크릭의 교인 자격을 얻을 수 있다. 1) 일년 동안 규칙적으로 주말과 주중 예배에 참석. 2) 교인 자격 강좌에 참석 : 교인 자격 강좌는 주기적으로 열려 다음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 첫째,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행정원리 - 둘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헌신의 성경적인 원리. 3) 개인적인 인터뷰 : 장로나 교회의 임명을 받은 교회 지도자가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교인 자격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과 개인적인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신앙 간증을 듣고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에 대한 그들의 헌신의 정도를 파악한다. 4) 헌신 서약서에 사인한다 : 이것은 교인 자격 바라는 개인의 열망을 확인하는 도구로서, 그리고 개인의 교인 자격 공적인 기록으로서 사용된다. 5) 교인들 앞에서 새로운 정식 교인이 됨을 공포. 2. 교인 자격 갱신 모든 정교인은 매년 자신이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교인 자격을 계속적으로 원한다는 것을 재공언하기 위해 헌신 서약서에 서약한다. 이 서약서는 그가 다음과 같은 교인 자격 요구들을 어떻게 부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포함한다. 1)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신조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재공언. 2)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동행을 계속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이끌 수 있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기술. 3) 교회의 공동의 교제(예배와 소그룹)에 규칙적으로 참석하겠다고 하는 재공언. 4) 자신의 영적인 은사, 달란트, 그리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기술. 3. 장로의 선택 성경은 처음에 장로들이 교회를 세운 사람들에 의해서 어떻게 선택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장로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표면적인 조건보다는 영적인 기준에 의해서 선택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 외에는 선택의 과정에 대한 특정한 가이드 라인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개의 교회에게 자신의 특별한 필요와 상황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절차를 개발하는 자유가 주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장로 선택의 절차 매년 9월, 현재 봉사하고 있는 장로들이 장로들을 더 뽑을 것을 결정하면 그들은 장로 선택을 위해 다음의 과정을 시작한다. 1) 기존 장로들이 후보 지명위원회를 설치한다. 후보 지명위원회는 최소한 3인 이상으로 구성된다. 후보 지명위원회의 위원은 현재 장로로서 봉사하는 사람이거나 이번에 장로가 되려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각 위원은 집사의 마땅한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어야 한다. 질서의 목적을 위해서 후보 지명위원회의 위원 중 한 명이 위원회의 위원들에 의해서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2) 동위원회에서 기존의 장로들과 협의하여 장로의 자격을 점검하고 장로 후보자들에게 제출된 문제들을 결정한다. 3) 교인들에게 장로의 자격과 그들의 성경적인 역할에 관해 가르친다. 4) 교인들에게 장로의 성경적인 자격을 명심하면서 장로로서 고려되는 후보자 명단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출하도록 30일의 기간을 부여한다. 5) 제출된 이름은 본인들에게 알려지고 이들에게 성경적인 자격의 관점에서 장로의 자격에 자신이 부합되는지 자기 판단을 하도록 한다. 이때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을 점 검하고 이들 각각과 인터뷰를 한다. 6) 후보 지명 위원회에서 후보자 명단에 올라 있는 후보자들의 이름을 점검하고 이들 각각과 인터뷰를 한다. 7) 각각의 후보자들은 기도하면서 고려한 후에 동위원회는 장로들에게 최종적으로 후보자를 추천한다. 여기에서 탈락된 후보자들은 자신의 결격 사유를 듣게 된다. 8) 장로들은 후보자를 검토하고 마지막 선택을 한다. 이때 선택되지 않은 후보자는 그들이 선택되지 않은 이유를 장로들에 의해서 듣게 된다. 9) 예비 장로 후보의 이름들이 교인들 앞에 공표되며, 이들 중에서 장로로서 섬길 자격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경우, 결격사유를 밝힐 수 있도록 교인들에게 30일간의 기간을 준다. 후보자 중 장로로서의 결격 사유를 밝힐 수 있는 교인은 예비 장로가 되어서는 안되는 자신의 이유를 설명하고 다음에 장로 위원회에 이유를 밝힌다. 10) 30일의 기간이 지나면 예배 장로 후보자는 참석한 교인들에게 소개가 되고 과반수 이상의 득표에 의해서 결정된다. (정족수는 기존 교인의 25%이상의 참석이 요구된다.) 5. 장로의 임기 특정의 정해진 기간이 없는 대신 각각의 장로는 일년간의 헌신을 한 후, 점검의 기간을 갖고 이 기간 동안 본인이나 다른 장로들이 장로로서 그의 계속적인 직무를 평가한다. 장로로서 개인의 직무는 자신의 결심에 따라 그만 둘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헌신을 갱신하는 - 즉, 일년 더 할 것을 헌신하는 장로들은 매년 1월 교인들의 재공인을 받기 위해 교인들 앞에서 소개된다. 기존의 장로가 위의 이유로 당회를 떠난다고 하여 앞으로도 장로로서의 그의 봉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장로 선택 절차를 밟으면 된다. 6. 집사의 선택 1) 집사의 리더쉽이 필요한 이유를 교인들에게 알린다. 2) 교인들은 장로들과 사역의 책임자들로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역에서 요구되는 자격이나 수행될 특정한 역할에 대해서 듣는다. 또한 성경적인 집사의 자격에 관하여 성경적인 가르침을 듣는다. 3) 교인들에게 집사의 자격과 역할을 염두에 두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도록 요청한다. 4) 후보로 제출된 명단은 본인에게 알려 스스로 성경적인 집사의 자격에 비추어 자신을 평가하도록 한다. 이때 집사를 원하지 않거나 성경적인 자격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누구 라도 자신의 이름을 취소할 수 있다. 5) 장로들에 의해서 임명된 후보 지명위원회는 관계되는 사역의 책임자와 함께 명단을 검토하고 각각의 후보자와 인터뷰를 한다. 6) 각각의 후보자를 기도하는 가운데 고려한 후에 장로들에게 최종적인 명단을 제출한다. 장로들에게 제출되지 않는 후보자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본인들에게 밝힌다. 7) 장로들은 후보자들을 검토한 후에 최종적인 선택을 한다. 이때 선택되지 않은 후보자들은 장로들에 의해서 본인들에게 왜 선택되지 않았는지 이유를 듣는다. 8) 예비 집사 후보 명단이 교인들 앞에 소개되고 교인들에게 이들 각각의 예비 집사 후보 명단 중에서 부적격자의 이유를 밝힐 수 있도록 30일간의 시간을 준다. 마태복음 18:15, 5:45에 준하여 부적격 이유를 알고 있는 신자는 부적격의 이유를 본인들에게 밝히고 당회에도 알린다. 9) 30일의 기간이 지나면 예비 집사 후보자는 참석한 교인들에게 소개가 되고 과반수 이상의 득표에 의해서 결정된다. (정족수는 기존 교인의 25%이상의 참석이 요구된다.) 7. 집사의 임기 성경에 집사의 임기에 대해서는 기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집사직의 특정한 임기를 교회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각 집사는 약속에 따라서 일년간의 헌신, 헌신에 대한 검토, 재헌신 그리고 다음 해의 일년 동안 집사로서 더 섬길 수 있도록 교인들의 재공인이 있다. 집사로서의 계속적인 헌신을 작정한 집사들은 재공인을 위해서 교인들에게 다시 소개된다. 집사로서 그의 봉사를 그만둔다고 하여 앞으로도 집사로서의 봉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집사가 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집사 선택의 절차를 밟으면 된다. 8. 이 사 회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이사회는 집사 자격을 가진 15명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장로들이 교회 감독의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반면, 이사회는 교회의 법적, 재정적인 문제들을 감독하고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대리 책임을 수행하고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법적인 대리인으로 행하는데 필요한 요건들을 이행하기 위해서 교회 내부의 어떤 조직이라도 가질 수 있다. 조정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이사회는 장로를 대리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사회의 보충 인원이 필요할 시에 이사회의 기존 멤버들은 장로들에게 추천자 명단을 제출하여 고려하도록 한다. 이사회 멤버들은 이사회의 독특한 역할과 책임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장로들에게 추천을 하기 전에 후보자와 독자적인 인터뷰를 갖는다. 장로들은 후보자 명단을 검토하고 최종 선택을 하며, 그러면 위원회 멤버로 선택된 사람은 그의 직무를 수행한다. 이사회 멤버의 임기는 다른 집사직의 임기와 동일하다. 9. 사역의 스텝 맴버들 신약의 리더쉽 원리에 따르면 사역의 스텝들은 사역 동역자로서 고려되어야 하며 따라서 전문 자격증이나 수행 능력에 의해서만 선택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역의 스텝을 선택하는 다음의 기준들을 인정하고 있다. 1) 일관된 신앙적인 행보와 주님에 대한 사랑. 2)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와 동역 지도자들에 대한 헌신. 3) 자신의 사역 영역에 부합하는 은사, 능력과 전문 자격증 모든 사역의 스텝들은 그들의 특정한 사역의 영역에 관계 없이 기본적으로 집사의 자격 요건을 갖는 것이 요구된다. 그들은 리더십을 수행할 것이며 다른 신자의 모범역으로서 섬길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자격과 행보가 사역의 스텝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장로들은 필요시에 스텝들을 복고, 해고하는 것을 포함하여 사역 스텝들에 대한 전반적인 감독의 책임이 있다. 10. 담임목사의 역할 신약성경의 은사에 대한 개념에 따르면 담임 목사는 교회의 다른 지체처럼, 독특하게 은사를 받고 그의 은사 내에서 사역을 추구해야 한다.(엡4:11, 고전 12장) 장로로서의 그의 목회 역할과 함께 담임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르치는 가장 주요한 교사이다. 그의 말씀과 모범에 의해서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 이것의 목적은 신자들을 교회 내에서의 참된 '사역자'로 무장시키면서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제사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신자들이 성숙하도록 돕는 것이다. 성경 교사로서 그의 하나님의 진리의 이해와 적용을 모두 강조해야 한다.(롬12:6-7, 살전 2:4-5, 2:10, 딛 1:7, 엡 4:11-12, 약2:22) 그러므로 담임목사는 가르치는 장로로서의 그의 주요한 기능과 관련이 없는 영역에서까지 사역의 책임을 져서는 안된다. 담임목사를 다른 기능(예를 들면 기금 모집, 행정, 상담, 심방, 공적인 관련 사항들)으로 부담 지우는 것은 그에게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몰두하는 시간을 뺏는 것이며,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은사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사역하도록 몰아 넣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약하게 만드는 부정확한 가르침이다. 또한 교회를 적당주의로 이끌 수 있다.(딤후 2:15, 1:13) 교회의 목사로서 충분한 은사를 가진 다른 지도자들이 담임 목사에 의해서 수행될 수 없는 여러가지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리더쉽의 자리에 임명하는 것은 장로들의 역할 중 하나이다.(행20:28) 교회 내에서의 가르치는 일은 담임 목사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신약은 가르치는 장로들의 필요성과 이러한 영역에서 은사를 가진 다른 지체들의 활용을 강조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가르치는 모범역들을 제시하고 있다.(딤전3:2, 딤후 2:2) 11. 담임 목사의 선택 담임 목사의 자리가 비우게 된 경우, 장로들은 그 직에 맞는 후보들을 찾는 책임을 진다. 장로들이 후보자를 선택하게 되면 그 후보자는 이사회, 사역의 스텝, 그리고 집사들에게 제시된다. 어떤 경우라도 2/3 이상의 다수 득표에 의해서 공인된다. 12. 개정의 절차 이 문서는 신실하지만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떤 식으로든 이 문서를 개정할 필요를 지적한다면, 장로들은 이사회와 사역 스텝들에게 개정안들을 미리 알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자들에게 제시하여 과반수의 득표를 개정한다.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는 이상의 원리들을 가지고 여러 가지 사역들을 펼치고 있다. 그 사역들은 1) 성인사역 : 상담센터, 복음전도사역, 선한 청지기사역, 국제선교사역, 소그룹사역, 여성사역 2) 가정사역 : 결혼준비사역, 회복사역, 홀부모가정사역. 3) 독신자사역 : 포커스사역, 프라임타임사역 4) 청소년사역 : 캠프사역, 어린이 사역, 중학생 사역, 고등학생 사역 등 뉴져지 평안교회와 패러미스 커뮤니티교회 "함께 공유하며 사역하는 기쁨 나누죠" - 한인교회와 미국교회의 팀 사역 현장 -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팀사역 교회가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뉴져지 패러미스 소재 뉴져지 평안교회와 패러미스커뮤니티교회(죠 스마하 (Joe Smaha)는 처음부터 이와같이 팀 사역을 목적으로 출발한 교회는 아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 못지 않게 성공적인 목회를 펼쳐 나가고 있어 화제를 모이고 있다. 이상인 목사의 소개로 신다윗목사가 죠 스마하목사의 교회로 입주해 올 수 있었다. 작년에 입주한 뉴져지 평안교회는 재정적으로는 물로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다. 서로를 위해 몰(Mall) 같은데서 힘을 합해 선교 활동을 펴가고 있다. 그밖에도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도 함께 행동한다. 스마하목사는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지, 개인의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함께 쓰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였다. 커뮤니티교회는 지난 1899년 설립된 후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다가 작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교회의 주 구성원이 되어 20여명 나왔을 뿐이었다. 평안교회는 다음달 제2회 원로 성직자 초청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스마하 목사가 커뮤니티교회로 버몬트에서 처음 올 때 당시 2-30명 정도었으나 60명으로 성장했다. 이때 1995년 10월에 이곳에 부임한 스마하 목사는 신앙심이 돈독하고 교회의 발전을 가져다주는 한인 교회와 무상으로 교회를 공동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편 발전하는 한인교회와 더불어 성장하고 싶은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는 교인수가 많아져 더 큰 건물이 필요하게 되더라도 함께 이사를 하거나 함께 신축할 것을 다지고 있다. 교단 역시 기독교 연합선교회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로 같은 교단에 있다. 평안교회는 2세 목회를 위해 중점을 두고 있다. 작년의 경우 '올림픽 선교'를 위해 대표선수단 통역을 세워 6명이 35일간 사역하였다. 지금은 90여명의 성도가 있으며 부부가 주교인을 차지하고 있다. 성결교적 복음주의와 고려신학의 보수 성향을 가진 이 교회는 목회자가 이혼하면 목사직을 박탈하고 재혼(사별예외) 주례는 서지 않게 되어있다. 뿐만아니라 부부가 함께 등록하고 다니지 않으면 혼자에게는 어떤 직분도 내리지 않아 철저하게 가정 중심과 가족구원 중심의 교회로 가꾸어가고 있다. 이 교회는 주일학교 어린이를 위한 단기 선교사팀을 도미니카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어린이들이 선교저금통을 모은 것에 교회가 나머지를 부담하여 이루어졌다. 내년 봄에 다시 가기 위하여 지금부터 옷을 모으고 있다. 또한 로얄 스카웃(Royal Scout)을 조직 (1-12학년)하여 매주일 오후 3시-4시까지 교회에서 모이고 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교회 주변을 청소하고 양로원 방문을 하는 등 기독교 정신을 사회에 환원하는 습관을 배우고 있다. 신다윗목사는 처음에는 18년 동안 군에서 이중 문화가정 목회에 관심이 많았으나 당면 과제인 한인 양로원 건립을 더 시급하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에 와서 노인이 된 1세들의 피땀이 없으면 선교할 수도 없었을 것"임을 강조했다. 이 교회는 주소에 번호가 없이 세다레인(Ceder Lane)으로 통한다. 그것은 이 교회가 패라미스에서 처음 지어졌기 때문이다. Calvary Chapel 1. 담임목사 - 척(챨스의 애칭) 스미스 (Chuck smith)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오순절파 교회들(Pentacostal churches)에 다니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네 시립대학(2년제) 다니다가 LA에 소재한 라이프 성경대학(L.I.F.E. Bible College)에 입학한다. 대학 졸업 후 국제 포스퀘어 복음주의 교단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re Gospel)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먼저 아리조나 주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다가 남가주로 이주, 여러교회에서 사무했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흔히 말하는 성공하지 못한 목회자였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집에서 조그마한 성경공부반을 열면서 그의 목회에는 새로운 장이 열렸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 스타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곧 간결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simple and yet profound), 분명하며 현실적인 (clear and practical) 강해설교식이다. 그 강해 설교는 그날 참석한 성도들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65년 지금의 코스타 메사에 소재한 갈보리 교회의 담임 목사로 청빙이 되었다. 그 당시 이교회 성도는 약 25명 남짓한 문을 닫을까, 말까 하는 죽어가는 교회였다. 2. 교회 - 갈보리 채플 (Calvary Chapel) 1970년대 초 갈보리 채플은 사회의 문제였던 "히피족"들과 "마약중독자"들에게로 목회의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 믿는 히피족"들이 일으켰던 "예수 운동"(Jesus People Movement)의 지도자로 알려지게 된다. 이때쯤 척 스미스 목사는 전 미국에 시선을 끌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코로나 델마 (Corona Del Mar)해변에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히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며 교회로 받아주는 그의 탈 전통 문화주의의 목회철학은 그를 수많은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로 만들었고 따라서 갈보리 채플을 급성장하게 되었다. 3. 목회방향 - 탈 전통적 목회 행사 지속적인 시리즈별 성경공부와 기도 훈련을 통한 또한 히피족, 마약중독자 그리고 사회에서 견뎌내지 못한 '중퇴자' 들을 진심으로 돌보아주는 목회로 말미암아 갈보리 채플은 전통주의와 탈전통주의 신자들이 단결하여 신앙생활하고 사역하는 매우 열정적인 교회로 성정한다. 그 내용들을 보면 크리스챤 룩큰롤 (Rock & Roll) 뮤직 콘서트를 열며, 마라타나 찬양팀이 조직되고, 사랑을 노래하는 찬양들이 작곡되고, "어린이들의 날" 등의 행사를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경건주의 교단등에서는 갈보리 채플을 "불경건한 교회"라든가 "유행을 따라 가는 (Faddish)"교회라는 말로 지탄하며 복음을 너무 가볍게 다룬다고 비평한다. 사실상 이러한 행사들은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수 많은 젊은이들은 복음을 이색적으로 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단히 매력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1971년도에 갈보래채플은 현재 위치한 10에이커의 땅을 구입하여 이사를 갔다. 이 교회 본당 좌석수는 2,500석, 그리고 모든 시설이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함으로 다목적으로 사용되도록 설계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T.V. 방송국을 설치하여 본당이 꽉차면 친교실에서도 예배를 보도록 마련하였다. 목회 초기부터 시작한 "히피족 전도"나 "마약 중독자"전도가 성공함으로써 갓 태어난 신자들이 교회 근처로 이동 거주하며 이 도시에 새로운 인구밀집이 형성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1970년 중반기에 초신자수는 매달 900여 명에 달하였고, 2년동안 베푼 세례식에서 세례받은 사람의 수는 8,000여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독 공동체는 코스타 메사 시는 물론 나아가 인근 도시인 리버사이드 관할 지역과 산 버나디노 지역에까지 형성되어 수 많은 지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코스타 메사의 갈보리 채플 본 교회는 매주 출석 교인이 2만5천여명에 달한다. 한 때 미국의 최대의 교회였으나 "갈보리 채플"이란 이름으로 교단이 형성되어 "창시자가 죽기 전에도 교단이 세워 질 수 있구나"라는 말이 한참 나돌았다. 4. 교회강점 1) 찬 양 갈보리 채플은 성경적 가르침(biblical teaching) 균형있는 은사활동(balanced use of charismata), 열정적 전도열(evangelistic fervor),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당했거나 배타적인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유명하다. 또한 이 교회의 찬양은 세계 기독교 역사의 한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찬송가에서 벗어나 유행가에서나 들을 수 있는 화성에 찬양에 도입,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성가의 주도자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마라나타 뮤직(Maranatha Music)이란 이름으로 복음성가를 작사, 작곡하여 온세계에 퍼져있는 찬양곡 집등이 바로 이것이다. 2)복음전파 갈보리교회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은 특히 교회 초기의 내용을 보면 확연히 나타난다. 새 신자들은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도록 훈련을 받으면서 동시에 성숙된 신자들과의 친교를 꾀하도록 하는 식으로 전도에 관한 분명한 관점을 처음부터 훈련 받는다. 이때의 친교는 말씀의 친교로 복음 안에서의 삶을 확실하게 다진다. 이렇게 성숙되어진 성도들을 교회의 여러사역에 동참하도록 하다가 결국에 지교회의 설립에까지 동참토록 성장시킨다. 이런 양육의 결과, 한때 성도수가 3만 5천명에 달하게 된 것이다. 코스타 메사의 갈보리 채플로 시작한 교회는 현재 미전역에 걸쳐 300여개의 지교회를 개척하여 갈보리 채플 교단의 산모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테잎 사역(tape ministry), 문서사역, 방송사역(척 스미스목사의 설교는 하루에도 여러번씩 미국 전역에 걸쳐 방송된다.) 찬양사역은 특기할만하다. 3) 균형있는 은사활동과 말씀사역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예배와 찬양을 선호하는 특징으로 많은 복음주의 교단에서 환영을 받는다. 또한 자체 내의 교육 프로그램을 발전 시키기전까지는 새신자 교육을 위하여 네비게이토의 공과를 사용함으로 여러 교회나 교역자에게 호응을 받았고, 위크리프 성경 번역 사역에 크게 협력 선교를 하고 있다. 자체 내 기독교 학교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있으며, 주위 시민들이 자녀들을 입학 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될 대단히 좋은 학교로 정평이 나있다. 뿐만아니라 자체 신학교를 운영하여 지교회 목회자를 양육하여, 이 신학교는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의 본부가 있는 에로헤드 스프링스 지역 근교에 지리를 같이 하고 있다. 5. 연구점 복음 전파의 열성이 줄어드는 감이 있음은 확실시 되어진다. 아마 교회의 연령이 올라갈수록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척 스미스 목사를 포함해서 초창기 멤버들은 은퇴기가 가까울수록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복음전파 열정의 돌파구를 찾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초창기의 기도훈련 등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줄어든 것 또한 확실시 되어진다. 이 방변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쟌 윔버 목사가 빈야드 교회를 세워 떨어져 나간 것이 성령의 역사가 줄어든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부활의 승리 고전15:50-58은 부활의 논의의 결론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부활의 승리를 장려한 문체로 노래하면서, 부활을 확신할진대 어떤 상황에서도 주의 일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또한 부활의 승리는 단순히 죽음에서 일으킴 받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 그 자체를 폐기시켰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고전15:51-54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성도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다. 그때 성도들은 살아있는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영원히 죽지 않는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고전15:55-58에서 바울의 승리의 개가는 그 절정에 이른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여태껏 사망이 왕노릇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는 모든 인류가 부활함으로써 사망은 더 이상 군림하지 못하고 영원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 승리는 첫째로는, 죄에 대한 승리이며(고전15:55,56) 둘째로는, 죽음에 대한 승리이고(고전15:51-53) 셋째로는, 무덤에 대한 승리인데(요5:28) 이러한 승리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승리를 얻기 위해서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승리를 얻기 위해 근신해야 한다(막13:33;벧전5:8). 둘째, 승리를 얻기 위해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후6:1). 셋째, 승리를 얻기 위해 용기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수12:9). 넷째, 승리를 얻기 위해 감사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살전5:18). 다섯째, 궁극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 성도들은 낙관적인 견해를 가져야 한다(골1:2). 여섯째, 승리를 위해서는 신뢰의 자세가 필요하다(마24:35). 일곱째,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양보하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눅22:42). 그러므로 우리는 본장 전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얻을 길이 없다는 점, 부활에 대한 소망이 성도들의 인내와 승리하는 삶의 근거가 된다는 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비록 현재에 살고 있지만 믿음을 통해 미래의 영광에 미리 참여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목회 능력개발 훈련 오늘날 행동과학을 위시한 "집중교육"(Intensive Training) 방법의 발달은 교역 실기훈련에 획기적인 장을 마련해 주고 있다. 실기 훈련들이 모두 이와 관련이 있겠지만, 특히 "잠재능력개발"이라는 데 역점을 둔 이 집중훈련의 방법은 아직도 교역의 실기훈련에는 십분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몇몇 신학교육기관에서는 실험사업(pilot project)으로 연구기관, 훈련기관을 병설 중에 있고, 많은 교회부설 단체에서 이미 교역자가 된 분들의 실기증진을 위해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런 교육의 기본방법론이 인간의 자기 개발을 목적으로 한 "감수성 훈련"이나 "인간관계 훈련"에서 유출된 것이긴 하나 요즈음의 성향은 "지도력개발", "조직개발" 등 잠재능력의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고, 그 방법론으로서도 거의 정립되어 가는 형편에 있다. 이런 분야에서 실기교육을 주관하는 지도자를 "훈련시켜 주는 자"(trainer), "가능하게 돕는 자"(enabler), "여건을 조성해 주는 자"(facilitator)로 불리우는 것은 종래의 교육개념을 뒤집어 놓고 있다. 한 집단 속에서 함께 있으면서도 초연하면서 그 그룹의 소기 목적을 성취토록 돕는 것을 교육의 방법으로 택하고 있는 것다. 같은 기본기를 가지고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되는 이 "집중훈련"방법은 훈련받은 전문가여야만 효과적인 학습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집단역학의 기초를 파악한 경험있는 목회자라면 심도있는 복잡한 목적성취를 위한 훈련 외에 초보적인 시도를 통해 경험을 축척해 갈 수 있다. 목회경험과 마찬가지로 이 소집단 경험도 체험으로서 체득하는 길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의 교역자라면 자기가 봉사하는 봉사의 대상을 "집단"으로 보고 그 현실을 파악할 줄 아는 안목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이 집중훈련은 문자 그대로 일정한 기간 동안 외부와 접촉이 단절된 고도의 교육환경에서 집중적으로 교육을 하는 훈련 방법이다. 이런 여건에서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훈련이다. 이 집중훈련의 방법을 응용할 수 있는 분야는 실로 다양하나 교역자와 교회에 쉽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는 아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교역자 자신의 훈련방법으로는 "자기 성장"(Self Renewal)을 위한 훈련을 들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한 인간은 굳어지고 기계화될 수 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살고 있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목회자로 하여금 개방되고 유연성 있는 자기의 모습을 찾아 사회의 변화와 목회환경의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인간개발 훈련이 곧 이것이다. 목회자의 "지도력개발"(Leadership Development) 훈련이 다른 하나의 가능성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스스로 수용하고 미처 개발되지 못한 잠재능력의 발굴에 역점을 두며, 특히 오늘과 같은 목회환경이 요청하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목회지도력의 개발에 역점을 두는 훈련 방법이다. 집중훈련 방법을 이용한 다른 차원의 훈련은 "공동체 형성"(Community Building)을 위한교육이다. 교역자와 교인 전체, 혹은 교회의 어떤 기관을 대상으로 그 집단의 응집력을 조성하는 데 우선적인 목표를 둔 훈련이다. 다소 고도의 기술이 요청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공동체의 부정적인 요소를 정리해서 건설적으로 의사를 집약해서 개교회 발전의 한 계기를 삼을 수 있는 "교회 조직 개발"(Church Organization Development) 훈련도 다른 하나의 가능성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치관의 변화가 교회의 선교적 추진력을 둔화시키고 있는 실정에서 서구의 교회에서 많이 시도되고 있는 방법들이다. 많은 경우에 이런 집중훈련의 방법들이 개교회의 "갈등해소"(Conflict Resolution)를 위한 방편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The Leader as a Defender “For the Lord is our defense” Psalm 89:18 The Bible declares that God is the defender of His people (Job22:25;Psalm7:10and59:9,16,17and89:18and94:22;Zechariah9:15). God offers His people safety in the proclamation of His name over His possession, all of creation (Psalm20:1). If God defends His people, His leaders must do the same. To defend God's people, a leader must match his actions and attitudes with the biblical sense of “defense” and “defend.” A leader must: Be a shade and shadow to God's people, protecting them from the sun's harsh rays. Be as a bird who hovers over its nestlings. Be as a hedge to them in a portion of the garden of God. Be a fortress of protection from attack. Be a shield to the people, warding off the fiery darts of the enemy. Be a canopy or chamber in which the people can find security and rest. Be as a governor who punishes the wicked but rewards the righteous. Give an honest account of himself to God and the people. Make a (legal) plea for the rights of his people before God and man. Be a peacemaker, who clears difficulties for other people. How does a leader become a good defense for his people? The Bible shows that God certainly desires a leader to be that defense. In both the Old Testament judges and the New Testament apostle Paul, His leaders are defenders of the faith and of the faithful (Judges 10:11; II kings19:34and20:6; II Samuel23:12;Philoppians1:7,17). First, a leader must be a man of wisdom. Wisely applying the spiritual principles of the kingdom, a leader will defend his people from the adversary. He will know the enemy's tactics(Ecclesiastes7:12). Second, a leader must keep his own family in order and in unity. In this, he will mount a stronger defense for the families of the church against the attacks of the devil(II Chronicles11:5;Psalm31:2). Third, a leader should take pains to maintain a strong commitment to the house of the Lord. The house of the Lord will be a sure defense against the foe. Fourth, a leader must stay in the presence of the Lord. God's presence (or glory) is a defense for the people of God, as it was for Israel in the wilderness(Isaiah4:5). Fifth, a leader should realize that every time he prepares something for the good of God's people, he is defending them (see Nahum 2:5). Finally, a leader will defend God's people well if he remembers that he will defend the same people that God Himself has defended throughout history: the poor and the fatherless (I Samuel 31:5; Psalm 5:9-11 and 82:3). May every leader feel his duty to help, protect and defend those who are spiritually poor and without a personal knowledge of their heavenly Father. If he does, he will lead them to Jesus Christ, who is the greatest defender the Church will ever have. 성도의 자세와 역할 1. 성도들의 자세 첫째,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야 한다. 이는 사도들이 전해 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행2:42;롬6:17)에 입각해서 생활하라는 의미이다. 둘째,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령은 성도들의 기도 생활을 돕는다(롬8:26). 칼빈(calvin)은 “성령은 우리에게 기도의 열을 주신다. 성령은 성도의 내적 선생이시다”라고 말하였다. 성도는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기도해야 한다(엡6:18). 셋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공동번역, Living Bible)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세심하게 돌보시며 지키신다(시121:3-8).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성도는 기대 속에서 기다리는 자이다. 소망은 실의 속에서도 성도를 지탱시켜 주며 절망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한다. 2. 성도의 역할 성도의 실제적 역할은 잃은 자를 되찾는 것이다. 잃은 자를 되찾을 능력을 잃은 교회는 이미 참된 교회로서의 모습을 상실한 교회이다. 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자들에게는 비난보다는 사랑의 권면이 필요하다. 둘째, 죄악의 구덩이에 빠진 자를 끌어내야 한다. 타는 불 가운데서 끌어내듯이 성도는 급한 마음으로 죄에 빠진 형제를 구해내야 한다. 셋째, 죄에 빠진 자들의 더러움은 멀리하되 그들 자신은 불쌍히 여겨야 한다. ‘육체로 더럽힌 옷’이란 ‘정욕으로 더러워진 마음’을 뜻한다. 남을 구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믿음을 든든히 해야 한다. 물에 빠진 자에게 구명대를 던지려면 자신의 선 자리를 든든히 해야 하듯이 죄에 빠진 형제를 구하려면 먼저 자신의 믿음을 무장해야 한다. 예수의 친구가 누리는 특권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성도들의 실존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가지 비유’(5절)와 ‘친구 비유’(14절)가 그것이다. 이 두 비유는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들을 강조해 주는 것으로서 전자의 비유는 진리되신 예수의 생명을 공급받는 모습을, 후자의 비유는 예수의 계시를 숙지하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성경에서 제시되는 ‘친구’의 개념은 대부분 주인의 뜻과 계획을 아는 자로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아브라함 성경을 통틀어 ‘하나님의 친구’(대하20:7;사41:8;약2:23)라고 일컬어지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그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이 거주하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알게되었다(창18:20).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순종하는 결단을 내리곤 했다. 정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히11:8)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히11:17)가 순종의 대표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모세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친구’라고 기록되지는 않지만 모세 만큼 하나님을 친구처럼 긴밀히 접촉했던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모습을 ‘친구같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고 전하고 있다(출33:11). 기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중재자로서 출애굽 때부터 가나안 입성 전까지 줄곧 하나님의 장중에 거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행하실 이스라엘 백성 구출 계획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출3:7-10) 일생 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살았던 모범적인 삶의 본이다. 한편 이외에도 신약성경에서 ‘나사로’를 가리켜 예수께서는 ‘우리 친구’(요11:11)로 지칭하셨는데, 이것은 나사로의 가족이 하나님께 대한 모범적인 순종과 믿음(요11:27)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지막 날의 부활에 관한 계시를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요11:25,26). 이상과 같은 경우들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제시되는 ‘친구의 개념’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에서의 ‘친구’는 주인의 계획을 알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이상 맹목적인 명령만 하달받는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친구로 삼으신 것은 그들에게는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예수의 친구된 성도들은 주님의 새 계명을 준수하며, 가일층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업에 일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7대 표적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다 헤아리기는 어렵다. 그만큼 예수의 행하신 표적은 수없이 많다(요20:30). 요한은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일곱 가지 표적을 본서에 소개하고 있는데 그가 사용하고 있는 ‘표적’이란 용어(11,18절;3:2)는 공관복음에서 보편적으로 쓰인 ‘이적’이란 단어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이적’(δυναμι , 뒤나미스)이 ‘능력 행함’(act of power)을 의미하는 데 반해 ‘표적’(σημειων, 세메이온)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분 표 적 구 절 상 징능력의 영역 1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2:1-11의식, 율법이 은혜로 질 2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영적 치유 공간 338년된 병자를 고치심5:1-16약한 자를 강하게 함 시간 4오천 명을 먹이심6:1-13영적 기아를 치유하심 양 5물 위를 걸으심6:16-21두려움이 믿음으로 자연법칙 6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9:1-7어두움에 빛으로 인도 운명 7나사로를 살리심11:1-44사망에서 생명으로 죽음 따라서 본서에 나타난 표적들을 유의해 보면 다양하게 펼쳐진 예수의 능역뿐만 아니라 본서의 중심 교리인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이 상징적으로 증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서에 실린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예수의 일곱 가지 표적 중 절반이 넘는 다섯 개의 표적들이 본서에만 고유하게 나타나는 사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강조하는 본서의 특징을 잘 반영해 준다. 이제 본서의 7대 표적을 도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상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 이어의 표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마14:13-23;막6:30-46;눅9:10-17) 물 위로 걸으신 표적은 본서와 마태복음14:22-33 및 마가복음6:46-52에도 나타난다. 아무튼 요한복음의 7대 표적들은 여러 영역에서 행하신 하나님 아들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거니와 이 표적들이 본서에 나타난 예수의 7대 강화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점 또한 쉽게 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표적 행하심 뒤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강화들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강화들은 예수의 신성을 의심하는 도전적인 무리들과의 논쟁 속에 자리잡고 있는 바, 본서 특유의 예수의 자기 선언이 그 가운데 부각되어 있다. 표적과 강화가 예수 사역의 대상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 속에 증거되는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증거의 책’으로서의 본서의 독특한 여러 특징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평안 이는 헬라어 ‘에이레네’(ειρηνη)의 번역으로 ‘평화’라는 뜻을 나타내며 이 말과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는 히브리어 ‘샬롬’은 ‘평화’, ‘번영’, ‘안녕’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샬롬’은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작별 인사나 문안 인사로 사용되었다(삿19:20;삼상25:6,35). 유대 사회에서는 누군가에게 이 ‘샬롬’을 기원하는 것은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샬롬’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결과로 나타난 충만한 평안의 상태를 묘사한다. 신약 시대에 와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사람들도 역시 이 ‘샬롬’으로 충만하게 된다. 아울러 이 ‘샬롬’은 다른 사람과의 손상되지 않은 관계라든지 자기가 맡은 임무의 성취라는 개념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는 3년 동안 제자들과 완전한 관계를 유지해 오셨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스승으로서, 종으로서 어떤 면에서든지 예수께서는 제자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임무를 모두 성취하시고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만 남겨 놓고 계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완전한 ‘샬롬’을 드러내시어 충만한 평안을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고 계신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평안’ 예수께서는 제자들과의 사별을 앞두고 ‘평안’을 기원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 이후에도 ‘평강’으로 안부를 물으셨다. 따라서 예수께서 중요한 시기에 특별히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단지 형식적 언어를 차용했다고 볼 수가 없다. 이에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이 용어에 담긴 풍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구약성경에서 ‘샬롬’으로 통용되는 ‘평안’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의미로 번역되었다. ‘화평’(엡2:14), ‘평강’(요20:19,21;빌4:7), ‘평화’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모두 동일한 어원을 가진 단어들로서 헬라어 ‘에이레네’ (ειρηνη)에 해당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주로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고전 헬라어의 용법에 따른 것으로 전쟁이나 투쟁에 반대되는 개념을 지칭한다. 이런 용례는 누가복음14:32;사도행전12:20에서 잘 나타나는 바, 주로 이방인과 유대인(엡2:14-15), 남편과 아내(고전7:15), 그리고 이웃(롬14:19)과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화해를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 회복에 관련된 개념이다. 구원을 받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상태’이며(엡4:18;골1:21),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다(롬5:10;골1:21).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왜곡된 관계가 회복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고후5:19;골1:22)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롬5:1). 이런 상태를 신약성경에서는 ‘화평’이라고 한다(엡2:14). 셋째, ‘마음의 평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 헬라어나 구약성경의 용법 가운데 없던 것으로 특별히 기독교적 의미로 첨가되었던 개념이라 하겠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의미를 부정하기까지 하지만, 신약성경의 많은 용례로 보아 전혀 부인할 수는 없다. 로마서8:6이나 갈라디아서5:22등은 이를 지지해주고 있으며, 특히 요한복음14:27에서는 예수께서 근심과 두려움에 가득 찬 제자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선물로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의미를 지닌 ‘평안’은 경우에 따라서 하나만 취할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나타난 용법은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각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예수께서 기원하신 평안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해주고(두번째 의미), 그 결과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세번째 의미). 따라서 제자들은 세상과 이웃에게 평화의 사도(peacemaker)가 되어야 한다(첫번째 의미)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말씀을 적용하라 묵상의 목표는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아는 것과 그분께 더욱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들 외에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유익들은 부수적인 것이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걸어가려면, 빛 가운데 걸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일서 1장 6절은 7절에 대한 문맥이 되며 더 나은 이해를 준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려니와“(요일1:6) 어두움 가운데 걷는다는 것이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면, 빛 가운데서 걷는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탐구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들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묵상해 온 말씀을 되새김질하고 사고한 후에, 우리가 발견한 진리들을 적용해야만 한다. 진리들을 적용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는 숨겨진 죄들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습관을 다루게 되는 것과 깨어지거나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역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물을 우리가 다니는 교회와 사역에 헌금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의 소유를 나누어 줌으로써 재물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루시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 가능성들은 끝이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서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종종 시간을 요한다. 때때로 이 일은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변화되어야 할 영역에 그분의 뜻과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영적으로 상승시키실 때가 있으며, 어떤 때는 우리의 삶의 영역들 중 그분의 말씀의 척도에 비추어 수정되어야 할 부분을 보여 주시기도 하는데, 이때 우리는 낙담되거나 패배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주의 창조자께서 그러한 영역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시간을 갖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세심하게 보살피고 계시는가에 대한 표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선이 아닌 차선의 관계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관계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자신의 고쳐야 할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시는 이유는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최선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물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한다는 것은 항상 커다란 개인적인 문제들만을 다룬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세속적인 일을 다루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의 말씀을 묵상할 때 꽤나 일상적인 문제와 관련된 진리들을 당신에게 보이실 것이다. 따라서 다뤄야 할 문제가 세속적인 것이든 그것이 아니든 상관없이 당신의 삶에 그의 진리를 적용하는 데 힘쓰라. 기업(Inheritance)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에 영원한 기업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벧전1:4). 성경에서 말하는 기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약에서의 기업 성경에서 기업이라는 말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기업’(나할레)은 ‘재산’, ‘소유물’과 같은 뜻으로서 가나안 땅을 열 두 지파에게 분배해 준 사건과 관련하여 ‘토지’나 ‘영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성경의 문맥에서는 아버지나 조상들로부터 상속받아 소유한 것이라는 법률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순종하는 백성에게 내려 주시는 선물이나 재산을 뜻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이며(신4:21;렘3:18,19), 이 땅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그 지파의 크기에 따라 분배되었다. 2. 신약에서의 기업 신약 전반에서 ‘기업’(κληρονομια,클레로노미아)이라는 말은 주로 영적이고 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악한 농부에 대한 예수의 비유에서 기업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마21:38).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기업의 상속을 약속받았으며(롬4:13),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있는 영광의 기업의 보증이시다(엡1:18).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만 영원한 기업이 보장되어 있는 바(벧전4:18;히11:8), 불의한 자는 기업을 받을 수 없다(고전6:9,10).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상속자이기도 하며(갈3:16) 축복의 성취라는 점에서 보면 기업 자체이기도 하다(갈3:14).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과 새 언약의 중보로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히9:15). 찢어짐의 의의 예수의 죽음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위로부터 임한다는 사실과 일맥 상통하며, 더불어 사람에 의해 인위적으로 찢어진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휘장의 찢어짐에 관한 기록은 공관복음서에 등장한다. 누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록하기 전에 이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언급하였다(눅23:45), 마태와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신 직후에 휘장이 찢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마27:51;막15:38). 이러한 사건의 실제적, 상징적 의미는 히10:19,20절에 잘 나타난다. 1. 하나님과의 화해 휘장은 예수 자신의 몸을 암시한다. 대제사장이 성막 가운데 쳐져 있는 휘장을 젖히고서야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에 나아갈 수 있었듯이, 예수 자신의 몸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하며, 관계의 회복, 곧 하나님과의 적극적인 교통을 의미한다. 한편 ‘위에서부터 아래로’는 하나님과의 화해됨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뜻하며, 그리스도의 독특한 대제사장직 기능을 상징한다. 2. 모든 이들의 하나님 이제껏 휘장은 불경스런 자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될 것이었다. 또한 이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정도로 두껍고 무거워야 했다. 지성소에서는 대제사장이, 성소에서는 제사장들과 신앙 깊은 자들이 메시야적 비밀을 엄호하면서 외부에 있는 여인, 어린이, 특히 이방인들로부터 철저히 구별하였다. 하지만 찢어진 휘장은 하나님이 모든 이들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인의 하나님을 갈라놓았던 장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성전 밖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기다려온 많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찢어진 휘장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성전 안의 휘장이 찢기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현존으로 충만하리라 믿고 있었던 그 거룩한 성소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곳을 떠나 참혹한 십자가가 서 있는 해골의 언덕에 계셨다. 십자가상의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은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으신다. 휘장을 두 쪽으로 가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 이방인과 이교도들에게도 동일하게 공개되신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요3:16;롬5:8;8:32;요일4:9,10)과 더불어 기쁘신 뜻(롬8:29;엡1:4,5)이 잘 드러나 있다. 히브리서 9장 전체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다루고 있으므로 특별히 속죄의 성질, 속죄의 완전성과 범위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의 특별한 가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속죄의 성질 속죄는 제물되신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포함된 ‘제사’를 의미한다(히9:11,12). 또한 속죄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유화’(宥和)의 의미를 포함한다(롬3:25;요일4:10). 더 나아가 속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무는 화목을 의미하며(롬5:10;고후5:20), 궁극적으로는 택한 자를 죄 가운데서 건지시는 구속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엡1:7;골1:14). 2. 속죄의 완전성과 범위 속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생겨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단 한번으로 종결되었으며(히9:28) 그 자체 안에 사죄의 능력을 갖는 내재적 효능을 지녔다(히10:14;롬5:19,21). 그러므로 속죄는 완전하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자에게만 해당된다(마1:21;눅19:10;요6:37). 3. 속죄의 특별한 가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몸소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속죄의 가치가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고통에서 기인된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특별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히 장막에서의 제사와 우리 주님의 속죄 제사를 대조하여 장막에서의 제사는 제사를 드리는 자들에게 죄를 상기시켜주는 주관적 영향력을 가질 뿐이지만 그 죄를 사하는 객관적 효력을 가지지 않는다고 확증했다(히10:4). 반면에 우리 주님의 속죄 제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히10:10). 단순한 죽음은 하나님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하나의 실제적인 제사, 성육신과 죽기까지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성산의 의미와 의의 원형 성산은 시온을 의미하는데, 신약적 의미로 시온은 지상의 모든 삶을 초월한 궁극적인 세계를 의미한다(사2:2). 따라서 성산에 거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순을 극복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궁극적인 기쁨과 평안을 의미한다. 시온은 종말론적인(eschatologically)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가 있는 곳이다(히12:22,23). 특히 계시록에 언급된 ‘하늘의 예루살렘’운 거룩한 무리들의 최종적인 목적지이자 안식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의 성산 곧 시온은 신약 교회가 바라볼 종말론적 실체이며 궁극적인 소망이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순례자들이 시온 성에 거하기를 갈망했던 것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며,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할 수 있는 신앙 인격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음으로 성산에 들어갈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는 열 가지 덕목에 대해 알아보자. 시편15편에 언급된 열 가지 조건들은 ‘의’(체데크)의 증표이자 원형(prototype)으로서 사실상 인간의 능력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들은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생활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의의 원형이시자 의 자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품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고전1:30). 이렇게 볼 때 이 열 가지 조건들을 구비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날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을 의미한다(롬13:14). 거룩한 성품이란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창조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와 밀접한 교제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는 신령한 축복을 얻을 수 있다(엡2:1-10). ‘은혜에 들어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이 조건들을 완비할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세계이자 성도의 최종적인 안식처인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권능(능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62:11. 하나님께 속한 위대한 능력의 보고는 그의 말씀 곧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원한다면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서도 성경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열매가 맺히도록 능력을 갈구하지만 예수님께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눅8:11)이라고 하신 것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 완고한 고집을 깨뜨리는 능력 얻기를 갈망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고 하신 것을 잊고 있다. 우리가 삶과 섬김에서 능력 충만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만큼 힘을 주는 음식은 없다. 영양 많은 음식을 먹지 못했을 때는 우리 몸에 힘이 없게 된다. 하물며 시간을 들여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찌 능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1.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다. 사도행전 2:37은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들은 무엇을 들었기에 그러한 깊은 회개를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었지 이루어진 설교 중 가장 성경적인 설교에 속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성경 말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심장을 찌른 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을 회개시키기 원하거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야 한다. 얼마 전 나는 어떤 사람이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로 죄를 회개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 아주 좋은 기도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도구에 당신의 영혼이 접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죄를 회개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죄를 회개하게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반드시 말씀을 사용해서 그 일을 해야 한다. 2.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 베드로전서 1:23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또 야고보서 1:1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당신이 거듭나기 원한다면 그 방법은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내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여 그것을 묵상함으로 그것이 마음속 깊이 파고들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을 소생시키실 것을 기대하라. 진심으로 믿으라. 그러면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다른 누군가가 거듭나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라. 우리 편에서 볼 때 중생의 과정은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일이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중생의 과정은 신비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 과정은 그저 이렇다-사람의 마음은 밭이다. 당신과 나는 씨를 뿌리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 밭에 뿌리는 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으로 씨가 싹이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신다(고전3:6). 마음은 믿음으로 말씀을 감싼다.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다. 새로운 출생이란 단지 새로운 성품의 부여, 즉 하나님의 성품의 부여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가? 베드로후서 1:4을 읽어보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것이 해답의 전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의 성품이 인간의 영혼에서 솟아나도록 하는 씨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낳는 능력이 있다. 로마서 10:17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리라.” 그저 기도만 하고 있으면 결코 믿음을 얻을 수 없다. 또 어떠한 의지의 노력을 통해서도 믿음을 얻을 수 없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믿음을 퍼 올리려 해도 결코 얻을 수 없다. 믿음은 어떤 원인의 열매이다.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원하는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 구원하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 하자. 그러면 그가 의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어떤 구체적인 것을 그에게 주라. 빌립보 간수는 물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 그러자 바울이 대답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절).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32절을 보자.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들은 빌립보 간수에게 그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만 말하고 믿을 무엇이나 그의 믿음이 의지할 무엇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가 어둠 속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믿음이 생기게 하기 위해 제정하신 것을 주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흔히 실수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믿으시오, 믿으시오, 믿으시오”라고만 하고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믿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믿으라고 말할 때의 지혜롭고 성경적인 방법은 믿어야 할 것을 그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 53:6을 보여 주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제시하라. 또는 베드로전서 2:24을 보여 주라. 그렇게 할 때 그는 그의 믿음이 의지할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 믿음은 근거를 가져야 한다. 믿음은 공기 속에 떠다닐 수 없다. 믿으라 믿으라 믿으라 하면서 믿음이 의지할 것은 주지 않은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온다. 그뿐 아니라 기도를 응답받게 하는 믿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온다. 내가 마가복음 11:24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를 읽었다고 해보자. 그리고 나는 늘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내가 그것을 얻을 것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믿으려고 애를 썼을 것이고, 그러나 내가 구한 것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진정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보증이 있어야 한다. 내가 구하는 것을 받을 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으려면, 먼저 나의 믿음이 의뢰할 하나님의 말씀의 구체적인 약속 또는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수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온다. 이때 문제는, 우리가 바라는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서 약속을 찾는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 약속을 하나님 앞에 제시하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사도행전 2:39에서는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또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증명할 주님의 말씀도 저는 제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하오니 저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또 요한일서 5:14-15을 택하여 이렇게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시여,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하신 말씀을 저는 굳게 믿으며, 또한 이 소원이 주님의 뜻대로인 것도 압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에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이것은 이제 내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내 것이 된다. 기도를 응답받게 하는 믿음을 갖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을 공부하여 약속을 찾고 그 약속을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제시하는 것이다. 죠지 뮬러(George Mueller)는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말씀을 공부함으로써 기도를 준비하였다(요15:7). 의심하지 않고 바라는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믿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당신이 어떤 무신론자 한 사람을 만나 그와 이야기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그가 믿음을 갖기 원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그에게 기독교를 증거하는 책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떠할까? 나는 기독교를 증거하는 책에 대해 반대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러나 기독교를 증거하는,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이 주제에 관해 이제까지 쓰인 모든 책을 합친 것 만한 가치가 있다. 요한복음 20:31을 보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따라서 이 요한복음은 그 안에 “기록된 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기독교를 증거하는 책이다. 그런에 우리가 회의론자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이제는 “이 책을 가지고 가서 성실하게 또 철저히 읽으십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결과를 제게 알려 주십시오”라고 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결과는 뻔하다. 회의론자, 불가지론자, 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지 진리에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이 성경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아가 깨달음을 달라고 간구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방법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시도해 보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이 법칙에는 예외가 하나도 없었다. 늘 동일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세상, 육체, 마귀를 이기고 승리를 얻는 믿음, 하나님을 위한 큰 승리를 얻는 믿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온다(요일5:4;엡6:16;히11:33-34). 나는 나의 사역 초기에 무디(Moody)의 설교를 지면을 통해 읽은 적이 있다. 그 설교에는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맞아, 나는 믿음을 가져야 해” 하고는 애를 써서 믿음을 가지려고 했다. 그러나 조그마한 믿음도 가질 수가 없었다.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할수록 믿음은 더욱 작아져만 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는 말씀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위대한 믿음의 비결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비밀에 속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믿음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을 먹임에 따라서 내 믿음은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자라고 있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을 우리는 본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면-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능력을 가지려면 믿음을 가져야 한다-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많이, 매일 먹어야 한다. 4. 하나님의 말씀은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에베소서 5:25-26은 이렇게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능력뿐 아니라 밖으로 나타나는 삶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만일 깨끗한 생활을 원한다면 수시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게 하여 씻어야 한다. 매연으로 오염된 도시에 사는 사람이 외출을 한다면 그의 손은 더러워질 것이다. 만일 그가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다면 자주 손을 씻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대기가 오염된 아주 더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 매일 밖으로 나감에 따라 우리는 이 더러운 세상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오직 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주 목욕하는 것이다. 당신은 매일 목욕해야 하고 많은 시간을 목욕에 들여야 한다. 매일,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을 들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욕하는 것은 삶은 깨끗하게 유지시키는 유일한 길이다(시119:9). 5.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사도행전 20:32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요즈음 우리는 인격 형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 형성이 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근거해야 할 대상이다. 베드로후서 1:5-7에서 우리는 7층으로 된 그리스도인의 그림을 본다. 오늘날 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1층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2:2에서는 동일한 내용이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본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유익하고 영양분 많은 음식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균형 있는 성장에 필요한 모든 영양분들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영적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린 아이가 적당한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마땅히 자라야 할 만큼 자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정기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먹지 않으면 마땅히 자라야 할 만큼 자라지 못한다. 새들백교회 "복음은 변함 없으나 방법은 바꿔져야 한다" 성경적 청사진 제시 도전받고 창의력 개발케 하는 새들백교회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 교회가 교회되는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미국에 교회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교회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중에서도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소재한 새들백교회가 그 중의 하나. 릭 워렌(Rick Warren)이 담임목사로 있는 이 교회는 현대 목회의 새 모델이 되어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월은 미주 곳곳에서 교회 성장 컨퍼런스들이 열리고 있다.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나 새들백교회 등의 교회들이 세미나를 갖고 있다. 이들 세미나에는 세계 곳곳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하며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California의 Lake Forest에 위치한 새들백교회에서 열리는 'Saddleback Church Conference'에도 수많은 목회자들이 몰려든다. 해마다 열리는 이 세미나는 최근 한국의 목회자들에게도 관심거리여서 한국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다녀간다. "Building a PurposeDriven Church"(목적에 따라 운영되는 교회 세우기)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는 세미나는 창의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기술을 연마시키기 위하여, 개인적인 격려를 위하여 열리고 있다. 현재 매주일 마다 11,520명이 출석하는 이 교회의 특징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적 경험을 가진 신자가 아닌 이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들이라는데 있다. 이중 약 1천여명은 핵심 멤버로 사역에 헌신한 신자들이고, 4천여명은 영적성장에 헌신한 신자, 6천여명은 교인이 되기 위해 헌신한 신자들이다. 아직도 허허 벌판과 같은 들녘에 겉에서 보기에는 창고와도 같은 Worship Center와 조립식 건물과 천막으로 된 Coass Room, 그리고 넓은 파킹랏을 볼 때 한국인의 느낌으로서는 교회로서 좀 초라한(?) 느낌마져 든다. 그러나 이 교회는 워렌목사와 팀사역하는 스타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과 교인들이 한데 뭉쳐 든든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비자 중심주의'에 의해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소리를 쉽게 듣곤 한다. 마치 차를 사기 위해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소비자들처럼 신자들이 "골라 잡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여러 교회를 돌아 다닌다. 그러나 신자들만을 나무랄 수는 없는 것. 신자들의 Need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데서 기인한다는 자성도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현대교회는 달라져야 한다고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시대는 빠른 속도로 변화되고 있고, 사람들의 삶은 변화되는 상황에 맞춰 변화되고 있는데, 교회는 옛날 그대로다. 오히려 시대를 선도하며 교회는 시대에 적절한 성육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때 새들백교회는 현대교회의 모델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비자 중심적 신자들에 지적하였지만, 목회자들도 어쩌면 소비자중심적 목회를 하기 쉽다. 목회자로서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특별히 무엇을 성취하길 원하셔서 부르셨는지 등을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채, 단지 교회들이 빨리 성장하도록 만들기 위해 새로운 방법들과 프로그램을 이것 저것 구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들백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 교회를 통해 도전받고 돌아가 목회가 각자에게 부여한 사명을 창의적으로 개발하여 사역하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워렌목사가 보여주는 것은 성경적인 청사진 바로 그것이다. 워랜 목사는 교회의 성장의 법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교회의 크기와 장점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2) 교회성장의 방법은 한 가지 이상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을 결코 비평하지 않는다. 3)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여러 종류의 교회들이 필요하다. 4) 원리가 성서적이면 어느 곳에서나 역사할 것이다. 5) 방법과 복음을 결코 혼돈하지 말라. 복음은 바꿔지지 않으나 방법은 바꿔져야 한다." 워렌목사는 1979년 사우스웨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캘리포니아에 왔다. 아내와 4개월된 베이비를 데리고 남가주 땅을 밟은 워렌목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한가지의 재산 뿐이었다. 학교의 대강당을 빌려서, 그리고 아무도 살지않는 허허벌판 지금의 위치에 천막을 치고, 교인들이 늘어날 때마다 천막을 늘리며 옮기길 50여회 정도, 오늘의 교회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성장은 그냥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성서에 바탕을 둔 분명한 목회관, 그리고 영성과 함께 뛰어난 감각적 Technic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목회의 토대를 이룬 Saddlback의 전략 (Strategy)을 살펴보자. 새들백의 전략은 새들백의 영어 알파벳의 첫 자를 잘 조직화한 전략이다. S=Seeker senstive services(구도자에게 초점을 맞춘 예배), A=Affinity Group(동질의 그룹), D=Driven by purpose(목적에 따라 운영함), D=Defined target(목표설정), L=Life development process(생활 발전단계), E=Every member a minisster(모든 교인은 사역자), B=Behavioral preaching(행동 변화를 위한 설교), A=Authentic leardership(모범이 되는 지도력), C=Climate of acceptance(영접하는 분위기), K=Keep the structure simple(간단한 구조), 이 전략은 물론 성서적인 바탕위에 더 구체적으로 세워져 있다. 워렌목사는 "위대한 명령(commandment)과 위대한 위탁(commission)에 위대한 헌신(commitment)을 함으로서 위대한 교회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는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Worship),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ministry), "제자를 삼으라"(evangelism), "세례 (침례)룰 주라"(fellowship), "가르쳐 지키게 하라"(discipship)는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이뤄졌다며 이것이 곧 교회의 사명인 예배, 전도, 친교, 양육, 봉사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 다섯가지 사역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주로 한 가지 목적에 중점을 둔다. 가정중심 목회라든지, 선교 중심 목회, 교육 중심 목회 등이다. 그러나 워렌 목사는 이 다섯가지가 모두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목회여야 한다고 말한다. 새들백교회는 이 다섯가지를 토대로한 교회의 목적을 정의하고, 새신자 교육이나, 성경공부, 설교 등을 통해 나눌 뿐만 아니라, 이 목적이 적용되도록 하는 프로그램들을 보면, 지역사회를 위해서는 Bridge Events, 대중을 위해서는 구도자(Seeker)예배 회중을 위해서는 스몰 그룹, 헌신자를 위해서는 주중예배, 핵심자들을 위해서는 SAlT Leadership traning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교인들은 목적에 따라 교육한다. 그 목적이란 4단계의 교육으로 1) 교인이 되는 과정과 교인 언약서(교인됨의 헌신) 2) 영적 성숙과 성장 언약서(성장에 헌신) 3) 자신의 사역을 발견함과 사역 언약서(사역에 헌신) 4) 선교지를 발견함과 선교 언약서(선교에 헌신)이다. 그리고 목적에 따라 구도자 그룹, 지원 그룹, 봉사 그룹, 성장 그룹을 두고 있다. 새들백교회의 비젼(The Saddleback Vision) 우리의 꿈은, 상처받은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 좌절된 사람들,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acceptance),도움, 소망, 용서, 인도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남 오렌지 카운티의 수십 수만의 이웃들과 예수님의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사랑하고, 배우며, 즐기며, 조화롭게 살아가면서 우리 교인들과 함께 교제하도록 20,000명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성경공부, 소그룹, 세미나, 안식, 성경학교를 통해 교인들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서 그들이 중요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준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전세계에 수백 명의 선교사와 교회 사역자들을 파송하고 전 교인에게 그들의 삶의 각 영역에서 선교하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각 대륙으로 파송하는 단기 선교 project에 우리 교인들을 참여하게 하고 매년 적어도 하나의 지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50에이커 이상의 대지위에 수천명이 함께 드릴 수 있는 예배당, 기도실, 상담실, 성경을 공부하고 평신도 사역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공간, 레크레이션 시설로 구성된 남 오렌지 카운티의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각 사람은 전 인격적으로-영적으로,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돕기 위해 구성된 것입니다. 또한 평화롭고 재충전할 수 있는 정원을 조경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자신에게 '이 꿈들은 현실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꿈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교회의 개척 첫 설교를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 후원 받는다"` 타겟 - 무엇을 낚을 것인가? 대화 - 고기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라 장소 - 고기가 무는 곳으로 가라 포착 - 고기의 한계 상황을 포착하라 방법 - 여러 가지 낚시 바늘을 사용하라 앞에서는 새들백교회의 목회비젼과 목회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새들백교회의 지역사회를 향한 목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열 두 제자를 불러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열 둘을 파송하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니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며 차라리 이스라엘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였다. 새들백 교회의 Target는 사람을 낚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략을 그 원리로 한다. 그 원리는 다음의 몇 가지로 되어 있다. 1, 무엇을 낚을 것이가? 누구에게 전도하려고 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바울은 그의 사역의 타겟(target)이 이방인(Gentile)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이었다. 둘 다 필요한 사역을 하였고, 중요했고, 효과적이었다. 새들백교회 첫 번째로 한 것은 바로 목표의 설정이었다. 릭 워렌목사는 "교회가 목표를 정하는 데 필요한 것은 지리적인(geographically)것과 인구적인(demographically)것, 문화적인(culturally)것, 그리고 영적인(spiritually)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목표를 지역적으로 설정할 때 고려할 것으로는 "이 지역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는가?"를 조사하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1마일, 3마일, 5마일을 나타내는 원 3개를 그리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 복음화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4가지의 지리적인 목표를 제시하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행1:8) 이 방법은 지역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평균 Drive시간 (15-2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안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숫자를 계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워렌 목사에 의하면 "적어도 50%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간주하라"는 것이다. 둘째, 목표를 인구 통계학별로 설정하는 일이다. 새들백교회가 관찰한 것으로는, 1) 연령:각 연령별로 얼마나 많은 그룹이 있는가? 2) 결혼:얼마나 많은 성인 싱글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결혼한 커플이 있는가? 3) 수입;중간의 수입은 얼마며, 평군 가정의 수입은 얼마인가? 4) 교육:커뮤니티의 평균 교육의 정도는 얼마나 되는가? 5) 직업:어떤 타입의 직업인가? 사무직인가? 육체노동자인가? 이런 조사는 도서실의 미국인구조사, 카운티 도시개발처, 신문사, 상공회의소, Unite Way, 건축자, 부동산업자, 가스회사, DWP등을 통해 제공받았다. 셋째, 목표를 문학적으로 설정하는 일이다. 커뮤니티의 지리적, 인구적, 조사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커뮤니티의 문화를 이해하는 일은 더 중요한 일이다. 해외로 나가는 선교사가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할 일은 선교하고자 하는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다. 목회 사역을 위해 오늘의 주위 상황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역 주민들의 가치관과 취미, 두려워하는 점 들을 발견하는 것은 사역에 큰 도움이 된다. 워렌목사는 "문화를 이해하는 최고의 출처는 개별적인 만남"이라고 말한다. 그는 "시장의 고용주와 만날 필요는 없지만 정면으로 맞서(facd-to-face)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넷째, 목표를 영적으로 설정하는 일이다. 복음에 대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의 종교적 배경을 찾는 일이다. 워렌 목사는 "한 가지 사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같다(same)는 것"이다. 그가 새들백 지역을 조사했을 때, 94%의 오렌지 카운티의 주민들이 하나님이나 Universal Spirit을 믿고 있었으며 75%가 하나님의 성서적 정의를 믿었으며 70%가 죽음후에 영생을 믿고 있었다. 다음에 나오는 그림이 오렌지 카운티 남부(새들백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2. 고기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라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마9:4상) 예수 그리스도는 가끔 믿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셨다.(막2:8, 눅 5:22, 9:47등) 그는 사람들과 함께 교섭하셨다. 왜냐면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 마음속에 소유하고 있는 정신적 장애를 진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배울 수 있을까? 워렌목사는 "예수를 믿은지 오래되면 될수록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그만큼 많이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배우는 길은 "그들과 대화하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과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비신자 친구들과 거의 사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과 사귀는 것이 필요하며 그것이 고기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바른 답변을 얻지 못한다. 바른 대답을 얻지 못하면 바른 전략을 세울 수 없다. 바른 전략을 세우지 못하면 바른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 세가지를 늘 유념해야 한다. 새들백교회를 시작할 때 5가지 질문의 설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1) 현재 적극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가? 2) 우리 지역에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4) 교회를 찾는다면 어떤 교회를 찾겠는가? 5) 내게 무슨 충고를 주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었다. 이 설문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대답 가운데 4가지의 큰 불평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목사의 설교가 지루하다 2) 교회에 처음 나오거나 방문자에 대해 멤버들이 친절하지 않다. 3) 헌금에 대한 강조가 많다. 4) 어린이들을 돌보는데 약하다 3. 고기가 무는 곳으로 가라 고기가 물지 않는 곳에서는 시간만 낭비된다. 현명한 낚시꾼은 곧 자리를 옮긴다. 교회의 목회지역 가운데 가장 반응이 좋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워렌목사는 "성장하는 교회는 새 사람을 접근하는데 초점을 두지 않는 교회는 이미 다른 교회에 나가는 신자를 다시 등록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고 말한다. 현재 새들백교회는 75%정도가 새신자로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4. 고기의 한계 상황을 포착하라 목표가 접근 방법을 결정한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0-22)라고 한 말씀은 바로 고기의 한계상황을 포착한 한 예이다. 사람들이 약할 때일수록 복음은 쉽게 받아들여진다. 새들백교회의 전도전략은 비신자들의 필요에 따라 프로그램을 결정한다. 미국에서 비신자들의 필요사항은 주로 감정적(emotional)이고, 관계적(Relational)인 것들이다. 새들백교회는 비신자들의 문제가 교회의 정책(strategy)을 결정하고, 비신자들의 문화가 교회의 스타일을 결정하며, 비신자들의 인구가 교회의 목표(Goal)을 결정한다고 보고 있다. 5. 여러 가지 낚시바늘을 사용하라.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끼가 여러 가지이면 다양한 고기를 잡을 수 있다. 가능한 모든 수단들(means)을 사용해서, 가능한 모든 사람을 접촉하며, 가능한 모든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워렌목사는 "대부분 잘못된 관념은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인가인데, 그보다는 Reach를 위해 누가 필요한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새들백교회는 선교를 위해 사용된 자금은 지출이 아니며 투자로 생각한다. 그들은 결코 '돈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아껴 인색하게 사용하면 인색한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 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한 하나님의 일은 항상 하나님의 후원을 얻는다"라고 한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음악은 Art가 아니라 Heart가 되어야 한다" 구도자에게 초점을 맞춘 예배로 급성장한 새들백교회 새들백교회의 예배중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강력한 대중을 사로잡는 힘이었다. 그는 대중에게 매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그리스도는 한 영혼을 사랑하고 관심가졌을 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하면서도 강력한 능력들을 보여주었다.(마 14:21) 새들백교회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한 사람을 잘 돌봐주면서 대중의 욕구를 채워주는 구조라고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은 한 영혼에 치중하던지, 아니면 대중에 치중하기 쉽다. 그러나 새들백교회는 이 둘을 다 중요시하게 여긴다. 릭 워렌목사는 "예수님의 사역은 한 사람을 중요시 하면서도 대중을 중요시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집을 채우기를 갈망하신다. 방문자가 없이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 대중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올바른 전략이 있으면 대중을 교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새들백교회는 주일 오전 8시, 9시30분, 그리고 11시15분 등 3차례의 예배와 토요일 오후6시 구도자를 위한 예배를 갖고 있다. 특히 토요일의 구도자를 위한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교회에 접근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자는 시도이다. 때문에 이 예배도 주일의 예배와 똑같은 비중을 두고 행해진다. 워렌목사는 새들백교회가 성장한 첫째 이유는 바로 새로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있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예배는 교회의 5가지 목적 가운데 하나인 중요한 사역이다. 새들백교회는 예배에 대한 12가지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1) 오직 신자들만이 참으로 예배할 수 있다. 2)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건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3) 예배하는 데는 올바른 스타일이 없다. 4) 비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5) 예배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비신자들이 전하는 소식을 이해할 수 있으면, 비신자들에게 아주 강력한 증거가 된다. 6) 하나님께서는 비신자들이 예배에 참석했을 때, 신자들이 비신자들의 두려움과 문제점들, 그리고 그들의 필요에 민감하기를 원하신다. 7) 구도자에게 맞추기 위해 예배의 질을 낮출 필요한 없다. 말씀은 타협해서는 안되나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게 전달 되어야 한다. 8) 신자나 비신자의 필요가 때론 겹치기도 한다. 어떤 분야에서는 상이하게 다르나 많은 분야에서는 아주 동일하다. 9) 비신자들의 목적에 따라 예배를 전문화시키는 것이 최고로 타당하다. 10) 구도자에게 초점을 맞춘 예배는 개인전도를 추가하는 것이지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11) 구도자 예배의 형식을 고안하는데는 정해진 방법이 없다. 12) 구도자를 위한 예배는 헌신적인 신자들이 드린다. ◉ 구도자 예배를 위하여 타협할 수 있는 3가지 ① 불신자를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라. ② 그들의 필요에 연관성있는 예배가 되게 하라. ③ 실제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배를 드려라 워렌목사는 구도자에게 민감한 예배를 고안하기 위한 몇가지 지침을 말하고 있다. 1. 목표를 생각하고 계획하라. 전체의 예배가 꼭 초정은 아니더라도 비신자들의 생각을 반영하여 계획해야 한다. 2. 교회에 출석하기가 쉽도록 고안하라. 다양한 예배를 제공해야 하며, 주차장을 충분하게 확보해야 한다. 교회의 건물이 얼마 나 큰가가 문제가 아니라 충분한 주차공간이 있는가가 문제이다. 예배시간과 같은 시 간에 선데이스쿨을 하는 것이 가족과 함께 교회에 왔다가 가기가 편리하다. 또 모든 교회의 홍보물에는 교회의 지도와 안내의 내용을 싣는 것이 좋다. 3. 예배의 흐름을 신속히 하라 . 시간 절약하는 방법을 찾고, 다른 순서로 바꾸는 시간을 최소한 줄이는 것이 좋 다. 그리고 목사의 기로는 가능한 간결한면서 길지 않아야 한다. 4. 방문자들을 편안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라. 처음 12분동안이 구도자들이 교회에 다시 나올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고 한다. 이 기 회를 놓치면 첫인상을 회복할 기회가 다시 오기 어렵다. 방문자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새들백교회는 최고로 좋은 장소에 별도의 주차장을 마련하고 있다. 새들백교회의 입 구에 들어서면 벌써 안내원들이 요소 요소에 서있다. 워렌목사는 안내원을 구별하기 위해 배지를 달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여러곳 에 교회의 시설에 대한 안내판들이 서있다. 방문자들을 환영하나 이름을 불러 소개하지 않으며, 환영카드를 기록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격려하고 있다. 예배 시작과 끝에는 서로 인사하는데. 3분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배후 3분간 방문객과 인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후 밖으로 나오면 자원봉사자들이 다과와 음료 수 테이블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리고 부담없이 먹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방문자를 편안하게 하는 것들이다. 5. 예배센터의 주위 상황을 밝게 하라. 건물과 시설을 방문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방문자에게 교회가 무슨 메시 지를 주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는 조명이 어두운 편이다. 실내 온도도 중요하며, 좌석배정도 중요하다, 앉기에 충분한 여백을 제공해야 하고,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배치, 필요한 것보다 의자를 적게 놓은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교회 의 장식에 제일 경비가 절약되는 것은 화분을 이용한 장식이다. 새들백교회의 강단 좌 우에는 많은 식물로 장식되어 있다. 유아실은 깨끗하고 안전해야 부모들이 안심하고 맡긴다. 또 화장실이 중요하다. 새들백교회의 화장실은 늘 청결하고, 전자식 장치가 되 어있다는 최상급의 시설로 되어 있다. 워렌목사가 가장 중요시하는 시설 가운데 하나 는 음향시설이다. 새들백의 대부분의 시설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실용적으로 되어있 다. 그러나 음향시설만은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어 있다. 대형 멀티비젼이 두 개, 소형 멀티비젼 3개, 그리고 비디오 카메라, 앰프 등의 음향시설에 1백만불을 들였다고 한다. 6. 호감을 주는 분위를 만들라. 새들백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6가지 단어가 있다. 찬양과 축제(celebration), 시100:2), 긍정(affirmation, 히10:25), 협력(cooperation, 벧전 3:8), 회복(restoration, 마11:28-29), 자유(liberation, 고후 3:17)이다. 7.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맞는 음악을 택하라. 워렌목사는 "음악이 사람들을 교회에 머물게 하는 첫 번째 요소"라고 확신있게 말한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음악을 택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새들백교회는 2백명을 잃었었 다. 그러나 현대음악을 택하므로 1천명을 얻었다고 한다. 워렌목사는 "음악은 Art가 아 니다. 음악은 Heart다"고 말한다. 새들백교회는 올겐대신 전자 음악기기를 사용한다. 그 것은 컴퓨터MidiBand로 Kord T3/MI 라는 뮤직박스이다. 그리고 릭뮤초목사가 음악을 전담하고 있다. 8. 광고를 최대한 줄이라. 문제점은 교회가 커갈수록 광고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광고에서 주의할 것은 사적인 광고를 배제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되는 광고가 되어야 하며, 봉사에 대한 광고는 사회봉사로서 돕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게 해야 한다. 9. 현대어 성경을 사용하라. 강단에서 사용하는 동일한 성경을 사용하여 본분의 쪽을 찾을 수 있게 하고, 목표 대상자들에게 적합한 교독문을 선정하는 것이 좋다. 10. 예배 순서를 간단하게 기록하여 인쇄하라. 예배순서가 지루하게 느끼지 않도록 간단하게 순서지를 작성하는 것이 좋다. 11. 설교할 대상자들의 마음상태를 생각하고 설교하라. 설교 대상자들이 필요를 알아야 하며 진지해야 한다. 그리고 비신자들에게 잘 어필이 되는 제목을 선정해야 한다. 새들백교회는 설교요약을 관련된 성구와 함께 인쇄하여 나눠주고 있다. 이렇게 설교요약에 성경구절을 기록하여 나눠줄 때의 이점을 참으로 많다. 비신자들은 성경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을 찾지 못하는 당황감을 제거해 주며, 짧은 시간에 많은 자료를 다룰 수 있고, 예배 후에도 읽어볼 수 있다. 워렌목사는 "사람들은 72시간이 지나면 들은 것의 90-95%를 잊어버리다"고 말한다. 12. 항상 그리스도를 받아 들일 기회를 제공하고 사람들이 호응할 것을 기대하라. 새들백교회는 등록카드를 결신카드로 사용한다. 구원 초청을 할 때는 시간을 너무 끌지 말고, 인위적인 방해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13. 계속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하도록 한다. 성장하는 교회는 항상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는가?" 평가는 탁월하게 하는 Key가 된다. 새들백교회가 오늘에 이른 것은 바로 이와같은 지역사회를 겨냥한 구도자를 위한 예배의 철저한 준비에 기인한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교회는 성장한다" 교회지도자는 친근감 필요, 이름 잘 외우고 유머감각 있어야 새들백교회의 맴버가 되는 과정 어떤 이유 때문에 교회를 선택하는가? 이 질문은 목회에 있어 중요하다고 본다. 새들백교회가 오렌지 카운티에서 비신자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를 조사했더니. 30%가 담임목사, 17%가 친절, 15%가 교회의 행사나 활동, 12%가 위치, 12%가 교회가 지지하는 교리, 7%가 교단 관계를 중요시한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교인이 되고 싶어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열렬히 바라는 두 가지 사실은 "사랑"(love, 요13:35)과 "용인"(acceptance, 롬15:7)이다. 릭 워렌목사는 "성장하는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교회는 성장한다. 교회를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Family로서 포지션을 갖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커뮤니티의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저 교회"라고 말한다. 대중이 "이 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의 회중의 "우리의 교회"라고 말한다. 교회의 멤버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는 교인들을 정말 잘 돌봐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어떻게 이웃을 돌보는 교회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늘 연구해야 한다. 워렌목사는 "교회지도자들은 가까이 하기 쉽고 진실해야 하며, 이름을 암기하고, 예배 전과 후에 개인적으로 환영하고, 유머를 적절하게 사용하라"고 말한다. 그는 그러나 "유머의 사용은 인상을 끼치려는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며, 신자들 사이에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 아 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새들백교회는 3가지 차이점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1) 헌신적인 것 (committement) 2) 교회 배경 3) 본질적인 교리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교인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인이 되는 것이 conformity 한 행동이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교인이 되는 것이 헌신적인 것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교회의 맴버쉽은 헌신의 행동이다. 새들백의 교인들은 맴버쉽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고 있다. 즉 교인(membership)이 될 때 오는 이익들을 그들은 알고 있다. 1) 내가 참다운 신자임을 나타낸다.(엡2:19) 2) 내가 그리스도와 동행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해 주는 영적 가정을 내게 제공해 준다.(갈 6:1-2) 3) 내가 은사를 발견하고 사역에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준다.(고전 12:4-27) 4) 내가 경건한 지도자들의 영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한다.(히13:17) 5)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책임을 지는 사람들을 제공해 준다.(엡5:21) 이것은 새들백교인들이 말하는 맴버쉽을 통한 이익들이다. 다른 면에서 교회는 새로운 교인을 동화할 계획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나 새들백교회가 목회적 차원에서 갖는 12가지의 고려할 만한 질문이있다. 1) 본 교회의 교인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2) 교인들로부터 지금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3) 현재 교인들은 어떠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4) 장래 5년내지 10년 사이에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5) 본 교회 교인들이 중요시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6) 새로운 교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7) 가장 오래된 교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8) 어떻게 하면 교인이 되는 것을 더 의미있게 할 수 있는가? 9) 교인들이 사랑을 받으며 돌봄을 받고 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10) 본 교회 교인들에게 무엇을 빛지고 있는가? 11) 교인들에게 무슨 자료나 봉사를 제공할 수 있는가? 12) 현재 우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들에 어떻게 가치를 첨가할 수 있는가? 이 질문과 함께 교인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물어오는 5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한 다. 1) 내가 이 교회에 어울리는가? 2) 다른 사람들이 나와 friendship 갖기를 원하는가? 3) 내가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 4) 멤버 가입의 유리한 점이 무엇인가? 5) 교인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사항들이 무엇인가? 등. 새들백교회는 이렇게 하여 멤버가 된 사람들에게 새 교인반에 참석하는 것을 요구사항으로 하고 있다. 사람들이 교인이 되기 위해 가지는 태도가 교인으로서 앞으로 계속해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섬길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새 교인반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교회는 무엇인가? 2)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3) 교인이 되는 이익은 무엇인가? 4) 교인이 되기 위한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5) 교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6) 교회의 비젼과 전략은 무엇인가? 7) 어떻게 교회가 조직되어 있는가? 8) 어떻게 나는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가? 9) 교인이 된 다음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 교회 출석자와 교인의 차이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헌신"(committement)에 달려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처럼. 각각 다르게 헌신하는 것이다. 새들백교회는 교회에 출석하는데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이면서도 멤버가 되는데는 쉽지 않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교인이 되기 위한 4대 강령이 그것을 보여준다. 1)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는 개인적인 고백이 필요하다. 2) 개인의 믿음의 공개적인 표현으로서의 침례를 받아야 한다. 3) 새신자반을 수료해야 한다. 4) 새들백교회 교회 언약을 준수하겠다는 개인적으로 서명한 헌신 언약을 해야 한다. 이렇게 교인이 되면 그 다음에는 Relationship을 발전시키도록 도와 준다. 교인들은 전부는 알 수 없으나 일부는 알아야 한다. 매 집회 때마다 알게끔 돕는 활동을 하는데 그중 한 가지 방법이 이름표를 달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인을 소그룹에 참여케 격려한다. 이 교회의 모임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대규모 모임(worship)과 소규모 모임(felloship)이다. 교회는 크게(large) 성장하는 동시 작게(small)성장해야 한다. 소 그룹은 상이한 목적, 취미, 연령, 지역이나 다른 것들을 참고하여 모이게 한다. 새들백교회는 중요한 소식을 교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한다. 예를 들면 팩스, 비디오, 카셋테잎, 엽서, Voice Mail, 뉴스레터, 연쇄기도, 신문기사, 인테넷 등이다. 교인이 되고 Relationship을 발전시키는 것과 함께 중요한 것은 성숙한 신자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새들백교회는 5가지 단계의 배움에 근거한 균형잡힌 기독교교육을 하고 있다. 1) 지식:하나님의 말씀을 알음(성경의 각 권,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산 지식을 획득하는 것) 2) 관점:사건을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게 한다. 3) 확신:하나님의 기치관, 헌신, 그리고 동기를 개발하는 것이다. 4) 기술: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사역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5) 성품:태도와 행동에 있어 그리스도와 같아지게 하는 것이다.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한 새들백의 2020년의 비젼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를 쓰신다" 모든 신자는 사역자, 모든 사역은 중요, 신자의 은사를 개발하라 *신자의 은사를 개발하는 일, 새들백교회의 지도력 미국의 교회를 중심으로 갤롭 조사를 한 것이 있다. 이 조사에서 오직 10%의 신자들만이 사역에 동참하고 있으며, 50%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40-50%는 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나 동참하라는 Ask를 전혀 받지 않았거나,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모든 교회의 맴버는 minister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멤버를 사역자화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크리스챤 사역에 관한 성서적 기초를 가르쳐야 한다. 사람들은 항상 "어떻게"를 가르치기 전 "왜"라고 알기를 원한다. 때문에 신자들에게 크리스챤 사역에 관한 성서적 기초를 가르치는 일은 중요하다. 성경공부 교실이나 설교, 세미나, 그리고 가정 성경공부 등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새들백교회는 이 성서적 기초를 확실하게 알게 한다. 그 크리스챤 사역의 4가지 기둥은 로마서 12:8에 나온다. 1) 모든 신자는 minister이다. 모든 신자는 pastor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사역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을 그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사역자로 부르셨다. 몸 안에서의 봉사는 크리스챤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원봉사가 없으며, 하나님의 군사로 징용된 것이다. 새들백교회는 모든 신자는 사역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2) 모든 사역은 import!ant하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아니며 거기에는 무의미한 (insignificant)사역이 없다. 모든 사역은 중요하다. 작은 사역이 종종 훌륭한 다른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3) 우리는 몸의 다른 것에 의존한다. 모든 사역은 중요할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항상 독립하려는 것은 바른 사역이 아니다. 나에게 가지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은 가지고 있다. 이런 정점들을 서로 나누면서 의존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서 가는 것이다. 4) 사역은 나의 모습(shape)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새들백교회 사역의 가르침의 특성(distinctive)이다. 워렌 목사가 SHAPE를 두문자어(acronym)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S=spritual gift(영적 은사, 고전12), H=Heart(마음, 마12:34;잠4:23), A=abilities(능력, 출31:3), P=personality(개성, 고전 2:11), E=experience(경험, 롬8:28)이다. 둘째는, 사역을 극대화 하고 유지(maintenance) 는 극소화하도록 구조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Roper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의 여가는 1973년에 매 주당 평균 26.2시간 이었다. 그러나 1987년에는 16.6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근에는 얼마나 더 여가가 줄어들었겠는가? 워렌목사는 "사람들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한인교회들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시간을 바친 신자들의 헌신이 값지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셋째는, 교회는 사역 배치의 과정을 최고 우선권으로 삼아야 한다. 새들백교회에서는 몇가지의 중요한 요소를 통해 신자들의 사역을 배치하고 있다. 1) 매달 있는 과정 (#301과정)에서 신자 각자의 사역을 발견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위해 개개인을 어떻게 조성하셨는가를 배우게 된다.(영적 은사들, 마음, 능력, 개성, 경험 등) 2) 사역을 위한 언약에 서명을 한다. 3) 개인명세서를 완성한다. 4) 개인 면접을 한다. 사역 안내서를 보고 3,4개의 가능성이 있는 사역을 선정한다. 5)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를 만나 상담한다. 6) 그리고 난 다음 자신의 사역을 시작 하고 매달 SALT모임에 참여한다. 새들백교회의 사역개발센터는 사역을 담당한 목사와 사역 개발팀에 운영되고 있다. 넷째는, 실습(On-the-job)을 제공한다. SALT 훈련 모임은 매달 첫 주일에 핵심 사역자들을 두시간동안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다섯째는, 사역자 없이 사역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도력이다. 워렌목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라!" 사역을 강요해서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여셋째는, 최소의 기준과 지침을 설정하라는 것이다. 새들백교회는 4가지의 지침을 따르게 된다. 1) 교회 스텝진들이 사역을 운영한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2) 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교회와 일치해야 한다. 3) 사역이 교회의 testimony를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4) fund raising을 하지 않는다. 일곱째는, 죄의식없이 신자들이 사역을 멈추거나 바꾸게 하라는 것이다. - 3가지의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1) 검토하는 것 (examine) 2) 경험하는 것 (experience) 3) 연습하는 것(exercise) 이 밖에도 새들백교회는 필요한 모든 제원을 제공하고 있다. 복사기나 팩스,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으며, 만날 장소를 제공한다.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과 사역자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다수의 대화수단을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엔 행사를 위한 보이스 메일박스, 인터넷 웹 페지(주소: http:₩www.saddleback.com), 핵심뉴스레터 등이 동원된다. 이제는 새들백교회의 지도력에 대해 잠깐 언급코자 한다. 워렌목사는 "교회가 3백명의 교인이 되기까지는 사역의 기술로 성장하나 3백명 이상은 지도력(leadership)으로 성장한다"고 말한다. 얼마전 한국갤럽연구소가 전국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직업인들에 대한 정직과 윤리수준의 평가"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목사에 대한 정직성과 윤리성과 19개의 직업 가운데서 제6위로 나타났다. 순위별로 보면 천주교 신부가 1위, 방송매체 기자 2위, 승려가 3위, 신문기자가 4위, 초중고 교사 5위, 그리고 목사가 6위었다.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목사는 정직과 윤리성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신망이 높아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미국의 한인 목회자들의 순위를 매긴다면 또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새들백교회를 탐방하면서 오늘의 새들백교회가 있기까지의 담임인 워렌목사의 지도력이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열려있으면서 투명한 인격, 그리고 성서적인 기초위에 조직된 갖가지 사역,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의 발견, 그리고 그것이 실제적으로 적용되게 하는 그의 기술 등 어느 면에서보나 훌륭한 지도력이다. 워렌목사는 "교회의 주요지도자를 통해 모델교회를 바라보게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곳은 곧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한다. 인격과 전문성과 영성에 있어 그는 존경할만하다. 워렌목사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목표를 설정하는 데 있어 낮게 세우거나 목표를 빨리 달성하려는 데서 실수를 범하게 된다며 "1년 목표는 너무 크게 세우고, 10년 목표는 너무 작게 세운다"고 지적한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쓰신다"며 "용기를 가지고 나갈 것"을 강조한다. Crystal Cathedral 1. 담임목사 : Robert H. Schuller 1926년 9월 16일생으로 Iowa 주 Alton에서 화란 칼빈주의 교회의 큰 영향 속에 성장했다. Hope 대학에서 학사 (B.A.1947), Western Theological Seminary 신학교에서 목회학 학사 (B.A.1950), 다시 Hope 대학에서 목회학 박사 (D.D 1973), Pepperdine University 대학에서 법학박사 (L.L.D.1977) 를 수여했다. 1950년에 Reformed Churches of America (RCA - 미국개혁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첫 목회를 Chicage 근교에 있는 Ivanhoe Reformed Church in Riverside 교회에서 약 40명의 교인과 함께 목회하다, 5년후 교회를 떠날 때는 400명이 넘는 교회로 발전됨. 1955년에 교단의 지시에 순종하여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지역에 Drive-In 극장을 빌려 교회를 개척한 후 30년이 넘은 오늘날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하게 됐다. Schuller 목사가 저술한 많은 책들은 주로 적극적인 사고와 믿음, 목회의 무한한 가능성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의 T.V.와 Radie방송 "Hour of Power"(능력의 시간)은 매주 약 천만명 이상이 세계 각처에서 시청하고 있으며, 미국만도 180개의 T.V. 방송국들을 통하여 미국 전역에 방송되고 있다. 2. 교회소개 Robert Schuller목사 부부는 지역 선교적 차원에서 R.C.A.교단의 파송을 받고, 중산층 이상 백인 지성인들로 구성된 Orange County 지역으로 이사하여 개척을 준비하다 마땅한 교회 건물을 구하지 못하던 중 Drive-In극장을 마침내 빌려 무대 위에서 강대상을 갖다 놓고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날 (1955년 3월 27일) 창립예배시 50개의 차들 안에 있는 성도들과 예배를 드렸다. 처음 약 5년 동안의 여러 가지 역경을 이기며 목회한 1960년에는 700명 까지 교인들이 부흥하게 되었다. 이 어려웠던 당시 Norman Vincent Peale목사의 물심양면의 큰 도움이 있었다. 그 다음해인 1961년에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하여 Drive-In 과 Walk -In의 교인들을 다 같이 예배를 드릴 수 가 있게 되었다. 1968년에 "Tower of Hope"(소망의 탑)을 완공했으며 1978년 시작된 Crystal Cathedral(수정성전)은 1980년에 2천 만불(약 160억원)을 드려서 완성됐다. 이 성전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으로 꼽히고 있다. 3. 목회철학 본 교회의 official 목회 철학을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본 교회의 사역은 다음과 같은 영적성장을 위하여 존재하는 핵심이며 공동체이다." -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형성되는 곳 - 선인 (good people) 이 더 나아지는 곳 (butter) - 상처 받은 자가 치유 받는 곳 - 교훈이 배워지는 곳 - 우정 (friendship)이 형성 되는 곳 - 가족 관계가 더욱 하나가 되는 곳 - 미혼자가 인정받는 곳 - 곤핍한 자가 평안을 찾는 곳 - 사랑이 살아 있는 곳 - 하나님이 이해 되는 곳 -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는 곳 " 이러한 정신으로 본 수정교회 사역은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막 16:15) 온 천하 만민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사역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은- 목사, 교인, 직원, 자원 봉사자--이 사명을 진심으로 전심으로 영적으로 헌신한다." 3. 교회의 특징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Possibility Thinking)의 선교, 교육, 목회를 적극 추구한다. - 교인들에게 힘을 주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강단 사역과 성경 교육 - Schuller 목사는 자신의 목회는 "현재 기성교회를 포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그들의 육신적, 정서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모든 필요성을 채워 주는 사역이다." 라고 주장 함. - 모든 목회 철학과 사역을 긍적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정의하며 시도하고 있다. 예컨데, 신학 - 자부심의 조직 신학 (Systematic Theology of Self - Esteem) 복음 - 긍정적인 자부심을 위한 인간의 탐구 (The Human Quest for a Positive Self-Esteem) 십계명 - 건설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위한 열가지 창조적인 계명 (The Creative Commandments for Constructive and Creative Living) - 결론적으로 교회의 표어가 "긍정적인 사고"(Possibility Thinking) 라는 한마디로 압축 할 만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와 행동을 외치는 교회라 할 수 있다. Schuller목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의 삶"은 바로 자기가 부르짖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라 주장한다 4. 연구할 점 - 신학적인 문제점들 인간론, 죄, 구원론, 등등 - 인본주의적인 가르침과 Programs - 현재 주류를 이루는 교인층(중산층 이상, 지성적인 백인들)외에 다른 주민들에게 과연 appeal 할 수 있는 목회 사역이며 지역교회인가? 뉴라이프 교회(New Life Community Church) 1. 뉴-라이프교회의 역사(교회소개서에서 발췌) 저희 뉴 라이프 교회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희 교회는 가리스마틱한 순복음교회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연구하기 힘쓰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려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믿으며 또한 현 시대에서도 신양성서 시대에 전파되었던 영적은사들의 운영을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 교회를 여러 재능과 은사 곧 교육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다양하게 축복하셨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각양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캐톨릭, 어떤 이들은 개신 장로교, 감리교, 메노나, 침례교, 그리고 유대인 등... 하지만 우리들은 한가지 공통된 것일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 예수 그리스도를 온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세례를 받을 때 각양 다른 영적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여러모습들을 저희 교회 봉사가운데서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은사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하실수 있습니다. 예배도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방언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기가막힌 영적 구원의 역사 또는 기적적인 고침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식으로 예배하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성서에서 하나님께 예배함을 이같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 "손뼉을 치며 ... " "소리나는 꾕가리와 춤을 추며 찬양하며..." "소리내어 기뻐하며 ... " 그리고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예배하라..." 믿는 자들이 성령이 충만해지면 예배와 찬양을 통하여 기쁨이 나타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결과입니다. 저희 뉴-라이프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계신 중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이면서 활력적인 관계를 맺도록 이끄는데 주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들의 삶에 생동력을 심어주고 기쁨을 가져다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 성경을 알게하려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새생명을 찾기위한 열쇠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2. 교회예배와 모임시간 주일 오전 8:00 - 9:30 (제 1부예배) (탁아 없음) 찬야, 예배와 성경공부 오전 10:00 - 정오 (제2부 대예배) 찬야, 예배와 어린이 교회 오후 6:00 - 8:30 (주일 저녁예배) 찬양, 예배와 성경공부 어린이 - 왕국 특공대와 작은 선교사들의 모임 수요일 오후 7:00 - 9:-00 T. A. G. 모임 중.고등부 학생들 주중에 점조직제들을 각 정하여진 시간에 성도들의 가정에서 만남, 점조직체 사역에 대하여 관심있으신 분들은 현관에 위치한 점 조직 인포메이션 센터에 오셔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뉴-라이프 교회의 입적인원은 지난해 출석인원들의 헌금기록을 토대로 합니다. 현 입적인원은 약 6.000여 명 입니다. 3. 교회 철학과 구조 여부 - 철학 뉴-라이프 교회의 철학은 성서에서 발견되는 바 신약시대의 교회 모습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합하여지며,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추구합니다. 예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교인들은 그의 명령에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고치거나 아니면 원상복귀하는 일을 책임 갖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들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번에 자기 자신을 오순절에 성령의 모양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부으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면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듭난다 함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물려받아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새로 거듭날 때 모든 것이 새로워 집니다. 하나님께서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며 우리를 안에서부터 밖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새로운 기쁨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게되며 새로운 용서를 우리의 마음에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과 놀라움 그리고 두려움으로 서게 되며 교회의 성결을 지키기에 대단하 관심을 갖게 됩니다. 믿는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과 그 가치관으로부터 관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분별되며 거룩하기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며 선교를 통하여 이 도시와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성서적인 믿는 모임 단체들을 세우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중요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10월에는 저희 교회가 10/40 창문 계획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천여만명이 창문을 통하여 함께 기도에 동참하는 계획입니다. 개교회적으로 기도대원들을 동시에 조직하며 10/40 창문 계획의 각처에 있는 많은 비중의 아직 예수가 전해지지 않은 사람들이 직사각형의 10/40 창문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혁띠같이 서아프리카에서부터 아시아까지 이르는 위도 10도에서 위도 40도를 말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95%의 사람들이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했으며, 84%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대부분의 모슬람, 힌두종교인들과 불교인들이 있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 교회구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만 "교회"에 대하여 잘못 오해하고 환멸을 느끼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중에 너무 복잡한 구조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또한 그의 말씀안에서 성장할 수 있기 기회를 줄 수 있는 교회라면 사람들의 관심을 사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실성과 성결성과 교회의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 까다로운 구조나, 수많은 위원회라든지 입교인들에 대한 요구사항이라든가 약정 카드 등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매주 얼마나 비치기로 작정했는지 등의 기록들을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와 헌금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예배의 일부이며 그것은 각 개인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현인 것입니다. 저희 교회 행정은 교회 일부의 이사위원 5명(근교 목사님)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 교회 목회자들이 책임 변명을 해야하는 그룹입니다. 그 외에도 24명의 장로들이 있어, 온 교우들을 섬기며, 건축위원회는 건물과 생건축을 책임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매주 작은 소그룹(점 조직)으로 각 가정에서 만납니다. 이 점 조직은 서로를 알게되며 서로의 구체적인 필요를 나누어 기도와 상담과 심방과 여러 가지 다른 도움으 로 서로를 도와 받혀줄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줍니다. 이 점 조직 그룹안에서는 매주 교회에서 가르치는 영적인 원리들을 논하며 영적 은사들에 사용과 용도 등에 대해 더욱 배우며 우리의 주위 이웃과 우리의 도시의 전도 기회들을 토론하게 되는 것입니다. 4. Ted 목사에 대하여 Ted 목사는 Oral Robert 대학교 1학년때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으로 사역에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께 확인을 요구한 Ted목사는 그 몇일안에 편지와 전화 등을 받음으로 그의 부르심을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78년 졸업 후 그는 주로 철의장막과 제3세계 사회주의적인 나라들을 대상으로 배후에 선교하는 World Mission for Jesus (예수전도단)이라는 곳에서 일하였다. 계속 승진한 끝에 부사장이 되었지만 목회에 대한 사명이 더욱더 그의 가슴에 간절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후 Bethany World Prayer Center (베다니 세계 기도센터)로 접근한 후 청소년 담임목사로 일하며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가르쳐 그들로 세계 정세와 사건들이 교회 정세에 어떠한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아울러 Bethany Family Counseoing Center (베다니 가정 상담 센터)를 증설하는데 큰 도움을 가져다 주었다. 주님께서 Ted 목사와 그의 아내 Grace를 Colorado Springs로 지난 1984년 부르심으로 확신을 얻어 Bethany World Prayer Center의 전적인 후원하에 Ted 목사는 뉴-라이프 교회(New Life Church)를 창설하게 된다. 첫 예배를 자기 지하실에서 25명으로 시작하여 지난 10여년간 6,000여명의 교인수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는 자기의 어린시절 "보수적인"교회에서 자라며 경험하였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성실하기를 사랑하는 그러한 예수의 몸이 되는 교회를 창조하기로 이끌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뉴-라이프 교회가 되었다. 그 후 Ted목사는 여러 원근교회 목회자들로부터 그들의 교회를 새롭게 재조직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받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성장과 전도 세계에서는 Ted목사의 영향이 Bill Moyers 등 Media 곧 U.S. Newst World Report, Los Angeles Times, New York Times Chicago Tribune, Washingtio Post, Denver Post, Charisma Magazine 등 ABD와 NBD국내 방송국 등 BBC와 Intemational News Network 들에게서 인정을 받은 바가 있다. 현재 그는 국제 정통교계위원으로 Colorado 정통 교계위원으로, 지구 추수사역위원으로, 모든 가정 그리스도화 단체와 기독인과 유대인의 대화 등의 단체에서 섬기고 있으며, 몇몇 책을 근래에 저서하였다. 그의 저서 한 책은 Primary Purpose (제일 첫째 목적)을 Creation House에서 인쇄하였으며 Discoverling Ancient Wisdom (구 세계의 지혜 발견하기)를 New Intmational Bible Society 를 위해 편집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 성경공부지들을 저서했으며, 가르침의 지침을 테입으로도 만들어 내었다. 그와 그의 아내 Grace에게는 다섯 자녀가 있다. Focus on the family 창시자 및 총재 : 제임스 답슨 박사 (Founder & President: Dr. James Dobson, Ph.D.) 본부: Focus on the Family, Colorado Springs, CO.80995 1. 사역소개 Focus on the Family 란 사역은 미국의 점차 악화되는 심각한 가정문제에 대한 제임스 답슨 박사의 개인적인 도전으로 1977년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U.S.C.(남가주 대학)의과 대학원에서 14년 동안 교수로 일하면서, 미국의 가정들이 내적과 외적의 여러 가지 압력과 악영향으로 여지없이 파괴되는 광경을 안타깝게 보면서, 여기에 교회나 그리스도인 단체들이 어떠한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도움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 사역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사역철학을 가지고 이 사역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활발하게 계속되고 있다. "Focus on the Family 사역의 근본적인 목적은 성령님과 협력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회개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또한 특별한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가정제도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이 목적을 이루는데 있다." 사역초기 캘리포니아 주 알케디아 시에 있는 사무실방 2개를 빌려 제임스 답슨 박사 홀로 약 40-50개 밖에 안되는 방송국들을 통하여 25분 짜리 Radio 방송으로 시작된 이 사역은, 오늘날 1,300명이 넘는 직원들과 50개의 사역부서 약 4,000개의 방송국을 소유하는 세계적인 단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2. Focus on the Family의 사역들 A. Radio 프로그램 "Focus on the Family": 이 모든 사역의 대명사이며 이 모든 것들을 시작한 라이오 방송 사역으로 매일 30분 동안 가정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결혼, 자녀교육, 건강, 영적과 정신적인 성장 등등)일주일에 18,000회씩 4,000개의 방송국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방송되고 있다. 이 외에도 "Weekend", "James Dobson Family Commentary", "Focus on the Family Commentary", "Armed Forces Radio & Television Services Broadcast", "Family News in Focus:, "Adventures in Odyssey"등 가정에 관한 issue를 중심으로 방송한다. B. 정기 간행물 / 잡지 (Periodicals) "Focus on the Family": 월간으로 발행되어 현재 약 2천만 가정들에게 무료로 운송되고 있다. 그 외에도 혼자사는 부모들을 위해 "SingleParent Family"와 아이들을 위한 "Clubhouse Jr." 그리고 "Citizen", "brio", "Breakaway", "Teachers in Focus:, "Parental Guidancd", "Physician" 등의 정기간행물들을 발간한다. C. 필름과 비디오 Focus on the Family에서 제작한 여러 가지 영화와 비디오 및 T.V. Progran들이 있다. 여기서 몇 가지만 소개하면 "Adventure in Odyssey", "Children at Risk", "Focuw on the Family", "Last Chance Detective", "MaGee & Me", "Turn Your Heart Toward Home!등이 있다. D. 책 제임스 답슨 박사가 직접 쓴 여러 책들 (13권의 Best Sellers)외에도 미국에서 유명한 기독교작가, 심리학자, 목사들이 쓴 많은 책들도, 역시 죽어가는 미국가정을 살리는데 목적을 가지고 Focus on the Family 출판사에서 직접 출판하고 있다. E. 기타 사역 위엣 것 외에도 아이들을 위한 여름캠프사역, 지역 선교 프로그램 사역들, 상담사역(카운슬링), 목회자들을 돕고 협력하는 여러 사역들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3. James Dobson 박사 James Clayton Dobson Jr. 박사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부친은 나사렛교회의 목사, 모친 가족은 3대째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하면서, 특히 진실한 부모님의 기독교인의 삶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는 진학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가정을 위한 사역에 대한 소명이 끓고 있었다. 그리하여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남가주 대학)에서 아동심리학과 교육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그 후 모교인 U.S.C. 의과 대학원에서 14년 긴 세월의 소아과 교수로 지내오며, 오랫동안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현실, 즉 미국의 무너져가는 성경적인 가치관과 가정의 기초에 대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낄수가 있었다. 오랫동안의 기도와 준비 끝에 Dobson박사는 마침내 학교를 사임하고 Focus on the Family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쓴 "Dare to Discipline"이란 책은 미국에서만 이백만권이 넘게 팔렸고 "Love Must Be Tough"외에 12권의 Best Seller들이 있다. 그의 사역의 열매로 1982년에는 미국 복음주의 협회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에서 선정한 "그 해의 평신도 (Layman of the Year)상 외에도 기독교 단체와 비기독교 단체에서 많은 상들과 칭송을 받아왔다. 1980년 Jimmy Carter대통령 시기부터 George Bush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여러 중요한 국가 연구위원회(National Commission)의 고문으로 섬겨 왔으며 현 미국의 심각한 가정문제에 대하여 대통령에게 Adviser격으로 보조하여 왔다. 4. 사역의 특징 Focus on the Family는 결코 지역교회도 전형적인 선교기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에서 어두워져가는 도덕과 사라져가는 청교도들의 성경적 가치관과 윤리관, 그리고 너무나도 비참하게 무너져 가는 가정(예컨데, 2 가정중 1가정은 반드시 이혼하는 미국의 현재 통계)을 위하여 그 어떤 교회나 선교단체보다 더 미국의 가정과 사회의 교회에 그리스도의 충격을 (impact)을 주고 있는 단체이며 특히 사역 기관이다.'' 특히 지역교회에서나 선교기관에서 다루기가 거북한 문제들을 (가정의 정의, 결혼과 부부의 문제, 이혼과 이혼자들의 문제, 재결혼, 유산문제-특히 Focus on the Family는 Pro Life/Abortion 즉, 인공유산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으로 유명하다 - 안락사 (Euthanasia)문제, 동성연애 문제 등등) 성경적인 입장에서 담대하게 가르치며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Focus on the Family의 모든 사역을 조정 (govem)하는 그들이 5가지 official한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삶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영화롭게 하며, 또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을 얻는 것이라 믿는다. 이 목적은 바로 우리 가정으로부터 시작하며, 아직도 그의 사랑과 희생을 알지 못하는 방황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적용된다. 2) 우리는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내신 제도로 영원하며(Permanent)남자와 여자의 평생관계이며, 어떠한 역경이나, 병마나,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정신적인 어려움도 끊을 수 없다고 믿는다. 3)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이요, 그 분의 손의 축복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녀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인류을 위한 하나님을 사명을 위해 어떻게 양육하고 준비시키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앞에 책임이 있다. 4) 우리는 모든 인간의 생명(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모태안의 생명, 노약자, 정신박약자, 정신질 환자, 추남추녀, 신체장애/불구자, 또한 어떠한 상태의 생명)의 존엄성과 무한한 가치를 믿는다. 5)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세가지 기본적인 제도를 친히 제정하셨다고 믿는 다. - 가정, 교회, 국가 가정은 인류의 번성을 위해 2세들을 사랑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안전하고 안정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각 가정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을 나누며 또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을 전파하며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문화적인 균형을 유지하며 사회질서의 뼈대를 마련하기 위해 존재한다. Focus on the Family는 이 원리를 모든 사역에 적용하며, 이 원리들이 모든 사역의 영역에 명백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고 있다. 빌리그레함 박물관 시작 초기부터, 미국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또한 그렇게 살려고 애썼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져 왔다. 오늘날 빌리 그레함 센터 박물관은 이러한 풍부한 영적인 유산들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준다. 진귀한 예술품들, 역사적 발자취, 그리고 눈에 띄게 훌륭한 전시들을 통해, 방문객들은 미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과 복음주의의 영향들을 생생히 경험한다. 미국의 복음주의 (Evangelism in America) 초기 개척자들의 시대때부터, 복음주의는 미국의 삶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과거시대로 되돌아가 보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던 헌신적이며 담대한 복음전도자들, 설교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을 만날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공헌했던 사람들, 즉 죠지 윗필드, 서져너 트룻, 챨스 피니, 프란시스 아스베리, D.L.무디, 이벤젤린 부스, 빌리선데이, 그리고 다른 많은 그리스도를 위해 담대히 헌신했던 사람들을 주목해 보자. 이 전시관은 또 한 과거의 영적 대각성 운동과 그것이 나라의 역사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대기적 기록들을 보여준다. 진리의 복된 소식(The Good News of the Gospel) 어두운 방, 성경 텍스트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 놓여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대예술가 프레드릭 하트의 드라마틱한 감동을 주는 조각품인 "The Cross of the Millennium"(천년의 십자가)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생생히 자세하게 들려준다. 여러분이 그 주변을 돌 때 , 어떻게 그것이 그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하심을 나타내 주는지를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고 보라. 빌리 그레함 스토리 가족 사진들과 개인적인 소장품들은 빌리 그레함의 전승을 상세히 이야기해 준다. 그의 삶의 이정표들(10대 청소년 시절에 일어났던 그의 중생에서부터 그의 첫 번째 설교를 시도하기까지)은 후에 있을 세계전도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하시는 손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의 신앙의 확신을 형성했던, 그리고 그를 국제적인 관심속으로 이끌었던 전환점들을 주목하여 보자. 만약 여러분이 박물관에 있는 빌리 그레함의 전도여행 설교단에 서 있다면 여러분은 그의 성경책과 그의 설교노트를 검토해 볼 수 있고, 또한 3개의 특별 스크린 상영들을 통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전도집회가 운영되며, 그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 여러분은 빌리 그레함과 그의 연합조직이 전세계에 선포했던 메시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새 삶과 희망의 메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임무 (The Unfinished Task) 우리는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적으로 궁핍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여섯 개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상영하는 비디오 자료들을 통해, 여러분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궁핍한가를 알게되고, 땅끝까지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변화를 받게될 것이다. 진리를 통한 발걸음 (Walk Through the Gospel) 환경이나 장소에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는 지리적인, 문화적인 장벽을 뛰어넘어 전달된다. 여러분은 빌리 그레함이 전하는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듣기위해 마지막 상영관에 초대된다. 그런다음, 여러분은 예수의 죽으심,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의 생생한 장면을 보게될 것이다. 단순하지만 그러나 심오한 진리들이 단계적으로 여러분 앞에 펼쳐진다. 박물관 채플룸은 미국과 전세계에 아직 남아있는 임무의 빛 아래서 조용히 반성하고, 기도하며, 그리고 개인적으로 헌신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여러분의 방문은 그것이 시작됐던 장소인 리셉션 지역(한시적으로 전시하는 박물관 시리즈 중에 하나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끝난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영적진리를 신선한 표현으로 묘사한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이나, 혹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전시해 놓은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빌리 그레함 센터 박물관은 미국에서 일어났던 복음주의의 성장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초대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미국 복음전도자들을 통해, 진리에 대한 능력있는 사역들을 보여 주며 박물관에서는 이 땅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전체적으로 보여준다. 무디교회 (MOODY CHURCH) 무디교회의 각 사역내용과 프로그램들 당신이 만약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면, 아마도 LaSalle Boulevard와 Clark 거리 사이에 위치한 큰 벽돌건물인 무디교회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건물은 1925년도에 지어진 건물이며, 대부분의 시카고 거주자들은 때때로 이 교회를 자동차로 혹은 걸어서 지나친다. 이 지면을 통해서 무디교회와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흔히 접하는 질문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겠다. "무디(Moody)라는 이름은 어디서 따온 것인가? 그리고 무디교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무디성경학교의 한 파트에 속하는가? 교회의 이름은 19세기 후반에 시카고에서 살았던 유명한 복음주의자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미국과 영국에 있는 많은 청중들에게 설교했던 그 당시의 빌리 그레함이었다. 무디 (D. L. Moody)는 그의 주일학교에 어린이들을 초청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디가 죽은 후에 그를 예우하는 뜻으로 무디라는 이름을 교회의 이름으로 정하게 되었다. 무디교회와 무디성경학교 둘 다 복음전도자 무디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비록 우리는 자매학교이긴 하지만, 유기적으로 관련되어있진 않다. 우리의 친밀한 우정의 목적은 두 학교 서로의 발전에 있다. 무디 교회는 비록 약 20%의 교회회원들이 카톨릭 교회에서 자랐지만, 개신교측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그 나머지 회원들은 여러 개신교 그룹들, 유대교 배경을 가진 몇몇 회원들 , 혹은 종교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디교회는 또한 어떤 특정교단에 가입하지 않는 독립된 교회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개혁측 사람들, 즉 성경을 그들의 영적인 권위로 믿는 사람들과 함께 기독교의 일반적인 전통들을 나눈다. 이러한 확신 즉,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우리를 과거나 현재나 다른 많은 교회들과 하나가되게 만들어 준다. 무디교회가 그 지역 커뮤니티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혹은 다른 말로, 그 지역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고 있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 지역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랄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데 헌신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여러 이유들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즉,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사람들, 교도소에서 일하거나 혹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사람들) 과 우리의 도움을 함께 함으로써 그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다. 적어도 10개 정도의 그런일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하는 자원 봉사자들을 보낸다. 또한 매달 한 번씩 Moody Business Network과 Women in the Working World에 점심식사로 후원하고 있다. 1970년 이후 계속해서 3세부터 5세이하의 자녀들을 가진 가정을 위한 Childern's Leming Center를 운영해 오고 있다. 매주일 아침에 모이는 모임에서는 성인성경공부모임 뿐만 아니라 도시와 주변 외곡지역에서도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을 갖고 있다. 내주 게시판에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많은 기회들 (즉, 가르치는 것, 리더쉽 기술을 개발하는 것, 음악을 만드는 것, 혹은 다른 모든 중요한 분야인 것이든지간에)로 가득차있다. 주일아침 예배에 참석한다면, 어떠한 것을 그 예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은 것은? 찬양 예배는 약 1시간 15분 정도로 진행하고 있다. 예배의 구성은 우리의 삶 속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복음적인 메시지 뿐만이아니라, 찬양과 성경봉독 그리고 성가대의 합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과 또 실제적인 그분과의 영원한 삶 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The Moody Church Covenant (무디교회 서약) 우리 무디교회 회원은 하나님 말씀인 모임에 다같이 참여한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할 것이며, 서로 기도하고 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다함께 사역한다. 우리는 모든 사악한 것들 분노, 성냄, 그리고 사악한 말들을 우리로부터 제거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하여,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죽이심 처럼, 서로를 용서한다. 우리는 경배와 예배를 위해 모이는 우리자신들의 모임을 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며 그리고 우리에 대하여 영적인 규율을 가진 자들을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람에 대해 선한 청지기 직분을 감당한다. 우리는 말과 행동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노력한다.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며, 특별히 믿음의 가정에 더욱 그렇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인 복음을 전세계에 충만하게 전파되도록 노력한다. Corporate Worship(전체예배) - 주일찬양예배 - 주일찬양예배는 오전 10:30과 오후 6:00시에 각각 시작한다. 두 예배 모두 스페샬 음악, 회중찬양, 기도, 그리고 가르침으로 진행된다. - 성인 성경공부모임 - 이 모임은 성경공부와 여러 가지 관계-발전적인 활동 들을 통해 남녀간의 관계를 강화한다. 또한 거기에는 결혼한 부부들, 미혼자들, 노인들 그리고 전체 가족들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 있다. - 수요저녁모임 - 전체기도후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인들을 위해 마련되는 성경공부 시간이다. - 수요저녁친교 - 수요저녁모임 이전에 진행된다. 모두가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다. - Connections - 이 소규모그룹 사역은 성경공부, 제자훈련, 그리고 기도를 위해 모인 다양한 그룹들을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그룹들은 여러형태로 이루어지며, 참석자들의 특별 필요사항들을 발표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 3인조 기도(Triple Cords)- 3명이 한 그룹이 되어서 정기적으로 만나서 기도하는 모임이다. - Vine and Branches (포도나무와 가지들) - 사람들의 삶속에서 소그룹이 끼치는 영향이 어떠한지를 서로 나누는 연 4회 발간되는 회보지. - 장로들의 기도모임 - 교회의 장로들에 의해 인도되는 이 모임은 매주 주일예배 전에 시작한다. - 금식기도의 날 - 이 프로그램은 일년에 두차례 실시하고 교회의 가난한 자들과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자들을 위해 다같이 모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시간이다. - 아침기도 - 토요일 아침에 약 25분동안 진행되며 주로 기도와 말씀을 나누는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Youth Ministries (청소년 사역들) 중학생 Culb Time and 고등학생 Culb Time - 복음주의와 영적인 성장을 강조하는 재미있고, 활동적으로 짜여진 프로그램. Junior High Culb Time은 수요일 밤에 있고, Senior High Culb Time은 주일밤에 있다. 중등부와 고등부 주일학교-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주로 찬양, 말씀공부, 그리고 여러 놀이 등이 주일 아침에 이루어진다. 캠프 Ministry - 캠프 Moyoca - 안디록 일리노이주 근처 Loon 호수에 위치한 캠프 Moyoca는 우리교회 가족 회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성장과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캠프는 여름기간 동안 어린이들과 중.고등부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 교회 피크닉 - 교회 전체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 즐거움 그리고 친교가 있는 시간이다. 캠프 Moyoca에서 매년 여름마다 개최한다. 추수의 날- 하나님의 선하심과 섭리 가운데 교회 -확장 일을 정하여 축하하는 날이다. Childern's Ministries (어린이를 위한 사역) - 어린이 주일학교 - 찬양과 하나님의 말씀과 재미있는 활동 등을 통해 신앙심을 키우는 주일 학교. - Caraway Street -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서미 스트릿"과 같은 행태의 프로그램으로써 주일 아침에 1학년부터 4학년까지를 대상으로 가면극, 또는 음악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시간이다. - ChurchTime - 2학년에서 5학년까지를 대상으로 디자인된 이 프로그램은 주일아침 예배시간에 이루어진다. 이 프로그램은 성경과목과 찬양, 구연동화, 비디오상영 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Nursery (탁아소) - 주일아침에 간난 아이들을 잘 돌봐준다. - Pionner Clubs - 학교 기간동안에 6살부터 12살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매주 수요일 밤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러 게임과 성경암송, 찬양, 그리고 각종 훈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Childern's Christmas Pageant - 음악과 드라마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 - Childern's Learning - 이 프로그램은 어린이들에게 경험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또 영적인 가치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안전하고 교육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Outreach Ministries (전도사역들) 무디교회는 크리스챤들에게 지역사회 활동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다. - Branch Ministries - "이 사역은 무디교회 사람들에게 그들의 시간과 재능을 헌신할 수 있도록 하며, 우리 도시의 특별히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체계화해서 준비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 Evangelism Explosion (복음전도 폭발)- 참석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나누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깊이있는 훈련과 전도에 필요한 훈련 등을 제공한다. - Light of lsreal Fellowship - 한달에 두 번정도 정기적으로 모여서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써의 예수를 찬양하는 시간이다. - Passover Seder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유대교의 뿌리를 나타내기 위한 전통적인 유대교 식사를 하게된다. - Moody Business Network - 한달에 한 번 점심식사를 베풀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시카고 상업지구에 심는 일을 한다. 주중에 한 번 성경 공부시간을 갖고 1년에 한 번 저녁식사연회를 갖는다. - Moody Business Nwtwork Sunday Seminer - 일반상업지구와 교회사이에 벌어진 틈을 이어주는데 도움을 주는 성인성경공부모임이 주일 아침에 있다. - Moody In the Park -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나누는 목적에서 지역사회 주민들과 무디교회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매년 여름마다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축제행사이다. 드라마, 음악 그리고 다른 특별순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 INTRD - Sinlge Focus에서 후원하는 이 프로그램은 3개월에 한 번씩 갖게 되는데 주로 지역주민 사람들에게 무디교회의 신앙과 사역들을 소개하는 시간이다. - Prison Ministry - 주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나 대회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들을 제공한다. - Vacation Bible School - 어린이들을 위한 재미있고 유익한 캠프 프로그램으로 매년 여름 일주일 동안 교회에서 있게 된다. - 수요저녁예배 at Pacific Garden Mission - 무디교회에 있는 각 개인들이 시카고 도시에 있는 무숙자 주거지인 퍼시픽 가든 미션에서 한달에 한 번 인도하는 예배이다. Music Minstry - Sanctuary Choir - 주일 찬양예배 시간에 새로운 스페샬 음악과 콘서트를 갖는다. 때때로 오케스트라 반주와 독창 발표회도 갖는다. - Orchestra Ensemble - 어떤 특정 주일예배 시간에 자원해서 오케스트라 반주를 제공해 주는 음악가들이다. - Handbell Choir - 1년에 몇차례 교회 예배 때 노래한다. 주로 1학년부터 6학년 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 Worship Band - 어느 특별한 주일 밤 예배나 그 밖에 다른 특별한 행사시에 공연한다. 이 시간에는 좀더 다양한 현대적인 스타일의 찬양을 드리게 된다. Radio Minstry 무디교회에서 만들어지는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미 전역에 그 이상 지역에 400개 이상의 라디오 스테이션을 통해 전파를 탄다. 라디오 프로그램들 - 매일 우리의 삶 속에 영감을 주는 15분 메시지 프로그램인 'Running to Win'과 주중에 한 번 나가는 프로그램인 'The Moody Church Hour'와 'Songs in the Night'이 있다. Wolley Hall Book Store - 주일 아침 예배 후에 무디교회 선임 목사의 책들과 설교 테잎들을 판매한다. 세계선교 (World Missions) 무디교회는 80개 이상의 선교지역을 자원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전하고 있다. World Missions Conferencd - 1년에 한 번 봄에 개최되는 이 행사는 사람들에게 세계선교와 선교사들의 활동 등을 배우는 기회를 준다. Fall Missions Celebration - 이 행사는 매년 가을에 있으며, 우리는 세계선교의 목적을 더욱 강조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Missionary Prayer Fellowship - 한달에 한 번 우리 선교사들의 특별히 필요한 사항들에 대하여 정보를 나누고 기도하기 위한 모임이다. Short - Trem Mission Trips(단기선교여행) - 이 프로그램은 다른 문화권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사역을 하기 원하는 자들을 위해 단기선교의 기회를 제공한다. World Missions Committee -선교사들과 계속적으로 접촉하고 그들의 활동과 필요사항들을 정기적으로 교회와 통신하는 활동이다. Women's Minstries Woman to Woman - 노인과 젊은 여자들이 1대1의 관계로 서로 만나서 서로간의 유대관계를 돈독히하는 프로그램이다. Deaconesses -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사역들을 운영하고 격려하며, 또한 직접 후원도 하는 모임이다. Discipleship Minstry - 수잔 헌트가 지은 'Spiritual Mothening'에 기초해서 진행되는 소그룹 모임이다. Nursery Committee - 이 그룹의 여성들은 주일아침에 있는 탁아소를 잘 운영하고 예배와 사회활동을 통해 엄마들과 그들의 아기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Mom's Night Out - 아이들이 없는 학기 동안에 엄마들을 초대해서 다 함께 모여서 사회활동에 참여케하는 것. Women in the Working World - 한달에 한 번 교회에서 제공하는 점심식사를 포함해서 여러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직장여성들을 후원하고 격려하는 시간. ABF Sisters in Christ - 모든 삶 속에서 여성들이 안고 있는 필요사항과 문제점들을 주일아침에 집중적으로 토론하는 성인성경공부 모임. Stepping Stones - 불임을 안고 있는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한 그룹. Family Focus - 이 모임은 자녀를 둔 결혼한 부부들을 위해 계획된 모임이다. Family Thgether -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성경을 배우는 가족 전체를 위한 주일학교. Father-Son-Banquet -매년 한 번 실시되는 이 행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꾸며진다. Mother-Daughter Tea - 일년에 한 번 어머니와 딸이 함께 보내게 되는 시간이다. New England Dinner -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저녁시간이다. 이 행사는 100년 이상 기간동안 계속돼오고 있다. Single Adults Ministries ABF College Class - 시카고의 많은 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 주일 아침에 모임을 갖는다. ABF Single Focus - 이 모임을 통해서 미혼자들에게 여러 도움과 도전과 기회(사회활동, 전도 프로그램)를 준다. Single Focus Retreats - 일년에 두차례 실시하며, 이 프로그램은 성경공부, 레크리에이션 그리고 친교 등으로 꾸며진다. Divorce Recovery Workshop - 이혼의 경험을 가진 남녀를 위해 여러 도움과 안내를 제공한다. Encouragement Ministries Barnabas Encouragers - 이 프로그램은 교회 몸 안에 있는 다른이들에 격려와 기도를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Prayer Parthers - 교회 가족으로부터 특별히 훈련을 받은 이들은 주일 아침 예배후에 여러 가지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가서 격려와 기도로써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Visitation -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이나 혹은 가정에 홀로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사역이다. 하나님의 뜻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1.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의지하고 있는 생명력입니다. 그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뜻에 따라서 이 세상은 지금의 모습대로 존재합니다. 세상은 그 지혜와 능력과 선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의 표현 또는 구현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움과 영광에 있어서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 세상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뜻이 날마다 세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즉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세세토록 사시은 이에게 돌릴 때에…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9-11). 2. 이것은 무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성을 가진 피조물의 경우에는 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피조물의 의지, 곧 자기의 존재 기반인 그분의 뜻을 알고 받아들이며 거기에 협력할 수 있는 강한 능력을 가진 의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행하시는 바로 그 일을 자신도 뜻하고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고의 영예요 행복으로 여깁니다.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의 죄와 비참은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등을 돌려 그 뜻 안에 거하기를 거부하고 그 뜻을 행하기를 거부했다는 데 있습니다. 3. 구속은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생 가운데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기 의지를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즉 자기 의지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기 의지 때문에 속죄를 행하셨고 우리를 위해 그것을 정복하셨으며 그리하여 죽음으로 가는 길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연합되고 헌신된 생명의 부활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4. 하나님의 구속 의지는 이제 그분의 창조 의지가 과거에 역사하셨고 그 일을 타락한 사람 가운데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모범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대한 열의와 기쁨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으며, 우리에게도 또한 그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영 안에서 그분의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며 그것을 지배하십니다. 즉 그분은 우리의 의지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소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모든 소원대로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분 자신은 모든 일을 당신 스스로의 뜻에 따라 행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앞에 즐거운 것을…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시며 또 이루십니다(히13:21). 이러한 것이 성령님에 의해 계시되어 마음 속에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비로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에 대해 통찰력을 가지게 되며, 그리하여 그 기도가 약속하는 삶에 대한 소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5.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의 관계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요구를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뜻에 비추어 그들의 믿음 또는 감정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만이 참된 축복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유일한 필요는 하나님께서 내게 뜻하신 것만을 행하는 것, 이렇게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살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그 뜻을 행하는 데 내 삶의 매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6. 오직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점점 더 목적을 성취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을 수 있는 담력을 가지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분과 친밀한 연합만이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시리라는 확신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확신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또한 우리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우리의 연약한 의지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고 그에 협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라는 유일한 일, 즉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그것이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의무가 되게 합시다. 그렇게 되면 믿음이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7. 그 뜻은 하나님 아버지와 살아 있는 연합이나 복된 성자의 현존과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에 의지할 때만 하나님의 뜻이 - 그 뜻의 아름다움, 일상 생활에서의 적용, 그리고 점차 풍부해지는 그 뜻의 계시에 있어서 - 참되게 알려집니다. 이러한 교훈은 지혜롭고 현명한 자들에게가 아니라 어린아이들, 즉 어린아이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기꺼이 기다리고 거기에 의존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길로 이끌 것입니다. 8.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다음과 같은 위대한 교훈을 거듭 배우는 터전입니다. 첫째, 내가 경배하는 하나님은 내가 그분의 뜻과 완전히 연합되기를 기대하신다. 둘째, 내 경배의 의미는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합니다”라는 뜻이다. 셋째, 내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수행하는 능력에 대한 지식을 찾고 계발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와 기도는 참되고 충만한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설교 사역 1. 말씀을 선포하라.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행하라고 명하신 일이다(딤전3:16;4:2) 2. 바울이 했던 것처럼 설교하라. 첫째, 하나님이 교훈하신 진리이고, 그 다음에는 계시된 진리에 입각한 실제적 호소이다. 우리의 실천적 호소는 항상 교리적 진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3. 인기가 있든 없든 성경 진리를 선포하라. 설교 내용에 대한 비판에 개의치 말라. 그것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비판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다. 4. 하나님으로부터 실수나 불성실에 대한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하라. 언제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과 설교를 하라. 5. 절대로 성경진리에서 이탈하지 말라. 그 진리를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라. 결코 평범한 상태에 안주하지 말라. 최대한 박력있는 설교자가 되라. 6. 당신의 신념, 당신의 주님, 당신 자신에게 충실한 자세를 유지하라. 결코 자신을 굽혀 타협하지 말라. 7. 영혼 구원과 설교 준비에 사역의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라. 8. 결정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라. 결단을 강력히 요구하라. 메시지 그 자체를 주님을 향한 강한 호소로 승화시켜라. 복음전도자 역할을 하라. 9. 아름다운 화법과 문법을 구사하도록 하라. 어휘 선택과 단어의 발음에 유의하라. 그것들은 당신이 메시지를 전할 때에 필수적인 방편들이다. 10. 가급적이면 언제나 쉽고 자세하게 풀어 설교하라. 11. 특별한 날들을 활용하라. 그 절기들을 계기로 어머니나 국가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 또는 죽은 자들이나 부활을 강조하도록 하라. 특별한 기념일들을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선포에 원용하면, 위대한 도약이 될 수 있다. 12. 설교자는 “가르치기를 잘해야”(딤전3:2)한다. 이것은 그의 소명 자격 중 한 가지이다. 설교를 통해 가르치라. 사람들은 주님의 방법으로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13. 설교할 때 꼭 맞는 예화를 사용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설교가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 예화는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이 쏟아져 내리는 천국의 창문이다. 그것은 대부분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나온다.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메시지 자료로 적합한 재미있는 예화의 일일선집을 얻게 될 것이다. 14. 그리스도 예수를 당신의 메시지 중심주제로 삼으라. 성령을 모시고 싶다면, 주 예수께 영광을 돌리라.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며 본분이기 때문이다(요16:13,14). 15.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 의복을 몸에 두르듯 겸손을 입도록 하라. 사람들에게 성경을 연구하도록 권면하고 반드시 교회의 공중 예배시 성경책을 가지고 오게 하라. 16. 성경을 들고 다니는 모습에서 그 책에 공적 존경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도록 하라.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소중히 다루도록 가르친다. 사람이 어린이들 앞에 서서 그의 성경책을 똘똘 말아 쥐거나 꺽어 젖히거나 바람 결에 우수수 흩날리게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해 마땅히 보여야 하는 아름다운 모습의 공손한 존중심에 역행하는 짓이다. 17. 설교는 언제나 고지되고 명시된 목적을 지향하게 해야 한다. 당신이 아무 목표도 설정하지 않았다면, 받드시 그것을 내세우라! 구속사 이해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의 연속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주권적 섭리가 면면이 흐르고 있거니와, 본 주제 강해를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경 전체를 조감하는 중요한 방법으로서의 ‘구속사’에 관하여 간략하게 고찰하기로 한다. 1. 구속사의 정의 신구약 성경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사가 아니라 창조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재창조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구속사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2. 구속의 정의 성경의 어원에서 살펴볼 때 ‘구속’(코페르)이란 돈을 주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 준다는 의미를 지닌다(민3:51;느5:8). 따라서 구속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에 대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지불하시고 율법의 저주와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시는 것을 말한다. 3. 구속의 범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를 포괄하며,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포함하는 전인 구속의 성격을 지닌다(롬8:19-23). 이는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죄에 대한 형벌과 저주가 인간의 육체와 온우주에도 미쳤기 때문이다(창3:16-19). 물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노아의 방주 속에만 구원이 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점이다(행4:12). 바로 여기에 구원과 구속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유일성이 있다. 4. 구속사와 언약 성경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언약서(testament)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언약’(브리트)은 구속사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모든 언약의 성취자요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는 그 모든 언약이 지향하고 있는 중심이다. 이렇게 언약의 관점에서 구속사를 바라볼 때에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 해석의 열쇠를 찾게 된다고 하겠다(요5:39).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함 시편을 시작하면서 다윗은 여호와의 율례를 기뻐하는 자는 복있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사실은 다윗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시편 119편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수없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과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14)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16)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24)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47)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70)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77)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92)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한 다윗의 ‘즐거워함’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사전에서는 즐거워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거나 기쁨의 근원이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에게는 큰 기쁨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 모두는 집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 혹은 부모님, 형제, 자매나 친한 친구에게서 온 것들인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할 텐데, 우리가 편지를 받으면 먼저 겉봉을 뜯어서 읽는다. 그리고나서 다시 읽는다. 다시 읽고 난 후에라도 편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넣는 법이 없다. 그 대신 잘 접어서 안전한 곳에 둔다. 왜 그렇게 하는가? 편지를 받아서 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이 편지로 인해 떠나온 집이나 편지를 보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다시 새롭게 되살아나게 된다. 나중에 우리는 그 편지를 다시 꺼내어보며 즐기곤 한다. 우리는 편지가 우리에게 더 많은 즐거움거리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편지를 보관했다가 또 다시 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말한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의 가장 큰 근원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도 끊임없이 말씀을 더 많이 읽고, 마음으로 말씀의 의미를 상고하여야겠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례는 성경의 첫 다섯 권이었다. 그는 그 책들을 즐거워했다. 그는 밤낮으로 그 책들을 묵상하여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통찰력들은 많은 다윗의 시편들, 그 중에서 시편 1편에서 그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시편의 입문격인 1편을 관찰해 보면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의 중요성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율례를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윗은 또한 묵상하는 사람을 늠름하고 튼튼한 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무가 자라는 것을 관찰하는 일은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니다. 나무의 성장은 매일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 갔다가 2년 후에 다시 돌아와 보면 나무가 놀랄만큼 자라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매일매일 그 나무의 성장을 감지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나무뿌리가 흙에서부터 영양소를 흡수함으로써 나무가 갑자기 커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숲에 있는 거대한 세코이아(역자주: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자라는 소나무과 상록 거목) 나무는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아무도 세코이아 나무가 1인치라도 자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거듭되면서 그 나무가 작은 씨에서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 또한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은 그러한 세코이아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10-20분의 성경 묵상으로 우리가 갑자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민감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루 10-20분이 계속 쌓이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삶에 큰 성장과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거목 세코이아 나무와 같이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의 성장은 매일,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해 나갈 때 생겨난다. 텍사스, 달라스에 있는 미니스 메이어 병원의 심리학자인 폴 메이어 박사는 묵상하는 사람들의 영적, 정서적 성장을 관찰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지적하기를, 계속적인 영적 성장이 확실히 나타나려면 평균 약 3년 정도의 꾸준한 묵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성경 묵상의 훈련에 따라오는 모든 가치는 개발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영적 성장의 유익들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확연히 드러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도 모른다. 눈에 드러나는 빠른 결과를 요구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다림은 위안이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진실이다. 다윗은 그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수년 동안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데 투자했고, 그 결과들이 그의 삶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시편 1편에서 다윗은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비유하고 있다. 단지 한 줄기의 시냇물이 아니라, 여러 줄기의 시냇물 줄기라고 말하고 있다. 많은 시냇물 줄기가 같이 흘러가면 저습지가 생겨나게 된다. 아마 당신은 플로리다에 있는 저습지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에 도착하면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푸르고, 우거지며, 생동감 있는 풀들일 것이다. 서 그래서(Saw grass)라고 불리는 야생난초들과 양치류들이 물기를 머금은 땅에 덮여 있다. 또한 다른 모든 것보다 키가 키고 우거진 사이프러스 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이 풀들은 저습지 환경에서 잘 자라는 것들이다. 충분한 물과 영양소의 공급으로 단단해지고 키가 크게 자란 것이다. 즉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는 시냇물 줄기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양분은 묵상하는 사람의 영적인 삶을 강건하고, 성숙하게 자라도록 해준다. 그리고 다윗은 계속해서 그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고 말한다. 바나나 나무는 풍성한 과실을 맺는다. 그렇다고 단지 “나는 바나나 나무다. 이제 바나나를 만들어 낼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바나나는 나무가 자라고 영양분이 공급될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것이다. 열매는 나무에서 일어나는 성장과 개발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그 결과로 때가 차면 바나나 나무는 과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에게도 영적 성장의 과정 중에 지속적인 성경 묵상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삶에 과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과실은 다윗의 삶에서와 같이 영적인 성품으로 나타난다. 그와 같은 열매가 다른 사람의 삶에 영양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무에서 다윗은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을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나뭇잎이 시드는 것은 나무가 땅으로부터 충분한 양의 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만약 나무가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마르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될 것이다.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있어 영적 생활에서 이러한 갈증을 경험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날마다 영양분을 얻어서 자신의 영적 생활이 활기차고 신선하게 유지되도록 하여야 한다. 요즈음 교회에서 영적 생활의 갈급한 시기를 지나는 것에 대해 자주 공개적으로 말하곤 한다. 우리를 가르치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러한 갈급한 시기를 지나도록 하시는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갈급한 시기들은 무관심과 무질서한 계획성 때문에 나타나기도 한다. 사과 나무를 심어서 그것이 자랐을 때 그 과실들을 먹는다고 한번 상상해 보자. 우리는 땅에 씨를 심는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뒷짐지고 앉아서 사과가 열리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잘못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 부족으로 나무를 소홀히 다루는 결과를 빚게 된다. 만일 우리가 비료와 물을 올바르게 주지 못한다면, 그 사과 나무는 크고 싱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사과 나무를 심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나무는 정성을 기울여 돌보아야만 한다. 정기적으로 비료를 주어야 하고, 해충이나 서리로부터 보호하여야 한다. 그러한 돌봄이 있을 때만이 사과 나무는 강하게 자라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달고 잘 익는 사과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적 성장을 원한다면 말씀 묵상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영양분이 된다. 영적인 삶에 알맞은 양육을 하지 못한다면 성장과 개발이 멈춰지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삶에 영적인 공백인 장기간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셈이 된다. 성경 묵상은 우리가 해야만 하는 어떤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두 가지 행위로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고 우리의 삶 속에 말씀의 능력이 풀어지도록 그분께 우리 자신을 허락해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편에서의 일이다. 나무와 같이 우리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속으로 끌어 넣고 흡수하면 하나님이 성장할 수 있게끔 도우실 것이다. 본질적으로 묵상은 쌍방의 관계 즉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새로운 사고방식 사람의존성을 가진 사람들은 수많은 비합리적인 생각에 둘러싸여 있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renewing the mind)이야말로 거짓 신념(또는 그릇된 신념, 원수의 거짓말)을 깨뜨리기 위해 반드시 실행되어야만 할 핵심적인 원리이다.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악취나는 쓸모 없는 생각’을 빛 가운데 드러내어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진리로 바꾸어야만 한다. 심리치료사들은 비합리적인 사고를 바꾸는 작업을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ur Therapy)라고 부른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뀌기 마련이다. 이것은 매우 대중적인 치료개념이다. ‘인지행동치료’는 과거와 현재를 다루지만, 특히 현재의 생각, 즉 ‘바로 지금’에 초점을 맞춘다. 인지행동치료는 죄악된 반응과 선택에 대한 회개, 용서,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불확실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알지만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감정이 그렇게 되는지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형태의 치료는 감정과 행동은 신념체계(belief system)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개념에 근거한다. 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지지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1)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사도 바울과 동시대의 사람이며 기독교로 개종한 헬라 철학자인 에피클레투스(Epicletus)는 “사람은 사건 때문에 방해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관점 때문에 방해받는다”라고 말했다. 다른 저명한 인물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존 밀턴(John Milton):“생각은 자신만의 공간이 있는데, 그것은 지옥속에서도 천국을 만들 수 있고 천국 속에서도 지옥을 만들 수 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좋고 나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햄릿).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당신을 화나게 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의 상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당신의 시각이 그렇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건에 대해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당신이 사람들이 가득한 방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당신은 ‘이 매력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은 궁금해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나는 여기 오지 않았어야 했어. 나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의 실제적인 생각과 상관 없이 당신이 내린 결론은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가지고 고개를 들게 할 수도 있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유발할 수도 있다. 빌립보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를 말한다. “무엇에든지 참되며(진실과 정직), 무엇에든지 긍정적인 자세(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하며, 덕이 있으며…)를 가지라”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참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훈계한다. 바울은 자신의 삶 속에서 부정적인 것을 확대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아래의 고백은 진실함과 낙관주의로 삶을 아름답게 산 모범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려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8,17-18) 예수님은 종종 상담(사람들과 만나실 때)에서 인지적, 행동적 접근을 하셨다. 그분은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수용되며,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현재의 상태에서 돌이킬 책임을 인정하고 올바른 행동을 선택해야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셨다(요5:6;막10:51). 그분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뀌도옥 도우셨다(눅5:22-25;12:22-27).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말씀하셨으며, 필요할 때는 직접적으로 도전하시고 대면하셨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서 진정한 변화, 즉 영구적인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들의 사고(생각)가 바뀌어져야 한다. 로렌스 크랩(Lawrence Crabb)박사는 매우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한다. 진정한 변화는 죄악된 행동유형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핵심적인 사고방식을 새롭게 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비록 성경 암송과 성경적인 진리의 묵상이 좋고 바람직한 것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변화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진정한 변화는 속사람의 변화를 뜻한다…새롭게 된 사고는 독립성을 유지하는 이미지와 신념이 의존성을 요구하는 이미지나 신념으로 이동될 때 가능하다…변화(성화)는 우리의 환경이나 과거, 현재를 바꾸는 것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의 사고를 새롭게 하는 데 달려 있다. 상처가 되는 과거의 기억을 치유하거나 현재 상활을 재정리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진정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강조하고 있는 핵심적인 성경 구절이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renewing of mind)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 구절의 교훈은 우리의 도덕적, 영적 비전과 사고를 하나님의 생각으로 재조정함으로써 변화가 일어난다고 피력한다. 생각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 설교, 세미나, 말씀 묵상, 또는 개인적으로 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가까운 친구의 충고, 그리스도인 상담자의 도움 등을 통해 새롭게 될 수 있다. 생각은 하나님과 사단의 가장 큰 전쟁터이다. 문제는, (우리가)누가 그 전투에서 이기도록 허락하느냐 하는 것이다. 생각의 전투는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 수반된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접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고후10:4,5) 우리 모두는 엄청난 분량의 자기 대화(self-talk)에 빠져 있다. 자기 대화는 현재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생각 속에서 홀로 자신과 대화(독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합적인 대화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생각 속에서는 여러 가지 대화가 오고간다. 자기 대화는 우리의 핵심신념(core beliefs)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자기 대화는 너무나 빨리 진행되어서 우리가 미처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심지어 전혀 의식하지 못하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깊이 자기 대화에 빠져 있는지 모르고 있다. 자기 대화는 감정과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한 감정과 행동은 성경적일 수도 있고 비성경적일 수도 있으며, 합리적일 수도 있고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생각 속에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두 가지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인정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내면 깊은 곳의 테이프는 이전의 테이프 소리를 지워 버릴 정도로 큰 소리로 돌아가면서 ‘나는 정말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라고 말할 것이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테이프가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테이프를 압도하도록 크게 틀어놓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신념, 사실, 관점이 실은 너무나 많은 비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만 했다면,” “…이라면,” “해야 한다”와 같은 표현, 과장과 축소, 긍정적인 면의 평가절하, 전부 아니며 전무(all or nothing) 사고방식, 지나친 일반화, 개인화(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해서까지 비난을 받아들이는 것), 완벽주의, 성취주의, 탁월함에의 집착 등이 그것이다. 용기있는 설교의 전통 오늘날 진실하게 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독교 설교자는, 구약시대부터 시작하는 선구자들의 긴 전통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인출해 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했으며, 반대와 그 결과로써 생기는 고독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가르쳤던 처음 선지자를 모세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히브리 예언의 뚜렷한 전통은 군주시대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결국 엘리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사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으며 ‘나, 단지 나 혼자만이 남았다’라고 불평했을 때 그의 셈법은 극히 잘못된 것이었다. 남은 신실한 자들은 그가 상정한 것보다 훨씬 많아서, ‘바알에 무릎꿇지 아니한 자’가 실제로 7,000명에 달했기 때문이다(왕하19:9-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진리와 사회 정의라는 이중 원인 속에서 전체 국가기관을 반대했던 그의 용기 앞에 우리는 존경을 금할 길이 없다. 그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대결하자고 도전했으며,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탈취한 왕과 왕비를 정죄했다. 두 경우 모두 그 혼자서 항거했다. 그것은 선지서의 통상적 특징이 된 선지자의 왕, 하나님의 말씀과 왕의 권위와의 대결에 관한 훌륭한 전례였다.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와의 간통과 그녀의 남편을 살인한 죄에 대해 감히 다윗왕을 비난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죄악에 항거하여 벧엘에 있는 왕의 성소에서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으며, 그의 입을 막으려 하였던 궁중 제사장 아마샤에게 끔찍한 운명을 예언하였다(암7:10-17). 예레미야 선지자는 또 하나의 외로운 목소리였다. 그의 선지자적 사역의 초기부터 하나님께서는 국가가 쇠망하리라는 그의 메시지가 반대와 두려움에 직면할 것을 경고하시면서, 그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들은 그와 대항하여 싸웠으나 그를 이기지 못하였다(렘1:17-19). 예레미야의 자기 연민이나 절망 혹은 사적인 복수의 열망에 관하여는 묵과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가 외로움 속에서 용감하게 참아내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진심으로 우러난 회개만이 국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참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바벨론 국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미워하여 그 원수들에게 버렸다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적 증거는, 여론에 의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도, 육체의 정욕에 빠져 있는 부드러운 옷의 정신(廷臣)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였던 진실한 선지자이며, 실로 그 때까지 산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예수께서 평하신 세례 요한 즉,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소리’에 와서 절정에 달하였다(마11:7-11). 그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고 또한 왕의 간음을 고발하였을 때, 그는 종교적, 사회적 방면이라는 사역의 동일한 두 요소에 의해 재현된 새 엘리야였다. 물론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야를 죽이고 또한 그의 사도들을 대적했을 지라도,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이 대적하고 죽인 순교 선지자(martyr-prophets)의 긴 대열 가운데 마지막 인물이었다. 예수 자신 역시 두려움 없고 타협하지 않는 설교를 한 분으로 명성을 얻으셨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불과 얼마 전에, 바리새인들은 대리자를 보내어 이렇게 말하게 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마22:16). 그렇다면 그의 갈릴리 사역의 인기가 단지 일 년 남짓 지속되었던 그 때 그에 대한 당국의 적대감이 그를 제거해 버리자고 결의할 만큼 증가했다는 것은 약간 놀라운 일이다. 또한 그 당시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제자가 그의 선생보다 크지 못하니 만약 선생이 핍박을 받으면 제자들 또한 그러하리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발생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첫째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체포되어 감금되었으며, 다음에 스데반과 야고보가 어떻게 순교했으며, 또한 다음으로 바울이 복음의 반대자들의 손에서 모든 종류의 경멸과 모욕을 어떻게 당하였는지를 묘사하였다. 이 박해는 초대 교회 신자들이 예수를 전하던 자유와 언론의 담대성 혹은 솔직함을 나타내는 파레시아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사역에서 다른 무엇보다 더 희구했던 특질이었다. 감옥에서 그는 그의 친구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담대히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다고 썼다(엡6:19,20). 그를 침묵하게 하기는커녕 그의 감옥 생활은 그에게 용기있는 증거를 위한 새로운 기회들을 제공해 주었다. 누가가 로마의 셋집에 감금된 그를 떠나 갈 때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를 방문하는 사람을 다 환영하여 ‘공공연하게’(문자적으로는 담대함으로써) 설교하고 가르쳤으며 ‘아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행28:30,31).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는 용기있는 증거와 그 결과로써 초래되는 고통의 이러한 전통은, 선지자와 사도에 의해 그리고 그들 모두의 주님에 의해 일관되고 간단없이 세워졌다. 그것은 교회사를 통해 계속되어 온 귀감을 형성했다. 우리에게 본받을 준비를 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으며 ‘인기있는 설교자’가 되려는 우리의 외고집적인 야심을 치료해 줄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자. 나는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웅변과 용기를 가지고 설교했고, 그 후 6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으소 활약하다가 황후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추방되었던 4세기 말엽의 크리소스톰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는 용감하게 그 도시의 악을 탄핵했고, ‘모든 계층과 신분 여하에 편벽됨이 없이 담대하게 그 죄악상을 비난했다’ 마태복음에 관한 그의 17번째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거기에서 그는 예수께서 헛된 맹세를 금지하신 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셨다(마5:33-37). 그는 회중들이 마땅히 심각하게 주님의 교훈을 받고 그것을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여러분이 고지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가 간음자나 음란자나 살인자들에게 하듯이 이후로는 이 신성한 문턱을 밟는 것과 영원한 신비에 참여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금지시킬 것이다.…나는 어떤 부자도, 유력자도 여기서 허풍떠는 것을 허락지 않으며, 눈썹을 치켜뜨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 이 모든 것은 내게는 쓸데없는 이야기요 어두움이요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나는 거의 천 년쯤 건너 뛰어 영국 개혁 운동의 선구자인 죤 위클리프로 가겠다. 그가 자신의 솔직한 비판들로써 단독적으로 기성 교회에 반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성직자의 세속성을 공격하여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다고 비판하였고, 교황권의 타락과 화체설의 오류 등에 반대하였다. 그는 몇 번이나 심판에 회부되었으나 그의 친구들이 그를 변호하였으므로 정죄를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그의 추종자들 즉, 롤라드(the Lollards)들은 고난을 당하였으며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와서야 개혁의 완전한 빛이 구라파에 비치게 되었다. 면죄부 판매에 대항하거나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거나, 어디에서건 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무작위로 그의 출판물들을 펼쳐보더라도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비타협적이고, 직선적인 견해를 표명한 예가 발견될 것이다. 산상수훈 주석에서 그는 ‘나는 설교자다. 나는 내 입에 이빨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물어뜯어야 하고 소금으로 짜게 하며 그들에게 진리를 말해야만 한다.’라고 표현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설교자로서 자기 의무를 다 하기를 원하고 그의 사명을 진실하게 수행하기 원하는 자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개의치 말고 두려움 없이 진리를 말할 자유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위대하건 보잘 것 없건, 부자이든지 가난하든지, 친구이든지 원수이든지 탄핵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탄핵해야만 한다. 탐욕은 높은 사람이나 자기의 친구들을 공격하게 되면 생계 유지가 곤란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행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탐욕은 그 호각을 호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침묵을 지킨다.… 그 어떤 설교자가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죤 낙스보다 더 용기 있었을까?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작고 연약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맹렬한 기질과 열정적인 화술을 가지고 있었다. 1559년 제네바의 포로생활로부터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그의 대담한 성경적 설교는 불란서의 카톨릭교로부터 벗어나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고자 열망하던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새로운 열정을 심어주었다. 영국의 외교관 란돌프(Randolph)는 엘리자베드(Elizabeth) 여왕에게 보내는 급송공문서에서 ‘한 사람의 단 한 시간 동안의 소리가 우리 귀에 계속적으로 불어 대는 500대의 트럼펫 소리보다 더 큰 활기를 주었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의 메리(Mary)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교황권의 세력(종교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을 부식시키고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려 했던, 스페인 필립왕의 아들인 돈 칼로스(Don Carlos)와의 결혼을 숙고하고 있었을 때, 낙스는 공개적으로 그것에 반대하여 설교하였다. 그러한 연합은 ‘이 왕국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추방하는 것’이라고 그는 외쳤다. 여왕은 심히 감정이 상하여 그를 불러오게 하여 항의했으며 울음을 터뜨리면서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낙스(Knox)는 여왕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여왕님, 설교 장소 밖에서는 나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왕님, 설교단에서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내게 솔직히 말하라 하신 그분께 순종해야만 하고, 지표면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어떤 인간에게라도 아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스는 1572년에 사망하여 에딘버러(Edinburgh)의 성 길레스(Giles) 성당 뒤에 있는 묘지에 장사되었다. 그 당시 섭정(the Regent)으로 있던 몰튼 백작(the Earl of Morton)은 그의 무덤에서 ‘여기에 결코 사람의 외모를 두려워 하지 않았던 사람이 잠들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 후 3세기 동안에도 설교자들은 용감한 증언을 계속해 왔고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하여 왔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복음에 대적했던 나치스(Nazi), 마르크스주의자(Marxist), 회교도(Moslem) 그리고 힌두교 치하에서 뿐만 아니라, 소위 서방 기독교(Christian West) 속에서도 또한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20세기에도 역시 더 큰 인기를 얻기 위해 메시지를 수정하는 일을 거부한 용기있는 설교자들이 존속해 오고 있다. 그 예로서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로, 결국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 한 사람만을 드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굴복하는 삶의 능력 “능력은 여호와께 속하였다.” 그러나 그 능력이 우리에게 부여되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란 여호와께 대한 무조건적인 굴복이다. 로마서 6:13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또 로마서 6:22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복과 능력의 위대한 비결이 이 말씀에 있다.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이것이 비결이다. “드린다”는 말의 의미는 어떤 사람의 재량권하에 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 자신은 하나님의 재량권하에 두라”는 말이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너희에게 행하시고 너희를 사용하시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은 자기에게 가능한 모든 복을 확보한 것이며 따라서 날마다 해마다 그 복이 계속 증가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가지고 계시는 것을 다 알기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 답은 간단하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라. “하나님 아버지, 지금부터는 저 자신의 의지가 없습니다. 모든 일에서 주의 뜻이 제 안에서, 저를 통해, 저를 이용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 자신을 남김없이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제게 행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무한한 사랑이시며 무한한 지혜이시며 무한한 능력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즉시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좋은 것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조만간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드린 그 사람의 마음이 빛과 기쁨으로 넘쳐 흐르게 하시며, 그의 삶을 능력으로 채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의 절대적인 굴복이 복과 능력의 비결이다. 절재적인 굴복이 가져다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굴복하면 우리 눈이 떠져 빛이신 그를 보게 된다. 2. 기도의 능력이 나타난다. 3. 넘치는 기쁨이 있다. 4.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5. 성령을 받는 위대한 비결이 된다. 은사는 말씀 아래 있다. 성령의 은사는 말씀 아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은사는 그 자체에 절대적 권위가 없고 교회의 건덕을 위한 도구로서 말씀에 매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말씀에 매여 있지 않는다면 그러한 은사들은 지나친 열정과 광신에 빠져 궤도를 이탈하고 말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라고 격려한 다음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19-22)고 경고하였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다. 그들은 서로 먼저 예언하고 서로 먼저 방언하려고 다투다가 교회를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자기의 은사를 과대평가한 나머지 교만에 빠져 사분오열되어 교회안에 많은 당파를 만들어버렸다. “나는 게바파요 나는 바울파요 나는 아볼로파요”라고 했으며, 이 모든 파가 싫어 어떤 사람은 나는 예수파, 무소속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은사를 말씀 아래 두도록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던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14:37). 첫째, 말씀에 순종할 때 은사는 과대망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은사의 가장 큰 위험은 과대망상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은사를 절대시한 나머지 남의 은사를 도외시하고 만다. 그리하여 자기의 카리스마로 남의 신앙을 심판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14말씀은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 말씀에 순종할 때 은사는 독선에서 벗어나 분파작용의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된다. 카리스마는 흔히 독선에 빠져 분파작용을 일으킨다. 특별히 고린도교회가 그러하였다. 카리스마는 교회 안에서 지위나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쉽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고전1:13)라고 하였다. 모든 지체는 나누어질 것이 아니라 한몸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 말씀에 순종할 때 은사는 개인주의에서 생기는 무질서와 혼란에서 벗어나게 된다. 은사는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하기 쉽다. 서로 자기의 것을 나타내려 하는 이기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고 하였다. 은사는 말씀을 따라 자기의 위치를 지킬 때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넷째, 말씀에 순종할 때 은사는 완성에 이르게 된다.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12:31)고 하였다. 그 큰 은사가 바로 아가페의 사랑이다. 아가페는 은사를 무기로 사용할 그 사람 자신을 무장시키는 정신이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무장한 사람은 은사를 그 목적에 알맞고 정당하게 쓸 수 있는 성숙한 영적 사람이 된다. 성령의 은사는 이러한 성숙한 영적 사람에 의하여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요하라, 물러나라 스스로 초래한 손실에 의해 무너진 세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영역'을 방어하고자 하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한다.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 당혹감을 가볍게 하려고 적어도 세 가지 일을 시고하고픈 생각을 갖게 된다. 첫째,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비난을 퍼뜨리고 싶어한다. 수치로 인한 고통으로 날카로와진 마음은 그 비극적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살피는 것과, 그들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알아내려 애쓰는 데 숙달되어 있다. 둘째, 무너진 세계 사람은 자신을 책망하고 비판하는 이들에 의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취급받는가에 대해 불평하려고 할 수도 있다. 셋째, 그는 다른 이들의 죄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의 잘못된 선택의 심각함을 감소시키기 쉽다. 이런 식이다. 나에 대해서 그렇게 처량해할 필요 없어. 그들고 나만큼이나 나쁘쟎아.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는 재건이란 있을 수가 없다. 재건을 더디게 하거나 아주 망쳐버리기도 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가지고 한 설교에서 헬무트 틸리크(Helmut Thielicke)는 말하기를, 인간이 진정으로 양심의 가책을 지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과 완전히 단 둘만 있는 것이죠. 그 세리가 과연 이렇게 말할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저 바리새인은 나보다 계급이 높아. 하지만 역시 수많은 오명을 지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도 죄인이긴 마찬가지야.” 물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과만 있으면서 오직 그분만 바라볼 때, 많은 중요한 것들이 그에게 있어 전혀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들 말고 더 중요한 생각거리가 있는 겁니다. 세리의 태도가 왜 그리 거짓없고 철저히 솔직한가의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위를 보고” 자신을 판단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그의 지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독일 국민들이 “2차 대전에 지고 난 후 죄의식을 느껴, 많은 사람들이 세리의 기도를 되뇌었음을” 틸리크는 설교를 듣는 성도들에게 환기시켜 준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영락한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를 말이다. 하지만 곧 우리 독일 민족의 영적인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 중 하나가 닥쳐왔습니다. 우린 갑자기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만큼 나쁘다.” 별안간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은 사라졌고, 회개와 영적인 회복도 없어지고, 아래를 보며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전승 국가들 사이에 있는 위선적인 민주 바리새인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The Waiting Father) 바울은 괘씸한 죄를 지은 후 통찰의 순간을 맞았을 때 요구되는 태도에 대해 분명한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고요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 책임의 완전한 영향을 피하려고 애쓴다면 잠깐 동안은 슬픔의 충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을 수 있도록 고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기 원하시는 재건을 위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고요하라는 원칙이 방어하지 말라는 뜻 뿐만 아니라,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라는 의미가 있음을 배웠다. 우리에게 있어 그 장소는 피스 리지였다. 그러나 활동적인 나로서는 그런 장소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끼친 커다란 상처와 함께 고통스레 살고 있는 세계가 무너진 사람이라면, 고요한 장소로 살짝 들어가는 시기가 필요하다. 이 시기는 소위 정치가가 말하는 ‘만회’를 구상하는 기간이 아니다. 상처가 깊고 넓어질수록 이 칩거의 기간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것은 저질러진 일의 목록을 들고 자문해보는 시간이며, 영적인 에너지를 재정비하고 재충전하는 시간이며, 맹점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내면 세계로 들어가서 정밀 조사하는 시간인 것이다. 몇 주 걸려서 간단히 끝날 문제는 아니다. 어리석게 서두른다면 나중에 나쁜 행실의 반복을 불러올 수가 있다. 여기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을 진지하게 숙고해 보자.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로 당신의 말씀에 주의하게 하시려고 어둠의 규율을 가르치신다. 노래하는 새들은 어둠 속에서 노래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는 말씀을 듣는 훈련이 될 때까지 주님이 만드신 어둠 가운데 놓여진다. “내가 어둠 속에서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느 어둠 가운데 놓으시는가,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잘 보라. 당신은 그저 삶을 살면서 어둠 속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안에서 어둠에 있는가? 그러면 고요하라. 어둠 속에서 입을 열면 당신은 엉뚱한 말을 하게 된다. 어둠이란 듣는 시간이다. 이것에 대해 사람들과 말하지 말라. 책을 읽어가며 어둠에 대한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말라. 그냥 듣고 주의를 기울여라. 사람들과 말하고 있다간 주님의 음성을 놓친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들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빛으로 나왔을 때 다른 이들에게 전할 너무도 귀중한 메시지를 주실 것이다.(My Utmost for His Highest) 영화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중생과 칭의로 보장된 구원은 과거적 구원이며, 성화는 진행 중이므로 현재적 구원이고,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성결한 자리에 이르는 영화는 미래적 구원이라 할 수 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영육과 영화(glorified body and glorification) 영화에는 성도가 죽을 때 영혼이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남으로 발생하는 영혼만의 영화와 육체적인 부활을 동반한 영육(glorified body)의 영화가 있다. 후자는 마지막 성도의 부활 때에 일어난다. 2. 성도의 영화된 모습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눅24:16,30;요20:19;계21:4)과 유사할 것이다. 졸러 박사(Dr. John E. Zoller)는 그의 ‘천국론’에서 우리가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그것은 우리 주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될 것이다(빌3:20,21) ♥ 그것은 썩지 않는 몸이 될 것이다(고전15:42). ♥ 그것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다(고전15:43). ♥ 그때에 우리는 완전한 눈(고전13:12), 완전한 청각(계5:11,12), 완전한 후각, 완전한 미각(계2:17;22:2), 완전한 지식과 이해력(신34:1-6)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마젤라(Robert S. Mazella)는 “영광을 입은 몸을 가진 성도는 성령에 의해 변화되고 성령의 활동이 스며들기 때문에, 창조의 완성에 해당하는 상상할 수 없는 장엄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이렇듯 영화(glorification)는 성도들의 구원이 온전히 피어 오른 단계이며 성도들이 소망하는 가장 아름다운 승리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윗이 시편17:15에서 하나님께 드린 고백을 연상할 수 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하나님 나라는 성결과 관계된다 웨슬레에 있어서 성화는 현재의 칭의 즉 현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성화가 최후 심판에 있어서의 궁극의인과 궁극구원의 필요조건이 된다. 와일리(Orton Wiley)에 의하면 칭의는 천국을 향한 자격을 주지만, 성화는 천국에의 적합성을 준다. 칭의에서 사람은 하늘나라와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성화에서 인간은 원죄로부터도 온전히 자유함(용서)을 얻게 되고, 천국의 적합성을 얻게 된다. 웨슬레의 점진적 성장과 함께 목적론적인 견해는 회개, 칭의, 성화를 용서, 성결, 하늘(나라)와 비교하여 설교한 데서 잘 나타난다. 구원의 최종단계인 새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대속, 칭의, 성결의 층계를 거쳐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용서, 성결, 하늘을 연합시켰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것을 분리시키는가?…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나를 용서하셨다.…그리고 그의 아들의 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나는 그의 성령으로 온전히 성화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새예루살렘으로 지체없이 올라갈 것이다. 웨슬레는 성서에 있는 ‘주의 날’이 바로 ‘대심판의 날’이라고 보았다. 그날에는 인간이 선악 간에 심판을 받는다. 그때에 죄인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갈 것”이며(마25:41)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마25:30) 그러나 의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성결에 따라서 상급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결과 그 열매인 선행은 심판 때에 상급을 가져다준다. 인자가 영광 중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각각 해당한 상급을 주실 터인데 그것은 1)우리 자신의 내적 성결 즉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같은가 함과 2)우리 자신의 선행 3)우리가 받은 고난 등의 정도에 따라 베푸실 것이다. 메쯔(Donald S. Metz)에 의하면 성결은 하나님 나라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성결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시민권(full citizenship)을 얻는데 요구되며, 2)성결은 천국 백성의 이상적인 성품(ideal character)이며, 3)천국에서의 봉사의 원천이다. 이처럼 성결은 천국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무엇으로 승리하는가 믿음이 나를 승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믿음은 최초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 바로의 손아귀에서 나오기 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 양을 잡아 좌우 문설주 인방에 그 피를 바르면 그 피를 볼 때 넘어가리라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원의 처방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피를 발랐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은 때로는 불신앙했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매장지가 없어서 죽게 만들고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게 만듭니까? 그들의 원망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애굽 땅에서 나왔을 때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행진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비극이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애 속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신앙 생활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계속되고,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항상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속되는 생활입니다. 내 모든 상황, 위기, 형편 속에서 계속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를 승리케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계획에 의하여 구원의 길로 들어선 성도는 성령의 지속적인 보호로 인하여 결코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 없음을 밝히는 교리가 로마서5장에 나타난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세상의 환난에 대하여 참고 견디면서 천국의 도래와 장차 올 영광을 확신있게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한 마디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바울 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 전반에 나타난 성도의 견인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공관복음서에서의 견인 예수께서는 이 용어를 3회 사용하셨다. ‘견인’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굳건히 견디어 내다’라는 뜻을 가진 ‘휘포모네(υπομονη)로서 참 성도의 특성을 결정해 주는 중요한 개념이며(눅8:15) 성도의 열매를 맺게 하는 적극적인 힘이 된다. 구원을 얻으려면 마지막 때의 시험을 참고 견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막13:13;눅21:19). 2. 바울 서신에서의 견인 바울은 ‘견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 생활 태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먼저 인내는 믿음과 소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롬8:25) 악하고 불의한 현 시대에서의 견딤을 의미한다(롬5:4;12:2). 또한 견인은 능동적으로는 영생을 만들어내며(롬2:7), 수동적으로는 고난을 참아낸다(살후1:4;벧전2:20). 성도들은 자신들이 고난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으며(행14:22) 모든 환난을 견딤으로써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딤후2:10).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롬5:3,4). 이 인내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며(롬15:5), 믿음 및 사랑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딤전6:11;딤후3:10). 즉 바울은 믿음, 사랑과 더불어 인내를 세 가지 덕으로 언급하였다(딛2:2). 여기서 소망이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인내, 즉 견인은 고통당하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디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고 그와 함께 왕노릇하리라는 것이다(딤후2:11,12). 3. 히브리서에서의 견인 핍박당하는 교회를 향해 씌어진 히브리서는 성도의 견인을 강력히 권면하고 있다(히10:32,36;12:1).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며(히12:2), 시험을 참고 견디는 것은 하나님의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히12:7). 4. 야고보서에서의 견인 야고보 역시 시련이 믿음을 굳게 하고 인내를 강화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고 증거한다(롬1:3,4). 욥을 그에 관한 훌륭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만일 신자들이 굳게 인내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권면을 한다(롬1:12;5:11). 5. 계시록에서의 견인 순교하는 교회를 묘사한 요한계시록은 견인이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격찬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며(계1:9;3:10) 고난과 박해를 참는 것이다(계2:2,3,19). 최후의 싸움은 가장 큰 시험이 될 것이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큰 인내가 필요하다(계13:10;14:10). 지금까지 성도의 견인에 관하여 간략히 고찰해 보았다. 칭의함을 받는 성도들은 인내로써 구원을 계속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 주요 논점이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디어 나감으로 장래의 소망을 누릴 수 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함 성경의 권위는 인류에게 가장 오래되고 가장 논란이 된 질문에 속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쟁점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성경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살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4,15). 바울은 어떻게 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1:16). 성경은 권위의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책도 이러한 하나님의 보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가 아더 피어슨(Arthur T. Pierson)은 성경의 독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무리 자신만만해 하는 인간의 계시를 다 둘러 보더라도 결국에는 영감된 말씀으로 돌아가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모호하고 믿을 수 없는 발언 대신에 독특하고 분명하며, 권위 있고 무오한 가르침을 발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완전한 책을 쓰실 수 없었다면, 여러분과 나는 왜 그런 하나님을 우리 구원으로 의지하는 겁니까? 영감에 대한 믿음이 필수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과 사귐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충분한 권위에 대한 믿음은 권위 있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생각할 점 * 지금까지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아왔습니까? 성경을 충분히 권위 있고 무오하고 주께 영감된 책으로 받아들였습니까? 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실천할 점 * 여러분이 성경의 권위를 믿는(또는 믿지 않는) 이유를 열거해 보십시오. 만약 성경의 무오나 영감에 관해 의문이 있다면 목사님을 찾아가 물어보십시오. 매일 새로워짐 - 그 양상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1,23,24). 모두 추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목표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입니다. 활동과 진전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 활동이 올바른 방향을 향한 것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목표와 그 사람의 목표가 완전히 일치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날로 새로워지는 일이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우리는 그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확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신령한 생명이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자연에서처럼 맹목적인 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협력은 지성적이고 자발적인 것입니다. 새 사람이 날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이해로 말씀에서 자신을 이끌어 내올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고작해야 생명도 능력도 참된 진리도 실질도 없는 것이며, 이런 것들은 신령한 지식이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일은 참된 지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 지식은 사고와 개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경험, 즉 사물들에 대한 살아 있는 지각-말이나 개념은 고작 그것의 형상일 뿐입니다-에 있는 것입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새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히 성경 공부를 한다고 해도, 영적인 새로움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참된 지식은 없습니다. 오직 영적인 생명과 속사람 안에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참되고 신령한 지식이 옵니다. 신령한 지식 가운데 어떤 계시가 새롭게 되는 참되고 유일한 목표로서 추구되어야 합니까?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매일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목표이며, 그 새로워짐을 추구하는 신자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조 때의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우리는 이 말씀의 한없는 영광을 얼마나 무심하게 생각하는지요! 하나님은 바로 당신 자신의 생명을 사람 속에 불어 넣으셔서 그 생명이 이 땅 위의 사람 속에 하늘의 하나님과 똑같은 모양을 재생산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모습으로 계시되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형상을 닮고 성자의 형상을 닮으며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기 위해 예정되었고 구원받았으며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마음을 두신 것에 우리의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즉 새 사람이 날마다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날로 새로워지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으며 매일의 성경 공부와 기도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두 번째 구절에서는 같은 생각이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하나님의 모양처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의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고 의로운 것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용할 수 없는 영광, 즉 의와 사람의 완전한 조화, 피조물 위에 한없이 뛰어나심, 사람과의 완전한 연합 등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의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이 창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을 보장하기 위해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와 능력 안에서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을 그분께 복종시키기를 기다리십니다. 아침 시간은 성령님께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날로 새롭게 하시는 것을 보장하시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곳에 두어 놀라운 가능성에 대한 참된 전망을 갖기 위해 묵상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속사람이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날로 새로워지고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보다 못한 것을 여러분의 목표로 삼지 마시고, 그런 것으로 여러분의 소원을 채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형상,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그분의 모양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을 분리시키지 마십시오.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자 하는 바로 그 열망을 가지고 그분께 가까지 나아가시고 그분을 실뢰하십시오. 여러분을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새로워지는 이것이 여러분의 매일의 기도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표지 1.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거룩하심에 있어서 온전하시다. 우리는 모두 범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는 순간 순간 현재의 승리와 축복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할 수 있으며 모든 죄로부터 항상 정결을 유지할 수 있다(요일1:7). 우리는 모두 종종 넘어지며 여러 가지로 실수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약3:2). 그러나 영혼의 자세 곧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습관은 지속적으로 의롭고 거룩한 생활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범죄할 때에 우리를 변호하여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분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요일2:1).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평생토록 주님 앞에서 거룩함과 의로 살아갈 수 있다(눅1:75). 그리스도인 지도자 속에 있는 죄나 도덕적 결함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즉각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은 거룩함과 의로움 가운데 살아야 한다. 2. 하나님의 사람은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건해질수록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2).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갈5:22). 사랑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12:31). 인격이나 개성에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생활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넘쳐 흐르는 사랑의 정신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못지않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로 구별해 주는 점이다. 오직 이러한 사랑만이 우리의 지도력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 우리는 서로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갈5:13). 그리스도인의 다른 은혜들 위에 덧붙여진 사랑의 봉사는 사람에게 특별한 인을 치는 것이다. 사랑은 항상 섬기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돕고 기꺼이 섬김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벧전5:3).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아도 될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주님처럼 기꺼이 섬기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고후4:5). 하나님의 양떼를 맡은 목자들로서 우리는 열심히 섬겨야 한다(벧전5:2).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속에는 지도력, 방법, 사역, 조직 또는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 깃들 여지가 없다. 우리는 빌립보서2:5-8에 묘사된 바와 같이 자기를 낮추신 주님처럼 종의 마음을 가지고 종의 자세를 나타내야 한다. 4.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확실히 말씀하셨다(마12:33).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실 때 우리의 태도, 분위기, 말 그리고 행위를 통하여 그의 거룩한 열매들을 나타내실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그 열매를 통하여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7:16). 하나님의 사람은 경건한 열매, 성품, 감정 그리고 경건한 영적 생활 양식을 가져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5:22-23에서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였다. 그리스도인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다(고후2:15). 성령님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인 아름다움과 사랑을 나누어 주신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인치시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5.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골2:9).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1:11). 참으로 성경은 우리 앞에 놀라운 이상을 펼쳐 준다. 이러한 거룩한 실체를 묘사하기 위하여 성경에는 여러 가지 다른 용어들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가장 자주 등장한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의미는 성령으로 적셔지며 성령으로 흘러넘치고 성령에게 온전히 사로잡히며 성령의 지배와 주장하심을 받으며 성령으로 변화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고 성령님의 온전한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열매와 그 은혜로 아름답게 되는 것을 암시한다. 충만함을 받는다는 의미는 전체적인 성품이 성령으로 감화되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으로 적셔져서 신령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은 성령의 권능과 임재가 우리의 성품 위에 임해 있으며 우리를 입히고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령 충만은 우리 안에서 결정적인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곧 우리의 생활과 지도력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차원과 새롭게 변화시키는 충만함을 가져다 준다. 우리도 그 사실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될 것이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성품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해 주며 우리의 증거, 사역 그리고 지도력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더해 줄 것이다. 성령 충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될 것이다. 성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과 함께 인간 안에 주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고 상실되었다. 우리는 원래의 형상을 어느 누구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요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요1:18).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골1:15).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을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 길”이시다(요14:6).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39), “우리가…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그리스도를 닮는 자는 우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요”,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는 자”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는 말씀과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는 말씀에 따라 사는 자이다. 웨슬레는 “그것(성결)은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전부가 내 안에 있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행하신 대로 행하게 하는 상태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요8:29;9:4;눅22:42;요일3:22). 이것은 하나님과의 조화된 인격적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둘째로 죄를 범치 않는 의로운 삶이다(히4:15;마27:19,24;눅23:47;요8:46;18:23). 셋째는 겸손이다. 웨슬레는 특히 겸손을 강조하였다. “그대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품으셨던 겸손을 옷 입으라. 그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 그리고 또한 그 겸손을 옷입으라” 그리스도의 삶을 닮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1)하나님을 향한 사랑인 동시에 2)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사랑의 고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따르는 신앙을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완전한 자라고 할 때 당신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가 가신 길을 걷는 자, 깨끗한 손과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 육과 영혼의 추악에서 깨끗함을 받은 자, 실족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는 자를 뜻한다.…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몸, 마음, 영혼 전체를 성화시킨 자’라고 말한다.…그는 주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힘을 다하여 섬긴다. 그는 자기 이웃 곧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한다.…실로 그의 영혼은 ‘자비, 친절, 온유, 겸손, 인내’로 충만한 사랑의 그릇이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가득 찬다(살전1:3).…이런 사람이 ‘전적으로 성화된’ 완전한 사람이다. 웨슬레에게는 성결 곧 그리스도의 완전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결의 근거이요 모델이다. 따라서 웨슬레의 성결론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성결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는 비결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와의 일관된 관계가 은총 안에서 ‘완전에서 완전으로’ 나아가는데 원동력이 된다. 웨슬레는 이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였다(요15:1-8). 우리는 이 은총을 그리스도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완전은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영양에 의해 번성하는 나무의 완전과 같은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열매를 맺으나, 일단 포도나무에 떨어지면 말라서 시들어 버리고마는-의 완전과도 같기 때문이다. 좁은 길과 좋은 나무 분명 예수께서 보시는 바로는, 인간이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타당한 이유가 전혀 없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행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당신이 그분 앞에 서서 그분이 최선의 길이라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은 이유를 해명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분 말씀대로 행치 않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이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분도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신다. 그러나 그분을 믿는 자의 삶의 전반적 태도로는 통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쉽고 즐거운 순종의 길, 진정 충만한 삶의 길을 마련해 주셨다. 바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즉 기독교 “제자도”이다. 그분의 복음은 생명과 기독교 제자도를 위한 복음이다. 다시 말해 “이제 천국이 모두에게 열렸으니 그 사실에 비추어 인생을 다시 생각하라”(마4:17)는 그분의 기본 메시지는, 우리 모두가 자동으로 느끼는 삶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시하며,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 땅의 천국 생활에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상적인 순종과 실천이 산상 강화의 마지막 주제이다. 그분이 최선의 길로 아시고 일러주신 일들을 한사코 행하지 않기 위해 상상 가능한 모든 일들이 시도되리라는 것을 그분은 분명 미리 내다보셨다. 과연 우리는 역사와 우리 주변에서 그 실상을 보고 있다. 그래서 산상 강화의 결론 부분인 마태복음 7:13-27에서 그분은 우리가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로 들어가는 길을 놓치지 않게 하시려고 네 가지 시각적 대비를 보여주신다. 그 공동체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함으로써 율법과 선지자가 이루어지는 곳이다(7:12). 그분은 먼저, 이 천국 공동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곳임을 지적하신다. 즉 들어가는 바른 길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 길-“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나 다 되는 것이 아니다(13-14절). 이어 그분은 우리를 그릇 인도할 사람들, 겉은 괜찮아 보이지만 참 행동의 거점인 속은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지배당할 자들에 대해 경고하신다. 그들은 겉으로는 양 같지만 속으로는 양을 잡아먹을, 곧 자기 목적을 위해 우리를 이용할 생각밖에 없다(15절). 이들은 바로 예수의 동생 유다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하고 묘사한 자들이다(유12-16). 우리를 그릇 인도할 자들을 분별하려면 그들의 말에는 별로 신경쓸 것없이 그 행동만 보면 된다. 그들의 행위야말로 내면의 정체를 밝혀 줄 정확한 표징이 될 것이다. 나무와 식물은 열매로 그 본질을 나타낸다. 무화과나무에는 포도 열매가 아인 무화과 열매가 맺힌다. 사람도 그 행동을 면밀히 정직하게 살펴보면 그 속에 그 사람의 실체가 드러나게 돼 있다(마7:16-20).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최선의 길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자들이다. 그분을 “주”라고 부르거나 심지어 그분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해도 그것이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하늘에 계신 예수의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21절). 아버지의 뜻은 정확하게 예수께서 여기 산상에서 지금까지 가르치신 내용이다.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참 뜻이다(12절).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짓는 것이다. 그 집은 모래 위가 아닌 반석 위에 짓는 집이다. 모래는 인생의 풍파에 꺼져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을 요즘 말로 간단히 말하면 “그냥 하라!”는 것이다. “그냥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복된 천국의 실체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임을 그분은 아신다. 마태복음 7장에서 이 부분에 대해 나오는 네 가지 시각적 대비는 다음과 같다. 1. 좁은 문과 넓은 문(13-14절). 2. “속”이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15-20절). 관련 그림-양의 옷을 입은 이리. 이들에게는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예수의 선한 마음이 없다(15절). 속은 “이리”이다. 3.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과 “주의 이름으로” 하는 큰 일들로 순종을 대치하려는 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21-23절). 4. 예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반석 위의 집)과 듣고도 행치 않는 자들(모래 위의 집)(24-27절). 좁은 문은 흔히들 생각하는 대로 교리적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좁은 문이란 곧 순종이요 순종에 필요한 믿음을 말한다. 그것이 교리적 정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정확한 교리를 전혀 모르고도 예수를 전폭적으로 믿는 많은 이들을 보아 알 수 있다. 반대로, 교리적으로는 매우 정확해 보이지만 미움과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도 많이 있다. 반면에, 넓은 문이란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는 삶이다. 좋은 나무의 열매도 순종이다. 순종이란 오직 예수와의 교제를 통해 되어져 가는 우리의 존재(나무의 “속”)의 귀결이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외면의 행위로 짐짓 제자인 척 꾸미려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내면의 실체로 모든 것이 드러나고 만다. “내 아버지의 뜻”이란 지금까지 예수께서 산상 강화에서 주신 바로 그 내용을 말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분의 말씀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즉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서 다음 단계인 인간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완성된 천국에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께서 최선의 것으로 보여주신 그 길을 실천할 때 우리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인생을 짓는 것이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다”(고전10:4). 고린도전서13장;골로새서3장;베드로전서2장;베드로후서1:1-15;요한일서3:1-5:5등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의 위대한 본문들도 모두 정확히 똑같은 메시지인, 예수이 제자들의 내면의 변화를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이런 말씀들의 중심 평가 기준은 언제나 우리 인격의 핵심적 특징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이다. “율법”의 행위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율법은 인격적 선의 근원이 아니라 언제나 그 경로이다. 예배의 정의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적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말에서 예배란 ‘예를 다하여 절한다’는 개념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예배는 즉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그를 신뢰하며, 그를 섬기는 믿음의 표현이요, 신앙의 순종을 나타내는 행위로써 이해된다고 하겠다. 경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것으로 성경은 교훈 한다(마4:10;요4:21-24). 이러한 경배적인 행위를 기독교는 예배의식(ritus)으로 표현하였고, 교회는 회중의 공적인 모임을 통하여 이러한 의식으로써의 예배를 순서들의 진행으로 실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기독교의 예배는 이러한 예배의 의식을 떠나서는 달리 하나님께로 향한 경배로서의 섬김을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인식해야 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과 그를 섬김과 그의 뜻에 순종하는 봉사의 신앙이다. 이것이 결여된 예배의식 만으로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문제의 예배가 될 것이다(마9:13이하). 두 번째로 예배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인 삶 자체라고 하겠다. 기독교의 예배란 공동체의 공식적인 행위로서 실현되는 의식(ritus)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땅에서의 삶 자체가 예배라는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된다(롬12:1-2).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와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봉사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섬기는 일꾼으로 불려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봉사는 언제나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섬김의 삶으로(사랑의 봉사)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섬김과 봉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요, 그를 경배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며, 그의 다스림 가운데 있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봉사가 되기 때문이다(고전6:19-20). 현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는 예배는 교회의 공적행위인 의식으로의 예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예배의 이해와 예배생활은 많은 문제를 가진다고 하겠다. 예를들면 의식으로의 예배에 참여하는 것 만으로 예배생활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해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의식으로서의 예배에 매이게 되며, 그것을 예배의 삶과 동일시 하는 문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에서 실제로 무엇(material)을 드리려 하는, 그야말로 제사의식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큰 문제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죄하기 위한 보상으로의 제사행위가 아닌 것이다. 어떤 물질적인 복을 얻기 위한 기복적인 행위이거나 상급을 목표로 하는 공로적인 제사가 더욱이 아닌 것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오직 그리스도가 속죄의 제물이 되셨으며, 그가 친히 대제사장 이시기에 그를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부름 받은 자들이 자신을 인격적인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요, 봉사요, 섬김 그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으로써의 예배와 삶으로써의 예배라는 양면성을 조화 있게 실천하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와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이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와 의의를 밝히는 중요한 관점이라고 하겠다. 예배의 사건은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물음과 기독교적인 대답의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다. 즉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며,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건으로써의 중요성이다. 이것은 예배가 의도하는 실제적인 목표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과의 만남과 경험과 대화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간접적인 것으로 중재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중재의 목적을 위하여 예배는 하나으 상징적이며, 의식적인 수단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과 교제와 대화에 ‘말씀’과 ‘성찬’은 역사적으로 중재의 기본적이며 상징적인 수단으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배의 실제를 정확히 관찰해 보면, 예배가 이루어지게 되는 그리고 그 예배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구조가 있다. 그것은 질문과 대답, 대답과 응답의 상관관가P이다. 여기 질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물음으로써 그 물음은 인간적인 물음과 관련하여 존재의 근거와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던져지는 물음이라고 할 것이다. 즉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규범과 어떤 가치를 우리의 삶에 척도로 적용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등에 관련하여 던져지는 물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이러한 질문들을 삶의 다양한 관련들을 통하여 항상 다시 그 하나를 주제화 하여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와의 대화 가운데서 올바른 대답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그 물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에 진지함과 깊이를 갖도록 해 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과 함께 참여자들에게 예배는 신앙의 대답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그 대답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중재되는 것이다. 그 대답은 성경의 역사적인 전승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과 대답의 연속적인 운동이 예배의 사건을 통하여 전개되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 하나님은 죄인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지만, 신적 은혜를 전달하심에 있어서 대부분 어떤 수단(방편, 경로)을 사용하신다. 은총의 수단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으로서, 그를 통하여 성령의 감화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웨슬레는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외적인 표적, 말씀, 행위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 칭의의 은총, 성결케 하는 은총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한 정상적인 통로로 정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웨슬레에게서 은혜의 수단이란 사상은 1733년에 발간된 “기도집”(A Collection of Forms of Prayer for Everyday in the Week)에서 이미 표현되었으며, 이어서 “계속적으로 성찬을 받을 의무”(The Duty of Constant Communion)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에서 이 사상이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은혜의 수단”이란 설교는 1739년 모라비안 교도의 정적주의를 반대하는 논쟁 중에 작성된 것이다. 웨슬레도 한때 회원이었던 페터레인회(Fetter Lane Society)의 모라비안파들은 정적주의(Stillness)를 옹호하였다. 그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고 다만 하나님의 사역을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웨슬레는 하나님은 그의 은총으로 우리를 감화시키시고, 제도화된 수단을 통하여 우리가 그에게 나아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가일층의 은혜를 받게 하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내적인 은혜의 외적 표상이요, 그것을 받는 수단이다”고 하였다. 이는 은혜의 수단 그중에서도 성례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웨슬레는 은혜의 수단을 3종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일반적인 수단(General means)으로서 전적인 순종, 계명 준수, 자기 부정, 매일 십자가를 지는 것 등으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성결의 은혜를 받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둘째는 신중한 수단(Prudential means)으로서 이는 성도의 형편과 필요에 따라 다양한 것이다. 성결과 사랑으로 이끄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셋째는 제도적인 수단(instituted means)으로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들이다. 여기에는 5가지가 있다: 기도, 말씀, 금식, 성도의 교제, 성찬이다. 그러나 “은혜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는 기도, 성서탐구, 성만찬의 3가지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열망하는 사람은 모두 그것을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에 의하여 대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것들을 버려서가 아니라 사용하는 일로서 대망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두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있다. 웨슬레는 이 둘을 모두 배격했다. 하나는 은혜의 수단은 인간을 구원함에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을 사용함이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정적주의자들인 모라비안 교도들이나 퀘이커 교도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은혜의 수단은 회심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무익하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불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주장은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을 보라…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웨슬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만히 서서 본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었으나, 그들은 먼저 “힘껏 앞으로 나감”(출14:15)으로서 였다고 가르쳤다. 또한 정숙주의를 지지하는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만 드리면 되지, 외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웨슬레는 신비주의자인 윌리암 로(William Law)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외적인 수단에 의하여 내적인 은혜를 받는 성서적인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은혜의 수단을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남용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영국 국교회와 천주교회의 입장이었다. 영국 국교회는 “성례전은 의롭다함을 받음에 필요한 선한 행위 중에 하나로 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을 자연계에 중개하는 수단으로서, 선을 성취하고 그로 말미암아 따라오는 사랑의 행위를 완성하는 도구로 간주되었다. 성례전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있는 도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성례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도덕적인 수단이요, 구원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웨슬레는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은혜의 수단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나 통로이지 수단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수단들이 “종교의 일종의 대용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웨슬레의 견해에는 은혜의 수단들의 유용성과 한계성이 동시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하고 또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다. 성례전을 포함한 은혜의 수단들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초대교회가 처음의 순수성을 상실하자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잘못을 범했다. 이런 잘못 때문에 은혜의 수단들을 거부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잘못이다. 비록 하나님이 은혜의 수단에 제약되신 분이 아니시고 이를 초월해서도 은혜를 주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수단들을 통하여 은혜 주시기를 즐겨하신다고 웨슬레는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로든지 수단 자체 내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수단은 유용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을 제쳐 놓지 말고,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은혜를 기다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약속하였기에 그가 정하신 방법에 따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와 성결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은혜의 수단으로 제정해 주신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일곱 절기 하나님께 드려지는 각종 제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일곱 명절을 중심을 해서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일곱 명절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큽니다. 레위기23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일곱 명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한이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먼저 유월절이 나옵니다.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무교절이라는 절기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곡물의 첫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인 초실절 혹은 맥추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다음 15절 이하 16절에는 오순절이 나옵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안식을을 일곱 번 세고 그리고 그 다음날을 합하여 된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이라는 말은 10을 다섯 번 곱했다는 뜻이고, 그 전날인 49일째 되는 날은 「칠칠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절기」라 해서 이 절기를 나팔절이라 부릅니다. 그 다음 26절 이하 2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절기가 「속죄일」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속죄절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이러한 일곱 명절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위대한 축제였으며, 심오한 종교적 영적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절기들을 해마다 꼭 지켰고, 각 절기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각종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절기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절기가 아닙니다. 일곱절기들은 여호와의 절기입니다. “기한이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레23:4). 이 절기들을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은 절기마다에 심오한 영적 의미를 담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절기들을 통하여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대단히 중대한 교훈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1. 첫 번째 절기:유월절 유대력에 의해서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었습니다. 이 유월절 절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되는 교훈을 위해서 고린도전서를 찾아보겠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우리의 유월절 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을 치기로 작정하시던 그 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재앙을 피할 길, 곧 양을 잡아 그 피를 그들의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3). 「유월」(passover)이라는 단어는 바로 “넘어 간다”는 뜻에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집의 모든 장자들이 구원을 받았던 사실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구원의 방편에 대한 그 말씀을 그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저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 문제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철학이, 윤리가, 도덕이 큰소리로 인간의 죄와 허물과 약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인간의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오직 예수께서 단 하나의 흠과 티가 없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합당한 제물로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로 예배해 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유월절을 결코 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장남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준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의 그 밤에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 유월절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바로의 사슬에서부터 풀려나와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향해서 삶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다운 역사는 유월절과 함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저의 성도로서의 삶다운 삶 역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유월절의 사건이 뚜렷하게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래서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해서 잔과 떡을 받는 것도 우리를 위해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유월절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살리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으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절기인 것입니다. 2. 두 번째 절기:무교절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레23:6). 「무교절」이란 문자 그대로 “누룩이 없는 절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무교절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병이라는 누룩이 없는 떡을 먹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룩이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누룩을 괴악한 것, 악독한 것이라 하여 죄악에 대한 모형으로서 누룩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교절이 당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없이 집안에서 누룩을 제거합니다. 누룩이 눈에 띄면 그들은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할 수 있는 한 누룩을 땅 속 깊은 곳이나 보이지 않는 장 속에 철저하게 감추고 묻었습니다. 그런 다음 누룩이 없는 절기 무교절을 하나님 앞에서 축하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무교절이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누룩이 죄악을 뜻하는 것이라면, 누룩이 괴악하고 악독한 인간의 하나님을 떠난 행실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누룩의 파묻힘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죄가 제거된 상태를 의미해 줍니다. 그런데 이 절기를 그리스도의 역사와 관련시켜서 묵상해 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으심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다음에 내 죄를 짊어지시고 땅 속에 깊이 장사지낸 바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내 죄를 짊어지시고 보이지 않는 장소로 아주 가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무교절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무교절의 핵심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 지내심 」입니다. 3. 세 번째 절기:초실절(맥추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레23:10,11). 초실절은 생명의 첫 번째 이삭을 제사장에게 가져다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지켜졌던 날은 안식일 이튿날로 지금의 주일입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주일에 일어났던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첫 이삭으로서, 처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분이 되셨습니다. 인간 역사 속에서 죽음에 처음으로 승리하신 분, 사망을 정복하고 생명의 주님으로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전15:23). 우리에게 부활의 장으로 기억되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복음과 이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을 설명하면서, 역사 속에서 부활의 첫 열매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은 생명의 첫 열매입니다. 분명하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실 수 있었던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생명의 첫 번째 이삭입니다. 초실절의 핵심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입니다. 4. 네 번째 절기:오순절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레23:15-17).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드는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오십 일째 되던 그 날에 역사속에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2:1-3).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순절날에 보혜사 성령님을 그분을 믿는 백성들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성령으로 침례(세례)시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약 교회가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대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강림하심을 나타내는 절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 속에 찾아오신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순절날에 떡 두 개를 구웠습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어느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순절날에 두 개의 떡이 구운 바 되어 하나님께 첫 요제로 드려진 사실은 오순절 이후에 이방인과 유대인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교회가 시작될 것을 상징해 준다.” 이 학자의 말에 문자 그대로 동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대단히 흥미있는 관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많은 사건 가운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오순절 이후에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한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오순절날 두 개의 떡이 구운 바 되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요제로서 바쳐진 것처럼,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여 영광스러운 교회가 탄생되고, 이 교회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오순절날 강림하신 성령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변함없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셔서 성령을 좇아 행하게 하십니다. 5. 다섯 번째 절기:나팔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레23:23-25). 모든 절기 가운데서 가장 경이롭고 신나는 절기가 나팔절입니다. 나팔절이 되면 갑자기 팔레스틴 온 땅에 나팔 소리가 진동합니다. 그리고 이 나팔 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이 나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희열과 즐거움의 절기입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는 즐거움이요,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영광스러운 절기입니다. 간혹 우리들 중에는 성령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의 바닷가를 산책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의 바닷가를 걷는 일을 택하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당신이 더 복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하고 있었지만, 오늘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어느 한날에 가서는 이 상태마저도 더욱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천지를 경악시킬 그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친히 그 육체로 역사 속에 다시 돌아오시는 그날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날에 그 분은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때 만약 살아있다면 우리는 그대로, 그러나 변화되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그날에는 예수 믿고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일어나고, 살아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변화되어 함께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만나는 거룩한 환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나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쳐 주는 복스러운 절기입니다. ● 나팔 소리의 의미 나팔 소리에는 대단히 많은 의미가 있지만, 특별히 구약성경이 뚜렷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소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소집되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전쟁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곧 출전준비 신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으 재림과 함께 왜 나팔 소리가 울립니까? 첫째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집하는 신호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집합하라!”는 그 소집 소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그 날 주님 안에서 영광스러운 만남을 갖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사단과 주의 군사들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신호입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성경은 사단의 정체를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추측하기로는, 그날 주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끌어올리실 때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과 천사장 미가엘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울려퍼질 나팔 소리는 이 전쟁의 시작을 또한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님 앞에서 만나게 하는, 그리고 영원한 세계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전개될 것이 나팔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 나팔절에 이어서 그 다음에 나타나는 절기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대단히 흥미있는 사실은 유월절부터 계속되는 이 절기들은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십사일은 유월절, 십오일 무교절입니다. 그리고 무교절이 지나고 나서 그 다음 안식 후 첫날이 초실절입니다. 그리고 50일이 지나서 오순절입니다. 그 다음에는 상당한 시간이 흐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지내심, 부활, 성령 강림, 세계의 초침은 그리스도의 역사를 쉴 새 없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실감있게 느껴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정적을 깨뜨리고 주의 재림의 위대한 소식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천지에 충만할 것입니다. 나팔절 이후 다시 역사의 시침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6. 여섯 번째 절기:속죄절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레23:27,28). 속죄절은 신기하고 이상한 절기입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며」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절기는 자기의 몸을 스스로 학대하는 고통의 절기입니다. 왜 환희의 절기인 나팔절이 고통의 절기인 속죄절과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복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속죄덜에 자기의 몸을 심하게 괴롭히고 학대합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그런 절기가 바로 속죄절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복음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모든 사람들은 애곡과 통곡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파멸 속에 던지게 될 것입니다. 속죄절의 핵심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거부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아주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계14:17-20). 복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모든 불신앙의 역사에 대한, 그리고 불합리와 부조리와 말할 수 없이 불의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장면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고 만나지 않은 사람은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7. 일곱 번째의 절기:초막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칠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레23:33-35). 이스라엘의 월력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초막절은 더할 수 없이 기다려지는 아주 기분 좋은 절기입니다. 이 초막절은 안식하는 절기입니다.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레23:39). 또한 초막절은 즐거워는 절기입니다.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레23:40). 우리의 원두막 비슷한 초막에 올라가서 수금과 비파를 타고, 나뭇가지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마냥 찬양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주고 받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 환희의 절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초막절입니다. 나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했고, 속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역사 속에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분의 즐거운 안식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기뻐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주고 받으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함께 거하는 영광스러운 광경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이 얼마나 아름답고 축복스러운 초막절의 교훈입니까? 초막절의 핵심 교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입니다. 역사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오순절은 옛날 옛적에 이미 지나갔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우리의 잠을 깨워버리는 그날이 얼마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의 말대로, 우리는 12시 5분 전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 직전의 시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주님의 나팔 소리가 울려올지 모릅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도적같이 오실 주님, 기대하지 않을 때에 오실 주님의 그 영광스러운 재림을 사모하며,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말씀과 성령 충만한 삶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믿음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해석 신약 시대의 대표적인 두 저자 바울과 야고보는 모두 아브라함의 역사를 중요하게 취급하며 논의하고 있으나 각각 서로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바울은 "사람이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된다"고 말하며(롬3:28;4:1-8)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결론짓고 있다(약2:24).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바울과 야고보는 어떠한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해석했는가? 본 주제 강해에서는 믿음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개념적 차이점을 분석함으로써 두 사상의 근본적인 일치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1. 바울의 경우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유대교 신앙에다 예수 신앙을 첨가한 종합적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로 말미암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순수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결코 행위로써 입증되는 것이 아니었다. (1)믿음의 개념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전인적으로 영향을 주는 지성적, 도덕적, 영적 신앙을 뜻하며, 사람을 하나님과 생동적인 관계로 인도하는 신앙을 말한다. 그것은 죽은 신앙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 안에 역동하는 구속하는 신앙이다. (2)행위의 개념 바울에게 있어서 행위란 율법주의자들의 죽은 행위, 억압당하는 상태하에서 혹은 의무감에서 행하는 행위, 율법이 엄격한 주종 관계가 되어 순종을 강요당하여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런 죽은 행위는 결코 생명을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 (3)의의 개념 바울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그리스도인의 내적 의를 뜻한다. 칭찬받을만한 의로운 행위가 없어도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의는 구원과 동일한 의미로서 하나님의 선물, 즉 은총으로 이해되고 있다. 2. 야고보의 경우 야고보는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믿는 단순히 교리를 인정하는 지적인 믿음을 유대 전통적 신앙으로 보고 있으며(약2:19) 하나님 앞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말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다고 보았으며 아브라함을 그렇게 행한 사람으로 여겼다. 야고보에게는 이미 하나님 신앙이 전제되어 있었고 신앙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1)믿음의 개념 야고보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나의 죽어버린 전통적 신앙과 생활 속에서 실제적 의를 발휘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신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구호에 그치고 공식화됨으로 양심의 증거를 듣지 못하는 믿음은 결코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2)행위의 개념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신자의 행위를 뜻하고 있는 바, 모든 믿는 자의 마음에서 생겨나고 증명된 신앙과 사랑의 결실을 뜻한다. 믿음은 일상 생활에서의 행위와 대화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증거가 없는 피상적인 신앙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3)의의 개념 야고보가 주장하는 의로움이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있어야 할 의를 말하며 심판대에 서기 이전의 결정적인 의로움을 말하고 있다. 그는 선행이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의당한 것이며 선행이 없이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3. 결론적 고찰 지금까지 믿음과 행위와 의로움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이해를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결론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각기 다른 각도에서 보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바울은 뿌리를 보고 있고 야고보는 그 열매를 보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 관하여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그것을 지속하고 성취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신앙보다 앞서는 행위는 버려야 할 것이며 그러한 행위는 죽은 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는 행위와 격리된 형식적인 신앙을 고발하고 있다. 경건한 행위의 필요성을 믿는 점에 있어서 바울과 야고보는 동일하다(고후9:8;엡2:10;살후2:17). 또한 의로움이란 결국 행위로 말미암아 판단되는 논리(롬2:6-10)에 있어서도 그렇다. 바울과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하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약2:22). 그리스도 안에서 행위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요 신앙 없는 행위는 죽은 행위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근본적인 입장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비하 인간 구속 사역을 위하여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신적 위엄을 스스로 버리고 인성을 취하사 낮아지신 사실이 빌립보서 2장 5-11절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비하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성육신 제2위(성자), 즉 영원 전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던(요1:1,14;요일1:1,2)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미 구약의 예언되었던 대로(사7:14;9:6;렘23:5,6;미5:2)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마1:16) 인류의 일원이 된 것을 의미한다(요1:14;고후8:9;빌2:6-8;딤전3:16;히2:14).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아래와 같다. ① 하나님을 인간에게 나타내기 위하여(요1:18). ②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려고(딤전1:15). ③ 죄를 대속하는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하여(히10:1-10). ④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요일3:8). ⑤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기 위하여(히9:11-22). ⑥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눅1:31-33). ⑦ 높이 들리움을 받기 위하여(빌2:9). 2. 율법에 대한 복종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을 기쁘신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그리고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대리적으로 복종하심(롬5:19;갈4:4,5)으로 율법의 제정자가 율법의 제한을 받는 위치로 낮아지셨다. 3. 수난 그리스도는 예언된대로(사53:4) 전생애를 통하여 육체적으로(마2:14,15;4:2;요4:6)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심한 고통을 당하셨으며(마26:38;요12:27;히5:7)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고(마4:1-3;눅22:28;히4:15),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수난을 받으셨으며(눅9:22;17:25),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모진 어려움을 겪으셨다(사53:12;마27:46;고후5:21). 4. 사망 비하의 절정인 사망(빌2:8)은 구속의 효력을 지닌 법정적 선고에 의한 사망이었고, 불명예스러운 십자가를 통한 수치와 저주의 죽음이었다(갈3:13). 이 죽음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속사의 전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으므로 이미 구약에서는 여러 번 예언된 바 있다(시22:1,6-8,17,18:69:21). 5. 장사 무덤에 들어가신 것은 비하의 마지막 단계이며 다른 면으로는 다음에 이어질 승귀의 전주곡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죽음을 맛보셨으나 몸이 썩지 않았으며 사망의 종 노릇을 하지 않았다(행2:25-32;갈6:8). 6. 지옥에 내려가심 그리스도의 비하 신분에 대하여 개혁파의 일반적 견해는 성육신, 수세, 수난, 사망, 장사의 5단계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개혁파의 일부 학자 및 다른 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비하의 최종 단계로 본다. 즉 카톨릭은 장사된 그리스도께서 선조 림보에 내려가서 구약의 성도들을 구속하셨다고 하며, 루터파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 흑암 권세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주장한다(시16:8-10;엡4:9;벧전3:18,19:4:4-6).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파 학자들은 지옥 강하를 ① 겟세마네와 십자가상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거나 ② 장사된 3일간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본 강해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으 이름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의 본질적 존재, 성질, 상태 및 직책 등을 보여준다. 1. 예수 탄생 직전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계시한 이름으로(마1:21;눅1:30,31) 그리스도의 특별 직무를 보여주는 ‘구원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구약 시대에 모세의 후계자이며 계시사적 측면에서 볼 때 예수의 예표가 될 만한 여호수아의 이름과 그 뜻이 같다. 2. 그리스도 구약의 메시야와 동일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를 지닌다(요4:25,26).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왕(삼상10:1)와 제사장(출29:7)과 선지자(왕상19:16)가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며(사61:1;슥4:1-6) 기름 부음은 성령이 임재하는 것을 상징한다(삼상10:6,10). 3. 인자 다니엘서7:13에서 유래되었으며 예수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그리고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동시에 나타내 주는 명칭이다(마16:27,28;24:30;26:64). 4.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눅1:35),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후사, 즉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의 대표자이며(롬8:17), 삼위 가운데 제2위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다(마16:16;26:63,64). 5. 주 단순한 존경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마8:2;20:33) 어떤 사물에 대한 소유권이 있으며(마21:3;24:42-46), 특히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는 호칭이다(빌2:11;행2:36;고전12:3). 6. 기타 이외에도 그리스도는 ‘임마누엘’(마1:23), ‘알파와 오메가’(계1:17,18;22:13), ‘말씀’(요1:1), ‘본체의 형상’(히1:3),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1:24) 등 여러 가지로 불리었다. 바울의 인간 이해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인간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21절). 인간에 대하여 바울이 사용한 여러 가지 용어들을 통하여 그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몸(σωμα, 소마) 바울은 인간의 지체들을 이루고 있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생물학적 부분들을 ‘몸’이라고 부르고 있다(롬12:4,5;고전12:12-26). 그러나 이 용어는 단순히 인간의 살과 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뜻하고 있는 바, 바울은 이 단어로써 인간의 자아를 말하고 있다(빌1:20;롬6:12,13). 즉 전체적이고 복합적인 살아있는 유기체요 인격체로서 인간을 가리킨다(롬8:13;고전9:27).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덧입지 않은 인간 존재란 아무 의미가 없다(빌3:21;고전15:35-45;고후5:2-4). 2. 육(σαρξ, 사릌스) 이 용어는 물리적인 몸을 의미한다. 즉 자연적이고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지상에 얽매인 나약한 인간을 의미한다(골3:5). 어떠한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으며(고전1:29),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8:8). 바울은 ‘육’을 ‘영’(πνευμα, 프뉴마)과 대조하여 표현함으로써 자연적이고 지상적인 경향에 지배되는 인간을 설명하고 있다. 3. 혼(φυχη, 프쉬케) 이 용어는 생동력과 의식과 지식과 의지를 가진 인간을 지칭한다(빌2:20;고전1:23;살전2:8).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지상적인 생명일 뿐 여전히 ‘육’의 생명이며 성령에 의하여 지배되는 생명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없이 사는 인간을 ‘혼적 인간’(프쉬키코스)이라고 부른다(고전2:14). 4. 정신(νου ,누스) 이 용어는 지적으로 이해하고 계획하고 결단할 수 있는 자아를 시사한다(롬14:5;고전1:10;2:16). 율법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여 그분의 뜻을 자기 자신의 뜻처럼 이해하는 자아가 바로 ‘정신’이다(롬7:23). 또한 그것은 피조 세계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아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롬1:20). 5. 마음(καρδια, 카르디아) 이 용어는 이해하고 계획하는 자발적이고 정감적인 자아를 가리킨다. 이 ‘마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사랑하고(고후7:3;8:16), 슬퍼하고(롬9:2), 계획하고(고전4:5), 방종하고(롬1:24), 괴로워하며(고후2:4), 또한 의심하기도 하고 믿기도 하며(롬10:6-10), 마음이 강팍해지고(고후3:14), 뉘우칠 줄도 안다(롬2:5). 하나님의 군대 영적 존재인 천사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영광을 호위하는 일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전을 수호하는 일을 주임무로 한다(시34:7;91:11;행27:23;히1:14). 구약 시대에는 이 군대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왕하6:15-17),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예수께서 이 군대의 존재와 활동을 언급한 사실을 볼 때(마26:53), 우리는 이 군대의 실존을 의심할 수 없다. 한편 가나안 땅으로 귀향하는 야곱에게 이 군대가 나타난 것은 ① 언약에 근거한 가나안의 주인(창28:13)이 잠깐 동안의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기쁨으로 환영한다는 의미가 짙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로 인해 잠깐 곁길로 갔다가 회심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때도 이러한 즐거운 환영을 받을 것이다(마24:31;눅15:7;16:22). ② 하나님 군대의 위용을 보여줌으로써 에서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던 야곱에게 담대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보호만큼 든든한 방책이 있을 수 있는가(시18:1,2)! 마찬가지로 성도가 위경에 처하여 두려움에 떨 때에 하나님은 친히 보호자가 되어 주시며 필요에 따라 적절한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히4:16).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부리시는 천사들을 보내어 천국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 성도들을 모든 환난과 핍박 중에서 보호하시고 늘 승리케 하신다(히1:14).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세상의 부패한 권력에 짖눌려 정의와 거룩을 팽개치지 말고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과 그의 군대를 확신하면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수5:14). 죽은 신앙에 대한 예수의 처방 예수께서는 사데 교회의 절망적인 상황을 안타까워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리셨다(계3:2,3). 첫 번째 처방은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즉 복음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나타난 ‘어떻게’(포스)라는 단어는 ‘무엇’(what)이라는 단어와는 다른 뜻이다. 즉 ‘어떻게’라는 말은 사데 교회가 처음에 복음을 받아들였던 자세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서 듣고, 받아들이는 것 모두를 지적한다. 인간의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을 회상함으로 새로운 현재를 경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처럼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할 때 믿음 안에 바로 설 수 있다. 사데 교회가 어떻게 받아씅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잘 생각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초기에 가졌던 복음에 대한 신실함을 회복할 수 있음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 처방은 ‘회개하라’(μετανοησον, 메타노에손)는 것이다. 이는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단한번의 영원한 회개, 즉 확실한 회개를 하라는 명령이다. 따르던 세상 것을 버리고 온전히 그리스도만 따르라는 180도 전향의 명령인 이 말은 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복음에 근거한 회개이며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는 권고이다. 세 번째 처방은 ‘지키라’(τηρει, 테레이)는 것이다. ‘지키라’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리에 다시 한번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복음적 명령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며,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순종을 뜻한다. 네 번째 처방은 ‘일깨우라’(γρηγορηση ,그레고레세스)는 것이다. ‘일깨운다’의 문자적 의미는 ‘조심하다’이다. 이 단어는 특히 사데의 역사와 연관을 가진다. 사데는 난공불락의 도시였으나 아크로폴리스를 방어하는 사람들의 경계 소홀로 인해 두 번이나 몰래 탈취당했었다. 이처럼 아무런 어려움이나 핍박이 없어 보이는 사데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즉 마귀의 궤계를 이기고 환난 날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무장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비하여 신부의 순결을 지키며 늘 긴장 속에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갖기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시111:10)라는 말씀을 우리는 듣는다.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잠15:33)는 말씀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지식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이라면 모은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시작했는가? 이 질문은 이런 내용을 묻는 것이 아니다. 가령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어떤 사역을 맡고 있는가? 라든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했는가?, 또는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존경을 받는 사람인가?”, 혹은 “어느 정도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가?, 아니면 ”그 동안 쌓은 업적은 무엇인가?“ 따위를 묻는 것이 아니다. 질문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과연 우리는 시작했는가?…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1. 우리의 의지로써 선택하면 된다. “제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절실히 요구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잠언1:29에는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다. 2.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도록 구한다. 3. 지속적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구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밤낮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구한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로마서 14:23 말씀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4.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곧 죄가 역겨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다. 가장 좋은 공부방법은 듣고, 보고, 읽고, 쓰고, 묵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께 대한 공부를 하려면 큼지막한 공책 한 권 정도 또는 몇 권의 공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성품과 원리원칙에 대하여 배울 것이 너무나 많이 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원리원칙’으로 나누어서 성경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수백개의 성구를 모아서 큰 공책으로 한 권 분량이 넘는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며 공부하기로 시작한다면 이 주제에 따라 모든 성경말씀을 예리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청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고 제목을 붙인 공책에다가 이 주제에 관한 말씀을 옮겨 적는다. 그런 다음 그 말씀들을 묵상한다. 전도할 때 소개하여야 할 기본적인 중요성경구절 ●롬3:23-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롬6:23-죄의 값은 사망이다. ●롬5:8,요3:16-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나, 죄인인 우리는 극진히 사랑하신다. ●딤전2:4-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금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계시다. ●막10:45-예수께서 당신을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사1:18,요일1:9-당신이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면 다 눈과 같이 희게 용서하여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다. ●히9:27-인간은 모두 한 번은 반드시 죽고, 그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게 된다. ●엡2:8-9-그런고로 예수를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세상의 선행이나, 금전이나, 공로를 가지고는 구원을 못 받는다. ●계3:20-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면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강요할 수 없고 스스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요1:12-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자녀의 특권을 누린다. ●요3:16-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다 구원을 받는다:중생의 체험 강조 ●고후6:2-다음으로 연기하지 말고 지금 구원을 받아야 한다. ●고후5:17-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다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전도의 내용 전도할 때 균형잡힌 믿음을 갖도록 건전하게 전도해야 한다. 즉 너무 자신의 체험만 전하여 감정적인 면만 전하거나, 성경지식만을 전하거나, 도덕적인 가치만을 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지정의가 겸비된 바른 믿음을 갖도록 전해야 한다. 1. 지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인간의 삼각관계를 분명히 알도록 전한다. 즉 인간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구원의 길이 마련되었음을 설명한다. 2. 정적인 요소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를 전한다. 간증 중심의 설득력 있는 전도도 효과가 있다. 느끼고 깨닫는 체험의 요소를 설명한다. 3. 의지적인 요소로서 본인 자신이 스스로 결신을 하도록 인도 권면한다. 지적인 요소만을 강조하면 지식이 되며 비판적인 사람이 되고, 정적인 요소만 강조하면 미신이 되며 감정적인 사람이 되고, 의지적인요소만 강조하면 수신도덕이 되며 인본주의가 된다. 이처럼 어느 한쪽 요소만 강조하면 신앙의 성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전도자의 자세 전도할 때, 그 마음 자세가 바로 되지 않으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베드로전서 3:15에 전도 자세에 대한 충고의 말씀이 있다. 1. 먼저 생활이 거룩하고 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과 실생활이 상치될 때 그 전도는 힘을 잃고 열매를 얻지 못한다. 2. 항상 전도할 내용을 자신있게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체험과 기도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3. 온유한 자세로 전도를 하며 교만, 정죄, 비판, 무시, 논쟁, 강요, 의무적인 자세를 절대로 가지지 말아야 한다. 4. 두려운 마음으로 전도하라. 귀한 영혼을 다루는 일이므로 그 마음 자세가 경건하며 하나님 앞에 책임 있고 두려운 자세를 가지고 하여야 한다. 5. 성령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전도하라(행1:8). 목자는 끊임없이 영적 휴식으로 인도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한 영적 휴식의 때가 필요하다.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라는 표현은 영적 갈증을 채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기회를 제공하시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점점 더 갈망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영적인 기갈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물은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인식하고 성령 사역의 증거들을 갈망하며 또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창조하셨다. 내가 영적 은사들이 우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주요한 증거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인도하심, 기도를 통한 도우심 그리고 성령을 통한 기도의 응답 등이다. 나는 또한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두드러지게 느끼는 것과 하나님의 종 및 지도자들의 사역 가운데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령의 이러한 특별한 축복이 없는 진리는 교인들을 흡족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가장 놀라운 진리도 죽이는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후3:6). 일부 예배에서는 인간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 성령의 사역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도자가 성령의 나타나심이나 사역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도자는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임재가 나타날 수 있는 길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1. 우리의 개인 기도 생활이 성령께서 얼마나 충만히 기름부으시며 사역을 통하여 새롭게 하시는지를 결정해 줄 것이다. 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교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는지를 알아본다. 심지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때로는 예배나 기도, 찬송 그리고 하나님 말씀이 역사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2. 성가대나 특별한 독창자들을 가르침으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들이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곡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또 그들의 노래가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자랑하기보다도 가사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강조해야 할 것이다. 또 그들이 선택한 곡이 성령 사역의 일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사실들은 그들이 성령님의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예배 전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들이 성령님께 더욱 의지하는 마음을 갖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3. 공중 기도를 위하여 당신 자신이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당신의 목회자 기도도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미리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전체 회중을 바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성령께서 당신의 교인들을 새롭게 하시는 길을 마련하는 데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4.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읽기 위하여 당신 자신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은 성령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본문 선택과 특별히 강조해서 읽어야 할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것도 역시 성령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폴 리즈(Paul Rees)는 젊은 사역자로서 캠벨 모르간(G. Campbell Morgan)이 설교하기 전 성경 본문을 읽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경배의 체험이 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당신이 성경을 봉독할 때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듣고 있는가? 5. 회중들 각자가 예배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예비하는 것이다. 몇 사람의 교인들을 선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토요일이나 주일날 아침 30분 동안(또는 적어도 각각 15분 동안) 기도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예배 전반을 통하여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하여 중보해야 한다. 또는 자원자들을 모아서 예배 40분전에 나와 예배가 시작되기 10분 전까지 기도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펄전은 예배를 드리는 동안 많은 무리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으므로 예배 출석하는 숫자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러한 자각이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에게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뜻에 새롭게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경배하게 하는 데 당신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바울은 성령께서 참석한 자들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망각해 왔던 죄와 실패 그리고 그들의 내적 필요를 계시하신다고 말한다. 또한 각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크게 베풀어 주시도록 성령님이 그 예배를 사용하실 때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바울은 불신자들이라도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전14:25)고 외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신자들이 깊이 감동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도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사로잡혀 감화를 받아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움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가운데 현저한 하나님의 임재 곧 하나님께서 찬송, 기도 그리고 메시지를 통해서 친히 말씀하심, 예배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이러한 것들로 우리의 목표를 삼아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만이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물로 영적 기갈을 풀어 줄 수 있다. 성령의 거룩한 사역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성령님은 찬송에 특별한 생명력과 기쁨을 더해 줄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예배드릴 때에 거룩한 침묵의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봉독되거나 당신이 공중 기도를 인도하는 동안 조용한 기쁨의 눈물이 흘러 내리게 할 것이다. 성령님은 당신의 메시지나 하나님의 사자로서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름부으시는 것을 느끼게 할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듣는 자들의 마음속에 개인적으로 역사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성령 사역은 하나님의 임재를 특별히 자각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배가 끝날 즈음 회중들에게 헌신의 결단을 촉구할 때에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을 주며 창조한다 에릭 리델은 영화 ‘불의 전차’에 등장하는 올림픽 육상 종목의 금메달리스트였다. 그는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에 성경 말씀을 묵상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은 이러한 묵상의 결과였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그는 올림픽에서 챔피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섬겼던 중국인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유능한 선교사가 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 역시 말씀을 묵상하였던 사람이었다. 찰스 웨슬리는 많은 찬송가를 작사했을 뿐만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가 작시한 찬송가들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자신의 삶을 헌신했는가를 잘 나타내 준다. 어느 작가는 말하기를, “찰스 웨슬리으 찬송가들은 마치 성경의 단어들과 성경의 직유와 비유, 그리고 성경 이야기와 성경 주제로 가득 찬 놀라운 스폰지와 같다”고 했다. 그의 찬송가 가사들은 나훔과 빌레몬서를 제외한 모든 성경책에서 인용한 2,500개의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다. 찰스 웨슬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결과로 현재까지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불려지는 교회의 찬송가들을 창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찰스와 요한 웨슬리는 귀신에게 고통당하는 구원받지 못한 한 여인을 위해 밤늦게까지 함께 기도했다. 이 두 형제는 이 여인에게 말을 하다가 성경 구절로 작시된 찰스의 찬송가를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 찬송을 불렀다. 마침내 그들이 떠날 때쯤 귀신은 그 여인을 괴롭히는 것을 멈추게 되었고, 그 여인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렸다. 조지 뮬러는 19세기에 영국에서 많은 고아원을 운영하며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역을 시작하기 전 뮬러는 먼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우선적인 부르심이라고 믿었다. 그가 자신의 우선적인 부르심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매일 성경을 묵상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중에서 최소한 한 가지는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일은 나의 사역을 위한 일이 아니라 양육되어야 할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묵상이 조지 뮬러의 사역에 얼마만큼 놀라운 영향을 끼쳤는지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그의 사역을 통해 많은 고아원들이 세워졌고, 그 고아원들에서 수백 명의 고아들이 양육되었으며, 또한 고아들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제자화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내 말에 거하면”이란 구절을 주목해 보라. 제자화란 ‘한두 달 동안 지속되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에서 배워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자화란 평생 계속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제자화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삶을 요구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씀 안에 계속 거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공부하며, 묵상하며,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씀 안에 참으로 계속 거한다는 의미는 그 말씀을 순종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약1:22). 야고보서에서 사용된 거울의 비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바라보면 마치 거울은 나의 모습을 반영해 주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잘 잤니 론, 오늘 아침에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오늘도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샤워를 하고, 면도도 하고, 머리도 잘 빗고, 이를 닦아야 되겠구나.” 그때 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거울이 나에게 보여 준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고,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나 자신을 깨끗하게 씻거나, 아니면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나는 이대로 지저분하게 보이는 것을 좋아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방법을 선택한다면, 거울이 하는 고유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며, 묵상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다뤄져야 할 부분을 보여 주시며, 우리 자신을 말씀에 순복하게 하신다.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변화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기능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않기도 결정한다면, 야고보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우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지 않는다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과 거역하는 삶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성숙한 사람들이 못된다. 이 땅에 거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앞으로 다가올 그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로 만드시려고 우리를 완전케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 따라서 제자화되는 과정은 일생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며,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그의 말씀 안에 거하라고 권면하고 계신다. 교회의 특성 교회란 하나님에 의해서 결성된 성도의 연합체이다. 즉 교회는 사람들의 뜻과 노력에 의해 조직된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하여 불러내심으로 이루어진 연합체이다. 이는 ‘교회’의 원뜻이 ‘불러내다’라고 하는데서도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려 사신 자신의 몸이다(엡1:23).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구원하시려는 데 있다(요6:39). 그러기에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되는데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의 연합체가 곧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는 사회의 여타 공동체와는 다른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 1. 교회의 일체성(Unity) 교회가 하나인 까닭은 그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며 또한 그와 연합된 성도들이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고전12:12-27;엡4:4-16). 뿐만 아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의 연합체라는 점에서 하나이다. 이 같은 일체성은 인종과 남녀, 빈부와 신분의 차이뿐 아니라 시대와 지역간의 거리를 초월한다(갈3:28). 한편 이 같은 교회의 일체성을 계속적으로 유지시켜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엡4:3). 2. 교회의 거룩성(Holiness)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다. 예수께서는 그 같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 결과 그분의 대속 사역을 믿고 그의 공로를 덧입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롬3:21-28).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성도들의 연합체인 교회는 거룩하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날마다 성화되어가는 자이다(갈5:22,23). 더욱이 성도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레11:44)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거룩하게 되어야 할 자들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교회는 거룩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3.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 이는 교회가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하는 연합체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4. 교회의 사도성(Apostolicity)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셨을 뿐 아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일구어 놓은 복음 사역의 터전 위에 교회가 굳게 세워질 것을 의미한다(엡2:20).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능히 교회를 이길 수 없다. 바울의 성령론 바울의 기독론과 종말론은 바울의 성령론에 의존해 있는 만큼 바울의 성령론은 바울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베드로와 누가의 신학적 전통에 따라 영을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의 나타남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로마서 8장은 바울의 성령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성령의 본질과 사역에 대해 여러 가지 통찰을 제공해 준다. 성령의 신학적 측면들과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성령의 본질, 그리고 성령의 여러 가지 사역과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삶으로 나누어 바울의 성령론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성령의 신학적 측면들 초대 교회 전통을 흐르다가 바울에게 와서 확립된 성령에 대한 이해는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다. ① 비피조자로서의 성령 성령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성령은 피조자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유일 무이한 영이시다. ② 비물질적 존재로서의 성령 성령은 어떤 생물이나 물체의 모양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그분은 순수한 영이며 따라서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③ 비시간적 존재로서의 성령 성령의 가르침과 전통적 성령론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볼 때, 성령은 성부와 함께 영원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즉 성령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오순절 사건을 일으켰고 오늘날에도 개인과 교회에 역사하신다. 즉 성령은 초시간적 존재이시다. ④ 초공간적 존재로서의 성령 성령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신다. 즉 성령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동시에 동참하시며 임재하시는 분이시다. ⑤ 체험의 대상으로서의 성령 성령은 대자적으로만 존재할 뿐 아니라 대타적으로도 여러 가지 사역을 감당하신다. 이사야6장;요한복음20:22;사도행전2장에서 확인되듯이 성령은 이론으로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양태로 현존하신다. ⑥ 역동적 존재로서의 성령 성령은 인간의 요구나 방법에 의해 사역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은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자유롭게 사역하시며 우리를 하나님께 맞춰주신다(The Spirit adjust us to God, Irenaeus). 성령은 온전히 자유로우며 본질상 역동적이시다. 2. 바울 서신에 나타난 성령의 본질 바울 서신에는 종래의 전통적인 성령의 이해를 뛰어넘고 확장시키며 보다 인격적인 본질로 나아가는 것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즉 누가가 이해한 성령은 승천하신 하늘의 그리스도와 지상의 백성을 이어주는 고리였다면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 안에 임하시는 양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여러 신학적 본질 외에 인간을 사로잡고 인간을 온전히 이끄시는 인격자로서의 성령에 대한 이해이며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 양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울 서신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① 성결의 영. 롬1:3,4 ② 새로운 삶의 동기가 되는 성령 롬8:2;갈라디아서3:2에서는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동기이며 원리로 이해된다. ③ 인간 특유의 권리와 위엄을 부여하시는 성령. 데살로니가전서4:18. ④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인 성령 고린도전서2:13;에베소서2:18에 나타나는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모든 세속적, 육체적 분열들을 초월하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⑤ 그리스도와 역동적 동일성을 이루시는 성령 갈라디아서5:22,23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께서 그의 교회안에 거하시며 사람들의 생활 속에 역사하시는 것은 그의 성령을 통해서이다. ⑥ 충만한 소망을 주시는 성령 롬14:17;15:13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되고 충만한 소망을 누리게 됨이 나타나 있다. ⑦ 전적인 구원의 보증자 롬8:23;고린도후서5:5에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보증하는 분으로서 성령이 언급된다. ⑧ 은사를 베푸시는 성령 데살로니가전서1:5에는 영적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 데살로니가전서1:6에는 내적 기쁨을 샘솟게 하시는 분으로, 데살로니가전서4:4-8에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정결을 가능케 하시는 분으로, 데살로니가후서2:13에는 종교적 성별을 베푸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듯 바울이 성령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스스로 생각해 낸 그 무엇이나 바울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그에게 임해서 그 자신을 사로잡은 인격자였다. 즉 죄가 육을 지배하는 것에 대립하고 신자들에게 순종과 은혜를 주시는 주도자로서 사람을 지배하시는 인격자인 것이다. 3. 성령의 여러 가지 사역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일반적 사역론과 로마서8장에서 말하는 특정 사역론으로 나누어 살펴봄으로써 보다 종합적 이해를 도모하도록 하자. ① 성령의 일반적 사역론 성령은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가? 성령은 본질적으로 성부, 성자와 분리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요한복음15:26;16:13,14에서 말하는 성령의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 성령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영역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신다. 첫째로, 성령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 가르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한다. 둘째로,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여 그를 영화롭게 한다. 셋째로,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 예수의 성품을 재현시킴으로써 예수를 영화롭게 한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봉사하도록 인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하도록 하심으로 예수를 영화롭게 한다. ② 로마서8장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론 로마서8장에서 성령의 사역은 특별히 네 분야로 묘사된다. 첫째, 우리의 육신 곧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관련할 때 성령은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신다(롬8:5-13). 둘째, 우리의 아들됨 곧 하나님의 양자됨에 관하여 성령은 증거하신다(롬8:14-17). 셋째로, 마지막 날에 있을 우리 몸의 구속(redemption)을 포함한 우리의 궁극적인 유업에 관련하여 성령은 우리의 영광스런 유업을 보증하신다(롬8:18-25). 넷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통하여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의 기도에 관련하여 성령은 기도하는 중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롬8:26,27). 4.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삶 성령을 인격자로 이해할 때 그분은 죄를 정복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정복하시고 우리의 새 주인이 되신다. 그러므로 바울의 성령론의 결론은 성령 안에 있는 자의 거룩한 삶의 특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① 성령의 역사하시는 영향력의 특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강제적으로 우리를 여기저기 끌고다니며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영이 아니라, 우리를 공포에서 해방하시고 기쁨을 주시는 영이다. 따라서 그 영향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미친다. 첫째로, 성령의 영향력은 간헐적이 아니라 지속적이다. 둘째로, 성령의 영향력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보호적 성격이 아니라 교정적 성격을 지닌다. 셋째로, 성령의 영향력은 단순히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를 억압하거나 억제하기보다는 도우시며 격려하신다. ②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삶 성령을 좇는 자 즉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삶은 몇 가지 특권을 누리며 산다. 첫째, 성령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다. 그것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할 때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은 것과 같다. 둘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가 된다. 성령 안에서 양자가 된 그리스도인은 새 부모에게 속하여 가산과 사회적 지위를 얻을뿐더러 생활 습관도 달라져야 한다. 셋째,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은 복된 확신을 누리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언제나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감사함으로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후사 즉 상속자로서 영원한 기업을 누리며 살게 된다. 결국 성령을 좇아 사는 성도의 삶은 창조의 영이며(시104:30), 지혜의 영이며(신34:9), 예언의 영이며(삼상19:18-24), 인도의 영이며(요16:13), 지식의 영(행5:1-11)과 함께 더불어 살아감으로 그리스도의 영화로움을 함께 나누게 되는 것이다. 전진하라! ‘전진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음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지하고 있는가! 위험의 저편을 보고 모험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을 향해 “목표를 향해 전진하라!”고 외치는 사람은 또 얼마나 적은가! 우습지 않은가? 이것은 사람의 내적 능력, 즉 모든 위험과 곤경에도 불구하고 상상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도취되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산을 타는 사람들이 밧줄로 뒤에 있는 사람과 연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 집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맨 뒤에 있는 자는, 마지막으로 영광을 맛만 보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눈썰매를 끄는 허스키 팀과 같다. 앞에서 끄는 개는 뒤쪽에 있는 다른 개보다 훨씬 더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 처음 부딪히는 장애가 있는 만큼의 미래만 내다볼 수 있는 근시안적인 운명 철학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절하는 환상가들을 보면 나는 기분이 좋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에 나는 기쁨을 느낀다. ● 에디슨은 그의 조력자들이 백열 전구의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의혹을 제기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를 향해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어도 물러서지 않았다. ● 미켈란젤로는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조각과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다. ● 린드버그는 모든 사람들이 조롱하고 죽을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것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 더글라스 맥아더는 2차 대전의 최암흑기 동안에도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 파파 텐 붐은 안전한 피신처와 은둔처를 필요로 하는 겁먹은 유대인들에게 ‘예’라고 대답했다. ● 유명한 줄리아드 음악 대학에서는 목발과 휠체어를 의지한 펄맨이라는 성공할 것 같지 않은 바이올린 학생을 받아들였다. ● 톰 설리반은 맹인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이 되기로 결심했다. ● 게이더 부부는 샌디 패티라고 하는 겁먹은 젊은 소프라노 가수를 위해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장소를 비워 주었다. 샌디 패티는 후에 ‘그를 보리라’(We Shall Behold Him)로 기독교계를 감동시켰다. ● 우리의 주님께서는 하늘을 떠나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 고난의 길을 내내 가시는 가운데에서 이러한 모든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외에도 여러분은 수많은 사례를 알고 있을 것이다. 혹은 여러분 자신이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속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관념에는 미완성된 부분이 있다. 우리는 거의 매일, 또는 매주, 일생에 가장 대담하고 위험한 항해를 할 생각을 하며 손수 만든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당신의 친구일 수도 있고, 배우자나 직장 동료, 이웃 내지는 가족 중에 부모나 형제, 당신 자녀일 수도 있다. 가능성의 대양은 여전히 놀랍도록 유혹적이며 한편으로는 무섭도록 위협적이다. 그들을 계속해서 재촉하라! 찬송표를 던지고, “너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하고 소리쳐 주어라. 그들이 가장 절실히 듣고 싶어하는 말을 기꺼이 해 주라. “목적을 향해 전진하라!”고 말이다. 그런 다음 열심히 기도해 주라. 우리의 문제는 잠재력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인내심의 부족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장점을 듣기보다는 단점에 귀를 기울이는 바로 그것에 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교각 맨 끝에 서 있는 용감한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 우리를 재촉하며 확신시켜 준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겠는가? 성품을 계발시키고 확장하고 깊이를 더하는 사람들은 비록 다수의 사람들이 “안돼”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가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윌리엄 스태포드는 한 인터뷰에서, “언제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시인으로 태어납니다. 즉 시인이란 언어가 어떻게 소리나고 활용되는지 그 방법을 발견하는 사람이며, 말을 좋아하고 말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입니다. 저는 다만 모든 사람들이 시작한 일을 계속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려면 ‘왜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었는데 당신은 계속하고 있습니까?’라고 해야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가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적용 ――― ‘보통’이 되기는 얼마나 쉬운가? 오늘날은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고 앞날이 빤히 내다보이는 일을 하는 평범한 부류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반면에 색다르게 사는 사람은 얼마나 드문가!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새로운 일을 하시기를 기도하라. 당신의 눈을 들어 예상되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을 볼 수 있게 하시고 당신을 계발시켜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야를 넓혀 주셔서, 자신들의 추적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거의 포기 직전의 위험에 놓여 있을 때 당신에게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과 격려의 말을 허락해 주심으로, 그들에게 찬성표를 던지고 “전진하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한다. 에스더4장을 읽으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 사도 바울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성도의 네 가지 법칙과 그 법칙의 근거를 항상 유념하며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데에 몇 가지 법칙이 있다. 첫째 법칙. ‘받으라’(롬14:1)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처럼 숨은 동기를 품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으라는 것이다. 둘째 법칙.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특별히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다른 성도들을 경시하기 쉬우며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 이웃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셋째 법칙. ‘판단치 말라’는 것이다. 특히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이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넷째 법칙. ‘각자가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각자의 생각과 능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 법칙은 방종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책임있는 신앙의 자유가 개인에게 철저히 주어졌음을 언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 중심의 생활 법칙은 아래와 같은 신학적 근거를 갖는다. 근거1.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롬14:1-3). 믿음이 약한 자나 믿음이 강한 자 모두를 하나님께서 직접 받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신 자를 우리가 서로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않는 것이다. 근거2. 하나님께서만 인간을 판단하신다(롬14:4).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롬14:5-9). 양심의 문제에 관해서는 신자끼리 책임을 묻거나 따질 수 없다. 그리스도만이 거듭난 우리 각자의 양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판단만이 전적으로 유효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귀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또한 보존되어야 한다. 근거3. 연약한 자든, 강한 자든 그들의 행위는 주님을 위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롬14:6-9). 가려먹거나, 자유로이 먹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들은 모두 주를 위하여 먹는 자이며, 특별한 날이 있거나 다 똑같은 날이거나 그들은 모두 주를 위하여 살고 있다. 옥합을 깨는 여인의 중심을 받으셨던 예수께서는 그들의 계산대로 여인을 판단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지 않으셨던가(막14:3-9)? 지금도 주께서는 방법의 시시비비보다는 믿음과 중심을 직접 받으신다. 근거4.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심판대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있다(롬14:10-12).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그분께 순종하는 생활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신앙 상태를 늘 점검해보고 진실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와 같은 자기 성찰은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며 타인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므로 나 중심의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특별히 교회 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오직 자신을 살펴 장래의 심판대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럽지 않게 영접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일상의 삶 전체가 제자도의 장이다 나의 실제 생활이 예수의 제자의 삶의 장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을 알면 요즈음의 “전임 사역”과 “시간제 사역”의 구분에서 비롯되는 시끄러운 분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구체적으로 종교적인 일에만 헌신된 자가 아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예수로부터 내 삶, 내 모든 삶, 내 실제 삶을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분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그분의 삶은 비할 바 없이 놀라운 삶이었다. 그러나 그 삶은 이미 끝났다. 나도 그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분 자신도 그 삶을 다시 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어떤 경우이든 그분은 내 삶, 즉 나라는 존재 자체에 관심이 있으시다. 거기에 나의 필요가 있다. 나의 필요는, 내 삶을 살되 그분이 나라면 살아가실 그 모습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로서 나는 반드시 특별한 종교적인 일-“전임 사역”의 일부로서든 “시간제 사역”의 일부로서든-을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규정 가능한 한계 안에서 예수의 제자도는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종교적인” 것이든 아니든 모든 것은 거기에 귀속된다. 로렌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성화(sanctification)는 우리의 일을 바꾸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흔히 자신을 위해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기도 시간은 다른 시간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다. 우리에게는 기도할 때 기도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 못지않게 행동할 때 행동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할 준엄한 의무가 있다. 예수의 가르침 자체가삶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천국의 삶에 아주 중요하다. 그분의 가르침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은 누군가의 삶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각자에게 자동적으로 삶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존재요 우리가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삶이다. 우리는 삶의 진정한 존엄성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우리는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은 거기 현실 생활의 한복판에 있는 당신이오.” 복음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허락된 시간, 장소, 가족, 이웃, 재능, 기회 속에서 내게 주어진 삶을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성경에 남겨진 그분의 말씀은 특정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방법에 관한 일반적 가르침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준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노선을 따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인간의 삶을 괴롭히는 문제들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7장의 가르침의 초점을 살인과 분노, 멸시와 정욕, 가족의 거부, 언어 폭력 등에 맞추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것이 실제 삶이다. 그분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삶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이들의 삶의 모든 지점과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천국의 삶은 단순히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의 제자의 일차적 관심은, “해 아래서” 자신의 날 동안 행해질 수 있는 긍정적 선과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마25:34)를 향해 자라 가며 내면에 이루어 가는 긍정적 힘과 덕에 있다. 우리가 평생 동안 자신의 삶에서 얻는 것은 장차 되어질 자신의 인격이다. 하나님이 얻으시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현실 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가족과 직장과 공동체-특히 신앙공동체-를 잘 가꾸는 것이야말로 스승과 동행하는 제자의 삶의 핵심이 된다. 바로 그 전체 정황을 염두에 둘 때에야 우리는 가장 풍부하고 정확한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예수로부터 내 삶을 사는 법을 배우되 그분이 나라면 내 자리에서 사실 그 삶을 배운다.” 양자의 은택 양자됨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은 우선 은총으로의 회복이다. 인간이 은총 아래 있기 전에는 그는 자연인이요, 율법적 상태에 매여 있었다. 인간은 그가 지킬 수 없는 율법에 매여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데, 양자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상태에 들어 가게 된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의 멍에에서 벗어났다(롬8:15). 즉 복음적 상태에 있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화목한 관계가 되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17) 그러므로 양자된 그리스도인은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롬8:17)이다. 율법 아래서는 종이었으나 복음 안에서 자녀가 되었으므로 자녀의 특권을 현세와 내세에 누리게 된다. 그리고 자녀의 특권을 가짐으로서 상속권도 가지게 되었다. 종과 자녀는 모두 한 집에서 한 주인을 모시고 살지만, 신분과 특권이 다르다. 종은 법으로 매여 있으며, 의무감에서 섬기며, 상속권이 없다. 그러나 자녀는 혈육으로 매여 있으며, 주인(아버지)을 사랑하며, 상속권을 가진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기업의 권리와 자젹을 가진다. 베드로는 이 상속권을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벧전1:4)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확신을 영의 증거를 통해 가지게 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롬8:16) 웨슬레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확신의 도리-영의 증거의 도리-이다. 구원 받은 자는 그 마음 속에 구원의 확신을 영의 증거를 통해 가진다. 영의 증거에는 먼저 성령의 증거가 있고, 다음으로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가 있다. 웨슬레는 이 증거는 우리가 중생할 때에 주어지지만, 그때만 단한번 순간적으로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성결함을 받았을 때도 그리고 그후 일생동안 지속된다고 보았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구원의 확신은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구원 받았음을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문제는 신자에게 중대한 과제가 된다.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신앙에 활기와 소망을 준다. 오늘의 삶에 활력을 주는 이 확신이 이 양자됨에서부터 주어지는 축복이다. 구원의 확신으로서의 영의 증거는 성도 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행하는 자의 복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2,25).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즐거워 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기만입니까!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듣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에 전혀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렵게도 이런 일은 오늘날 너무나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만약 고용인들이 이렇게 한다면-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그들은 분명히 노발대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은 너무나 완벽하여, 이런 사람들은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만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 원인은 사람들이 종교 활동을 하거나 혹은 예배를 드리면서 경험하는 ‘듣는 기쁨’을 오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정신은 명쾌하게 제시된 진리를 기뻐합니다. 우리의 상상도 진리의 여러 예증들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진리를 적용해 보는 데서 한껏 고양됩니다. 활발한 정신은 지식을 기뻐합니다. 실천적인 적용 의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은 단지 지식이 가져다 주는 기쁨만을 위해서 과학의 한 분야-가령 전기학 등-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이와 똑같이 사람들도 교회에 가서 설교를 즐기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조금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과 회개한 사람이 똑같이 죄를 짓고, 그것을 고백하고, 또 다시 죄를 짓는 일에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만의 두 번째 원인은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는 데 무력하다는 교리를 크게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순종할 수 있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거룩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믿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죄를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생각합니다-하나님이 인간의 무능력함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엄격한 순종을 기대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결심을 뿌리째 잘라 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일을 진지하게 믿고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을 잃게 되고, 그리하여 죄 가운데서 늘 자족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이것은 너무나 두려운 자기 기만입니다! 자기 기만의 세 번째 원인은 특별히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관련된 것인데, 듣거나 읽는 것을 어떤 의무, 즉 신앙적인 공헌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아침에 말씀을 읽으면서 5분이나 10분을 보냅니다. 우리는 전심을 다해 집중해서 읽습니다. 우리는 읽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충실히 행함으로써, 양심을 편케 하고 만족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법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무디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한 것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또한 말씀이 명하는 사람이 되는 데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우리는 골방에서, 즉 아침 경건 시간에 이러한 기만을 찾아내고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의 규칙적인 성경 읽기를 방해하고 우리가 이미 세워 놓은 계획을 망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런 결과는 별로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미흡하게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편이 훨씬 더 유익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이라.”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 마음만이 신성한 교훈을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능력 있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우리의 지식은 아무 유익이 없고, 단지 머리만 기쁘게 하는 지식일 뿐입니다. 인생에서, 학문과 예술에서, 사업에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하는 것뿐입니다. 행할 수 없는 것은 완전히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우리의 감상과 상상이 만들어낸 하나님인지, 아니면 만물을 통치하시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인지를 판가름해 줄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만,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그분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천하지에 우리가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연합하지 않고도 그분 자신과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이러한 자기 기만을, 골방의 고요함 속에서, 개인적인 성경 읽기를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정신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겠다’는 결심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을 보여 주는 한 예입니다. 산상 설교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이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매일 최선을 다하는가? 나는 기꺼운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분에게 구하며, 그분이 내 안에서 이 일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는가? 나는 이것-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라는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인가?“ 우리는 팔복, 그리고 산상 설교를 공부해 나가면서, 각 구절마다 “나는 이것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나는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가?”고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은 “나는 지금까지 전혀 이렇게 살지 않았고, 그분의 말씀을 행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거의 믿음과 행동을 완전히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겠다’는 맹세가 성경 공부나 실생활 속에서 실제로 이행되었는지 재검토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반성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심령의 가난을 체험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불어 넣어 주시며 당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안에서 친히 이루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분이 성경을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다”고 말할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인간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거니와(롬3:24)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인간의 믿음’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은총의 구약적 배경 구약에서 ‘은혜’ 또는 ‘은총’(헨)이라는 말은 ‘호감을 얻는다’(창30:27;잠13:15), ‘관대하다’(삿21:22), ‘자비하다’(신28:50), ‘구원하다’(출33:19)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구약의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이었으나 반역하는 자기 백성을 회개하고 돌아올 때는 언제나 은혜스럽게 받아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시다(호6:1).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은 신약에 와서 예수의 은혜로우심으로 이어진다(막5:19;10:47). 2. 은총의 성격 은총은 하나님의 부드러운 속성이나 호의라는 개념으로만이 아니라 지금 인간에게 일어나는 현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무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금 일어나는 은혜의 나타남이라는 것이다. 진노는 계시되는 사건, 즉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처럼(롬1:18;2:7) 은총 역시 계시되는 사건으로서 인간에게 영생과 구원의 선물을 준다(살전5:9). 또한 은총은 보수로 받는 것이 아니라(롬4:4) 은총의 지배 속에 들어가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롬5:21). 3. 은총과 믿음 바울은 오직 은총을 강조하는 동시에 오직 믿음을 역설하였다. 은총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믿음은 은총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태도이다. 믿음은 확신과는 다른 것으로서 인간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맡기고 순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구속의 선물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철저한 태도이다. 은총과 믿음은 분리되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새로운 인간은 믿음의 지배 아래 사는 자이다(롬3:27).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기 의의 주장이 전혀 없는 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이며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오늘날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만이’라는 바울의 신학 사상은 교회를 지탱하는 역동적인 힘이 될 것이다. 바울의 ‘오호라’ 고백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백은 바울 내부의 극렬한 갈등을 절규하는 말이다. 이사야 6:5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오호라!’라고 절규하였다. 또한 계시록 3:17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환상을 묘사하면서 요한사도는 ‘곤고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이 두 가지 비탄의 표현을 한꺼번에 사용하면서 자신을 ‘사망의 몸’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그러면 이 극도의 절망과 고통은 바울에게 있어서 어느 때의 경험일까? 또 성도들은 언제 이런 절규를 하게 될까? 그 시점에 따라 이 고백의 의미와 교훈이 달라진다. 이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바울의 신학적 의도와 구원사적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자. 1. ‘오호라’ 고백의 경험 시점 이 고백이 일반적 사건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직접 겪음으로써 뼈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울부짖음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 고백이 바울의 회심 이전인지, 아니면 회심 이후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두 가지 이견을 살펴보도록 하자. ① 회심 이전의 경험이다. 초대 교회 당시부터 중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초기엔 그렇게 주장했으며 불트만(R. Bultmann), 다드(C. H. Dodd), 큄멜(W. G. Kummel), 리델보스(H. R. Ridderbos), 위트니스(Witness)등이 이 고백은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있던 사람, 즉 율법 아래서 절망적인 투쟁을 벌이던 바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로마서 6장에서 8장까지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로마서 7장 24절에 나오는 ‘오호라’ 고백이 바울의 구원받기 전의 경험임이 금방 발견되어진다고 한다. 바로 로마서 8장 1절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고 한다. ‘오호라’ 고백은 그 당시 바울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호라’ 고백의 경험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즉 구원받기 전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로마서 6장과 8장 사이에 자신의 구원받기 전의 경험을 기술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율법 아래에서 자기의 의를 찾으려고 노력하던 바울의 결론이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사망의 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구원받기 전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 율법을 지켜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하기보다는 은혜의 자리로 나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만날 것을 당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② 회심 이후의 경험이다. 그러나 신앙에 들어선 자는 죄의 용서를 받았으므로 이런 심각한 죄와의 싸움은 없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의견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반박되고 있다. 첫째, 본서를 체계있는 논문으로 인정하는 바 논술의 순서로 보아서도 바울의 ‘오호라’ 고백을 구원받기 이전의 경험으로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지 않고 믿음에 의해 의로 인정되는 ‘이신 득의’는 5장에서 확립되었다. 6장부터는 의로 인정함 받은 자가 현실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문제 즉 성화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다시 칭의 이전의 경험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논술의 순서로서 부자연스럽다. 둘째, 율법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에 의해서만 의로 인정받는다는 원칙을 입신(入信)의 경험에만 국한시키고 입신 후에 생활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물론 신앙에 의해 죄는 용서받는다. 그러나 육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를 죄는 여전히 노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우리를 탈환하여 다시 죄의 포로로 만들기 위해서 죄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리고 죄는 율법을 그 수단으로 계속 이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회심 이전에는 자신의 곤고함을 경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영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절망하고 자신의 삶을 ‘오호라 곤고하구나’라고 고백하며 영적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오호라’ 고백은 회심한 이후의 성결해가는 과정 속에서 율법을 이용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죄와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성도에게 있어서 ‘오호라’ 고백의 경험 시점 물론 바울의 경험 시점과 우리의 경험 시점을 그대로 일치시켜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바울의 경험 시점과 일반 성도들의 경험 시점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성도들 중에도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위트니스(Witness)는 ‘오호라’ 고백은 ‘바울의 경우 구원받기 전의 경험을 기술하지만, 그것은 또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받은 후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그 시점을 달리했다. 또한 미톤(C. L. Mitton), 로빈슨(John A. T. Robinson) 등은 ‘일종이 타협적인 주장 즉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 도덕적으로 열심인 어떤 사람의 체험에 대한 묘사이다’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에 ‘오호라’ 고백의 성도들의 경험 시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①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고백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로, 초대 교회의 희랍 교부들 사이의 일반적 견해이다. 둘째로, ‘오호라’ 고백을 불러일으키는 ‘죄 아래 팔렸도다’, ‘육신에 속하여’와 같은 표현들은 성도에 관한 묘사라기보다는 구원받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로 더욱 적절하다. 셋째로, 만약 롬8:1에 나오는 ‘이제’라는 말이 통상적인 뜻을 의미한다면 바울의 ‘오호라’ 고백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고찰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구원받은 경험을 논하면서 ‘오호라’ 고백 이전의 서술 과정에 성령과 심지어 그리스도마저 빠져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함 받기 이전의 상태에서 바울과 같이 자신의 의를 추구하다 지치고 무너진 채 ‘오호라’ 고백을 하는 것이다. ②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 도중의 고백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로, 개혁 교회의 신학적 기초라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의 견해이다. 둘째로, 헬라어 동사의 시제를 살펴보면, ‘오호라’ 고백문에는 현제 시제가 사용된다. 즉 ‘오호라’ 고백은 성도가 칭의받은 후 지금부터 앞으로 지속될 고백임이 현재 시제를 통해 암시되고 있다. 셋째로, 본서 전체 문맥의 진행 과정을 살펴볼 때, ‘오호라’ 고백이 속한 로마서 7장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넘어서서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오호라’ 고백은 구원받았으나 이 땅에서 생명을 마칠 때까지 죄와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끊임없는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화란 결코 일정 수준 이상이면 만족되는 그런 완성의 개념이나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이므로 ‘오호라’ 고백은 구원 받은 성도가 세상 끝날까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고뇌와 부르짖음이다. 이렇게 볼 때 ‘오호라’ 고백은 죄에 지고 말았다는 단순한 절망의 결과가 아니라 실로 죽음에까지 처하는 극한적 영적 투쟁의 고뇌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결국 이런 고뇌의 목적은 보다 장성한 분량의 거룩한 삶을 이루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오호라’ 고백을 통해 표출되는 현재적 고뇌는 오늘을 사는 성도들의 고뇌이며 8장에 이어질 미래적 승리의 확신을 위한 서곡인 셈이다. 3. ‘오호라’ 고백의 의미와 교훈 앞에서 살펴본 두 가지 상태는 반드시 흑백 논리로 한 가지를 버리고 다른 하나만을 취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실지로 ‘오호라’ 고백의 출발점이나 그 고백의 기본 내용이란 언제나 궁극적인 존재자이며 우리의 구속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완전 무능역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겐 나 자신을 의롭게 할 그 어떤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오호라’ 고백은 칭의 받기 이전에도, 칭의 받은 후 성화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신앙 자세이다. 우리의 몸 안에 거하는 한 죄와의 싸움은 불가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행위나 자기의 힘에 의해 자신이 성결해지는 일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만큼 신앙의 길에서 죄의 곁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제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바울의 고백은 어떤 의미일까? 첫째로, 그것은 자신의 무능력을 알고 깨달아 외치는 외침이다. 둘째로, 자신의 죄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게 하는 해방자를 갈망하는 외침이다. 셋째로, 해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신호이다. 이 경우 ‘오호라’ 고백은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외침이다. 더 나아가 넷째로, 이 고백은 단순히 죄로 인한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에 대한 고통의 절규가 아니요 하나님의 법을 이루지 못한 고통의 부르짖음이며 간구이다. 이렇게 해서 이 ‘오호라’ 고백은 또한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의 과정에서 계속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의탁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거듭나기 전에 부르짖은 우리의 ‘오호라’ 고백이 의의 세력을 누르는 죄의 세력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라면, 거듭난 이후의 ‘오호라’ 고백은 죄의 세력을 누르고 지배하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나 자신과 삶 전체를 맡긴다는 기도이다. 마음과 생활의 성결:기독자 윤리의 완성 웨슬레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기독자 완전을 추구하도록 호소한 것은 기독교 윤리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웨슬레의 윤리는 -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 모두 - 신학적 기초를 든든히 가지고 있으며, 성결은 기독자 윤리의 최종 단계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생의 중요성은 성결을 그 결과로 가져오는데 있다. 성결은 기독자 윤리의 최고봉이요, 완성이다. 가장 성서적 의미에서 성결은 사랑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 윤리의 시작이요 마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이 솟아난다. 후자는 전자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가 불가능하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소극적으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으로 나타나지만, 거기에만 머물 수는 없다.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에 선행을 하도록 요청한다. 이 사랑은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모든 가능한 정도로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요구한다. 사회와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이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웨슬레는 강력히 부인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없이는 성결이 불가능하고, 이 신앙은 선행없이는 발생도 유지도 어렵기 때문이다. 웨슬레의 종교적 사상은 훌륭한 사회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선행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것은 모두의 의무이다. 만일 누가 이런 열망을 무시한다면, 그는 성화되거나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이미 받은 은혜도 다시 받을 수 없으며 신앙을 지속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속 거할 수도 없다. 웨슬레는 선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종교적인 것으로 헌신, 기도, 자기 훈련, 성서 연구 등이다. 두 번째는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자비로운 선행이다. 이러한 선행들은 우선적으로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지만, 이를 추구함에 있어서 성도의 삶에서 나타나야 할 윤리이다. 웨슬레의 종교적인 견해와 사회 윤리에 대한 가르침은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양자는 참된 기독교의 개념 안에서 하나이다. 그리고 성결은 웨슬레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종교적 윤리와 사회적 윤리의 최종 단계요 목표이다. 진리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진리’라는 용어는 요한이 다른 신약성경의 저자들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중요시했던 개념이다. 특히 그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이었던 헬라 문화권에서 이해되는 ‘진리’ 개념과 기독교적인 진리의 개념을 구별하였다. 그것은 헬라적 개념으로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곡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 사상들과 비교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구약성경의 개념 ‘진리’란 말에 상응하는 히브리어는 ‘에메트’이다. ‘에메트’라는 명사는 ‘버티다’, ‘지지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단어의 구약성경의 용례는 주로 ‘견고한’, ‘단단한’, ‘의지할 만한’(창42:16), ‘신실한’(신7:9), ‘영구한’(시89:29) 등이 있다. 이 같은 번역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에메트’는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추상적인 성질들이 아니라 생태적인 힘을 통하여 변하지 않고 완전하며 견고함을 유지해 나가는 능력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용어가 하나님에 대해서 적용될 때에는 그의 백성들이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갖는다(시146:6). 또한 적지 않은 구절에서 ‘에메트’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을 의미하는 ‘헤세드’와 짝을 지어 나온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는 거짓됨과 반대되기 보다는 ‘변덕스러움’과 반대되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창32:10;시25:10;26:3;40:11). 즉 ‘진리’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해 사용될 때 이는 일관성과 불변성 등과 같은 하나님의 본성이나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산성이요, 피난처요, 반석으로 불리기에 합당하며 그의 백성들이 능히 의지할 분이시다. 2. 헬라적 개념 이것은 주로 플라톤주의(platonism) 내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말하는 바 여기서는 주로 이원론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들의 진리 개념은 참된 실재로서의 이데아(Idea)와 그림자에 불과한 오상의 세계를 분리하고 이중에서 전자의 세계를 추구한 데서 유추된다. 즉 오상과 가상의 세계를 존재케 하는 원인으로서의 이데아 세계를 상정하고, 이것만이 유일한 실재 즉 진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출생때부터 오상의 세계에 익숙해진 인간들이 이데아의 세계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한데, 그것을 ‘수학’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수학을 이데아에 이르기 위한 예비 학문으로 보았던 것이다. 3. 요한복음에서의 개념 진리의 개념에 관한 한 요한은 구약적 개념을 철저히 견지하고 있다. 요한 복음에 쓰인 ‘진리’(αληθεια,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특성인 ‘에메트’와 같이 신적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개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관점에서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의 인격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통해서 나타났다. 예수는 진리를 말씀하셨고(요8:40,45) 진리에 대해 증거하셨다(요18:37). 이 진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증거로만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알려주는 것이다(요7:18;8:16).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말한 모든 것은 곧 진리이다(요17:6,14,17). 또한 이 진리는 예수의 지상 사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통해서도 증거된다(요14:17;15:26;16:13). 물론 이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구속을 이해시키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요16:13). 즉 요한복음에서의 진리 개념은 구약의 개념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관점을 덧붙인 것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개념은 헬라적 개념과는 확연히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요한복음의 진리 개념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해일과 같이 엄청난 기세로 덤벼드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장하는 대로 살아감으로 세상 죄와 악으로부터 분리되고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생활의 지표가 되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하신 말씀의 중심 메시지였다. 그래서 신약성경 중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중심으로 기술된 사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이 다른 곳에서보다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렇듯 사복음서의 여러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나라와는 대조되는 개념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공관복음과 본서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 개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하자. 1. 공관복음에서의 ‘하나님 나라’ 마태는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 곧 ‘천국’이란 용어를 34회나 사용하고 있고 마가와 누가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였다. 여기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실상 같은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최고의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그의 왕적 통치권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권은 선택을 받은 당신의 백성 및 그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에 대하여 실행되어지며 그 목표는 인간을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낸다는 구속사적 관련 하에 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한 의미가 공관복음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 스며 있음은 물론이다. 이를 전제로 공관복음서 각 권마다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적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마태복음 마태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을 강조하면서 장래에 도래할 종말론적(eschatological)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마6:10;16:28). 이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dynamics)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는 실제 역사 속에서 사단의 세력을 축출하고 불신자들에게 심판을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 이르기까지 그 영역이 계속 확장되어 간다는 점에서 역동적임을 말해준다(마13:36-43;19:28;25:41). 이러한 의미에서 마태는 예수의 권능으로말미암아 귀신이 쫓겨나가고 예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단이 결박당하며 마지막 때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파멸을 당할 것이라는 일련의 예수의 사역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언급하였다(마12:28,29). ② 마가복음 마태복음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은 예수의 지상 사역은 우리들 가운데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었다는 점의 부각이다(막4:26-29). ③ 누가복음 마가복음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의미를 염두에 둠과 동시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부각시키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대답하신 사실을 누가의 기록 속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수 자신의 지상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뿌리를 내렸다는 의미인 것이다. 2. 요한복음에서의 ‘하나님 나라’ 요한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단지 2회에 불과하다(요3:3,5). 하지만 그 나라에 관련된 표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의 왕의 의미로 언급한 것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이스라엘 임금’(요1:49), ‘이스라엘의 왕’(요12:13), ‘너의 왕’(요12:15), 등과 같은 표현들이 나온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요18:36). 본서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경우처럼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라는 ‘이중적 종말론’(twofold eschatology)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보다 엄격히 말하면 현재적 종말론 혹은 실현된 종말론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 보면 본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요한에 의해 ‘영생’이란 표현으로 대치되어 현재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요3:15). 요한은 헬라 문화권 속에 있는 독자들에게 보다 더 실존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한층 생동감을 주는 영생이라 개념을 사용한 듯하다. 즉 요한은 영생이란 믿는 자들이 우선적으로 소유하는 현재적 소유물로 나타냄으로써 믿음의 생동감을 주고 있다(요5:24). 따라서 본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영생이란 개념으로 투영된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이로써 요한은 막연히 미래적인 인상을 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이고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실존적인 의미로 증거하여 신학적 문제를 진일보시켰다. 양자 1. 양자의 의미 양자가 되는 일은 하나님의 선언적 행위이다. 그것에 의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관해 칭의되어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이 회복되어 진다. 양자는 칭의와 중생과 동일한 순간에 생겨지는 일이지만 사상의 순서에 있어서는 논리적으로 그것들 후에 따라 오게 되는 것이다. 칭의는 우리들의 죄책을 제거하며 중생은 우리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양자가 되는 일은 우리들을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중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바울은 때때로 양자라는 용어를 위에서 설명한 것보다 넓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선택을 “저희에게는 양자됨과(롬9:4)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수육(受肉)의 중심적 목적을 우리들로 하여금 양자되게끔 하는 일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갈4:5). 마지막으로 그는 이 용어를 인간의 원상회복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고 있다. “우리까지도…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의미로 쓰여지고 있으나 바울은 신약의 조건하에 중생이 믿는 자들을 도입하는 특권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보통 쓰고 있다. 2. 양자의 은택 하나님의 가족중에 입양하는 일로부터 흘러 나오는 축복은 많으며 또한 바람직 한 것들이다. 그와같은 축복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 우리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롬8:1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7).” 하늘나라는 “황제들의 의회, 제왕들의 공화국”이라고 묘사되어 왔다. 그 왕국에 있는 모든 겸손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된 자요, 명예로운 임무, 능력의 홀, 위엄의 왕자, 영광의 면류관을 갖고 있다. ② 하나님을 향한 자녀로서의 확신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양자의 영이 죄의 속박으로부터 석방을 초래하신다. 정죄는 제거되고 영적의 흑암은 추방되며 하나님의 승인이 영혼위에 놓여지게 된다. ③ 그리스도께서 가지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 실체이신 바, 모든일에 있어서의 소유권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④ 영원한 기업의 권리와 자격 베드로는 이 기업을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벧전1:4)”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 나라(눅12:32).” “더 나은 본향(히11:16).” “생명의 면류관(약1:11).” “의의 면류관(딤후4:8).”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후4:17)”이라고 불리워진다. 디크박사는 “지금 천사들과 영광중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또 장차 영원한 미래까지 무엇을 베푸시든지간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양자된 자들은 소망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까지고 그 기업에 대한 보증은 얼마나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 그들 영혼에게 영향을 주는 평화로움은 얼마나 신선한 것인가! 가끔있는 특별한 때에 그들 마음속에 용솟음치는 기쁨이 얼마나 청명하고 고상한 것인가! 그들은 인간의 고통과 쾌락을 초월하여 얼마나 높이 들려 있는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신앙적인 명상을 하는 가운데 우주의 상층부에 있는 그들의 미래의 거처를 얼마나 소망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보증물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3. 양자의 증거 확증 혹은 성령 증거의 교리는 복음의 가장 귀중한 교리들중의 하나이다. 중생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을는지 모르겠으나 이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알도록 허락되어져 있다. 다. 어떻게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인가? 누군가의 제자가 되려면 절대적인 필수 조건이 하나 있다. 그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학생-스승 관계가 다 그렇다. 예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을 따른다는 것도 정확히 그런 의미였다. 최초의 제자들에게 있어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곧 그분과 함께 있는다는 뜻이다. 예수의 제자란, 곧 그분과 함께 있어 그분으로부터 그분처럼 되는 법을 배우는 자를 뜻한다. 일상 생활에서 예를 찾아보면, 곱셉과 나눗셈을 배우는 아이는 교사의 제자이다. 아이들은 교사와 함께 있어 교사로부터 승제산이라는 특정 영역에서 교사처럼 되는 법을 배운다. 피아노, 성악, 외국어, 테니스 등을 배우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있으며 보고 듣는 것은 절대 필수이다. 우리에게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인격과 인격으로 예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방편이 주어져 있다. 이 스승-제자 관계에서 우리의 몫을 수행하려면 이 방편에 대한 실제적 이해-형이상학적, 신학적 이해는 아니어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는 앞서 긴 시간을 두고 자신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그리고 우리에게) 임재할 특별한 방식을 그들에게 아주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죽으시기 전에도 일러주셨고 부활과 승천의 중간 기간에도 거듭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그 임재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제자들이 자신이 떠나기 전 분명히 깨닫기 원하셨다. 요한복음14장에서 그분은, 제자들이 알고 있던 가시적인 인간의 모습의 자신은 곧 그들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말씀하신다. 이어 그분은 다른 “힘 주시는 분”-“위로자”(comforter)라는 말은 오늘날 파라클레톤(paracleton)을 번역하는 단어로 적합하지 않다-이 오셔서 그들과 교제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 역사하실 것을 설명해 주셨다. NASV(New American Standard Version)의 요한복음 14:16 난하주에 본래의 의미가 잘 표현돼 있다. 파라클레테(paraclete)란 “곁에서 도와주도록 부름 받은 자”를 뜻한다. 즉 제자들이 여태까지 알았던 가시적인 예수가 아닌, 이 다른 힘 주시는 분이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질서, 곧 “세상”(코스모스,cosmos)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한다.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실체로 수용하지 않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 지성의 표준 양상이다. 여기 예수께서 자신의 인격을 가리키며 재차 확언하신 하나님의 영적 본질은, 일찍이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에게 이미 제시된 내용이다(예:출20:4;신4:12,15등). 그러나 우상에 대해서는 잘 알던 그들도 이 사실만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것이 예수 시대에까지 이어짐으로써 오직 겉으로 보여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가 지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우친 자라면 그런 “의”로 꾸미고 살 생각은 꿈에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중에도 그렇게 살려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인격이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원하든 원치 않든, 무조건 보아야 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물론 그분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 방법으로나 인간의 마음에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다. 그러나 인격의 본질과 인격적 관계의 본질에 깊이 근거한 선한 이유들로 인하여 그분이 최선의 길로 택하신 것은 말씀, 즉 대화이다. 그래서 제자도의 절대적 중심이 되는 것은 성경이다. 고독과 침묵의 충분한 활용이 인간 영혼의 성장에 중요한 기초가 되는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 말하고 듣는 최적의 조건이 고독과 침묵으로 조성되는 까닭이다. “에워싼” 군중 밖에 머물러 있으시오 “또 이와 같이 돌발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가복음4장16-17절).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속해 있는 것이 인기가 있을 때만 예수님께 속해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자세히 보면, 그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을 위해 살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들의 한가지 인생 법칙은 에워싼 군중속에서 세차게 흐르는 열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 군중의 열망속에 종교적 여로가 있으면 그들도 또한 가담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종교가 그 열망안에 없으면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바꾸는 것을 당신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에워싼” 군중에 갇혀 있는 사람을 당신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나 종교적인 군중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평판만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들의 가치를 시험해 보십시오. 1. 그들은 자기들 속에서 자기들을 측정합니다(고린도후서10장12절). “에워싼” 군종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 주위 세상의 경향에 의존해서 자기의 표준을 세웁니다. 그가 “선”이라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의 좋은 견해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책망을 받기 전에 나는 충분히 처리해 나가고 있는가?“ 교회의 에워싼 군중은 존경받을 만한 종교적 체면을 유지할 것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들은 단지 당시의 기독교 군중을 모방하려고만 애씁니다. 만약 일방통행 표지가 그들 안에 있으면 그들은 일방통해 신호 방법을 배울 것이고 만약 초인종의 단추나 밤바 스티커(bumper sticker)나 백파이프(bagpipes)가 교회 군중을 위해 있으면 그들은 역시 그것들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들은 바른 것을 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존경받을 만한 것을 행함을 목표로 삼습니다. 2. 그들은 옳은 것의 표준을 높일려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에워싼” 교회를 좀 더 높은 수준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북돋우려는 사람을 항상 싫어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적 수준을 그 군중의 최소의 표준에 의해 설정해 놓았으며 그 수준을 좀 더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판이나 곤란을 받게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은 군중에게 인기가 없는 남자나 여자에게는, 설령 그 남자나 여자가 옳다하더라도 저항합니다. 그 다음에 동일한 군중이 그 남녀를 존경하기 시작하면 방향전환을 합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남자나 여자에 반대하여 너무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들이 태도를 바꾸면, 불명예를 가져올 때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판할 또 다른 기회를 포착할 때까지 잠잠할 것입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이 실행하고 싶어하는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나눕니다. 사람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저항하는 죄는 그들도 “저항”합니다. 만약 지나친 마취의 습성이 지탄받으면, 그들도 또한 자기들의 마취 습성을 버립니다. 그러나 만약 아무도 술이나 담배나 토색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그들은 이전 것을 계속합니다. 어떤 사람이 버릇으로 인해 이미 알려진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했다면, 하나님의 다른 율법들에 대하여 그가 행하고 있는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군중에 “에워싸인” 사람이 가정을 떠나 죄를 짓기 쉬움을 뜻합니다. 외형적으로 매우 종교적이고 자기 자신의 교회 군중들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많은 자칭 교인들이 먼 곳에서는 그들의 가면을 떨구고 그가 진심으로 살고 싶은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누구도 자기의 정체를 알지 못하리라고 여겨지는 곳에서는 그는 죄를 지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교회에서 종교적인 사람이라면, 교회를 떠나서는 “자기의 본성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정말 당신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라면, 이중생활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들은 교회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똑같은 일들입니다. “에워싼” 군중속에 있는 사람은 종종 비밀스러운 죄를 안고 살아갑니다. 여기에 당신 자신의 입장을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피할 방법을 알면서 비밀리에 어떤 죄를 범하고 있다면, 당신은 “에워싼” 군중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은 양극의 사람들과 사귀려고 합니다. 신성하다는 딱지가 붙여지지 않고서도 사람들이 종교를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수세기동안 있어 온 일입니다. 그 표준은 여전히 낮아서 여러 곳에서 사람들은 탕자로서 낙인찍히거나, 기독교 광신자로서 조롱받지 아니하고도 종교적 신분을 지니고 무사히 지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행을 좇는 사교계의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의 삶의 형태는 사교적이고 인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옷에 있어서, 삶의 방식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한대로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적을 하나라도 기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만약 그들이 군중의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의 선택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5. 그들은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에 대하여 보다는 사람들이 생각한 것에 대하여 더 많이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용서할 수 없는 죄”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실패하거나 군중에 의해 거절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갈보리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지지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녀가 깍아내려질 때 그는 그녀를 변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어느 여인의 자녀들이 악용당하고 있다면, 그녀가 그것을 막지 않고 내버려 둘까요? 만약 그녀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진리를 위해 용감할 수 있고 자기의 신앙을 과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하나의 책망이 될 그리스도의 적 가운데 그를 놓아두거나 시련을 당하게 하면, 그는 유다처럼 그리스도를 팔거나 그의 적들 앞에서 그를 부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판을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리낌없이 거절하는데 참여했습니까? 죄를 짓지 못하도록 그들을 억제하고 있는 것은 단지 여론과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과 선하다고 여겨지는 평판을 얻고자하는 욕망이 전부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간에 그분의 권위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면, 당신은 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이유로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은 그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실망할 것입니다. 성경을 당신의 법으로, 주 예수를 당신의 귀감으로 모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던간에 모든 경우에 의로움을 행할 것을 약속하시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이런 입장을 기꺼이 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총에서 소외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군중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의로움을 행하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친구여, 나는 당신께 정직해 왔습니다. 만약 내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돌볼 마음이 없었다면, 이런 것들을 말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당신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께 드려야 합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감정의 파동에 떠밀리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고 꾸며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고린도후서6장17-18절)고 하셨습니다. 칭의와 성화 성화의 성질은 칭의와 성화와의 일련의 비교대조표에 의해 밝혀질 것이다. 그 차이점들 중의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본다. 1. 칭의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우리들을 위하사 행해진 그리스도의 전체역사에 관계하는 것이지만 성화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들 안에 행해진 전체 역사에 관련되는 것이다. 2. 칭의는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사법적 행위이며 성화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진 영적 변화이다. 3. 칭의는 관계의 변화 즉 정죄로부터 은고(恩顧)를 향한 관계변화이며 성화는 죄로부터 성결을 향한 내적인 변화이다. 4. 칭의는 우리들을 위해서 행위적인 죄의 사죄를 획득하나 성화는 그 완전한 의미로서 마음을 원죄 혹은 유전적 부패성으로부터 정결케 한다.(Cleanse) 5. 칭의는 죄책감을 제거하나 성화는 죄의 능력을 파괴한다. 6. 칭의는 하나님의 가족중에 입양되는 것을 가능케 하나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한다. 7. 칭의는 천국을 향한 자격을 주나 성화는 천국을 위한 적합성을 준다. 8. 칭의는 논리적으로 성화보다 앞서며 초시적 단계에 있는 성화는 칭의와 동시에 생긴다. 9. 칭의는 순시적이며 완성된 행위이다. 그러므로 단계적으로 혹은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성화라는 것은 부분적 혹은 초시적인 성화가 칭의 때에 일어나며 또 전적 성화는 칭의에 뒤따라 온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전진적으로 되어진다고 하는 특색이 있다. 그러나 초시적 성화나 전적 성화는 모두 성령에 의해서 사람의 마음속에 되어지는 순시적인 역사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 절대적 속성이라 함은 하나님의 운행이나 활동양식에 관한 특질과는 현저히 구별된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관한 특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가능한 한 피조물과의 관련없이 생각되어져야 한다. 시간이나 공간에도 제한받지 않으며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독립하고 있는 이상 이 특질들은 절대적이며,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도 완전하다. 이 특질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절대적 존재자이시라고 하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영에 속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것이며 신성에 관한 어떠한 바른 개념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신 존재 자체의 속성들인데 영성, 무한성, 영원성, 무궁성, 불변성, 완전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영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요4:24)고 선언하셨다. 영이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은 참되시고 살아계신 영적 인격이시다.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피조물과는 구별되며 자의식이 있는 지적인 자발적 행위자(agent)이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성질로서부터 볼 때에 하나님은 지적 존재인 동시에 도덕적 존재이다. 속성으로서의 영성은 본질로서의 영과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perfections)을 생각할 때 영성이 먼저 고찰된다. 영성이란 용어는 여기서는 자존성(aseity), 즉 자기실체(Self-substance)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으며 이것은 때로 통일성과 단일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존성이란 용어는 자기실체, 즉 하나님께서 자기안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안에만 모든 존재의 근원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이심이라”(행17:24-25). 단일성이란 용어는 순수하여 혼합기가 없는 영을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육체가 없으시다. 마음이시며 물질은 아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며 육체적 형태나 제기관과도 관계가 없다”고 왓슨은 말한다. 이 개념은 웨슬레에 의해서 개정된 신조중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선언된다. “오직 한분이시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시고 몸이 없고 지체도 없고 정감(passions)도 없는 분이시다.” 페일레이는 하나님의 영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영성은 “소극적, 적극적 부분으로 되는 개념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소극적 부분은 몇 가지의 알려진 물질의 성질, 특히 입체성, 관성, 분할성 및 중력을 배제하는데 있다. 적극적 부분은 지각사고, 의지력과 의지행동 및 운동기인(the origination of motion)으로 구성되는데 아마 이 운동기인안에 물질-움직여 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으며 밀어줄 때에만 움직일 수 밖에 없는-보다 뛰어난 영의 본질적 우월성이 존재할 것이다. 영은 단일하고 혼합된 것이 없으므로 그것이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통일의 개념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통일성은 자주 속성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고 하나님의 통일성은 자존성에 포괄되어 있다고 가르쳐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한분 자존하시는 분은 모든 본질적 속성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다른 존재자는 영원히 필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도다”(고전8:4). 이 입장을 확립하는 것은 자존의 속성이며 영원이라고 하는 속성에 의해서 이 입장은 더욱 지지를 받으며 더욱 강화되어진다. 신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신6:4) “주만 하나님이시니라”(시86:10).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사44:8).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45:22).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막12:2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8: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다.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6).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가운데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상술한 성구에 명시된 하나님의 유일성을 거부하게 되면 이교주의의 오류에 떨어지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성은 하나님의 자존성, 단일성, 유일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상 퍽 난해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본질적 속성이다. 인격적 영으로서의 신 개념이야말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모순됨어 없는 유일한 종교적 신조개념이다. 어느 사람은 “다음 사실은 자연계에서 최초이며, 최대의 것이며 가장 숭고하고 필요한 진리중의 하나이다. 즉 한분 하나님이 계시고, 그는 모든 일의 원인이시며, 모든 완전의 원천이시며, 지체나 차원을 갖지 않는 분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영원자이시며, 천지에 충만하시며 모든 것에 침투하사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지지하시며 또 무한한 영이시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 2. 무한성 무한성이란 용어는 신성에는 제한이나 범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성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말인데 그와 같은 입장으로 능력과 지혜와 양선 등등의 인격적 속성에 각별히 적용되는 거싱며, 따라서 신조에도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와 양선이 무한하시다”. 포오스타 박사는 이 속성을 영원성과 광대성 등 관련한 속성의 근저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의 말에 “그는 자신의 전체 속성을 지닌 채 어느 곳에나 계실 수 있는 방법을 아시며 어느 장소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으신다. 그는 지금까지 계시던 곳에서 떠날 것 없이도 오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 그는 오신 장소를 떠날 것도 없이 가는 방법을 아신다…그는 자신의 전체 속성을 지닌 채 어느 곳에도 계시며, 장소에 의해서 견제되지도 않으시며, 어떠한 한계에 매이지도 않으시며 어느 부분에서도 분할되지 않으며, 어떤 점에서나 불변하시며, 자신의 능력의 임재로써 천지에 충만하시다”고 했다. “무한”이란 말은 인격적 영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인데 이 말은 단순히 한계를 허락지 않는다고 하는 그말의 본래의 의미 그대로 쓰여져야 한다. 3. 영원성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성은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심과, 과거와 미래의 시제의 차이로부터 자유하시며, 또 그의 생명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오직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이란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첫째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 하신 그 이름에 표현되어 있으며 또 요한에 의해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고 표현되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 뿐만 아니라 그의 영원성이 또한 선언되어진다. 이 교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성서 중에 다음과 같이 표명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33:27).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 같이 말씀하시되”(사57:15),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7).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4:8).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언제나 계셨고, 미래에도 영원히 계신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 인간의 이해 능력을 초월한 것이다. 위버감독은 “이러한 사실들, 즉 하나님의 존재 양식은 우리 자신들의 것과 전혀 다르다고 하는 사실; 현재있는, 지금까지 있어온, 또 장차 있을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청명하고도 언제나 현재적인 의식의 일부분이란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공간에서 편재하심과 같이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언제나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 즉 무궁히 사시는 그분이 한가지로 영원히 사신다고 하는 이런 사실들이 심중에 자기를 정하게 된다. 4. 무궁성 하나의 속성으로서 무궁성은 공간의 세계와 하나님의 존재 양식간의 대조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영원성이 시간적 대비를 표현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시간이 영원으로부터 생겨나듯이 공간을 하나님의 광대 무궁하심으로부터 생겨난다. 이 속성은 직접적으로는 성서중에서 단한번 언급되는데, 이것은 역대하6:18와 왕상8:27의 두 곳 병행된 성귀에서 찾아보게 된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로이이까?” 그러나 간접적으로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는 다른 성 구절들이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사66:1),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4). 여기서 성서가 호소하는 바는 제일의적으로는 경건을 위함이요, 또 그 다음은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부당하게 국부화시키는 위험성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5. 불변성 이 속성은 하나님께서 본질에 있어서나 속성에 있어서나 목적에 있어서나 의식에 있어서나 불변하심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에 있어서 경직된 무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언제나 그의 운행(operations)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는 언제나 거룩한 사랑으로서 그의 성질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불순종이냐 의로우냐에 따라서 어떤 때는 인간을 혐오하시고 또 다른 때는 열납하신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도덕적면에서나 종교적면에서나 매우 중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성경에서 적절하고 만족한 몇가지의 교훈을 찾아낼 수 가 있다.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말3:6),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블레어박사는;“이것은 아마 다른 어는 것보다도 신성을 인성과 두드러지게 구별시키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속성에 완전한 힘(Complete energy)을 주며 최고의 숭경을 받도록 신성에 자격을 부여하는 온전한 속성이다. 또 이 불변성으로부터 자연계의 규칙적인 질서와 우주의 견고함이 유래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출3:14)라고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나는 스스로 있는자이시며 하나님 자신의 존재, 지혜, 능력, 성결, 공정, 양선, 진실에 있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분이시다”고 말하고 있다. 6. 완전성 이것은 다른 모든 본질적 속성을 완성에 이르게 하며 조화시키는 속성이다.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 자신중에 발견되며 결여된 것은 전혀 없다. 이 속성은 하나의 통일이다. 그것은 특유한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개개의 완전의 결합이라든가 완전을 향한 과정의 정점이라기보다 차라리 이 속성은 다른 모든 본질적 속성의 근원 그 자체이다. 그것은 모든 결점의 가능성를 배제해 버린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말씀하실 때에 주님께서 천부를 모든 영적선과 사람의 기쁨과 경건의 최고목적인 최고선(Summun Bonum)으로 소개하셨다. 온전한 분으로서 천부께서는 우리들의 영원한 축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 가운데 갖고 계시다. 영적 축제와 기근 빅토리아 여왕이 치리하던 당시의 영국은 성경적 진리가 넘쳐나는 때였다. 영적인 화려한 축제가 매주일 열렸고, 배불리 먹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사람 없이 매우 풍족했다. 영적인 음식이 부족하여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한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다. ● 찰스 햇돈 스펄전이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성막에서 성령의 검을 휘둘렀다. ●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티 템플에서는 3천명의 회중이 모여 요셉 파커의 목회 아래 33년 동안 좋은 자양분을 공급받았다. ● 덕망 높은 F. B. 마이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고 그분과 동행을 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 윌리엄 부스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에 비난을 가했다. ● 성바울 교회에서는 C. H. 리돈이 확고한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 알렉산더 맥레런 박사는 교회 역사상 가장 자세한 해설 메시지를 전했다. ● R. W. 데일이 버밍엄, 칼 레인 교회에서 36년 동안 설교했으며, 그가 죽기 2년 전, G. 캠프벨 모르건이 같은 도시의 부근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로드 회중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 알렉산더 와이트는 에딘버러의 피리 성조지교회에서 유명한 로버트 S. 캔드리쉬를 도왔으며, 후에는 그의 경건한 스승의 뒤를 이어 47년 동안 그 교회에 남아 수천 명의 스코틀랜드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 또한 미국의 복음 전도자 드와이트 S. 무디의 활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 빛나는 시대 동안에 대영 제국의 열두 도시 이상을 순회하며 설교했다. 얼마나 신기원을 이루는 시대였는가! 당시 그 땅에는 믿음의 거장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의 존재는 가장 빛나는 역사를 이루는 기독교 국가의 자랑이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작곡된 웅장한 복음성가의 둘째 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살았다. 강력한 군대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움직이네……. 그러나 지금은 그 행진 소리는 사라졌다. 한때 강력했던 그 용감하고 박력있던 군대는 이상하게도 여기저기 몇 명의 영웅적인 ‘저격병’만 남은 미약한 분대로 줄어들었다. 도전적이던 무적의 교회들은 오늘날 어디로 갔는가? 힘 있게 성경을 가르치는 강단과, 적용과 제자화에 동등한 강조점을 두어 균형을 맞추는 교회가 오늘날에는 얼마나 있는가? 너무 심하고 부정적으로 말한다고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아래에 제시된 네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번 해보자. 1. 우리 나라에는 영적 양식을 충분히 제공하고 도전을 주며 성경적인 의미에서 역동적인 교회로 알려진, 영향력 있는 교회가 몇 개나 되겠는가? 2.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 당신의 친구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회를 찾아 기뻐하며, 거기서 건강하고 영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가? 3.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자들이 복음적인 신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4. 청년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자들이 확신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서 성경적 입장을 고수하며 목사직을 추구하고 있는가? 열 여덟? 열? 일곱? 셋? 영적인 기근, 그것도 가장 지독한 기근이 지금 우리에게 닥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그 당시에 함께 축연을 베푼 귀족들은 영적 기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아모스는 알고 있었다. 옛날의 그 선지자는 통렬한 말들을 기록할 때, 19세기의 영국이 아닌 지금의 우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8:11,12). 이 말씀을 천천히 읽으라. 큰소리로 읽으라. 읽고 통곡하라! 적용--- 하나님의 성도들이여, 그대들의 하나님의 뛰어나신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내린 얼마나 견고한 나무인가! 그동안 내려 주신 말씀 외에 더 이상 그대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는가? 그곳은 그대가 예수께로 피하는 피난처가 아닌가? 이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에 대해 찬양을 드리라. 주의 말씀은 영감이 넘치고, 의존할 만하며, 통찰력 있는 영원하신 말씀이다. 당신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추적할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하라. 만일 당신이 교회의 크기와 상관없이, 균형 잡히고, 변함없이 강하고, 도전적인 강단과 열정과 잃어버린 양에 대한 열정이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라. 시편 119:97-106을 읽으라. 기쁜 마음으로 주기 “마음이 즐거우면, 발걸음도 빠르다.” 이것은 토마스 제퍼슨이 오래 전에 남긴 말이다. 다음의 말들도 이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행복한 사람은 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다. 긍정적인 자세는 희생을 즐겁게 한다. 사기가 높으면 의욕이 강해진다. 마음 깊은 곳에 기쁨이 있으면, 어떠한 도전도 두렵지 않다. 기쁨으로 주는 선물은 관대함을 불러온다. 당신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과연 얼마나 보았는가? 일단 우리가 그러한 역동적인 힘에 사로잡히게 되면, 결단의 신선한 파도가 우리를 휩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 나와 절친한 친한 친구 하나가 최근에 「위대한 전쟁 연설」(Great War Speeches)이라는 작은 책자를 내게 주었다. 그것은 윈스턴 처칠의 감동적인 연설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읽었지만, 다시 읽어 보니 또다시 새롭게 느껴졌다. 그 책을 통해 나는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고, 나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처칠은 용감 무쌍한 군사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은 고귀한 변화를 낳고, 매일매일 일어나는 변화는 고귀한 기사(knight)를 낳는다.” 아라우나가 다윗 왕에게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그의 소유 중의 하나인 타작 마당을 바치려고 했을 때 다윗이 한 말을 생각해 보라.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24:24). 다윗은 거저 주는 물건을 거절하였다. 위대한 설교가 존 헨리 조웨트는 다윗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였다.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은 사역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물이 변화되기를 그저 소극적으로만 꿈꾸며 여기저기를 표류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행동할 시간이다 사물을 변화시킬 시간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된 인생을 사는 길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렇게 하자!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한 말이 기억하는가? 그것은 아마 성경에서 기쁨으로 주는 것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말씀일 것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기억하라. ‘즐겨’라는 용어는 헬라어 ‘힐라로스’(hilaros)에서 파생되었으며, 그것에서 영어 ‘hilarious'(들뜬, 명랑한)가 나왔다. 하나님께서는 명령한 마음으로 주는 자에게 상 주신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명랑한 마음으로 주는 자는 억지로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준다! ●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 자기 자신과 소유를 아낌없이 드렸다. 그들의 기쁨은 너무나 커서 더 이상 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출36:6,7). ● 예루살렘에 모인 백성들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할 때, 그들의 즐거움은 기록을 깨는 성취를 이루었다(느2:17,18, 4:6, 6:15,16).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도전을 주실 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영원한 것에 재정적인 투자를 할 때 기쁨으로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행20:35).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는가? 관대함의 원탁에 앉은 ‘고귀한 기사’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네 가지 제안을 하겠다. 1.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생각해 보라.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선하게 행하지 않으셨는가? 우리가 받을 자격 이상으로 주지 않으셨는가? 건강, 행복한 가정, 풍족한 음식, 옷, 휴식처, 가까운 친구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2. 관대에 관한 그분의 약속을 상기하라. 아까워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자가 받을 혜택에 대해 약속하고 있는 몇 가지 성경 원칙을 기억하라. 잊지 말라.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공이다. 3. 자신의 마음을 살피라. 이 일은 당신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다. 닫아 놓은 마음을 열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 ● 나는 나의 수입에 맞게 주고 있는가? ● 나는 양심에 의해 동기 부여를 하는가, 아니면 넘치는 기쁨으로 하는가? ●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내가 얼마나 드리고 있는지를 안다면 나는 남이 따를 만한 모범이 되겠는가? ● 나는 주는 것에 대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충동에 이끌려 반응하는가? 4. 관대함을 지속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라. 이것은 아주 중요하면서도 극히 기본적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 추진하라! 남에게 주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자제하지 말고 관대하게 베푸는 습관을 계발하라. 관대함은 결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앞에는 커다란 재정적인 도전이 놓여 있다. 만약 우리의 영이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만약 우리의 사기가 고양되어 있다면 그 큰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에는 관대함이 포함된다! 올해를 사상 최대의 해로 가꾸자. 전에는 그렇게 드린 적이 없었다면 올해에는 우리 주님의 일을 위해 드리자. 큰 기쁨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즐거움으로 드리자. 그리고 희생의 제물을 드리자. 만약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다면, 우리의 발은 재빨리 움직일 것이다. 기도할 시간을 냄 전도자 무디(D. L. Moody)는 다음과 같은 했다. “매일 아침 사람의 얼굴을 보기 전에 하나님의 얼굴을 봐야 합니다. 너무 바빠 기도할 시간이 없다면 그건 하나님이 뜻하신 것보다 일에 더욱 치중하는 셈입니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할 수 있도록 일정표에 자리를 만드십시오. 반면에 기도는 종일 해야 합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살전5:17). 어느 경우 어느 순간이든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앨버트 월렌(Albert J. Wollen)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항시적이고 자각적인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이러한 사귐을 누립니다. 그 찬송가 작사자는 “예수께서도 기도하셨는데, 당신은 어떠십니까? 당신은 어떠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는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수 없을만큼 자기가 바쁘다고 생각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할 일이 늘수록, 중대한 결단에 임할수록 한적한 곳으로 나가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생각할 점 *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다고 설명하고 싶습니까? 실천할 점 * 1분을 내서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십시오. “당신과 풍부한 사귐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기도를 통해 매일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만큼 풍성한 시간을 말입니다.” * 내일은 기도 가운데 혼자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을 택해 15분을 내십시오. 모레는 여러분이 왕 중 왕과 맺은 약속을 위해 몇 분 더 일찍 서두르십시오. 주님을 위하여 새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산 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이사야42장10-12절). 영적 각성이 일어난 모든 나라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새 음악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에 있을 때는 그들은 너무 행복하여 노래를 부르고 싶어합니다. 좋은 소식을 들으면 누구나 흥겨워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모든 천사들은 찬송했습니다. 음악은 행복을 실은 홍수와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싣고 땅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송으로 그를 예배하며 그의 선하심을 온 세상에 노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하여 감명을 준 노래를 쓸 수 있을까요? 교인들의 새 노래에 대한 몇 가지 좋은 착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 노래들은 모두, 주님과의 진정한 깊은 관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단순히 자기 재능을 보이기 위하여 또는 돈을 벌기 위하여 예수님의 노래를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예수님의 노래를 불러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노래들을 칭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노래들은 물론 주님께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노래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행복해서 예수님을 섬기면서 부르는 행복의 노래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노래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위의 것들에 대하여 예수님과 그의 영광에 대하여 예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하여… 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그 노래는 길잃은 자들이나, 구원을 받은 자들, 성경의 하나님의 참모습을 그린 노래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은 반드시 성경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성경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글로 쓰는 말들은 진실이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쓴 노래를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당신의 노래로부터 틀린 것들을 배워서는 안됩니다. 나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것은 어느 것도 충족시킬 수 없는 나의 갈급함을 채워 줍니다. 좋은 노래는 간단할 것입니다. 심오한 단어들이 그 안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적은 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노래들은 굉장한 생각들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단어들로 바꾸어 놓습니다.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이해하고 부를 수 있도록 쓰십시오. 그리고 될 수 있는대로 노래를 짧게 지으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에 고작해야 3연과 하나의 후렴으로 된 가사를 외울 수 있습니다. 간단해야 한다는 것은 가사뿐만 아니라 멜로디에도 적용됩니다. 어느 노래나 그것을 처음 듣는 사람이 최소한 그것의 2행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은 간단했습니다. 간결해야 힘이 있습니다. 당신의 노래들에 모든 종류의 반주를 사용할 수 있으나 너무 복잡하게는 하지 마십시오. 만일 너무 복잡하면 아무도 그것을 기억할 수 없으며 그것을 부를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냉정하게 당신의 노래들을 점검하십시오. 긴 단어나 어수선한 행은 모두 잘라내십시오. 거창한 단어들을 쓰지 마십시오. 복잡한 배열은 피하십시오. 간결을 유지하십시오. 좋은 노래들은 또한 많이 반복됩니다. 만일 당신의 노래에 후렴이 있으면 최소한 세 번내지 네 번 사용하십시오. 만일 당신의 노래에 인기를 끌 주제나 행이 있으면 그것을 될 수 있는대로 여러 번 반복하십시오. 어떤 것이 여러 번 되풀이 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더 잘 외웁니다. 노래는 감화력이 있는 스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해놓으신 일을 염두에 두기를 바랍니다. 길 잃은 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기뻐서 그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그것을 되풀이 할 적마다 놀랍게도 더 달콤해 보입니다. 동일한 생각의 반복은 음악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어떤 노래가 널리 보급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기본 멜로디가 자주 들려져야 합니다. 장기간 흥행된 많은 힛트 곡은 거의 유사한 연과 후렴을 지녔습니다. 사람들이 대략 세 번 정도 들었을 때 그 곡을 곧장 콧 노래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노래에 곡의 변화가 너무 많으면 아무도 그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많은 인기 있는 노래들은 하이 클라이막스(high climax)까지 올라가거나 로우 클라이막스(low climax)까지 내려가는 주목을 끄는 화음의 진행법을 지녀왔습니다. 당신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까지도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원하는 이유로 이 클라미막스 음들이 너무 높거나 너무 낮지 않도록 유념하십시오. 당신의 노래들에게 동일성을 피하십시오. 가사나 서정시를 되풀이한다는 이유를 들어 단순히 노래를 높고 낮음이 없게 또는 생동력이 없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악기의 간주, 뒤에 깔리는 합창, 음과 가사의 침묵은 당신의 곡조를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음색들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상실한 것들, 즉 사랑, 애정, 우정, 신앙, 형제애를 회상시켜 주는 노래들을 갈망합니다. 지난 25년간에 있어 거의 변함 없는 힛트곳은 이 주제들 중 어느 한 가지 것에 대해서 이거나 이것들 중의 한 가지 상실에 대한 노래였습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을 갈망합니다. 이것들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또는 어떻게 이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압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해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장면속에서 내가 새롭고 새로운 노래를 부를 때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옛날, 그 옛날의 이야기일거예요. 신-인이신 인격(The Divine Human Person) 그리스도의 신성과 온전한 인성에 관한 성서적 증거를 고찰해 왔으므로 이제는 하나의 인격중에 있는 이 두 가지 성질의 결합에 관해서 주목해야만 하겠다. 이 결합은 수육에 의해서 초래된 결과인데 그 결과가 신-인 양성을 구비한 인격 혹은 신-인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에 관한 온갖 상황을 자신안에서 결합하신 것이다. 이 하나의 인격은 선재하신 Logos(로고스)즉 거룩하신 말씀이시며 인성을 스스로 취하셨다. 또 그것을 취하셨으므로 이 인격은 인성을 인격화하며 또 회복했다. 1. 수육의 성질 수육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봉사를 위한 하나의 계단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의 기초였다. 이 수육이 없이는 속죄도 없고 중보의 봉사도 존재할 수 없었다. 이 중요한 제목을 고찰하려면 몇 가지의 극히 현저한 사실들이 관찰되어야 한다. ① 수육은 일종의 변형(Transmutation)이나 변질(Transubstantiation)은 아니었다. 성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이신 분이 사람이 되셨을 때 하나님이신 일을 그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그것에 의하여 속량할 의도를 지니시고 인류의 각양 인간적 경험 가운데로 잘 들어가시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시게 된 것이다. ② 수육된 것은 말씀 즉 Logos였다. 삼위일체 신의 제 2위의 인격뿐이시지 신성의 전체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신성 전체가 수육되었다고 가르치는 일은 부신(父神)수난설(Patripassianism)이란 오류설에 빠지게 한다. 그 학설에서는 “성부가 고난 받으셨다” 혹은 “성부가 죽으셨다”고 말한다. 삼위 중 한 분 인격은 수육하실 수 있으나 그 수육은 하나님 전체로부터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 가지 양태에 있어서의 신적인 성질이나 본질을 의미하며 이 세 가지 양태 전부에 있어서의 본질이 수육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양태중 각각에 전체적 본질이나 신적 성질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은 것이다. 즉 성자가 수육될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이 형체를 이루고 그 분안에 내주하게 됐으나 그것은 제2위의 분 즉 성자의 양태에 있어서 만이라는 것이다. ③ 수육이라 함은 신적 인격이 인간적 성질과 결합한 것이지 인간적 인격과 결합된 것은 아니다. 그가 취하신 인성은 그리스도와 결합에 의해서 인격을 획득한 것이다. 구속주는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히2:16)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말씀 되어진다. 게다가 그는 “여자의 후손”(창3:15) 또 “다윗의 혈통”(롬1:3)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 주님께서 취하신 인성은 아직도 개성이 부여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해 줄 뿐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다음에 나오는 의미에 있어서 이외에는 비인간적인 것은 없었다. 자연적 탄생에 의해서 인류로부터 인간화된 것이 아니라 신-인 양성을 구비한 하나의 인격의 구성요소로 되어졌다고 하는 점이다. 신성 중에서 생활하시는 인격 이외에 다른 인격을 갖고 계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그를 비 인격적 인간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오직 위의 사실만이 그를 비 인격적 인간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오직 위의 사실만이 인성에 있어 배타적일 정도로까지 부가적 인격을 말하는 네스토리안적 오류를 방비할 수 있다. 이 분은 충만하고도 완전한 인성을 가지시며 그의 양심과 의지는 로고스의 인격과 결합됨으로만 발전하는 것이었다. ④ 수육은 신-인 양성을 구비한 인격개시의 표식이었다. 신-인은 독특할 뿐아니라 새로운 인격이었다. 이 신-인 양성 구비의 인격의 정밀한 개시는 기적적 잉태의 순간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 순간 이전의 그 인격적 존재는 영원한 성자이신 것 뿐이셨다. 동정녀 마리아 중에 존재한 그 인성은 아지기도 인격화되질 못했다. 시작하는 때는 있었으나 구속주의 신-인 양성 구비의 인격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용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직도 수육하지 않으신 제2위의 인격에는 적합한 이름이 아니고 수육된 제2위의 분에게만 해당된다. ⑤ 주님의 구속사업의 기초로서 수육은 필요했다. 인성을 획득하시기 전에는 로고스는 사람의 마음을 갖지 않았으므로 사람의 감정을 경험하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획득하신 후에는 인류의 모든 경험을 더욱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게 되었다. 수육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유한한 두뇌의 소유자가 아니시므로 유한한 지각을 소유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수육 후에는 사람들이 사고하는대로 사고하실 수 있게 됐다. 수육 이전에는 로고스의 자의식은 여원적인 것만 있을 뿐 즉 시간의 계속이란 것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는 영원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 시간의 계속되는 면과 계속됨이 없는 양면으로 됐다. 그러하기 때문에 2가지 성질의 결합은 그리스도께서 자비로우시며 충성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었다. 2. 하나의 인격 그리스도안에서 신-인 양성의 결합은 일 개인적인 것이다. 즉 보통의 자아(Ego)나 자기(Self)-영원하신 Logos즉 말씀이신 분의 그것인데-를 지속하는 일로 성립하는 결합이다. 신학에 있어서는 이것이 위격적 결합(Hypostatical)이라고 정의 된다. 위격(Hypostasis)이란 말은 헬라어(ύποστασι, 후포스타시스)로부터 유래하는 것인데 신 고유의 자체적 요소를 일반적 성질이나 본질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술어이다. 이 양성은 양자에 공통된 자아(Self)를 통해서만 피차에 만나기도 하며 교제를 지속한다. ① 양성을 소유한다 함은 2중적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인격의 기초는 영원한 Logos이지 인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언제나 자신에 관해서 단수형으로 말씀하고 있다. 행위 집행자(Agent)는 언제나, 어디서나, 한 분이시다. 삼위일체에 있어서와 같이 “나”와 “너”의 상호교환은 결코 없다. 의식에 관하여 각이한(Variying) 양태들은 신적인 것에서 인적인 것으로 재빨리 옮겨질 수 있으나 그 인격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또 “나는 목마르다”(요19:28)고 말씀하셨다. ② 하나의 사람은 하나, 둘, 혹은 셋의 성질로 구성될 수가 있다. 삼위일체의 인격 즉 성부, 성자, 성령의 그것은 하나의 성질만을 가지시는 것뿐인데 그것은 신적인 실질, 본질로 부터의 그것이다. 인간의 인격에은 두 가지의 성질이 있다. 즉 물질적 신체와 영적인 혼이다. 그리스도는 신-인 양성을 구비하는 인격으로서 세 가지 성질-거룩한 Logos 혹은 말씀, 사람의 혼, 사람의 신체-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 두 가지의 성질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할 때는 그 중 후자의 두 가지는 결합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질을 결합한 것은 인격이지만 이 성질들을 하나의 외적이며 기계적인 방법으로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결합이므로 긴밀하고 분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 양성의 결합은 인간안에 있어서의 혼과 몸의 결합보다 더욱 긴밀한 것이었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망에 의해서 그 혼과 신체가 분리되어지나 전자의 신성은 한 순간도 혹이나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지지않는다. ③ 신-인이신 분의 인격이 주로 신성에 의존했다는 것은 사망에 의해서도 그 인격이 파괴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돌아가실 때에 분명히 혼과 몸 사이에는 한 순간의 분리도 없었다. 그의 사망과 부활이 기간중에도 인적인 혼과 신체는 모두 Logos즉 거룩한 말씀이신 분과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의 신체가 결코 썩음을 보지 않은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3. 두 가지 성질 그리스도 인격의 결합에 관해서는 이 두 가지 성질의 다양성이 보충적 진리를 제공하고 있다. 신성과 인성은 본질의 변경이나 상호간에 방해됨이 없이 각각 특질과 기능을 보존하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위격적 결합인 동시에 수육의 진정한 개념을 위해서도 불 가결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의 여러 가지 행동과 특질은 신인 양성 구비의 인격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두 가지 성질이 상호간 도움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성질에 속하는 특질은 그 성질내에 제한하는 일이 필요하다. 물질적인 실체는 물질적 특질만을 가질 수 있으며 물질적이 아닌 실체는 영적 특질만을 가질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성은 인간적 특질만을 가질 수 있고 또 신적인 성질은 신적인 특질만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성질이 아무리 상이하게 보이더라도 동일 인격에 속할 수가 있다. ① 칼게돈 회의의 정의 A. D. 451 Chalcedon의 종교회의에 준비된 성명은 다음과 같다. “성스러운 교부들을 따라서 우리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하나님의 성자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고백되어야 한다. 그는 신성에 있어 온전하며 또 인성에 있어서도 온전하신 분이며 참 하나님이시고 정상적인 혼과 인간적 신체로 구성되는 참 사람이시다. 신성에 관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며 인성에 관해서는 우리드리과 동질이시다. 죄를 제외하시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지어졌으며 그의 신성에 의하면 창세전에 성부로 인해서 출생하셨으며 인성에 의하면 신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이 말세에 우리 인류를 위해서 우리 구원을 위하사(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이 유일하시고 불변하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의(하나님으로부터) 탄생하신 성자는 혼란도 없으며 변함도 없으며 분할도 분리도 없는 두 가지 성질을 가지신 일이 고백되어야만 한다. 그와 같은 결합에 의해서 양성의 구별이 제거되지도 않고 차라리 각 개의 특질이 보존되면서 하나의 인격과 실질 중에 결합되어진 것이며 몇 개의 인격으로 분리나 구별되는 일 없이 유일하시며 불변 동일하신 성자, 탄생되신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분이시다. 이 분에 관해서 옛 선지자들은 말씀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치셨고 우리 선조들은 교회의 신조로서 우리에게 전해온 것이다. ② 정통적 신앙 Chalcedon 신조는 교회에 대해서 기독론을 위한 참된 기초를 제공했다. 이 신조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나 개신교회에서나(다음 부분을 제하고) 정통한 것으로 수락되어온 것이다.-개신교회는 데오토코스(Theotokos-θεοτοκο) 즉 하나님의 어머니란 말을 거절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두 가지 성질은 긍정될 뿐만 아니라 양자의 상호관계에 관해서도 4가지 요점으로 정리되어진다. 즉 혼합(혹 혼란)없고, 변화(전환)없고, 분할없고 분리도 없다. 이 용어들이 정의를 내리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될 수 있겠으나 참된 교회 보존을 위해서 도표(道標)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참된 신앙을 보존하기를 원한다면 다음 사실들을 믿어야 한다. ●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성의 결합은 양성 양면의 명백한 특질을 파괴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혼란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수육 후에도 수육전과 같이 순결하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를 제외하고는 그의 모친이나 다른 어떤 사람의 인성에 비해서 동일하고 순수하고 순전한 것이다. ● 한 성질을 또 다른 성지리로 변경한다고 하는 학설은 어떠한 것도 비 정통적인 것으로 우리는 마땅히 거부해야만 한다. Eutyches주의에서와 같이 인성이 신성에 의해서 흡수됐다 고 말하든지 혹은 근대 케노시스설들 중 어떤 것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성을 향해서 신성이 축소되었다고 하는 등등을 거부해야 한다. ● 네스토리우스주의와 같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두 개의 자기( Two Selves)로 분할하든가 아폴리나리스주의와 같이 두 성질을 혼합하여 하나님도 사람도 아닌 합성적 존재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 양성의 결합을 우리는 고수해야 한다. 그 결합의 결과는 두 인격이 아니고 한 인격으로서 신적 존재와 인적 존재를 그 인격안에서 하나가 되게 한다. ● 우리는 이 양성의 결합이 분리할 수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 있어서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은 단절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다. 삼위 중의 제2위의 분은 인성을 항구적으로 취하시는 것이다. 세례의 성질과 목적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택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엄숙한 예전이며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복종에 대해 완전한 의도를 표시하는 서약이다. 우리 주님의 명백한 명령(마28:19-20)과 사도들의 실천(행2:38,41,8:12)에 의해서 우리는 세례가 보편적, 영속적인 책임됨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엄숙하고도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그것은 입회의 의식이기 때문에 오직 단 한번만 집행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영원한 언약을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되어져서는 안된다. 세례는 은총의 계약의 표징이며 또한 보증이다. 표징으로서의 그것은 영적인 청결을 표시한다. 우리 주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3:5). 여기서 분명히 그 표징은 외적인 물에 의한 세례이며 의미하고 있는 사실은 성령의 내적인 역사이다. 표징으로써 세례는 중생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성령 시대의 특별한 사건인바 성령에 의한 세례도 상징하는 것이다. 세례는 보증이기도 하다. 하나님 측에서는 이 보증은 그의 언약하심에 대한 충실성의 가견적인 확증-그의 백성이 언제나 호소할 수 있는 영속적인 의식이다. 인간 측에서는 그 보증은 그가 자기를 계약의 한편 당사자로서 결합하는 행위이며 모든 일에 있어서 충성되기를 서약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완성된 계약의 표징이기도 하다. 쉐드(Shedd)박사는 “그것은 법률적 문서에 날인된 공인과 같은 것인데 그 공인이 존재한다는 일에 의해서 부동산 권리증의 순수성을 확신할 수가 있으나 공인이 없는 경우에는 의구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리를 전달하는 것은 권리서이지 보증인(印)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인격을 갖고 재림하심 근대신학은 우리 주님의 인격적, 가견적 재림에 대해서 부정하고 그대신 주님의 영적 임재만을 신앙하는 방향으로 과도히 기울어지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성서는 명백히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속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번 세상에 임하셨듯이 또 그 구속하신 교회를 자신에게로 받아들이기 위해 재림하시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고 하신 말씀중에 명백히 진술된다. 이 재림은 인격적, 가견적이며 그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그리스도의 재강림은 단순히, 믿음의 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면전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주의 원수들에게는 공포가 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이 일은 승천하시는 산에서 생긴 일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입은 두 사람이 저희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9-11). Dr. Whedon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성구는 예수님의 실제적, 인격적 재림에 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 성구이다. 오실 분은 승천하신 분과 같은 인격적, 가견적 예수님이시다. 그의 오시는 양태는 승천하실 때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의 재림에 관한 증거들 중 예수님 자신이 친히 증거해 주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엄숙히 경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23:38-39).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최고의 발언은 대제사장 앞에서 말씀하실 때의 것이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주님 자신에 의한 이런 명확한 진술을 토대로 하여 초대교회 교인들은 주의 재림을 “복스러운 소망 곧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영광이 나타나심”(딛2:13)으로 삼은 것은 결코 놀랄 일은 아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시리라”(빌3:20-21).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권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야고보도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7-8). 가장 애용되어진 성구는 아마 요한의 기록일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한 이런 명백한 말씀들에서 우리는 주의 인격적 재림의 사실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가지게 된다. 성화에 관한 헬라어 성서의 시제 연구 다니엘 스틸(Daniel Steele) 박사는 그의 저서 “Milestone Papers” 중에서 이 흥미있는 중요한 주제에 관해 뛰어난 장(제5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는 쓰고 있다(I am writing)”와 같은 현재형 혹은 예컨대 “나는 기록하고 있었다(I was writing)”와 같은 과거에 있어서의 동일한 계속을 표시하는 미완료의 사용과 부정과거형(aorist tense)-이것은 직설법에 있어서는 예컨대 “나는 썼다(I wrote)”와 같은 과거에 있어서의 하나의 행동이 일순간에 발생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과의 대조를 지적하고 있다. 이 부정과거형은 다른 모든 법(mood)에 있어서는 무시간적 혹은 “행위의 단일성”이라고 칭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형이 쓰여질 때에는 계속적 행동을 표시하고 부정과거형이 쓰여질 때에, 시간과는 관계가 없다. 영어에서는 이와 같은 시상이 없다. 이 일을 정확히 이해하면 중요한 성서본문을 해석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개략적인 형태로 약간의 실례를 들어보겠다. 1. “저희를 진리로 (단번에 전부) 거룩하게 하옵소서(부정과거명령형)…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현재형-거룩하게 혹은 성별하기를 계속함) 이는 저희도 진리로 성별함을 얻게(혹은 참으로 거룩하게 하려) 함이라”(요17:17,19). 2.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부정과거형-순시적으로)”(행15:9). 3.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산 제사로 드리라(부정과거형-단일회적 행위이며 반복이 필요없으)”(롬12:1). 4.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견고케 하시고(현재형-계속적으로 견고케 함)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단일회적인 명확한 행위로서 부정과거형)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부정과거형-보증으로써 우리에게 성령을 주사)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부정과거형-단 일회적인 명확한 행위로써 주셨다)”(고후1:21-22). 여기서 견고하게 한다는 일은 일정한 계속적 행위이지만 기름 붓는 일과 인치는 일 및 성령의 보증은 전적 성화라고 하는 하나의 경험의 순시적인 완성된 행위이다 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육적인 마음 혹은 죄의 원칙)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부정과거형-단일회적인 명확하고도 완성된 행위(갈5:24). 6. “그 안에서 또한 믿어(부정과거형)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부정과거형)”(엡1:13). 여기서 믿는 일과 인치는 일은 한가지로 명확하고도 완전한 행위이다. 7.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부정과거형)…너희 온 영과 혼이 몸이…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8.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부정과거형) 성문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부정과거형)(히13:12).”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현재형)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부정과거형)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부정과거형)”(요1서 1:9). 여기서 사죄와 깨끗케 함(cleansing)은 한가지로 완성된 행위로서 표현되어진다. 그래서 문법적으로 점차적인 칭의(gradual justication)와 한가지로 점차적인 성화(gradual sanctification)와 한가지로 점차적인 성화(gradual sanctification)를 믿을 이유는 없다. 영적 리더쉽을 위한 제언 1. 리더는 목표를 달성하고도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목표 달성이 반드시 하나님이 복 주시는 징표는 아니다. 2. 영적 리더는 자기 목표를 이루려고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곧 그들의 목표다. 영적 리더가 하나님께 받은 책임은 최선의 노력으로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3. 아무리 목표에 매달려 성취했다 해도 혹시 그 과정에서 아랫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뒷전으로 밀려났다면 그는 실패한 리더다. 사람들을 이용해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영적 리더쉽에 상충하는 것이다. 4. 하나님께는 어떤 일을 하는가 못지 않게 그것을 어떻게 하는 가가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5. 탁월함을 매사에 완벽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다. 탁월함은 매사에 하나님을 높이는 방식으로 일하라는 뜻이다. 6.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조직에 특별한 뜻을 갖고 계신다. 리더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 속에서 그분의 계시를 통해서만 그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성결 하나님의 성결에 관해서 3가지의 일반적 견해가 취해져 왔다. (1)그것은 다른 속성들과 병렬적 또는 대등하는 하나의 속성으로 본다. (2)그것은 여타의 모든 속성의 총계로 볼 수 있다. (3)이 속성은 하나님의 성질인데 제속성들은 이 성결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질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고려되는 것이다. 웨이크 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성결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다른 본질적 속성들과는 구별된 하나의 속성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성결이란 말은 하나의 복합적인 어휘로써 어느 특정의 속성을 표시했다기 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모든 도덕적 속성으로부터 결과하는 하나님의 총합적 성질을 표시하는 것이다……하나님의 성결은 그의 성질의 도덕적 속성들과 상이한 그 무엇(something)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다만 하나의 일반적 용어이며 그 용어밑에 이 모든 본질적 속성들이 내포되어 진다.” Dr. Wardlaw는 성결을 “마치 백색 태양광선이 스펙트럼의 여러 가지 색채의 광선으로 결합된 것과 같이 모든 속성의 결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Dr. Pope는 하나님의 두 본질적 속성 곧 성결과 사랑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질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들은 “아직 상호간의 융합과 조화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두 가지의 탁월한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쌍방울 결합시킨 바 오직 두마디의 용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본질로서 이것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질을 구성하고 있으며 속성으로서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the economy of divine grace)를 통한 신성의 계시이다. 성결에 관한 최선의 정의중 하나는 W.N.클라이크에 의해서 내려진다. “성결은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의 영광스런 충만이며 하나님 자신의 행동원칙, 피조물을 위한 표준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특성, 일관성과 요구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안에 있는 성결은 도덕적 탁월성의 속성이며 그것은 하나님안에 시작도 없고 유래도 없이 존재하고 있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15:11)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71:22).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4:8)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계15:4) 둘째로 성결은 하나님 자신의 활동 원리이다. “주께서는 눈이 청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합1:13)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거룩하시도다”(흠정역시145:17)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된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히1:9) 하나님의 성결은 적극적인 동시에 소극적이다. 즉 그 성결은 모든 적극적 선을 소유하는 일과 모든 악의 부재를 의미한다. 셋째로 성결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기대하시는 표준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레11:44)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1:74-7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사람은 그러므로 거룩하게 되는 일이 요청된다. 절대적 성결은 하나님에게만 속하므로 절대적 성결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천사와 인간에게 나눠 주시는 성결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 깊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거룩하게 될 것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며 속죄 은혜는 하나님의 성결을 보호하는 동시에 인간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삼는 일을 통해서 인간에게 성결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어서 생명은 특별히 성부의 특성이며 빛은 성자의 특성이며 사랑은 성령의 특성이다. 그러나 성결의 특성은 삼위일체 각 인격에 있어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중의 송영과 찬미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는 생명과 빛과 사랑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안에 있는 성결은 성별되고, 탁월하며 창조되지 않고 그 빛 때문에 그 신성의 무한하신 깊이까지 철두 철미하게 어떠한 흑암도 없고, 발견되지 않은 것이 없고 성취되지 않는 것이 없고 더 이상 완전을 기해야 할 것도 없으시다. 성령안에 있는 성결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발현인데 바울은 그것을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불렀다. 성부에게 있어서의 성결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며, 유래한 것이 아니다. 공경과 경배의 기초이며, 모든 도덕적 양선의 표준이 된다. 성자 안에 성결은 계시되었다. 자신이 속죄 제물이 되셨으므로 인간은 성결하게 될 수 있으며 천부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다. 성령안에 성결은 사람에게 부여되며 사람에게 접근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 되는 일이다. 따라서 “성령”이라 하는 어휘는 성령 자신이 거룩하시다는 그 성질을 말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거룩케 하는 일이 성령의 직무이며 또한 역사라고 선언하고 있다. 성서 그리스도교적 계시에 대한 어떠한 논의에서도 가장 주요한 주제는 마땅히 성서이어야만 한다. 오직 성서에만 그 문서적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한 고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탁(oracles)으로서의 성서에 대한 성질과 기능을 논하기로 한다. 성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분적 계시와 그리스도-인격적인 말씀-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 계시와의 중간적 위치에 서게 된다. 만일 우리가 계시의 참된 핵심에 영원한 말씀이란 개념을 놓고 그 주위에 몇 개의 동심원을 그리게 된다면 가장 중심에서 가까운 제1원은 수육된 말씀 즉 인격적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해당하겠다. 제2의 외원은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그 말씀의 기록물도 된다. 우리가 입으로 말한 것이나 기록한 말은 곧 우리 자신의 인격과 관계가 있듯이 성서는 살아계신 인격적 말씀이신 분과 관계가 있다. 가장 밖에 있는 제3원은 자연물과 창조된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에 해당 된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서를 한편으로는 그 자연에 대한 관계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인격적 말씀에 대한 관계로 평가해야 한다. 성서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자연계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고 추가하는 것뿐이다. 자연계를 관찰하므로 사람은 영적인식을 파악할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들의 백합화를 말씀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적 배려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께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를 언급하시면서 우리가 영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를 의뢰해야 한다고 주의를 촉구하셨다. 세계와 성서는 하나님께 속한 두 권의 교과서인데 각각 그 진전적 계시에 있어서 위치와 시간과 기능을 가진다. 자연은 하나님과 신성한 사물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으며 그 계시의 부족한 것을 성서는 보충해주고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Godhead)를 어느 정도 우리에게 말해주며 후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성서가 없으면 세계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되어버리며 또 자연이 없으면 성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될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성서는 언제나 인격적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고유한 관계에서 이해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기록된 말씀을 대용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영적 유대에 의하지 않고 율법에 의해서 속박될 것이다. 종교적 지식은 영적이라기보다 형식적으로 되어버린다. 또한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실재자는 아니고 하나의 역사적 인물로 되기 쉬우며 그리스도를 향해서 보다 신조에 대해서 더 주의심을 갖게 된다. 또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하나님과의 생명적, 인격적 접촉이라기 보다는 신조에 대한 하나의 지적 동의로 되어버리기 쉽다. 이와같이 해서 성서는 인격적 말씀과의 신비로운 관계로부터 분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왕좌의 침략자 또는 왕위를 노리는 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19세기에는 일반적으로 파괴적 비평학이라고 알려진 하나의 운동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성을 왕좌에 모시고 성서를 그 살아있는 원천이신 분으로부터 격리시키고 많은 책들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위치까지 격하시키려고 노력했다. 거기에 대항해서 궐기한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서의 순수성과 진정성과 권위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성서의 완전한 영감에 관해서도 옹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 신앙 옹호자들은 논리, 이성, 논쟁에 의거하는 형식주의적 변호에 의뢰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영적인 사람들-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은 성서의 비평학에는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으며 논의에 의해서 옹호되어야할 문자에만 의뢰하지도 않는다. 그들 신앙의 보다 뛰어난 근거는 부활하신 주님이시오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들은 성서가 참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원래 변증자들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성서의 저자이신 하나님과 친교 관계에 있는 때문이다. 성서에 영감을 주신 성령은 그들 중에 머물러 계시며 성서의 진실성을 증언해 주신다. 성령의 직무 성령은 선물인 동시에 또한 주시는 분도 되신다. 그는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시는 선물이며, 창조하시며, 능력을 주시는 임재로써 교회안에 머물러 계신다. 생명과 빛과 사랑에 관한 핵심은 대언자 혹은 상주하시는 보혜사이시다. 오순절에서의 취임식에 이어서 성령은 지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집행자(The Executive of the Godhead)가 되셨다. 성령은 지금 성부와 성자 쌍방의 대리자(Agent)이시며,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서 거처를 함께 하신다(요14:23). 그리고 인간들은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가 있다. 주시는 주님 혹은 속죄의 집행자로서 성령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관련된 분야인바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분야에서 역사하신다. 1.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신적 성질로부터 흘러나오는 품덕적 은혜를 개인에게 전달하는 일로서 봉사를 위한 특수한 자격으로서 보다는 차라리 품성으로 그 열매를 결실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구성하는 9가지 은혜(갈5:22-23)를 표시할 때 아마 포도나무 가지에 관한 우리 주님의 비유를 마음에 두었던 것 같다(요15:1-5). 바울이 기록한 은혜의 일람표 중에 하나님에 관한 것 3가지-사랑, 희락, 화평 : 타인에 관한 3가지-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 우리 자신에 관계되는 것 3가지-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품성에 관한 이 특질은 포도나무되신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이며 생명적인 접촉을 가지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육체의 행위는 상술한 것과는 현저히 상반된다(갈5:19-23). 2. 성령의 은사 이 은사들은 곧 은혜의 선물이다. 이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이며 능력인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가 지상에서 맡은 책임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게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들이다. 영적 은사에 대한 바울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4-11)(엡4:11, 롬12:6-8을 참고). 성령의 은사는 봉사를 위해서 초자연적으로 부여되는 것인데, 수행되어야 할 봉사의 성격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것들은 교회 사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이와같은 선물들은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나눠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타고난 은사와 능력과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별개의 것이며 교회원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것은 아니다. 교회안에는 각양 은사가 있다(고전12:29-30). 각개 회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중에서 그들의 기능을 결정하며(고전12:21-25) 또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영적인 발전에 본질적 요인을 구성하고 있다. 3. 성령과 구원의 역사 특별히 구원에 관계되는 성령의 집행자적인 행위 또는 기능은 두 가지의 일반적인 항목:“생명이 부여자”로서의 성령과 “성화하신 임재자”로서의 성령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 전자에는 성령에 의한 탄생 혹은 구원의 초시적 경험이 속하고 후자에는 성령에 의한 세례-이것은 영혼이 거룩하게 되는 제2차적 역사이다-가 속한다. 이것은 전적 성화라고 알려지는데 “성령 세례에 의해서 되어지며 하나의 경험중에 죄로부터 마음이 정결케 되는 일과 및 생활과 봉사를 위해서 신자에게 힘을 주시면서 성령께서 상주적으로 임재하시는 일을 포함한다. 성령에 의한 탄생은 영혼을 향한 신적 생명의 분여이다. 그것은 단지 옛 생애의 개조나 재건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생명을 영혼에 분여하는 일이며 또는 영혼안에 내식(Implantation)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위로부터의 탄생”이다. 성령은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속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것으로 영적 영역에 있어서 그들을 독특한 개인들로 세우시는 것이다. 이 개인들이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게 되며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가 된다(롬8:15-17). 일 개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또한 “육적인 마음” 혹은 타고난 죄가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계약의 특권 가운데로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께서는 “세상죄-The SIN of the world”를 제거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므로 죄(Sin)로부터 정결케 됨이 있어야 한다. 이루어진 역사(The work wrought)라고 하는 견지에서 보다 행위자(The Agent)의 관점에서 이 전적 성화라고 하는 제2차적 경험을 분석하게 된다면 신자가 받는 그 하나의 경험중에는 성령의 3중적 역사가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된다. 즉 “세례”-이것은 한정된 의미에 있어 정결하게 하는 행위 혹은 거룩하게 하는 행위에 관계한다. “기름부음” 혹은 생활과 봉사를 위해서 능력을 베푸시는 내주의 성령, 또 “인치는 일” 혹은 그의 증거하시는 자격에 있어서 동일하신 내주하시는 임재,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네가지의 집행적 행위 또는 기능으로서 탄생, 세례, 기름부음, 인치는 일에 관해서 말할 때에 우리는 단지 은혜에 관한 두 가지 역사를 말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3중적 국면하에서 제2차 은혜 곧 전적 성화를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네가지의 집행적 행위는 그리스도에게나 성령에게나 동일하게 속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은 영혼을 성령에 의한 생명가운데로 살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사람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자기 백성에게 기름을 붓고 인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이름 성서중에 가르쳐진 하나님의 성질은 신적 명칭들을 사용하는 일을 통해서 사람에게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왔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성질에 관한 지식을 각이한 정도로 전달해 주며 하나님의 존재를 둘러싼 그 무엇인가 탐지할 수 없는 신비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최초의 이름은 포괄적 명칭인 엘로힘인데 “능력”을 의미하는 단순한 어근을 가진 어휘에서 그 어원을 찾아내게 된다. 그러므로 엘로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형태의 능력의 보존자시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말은 보통 하나님의 능력의 충만과 영광과 또한 이 능력들을 부여해 주시는 분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서 복수형으로 쓰여진다.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둘째 이름은 여호와 혹은 야웨(Jehovah 혹 Jahweh)이다. 이것은 총칭적 명칭이 아니고 고유명사이며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자(I AM THAT I AM)라고 풀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명칭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이 한가지 개념중에 겸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 영적 관계를 계시해주고 있다. 여호와라고하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한 신실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에 유대인들 중에서는 이 명칭을 써서 개인적, 국가적 승리를 표시하는 복합명사를 형성하는 일이 관례로 되었다. 그래서 여호와-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여호와-닛시(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샬롬(여호와는 평강을 보내소서), 여호와-삼마(여호와 거기 계시다), 여호와-치드케누(여호와는 우리의 의). 엘로힘과 여호와는 때때로 엘로힘-여호와라고 복합적으로 쓰이며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시며 구속자 되심을 계시해 준다.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또 하나의 말은 엘 샤다이(EL Shaddai)인데 어근 샤드(Shad) 즉 유방으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이것은 “양육하는 자”, “힘을 주는 자”, 믿고 있는 생명들에게 자신을 부어 주시는 분이란 뜻이 된다. 계시의 과정에서 이 용어는 사랑의 영 혹은 “위로하시는 주”를 의미하게 되었다. 아도나이는 주를 의미하며 이것은 두가지의 원천적인 용어 엘로힘과 여호와와 같이 쓰여지며 따라서 여호와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통치를 의미한다. 여호와는 말로 할 수 없는 명칭으로서 유대인들은 그 명칭을 미신적으로 존숭하여 그것을 구두로 말하는 것을 거절하고 언제나 아도나이 즉 주라고 하는 말로써 그것을 대용했다. 아도나이는 엘로힘과 같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20:28)과 같은 표현으로 쓰여진다. 하나님의 성결의 개념 1. 경외 신과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응답에는 우선 신비와 두려움이 있다. 여기에는 가까이 하고자 하는 매혹(fascination)과 두려움(awe)의 감정이 교차한다. 우주와 자연의 광대함과 오묘함에서 창조주를 발견할 때,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또는 신적인 영감의 경험에서 전율과 함께 경외심을 가지게 된다. 오토(Otto)에 의하면 이것이 “누미노제”의 경험이다. 누미노제는 거룩한 자(신)의 가장 첫 번째요,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이런 경험은 비이성적(irrational)이 아니라 초이성적(non-rational) 경험이다. 따라서 거룩한 자와 만남의 경험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직관적(intuition)이다. 오토의 누미노제에는 신비(mysterium), 전율(tremendum), 그리고 매료(fascination)가 들어 있다. 이 점에서 오토의 누미노제 경험은 어마어마한 신비(mysterium tremendum)이다. 이것을 경험한 자는 두려우면서도 매료되고 사로 잡힌다.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오토의 연구가 성결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고 새로운 이해를 가져오게 하였지만, 그의 견해가 동양적 신비주의에 치우치고, 대신 성서적 견해와는 거리가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자요, 인간과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기 보다는 영광과 위엄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을 찾아오시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찾아 만나야 되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직관에 의해서 만남이 가능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계시에 의해 즉 성서를 통해 말씀으로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신과의 만남에서 신비적 전율과 매혹을 동시에 경험하고 경외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이것은 바로 거룩한 자에 대한 첫 번째 심리적 반응이다. 2. 영광 히브리어 카도쉬는 “찬란한 영광과 함께”라는 의미가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영광이 충만하시고, 영광 받으시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영광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되리라”(출29:43).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다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는 말씀은 하나님의 현존은 언제나 영광의 현존임을 말해 준다. 앗수리아어 Kuddusa나 구약의 카도쉬의 용법에서 성결은 광휘를 나타내며, 영광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3. 성별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신다.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서는 존재 유비를 찾을 수 없는 홀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계와 인간과는 구분되신다. 그 분은 창조자요 주권자시며, 다른 만물은 모두 그 분의 피조물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것과는 구별되는 분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은 “절대 타자”(Wholly Othrer)시다. 하나님의 성별, 절대 타자성은 그 분의 초월성을 의미한다. 오토의 ‘거룩한 분’(The Holy One)은 바르트에서와 같이 “절대 타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함은 동시에 내재성의 상실을 가져온다. 초월하신 하나님의 성결은 동시에 내재하는 성결이 될 때에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적 성결은 피조물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성별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성별도 말하고 있다. 이는 성결이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음을 가르킨다. 4. 정결 이것은 하나님의 윤리적 탁월성(moral excellence)과 완전성(ethical perfec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성 속에 윤리적 사상은 예언서와 시편에 이르기까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성은 그 분의 본성의 정결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은 죄와 악이 없으시며, 언제나 밝은 빛 가운데 계시는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인격은 어떤 악이나 더러움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움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은 어떤 윤리적 기준(standard)이 없다. 그 자신이 바로 그 기준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윤리적 요구와 함께 나타난 성서적 예는 이사야의 경험이다. 이사야서 6장에서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남과 동시에 자신의 부정함을 발견하였다. 이사야의 부정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심으로 제거되었다. 이사야의 죄의 확신과 고백은 즉시 부정의 제거와 씻음이 뒤따랐으며, 이렇게 하여 거룩과 함께 하나님의 정결이 사랑과 함께 나타났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절대적 의와 정의가 있어 피조물에 윤리적 요구를 함과 동시에, 거룩한 사랑이 있어 피조물을 정결케 한다. 5. 사랑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 19:2, 벧전1:16)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죄인을 사랑하사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출31:13, 요17:17). 성결하신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시다(합1:13). 절대적으로 의롭고 선하신 분은 죄와 악과 양립할 수 없으시다. 그 분은 죄를 정죄하시고 심판하신다. 이 점에서 거룩한 하나님은 심판관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죄는 용서와 화해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사랑과 관련된다. 심판관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정죄와 심판 앞에 떨고 있던 죄인은 곧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면서 용서하시고, 더 나아가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결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사랑은 뜨거운 사랑이면서 “질투하는 사랑”이라는 점이다. 6. 나누어 줄 수 있는 성결 하나님의 성결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이라는 것은 이미 본 장에 처음에 언급되었다. 이 귀중한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자신의 것을 다른 피조물과 나누어야 한다. 더욱이 사랑의 아버지시라면 사랑하는 자식에게 더욱 더 그러하여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본성을 나누어 주셔서 거룩한 백성을 만드신다. 거룩하셔서 피조물과 구분되시는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까이 피조물과 함께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성결은 구속사의 중심이 된다. 건강한 자기 이해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 후에도 우리는 아직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했다. 건강한 시간 사용과 건강한 공간 개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건강한 자기 이해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사역자가 부딪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전 세계적으로 사역자 수가 급속히 감소하는 현상은 교회 전체와 아울러 사역자 개개인이 정체감의 위기에 들어섰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사역자는 의문에 빠진다. “나는 누구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사역자의 현실적 방향 감각을 자기 이해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개인적 정체감과 직업적 정체감을 구분하여 생각하려 한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기본적인 차원에서 개인적 정체감 위기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병이다. 깊은 우울증과 강박 행위와 각종 정신 질환 행동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정신과 의사의 도움과 때에 따라 입원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이런 중증 정체감 혼돈을 겪는 사역자는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본 문제는 어느 정도는 모든 인간의 문제요, 특히 모든 사역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사역자는 동료 인간 사이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프라이버시와 교제, 친밀함과 폭넓은 사교의 관계를 각각 어떻게 보는가? 본질상 인간 존재란 ‘함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혼자 있지 않고 타인과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 이 세상(나의 물리적 정체에 따라 내게 일정 역할을 기대하며 나를 판단하는)에서 건강한 삶을 살려면 다음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도전하는 세상의 얼굴을 피해 숨을 수 있는 나만의 내적 프라이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세상에서 관계의 위계를 형성해야 한다. 우선, 내 삶의 가장 가까운 반경에서 가장 친한 사람을 찾는다. 그 친밀함의 반경 바깥에는 가족과 사랑하는 친구들의 반경이 있다. 거기서 좀 더 멀리 나가면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이 있고, 더 멀리 나가면 회사의 직장 동료들이 있다. 끝으로, 이름은 모르지만 막연하게 나의 세상이라 부를 수 있는 지경에 속해 있는 인류 전체의 반경이 있다. 이렇듯 나는 점점 넓어지는 많은 반경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반경의 문턱에는 보초를 세워, 친밀한 관계로 들여보낼 사람을 세심하게 점검한다. 동료 사역자에게는 할 수 있지만 버스 운전기사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부모에게는 할 수 있지만 친구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 완전히 나 혼자인 곳, 나 자신의 가장 내밀한 프라이버시를 간직하는 곳이 있다. 여기가 바로 하나님, 성육신을 통해 타자의 옷을 벗으신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이 세상의 얼굴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모든 공동체 형성의 기본 조건이다. 프라이버시가 없는 사람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사역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역자는 혼자만의 공간인 사생활을 잃을 때가 많고 문턱에 보초를 세우지 못할 정도로 관계가 위계 없을 때도 많다. 모두에게 친절히 대하지만 정작 자신은 친구가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항상 조언과 상담을 베풀지만, 정작 자신은 고민과 문제를 안고 찾아갈 사람이 없다. 가정에서도 참된 친밀함을 발견하지 못한 채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소속감과 안정감을 얻으려 하기도 한다. 교인들 중에서 친구를 얻으려 한다는 것은 곧 사역자가 교인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사역자를 위해 있다는 얘기다. 인정을 받으려고 내담자들에게 매달리며 성도들에게 의존한다. 행복을 느낄 친밀한 관계를 발견하지 못한 사역자에게는 교인들이 필요 충족의 수단이 된다. 교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그들의 필요가 아닌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그런 식으로 사역자는 관계의 위계를 잃는 경향이 있다. 결국 한시도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늘 긴장하며 지내다 끝내는 오해만 받고 심한 고독에 빠지게 된다. 만인을 사랑하라고 배운 사람이 실상 친구가 하나도 없고, 집중적인 기도 훈련을 받은 사람이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역설이다. 바깥 사람 아무에게나 속을 내보이기 때문에 따로 가까운 이들에게만 보여 줄 부분이 없다. 내밀한 프라이버시의 담이 허물어져 혼자만의 공간도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을 너무 많이 내준 사역자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자신이 온전한 한 인간임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사역자는 위기 상황에 처한다. 영적인 삶과 좋은 친구가 없는 그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다. 이 질문의 이면에 있는, “지도자는 누구의 지도를 받을 것인가?”하는 물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말은 한낱 구식 설교처럼 느껴질 것이다. 정신 치료사가 전문적 도움을 통해 자신의 정신 건강을 끊임없이 재평가할 의향이 없다면 유능한 의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사역자들 중에서 자신과 남들의 복잡한 신앙 문제 해결을 도와줄 영적 스승을 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역자들 중에 유능한 신학자, 훌륭한 교사, 탁월한 행정가, 촉망받는 작가, 기타 사회학과 심리학과 수학과 철학 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 문제로 동료 인간들과 특히 동료 사역자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흰 까마귀만큼이나 드물 것이다. 그래서 매우 시급한 문제 중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다. “목사의 목사는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의 마지막 주제이자 가장 구체적인 주제가 나온다. 사역자의 직업적 정체감 문제다. 건강한 자기 이해는 세상 속에 한 개인으로서 건강한 자기 인식만 아니라 한 전문인으로서 건강한 자기 인식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첫째 질문이자 가장 확연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정말 전문인인가?” 우리가 사는 사회는 급속한 전문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의사,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사회사업가, 변호사, 판사, 건축가, 기술자 등 해마다 생겨나 정신 치료 분야에는 음악 치료사, 그룹 치료사, 직업 치료사 등이 따로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전문성을 갖고 전문화 세계에서 전문 훈련을 통해 제자리를 찾고 있다. 사역자는 어떤가? 그의 전문 분야는 무엇인가? 그만의 독특한 기여는 무엇인가? 모든 것을 조금씩 알고 있지만 정작 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많은 사역자들이 깊은 좌절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을 아마추어 상담자, 아마추어 사회사업가, 아마추어 심리학자, 아마추어 그룹 리더, 아마추어 교사로 느끼고 있다. 진정 프로인 영역은 어디란 말인가? 많은 사역자들이 전문인 환경에 아주 불편을 느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대학원을 마친 후 4-5년씩 더 공부한 사역자들도 소위 ‘못 배운 사람들’과 있을 때 마음이 더 편하다. 사역자들이 이렇게 느낄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의사는 4년 간 이론을 배운 뒤에도 최소한 2년은 엄격한 지도 아래 인턴 과정을 거쳐야 독립 의료 행위가 가능하다. 심리학자는 철저한 통제와 지도를 통해 적어도 2년 간의 실습을 거치지 않고는 혼자서 일을 시작할 수 없다. 사회사업가도 다년간 자기 분야의 엄격한 지도를 거쳐서만 얻을 수 있는 직함이다. 하지만 사역자는 어떤가? 대부분의 사역자는 4년 간 신학을 공부한 뒤 인턴 과정 없이 곧바로 목회 사역에 뛰어든다. 기껏 일 년 정도 목회실 습을 거친다 해도 꼭 필요한 개인 지도-실습 경험을 진정한 학습 경험이 되게 해줄-를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비 사역자들의 설교를 꼼꼼히 지도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의 목회 상담을 관찰하여 일대일로 비평을 들려 준 사람은 누구인가? 예배 의식 중에 손짓과 음성과 눈빛을 통해 의미 있는 표현을 하도록 도와준 사람은 누구인가? 특히 4년 동안 이론 교육을 통해 쌓은 그들의 지식과 정보가 다양한 교인들-혼란에 빠진 십대, 길을 찾는 대학생, 회의에 빠진 남편, 절망 가운데 있는 아버지, 우울한 과부 등-과 맺는 구체적 관계에 얼마나 적합한지 따져 볼 수 있도록 지도해 준 사람은 누구인가? 목회에 대한 기대가 현실적인 것이며 열망과 필요가 바람직한 것인지 점검하게 해준 사람은 누구인가? 지혜로운 선택을 내리며 가능한 실패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게 해준 사람은 누구인가? 교인들과 맺은 관계는 물론 상급자들과 관계에서 복잡한 권위 문제에 대처하는 법을 일러 준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분야의 공부와 연구에 더 힘쓰도록 권해 준 사람은 누구인가? 새로운 경험을 통합할 수 있도록 지도해 준 사람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이들 사역자를 진정 전문인 되게 해준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학자 오즈먼드 슈뢰더(Osmund Schreuder)는 이렇게 썼다. “우리 시대 성직자의 위기는 이러한 직업 분야의 전문성 개발 부족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정신 건강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영속적 회의가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일에 전문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과연 보상이 따르는 직업인가?” 창의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전문인은 보상을 받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의 일솜씨에 찬사를 보낸다. 칭찬과 월급 인상과 진급이 따른다. 이렇게 손에 닿는 가시적 보상을 통해 그는 자신의 전문직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된다. 사역자는 어떤가?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의 사역을, 어쩌다 빈자리가 생긴 곳을 채우는 정도로 생각한다. 특수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자신의 특수한 전문 기술 때문에 그곳에 간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맡을 만한 다른 사역자가 없어서 간 것이다. 일단 그 자리에 들어서면 아무도 그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물의를 빚거나 신문에 삐딱한 글을 기고하거나 전반적으로 기존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조용한 사역자의 보상은 상부의 침묵이다. 소속 사역자를 칭찬하는 교단은 찾아보기 어렵다. 상부에서 바라는 것은 ‘감사’를 바라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는 것이다. 칭찬과 감사와 보수와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부인하는 사역자도 많을 것이다. 순종에 대한 일부 왜곡된 견해는 감사와 만족을 바라는 마음조차 금하고 있다. 순수한 칭찬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역자가 참으로 적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받아 본 적이 없어 당황한다. 칭찬을 받으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학기말의 학점이 학업에 대한 만족의 전부인 사람은, 날마다 재미있게 공부하고 좋은 학점까지 받는 사람에 비해 정신적으로 덜 건강하다. 후자의 경우는 하루하루가 재미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작은 만족을 위해 큰 고생을 치러야 한다. 사역자가 나날의 목회 사역에 재미를 못 느끼고 그저 인생 끝에 주실 하나님의 점수만 기대하고 있다면 그의 정신 건강은 위험한 상태다. 동료 인간들에게 생명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그의 중대한 사역도 똑같은 상태이다. 그 중에서도 사역자의 일상 생활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든 만족이 있다. 전문 분야의 성장에 대한 만족이다. 전문인의 과제는 그 분야의 지식을 따라잡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도 그 분야에 창의적 공헌을 하는 것이다. 전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의사와 심리학자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돕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자기 분야를 위한 새로운 통찰을 찾기도 한다. 알레르기 환자를 수백 명씩 보는 의사는 체계적 치료 방식을 통해 환자들을 도울 뿐 아니라 의학 발전에도 기여하게 된다. 사역자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신학 발전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지만,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역자가 얼마나 될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주요 원천이다. 병원이 의사의 연구 현장인 것 못지 않게 교회는 사역자의 연구 현장이다. 우리에게 이 경험 신학의 필요성을 가장 잘 일깨워 준 사람은 아마도 개신교 정신 병원 원목 앤톤 보이슨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역사가도 자신이 연구 중인 주제에 관해 다른 역사가의 단순한 주장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도 이미 다 만들어져 책에 나와 잇는 공식에서 시작하지 않고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자료와 복잡다단한 사회의 실제 상황에서 시작했다.” 사역자는 날마다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자료를 접한다. 그것을 읽고 이해하며 신학적 묵상의 끝없는 출처로 삼을 수만 있다면 사역자의 삶에는 언제나 새로운 경이와 영감과 창조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와 갈등과 행복과 기쁨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역에 대한-더 깊은 이해로 연결될 수 없는 것은 없다. 이렇듯 목회라는 전문직은 사역자에게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요구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변하면서도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늘 살아 있는 존재로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사역자가 자기 분야의 심장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건강한 자기 이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주요 주제였다. 개인적 자아에 대한 건강한 자기 인식은 건전한 신앙 생활과 친밀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과 현실적으로 깊게 맞물린 것이 직업적 자아에 대한 건강한 자아 인식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유사 전문 분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겸손하고도 만족스럽게 전문가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주의 날에 일어날 사건의 순서 예언 해석에 있어서 보류의 법칙에 의하면 성서에는 교회에 영광스런 소망을 주기에 충분한 예언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미래의 사건은 예언이 역사중에 옮겨져서 역사적인 관련중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볼 때까지는 결코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의 날의 사건들에 관한 순서를 취급하는 데 있어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지한 성서 연구가들을 배제할 정도로 적극성을 가지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많은 일에 대해 독자들간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공할 자료는 독단적인 것 보다는 차라리 시사적이며 그것이 독자측에서 더욱 공부하고 탐구하는데 유익한 자극제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1. 휴거와 현현(Rapture and Revelation) 그리스도의 재림은 주의 날의 개시적 사건이다. 거기에는 세상을 떠난 의인의 부활과 지상에 생존해 있는 의인의 휴거가 동반하는데 두 무리의 성도는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기 위해서 구름가운데로 들려 올라가게 된다. 여기서 휴거와 현현이 구별된다. 휴거는 주의 백성들이 공중에서 주를 뵙고자 들려 올라가는 것이다. 현현은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천사들로 구성된 시위대를 거느리고 지상으로 돌아오시는 일이다. 휴거와 현현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폭넓은 견해의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께서 오실때에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성도들은 그를 만나려고 기쁨으로 일어나고 지상에 있는 족속들은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계1:7)고 주장하면서 양자를 동일시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휴거는 비밀리에 될 것인데 성도에게만 알려지고 오직 현현만이 지상에 보여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양자를 별개의 것으로 본다. 양자 사이의 기간에 대해 대부분의 저자들은 3년반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기간중 성도들은 하늘의 처소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것이고 반면에 지상에서는 적그리스도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미증유의 환란의 때를 통과하게 된다. 휴거와 현현에 관한 일반적 사실은 명백히 성서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론한 것은 개인적 견해와 해석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2. 대심판(Investigative Judgment) 그리스도가 재림하신 직후에 대심판이 시작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주님 자신의 분명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마25:31-34;19:28). 이 심판은 재림때에 현존하는 열방에게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41-44)에 의해서 증명된다. 천년기후 재림론자는 마25:31-46에 기록된 심판을 마지막날의 대심판과 동일시한다. 어떤 천년기전 재림론자들도 그와 같이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상술한 바와 같이 그 심판을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에 지상에 있는 열방들에게 적용한다. 3. 악인의 멸망 대심판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은 악인의 멸망이다. 먼저 인용한 성구에 첨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환란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예수께서 저희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자에게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1:7-10) 4. 적그리스도의 멸망과 사단의 결박 재림때에 악인의 멸망하는 중에 같이 포함되는 것은 바울이 “저 불법한 자”라고 부르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멸망이다.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예수께서 그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살후2:8-9) 사단도 또한 결박된다.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동안 결박하여…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계20:2-3) 5. 천국의 확립(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전투적 교회는 충분하고도 온전한 신약의 의미에 있어 오순절과 더불어 시작했으며 그것은 재림시 성도의 휴거와 함께 개선적 교회가 될 것이다. 그때에 교회는 어떤 의미에 있어 하나님의 나라와 일체화 될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에 있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안에 있느니라.”(눅17:21) 그러한 의미에 있어 우리는 지금 성령이신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그것에 이어서 있을 나라는 성자이신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때에 내면적이고 신비적인 나라는 외형적인 영광으로 표현될 것이다. 예수는 세상을 이기셨으며 지금은 성부의 보좌에 앉아계시면서 그 영광의 자리에 앉게될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마25:31) 6. 지상의 변혁(The Regeneration of the Earth) 주께서 지상 변혁과 장차 임할 그의 나라를 연결하신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이 말씀은 우리가 다음 사실을 고려할 때에 퍽 시사적이다. “위로부터의 신생”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변혁(Regeneration)은 인격적으로 고려된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온 직접적인 영적 결과를 의미하고 있으며 또 이 말씀은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대지가 신적속량을 받을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즉 대지가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분명히 해방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행3:19-21,롬8:19-21) 이와 같이 해서 죄의 저주는 현재의 지구로부터 제거될 것이며 그 성질을 완전히 다 알 수는 없겠으나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 회복에 관해서 흥미있는 면을 많이 시사하고 있다. 그 혁신들중 몇가지를 들어 본다면 대지의 비옥성 증대(사55:13), 지금은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땅중 많은 부분들이 화려하고도 영광스런 거처가 된다.(사35:1,2,6,7) 야수들이 정상적 본능으로 기적적인 회복(사11:6-9), 수명연장(사65:20-23), 천문학적우주의 지구에 대한 관계가 변화하는 모종의 가능성(사30:26) 지금 여기 열거한 성구는 깊은 영적 교훈으로 가득차 있으며 수많은 성도들에게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되어 왔다.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영적교훈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의 확신을 필연적으로 금하는 것은 아니다. 또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영적인 의미를 삭감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의미를 증대하는 것이다. 7. 최후의 완성(The Final Consummation) 최후의 완성 혹은 이 세상의 멸망은 과도기를 마치고 영원한 질서에 속한 신천신지를 도입한다. 그것은 “주의 날”의 마지막 사건이다. 이 기간의 개시의 때에는 세상을 떠난 의인의 부활과 함께 휴거가 있고 다음에는 생존하고 있는 성도들의 휴거가 있으며 이어서 현존하는 국민들을 조사하는 심판이 계속됨과 같이 그날은 천년왕국 직후의 배교, 악한 사자(死者)의 부활, 불에 의한 천지의 파괴, 보상과 형벌을 동반하는 최후심판을 갖고 마지막을 고한다. 베드로는 땅이 갱신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또한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타지리라.”(벧후3:10)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리라.”(벧후3:12) 베드로는 이 성구에서 세계가 그 불세례에 의해서 소멸된다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다. “불에 타서 풀어지고-dissolved”란 말은 세계가 최초에 기획되어 졌던 것처럼 되기 위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된다고 하는 개념을 지닌다. 인체가 사망에 의해 무너지고 부패하게 되며 그 가운데서 불멸불후하며 능력과 영광으로 부활하듯이 인간의 거처로서의 지구도 그와같이 무너지고 그 가운데서 부활과 같이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이 출현하게 된다.(벧후3:13) “그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15:24-28) 헬라어 시칭의 특징과 의미 1. 현재 헬라어에서는 현재에 일어나는 일과 지속적인 행위를 현재로 나타낸다. (예) 빌립보서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중단없이 그리고 이 순간에도: 지속적의미) 행하게 (현재) 하시나니 (지속) 반복적인 표현도 현재로 쓴다. (예) 마태복음7:7-8 (항상 반복해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싫증 내지 말고)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항상 새로운 것을 위해)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항상 계속해서) 얻는 이마다 (항상 반복해서 역시) 얻을 것이요 (싫증 내지 않고) 찾는 이가 (계속해서 다른 것을) 찾을 것이요 (발견하고)(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모두 현재로 표현됨). 또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때도 현재를 사용한다. (예)고린도전서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현재) 그 뜻대로 (계속해서) 각 사람에게 (특별하게) 나눠주시느니라(현재) 가끔은 현재가 미래의 일이지만 확실히 일어날 일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다가올 미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확실하기 때문이다. (예)요한복음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내가 (틀림없이) 다시 와서 (현재표현)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 부정과거형 신약성서에서 매우 특이한 의미를 갖는 부정과거형은 완료를 나타내며, 1회적인 행위나 순간적으로 발생한 행위 등을 나타낸다. (예)고린도후서12:7-8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현재표현)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부정과거형)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매순간) 족하도다(현재표현) 3. 현재완료 현재완료나 과거는 헬라어에서는 현재와 부정과거형에 연결된다. 과거에 한 번 일어났던 일이 현재에 여전히 계속되고 연관이 있는 사건을 표현한다.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의 사건에 대한 말씀이 이러한 표현이다. 여기에는 계속해서 부정과거형과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예)요한복음3:4-5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어떤 특별한 시간에)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부정과거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남의 순간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이것은 한번 일어나는 완성된 사건이다. 특히 6절에는 갑자기 현재완료형이 나오는 특이한 표현이 나오는데 ‘육체로부터 나온 (현재완료형) 육체의 열매가 육체에 머무르면 육적인 것이고, 성령으로부터 나온(현재완료형) 영의 열매는 영’이라는 표현이다. 육체로부터 영이 나올 수 없고 영에서는 육체적인 것이 맺히지 않는다. 거듭남은 점진적인 것이나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일어난 새로운 것의 시작이다. 새로운 삶과 반대되는 것은 계속적인 것이며, 지금 훈련되어지고, 계속해서 경험되어지는 어떤 것들이다. 이와 같이 일반적인 주의점을 갖고 예수 안에서의 구원에 관한 신약성서의 말씀을 문법적으로 파악할 때 우리에게 닥치는 몇 가지의 중요한 것들을 발견해 보기를 원한다. 유혹에 대한 기도와 저항 등은 일반적으로 현재성을 부각시키는 관점에서 현재형으로 나타내었다. (예)야고보서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현재),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단지 그것을 위해) 구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지혜를 구할 때마다) 주시리라(미래형) 현재는 단디 현재적인 구원을 나타낼 뿐 아니라 구원의 완성에 대한 것도 나타낸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조건들은 한 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다. 조건들은 우리 삶의 전 시험기간에 해당된다. 거듭남을 통하여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는 믿음의 삶에 들어갈 수 있다. (예)요한복음1:12 그를 영접한 자(어떤 결정 순간에, 부정과거형)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같은 순간에: 부정과거형, 한 번의 행동을 나타냄: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현재: 계속해서 그후에도 그를 믿는 자에게) (예)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부정과거형), (그는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현재형) 자마다 멸망치(부정과거형: 현재 의미) 않고 영생을 얻게(현재)하려 하심이니라 (예)요한복음6:35,5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계속해서)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부정과거형의 표기는 여기에서 상황의 실현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계속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지속적으로) 가졌고(명쾌한 현재형) 원죄 혹은 유전적 부패성 죄의 형벌은 사망이라고 우리는 알게 됐다. 또 죄의 영향은 개인 문제로 한정될 수 없는 것이고 사회적, 인류적 규모에 있어서의 제결과를 한가지로 포함해서 생각해야 한다고도 알게됐다. 원죄 및 유전적 부패성이라고 하는 말은 이와 같은 제 결과에 적용된다. 1. 용어 피일드 박사는 “원죄”하고 하는 용어는 성서중에는 없고 펠라기우스주의자와의 논쟁 과정에서 어거스틴이 처음으로 쓴 어휘라고 말하고 있다. 통상적 용법에서는 “원죄”라고 하는 말은 “유전적 부패성”이란 말과 자주 동의로 쓰여지고 있다. 즉 이 두 어휘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있는 인간의 영적 성질의 자연적 상태를 일반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 통상적인 용어법은 영국 국교회의 신조중 원죄의 정의 가운데 나타나 있다. “원죄란 것은 모든 사람안에 있는 도덕적 결함과 부패이며 그것에 의해서 사람은 본래의 의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고 그 성질상 끊임없이 악으로 경향하며 따라서 육적인 것은 끊임없이 성령을 거스린다. 그러기 때문에 원죄는 이 세상에 출생하는 모든 사람중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원죄란 어휘와 유전적 부패성이란 어휘는 한 가지로 신생전의 인간의 상태를 표시하는 것으로 거의 구별없이 사용되는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어휘의 용법에 모종의 구별을 두는 일이 유익할 것이다. 원죄란 어휘는 (1)죄에 관한 인류적 결과라고 하는 개념 (2)원죄란 것이 어느 정도까지 아담이 최초범죄의 결과이냐 하는 개념 (3)인간의 자연적인 상태는 실제상 죄 깊다고 하는 점등등의 강조점을 포함하고 있다. 유전적부패성이라고 하는 어휘는 자연인된 인간의 도덕적 상태를-그 상태의 궁극적 기원에 특별한 언급없이 또 그 상태가 죄깊다고 하는 정확한 의미에 관한 문제에 특별히 유의할 것도 없이-그저 단순히 서술하기 위해서 지정된 어휘이다. 이 두 가지 어휘가 그 의미상 뒤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구분하게 되는 것은 주로 분석과 서술의 명확을 기하기 위함이다. 2. 원죄의 사실 성서는 세상에 있는 사망의 존재와 또 그것에 부수하는 모든 악은 인간의 죄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 문제에 관해 가장 중요한 성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글일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2-14,17-18) 여기서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담의 타락전에는 죄도 사망도 없었다는 일, 그의 타락후에 그 두 가지가 존재하기에 이르렀다는 일, 또 이 두 가지는 죄의 직접적 결과로서 고려되어진다고 하는 사실이다. 거기에다가 첨가하여 바울은 죄의 결과로서의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는데 즉 인류의 번식과 함께 전달되어 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원죄와 유전적 부패성과는 사실상 동일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인류의 번식은 단지 아담의 육체적 모양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타락한 도덕적 형상에 있어서의 것이기도 했다. 바울은 또 아담이 불순종행위로 공공연하게 범죄한 것과 같은 형태로 죄를 범하지 않은자까지도 사망의 지배밑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사망은 불순종 행위로서의 죄의 결과인 동시에 부패한 성질로서의 죄의 결과였음에 틀림없고, 지금도 그러하다. 3. 유전적 부패성의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의 결과로서 사망의 형벌밑에서 출생하게 되었으며 또 부패한 성질을 갖고 태어난 사실을 공부해 왔다. 후자는 통상 타고난 죄 혹은 유전적 부패성이라고 불리운다. 다음과 같은 대표적성구가 이 상태를 표시하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셨나이다”(시51:5)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58:3) 첫째 성구는 바로 생명의 발단으로부터 존재하는 인간의 비뚤어지고 왜곡된 성질을 표시하는 말로서 “죄악-iniquity)”이란 어휘를 쓰고 있다. 그 다음 성구는 이 사상을 진일보 시킨다-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하게 되는 일은 출생시부터의 것이므로 분명히 유전적인 것이다. 인류의 성질이 도덕적으로 부패했다고 말해주는 신약성서의 언급은 무수히 많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2). 이와 같이 악의 특색은 나면서부터 마음에 그 근원을 가진다고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신다. 바울은 인간의 부패한 성질을 진술하는데 “육신”이란 어휘를 반복 사용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롬8:5)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롬8:13)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라”(롬7:17-18). 상술한 성구들은 모두 죄를 향한 경향성이 타락한 인간성에 속해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4. 유전적 부패성의 성질 유전적 부패성의 용어는 출생하면서부터 인간의 상태에 적용된다. 이 말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 있는 도덕적 부패성을 표현한다. 이 상태는 예컨대 인간의지와 같이 인간존재의 일 국면에 속한다기 보다 인간 인격의 전체분야에 관계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악의 경향성, 지나친 정애, 사악한 충동이 원천이 되는 인간존재의 근거 바로 그것에 있어서의 무질서한 상태이다. 인간의 부패성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결과이다. 사람이 범죄했을 때에 그는 자기가 지음받은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상실했다. 이것은 그로부터 성령이 퇴거되며 사람이 원초적 성결을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이 상실의 결과 죄의 조수는 인간들중에 흘러들어와 마침내 전체 성질에 흘러 넘치게 되었다. 성령의 제어하시는 힘, 가능케 하시는 힘, 거룩하게 하시는 힘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한 존재가 되고 규제할 수 없는 충동과 악한 정애의 포로가 되고 율법의 저주밑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인간이 전적 부패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썩어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 말은 그 확대된(Extensive) 의미에서 쓰여지는 것인데 죄라고 하는 전염병이 인간의 전 존재에 확대되어 버렸다는 사상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영, 혼, 육체의 모든 능력과 기능을 해친다. 애정은 소외되고 지성은 어두워지며, 의지는 왜곡된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사1:5), 자연인은 모든 적극적 선을 결여하고 있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라”(롬7:18)고 주장하고 있다. 성령에 의해서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 은총의 능력을 떠난다면 부패성은 영적인 사물에 있어서 인간을 아주 무능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흠정역에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FREE GIFT)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8,1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에 의해서-죄의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구속의 가능성 이하로 가라앉는 일이 없도록 보호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인류를 위하여 회복되어진 것이다-신생에 있어서의 생명의 영이라든가 전적 성화에 있어서 성결의 영이라고 하는 의미에서가 아니고-일깨워 주시며, 죄를 책망해주시는 영으로서 회복되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혜로운 도우심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자연적 무능력을 길항하는 것으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거룩한 상태에 회복될 수가 있으며 원하는 사람은 모두 죄에서 의로 돌이킬 수 있게되고 죄 사함과 깨끗함을 얻기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으며 또한 주앞에 열랍될만한 착한 일들을 따라갈 수 있게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사람이 향수하고 있는 이 자유능력(free agency)은 자연적 능력이 아니고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5. 원죄의 전달 원죄 혹은 유전적 부패성은 그 근원을 아담의 죄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인류 각인에게 전달 되었는가를 우리는 간단하게 고찰해야겠다. 이 제목에 관해서 수 많은 견해들이 있었으나 가장 적합한 것은 “유전양식설-Genetic Mode)”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유전법칙의 표현이나 혹은 그 적용이다.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재 생산하는 일 또한 그것은 해부학적 구조나 육체적 특징에 관해서 뿐아니라 정신적 생명 및 정신적 경향에 관해서까지도 그러하다고 하는 것은 유기적 생명의 법칙이다. 유전 전달의 법칙은 자손이 양친을 닮는 일을 결정한다. 이 일은 인간이 공통적으로 타고난 부패성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겠다. 아담의 자손은 이 법칙의 저주 밑에서 출생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성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을 빼앗아 버렸으며 거기서부터의 회복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유전적 부패성은 자연적 유전법칙일 뿐 아리라 그것은 아담의 죄의 형벌적 결과밑에서 지금도 작용하고 있는 법칙이다. 인간은 자기가 타고난 부패성에 관해서 책임이 없다. 따라서 부패성에는 양심가책이나 잘못했다는 느낌이 붙어있지 않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에 타고난 그 죄에 대해서는 책망받을 것이 없다. 그가 유전하게 되는 것은 속죄 보혈로 준비해 놓이신 구체책을 거부할 때에만 있는 일이다. 자기선택으로 그 구체책을 거부할 때에 그는 유전적 부패성이 자기의 책임됨을 인준하게 되는 것이다. 6. 부패성과 연약성 바울이 쓰고 있는 육신(flesh)이란 어휘는 죄의 지배밑에 있는 인간의 영적, 육체적 쌍방의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 부패성은 영혼과 육체 양면에 모두 뻗어 나아간다. 영적 성질의 부패는 성령세례의 의해서 제거될 수 있으나 육(flesh)의 연약성은 부활과 육체영화에 의해서 제거될 수 있다. 일반적 의미에 있어 혼(soul)과 육체(body)를 구별하는 일은 별로 어려울 것이 없겠으나 명확한 경계선 즉 영적분야와 육체적분야의 정확한 경계선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이 경계선의 소재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혼(soul) 가운데 전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육적 마음의 표현(carnal manifestation)과 여전히 죄 밑에 있는 인간의 육체적 구성의 표현인 육체적 연약성을 쉽사리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적인 과로는 자주 육체를 약화하며 반면에 육체적 연약함도 인간의 마음과 영을 어둡게 한다. 모종의 질병은 이상한 정서적 경향이나 특수한 표현 형태를 초래하는 수가 있다. 적당한 휴식의 부족, 부적당한 식사, 내분비선의 장해, 기타의 요인은 지나친 초조감이나 이상한 좌절감을 느끼게하는 기간을 초래한다. 심리적 갈등은 자주 신경쇠약이라고 알려진 상태를 초래한다. 그러한 경우에는 전적 성화된 사람도 이상하게 행동하는 수가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육체적 영적 분야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명확하지 못하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사람을 향해서 언제나 사랑의 정신이 요청되어 진다. 동시에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적상태에 관하여 가감없이 사실 그대로의 정직성을 가져야 한다. 그는 자기 생애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정당하게 직시할 것이며 육적 마음의 표현(carnal manifestations)을 “육체의 연약성”이라고 말하면서 정당화하려고 하는 온갖 유혹을 물리쳐야 하겠다. 개인적 종말론 베드로전서1장에서 베드로는 개인의 종말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성도 각자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완전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5,7,13절). 본 주제 강해에서는 개인적 종말에 관하여 자세히 고찰해 봄으로써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지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육체적 죽음 이는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됨으로 육체의 생명이 종결되는 상태를 말한다(전12:7;요19:30;약2:26). 그러나 이것은 육체의 기능이 정지되는 것이지 존재 자체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① 죄와 육체적 죽음의 관계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다(창2:17;롬5:12;6:23). 곧 죽음은 신적 진노의 표현이며(시90:7,11), 심판이며(롬1:32), 정죄이며(롬5:16), 저주로서(갈3:13) 필연적인 것이다(히9:27). ②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밀 죄사함을 받은 성도 역시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죽는다. 그러나 그 죽음의 의미는 단순히 지상 생활의 끝이며, 끝없는 심판 상태에 처할 불신자의 죽음과는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죽음은 성도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며 속된 생각을 없애고 영적 성장을 도모하여 성스러운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2. 영생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영생하는 분이시나(딤전6:16) 그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에게는 시작은 있는 반면 끝은 없다. 즉 악인은 사후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며(계20:10) 성도는 행복한 상태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요3:16;5:24;갈6:7,8). 악인의 존속은 영벌이며 성도의 존속은 영생인 것이다(요3:36). 영생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① 구약 구약에서 에녹(창5:24;히11:5)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고 아브라함(창25:8)과 이삭(창35:29)과 야곱(창49:33)은 죽었으나 존재가 소멸되지 않고 열조에게 돌아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욥(욥19:25,26)과 다윗(시16:10,11)과 솔로몬(전12:7), 이사야(사26:19), 다니엘(단12:2,3), 호세아(호13:14) 등은 영생에 대해 증언하였다. ② 신약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영생을 믿었으며 예수께서 직접 영생에 대해 언급하셨고(요11:25,26), 사도 바울(롬8:18;고후4:17,18;딤후4:7,8)과 히브리서 기자(히11:19)도 이에 대해 증언하였다. 3. 중간기 상태 인간이 죽은 후 부활할 때까지 영혼이 어디에서 어떠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① 중간기 처소에 대한 카톨릭의 견해 인간은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처소에 거한다는 주장이다. ㉠ 천국. 영세를 받고 신자가 된 후 선행과 공적을 쌓은 자는 즉시 천국으로 간다. ㉡ 지옥. 영세를 받지 못한 성인이나 영세를 받은 후 치명적인 죄를 지은 자는 즉시 지옥으로 간다. ㉢ 연옥. 영세를 받았으나 완전치 못한 신자는 고통의 장소인 연옥에서 정화의 기간을 거친 후 천국으로 들어간다. ㉣ 선조 림보. 구약 시대 성도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 기다리며 머무는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부활 전에 이곳에 내려가셔서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천국으로 끌어 올리셨다고 주장한다. ㉤ 유아 림보. 영세를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유아들이 특별한 형벌이나 행복 없이 영원히 지내는 장소이다. ② 중간기 처소에 대한 성경적 견해 인간이 죽은 후 세상 마지막 날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영원한 축복과 형벌을 선고받기까지 일단 머무는 처소에 관하여 성경은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종합적 고찰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이끌어 낼 수 있다. ㉠ 최종적 심판은 인간의 사후 즉시 개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 마지막 날 백보좌 앞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진다(단7:10;롬14:10;계20:12-15). ㉡ 영생과 형벌의 장소는 오직 세상 종말 뒤에 새로이 도래할 신천지와 천국과 지옥밖에 없다(마25:31,46:계20:10;1-4,8). ㉢ 일단 유적 생명이 끝나면 더 이상 최후의 심판에 영향을 끼칠 회개와 범죄는 없다(시6:5;눅16:25,26:히9:27). ㉣ 육체적 죽음을 통하여 영과 육은 분리되며 영은 각기 중간기 초소로 가나 육은 완전히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도는 부활시에 새 육체를 갖게 된다(전3:21;12:7;고전15:44,51-53). 이상의 원칙과 성경의 관련 부분을 종합하여 학자들은 사후에 육은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각각 천국과 지옥의 중간기적인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돌아간다고 본다. 즉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하면 비할데없이 즐거운 곳이며 올무는 매우 고통스러운 곳이나, 낙원과 음부로 장차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하다(눅16:22-25:23:43;고후12:4;계2:7;6:9-11;7:9,10:20-13). ③ 사후 영혼의 의식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영혼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 영혼수면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무의식, 즉 잠자는 상태로 부활때까지 유지된다. ㉡ 멸절설. 죄로 인하여 영생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죽은 후 영원히 의식을 상실한다. ㉢ 조건적 영생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영혼들만 멸절한다. ㉣ 제2시련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중간기에 회개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 개혁파 견해. 사후 인간은 각기 처소에서 즐거움 혹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본다(눅16:19-31). 사람 낚는 어부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임할 동역자들을 부르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동역자들에게 부여된 사명과 그들의 옛생업과는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즉 동역자들의 세상 일은 신령한 하늘나라 사업의 예표요 상징이었다. 한편 새로 부여된 ‘사람 낚는 어부’에 관해 재고해 볼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선결조건 ‘나를 따라 오너라’는 명령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부인에의 요구였다(마16:24). 즉 자기 중심에 얽매여 있는 현재의 삶의 방향과 방법과 관심과 목적을 예수께로 돌리라는 명령이었다. 또한 이는 거룩한 일꾼으로서의 헌신의 부름인 동시에 수난과 십자가 행로의 동행 요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와의 완전하고도 친밀한 교제에의 요청이었다. 2. 사명의 본질과 내용 신령한 어부에게 부여된 사명은 그들 고유의 능력과 신분 때문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당신께 합당한 자로 들어 쓰시는(고전1:27,28) 하나님의 전권에 의해 맡겨졌다. 따라서 신령한 어부들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 대로 세상이라는 바다에 나아가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데 성과 열을 다해야 한다. 3. 사역의 자세 일반적인 ‘어부’는 산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이지만,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자이다. 이러한 직임을 감당하기 위해 ①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잡으려는 대망을 가져야 하고 ②고기가 좋든 나쁘든 잡아들이듯이, 전도 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하늘나라에로 불러들이려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③한 자연인을 영생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성령(하나님)이심을 먼저 자각해야 한다. ④신령한 그물을 던질 세상을 알아야 하고 그 낚는 방법도 깊이 연구해야 한다. ⑤믿음으로 그물을 던지되 낚여지는 고기가 적더라도 실망치 말아야 한다. ⑥죽음의 물결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산상 수훈에 나타난 팔복 연구 여덟 개의 축복 선언으로 구성된 8복은 독립된 개개의 항목으로 존재하지 않고 천국 시민에게 부여된 하나의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윤리 기준들이다. 1. 배경 먼저 본문이 갖는 양식적 배경은 구약의 지혜 문학, 특히 시편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시편 84:4,5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구약 성경에 언급된 축복 선언은 두 이상이 짝지어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본문의 시간 및 장소적 배경은 1,2절에 암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한 직후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등(마4:23) 핵심적 사역을 전개해 나가셨다. 온갖 병자들을 이적적 권능으로 치유하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혹은 그 권능을 직접 목젹하고서, 수많은 군중이 예수께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축복을 구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에 예수는 공생애 초기부터 이 무리들에게 천국이나 축복의 실상이 어떠하며, 또한 그러한 축복 가운데 있는 자들이 드러내어야 할 삶의 자태가 어떠한지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무리들은 예수의 이 심오한 설교 내용을 듣긴 들었어도 도무지 그 내용을 알지 못했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들마저, 예수께서 대적들의 손에 사로잡혀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 생애의 의의를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구조 어떤 학자들은 8복을 구약의 십계명에 비교하기도 하고, 8복이 아니라 9복 내지는 7복으로 늘이거나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8복 중 처음 네 개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한편 나중의 네 개는 성도들 상호간의 대인 관계에 관한 규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본문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무리하게 분해하거나 짜맞추는 시도들은 무의미하다 하겠다. 본문의 여덟가지 축복들을 어떤 특정한 순서로 배열되었다기 보다는, 천국 시민의 특질이라고 하는 단일한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개 나열하여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할 사항은 앞에서 논의되었듯이, 팔복의 처음과 끝이 ‘천국’의 축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됨으로써 본 설교이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가글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3. 누가복음과의 비교 마태복음 5:3-12을 누가복음 6:20-26과 비교해 보면 사소한 차이점도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누가복음의 네 개의 축복 선언이 네 개의 저주와 나란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두 2인칭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저주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여덟 개의 축복 선언(마5:3-10)은 모두 3인칭 형식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 것만 2인칭 형식으로 확대되어 그 뒤에 이어지고 있다(마5:11,12). 외경 에녹1서 58: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 이전의 축복 선언에서는 2인칭을 사용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전도서 10:16,17의 헬라어 본문의 경우에만 축복 선언이 저주와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축복 선언이 후기의 개작이라고 볼 마땅한 이유는 없다. 한편 듀퐁(Dupont)과 마샬(Marshall)은 누가는 제자들의 실제적이 상태를 중점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하고 마태는 당위적인 요구를 중점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현상태는 종말에 역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로 강조하였고, 마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지금 요구되는 그리스도인의 의의 기준을 말하려 했었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스트렉커(G. Strecker)는 마태복음 축복 선언에서는 윤리가 종말론을 대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축복 선언이 메시야 시대와 관련된 종말론적 축복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윤리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구 사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자료를 취사 선택하여 구성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두 가지 축복 선언에서 차이점이 생기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차이가 지나치게 과장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교훈 여기 열거된 여덟 가지 그리스도인다운 특질들과 참된 성도에게 약속된 축복들의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보다는 본 단락 강해에서는 팔복 전체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교훈에 대해 상고하자. ①본문의 ‘…한 자’란 ‘모든’성도들이 이르러야 할 상태이다. 팔복 강화의 교훈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특별히 헌신하는 목회자나 선교사 등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②그리스도인들은 여기 나타나는 여러 특성들을 ‘모두’ 드러내어야 한다. 물론 성도들에 따라 어느 특성을 다른 특성에 비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여덟가지 특성을 다른 특성에 비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여덟가지 특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신앙자세라는 면에서 하나이다. 따라서 ‘애통함’이 없이는 ‘심령의 가난함’이 있을 수 없고, 또한 ‘마음이 청결’하지 않고서는 ‘애통할 수’ 없다 하겠다. ③여기 열거된 그리스도인다운 특성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특성들은 생래적으로 타고난 좋은 성품을 가리키지 않으며 후천적 수양을 통해 획득한 결과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생명의 열매들로서 나타나는 것일 따름이다. 복음은 가장 교만한 자도 가장 겸손하게 만들 수 있고, 가장 완악한 자도 가장 온유하게 만들 수 있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웠던(막3:17)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았다. ④본문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시사한다. 이 양자는 구하는 복의 종류나 기뻐하는 대상 등 여러 면에서 엄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 차이는 외면적이거나 부분적인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이는 가시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열매들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눅6:44). 그러므로 성도들은 먼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성별시킴으로써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세상을 향한 성도의 사명을 잘못 인식한 나머지, 세상의 사악한 풍조를 교회에 들여와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사례는 철저히 근절되어야 한다. ⑤팔복은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나거니와,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과 다른 차원의 또 다른 영원하고 참된 세계에 관한 비젼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불의와 포학이 창궐하고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며, 또한 권모와 술수가 처세의 능사로 통하기도 하지만, 천국에서의 삶의 법칙이나 통치 원리 등은 이와 전혀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되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빌3:20),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열성을 바치도록 부름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상대적 속성 하나님의 상대적 속성은 본질적으로 절대적 속성과 다른 것으로 간주될 것은 아니고 같은 본질적 속성의 다른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 관점이 달라진 것 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기 충족은 하나님의 전능에서 표현되며 같은 모양으로 공간과 관련되는 하나님의 광대 무궁함과 시간과 관련되는 영원성은 그와 밀접한 불변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편재성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전지는 우리들이 생각해 온 것만큼 절대적 속성들과 그렇게 밀접히 관련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전지는 특별히 인격성에 속한 것인데 형이상학적 속성과 윤리적 혹은 도덕적 속성간의 필연적인 접촉점이 된다. 1. 하나님의 편재 하나님의 무궁성은 편재라고 하는 속성의 전제가 된다. 디크박사는 그 양자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무궁이라고 부를 때에 그것은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편재라고 할 때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존재하신다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편재하시기는 하나 그의 피조물에 대해서 각각 다른 관계에 서있다. 마르텐젠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자연계에서 어느 한 방법으로 임재하시며, 역사에 있어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임재하시며 교회에서는 별도의 형태로 세상에서 또 다른 형태로 임재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성도의 마음속과 불경건한 자들의 마음속에 또는 천국과 지옥에서 동일한 의미로 임재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해 우리가 전술한 논의에 비추어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곳에 자신의 전체 속성으로 임재한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경건한 자가 하나님을 환란중에 만날 큰 도움으로 언제나 경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3-24). 하나님은 어찌 그리도 위대하신고!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시33:13). 하나님은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실뿐더러 죄를 범치 않도록 제지하시는 임재도 되신다.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죄가 범행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실행된 행동이나 발설된 말을 모두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마음속에 품은 사상이나 동기 또는 어떠한 감정에 탐닉했던 것까지도 모두 알고 계신다. “나 어느 곳에 방황하든지 나 어느 곳에 안식하든지 이러한 생각들로 내마음을 채우소서. 또 내 열정(Weaker Passions)이 범죄를 감행치 못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니까요.” 2.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전능성은 의지중에 표현된 인격성으로서 절대적 속성인 자존성(aseity)과 관련된다. 그것은 성지의 표현이므로 직접적으로 생명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과 관련된다. 전능성은 하나님의 완전성(perfection)이라 정의할 수 있는데 이 전능성에 의해서 하나님은 행하기를 기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하실 수가 있다. 다음은 성서적 정의라고 하겠다.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라”(렘32:17).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능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의 성질 때문에 그러핟.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성결이 죄와는 양립할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와 같은 처지에서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표현으로 충만하다. “하나님이 한 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62:11).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 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찌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니 명하신대로 견고히 섰도다”(시33:8-9). “하늘과 땅이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종교적 가치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능의 교리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깊고도 항구적인 경건한 예배의 기초가 되며 고요한 신뢰와 확신을 위한 근거와 견고한 토대가 된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로 용감하게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것은 전능성을 통하여 그의 구속 성업이 최후의 적이 되는 사망까지도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세토록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실망과 외견상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넉넉히 이기게 해 준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 3. 하나님의 전지 전지라 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해서와 모든 사물에 관해서 가지는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들 중에서 지식이라고 불려지는 것의 무한한 완전이다. 따라서 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147:5).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139:12).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사46:9-10).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일3:20).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계2:23). 전지라고 하는 속성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학상 논의가 많으며 또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 속성에는 각별히 당황케 하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것은 특이하고 신적인 인격자와 본질적 관계를 띄고 있다. 이 속성과의 관련에 있어서 발생하는 첫째문제는 일반적으로 예지라고 알려진 것, 즉 장차 일어날런지도 모르는 우발적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문제이다. 우발적인 일이라 함은 일어날 듯 하면서도 일어난다고 단언할 수 없는 일들과, 우연히 발생하기 쉬운 일들이나 혹은 예기치 않은 상황들과, 또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영향을 받는 일들이다. 하나님의 예지문제에 관해서 알미니우스 신학자와 칼빈 신학자는 한가지로 Scientia necessaria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관해서 필연적이며 영원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주장한다. 무한한 인격자시라 함은 자신에 관해서 무한한 의식과 지식을 가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 양대 진영의 신학자들은 Scientia Libera 즉 하나님이 자기자신 이외의 인간들과 사물에 관해서 갖고 계신 자유로운 지식에 대해서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예지의 근원에 관해서는 이 양자의 견해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알미니안들은 하나님이 순수한 우발 사건을 아신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이 예지를 하나님께서 자기안에서 작정하신 바 성정(decrees)과 관련시킨다. 이 양자의 중간적 입장으로서 Scienta media 즉 가설적 지식이라고 하는 입장이 있다. 이것은 조건적 지식인데 그 지식에 의해서 하나님은 실지로 발생할 모든 일 뿐만 아니라 어떤 실재하지 않은 조건(nonexistent conditions)하에서 발생 여부에 대한 모든 가능성까지도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이 전적으로 자유에 근거하는 것인가 혹은 조건적인 것인가는 불문에 붙이고 반 오스테르제(Van Oosterzee)와 한가지로 “하나님이 알고 계신 곳에서 그 누구도 절대로 도피할 수가 없다”고 결론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성과 관련에 있어 둘째로 곤란한 문제는 예지와 예정의 관련이다. 칼빈주의의 입장은 예지와 예정을 동일시하며 하나님의 성정은 인간의 자유 행동을 포함해서 모든 사건 발생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은 어떤 일들이 마땅히 발생해야 한다고 하나님 자신이 성정하신 결과로서만 미래의 사건들을 예견하신다”고 말한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이 견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정면으로 반대가 되는고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미니우스주의 입장에서는 반대 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자유의 본질적 요소이며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의 자유행동에 관한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우발성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점에 관한 포우프박사의 성명은 주의깊게 고찰할 가치가 있다; “발생하는 일의 원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고, 발생하는 일이 하나님의 예지의 원인이 된다…… 예정 즉 하나님이 하시고져 하는 모든 일이 미리 결정됐다고 생각하는 일은 그 논리적 근거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달성하는 일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다만 그것을 미리 아실 수 있는 것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는 벌써 자유가 아니다”(포우프의 기독교신학개요 제1부 p.318). 하나님의 전지와 인간 자유와의 관계에 대해서 히일즈 박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를 하나님의 전지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부정해 버린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예지 그것만은 아무 것에도 영향을 주지 않으며 또 인간의 선택하는 본성을 어느면으로나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지란 것은 하나의 지식인 것 뿐이지 영향력이나 원인이 아니라고 하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그러하다. 오늘, 오후에 모씨가 자유의지에 의해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를 하나님께서는 100만년 전에 확실하게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며, 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것도 알고 계신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하나님은 별도의 방법으로 그것도 예지하고 계셨을 것이다. 예지가 인간의 자유선택을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선택이 하나님의 예지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오늘 오후에 자유의지에 의해서 행한 일은 구경하는 이웃들이 무엇을 보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해 주었으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할 일을 예지하셨던 내용까지도 결정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장차 행할 자유의지의 결정을 예지하시는지 -하나님의 성질중의 여타의 모든 무한한 사실들처럼-신비로운 일이다(히일즈의 기독교신학기초 제1권 p.209).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결론함에 있어서 W.N.Clarke의 진술에 유의하자. “사실, 사물에 관한 하나님의 지식이 그 사건에 관한 참된 원인, 혹은 다른 실재의 원인들을 파괴해 버린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상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과꽃 핀 것을 보시고 결실에 대한 약속을 다할 것이냐의 여부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심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지식이 그 열매를 결실시키거나 부실하게 하는 자연의 힘을 대리행사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자유 행동의 분야에서도 그러하다……우리의 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 행동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인류의 모든 경험과 상식에 역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이 힘들의 효력-하나님은 그 힘들의 활동을 미리 알고 계신다-을 파괴하는데 있어 특별히 그 힘들이 인간의 의지들인 경우에 그렇다고 하면 우주에는 단 하나의 의지만 있을 뿐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주장하는 일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전적으로 숙명론중으로 구속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때때로 주장되어 왔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논할 때에 이같은 교리를 주장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닌데도 부지부식 중에 이같은 교리를 주장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닌데도 부지부식 중에 암시되어지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를 부인하는 교리라면 진리일 수는 없다.”(클라아크의 기독교신학개론 p.85). 4.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지혜는 전지와 밀접하게 관련되며 또한 전지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주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특별 항목의 취급을 받고 있다. 웨이크필드가 정의한 바와 같이 “이것은 신성의 속성인데 그 속성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 자신의 영광을 증진하는 일과 그의 피조물의 유익을 위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정돈하신다.” 지혜와 지식은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으나 그 차이점은 명백하다. 지식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일이며 지혜는 그 지식을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적용하는 일이다. 지식이 지혜를 위해서 필요하듯이 전지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위해서 필요하다. 이 속성에 관해서는 신, 구약성서에 많이 언급되었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12:13), “여호와여, 주의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시104:2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딤전1:17). 5. 하나님의 양선(Godness) 하나님의 양선은 그의 속성인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이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이 속성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유한한 자에게 분여하시도록, 또한 인간의 수용능력에 따라 은사를 전달하시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주는 뛰어난 속성이다. 하나님의 양선은 자발적인 것이다. 그것은 제일의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심 혹은 피조물의 행복을 증진시키려고 소원하시는 기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관련한 것인데 사랑은 응답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것들에게 제한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선은 모든 피조물에게 다 적용된다. “한 마리의 참새도 하나님 앞에는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도다”(눅12:6). 시성 다윗은 하나님의 양선을 깊히 명상하기를 좋아한 듯하다. “나의 평생에 선(Godness)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하나님의 인자하심(Godness)은 항상 있도다”(시52:1).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godness)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9).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goodness)이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롬2:4)고 말하며 갈5:22와 엡5:9에서는 양선을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다. |
출처: 꿈돌이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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