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전도에 편중된 제자교육에서 진정한 신앙인격과
기능을 보완한 제자훈련서!! 첨부파일 참고하세요. (지은이 - 라황룡목사) 박영선목사의 제자 훈련 교제 서 문 그 동안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여러 복 중에 구원 확신이 라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고 또 성령의 은사들을 넉넉히 주신 것도 한국교 회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압니다. 그리고 제자훈련으로 각 교회들이 전도와 신앙인을 키우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신 것도 커다란 축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제자훈련을 시킨다고 하면 전도자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제자훈련의 내용으로서는 조금 미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라는 것은 그것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뜻을 갖지 않는가, 좀 더 넓고 깊은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말하자면 전도가 강조되야 되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전도일변도다 싶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기능인을 키우는 것 같은 인상을 자꾸 받게 되고 성도들도 실력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성경이 요구하는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생겼다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교재는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에 대해 원리와 실제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고자 제작되었습니다. 이 안에는 제자에게 필요한 자세, 다른 신앙 원리들과의 관련성, 그래서 해야되는 실제적인 행동지침등을 다루었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처음 그것을 도입하는 사람은 대단한 위인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제자훈련을 시작한 일들은 언제까지나 한국교회에 큰 공헌으로 남아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첫 사람 이 시작이고 끝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재가 기존의 교재들을 보완하고 그 정신을 살려 여러분들이 가진 신앙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제 1 과 --------------------------------- 제자란 누구인가? 본문 / 마 28:18-20 <요점> {{ 제자를 삼는 일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열심과 의지가 땅 끝과 모든 족속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고난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이루어진 이 온 우주를 통일 되게 하려는 구원의 범위가 땅 끝과 모든 족속에게 허락되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1. 제자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 까? 평소에 생가하고 있던 의미들을 말씀해 보십시요. <이해를 위한 설명> 먼저 제자훈련이라는 이 말에서 제자가 무슨 뜻이냐 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합니다. 제자는 어떤 특 수한 직분을 맡은 특별한 사람들이냐, 아니면 포괄적인 신자 전부를 일컫는 일반적인 명칭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문제가 되는데 그 제자가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제자삼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 음 28장 18-20절에 나오는 이 표현들을 살펴 보기로 합시 다. 우리는 막연히 이 구절을 선교적 사명에 있어서의 전세계적인 비젼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수행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우리의 열심과 투지는 그리스도께 서 주신 권세가 근거라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의 이해가 본문을 다 수용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과연 이 구절이 요구하는 것이 전도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권세가 그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이 대위임령에 있어서, 왜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는 이 일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제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제대 로 풀려야 그것을 전제삼아 언급되고 있는 제자를 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분명해질 것입니 다. 우선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예수께서 하늘과 땅 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 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 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 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 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그러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서 가지셨는데 그것을 가지신 근거는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 이 그가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 다. 따라서 마태복음 28장의 말씀도 단순한 신적 권세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말하는 그의 고난으로 말미 암는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는데 근거가 된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졌고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는 데 뭐가 겁나랴?" 라는 믿는 자 들의 전도적 열심을 강조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 은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 사역을 완수하셔서 이제는 나 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흑 암의 권세에서 해방을 얻는 이 은혜와 구원이 허락되었으 니 너희는 마음 놓고 가서 누구든지(모든 족속) 살려내고 구원해 낼 수 있다라는 말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전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해주는 대목이 사도 행전 1장에 가면 나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 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 끝까지'는 우리에게 부여된 전도적 사명의 범위에 초점이 있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구원을 초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적 개념에서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 에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구원이 이 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족속에게 허락된 하나 님의 복된 선물인 것이 이 '땅 끝'이요, '모든 족속'이라 고 명시된 표현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모든 족속과 땅 끝까지 가는 문제에서 그 초점은 선교사역의 넓이와 범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범위가 '땅 끝'과 '모든 족속'이란 것입니다. 제자를 삼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권세가 전제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에베소서 1장에 가면 조금 더 확실하 게 드러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 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10) 여기 나오는 바와 같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 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시는 이 일이 제자를 삼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권세가 전제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근거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가보시면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 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 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 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 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5-20). 여기 나타난 이 설명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어 린 양이라 하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 설명이 있음을 봅니 다. 우리 인류가 다른 아무 문제는 없었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 밖에 없었는데 그 죄 지은 것 하나만을 고 쳐주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이시며, 창조된 모든 것이 그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요, 그가 만들어진 모든 것의 주인이시요, 그가 창조된 모든 것을 생명있게 하고 조화있게 하고 선하고 아름다움으로 축복하시는 분이시요, 또 이제 타락한 이 인류와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것도 오직 그만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화목과 회복과 완성까지 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므로 그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 끝까지'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 으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는 우리 모든 인류, 우주 만물, 역사를 다 만드셨고, 복 주셨고, 주인이 되셨 고, 타락하고 이제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다시 회복 시키기를 기뻐하시는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다시 우 리를 화목케하여 자신 안에 모든 것이 통일되도록 하는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이해하므로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목과 통일의 작업은 온 우주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기에 모든 족속과 땅 끝이란 표현들이 등장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 일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 의 열심과 의지가 땅 끝과 모든 족속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 이 아니고 고난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 진 이 온 우주를 통일 되게 하려는 구원의 범위가 땅 끝과 모든 족속에게 허락되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점이 어디로 갑니까? 전도와 불러 오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부르셨습니 다', '그 분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이렇게 놀라우신 분입니 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누구든지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 니다'로 초점이 전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래서 '땅 끝'과 '모든 족속'은 포획물적인 차원에서 우리 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제부터 해야되는 사명이 크다는 것이나 전과(戰果)를 위해서 들먹여지고 있는 표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한 구 원이 어떻게 모든 인류에게 동등한 것인가에 초점이 있습 니다. 그러므로 제자 삼으라는 표현은 어떤 특별한 사람을 뽑으러 가는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 제자를 삼으라 는 것으로 인해서 제자를 삼으러 가는 사람이 특별한 지 도층을 가르치는 더 고급한 우월감에 가득 차서 가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고, 땅 끝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허락하시고 동등한 구원의 복을 주시기를 기뻐 하셨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제자가 특수한 고급 지도자가 되는 것으로 오해되는 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엘리트를 만들고 그 엘리트들로 하여금 특별한 기능에 맞도록 훈련시키는 것이기 보다 모 든 족속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동일한 구원이요, 독특한 지위와 책임이기 보다는 부르심의 영광의 동등한 지위라 고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제자삼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권세가 전제되어야 되는 이유를 빌립보서 2:6-11에서 알수 있습니다. 이구절을 근거로 하여, 그 권세가 어떻게 오해될 수 있으며, 어떤 식의 해석이 바른 것인지를 설명해 보십시요. 2. 에베소서 1장과 골로새서 1장에서 설명해 주는 그리스 도의 권세는 제자삼음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까? 3. 마 28:18-20에서 제자삼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권 세가 전제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보십 시요. 4. 제자란 누구입니까? ( ) ① 잘 훈련된 신자 중 엄선된 자들 ② 신자면 누구나가 갖게 되는 동등한 지위 ③ 전도를 잘하며, 열심내는 신자들 ④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일반명칭 ⑤ 특수한 제자훈련 과정을 마친자들 ⑥ 신앙의 엘리트 의식을 가진자들 <토의를 위한 질문> 1.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제자인지 서로 말씀해 보십시 요. 제 2 과 --------------------------------- 제자의 탄생 본문 / 행 1:8 <요점> {{ 제자훈련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구원과 성령으로 인해 새 생명 얻은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생명이 갖는 변화된 삶으로 증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1. '제자 훈련'을 받아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 면 그 훈련이 어떤 식의 제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다. <이해를 위한 설명>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은 어떤 기능적인 측 면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고 모든 인류에게 허락한 복된 구원과 그 영광의 동등함에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 앞의 공부에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그 제자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는 어떤 독특한 신분이나, 지 도자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모든 신자의 일반명칭이라고 봐야 됩 니다. 여러분이 제자훈련을 받는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신자로서 훈련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시간에는 제자란 존재가 누구에 의해서 발 탁되거나 양육되는 엘리트나, 지도자들이 아니고, 하나님 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모든 종족이란 범위 속에 들어 있는 존재라면 그 제자들은 도대체 어떤 방식 에 의해 탄생되며, 그 탄생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 지 추적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8이 우리의 궁금증에 답을 줍니다. 땅 끝까 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이 일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 이 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는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는 일'에 있어서의 조건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님이 가지신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것이 주로 어떤 식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느냐 하면 하늘 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임하사 얻는 권능이 이 일을 하는 자들에게 커다란 담대함과 기 고만장한 자세를 부추기는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에 있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 세'라는 것이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었듯이 여기서도 왜 성령이 임하셔야 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이 가서 하 는 일에 있어서 일의 성공을 위한 보호 장치나 형통케 하 기 위한 초월적인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출 생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성장은 다 성령 하나님을 조건 으로 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일은 지식과 인종과 문화와 노력의 문제가 아닌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으로 말미암는 회심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을 먼저 구하면 되고, 아니면 안되는 식의 우리의 열심이나 자세의 문제가 아닙 니다. 성령은 새 생명의 탄생에 유일한 열쇠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으로 가서 성령께서 새 생명 출생의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 니라".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아무도 회심하거나 주 를 알거나 주를 믿거나 주를 고백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 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 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 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 라"(롬8:9-11).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 의 사람으로 출생하지를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는 새 생명의 출생과 함께 그 새 생명이 완성과 영광의 자리에 가기까지 보장하시고 이루어내시는 이로 오셨습니 다. 이렇게 사도행전 1:8에서 성령이 전제된 것은 이 일 을 하는 자들의 자세에 어떤 능력을 부여하는 근거로써 이해되기 보다 성령만이 생명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8이 말하는 성령의 권능입니다. 성령님은 탄생한 새 생명의 성장에 있어서도 또한 유일한 열쇠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3-14) 입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구원이 죄와 심판에서 벗어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완성의 자리까지 가도록 의도되었으며 그 의도가 실패되 지 않는 보증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 는 것이 기도해서 어떤 결과가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습하고 애써야 되는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을 봅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 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 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 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 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내게 비추시 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 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 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 라"(엡5:8-18). 잘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님의 권능으로 한 사람, 모든 족속, 땅 끝까지 구원 이 허락되고 모든 심령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그 구원 을 얻은 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명령 이 됩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이란 어떤 특수한 임무를 위 한 기능인으로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 로 거듭난 자가 성도답게 사는 훈련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훈련은 성도라면 누구나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여러분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있게 한 어떤 위치와 환 경과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하 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환경과 책임거리는 뒤로 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필요한 조건들을 하나님 앞에 나 열하기 시작을 합니다. "돈을 더 주십시요, 지혜를 더 주십시요, 시간을 더 주십시요, 건강을 주십시요" "내가 할 일이 있는데 그 할 일을 위한 힘을 주십시요"가 됩니 다. 오늘날 교회는 이 실수를 너무나 잘합니다. 그래서 자꾸 교회가 개인들의 욕심, 또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잘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운동을 일으켜서 모든 사람을 자기가 처한 환경과 하나님이 맡긴 일은 잊 어버리고, 그 운동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 다. 제자 훈련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구원과 성령으로 인해 새 생명 얻은 모 든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 고 그 새 생명이 갖는 변화된 삶으로 증거해야 되는 것입 니다. 그래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이렇게 분명하게 결 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새 생명의 출생이라는 구원과 함 께 새 생명으로 변화된 삶까지가 '제자를 삼는다'는 말 속에 내포된 책임있는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를 고치시고 완성하시려고 하는 그 일은 그리스도 예수가 모퉁이 돌이 된,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는 복된 지위 에 오르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일도 세상의 환경과 교육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 님이 친히 오셔서 하시는 일임을 이제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 한 우리의 근본적인 시각이어야 됩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왜 증인의 역할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성령의 임 함이 등장되는 것인지를 본문에서 찾아보십시요. 2. 새 생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필요합니까? ( ) ① 열심히 기도만 하면 저절로 된다. ② 특수한 임무를 위한 훈련을 받아야 된다. ③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책임에서 먼저 반응해야 된다. ④ 변화된 삶을 살아야 된다. 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필요한 조건들을 하나 님 앞에 나열한다. 3.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근본적인 시작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당신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여러분의 위치와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나님으로 사람으로 살고 계십니까? 있 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입니까?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35/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2 15:08 길이:238줄제 목 : 제자훈련 3과 제자됨과 사랑(1) - 박영선 목사 제 3 과 --------------------------------- 제자됨과 사랑(I) 본문 / 요 13:34-35 <요점> {{ 제자훈련은 내가 갖고 있는, 내가 먼저 획득한 것 을 나누어 주는 자가 아니고 내가 어떻게 변했고, 왜 변했고, 무엇으로 변했는지, 그 변한 것으로 상대방 을 항복 시켜야 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훈련은 전도적이지 않고 변화된 인격으로서의 싸움이 어야 맞습니다. 제자훈련은 전도의 기술(Skill)이나 기교(Technic)나 열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 으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새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이 '사랑하라'입니다. }} {{ }}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생각을 위한 질문> 1. '복음의 습격'이란 용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이 주는 느낌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요. <이해를 위한 설명> 지난 시간에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특수 요원을 만들라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류가 차별없이 동등한 신분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며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은 전도적 사명과 범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말 미암는 새 생명으로의 구원과 새 생명이 갖는 변화된 삶 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제자 삼음의 원리들에 대해 정리했 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어떤 행 동들을 해야 된다는 것인가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 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에 있어서 '제자를 삼는 다'는 것은 당시의 제도로는 '도제 제도(徒弟 制度)' 입 니다. 오늘날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교육 제도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함께 숙식을 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배워야 되는 것이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 격적 ,전인적인 변화와 전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갖고 있는 정보의 전수 정 도가 아니며 더욱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 쳐 지키게 하라'는 말은 의외로 십자가 사건, 구속 사건 의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연결되기 보다 는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케리그마(kerygma)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거듭난 다른 인간상에 초점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 어졌다는 것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인간을 어떻 게 변화시키는가, 그 구원이 인간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 시켰는가에 초점이 가야 맞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는 일에서는 그 가르치는 제자들이 예수를 믿고 변 화된 모습이 전수되고 증거되는 것이 첫번째 초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제자 삼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갖는 케리그마를 땅 끝까지, 아직 이 케리그마를 모르는 자들에게 전달해서 저들로 하 나님의 백성을 삼는 전도에 그 모든 초점이 모여있는 것 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끝까지, 모든 족속으로 이렇게 뛰어 나가는 일에 그 동안 너무 초 점을 맞추다가 '주님이 분부한 것'과 '무엇을 해야 되는 가'를 조금 놓친 감이 있습니다. 그 분부한 모든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요한복음 13장 34절 말씀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4:34-35). 굉장히 의미심장한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의미에서 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 우리가 주를 따르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된 그 표를 나타내는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구절을 말할때 주님이 가지셨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이 일과 여 기 요한복음 13장 34절 이하에 있는 '서로 사랑하라'가 사실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연결된다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이제껏 대부분의 제자훈련은 복음 전도 일변도였습 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읍시다'하는 것이 제자훈련 의 초점이었는데 그것 자체로는 잘못도 아니고 분명히 제 자훈련과 제자된 자로서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되는 일차 적인 책임인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 점이 되었을 때 '서로 사랑하라'는 이 주님의 새 계명으 로 주신 말씀과의 연결의 부족으로 인해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났느냐면 제자훈련이 복음전도 일변도로 행해졌을 때 는 대부분 그 전도가 '복음의 습격'을 나가는 양상을 띄 었습니다. '복음의 습격'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습격을 나간다는 것은 어떤 탈취할 목적을 위하여 나머지를 무참 하게 파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속에 있는 뉘앙스는 "너희는 죽어 마땅하고 너희는 벌받아 마땅한데 하나님께 서 나에게 이 명령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어서 나간다. 따라오면 너희 복이고 안 오면 죽어도 싸다" 입니다. 이런 식의 복음의 습격, 복음 전도가 제자훈련 의 초점이 되면 그 일을 행하는 자의 기고만장함이라는 것이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크게 오해됐고 실제 로 제자훈련과 복음 전도라는 이름 속에서 성도들에게 매 우 많이 해롭게 작용했던 부분들입니다. 전도라는 행위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이 대위임령을 근거로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과의 연계성을 놓치고 복음 전도가 제자된 첫번째 사명으로 이해되었을 때는 언제나 파괴적인 습격의 형태 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있어야 하는 가 장 큰 이유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 람을 귀의시키는 문제가 파괴적이거나 심판적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옳다는 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고, 거룩 한 자라는 것 때문에 용서와 긍휼이 없고 훨씬 그 명분과 옳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잔혹하게 군 것이 십자군 원정 을 비롯한 기독교 선교 역사가 증언하는 기독교인들의 부작용이었습니다. 그것이 옛날에는 정치적인 힘을 가지 고 군사력으로 크게 자행되었고 이제는 그 나쁜 유산들이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인간이 같기 쉬운 것이 우월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전도를 하거나 기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자기도 모르게 교만과 정 죄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가시면 4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 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 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 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 이 온전하라"(5:43-48). 하나님께서 왜 악인과 선인에게 그 해를 주고 의로 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주시겠습니까? 사람 중에 우리가 볼 때 선인과 악인이 있고, 의로운 자가 있고 불 의한 자가 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는 성경이 기록한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아닙니까? 그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베푸신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러 갈 때 마치 나는 선인이고 저들은 악인이며, 나는 의로운 자 고 저들은 불의한 자인 것처럼 그들 앞에 서기 위하여 나 간다면 그것은 제자도도 아니고 제자로서 훈련을 잘못 받 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자행되어 왔습니 다. 제자훈련은 내가 갖고 있는, 내가 먼저 획득한 것을 나누어 주는 자가 아니고 내가 어떻게 변했고, 왜 변했 고, 무엇으로 변했는지, 그 변한 것으로 상대방을 항복을 시켜야 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은 전도 적이지 않고 변화된 인격으로서의 싸움이어야 맞습니다. 제자훈련은 전도의 기술(skill)이나 기교(Technic)나 열 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가야만 하는 것입 니다. 그 새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이 '사랑하라'입 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가봅시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 랑장인데 사랑에 관한 여러가지 개념 속에 이런 음미할만 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봅 시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 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 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 라"(고전13:4-8) 지금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상대방 편이 되는 것입 니다. 제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까지 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투기 하지 않습니다' 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조 금 전에 전도라는 하나의 명분만 갖고 있을 때 우리가 어 디에 빠지기 쉽습니까? "나는 주를 믿고 주를 위해 사는 데 너는 너만을 위해서 네 배를 불릴려고 사니까 사실 구원시켜 줄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이 시켜주라고 해서 내 가 딱 한번만 기회를 준다. 믿을래, 안 믿을래? 넌 이제 죽었다."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처럼 사는 것은 지옥가는 것이고 나같이 살아야만 된다'를 상대방을 변화 시키고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것과 '난 잘났고 넌 못났 다'를 얘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 습니다. 그리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 니다. "하나님 쟤는 회개하게 하지 마세요" 이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미우면 그 사람이 회개 할까봐 제일 겁나죠? '저 사람하고는 천국도 난 같이 갈 수 없다!' 얼마나 근본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 리 마음 속에 나쁘게 작용하는가를 보십시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 합니다. '너는 죽어가고 나는 구원얻고' 이런 차별로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구원을 얻어 함께 생명과 진리로 오는 것을 기뻐하며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을 믿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 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모두가 구원 얻는 일이 일어 나기를 바라며 일어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구원이 나에게 일어났으니 누구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사랑이요, 그 사랑이 모든 족속에게 갈 수 있 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 편에 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 수님이 우리 편을 들러 오신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베푸 는 자의 자랑이 아니며, 베푸는 자의 고결함의 증명이 아 니며, 그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 혜택을 받아야 사랑인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행위가 그것을 하는 자의 증명이 되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제자훈련도 남 다르다는 것으로 빠지지 않도 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땅 끝까지 가는 우리의 자 세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족속 앞에 서는 우리의 태도여야 되며, 제자의 가장 굵은 심정이요, 근거요, 원 리여야 되는 것입니다. <도움말> kerygma는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 내 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 다'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사랑이 외면된 채 복음 전도만이 제자 훈련의 초첨이 되면 어떤 부작용들이 발생한다고 본문은 말합니까? 2. 제자를 삼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첫 번째 초점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제자삼는 일에 있어서 사랑이 전제되어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데 있어서 사랑을 갖고 이 일 을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에 변화가 있을까요? 말씀해 보십시요.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36/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2 15:11 길이:250줄제 목 : 제자훈련 4과 제자됨과 사랑(2) - 박영선 목사 제 4 과 --------------------------------- 제자됨과 사랑(II) 본문 / 요 13:12-15 <요점> {{ 제자도는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 하는 것이요, 그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동참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임 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나누어도 손해 보지 않는 일이며, 부요한 결실을 맺는 길임을 그 수 혜자에게와 그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동참한 우리 모 두가 확인하는 일로써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하나의 일거리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된 본질과 격(格)에 관한 문제임을 배우는 것입 니다. }} {{ }}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생각을 위한 질문> 1. 불신자를 전도하러 갈 때 우리의 심정은 어떤 상태입 니까? 해당되는 것에 check(V) 해 보십시요. ․ 호응이 없을까봐 불안하고 두렵다 □ ․ '믿으면 좋고, 안믿으면 말라'라고 담담하다 □ ․ 복음의 날선검을 들고, 불신세계를 공격하러 간다□ ․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간다 □ ․ 내게 이미 누리고 있는 풍성함을 나눠주러 간다 □ ․ 저들을 섬기기 위한 자세로 간다 □ ․ 교회에서 시키는 일이니 의무로 한다 □ ․ 기타 ( ) <이해를 위한 설명> 지난 시간에는 제자도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에 대 하여 공부했습니다. 그 사랑은 나의 만족을 위한 사랑이 아니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 면 이번 시간에는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 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 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 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눅 10:25-29). 율법사의 질문은 이겁니다. '어디까지 해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다하는 것이 됩니까? 사돈에 팔촌까지면 됩니까? 아니면 버스타고 두시간 거리 내에까지 입니 까?' 그러자 주님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 인 비유를 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36절, '내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질문과 답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시겠습니 까?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해라"였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상이 분명한데 이웃 은 어디까지입니까?" 바리새인의 질문은 '사랑을 할 자 쪽에서 어디까지 해야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은 강도 만난 사람이 볼 때 누가 이웃이냐는 것입니다. 37절에 답이 나옵니다. "가 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 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이 바로 '땅 끝까지'와 '모든 족속'입니다. 땅 끝까지, 모든 족속 앞에 십자군기를 들고 내가 가진 구원 과 내가 깨우친 진리를 쟤는 의미에서 나눠 주러 가는 것 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었 듯이 저들을 도우러 가는 자로, 하나님 앞에 일을 맡은 자로, 종과 섬기는 자로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대접을 받는 자로서 선생과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 실제 내용으로서는 그런 면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 오히 려 종과 하인으로서 보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냈듯이 우리가 이제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영혼들을 향하여 하나 님의 종으로 섬기려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 땅 끝까지요, 모든 족속 앞에 가는 것입니다. 전혀 자세가 달라진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에서 잘난 척 을 했듯이 주님의 크신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잘난 척 을 꼭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섬기는 것으로 규정지워진다는 것을 놓치지 않 아야 됩니다. '대접을 받듯이 가지 않고 섬기는 것으로 간다'. 이유는 제자도가 내가 무엇을 나누어 준다는 시 혜자로서의 자랑보다는 주께서 하시는 일을 옆에서 시중 드는 자로서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땅 끝까지 가 는 이 일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이 일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났던 '원 수를 사랑하라'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 내가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안되는 자가 다 내 이웃입니다. 모든 신자의 이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한 자요, 그 은혜를 소개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시중들 어야 되는 대상이 다 우리의 이웃인데, 그럼 누가 제일 먼저입니까? 원수가 제일 먼저라는 겁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을 하고 갈만한 곳에 가는 것,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취미활동입니다. 사랑은 베푸 는 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자가 결정하는 것 입니다, 그 대상과 그 일을.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파한다는 우리의 사명을 누 가 더 멀리, 더 어려운 곳에 가느냐의 싸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태국 가서 선교사 하는 것과 아프리카 콩고 에 가서 선교사 하는 것은 어느 쪽에 더 쎄 보입니까? 그것 말고 여러분 주변을 보십시요. 먼 곳에 가는 것이 자랑이 아니고 내 주변에 얼마든지 널려있지 않습니 까?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이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찾으러 다녔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은 다 오시 오" 이렇게 말하고 다닙니까? 가다가 우연히 만난 겁니 다. 그 때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더 멀리 가고, 누가 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으로 잴려고 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 는 아무도 종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이 되 며, 섬겨야 되는 이 싸움, 이것이 제자도요, 그것을 훈련 해야 되는 것이 제자훈련입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또 다 른 하나의 핵심은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편안 하고 폼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고달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갖되 그 사랑을 무엇으로 감수해야 되냐면 섬기는 것으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섬김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이유 와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태복음 22장 3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 다함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4-40). 여기서 왜 율법의 대강령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됩니까? 하 나님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게 충분하시다'라는 뜻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하나님이 우리 에게 보호자 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 이외에 더 필요한 다른 근거와 보호자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 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도적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등은 모두 다 나에게 주신 것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23편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여호와는 나의 목 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가진 것으로 내가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 님은 나에게 충분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 아서 내가 가져야 될 그 핍절함에 있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것이 근거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 랑하는 이유는 내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나의 부족함을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도에 있어서 서로 사랑해야 되는 이유 는 내가 이제 세상에 사는 자들 같이 약육강식, 적자생존 하듯이 남의 것을 빼앗고, 앞선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인생을 사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산다는 증명이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내가 섬기러 가는 것과 함께 갈 수 있는 이유는 저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든, 어떤 은혜를 베풀고 복을 주시든 그것이 나에게 이미 충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사랑에 증인으로 가는 가장 큰 이유는 그걸 내가 먼저 가졌고, 넉넉히 가졌기 때문입 니다. 내가 누구에게 사랑을 베푼다고 해서 내 것 중에 서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든지 주시는, 나 에게 이미 넉넉히 주셨고 또 누구에게든지 넉넉히 주시는 일에 수종들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사랑의 마음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가시면 이 문제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을 만납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 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 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2-15).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 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명예가 깎이든가, 주님이 가지신 어떤 소유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 리스도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 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아래 꿇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 광을 돌리게 하셨다는 빌립보서의 기록을 우리가 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굉장히 풍부 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사 그의 목숨을 버리셨다고해서 주님이 밑지신 것이 없는 것처럼, 그것이 고난의 길이고 억울한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손해보고, 희생하고, 섬기는 일로 부름받은 그 길은 그것이 더 멋있는 덕목이기 때문 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도 밑지는 것 이 아니요 오히려 많은 열매를 맺는 부유하고 영광된 길 이기 때문에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행위나 원리나 계명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냐를,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었느냐를 드러내 는 것이며, 하나의 제자상을 정립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된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 제자도라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 하는 것이요, 그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임을 증거하 는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나누어도 손해 보지 않는 일이 며, 부요한 결실을 맺는 길임을 그 수혜자에게와 그 은혜 를 베푸시는 일에 동참한 우리 모두가 확인하는 일로써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하나의 일거 리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된 본질과 격(格)에 관한 문제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란, 제자도란 결국 제자된 신자 개인 인격의 뿌 리요, 근거요, 핵심이요 또 흘러 넘쳐나는 모든 것으로 드러나는 영혼과 인격의 어떤 격이란 말입니다. 제자훈 련을 받음으로서 어떤 특수 요원이 되고, 특별한 기술을 배워 특별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자녀된 격이 이렇게 다른 것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 안에 부요해 지도록 노력하고 훈련하여 채우려는 데에 제 자훈련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우리가 섬김의 모양으로, 이웃에게 나아갈 수 있는 힘 은 어디에 있습니까? 2. 사랑은 행위나 원리와 계명이 아니라 무엇을 나타내는 원리가 됩니까? 3. 주님의 걸어가신 고난의 길 및 십자가 사역이 보여준 외형상의 모습은 무엇이며 실제 이루어진 결과는 무엇입 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내 사랑의 대상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주변에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나의 가장 긴급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서로 이야기 해 봅시다.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37/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4 06:24 길이:238줄제 목 : 제자훈련 5과 제자의 정체성-박영선 목사 제 5 과 --------------------------------- 제자의 정체성 본문 / 히 11:6 <요점> {{ 우리가 믿는 것은 진리와 생명에 관한 것이라서 인생의 목표와 삶의 원리와 자세에 영향을 주는 것입 니다. 그것은 의욕과 능력, 열심을 부리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삶의 원리와 자세를 바꿔놓는 것 입니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1. 지난 주간 동안 여러분 자신이 믿고 산 것은 무엇인지 실제적인 삶의 순간순간을 떠올리면서 솔직하게 한 번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해를 위한 설명> 우리는 이제까지 제자훈련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정립하려고 애썼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허락하신 구원을 말 로만이 아니고 우리의 인격과 존재와 삶을 통하여 증거하 는 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땅 끝까지 이 르러 증인이 되며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이 일은 결 국 '그러면 신자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신자란 누구인가?' 말하자면 신자의 정체성(identifica -tion) 문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익숙한 것으로 표현 을 하자면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고 사는가?' 하는 것 입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 앞에 우리가 누구인가, 무엇 을 목적으로 하는가, 왜 사는가를 증거하는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구절인 히브 리서 11장 6절은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하여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 리는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데,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가 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여 기 '존재를 믿는다'라는 말 속에는 그의 창조, 섭리, 심 판권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유일한 권위와 주권과 높으심 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믿음은 이런 것과 함께 좀 더 근 본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을 봅시 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 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7-18). 은혜와 진리, 하나님 께 속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 비로 소 소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궁극 적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며 그의 은혜와 복주심 안에 거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렇게 하나의 개념과 추상적 목표로만 있지 않 고 실제로 그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를 통과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 다. 그래서 믿음 안에는 이 두 초석이 다 놓여야 됩니 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제되고 하나님이 논의되는 곳을 가보면 그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관념의 한 상 징인 것을 봅니다. 선이요, 덕이요, 이상(理想)인 것을 봅니다. 그런 하나님은 깨우침에 불과합니다. 그 하나 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하 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관념과 이상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과 개념 앞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을 것도 없고, 도 움을 구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는 심판도 보상 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신앙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았으면 가짜라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을 소개하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의 본질을 요한복음 14:6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그 하나님을 설명하는 예수를 아는 것이 요, 그 예수의 실체인 진리와 생명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와 생명된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보이시려 는 것은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자신이 진리와 생명의 내 용이자 본질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믿음은 믿는 자의 소원과 정성 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진리와 생명에 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소원과 정성에 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하 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진리와 생명이 라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소원과 정성은 내가 그 내용과 목표를 정한다는 차이입니다. 권위가 누구에 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 님을 믿는다','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이 마치 내가 진리 를 선택한 것 같고, 진리를 깨우친 것 같이 생각할 위험 성이 대단히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야기를 해 놓고도 그의 믿음의 근거가 진리와 생명이라는 우리 믿 음의 중요한 핵심되는 성격이 외면되고 자기도 모르게 정성과 소원이라는 것으로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 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추적하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 느냐가 훨씬 목표의 선상에 튀어 나오게 됩니다. 또한 그 믿음의 내용은 진리와 생명이지 능력과 의 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능력과 의욕일 때는 자꾸 뭐라고 요구를 하느냐 하면 자랑할 일거리를 달라고 합 니다. 내가 가진 주를 향한 거룩한 욕심과 주의 영광을 드러낼 소원이 있으니 나한테 그것을 나타낼 어떤 사건 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의 약점은 믿음의 기초가 잘못되 어 있기 때문에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달라는 것이 다 뭐냐 하면 한 번 보란듯이 잴 건수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제자훈련이라는 것이 일종의 능력을 과시하며, 주를 향하여 내 열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너무나 많이 그 동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진 리와 생명에 관한 것이라서 인생의 목표와 삶의 원리와 자세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욕과 능력, 열 심을 부리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삶의 원리와 자세 를 바꿔놓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디모데후서 4장을 보십시다. "하나 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 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 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 며 권하라"(딤후4:1-2). 인생살이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주어진 명령들은 무엇을 근거로 나오느냐면 1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 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라는 근본적인 진리에 기초해서 그 뒤에 있는 삶의 모든 요구 들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만일 이 앞에 있는 이런 믿음의 내용, 곧 진리가 우리에게 공감되지 않는다면 그 뒤에 있는 요구들은 우리에게 설득력을 가 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들에 있어서 최고의 약 점은 그것이 자꾸 경쟁적이고 자기 증명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는데 있습니다. 누구는 재주가 열 개있고, 누구는 재주가 다섯 개 있고, 누구는 재주가 한 개 밖에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 개와 다섯 개를 놓고 비교를 하는 식으로 신앙을 권면하면 안됩니다. 그가 무엇을 위 해서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한 것이지 열 개 가 졌냐, 다섯 개 가졌냐를 자꾸 비교하니까 우린 '더 많이 주십시요'밖에는 기도할 것도, 욕심낼 것도 없게 된 것 입니다. 우리가 열 개를 가졌느냐, 다섯 개를 가졌느 냐, 하나를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가진 것으로 - 능력이 아니라 존재 - 나의 존재, 나의 삶을 어디를 방 향잡고, 어떤 자세와 원리로 살아갈 것이냐 인 것입니 다. 이것이 우리의 증인된 최고의 책임이요, 더 이상 값 진 것이 없는 사명입니다. 여러분은 더 가진 사람을 부 러워할 필요가 없고, 더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인해서 시험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인격을 변화시 키는 것이어야지 어떤 특정한 일을 위한 방법과 수단일 수 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일의 방법과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누구인가는 우리가 무엇 을 믿느냐이고 그 믿음이 목표에서, 가치관에서, 사는 방법과 원칙에서, 인격과 전 존재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 는가가 전도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하게 제시되어야 할 하나의 증거들인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아무 앞에도 설 수 없고, 아무에게도 무엇을 전할 수 없습니 다. 내가 전하는 모든 내용은 그것이 나에게 먼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증거해내야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위한 믿음이든가, 성공하기 위한 믿음이라든가 이런건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를 지키며 충성 하며 인내하는 그런 안목과 분별과 인내를 만드는 것이 어야지 무엇을 이루는 기술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소 원과 욕심을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믿음을 동원하 는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 진리와 생명은 우리로부 터 출발한 업적이 아니요, 결과가 아니며, 노력의 산물 이 아니요 하나님으로 부터만 허락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모든 신앙의 핵심, 믿음의 핵심되는 성격은 아 는 것과 순종으로 가게 됩니다. 아는 것이란 도를 깨 우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진리를 아는 것,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가에 관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순종하는 것으로 믿음의 형태는 가장 먼저 제한을 받아야 옳습니 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순종하며 우리가 진리와 생명 안에 있는 법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믿 음은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순종하며 우리가 진리와 생명안에 있는 법,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히 11:6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 까? 2. 이러한 믿음은 누구를 통해서만 소유할 수 있습니까? 3. 믿음의 내용을 '능력과 의욕'으로 오해할 때 생기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4. 믿음의 3단계는 무엇입니까? 5. 진리와 생명이란 결국 무엇을 지칭하는 말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믿음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 오늘 공부한 것을 근거로 해서 서로 말씀해 봅시다.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38/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4 06:26 길이:247줄제 목 : 제자훈련 6과 제자의 믿음-박영선 목사 제 6 과 --------------------------------- 제자의 믿음 본문 / 합 2:4 <요점> {{ 믿음은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한 기술과 방법이 아 니라 이 세상의 허망함과 모든 시험과 위협에 굴하 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함을 쌓아 나가는 일을 승리케 하는 우리의 분별과 안목입니 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1. 여러분은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항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상 같은 답변을 하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답변 이 무슨 이유 때문에 달라지게 되십니까? <이해를 위한 설명> 믿음은 진리와 생명에 관한 것이요 진리와 생명에 관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믿음으 로 산다는 것은 진리와 생명된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 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좀 더 현실적이 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세분화시켜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 니다. 신자의 삶을 규정하는 믿음의 내용 그 첫번째는 죄인된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분별입니다. 세상이 무엇이 며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이라 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지만 동시에 세상과 결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우리와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을 올바로 아는 것이 믿 음의 주된 내용이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 을 말하여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 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 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7-19). 이 것이 죄인된 인간의 모습이요, 죄가 주도하는 세상의 모 습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큰 부분이라는 것 을 알아야 됩니다. 우선 죄인된 인간과 세상의 첫번째 큰 특징은 허망 하다는 것입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올바른 목표와 보람 있는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녁이 없습니다. 과녁 이 없는 곳에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잘 못 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초점이 있어야, 과 녁이 있어야 맞았다 안 맞았다가 있지 않겠습니까? 왜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만 이렇게 배타적이고 편협합니 까? 우리가 진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정답이 있을 때 만 오답이 증명이 됩니다. 맞는다는 것이 있어야 틀린 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데 맞는 것이 없으면, 즉 과녁이 없으면 어디가 틀렸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상을 볼 때 제일 웃기는 것은 모든 것에다 가 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자가 집안을 돌보지 않고 남편과 자식을 차버리 고 뛰쳐나가면 옛날에는 "무슨 무슨 무슨"이라고 했습니 다. 그런데 요새는 "용기있는 여성 인권주의자" 이런 말을 하는데 이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나중에 하나님 앞에 여 성 인권을 위해서 일하다가 왔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 고 그러실 것 같습니까? 천국에서도 여성 운동가로 살 아요? 훌륭하실 거예요. 허망해요, 참 허망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허망한 사람들이 떼를 지으면 설득력을 지닙니다. 유행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멋있거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다는 것이 유일한 설득력 아닙니까?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지킵니까? 그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허망하고 총명이 어두워 무지합니다.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당하고 진실되면 세상에서 평가를 받고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 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훌륭한 일이 아니고, 거룩한 세계에서의 훌륭한 일은 어려운 길을 가는 겁니다. 고독한 길을 가는 것입 니다. 실패자의 길을 가는 경우가 휠씬 많습니다. 그것 을 끝까지 견디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또 세상은 생명이 없고 감각이 없어 방탕합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허송세월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향하여 쌓아가고 연결해 가는 것이 없는 생활을 방탕하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 활은 더럽습니다. 이런 세상과, 인간의 모습은 믿음을 가진 자만이 압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진리와 생명을 부여 받은 새 생명을 가진 자만이 비로소 알고 이것을 비켜가며 여기 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초점을 삼으려는 것은 이 것입니다. 결국 신자란 '죄를 피하고 의와 거룩을 목적 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땅 끝까지 이른 증인의 모습이 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보여줘야 할 우리의 진 면목입니다. 그것은 활동적이고 사건적이기 보다는 훨 씬 존재론적이며 인격적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해결하고 어떤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나 수단이나 기술이 아니고 성품적이고 전인적이며 근본 적인 변화를 받은 새 생명의 모습,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신자의 삶을 규정하는 믿음의 내용 그 두번째는 종 말론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이라고 하 는 것은 현실 도피적이거나 내세지향적이라는 뜻은 아닙 니다. '종말론적' 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현실 도 피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은 다 무가치하고 다 쓸데 없고 빨리 주님이 오시고 그 나라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자라나 완성된 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6절,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 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 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 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 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6-10).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평가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거기서 받을 평가는 지금, 여 기서 시작하여 그 때, 심판받을 날까지 완성하고 키워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생명이 진리 안 에서 자라나는 일을 시작해야 되고, 가꾸고 키워, 마침 내 주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된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책임을 가진, 그리고 거기서, 그 때 받을 평가를 위하여 지금, 여기서 시작하고 가꿔 나 가는 것을 종말론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도 피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번째로 믿음의 중요한 또 하나의 성격은 생각하 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라나 야 되는 것이기에 그 근거가 되는 진리를 생각해야 됩니 다. '믿음은 진리에 근거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 각한다는 것은 소원에 근거하여 치성을 드리는 것과 대 비해서 쓰는 표현입니다. 치성을 드린다는 것은 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무작정 열심을 드려 그 결과 를 이루어 줄 대상을 항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지성 이면 감천이다'하는 겁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초월적인 힘을 빼앗아 오는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을 배워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나를 바꿔 나가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믿음을 동원해서 내가 하 고 싶은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려고 합니다. 그것은 치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 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을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 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 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 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 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 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5-30). 이 내용들을 잘 보시면 굉장히 논리성을 가지고, 논리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여기서 공중 나는 새를 보라는 것은 그냥 쳐다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고 생각을 좀 해 봐라'입니다. 여기서 하는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믿음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음의 강함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하나님의 일하심에 부합된 것을 말하지 기술적 측면이 아닌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 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 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 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여기에 믿음의 핵심이 아주 잘 드러나고 있는데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께 정성을 바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 음이란 내가 하나님을 공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과 의를 위하여 요구하시는 것을 열심이 아니고 아는 것입니다.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역하는 것은 뭐와 같으냐면 "사술의 죄와 같고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없는 것이 며,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핵심, 믿음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한 기술과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의 허망함과 모든 시험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함을 쌓아나가는 일을 승리케 하는 우리의 분 별과 안목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의 생 명과 진리로 말미암는 그 단마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입 니다. 오늘날 이 믿음을 가르쳐 주어야 되는 교회와 거기 서 이 믿음을 배워야 되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세상을 보 는 눈과 하나님이 성도들을 어떻게 만들어 가려고 하시 는가는 안 보고, 다른 모든 일은 제멋대로 살다가 하나 님의 이름으로 갑자기 모여서 십자군 전쟁 한 번 하고, 그러고 돌아가서는 또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되는 식으로 타협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합2:4)입니다. '세상이 이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악당들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저들 은 미끄러운 자리에 버려진 것이다. 내가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 나를 거룩으로 인도하시기 때문 에 생기는 것이다. 오늘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며 나한 테 맡겨진 일을 한다. 한 달란트를 지키며 그 책임을 다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신자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내용 세가지는 무엇이라고 본문은 말 합니까? 2. 다음 각각의 용어들은 세상의 특징을 묘사하는 단어들 입니다. 각각의 의미를 규정해 보십시요. 1) 허망하다 : 2) 방탕하다 : 3) 유행 : 3. 어떨 때 믿음이 강해지고, 어떨 때 약해집니까? 4.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제사일까요? 사울왕이 좋은 짐승을 제사용으로 남겨 놨다고 변명하지만 사무 엘에게 크게 책망 받은 사건을 통해 '믿음'은 어떤 성 격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5. 결국 본문에서 정의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우리 자신이 오늘 한 달란트의 책임을 지고 사는 길은 어떤 것이 있는지 말씀해 보십시요.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39/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32 길이:276줄제 목 : 제자훈련 7가 제자훈련과 성경 - 박영선 목사 제 7 과 --------------------------------- 제자훈련과 성경 본문 / 레 11:44-45 <요점> {{ 성경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제발 명심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유능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업적이 아니고 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 룩한 것입니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해를 위한 설명> 지난 시간에 믿음이란 내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는 열심, 자기최면이 아니라 내가 믿는 내용과 대상에 관한 신뢰가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국 그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신 하나님을 아는 일을 말하는 것이 며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자 신을 밝히신 성경(계시)을 통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 다. 따라서 신자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정체성, 곧 믿 음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될 수 밖에 없 는 것입니다. 믿음을 다루고 성경을 다루는 것은 곧 신 자의 정체성, 우리가 누구냐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믿음이나 성경, 기도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 데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면 이미 어떤 일이 주어지고 미 션이 주어진다 말입니다. '누구를 가르친다', '누구를 교화시킨다', 그것을 위하여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믿 음, 성경, 기도가 하나의 기술로 도입이 되고 있지, 나의 나된 것을 만드는 통로나 그 무엇으로서 동원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정체성을 만드는 요 소인 성경은 무엇이 가장 관심거리겠습니까? 성경은 내 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것이냐에 관한 이야기가 아 니고 모두 다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무 엇을 좋아하시는가, 또 무엇을 싫어하시는가, 이것이 성 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관심 중에 '하나님은 어떤 분 이신가'를 먼저 살펴 봅시다. 신명기 28장으로 가봅시다. 1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 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15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성경이 그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첫 초점은 '하나님은 창조주요, 심 판자요, 섭리자요, 모든 피조물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권세는 하나님의 유일하 신 권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이 권세로 우리를 복주기 를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높 으신가와 함께 그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어떤 분이시냐가 성경의 또 하나의 초점입니다. 하나님이 그 높은 지위와 권세와 능력과 지혜를 가져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복주시 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사상이며,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자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큰 권세로 우리를 겁주고 우리를 놀래키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쓰시기를 기뻐합니다. 시편 118편 1절부터 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제 이스라 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찌로다 이제 아 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찌로다 이 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 하다 할찌로다"(시118:1-4). 이것이 시편에 기록된 모든 시편 기자들의 고백이요, 그것은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 들의 경건함, 올바른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인 것입니다. 지나간 날을 상고해 볼 때,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결국을 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며 자 비롭고 인자하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그는 신실하십니다. 시편 125편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 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 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 시리로다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 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찌어 다"(시125:1-5).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습니다. 태산이 흔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 다. 그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 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는 자는 영원히 흔들릴 일이 없는 것입 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들의 역사와 인생 속 에서 확인한 하나님의 속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가와 함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를 아는 것이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합니 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 내 소원을 아뢰고 하 나님 명령을 받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를 하러 들어갈 수가 있게 된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그 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는 성경의 초점에서 우리 는 이 두가지 초점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권위자입니다. 모든 존재와 모든 역사에, 온 우주에 유일하신 주재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 리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두번째 관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 엇을 요구하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신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입니다. 일의 차원이 아니고 존재의 차원에서 인격과 성품의 차원에서 말입니다. 성경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능력이 아 니라는 것을 제발 명심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 하는 것은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유능한 것이 아닙니 다. 어떤 업적이 아니고 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 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 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 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11:44-45). 이 것입니다. 거룩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최고의 책 임, 최고의 자랑은 거룩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4절부터 봅시다. 예수님의 대제사 장적 기도의 장면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 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 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 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 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 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4 -19). '거룩하라'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거 룩하다는 것은 행위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 다. 거룩하라는 것은 윤리, 도덕적 차원의 이야기도 아 닙니다. 그것은 본질적 차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12장에 가면 이 요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 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 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 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라고 되어 있습 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행위들은 우리가 그런 존 재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되어야 됩니 다.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에 오신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만 메세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 은 다 메세지입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계셔도 그 자체가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이 미 말씀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죄인을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그 존재 자체가 벌써 말씀인 것입니다. 행위(Doing)가 아니라 존재(Being)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의 거룩함이여야 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그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 거룩 한 자가 하는 반응이요, 순종이요, 절제입니다. 그가 하 는 결정과 그가 하는 표현들은 다 거룩인 것입니다. 그렇 게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못하 지만 의도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란 불쌍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열심입니 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갖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서 받아들인 사역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가 갖는 불쌍한 죄인을 향한 우리의 자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과 거룩이 심판이 아니라 긍 휼과 자비로 뻐쳐 나간 반응이기도 합니다. 전도, 그것 을 사람 잡아 오는 능력과 기술로 끌고 가버리면 이런 풍 성한 내용들이 다 죽어 버립니다. 결국 성도들의 신앙의 핵심은 그의 삶을 거룩한 삶 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생각하거나 거룩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에 게 주어진 모든 형편 속에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아야 합니다.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며,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로서, 세상에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그 래서 어떤 의미에서 그런 일들을 인하여 당하는 고난들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입 니다. 그래서 이제 나중에 우리가 결론으로 가겠습니다만 제자훈련의 핵심은 결국 신앙 인격 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 인격 훈련,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 다.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주를 닮고, 십자가 를 질 줄 알고, 그는 인자하고 자비롭고 용서하며, 덕과 선한 말로 유익을 도모하는 자라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 니다. 그 훈련들을 하십시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 중에 아주 독특한 표현으로 '가슴이 클클해서'가 있습니다. 좀 믿어도 화 끈하게 믿고 싶은데 뭔가 시원치가 않다는 말입니다. 여 러분, 공부 잘하고 싶으면 얼마나 마음이 클클합니까? 그러나 공부를 잘 할려면, 어느 날 실컷 울면 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밝히고 여러 해를 고생해야 뒤쳐진 것을 쫓 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 이 클클하고, 마음이 클클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과 하 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까지 거리가 멀고 그 단계에 관하 여 뭔가 아직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되고 연 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주여"하고 외치고 울 어서 시원해져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면 큰일 납니다. 다 공책 불사르고 "주여"하고 만족하고 내려오면 어떡합 니까? 학교 없애고 공부 없애고 내려 온 꼴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리 가면 안됩니다. 신자다운 것, 거룩함의 더 깊은 경지로 가는 싸움,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존재의 깊이와 폭이 넓어지는 싸움, 이것이 제자훈련입니다. <도움말> 성경을 매일 규칙적으로 읽고 활용하시는 분들에게 익숙한 신앙행위가 Q.T(Quiet Time)입니다. Q.T에 대해서, 본 교재의 흐름에 상응하는 개념을 알고 싶으시면 부록1) 「제자훈련과 Q.T」를 참조하십시요. <이해를 위한 질문> 1. 제자훈련이 기술훈련으로 오해되서 '성경'을 주신 하 나님의 의도가 어떻게 잘못 사용되었습니까? 2. 성경에서 말하는 관심 두 가지가 뭐라고 본문은 가르 칩니까? 3.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 볼 때 우리가 깨닫는 두가지 초점은 무엇입니까? 4. 성경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산제사란 어떤 제사를 말합니까? ① 살아있는 동물로 드리는 제사 ②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제사 ③ 우리의 삶의 실제적 행동과 말로 드리는 제사 ④ 산에서 드리는 제사 <토의를 위한 질문> 1. 왜 제자훈련에 있어서 성경이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지 오늘 배운 것을 떠올리며 말씀해 주십시요.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40/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34 길이:248줄제 목 : 제자훈련 8과 제자훈련과 기도 - 박영선 목사 제 8 과 --------------------------------- 제자훈련과 기도 본문 / 출 32:11-13 <요점> {{ 기도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시며 하나님이 내가 어떠하기를 원하시는가?' 따 라서 우리는 기도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쓰여지 는 주문이 아니고, 방법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 나님과 대좌하게 하는 특별한 초청인 것을 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1. 공예배나 구역예배 때에 기도순서를 맡으면 기분이 어 떻습니까? 왜 그런 기분이 들게 되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요. <이해를 위한 설명> 우리가 앞과에서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것이, 또 기 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존재와 삶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일을 위해서 성경을 아는 것이 필수적인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하나 님을 아는 이 일을 위하여 씌여져 있는 계시로서의 성경 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간구할 수 있고, 물어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우리가 기도를 해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신자로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거룩한 것 들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행 위고, 확인 이전에라도 의와 거룩과 생명과 진리에 속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것 때문에 기도가 필요 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믿음을 다루는 문제 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주문이 아니고 내가 요구하는 결과 를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며 이제부터 가져야 하고 채워 야 하고 넘치도록 해야 되는 거룩과 생명에 속한 것이 세 상에서부터 얻어지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 이 기도라는 당연한 결과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그 대표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변화산에 올라갔다 내려오시는 예수님 앞에 한 사람 이 제자들이 못고친 귀신들린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나왔 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치시고 9:29에서 이렇 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겁니다. 어떤 사본에는 금식이 더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금식이란 '내가 신령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세상 의 것이 힘이 되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람은 먹어서 힘을 냅니다. 먹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얻을려는 힘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신령한 것, 하나님이 주시는 것 입니다'라는 표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기도 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란, '지금부터 내가 얻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은 거룩하고 신령한 것들인데 이것을 세상이 주지 않았지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 나님께 구하러 온 것입니다. 제가 얻을려고 하는 것은 신령한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에스겔서 36장에 가면 지금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 하기 좋은 역사적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겔36:33-3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 땅이 황폐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 을 다시 회복시킬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회복될 수 없을 지경의 형편에 와 있는데 그것을 회복케 함으로써, 이건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일반적인 하나 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증명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려야 이루어 주시겠답니다. 기도를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된 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생각을 하는 데, 기도를 하면 되고 기도를 안 하면 안 되는 문제가 아 니라 그 일을 누가 하시는 것이냐의 확인을 위해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고 그 일이 일어나면 누 가 한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묘자리를 잘 써서 그렇게 된 것인지, 어젯밤 꿈을 잘 꾼 탓인지 불분명해지 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했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은 다 하나 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것 에 초점이 있습니다. 일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초점이 아 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도의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기도하는 요청이, 기도 속에 들어있는 간구의 내 용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 이런 주님의 가르치심이 있습니 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 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7-8). 여기서 중언부언이라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다'하는 식 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같은 말 을 여러번 할 수 있습니다. 그 간절함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하는 것을 중언부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정성을 바치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고 기도의 결과를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은 다른 것이 아니고 "비나이다 비나이다"입니 다. 그러니까 자기의 소원을 얻기 위한 열심만 있지 그 기도의 내용이 무슨 당위성과 무슨 필연적인 근거를 가지 는지 그래서 결과를 얻을 이유가 있는지가 없다는 것입 니다.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이 기도가 응답 될 필연적인 어떤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부합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당위성이 있어야 되는데, 이 당 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의미의 당위 성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도의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기도하는 요청, 기도 속에 들어 있는 간구의 내용 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 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 설명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설명이 많은 이유는 내 생각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당연히 맞다는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 니다. 주문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주문은 가장 신속하 게 외우고 나열하면 그만이지만 기도는 그렇게 안됩니다. 기도는 편지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자신 이 왜 기도를 하려고 하는지, 하나님께서 왜 이 기도를 들어주셔야 되는지를 평소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을 근거로 하여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설 명은 설득과는 다른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사 저들을 멸하겠다 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뭐라고 중보기도를 하느냐 하 면 출애굽기 32장 11절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 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 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 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 이다"(출32:11-13). 이 기도의 내용이 재미있지 않습니 까? 간절하고 열심이 전부가 아니라 기도의 중요한 틀이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히 따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힐문을 하고 무뢰하거나 건방지게 기어오르는 식의 얘기가 아니라 생 각이 오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는 성경에 서 배우는 것과 별개로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는 부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도 모르게 많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일하 시는 방법에 대하여 특별한 깨우침이 기도 속에 있는 것 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부적과 주문의 신앙이 아닙니 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부르짖지 않았던들 일어나지 않았고 하나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그 런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생각할 틈이 없이 따 발총을 쏘면 안됩니다. 막힘없이 쏟아붓는 것을 잘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입니다. 기도는 좀 씹어가면서 해야 됩니다. 또박또박해야 됩니다. 그렇다 고 어눌하게 하는 것이 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할 틈이 없이 쏟아내는 것은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 서 통성기도는 굉장히 생각해 볼 문제인 것입니다. 통성 기도하면 옆에서 떠드는 바람에 방해 받지 않을려고 그냥 막 읊는 거 아닙니까? '누구 목소리가 더 큰가' 이것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기도를 소리 내서 같이 해 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공통된 기도 제목을 놓고 간단 한 내용이지만 절실한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통성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더 이 상의 생각이 필요없기 때문에 모두가 합심해서 소리를 내 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도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 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내가 어떠하기를 원하시 는가?' 따라서 우리는 기도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쓰여지는 주문이 아니고, 방법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대좌하게 하는 특별한 초청인 것을 봅니다. 하 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견,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게 합니다. 우 리에게 일어난 일과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하여 하나 님 앞에 가서 일종의 따지는 일을 허락하는 이 일은 하나 님이 우리를 기계나 종으로 부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을 하나님이 기계나 종으로 부리시지 않고, 설득하 시며 의논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와 의논하시며, 우리 를 설득하시며 우리를 항복시키셔서 일하시기를 기뻐합니 다. 이것은 하나님의 한 성품이며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럴 수 있다는 것이 기도입니다.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디로 밖에 못 써 먹습니까? "주시옵소서"밖에 못 써 먹습니다. "주시옵소서". 이것 은 신자가 누려야 할 특권을 스스로 박찬 꼴이 됩니다. 기도는 하다 하다 할 수 없어서 맨 마지막으로 뛰어가는 무슨 전당포 같은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된 이해들 로 인해 어떤 버릇이 있느냐면 현실의 제자훈련이라는 상 황을 놓고 볼 때 믿음도, 성경도, 기도도 다 기술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보란듯이 뭘 해드 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믿음이나 기도나 성경이나 어느 것 하나 일과 기술로써 쓰여지는 것은 볼 수 없고, 하나님이 그 궁극적인 목적을 우리에게 다 두고 있는 것 을 봅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이나 성경 안에서 우리가 깨우치는 것이나, 기도가 필요한 것은 그런 모든 것이 수 단과 방법으로 소용되지 않고 그것 자체가 다 하나님 앞 에서 존귀한 인격자로서 대접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답답하고, 내가 안타깝고, 이상해서 가지고 나 가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와 대좌 를 기뻐하시는 것이 더 먼저이고, 무슨 문제가 풀려서 어 떤 일이 되는 것은 2차적인 결과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하나님께 내가 열심히 기도하여 무엇 무엇이 이루 어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가서 하나님을 만나뵙고 하나님 앞에 앉았느냐에 그 자랑이 있는 겁니다. 기도란 '해라, 마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꾸 기도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그 기쁨과 그 대접을 누리라는 차원에서이지 그렇게 함으로써 남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다, 그래서 어떤 일이 해결됐다는 차원에서는 아니란 말 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는 내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하게 쓰임을 받 는가 하는 명분과 가치로서 보다 우리 자신의 지위와 대 접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되는 가장 큰 이 유는 무엇입니까? 2.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 수 있는 일을 왜 우리에 게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3. 출 32장에 나온 모세의 기도를 평가해 보십시요. 왜 그런 기도가 허용됩니까? 4. 기도가 특권이란 말의 의미를 본문을 토대로 하여 설 명해 보십시요. <토의를 위한 질문> 1. 왜 우리는 더 자주 기도해야 됩니까? 그 이유를 생각 해 보시고,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십시요.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41/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36 길이:280줄제 목 : 제자훈련 9과 제자된 자의 원리(1):진리-박영선 목사 제 9 과 --------------------------------- 제자된 자의 원리(I)-진리 본문 / 요 8:31 <요점> {{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 나는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것 을 분명히 아는 것으로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진 리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 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1. 신자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서 땅 끝 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고, 제자가 되어야 하는 책임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해를 위한 설명>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고, 제자가 되어 행해야 되는 책임을 생 각하면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이 며 우리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실 천해야 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야 되었던 것 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결정적으로 어떤 문제에 봉착하 게 되느냐 하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우리 주님께 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이 일에 있어서 그것이 다 만 지식에 전수라는 교육이라든가, 훈련이라는 차원 이전 에 근본적으로 다른 사명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 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가 확정되 지 않으면 저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고 우리의 인생관과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인가가 분명하지 않고는 나누어 줄 것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주께서 나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칠려고 하는 그런 사람으 로 내가 바뀌어 있다는 것에 먼저 초점을 두지 않고 '가 르친다''전수한다'에 초점을 두는 것은 순서가 어긋났다 고 생각됩니다. '예수의 증인이다'그러면 예수가 누구냐를 설명하고 전달하는 자 이전에 그것을 전달하고 그것을 가르칠려고 하는 내가 누구냐가 먼저 분명하게 확인되는 일이 증인되 는 일의 첫번째 몫이라 말입니다. 저 사람이 무엇을 가 르치는냐가 아니라 저 사람이 왜 그것을 가르치느냐가 초 점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일단 예수의 증인되는 일은, 말로 나열하고 꺼내서가 아니라 존재로서 증인이란 말입니다. 제자훈련이 전도훈련으로 오해되는 것으로 인해서 시비를 걸었듯이 기술과 방법론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 유가 여기 있습니다.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고,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강조되어야 제자훈련이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제자훈련과 전도훈련은 같 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전도를 해야 됩니 다. 그러나 전도는 제자된 자의 여러 몫 중에 하나일 뿐 입니다. '제자 = 전도' 이렇게는 안됩니다. 물론 증인 이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그는 전도적 지위에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의 증인의 몫을 감당해야지, 전도를 한다는 행위로서만 제자라는 것이 확인이 된다면 잘못이라는 말 입니다. 우리는 말하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 법과 모습과 원리로서 분명히 이 사람은 다르다'라고 증 언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차적 책임입니 다. 존재적인 차원에서 예수의 증인된, 제자된 자들의 원리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것,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아는 것, 즉 진리와 생명으로서의 변화, 이것이 이 증인에게 있어 서 필수적인 조건인 것입니다. 첫째는 진리고 둘째가 생 명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가시면 31절에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 게 나옵니다. 제자된 큰 특징 중에 하나를 진리라고 합니 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에 첫번째 핵심되는 원리는 진리라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를 자 유케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거짓을 고발하며 바른 길 을 제시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편협하느냐는 지적을 불신자들로부터 받는 경우가 많으실 텐데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불교는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배타적인 것은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 고, 저들은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답이 있다는 것 은 정답이 아닌 모든 것을 틀렸다라고 얘기할 수 있고 정 답이 없는 자는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차 타고 다니실 때 중앙선 침범이라는 것이 큰 교통규칙 위반입니다. 그런데 중앙선을 그려 놓아야 중앙선 침범 이 있지 줄을 그어 놓지 않으면 중앙선 침범은 없습니다. 일부러 고발을 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는 효과를 가집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갖는 배타성으로 보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타성이 아니라 정답을 알기 때 문에 나오는 부수적인 어떤 효과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에 하나는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것 을 분명히 아는 것으로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다 어떻게 사는가 하면 자기의 욕 심을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이루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러니까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둘을 다 바 꾸어야 하는데 '무엇을'은 그냥 있고 '어떻게'만 하나님 이 개입 하시는 겁니다. '무엇을'이라는 목표는 내가 갖 고 있고 '어떻게'는 내 힘만으로는 안 되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열심을 떠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성도들에게 있어 제일 많이 틀리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신앙 생활을 30,40년동안 했다고 하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늘 헷갈리는 신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인 행사에도 익숙하고 기도도 잘하고, 무슨 성가도 하고, 무 슨 봉사도 잘합니다. 그런데 일상 생활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도 양보를 안합니다. 진리와 거짓이 있 는 것이 아니라 융통성과 재주만 늘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 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7-18) 믿지 않는 자들에 관한 설명은 진리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허망 하다는 것은 과녁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 을 해야 되는지, 왜 살아야만 되는지, 그걸 어떻게 살아 야 되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얼마나 그 표현들이 다 진리라는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 가를 보십시오. 목표도 없고 기준도 없으니까 잘했 다 못했다의 감각이 있을 수도 없고 양심상의 가책이나 올바른 길을 갔다, 틀렸다의 감각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무지한 겁니다. 미련하기 이전에 모르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몰랐다는 것에 대해 많이 봐주지만 모르는 것 은 큰 죄입니다. 예수를 모르면 안 믿은 것과 똑같은 것 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이 불신자들의 삶의 큰 특징이 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은 누구입 니까?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 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 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언제나 진리입니다. 저 쪽은 19절에 있는 바와 같이 "저 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그냥 물 결치는 대로 바람부는대로 내버려 둔 그런 인생인데 반해 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들 같지 않다는 것 은 저들 같이 방탕하거나 더러움에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 는 말입니다. 진리를 알고 생명에의 감각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정도 가지고는 안됩 니다. 그런데 우리는 윤리 도덕적인 수준에 있는 것을 더 평가해 주고 진리와 생명 안에 있느냐는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표현들을 잘 보십시요. 옛날 하 나님을 모르고 구원 얻기 이전에 자신을 방탕에 방임해서 물결치는대로 바람 부는대로 갈 때는 우리는 어디를 목표 로 삼고 애를 써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가는대 로 떠내려 흘러가면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 수를 믿고 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슨 오해 속에 있느 냐면 '하나님! 제가 주를 사랑하고 주의 뜻을 따라 살 진심이 있사오니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 데 하나님이 힘을 주지 않고 진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보여주지, 내가 그 것을 할 힘을, 일의 태엽을 감아주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하나님이 내 마음에 거룩한 마음 을 주시고, 거룩한 힘을 주사 거룩한 곳으로 나를 떠밀고 갈거라고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것을 아는 겁니다. 그 아는 걸 내 가 실천해야 됩니다. 물결에 휩쓸려 가던 생명없는 자에 서부터 생명를 가진 물고기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유혹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 으로 가는 길을 내가 해야되는 것입니다.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생래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습관으로, 제 2의 천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성화 나 거룩한 것들은 기도해서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연 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제자훈련이 나오는 겁니다. 이제 제자훈련의 적극적인 모습의 입구가 보입니다. 본질적으로 제자훈련은 절제와 거룩한 경건의 연습 의 익숙함을 위한 훈련입니다. 전도지 돌리는 것이 제자 훈련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기도했다, 성경봤 다, 부흥회 참석했다, 전도했다로 자기가 할 신앙적인 책 임을 다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제하고 참고, 견디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이 모든 것 을 습관화 해야 되는 것입니다. 표정과 감정과 행동과 모든 것을 그것으로 바꿔나가는 싸움이 결국 제자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지도력을 가 진 특수 계층의 책임이 아니고 신자 일반에게 요구되는 본질적 책임이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도가 뭐냐, 제자된 모습이 뭐냐 그럴 때 행위, 업적이 아니며 능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 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 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 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우리는 횃불이나, 레 이저나, 화염병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밝히는 것이지 타오르는 불길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 게 하고 싶습니까? "성령이여 임하사 이 온 세대와 이 온 민족을 그냥 성령의 불길로 삼켜 주옵소서" 이런 건 없어요. 왜 이렇게 정복적이고, 왜 이렇게 파괴적인지 모 르겠습니다. 그냥 우지끈 뚝딱 밀고 들어가는 식의 싸움 을 왜 그렇게 전도적 사명으로 갖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입니다. "저 사람은 다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저 사람 안에는 분명히 우리가 갖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 것이 예수의 증인입니다. "왜 저렇게 됐느냐?"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느냐?" "저들이 믿고 저들이 목적하 는 건 뭐냐?" 이렇게 따지게 만들어야지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없다' 그러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찾아 가서 "예수 믿으세요. 좋은 말로 할 때 믿으세요. 안 믿 으면 가만두지 않을거예요"는 아닙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그래서 예수의 증 인된다는 것은 '우리가 달라진 것으로'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차원이 아닙니다. 생명과 진리의 문제인 것입니 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예수의 증인이 되는 이 문제를 전도적 차원에서 생각할 때 그것은 업적과 테크닉으로 가 는 것은 성경이 얘기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제자훈련이 기술과 방법론이 아닌 존재적 차원의 일 이라면 예수의 증인된 제자로서의 원리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2. 신자들이 진리를 근거로 하지 않을 때 예수믿는 신앙 생활에서 제일 많이 틀리는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3. 하나님께서 "제자 주를 사랑하고 주의 뜻을 따라 살 진심이 있사오니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에게 힘 을 주지 않고 진리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절제와 거룩한 경건의 익숙함을 위하여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전도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했던 방법과 본문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서로 말 씀해 보십시요.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42/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39 길이:253줄제 목 : 제자훈련 10과 제자된 자의 원리(2):생명-박영선 목사 제 10 과 --------------------------------- 제자된 자의 원리(II)-생명 본문 / 창 12:1-3 <요점> {{ 의와 진리로 부르심을 받은 새 사람, 생명으로 허락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모습과 정당 한 가치관,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모습입니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1. 생명있는 물체들의 공통된 특성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십시요. <이해를 위한 설명>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증인이 되는가? 첫번째는 진 리가 그 기준이었다면 두번째는 생명입니다. 이번 시간 에는 생명과 제자됨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생명은 자기가 어떻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밖으로 나타냅 니까? 열매를 보고 압니다. 생명이 있는 것만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다른 것으로 자기가 생명이 있다고 하지 않 습니다. "생명있음" 이렇게 쓰고 다니거나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생명은 당연히 자라는 겁니다. 왜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이라는 말을 하시는지 아십니 까? 생명은 겨자씨로 시작한다 할지라도 나중에 큰 나무 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겨자씨로 있 는 법이 없습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데까지 가는 이유 는, 시작은 겨자씨 같아도 생명이 있는 올바른 믿음이라 면, 그것은 나중에 감당치 못할 자리까지 당연히 크기 때 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보는 성도들을 보면,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의 생명에 대한 관심과 초점의 부분을 명확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명으로 갖고 있는 믿음이 크지를 않습니다. 그 믿음을 생명으로 이해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감동할 때마다 벽돌을 한 장씩 굽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흥회에 다녀오 면 감동한 벽돌을 한 장씩 가져옵니다. 집에 가보면 이 런 벽돌이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권면하 고 자극을 하면 그 날 '욱'해 가지고 모여서 한줄로 높게 벽돌을 쌓고, 그러다가 너무나 하고 싶은 유혹거리가 있 으면 "에이 모르겠다" 그리고 놓고 가서 놀다가, 어느 날 또 '욱'해 가지고 눈물흘리고 회개하고, 와서는 그 흩어 진 벽돌을 다 정돈합니다. 그러나 그것들로 집을 짓지는 못합니다. 그냥 벽돌더미로 있습니다. 비 오면 벽돌더 미 위에서 비 맞고, 바람 불면 벽돌더미 옆에서 바람 맞 을 뿐이지 그 속에 들어가 쉬지를 못합니다. 그 벽돌들 이 내 안에서 양식이 되어 나를 키우고 내 믿음을 키운 것이 아니라 감격의 사건들과 감격의 기억들로만 남아 있 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만 생기면 들어와서 그 벽돌을 잡고 '내가 그 때는 얼마나 행복했었는가, 그 때는 얼마 나 울었었는가, 그 때는 얼마나 진심에 차 있었는가'라는 회상을 하고 그리로 도망을 갑니다. 감격거리만, 자랑할 거리만 가지고 있지, 실제로 우리를 키우고 있는, 우리 안에서 자라야 하는 생명은 갖고 있지 않은 겁니다. 옛 날의 그 사건이, 오늘 일어나는 사건을 이기도록 내 안에 어떤 힘으로, 지혜로 남아있지 못합니다. 생명이 신자된 큰 원리 중에 하나인 것을 이해하지 못해 그런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감격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존재이지 그 감격이 '나'라는 사람을 키우고 있지를 않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그걸 먹고 크는 생명체가 아니였다는 말입니 다. 나는 분명히 생명체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 는 양식을 먹고 크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어떻게 변했느냐로 증거하고, 대 응할 그런 사람으로 변해 있지 않다는 데에 큰 약점이 있 습니다. 생명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훈련, 그것이 제자 훈련입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 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7-18). 좋은 나무면 좋 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압니다. 그러니 까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 될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거듭난 새 생명을 가진 자라는 열매가 있어야 되는 겁 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 자하며, 자비하며, 오래 참으며, 유익되는 말을 나누며, 빛에 거하며,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변화된 자로서 마땅히 맺어지 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 안에 가진 생명이 어떻게 성장하느냐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찾을 것입니다. 그 러나 우리의 열매는 얼마나 많이 잡아 왔느냐는 것이었습 니다. 내가 누굴 하나 데려왔다고 그 사람이 내 열매가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믿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가 그 사람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내가 가진 생명의 향기와 생명의 열매로 저 사람의 마음을 두드려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일 에 써 주신 것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문제를 다룰 때에도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하신 새 생명 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로 말 미암아 어떻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영혼들을 하나님 앞 으로 인도하시고 저들의 영혼을 잠자던 자리에서 깨우셨 는가에 대해 놀라는 것이 원칙이지, 어떻게 시간을 내고 노력을 경주하여 뛰어다니면서 사람을 잡아오는가에 그 사람의 신앙이나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7장 4절로 가십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 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 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이 싸움을 로마서 6장 20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 에 대하여 자유하였으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 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0-22)라고 설명합니 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이것이 우리가 얻은 것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의와 진리로 부르심을 받은 새 사람, 생명으로 허락 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모습과 정당한 가치관,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모습 입니다. 이것이 약화되는 이유는 행위 자체에 우리가 정 신을 팔고 있기 때문이예요. 우리는 자꾸 형태화 작업으 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여지는 것 자체가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형태와 명분에 관한 문제가 아니 라 내용과 진리와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빛이고 소금인 것은 빛을 비추고 소금을 퍼다 뿌리는 싸 움이 아니라 내가 빛이고 소금인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거룩해 지는 것이 일차 목표고 그것을 통하여 또한 하나 님께서 다른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다 는 것이 이 증인된 일에 선후인 것을 기억하셔야 될 것입 니다. 이 일차적인 목표를 위하여 일터로 가기보다는 나의 완성을 위한 환경을 먼저 제공받는다라는 생각을 해야 됩 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에게 건강도 주고, 돈도 주고, 실력도 주면 내가 정말 주를 위해서 꽝꽝 일을 할텐데 왜 이렇게 안 주고 시간을 끄시는가'라고 조급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이루어지는 이유는 여러분 자신이 목적 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일차 목표이지 여러분을 써 먹는 것이 목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 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인생살이와 그 과정을 통해 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만족할 만한 존재가 되어야 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그 작업을 통하여 하나 님은 여러분이 빛이고 소금인 것을 이웃들에게 제시합니 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안목을 갖기 시작을 해야 되느 냐면 내가 백성으로, 예수의 증인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하 고 싶습니다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환경 과 조건으로 인도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 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 라함의 생애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 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 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 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 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1-3). 기존의 제자훈련 개념으로 보자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다니면서 매일 전도지 돌리면서 매일 전도 집회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부터 아브라함 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사는가?'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기 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복의 근원입니다. 그래 서 아브라함을 보고 축복한다는 것은 '너를 지키는 하나 님은 굉장히 놀라운 분이구나, 나도 그 하나님의 보호하 심 속에 있기를 원한다' 이런 뜻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 함을 보고 저주한다는 것은 '너는 왜 네 한 몸 먹고, 네 뜻대로 살기도 바쁜데 무슨 하나님인지, 누군지를 섬긴다 고 그 고생을 하느냐' 이렇게 해서 그의 생애를 보면서 하나님을 못 보았으면 그것은 곧 그에게 저주인 것입니 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 나시는 겁니다. 그 일이 아브라함에게 숙제로 주어져 있 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보고 걸으라 하신 그 가나안 땅 에서 그냥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여기 저기 가서 양치며 산 그 모습 속에서, 그냥 평범한 삶의 현장 속에 서 나타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증거 를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는데 있어서 우리에 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열심과 기술 이전에 시간과 공 간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선교사 되고, 가가호호 방문 해서 전도지를 돌리는 것이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일차적 인 임무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공간과 시 간, 이것이야말로 바로 여러분이 아브라함과 같은 인생을 사는, 그래서 이웃들이 여러분을 보고 축복할 것이냐, 저주할 것이냐로 여러분을 점검하는 삶의 자세, 이것이 예수의 증인된 첫번째 형태라고 봐서 틀림이 없다 이겁니 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훌륭하다는 것은 경쟁적 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 맡은 일이란 삶 자체입니다. 신앙 생활이 뭐냐 그러면 형태로서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준 불신자들과 똑같이 맡긴 일상적인 생활을 신자 된 자로서 이제 반응하고 또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형태의 변화는 없습니다. 똑같이 지지고 볶는 겁니다. 그래서 맡은 일이 적고, 감춰졌다는 것 때문에 흔들리시면 안됩니다. 이 지지고 볶는 것을 지키는 것이 큰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큰 일을 여러분들 이 얘기하는 사소한 것들 속에서 준비시키신다는 것입니 다. 그것이 평범하고 감추어졌다는 것 때문에 여러분이 힘을 덜 내서는 안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것 이 전부인 것 같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한 시간 후에 있다 오신다 할지라도 지금 맡은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날짜를 안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배운 "예수 의 증인으로 산다"는 문제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임 을 잊지 마시고 여러분이 처한 여러분의 남편, 자식, 가 정, 이웃, 교회, 여러분이 처해 있는 형편을 소중한 사명 으로 알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성하는, 그리고 감사하는 그 복된 인생을 걸으면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신자가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자라지 않는 이유는? 2.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거듭난 새 생명을 가진 자라는 열매가 있어야 됩 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열매들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을 증거하는 대상으로 삼으 실 때, 우리의 어떤 점을 사용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생을 참조하여 답하십시요) <토의를 위한 질문> 1. 주님께서 언제 오시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삶 의 모습속엔 어떤 변화가 있을지 서로 토의해 보십시요.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번호 등록자 등록일 줄수 조회 제 목----- -------- -------- ---- ---- --------------------------------------------- 42 YURI007 96/11/16 253 6 제자훈련 10과 제자된 자의 원리(2):생명-박영 41 YURI007 96/11/16 280 6 제자훈련 9과 제자된 자의 원리(1):진리-박영선 40 YURI007 96/11/16 248 6 제자훈련 8과 제자훈련과 기도 - 박영선 목사 39 YURI007 96/11/16 276 6 제자훈련 7가 제자훈련과 성경 - 박영선 목사 38 YURI007 96/11/14 247 14 제자훈련 6과 제자의 믿음-박영선 목사 37 YURI007 96/11/14 238 8 제자훈련 5과 제자의 정체성-박영선 목사 36 YURI007 96/11/12 250 10 제자훈련 4과 제자됨과 사랑(2) - 박영선 목사 35 YURI007 96/11/12 238 8 제자훈련 3과 제자됨과 사랑(1) - 박영선 목사 34 YURI007 96/11/12 187 11 제자훈련 2과 제자의 탄생 - 박영선 목사 33 YURI007 96/11/12 238 13 제자훈련1권1과 제자란 누구인가?-박영선 목사 32 YURI007 96/11/07 32 23 제자훈련 서문 31 PJH2886 96/11/01 147 26 박영선목사 저서목록 30 PJH2886 96/11/01 221 19 봉사론-박영선 목사 29 PJH2886 96/11/01 415 27 주일성수의 원리-박영선 목사 28 PJH2886 96/11/01 446 27 신자의 레저생활-박영선목사 27 PJH2886 96/11/01 86 7 살아있는 공동체로서의 하나님나라2-김명국목사 26 PJH2886 96/10/27 176 13 살아있는 공동체로서의 하나님나라3-김명국목사 25 KYH9135 96/10/24 37 13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 - 박정희 목사 24 TELOS 96/10/21 170 29 [문안인사] 23 PJH2886 96/10/03 86 19 살아있는 공동체로서의 하나님나라I-김명국목사 22 KYH9135 96/09/14 55 21 바울의 동역자 '오네시보로' - 박정희 목사 21 KYH9135 96/09/03 47 19 바울의 동역자 '그 형제' - 박정희목사 20 LAZYCAT 96/08/30 12 28 8/15 강의정리를 쓰고나서 19 LAZYCAT 96/08/30 13 46 여름수양회 강의정리 (8/15) 18 DMOJH124 96/08/23 97 57 여름 수양회 강의 정리(8/16) 읽기(번호) 쓰기(W) 다음(엔터) 앞(B) 연속출력(NS) 기타(Z) > P번호:43/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41 길이:291줄제 목 : ]제자훈련 11과 제자훈련의 실제 - 박영선 목사 제 11 과 --------------------------------- 제자훈련의 실제 본문 / 롬 12:1-2 <요점> {{ '새 생명으로의 나'를 확립하는 일과 내 믿음이 지금 완벽하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진행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 해해야 되고,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을 함께 그 목적지까지 동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몇 가지 하나님의 특별하 신 일하시는 뜻과 방법을 아는 것, 이것이 제자훈 련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 {{ }}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생각을 위한 질문> 1.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의 가짓수를 생각해 보고, 그 각각의 필요성이 무엇이며, 왜 그런 재료가 필요한지 말씀해 보십시요. <이해를 위한 설명> 앞에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제자훈련이란 결국 우리 의 믿는 바와 믿음의 내용인 생명과 거룩에 대한 보존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란 특별한 기능과 영역으 로서가 아니라 신자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 이기에 이 싸움을 바로하기 위해선 신자의 삶을 구성하는 원리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신자의 삶의 원리를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삶의 3대 원리가 믿음, 소망, 사랑인 데 믿음이란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 음을 지킨다 그러면 우리의 우리된 것을 지키는 것입니 다. 소망은 뭡니까? 우리의 믿음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동시에 소망은 이 싸움이 여기서 심판받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서 심판받는 것을 아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사랑 은 뭡니까? 내가 가진 이 믿음과 그 목적지를 향한 시각 이 나 혼자 갖는 것이거나 나 혼자 가야 되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님께서 나를 그 증인으로 삼아 가능한한 많은 사 람과 함께 가도록 요구한 내용인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신자 모두가 전도의 책임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시각에서 입니다. 전 도라는 하나의 형태적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 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혼 자서 가지 않습니다. 같이 갑니다. 상대방을 들어오게 하고 내가 떨어질지라도, 내가 혼자가고 상대방이 못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제자훈련이라 하는 문제 에 있어서 '새 생명으로의 나'를 확립하는 일과 내 믿음 이 지금 완벽하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 을 향하여 나가는 진행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되 고,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을 함께 그 목적지까지 동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 에 여기에 수반되는 몇 가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일하시는 뜻과 방법을 아는 것, 이것이 제자훈련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제 로마서 12장에 가서 본격적으로 제자훈련의 내 용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게 되는데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는가 봅시다. 여기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의 중요함 은 변화된 우리의 생명의 증언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되고,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의 우리의 책임을 다한다고 성경이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몸으로'라는 것은 몸뚱아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 닙니다. 우리의 전 삶의 모습들, 우리가 하는 행동거지 의 모든 것, 일거수 일투족, 표정,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이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의 우리의 일을 수행해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절 이하에 내용들을 보시면 굉장히 구체적이고 현 실적이라는 것을 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금 확인시킬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생각하는 제자훈련이라 그러면 어떤 특별한 임무, 어떤 두드러진 능력이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너무나 사소하고, 너무나 평범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 다. 실제로 성경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님 의 증인 노릇을 하라고 합니다. 이 성도들을 향한 권면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면 전부 말과 생각에 관한 것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생각이 말을 결정 하고,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며, 말은 모든 것에 제일 먼저 우선하는 하나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행 동하기 전에 말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첫번째 표인데, 이 생각과 말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분 명히 잡고 있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해 야 될 것은 생각 중에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 을 품지 말라"입니다. 이것이 여기서부터 21절까지 있는 모든 내용의 전체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입 니다. 그러면 마땅히 생각할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대해서 가지는 마땅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통하여 영광 받 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 각은 다 뭐냐하면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빼놓고는 재미있는 '꺼리'로 밖에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 니까 가쉽(gossip)이라는 게 생깁니다. 실제로 그 사람 이 그러냐, 그런 일이 있었느냐를 떠나서 재미꺼리가 됩 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어떤 일 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재미꺼리로는 얘기를 삼지 않는 것,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훈련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나, 일에 대해서 판단을 보류할 것을 요구하는 가 장 큰 이유는 서로가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이기 때문입 니다. 4절과 5절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 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 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내가 가진 기능에서 볼 때는 저 사람이 가진 기능이 이해가 안가는데, 우리는 나와 다르 면 무조건 누가 뛰어났느냐, 누가 못했느냐의 우열의 개 념으로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우열의 개념으로 보지 말고 다르다고 보라는 것입니 다. 비빔밥을 만들려면 무엇을 넣어야 됩니까? 나물 넣 고, 고추장 넣고, 밥 넣습니다. 그리고 참기름도 넣고. 그런데 넣는 분량이 다 다릅니다. 그 때 가장 많이 들어 간 것이 '내가 최고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은 틀리는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얘기하는 건 '한 몸에 많은 지 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은 아니 라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한 몸, 동등한 가치를 인정 할 줄 아는 것.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으 로 부르셨느냐에 충성해야지, "왜, 난 저 사람에게 준 것 을 안 줘요?"라고 얘기하면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 전제조건과 원리를 이해하고서 6절 이하의 부 분들을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 을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것은 예언할 때 자기가 역사 를 주관하는 것 같이 굴지 말라는 말입니다. 앞 날을 미 리 안다는 것이, 앞 날을 자기가 조작할 힘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신앙이 약한 것을 보고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그를 권면할 때, 마치 여러분이 그 말씀을 만든 것 같은 그런 입장에 서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7절, 섬기는 일은 섬기는 일로 하라는 것은 뭐냐 하 면, 그것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섬기는 일 로 자랑하는 대표적인 실수가 어디에서 많이 나오냐면 정 치인들에게 많이 나옵니다. 이들이 유세할 때 가보면 '내가 어떻게 국민을 위해서 일할 사람이요, 내가 어떻게 애국심을 갖고 있으며, 내가 어떻게 모든 국민의 공복감 인가?'를 외치는 데, 되고나면 하나도 안합니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일로' 이게 왜 재미있느냐 하면 섬기는 자는 그의 희생 정신으로, 고귀한 인격으로 보상 을 받고 싶고, 가르치면 내가 가르친 열매로 보상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효도한 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 효도는 그 상이 뭔지 아십니 까? 효도의 상은 효심을 가진 것 자체가 상입니다. 부 모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과 어떤 불만족을 갖고 있으면 그것 자체가 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서, 혹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 사이에서 내가 누 구에게 가르칠 일이 있으며 내가 쓸모가 있다는 것으로 이미 보상을 받은 줄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큰 봉사직은 남 앞에 서는 직분이 아니고 섬기는 봉사직입니다. 8절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 는 성실함으로" 여기서 권위라는 것은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로하고 권면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제일 많이 실패하는 것은 누가 나한테 실수를 했거나 상 담을 하러 오면 너무 자기의 생색을 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여린 마음, 깨우치지 못한 마음, 그래서 갈등하는 것을 안타까와 하고 정말 그 사람 편이 되어서 "얼마나 속상했을까?" 이런 마음으로 그 사람을 위로하고 "혹 이 것이 남에게 알려져서 남들이 알고 그 사람을 얕보면 어 떡할까?" 하는 감쌀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눈을 부라리 면서 자기는 그런 건 문제도 아니라는 과시를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누가 나한테 물어보러 온 일로 오히려 고마워 해야 됩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왜 구제하는 자는 성실 함으로 해야 될까요? 여기서는 천성적으로 나태하고 게 을러서 어렵게 사는 사람의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건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입니다. 이 사람 들을 구제해야 하는데 이 구제받는 사람은 자기들이 구제 받는 곳까지도 안옵니다. 줄도 안 섭니다. 그래서 구제 하는 사람은 내가 베푸는 것 때문에 까다롭게 굴면 안된 다는 얘깁니다. 내가 베풀고 저쪽이 베품을 받지만 베푸 는 자가 마치 빚을 갚는 것 같이 굽신거려야 되는 것입니 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빚진 자 같이 오시듯 말입 니다. 그래서 구제하다 보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구제할 만한 자를 구제하자'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 러나 굶는 사람, 지금 당장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됩니 다. 언제까지 도와야 됩니까? 그 사람이 먼저 죽으면 그 사람 죽을 때까지고, 여러분이 먼저 죽으면 여러분이 먼저 죽을 때까지 입니다. 이 말의 뜻은 그 사람에게 도 와준 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도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하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됩니다. 다스리는 자가 부지런함으로 한다는 것은 권세를 갖 고 있는 자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잘되게 하기 위하 여 그 권세를 부여받고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 서 이걸 내가 어디에 써야 되는가를 위해 돌아다녀야 됩 니다. 찾아 오는 자를 만나는 것이 권세자의 일차 책임 이 아니라 내가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위해서 늘 돌 아다니는 부지런함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 들이 가져야 하는 사고방식 중에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빛과 소금으로, 저들에게 나눠 줄 의와 거룩과 생명과 진리로 부지런 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돌아 다니면서 어디에 가서 불을 비춰야 되는지, 어디에 가서 소금을 쳐야 되는지, 어디 가서 내가 봉사를 하고 섬기고, 어디에 가서 사랑을 나누고, 도움을 줘야 하는지 우리가 부지런히 찾아 다녀야 됩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됩니다. 구제 를 하는 것이 상대방의 불쌍한 것을 도와주는 정도에 불 과하고 채권과 채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채권, 채무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 이 뭔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나에게 빚진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걸 용서하는 일입니다. 기쁨으로 하셔야 됩니다. 남을 용서할 수 있고,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즐거운 일 인 줄 아셔야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누구냐가 증명이 되는 것입 니다. '저 사람은 다르다' '저 사람은 저렇게 해가지고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다 받는다' 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 소망입니다. 그걸로 결 국 뭐가 이루어지느냐면, 나에게 그 은혜를 입고, 나의 모습으로 영향을 받은 그 사람들이 내가 가는 길에 찾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9절부터 21절까지는 사랑의 원리가 실행되는 모습입 니다. 사랑의 특징은 '주는 즐거움, 나누는 기쁨,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습하셔야 되는데 처 음엔 이것을 다 알고도 실천이 안되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연습을 하십시요. 그러던 중에 17절의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구절이 왜 갑자기 등장할까요? 여러분이 이 모든 선한 일과 희생 하는 일과 주는 일과 사랑하는 일과 저들의 유익을 위하 여 일함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은 악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걸 악으로 갚지 말 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더 많은 믿음 과 더 신령함과 더 큰 능력으로 나가면 여리고 성이 무너 지듯이, 홍해가 갈라지듯이 모든 것이 그냥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하면 잘 할수록 더 많은, 더 두터운 벽에 부딪 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것이 심기워지는 작업이고 그 열매는 뒤늦게 엉뚱한 데서 나타날 지 모릅니다. 그리고 당장은 그 씨를 뿌리는 것을 방해하러 오는 적군뿐 입니다. 그래 서 우리는 놀랍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이렇게 힘들 어 가지고 어디 해먹겠나?" 또 우리가 하는 일에 열매를 걷게 해주는 일도 몇 번 없습니다. 아마 뿌리다가 죽을 거예요. 뿌리는 동안에도 상 주러 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러 오는 적군을 만납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적군이 오는 이유는 내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훈련 부족이나 내가 믿음이 없는 문제가 아 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고생을 하시고 맨 나중에 빌립보서 2장에 얘기한 바와 같이 죽기 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 가에 죽으십니다. 그건 가장 큰 고통과 가장 큰 모욕의 자리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배우고, 훈련해야 됩니다. 이것이 증인이고 제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참 어렵습 니다. 성경이 하라고 하는 이 일들은 우리가 제일 하기 싫은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연습해야 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이런 마음이 저절로 들기를 바라면 안됩니다. 내 생각과, 내 습관과, 내 본질이 달라지는 연습, 이것이 제자훈련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신자의 삶의 3대 원리와 그 각각의 의미를 말해보세요. 믿음 : 소망 : 사랑 : 2. 12:1절에 나온 '몸'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3. 롬 12:9-21까지는 사랑의 원리가 실행되는 말씀입니 다. 그런데 17절에 갑자기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말 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자신이 적절하지 못 했던 부분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인정하고 변 화될 모습을 서로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44/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43 길이:234줄제 목 : 제자훈련 12과 제자훈련과 새사람 - 박영선 목사 제 12 과 --------------------------------- 제자훈련과 새 사람 본문 / 엠 4:21-24 <요점> {{ 제자도(弟子道), 제자훈련이라 그럴 때 전도적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의 첫 째 가는 책임이지만 그것이 행동과 형태로 직선적 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생활과 자세와 성품 속에 녹 아져 있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훈련해야 할 것 입니다. }} {{ }} <생각을 위한 질문>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1. 여행을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해를 위한 설명> 지난 시간에는 제자훈련의 내용들은 구체적으로 '믿 음과 소망과 사랑을 근거로 삼는다'에 믿음이란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고, 소망이란 무엇을 목표하고 무엇을 가치로 두는가 하는 내용이 되고, 사랑이란 이것이 혼자 가는 싸움이 아니고 함께 가는 싸움이라고 말씀을 드렸 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은 우리의 믿는 바와 소원이 내용으 로 풍성해야 하며, 함께 가는 일을 가로막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야 되며 절제해야 된다는 두 가지 원리를 얻게 됩 니다. 종교적인 어떤 형태의 일을 함으로써 제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doing) 그 일을 하는 존재 자체의 변 화, 인격과 성품의 풍성함(being)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상대방과 내가 어떻게 다른가로 가는 것 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가기 위한 것으로 쓰여져야 된 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에서 24절까지 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 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 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것이 제자훈련 에 있어서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요구가 되기도 하는 것 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 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됩니다. 그러면 '새 사람을 입으라'의 내용인 25절 이하를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 을 말하라"(25절)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다 하 나된 것을 해치는 행위들입니다. 도덕적 차원에서 거짓 말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이야말로 하나된 신뢰를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된 것을 해치는 행위라는 것은 함께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 지 말라"(26절) 화가 나면 끝장을 보고 싶어집니다. 악 한 자를 보면 그 악한 자를 꺽기 위해 나도 모르게 내가 더 악한 자가 되는 시험에 빠지는 겁니다. 그게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화가 난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화가 났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화 를 낸 것으로 그쳐야 됩니다. 그걸로 무슨 열매를 맺지 마십시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의미심장합 니다. 화를 삭이는 쪽으로 가야지 내가 화를 낸 것이 정 당하고 이유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는 자리까지 끌고 갑니다. 자기가 화가 난 것 을 생각해서 정당하다고 인정을 받으면 심판권을 행사하 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28 절). 왜 여기 도적질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도적질이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을 이웃에게 피해를 입혀서 자기 필요한 것을 채워 나가는 이웃을 해치는 행위의 대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라" 더러운 말은 마치 남의 밥에 재를 뿌리는 것과 같은 것입 니다. 남의 마실 물에 침 뱉어 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 다. 그게 더러운 말입니다. 더러운 말을 하면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함께 가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 이 제자된 책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자도(弟子道), 제자훈련이라 그럴 때 전도적 사명 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의 첫째 가는 책 임이지만 그것이 행동과 형태로 직선적으로 나타나기 보 다는 이렇게 생활과 자세와 성품 속에 녹아져 있어야 된 다는 것을 기억하고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 가면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 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엡4:31-32)입니다. 결론이 어디로 가나 보십시요. 상 대방의 지금 모습을 보고 심판하지 말 것, 경멸하거나 정 죄하지 말 것, 상대방에게 악하게 굴지 말 것, 하나님께 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상대방을 용서할 것, 그래야 되는 이유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우리 한테 못되게 굴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것만큼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제자가 자기의 직분 의 책임을 제대로 감수하느냐 못하느냐가 그 판가름이 나 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이싸움에서 우리가 제일 조심해 야 되는 것은 '거치는 것을 두지 않는 것', 그 다음에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참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에베소서 5장에서는 이렇게도 가르칩니 다. 18절 이하에 나오는 이 제자도, 제자상, 제자훈련의 어떤 기준들은 이런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 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충만을 받 으라고 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 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본문을 보면 성령충만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 라 사는 제자도의 완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그 성령 충만이 복받치는 감사, 환희, 희열, 이런 것으로 나타나 는 것이 아니라 복종이라는 원리로 성령충만의 표가 강조 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복종이 왜 등장 하느냐 하면 이것이 함께 가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가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교만한 마음과 독선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겁니 다. 상대방을 대접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래서 신앙의 최고의 행동 원리가 '사랑이요, 사랑 은 복종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성경은 푸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는 동안까지 나 혼자 문제도 어려운데 이웃들과 함께 오라고 하십니다. 그 이웃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 자들이 다 포 함된 우리 신앙상에 어쨌든 함께 가야하는 어느 특정한 시대와 환경에 주어진 모든 사람들 입니다. 예를 들면 가족, 혈육, 가문, 동창, 이웃,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들이 선택한 것이 아닌 우리 주변에 함께 가야하는 모든 대상들입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갈려면 아주 중요 한 원칙 몇 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우리들이 양보하고 갈 수 밖에 없고, 그걸 잘 양보하므로 상대방을 항복시키 고, 동참시키느냐가 제자도입니다. 그래서 이제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6장 9절에 이르 도록 신앙상의 최고의 원리가 소개되는데 그게 뭐냐하면 성령충만으로 인한 순종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입니다. 여러분은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러면 입 맛 쓰게 생각하시는데, 그게 누구한테 하듯하라구요? "주께 하듯하라"입니다. 이건 참 무서운 원리입니다. 그 다음에 6장에 가면 6장 1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 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5절에 가면 "종들아 두려워 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라"입니다. 물론 그 반대급부가 꼭 요 구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했으 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 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가 나오고 "자녀들아 부모를 순종하라"한 다음에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엡6:4)가 나오고 "종들아 두 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 라"(엡6:5)했으면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공갈을 그 치고,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있는 것을 기억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직분을 감당해라"(엡6:9) 이렇게 나옵니 다. 그런데도 에베소서 5장 18절 이하에서 순종이라는 제자도에 가장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고서 '아내들아 순종 하라, 자녀들아 순종하라, 종들아 순종하라'가 먼저 나오 는 것은 그 쪽 직분이, 그 쪽 배역이 순종이 강조되는 배 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쪽이 더 책임이 많아서가 아니라 반대 쪽도 책임은 동등하게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나 "부모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 도 동등한 책임이면서도, 순종의 원리가 제자도에 있어서 는 훨씬 강조되어야 할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가는 싸움에서 상대방이 함께 갈 만한 사람이냐 아니냐는 데 있어서의 대원칙은 그 사 람이 예수를 믿느냐는 것과 주를 사랑하느냐는 관점에서 만 따지고 그것에서 충돌하지 않으면 나머지에 있어서는 상대방한테 요구하지 않고 그들의 부족한 부분은 내가 감 당하는 버릇을 들여야 되는 것이 제자훈련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야 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 리를 용서하듯 모든 사람을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는 지고, 당하고, 죽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놓치 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배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 혼동함이 없어야겠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훈련은 바로 이런 식의 자세로부터 출발해야 되고 진전되어야 할 것입 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제자도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 셨고 또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고 구원을 이루심으로 내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많은 영혼들을 하 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전도적 사명을 가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도적 사명이 전도라는 행위적 사건 을 통해서 보다는 그 사람들을 어떤 자세로 기다려 주며, 또 찾아가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우리의 성품과 인생의 가치와 삶의 모습들을 통하여 증거해야 되는 것으로 요구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 삶의 원리, 방 법, 삶의 자세, 가치관, 그리고 우리에게 부딪치는 모든 현실적인 사소한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들이 전도적 사명에서 가장 중요한 일거리라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 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을 하나 님이 나와 같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 려고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고, 지금 내가 보기에 모자란 부분에 대하여 섣부른 심판을 행사하지 말아야 됩니다. 함께 가 면서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그를 부르시며, 우리 서로가 합력하여 하나님 앞에 동등한 거룩과 의와 영광으로 설 것을 기대합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에베소서 4:21-31까지에서 제시된 요구들은 결국 무엇 을 하기 위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들입니 까? 2.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제자도의 완성이 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의 표가 '복 종'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3. 우리가 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함께 가는 싸움에 서 가장 기억하고 지켜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이 더욱 더 강해지는 세상 속에서 다른 자들과 함께 가야하는 요구를 받을 때 느 끼는 갈등이나, 고민을 나누어 봅시다.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45/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47 길이:299줄제 목 : 제자훈련 13과 분별과 지혜 - 박영선 목사 제 13 과 --------------------------------- 분별과 지혜 본문 / 마 11:28-30 <요점> {{ 우리는 용기와 만용의 차이, 지혜와 타협의 차 이, 이런 것들을 아는 분별과 안목이 많이 필요하 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제자훈련 은 인생과 신앙 경륜에 있어서 많은 경험을 쌓고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서 이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 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키워진 분별력으로 실제로 목표 지점을 향하여 걸어가는 싸움입니다. }} {{ }}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생각을 위한 질문> 1. 선과 악이란 윤리적 기준이 분명치 않은 일을 선택하 려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시곤 합니까? 예를 들면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해를 위한 설명> 제자훈련이라는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근본 적인 원리 하에서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것을 함께 이루 어가는 싸움이며, 그 함께 가는 싸움에서 우리가 절제해 야 되고, 양보해야 되고, 희생해야 되는 것도 있으나 또 고집해야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에 대 한 근본적인 이해와 원칙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더 풍성 히 하고 더 잘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분별과 안목 입니다. 한 마디로 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별과 지혜와 안목은 우리 신앙의 본 질을 지키기 위한 단호함에 경우에도 필요합니다. 기독 교 신앙 중에는 배타적일 정도로 유일함을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단호 하고 유일한 것들 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식으로 우리 것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 신앙이 커지느냐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다 다릅니다. 죽을 병에 걸려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누구는 권태로왔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누구는 위기에서 만나기도 하고, 누구는 성공해서 만나기도 합니다. 또 그의 신앙이 평화기에 발전하는 사 람이 있고, 고난기에 발전하는 사람도 있고 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될 사상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단호함 의 문제를 오해한 근본주의(fundamentalism)입니다. 근본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내용은 언제나 동일한 하나의 형태만을 취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 다는 것은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나쁜 데도 새벽기도를 하는 예는 드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정도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드물게는 한 번 도 안해 보던 사람이 정말 다급한 일이 생겨서 새벽같이 뛰어나오는 일도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외골로 달리는 것, 단호하고 선명 한 것, 그것은 하나의 목표와 기치를 드는 표적으로서는 가치가 있고 분명한 일을 해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을 살려 내는 방법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방향을 잡게 하는 가치가 있는 대신에 그렇지 못한 사람 은 정죄하려는 버릇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 선과 곡선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근본주의는 직선입 니다. 직선은 이쪽과 저쪽을 구별해 내는 확연한 분별과 차이를 만들어 내는 장점을 갖고는 있지만 그것이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는 대단히 나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목표에 도달하고, 목적을 이루는 것은 직선으로 갈 수 있 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내용은 하나의 형태를 가진다고 생각을 해서 거길 가야 하는 사람이 실제로 가야 될 때는 곡선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실제적인 길과 방법을 정죄하는 부작용을 낳는 것이 근본주의입니다. 보통 근본주의는 생활에서 나 타나기보다는 말에서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면 근본주의자에게 집니다. 말을 하면 완전주의, 이상 주의가 이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앉은 교회 안에서 저기 무역센터를 옥상까지 간다 그러면 맨처음 어 떻게 가야 됩니다. 직선으로 가려면, 벽을 뚫고 가야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근본주의적 신앙관은 저 벽을 이마 로 깨질 때까지 평생 받다가 순교하는 것이 됩니다. 미 련한 짓입니다. 실제로 가지 못하고 또는 안 가려고 그 쇼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려면 우리 출입구 가 반대 편으로 나 있으니까 먼저 반대편으로 나가야 됩 니다. 얼핏 보자면 목표와 반대되는 곳으로 나가 보이지 만 반대편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기 위하여 도는 것입 니다. 그 우회는 목표지점에 가기 위한 실제적인 싸움이 지 목표와 목적을 혼동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와 만용, 지혜와 타협이라는 선 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져야 됩니다. 목표에 기어코 도달하기 위하여 앞에 막힌 산을 돌고, 앞에 막힌 강을 돌아가는 것과 회피하려고 외면하는 것과는 얘기가 다릅 니다. 그러나 목표 지점에 가다가 장애물이 있어서 그것 을 돌아가는 모습은 외면하는 것 같고, 회피하는 것 같습 니다. 그것은 본인만이 아는 것입니다. 저기 목표한 지 점에 기어코 가야겠는데 가다가 쉬어야 되는 것, 가다가 밥을 먹는 것, 이건 다 가기 위해서 쉬는 것이고, 가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저기를 가는 것이라는 표만 내고 실제로는 가지 않을려는 마음에 간다는 쇼만 하기 위해서 그 쪽 방향으로 열심히 헤딩을 하고 있는 것과는 얘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와 만용의 차이, 지혜와 타협의 차이, 이런 것들을 아는 분별과 안목이 많이 필요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제자훈련은 인생과 신앙 경륜에 있어 서 많은 경험을 쌓고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서 이 분별력 을 키우는 것이 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키워진 분별력으 로 실제로 목표 지점을 향하여 걸어가는 싸움입니다. 이 것이 솔로몬의 지혜요. 모든 성도들이 갖고 있어야 되는 지혜입니다. 누구를 살리냐의 싸움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출애굽해서 시내산 아래 모여서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40일 동안에 아래에서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죽이겠 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 백성을 죽이시려면 제 이름도 빼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게 무슨 얘 기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옳았느냐, 내가 얼마나 굉 장하냐'가 아니라 이 백성을 구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 임을 아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으셨습니다. 누가 더 중요합니까? 우리가 더 중요한 겁니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목숨보다 우리가 더 가치있다는 의미가 아 니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초점이 어디 있냐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제 자훈련이 안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내가 오해를 받는 꼴 을 아무도 안 참는다는 겁니다. 교회가 깨지고 상대방이 묵사발이 되는 한이 있어도 내가 옳다는 것만은 증명을 해야 됩니다. 이 싸움에서 다 지는 겁니다. 그러지 마시 고 상대를 살리는 싸움을 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제자도 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며, 많은 열매를 위하여 심기우는 밀알이 되 는 것입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하여 남을 죽이지 말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죽어야 하는 겁니다. 분별과 지혜의 차원에서 무엇이 정직이냐 하는 싸움 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실수를 하느냐 하면 '나는 정직했다, 혹은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것만 으로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무조건 나를 용서해야 되 고, 무조건 그 다음부터는 없었던 것으로 해야 된다는 요 구를 하기 시작을 하는데 그건 잘못입니다. 만일 자기 실수를 고백해야 되면 고백을 하고 벌도 달게 받을 각오 를 하셔야 됩니다. 짐을 넘기는 식이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나 할 것 다했어. 그러니 이제부터는 당신이 책임 을 지세요'는 안됩니다. 그건 정직이 아닙니다. 내 짐 을 상대방한테 떠넘기는 걸 정직이라 그러지 않습니다. 책임 회피라고 합니다. 평생 그 짐을 지고 미안해 하면서 살으셔야 됩니다. 그것이 정당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서 그의 과거를 감춰주시고, 지금 자기가 받지 못할 대접 을 받게 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다른 모든 문제에서 어떤 의미의 희생을 달게 받으면서 사는 것이 정당한 신앙입니 다. 이것을 잘못 쓰지 마십시오.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 무슨 가장 모범이 되는 모델이 라든가, 스텐다드라든가, 표준이 되는 것은 훌륭한 것,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한 것일 겁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못 났다든 가, 타협을 했다든가, 게으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별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만은 다르다'라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일이 유별나지 않다고, 훌륭하지 않 다고 제가 자꾸 강조하는 것은 조금 전에 예를 든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 훈련들은 짐을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멋있게 나타날 수는 없 죠. 멋있게 나타나는 사람은 전부 훈장을 달고 나타나야 지 짐을 지고 나타나서는 안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세 상적으로는 우리가 모든 고민을 털고, 짐도 털고, 백마 타고, 칼을 높이 든 모습으로 승전가를 부르는 승리자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오늘도 그 일을 다 끝내지 못한 일꾼 같이, 아직도 풀어야 되는 숙제가 많은 학생같이 오늘의 삶을, 내 몫을 지켜나가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 에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 이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펴 보는 바와 같이 실제로 신 앙생활을 해나가는 이 일에 있어서는 그 신앙 생활이 직 선적이지 않고 대단히 곡선적이라는 분별이 있어야 되고, 그것이 지지고 볶는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 다. 그래서 우리의 안목은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면 우리 의 싸움이 보이는 싸움도 아니며, 자랑하는 싸움도 아니 며, 시원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목표하 고, 우리가 부름받은 자리에 가기 위하여 현실이라는 길 목을 돌고, 돌고, 돌아서 거기에 도착해야 되고, 그 돌 고, 돌고, 도는 것이 감춰져 있고, 권태롭기 짝이 없는 인내의 싸움이요, 긴 싸움이요, 반복되는 싸움이라는 것 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리 좋은 신앙과 아무리 좋은 방법을 가지고도 그 문제가 하 루 아침에 해결되는 싸움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짐을 지고 가는 싸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제 가서 짐을 벗느냐 하면 여러분이 이 세상을 하 직해야만 짐을 벗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내 짐을 벗게 하 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 이 요구하는 제자훈련의 목록들을 보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짐을 내가 지고 있는 것이 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마치 한 건물의 기둥과 같습니다. 기둥은 그 건물 이 필요로 하는 한 지붕을 이고 있으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여러분들의 신 앙 생활과 인생살이 속에서의 어떤 짐들, 그것이 가족에 관한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그 짐 은 여러분이 짐으로써 여러분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지 어 떤 방법으로든 그 짐을 벗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하면 그것은 사실 본연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도망가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성경말씀으로 마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 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 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이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수 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대하는데, 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짐을 대신 져주신다는 내용은 없습니 다. 우리는 얼핏 보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해놨으니까 주님이 그 짐을 대신 져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그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짐이 쉬었다 그럽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그 짐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쉽습니까? 마음으로 억울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쉽습니다. 그 짐을 지는 것이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이 요, 주님의 책임입니다. 그 짐을 짐으로써 열매를 보시 는 구원의 사역의 짐입니다. 기꺼이 지신 짐입니다. 우 리에게도 그렇게 요청하십니다. '너희가 지는 짐이 무엇 인지 알고 어떻게 져야 되는지 나를 보고 배우라'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이 헛된 세상에서의 보상과 억울함에서 벗어나셔야 됩니다. 이렇 게 짐을 지는 삶이란 크게 튀어나지 않고, 일상에 묻혀있 는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보석이란 대부분 희소가치 때문에 보 석이 되는 예가 많고, 유명한 사람이라는건 다 어떤 독특 함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세상의 법칙입니 다. 세상의 경쟁적이고, 남과 같지 않고, 나만 가진 것 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은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공기, 물 이런 것들입니다. 성도들의 경우엔 구원, 하나님의 사랑, 보호하심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은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이아몬드, 이런 것은 하나님 쪽에서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 는 가지고, 누구는 안 가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눈 두 개, 이것은 누구에게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중요함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성도에게 줍니다. 성령님의 내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는 것, 이런 것은 모두에게 주십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어떤 특별한 체험, 방언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합니다. 그것을 받아서 신앙이 꼭 더 낫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누구 에게 허락하시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낫다는 것은 아닙니 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가장 조심 히 다뤄야 할 것은 모두에게 주었기 때문에 과소평가하는 것은 없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보기엔 신앙생활이 란 지지고 볶고 사는 것입니다. 그걸 소중히 하십시오. 형제 중에 누가 아프다고 해서 병문안 한 번 가는 것, 굉 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도와준 것, 주님께 한 것이랍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 게, 모두에게 있습니다. 배우고 가진 사람만의 일이 아 니고 모든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할 줄 알아야 되고 그 일의 귀중함을 알고, 그 일에 충성되고, 세상적 가치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이 참다운 제자의 삶이요, 모습이요, 훌륭한 길인 것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근본주의가 오해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의도는 무엇 입니까? 2. 솔로몬의 판결과 모세의 기도에서 배우는 점은 무엇 입니까? 3. 신자가 신앙적 환경이나 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신앙의 최고 원리는 무엇입니까? 4. 잘못했으면 정직하게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벌을 달게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잘 못해서 사과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무엇 을 오해해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5. 짐을 지는 삶이 일상에 묻혀 있는 평범한 삶일 수 밖 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우리가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것을 싫어하는 원인이 어디 있는지 각자의 경우를 서로 말씀해 보십시요. 2. 제자훈련이란 무엇입니까? (부록 2를 참조하십시요)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46/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48 길이:138줄제 목 : 부록 1 경건의 시간에 대하여 - 박영선 목사 부 록 1 ---------------------------------- 경건의 시간(Quite Time)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거룩함을 알게 하기 위 하여 '성경과 기도'라는 좋은 수단을 주셨습니다. 이것 들은 성도들을 성도답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모든 충만에 이르기 위하여 허락된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보고 기도를 많이 할 것을 어느 교회에서나 가르치고 어느 신 자들에게나 요구하고 있는데 이 일의 좋은 방법 중 하나 가 '경건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경건의 시간은 제자 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고, 어떻게 사용해야 되느냐 하 는 것도 알아야겠습니다. 경건의 시간이 잘못 사용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매 일 일정량의 성경을 보고 그 성경 속에서 오늘 깨달은 하 나님의 말씀을 갖고 나와 실천하는 것인데, 이것은 틀려 보이지 않지만 굉장히 오해되기 쉬운 것입니다. 일차적 으로 그 날 읽은 성경에서 너무 단편적인 뜻을 긁어 내려 고 하는 잘못이 제일 큽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모 습들이 전체적인 그림으로 한 장과 절에 다 들어 있기도 하면서 그것이 전체 하나님의 모습의 한 부분인 것도 알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Q.T를 하게 되면 하나 하나 를 주제로, 감격으로, 내용으로, 결론으로 끌어 내는 것 때문에 전체를 보는 시각을 자꾸 놓칩니다. 경건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매일 일정량의 성경을 보고 그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나온다는 의 미에서는 전혀 하자가 없고 옳고 바른 자세임에 틀림없지 만 성경을 보는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실제적인 내용으 로는 하늘나라에 속해 살고 있고, 마음 속으로 거룩한 곳 에 속해있고 거룩한 욕심을 갖고있다 할지라도 세상에 나 와서 살고 그 영향권 속에 있으면 우리도 모르게 떠내려 가는 현실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늘 말씀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으로 나를 깨끗이 하며 점검하는 일이 없으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떠내려 와서 어느 날 굉장히 기준이 낮아진 것을 보게 됩니다. 삶의 기준이 백에서 시작을 했다가 그 다음 날은 백 에서 십만 양보해서 구십이 되는데 그 다음 날 나갈 때는 그 구십이 기준이 됩니다. 또 구십에서 십만 양보합니 다. 그 다음에는 그 팔십이, 이미 양보한 팔십인데 그 팔십이 기준이 되어가지고 또 칠십, 나중에는 이십이나 십쯤 내려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봐야 되는 것입니 다. 그래서 기준을 다시 백으로 끌어 올려야 된단 말입 니다. 이것이 경건의 시간의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목적 이요, 이유입니다. 매일 보는 그 날의 특별한 어떤 테마나 어떤 특별한 목표를 세울려고 성경을 보셔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명령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뭘 해라'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의 운세도 아닙 니다. 성경은 굉장히 넓고, 무한히 크고, 무한히 깊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며, 하나님의 뜻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 것은 그 충만하신 하나님의 어느 일 부분이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한 부분으로 갖고 계셔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매일 매 일 그것이 하나씩, 하나씩 쌓여서 티끌모아 태산같이 하 나님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깊어져 가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목욕탕에 물받는 것과 같습 니다. 목욕탕에 물을 받으면 수도꼭지에서부터 탕 밑바 닥까지 물기둥이 섭니다. 그러나 그것이 밑에 떨어지면 전체로 넓어져서 수면이 차 올라오지 기둥으로 서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보면 어느 부흥회서 은 혜를 받아서 힘있게 살았다가 한 달쯤 지나면 희미해 집 니다. 왜 그러냐면 그 물기둥이 전체를 채워야 되는 것 으로 골고루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받은 것은 1미터 짜리 기둥으로 받았는데 내려오면 전체를 높이는데 1미리 나 2미리 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무슨 막대기 를 갖고 있는 싸움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이렇게 수면을 높이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신자들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느냐 하면 마치 벽돌을 쌓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세로로 쌓 아 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높긴 되게 높은데 매일 붙 들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 여러분이 조심하셔야 되는 것은 거기서 무슨 번쩍하는 말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시라구요. 그 래서 경건의 시간에 쉐어링(Sharing)을 안 했으면 좋겠습 니다.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누구나 무슨 잘난 말을 하 나씩 해야 된다는 것 때문에, 거기서 억지로 자꾸 뭘 긁 어 나올려고 그러는데 그러지 마십시요. 하루만큼 읽고, 일 년 내내 읽어서 괜찮은 생각이 나오는 경우가 한 번 내지 두 번 밖에 없습니다. 보통은 그게 그거 같고 그 소리가 그 소리 같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것 같지만 그 걸 꾸준히 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슬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수면이 높아진 것 같이 깊어지는 것 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건의 시간을 하면서 가지는 성경에 대한 깨우침과 그 앞에 들어가는 기도가 어떤 조급한 눈 에 보이는 목표나 소원을 가지지 않아야 된다는 분명한 경계심을 갖고 매일 매일 성경과 기도에 열중해야 될 것 입니다. 긴 안목을 갖고 멀리 내다 보고, 그래서 충만하 신 하나님, 부요하신 하나님, 그 넓고 크고 높으신 하나 님에 대하여 하루에 하나씩 차근 차근 배워 나가는 겁니 다. 이 축복이, 이 기쁨이 무한정 있다는 기쁨으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는 마음, 이것이 경건의 시간이며, 성경을 읽으며 매일 기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 때문에'라는 기억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쑥 커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클 때 보약을 먹고 컸다든가, 비타민을 먹고 컸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밥 먹고 크는 겁니다. 늘 먹는 그 밥으로 우리가 큽니다. 그것이 최고의 보약 입니다. 맛있는 것만으로도 아니고 가장 영양가 있는 것 만으로도 아닙니다. 인삼, 녹용같은 보약은 아슬아슬할 때 한 번 먹이는 것이지, 아무 때나 보약 먹지 않습니다. 누가 한약에다 밥말아 먹고 밥을 안 먹고 주식을 인삼, 녹용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 밥 먹고 김치 먹은 것이 머 리카락도 되고, 이빨도 되고 그런 것입니다. 그 구절이 그 구절 같은데 나중에 하나님의 모습과 나의 나된 것의 전체적인 힘과 분별과 안목과 영양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일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군가를 튼튼하게, 넉넉하게, 아니 풍성하게 쌓아가는 일에 성경 과 기도가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 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힘 쓰고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참다운 거룩함과 영광 을 스스로 찾게 되고, 그 풍성함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 다. 그 승리와 그 감사의 누림들을 우리가 소유할 것이 요, 우리를 보는 이들이 우리의 새 생명에 넘침으로 말미 암아 거룩한 생명에 속한 도전과 증언을 받게 될 것입니 다.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47/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6 13:50 길이:180줄제 목 : 이 교재에서 말하는 제자훈련 - 박영선 목사 부 록 2 -------------------------------------------------- 이 교재에서 말하는 제자훈련 1과 '땅 끝까지'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는 우리 모든 인류, 우주 만물, 역사를 다 만드셨고, 복 주셨고, 주 인이 되셨고, 타락하고 이제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다시 회복시키기 를 기뻐하시는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다시 우리를 화목케하여 자신 안에 모든 것이 통일되도록 하는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이해하므로 비 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 일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 들의 열심과 의지가 땅 끝과 모든 족속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고난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온 우주를 통일 되 게 하려는 구원의 범위가 땅 끝과 모든 족속에게 허락되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2과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그 제자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는 어떤 독특한 신분이나, 지도자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 름으로 구원받는 모든 신자의 일반명칭이라고 봐야 됩니다.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제자훈련이란 어떤 특수한 임무를 위한 기능인으로 훈련을 받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 자가 성도답게 사는 훈련을 말합니 다. 따라서 이 훈련은 성도라면 누가나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구원과 성령으로 인해 새 생명 얻은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생명이 갖는 변화된 삶으로 증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3과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새 생명으로의 구 원과 새 생명이 갖는 변화된 삶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내가 갖고 있는, 내가 먼저 획득한 것을 나누어 주는 자 가 아니고 내가 어떻게 변했고, 왜 변했고, 무엇으로 변했는지, 그 변한 것으로 상대방을 항복을 시켜야 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훈련 은 전도적이지 않고 변화된 인격으로서의 싸움이어야 맞습니다. 제자훈 련은 전도의 기술이나 기교나 열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가 야만 하는 것입니다. 4과 제자도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냈듯이 우리가 이제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영혼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섬기려는 마 음으로 땅 끝까지, 모든 족속 앞에 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나누어 준다는 시혜자로서의 자랑보다는 주께서 하시는 일을 옆에서 시중드는 자 로서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땅 끝까지 가는 일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또 다른 하나의 핵심은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 는 것은 편안하고 폼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갖되 그 사랑을 무엇으로 감수해야 되냐면 섬기는 것으로 해야 됩니다. 제자도에 있어서 서로 사랑해야 되는 이유는 내가 이제 세상에 사는 자들 같이 약육강식, 적자생존 하듯이 남의 것을 빼앗고, 앞선 사람의 것 을 빼앗아야만 살 수있는 사람이 아닌 인생을 사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산다는 증명이 됩니다. 제자도라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요, 그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 과 은혜를 입은 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나누어도 손해 보지 않는 일이며, 부요한 결실을 맺는 길임을 그 수혜자에게와 그 은혜 를 베푸시는 일에 동참한 우리 모두가 확인하는 일로써 요구받고 있습니 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하나의 일거리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된 본질과 격에 관한 문제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란, 제자도란 결국 제자된 신자 개인 인격의 뿌리요, 근거요, 핵 심이요 또 흘러 넘쳐나는 모든 것으로 드러나는 영혼과 인격의 어떤 격 (格)이란 말입니다. 제자훈련을 받음으로서 어떤 특수 요원이 되고, 특별 한 기술을 배워 특별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 녀된 본질과 하나님의 자녀된 격이 다른 것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 안에 부요해 지도록 노력하고 훈련하여 채우려는 데에 제자훈련의 이유가 있습 니다. 7과 제자훈련의 핵심은 결국 신앙 인격 훈련입니다. 신앙 인격 훈련, 사 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주를 닮고, 십자가를 질 줄 알고, 그는 인자하고 자비롭고 용서하며, 덕과 선한 말로 유익을 도모하는 자라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신자다운 것, 거룩함 의 더 깊은 경지로 가는 싸움,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존재의 깊이와 폭이 넓어지는 싸움, 이것이 제자훈련입니다. 9과 본질적으로 제자훈련은 절제와 거룩한 경건의 연습의 익숙함을 위한 훈련이 제자훈련인 것입니다. 전도지 돌리는 것이 제자훈련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기도했다, 성경봤다, 부흥회 참석했다, 전도했다고 자 기가 할 신앙적인 책임을 다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 니다. 절제하고, 참고, 견디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이 모든 것을 습관화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표정과 감정과 행동과 모든 것을 그것으로 바꿔 나가는 싸움이 결국 제자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지도력을 가진 특수 계층의 책임이 아니고 신자 일반에게 요구되는 본질적 책임이요, 모습인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특별한 기능을 극대화하는 싸움이 아니고 인격과 영혼의 변화가 가져온 새 사람된 우리의 당연한 그 변화를 증언해야 되는 것입니 다. 당연하다는 의미는 보편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신자된 자가 갖는 제 자로서의 증언이나 역할, 이런 것들은 특수 계층에게만 있는 희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있는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제자훈련이란 결국 우리의 믿는 바와 믿음의 내용인 생명과 거룩에 대한 보존에 관한 싸움입니다. 한 개인으로 볼 때, 믿는 자된 것과 신앙 인이라는 싸움이요 그 신앙의 내용인 생명과 거룩을 지키는 싸움이란 말 입니다. 물론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이 확장은 언제 나 나의 승리와 나의 승리의 충만함에 의한 부수적인 결과로 확장이 있 지, 칼들고 나가 싸워가지고 상대방에게 억지로 생명을 주입시키는 식의 싸움은 아닌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한 각오를 하시는 것이 제자훈련의 첫 관문입니다. 11과 제자는 '새 생명으로의 나'를 확립하는 일과 내 믿음이 지금 완벽하 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진행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되고,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을 함께 그 목적 지까지 동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의 특별하신 일하시는 뜻과 방법을 아는 것, 이것이 제자훈련이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제자훈련이라 그러면 어떤 특별한 임무, 어떤 두드러진 능력이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너무나 사소하고, 너무나 평범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 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라고 합니다. 내 생각과, 내 습관과, 내 본질이 달라지는 연습. 이것이 제자훈련입니다. 12과 제자훈련은 우리의 믿는 바와 소원이 내용으로 풍성해야 하며, 함께 가는 일을 가로막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야 되며 절제해야 된다는 두 가지 원리를 갖습니다. 종교적인 어떤 형태의 일을 함으로써 제자 노릇을 하 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존재 자체의 변화, 인격과 성품의 풍성함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상대방과 내가 어떻게 다른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가기 위한 것으로 쓰여져야 된다는 것입 니다. 제자도, 제자훈련이 전도적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의 첫째 가는 책임이지만 그것이 행동과 형태로 직선적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이렇게 생활과 자세와 성품 속에 녹아져 있어야 된다는 것을 기억 하고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13과 제자훈련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원리 하에서 우리가 믿 고 소망하는 것을 함께 가는 싸움이라는 근본적인 이해와 원칙을 가지고 그 함께 가는 싸움에서 그것을 더 풍성하게 하며, 더 잘 사용하기 위하여 우리가 절제해야 되고, 양보해야 되고, 희생해야 되고, 그러나 또 고집해 야 되는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과 안목, 곧 지혜의 훈련입니다. 제자훈련이 인생과 신앙 경륜에 있어서 많은 경험을 쌓고 그것을 말 씀에 비추어서 이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키워진 분별력으로 실제로 목표지점을 향하여 걸어가는 싸움입니다. 제자도는 자기 증명이나 과시가 아닌 사람을 살리는 싸움, 십자가를 지는 것,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많은 열매를 위하여 심기우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하여 남을 죽이지 말고 남을 살 리기 위하여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제자도입니다.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48/52 등록자:CYH2 등록일시:96/11/18 13:02 길이:552줄제 목 : 여름수양회토크쇼(박영선목사님) 토크쇼 젊은이와 함께 96. 8. 16. 사회 : 손태현 출연 : 박영선 목사 박영선 목사님을 소개합니다.(우뢰와 같은 박수~) 손 : (목사님 소개)서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 놀랍게도 6년만에 졸업하셨습니다. 박 : 고등학교는 3년만에 졸업했죠. 손 : 고등학교는 서울고등학교를 나오셨고, 한양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십니다. 이때 목사님 표현대로 남들 공부할 때 당구치고 남들 놀 때 당구를 치셔서 지금 아주 유용하게 목회자료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졸업후 해병으로 입대를 하십니다. 박 : 삼수해서 한양대 들어가고 해병대 갔다가 제대하고 복학해서 졸업을 했죠. 손 : 군대간게 먼저 시네요. 그때 해병대에서 지금 즐겨 사용하시는 욕들을 익히셨습니다. 박 : 원래 욕은 잘 했고 거기 가서 훨씬 많이 개발됐습니다.(관객:웃음) 손 : 헌병으로 복무 중 허리부상으로 의가사 제대를 하셨습니다. 박 : 그렇습니다. 손 : 그리고 나서 극동방송에 잠시 근무하셨습니다.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박 : 극동방송이 아니고 김장환 목사님이 하시던 YFC라는 청소년 선교단체의 간사가 되었는데 그 사무실이 아세아방송국 내에 있었어요. 저희 집사람이 아세아방송국 아나운서였어요 (와~) 그렇게 됐지요. 손 : 그리고 신학교에 입학하시게 되는데, 입학 후에 결혼을 하셨나요. 박 : 3월에 입학을 하고 4월에 결혼을 했지요. 손 : 그리고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셨지요. 박 : 신학교 가는걸 집에서 무척 반대를 해서 학비를 벌어서 가야 했어요. 그런데 내가 벌 힘은 없으니까 장학금을 타야 했지요. 일등만 전액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무지하게 열심히 해서 평균 95.2를 했어요. 그래서 당연히 일등인줄 알았는데 2등도 아니고 3등이래요. 그래서 누군가 알아 봤더니 일등이 현재 총신 신대원 김정우 교수고 이등을 권성수 교수가 했어요. 95.7, 95.5, 95.2, 이랬지요. 그래서 열받아서 학교 앞에서 같이 자취를 했어요. 그러다 병을 얻어서 남은 2년을 아프면서 다녔어요. 손 : 신학교를 졸업 하신 후에 마장동 교회 학생부를 맡아서 하셨지요. 박 : 졸업이 아니고 신학원 일학년때 했지요. 2학년 때부터 성도교회 고등부, 대학부 했습니다. 손 : 성도교회 시절에 지금 같이 사역하시는 이대원 목사님, 김명국 목사님, 김형준 집사님을 지도하셨구요. 박 : 제가 성도교회 출신이에요. 다 성도교회 후배들이지요. 그때 배짱 맞았던 사람끼리 아직 교회에 같이 있는 셈입니다. 손 : 그리고 유학을 가십니다. 미국 버지니아 리버티 벱티스트 세미너리, 놀랍게도 6개월만에 기독교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으셨군요.(와~)박 : 예, 미국의 신학원 과정 중에 기독교 교육학 석사과정이 있죠. 그 과정중 이미 성경과목을 다 이수하면 6개월이 줄고 또 마지막 과목을 교수와 해서 6개월만에 마친셈입니다. 손 : 귀국하셔서 잠깐 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구요. 박 : 쉰게 아니고 써주는 데가 없었어요.(웃음~) 왜냐하면 가기 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입바른 소리했다가 쫓겨났어요. 그래서 놀다가 유학을 갔고, 갔다 와서도 써주는데 없었고 그런 거지요. 그래서 한참 놀다가 이동원 목사님이 홍정길 목사님께 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홍정길 목사님은 몰랐고 아내가 이동원 목사님 사모님하고 고등학교 선후배 에요. 그래서 저를 그 전에 조금 아셨고 해서 강력히 추천을 해서 홍목사님이 저를 붙여 주셨어요. 제가 가서 첫 설교 때 홍 목사님을 딥다 들었다 놨어요. '입다'라는 설교를 했는데 '홍입다'하면서 들었다 놨어요. 그래서 껄껄 웃으셨어요. 참 대단한 분이지요. 그래서 교인들이 아주 감명을 받았지요. 제가 한 좋은 설교와 그걸 감당하는 담임목사님에 대해서 양쪽 모두 점수를 얻은 좋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설교를 할 기회가 적고, 젊은 눈으로 볼 때 기성세대가 너무 바르게 안가는게 많은 것같아서 설교를 하면 악을 악을 쓸 때였어요. 그 때 tape을 들어보시면 이런 일도 있었지요. 내 마음은 자객 같았어요. 하도 악을 써서 앰프가 한번 나갔어요. 주일 아침 설교하기 전에 김인수 장로님이 기도시간에 '오늘 우리 목사님이 설교 좀 살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까지 하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면 거의 돌았던 것 같아요. 손 : 네, 홍정길 목사님 안식년 때에 강단을 맡으셨는데 지금 우리가 너무 잘 아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인물설교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포교회는 85년에 개포동에서 시작하셨고요, 87년 봄에 현 위치로 이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남포교회 담임 목사 및 합동신학교 강사를 하고 계시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계십니다. 맞습니까? 오늘 talk show를 위해서 목사님 별명을 조사했습니다. 그 중의 best5를 뽑았습니다. 목사님, 어떤 별명이 좋으신 가요? 박 : 짓는 사람 마음이지요. 손 : 자, 5등부터 보겠습니다. '깬돌이' , 혹시 '깬돌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박 : 모르겠는데요. 손 : 4등 '단추구멍', 3등 '허슬러', 2등 '가까이 하기엔 너무먼 당신', 1등 '맥가이버' 박 : 일등이 맥가이버로 나온 이유가 뭐죠? 손 : 글쎄요, 목사님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잘 해결하신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박 : 원래 김형준 집사 별명이 맥가이버예요. 손 : 그건 기술적이고, 목사님은 영적이고요.(박수~) 손 : 원래 당구에 관해서는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청년1,2부 형제자매들이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으로 목사님의 당구론, 당구철학, 당구관에 관해서 묻고 있습니다. 아주 짧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박 : 그건 짧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웃음~) 꼭 당구일 필요는 없어요. 모든 게임은 승부가 걸려있습니다. 그렇죠 승부를 걸고하는 모든 것은 다 유익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승부를 이기기 위해서 교활한 사람이 되느냐 승부를 놓고 지지않는 사람이 되느냐 그 갈림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무슨 승부를 하든지 인격으로 지지만 않는다면 승부가 아무리 무서운 승부가 걸려도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작은 것이라도 이기기 위해서 자기를 속이고 상대방을 속이는 것으로 넘어가면 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살이에서 승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까 보니까 ○× 또 피구 이런거 하는데, 그 승부에 졌다고 인격에 질 필요는 없는데 우린 인격은 지고, 승부는 이기는데 훨씬 익숙합니다. 하나만 지면 재미없어하고 승부의 가치를 떨궈 가지고 자존심 상하는 것을 면하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면 이긴 사람을 칭찬해야 해요. 그런데 관중 잘 안하잖아요. ○×할 때 보니까 한꺼번에 뭉태기로 떨려 나오니까 남아있는 사람들한테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고요. 그러니까 관중을 잘하는 것도 승부의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당구는 그런 것이 짧은 시간 속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지요. 20~30분이면 승부가 결정나니까 돈내기하는 사람은 심각하지요. 한 30년전에 지금 돈 가치면 5만원, 10만원 짜리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큰 승부지요. 그러니까 얼마든지 치사해 질 수 있지요. 치사해지지 않아서 돈은 못 벌었는데 사범은 아니고 사부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같이 친 사람들이 마음으로 당구에 대한 실력과 인격으로 항복을 해서 사부님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한번은 저희 집사람하고 남대문 시장을 갔는데 '오백,오백'하는 골목있죠. 제일은행 뒤쪽으로, 그런데 중대 농구선수 출신인데 무릎을 다쳐서 190가까이 되는 친구가 운동을 그만 두니까 몸이 불어서, 생각해 보세요. 190에 찐빵이 되니까 얼마나 클까요. 이 친구가 저를 만나서 250다마가 400이 됐어요.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코치 받아 가지고 마음으로 항복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백,오백 동네를 지나는데 큰소리로 '사부님'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씨끄럽던 남대문 시장이 조용해 졌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웬수가 악을 쓰나 봤더니 저기서 이따만한 황소가 뛰어오는 거예요. 날보고 그러는줄은 꿈도 안꾸고 '야, 저거 잘못하면 남대문시장 깔아 뭉개겠다 이거' 그러니까 나한테 온 거예요. 그땐 지금보다 훨씬 말라 있을 땐데, 그러니까 남대문 시장 사람들이 무슨 사부라고 생각했겠어요? 당구 사부라고는 생각 안 했을 거예요. 역시 무술의 고수들은 말랐구나....(웃음~)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손 : 남포교회수련회 그러면 목사님도 장로님도 말씀하시길 잘 놀다와라 라고 말씀하시는데 거기서 말씀하시는 논다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논다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 같은데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논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박 : game과 gamble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game은 재미 있자고 승부를 걸어놓은 것입니다. gamble은 돈을 따자고 game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가위 바위 보 하는 거예요. 하다보니 승부가 짧아지는 거죠. 당구를 하다가 나중에는 홀짝을 하고 끝내지요. 그건 바보예요. game이란 액수가 얼마가 아니라 재미 있자고 재미를 높이기 위해서 승부를 높이는 것인데 승부를 내기 위해 game을 도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액수가 얼마냐는 문제가 아니라구요. 여러분보고 어디가면 잘 놀고 오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잘 논다는 것은 무슨 승부를 걸든지 승부에 빠지지 않고 재미있게 사는 것으로 처음에 말씀드린 것같이 승부를 뛰어넘는 인격과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재미를 누리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게 수양회지요. 이를 위하여 수양회 오면 새벽기도는 안해요. 새벽기도는 짬을 낼 수 없으니까 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24시간 다 신앙훈련을 하러 온건데 새벽부터 깨워 놓으면 하루종일 비몽사몽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수양회에 새벽기도는 안한다 이렇게 됐는데 전교인 수련회도 처음에 하니까요 스케줄을 헐렁하게 짜는 게 특징이죠. 우리교회가 아침식사 8시, 아침강의 10시, 한참 놀다가 저녁에 7시나 8시쯤 저녁모임 이런 식으로 해놓았더니 처음에 교인들이 수양회 와 가지고 당황해했어요. 제가 이리오면 이리 쫓아오고, 저리가면 저리 쫓아오고, '목사님 어디가세요', '나 테니스치러가요', '목사님 어디가세요', '화장실가요' 그러니까 전혀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더라고요. 그러니까 놀고 오라는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배우고 와야 하는가, 무엇을 즐기고 와야하는가, 여러분들이 혼자 생각도 하시고 훈련도 해 보시고, 해마다 실패하면 다음해에는 낫게 고쳐보시고 그런 내용들이 포함되는 게예요. 손 : 이번 수련회 잘 놀겠습니다. 박 : 네. 손 : 사모님은 물론 첫사랑이 아니시겠지요. 박: 물론이죠.(웃음~) 손 : 목사님의 첫사랑은 언제였나요. 박 : 제 첫사랑 얘기를 할 필요는 없고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문제로 첫사랑은 왜 깨지느냐 하면요, 여러분의 첫사랑은 빠르면 국민학교때, 중학교때, 고등학교때, 대학교때 다 첫사랑이에요. 이성에 눈을 뜨고 저 사람을 놓치기 싫다 하면 사랑이지요. 그런데 왜 깨지느냐 하면 그땐 맞는데, 말하자면 고등학교땐 맞는데 대학 졸업 할 때까지 둘이 똑같이 자란다는 보장이 없는 거예요. 나중에 차이가 나면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첫사랑은 깨져요. 첫사랑이든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든 십단위 밑에 있는 사랑은 거의 깨져요. 왜 그렇지요. 그때 사랑은 순수하고 진심만 가지고 있지 사랑을 지키고 열매맺을 실력은 그때 없어요. 실력은 그 요소에 안껴 있다고요. 특별히 남자들이 조심해야 할게 그거예요. 나는 사랑한다 하고 심장 꺼내지 마세요. 사랑하면 상대방이 나 아니면 갈 때 없게 실력을 만드셔야 하는데 늘 집 앞에 가서 심장 꺼내놓고 온다고요.(웃음~) 그러니까 고양이가 쥐를 잡아다가 주인 앞에 놓으면 고양이를 발길로 찬다고요. 안 그래요. 무섭잖아요. 왜 쥐를 잡아다가 주인 앞에 물고와요 혼자 먹을 일이지. 남자들은 언제나 강아지 같이 사랑하고 여자들은 고양이 같이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나도 같은 남자로서 너무 가슴아픈 추억들이 많아서 그래요.(웃음~) 그러니까 진심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심장 꺼내 놓고는 "식기전에 드시죠" 하는 거예요. 남자들이 어떤 병신 짓을 하냐하면 어떻게 어떻게 힘들게 억지로 만나면 긴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따뜻하게 여유있게 못하는 거예요. 진심에 눈이 멀어서, 그러고는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고 지랄지랄한단 말이에요. 새소리를 듣고 싶으면 나무를 심어라, 물이 고이게 하고 싶으면 물길을 파세요. 샘물이 나오기를 기도하지 마시고. 됐지요. 손 : 불현듯 저도 아픈 추억들이... 진작 목사님을 만났다면 장가를 갔을 텐데요.(웃음~) 목사님께서는 자주 '여자가 무섭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여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 일거예요. 여자가 이쁠때하면 성희롱 내지 성차별이 돼요. 남자나 여자나 인간으로서 멋있어야 되는 건데, 인간에게 두 종류가 있지요. 남성과 여성. 공통적으로 아름다운건 무엇이냐 하면 자기분수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분수라는건 하나님이 준 자기 꼬라지를 감사하고 충실하게 하는 거지요. 여자를 놓고 얘기하자면 정숙하고 단정한 겁니다. 여자의 책임이에요. 여자가 남자같이 굴면 여자 맛이 없고 남자가 여자같이 굴면 남자 맛이 없는거에요. 그렇잖아요. 왜 여자랑 등산을 가지요. 악악거려서 데려가는 거예요. 여자가 씩씩하게 가면 재미없어요. 그러니까 여자가 여자 같을 때 남자가 남자 같아지는 거지요. 성차별을 없애자는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차별을 없애면 안돼요. 그것은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가 아니고 다 빨강하자는 그런 거예요. 재미 되게 없지요. 그렇잖아요. 그건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생명의 무성함입니다. 풍성함이고, 그런 것 놓치지 말아야해요. 여자의 아름다움이 무엇이냐 하면 여자 같은 겁니다. 여자같은게 한국식으로 빌빌대라는건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식으로 펀치를 날리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여자는 단정하고 정숙할 것, 남자는 능력있고 책임질 것 그런 것들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알아 듣는 게예요, 지금! 손 : 알아 듣는데 삶의 변화는 별로 없더라 이거지요.(웃음~) 저희들은 어릴때부터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해야한다고 해서 저는 20년동안 기도만 했거든요. 제 기도방법이 틀린 것 같다는 생각밖에는 지금 말할 수가 없는데, 배우자를 위한 기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박 : 기도가 어려워요, 기도란 자기가 기도한 내용과 목표를 향하여 나를 맞춰 나가겠다는 약속이에요. 난 가만 있을테니까 하나님이 깡통으로 만들어서 보내주십시요는 아니거든요. 뭐든지 하나님께 의뢰해라는 이 말이 너는 책임 안 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배우자의 제 1차적인 조건을 신앙과 영적인 차원에서 기준을 삼겠다는 뜻이지요. 그럼 그런 아내를 맞이할 실력있는 신앙인이 되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쪽을 게을리한거지요.(웃음,박수~) 손 : 예(한방 얻어맞은 표정으로) 박 : 빨리 넘어갑시다(웃음~) 손 : 여기 청년 1,2,3부가 모여 있는데 각자 나름대로 부서내에서 소위 CC(church couple)라고 하지요. 사귀는 사람들이 많은데 되는 경우보다 제경험상 안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사귀다가 잘못되면 우리들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의 대다수가 한쪽 일방이 교회를 안 나오는 경우라구요.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약6개월 동안 근신하는 마음으로 견뎌야하는 고난들이 있는데(웃음~), 우리가 교회내의 공동체내에서 그런 일들을 당했을 때 당사자나 주의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대해야 할까요? 박 : 여러분들은 사귈 때 처음부터 너무 진하게 사궈요. 남녀가 사귀는게 너무 진해요. 특히 남자들이 보수적일 가능성이 있지요. 남자끼리 모이면 그러는데 '나 쟤 찍었어 손대지마'이거란 말이에요. 딴 사람하고 야구장을 가거나 딴 사람하고 커피를 마셔도 그건 벌써 춘향아 이럴수가 있느냐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거 아니에요. 지금은 여러분이 훨씬 많은 단계를 놓고 사귀셔야 되요. 이 사람하고 야구구경 가고, 저 사람하고 영화구경 가도 바람둥이 아니라구요. 여러분들이 남자가 여자를 초대할 수 있어요. 야구장 같이 갈래. 그러면 예의 바르게 같이 갔다 오세요. 여자도 그렇게 따라가고, 한번 그렇다고 쉬운 상대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쟤는 내 여자야 이러지 마시고 훨씬 많은 단계를 거쳐야 연인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딱 째려보다가 결정을 하고, 사귀거나 같이 가면 벌써 애인이고 결혼이고 너무 무겁게 가요. 나중에 어떻게 결혼을 할지 모르는 거예요. 결론은 훨씬 다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이 관심을 갖고 있는 배우자로서의 조건속에 가장 필요한 조건들이 지금 없다고요. 여러분의 소원하는 조건이, 나중에 산다는 것은 아름답고 매력 있는 이상으로 능력, 성실 이런 다른 문제가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이 아직까지는 동화적 차원에서 연애를 한단 말이지요. 동화는 다 결혼에서 끝난단 말이지요. 그 왕자와 공주가 결혼한 다음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 그런데 결혼한 다음에 행복하게 사는 경우가 없어요. 동화는 거기서 그쳐야해요, 그 다음은 지지고 볶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그 영화를 볼수가 없는데 '초원의 빛'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나탈리우드하고 워런 디티가 나오는데, 고등학생이 연애하는 내용인데 좋아했다 배신하고 정신이상까지 걸렸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자기가 좋아했던 남자 집에 가보니까 완전히 지지고 볶고 사는 거예요, 애는 울고 결혼한 부인은 앞치마에 국물 흘리고 머리가 부시시 해가지고 자다 깬 얼굴로 누구에요 이런 식으로, 나탈리우드는 있는 대로 멋부리고 찾아갔는데, 남자는 남자대로 똥푸다 나온 것 같이 하고 있고, 산다는 건 그렇게 짠 하고 사는게 아니에요. 사는 건 훨씬 실제적인 힘이 많이 필요해요. 거기에 매력이 있고 멋이 있지 짠하고 마네킹 같이 있지 않다고요. 여러분이 사귈 때는 그런게 싫잖아요. 손 : 설문조사 소개를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목사님이 아니라면 가장 어울릴 직업 BEST5 보겠습니다. 5등 약장수, 4등 세일즈맨, 3등 고교 한문선생님, 2등 당신, 여기서 당신은 '당구의 신'의 줄임말입니다. 1등은 도박사 박 : 도박사의 의미는 딴다는 의미가 아니고 승부를 즐겨서 그렇습니다. 저는 승부가 참 재미있습니다. 지금도 당구를 종종 치는데 제 승률이 나쁘도록 자꾸 걸어요, 핸디캡을. 바늘 끝같은 승률을 놓고 치는게 좋아요. 손 : 그 외에도 소수 의견이 PD, 영화감독, 영화배우, 주차단속요원, 한국전력 인사부장, 야구해설가, 인권변호사, 사기꾼, 기도원 원장. 아주 다양한, 어떤 직업을 가지셔도 잘하실 것 같은데 제가 결론적으로 보기에는 목사님 하시기를 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박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손 : 목사님 하면 연상되는 것 BEST 5를 보겠습니다. 5위 박병석군(박목사님 아들)이 청년부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5위를 차지했습니다. 4위 바바리코트, 3위 당구, 2위 욕 입니다. 1위는 하나님의 열심(박수와 환호~) 설교 중에 욕하시는 분은 처음 뵈었거든요, 목사님이 하시는 욕의 의미와 욕을 하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박 : 열심 있게 하나님 편을 드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편에 서서 열심 있게 들 때 대상인 대부분의 성도들이 욕먹을 자리 혹은 욕먹을 수준에 와 있습니다. 욕을 안할 수가 없어요. 잘했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욕을 해야지요. 옛날에 비하면 5%로 줄었어요.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저의 진심을 이해한 사람이 팬이 됐지요. 그것과 연결해서 말 잘한다는 것이 나오는데 말을 잘한다는 것은 옛날엔 달변가 였습니다. 쉬지않고 이야기하면 똑똑한 사람으로 치부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데 그 이유는 제가 전달하려는 것을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맥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쓸데없는데서 힘쓰지 않고 남의 다리 긁지 않는 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말을 잘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설교를 하다보면 답답한 경우가 있어요.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를 몰라서요. 손 : 아까 목사님 하면 연상이 되는 것 중에서 병석이 이름이 나왔는데, 목사님 가정생활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우리가 대부분 자식의 입장이지만 머지않아 가정을 이끌 사람이 될텐데 자식교육의 기본원칙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박 : 기다려 주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마음 중에 가장 중요한 게 기다려주는 것인데 부모의 사랑이 기다림을 조급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자꾸 뭐라고 꾸중하게되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해해야 되요. 한 사람이 만족할 만한 자리에 가는데 오래 걸린다는 걸 서로 알아야 하는데 부모가 되면 급해져요. 관심과 사랑이 있으니까. 내가 제일 미안하게 생각하는 게 우리 아들인데 딸인 경우는 아버지가 목사인게 크게 마이너스로 작용 안하는데, 남자들 사회에서는 목사 아들이라는 것이 좋게 작용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데, 아들이 잘 감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부탁을 한다면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해서 봐줘요. 너무 연결하지 말고. 제가 설교때 제 집사람이나 아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누구를 예로 들 수가 없어서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한동안 집사람을 등장시키니까 집에 전화 오고 그랬어요. '도대체 사모님은 목사님을 어떻게 모시는 거예요'하고요. 이렇게 민하게는 말라구요. 우리가 믿는 게 있어요, 기다려주고 마음을 끊을 수 없고 하나님이 편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신앙인이라면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그런데 부모된 마음은 조급해지고 왔다갔다 한다는 걸 알고 부모를 이해해야해요. 언제나 사랑은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잔소리 하면 들어주는 거예요. 부모님의 잔소리를 가장 빨리 멈추게 하는 것은 감동을 하는 거예요. 분위기도 좋고 실제적인 이익도 따라오죠. 그래야 그 다날 용돈 타는데 지장도 없지요(웃음~). 손 :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남편의 역할은 어떤 것이며 아내의 역할은 어떤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연애할 때부터 어떻게 해야하나요. 박 : 결혼은 짐을 대신 져줄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니고, 나를 이해해줄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배우자 조건 중에 1위가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내 멋대로 살텐데 네가 책임 다져라 이말이에요. 순 날강도들이에요. 이런 식으로 마음을 갖기 시작하면 안됩니다. 배우자는 서로 어떻게 만나느냐 하면요 이 사람 하고라면 내가 저 산을 넘겠다 이 사람하고라면 태평양을 건너겠다 이런 사람이 생기는 거예요. 이 사람하고 라면 인생이 고달파도 업고라도 가겠다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서로 결혼을 하면 짐이 10배쯤 더 무거워져요. 내가 나를 책임지고 우리집을 책임질 뿐 아니라 결혼하는 상대방을 책임지고 그 일가친척, 사돈의 팔촌 다 책임지는 그래서 짐이 훨씬 많아지지 짐이 덜어지지가 않습니다. 둘이 그 짐을 어떻게 나누어지느냐 하는 건 살면서 협상을 하는 거예요. 싸우기도하구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선을 갖게되고 양보를 하게되요. 우리는 상대방이 '나 화낼거야'하면 '내봐' 그러면 그건 잘못하는 거예요. 한쪽이 참아야지요. 연애를 할 때도 그 표현을 하는 법을 배우세요. 상대방이 싫다면 하지 마세요. 서로 상대방을 위해서 관객이 되는 법, 나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상대방도 재미있게 하는 것 이런게 노는 겁니다. 예의고, 그래서 남자들은 신사가 되시고 여자들은 숙녀가 되십시오. 손 : 조금 무거운 주제로 넘어가죠. 목사님도 힘드실 때가 있으실텐데요 그때 지표가 되는 말씀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박 : 힘들 땐 많습니다. 힘들 땐 많은데 이쯤되면 기도를 해서 넘어간다든가 말씀을 생각한다든게 아니라 도가 통해요. 이 말의 의미는 힘든 것이 중심을 흔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제쯤되면 힘들면 힘든 것으로만 있지 다른 것에 영향을 못 미칩니다. 그냥 힘들면 힘들죠 설명 불가능해요. 여러분이 상상하고 기대한 것보다 더 센 거지요. 손 : 남포교회 특징 그러면 자유로움이라는 주위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스스로가 생각을 해봐도 자유가 넘쳐서 오히려 방종으로 가고 있지는 않나 생각이 드는데요. 목사님께서 저희 청년들에게 자유로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박 : 연세대학교가 미션스쿨이기 때문에 설립 이념이 진리, 자유, 평등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서구사회는 어느 나라나 다 진리, 자유, 평등이라는 것이 중요한 국가의 이념이고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삼색기가 많습니다. 조금씩 색깔은 달리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영향을 미친 서구사회는 다 세가지 원리입니다. 진리, 자유, 평등입니다. 그런데 이 세단어를 잘 이해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자유란, 진리 안에서의 자유란말이죠. 자유는 썩지 않는 자유, 죄의 포로가 되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진 자유가 일차적으로 부정적입니다. 뭐하지마라 뭐하지마라에요. 신앙이 속박으로 훨씬 많이 다가오죠. 자유는 하나도 없죠 어떻게 보면 뭐하지마라는 썩지마라 죄에 다시 붙잡혀가지 마라, 헛된데 가서 시간낭비 하지마라. 그 대신 진리 안에 들어와서 새생명답게 살아라.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내용이기도 한데 살아있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입니다. 물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를 믿지않는 이들 구원을 얻지 않은 이들은 그 물고기가 밖에서 썩어가는 거죠. 또는 풀이 그 생명을 가지고 해를 받고 비를 받아서 꽃피는 것예요. 아니면 썩어서 퇴비가 되든가 가축이 먹는 꼴이 되는거죠. 그러니까 그거하지마라 그거하지마라 그럼 그거하지말고 무엇을 하는 거냐 새생명답게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수영장가서 놀면 놀이밖에 할 줄모르고 누구 놀래키고 손해시켜서 재미있는 그런거 말고 노는거는 훨씬 적극적이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규칙을 지키고 열심을 다하고 그래서 승부를 겨루는 참다운 인간의 고급한 어떠한 인격과 수준을 나타내는 재미가 있단 말입니다. 그게 더 재미있죠. 그런 재미를 누릴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 그러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 신자가 얻은 자유는 그것 아닙니다. 죄의 멍에를 메지 않는 자유, 요즘은 어떤지 모르는데 우리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진도다 나가면 딴거 가르쳐줄까 하면 싫어요 놀아요하고 그래놀아하면 심심해요 그랬어요. 놀라면 무엇을 해야될지 모르는 거예요. 건전하게 놀 줄 모르는 거죠. 우리의 자유라는 것이 아무렇게나 해도되는 질서를 깨고 기분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죠. 자유는 질서를 지키고 질서안에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 참다운생명 우리만이 가지는 고급한 인격을 발휘하는 그런 자유를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걸 뺏으려하면 말하자면 방종, 썩음, 문란, 자폭 이런걸 여러분이 거부하셔야죠. 그것이 자유입니다. 손 : 어디서 글을 보니까 한국기독교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서구화로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의 글을 읽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보시기에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는 한국교계의 문제가 어디에 있으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박 : 기독교라는 신앙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환경적, 개인적 조건 때문에 접하게 되는 경우가 제일 흔합니다. 급해져서 위급해져서 필요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제일 큰 조건으로 작용을 하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먹고 살만해지면 신앙생활이 짐이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얼만큼 벌때까지는 국가에서 돕는 최저임금제라든가 사회보장제도가 좋지만 많이 벌면 어떻게 되요. 그 혜택받는 것보다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뜯기는 돈이 더 많아져요. 미국 같으면 많이 버는 이들은 50%정도를 세금으로 뜯겨요. 굉장하죠. 번것의 절반을 세금으로 뜯긴다고요. 고급인력들은 신경질 나죠. 그러나 여러분이 미국가서 아무것도 안하고 놀면 사회보장제도를 받으면 가만놀고 있어도 먹는 것은 해결해 준단 말이죠. 그땐 좋죠. 그러니까 신앙이 그런 식으로 쓰여질 수 있단말이예요. 앞으로 우리가 먹고 살만해지니까 벌써 신앙생활보다는 놀기 바빠졌는데 주5일제 근무가 되서 정기적으로 토요일이 공휴일이 되면 교인들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교회자체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쭉정이들이 빠져 나갈 것이지 정당한 신자들이 빠져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많은 유혹을 받을 것이고 그 유혹에 많이 걸려 들것입니다. 교회가 정당한 차원에서 신자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영적이지 않은 문제로 교회가 성도들을 붙잡고 있으면 그때 가서는 다 뽀록이 날겁니다. 손 : 설교시간 중에 박동준목사님을 많이 거론하시는데 박동준목사님이 진짜로 그러셔서 그러시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이해가 있으셔서 그런지 저희들에게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해명을 해주십시오. 박 : 제가 저를 예를 들때도 있고 박종준목사를 예로들때도 있는데 상대방이 이해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고 그 다음의 한 조건은 듣는 이들이 볼 때 위로를 받을만한 사람을 등장시켜야 합니다. 여러 면에서 그러니까 듣는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만은 아니겠지 하는 사람도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하나있고, 또는 여러분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 이런 사람도 있다하는 면에서도 박동준목사는 아주 많은 풍성한 조건을 갖고 있죠. (우하하하)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잘 소화를 합니다. 쓰임 받는데 대해서 그렇게 인용되는데 대해서 본인이 잘 넘어가는데 아주 고마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효과도 크고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자주 인용을 하는데 요즘영화를 인용할게 없어요. 옛날영화는 인용할 것이 조금 있었습니다. 영화를 인용하는게 왜 좋으냐면 예화를 들거나 그 설명을 할 때 제일 설명하기가 쉽죠. 다 본영화면 벤허, 십계 같은 것은 예로들기 좋은데 만일 그런 것으로 안되면 박동준목사님도 끌려나오고 아들도 끌려나오고 저희집사람도 끌려나오고 하는 겁니다. 저희 집사람도 가끔 불평을 합니다. 자기는 끌어내지 말라고. 손 : 말씀을 들어보니까 다음 타켓은 박정희 목사님이 될것같군요. 박 : 박정희목사님은 아직 감당하기 어려워보여요 관객: 우하하하하하하~~~~~ 손 : 10년전에 남포교회를 설립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남포교회는 이런 교회로 만드시겠다고 작정하신 것이 있을텐데 10년이 지난 지금하고 비교해 보실 때 어떻습니까? 박 : 사실은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자라나면서 교회에서 본 어른들 중에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는 분이 별로 없고 나는 저렇게는 안해야지가 훨씬 많았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아직까지 모르겠습니다. 멋진 교회라고 손꼽을 수 있는 교회가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별로 없었습니다. 나도 저런 교회를 해야지가 없었고 그래서 더듬듯이 여기까지 온 겁니다. 저기다 하고온 것이 아니고 더듬듯이한 걸음씩 였쪄舅未陋 풍ª 외〈 쟳O枓 왜그건 ≠납면 저같Ì 뭅 가좆【 쩐爭ぜ 교효【 융õ 입읏【 보면 주일학교때 瓦齋뭐曠閨 다니ø 시절에 뮈î 성경메셉贅서 徨 한 걸슉µ 어른이 되어¶µ 전진하지 못했습求 ± 다음에들은 낢났湧 언어만 低Ⅵ湧Ç 말로 묾戰지 냄育º 陞런거고해서 주 일씻㎰¡ 교교챨8떪Ù 세瓦㈖敾 떠나 그【 粹교가 이잴A 〕土朞 하 의뮌Ì 많柰í 늡癬÷ 섟嚥¡ 淪서 깊이 ¾ 수 있는 銹린¡ 뺐攘 풉묽냠릿쩌Ш맙『舟서는 한 몇십â 떨어Á 있슈求 나쁜쪽윷灌쩔㈆¯ 책» 만날수 있었ø 것과 하나님Ì 의燻¦ 베 푸탉 Ñ 걸음 õ 들載〈 資Ì 윱 뼁育» 꼐爭뺨 읍汰» 시작을했죠 지금À 히브˙↨ 품í 있í 언졀¡ 갹첨歐지 가¸ 끝나는 셈퍜a. 굣 은퇴할려고 풔求. 손: 올해 청³ 청년23부¦ 나뉼決니다. 졀拷로 알í 있는¥ 그 역할 Ì 아÷ 우맙Ô ㅘ 鞫 가습막Î 姑阮淄苛 觀筠龍 있건孤몝i 박말榮Ì 오½ 김에청년123봇¡ 거 기대¡ 어¶ 것인지말씀을 榕咀맘弩만é 합求 박 :기대하는Ô 없죠(관웃음~ 누가 살아남느냐의 싸오都求 여러줭i 위해서 여러분돛Ì 책임을 지셔씰Ò 또 쓺² 이湧º 邦막Î 나갸 곱° 살다죽기µ 하° 그· 겁니 교활¡ ㈆ 肯을 위푿 이교회다음세대요 이나라의 다음 윷± 嫄穗Â Ò 필¿ 없습니다 그런 부담을 가질 却芽 전혀 없고부모È 마음과 교회에서 다음세대를 위해 할 수 는 모µ 혜택과 가뛤 좋º 방뮌» 좃쳬弩지 린í 여茱 건土構í 歷맨蠻˙⌙퓐 있 琉 신자렐 사 삶에 기쁨À 누±Â 윷關 궐맙~여러분의봉사¿ 여렉隙Ç 이익À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를 뭉遮 것입求 여러볕湧» 위퓬▲扁¡ 교육부서¿ 드는 렝º 뉨Ⅵ¥ 드는 것보´ 효응Ì 떨沮畦다. 훨À 쓸 愎쨌館벙 많슈求 그러³ 우리´ 기 갸覃柰甄求. 예測纛Ì で毬じ맛» 위해섬捉돛Ì 땅에 오신 것씦ñ ㈆ 중에 하나를 건지â 위해서라µ 교회는기꺼이 열심을 冒뺐 물심양면막Î 할겁求 여러분湧º 책임À 차원À 아니ó 스슘罐¦ 위해 서 풍ご纛퓨泳馨 부모Ç 사¶ 목사途꼈月 시례비라든Á 여러 ≠層럿湧 어떻Ô 갭⌡ 하시며목사纛Ì 쓰척 것 ㏏ⁿ¡ 사모님과마찰은 없맒탕ö 금하고, 궁굼岵막Î 걍骸을 錚뺐Ô 생건¡ 求쩝에 대해서말씀해 笭駕첼À 박 : 물질º 본인이성실품Ô 산 눗》菅濱 甄求. 그게 봄피璣Í 만큼 못뮌뻤도 있í 성실舊置萬枓우리´ 물질À 가만÷ 앉티 쭽¡ 씜윱求. 노력漫 얻씨ß 됩니다. 陋痼º 내 인생에 있씔 중요한 일 입니다. ┛「株 생활을하면서 佇좆 일돛Ì 많À 법인µ 목사이 기 때ⁿ¡ 어렛î 것맛º 아눗縯 醍ç 삶Ì 어· 큰 응  씰붏a월± 때문À 것입니 먹갱榮 뭐萱Ì ㈀â 아뉨é 다른방뮌Ì 없â 때뮈¡ 참는 경염¡ 많습니다. 옆 Ð 인생 있어서µ 여렉隙 성질» 다 부리며 사 것이 최고가틈Ñ 겁求 마슴¡ 안뎬 속옘¶µ 챞競 살아야되나 하면서사는 걋Ì 옆 極 인내와자폭À 방지權다. 손: 예, 윱à 엽茱↨株榮犢 가굼Ì 뵈니î 강단에 우리가 萬【 위Î 뵐떵릿 횡À 더 맛Ì 인鳧岵시고 인@인 모응» 玲羚底 촚v던 것 같윱求 곧 이어서식사시걋堅â ㏏ⁿ〈õ 鵑ó 연洋歐讐 도읜兌柰〈º 떴ⁿ¡ 마지렝막 목榮纛Ì 뺙竪窈게 蠻儡 싶으Å 말맛» 프笭챰繡帽愎裙. 박 : 씰 〉舟瞞 한다는것때ⁿ¡ 어틱윱求 瀏【 처蒐챰臼 제À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여러볕湧訣曼舟每 되는것이 仄Ý 여러筠湧Ç 還培고 거φ¡ 獵募데문제° 있습눼 씀ι이 ㈆싡i에Ô 잔섯⌡¦ 풔 이  ㈆ 筠龍 관 갖고 逞ö 쓴 것» 梶Ù 하떠í 해¼ 읊恬φ 되는 겁니다. 그려 여러筠湧 하고 » 때 解縯 놀고싶을 때 놀縯 린í 싶À 때 蹈í 어링湧Ì 蠻Ù ¼ 있는것은돈이나 탬Å 좃척 것외에 じ지는 低Ⅵ茸테 도遲» 요뽀Ò 일Ì 없잖윱歐. 그걋º 고치센ß 합눼 여 筠龍 준비瞞ß Ò 것을준비해¾ 합니 많습求 실력이 있杵峠構í 교양을 가지탑ß 풔求 그것º 여러모로 필요Ñ 일琯¥ 실력뭉岺뗘嶺립뻗 갈수Ï 불악構縯 봅훌면 사뗌Ì 성걋Ì 낳滑촻. 별것 아´ 일에 성좇» 내Ô 품í 윤â 꼴Ì 초또漫 냄Ô 줯좉 내고 무렷蠻側 그리í 불안감을 남Ô 슭Æ 붓鍍품í 罐嘲羔믥Á 사맙Í 역사와 모µ 사람들Ô 湛» 돌린Ô 되고 나중에 '그 낫 못났어'품í 악당인것을 폭로품í 총을 휘두르Ô 쨉Ⅴ 무지무지품Ô 시@Ì 윷¡ 걸릿求 ㈆ 筠이 훌륭해지쨉¥ 부므求 痼º 옆 筠龍 서Î 협력풉綬¦ 帽愎裙. 격려絿고 섭寬¡ 서恝Ô 유혹 껴≡ª 방해꺼리는최소한 되지 릴綬¦ 바라는 痼都다. 슭湛岵로든 일¹ 실쩔¡ 건Ñ 문제µ 인鳧岵막琯시 손 : 오랜 시간성의있° 답蠻笭Å 말榮途 다시한번 ㉪永約니다.그럼 이시간 뗑〉둑 하愍니다. 喚 뭡ö À 토크箏쩠뺙â 1 2, 3Î 여¸ 연합수련회 § 행Ç 것으로 부의 최용환 프┛¡ 수고Ç 주決니다. 閨繡叭) 쓩曠)목臼§(DI,L,L) 느쌨셉泡N)앞氷¼ 동至(H 돈舅密ROM 존冑騫(SUBJ) 답鷺) 뼉(P 번호:49/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9 13:09 길이:210줄제 목 : 제자훈련 2권 1과 성도로 부르심-박영선 목사 1과 성도로 부르심 본문/고전 1:1-3 <생각을 위한 질문> * 신자로서 자신의 최고의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이해>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나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병행 구절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자기의 사도직을 설명하는데 그 사도 직분이 오늘날 우리의 성도라는 직분을 이해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쟁이 있었고 부도덕한 음행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아주 부패하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저들에게는 많은 은사와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은 유치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가장 큰 세 가지 문제였습니다. 그 외에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받은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해라,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저렇게 해라'하면서 그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사도직이 변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도직이 먼저 확보되어야만 그가 지시하고 권면하는 말이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모든 판정과 결론의 순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을 특별히 주의깊게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도직이 대해서 도전을 받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0에 보면 바울에게는 외관상의 약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 10:10). 여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사색 당파 중에 아볼로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아볼로는 바울과 동역한 훌륭한 협조자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뛰어나고 또 상당한 웅변가였습니다. 말에 힘이 있어서 토론에서 유력한 지원사격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 편을 들었던 사람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특별히 외모를 공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바울이 지금 내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변명해야 될 실제적인 공격들 중 하나인 것입니다. 외모로도 시원치 않고 능력도 의심이 간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그가 그 일로 사람을 등쳐먹는 사람이라는 공격도 받은 것 같습니다(고전 9:11-15). 왜 우리가 이런 일들을 들추어내느냐 하면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된 것과 사도 직분의 핵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옹호하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신자로서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성경적인 요구대로 우리는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어야 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바울이 당한 것 같은 아픔과 조롱과 어려움과 억움함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며 감수해야 되느냐 하는 것의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불렀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하는 것이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는 근거이고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 속에는 자기가 받은 공격에 대하여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는 생긴 것이 사도답지 못하다"라고 공격할 때 생긴 것을 고쳐서 저들에게 대답해야 된다는 생각이 없으며, "말을 못한다"고 할 때에 말을 잘해서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사도직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목표와 방법으로 밖에는 수행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감당할 직분이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사도로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왜 이 꼴로 불렀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을 너희가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으나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나도 그것을 변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자직이 그렇습니다. 신자는 전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바울과 같은 직분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내가 기왕 하나님의 자녀요 이 세상에서 빛이고 소금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것은 주지 않으셨습니까? 보세요. 저 사람들이 나에게 이것이 없다고 공격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거나 섭섭해 하는 것은 우리의 직분이 어떤 것인지를 바울식으로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전 4:9이하에서 자신의 연약하고 실패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사도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멋진 것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직분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스러운 모습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서 그 직분을 수행케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바 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네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존귀한 일에 사도겠느냐?"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나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부르셨고 그것들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고쳐주지 않았다는 이 엄연한 사실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을 더 나아가 "더욱 우리를 만물의 찌끼같이 모든 세상의 미말에 두시사 구경거리로 삼았다는 것밖에 나는 증거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도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 된 직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성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면 무슨 망신이냐고 하지만 그런 것은 자신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지 하나님에 관한 문제는 사실상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최고의 예증, 최고의 실례는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왜 죽어? 거꾸로 정복해야지"라고 공격해 옵니다. 그것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공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씻는 작업이 제일 먼저 필요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로 보일 뿐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사역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빛이 될 수 없고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하여는 사도 바울식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 약함이 여러분에게 좌절거리가 되거나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한답시고 주님 앞에 쓰이는 일을 거부하고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 문제가 그에게 좌절의 문제이거나 사람들을 항복시키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과 다른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증거라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원에 속한 것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나의 존재 속에서, 그리고 나에게 맡긴 직분 속에서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의 직분을 그런 모습으로 감당하기를 요구하신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을 봅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10:1-8). 바울의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적극적이고 깊은 이해를 보십시오. 우리가 육체에 있으나 육체대로 싸우는 자가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신이 되었고 하나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죄의 최고 핵심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무릎끓고 싶지 않은 자존심입니다. 사탄이 어떻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는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너희에게 저것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 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방불해지려고 먹은 것이 선악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의 뿌리, 죄 된 생각의 종착점은 언제나 자기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적인 싸움에서 하나님의 일꾼은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만 그 직분이 힘을 발합니다. 내가 얼마나 강하고 센가가 등장하는 순간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은 거기에 함께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승리한 것, 극복한 것으로 절대 나타내지 않습니다. 형통하고 승리한 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증인들의 승리와 형통은 언제나 그가 주 앞에 엎드려 혼자 몸부림치고,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고 남의 도움을 무시하던 교만으로부터 어떻게 내가 주 앞에 거꾸러져서야 평안과 해결을 얻었는가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이 높아지고, 주님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으로만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신자 된 모든 직분들이 사용되도록 의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이유로 외형적인 모습을 주지 않으셨다고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싸움은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니요, 영적인 것이니라" 이렇게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많이 요구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사용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소원이어야 되고 그 소원에서는 돈이나 건강이나 지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부터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존재와 내 삶에서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매일 자기를 쳐 복종케 하십시오. 그것을 구하십시오. 죽는 법을 구해 보십시오. 주께서 존귀함을 받으시기를 매일 구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필요하다면 그 밖의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얼마나 간단한 진리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가 천만에 이른다는데 이렇게 세상이 어둡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이해타산을 위해서 도입되었지 십자가와 주님 앞에 무릎끓기 위해서는 하나도 쓰여지지 않았다는 데 대하여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고만장했던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의 대학자 바울이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철학과 사상으로도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학식있는 바울이,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어느 분 앞에 납작하게 엎드렸습니다. 그 분이 '이래라' 하면 자다 말고도 일어나 '예'하고 순종하고, '나 자빠져서 거품을 물어라' 하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항복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자신이 항복하고 있는 그 분이 드러나기를 기뻐하는 존재가 된 것을 나타내는 것 외에는 그의 인생의 소원도 없고 미련도 없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세지요? 이것이 센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가능한 한 남의 도움이 필요없는 사람이 되는 것, 사람의 도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아도 자급자족하는 사람이 되고, 남의 도움이나 충고나 가르침이 필요없는 유아독존적인 신이 되는 것으로 동원되기가 일쑤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만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내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인식한 그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 간절함, 그 처절함, 그리고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있는 만족과 환희와 기쁨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충만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최고의 약점이고 이 약점은 근본적인 신앙의 약점이기 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바로 이런 시점에서 이제 점검하십시오.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자신, 사도로서의 자신, 그의 인생, 그것과 방불한 우리의 모습,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의 지금 존재는 바울과 방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시고 주를 아는 일을 우리의 발걸음과 우리의 삶을 통해서만 나누시기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를 존귀히 높이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의 존재와 삶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공격받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과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우리의 존재와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3. 본문에서 제시하는 신자의 최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4. 본문이 지적하고 있는 신자들의 최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 오늘 공부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50/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9 13:13 길이:237줄제 목 : 제자훈련 2권2과 성도의 자기성찰-박영선 목사 2과 성도의 자기성찰 본문/고전 1:1-9 <생각을 위한 질문> * 일반적으로 스스로 신자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자책감을 많이 가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이해> 신자 혹은 성도라는 말의 뜻이 성경에서 어떻게 쓰여지고 있으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이 성도라는 말을 쓸 때는 그 사람의 자격을 논해서 성도라는 말을 쓰는 적이 없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성도란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의 죄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중한 죄를 갖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피를 흘리는 것 외에는 그 죄를 씻을 수 없는 가장 악질들, 천하에 몹쓸 녀석들 이것이 성도입니다. 신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는 방법 외에는 깨끗해질 방법이 없었던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나은 자라고 얘기할 수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없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우리가 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가 됐다. 신자가 됐다'고 하면 우리에게 어떤 오해가 있느냐 하면 '나는 예수를 믿었고 저 사람은 믿지 않았다'라는 것으로 자꾸 구별을 합니다. '나는 믿은 자, 저 사람들은 안 믿은 자', 이런 식으로 구별을 가져서 신자가 그래서 낫다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물론 낫긴 낫죠. 그러나 그 낫다는 것은 은혜를 입었다는 뜻에서 낫다는 것이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의미에서 낫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건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성도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데 원래 성도라는 헬라어 자체의 뜻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깨끗한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일차적인 뜻은 아닙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자, 하나님이 자기의 소유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이지 그가 뽑힐 만한 자격이 있었다던가 뽑힐 만큼 노력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자기의 소유로 삼은 자라는 뜻입니다. 전부 다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이고 능동적이지 않다는 뜻은 우리가 뽑힐 만한 준비를 했거나 조건을 만들었거나 연습하지 않고 아니 그런 것을 연습할 수도 없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편지 서두에다가 사도 바울이 꼭 써야 되느냐 하면 고린도교회에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저들의 교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많은 분파가 있고 음행도 있고,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시기하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교인들입니다. 왜 어리석어졌느냐 하면 저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로 말미암아 자기네들이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이라는 교만한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시작부터 사도 바울이 이 부분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잘나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불렀기 때문에 성도가 된 자들이다." 이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이 신앙심이 뛰어나서 그들이 교회를 만들어서 고린도교회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고린도라는 곳에 교회를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저들을 부르시고 교회를 세워 주셨기 때문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꼬집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고 싶은 얘기를 아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신자란 누구든지 예외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와 긍휼로 부르시어 우리를 붙잡아 내셨기 때문에 신자가 되는 것이지, 혼자 결심하고 혼자 연구하고 혼자 잘나 어느 날 도를 깨우쳐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틀리면 그 이후의 신앙의 모든 분야, 모든 생각에서 틀려집니다. 즉 내가 어떻게 신자가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은혜를 모르는 것이며 우리가 죄인으로부터 이 자리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모르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교만하면 싸움하고 하나님이 그 인생을 통하여 일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스스로 방해하는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살펴보아야 되느냐하면 성도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 각자가 개인적으로 자기의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때 가장 중요한 싸움을 어떤 기준, 어떤 안목에서 분별하며, 싸우며 극복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겸손이 모든 해결점이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 싸움이 걸리고 시험이 걸리느냐 하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이 쓸데없는 싸움에서 우리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신자는 이중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신자의 이중 구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눈을 뜨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작업을 하셔서 어느 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과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것과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를 믿기로 약속을 하고 주 앞에 엎드립니다.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보았고 빛이 무엇인가, 무엇이 죄이고 사망이고 무엇이 생명이고 영원인가를 알게 되어 그를 선택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이제부터 내가 영원한 것과 거룩한 것과 생명에 대한 것을 쌓아나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없던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오해가 빚어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뜨게 하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시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도록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우리에게서 자라납니다. 그것을 보고서 우리는 '내가 원래부터 그런 것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냈다'고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원래 어두움에 있었을 때, 사망 아래 있었을 때 우리가 가진 것이 있었고 쓸 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시켜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고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내시고, 불러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경건에 속한 것, 영원에 속한 것, 생명에 속한 것을 이제 새로 주셨는데도 그것을 얻은 다음에 이런 것들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기를 쓰고 나를 꺼내셨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계속 '은사를 봐라 이게 원래부터 우리 속에 있었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잠재력이라고 오해를 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초반부터 못을 박는 것입니다. "너희가 왜 성도인 줄 아느냐? 너희에게 어떤 조건이 있고 자격이 있고 실력이 있고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너희를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이 너희를 자기의 소유로 삼았기 때문에 성도요, 너희에게 있는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허락했기 때문에 가지게 된 재능이니라. 너희는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보다 하나도 더 나은 조건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니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초두부터 고린도교회에 그리고 우리에게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그가 쓸모 없는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요, 그가 구원을 얻은 후에 이 생명과 영원과 그리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새로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가 어떤 조건이 있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에 의해서 선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떤 좌절과 실패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에는 언제나 무엇으로 돌아가서 자기를 다시 분발시켜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원래 가진 것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들어왔다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됩니다. 원래가 빈손 들고 하나님 앞에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밑질 것도 없고 실패할 것도 없고 빼앗길 것도 없는 자리로부터 온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내가 놓쳐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가져야 되는 맨 밑바닥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가 있어야만 그 다음에 신자의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성화입니까? 원래 내 속에 좋은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불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불러서 내 안에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 거룩한 것들, 영원한 것들, 생명에 관한 것들, 진리에 관한 것들, 신의 성품에 속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를 언제나 출생으로 비교합니다. 출생, 거듭난다, 중생했다 그럽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아이로 출생을 합니다. 그래서 자라나야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죠? 자기 것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해서 그가 이제부터 자라나야 되는 모든 영광에 속한 것, 생명에 속한 것, 진리에 속한 것을 우리의 것이 아닌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낯설고 서투르며 어리석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무릎이 깨지지 않고 자랄 수 없는 것같이, 싸우지 않고 클 수 없는 것 같이, 병들지 않고 클 수 없는 것 같이 우리는 실패하고 실수하면서 크는 법입니다.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되느냐 하면 모든 신자는 그가 가진 영혼과 진리와 생명에 속한 것을 키워 나가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매어달려서 완성품을 결과로 받아내는 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신앙이 이렇게 기도 많이 해서 뚝 떨어지는 식으로 되는 것은 성경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굵은 신앙의 핵심되는 내용과 맞지 않는 사상입니다. 신자는 예외 없이 누구나 그가 예수를 믿는 것이 시작에 불과한 어린아이로부터 장성한 자리로 성장을 책임져야 됩니다. 이게 신자의 이중 구조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모든 교만은 자라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은사들로 인하여 저들이 원래 갖고 있었던 것을 꽃피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말미암는 싸움들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짜리가 국민학교 2학년짜리를 괄시할 수 없습니다. 중학교 2학년과 국민학교 2학년이 같은 시험을 놓고 보면 중학교 2학년이 낫겠지만, 중학교 2학년짜리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어땠느냐를 가지고 국민학교 2학년 하고 비교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자라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면 사람들은 국민학교 2학년짜리의 실수를 그의 결정적 실수로 단정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지금 유치원을 지나가고 있느냐, 국민학교를 지나가고 있느냐 중학교를 지나가고 있느냐를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다양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 속에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대학원생인데 어느 부분에서는 유치원생과 같은 복합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기도는 대학원생인데 말씀은 유치원생인 사람, 거꾸로일 수도 있습니다. 열심은 대학원생인데 말씀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라면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는데 실천을 하라면 전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내라면 잘 내는데 사람을 용서하라면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분야가 다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어떤 하나의 일만을 보고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기능적인 어떤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인격을 가지고만 평가를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떤 일들을 처리하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두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는 언제나 누가 더 하나님 앞에 잘 쓰임 받느냐인데,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은 언제나 감추어지는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묵묵히 감추어지느냐? 누가 부름 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나를 쓸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중에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 있어서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겨 아무것도 아닌 나를 불러서 그가 나에게 무엇을 채웠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내가 나타날수록 손해라는 것을 알아 본인을 감추고 주께서 나타나도록 자신을 씀으로써 우리는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대단한 존재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모두 여기에 말려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말려들어 있습니다. 이걸 깨 버려야 됩니다. 우리는 전혀 쓸모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이고 도적이고 우리는 정말 아무 가치도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해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을 때 비로소 제로(0)입니다. 마이너스에서 제로입니다. 이제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을 넣어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이제부터 우리에게 쓸 만한 것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갈고 닦고 키워 나가야 됩니다. 우리에게 예전에 없던 것, 나한테 있었던 것이 아닌 것,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고린도교회를 꾸짖을 때 사도 바울이 했던 말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인가로 쓰이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원래부터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 받으신 것 있습니까? 쓸모 없는 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혼자 하셔도 되는 것을 나를 통해서 하심으로써 나를 가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이요, 내 편을 드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신 마음이십니다. 그것을 감사할 줄 모르면 금방 우리는 눈이 돌아갑니다. "넌 왜 그래, 넌 왜 그렇게 해." 심판, 공격, 잘난 척밖에 나오는게 없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들었던 시험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마다 교인들이 늘 넘어지는 시험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신자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들어온 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옛날에는 갖고 있었던 것을 세상을 위해 쓰고 나를 위해서 썼지만 이제는 이것을 주를 위해 쓴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갖고 온 것 중에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다 쓸모 없는 것들 뿐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내게 있는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까? 없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쓸모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알게 된 것, 주 앞에 쓰임 받는 것, 여러분이 기쁠 때 감사할 곳이 있고 위기에 처했을 때 매어 달릴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요, 여러분이 그걸 가질 수 없었던 존재에서부터 그 모든 것을 갖게 된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을 감사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뻔뻔스런 악당인 줄 아십니까? 이미 확보된 모든 것들을 감사하기는 커녕, 왜 나에게는 저 사람에게 준 것을 안 주었습니까? 왜 저건 안 주었습니까? 왜 저건 안 줍니까? 이것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성도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주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부여받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키워가야 되는 존재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키워 가시고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우리와 함께 동역하시며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헛소리들입니다. 감사할 줄 아셔야 됩니다. 모자란 사람들을 보시거든 기다리실 줄 알아야 됩니다. '나도 저 사람과 방불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별로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 우린 지금 어리석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는 일과 쓰임받는 일에 혹 우리가 미련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원한 나라와 오는 모든 세상의 영광된 것을 기업으로 이을 자들입니다. 그 감격이 있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로서의 부족한 자신을 애통해 하는 신자된 자각, 분발, 안타까움이 있으셔야 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부르신 상급의 풍성하심에 대한 그 엄청난 기대와 주리고 목마른 아우성이 있어야 됩니다. 경건한 갈증이 있으셔야 됩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이 기본적인 자세를 놓치면 우리는 금방 교만해지고 불평하게 되고 싸우고 하나님은 없어지고 사람끼리 서로 칼싸움하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위치를 깨달으면 감사할 것뿐이요, 기뻐할 것뿐이요,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모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하는 이런 것들이 사실인 것을 여러분이 금방 알게 되고 누리게 되고 권면하게 됩니다. 신자된 것은 세상이 주는 어떤 것으로도 흉내낼 수 없고 뺏을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자랑과 특권과 감격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의 신앙의 어느 곳에선가 병이 든 줄로 아셔야 됩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여러분의 신자 된 특권, 감사거리, 기대, 마땅히 찬송해야 되는 여러분의 위치를 확보해 보시고 깨우쳐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 특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이해를 위한 질문> 1. 성도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2.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성도'를 꼭 써야했던 이유는? 3. 신자는 신앙 생활에서의 실수와 실패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자에게 적극적으로 어떤 역할을 합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 신자의 이중 구조를 배움으로 나에게 어떤 위로가 있습니까?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번호 등록자 등록일 줄수 조회 제 목----- -------- -------- ---- ---- --------------------------------------------- 50 YURI007 96/11/19 237 3 제자훈련 2권2과 성도의 자기성찰-박영선 목사 49 YURI007 96/11/19 210 2 제자훈련 2권 1과 성도로 부르심-박영선 목사 48 CYH2 96/11/18 552 14 여름수양회토크쇼(박영선목사님) 47 YURI007 96/11/16 180 9 이 교재에서 말하는 제자훈련 - 박영선 목사 46 YURI007 96/11/16 138 10 부록 1 경건의 시간에 대하여 - 박영선 목사 45 YURI007 96/11/16 299 7 제자훈련 13과 분별과 지혜 - 박영선 목사 44 YURI007 96/11/16 234 7 제자훈련 12과 제자훈련과 새사람 - 박영선 목 43 YURI007 96/11/16 291 6 ]제자훈련 11과 제자훈련의 실제 - 박영선 목 42 YURI007 96/11/16 253 6 제자훈련 10과 제자된 자의 원리(2):생명-박영 41 YURI007 96/11/16 280 6 제자훈련 9과 제자된 자의 원리(1):진리-박영선 40 YURI007 96/11/16 248 6 제자훈련 8과 제자훈련과 기도 - 박영선 목사 39 YURI007 96/11/16 276 6 제자훈련 7가 제자훈련과 성경 - 박영선 목사 38 YURI007 96/11/14 247 14 제자훈련 6과 제자의 믿음-박영선 목사 37 YURI007 96/11/14 238 8 제자훈련 5과 제자의 정체성-박영선 목사 36 YURI007 96/11/12 250 10 제자훈련 4과 제자됨과 사랑(2) - 박영선 목사 35 YURI007 96/11/12 238 8 제자훈련 3과 제자됨과 사랑(1) - 박영선 목사 34 YURI007 96/11/12 187 11 제자훈련 2과 제자의 탄생 - 박영선 목사 33 YURI007 96/11/12 238 13 제자훈련1권1과 제자란 누구인가?-박영선 목사 32 YURI007 96/11/07 32 23 제자훈련 서문 31 PJH2886 96/11/01 147 26 박영선목사 저서목록 30 PJH2886 96/11/01 221 19 봉사론-박영선 목사 29 PJH2886 96/11/01 415 27 주일성수의 원리-박영선 목사 28 PJH2886 96/11/01 446 27 신자의 레저생활-박영선목사 27 PJH2886 96/11/01 86 7 살아있는 공동체로서의 하나님나라2-김명국목사 26 PJH2886 96/10/27 176 13 살아있는 공동체로서의 하나님나라3-김명국목사 읽기(번호) 쓰기(W) 다음(엔터) 앞(B) 연속출력(NS) 기타(Z) > P번호:51/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9 13:18 길이:193줄제 목 : 제자훈련 2권3과 종말론적 삶(1) 유무상통-박영선 목사 3과 종말론적 삶(1) - 유무상통 본문/행 2:43-47 <생각을 위한 질문> * 교회에서 빈부의 문제로 시험을 당하시거나 어려움을 스스로 느꼈던 경험이 있습니까? <본문이해> 우리가 본 본문 내용에는 초대교회의 특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와 그로 인한 삼천 명의 회개, 그리고 시작된 초대교회 모습의 특징을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 교회의 처음 설립의 특징, 첫 교회의 특징을 유무상통과 빈자구제 쪽으로 몰고 갔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성을 왜 하필이면 이 물질문제로 묘사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의 신앙이 종말론적이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합시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같이 교회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내세 신앙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 믿어서 천국을 가겠다고 하는, 말하자면 복을 원하고 나중 상급을 원하는 차원에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곳으로부터 어느 곳인가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방향성을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여기서 가치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곳을 향하여 가고 있고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이라는 말은 끝이라는 뜻인데 이 세상의 가치와 체계가 끝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 이 세상에서 즐기고 있는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영원한 것, 진정한 가치, 진리, 생명을 준비하며 그곳을 목표하고 있는 자이며 그곳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과 그 목표를 향하여 지금 어떻게 달려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증거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않고 바로 이 기록들 다음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만 인하여 삼천 명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신앙인들의 자세와 삶의 모습과 원리와 목표로도 매일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셀 수 없게 일어나는 것이 교회가 갖는 성격이고 원리이며 분위기이고 증거해야 되는 것들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선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선교적이라는 것은 나가서 강제적으로 한 영혼을 불러옴으로써 선교적이라고 하는 말 이상으로 우리의 삶, 이 세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오는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는 것으로 우리의 목표와 원리로 삼고 그것을 훈련하는 삶입니다. 또한 그것으로 이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기에 우리 이웃 사람들이 이를 보고 예수를 믿고 진리에로 돌아오는 결실이 된다는 의미에서 선교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되는 것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서슴치 않고 물질이라고 합니다. 물질을 서로 나누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느냐 하면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더 어떤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이 초대교회에서 물질을 교회가 갖는 종말론적인 성격, 선교적인 사명의 대표적인 핵심으로 꺼낼 수밖에 없느냐는 것을 오늘 우리가 추적해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을 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절) 성경이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을, 저들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내세를 추구하며 그 길로 가고 있는 모습으로 물질을 꺼낸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입니다. 왜 중요합니까? 돈 그 자체는 사실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인도에 갇혀 있으면 돈은 쓸모없습니다. 돈을 씹어 먹을 수도 없고 아픈 데 붙여서 낫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돈이 중요한 이유는 그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도 되고 첩도 여럿 데리고 사는 것이 오늘날 돈의 위력입니다. 그뿐 아니라 혹 어떤 곳에서는 장로도 사며 젊음도 삽니다. 실제 나이는 어쩔 수 없어도 돈으로 주름살을 제거하며 뭐든지 합니다. 사람들을 부릴 수 있으며 자존심을 마음껏 세울 수 있고 거들먹거릴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고 최고의 목표로 하고 있는 원리를 통칭하여 돈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자면 우리의 신앙은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 가기를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의 실력과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추구하며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합니다. 진리와 생명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사모하며 그것을 준비하는 자라는 표현을 지금 모두가 개인적인 세상의 욕심과 세상의 싸움에서 벗어난 것으로 증명해낸 것이 본문의 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성공인 것 같고 행복인 것 같습니다. 어느 틈에 교회는 만병통치약을 파는 이상한 곳으로 전락됐고 세상에서 잘 살게 해주는 주문과 부적을 만들어 주는 공장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이가 공부를 안해도 좋은 대학에 붙고 남편이 승승장구하고 아픈 병이 낫고 안되는 일이 없고 의사가 포기한 병도 기도하면 낫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하나님이 어떻게 온 천하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가를 증명해야 되고 그것을 우리에게 납득시켜야 될 때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된 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신앙인의 현실 삶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순교로 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어디 형통이라는 단어가 맞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놓고 있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물려 받을 사람으로서 훈련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에서의 빈부와 귀천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부자들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남들에게 겸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굽실거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조심할 것은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자란 부자라는 이름, 또 권세자는 권세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일반인의 욕과 비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까지도 책임입니다. 부자가 가져야 되는 책임입니다. 내 돈 갖고 내가 쓰는데 누가 뭐래? 안됩니다. 좋은 음식도 몰래 먹어야 됩니다. 부자는 좋은 차도 몰래 타야 되고 흙을 묻혀서 타고 다녀야 됩니다. 그것이 덕입니다. 뽐내기 위해서 해서는 안됩니다. 부자다 가난하다, 권세를 가졌다 천하다는 것은 결단코 영원한 나라에까지 지속되는 신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기 가장 좋은 방법과 환경과 길로 인도해서 얻어지는 결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신자가 가져야 되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거들먹거리는 부자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때 이렇게 욕하지 마십시오. '있는 것들 눈꼴셔서 못 보겠네.' 그러지 말고 '아직도 신앙이 어리구나' 이렇게 하십시오. 그것을 돈이나 권세로 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그 문제만이 아닙니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아직 신앙이 덜 됐구나' 하고 쓱 웃자구요. 돈 가진 사람이 눈꼴시게 굴면 웃자구요. 똑같이, 없는 자들에게는 이런 약점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능력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운이 없어서 이렇게 됐을 뿐인데 이렇게 나를 괄시하기요?'하는 열등감에 반발이 예민합니다. 가난한 자의 큰 약점은 누구를 보면 할퀸다는 사실입니다. 정당한 일을 보고도 할퀴고 가장 평범한 일에도 지나가지 못하고 꼭 한 번 긁고야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의 주변에는 친구가 잘 안 모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점심을 사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만나면 밤낮 씹기 때문에 안 모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난과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아직 신앙적으로 극복을 못하고 아우성을 치거든 '없는 것들은 저래!'라고 하지 말고 신앙이 연약하구나라고 하란 말입니다. 교회에는 있다 없다, 잘났다 못났다 하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있는 것을 나눠준 자나, 없어서 남의 것을 얻은 자나 잘났다 못났다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닌 사람들로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영원한 나라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으로서의 훈련, 그렇게 부름받은 일에 대한 감사로 꽉 차고 그 훈련을 위해서만 모이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일로 인해서 이것이 흔들려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갖는 기준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도 각자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는 귀한 분도 있고 천한 분도 있고 부한 분 또는 빈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기준이고 사회적인 분별입니다. 저희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한 형제이고 한 자매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있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고 있고 그 안에 부름 받은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만 평가받습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여러분의 점수를 쌓아 나가십시오. 늘 드는 예로, 입학시험 문제지에 얼마나 고급 연필로 답을 쓰느냐 하는 것이 전혀 채점에 고려되지 않습니다. 누가 정답을 썼느냐입니다. 여기 여러분이 어떤 지위와 어떤 명성과 어떤 옷을 입고 오느냐는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누가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진심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마음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주께서 가신 길을 뒤쫓으며 힘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채찍질하고 경건을 연습하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 주님의 칭찬을 얻기 위하여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는가 밖에는 주님에게 평가받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 오셔서 신앙적인 문제로 대접 못 받으시거든 안타까워 하셔야 됩니다. 교회 갔더니 아무도 아는 척을 안해, 교회에 안가! 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여기 오셔서는 신앙적인 문제로 대접받지 못하고, 신앙적인 문제로 여러분이 모든 사람 속에 숨겨진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인하여 안타까워하셔야 됩니다. 사회에서는 실패하셔도 여기서는 실패하시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여러분은 교회가 여러분의 이익을 위하여, 영원한 나라에서의 상급을 위하여 제안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힘을 다하여 참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영적 실력을 늘리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더 강건케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약속들과 영원한 소망들을 더 많이 채우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방법을 배우셔야 되고 물어보셔야 됩니다. 기껏 불러다가 목사 밥 사주는 것으로 끝내면 안됩니다. 물론 사주면 제가 기분 나빠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밥 한 번 나눠 먹은 것에 불과하지, 저와 친하고 저와 깊이 악수하는 것이 여러분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적 실력을 늘리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조명하십시오. 그 부르심을 향하여 여러분을 점검하시고, 영적인 사람으로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것들로 여러분의 삶의 원리와 기준으로 삼아 끊임없이 노력하기로 결심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를 그런 교회로 만들기로 하고 여러분의 신앙도 그런 신앙으로 기준 삼아 쓸데없는 싸움은 하지 말기로 합시다. 너무나 손해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영적인 분위기를 풍기십시오. 영적인 도움을 서로 얻으십시오. 영적인 동지가 되시며 영적인 문제에 경쟁자가 되시고 영적인 문제에서 주고 받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 주십시오. 그것이 교회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고 교회에 와서 여러분이 얻어야 할 마땅한 것들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내세 신앙(종말론적 신앙)이 가지는 적극적인 정의는 무엇입니까? 2. 내세 신앙, 즉 종말론적 신앙이 초대교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교인들에게 나타났습니까? 3.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까? 4. 빈부와 귀천에 대하여 새로운 안목을 신앙인으로 가졌을 때 모습은 교회 안에서 각각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부한 경우: 가난한 경우: <토의를 위한 질문> * 초대교회의 물질을 유무상통했던 것과 같은 모습을 교회 안에서나 우리 주위에서 보았다면 서로 말씀해 봅시다. 읽기(번호) 쓰기(W) 목록열람(DIR,L,LL)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등록자검색(FROM) 제목검색(SUBJ) 답장(R) 삭제(DEL) 앞페이지(B) 기타(Z)선택> P 번호:52/52 등록자:YURI007 등록일시:96/11/19 13:20 길이:200줄제 목 : 제자훈련 2권4과 종말론적 삶(2) 기쁨-박영선 목사 4과 종말론적 삶(2) - 기쁨 본문/행 2:43-47 <생각을 위한 질문> * 예수를 믿어 기쁘다는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어떤 종류의 기쁨인지 서로 말해 보십시오. <본문이해>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나서 그 교회가 가졌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냐고 할 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무상통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추적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추적하는 일, 그것이 일차적인 특징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더 살펴보려고 하는 특징은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신앙과 대조하면서 점검해봐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삼천명이 회개를 하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나누어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주를 찬양하고 전도하고 칭찬을 받고 합니다. 분명히 초대교회를 형성한 신자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기쁨, 감격 그리고 생명감, 활동력이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어떤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기쁘냐는 것입니다. 기쁩니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상식적인 기쁨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부분이 오해되면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슬픈 일이 있을 수 없고 절망이 있을 수 없고 아플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좀먹는, 기독교 진리를 방해하는 모든 이단들의 가르침은 그 기쁨과 감격을 세상적인 성취로 슬쩍 바꿔 놓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얘기하는 기쁨이나 감격은 세상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쁨이 세상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십시다. 사도들이 다시 잡혀서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는 공갈과 협박과 그리고 매를 맞고 풀려나는 장면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0-42절) 그들이 지금 매 맞고 협박과 공갈 속에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 모이든 공개적으로 모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전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과 아픔과 핍박과 환난을 저들이 기쁨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어떤 기쁨입니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은 것을 기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졌던 감격과 기쁨과 힘은 세상적인 일에서의 형통함과 성취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사도행전이 스스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과 감격, 그들이 증언하는 일에 대하여 그 사회와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찬성하지 않습니다. 반대하며 위협하며 협박하며 그들을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신자의 기쁨에 관한 이해입니다. 신자가 갖는 기쁨은 결단코 세상적 차원에서의 난관이 없어지거나 환경이 개선되거나 누구나 우리를 환영하는 것으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아닙니다. 그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신앙생활이 고달플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소개하는 바울의 기쁨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사도 바울의 기쁨도 이것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하면 내게 더 많이 머물며 나로 인하여 주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아는 것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주를 위한 열심과 주를 위한 봉사 정신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건강을 구하는 것은 주의 복음을 더 많이 전하기 위하여, 주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답하시기를 '네가 약할 때 오히려 내가 너와 더 많이 함께 할 수 있고 너를 통하여 나를 더 많이 나타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기뻐합니다. '내가 약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더 많이 하시사 내가 모자라고 연약한 것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며 오히려 쓸 것이 있다'하는 이것이 그의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면 구체적으로 한 사건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2-18절). 이 기쁨의 근거를 잘 보십시오. 지금 사도 바울은 주를 전하는 일 때문에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좋아하는 것은 이 일로 인하여 감옥에 있는 모든 간수들, 지키고 있는 군사들이 자기의 잡힘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무슨 문제가 생겼느냐 하면 사도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의 일에 너무 많이 쓰이고 사람들한테 칭찬 받는 것이 배가 아파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잡힌 것입니다. 얼마나 핑계거리가 좋습니까? '하나님이 만일 그의 일을 실제로 맡길 사람을 골랐다면 왜 일하지 못하게 잡아 가두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의 일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했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갇히자 더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봐라, 실제로 하나님이 인도할 종은 우리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시니까 그를 일 못하도록 감옥에 가둔 것이다. 우리가 진짜니까 우리에게 자유도 주고 건강도 주셔서 마음껏 주를 전하게 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또 사도 바울은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갇힘으로 시기하는 사람들이 날뛰니까 '그렇지 않다. 우리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라도 마저 하자'고 해서 나서서 했습니다. 그래서 두 파로 나뉘어서 주의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집니다. '아무러면 어떠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도 있는 시험거리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봉사하다가 제일 크게 당하는 일이 뭡니까?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한 마땅한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의 봉사가 어려운 점은 언제나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한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람이 뮈라고 그러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느냐, 그가 하시고 싶은 일을 이루셨느냐로 기뻐해야 됩니다. 이것을 조금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기독교인의 신앙, 그리고 기독교인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모든 일이 그리스도를 위하려는 관심과 열심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기쁨, 기독교인의 신앙, 기독교인의 생활, 인생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으로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일하려는 관심, 그를 향한 열심으로만 지배받고 제어되며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나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기를 기뻐하시는가. 이것이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고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느냐, 또 하나님이 그가 하시고 싶어하는 일을 실제로 하고 계시는가에만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만일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의 기쁨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곧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하라고 한 일을 했는데 돌아온 것이 뭡니까? 신앙을 지키고 정직하고 양심대로 살아온 것에 대해 받을 보답이 뭡니까?'라고 묻기 시작하면 틀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살이를 하면서 가장 크게 당하는 신앙적인 좌절이 뭡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는 살 수가 없다고 느낄 때가 아닙니까? 세상에서 정확하게 양심대로 살아서 이익을 본 것이 무엇입니까? 없지요? 이익 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정당하게 살라는 것을 먼저 가르쳐야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의 자녀가 이 세상의 자녀보다 더 성공한다는 보장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문득 이런 시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주님, 제 자식은 주일에 공부시키지 않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컨닝하면 안되다고 했습니다. 공부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신앙적으로 살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는데 왜 아프게 하십니까? 왜 학교에 떨어지게 하십니까?" 그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과 그의 생명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에 우리를 좋은 모습으로도 부르시고 나쁜 모습으로도 부른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얘기는 뒤에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빌립보서 1장을 봅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9-21절)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이유, 지금 이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의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언행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는 일이 있다는 보람과 책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신자가 살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이웃에게도 역사와 시대 앞에서도 우리가 하려는 일은 나와 내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어야 됩니다. '내가 살아서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로 부름을 받는다면 살 것이요 나를 죽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신다면 죽음을 불사하겠나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기쁨이요 소원이어야 됩니다. 초대교회 모든 신자들이 이런 시각과 원리와 목표에서 그들의 기쁨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삶의 생명력을 활동력으로 확신으로 담대함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인하여 고난과 오해와 조롱을 받는 자리에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주께서 친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오해요 외면이요 경멸이요 핍박이요 환난인 것을 몸소 보이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이를 갈거나 창을 겨누기 위하여 모이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우리도 예전에는 그 무리 속에 있었던 것을 인정하고 우리를 불러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에게 알게 하신 영원한 소망과 생명을 저들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를 증언하기 위하여,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람같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소망을 더욱 든든히 하고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통하여 그의 일을 이루시고 그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사실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내가 약한 것으로 실망하지 않는 것은 약한 것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쓰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그 좌절이 나의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시고 좌절시키사 거기서 영원한 것을 증명하실 일이 있어 부른 부름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요 연약함과 무지함을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싸움에서 질 이유가 없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적인 것을 목표로 하여 싸우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준비하며 증거하며 그것을 위하여 주 앞에 쓰인 바 되는 것을 인하여 오늘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 늘 순종하여 그가 나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일 때문에 기뻐하며 자랑하며 힘내며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께서 모으신 백성들이 모여 신앙을 고백하며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신앙고백 속에 이 고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지금 분명히 이 목표를 새롭게 해야 됩니다. 우리는 영원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 것과 너무나 구별되는 것입니다. 타협할 수 없습니다. 양 다리를 걸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분명한 두 가지 특징입니다. 영원한 것, 진리되는 것, 그것을 깨우치고 바라보고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세상의 위협과 유혹에 타협하지 않았던 그들의 선명한 노선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초대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진 자들의 기쁨, 그것이 오늘날 우리 모든 신자들의 기쁨이어야 됩니다. 그것 없는 다른 것의 기쁨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틀림없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을 기쁘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예수를 믿는 자의 기쁨이 오해될 경우 어떤 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까? 2. 바울이 감옥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다음 각 각의 성경본문에서 사도들이 무엇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고후 12:7-10;행전 5:40-42) 4.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의 유일한 이유이면서 또한 신자들의 마땅한 기쁨이며 소원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 사도들의 기쁨과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기쁨이 차이점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이유를 말해보십시오. |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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