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징조가 되리라" 에스겔 4장 1-17절 석기현 목사 요즘의 주일학교에서는 신앙교육이나 성경 이야기를 가르치기 위하여 정말 다양한 교재와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림책 따위는 이제는 특별한 교재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온갖 종류의 '만들기'에서부터 컴퓨터를 이용한 빔프로젝터에다 때로는 아예 '뮤지컬' 공연 따위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청각교육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시절에는 물론 이런 것들은 전혀 없었고, 교재라고는 일 년 내내 그야말로 달랑 '공과책'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주일학교의 성경공부 시간이라는 것은 오늘날에 비해서는 어린이들에게 훨씬 더 따분하고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그냥 귀로만 듣는 것보다는 뭔가를 눈으로 보면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쉽게 습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그런 '특별 시청각 교육'을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로 하여금 어떤 '상징적 행위'를 백성들 앞에 보여 줌으로써 그 행위가 암시하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 역시 그런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던 백성들에게 '예언'해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런 일을 시키신 이유는 그가 선포해야 할 예언이 백성들이 그냥 간단하게 받아들이기에 아주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당장 '거부반응'과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미리 포기하실 하나님은 물론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행위 예언'을 통해서 그냥 말로만 선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백성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려고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밤 전국주일학교교사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 역시 비록 어린이들의 마음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그럴수록 더욱 분명하고 강하게 가르쳐야만 할 진리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주교교사들은 인류역사의 끝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최후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1너 인자야 박석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그 성읍을 에워싸되 운제를 세우고 토둔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3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박석"이라고 하는 것은 '흙벽돌'이나 '타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에는 건축 재료로서뿐 아니라 글을 새겨 넣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그런 박석 위에 장차 "예루살렘" 성읍이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포위당할 때의 상태를 자세히 나타내는 지도를 그리게 하셨습니다. "운제"란 성을 공격할 때에 쓰는 '높은 사다리' 같은 것이며, "토둔"이란 방어하고 있는 성벽과 같은 높이로 쌓아 올리는 '토성'을 가리키며, "공성퇴"란 성벽을 무너뜨리는 특수한 무기를 뜻합니다. "전철"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음식을 만들 때 쓰는 철판 같은 것인데, 이것을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고 한 것은 바벨론 군대의 포위가 그처럼 물 샐 틈 없을 정도로 강력할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런 지도를 그리게 하신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징조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그런 상징적인 행동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의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예언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1장을 설교할 때에 말씀 드렸듯이, 예루살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을 3차에 걸쳐서 받았습니다. 에스겔은 제2차 침략 때에 포로로 잡혀 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예루살렘은 완전히 망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이미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그 때문에 아직도 자기 죄를 먼저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슨 요행수라도 터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부질없는 희망이었습니다. 이미 유다의 죄는 돌이킬 수 없도록 극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마지막 일격을 가할 시간이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에스겔 선지자가 '박석에 그려진 예루살렘 성의 지도'를 유다 백성들의 눈에 보여 주면서 뚜렷이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제일 첫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인류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대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적으로만 생각해 보자면 선뜻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어른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순진하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에게 온 세상이 결국은 다 멸망하게 되는 때가 오고 말 것이라고 말해 주는 것은 '너무 심한' 일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후의 대심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역사의 벽보' 가운데 가장 중대한 사건이 아닙니까? 신구약 성경 전체는 바로 이 마지막 한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을 그야말로 '지도처럼 생생하게 그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정보는 비단 어른에게뿐 아니라 어린이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실, 반드시 알아야만 할 필수적 정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시공세계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마지막 종말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이 어린이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 날이 오면 이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하여 저 백보좌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은, 그 아이들에게 부활절과 성탄절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교육인 것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의 눈에 이 지구 위의 땅과 바다가 그대로 영원히 있을 것처럼 보이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이 '종이축처럼 말리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내리는 것'과 같이 멸망하게 될 마지막 심판의 한 날이 반드시 닥쳐오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어린이들에게 '박석에 그림을 그려서라도' 똑똑히 알려 주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교교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의 죄에 대하여 엄중한 선고를 내리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야만 합니다. 4절부터 8절의 말씀에 "4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 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5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6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일일이 일년이니라 7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팔을 벗어 메고 예언하라 8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맟도록 몸을 이리저리 돌리지 못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두 번째의 상징적 행동'을 통한 예언을 지시하셨습니다. 우선 "좌편으로 누워"라는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 땅의 한 가운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왼쪽으로 눕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좌편에는 바로 '북조 이스라엘'이 위치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 4절에서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다'라는 말은 북조 이스라엘의 죄악을 에스겔 선지자가 떠맡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어떤 대가를 받게 될 것인지를 에스겔 선지자가 그런 상징적인 행위로써 선포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라는 말씀은 바로 그 북조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날수를 에스겔 선지자가 '좌편으로 누워 있는 날수'를 통하여 알려 주시겠다는 뜻합니다. 그리고 그 날수는 "곧 삼백구십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6절 하반절에 보면 "일일이 일년이니라"고 했으니, 이 '390일'은 바로 '390년'을 가리키는데 이 햇수는 곧 북조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에 바벨론에서 해방을 받아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기간과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 수가 차거든" 즉 그가 390일 동안 '좌편으로 누워서' 북조 이스라엘이 죄값으로 당할 형벌의 날을 상징적으로 예언한 날이 다 지나고 나면,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좌편이 북조 이스라엘이었으니까 우편은 자연히 '남조 유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가 그처럼 '우편으로 누워' 있는 날은 하나님께서 "사십 일"로 정하셨는데, 이것 역시 '일일이 일년'인 까닭에 '40년'이 되며 이 기간은 바로 남조 유다가 최종적으로 완전히 멸망한 해로부터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하여 해방을 받게 되는 기간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좌편으로 누워 자는' 날과 '우편으로 누워 자는 날'을 통하여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가 각각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받게 될 징벌의 날들을 정확하게 예언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팔을 벗어 메고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팔을 벗어 메다'라는 말은 '팔소매를 걷어붙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당할 일을 예언하면서 무슨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당하는 일처럼 생각하면서 아주 '적극적'으로 선포해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몸을 이리저리 돌리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좌편으로 누워 있는 390일'과 '우편으로 누워 있는 40일' 동안 다른 방향으로 눕지 못하도록 줄로 묶어 놓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꼭 문자적인 의미라고는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를 징벌하실 날수를 그만큼 '정확하게' 시행하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최후의 대심판'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또한 꼭 알려 주어야 할 것은 그 심판대에서는 각 사람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엄중한 판결이 내려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까닭에 죄에 대하여 결코 얼렁뚱땅 넘어가시는 법이 결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390년 동안 벌을 받게 하겠다.'고 선고를 내리시면 선지자의 몸을 '줄로 동여매어서라도' 그 날수를 한 해도 오차 없이 그대로 시행하실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어린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원래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원죄'의 본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또한 그 어린이들이 아무리 학교에서 모범생이고 부모에게 칭찬만 듣는 착한 자녀라 할지라도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본인만은 분명히 알고 있을 '자범죄'들을 지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대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는 '책들' 즉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그 책들에 의하여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 또한 똑똑히 일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어린이들이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는 그저 '모범 어린이'나 '착한 학생'이라는 소리만 듣고 있을지라도, 이 교회의 주일학교에서만큼은 우리 모두가 다, 목사나 교인이나, 교사 자신이나 주일학교 학생이나 할 것 없이 다 원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팔을 벗어 메고서' 적극적인 자세로 분명히 가르쳐 주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교교사들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실로 무서운 영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어린이들에게 꼭 가르쳐야 합니다. 9절 이하 17절에 기록하기를 "9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 네 모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에 먹되 10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 중씩 때를 따라 먹고 11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2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13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열국으로 쫓아 흩을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와 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14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15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 16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가 17떡과 물이 결핍하여 피차에 민답하여 하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세 번째 상징적 행위를 통한 예언을 명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철통같은 포위를 당하게 될 때에 그 성읍에 사는 백성들이 당하게 될 '극심한 식량난'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라고 했는데, 여기에 번역되어 있는 곡물들의 이름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들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그런 여러 종류의 곡물들을 다 '한 그릇에' 모아서 떡을 만들라고 한 것은 일단 예루살렘 성이 포위가 되고 나면 평상시에 먹던 '밀'뿐 아니라 보통 때에는 먹지 않던 그 어떤 종류의 곡물이라도 무조건 구할 수 있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 선지자는 그 떡의 양도 저울에 "달아서" 하루에 "이십 세겔 중씩"만 먹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이십 세겔'이란 오늘날의 무게 단위로 환산해 보면 약 230그램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서 정상적인 식사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히 적은 양이었습니다. 또한 "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마시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약 0.6리터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서 오늘날 정상적인 사람이 하루에 필요하다고 하는 2리터에 비하면 턱도 없이 모자라는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극심한 식량난이 장차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포위당하게 될 때에 필연적으로 겪게 될 고난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그 떡을 "인분 불을 피워" 굽도록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막 지방에서는 가축의 배설물을 말려서 연료로 사용하고 있지만, 인분을 연료로 사용해서 떡을 굽는다면 그 냄새부터가 얼마나 지독할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인분'은 신명기 23장 12절부터 14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부정한 것'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에스겔 선지자는 그런 '상징적 행위'만큼은 피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청을 들으시고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를 "열국으로 쫓아 흩어" 버리실 때에 그들이 바로 그런 "부정한 떡을 먹는"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되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에는 물론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사죄를 받지 못하는 한, 하나님께서 지금 에스겔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엄중히 경고하고 계시는 징벌은 반드시 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지금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전해 주시는 경고를 듣지 않으면,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는" 다시 말해서 '백성이 큰 근심에 싸인 채로 인분에 구운 떡을 먹고 두려워서 벌벌 떠는 가운데 조금밖에 안 되는 물을 홀짝거리며 마시게' 될 무서운 형벌을 피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가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게" 될 날, 곧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멸망하게 될' 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자신의 행위로써 몸소 보여 주시면서 예언했던 징벌도 실로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받고 영벌에 떨어지게 될 자들이 받을 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가 아니겠습니까? 지옥은 그냥 갇혀 있기만 하거나 죽어 없어지는 곳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의 세계'입니다. 그 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하는' 즉 '소금에 절여지듯이 불에 절여지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명백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처럼 뜨거운 불에 죽지는 않고 고통만 당하고 있으니 그곳은 그야말로 '물 한 방울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주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곳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극히 짧은 시간의 휴식도 결코 있을 수 없는 곳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하여 실로 생생하게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만은 '멸망치 않고' 즉 그런 무서운 고통의 영벌을 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일학교 교사들이 예수님께서 친히 이처럼 명약관하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똑똑하게 말씀해 주신 '지옥의 영벌'을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우리가 이 '구원의 복음'은 전해 주지 않고서 다른 그 어떤 '더 좋은 말'로써 어린이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벌 지옥에 가게 되어요.'라는 진리를 쏙 빼 놓고 다른 그 어떤 '유익한 교재'를 가지고 어린이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오늘날 절대다수의 주일학교에서 '천당'은 가르치면서도 '지옥'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영생'은 입에 발린 듯이 가르쳐 주면서도 '영벌'은 입에 담기도 꺼려하는 가운데서도, 이 에스겔 선지자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는 날' 곧 '지옥에서 영벌의 고통을 받게 되는 날'을 당하게 되고야 말 것을 자신부터 진심으로 두려워하면서 학생들에게 똑바로 가르쳐 주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교교사 여러분, 에스겔 선지자는 '박석'에 예루살렘 성이 포위 공격을 당하는 지도를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390일과 40일 동안 왼쪽과 오른쪽으로만 누워서 자고, 더구나 그 기간 동안 '쇠똥'으로 불을 피워 구운 '잡곡떡'을 먹어야만 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소위 '행위예술가'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특이한 행위를 통하여 무언가 예술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에스겔 선지자의 '행위 예언'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아주 '강력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역시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심령에 자극이 되고 그들의 인격에 인이 찍힐 정도로 강하고 명백하게 이런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쓴 소리'라는 것은 남에게 해 주기 참 어려운 말입니다. 더욱이 마냥 순진하게만 보이는 어린이에게 하기에는 더욱 망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있을 '종말의 대심판, 그 심판대에서 죄인에게 내려질 무서운 선고, 그처럼 영벌의 선고를 받은 자가 영원토록 당하게 될 지옥의 고통' – 이런 사실을 두고서도 '어린이에게 가르치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교사가 혹 있습니까? 교사 본인은 물론 진리라고 믿고 있기는 하지만, 어른들에게라면 당연히 해 주어야 할 말이라고 알고 있기는 하지만, 어린이에게는 '아직 시기상조의 교육'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세상의 유치원에서라면 당연히 그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인간사회의 초등학교 교사라면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교회 주일학교의 교사'이며, 그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몽학선생'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책임 맡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비'와 같은 스승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오직 '성경이 선포하는 그대로' 어린이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조차 이런 사실을 가르쳐 주기를 꺼려한다면 이 어린이들은 다른 어떤 학교에서도, 다른 어느 선생으로부터도 문자 그대로 그들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이 중차대한 예언을 끝내 듣지도 배우지도 못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심판, 죄, 지옥'이란 그 어린 영혼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진정한 영적 교사라면 '하나님 사랑, 예수 십자가 대속, 성령 충만'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똑바로 가르쳐야 할 '생명의 교훈'입니다. 모든 사람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반드시 당하게 될 그 '마지막에 될 일들에 관한 교훈'은 그 어린 심령들 속에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청지기'와 같은 교사라면 자신의 입술의 말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야말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교육의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그 어린이들의 '심비'에 새겨 주어야만 할 가장 소중한 '복음'이요 최고의 '진리'인 것입니다. 당신의 택자를 어린아이들로부터도 부르고 계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기록된 신구약 66권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복음의 말씀을 그 어린이들 앞에서 자신의 입술의 말과 행동의 모범과 가슴의 사랑을 총동원하여 '이것이 징조가 되리라'고 똑똑히 가르쳐 주는, 우리 교단 산하의 모든 주일학교 교사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