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에스겔 강해

여호와 삼마 (겔 48:30-35)

에반젤(복음) 2019. 7. 12. 15:53



여호와 삼마 (겔 48:30-35)

  

   박근혜 대통령께서 금년 1월 6일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씀하신 뒤 큰 반향이 일고 있습니다. 처음에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그리고 표현이 너무 거칠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말씀에 호응이 확산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근자에 우리 사회에 통일에 대한 바람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꼭 통일이 될 필요가 있는냐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었고, 심지어 ‘통일은 쪽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통일 비용이 막대하게 든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 뜻밖에 통일이 대박이라고 주장하시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습니다. 언론들이 앞을 다투어 통일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우리가 선진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어찌 보면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주변 강대국들마저도 대통령의 통일이 대박이라는 말씀에 공감을 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다시금 통일에 대한 희망이 움트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련의 상황변화를 지켜보면서 희망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고 또 희망이 어떻게 확산되어가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사람들이 희망을 띄웁니다. 이 희망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점점 확산됩니다. 그리고 어느 새 이 희망이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스겔서는 에스겔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본 것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에스겔이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본 때는 주전 593년에서 571년까지 약 22년 동안입니다. 이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한 마디로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때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입니다. 강대국 바벨론이 등장했고, 이 때 남왕국 유다는 우상숭배가 극심했고 사회가 도덕적으로도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여호와 유일신앙을 저버리고 바벨론 편에 설 것인지 애굽 편에 설 것인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어있었습니다.

   결국 바벨론이 쳐들어왔고 주전 586년에 나라가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백성들과 함께 눈물로 겪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땅에서 백성들과 함께 깊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선 유다와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잘못된 선민사상에 사로잡혀있던 사람들에게 누구라도 죄를 범하면 멸망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원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고 그 환상 속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특히 40장에서 48장에는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회복하실 것인지 그 멋지고 아름다운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겔은 나라가 멸망하고 남에 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저 깊은 절망의 나락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최남단에 ‘희망봉’이 있습니다. 그 이름의 유래는 주목해 볼 만합니다.

  포르투갈이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릴 때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탐사대를 보냈습니다. 1488년 바르톨르뮤 디아스가 인솔자가 되어 아프리카 최남단까지 왔습니다. 이곳에서 항로가 남에서 북으로 바뀌게 된 것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려했는데 그곳에서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이 그곳에 큰 돌기둥을 세우고 이름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되돌아가 갔습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왕명을 받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할 희망을 찾았다고 해서 이곳에 또 다른 큰 돌기둥을 세우고 이름을 ‘희망의 곶’이라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곳의 이름이 희망봉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는 절망의 자리였지만 누구는 바로 거기에서 희망을 봅니다. 모두가 절망하는 그 자리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에스겔이 그랬습니다. 모두가 절망하는 그 자리에서 그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래야 합니다.  모두가 절망하는 그 자리이지만 거기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본 희망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1. 성전 회복의 희망

   에스겔이 본 희망의 환상은 40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신 것은 장차 성전이 회복될 모습입니다. 40장에서부터 46장까지 장차 회복될 성전의 모습이 정말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47장을 보면 소위 ‘성전에서 흐르는 생명강의 척량 환상’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환상은 에스겔서에 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 소생 환상’과 함께 가장 강력한 희망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성전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 세밀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모습이 펼쳐집니다.

   겔 47: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 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아름답게 재건된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수는 흘러 성전을 두루 적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던 동쪽 문 아래로 스며 나와 강이 됩니다. 그 강이 흘러 척박한 황무지를 지나며 강변 좌우에 수많은 초목들이 왕성하게 자라게 하여 그곳에 풍성한 과실이 가득하게 합니다. 그 강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뛰어놉니다. 그리고 죽음의 바다였던 사해로 흘러들어 그 바다가 생명의 바다가 되는 이적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성전 회복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봐야 할 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희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일전에 미국의 명문대학인 프린스턴 대학교를 방문했던 일이 있습니다. 후배 목사님의 안내로 학교를 둘러보면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학교 도서관이 많은 부분 지하에 배치된 것입니다. 대체로 도서관은 습기가 많은 지하에 비치하는 것은 금하는 것은 관례입니다.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알고 보니 도서관을 교회당보다 높게 지을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도서관은 많은 책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큰 공간이 필요한데 교회당 보다 높이 지을 수는 없어서 지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학교를 세운 사람들의 정신이 무엇인지,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희망은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희망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가 든든히 자리 잡고 있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고 이어서 다른 모든 관계가 이어져 나가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전은 건물만 아름답게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그 성전 안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생명수가 성전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강이 되어 성전 밖으로 흘러 세상을 생명의 동산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성전의 회복이 단지 눈에 보이는 성전의 회복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전의 회복은 그 안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의 회복은 영적인 회복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유럽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이면 대부분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웅장한 교회당의 모습에 압도를 당합니다. 고딕 양식의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과 위압적이기까지 한 내부 인테리어에 가슴까지 흔드는 파이프 오르간의 강렬한 선율에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주일에 가보면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정작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극소수인 모습에 또 놀라게 됩니다. 그것도 연배가 높은 노인들 몇몇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생명수가 마르고 또 교회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오지를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점차 저 유럽교회를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과거처럼 영으로 진리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를 찾아보기 힘이 들어졌습니다. 기도원마다 가득차서 부르짖던 그 뜨거운 기도를 찾아보기 힘이 들어졌습니다. 부흥사경회 때마다 교회당에 가득모여 말씀을 듣던 그 모습도 찾아보기 힘이 들어졌습니다. 여름성경학교 때마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 찬송 부르고 말씀 공부하던 그 모습도 찾아보기 힘이 들어졌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생명수가 점점 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생명수가 제대로 흘러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교회에서 생명수가 가득하게 하고 교회로부터 생명수가 세상으로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도 교회가 희망입니다. 교회 아닌 그 어떤 곳에서도 생명수가 흘러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더욱 세상의 희망이 되도록 바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2. 여호와 삼마의 희망

   오늘 본문 35을 보면 “여호와 삼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속된 땅에 세우게 하신 성읍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여호와 삼마의 이름이 성전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성읍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성읍은 속된 땅에 세워진 성읍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는 것은 물론이고 속된 땅에 세워진 성읍에도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회복은 우선 성전의 회복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단순히 물질적 축복과 사업의 번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 삼마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세라 정공’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CEO로 섬기고 있는 분이 전희인 장로님입니다. 이 회사는 회사와 신앙공동체를 묶는 소위 ‘십자가 경영’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회사가 내세우는 비전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와 의가 구현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회사는 이런 비전을 이루기 위해 ‘일터교회’를 세웠습니다.

  일터교회는 월요일마다 전 직원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24개의 사랑의 공동체를 구성했습니다. 이 사랑의 공동체는 자기가 맡은 일 외의 삶의 문제, 신앙의 문제, 가정의 문제 등 갖가지 문제를 함께 나누면서 서로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면서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터교회의 사역을 통해 직원들이 영적으로 충만해 지게 되었고, 직원들은 다른 회사와 달리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도우면서 팀웤이 눈에 띠게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생산성이 탁월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회사가 일본과 합작한 회사인데 같은 그룹 내의 회사들 가운데 생산성이 가장 탁월해서 일본 교세라 그룹 안에서 모델 회사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호와 삼마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전이 아닌 성읍에도 계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회사에서 정말 주목할 것은 ‘일터 교회’입니다. 이것은 일터 안에 있는 실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터를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교회처럼 만들어보자고 세운 일터 내의 믿음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 곧 임마누엘을 교회에서만 체험하고 삽니다. 교회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면서 은혜 받고 힘과 능력을 얻고서 일터로 나아갑니다. 교회에서 받은바 은혜로 일터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일터에서 지치고 곤고해진 몸과 마음을 교회에서 치유 받고 회복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자리와 삶의 자리가 분리되어있습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의 자리요, 일터는 삶의 자리로 분리되어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치중하고, 일터에서는 돈 버는 일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보여 지는 신앙인의 얼굴과 일터에서 보여 지는 생활인의 얼굴입니다. 교회에서 쓰는 가면과 일터에서 쓰는 가면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비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루어가야 하는 사명입니다.

   롬 12:1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말씀하는 영적 예배는 성전에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터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여호와 삼마를 실천하라는 말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전이 아닌 성읍에서 여호와 삼마를 이루어 가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꿈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 여호와 삼마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가족들이 다 교회 다닌다고 여호와 삼마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서로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정 안에 임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터에서 여호와 삼마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일터가 온전히 복음화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곳에서 작으나마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누룩처럼 그 공동체가 커져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희망을 만들고 그리고 그 희망을 나누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만들고 나누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바로 성전 회복의 희망을 곧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만들고 나누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삼마의 희망을 만들고 나누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