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에스겔 강해

"인자야 일어서라" 에스겔 2장 1절 – 3장 4절

에반젤(복음) 2019. 7. 12. 15:48

                                            

"인자야 일어서라"
에스겔 2장 1절 – 3장 4절
석기현 목사

  얼마 전에 내셔널지오그래픽 텔레비전에서 'Inside Combat Rescue'(전투 구조작전 실황)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아주 감동 깊게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전투 중에 있는 미군이 부상당했을 때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에 날아가서 그들에게 응급처치를 실시한 후에 후방의 병원으로 후송하는 미공군 특수구조대의 임무 수행을 실제상황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임무는 최전선에 있는 병사들 못지않게 위험한 것으로서, 구조 헬리콥터를 타고 전투 현장을 비행하는 동안 탈레반의 로켓포나 기관총의 공격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착지하는 곳에 급조폭발물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구조대원들은 오직 아군 동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처럼 자기 목숨을 걸어 놓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무의 성격이 그런 것이니만큼 그 구조대원들은 1일 2교대로 각 12시간 근무 체제를 유지하면서 밤낮없이 항상 대기상태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부상자 발생 연락이 오기만 하면 즉시 군장을 챙겨 입으면서 구조 헬리콥터로 달려가서 출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부상자를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에스겔 선지자에게 바로 그처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시급한 출동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본문 1절과 2절에 "1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라고 기록된 사실입니다.

  여기의 "인자(人子)"란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사람의 아들'로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의 이름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지칭할 때에도 자주 사용되었고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시는 명칭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 신" 즉 성령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에스겔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를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파송하시는 명령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경향교회 전도운동의 제1단계인 '태신자 갖기 운동'을 올해에도 또다시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는 '인자야 일어서라'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파송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전도자는 자신이 곧 패역한 백성을 살릴 수 있는 '현장의 구조대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절부터 4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3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4a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패역한 백성"이라고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백성'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의 원래 히브리어 단어는 '이방인들'이라는 뜻이고, '패역한'이라는 말은 '신성모독자, 버려진 자, 더럽고 혐오스러운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 '패역한 백성'이란 원래 '하나님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그렇게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바로 그런 '불신앙의 이방인'처럼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타락하게 된 이유를 가리켜 "곧 나를 배반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열방 중에서 선택하셔서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 주신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배반'당하신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배반은 "내게 범죄하여"라는 사실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정착,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을 통한 최고최대의 축복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갚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실로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들이었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한 죄 때문에 지금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오게 되었는데, 그런 처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철면피'들이었습니다.
  그처럼 큰 벌을 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조금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고집쟁이'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라고 선포해 주려 하시는 이유였습니다.
  그처럼 '패역한 백성'인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필요한 자들이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아무 소망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바로 그 '패역한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던 현장 즉 '바벨론의 그발강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에스겔은 그들의 이웃으로, 같은 동네 주민으로 살고 있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부여해 주시기에 그야말로 최고의 적격자였던 것이었습니다.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그처럼 '패역한 백성'인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은 모두 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이며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요 하나님께 '범죄한 악인'일 뿐이며, 여기에는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나는 종교가 없어도 양심적으로 깨끗하게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얼굴이 뻔뻔한 교만'일 뿐이며, '나는 예수는 믿지 않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라고 자찬하는 것은 실상 '강퍅한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오직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전달되어야만 진정한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귀중한 구원의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은 과연 누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같이 살고 있는 신자입니다.
  불신가족이 있을 때 그들과 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신자 가족이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대언자'입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불신동료가 있을 때 그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치고 있는 신자 사원이야말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전달해 주어야 할 '제1차 책임자'입니다.
  같은 동의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그 곳에 같이 살고 있는 여러분이야말로 제일 먼저 찾아가서 '예수 십자가 구원'을 선포해 주어야 할 '현장의 구조대원'인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되었을 때 만약 여러분 외에는 주위에 다른 아무도 없다고 한다면 그 다친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고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친구가 혼자 집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냥 돌아서서 나오거나, 가까운 친척이 끼니를 잇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내 이웃에서, 내 직장에서, 같은 지붕 밑에 있는 내 집안에서 그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서도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패역한 백성'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박식한 교수가 아니라 오직 전도자일 뿐입니다.
  죽어가는 '죄인'에게 생명의 인공호흡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유능한 의사가 결코 아니라 오직 전도자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야말로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을 찾아야 할' 현장의 구조대원으로 파송되었음을 꼭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전도자는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무조건 나가는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4절 하반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에 "4b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6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7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말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무조건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라고 전파하라는 아주 강력한 명령을 내리고 계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만나게 될 대상은 결코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앞장들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차례 반복 강조하시듯이 바벨론 포로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본적으로 "패역한 족속"이며 그것도 "심히 패역한 자"들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에게 주어진 명령은 분명했습니다.
  그런 '패역한 백성'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 반응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전도해야 할 대상은 그처럼 '무반응적'이며 '비호의적'일 뿐 아니라 그에게 아예 '적대적'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역시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계셨으며, 그래서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독려하신 것입니다.
  이 '가시와 찔레'란 팔레스타인 지방의 자생식물로서 농작물의 성장을 방해하고 목초지를 망치고 가축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앞으로 당하게 될 방해와 고난을 가리키는 비유였습니다.
  '전갈'은 잘 아시다시피 작은 동물이지만 사람과 동물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주는 것입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그저 핍박 정도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게 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자신을 욕하는 그 어떤 말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위협까지도 겁내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해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이 사람이 과연 내 전도를 받을 것인가, 안 받을 것인가?'를 미리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리의 전도를 받든지 안 받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전도를 받을 것 같다.'로 예상되는 사람에게만 전도하든지, 혹은 '이 사람은 전도를 받을 것 같지 않다.'고 지레짐작하면서 아예 전도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것은 크나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하는 것'만이 100퍼센트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전도를 할 때 반드시 받게 될 핍박을 겁내서도 안 됩니다.
  우리 교회의 심방장들이 간증을 할 때면 전도를 하다가 온갖 방해와 핍박을 당한 체험들이 거의 필연적으로 나옵니다.
  또 인터넷 검색창에 들어가서 '경향교회'를 치면, '학교 앞 전도'를 나온 경향교회의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자기 아이한테는 사탕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글이 뜨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의 홈페이지가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무나 게시판에 글을 남길 수 있었던 때에는 어느 여전도사님을 향해 욕설에 가까운 말을 남긴 지역주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가시와 찔레'를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당하는 비난이나 방해는 선지와 사도들이 당했던 핍박이나 우리 순교자 선조들이 당했던 생명의 위협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심방장들과 구역장들은 '아파트 관리인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스스로를 독려해야 합니다.
  우리 주교교사들도 '불신자들로부터 욕을 먹는 것을 겁내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스스로 격려를 받고 용기를 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가면 있고 안 나가면 없다.' - 참 간단하면서도 멋있는 우리 교회의 전도 슬로건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가시와 찔레' 같은 이웃과 불신사회의 한가운데에 혼자 떨어져도, '전갈' 같은 핍박자가 내게 독침을 쏘아대더라도 오직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라고 더욱 담대하게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전도자는 성경 말씀만이 죄인에게 '유일한 기쁜 소식'인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8절 이하 10절에 기록하기를 "8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한 "두루마리 책"의 환상을 에스겔에게 보여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고 하셨는데 거기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당한 현실을 볼 때 당연히 선지자의 메시지는 애가와 애곡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으니 또한 재앙의 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그 두루마리가 "안팎에 글이 씌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두루마리는 양피지를 길게 이어 붙여서 만든 것으로 돌돌 말릴 때 안쪽의 한 면에만 글이 씌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스겔에게 환상을 통하여 내려 주시는 두루마리는 특이하게도 '안팎에', 즉 양면에 다 그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가득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책망과 징계의 메시지가 얼마나 방대했던지 두루마리 한쪽 면만 가지고서는 모자랄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3장 1절부터 4절에 기록하기를 "1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2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4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 두루마리를 에스겔에게 "먹이시고" 그의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게" 하시는 아주 희한한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이것도 환상 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이상한 행위를 에스겔 선지자에게 명하셨던 것입니까?
  사람이 어떤 음식물을 먹고 소화시키면 그것이 바로 활동의 에너지로 바뀌며 또한 신체의 일부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일단 에스겔 선지자부터 자신의 심령 속에 완전히 받아들여야만 그것이 곧 그의 사명 수행의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바로 그런 말씀의 충동에 사로잡혀야만 백성들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이 그런 자세로 그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었을 때에 그 맛이 그의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고 했습니다.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습니다.
  그런 문맥에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본다면 그 맛은 '아주 쓰고 독해야' 어울릴 것 같은데 오히려 '꿀같이 달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모두 다 달디 단, 귀하고 고마운 말씀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칭찬하시거나 구원의 약속을 내리시거나 축복하실 때의 말씀이 꿀처럼 달콤한 말씀이 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두려운 말씀, 슬픈 말씀, 무서운 말씀을 주실 때도 많이 있는데, 그럴 때조차도 그 말씀의 맛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런 거룩한 진노와 책망의 말씀도 결국 당신의 택자를 회복시키시고 구원을 얻도록 인도하시기 위하여 내리시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는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로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분부대로 그처럼 자기가 맛본 말씀을 그대로 백성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저주의 말씀은 백성들이 듣기 싫어할 것이니까 생략하고 듣기 좋은 말만 전해야겠다.'라는 따위의 계산을 할 필요가 전혀 없이, 오직 "내 말" 즉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전도자들은 바로 이 사실부터 스스로 체험해야만 합니다.
  비록 성경 말씀 중에 사람들이 꺼려하고 듣기 싫어하는 말씀들도 분명히 있지만, 그런 말씀 역시 죄인들에게는 오직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을 본인부터가 확신해야만 다른 사람 앞에서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위로의 말씀, 축복의 말씀, 인도와 보호의 말씀, 구원 약속의 말씀들을 은혜롭게 듣고 귀중하게 받아야 함은 물론이지만,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훈계하시고 책망하시고 경고하시는 말씀 역시 그에 조금도 못지않게 귀하고 은혜로운 말씀으로, 아니 '꿀처럼 달고 오묘한 말씀'으로 본인부터가 느끼고 맛볼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대로 패역한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라고 전하는 것을 '심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부터가 이미 성경에서 '애곡과 애가와 재앙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참된 전도자는 오직 성경이 선포하는 그대로 '천당 구원'뿐 아니라 '지옥 저주'도 똑같이 외쳐야 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세요."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만 내세에서 영벌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양서(良書)에 이런 '생명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 인간사회의 그 어떤 언론이나 방송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이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애곡과 애가와 재앙의 말'이 양쪽에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그처럼 달게 받아 먹고 전했던 에스겔 선지자와 같이, 신구약 66권에 기록되어 있는 이 복되고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Inside Combat Rescue'에 나오는 특수구조대원들은 그 힘들고도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보람과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구조하는 일도 그렇다면 하물며 영혼을 구원해 내는 사명은 더욱 뿌듯하고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인자야 일어서라'고 명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결코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일어서서 달려가지 않으면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있는 수많은 죄인들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나 자신이야말로 내 가정과 이웃과 학교와 직장 안에 있는 저 '패역한 백성'을 급히 찾아가야 할 '현장의 구조대원'입니다.
  '보내심을 받았으면 어찌 전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원수 마귀의 방해공작과 핍박이 있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무조건 나가는 용기'를 발휘해야만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 하나를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가장 아름다운 발'을 가진 전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하기만 하면 우리 자신의 말재주 때문이 결코 아니라 바로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복음의 말씀'이 직접 역사하여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드는 놀라운 일이 반드시 벌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태신자 갖기 운동'은 이처럼 성도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사명 수행을 아주 쉽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첫 단계입니다.
  올 상반기에도 각자의 태신자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랑의 편지 쓰기'와 '문서전도 헌금'과 '수요 전도대회'에 동참하고 또한 직접 '와 보라'고 그 손을 잡아 교회로 인도함으로써, 내 집 근처의 '예루살렘'에서부터 서울시의 '유대'와 지방의 '사마리아'와 오대양육대주의 '땅 끝'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