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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연대기(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에반젤(복음) 2022. 4. 13. 23:49

바울의 연대기(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Ⅰ. 바울의 33년 연대기

 

바울의 연대기는 33년정도이다. 약 3년간 아라비아에 있었는데, 이곳은 나바티아왕국이다. 신약시대의 아라비아는 다메섹부터 요단강 동편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바티아왕국은 다메섹 동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서부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서 바울은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 증거로는 갈라디아서 1장 13절 이후를 들 수 있다. 그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추격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도망을 해 왔다. 3년후에는 예루살렘으로 게바를 만나기 위해서 올라갔다.(1차 예루살렘 방문) 올라가서 그는 15일(짧다는 개념)간 있었다.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적대자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바울은 그의 모든 말들을 그의 적대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다. 바울은 게바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올라갔는데, 15일동안 있었다. 15일동안에 바울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바울이 보름동안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원사도들과 그외의 사도들에게 복음에 관해서, 예수에 관해서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후에는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났다. 진짜 열두 사도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열두 사도 모두를 만나야 하는데 바울이 만난 사람은 베드로와 야고보뿐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바울은 사적인 교우 관계일 뿐이다. 갈 1:17절의 "3년 후에"는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낸것인가? 아니면 다메섹에서 3년을 지낸 것인가? 이것의 표현 자체가 무엇을 기점으로 하는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둘다 가능하나, 전후 문맥이나 심리에 따르면 이때의 기점이나 기준은 다메섹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3년은 아라비아에서 지낸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 후 바울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자 소문이 나고 유대인들이 바울의 변화에 대해서 놀랍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갈 2:1을 보면 그후에 십사년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메섹을 기점으로 했는가? 아니면 1차 예루살렘 방문을 기점으로 삼았겠는가? 이 경우에는 1차 예루살렘 방문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 2차 예루살렘 방문 - 갈 2:1

 

2차 예루살렘 방문 기간동안 사도회의가 있었다. 이후에 안디옥 사건이 일어난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시리아와 길리기아 선교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안디옥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바울의 2차선교여행(AD 50년에 시작)은 유럽선교이다. 마게도니야, 네아폴리아를 지나서 첫 번째 교회를 빌립보(알렉산드리아 대왕의 아버지 이름)에 세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중에서 바울이 세운 첫 번째 교회는 유럽에 있는 빌립보 교회이다. 물론 이 전에 바울이 교회를 세웠는지 안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거기서 박해를 받자 서쪽으로 나가서 데살로니가(어느 왕국 공주의 이름)에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바울은 예수와는 달리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 다시 박해를 받자 베뢰아를 내려간다. 베뢰아에서 선교가 성공했다는 기록은 없다. 유대인들이 베뢰아로 와서 다시 박해하자 바울은 실라와 나머지 사람을 남겨두고 배를 타고 아데네로 간다. 그곳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 다음에 고린도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아굴라(천막 제조업자, 브리스길라의 남편)와 브리스길라를 만난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유대인인데, 로마로부터 추방을 받아서 고린도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49년에 글라디오 황제 칙령(로마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칙령 - 유대인들이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이든지 기독교인이든지 모두 추방을 당하였다. 바울은 이들의 집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약 18개월동안 체류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쓴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이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신약성서 27권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이다. 이 기간동안 바울은 고소를 당해서 아카야주의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을 받는다. 이것은 바울의 절대적인 시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것을 통해서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른 시기를 알아 볼 수 있다. 갈리오 비문에 보면 갈리오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써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알아보면 갈리오의 재임 기간은 50년 전후이다. 아테네와 반도의 관계를 보면 떨어져 있는 곳도 있고, 붙어 있는 곳도 있는데, 옛날에는 붙어 있었는데, 네로 황제때

시작한 운하 공사가 중간에 중단되었다가 약 100년전쯤에 완공되어 지금은 떨어져 있다.

3차 선교여행(52년)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서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에 있으며, 아테네와 거의 같은 위도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바울은 2-3년간 체류하였다. 여기에 머물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 전서를 썼다. 둘중에 어느 것을 먼저 썼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 둘은 거의 동시에 쓰여졌으며, 3차 선교여행 초기에 쓰여졌다. 중간에 고린도를 방문하였다. 그후 에베소에 돌아와서 다시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쓴다. 첫째 편지가 고린도 전서이고 두 번째 편지가 고린도 후서이다. 고린도 후서는 최소한 2개 이상의 편지가 인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 증거로는 처음과 뒷부분이 분위기가 다른 것을 들 수 있다. 고린도 후서가 여러 개의 편지가 합쳐진 것이라면, 눈물의 편지가 먼저 쓰여졌을 것이다. 그 후에 바울은 빌립보와 빌레몬서(옥중서신)를 썼다. 이 둘은 옥중 서신인데 일반적으로 옥중 서신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맞지 않다. 옥중 서신은 바울이 에베소나 그 근처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도를 보냈다. 그후 바울은 소식이 궁금해서 육로의 중간 지점인 마게도니야로 가서,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좋은 소식을 듣는다. 거기서 또는 에베소에 돌아와서 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쓴 편지는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 후서이다. 바울의 진정서신은 7개인데, 하나는 고린도에서 썼고(50년쯤에 쓰인 데살로니가 전서), 다섯 개는 3차 여행의 체류지인 에베소에서 썼다.(52년에서 55년쯤에 쓰여진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 후서) 나머지 하나는 어디서 썼는가?

바울의 선교 여행의 끝은 스페인이다. 그 전에 그는 이방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이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유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허용하지 않았다. 바울을 고린도로 넘어가서 겨울을 지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바울은 이곳에서 3개월을 지내는데, 이곳에서 그는 로마서(55년이나 56년쯤에 쓰임)를 쓴다. 이것은 바울의 진정서신중에 마지막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은 스페인 선교를 앞두고 있는데, 만약 로마 교회가 중간에서 바울의 선교를 방해하면 지장이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 바울은 56년에 예루살렘으로 갔다.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이다. 바울은 이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게 많은 기도를 부탁하였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체포를 당하게 되고 2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58년에 로마로 압송당한다. 그 후에 로마에서 그는 순교를 당한다. 바울이 활동한 결과는 50년에서 55년(56년) 사이에 활동한 것의 결과이다. 5-6년 사이에 활동한 바울의 결과가 그가 쓴 문서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바울의 생애를 두부분으로 나누면, 나누는 기준은 다메섹 사건이다. 다메섹 사건 이전의 바울을 평가해보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바울에서는 좋은 평가를 하지 않지만, 어떠한 입장에 서는가에 따라서 바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바울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바울은 모든 입장에서 다 좋지 못한 평가를 하고 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바울에 대해서 착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른 사람들이다. 여기서의 교회는 건물의 개념이 아닌, 사람들의 모임인 공동체의 개념이다.

 

2. 갈라디아서 1장 13절부터의 내용

 

14절에서 말하는 전통이란,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신앙의 전통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세의 율법을 랍비들이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구약성서의 모세 율법은 안 지키고, 랍비들이 해석하는 것만을 지켰다는 말이 아니라, 둘을 구별없이 이들을 유대교적인 유산으로 생각하고 두가지 모두를 지켰다.

 

3. 빌립보서 3장 1절부터의 내용

 

"개들을 조심하십시오"라는 말은 바울이 자신의 적대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할례를 개역성경에서는 "손할례"라고 나오는데, 여기의 '손'자는 損(덜 손)이다. 여기서 바울은 상대방이 그들의 육체를 가지고 주장을 하자, 바울도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 자랑을 한다. 이것은 그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민족이라고 얘기하면서 자랑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약속의 땅에서 유일하게 출생한 아들은 베냐민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입장도 있다.

"히브리파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 히브리인이라는 말의 어원은 Apiru이다.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파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랑거리로 생각하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 이것은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열성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유대교를 위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바울의 가치관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자기의 출신성분, 학식, 열성이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에는 이러한 것들이 해로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 주 예수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다는 말은 주 예수가 가장 고귀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필요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 바리새파 사람들은 구원이란 자기 능력으로 열성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義)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이 새로이 바뀐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 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은 것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도 그리스도와 같은 대열에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회개하기 이전의 바울은 모든 사람이 말하는 반인륜적인 그런 부정적인 인물은 아니었으며, 유대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아주 박식하고 열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4. 롬 7장 24절

 

롬 7:24 -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시겠습니까?)을 보자. 율법을 지킬려고 하면 할수록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슬퍼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잘못된 것이고, 여기서 슬퍼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나"이다. 직접적으로 바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일반으로서의 "나"이다.

 

5. 딤전 1:15

 

디모데전서 1:15 - 다메섹 사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메섹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3곳이 있다. 이것들은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다메섹 사건 이야기와 바울의 진정 서신에 있는 다메섹 사건의 이야기의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자.

 

 

Ⅱ. 사도행전, 바울의 진정서신의 이야기

 

1. 9장의 이야기

 

행 9장 - 빛을 보고 소리(음성)를 들었다. 이것이 진짜로 본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들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9장의 이야기와 22장의 내용이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을 경험하고 난 후에 행한 결정적인 변화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어떤 식으로 받았겠는가? 9장에서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22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기도할 때 무아지경에 사명을 받았다. 26장에서는 다메섹 현장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는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의 사명을 어디서 받았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사도행전의 다메섹 사건에 대한 세 개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아라.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만 3개의 다른 전승이 존재하는 것이다.

http://kr.blog.yahoo.com/kyu153/5142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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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 이해의 첫걸음

2004/06/29 오전 10:16 | 바울신학이란?

 

바울로 이해의 첫걸음

 

1. 편지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거나 어떤 용무가 있을 때 쓰는 것인데, 바울로의 편지는 어떻게 성서가 될 수 있나요?

 

먼저 편지와 서간의 구분을 하는 게 좋겠군요. 편지는 실제로 만나 대화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통신수단이고, 서간은 일정한 수신인이 없고 광범위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씌어진 편지형식을 딴 저서들을 말합니다. 바울로의 글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지요. 여기에서는 편의상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바울로의 편지'로 통용하겠습니다.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20권이 편지로 되어 있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편지들은 엄밀히 말해서 개인적 용무만을 위한 사신(私信)은 하나도 없고 모두 상당히 큰 공동체들을 위해 기록되었지요. 심지어 필레몬서와 같이 한 개인에게 보낸 편지도 그 수신자의 이름이 '당신의 집안에 있는 교회'로 되어 있어 그 공동체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답니다.

 

바울로의 편지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뼈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머리말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이름과 서로의 안부를 전합니다. 다음엔 일반적으로 중재기도와 종말론적 희망을 포함하는 감사나 축복의 말씀이 나오지요. 그리고는 종말론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편지의 본 내용이 이어진답니다. 그 다음엔 사목적 권고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편지의 끝맺음은 고별인사와 축복으로 되어 있어요.

 

이상의 편지 내용으로 보아 우리는 바울로의 편지들이 모두 편지의 형태를 빌려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 공동체에게 복음의 내용을 좀 더 깊이 해설해주고 그 공동체를 사목적으로 격려하고 지도하기 위해서 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초대 교회는 바울로의 편지를 성서로 채택하여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읽게 한 거랍니다.

 

2. 그의 편지를 통해 그는 무얼 강조했습니까?

 

바울로가 강조한 내용은 다른 신약성서 저자들이 전하는 내용과 같아요.

 

하느님은 나자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약속을 실현시키셨고 이 예수를 영광의 주님으로 선포하였다는 겁니다. 아울러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선포하지요.

 

3. 바울로의 편지들을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독서 시간의 길이는 책의 분량보다 책에 대한 독서자의 관심과 흥미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요?

 

신약성서의 독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보다 바울로의 편지를 대할 때 당혹감과 어려움을 느낍니다. 바울로의 성품이나, 편지가 나오게 된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서 그의 편지들을 읽게 되면 각별한 감동과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될 것 같군요. 그리되면 편지들의 길이도 자연 짧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실제로 바울로의 편지들 전체의 분량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합한 분량의 절반 가량밖에 안된답니다.

 

4. 신체적으로 바울로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우리는 바울로의 외모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한 곳에서 바울로가 자신에 대한 반대자들의 비평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는데 이 인용문 안에서 그의 외모에 대한 약간의 암시를 엿볼 수는 있지요. "바울로의 편지는 무게도 있고 단호하기도 하지만 막상 대해보면 그는 약하기 짝이 없고 말하는 것도 별 것이 아니다"(2 고린 10,10)

 

바울로의 편지와는 별도로 2세기 말경 <바울로 행전>이라는 전설 모음집이 발간되었는데 역사적인 신빙성은 없지만, 꽤나 자세하게 바울로의 외모를 전해주고 있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바울로는 땅딸막한 대머리 총각이고 다리가 양가발이로 뒤틀려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약간의 매부리코에 양미간에 짙은 눈썹이 교차하는 안면과 더불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는 겁니다. 이런 용모라면 그 누구도 바울로를 미남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바울로 행전>은 이런 기형적인 용모에도 불구하고 바울로가 은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로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얻어진 내면의 아름다움이 그의 육체적인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5. 성서공부를 많이 못한 사람도 바울로의 편지들을 읽으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물론 상당한 대목들은 성서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고린토 전서 13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사랑의 찬가'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만인의 가슴을 울려주는 대목이지요. 디모테오 전. 후서도 내용이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깊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바울로의 편지들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책상에 앉아 쓴 것이 아니었지요. 때로는 공동체의 파벌을 잠재우고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때로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를 반격하기 위하여, 때로는 자신의 선교 동업자들을 격려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바울로는 이곳저곳 선교 여행길에서 필요를 느낄 때마다 원시 교회 공동체들에게 서신을 보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편지들이 씌어지게 된 동기와 배경, 그리고 편지를 받아볼 공동체의 성격을 간단하게라도 파악한다면 편지의 내용을 보다 쉽고 깊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6. 그 편지들은 모두 바울로가 직접 쓴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바울로의 이름으로 씌어진 편지들은 도합 13권입니다. 히브리서는 바울로의 이름으로 씌어지지 않았고 실제의 내용과 문체에 있어서도 바울로의 편지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답니다.

 

다른 13권의 편지들 중 의심할 여지가 없이 바울로의 것으로 보이는 책은 로마서, 고린토 전. 후서, 갈라디아서, 필립비서, 필레몬서, 데살로니카 전서로 총 7권이지요. 여기에 덧붙여 골로사이서, 데살로니카 후서가 약간의 의심은 있지만 대체로 바울로의 친저로 인정됩니다. 에페소서는 언어와 사상에 있어서 바울로의 다른 편지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골로사이서를 많이 닮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의 저자가 바울로가 아니라 바울로를 잘 알고 그를 존경하는 사람으로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목서간으로 알려져 있는 디모테오 전. 후서와 디도서는 바울로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편집된 것으로 보입니다.

 

7.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남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볼 그런 일들을 왜, 어떤 사정이 있어 그렇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 책을 낸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유명인사의 이름을 도용한 명예훼손죄에 해당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성서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가 쓴 책을 평소 존경하거나 숭배하던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하나의 예우였답니다. 특히 유명인사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에 부합하도록 글을 써서 스승의 이름으로 출간시키는 경우가 많았지요.

 

바울로의 사목서간(디모테오 전. 후서, 디도서)은 단어사용, 문제의 접근방법, 전체적인 분위기 등이 바울로의 다른 서간들과 매우 다를 뿐만 아니라 관심 내용도 다릅니다. 거기에서는 참교리를 보전하고 이제 겨우 꼴을 갖추기 시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직분과 규율을 확립시켜나갈 것인가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들의 저자들은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당면한 문제들을 바울로 같으면 어떻게 풀어나갔을 것인가 상상하면서 그의 정신에 따라 이 편지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개중에는 간혹 바울로의 진짜 편지들의 일부가 포함되었을 거예요. 어떻든 사목서간은 바울로의 사상을 깊이 이해한 사람들의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8. 복음서와 바울로의 편지들은 어느 것이 더 먼저 씌어졌습니까?

 

적지 않은 신자들이 신약성서의 집필 순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요. 책을 구성하는 순서로 보면 마태오 복음이 가장 먼저 나오지만 실제로는 바울로의 편지들이 더 먼저랍니다. 4복음서의 집필 연대가 70년에서 100년 사이로 비교적 1세기 말엽인데 비해서, 바울로의 친저 편지들은 49년에서 바울로의 순교(대략 64년) 직전까지 1세기 중엽에 기록되었습니다.

 

바울로의 추종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사목서간은 신약성서 중 가장 후대에 기록된 작품으로서 그 작성 연대를 2세기초로 추정들 합니다.

 

9. 그러면 바울로와 복음사가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나요?

 

사도행전과 바울로의 편지들을 토대로 바울로가 복음사가들 중 적어도 마르코와 루가와는 서로 친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선 마르코는 요한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사도 12,12) 어머니 마리아(성모님이 아닌 다른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거주하다가 바울로와 자신의 삼촌 바르나바를 만나 한때는 그들과 전도여행을 같이 하기도 했지요(사도 13,5;골로 4,10). 그러나 마르코는 바울로가 자신의 동행 문제로 바르나바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자 바울로가 필레몬서를 쓰고 있었을 당시에는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필레 24절). 그 외에 마르코가 감옥생활을 하는 바울로를 도와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골로 4,10;2디모4,11).

 

다음으로 루가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 3번의 언급이 있지요. 필레몬서 24절에서 루가는 바울로의 동업자로 소개되고 골로사이서 4장 14절에선 '사랑하는 의사'로 묘사되지요. 그리고 디모테오 후서 4장 11절엔 루가만이 바울로를 끝까지 수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이 얼마나 역사적인 신빙성을 갖느냐도 문제이지만, 그 복음사가들이 직접 그 복음을 썼느냐에 대해서 대개는 회의적이고 또 동명이인(同名異人)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로가 위의 두 복음서 저자들과 친분을 맺었노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10. 바울로의 출생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요. 그는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태어났나요?

 

바울로의 출생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이 전해주고 있는 몇 가지 정보 이외에 다른 자료가 없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는 다르소 시에서 출생했습니다(22,3;21,39 참조). 다르소 시는 바울로의 초기 선교활동의 주무대였던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한 도시로서 희랍문화가 상당히 발전되었던 도시로 평가되었지요. 바울로가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이스적 사고방식과 대화술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지식은 이 도시에서 길러진 게 아닐까요?

 

불행히도 바울로가 언제 탄생했는지, 또 그의 부모의 이름이 무었이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자료는 전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바울로가 예수보다 10여 년 늦게 출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기원전 6년경 탄생하셨으니 바울로는 서기 5년경에 출생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가문이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증언은 바울로의 자신의 편지에 나와 있습니다(로마 11,1;필립 3,5).

 

11. 바울로는 사울이라고 불렸다는데 사울은 개종 전의 이름인가요?

 

사울이라는 이름은 유다식 이름이고 바울로는 그것의 로마식 이름으로 처음부터 그는 이 두 가지 이름을 다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스스로를 한 번도 사울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바울로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의 이름을 처음에는 사울이라고 했다고 개종 이후 그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방인의 영역에로 넘어갈 때부터 바울로로 바꾸어 부릅니다(사도 13,9).

 

성서적 전통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바꿔 부를 때에는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느님이 아브람을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시며 가나안 복지로 가도록 명하실 때에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 부르신 것이라든가 예수께서 시몬 바르요나를 당신 제자로 삼으시면서 계파(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이 바로 그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다교에만 집착해 있었던 사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새로운 소명인 이방인 선교에 첫발을 내딛는 과정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사도행전의 저자는 개종전후의 이름을 구분하여 부른 것이라고 봅니다.

 

12. 그는 언제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까?

 

바울로가 예수를 알게 된 때에는 34년경이라고 보면 무방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회심을 다마스커스와 관계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이에 반해 바울로의 편지들은 자신의 회심을 '계시'(갈라 1,16), '새 창조'(2고린 5,17),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1고린 15,8)이라고 말하고 있답니다.

 

실제로 바울로의 회심은 악인에서 선인으로 돌아서는 윤리적인 '회개'도 아니었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의 '개종'도 아니었습니다. 바울로는 회심 이전이나 이후에나 윤리적인 수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회심 이후에도 유다교를 의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로의 회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곧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심'(로마 8,9)으로써 그리스도께 소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바울로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원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을 어떤 경로를 밟아 얻게 되었는지는 사도행전에서도 그 자신의 편지들에서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3. 그는 여행을 많이 했다던데 여행수단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세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차례의 전도여행 모두 출발점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였어요. 그리고 제3차 전도여행의 종착역은 예루살렘이었지만, 제1차와 2차 여행은 종착역도 안티오키아였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로는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로마로 압송되었고 전승에 의하면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답니다.

 

지중해 동쪽과 북쪽의 거의 전 지역을 포함하는 이 모든 여정들은 육로와 해상을 통과했는데 당연히 육로여행 때는 도보와 말, 당나귀, 수레 등을 타고 다녔을 것이고 해상 여행은 돛과 노를 가진 목선을 이용했을 것입니다.

 

14. 그렇게 많은 여행을 했다니 바울로 사도는 무척 건강했나 보지요?

 

앞에서 이야기한 <바울로 행전>의 기록엔 그가 매우 강인한 체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바울로 자신이 편지들에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것처럼 그에게는 불치의 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지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들을 해봅니다. 간질, 말라리아, 만성적 안질 등. 그러나 병의 징후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진단을 내릴 수 없군요.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열한 장황한 육체적 고통들은 그의 병약한 체질에 대한 게 아니라 그가 당한 고생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든 그는 세번씩이나 이 만성 질병에서 구해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와 같은 치유의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음을 시인하고 이 육체의 연약함을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한 채찍질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성 질병이 바울로의 전도여행을 불가능하게 할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교통기관이 오늘날처럼 발달되지 못한 그 시대에 그토록 장거리 여행을 끊임없이 할 수 있었다면 강한 정신력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기초 체력은 유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았겠어요?

 

15. 결혼은 했습니까? 결혼한 몸이었다면 여행도 가족과 함께 했나요?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가 당시 예루살렘의 저명한 랍비(유다교의 지도급 선생님) 가믈리엘의 제자로서 바리사이와 랍비가 될 수업을 받아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수업은 통상 꽤 이른 나이 때부터 시작되지요. 5살 때 율법의 주요내용을 익히고, 6살엔 시나고가(유다교 회당)에 딸린 유치원에 입학하여 10살 때까지 성서를 공부하면서 구전 법전과 수많은 규정들을 배워나갑니다. 15살 땐 가므리엘 선생이 가르치는 예루살렘 성전 대학에 입학하여 고된 랍비수련과정을 밟는 한편, 율법의 해석과 유다인들의 고전문학을 익힌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랍비로서의 자격을 모두 얻게 되면 원로 랍비들의 추천을 받아 랍비로 서품 되지요.

 

바울로가 랍비로 서품 되었는지 아닌지는 문헌상 밝힐 수 없지만 사도행전과 그의 편지들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사이로서 분명히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서품된 랍비들에겐 결혼이 의무규정으로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로가 바리사이의 규정대로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동시에 그의 부정적인 결혼관으로 미루어보아 결혼 초기에 아내와 갈라섰던 게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그러나 당시에 랍비들이라고 해서 다 결혼했던 것은 아니었지요. 한 랍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별수없잖은가? 내 영혼이 이미 율법에 결합되어 있으니, 세상이야 다른 사람들이 계속 유지시키면 되는 게 아닌가?"라고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로가 독신생활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신비적 약혼을 간주했던(1 고린 7,7) 점으로 보아 그가 보다 크고 자유로운 자기 봉헌을 위해 독신으로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16. 그의 생계는 어떻게 꾸려나갔나요? 혹시 부업이라도 있었나요?

 

랍비들은 율법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돈을 받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일정한 생업을 가져야 했답니다. 바울로는 원래 비교적 부유한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도 복음을 전파하면서 돈받기를 거부했고 천막 짜는 일로 자신의 생활비를 벌었습니다(사도 18,3).

 

17. 바울로를 사도로 부르는데 그렇다면 그도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나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만 사도라고 부른 건 아니지요. 그리스도교에서 사도라고 했을 때는 두 가지 조건을 채운 사람들을 가리켰답니다. 첫째 그들은 교회사 안에서 첫 번째 세대에 속해야 하고, 둘째 무엇보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열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지요.

 

바울로는 역사적 예수와 함께 생활했던 열 두 제자들 틈에 했던 탓으로 처음에 초대교회 안에서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가 간혹 의심과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에 거세게 반발하면서 바울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임을 거듭거듭 강조하면서(로마 1,1;1 고린 9,1-2;15,9;2 고린 11,4-5) 자신의 가르침도 다른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첫머리에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바울로는 자신과 열 두 사도들 이외에도 '주님의 형제'(유다인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먼 친척도 형제 자매로 불렀습니다) 야고보와 바르나바도 사도로 생각하였지요(갈라 1,19;1 고린 9,6;15,7). 교회의 직책 중 사도직을 최상의 은사로 소개하고 이 직책은 놀라운 표정과 기적들을 동반함으로써 거기에 신적인 권위가 부여된다고 믿고 있습니다(2고린 12,12).

 

18. 초대 교황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 사도와 바울로는 심하게 다툰 적이 있다고 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결말이 났나요?

 

두 사도가 심하게 다투었다기보다는 바울로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끝난 이 사건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점차로 불어나고 있었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일어났지요. 베드로와 바르나바를 위시해서 상당수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성체성사를 포함해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식탁을 같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낸 예루살렘의 수구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 베드로는 그들의 비난이 두려워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음식을 나누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원래 유다교에서는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을 구별하고 식사 전에는 그릇과 손을 깨끗이 닦는 등 음식에 대한 규정이 까다로웠답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유다인들로 구성되었고 엄격한 율법준수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바울로는 복음 앞에서 그리고 주님의 식탁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왔고 베드로와 바르나바도 그 사실을 받아들였는데 예루살렘의 수구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도착하자 비겁하게 이방인들과 음식을 나누지 않은 체하며 꽁무니를 뺀 겁니다. 지도급 인사들인 이들의 표양을 보고 다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성찬과 식사 나누는 일을 피하게 되지 않았겠어요?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타가 인정하는 바울로의 눈에 이것은 분명 복음에 위배되는 일로서 이제 막 태어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협하는 일로 판단되었지요. 왜냐하면 이로써 만인을 위해 제정된 주님의 성찬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할례를 비롯한 유다교의 온갖 율법규정들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강요하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로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직접 대고 "당신이 이미 그리스도의 법을 받아들여 유다인으로서의 모든 규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는데 왜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려는 이방인들을 유다교의 규정에 묶어놓으려는거요?"하고 면박을 주었습니다(갈라 2,14). 베드로가 워낙 잘못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도 없이 바울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사건이었지요.

 

19. 다른 사도들과 바울로 사도와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단이 바울로를 지지하고 이방인 선교에 대한 그의 독보적 권한과 위치를 인정한 것으로 묘사된 것과는 달리, 바울로는 이방인 선교 벽두에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수구파들로부터 상당한 방해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가장 크게 문제를 삼고 있었던 것은 그의 가르침의 정통성 여부였습니다. 바울로는 분명 열 두 제자의 무리에는 속하지 못했지만 그는 여러 번 자신있게 자신의 가르침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얻어진 것이고 자신의 이방인 사도직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그가 이룩한 이방인 선교의 놀라운 결실을 보고 종내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수구파 유다계그리스도인들도 그의 사도직을 인정하며 그를 동업자로 받아들였으리라 확신합니다.

 

20. 바울로 사도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첫 전도 여행 때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를 동반자로 삼았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헤어집니다. 두 번째 전도 여행 때에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동반자로 맞아들입니다. 세 번째 전도 여행은 브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로의 중요한 협력자로서 그리스인 디도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이외에 바울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게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바울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들에 대한 안부를 소상히 묻거나 문안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하지요. 로마서 16장에서 바울로는 27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문안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정을 맺는데 각별히 신경을 쓴 거지요.

 

21. 바울로가 사용한 언어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로가 길리기아 지방의 다르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유다인들이 팔레스티나를 떠나 여러 이방지역에 흩어져 사는 현상)의 유다인 출신이면서 예루살렘에서 랍비 교육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라메아어와 그리스어 둘 다 능통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요 선교대상이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향한 그의 연설이나 편지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22. 바울로의 말솜씨와 글솜씨 중 어느 것이 더 뛰어납니까?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보면 바울로가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유다인들을 거리에서 재판정에서 굴복시키고, 궤변에 젖어 있는 그리스인들을 탁월한 논리로 설득시킨 유명한 설교가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로는 숭배하다시피 떠받들었던 루가의 문학적인 기록이라고 봐야 할겁니다. 루가는 여기서 바울로라는 한 영웅을 통하여 복음이 유다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로의 말솜씨는 실제로 어떠했을까요? 끊임없는 반대자들의 공격과 그를 해치려는 사람들의 모함 앞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힘입어 적대자들의 숨은 의도를 밝혀내고 자신의 언행을 변호하는 것이었겠지요.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으리만큼 바울로는 실제로 체계적이고 냉정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여유도 방법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자연 그의 말이나 글이 상식 밖으로 장황하게 길어지거나 논리의 비약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사도행전에서조차도 많은 청중들, 특히 바울로의 반대자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웃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정은 약간 낫기는 하지만 그의 편지에서도 그대로 표출되고 있지요. 바울로가 당시의 수사학에서 유행하던 디아트리베(대화체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킴)의 방법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 하지만, 한 주체를 너무 지나치게 파고 든다든가 문법적인 논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무리하게 강변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그의 글을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답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글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과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복음선포에 대한 불타는 정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랑과 헌신적 봉사는 그의 말과 글에 생명력을 제공함으로써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청중과 독자를 감동시켰으리라고 봅니다.

 

23. 바울로의 성격은 어떤 편인가요?

 

방금 말씀드린 대로 복음에 대한 열정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헌신적 봉사와 사랑은 바울로를 단단히 무장시켰습니다. 그는 무슨 일에든지 적극적이었고 자신이 한번 진리라고 생각한 일에 진지하고 철저하게 몰두해 들어갔지요.

 

설상가상으로 바울로는 그의 권위와 가르침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반대자들의 공격에 끊임없이 반박성명을 내야 할 형편이었지요. 이 모든 요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바울로로 하여금 자신의 편지들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복음과 권위가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성공적인 그의 선교활동이 자신의 약점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나칠 만큼 강조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를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균형을 잃어버린, 그리하여 영원히 자기 나팔만을 부는 사나이로까지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업적이나 능력을 자랑한 적이 없고 다만 자신 안에서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을 자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자랑도 반대자들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 진리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내놓은 것이지 자기 선전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답니다. 오히려 바울로의 편지 곳곳에서 우리는 그의 신생교회들에 대한 어버이다운 애정과 관심을 엿볼 수 있고 많은 친구들과 협조자들에게 보내는 자상한 충고와 문안을 발견할 수 있지요. 이는 바울로가 결코 언제나 도발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상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따뜻한 면모도 갖춘 균형 잡힌 인물임을 증언하는 대목들입니다.

 

 

24. 바울로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어디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가 항구도시 에페소에서 3년 동안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20,31).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페소는 바울로가 한 장소에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광신적인 유다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반대와 모함을 받았습니다. 바울로를 쫓아내기 위해 유다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우리는 에페소에서 바울로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사도행전과 그의 편지들로부터 별 특별한 정보를 얻어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필레몬이 살던 골로사이가 에페소 근처에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바울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생활을 하면서 필레몬에게 옥중서간을 보낸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상당히 근거 있는 추측 같군요.

 

25. 그는 감옥에 많이 갇혔는데 무슨 죄 때문이었습니까?

 

바울로는 대부분 유다인들의 모함 때문에 감옥에 갇혔지요. 그들은 바울로가 자신들이 처형한 나자렛 예수를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선포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계속 전하는 걸보고 위협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율법과 유다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상대화시키고 직선적으로 비판하는 바울로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바울로를 제거하기 위하여 갖가지 구실을 찾으며 일반 시민들을 선동하였습니다. 바울로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 이외에도 치안대장이나 총독에게 고발하여 감옥에 갇히도록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였답니다. 유다인들로부터 그가 당한 박해가 고린토 후서 11장 23절에서부터 26절에 나열되어 있지요.

 

26. 그가 로마에 간 것은 전교 때문이었습니까?

 

바울로의 로마 여행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의 기록이 유일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바울로는 로마에 전교하러 간 게 아니었지요. 예루살렘과 가이사리아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함에 빠져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로는 가이사리아로 이송되어 아그리빠 왕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심문 도중에 바울로는 출생지 다르소에서 얻은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황제에게 상소합니다. 이 상소가 윤허되어 바울로는 로마로 압송되지요. 말하자면 바울로가 로마에 간 것은 순전히 재판문제 때문이었던 겁니다.

 

27. 바울로는 몇 살까지 살다가 어디에서 돌아가셨읍니까?

 

사도행전은 "바울로는 셋집을 얻어 거기에서 만 2년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맞아들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아주 대담하게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28,30-31)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도착한 바울로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전도를 계속했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서 언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사도행전도 그의 편지들도 아무런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의 클레멘스 바울로가 로마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은 후 서부의 끝인 스페인에까지 전도여행을 했다고 전합니다. <무라토리오 경전>과 위경 <베드로 행전>도 같은 전승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스페인 여행을 마친 바울로는 로마에서 다시 붙잡혀 더 엄격한 수인생활을 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67년; 로마의 클레멘스와 떼르뚤리아노는 64년으로 주장) 참수 치명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분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정확한 출생연도를 모르니 알 수 없지만 대략 60세 정도가 아니었나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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