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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본 선교

에반젤(복음) 2022. 3. 27. 02:02

신약에서 본 선교   

박명수 목사



1. 신약은 구약을 통해 이해될 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구약 또한 신약의 빛 아래서 조명할 때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선교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선교는 신약에서 볼 수 있지만 구약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구역 예언의 성취이며, 구약적 선교의 완성이 신약의 선교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보편적인 관심을 가지시고 만민의 구원을 궁극의 목표로 가지셨다. 그 일을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택하여 그들로 이방의 빛을 삼으시고 만민이 그 빛을 보고 찾아오게 하셨다.

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사명을 주어 흩으심으로 시작된다. 복음의 선포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으로부터 시작되어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그 일은 지금도 계속 수행되고 있다. 구약 선교의 주제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제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선교를 통해 확증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복음서의 선교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처럼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의 종들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도구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방의 빛도, 참된 포도나무의 역할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당신의 보편적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땅위로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교를 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고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셨다. 그를 '세상의 빛'과 '이방을 비추는 빛' 그리고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놓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는 완벽한 선교의 모델이 되신다. 이 땅에 오심 자체도 물론이려니와 오셔서 그가 남긴 행적이나 말씀은 하나 하나가 선교 자체이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나 곧바로 애굽으로 피난해야 했으며 돌아온 뒤에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그 후에 유다로 예루살렘으로 옮기시는 그의 여정은 선교적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으로 가득 차있고 그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행적 뿐 아니라 그의 십자가와 죽으심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절정이었다. 예수의 생애의 진정한 절정은 부활 사건이다. 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열납하셨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우주적 선교 계획이 성취되어 감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하나님의 선교사역에서 그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사역의 지경을 넓히셨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끔 준비시키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로 마태복음28에서의 위임명령을 통해 당신의 세상을 향한 선교의지를 접목시키셨다. 예수는 '타자를 위한 사람'이었으며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생애를 사셨다. 이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닌 그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누구에게나 적용됨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의 관계의 회복이 선교의 주요 과제임을 보여준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의 사역의 메시지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다음 세 가지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는, 종말적인 특징으로 이는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모든 세상의 절대주권을 지닌 주님으로 드러내시리라는 확신의 표현이다. 둘째는 신학적인 특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통치하고 지배하심을 가리킨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론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서 오시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구원을 책임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고통과 질병과 악과 죽음을 물리치시려는 뜻을 지닌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한편으로는 이미 도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도 도래하고 있다. 그 긴장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선교적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의 많은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데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도래, 그리고 그것의 확장과 가치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그리스도의 교훈이 선교적 관심으로 가득 찬 것은 그의 부활 후에 주신 가르침이며 이것의 절정은 대위임명령인 마태복음 28:19-20이다. 여기에는 선교를 향한 예수의 권위와 요구, 약속이 담겨 있다. 이 명령에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사회적, 종족적, 문화적, 지리적 장벽을 넘어 '가서' '제자 삼으라'는 내용이 담겨있고 그 후의 모든 신약의 내용은 이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순종과 헌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4. 교회와 선교 : 사도행전. 복음서에서 주어진 지상명령은 사도행전 구석구석에서 다시 들려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이 명령에 순종한 사도들의 행적이면서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선교적 행적이다. 또한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교회공동체의 행적이기도 하다. 주어진 사명은 분명하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들려준 예수의 최후의 선교적 명령인 동시에 사도행전의 골격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사실상 사도행전이란 이 말씀이 시공간에 걸쳐 펼쳐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선교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으나 그것을 계속할 사명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과 그들이 중심이 된 교회공동체의 선교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의 연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의 구조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선교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8에서 제시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가 사도행전 선교의 범위이며, 사도행전의 선교역사에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침이 된다.

예루살렘은 선교의 출발지이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란 단순히 중심도시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성이며 희망의 상징이었다. 예수의 생애도 교회의 선교적 사명도 이곳에서 끝나고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선교는 사도행전의 초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때의 중심 인물은 베드로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대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누가는 성령의 계시를 좇아 선교의 대상이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선교는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으며 이어진 핍박으로 인해 사마리아로 그 지경을 넓히게 된다. 그리고 이어 이방선교를 위한 사울의 회심이야기와 특히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의 구원, 무엇보다 바울의 등장은 이제 복음이 이방인의 세계, 땅 끝으로 이어지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안디옥 교회의 출범과 동시에 바울의 선교 여행은 이제 사도행전의 끝까지 이어지면서 사도행전 1:8의 말씀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5.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 이전에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져갔는가를 보여주는 '성령의 행전'이다. 선교는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강림사건에서 출발되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사도행전의 어느 페이지를 들쳐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선교에 있어서의 성령의 주도하심이다.

교회를 시작케 하신 이도, 선교의 시대를 여신 이도,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라는 핍박자를 들어 이방 세계를 향한 그릇으로 쓰신 이도 성령님이셨다. 선교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선교사역을 행하는 이도 성령충만함을 입어 변화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메시지나 성령께 사로잡힌 그들의 삶의 모습은 선교에 있어서의 성령의 주도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6. 바울과 선교 성경에서 선교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울이다. 바울은 헬라 문화권인 소아시아의 다소에서 출생했으나 로마 시민권의 특권을 가진 철저한 히브리 사람으로 성장했으며 후에는 가멜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의 교육을 받은 바리새 출신이다. 그의 다문화적인 성장배경이 그에게 선교사적 마인드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한 때 핍박자였으나 이방인들과 유대인 앞에 예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선택된 그릇이자 '이방인의 사도'였다.

3차에 걸친 그의 전도여행과 그의 서신과 선교 전략 등은 기독교 선교사에 의미심장한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사실상 바울이 없는 사도행전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의 선교전략은 기도 중심의 전략이었고, 동역자들과의 협력을 통한 사역이었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는 유연성이 있었다. 또한 바울은 도시를 중심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 기지화하는 선교전략을 펼쳤다. 간략하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선교(Ralph D. Winter)

1. 사람은 사실상 자기 자신의 과거 역사를 지워버리며 살아간다. 인간은 상대를 철저히 밀어내 버림으로써 그들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업적의 90% 이상을 파괴해 온 것이다. 그들의 옛 유산들은 오늘날 거의 사라지고 없다. 오랜 옛날로부터 남아 내려온 것조차도 이상하고도 널리 퍼져있는 악의 증거들로 흠집 투성이가 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 삶에 대한 이지러지고 왜곡된 '이상한 행동'에 대한 설명들이 유대교와 기독교, 회교의 경전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거기에는 이런 악의 기원을 설명할 뿐 아니라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온 전투와 보복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묘사한다면 창세기의 처음 11장은 전체 문제에 대한 도입부 역할을 하는데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1)영광스럽고 선한 원래의 창조 2)하나의 세력, 실제로는 하나의 인격 이상인 반역적이고 악한 초인간적인 능력의 등장과 그 결과로서 3)그 반역에 휩쓸리어 그 악한 권세 하에 놓이게 된 인간이 그것이다.

2. 우리는 남은 성경에서 하나의 단순한 드라마를 보게 된다. 그 드라마는 이런 원수가 점령하고 있는 그 나라의 영역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들어오심을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창세기 12장부터 성서의 끝까지, 실로 이 세상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 감'이라는 단순하고 일관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우리는 지금의 시대를 끝으로 하는 지난 4000년 역사의 한가운데 시점에서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써 타락해버린 그의 피조물들을 다시 찾으시고 구하시는 하나님의 점진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보게 된다.

악의 세력에 대한 이런 반격의 역사는 분명히 이 이야기의 중심에 등장하시는 그 중심 인물이 출현하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미 서로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다섯 시대가 있었다. 이 글의 주 목적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의 다섯 시대를 설명하는 데 있지만, 그 시대들이 연속적인 열 개의 시대의 부분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처음 다섯 시대의 중심이 되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이 열 개의 시대를 연결해주는 주제는 일시적으로 '이 세상의 신'이 된 원수를 대적하기 위하여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미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축복은 결국 다른 족속들과 그 복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조건을 가진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되며, 다른 모든 백성들이 사는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그의 통치가 미칠 수 있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줄잡아 400년 간으로 볼 수 있는 첫 시대에는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아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만나는 중심지대로 이동해온다. 흔히들 족장시대라 불린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시대이다.

4. 줄잡아 400년씩으로 이어지는 그 다음 네 시대를 1)애굽 노예생활 2)사사시대 3)왕정시대 4)다음 포로 및 디아스포라의 시대로 생각할 때, 그때에도 약속된 축복과 기대된 선교사역은 흔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가능한 곳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자발적인 순종과 경건한 생활을 통하여 자기 뜻을 성취시키셨으며, 반면에 정말 필요한 곳이라면 비자발적인 수단을 통해서라도 자기 뜻을 행하셨다. 우리는 어느 시대에나 택하신 백성이 온전히 그 사역을 감당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선교적 관심을 볼 수 있다. 심지어 택한 자들의 선교에 대한 불순종이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복음의 물결이 이방의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가게 하셨고 이를 기뻐하셨다.

5. 그 다음의 2000년 역사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잇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찾아오심을 기초로 하여 다른 백성들이 축복을 받으며, 동시에 그들이 '땅위의 모든 족속에게 복의 근원이 되도록' 부르심을 입었음을 확신케 해주는 시기이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아르메니아 인과 로마인과 켈트인과 프랑크족과 앵글로족과 색슨족과 게르만족과 심지어 잔인무도한 이방 해적이던 바이킹족의 지경에까지 그 영역을 넓히어 회복되고 있다. 복음의 능력이 다시 다른 민족들과 그 축복을 나누어 가질 책임을 졌다.

그러나 다음 다섯 시대가 처음 다섯 시대와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열심히 그 복을 나누어 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첫 1000년 동안에 괄목할만한 선교적 응답을 한 민족은 오로지 켈트족일 뿐이다. 축복은 견실한 책임을 동반하며, 그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위험할 것이다.

6. 로마는 예수께서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찾아온 세계의 지배자였다. 로마는 잔악한 제국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심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였음은 분명하다. 로마의 제도와 도로망, 공용어인 희랍어 등 당시의 소위 '팍스 로마나'는 복음의 선교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이것이 그 짧은 시기에 복음이 전 로마제국에 전파되고 더욱이 로마의 국교가 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할 때 한가지 심리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데 그것은 중세기에 대한 평가이다. '중세기에 성도가 있었는가?'하는 문제다. 신교의 경우, 중세기를 건너 뛸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시대와 종교개혁 사이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성서와 더불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 배우지 못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분명 중세시대에도 역사하셨다. 우리는 초대교회 이후 오늘까지 다섯 시대로 분류할 수 있다. 대략 400년 단위로 구분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7. 첫째 기간의 로마세계(0-400년)에는 복음이 전해졌으나 이방족인 켈트족과 고트족에게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에 고트족이 로마를 침입하였고 로마제국의 서방 전역에 파고들었다. 초기의 선교에서 주목할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은 선교사역을 할 때 철저한 성서적 원리를 기초로 하고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이며, 새로운 문화에 속한 새로운 신자들은 파송하는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를 쓸 필요가 없고, 그들이 입는 옷을 입을 필요도 없으며, 그들의 관습을 따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방선교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교는 켈트족의 문화적 전통에 적응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가 전한 복음은 그들의 친구들과 친척들과 상업적 접촉을 통하여 멀리 서방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모아진 힘들이 후에 로마의 기독교공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가 주는 교훈은 로마를 중심한 기독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어떤 특별한 노력도, 특히 이 시대에는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이후에도 변함 없는 사실이다.

8. 둘째 기간은 고트족들이 들어와서 곧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복음을 북방 깊숙히까지 효과적으로 전하지는 못하였다. 셋째 기간에는 앞서 기독교화된 켈트족과 고트족들이 점령하던 지역을 바이킹족이 쳐들어왔고 그들도 역시 점차 기독교인이 되었다. 넷째 기간에는 처음으로 기독교신앙으로 연합된 유럽이 사라센인들에게 일종의 유사선교(pseudo-mission)를 행함으로 십자군전쟁이 못 이룬 복음운동이 동방으로까지 이르게 하였다.

다섯째 기간에 와서야 유럽은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가게 되었다. 이 시대의 복음전파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면서도 상당히 혼합된 동기에서 행해졌다. 상업적 이익과 영적 이익이 얽혀 축복과 동시에 어둠이었다. 이 기간에 비서방세계 전체는 갑자기 발전이라는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다. 이전의 어느 시대에도 그렇게 적은 것이 그렇게 많은 것에 영향을 준 적이 없었고, 양반구 사이에 그렇게 큰 격차가 생긴 적도 없었다. 특히 선교적으로 볼 때에 괄목할만한 것은 비서방세계에서 놀랄만한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부흥과 선교의 불길은 점차로 서방세계에 가졌던 선교의 주도권을 비서방세계가 갖게 될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의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갑자기 서방세계의 지배를 벗어나 정신을 차린 비서방 세계의 반응에 서구는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적 세계관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하나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기독교는 분명 승리하였다.

9. 그러나 이런 세계적인 변화는 갑자기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2000년 간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힘든 선교사들의 희생적 노고를 대가로 성취된 것이다. 그들은 세계 도처에서 민주적 정부의 수립, 학교, 병원, 대학의 설립 등을 통해 선교의 불을 지폈다. 앞으로의 시대는 급변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거 4000년 동안 자기 계획을 바꾼 적이 없다. 그 섭리 앞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계속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우리에게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