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루스드라 선교
본문: 사도행전 14:8~18 1. 부르심 = 성공의 보증? 1. 바울의 선교여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13:2) 그런데 이 ‘부르심’이 곧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처음부터 장애를 만납니다. 첫째,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바울의 선교를 적극 방해합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동족 전도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는 대신, 모든 에너지를 이방을 위한 ‘선교’에 투자합니다.(13:46) 둘째, 이방 문화입니다. 이교도들은 복음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기적에는 관심을 보입니다. 루스드라인들은,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바울을 신으로 섬기고자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거행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헛된 일을 그만 두라!”며 무리를 만류한 후에(14:15), 복음을 소개합니다. 그러자 무리들의 반응이 냉담해집니다. 급기야 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을 돌로 쳐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과연 이것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당시의 상황만을 볼 때, 바울의 사역은 실패에 가까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문화의 깊은 태클에 걸려 완전히 넘어지는 듯 합니다. 2. 그렇습니다. “부르심”이 확실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장미 빛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이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사6장) 쉽게 말해, 실패할 사역을 위해 이사야를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때때로 우리에게 형통함을 보장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극심한 고난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수업 시간에 박영선 목사님이 이 내용을 가지고 “장미빛 비전에 들떠있는 신학생들이여, 환상에서 벗어나라!” 외치신 것이 기억납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국 최선의 결과를 낳습니다.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만약 바울이 유대인의 공격을 받아 쓰러지지 않았다면, 바울은 이방 선교에 100% 전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비록 돌탕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결국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의 생전에) 그리스 문화의 높은 장벽을 뛰어 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과 수세기 만에 복음은 로마와 헬라의 문화를 정복했습니다. 3. 그렇다면 선교사 바울이 경험한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해산의 수고에 비교합니다.(갈4:19) 여러분을 출산하기 위해 여러분의 엄마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아십니까?(안상혁)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산고를 이겨내고 아기를 출산한 결과? 엄마는 한 생명의 가치를 온 몸으로 체험합니다. 만약 해산의 고통이 없었다면, 인류는 심각한 “생명경시풍조”에 병들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는 곧 “영혼의 출산”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선교의 현장에 진통을 허락하십니다. 왜일까요? 만약 진통이 없다면, 영적 출산을 통해 얻은 한 생명의 가치는 그만큼 평가절하 될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 하나님 자신의 진통, 곧 십자가의 희생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선교 현장에서 전도자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바로 이 십자가의 진통에 참여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진통이 극심한 만큼 생명을 얻은 감격 또한 큰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2. 문화: “과연 신성불가침의 영역인가?” 1. 이제 문화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000년 5월 25일, 주요 일간지들은, 김수환 추기경이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재배(再拜)한 사실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사실 이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1939년, 이미 교황은 예수회 선교사들(Jesuits)의 ‘문화적응주의’를 수용하여 한국의 조상숭배 의식, 즉 유교식 제례를 인정했습니다. 문화적응주의? 피선교국의 좋은 전통문화를 최대한 존중하여 그 문화 안에 기독교를 토착화시키자는 것입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운 후에 영어나 한문을 가르치는 대신 한글을 (발굴하여) 가르친 것도 ‘문화적응주의’의 한 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국) 여학생들에게 서양 옷을 입히고 서양식으로 생활하도록 할 의향이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충실한 한국 여자가 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자기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를 소원하며, 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들을 한국 여자가 되도록 교육하려는 것이지 미국 여자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적응주의’의 장점? 피선교국 국민에게는 ‘주체성’을, 선교사들에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선교사들은 자기들의 소위 ‘우월한 문화’를 피선교국에 이식시키기 위해 파송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국의 문화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소개하는 사명을 가졌을 뿐입니다. 사실 ‘문화적응주의’를 실천한 최초의 선교사는 사도 바울입니다. 고전9:19~23를 보세요. 바울은 효과적인 복음선교를 위해 이 원리를 실천했습니다. 2. 물론 ‘문화적응주의’의 약점도 있습니다. 자칫 하나님의 말씀보다 문화를 더 앞세우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 선교사 바울은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두아디라 지방에서 보여준 바울의 태도를 보세요. 고전9:19~23에서의 태도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두아디라에 임했을 때, 지역주민들은 이 사건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두아디라의 전통신화에 따르면, 한 때 올림푸스의 두 신(Zeus & Hermes)이 두아디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주민들이 이들을 영접하지 않자, 그 신들은 두아디라 주민들을 홍수로 멸망시켰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 전통설화에 기초하여 바울의 사역을 해석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들의 전통적인 종교 의식을 따라 바울 일행을 예배하고자 시도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을 전도의 효과적인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이러한 종교적 행위을 가리켜 “헛된 일”이라고 말하며 이를 단호하게 배격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복음을 전달하는 수단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지만,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은 결코 문화에 ‘적응’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복음은 각 민족 집단의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타락했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일종의 (특정한 민족의 문화로부터 독립된) ‘보편적인 진리’로서 믿는 것이지, 그것을 예컨대 ‘유대 문화의 산물’로서 받아들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은 문화를 초월합니다. 선교국과 피선교국의 문화는 복음 앞에 나와, 함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평가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화는 결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화 안에는 자연히 “죄”가 들어 있습니다. 이 죄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리켜 죄라고 규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도의 아크바 선교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인도)에게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아내를 생매장하는 것과 전통적인 카스트 신분제도입니다. 이것들은 전통적인 신앙 안에서 합리화되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인도에 복음이 들어오자 이 악습들이 사라졌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첩을 거느린 자에게는 그 관계를 정리하고 회개하기 전까지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서양 문화를 거울삼아 일부다처제를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일부다처제가 죄임을 깨닫고, 당장의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것을 회개하고 청산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는 우상숭배를 죄로 규정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무관한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라는 형식은 ‘효심’이라는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을 분명이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효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요소도 있습니다. 제사의 형식은 이미 그 자체로서 정령숭배 및 샤머니즘과 같은 종교적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제사는 단순히 형식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막상 제사가 표현하는 동일한 내용을 좀 다른 ‘형식’으로 표현해보자--이를 테면, 추모예배--고 제안하면 결코 타협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제사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만큼 불신자들도 그것을 단순한 ‘관습’ 혹은 ‘형식’ 이상의 신앙적인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3. (결론) : 하나님의 부르심 1. 예수회의 ‘문화적응주의’가 맺은 선교의 열매들이 오늘날 보잘 것 없는 이유? 사람이 만든 문화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들까지 타협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선교지에 세운 교회들은 기독교의 형식과 토착 신앙의 내용을 섞어 놓은 ‘혼합주의’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사람에 대해서는 겸손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상황과 이성에 맞게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복음은 문화를 초월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모든 문화는--소위 ‘기독교 문화’를 포함하여--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고 죄를 찾아 회개하며 순종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선교사들은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 가운데 자기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조항이 있더라도 그것을 가감 없이 전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 점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십계명의 제2계명과 함께 제5계명을 좀 더 강조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제사를 금함과 동시에 기독교의 효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2. 자 결론을 내려봅시다. 2000년 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은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전도자를 통해 불신자들을 부르십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회 신부들이 사람을 섬기기 위해 겸손한 자세로 그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 불신 민족들의 문화를 연구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큰 열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복음으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전하는 그 복음의 말씀을 거울삼아 끊이 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의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로의 부르심은 반드시 “회개”로의 부르심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컬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The Call”이라는 중고등학생들의 회개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40만 이상의 청소년들이 워싱턴에 모여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마약, 섹스, 낙태, 폭력이 난무하는 학원 문화에 대한 철저한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인상 깊게 본 것은, 이 모임의 결론입니다. 미국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타락한 문화를 회개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세계 선교의 사명을 새롭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으로의 헌신을 다짐하며 집회를 마무리합니다. 이 회개 운동의 주제가 바로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 안에 회개로의 부르심과 선교로의 부르심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선교”라는 주제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선교는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 안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출처] 선교사 바울의 루스드라 선교|작성자 성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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