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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모금

에반젤(복음) 2022. 3. 27. 01:58
사도바울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모금


 

(바울의 예루살렘 표상을 중심으로)



 

1. 모금 성격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

K. Holl은 오래 전 (1921년) 그의 글 Kirchenbegriff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자신을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교회"로 (ekklesia tou theou) 즉, "가난한 자 (갈 2,10)" (Anawim-Frömmigkeit) 또는 "거룩한 자" 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구속사적으로나 교회법적으로 당시 초대교회사에서 모교회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법 차원에서 이방교회들에게 모금을 요구하였다 (Rechtsforderung). 모금은 예루살렘교회의 우선권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혹자는 모금을 이스라엘인들이 내는 성전세와 유사한 성격으로 본다 (참고 출 30,11이하, 느 10,32 1/3세겔, 마 17,24이하; 필로 spec. leg 1,14,77이하; Jos Ant 3,8,2; Strack-Billerbeck, 1, 760). 이스라엘인들은 20세 이상이 되면 일년에 한차례 성전세로 반세겔을 냈는데 모금은 바로 이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즉 이방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성전대신으로, 정신적인 성전으로 생각하고 헌금을 냈다. 여기서 헌금이 유대교의 성전세와 다른 것이 있다면 자발적으로 낸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들 H.-J. Schoeps, Paulus, 63; E. Schweizer, ThWNT 6, 412; K.F. Nickle, Collection, 74이하)

한편 D. Georgi는 모금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해 보면서 결론으로 바울의 모금 이해의 변화를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대신해서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예루살렘교회에 대해 이방교회들은 그들의 종말론적인 우위를 인정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이방교회들은 헌금을 한다. (즉 모금의 법적인 요청적 성격을 인정) 그러다가 뒤에 가면서 점점 이방교회들의 독립성이 강해지면서 이제 모금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하나의 도전적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 즉 종말에 이방인들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오는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폭로되고 그들을 돌이키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Hainz, Koinonia, 123ff도 유사). (K. Holl도 일찍이 윗 글에서 바울 사상의 변화를 말한 바 있다. 즉, 바울의 이방교회가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수위권을 깍아내리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그래서 교회의 중심의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기는데 {이는 시대착오적 발상}기여한다고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W. Schmithals, Apostelamt, 74; 참고 G. Strecker, Christentum, 458이하) 예루살렘교회와 이방교회는 서로 다르게 모금을 이해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Schmithals에 의하면 예루살렘교회는 모금을 법적인 성격으로 이해한 데 반해 이방교회는 이를 모교회에 윤리적으로 감사하는 성격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모금을 경제적 지원의 성격으로, 박애주의적인 원조, 예루살렘교회와 이방교회간의 하나됨, 연대, 연대정신, 종말에 이방인에 의한 예루살렘성전에 예물봉헌, 종말에 이방인에 의한 예루살렘 순례 (예물을 동반한), 상호 인정, 다원주의의 상징 등등 여러가지로 이해한다. (참고: 모금을 "동질성의 확보"나 "하나됨"로 보는 견해는 벌써 F.C. Bauer (Beiträge zur Erklärung der Korintherbriefe, Theologische Jahrbücher 9, 1859 81-82)에 의해 주장되었다.)

2. 예루살렘 모금 관련 성서구절들 (바울서신에 한함)

1) 갈 2.10 2) 고전 16,1-4 3) 고후 8-9 4) 롬 15,14-31

3. 모금의 발생, 전개, 종결

발생: 갈 2,10

* 갈 1-2에서 보듯이 바울은 예루살렘과 상관 없이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독립적으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증거했다. (시리아. 길리기아, 다메섹 등등에서)

* 바울의 가난하다는 단어의 용례로 볼 때 2,10의 "가난한 자"는 실제로 가난한 자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한 구성원 중 일부로써). 다시말하면 롬 15,26의 "성도"와 "가난한 자"의 관계는 동격이 아니라 (개역 성서가 번역하는 것 처럼) 부분의 관계로 (즉, 성도 중 가난한 자) 봐야한다. (Anawim-Frömmigkeit에 근거 예루살렘교회를 높이 보려는 것에 반대. 덧붙여 말하면 예루살렘 교인을 "거룩한"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해서 부르는 것도 바울이 일반 기독교인들을 일컬어 성도라고 부르것과 다름아니다.)

* 2,10에서 ("가난한 자를 생각한다" 동사 mnemoneuomen) 보듯이 경제적 지원보다는 "염두에 둠" 즉 "그들을 시야에 둔다"는 것이 우선이다. 즉 사도회의에서 비로서 서로 상관없던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간에 관련성이, 관계가 성립된다. 그들은 서로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고 있음을 보고 서로 대상은 다르지만 같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임을 서로 인정한다 (2,7이하). 그러므로 모금은 이 관계, 연결, 연대감의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상징이다.

전개: 고전 16,1이하, 고후 8-9

* 안디옥 교회에서의 불미한 사건 (갈 2,11이하)으로 둘 사이에 형성된 연대정신에 금이 간다. 둘은 서로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 동역자이다. 바울은 혈통이나 업적에 관계 없이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 구원을 얻는 다고 보았고, 예루살렘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된 이들은 바울이 사역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에 자신의 신학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거기에는 이미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 간의 식탁교제가 이루어 지고 있었다. (유대 정결법에 의하면 유대인은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하면 않된다). 결과는 예루살렘 교회의 견해가 교인들에게 더 설득력을 얻는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자신의 신학적인 지지자들을 잃고 유럽으로 떠나야만 했다. 이처럼 둘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미 맺어진 동역자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유럽에서 계속 모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 모금은 고전 16장에 의거해 볼 때 일주일에 한차례, 각자 집에서, 특별한 조직을 통하지 않고 이루어 졌다.

* 고후 8-9에서 보면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바울은 열심히 모금을 권유한다.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신학적인 우위성에 근거해서 설득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모금의 논거로 삼는다.

1) 원래 부유하셨으나 우리를 위해 가난해진 주님을 본받아 하자 (8,9)

2) 동등의 원칙. 지금 너희가 부유해니 가난한 예루살렘을 도와주라. 그러면 그들이 언제인가 너희를 도울 것이다. (8,13이하; 비교 롬 15,27)

3) 자연법칙: 많이 뿌린 자는 많이 거둔다. (9,6)

4) 넉넉하게 돕는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9,7)

5) 헌금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풍성히 채워주신다. (9,8-10) (혹자는 10절을 이방인의 순례와 연관 {사 55,10 <70인 역>}시키는 데 이 구절은 그와 상관없다.)

6) 모금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9,11-13) (13절의 hupotage는 복종의 의미가 아니다)

종결: 롬 15,14-31

* 롬 15,25에 바울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즉, 모금을 전하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이 나온다. 즉, 모금사업은 이제 종반으로 치닫는다. 31절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이 모금을 받도록 기도해 달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바울과 예루살렘 교단의 사이가 악화되어 상호연대의 상징인 모금을 예루살렘교회가 받지 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50년대 이후 예루살렘교회는 당시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유대화되어가는 와중에 있었다. (31절에 유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험, 참고: 유대전쟁 66-70 년). 둘 사이의 관계악화는 예루살렘 교회가 점점 유대화되어 가면서 내부에 (갈 2,4; 참고 행 15,1.5; 21,20이하)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복음",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인정하지 않는 여론이 점점 거세지는 것에 기인한다고 보겠다.

* 한편 롬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신학적인 우위에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19절, 27절. 여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나와 온 세상으로 퍼진다. (19절)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영적인 빚을 지고 있다. (27절)

* 일단 앞에서와 (갈, 고전, 고후) 달리 롬에서 그런 암시가 나오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예루살렘여행을 앞둔 바울이 마지막으로 모금을 격려하기 위해서, 사용 가능한 모든 논증을 쓰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로마서에서 바울은 모금과 관련해서 예루살렘을 신학적으로, 교회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보았을까?

* 19절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그 주위로, 그리고 일루리곤 (지금의 유고)까지 퍼져나간다는 말이 나온다. 이 구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종말에 말씀이 복음이 퍼져나가는 (참고 사 2,3; 49,4; 참고 66,19이하) 출발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혹자는 이방인은 (바울을 포함해서) 이 출발지인 예루살렘의 우위를 인정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중점은 예루살렘이 종말론적인 복음의 출발지이니까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 그렇게 복음이 퍼져나가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즉, 예루살렘 교회와 동등하게 바울도 초기부터 복음이 퍼져나가는데 공을 세웠고 따라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이 구절은 말한다 (참고 A.S. Geyser, Essai, 158f).

* 27절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인들에게 영적인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가지고 이 글 맨 앞에서 언급한 K. Holl이나 K.F. Niclke 등은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구속사적인 우위를 인정하는 전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 구절은 19절의 빛에서 해석해야 한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단과 신학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바울과 예루살렘은 복음이 종말에 세계까지 퍼져 나간다는 전체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같이 수고한 한 몸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고전 9,11의 정신에 따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참고 갈 6,6; 빌 4,15)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이방인은 바울에게 영적으로 빚을 졌고 따라서 육신의 것으로 도울 의무가 있듯이 바울과 하나인 예루살렘에게도 이방인들은 도울 의무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 27절은 전체로 본 복음의 땅 끝까지 퍼져나감에 대해서, 그리고 바울도 예루살렘교회처럼 이 복음전파에 기여했고, 전제로 볼 때 둘은 하나임을, 그래서 직접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지 않았지만, 거시적으로 보아 둘은 하나임으로 이방인도 예루살렘을 도울 의무가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이방인들이 특별히 복음의 출발지로서의 예루살렘 교회에 영적인 빚을 졌기 때문에 모금을 해야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복음의 출발지로서의 예루살렘에 대해 다른 곳에서 어떤 관심도 피력하지 않는다. 바울에게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 퍼져나가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바울의 주 임무는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위해 죽을 위험을 여러번 겪었다 (고전 4,9; 고후 1,8이하; 4,11; 11,23; 빌 1,21이하). 물론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와의 "연대", "관계"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는 바울의 위의 주된 임무에 비교할 때 부차적인 것이다. 바울은 초기에 예루살렘과 상관없이 십 수년간 (갈 2,1) 복음을 전했다. 만약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의 주도하에 전달한 모금을 거부했다 하더라도 자유로운 몸이였으면 그는 이방인을 위해 계속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금은 신속히 도와 주어야 될 그런 성격이 아니였다. (모금운동은 수 년간 지속되었고 고후 8,6, 중간에 중단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 예를 들면 갈 2,10의 동사 "힘써"espoudasa 의 시제는 Aorist이다. 이를 가지고 모금 운동이 지속되지 않은 증거로 볼 수 도 있다) 물론 롬 15,26-27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의 교회에서 모금운동이 종결되어 바울은 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중대한 스페인 전도여행을 앞둔 이때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모금을 전하러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할 필요가 (더 나아가 예루살렘교회가 이를 받는다는 보장도 불확실한데) 있었을까?

* 이상을 놓고 볼 때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으로 모금을 전하러 가는 여행은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 재정립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이 당시의 땅끝인 스페인으로 가려는 이유를 알아보자. 바울은 롬 15,20에서 그리고 고후 10,15 이하에서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으로 가서 증거하고 싶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 구절을 고전 3,6.10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 등과 비교하면서 바울은 첫 기초를 놓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두 구절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에서는 전도자간의 (아볼로와) 공동작업을 전제하는데 반해 고후, 롬의 구절에서는 그런 맥락이 아니다. 바울이 고후에서 복음의 처녀지로 가고싶다는 희망사항은 물론 종말에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한다는 맥락이긴 하지만 고린도 (후서) 교회의 대적자와 상관이 있다. (이렇게 보는 주석류들 H. Windisch, KEK 6, 312; R. Bultmann, KEK Sonderband, 198; Ch. Wolff, ThHK 8, 207). 바울은 여기서 유대적인 경향의 대적자를 만난다. (한편, 고린도 전서에서 만나는 대적자들은 이와 달리 헬라적 성령주의적 열광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타 지역에서 나중에 바울이 기초를 닦아 놓은 고린도로 들어와 자신의 유대적인 복음을 가지고 고린도교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려고 한다. (고후 3,7-18; 11,4.13.22) 이런 비슷한 부류의 대적자들을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도 만난다 (갈 2,3이하; 3-4장; 5,7-11; 6,12이하). 바울은 이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다른 곳으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어한다. 로마서는 고린도 후서 직후에 쓰여졌고 여기서도 복음이 않 전해진 곳으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 (롬 15,20이하), 그리고 바로 이어서 몇 년 전부터 로마에 갔다가 스페인로 가길 원했다는 이야기 (15,23이하) 등은 계속 로마서를 쓸 당시에도 고린도 후서에서 했던 생각이 계속 유효함을 말해준다.

* 즉, 바울이 스페인 여행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상당 부분 대적자들 때문이다. 그랬기에 바울은 새로운 지역에서도 대적자들을 만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왜 바울이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여행을 하는 지가 설명된다. 바울은 신학적으로, 교회법적으로 예루살렘교회를 우위에 뒀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모금이라는 약속을 지키면서, 유명무실해진 둘 간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으로는 미지의 지역에서 만날 대적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비록 그렇게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 종말론적인,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예루살렘 교회는 신학적으로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안디옥교회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도 결국 예루살렘교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 바울에 등을 돌린다. 그리고 바울은 거기서 비난의 화살을 직접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자들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설득에 넘어간 바나바와 교인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드로에게 겨냥한다. 갈 2,1이하). 즉, 이러한 예루살렘교회가 당시 초대교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볼 때 장차 만날 미지의 대적자들에게 바울 자신과 예루살렘은 동등한 파트너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바울의 복음의 정당성, 사도성을 주장하는 데 아주 설득력있는 논증이 될 것입니다.

4. 잠정적인 결론

모금을 표시할 때 charis (자혜), koinonia (연대감), eulogia (축복의 선물), prothumia (자발적으로 준비되어 있음), leitourgia (봉사), karphos (열매), agape (사랑), hadrothes (풍성함) 등의 용어가 사용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모금은 자발적인, 연대정신에 의한 사랑의 봉사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식으로 든지 자신의 이방교회 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금은 동등한 파트너 간에 주님의 사랑을 근거로 이루어 지는 상호 인정 정신에 근거한 도움이지 예루살렘 교회의 신학적인 교회사적인 우위를 인정한 결과에 따른 이방교회들의 상납이 아니다.

모금 전달을 통해 희미해진 상호 인정과 존중의 정신을 새롭게 환기시키기 위해 바울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 여행이 스페인여행을 바로 목전에 둔 상태에서, 그리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감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스페인 여행은 상당한 정도 고린도 등에서 부딪친 유대적 성향의 대적자들 때문이라는 점에서, 이 여행은 스페인 여행을 염두에 두기도 한 것이다. 모금을 주고 받음으로써 새로 환기되는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은 신학적으로 동등한 동역자라는 사실은 새 선교지에서 미지의 대적자들과 대항할 때 바울의 사도성을 증명해주는 아주 좋은 논거가 된다. 이를 획득하기 위해서 바울은 모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났다.

참고문헌

- Berger, K.: Almosen für Israel. Zum historischen Kontext der paulinischen Kollekte, NTS 23, 1977 180-204

- Bultmann, R.: Der zweite Brief an die Korinther, KEK Sonderbd., 21987

- Georgi, D.: Die Geschichte der Kollekte des Paulus für Jerusalem, ThF 38, 1965

- Geyser, A.S.: Un Essai D'Explication de Rom. XV.19, NTS 6, 1959/60 156-59

- Gnilka, J.: Die Kollekte der paulinischen Gemeinden für Jerusalem als Ausdruck ekklesialer Gemeinschaft, in; Kampling, R./ Söding, Th. (Hg.), Ekklesiologie des Neuen Testament. FS K. Kertelge, 1996 301-15

- Hainz, J.: Koinonia. Kirche als Gemeinschaft bei Paulus, BU 16, 1982

- Holl, K.: Die Kirchenbegriff des Paulus in seinem Verhältnis zu dem der Urgemeinde, in; K.H. Rengstorf (Hg.), Das Paulusbild in der neueren deutschen Forschung, WdF 24, 1964 144-178 (= ders., Der Osten, Ges. Aufs. zur Kirchengeschichte II, 1928 44-67)

- Nickle, K.F.: The Collection. A Study in the Strategy of Paul, Basler Diss. 1963 (= London 1966)

- Peterman, G.W.: Romans 15.26: Make a Contribution or establish Fellowship? NTS 40, 1994 457-63

- Schmithals, W.: Das kirchliche Apostelamt. Eine historische Untersuchung, Göttingen 1961

- Schoeps, H.-J.: Paulus. Die Theologie des Apostels im Lichte der jüdischen Religionsgeschichte, Tübingen 1959

- Schweizer, E.: Art. pneuma, ThWNT 6, 387-450.

- Strack, H.L/ Billerbeck, P.: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1-5 (Bd. 3, 1926; Bd. 4/1.2, 1928), München

- Strecker, G.: Christentum und Judentum in den ersten beiden Jahrhunderten, EvTh 16, 1956 458-77

- Windisch, H.: Der zweite Korintherbrief, KEK 6, 1970 (= 91924)

- Wolff, Ch.: Der zweite Brief des Paulus an die Korinther, ThHK 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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