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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書信에서 예수의 十字架와 復活이宣敎 行爲에 대해 가지는 神學的 含蓄

에반젤(복음) 2022. 4. 13. 23:53
 

 바울 書信에서 예수의 十字架와 復活이宣敎 行爲에 대해 가지는 神學的 含蓄


                                                   총신대학신학대학원:이경진

 

I.  서     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시면서 죄인된 사람을 철저히 섬기시는 자세로 사역을 이루어 나가셨고 결국은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과의 높은 장벽을 넘으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form of a bond-servant), 사람의 모양(appearance as a man)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humbled), 죽기까지 복종(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1)하신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특사(agent)로서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神)이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도 십자가라는 형틀에서 죽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난인 것이다. 또한 그의 삶이 십자가를 향해 부단한 수치, 모욕, 침뱉음 그리고 사탄의 도전을 받는다는 것도 고난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께서 반드시(must) 겪어야 할 것들이었다. 예수께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기 이전에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2) 이  미리 예언된 것으로 환경에 따라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없는 것이 아닌 수난(passion)이었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을 당해야 했다.

이 논문을 시작함에 위의 사실을 언급한 것은 현대 선교에 있어서 선교하는 것이 교세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며,3) 다  목적을 위한 디딤돌로서 거쳐가는 선교를 하는 것, 또는 선교를 의기양양한 승리로만 보는 개념(고난받는 종의 이미지에 적절하게 들어맞지 않는 군사적 비유를 사용하는)때문에4) 선 를 하다가 열매가 눈에 띄게 안나타나니 곧 포기하는 것, 선교 초기에 는 예수의 죽으심의 길을 따르겠노라고 목숨도 아끼지 않지만 교회가 확장만 되면 섬김이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 등 오히려 십자가에 거치는 선교를 하는 사례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 논문을 통해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은 선교의 내용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전하여 곳곳에 생명의 부활이 있게 되지만, 선교하는 자가 실제적으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여한다는 깊은 묵상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John R. W. Stott가 이를 잘 지적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교회 성장에 있어 고난이 핵심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씨가 죽어야만 열매를 맺기 때문에 -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그에게 이제 모든 권세가 그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그의 교회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우주적 주권을 부여했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고난이 영광에 이르는 길이며, 죽음이 삶에, 연약함이 권능의 비밀에 이르는 길이라는 역설적인 원리를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원리를 선교에 적용시키려는 것은 꺼려한다.”5)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사에 있어서 과거의 한 사건만이 아니었다. 예수 이후로 계속되고 있는 사건이다. 그가 계속 실제적으로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의 사역의 모습 속에서도 실제화 되도록 하였다. 그러기에 고난과 환난의 삶과 사역을 한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는 생명이었고 또한 많은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이었다. 바울은 자기의 사역이 다소 남을 대신해서(vicariously) 핍박을 받는다는 강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6)

이러한 논지에서 필자는 1)선교의 내용으로서의 십자가와 부활, 2)선교 행위에 있어서의 십자가와 부활, 3)사도 바울이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십자가와 부활, 4)선교 사역에 있어서 고난 받음의 의미, 5)선교사의 사역은 redemptive 한가?에 대해 검토하려 한다.

이제껏 출판된 선교에 관한 연구 자료들이 대부분 선교의 목적, 선교의 근거로서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 선교사의 자질, 선교사의 처신 등 일반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지만, 그들이 선교의 본질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지고 끊임없는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면서도, 무한한 능력을 체험하며, 그의 사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위대한 사역임을 성경을 통해 재 조명해 주는 깊은 묵상이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몇 가지 주제들을 논증하면서 선교사와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적 함축을 연구할 것이다.

첫째, 사도 바울은 많은 주제들 중에서 십자가를 전하기에 힘썼다. 왜?

둘째, 그는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기만 했는가? 십자가와 부활에 실제적으로 참여하여 예수의 죽으심이 자기의 사역이었으며, 예수의 부활하심이 자기의 사역이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이 또 다시 감당하는 듯한 말까지 한다. 이를 고린도후서 4:7-12, 빌립보서 3:10-11, 골로새서 1:24의 주경(exegesis)을 통해 증명할 것이다.

세째, 이로 보건대 선교사의 행위와 십자가, 부활과는 어떠한 함축이 있는가, 즉 선교사의 고난받음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해석할 것이다.

끝으로,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선교사의 행위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redemptive하다는 것을 설명하여, 선교사의 특권과 책임성에 대해 약술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선교사 뿐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정립해야 할 문제이다.

 

II. 사도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의 십자가와 부활

 

바울이 시작한 지 얼마 않되는 기독교 운동에 관여하게 된 것은 박해자로서였다. 그는 후에 “나는 사도 중의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 또한 갈라디아 개종자들에게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갈 1:13) 라고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되새겨 준다.7)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 9:1)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대제사장 공문을 청하여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투옥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이유는 그가 유대교에 열심이었고(갈 1:14a; 빌 3:6), 모세의 율법에 열심이었기에 토라(Torah)를 경시하는 것 같아 보이는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더우기 나무(십자가)에 달려 저주의 죽음을 죽은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blasphemy)이며, 율법을 위반(transgression)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8)

신명기 21:23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기에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수치였다. 핍박의 근거요 목표였다. 더우기 예수가 부활했다는 선포는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만드는 모독이었다.

이런 그가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는 자가 되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른 이방 나라에까지 전파하게 되었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가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을 자신의 삶속에서 실제적으로 체험하며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께서 현현(Christophany)하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부터(고후 5:16; 갈 3:13) 하나님의 아들로,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높이신 메시야로 그에 대한 참 지식을 가지는 순간이었다(고후 5:16; 갈 1:16; 빌 3:8). 바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참으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9)

예수에 대한 모든 태도나 관점이 이 사건 이후로 철저히 변했음은 물론이다.10)

현대의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깊은 묵상과 확신이 없으면 선교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런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전혀 새로운 관점을 소유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지 않으면 선교(광의의 의미로는 전도)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선교행위와 십자가와 부활이 어떤 함축이 있는지  먼저 사도 바울이 선교의 내용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한 것과, 십자가와 부활이 바울 자신의 선교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살펴보려 한다.

 

   A. 선교의 내용으로서의 십자가와 부활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을 받은 바울이 전파한 내용은 무엇이었나? 바울 서신들을 본다면 그것들은 바울이 선교하면서 설교한 내용들을 직접 제시해 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세워진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진 것들이며, 특수한 역사적  상황들 속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또한 구전의 범주에 속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문서로 전달된 서신의 범주에 속한다.11)

그러나 이 서신들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선교로 되어진 자들이며, 그가 전하는 내용을 들은 자들이며, 이 서신들의 중요한 기능이 그들에게 이전에 자기가 전했던 것들을 회상케 하고 재 정립케 하는 것이기에,12) 바울 서신들을 통해 그가 전한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전파한 내용으로 ‘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 ‘사랑’, ‘교회’, ‘율법’, ‘성령’ 등 그 내용이 많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바울이 전한 내용 속에서 결정적이며 가장 중심적인 요소가 되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없이 분명한 사실이다.13)

한 가지 살펴볼 것이 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내용을 ‘복음(ευαγγελθξν)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롬 1:1),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롬 1:9), “나의 복음”(롬 16:25), “다른 복음”14)(고전 11:4; 갈 1:6,7,9), “구원의 복음”(엡 1:13) 등 다양한 표현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나의 복음” 혹은 “우리의 복음”(살전 1:5; 살후 2:14; 고후 4:3; 고전 15:1)이라고 말할 때 온전히 자기 특유의 복음, 다른 사도들의 복음들과는 판이한 복음을 선포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단 하나의 복음밖에 모르고 있었다(갈 1:6).

그러나 그의 복음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바를 이야기하는 형태로 선포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이셨다.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할 사도직의 은총을 자기가 받았다고 의식했기에 “나의 복음”이라고 말한다.15)

또한 그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하며 복음은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능력이며,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는 것이라 한다.

그가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독특하게 여기며, 그의 생명까지 바치려 하며, 능력까지 있다고 하는가?

공관 복음서에서는 ‘복음’을 하나님 나라(천국)와 연관시키고 있으나,1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일치시키고 있다. 특히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집중하고 있다.

첫째,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다.

“십자가의 도(the word of the cross)”를 전했다(고전 1:18). “십자가의 도”는 언제나 인기가 그다지 없었다. 사도 바울 당시만 하더라도 그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다시 말해서 그것은 유대인의 독선(self-righteousness)과 헬라인의 지성주의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담대히 전했다.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도덕심에 의해 마음대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으며, 또한 헬라인도 그들의 철학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1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할 만큼 예수의 십자가에 집중했다(고전 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며 기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거리였다(갈 6:14).18)

기독교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것을 반대하려 들지 않는 자들과 같지않고, 또한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하였다.19)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여 인류를 위한 구속(redemption;엡 1:7), 화해(reconciliation;엡 2:13; 골 1:20), 칭의(justification;롬 5:9), 희생(sacrifice;롬 3:25)적 죽음을 전하였다.

십자가에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를 도말하여 제하여 버리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하여 율법이 요구할 모든 죄 값을 십자가로 지불하셨다는 즉 율법요구의 말소 처분을 강조하였다(골 2:14-15).20)

이렇듯 바울의 복음 전파는 예수의 십자가 중심이었다.

 

둘째,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다.

십자가 사건은 결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21) 그는 복음을 언급하면서 육신으로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전한다(롬 1:2-4).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f).

또한 전승으로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다. “내가 받은(οαρεδ κα)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οαρελαβξν)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주목하여 볼 것은 바울이 전했던 전승은 그가 받았던 것보다 더 풍부했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심에 대한 기록을 그 자신이 개인적인 증거로써 확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22)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들을 살펴보면 예수의 신성과 그의 구원의 완전,확실성을 보증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도 바울의 증거의 핵심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었다. 칭의도, 화해도, 세례도, 교회도, 바울 서신에 나오는 어떠한 주제들도 십자가 사건에서 해답이 있다.

그 당시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형태의 십자가 처형,23) 키케로(Cicero)가 말했듯이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런 형벌”,24) 로마인들에게는 중대한 범죄, 대역죄, 노예에 대한 처벌의 전형으로 십자가 형,25) 희랍 세계에서도 모든 사건에 있어서 최고의 형벌(summum supplicium)인 십자형에 의한 죽음,26)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저주스런 죽음(신 21:23).

이 모든 점들을 배경으로 한다면 바울의 십자가에 대한 증거는 희랍인, 로마인 모두에게 미친 발언이요, 건방진 행위로 받아들여졌음이 틀림없고, 더우기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이었으며 더욱 더 그러했던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27)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 28)”이다(고전 1:23b).

바울도 이들과 같은 자였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미련한 것” 즉 세상이 미련하다고 여기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역, “하나님의 약한 것 즉 세상이 어리석고 약하다고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의 지혜, 세상의 지혜보다 지혜롭고,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29)

바울은 특히 그 당시에 살았던 아테네의 현자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깊이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복음 메시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힘이며 지혜이기 때문이다(고전 1:24).

구원은 인간의 지혜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30)

죄인들은 십자가의 도가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증오한다. 선교사들은 십자가의 도가 교만한 자들에게 불쾌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는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그리스도의 공로보다 인간의 것을 전하는 것이 더욱 쉽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것을 전하거나’ 또는 ‘할례를 전하거나‘하는 것 중 양자택일해야 할 운명에 선교사들은 처해있다.31)

현대의 생활이 급격히 변하여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격동기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기에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하여, 지금의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새로운 복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십자가만을 이야기하는 낡아빠진 복음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32)

또한 정치 신학이 발전하여 사회 구원을 강조하며 인간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며 선교를 하는 것은 좋지만, 본질적인 것을 놓쳐버리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상황들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가진 지식, 업적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교의 핵심으로 전했다는 것은 현대의 선교사의 전파와 가르침의 내용도 본질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강조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수사법과 지혜있는 말을 삼갔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인간적인 것과 혼동하지 말며, 복음의 성격을 명료하게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같이 선교사는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전달자인 선교사를 보낸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여야 한다.

 

   B. 선교 행위에 있어서의 십자가와 부활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선교의 내용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선교사로서 사역을 함에 선교 행위 자체의 근거가 되며, 형식(pattern)이 되며, 목표가 되었다.

십자가를 수치로 알아 핍박까지 하던 자가 이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ambassador)이 되어” 예수로 인해 얻게된 하나님과의 화목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고후 5:18-20).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하며 그 자신이 먼저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준다고 한다(고전 2:2).33)

또한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군”34) 이 ,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며, 각 서신들 서두에 자신을 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 1:1; 빌 1;1), “사도”(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골 1:1; 딤전 1:1; 딤후 1:1; 딛 1:1)로 부르는 것은 더 이상 십자가의 대적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전하는데 충실함을 보여 주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선교의 근거가 된다.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선교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 생명을 가져오게 한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며, 자신의 율법의 공적으로가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동등하게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얻게 되었다.

 바울 자신의 죄로 인한 저주를 예수께서 대신 받았고, 진노의 관계에 있는 자를 화목하게 하시며, 더 이상 정죄받은 자로 여기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이 비밀을 나타내어 구원 사건이 타인에게도 적용되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 2:4).

예수의 십자가에 자신의 옛 사람을 연합하여 못 박았기에 이전의 삶을 다시 살 수 없다. 더우기 예수의 부활하심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에 그의 부활하심을 본받아 생명을 가진 자로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수 죽음과 부활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기에 이 객관적 사실이 주관적으로 효력을 미치도록 이미 그 은혜를 받은 선교사는 이를 전하여야 한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와 부활은 선교 행위의 형식이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고난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도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고후 6:4-10).

바울은 자기가 들은 메시지를 단순히 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35) 즉 자신 자체를 주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됨이니라”(살전 2:8). 이것은 모든 순수한 기독교 가르침과 복음전파의 행위에 있어서 본질이다. 살아있는 기독교 사역은 희생이 따른다.36)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b)37) 라고 권면을 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나쁜 대우(evil treatment)를 받게되어 있다고 하여 복음을 전함에 고난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38)

기독교의 메시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메시지의 전달자들도 반대하기 마련이므로 선교 행위에 있어서 고난은 당연한 것이다(딤후 1:11-12 3:11-12; 4:5 참고). 39)

부활의 소망과 확신이 없을진대 바울의 생애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불쌍했다(고전 15:19). 하지만 역(逆)으로 그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체험하고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기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강조하면서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며 이를 감수할 수 있었다(고전 15:31).40)

바울은 참 사도의 표시로서 고난을 겪음을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사도와 비교하며 진술하고 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23-30).

거짓 사도(ψευδαοξστξλξθ), 궤휼의 역군(εργαταθ δξλθξθ),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μετασχηματθωξμενξθ εθζ αοξστξλξυζ)은 자기를 자랑하며, 높은 자로 군림하나(고후 11:20), 참 사도인 자신은 낮추고(11:7), 그리스도와 고린도인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며 염려한 것을 참 사도로서 자신의 선교 행위에 핵심을 두고 있다.

그는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로서(갈 6:17),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한다(골 1:24).

그는 자신의 선교에서 환난을 받으며 부활을 체험했다.

“핍박과 고난과...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 3:11). 즉 자신이 궁핍하며 환난 가운데 처하였지만 그런 가운데서 자신을 구해 주시는 생명을 체험했던 것이다.

고린도후서 1:5에서도 같은 의미를 제시해 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이는 그러한 환난 속에서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함이라 한다(고후 1:9).

또한 그가 체험한 부활은 자신에게서 뿐 아니라 복음을 받는 자들에게 체험케 되기에 더욱 고난을 받음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2)

바울은 놀라운 말을 하는데 빌립보서 3:10-11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며,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고난에 참여하여 교제키를 원하고, 또한 그것을 본받기를 원한다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바울 선교의 목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의 삶, 행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풍성히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풍성함을 체험했기에 선교의 봉사를 하며, 그것을 전했고, 다른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방식대로 전했으며, 이로인해  다시 십자가와 부활이 효력을 이루어 유익을 보는 자가 많이 생기기를 기대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바울이 어떻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실제적으로 참여하였는지를 고린도후서 4:7-12, 빌립보서 3:10-11, 골로새서 1;24을 통해 살펴보며, 이로 보건대 선교사의 사역은 십자가와 부활과 어떠한 신학적 함축이 있는지를 논증하겠다.

 

III. 사도 바울이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십자가와 부활

   A. 고린도 후서 4:7-12

 1. 배경

고린도에 복음을 전파한 것은 제 2 차 전도 여행에서였다. 바울은 로마로부터 추방당한 두 명의 유대인-아굴라, 브리스길라-과 함께 기거하면서 회당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했다. 얼마 후 유대인의 반대로 인해 그의 전도 방향이 이방인들에게 향했고, 디도 유스도의 집을 사용하므로 많은 사람을 믿게 하는 결과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함께 있었다.41)

그러나 이 곳의 도덕적 방종과 지적 교만의 분위기 속에서 고린도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많은 반대자가 있었다.42)

그 후 제 3 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 도착했던 주후 52년에 고린도 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 교회와 두 차례의 접촉을 가졌다.43)

그리고는 주후 55년 경 고린도 전서를 디도 편에 보내었고 후에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에 갔으나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중단되었다(고후2:12-13).

그는 마게도냐에 사역을 하였는데(고후2:13; 행20:1-2), 그곳에서 막심한 환난을 겪으며(고후7:5), 디도로부터 고린도의 소식을 들었다(고후7:6 이하; 고후10:2,10,12: 11:4; 12:16,20-21). 이로인해 세 번째 방문을 위해 고린도 후서를 써서 디도에게 보낸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특히 그의 사도직에 대해 변호하며 기독교 사역의 참된 특징을 지적해야만 했었다(1-7장). 그리고는 연보에 대해 부탁을 한 뒤(8-9장), 미래에 방문할 것을 언급하며 바울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있다(10-13장).

3:1-7:16까지는 사역자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4:1-5:10까지 사역자 자신은 고난을 받으나 오히려 그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크기에 사도직은 영광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4:1-6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主)되신 것과 자신은 종된 것을 전파한다고 하며 하나님을 아는 빛인 예수 만을 전파했음을 말한다. 이것을 가지고 있기에 그는 역경과 고난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오히려 그의 능력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4:7-18까지 언급한다.

 

 2.주해

 

a.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 Εχξμεν δε τξν  ησαυρξν τξυτξν εν ξστρακθνξθζ σκευεσθν”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δε)”가 들어가 있어서 바울이 바로 전에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과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보잘것 없는 그릇을 대조시키고 있다.44)

“보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6절)을 의미한다.45) 그 나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적 영광의 위대함과 그것이 들어있고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질그릇이라는 연약함과 무가치함과의 대조는 눈에 띄고 있다. “질그릇에”(εν ξστρακθνξθζ σκευεσθν)이란 고린도 시장에서 동전 한 두 푼에 살 수 있는 도기 램프(pottery lamp)를 지칭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도기는 고대 세계에서 잘 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46) 이는 사도 자신을 의미하는 낱말이다.

이러한 대조는 다음의 말들에서 그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즉 질그릇의 무가치함은 복음이 전파되어 인간의 일생에 효력을 끼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능력의 심히 큰 것(such transcendent power)”이 하나님의 것이지 사도의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47)

이 구절은 그래서 두 가지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즉 바울은 무력하게 고난을 받는 자에 불과하므로 그 자신이 신적 능력의 참된 근원이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지만, 다른 한편 그와 같은 능력이 그가 받는 고난의 당연한 결과로부터 그를 구해내듯이 그 자신이 신적 능력이 현시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48)

 

b. 8-11절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강조한 뒤 곧 바로 자신이 겪는 환난들을 열거하고 있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4:9-13을 회상하는 언어로 무가치하고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사도 자신의 연약함과 무의미함(insignificance)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도들의 고난(고후1:8-10 참고)과 그들이 보호 받음,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비참한 그들의 운명과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됨 사이의 대조를 이루어 끝에는 예수의 죽인 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과 그렇게 한 결과 즉 예수의 생명이 죽을 자신들의 육체에 나타난다는 대조로 연결하고 있다.4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8a)

“εν οαντθ  λθβξμενξθ αλλ’ ξυ στενξχ ρξυμενξθ”

 

“ λθβξμενξθ”50)를  롯해 8개의 분사는 7절의 “Εχξμεν”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εν οαντθ”란 ‘어떤 방향에서나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의 뜻으로 8-9절의 동사에 모두 연결된다.

“우겨쌈을 당하여도”는 “hard pressed"(REB), “afflicted”(RSV; NASB) “괴로움을 당해도”(현대인의 성경), “아무리 짓눌려도”(공동번역)로 번역되고 있는데, 환경의 압박과 사람들의 적대로 괴로움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살전3:4; 살후1:6-7).51)

“싸이지 아니하며”는 “not crushed”(NASB; RSV; NIV), “never cornered”(REB), “찌부러지지 않고”(공동번역)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좁은 장소로 밀어 넣다’는 뜻으로 방이 좁고, 제한된 공간으로 인한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52) 즉 ‘공간적으로 압박을 당하지만 아직까지 여유가 있는’이라고 직역된다.

이 비유는 적들로부터 심하게 공격 당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몸을 피할 여유가 있는 전투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며 10절에서 “항상”이란 말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이러한 경험은 끊임없이 계속됨을 알 수 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8b)

“αοξρξυμενξθ αλλ’ ξυκ επαοξρξυμενξθ”

 

“답답한 일을 당하다(αοξρξυμενξθ)”는 ‘당황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는 뜻으로 papyri에서는 채권자(creditor)들에 의해 망하여 진퇴양난인 자에게 사용된 말이다.

“낙심치 아니하며(ξυκ επαοξρξυμενξθ)”는 위의 단어의 강조형으로 활용 가능한 수단이나 방법이 없이 완전하게 닫혀버린 상태를 나타낸다. REB는 이 대조적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bewildered, but never at our wits' end”, 즉 ‘실망하고 당황했지만 완전히 실망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53)

또는 ‘무엇을 해야 할찌 모르나 모든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다(not knowing what to do, but never bereft of all hope)’라고 의미할 수 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9a)

“δθ κξμενξθ αλλ’ ξυκ εγκαταλεθοξμενξθ”

 

“핍박을 받아도(δθ κξμενξθ)”는 ‘동물처럼 쫓기워 잡히다(hunted down like an animal)”, “박해받다(persecuted)’는 뜻으로,“궁지에 몰려도”(공동번역)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4:9-13, 고린도후서 6:3-10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직을 감당하면서 닥치는 고난들 즉 복음의 대적자들로부터의 핍박을 가리킨다.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ξυκ εγκαταλεθοξμενξθ)”는 보통 “not forsaken”(RSV; KJV; NASB)으로 번역되는데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공동번역)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핍박하고, 그의 생명을 멸하여 쓸모없게 만들려고 애쓰도록 허용하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를 버리시거나, 그를 쫓는 무리들의 수중에 넘겨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해석하는 이유는 εγκαταλεθο 라는 단어가 LXX에서 그의 택한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나오기 때문이다(창28:15; 신31:6-8; 수1:5; 대상28:20;시15:10;37:25,28).54)

대적하는 것이 인간 또는 악마이든지 어떠한 것이 대적할찌라도 질그릇들은 핍박들을 참을 수 있고 계속해서 섬길 수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의 연약함 속에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55)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하고”(9b)

“καταβαλλξμενξθ αλλ’ ξυκ αοξλλυμενξθ”

 

“꺼꾸러뜨림(καταβαλλξμενξθ)”은 힘에 의해 ‘내던져지는(throw down)’  ‘때려 눕혀지는(strike down)’것으로 이 말은 레스링에서 적수를 내던지는 것(Windisch), 또는 어떤 사람을 칼이나 다른 무기로 때려 눕히는 것(Plummer)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어 진다.56)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맞아서 쓰러져도 죽지 않습니다.”

 

“망하지 아니하고(ξυκ αοξλλυμενξθ)”는 ‘죽지 아니하고’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사도 바울은 원수들에게 핍박 당하거나 쫓김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잡혀서 땅에 메어침을 당하였다. 그러나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처음에는 끝까지 밀리고, 그 다음에는 포위되고, 점점 압박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결국 넘어진 병사에다 비유하고 있다.57)

이러한 경험을 실제로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에 갔을 때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그를 돌로 치고 죽은 것 같은 몸을 성 밖에 끌어 낸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일어나 다시 성에 들어갔다(행14:19-20).

 

이렇게 네 가지의 대조는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다.

‘Hemmed in, but not hamstrung; not knowing what to do, but never bereft of all hope; hunted by men, but never abandoned by God; often felled, but never finished.’58)

 

이상 여덟 개의 분사로 열거된 바울의 경험들은 그가 끊임없이 겪는 사도로서의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난들은 바울을 파멸로 몰고가서 사도직을 수행못하게 막으려고 했을지라도 이것들은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한하신(inexhaustible) 능력과 연결되게 하였다.59)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절)

“οαντξτε την νεκρ σθν τξυ ’Θησξυ εν τι σ ματθ οερξφερξντεζ  θνα καθ η ω η τξυ ‘Θησξυ εν τι σ ματθ ημ ν φανερ  η”

 

10절은 앞의 8-9절을 요약하며, 그의 역설적(Paradoxical)경험을 설명하며 ‘항상 죽으나, 항상 산다(always dying,yet always alive)’는 클라이맥스로 옮겨가고 있다. 그래서 네가지 종류의 고난은 η νεκρ σθζ τξυ ’Θησξυ로, 네 가지 종류의 구원은 η ω η τ ’Θ 로 축약된다.

강조형 οαντξτε(항상)는 강조형 οαντθ(사방,8절)를 반복하고 있으며 강조형 αεθ(항상,11절)를 기대하고 있다.60)

 

“예수 죽인 것”이란 무슨 뜻인가? 먼저 번역들을 살펴보자.

“the death of Jesus”(RSV; NIV),“the dying of Jesus”(NASB; KJV), “the death that Jesus died”(REB), “예수님의 죽으심”(현대인의 성경)

번역들을 보면 νεκρ σθζ가 “dying”인지 “death”인지, 그리고 소유격 τξυ가 주격의 의미인지 목적격의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νεκρ σθζ”를 바울이 보통 예수의 죽음(Jesus' death)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낱말인  ανατξζ(롬 5:10; 6:3-5; 빌 2:8; 3:10; 고전 11:26)와 구별하여야 한다고 대부분이 믿고 있다. 이런 경우 이것은 예수께서 ‘죽어져 가고 있는(being put to death)’과정을 지칭할 수 있다.61)

Martin도 주장하기를 νεκρ σθζ는 죽음이 뒤따를 때의 행동(act when death supervenes)이라기 보다는 죽어가고 있는 과정 또는 상태(a  process or a state of dying)를 지칭한다고 한다.62)

그러나 τξυ ’Θησξυ를 목적어로 보면서 능동적으로 해석하여 ‘the putting to death of Jesus(예수를 죽이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63)

두 해석을 다 취해도 무방하지만 앞의 것이 더 합당하다. 바울은 그의 생명의 연속된 과정을 말하면서 끊임없는 죽어감(dying)으로 여겼다. 이것은 예수가 당한 그와같은 죽음을 의미한다(1:5과 비교).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육체적, 영적 힘을 다 쏟으셨다. 그는 정치적, 종교적 대적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박해를 받으셨다. 밤에는 잠을 주무시지 못했고, 낮에는 머리 둘 곳이 없었다.

그가 죽은 죽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순종의 길을 걸으면서 계속하였던 죽어가는(dying) 삶의 마지막 장(stage)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64)

이러한 예수의 죽음(dying)을 “οερθφερξντεζ”한다고 한다.65) 이는 선교 여행을 암시하고 있는데 선교사로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계속 죽음에 넘겨지는 것과 공포로부터 결코 해방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과 그 일행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향해 계속되는 고난을 받으며 자신은 철저한 순종과 겸허의 삶을 살아 하나님만을 드러낸 것과 같은 이러한 죽으심(dying)을 그들이 몸에 끊임없이 지고 다님 곧 그들도 예수와 같이 날마다 죽음을 향한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이유는(θνα),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이다.

“η ω η τξυ ’Θησξυ (the life of Jesus)”는 예수의 지상에서의 생애와 사역의 과정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그것이 현재 나타나는 그의 부활 생명의 힘을 가리킨다.66)

여기서 바울은 τξυ Θησξυ를 반복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역사적 예수(historic Jesus)'의 죽음과 ‘부활한 그리스도(the risen Christ)’와의 구별을 하지 않고 있다.67)

“φανερ  η”68)는  be manifested"(RSV; NASB), “be revealed"(NIV; REB)로 번역되는데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죽으심과 같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가 약한 가운데서(고후 12:9-10) 강한 부활의 힘이 계시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한다. 그는 시편 기자가 말한 것을 인용하며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 8:36)라고 고백한다. 그는 “부득불 자랑할진데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한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다(고후 1:5).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고(눅 9:23),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 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15:20). 분명히 주와 그를 따르는 자들 사이에는 경험과 운명에 있어서 어떤 연합(unity)이 있다.

하나님은 복음을 어떤 천사에게 위탁하시지 않고 질그릇인 바울에게 맡기셨다. 이는 주께서 바울이 압제와 핍박을 당하며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서 죽음의 위협에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서도 살아 남아(8-9절), 오히려 복음 사역의 놀라운 효과를 드러냄으로써, 예수께서 살아 계시며 또한 섭리적인 돌보심으로 그의 종들을 지켜서 그들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건지시는 동시에, 그 자신의 신적인 능력으로 그들의 노고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69)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11절)

“αεθ γαρ ημεθζ ξθ ω ντεζ εθζ  ανατξν οαραδθδξμε α δθα ’Θησξυν  θνα

καθ η ω η τξυ ’Θησξυ φανερ  η ”

 

11절은 10절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두 구절은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우리 산 자가”는 “we who are alive”(NIV), “while we live”(RSV)라는 뜻으로 바울의 생명은 끊임없이 죽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Plummer는 다음과 같이 의역한다.

“we are ever a living prey”70)

“예수를 위하여(δθα ’Θησξυν)”는 “for Jesus' sake(예수를 위하여)”(대부분의 영역본)라는 뜻과 “on account of Jesus(예수 때문에)”라고 번역하는 것 둘 다 합당하다. 즉 예수의 복음에 충실(loyalty)하였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고, 예수의 사도로 그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

“죽음에 넘기움(εθζ  ανατξν οαραδθδξμε α71))”  예수께서 권세자들에게 넘겨져서 죽음에 넘겨진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οαραδθδ μθ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고전 11:23; 롬 4:25; 8:32; 갈 2:20 참고).

여기서 바울이 자기의 주(主)인 예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뜻만을 드러내기 위해 운명적으로 고난과 죽음을 겪으셨던 것 같이, 그는 자기를 파송한 예수를 나타내며, 그의 뜻만을 드러내기 위해 죽음의 위치까지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의 사도직에 따라 고난을 받았고, 그러한 부르심이 그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가 참(true) 사도라는 증거인 것이다.72)

이렇게 됨은 10절에서도 밝혔듯이 예수의 생명이 “죽을 육체(εν τη  νητη σαρκθ)”73)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 νητξζ”는 “mortal(죽을 수 밖에 없는)”이라는 뜻으로 질그릇처럼 연약하고 보잘것없음을 나타내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도구, 혹은 수단의 약함을 두드러지게 대조시키고 있다.

앞절과는 달리 σαρπ를 사용한 것은 예수의 부활 생명의 현시는 오직 마지막 때의 부활에서만 완전하기는 하지만, 복음을 전하며 고난당하는 자신의 현재 연약한 삶 속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74)

 

 c. 12절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12절)

“ στε ξ  ανατξζ εν ημθν ενεργεθταθ  η δε ω η εν υμθν”

 

“그런즉( στε)”은 앞 절에서 언급한 것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바울의 연약함, 죽음과 같은 고난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라는 죽음과 생명의 역설이 12절에서는 다른 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ενεργεθταθ)75),  명은 너희(고린도 교인들) 안에서 하느니라.”

Calvin은 이 구절을 아이러니칼하게 해석해 버렸다. 즉 바울은 무수한 고난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고린도 교인들은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 안전하게 쉬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래서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적었다는 것이다.76)

그러나 문자적 해석이 더 합리적이다.

‘너희들은 이제 생명에 이르는 길에 있다. 이러한 엄청난 축복이 그렇게 무가치하고 보잘것없는 자의 덕택이라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한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준다.’77)

바울이 지금도 끊임없이 수고하며 죽음에까지 직면해 있는 것은 그가 전파하는 대상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이로 인해 예수의 복음이 전해져 그들 속에 부활의 생명이 계속 효력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가 치룬 크나 큰 희생에 의해, 그리고 바울과 같은 선교사들의 자발적인 고난으로 인해 고린도 사람들도 생명을 가지게 되었고 그 축복을 계속 누리게 되었다.78)

이러한 그의 고난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되었다.79)

바울의 고난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며(실제적 참여를 통해),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하는 것같아 보일지라도 고린도에 있는 개종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가 되어 생명을 소유하게 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울 자신은 사도들의 고난을(선교사와 일반 신자를 포함) 단순히 예수의 수난을 모방(imitation)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사역 가운데 예수 자신의 고난을 이루게(work out) 하는 것으로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바울이 그의 사도직분을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여인이 겪는 것과 같은 종류의 고통(travail)을 포함한다는 것과 새 생명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갈 4:19과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한다.80)

 

 

   B. 빌립보서 3:10-11

 1. 배경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 2 차 전도 여행 때 세워진 유럽 교회의 탄생지로 그 구성원은 아시아에서 온 자주 베장사 루디아로부터 출발했다. 그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로 유대인의 종교에 익숙하였고, 모세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이방인 개종자(a proselyte of the gate)로서 유대교의 신앙을 받았다(행 16:13-14).81)

그녀가 바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였고, 후에 옥중 간수와 그 가족들이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본 서신에 언급된 에바브로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그리고 클레멘트라는 이름들은 빌립보 교회가 이방인들로 구성된 탁월한 교회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82)

이 서신은 로마의 감옥에서 쓰여진 것으로,83) 자 의 상태를 전하며(1:12-26; 2:24), 그들 중에 들어온 잘못되고 유혹적인 유대교의 교리를 지적하여 그가 전한 복음과 그를 따라 살라고 간청하며(3:2-21),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따라 살라고 격려하며(1:27-30),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가 보낸 에바브로 디도의 소식을 알리며(2:25-30), 그들 가운데 있는 분쟁을 조정하여 연합을 고무시키며(1:27; 2:2-4; 4:2),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뻐할 것과(2:18; 3:1; 4:4), 자기에게 보여준 호의에 대해 감사를 전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다(4:10-20).84)

특히 3장은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경고하교 있다. 그는 할례와 인간의 공적(human achievement)을 자랑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3:1-3), 자신의 과거의 유대교에 대한 열심을 열거하며(3:4-6),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surpassing greatness)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 버렸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한다(3:7-8a)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θνα)인데,85) 이  율법에서 나오는(εκ νξμξυ) 의를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δ θα οθστε ζ Χρθστξυ) 의 즉 믿음에 근거해서(εοθ τη οθστε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εκ  εξυ) 의를 가진다(8하-9)는 것이고, 그 뿐 아니라 그를  (αξυτξν) 알고(τξυ γν ναθ)86) 그  부활, 고난, 죽으심에 참여하기 위함이다(3:10-11).

그러나 어떤 자들이 생각하기를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완성되었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그는 즉시 그러한 가정을 깨우쳐 준다. 그리스도는 일생에 걸쳐 완전히 알 수 없고 다만 계속 알아 나가는 것 뿐이라 한다(3:12-16).

 

 2. 주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아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0절)

“τξυ γν ναθ αυτξν καθ την δυναμθν τηζ αναστασε ζ αυτξυ καθ [την]

κξθν νθαν [τ ν] οα ηματ ν αυτξυ  συμμξρφθωξμενξζ τι  ανατι αυτξυ ”

 

이 구절은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했던 것과 모든 것을 해(害)로 여기며 배설물로 여기는 세째 목적을 언급하고 있다.87)

“알려 하여(τξυ γν ναθ)”라는 부정사는 부정 과거 시제로서(ingressive aorist, 진입적 부정과거), 그 동사가 시작하는 시점에 그 동사의 행동을 요약하는(sum up) 부정 과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식의 crisis를 언급하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the coming to know Christ)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능가하고, 그리스도의 의미(significance)는 너무 광대해서 단지 그를 알기 시작하는 것(to begin to know him)도 세상의 어떤 다른 것보다 더욱 중대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γν ναθ/γθν σκεθν”는 이해(understanding), 경험(experience)과 친밀함(intimacy), 심지어는 결혼하여 성 관계를 가지는 친밀함을 의미하기에,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을 변화시키고 계속되어가는(on-going)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친밀감을 시작케 하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다.88)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다음 구절들에 의해 분명하게 나타난다.

“καθ την δυναμθν τηζ αναστασε ζ αυτξυ”

여기서 καθ는 대등한 요소를 이끈다기 보다는 αυτξν이 의미하는 바를 한정하고 더욱 완전히 설명하는 방식으로 뒤의 구절을 αυτξν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89)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를 알려고 소망했다.90)

“그(원문은 ‘그의’) 부활의 권능”이란 무슨 뜻인가?

Michael은 말하기를 이 말은 죽은 자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한 그리스도로서 그가 받은 능력을 지칭한다고 한다. 바울은 그(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in virtue of) 그가 행사하는(wields) 권능을 경험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며, 그를 즉 구속하는 주로 알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being raised with Christ)’다고 자주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resurrection-life), 부활의 권능(resurrection-power)을 가지기를 원하고 있다고 한다(엡 2:5-6; 골 3:1).91)

즉 바울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역사의 한 사실로 알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생애에 부활하여 항상 살아있는 주로서 개인적으로 알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살아서 계속 역사하여 자신을 악에서 선으로 변화시키시며, 그를 남을 섬기는 생활로 이끌어 나가시며, 새로운 삶(newness of life), 성령 안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한 마디로 그를 죄 가운데서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으로 부활시키시며, 그의 도덕적, 영적 전 존재를 소생시키고 격려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기를 바라고 있다.92)

그의 부활의 권능이란 부활절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에서 나타난 능력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바울이 죽음 후에 경험할 부활 때에 있을 그리스도의 능력도 아니며, 그것은 중생한 새로운 삶의 원리들을 형성하며, 사람의 온전한 신생(renewal)을 향하여 역사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지칭한다.93)

이것은 바울의 경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고린도 후서 1:4-5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οαρακλησθζ;comfort;consolation;exhortation)가 그의 생애에 계속 흘러 넘치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워지는 것같은 고난을 당하며, 그 속에서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또한 그의 고난으로 인해 부활의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다(고후 4:7-12).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하면서 그의 부활의 권능 즉 사도 자신 속에 새 생명을 이루시며, 삶의 새로운 기준과 목표를 형성하시고, 율법 안에 있었을 때와 다른 방식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당하는 수 많은 고난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이로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알기를 원하고 있다.

 

“그(그의) 고난에 참예함([την] κξθν νθαν [τ ν] οα ηματ ν αυτξυ)”

“참예함”이란 “fellowship”(NASB; NIV; KJV), “share"(RSV; REB)로 번역되었으며, 보통 친밀한 결속(close bond)을 가지고 참여(participation)한다든지 교제(fellowship)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며, 쌍방 관계(two-sided relation)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참여(participation)’ ‘나누어 줌(impartation)’ ‘교제(fellowship)’를 의미한다.94)

세속 koine에서는 결혼하여 가지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95)

하여튼 어떤 사람과 어떤 것을 나눈다(share)는 뜻으로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생애의 세부적인 면(detailed phases)에 참여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96)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점- 그의 생활, 그의 고난, 그의 죽음과 영광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97)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은 이것을 부활의 권능 뒤에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고, 그 생명을 나누며 그가 살아서 계속 생명을 주심을 확신하기에 이 고난에도 참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원문을 보면 어떤 사본에는 관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두 개의 완전히 구분된 경험으로 생각된 것이 아니고, 동일한 경험의 alternate한 측면들이다.98)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그의 부활의 권능”보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어떤 다른, 추가적(additional)인 경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그의 고난에 참여할 바로 그 때(just as) 실현되는 것이다.99)

Hawthorne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외적인, 육체적인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타나게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후 4:7-11)고 한다. 그러면서 로마서 6:4-11을 이 문맥에서는 반영한다고 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내적(inward) 경험을 나타낸다고 한다.100)

그러나 로마서 6:4-11의 문맥이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어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살아야 됨을 의미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생활 곧 그리스도를 대항하며 믿지 않는 세상에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Christ life)’ 때문에 신자에게 오는 육적 또는 영적 모든 고난을 의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만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라는 고난을 길을 걸었듯이, 바울도 자기를 보낸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은 고난을 당하며 약하여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생명이 전해지기 위해 더욱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101)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자가 되었다. 그릐 신분이 바뀌었고, 삶의 패턴이 바뀌었고, 기준이 바뀌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핍박했기에 그도 핍박을 받고 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삶 때문에 더욱 핍박을 받고 있다.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적 고난을 나눈다는 뜻이 아니라, 그를 더욱 알고자 하는 열망에서 그의 모든 고난들 - 자기 비하, 유대인들의 핍박,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함에 사탄의 방해, 자기는 약하시고 하나님만을 드러내심, 최후에는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신 것- 에 실제적으로 참여하여, 사도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은 약하여지고, 주를 위해 핍박을 받으며, 그의 대속의 죽음이 효력을 나타내게 복음을 전하며 남을 위해서도 고난을 받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없이 즐길 수 없는 반면, 다른 면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의해 더욱 강하여지는 것이다.102)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συμμξρφθωξμενξζ τι  ανατι αυτξυ)”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개념은 고난의 종국점인 죽음에까지 전개된다.

συμμξρφθωξμενξζ는 συμμξρφξζ(같은 모양의)에서 파생한 후기 동사 συμμξρφθω (grant, invest with the same form)의 현재, 수동태, 분사로서 μξρφη(2:6)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단지 σχημα 혹은 외적인 양식만 받아 들일 뿐 아니라, 본질에 맞는 진정한 형태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103)

“being conformed to His death"(NASB), “being made conformable unto his death”(KJV),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NIV), “in growing comformity with his death”(REB)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어떤 다른 사람과 같은 형태(form)를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104)

이것은 빌 2:6-7의 “μξρφη  εξυ” “μξρφην δξυλξυ”105)에  오는 μξρφη의 의미를 살펴 볼 때 좀 더 분명해 진다.

μξρφη는 개인에게 추상적(abstract)이 아니라 실제로(actually) 존재하며(subsisting), 개인이 존재하는 한 남아있는 본질(essence) 또는 특질(nature)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μξρφη)이라고 할 때는 신성(神性)의 모든 본질과 특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inseparable) 것을 의미한다.106)

그렇다면 συμμξρφθω 도 단순히 συσχηματθω 107)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본질, 성격을 본 받으려는 것이다.

συν 이라는 접사 때문에 로마서 6장과 연결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그이 죽으심을 본받아(ξμξθ ματθ τξυ  ανστξυ αυτξυ) 연합한 자(συμφυτξθ)가 되었으면...”(5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συν)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συωησξμεν) 죽을 믿노니”(8절).

즉 그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의 모든 사건을 함께 나누기에 συν을 가진 복합어를 사용하여 그 개념을 자주 설명하면서(6:6,4: 엡 2:5 등), 바울은 과거의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을 그 죽음에 기꺼이 일치시키며, 현재 그 죽음의 의미(implications)를 자신이 본받음을 나타낼 새로운 어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108)

그래서 συμμξρφθωξμενξζ란 그리스도의 죽음 덕택으로 죄에 대해 죽은 바울은 자신을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롬 6:11) 여기며, 세상에서의 그의 행위를 그리스도 안에 자신의 신분에 맞게하며, 이기적 욕망은 포기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를 따르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에게 ‘예(yes)’라고 말하도록 끊임없이 선택함으로써, 그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이 항상 현재적 실체(ever-present reality)가 되도록 노력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환경이 감금된 상태이고, 특히 3 장에서는 빌립보에 들어온 유대 주의자들에 대해 경고를 하면서, 자기가 유대교에 열심하면서 교회의 핍박자로 있었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며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말하고 있는 배경을 본다면, 또한 빌 1:29, 2:17(“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라는 구절들과도 비교해 본다면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뜻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지칭하며, 심지어는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자 죽으신 것처럼 자신도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 이를 전하며 이러한 방식대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람을 지칭한다.

이 말은 바울이 꼭 순교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109)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 심지어는 그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알지 못하여 이것들에 참여하는 것이 없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그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선택한다거나 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친밀하게 알아 교제하며 신비적(mystical)110) 연관을 가지면 선택의 여지(option)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3:18 참고)의 대항과 반대에 자동적으로 직면하게 된다.

위의 구절의 문맥은 바로 이러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1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1절)

“εθ ο ζ καταντησ  εθζ την επαναστασθν την εκ νεκρ ν”

 

“εθ ο ζ”란 “If by any means”(KJV), “if somehow”(NASB의 난외주), “in hope of somehow”(REB)라고 번역되었는데 ‘만일 어쩌면’ ‘만일 가능하다면’ ‘만일 어떻든지’라는 의미로 가정법 동사 καταντησ 와 함께 사용됨으로, 불확실성, 의심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으나, 바울이 그의 미래의 기대에 대하여 다른 데서 확실히 언급한 것을 볼 때,112) 이런말은 어떤 의구심이나 불확실성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않되며, 오히려 깊은 겸손과 자기 신뢰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13) 조심스런 바램이기도 하다.

11절은 앞의 συμμξρφ  τι   αν  αυ 와 연결될 수 있다. 부활은 육체적이든 윤리적이든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취해질 수 있다.114)

그러나 10절 전체에 연결되어 바울이 소망하기를 10절에 기술된 경험으로부터 계속 될 결과를 표현하고 있다고 봄이 합당하다.115)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현재의 삶 속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는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힘(energy)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 만을 나타내고자 십자가라는 고난의 삶을 살았다. 심지어는 그의 죽음에까지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그로 하여금 미래 부활의 소망을 포기하도록 하지 않았다. 비록 위의 경험들이 현재의 삶에서 풍성히 나타나기는 하나 미래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καταντησ (might attain)도 ‘to arrive at, as at a goal’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116)

바울은 부활이라는 단어로 επαναστασθζ를 사용하고 있다. 보통 부활이라고 할 때는 αναστασθζ를 사용하는데 επαναστασθζ는 LXX과 NT에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또한 τ ν νεκρ ν이 아닌 εκ νεκρ ν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함은 죽은 자의 일반적 부활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부활, 생명과 영광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설명하려 한다.117)

그러나 εκ... εκ νεκρ ν처럼 반복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신자들의 현재 경험인 그리스도와 함께 신비적으로 부활하는 것, 매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누리는 것을 뜻하지 않고, 미래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분명히 부활할 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도 한다.118)

James Boice같은 경우는 독특하게 설명하고 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일어서다’는 뜻이다. 헬라인의 관념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은 서 있는 자이고, 죽어 있는 사람은 누워있는 자이다. 그래서 헬라식의 익살을 떨며 바울은 ‘나는 그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영적으로 누워 있는 자들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 사이에 나는 서 있음으로써 쉽게 눈에 띄어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나의 행동을 통하여 영생을 미리 선 보이려 한다.”119)

 

예수 그리스도를 친밀히 알고 교제하기를 원하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 고난, 죽음에까지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면,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신도 예수의 부활과 같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에(3:21), 복음으로 전하며 고난을 받아 죽더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것임을 겸손히 그러면서도 확신있게 말하고 있다고 봄이 합당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적인 주제로서가 아니라 진리로 알고 있는 이론을 실제로(in practice) 경험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서 현재도 살아 있는 부활의 주의 능력을 끊임없이 체험하며, 복음을 전하는데서 자신을 살리시고, 많은 사람을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더욱 알기를 원하고 있다.

바울은 더 이상 핍박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도 참여하여 오히려 핍박을 받으며, 심지어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적 죽음, 화목적 죽음, 대속적 죽음을 죽으신 것을 따라서 자신은 죽게 될지언정(물론 자신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삶에서의 고난, 죽음으로 다시 부활의 생명이 타인에게와 자신에게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록 죽더라고 부활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패턴이었으며, 본질이었으며, 목표였다.

 

   C. 골로새서 1:24

 

 1.배경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직접적인 방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1:4; 2:1). 에바브라의 사역의 결과로 설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1:7; 4:12,13). 그는 아마도 교회의 문제로 이전에 바울과 접촉을 가졌으며, 이 일로 인해 골로새 교회가 바울의 선교 관할 지역(missionary jurisdiction)으로 인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20)

그가 바울과 함께 잠시 투옥된 이유는 골로새 교회의 복음의 진보를 알리어 바울을 격려하려는 것이었으며, 주된 이유는 위협하는 이단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교훈을 경고하며, 그리스도의 위격과 관련하여 기독론을 재 정립시키며, 인간의 의식들에 근거한 금욕적 경향을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다.

감사(1:3-8)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그것이 생활로 나타나 자라며, 또한 인내하며 신자의 유업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도록 기도한 후(1:9-12), 골로새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거짓 교훈을 다루기 전에 그리스도의 위격(person)과 사역에 대해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1:15-23). 바울 자신의 사역은 사실상 이러한 사실 즉 복음을 전하는 일군으로서의 사역이고(23), 이를 수행하는 사도로서 고난을 겪지만(24), 이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다(25).

그의 메시지는 지금 나타난(revealed) 비밀을 선포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방인의 소망인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26-27). 그러므로 사도로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를 완전하게 세우려고 가르치며 경고하기에 정열을 쏟고 있다(28-29). 이러한 범위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사역은 그가 방문하지 않은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적용되어 그들을 가르치고 경고할 수 있게 되었다(2:1-5)

 

 2.주해

 

이 구절은 신학적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 난해 구절로 바울의 ‘고난’에 대한 다른 구절과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울의 고난은 무엇이며, 어떻게 고난들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의미로 이러한 고난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며, 또는 그가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고 방문치도 않은 골로새인들을 위한 것일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무슨 뜻이며, 이러한 고난에서 남은(lacking)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바울이 이것을 채운다는 의미는?

이 구절은 그의 사역에서 어떤 면을 반영하고 있는가? 그의 선교 사역에서 당하는 고난을 바울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보면서 선교사 행위의 독특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 a)

“Νυν χαθρ  εν τξθζ οα ημασθν υοερ υμ ν”

 

“Νυν(이제)”는 4:3에야 나오는 바울의 감금된 때를 말함이라기 보다는 이 문맥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121) 그리스도의 주재권(lordship)이 복음에서 우주적으로 선포되었고, 바울은 복음의 종으로서 골로새인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특권을 가지게 된 현재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22)

“οα ημα”는 ‘suffering(고난)’ ‘affliction(고통)’ ‘misfortune(불행)’을 의미하는데 LXX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NT에서는 항상 복수 οα ηματα로 사용된다(히2:9은 예외).

‘passion' ‘impulse’라는 드문 의미 외에는(갈 5:24; 롬 7:5), 주된 의미는 ‘고난(suffering)’이다(롬 8:18; 고후 1:5-7; 빌 3:10; 골 1:24; 딤후 3:11; 히 2:9-10; 벧전 1:11; 4:13; 5:1-9).123)

바울이 고난이라고 말할 때는 거의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는데 따르는 어려움(hardships)으로 “너희를 위하여(υοερ υμ ν)” 고난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즉 골로새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골로새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χαθρ ). 이와 유사한 구절이 고린도 후서 1:4-7로서 그의 사역 가운데서 겪는 고난은 그로 하여금 고통 당하는 그의 동료 신자들을 동정할 수 있게 했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서 끊임없이 경험하는 위로도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124)

여기서도 그의 복음 전파의 사명을 고난 가운데서도 수행함으로써 골로새 지방에 신자들이 생기게 되었으며, 비록 직접 방문한 적은 없지만 그가 전하는 복음의 유익이 그들에게도 미쳐져 변화를 일으켰기에 기뻐한다고 한다(1:3-6참고).

어떻게 바울의 고난이 그가 복음을 전파하지도 않았고 방문도 하지 않은 무리들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여 υοερ υμ ν을 동사 χαθρ 와 연결하기도 했다. “I rejoice...over you"

그러나 υοερ υμ ν은 “너희를 위한 (for your sake)"이란 뜻으로 εν τξθζ οα ημασθν에 연결되며, 첫째 구절(24a)은 어떻게 바울의 고난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것인지 명확히 언급하지 않지만 이 문제는 24a 구절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밝혀 주고 설명해 주는 다음 구절 (24b)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125)

즉 바울 자신의 사역은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기에 방문치 않은 곳일지라도 어느 곳이든지 그의 사역지가 될 수 있으며, 교회를 위한 고난 받음의 혜택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룬 골로새 사람들에게까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 b)

 “ανταναοληρ  τα υστερηματα τ ν  λθψε ν τξυ Χρθστξυ εν τη σαρκθ μξυ υοερ τξυ σ ματξζ αυτξυ  ξ εστθν η εκκλησθα”

 

“ λθψθζ τξυ Χρθστξυ”란 무슨 뜻인가?

 λθψθζ란 문자적 의미로는 ‘압박(pressure)’이란 뜻으로 비유적으로는 ‘환난,고통(affliction)’ ‘억압(oppression)’ ‘재난(tribulation)’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126)

이 단어는 특히 바울 서신에 많이 언급되는데 비유적 의미로 사용된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교회의 회원들이며 본보기적으로(exemplarily) 사도들이다. 이것은 또한 필수적(necessary)인 것이다(요 16:33; 행 14:22; 살전 3:3). 공동체(community) 안에서 사도도 역시 환난을 겪는다(살전 3:3-4). 이것은 종말론적 환난이며, 그의 신자들 안에서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다.127)

이와같이 바울은  λθψθζ라는 말을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서만 쓰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몇 군데(골 1:24; 고후 1:4; 4:8)외에는 쓰지 않으며, 더구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128)

Moule도 말하기를  λθψθζ는 신약 어디에서도 십자가 위에서나 그의 사역 기간 동안의 예수의 실제 고난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129)

그러나 이것이 바울의 어법상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을찌라도  λθψθζ와 οα ημα가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을 볼 때(고후 1:5; 빌 3:10), 이 고난은 예수께서 삶과 사역의 과정에서 겪으신 아픔을 의미할 수 있다.130)

그리스도 자신의 과거, 역사적 고난을 지칭한다고 봄이 더욱 합당하다.131)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부족한 어떤 것(υστερηματε)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을 바울의 몸에 채운다는 의미는 또한 무엇인가?

“υστερημα”는 ‘뒤에 오다’, ‘남아 있다’, ‘실패하다’라는 뜻의 υστερε 에서 유래한 후기 단어로서, 문자 그대로는 ‘부족한 것’이라는 뜻이다.

영역본에서는 “what is still lacking”(NIV; NASB; RSV), “that which is behind of”(KJV), “what still remains”(REB)라고 번역하고 있다.

“ανταναοληρξ ”는 ‘채우다(fill up)’‘완성하다(complete)’는 뜻으로 αντθ라는 전치사 때문에 의미를 달리하기도 한다.

Lightfoot는 고전 헬라어, 헬레니즘 헬라어에 나오는 언급들을 비교하면서 그 동사를 “I fill up on my part(내 편에서 채운다)” “I supplement(내가 보충한다)”는 뜻으로 보아 전치사 αντθ를 ‘상대방 쪽에서 부족한 쪽으로 공급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132)

Schweizer나 Moule은 뒤에 나오는 υοερ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133) R bertson은 야구를 비유로 들어 지금은 바울이 타석에 들어설 ‘차례(in his turn)’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중단시키지 않으셨고 바울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많은 고난을 남겨 놓으셨다.134)

어떤 의미로 신약에서 이곳에서만 나오는 ανταναοληρ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자기 쪽에서, 골로새 교인들 즉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어떤 부족한 것을 채우고 있다.

24절 하반절의 고난( λθψε ν)은 ανταναοληρ 라는 동사로써 수식되는데 여기의 접두사 αντθ는 그리스도의 덜 채우신 고난으로서, 바울이 채울 고난을 말하는 二重性을 가진다. 이 이중성은 또 다시 “내 몸에”와 “그의 몸을 위해”의 상관관계 속에서 일층 강화된다.135)

 

이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슨 뜻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Lightfoot는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satisfactoriae와 aedificatoriae사이에 구분을 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여 보충되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전자는 세상의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으로서 그의 수난을 나타내기에, 그의 고난에는 부족한 것(υστερημα)이 없다.

그러나 후자는 교회를 세우시며 신자들을 믿음에 굳게하는데서 겪는 고난을 나타내기에, 그리스도의 사역(work)은 그의 백성의 고난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다.136)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이러한 구분을 신약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난의 완전성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데 아직 고난이 남았다고 하여 상당히 타당성 있는 해석을 했다고 생각한다.

 

(2)H.Windisch같은 자는 그리스도의 대속(vicarious)의 고난에는 부족한 어떤 것이 있어서 사도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완전히 질 수 없는 고난을 졌다.137)

그러나 이 주장은 신빙성이 전혀없다. 바울은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을 그것에 의해 화해, 구속이 완전히, 유일하게 완성된 방법으로 여겼다. 골로새서 자체에서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1:12-14, 19-22; 2:13,14).

 

(3)E.Best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떤 경우에라도 구속하기에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고 υστερημα를 신중히 취급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시기 전 완성되어야 하는 양(量)의 메시야 해산의 고통(Messianic birth-pangs or woes)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간주한다.

이러한 고난들은 그들의 영광의 날을 더욱 가까이 가져다 주기에 골로새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138)

E.Lohse,139) O brien,140) R P.Martin141) 등이 이 견해를 주장한다. 다음은 이들의 주장이다.

τ ν  λθψε ν τξυ Χρθστξυ에서 정관사가 있는 것은 메시야 전통과 같은 하나의 명확하고 잘 알려진 실체(entity)를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계속되는 문맥이 묵시적 범주를 가지고 있는 다른 개념을 언급하고 있기에(1:26,27; 2:2,3) 더욱 합당하다.

 λθψθζ가 LXX에서 ‘이스라엘 백성 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의로운 자들의 압박(oppression)과 고난(affliction)’을 의미하는데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출 4:31; 신 4:29; 28:47-68; 삿 6:9; 10:6-16; 삼상 10:18,19; 왕하 19:3; 시 9:10; 12:5; 22:5; 31:7; 33:7,18등).

이에 덧붙여 단 12:1에 의하면 미래의 ημερα  λθψε ζ가 속하게 된다(합 3:16; 습 1:15 참고).

그래서 Schlier는 결론 짓기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심판은 종말의  λθψθζ에서 전적으로 나타날 것이다”라고 한다.142)

유대 묵시 문학은 두 세대의 교리와 함께(‘현세대’와 ‘올세대’) 종종 이 세상에 오게 될 재난과 파국을 하나님의 오실 기름부음 받은 통치자를 예고할 종말의 서주(prelude)로서 묘사하였다. 이러한 공포, 우주적 무질서가 절정 곧 정해진 한계에 달하면 재림이 올 것이며, 이러한 마지막 날들의 고난은 메시야 재난(woes of the Messiah)이라 불리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 한계를 정하셨다(막 13:19-24).

그렇지만 신약은 메시야 재난의 묵시적 개념을 한정하고 있다. 즉 나타날 메시야는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여 구름타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다가올 세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두 세대의 overlap속에서 사는 것이다. 메시야 재난,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시작 되었고, 그들의 지정된 한계가 다다르면 도래할 세대는 완성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고통에 참여한다.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간다(행 14:22; 살전 3:3,7).

그러나 지금은 아직 그런 경우가 아니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 사도는 자신의 육체에 고난을 견딤으로써 종말적 환난을 단축시키는(foreshortening)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메시야 재난’이라는 묵시 문학적 개념으로 바울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이 묵시 문학적 틀을 서신서들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143)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context)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기 전의 환난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언급된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고난받는 것이 열매맺기를 바라는 열정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면 종말이 도래한다고 보기에 고난을 당하며 복음을 전파해서 그 날을 단축시키고 있다고 보는 편이, 메시야 시대를 여는 고난을 통해 왕국에 들어가기에 바울이 교회가 당해야 할 고난을 대신 받으며 단축하고 있다는 것보다 합리적이다.

 

(4)17-18세기에 개신교의 널리 퍼진 해석은 τξυ Χρθστξυ의 소유격을 목적격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행 9:16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인지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바울의 사상과 일관된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바울은 예수의 고난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고 있다.144)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τα υστερηματα라는 구절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고, 어떻게 바울이 채울 수 있는 가를 지시해 주지 못한다.

 

(5)반면에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자의 공로(the merits of the saints)와 면죄부 교리(doctrine of indulgence)를 주장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난과 관련시켜서, 그리스도의 대속은 완벽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145)

이는 바울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하며, 단번에(once for all) 이룬 사역에 대한 주장과, 아니 신약 성경 자체와 모순된다.

 

(6)Christ-mysticism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바울이 행하고 고난받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와 함께 신비적인 교제에서 체험되는 고난이다. 그렇기에 문제를 초래하지도 않고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소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신비적으로 연합하는 것은(아마 빌 3:10-11에 의해 지지되는 것 같은데) 교회에 유익을 가져왔다.146)

그러나 고난에 있어서 이러한 신비적 친밀한 교제에 비추어 보아서 어떻게 여전히 부족한 고난의 분량이 있을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7)Roy Yates는 υστερημα와 αντθ를 신중하게 취급하기 위해서 이 구절은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신비적(mystical)’ 연합으로 또는 종말 전에 겪어야 할 메시야 고난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Corporate Christ'147) 개념을 받아들여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incorporated)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적 몸(corporate body) 곧 교회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그러한 고난을 나누는 것은 골로새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전체 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교회는 그의 고난을 완성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에게 많은 몫이 주어지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148)

 

(8)그러나 P.Trudinger는 Yates의 견해에 비평을 하고 있다.149)

즉 Yates는 이 구절을 바울이 교회를 위해 겪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성(complete)하도록 돕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꼭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충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신성의 모든 충만”(골 2:9-10; 엡 1:22-23)이시고, 그 자신이 “교회를 위하시”기에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완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중심 의도는 그리스도인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죽으심에 있어서 예수를 본받고(conform), 그의 고난을 나누기를 소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부족한 것은 바울의 것이다. 비록 그는 많이 고생했고 고난에 있어서 그의 주와 함께 많은 교제를 가졌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고난의 완전한 분량에까지 본받는 데에는 여전히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의미로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말하고 있다. 모자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울, 그리스도인, 교회에 적용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

 

(9)필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물론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의 고난과 교제한다고 말하는 것에 해답이 놓여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특수하고 독특한 연합(solidarity)인 것이다.

이러한 연합으로 인해 신자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죽음에 본받는 것으로 보여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개인적, 과거-역사적 고난과 현재 교회의 환난들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으로 같이 보여진다.

분명히 교회의 고난은 어떤 추가적인 속죄, 화해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고난은 구원론적 (soteriological)인 면보다 다른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일괄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은 머리(Head)가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의 이 세상에서의 복음-선교와 관련하여, 사도적(apostolic), 선교적(missiological)인 면을 지칭하고 있다.150)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할 때도 단번에, 완전하게 이루신 속죄, 구속, 화해가 온 인류에게 효력을 미치어 완성(comsummation)해야 할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시며 구속을 이루시려 할 때 사탄은 끊임없이 시험하며 도전했듯이, 그의 복음을 전하여 그 구속이 효력을 나타내게 하는 사도의 사역을 하는 동안도 끊임없는 고난이 따른다(마 10:25; 요 15:18-20).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αντθ-;in place of)’, 자기에게 주어진 사도의 역할을 감당할 ‘차례에(in his turn)’, ‘자기 쪽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

“εν τη σαρκθ”(내 몸에)라는 말을 볼 때 복음을 전하면서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한 것을 알 수 있다(갈 6:17; 고후 4:10 등).151)

이렇게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σ μα)인 교회(εκκλησθα)를 위함(υοερ)  이다.152) 지 교회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보편교회를 의미한다. 즉 바울이 고난을 받으며 선교를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유익을 얻도록 함이며, 자신도 “그리스도의 몸(σ μα Χρθστξυ)”의 지체이기에 수평적으로도 자신의 사역을 통해 유익을 줄 수 있도록 함이다.

그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는 자가 많아지게 되었으며, 골로새 사람들도 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지체가 되었기에, 교회를 위한 바울의 사역은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유익이 되었다.

John Murray도 이 구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자들은 그들의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구속의 완성과 그리스도의 몸의 영화를 이룸에 필수적인 고난의 총 몫(quata)을 채우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한다.153)

이 “총 몫”이란 묵시 문학적 개념인 “메시야 재난”의 일정한 양(量)과 같이 의심스런 견해로 해석되지 않으면서, 이 구절은 여전히 부활과 재림 사이의 지연(delay)에 대한 논리적 근거(rationale)의 중요한 면이 복음과 교회의 성장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요약하면 바울이 자신의 육체에 채우고 있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예수의 속죄적 고난으로 이루어진 구원이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효력을 나타내도록 복음을 전파함에 겪는 예수 그리스도 후(後)의 구원을 위한 고난을 의미하며, 주께서 시작케 하신 교회를 세워 가는 중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치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힘을 다하여 수고하여 복음의 진보를 이룸을 의미한다(1:28,29 참고).

 1. 배경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 2 차 전도 여행 때 세워진 유럽 교회의 탄생지로 그 구성원은 아시아에서 온 자주 베장사 루디아로부터 출발했다. 그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로 유대인의 종교에 익숙하였고, 모세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이방인 개종자(a proselyte of the gate)로서 유대교의 신앙을 받았다(행 16:13-14).154)

그녀가 바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였고, 후에 옥중 간수와 그 가족들이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본 서신에 언급된 에바브로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그리고 클레멘트라는 이름들은 빌립보 교회가 이방인들로 구성된 탁월한 교회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155)

이 서신은 로마의 감옥에서 쓰여진 것으로,156) 자 의 상태를 전하며(1:12-26; 2:24), 그들 중에 들어온 잘못되고 유혹적인 유대교의 교리를 지적하여 그가 전한 복음과 그를 따라 살라고 간청하며(3:2-21),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따라 살라고 격려하며(1:27-30),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가 보낸 에바브로 디도의 소식을 알리며(2:25-30), 그들 가운데 있는 분쟁을 조정하여 연합을 고무시키며(1:27; 2:2-4; 4:2),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뻐할 것과(2:18; 3:1; 4:4), 자기에게 보여준 호의에 대해 감사를 전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다(4:10-20).157)

특히 3장은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경고하교 있다. 그는 할례와 인간의 공적(human achievement)을 자랑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3:1-3), 자신의 과거의 유대교에 대한 열심을 열거하며(3:4-6),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surpassing greatness)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 버렸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한다(3:7-8a)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θνα)인데,158) 이  율법에서 나오는(εκ νξμξυ) 의를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δ θα οθστε ζ Χρθστξυ) 의 즉 믿음에 근거해서(εοθ τη οθστε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εκ  εξυ) 의를 가진다(8하-9)는 것이고, 그 뿐 아니라 그를  (αξυτξν) 알고(τξυ γν ναθ)159) 그  부활, 고난, 죽으심에 참여하기 위함이다(3:10-11).

그러나 어떤 자들이 생각하기를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완성되었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그는 즉시 그러한 가정을 깨우쳐 준다. 그리스도는 일생에 걸쳐 완전히 알 수 없고 다만 계속 알아 나가는 것 뿐이라 한다(3:12-16).

 

 2. 주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아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0절)

“τξυ γν ναθ αυτξν καθ την δυναμθν τηζ αναστασε ζ αυτξυ καθ [την]

κξθν νθαν [τ ν] οα ηματ ν αυτξυ  συμμξρφθωξμενξζ τι  ανατι αυτξυ ”

 

이 구절은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했던 것과 모든 것을 해(害)로 여기며 배설물로 여기는 세째 목적을 언급하고 있다.160)

“알려 하여(τξυ γν ναθ)”라는 부정사는 부정 과거 시제로서(ingressive aorist, 진입적 부정과거), 그 동사가 시작하는 시점에 그 동사의 행동을 요약하는(sum up) 부정 과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식의 crisis를 언급하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the coming to know Christ)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능가하고, 그리스도의 의미(significance)는 너무 광대해서 단지 그를 알기 시작하는 것(to begin to know him)도 세상의 어떤 다른 것보다 더욱 중대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γν ναθ/γθν σκεθν”는 이해(understanding), 경험(experience)과 친밀함(intimacy), 심지어는 결혼하여 성 관계를 가지는 친밀함을 의미하기에,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을 변화시키고 계속되어가는(on-going)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친밀감을 시작케 하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다.161)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다음 구절들에 의해 분명하게 나타난다.

“καθ την δυναμθν τηζ αναστασε ζ αυτξυ”

여기서 καθ는 대등한 요소를 이끈다기 보다는 αυτξν이 의미하는 바를 한정하고 더욱 완전히 설명하는 방식으로 뒤의 구절을 αυτξν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162)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를 알려고 소망했다.163)

“그(원문은 ‘그의’) 부활의 권능”이란 무슨 뜻인가?

Michael은 말하기를 이 말은 죽은 자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한 그리스도로서 그가 받은 능력을 지칭한다고 한다. 바울은 그(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in virtue of) 그가 행사하는(wields) 권능을 경험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며, 그를 즉 구속하는 주로 알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being raised with Christ)’다고 자주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resurrection-life), 부활의 권능(resurrection-power)을 가지기를 원하고 있다고 한다(엡 2:5-6; 골 3:1).164)

즉 바울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역사의 한 사실로 알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생애에 부활하여 항상 살아있는 주로서 개인적으로 알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살아서 계속 역사하여 자신을 악에서 선으로 변화시키시며, 그를 남을 섬기는 생활로 이끌어 나가시며, 새로운 삶(newness of life), 성령 안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한 마디로 그를 죄 가운데서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으로 부활시키시며, 그의 도덕적, 영적 전 존재를 소생시키고 격려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기를 바라고 있다.165)

그의 부활의 권능이란 부활절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에서 나타난 능력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바울이 죽음 후에 경험할 부활 때에 있을 그리스도의 능력도 아니며, 그것은 중생한 새로운 삶의 원리들을 형성하며, 사람의 온전한 신생(renewal)을 향하여 역사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지칭한다.166)

이것은 바울의 경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고린도 후서 1:4-5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οαρακλησθζ;comfort;consolation;exhortation)가 그의 생애에 계속 흘러 넘치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워지는 것같은 고난을 당하며, 그 속에서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또한 그의 고난으로 인해 부활의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다(고후 4:7-12).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하면서 그의 부활의 권능 즉 사도 자신 속에 새 생명을 이루시며, 삶의 새로운 기준과 목표를 형성하시고, 율법 안에 있었을 때와 다른 방식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당하는 수 많은 고난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이로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알기를 원하고 있다.

 

“그(그의) 고난에 참예함([την] κξθν νθαν [τ ν] οα ηματ ν αυτξυ)”

“참예함”이란 “fellowship”(NASB; NIV; KJV), “share"(RSV; REB)로 번역되었으며, 보통 친밀한 결속(close bond)을 가지고 참여(participation)한다든지 교제(fellowship)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며, 쌍방 관계(two-sided relation)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참여(participation)’ ‘나누어 줌(impartation)’ ‘교제(fellowship)’를 의미한다.167)

세속 koine에서는 결혼하여 가지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68)

하여튼 어떤 사람과 어떤 것을 나눈다(share)는 뜻으로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생애의 세부적인 면(detailed phases)에 참여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169)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점- 그의 생활, 그의 고난, 그의 죽음과 영광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170)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은 이것을 부활의 권능 뒤에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고, 그 생명을 나누며 그가 살아서 계속 생명을 주심을 확신하기에 이 고난에도 참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원문을 보면 어떤 사본에는 관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두 개의 완전히 구분된 경험으로 생각된 것이 아니고, 동일한 경험의 alternate한 측면들이다.171)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그의 부활의 권능”보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어떤 다른, 추가적(additional)인 경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그의 고난에 참여할 바로 그 때(just as) 실현되는 것이다.172)

Hawthorne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외적인, 육체적인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타나게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후 4:7-11)고 한다. 그러면서 로마서 6:4-11을 이 문맥에서는 반영한다고 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내적(inward) 경험을 나타낸다고 한다.173)

그러나 로마서 6:4-11의 문맥이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어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살아야 됨을 의미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생활 곧 그리스도를 대항하며 믿지 않는 세상에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Christ life)’ 때문에 신자에게 오는 육적 또는 영적 모든 고난을 의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만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라는 고난을 길을 걸었듯이, 바울도 자기를 보낸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은 고난을 당하며 약하여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생명이 전해지기 위해 더욱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174)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자가 되었다. 그릐 신분이 바뀌었고, 삶의 패턴이 바뀌었고, 기준이 바뀌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핍박했기에 그도 핍박을 받고 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삶 때문에 더욱 핍박을 받고 있다.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적 고난을 나눈다는 뜻이 아니라, 그를 더욱 알고자 하는 열망에서 그의 모든 고난들 - 자기 비하, 유대인들의 핍박,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함에 사탄의 방해, 자기는 약하시고 하나님만을 드러내심, 최후에는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신 것- 에 실제적으로 참여하여, 사도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은 약하여지고, 주를 위해 핍박을 받으며, 그의 대속의 죽음이 효력을 나타내게 복음을 전하며 남을 위해서도 고난을 받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없이 즐길 수 없는 반면, 다른 면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의해 더욱 강하여지는 것이다.175)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συμμξρφθωξμενξζ τι  ανατι αυτξυ)”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개념은 고난의 종국점인 죽음에까지 전개된다.

συμμξρφθωξμενξζ는 συμμξρφξζ(같은 모양의)에서 파생한 후기 동사 συμμξρφθω (grant, invest with the same form)의 현재, 수동태, 분사로서 μξρφη(2:6)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단지 σχημα 혹은 외적인 양식만 받아 들일 뿐 아니라, 본질에 맞는 진정한 형태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176)

“being conformed to His death"(NASB), “being made conformable unto his death”(KJV),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NIV), “in growing comformity with his death”(REB)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어떤 다른 사람과 같은 형태(form)를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177)

이것은 빌 2:6-7의 “μξρφη  εξυ” “μξρφην δξυλξυ”178)에  오는 μξρφη의 의미를 살펴 볼 때 좀 더 분명해 진다.

μξρφη는 개인에게 추상적(abstract)이 아니라 실제로(actually) 존재하며(subsisting), 개인이 존재하는 한 남아있는 본질(essence) 또는 특질(nature)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μξρφη)이라고 할 때는 신성(神性)의 모든 본질과 특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inseparable) 것을 의미한다.179)

그렇다면 συμμξρφθω 도 단순히 συσχηματθω 180)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본질, 성격을 본 받으려는 것이다.

συν 이라는 접사 때문에 로마서 6장과 연결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그이 죽으심을 본받아(ξμξθ ματθ τξυ  ανστξυ αυτξυ) 연합한 자(συμφυτξθ)가 되었으면...”(5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συν)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συωησξμεν) 죽을 믿노니”(8절).

즉 그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의 모든 사건을 함께 나누기에 συν을 가진 복합어를 사용하여 그 개념을 자주 설명하면서(6:6,4: 엡 2:5 등), 바울은 과거의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을 그 죽음에 기꺼이 일치시키며, 현재 그 죽음의 의미(implications)를 자신이 본받음을 나타낼 새로운 어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181)

그래서 συμμξρφθωξμενξζ란 그리스도의 죽음 덕택으로 죄에 대해 죽은 바울은 자신을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롬 6:11) 여기며, 세상에서의 그의 행위를 그리스도 안에 자신의 신분에 맞게하며, 이기적 욕망은 포기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를 따르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에게 ‘예(yes)’라고 말하도록 끊임없이 선택함으로써, 그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이 항상 현재적 실체(ever-present reality)가 되도록 노력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환경이 감금된 상태이고, 특히 3 장에서는 빌립보에 들어온 유대 주의자들에 대해 경고를 하면서, 자기가 유대교에 열심하면서 교회의 핍박자로 있었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며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말하고 있는 배경을 본다면, 또한 빌 1:29, 2:17(“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라는 구절들과도 비교해 본다면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뜻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지칭하며, 심지어는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자 죽으신 것처럼 자신도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 이를 전하며 이러한 방식대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람을 지칭한다.

이 말은 바울이 꼭 순교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182)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 심지어는 그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알지 못하여 이것들에 참여하는 것이 없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그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선택한다거나 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친밀하게 알아 교제하며 신비적(mystical)183) 연관을 가지면 선택의 여지(option)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3:18 참고)의 대항과 반대에 자동적으로 직면하게 된다.

위의 구절의 문맥은 바로 이러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184)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1절)

“εθ ο ζ καταντησ  εθζ την επαναστασθν την εκ νεκρ ν”

 

“εθ ο ζ”란 “If by any means”(KJV), “if somehow”(NASB의 난외주), “in hope of somehow”(REB)라고 번역되었는데 ‘만일 어쩌면’ ‘만일 가능하다면’ ‘만일 어떻든지’라는 의미로 가정법 동사 καταντησ 와 함께 사용됨으로, 불확실성, 의심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으나, 바울이 그의 미래의 기대에 대하여 다른 데서 확실히 언급한 것을 볼 때,185) 이런말은 어떤 의구심이나 불확실성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않되며, 오히려 깊은 겸손과 자기 신뢰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86) 조심스런 바램이기도 하다.

11절은 앞의 συμμξρφ  τι   αν  αυ 와 연결될 수 있다. 부활은 육체적이든 윤리적이든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취해질 수 있다.187)

그러나 10절 전체에 연결되어 바울이 소망하기를 10절에 기술된 경험으로부터 계속 될 결과를 표현하고 있다고 봄이 합당하다.188)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현재의 삶 속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는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힘(energy)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 만을 나타내고자 십자가라는 고난의 삶을 살았다. 심지어는 그의 죽음에까지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그로 하여금 미래 부활의 소망을 포기하도록 하지 않았다. 비록 위의 경험들이 현재의 삶에서 풍성히 나타나기는 하나 미래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καταντησ (might attain)도 ‘to arrive at, as at a goal’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189)

바울은 부활이라는 단어로 επαναστασθζ를 사용하고 있다. 보통 부활이라고 할 때는 αναστασθζ를 사용하는데 επαναστασθζ는 LXX과 NT에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또한 τ ν νεκρ ν이 아닌 εκ νεκρ ν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함은 죽은 자의 일반적 부활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부활, 생명과 영광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설명하려 한다.190)

그러나 εκ... εκ νεκρ ν처럼 반복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신자들의 현재 경험인 그리스도와 함께 신비적으로 부활하는 것, 매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누리는 것을 뜻하지 않고, 미래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분명히 부활할 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도 한다.191)

James Boice같은 경우는 독특하게 설명하고 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일어서다’는 뜻이다. 헬라인의 관념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은 서 있는 자이고, 죽어 있는 사람은 누워있는 자이다. 그래서 헬라식의 익살을 떨며 바울은 ‘나는 그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영적으로 누워 있는 자들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 사이에 나는 서 있음으로써 쉽게 눈에 띄어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나의 행동을 통하여 영생을 미리 선 보이려 한다.”192)

 

예수 그리스도를 친밀히 알고 교제하기를 원하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 고난, 죽음에까지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면,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신도 예수의 부활과 같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에(3:21), 복음으로 전하며 고난을 받아 죽더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것임을 겸손히 그러면서도 확신있게 말하고 있다고 봄이 합당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적인 주제로서가 아니라 진리로 알고 있는 이론을 실제로(in practice) 경험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서 현재도 살아 있는 부활의 주의 능력을 끊임없이 체험하며, 복음을 전하는데서 자신을 살리시고, 많은 사람을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더욱 알기를 원하고 있다.

바울은 더 이상 핍박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도 참여하여 오히려 핍박을 받으며, 심지어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적 죽음, 화목적 죽음, 대속적 죽음을 죽으신 것을 따라서 자신은 죽게 될지언정(물론 자신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삶에서의 고난, 죽음으로 다시 부활의 생명이 타인에게와 자신에게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록 죽더라고 부활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패턴이었으며, 본질이었으며, 목표였다.

 

IV. 선교 사역에 있어서 고난의 의미

 

이상에서 살펴본 성경 구절들을 통해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음은 복음 선교에 따른 고난이며, 이방을 위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았고, 그들이 바울 자신의 고난으로 인해 얼마간의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후 1:5-6; 4:12; 11:28; 엡 3:13; 빌 1:12; 골 1:24 등).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고난을 받았듯이 제자들도 제자이려면 고난과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십자가는 부자유나 어두운 숙명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매임으로 생기는 고난이다.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다.193)

옳은 교회의 표시를 고난이라 한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 초안에서 교회를 ’복음으로 인하여 쫓기는 순교자의 집단‘이라 하였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생명을 사람들에게 내주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와의 공동성을 잃을 것이다. 그는 이미 제자가 아니다.194)

첫째, 선교에 있어서 고난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이 전파되어 열매를 맺고 한 사람을 성숙된 신자로 양육함에 따르는 고난이다. 바울에게 사도가 된다는 것은 큰 영광이요 특권이지만 또 한편 큰 책임이기도 했다.

갈라디아서 4:19에서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음과 수고하면서도, 후욕을 당하면 축복하고 핍박을 당하면 참고 비방을 당하나 권면하였다(고전 4:11-13).

그러나 이렇게 수고하여 한 사람의 신자를 얻었고 한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다. 사도의 복음전파는 고통과 수난, 그것이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의 실생활은 슬픔이었고, 죄와 고통에서의 해방을 전하는 사도의 참 모습은 고난 속에서 착고를 차며 감옥에서 갇히는 구속이었다.195)

선교의 메시지를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영접을 하게하는 것도 무수한 고난이 따른다. 그러나 선교가 단순히 전하고 영접하여 구원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만 만들고 끝나서는 않된다. 계속되는 양육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또한 선교사의 책임이다. 부단한 해산의 수고가 필요하다.

복음의 수고, 고난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효력을 나타내게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케 하심이 선교사의 사역을 통해 전달되고 중보하게(intercession) 하여 화목이 열매를 맺게 한다. 예수께서 겪으신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을 선교사가 계속 겪음으로써 구원을 완성시켜 간다. 구원의 범위를 완성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선교사란 주를 믿되 더욱 헌신하여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구원을 열망하여 주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철저한 신앙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이와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고난을 필수적으로 받음은, 복음의 메시지(message)를 세상과 사탄은 싫어하므로 복음의 전달자(messanger)를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선교 행위에 있어서 고난을 받음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참되며, 참된 선교사의 표지(sign)을 가지고 있으며, 선교사로서 그를 보낸 자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는 안일한 길이 놓여 있지 않다. 예수님도 자기를 다르는 자들에게 십자가가 불가피함을 말씀하셨는데, 이 사실은 항상 입증되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이 반드시 따른다.196)

내촌감삼도 “세상이 죄의 세상인 동안은 박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박해는 그리스도 신자의 부수물이라고 하였다.197)

Warren W. Wiersbe는 갈라디아서 6:17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 test of a true ministry is not stars, but scars.”198)

세째, 복음을 전함에 고난을 받음은 복음의 본질을 전달자의 행위로 예증(illustration)한다는 의미가 있다.

선교사 행위의 본질은 그를 보낸 자를 그대로 드러내고 그 분의 뜻, 의도를 가감없이 전하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와 부활을 그림을 그리듯 풍성하게 설명하고 제시하기 위하여, 말로 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이 십자가의 고난과 같은 고난(물론 선교사의 고난이 십자가의 대속,구속의 고난의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을 당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남을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삶을 실제화 시켜주는 기회가 되며, 선교사 자신이 이러한 고난과 죽음에 가까운 위협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부활의 생명을 체험하여 보여줌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 부활하여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생명을 보전하시고 생명을 주심을 보여주는 commentary가 되는 것이다.

네째, 선교를 하면서 고난을 겪는 것은 선교사 자신은 연약하고 무능하지만 그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통로가 된다. 선교를 함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선교사로 하여금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이다(고후 12:7,9,10).

바울은 자기에게 연약했던 것을, 자기에게 닥치는 많은 고난들을 제거해 달라고 바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러한 환난을 디딤돌(stepping-stone)이 되게 해주기를 바랐다. 현대 많은 사역자들은 모든 조그마한 고통을 사역에서 물러나 집에서 쉬는 변명으로, 사역할 기회를 거절하는 변명으로 삼고 있다. 바울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거침돌(stumbling block)이 되지 못했다.199)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를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보냄을 받은 사도가 자기를 드러내며, 강하면 전달자를 보낸 주인(Master)은 드러나지 않는다. 보냄을 받은 자가 약하면 약할수록 그를 보낸 자는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선교 행위에 있어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이 고난을 받는 것은 그러한 모습 속에서 선교사 자신을 보낸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선교 행위에 있어서 고난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선교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삶에 참여하여 자기를 부르신 자를 더욱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당하는 고난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더욱 친밀하며 완전히 알고 교제할 수 있으며(빌 3:10-11), 이러한 체험은 선교를 함에 큰 추진력을 제공해 주는 것이 된다.

 

V. 선교사의 행위는 REDEMPTIVE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제껏 바울 서신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난받음,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의 관계를 그가 당하는 고난과 연관을 지어 살펴보았다. 이로 보건대 선교사의 사역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의 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redemptive”라는 어휘를 선교사의 행위 자체에 사용할 수 있는가?

바울 서신을 살피면서 한 가지 주목해 볼 것은 바울은 자신의 이방에로의 사도직과 이에 따르는 고난, 섬김을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에 연결하고 있다(행 13:47; 26:16-18; 갈 1:15).200)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이방의 빛이 되도록 할 목적으로 여호와께 부름을 받았다. 그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많은 무리의 죄악을 담당하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견디었고, 그가 죽은 결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열방이 축복을 받을 것이었다.

이 복합적인 묘사에서 고난과 섬김, 수난과 선교가 함께 어울려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201)

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나, 열방에 빛을 가져오기 위해 종의 사명을 인식한 바울은 이를 자신과 교회에게 동시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구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면서 당하는 고난이 예수의 구원하는 고난과 같은 효력을 발휘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하며 계속 고난을 받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자랑했으며,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며 교제하기를 원했다.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며 부활을 체험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세례를 받음에서만 체험하기를 원히 않았다. 단지 신비적 연합만을 원치 않았다. 바울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으며, 부활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사역과 고난이 구원의 효력이 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 사건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효력을 발생시키며, 이러한 사역을 수행함에 희생되며 고난을 겪는 것이 복음의 진보가 됨을 말함이다.

예수의 고난의 효력은 전달자(herald)를 필요로 한다. 시작되고 이미 이루어진 구원은 그것이 효과있게 제시됨을 필요로 한다. 한 왕국은 대사(ambassadors)를 통해 계속 일을 해야 하며, 자신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구속하시는 그리스도는 자신을 선교하는 사역자를 통해 제시하셔야 한다. 갈보리의 사역은 희생하는 사역자 안에서 선포되어야 한다.202)

이런 의미로 본다면 선교사의 사명, 행위는 효과상 구속적(redemptive)이 아니라, 사역의 수행상 구속을 전하며 구속이 효과를 발휘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에 구속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선교사의 독립적인 면에서는 구속적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할 때에는 구속적인 의미를 포함할 수 있다.

또한 redemptive한 사역을 수행하면서 그 내용(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방법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의 죽으심(dying)을 지니고 다니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신은 약한 가운데 있지만,203) 예수 그리스도만이 명확히 나타나 구속이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하기에, 현대 선교사도 구속의 효과가 지속적으로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와 부활에 실제로 동참하는(realistic participation) 삶이 필요하다.

선교사의 행위를 통해 십자가의 능력이 전해지며, 부활의 생명이 전해져서 선교사 자신은 망하는 것 같지만(예수의 죽음이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어리석고 망한 것 같이), 그가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가운데서 생명이 나타나기에 감히 구속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그가 파송한 선교사들의 행위도 구속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단번에 완전히 이루신 구원이 선교사를 통해 재림 때까지 완성되어야 하기에, 주께서 지상에 계실 때 사역의 범위상 하지 못한 남은 사역을 위해 선교사는 자신의 육체에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서 구속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양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의 기간동안 구원 사역을 위해 필연적인 고난을 감내하며, 끊임없이 함께하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전하며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 뿐이다. 선교사 자신에게 위대한 직분을 주심을 책임감있게 감당하는 것이 남아있다.

 

VI.  결         론

 

선교의 가장 중심부에는 십자가가 놓여있다.204)

바울에게는 십자가의 의미가 충만하게 채워져 있으며, 이것만을 전하고자 힘썼다(고전 1:23; 2:2; 갈 6:14). 그에게는 그토록 혐오스럽고 모욕적이었던 십자가가 자랑이 되었고, 그러기에 핍박을 했던 그가 오히려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십자가를 전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아 이방에 빛을 전하였고, 단순히 그 내용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방식으로 전하였다.

바울은 복음 선교의 사역을 수행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질그릇같은 연햑함은 외적인 압박, 고난, 내적인 고통에 노출되어 있었다. 예수의 죽음, 예수를 위한 죽음을 지고 다니는 자와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중에 끊임없이 역사하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했으며, 권능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게 되었다. 복음 선교에서 고난 받음은 오히려 타인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었다(고후 4:7-12).

바울은 예수를 단순한 지식으로, 그의 구속의 사건을 단순히 객관적인 효력으로만 알기를 원치 않았다.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생생하게 체험했고, 이를 고난에 참여함으로 더욱 그의 죽으심을 따름으로 체험하기를 원했다. 그의 부활이 자신 뿐 아니라 많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고, 그의 고난을 자신도 당하면서, 고난으로 인한 구속이 전달되기를 힘썼다(빌 3:10).

바울은 남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당하는 고난을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한 구속이 자신의 선교 사역을 통해- 자신에게 고난이 올찌라도- 완성되기를 바라며, 이로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연합되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하고 있다(골 1:24).

그는 구속을 이루기 위해 겪으신 예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면서, 예수로 인한 구속이 효력을 나타나게 했다. 더욱 범위가 넓어져서 구속이 완성되기를 소망하며 고난 받기를 더욱 힘썼던 것이다.

고난과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곧 예수처럼 섬긴다는 것이다. 선교사 자신은 구원사업을 수행함에 자신을 선포의 제목으로 삼지 않으며 선교의 양식을 십자가와 조화되게 하여야 한다.205)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선교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보다 real하게 보여주며,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현대 선교사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가 “구속적”이며, 고난 받음은 구원이 더욱 이루어짐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여, 자기를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드러내어 전하며 기꺼이 고난받으며 이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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