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과 바울
유 상 현
Ⅰ.
사도행전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이른바 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로마 권력에 의해 체포된다(행 21장). 그 체포는 바울 생애에서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예루살렘에서의 체포로 인해 바울은 그의 마지막 여행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까지'에 이르는 이 여행 과정은 여러 극적인 사건이 돌발하는 매우 흥미 있는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바울이 초기 기독교 지도자로서 로마 당국의 식민지 최고 지도자인 몇몇 총독들과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사도행전 저자의 기록은, 팔레스틴 기독교 활동 보고로서는 희귀한 일로써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일이다.
우리는 아래의 글에서 바울이 총독 벨릭스 앞에 출두하는 것을 묘사한 사도행전 부분만을 임의로 선정(행 24장), 그 기록 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사건에 관한 서술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그와 동행한 예루살렘 유대인 대표단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시기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몇 사람의 장로와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데리고 내려와서---"(행 24 : 1a).
사건이 '닷새 후'에 벌어진 것으로 저자는 밝힌다. 여기 보고된 사건의 시간 흐름이나 연대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닷새라는 시간이 어떤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흘러갔다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닷새의 기점(起點)이 되는 시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세 개의 답변을 고려해 볼 수 있다 : 1) 바울이 성전에서 체포된 이후, 2)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난 이후, 3)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이후. 이중에서 세 번째 답변이 가장 수긍할 만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바로 앞에 기술된 사건이 바울의 가이사랴 도착과 벨릭스와의 첫 번째 만남이기 때문이다(행 23 : 33-35). 이리하여 가이사랴에 도착한 닷새 후, 바울은 그의 고소인과 함께 벨릭스 앞에 서게 된다. 이번에는 그의 고소인이 예루살렘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아시아에서 온 무명의 유대인들'이 아니라(행 21 : 27), 대제사장이 이끄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기구 대표단이다. 이들 중에는 '더둘로'라 이름하는 '변호사( )'가 있었다. 어쩌면 누가는 대제사장과 더둘로라는 인물이 그곳에 등장하게 된 실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이들의 존재를 통하여 이 재판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일의 진행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전문 연설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는 고려를 했을 수 있다. '변호사, 대변인, 수사학자'로 번역될 수 있는 ' '란 희랍 수사학을 잘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본문의 ' '는 법률과 재판, 그리고 법적 절차에 관한 수사학에 정통한 법정 연설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고소인측 변호사( )로서, 피고소인의 변호사( )에 대립하게 되어 있다. 더둘로의 이름 ' '는 ' '의 변형이다. 이 이름에서 'Tertullianus'가 파생된다. 더둘로가 유대인인지, 아니면 로마인이나 희랍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행 24장의 3, 4절, 그리고 6절에서, 그는 그 자신과 의뢰인을 가리켜 일인칭 복수인 '우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지칭으로 보아서는 유대인일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둘로의 말 중, 2절에는 '이 나라( )', 그리고 5절에는 '유대 사람들에게( )'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3, 4, 6절에 나타나는 '우리'라는 용어와는 달리 더둘로와 대표단을 구별하여 거리를 두는 표현이다. 여기서 저자가 유대인들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대변하게 하기 위해서 더둘로와 유대인들을 동일시하게 만들어 '우리'라는 말을 쓰게 한 것인지, 아니면 2, 5절의 구별되는 표현 속에 그의 정체 해명의 실마리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더둘로를 소개한 다음 저자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 "(그들이) 바울을 걸어 총독에게 고소했다"(행 24 : 1b). 이렇게 총독 앞에서의 고소가 이루어짐으로써 바울에 대한 법적인 절차가 정식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바울의 범죄 사실을 공식적으로 법정에 제소한 것이다. 실제로도 재판 절차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하듯이 고소인이 공식적인 제소를 함으로써 시작된다.
"바울이 불려 나오자( )"(행 24 : 2a) : 절대 속격으로 쓰인 이 표현에서 주어는 앞으로 나타날 25장의 6, 7, 23절에서 그러할 것처럼 심문에 불려 나오는 바울이다. 바울이 불려 나오자 더둘로의 고소( )가 시작된다. 행 24 : 2-8에 다소 길게 제시된 그의 고소는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 1) 서언(序言) : 2-4절, 2) 일반적인 고소 : 5절, 2) 구체적인 고소 : 6-7절, 4) 고소 내용에 관한 확인 요청 : 8절.
저자는 더둘로의 입에 담은 연설의 서언( )을 과장이 가득한 아첨으로 시작하게 한다. 이것은 고대의 수사학 규칙에 따른 이른바 '호의 끌기 captatio benevolentiae'로 이해될 만한 것으로서, 발화자와 청취자 사이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청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청중의 흥미를 유발하고, 적극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더둘로는 벨릭스에게 아첨하는 것이다 : "우리는 당신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으며 이 나라는 당신의 선견(先見) 덕택으로 개선되고 있습니다( )"(행 24 : 2b).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시대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찬사이다. 수사적인 기교임을 감안할 때 묘사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알려진 문헌을 가지고 판단할 때 벨릭스의 통치는 형편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 타키투스의 문헌에 의하면 벨릭스는 잔인하고 방탕한 사람이었다.
벨릭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총신(寵臣)이었으며, 재정장관을 지낸 자유민 세력가 중의 하나인 팔라스(Pallas)의 형제였다.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벨릭스는 황실의 해방 노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황제의 어머니인 안토니아(Antonia)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벨릭스의 공적인 생활에 관해서 타키투스는 그가 마치 처벌 당하지 않고 온갖 범죄를 저지를 권리를 가진 것으로 믿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통치는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끝나고 마는 유대인의 비극적 봉기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서언에서 더둘로는 '평안( )'이라는 단어와 '개선(改善,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벨릭스 통치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 변호사가 상대하는 로마의 재판관이, 평화를 유지하고 행정적으로 훌륭한 일을 했다는 아첨에 만족해 할 것이라는 상황을 상정하고 법정의 공간을 그리고 있다. 더욱이 이 두 단어는 같은 구절의 '선견 '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이러한 유형의 법정 연설에 흔히 사용되던 전형적인 수사적 용어라고 한다. 그점을 감안한다면, 저자가 그럴듯한 법정 장면을 현실감 있게 그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는가, 그리고 그 장면의 사실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묘사의 세부에 얼마만한 관심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더둘로의 연설은 계속된다 : "벨릭스 각하, 우리는 모든 면에서( ), 그리고 어디서나( ) 이것을 인정하며 만강(滿腔, )으로 감사하여 마지 않습니다"(행 24 : 3). 여기에는 웅변가들이 흔히 구사하는 소위 '수음중첩법(數音重疊法, paronomase)'이 사용되고 있다. 즉 '모든 면에서( ), --- 어디서나( ), --- 만강(滿腔, )으로'라는, 두운(頭韻)을 살린 용어 선택을 통한 어희(語戱)적 진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면에서( )'와 '어디서나( )'라는 말은 2절의 '개혁이 발생하다 '나, 3절의 '인정하다 '에 연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일에, 어디에서나 이루어진 개혁'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우리는 모든 일들을 어디에서나 환영한다'라는 의미로 새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두 의미가 모두 가능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의미가 한층 더 강도 높은 아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누가의 저술에만 일곱 번 등장하는 '인정하다 '라는 동사의 목적어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문맥상 자연스럽게 그것이 벨릭스의 공적(公的)인 업적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적할 것은 더둘로의 연설이 사도행전의 다른 연설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자유로운 문예적 능력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저자가 상정하는 법정의 정황에 적합한 구도, 그리고 더둘로 발언의 흐름과 내용에 관한 치밀한 고려에 입각해서 이러한 인용문이 작성되었다. 설혹 이 글 속에 실제 바울 재판의 초기 과정에 발생했던 역사적 상황이 반영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더둘로라는 인물의 발언 전문을 옮겨놓았거나, 그것의 다소곳한 요약이라고 말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연설을 간결하고 요령있게 구성할 줄 아는 누가의 문학적 터치는 우리로 하여금 재판의 분위기를 보다 분명하고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서언 부분(2-4절)은 법정 상황의 경직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문체의 형식미를 간파하게 한다. 그에 덧붙여서 재판 참석자의 태도를 느끼게 해주는 또다른 수사적 표현이 있다 : "이제 당신을 너무 오래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행 24 : 4). 이 말은 재판에서의 화제 전환을 지시하는 뜻도 물론 있지만 저자가 기록하는 재판 장면 묘사의 장황함을 피하기 위한 교묘한 전환의 뜻이 담긴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점으로 가기 위하여 변호사는 ' (방해하다, 괴롭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총독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더둘로는 총독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 곧바로 사건의 주제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벨릭스에게 소송에 관한 간단한 진술을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서언은 이렇게 끝나고 이제 변호사는 바울을 본격적으로 고소하려는 마당이다.
그의 고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더둘로는 먼저 바울이 온 세계에 있는 유대 민족 사이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그를 고소한다. 그리고 이어서 보다 구체적, 개별적으로 그가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고 고소한다. 이 두 가지 측면의 고소는 행 21 : 28에 실린 묘사 내용과 대개 일치한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요(염병 같은 자요)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대사람들에게 소요를 유발시키는 자요 나사렛당의 괴수입니다"(행 24 : 5). 이처럼 말한 총괄적이며 주된 고소 원인인 첫 번째 부분에서, 더둘로는 바울을 '염병( , 페스트)'이라고, 즉 단어 자체가 설명하듯이 페스트 같이 해롭고 위험한 자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소요를 유발하다( )'와 함께 사용된 이 용어는 총독의 뇌리 속에 바울이 종교사범(宗敎事犯)이 아니라 정치범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더둘로는 피고소인에게서 전체 제국의 유대인 공동체를 뒤흔드는 선동가의 모습을 보도록 벨릭스를 유인한다. 공공 질서를 문란케 하는 범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더둘로는 바울이 제국 사회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유대인 세계의 질서를 문란케 함으로써 제국 권력이 항시 염원하고 있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근거가 증명될 경우 엄중한 판결을 초래하게 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고소 내용이다. 사실 사도행전에 의거한다면 이 고소는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 사회에 소요를 야기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더둘로는 바울을 '나사렛당의 괴수( )'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에서 단 한번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 (당, 분파)'라고 지칭되어 있는데, 그렇게 불려지는 원인과 정확한 의미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명칭을 부여한 것은 유대인들일 것이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이러한 명칭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명칭에는 경멸의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이 명칭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을 나사렛당이라고 진술함으로써, 더둘로는 이들이 공식적인 유대교와는 관련이 없음을 표현하고자 한 듯하다. 본문에서의 고소 분위기로 보아서도 이 말은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갖는 본래의 뜻은 경멸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았으며, 희랍의 학파나, 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과 같은 분파 중의 하나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로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전이가 완전하지 않았으므로, 이 낱말 속에 함축된 정확한 뜻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도행전에서는 저자가 이 단어를 오직 반대자의 입술을 통해서만 사용하고 있으므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고소의 두 번째 측면은 바울의 체포를 야기한 최근의 구체적인 사건에 관련된 것이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 그것이다. 더둘로는 말한다 : "그는 성전을 더럽히려고까지( ) 했으므로"(행 24 : 6a). 이 변호사는 사건을 이미 이루어진 어떤 객관적 사실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더럽히려는 바울의 '의도'( )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이렇게 더둘로로 하여금 바울이 가졌던 성전 모독의 의도에 관해 말하도록 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증명해 보일 수 없는 이유를 고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변호사는 유대인들이 때 맞춰 개입함으로써 성전 모독 행위가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다고 말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유대인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바울이 성전 모독 관련 범죄 사실을 벨릭스에게 확신시켜 줄 수 있다면, 그는 이 재판을 유대 법정에 넘겨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산헤드린의 재판 관할 사항에 속하는 특별한 범죄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독하려는 '의도'를 언급하게 된 동기는, 성전에서 바울을 체포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산헤드린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재판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기 위한 구실을 제공하는 데 있었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더둘로는 계속해서 말한다 : "우리는 그를 체포했습니다"(행 24 : 6b). 체포 당시의 폭력적 상황에 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이 변호사는 매우 단순화시킨 사실만을, 즉 체포를, 합법적 행위였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마침내 더둘로는 벨릭스에게 이 사건에 관해 자세히 조사해 볼 것과, 고소의 정당성을 확인해 볼 것을 요청하며 연설을 끝낸다 :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해 보시면 우리가 그를 고소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행 24 : 8). 벨릭스에게 용의자를 심문해 보라는 요청은 이 재판에서 총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능동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 여기서 따르고 있는 소송 절차는, 배심원이 고소와 변론 사이의 논쟁('quaestiones perpetuae, 지속 攻防') 앞에서, 말하자면 승점(勝點)을 주는 것과 같은 형태로 재판에 참여하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고소 절차와는 다르다.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소송 절차는 진실을 찾기 위해 직접 조사를 할 권한을 가진 총독이 친히 관장하는 소위 'cognitio'라고 규정되는 '직접 심문 재판(proc dure inquisitoriale)'이다. 저자는 8절에서 끝난 변호사의 고소 내용에 곧 이어서 신문(訊問)에 참석하고 있던 유대인 대표단이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고 확언하며 변호사 발언에 합세하여 그를 지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행 24 : 9).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은 증인의 신분이 되어 변호사의 고소 내용을 확증했다고 말한다.
II.
이제 저자 기록에서 더둘로의 연설이 끝나고 바울이 발언을 할 차례가 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변호하여 무죄임을 호소하려는 바울의 변명이다. 더둘로가 그랬듯이 바울도 매우 간결한 '호의(好意) 끌기 captatio benevolentiae'로 연설을 시작하며 더둘로의 이중(二重)적인 고소 내용에 답변한다. 먼저 바울은 성전에서나 군중 속에서, 그리고 회당에서나 성내에서 혼란을 야기한 일이 결코 없다고 말한다. 그 다음 그는 결코 성전을 더럽힌 적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을 변호한다.
"그때에 총독이 머리를 끄덕이며 바울에게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행 24 : 10a). 마치 왕과 같이, 권력자 벨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피고에게 머리를 움직여 신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요 13 : 24를 제외하면, ' , 머리 신호를 하다'라는 단어가 신약 전체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사용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의 저술에는 몸짓 신호를 하는 행위가 종종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고대의 저술가가 연설을 도입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던 상투적 표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 "당신께서 여러 해 동안 이 나라의 재판장으로 계신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게 대한 사실을 변명하겠습니다"(행 24 : 10b)." 얼핏 보면 이 연설에는 서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와 같이 희랍의 수사학에 일정한 조예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작품 이 부분의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바울로 하여금 수사학의 관습을 무시하도록 할 리는 없다. 단지 바울의 서언은 더둘로의 서언보다 덜 과장되어 있을 뿐이다. 바울은 여기서 벨릭스가 여러 해 전부터 유대 민족의 재판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바울은 이러한 벨릭스의 '여러 해 전부터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가 유대의 상황에 관해 정통하리라고 믿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벨릭스는 아그립바 1세 왕의 막내 딸인 드루실라(Drusille)와 결혼했으므로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총독의 유대에 관한 이해를 신뢰하는 뜻을 갖고 그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겠노라는 말을 하게 됐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정중한 짧은 서언을 통하여 바울은 벨릭스의 공정함을 기대한다고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벨릭스 통치의 존속 기간에 관한 바울의 암시는, 그의 유대 체류 기간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듯 보인다.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는 벨릭스가 52년에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역사가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을 받기 이전에 이미 유대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위의 두 사람이 이점에 관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타키투스의 저술에 의하면, 벨릭스의 선임자인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가 로마로 불려가 유배지로 보내졌을 때, 벨릭스는 이미 유대에 있었다고 한다. 쿠마누스가 갈릴리의 총독이었을 때, 벨릭스 또한 사마리아에서 로마 권력을 대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52년에 벨릭스는 단지 쿠마누스의 소환으로 말미암아 비어 있던 직책을 맡아, 적어도 갈릴리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로마 권력을 대표하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상황은 이와 다르게 진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유대 전쟁기(Guerre des Juifs)'에 따른다면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국토 재정비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 "그는 칼키스의 아그립바(Agrippa de Chalcis)에게 빌립보(Philippe)의 옛 지방과 다른 영토들을 주어 보다 넓은 왕국으로 보냈다. 이러한 영토 재분배와 관련하여 클라우디우스는 팔라스의 형제인 벨릭스를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와 페레(P r e)의 총독으로 보냈다."
이 두 고대 역사가가 제시하고 있는 정보는 서로 모순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적절한 설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스몰우드(E. M. Smallwood)와 같은 학자들과 함께, 타키투스보다는 요세푸스의 저술이 더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세푸스는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자기 민족의 역사를 현장에서 썼으므로, 그의 글이 이 문제에 관한 신뢰를 더 가질 수 있게 하지 않겠느냐는 일반적 추정이다. 요세푸스는 현실을 감출 이유가 없다. 그러나 본문의 수사적인 문맥을 감안할 때, '여러 해 동안'이라는 표현이 갖는 연대기적인 의미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머리말에 이어서 바울은 더둘로의 고소에 대해 답변할 순서가 되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선동가라고 하는 주장을 단호하게 부인한다.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온지 열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께서 아실 수 있습니다"(행 24 : 11). 바울은 더둘로가 문제 삼은 이방에서의 자신의 행위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삼가면서, 곧바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최근 사건을 정확한 날짜를 밝히며 거론한다. '당신께서 아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사건이 최근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총독이 직접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자기 변호의 한 방략이다. 이 말 속에 담아놓은 저자의 신랄한 아이러니를 들르벡(Delebecque)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편견적인 변호사에게 응수하면서, 바울은 벨릭스 앞에서 더둘로를 은근히 비웃고 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동조자의 눈길을 던지면서, 마치 빈정거리며 변호사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 하는 것 같다. 더둘로는 총독에게 이미 말했다 : '아시게 될 것입니다' ; 바울이 이 말을 받아 되풀이 한다. '아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올라온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라는 바울의 말은 연대기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이 말 중 '열이틀'이라는 표현은 앞에 기술됐던 저자의 사건 묘사와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서술에 의해서 우리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래의 연대기를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 첫째 날, 바울은 예루살렘에 입성한다(행 21 : 17) ; 둘째 날, 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한다(행 21 : 18) ; 셋째 날, 바울은 야고보의 충고에 따라 나실인의 의식을 시작한다(행 21 : 26) ; 이레가 끝나갈 무렵(행 21 : 27), 즉 아흐레가 되기 하루나 이틀 전 날, 일단 이 날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자, 소동이 일어난다 ;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여덟째 날, 바울은 산헤드린 앞에 선다(행 22 : 30) ; 그 다음 날, 즉 아홉째 날,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기로 공모한다(행 23 : 12) ; 아홉째 날과 열째날 사이의 밤에, 바울은 안디바드리로 간다(행 23 : 31) ; 약 60킬로미터가 되는 안디바드리와 예루살렘 사이의 거리로 볼 때, 도착한 당일에 약 40킬로미터가 되는 두 번째 여정에 나섰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가이사랴에 도착한 것은 열하루째 날이다 ; 닷새 후에 바울은 벨릭스 앞에 출두한다. 따라서 이 날은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래 열다섯 번째가 되는 날이 된다. 이렇게 바울의 연설에 나타난 내용과 앞선 서술에서 관찰된 내용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날 수를 열이틀로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안할 수도 있고, 이 착오를 작가의 저술상의 실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저자의 날짜에 관한 무신경에 기인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저자가 어쩌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지낸 날들만을 염두에 두고 그같은 기록을 남겼을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복잡한 작품을 저술하고 있는 저자가 그러한 사소한 날짜 계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리는 없겠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 말이 반란죄에 대한 변론의 한 부분임을 생각할 때, 그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하고자 했을 것이다 : "내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은 겨우 열 이틀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짧은 체재 기간 중에 어떻게 민중을 선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나는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간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 위함이었습니다." 상경 동기에 관한 이러한 언급은 상경의 이유를 밝히는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반란, 성전 모독, 그리고 도당 연루 등 몇 개의 혐의를 한꺼번에 반박하는 역할을 한다.
바울은 더둘로가 사용했던 '소요'라는 어휘를 받아서(5절의 ' 소요'와 상응하는 12절의 ' 소동')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선동가로서 행동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 "그리고 성전에서 내가 누구와( ) 변론을 하거나, 회당에서( ) 또는 성중(城中)에서( ) 군중을 소동케 하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행 24 : 12). 이 말에서 세 번 반복하여 사용된 ' '는 그의 무죄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더둘로의 고소를 강하게 반박한 후, 바울은 13절에서 고소인들이 고소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증거도 제시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 "지금 그들은 나를 고소하는 사실에 대하여 당신께 보여드릴 아무 증거도 없습니다"(행 24 : 13). 이와 같이 바울은 구체적인 증거나 증인이 없는 변호사의 고소는 법적인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동시에 바울은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는 무죄한 사람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유죄가 입증되지 않으면 무죄라는 기본적인 사법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에 관한 고소는 일일이 열거하여 전체적으로 부인하면서도, 온 세계의 유대인 사회를 소란케 했다는 고소에 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판단에, 바울 선교 행적의 성격상 그러한 소란으로 간주될 내용이 있다고 짐작하여 그 부분은 묵살케 했을 수 있다.
이어서 14, 15절에서 바울은 종교적 차원에서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관해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유대인들의 전통적 종교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바울을 '나사렛 당의 괴수'라고 규정한 더둘로의 고소(행 24 : 5)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다 : "그러나 나는 당신 앞에서 이것만은 인정합니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습니다"(행 24 : 14). 바울은 반대편이 멸시하는 투로 사용한 어휘인 '당(徒黨) '을 따른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인정한다. 그는 고의적으로 '당 '이라는 어휘를 '길(道) '로 바꿔 놓는다. '길 '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유대 민족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안에 위치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그의 섬김은 반대편에서는 도당이라고 부르는 '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삶을 사는 새로운 방식이며, 신앙과 행동의 새로운 형태이며,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새로운 길이라는 이해가 깔여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종교와의 '분리', 즉 ' '가 아니다. 바울은 '길 '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더함으로써, 기독교가 진정한 유대교, 또는 유대 종교의 완성이라고 말하려 했는 지도 모른다.
자신의 믿음이 유대인들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바울은 다음의 표현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한다 :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과 예언서'를 유대 신앙의 근거가 되는 두 가지 방식의 계시로 인정한다. 성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율법학자들, 즉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바울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믿는다. 그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자는 바울로 하여금 희망으로부터 그에 관한 말을 시작하도록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들(나를 고소하는 이들)도 이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희망은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 모두 부활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행 24 : 15). 바울은 이렇게 부활의 희망에 관한 신학적 문제의 본질을 건드린다. 아마 이쯤에서 사람들은 바울이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예수에 관한 메시아적 약속이라는 미묘하면서도 특별한 신학적 주제를 언급할 것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신학적 논의를 심화시키는 대신에 부활에의 믿음이라는 좀 더 일반적인 주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다. 저자는 사건의 무대가 신학 토론장이 아니라, 이방인 총독이 재판장인 법정임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 총독을 고려하여 논쟁적인 주제를 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들(자기를 고소하는 이들)도'라고 말하며, 법정에 나와 공방을 펼치는 사람들, 즉 바울과 그의 고소인들 모두가 부활의 희망을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바울의 시대에 이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퍼져있었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적어도 누가가 이 책을 저술할 당시, 즉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는, 부활이라는 개념이 비교적 널리 퍼져있었다고 추정된다. 부활 신앙이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증언된 것은 신 12 : 1-3에 나오는 것으로 2세기 B. C.일 터인데, 제사장 계급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A. D. 1세기 말경에 성전이 함락되면서 제사장 계급은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바리새파가 유대 민족의 종교 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이리하여 유대 민족은 바리새파의 이해에 입각한 부활에의 희망을 공유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의 이 말에서 저자가 살던 시대의 반영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여기서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에 대한 미래의 상벌(賞罰)은 믿었지만, 부활은 의로운 자들만의 몫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연설의 흐름을 따를 때, 일반적인 부활의 희망에 관해 언급한 다음에는,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뒤따라야 했을 것이다. 사실 저자가 다른 곳에서는 예수에 관한 설교와 부활에 관한 설교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바울 자신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부활의 희망이 가져온 실제적인 결과에 관해 논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이끌어 간다. 말하자면 부활과 심판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 "그래서 나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있습니다"(행 24 : 16).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은 조심스럽게 성전 모독에 관한 변론을 준비한다. 바울은 언제나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다고 말하면서, 예루살렘 순례 여행에 관해서, 그리고 가지고 온 구제금에 관해서 설명을 시작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온 이유, 그리고 성전에 간 이유를 설명한다 : "나는 여러 해 만에 내 민족에게 전달할 구제금( )과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습니다"(행 24 : 17).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힘으로써,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고 소요를 일으켰다는 고소를 반박한다. 예루살렘에 온 것은 동족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 민족과의 전적인 연대감을 증명해 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것은 '양심( )에 거리낌 없이' 수행하는 행위이다. 고국에 대해 이러한 신의를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고소할 수 있는가? 자신이 유대 민족의 일원임을 이렇게 공포하고 있는데, 무엇이라 비난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저자가 바울의 말 속에 함축하도록 배려하고 있는 질문들일 것이다.
바울은 연설을 계속한다 : "그러는 가운데( , 즉 제물을 드리며 예배하는 가운데) 그들은 내가 성전 안에서 성결 예식을 행하는 것을 본 것뿐이요 나와 함께 군중이 모인 일도 없었고 소동한 일도 없었습니다"(행 24 : 18). '그러는 가운데( )' : 이 단어들은 앞 구절의 ' (제물)'에 관련된다. 그러니까 바울이 나실인들과 함께 제물을 바치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결례(潔禮)를 행하는 그를 성전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건한 행위를 감안한다면, 바울이 작당을 한다거나 소동을 일으켰을 리가 없다는 암시가 담겨 있는 것이다. 누가는 여기에서 상황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고 있다. 즉 바울이 불경죄를 범했다는 고소를 당한 것은, 정결 예식에 관한 규칙을 지킴으로써 유대교와 유대의 종교적 관습에 대한 신실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그것이다. 유대교에의 경모(敬慕) 행위가 오히려 불경죄로 이해되는 아이러니를 말한다.
19절에서 바울은 고소인들을 당황하게 할 논거를 제시한다. 현장을 목격한 증인을 요구한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므로 그들이 와서 바울을 고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게 대하여 고소할 일이 있다면 당신 앞에서 그들이 직접 했어야 할 것입니다"(행 24 : 19). 그때의 그 증인들이 직접 출두해야 한다. 오직 그들만이 고소할 자격이 있다. 고소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증인의 부재는 로마 사람들의 사법적 관습을 상기하게 한다. 그것은 소송 당사자의 대질에 관한 것이다. 피고인은 고소인들과 직접 대질되어야 한다. 뒤뽕의 표현을 따르면, "대질은 피고인의 권리이다. 재판관은 피고인이 고소인들을 면전에 대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피고인을 위한 법적 보호 장치이다. 피고인에게 고소인의 면전에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 피고인의 보호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피고인이 고소인의 입으로부터 직접 고소 내용을 듣지 않았을 경우, 판결은 그 유효성을 상실한다."
합법적인 고소인들이 없으므로, 바울은 그곳에 나와 있는 고소인들을 향한다. 그곳에 나와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산헤드린 앞에 끌려가 섰을 때 그에게서 어떤 죄상을 발견했는지 말해야 할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산헤드린 앞에 섰을 때 이 사람들이 내게서 무슨 잘못을 찾아냈는지 말해보라고 하십시오"(행 24 : 20). 다시 한번 바울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를 가져왔어야 할 증인들의 부재를 언급하며, 고소의 법적 근거가 빈약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변론을 마친다 : "나는 오직 그들 가운데 서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문제 때문입니다'라는 단 한 마디 말을 외쳤을 뿐입니다"(행 24 : 21). 바울은 행 23 : 6-9의 논쟁을 연상하게 하는 '부활'이라는 주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다. 유대 민족 고유의 문제인 순전히 신학적인 주제로 다시 돌아옴으로써, 바울은 의도적으로 로마 사법 당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종교적 논쟁의 테두리 안에 자신의 변론을 국한시킨다. 바울은 자신의 사건이 유대 종교의 내부 갈등으로 비춰지기를 원하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우만을 변론의 주제로 삼고, 더둘로가 행 24 : 5에서 언급한 유대인 사회의 소요에 관해서는 분명히 설명하기를 삼가고 있다. 같은 이유로 그는 나사렛 도당의 괴수라는 말에 대해서도 명백한 답변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바울의 변론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한 바울의 자기 변론을 들은 벨릭스는 단번에 재판을 종결 짓지 않고, 재판을 연기한다 : "벨릭스가 그 도에 대한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그대들의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겠소'라고 말하고 심문하는 일을 연기했다"(행 24 : 22). 이 말은 벨릭스 앞에 있는 바울과 유대인 고소인들 모두를 향한 것이다.
여기서 재판의 연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일종의 해설자를 본문에 등장시킨다("벨릭스가 그 도에 대한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벨릭스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을 언급하게 만들고 있다. 벨릭스가 실제로 본문의 묘사대로 기독교에 관해 자세한 정보를 갖고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연기(延期)하다 '은 소송에 관해 새로운 신문을 행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사법 용어이다. 이것은 'pronuntiavit amplius', 즉 사건에 관해 더 충분히 조사하기 위하여 '보다 더 많이 amplius라고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전문적 용어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명백한 증거를 더 확보하고 더 조사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는 결정이 된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그에게 자유를 주고 친지들이 돌보아 주는 것을 막지 말라고 했다"(행 24 : 23). 이리하여 바울은 억류 상태에 있게 된다. 억류의 조건은 상당히 유연했던 것으로 본문은 말한다.
사실상 벨릭스는 이 단계에서 사건을 종결 지어야 했다. 고소인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현 상태에서 어떤 형태든 판결을 해주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고소의 근거가 확실하다는 점을 인정했다면 재판 관할 문제를 결정했어야 했다. 이 사건의 판정이 유대인 당국이 결정할 문제인가, 아니면 로마 당국의 소관 사항인가-라는 문제 등에 관하여 결정을 내렸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벨릭스는 사도를 계속하여 붙잡아 두고 억류하게 한다. 여기서 총독이 왜 재판을 연기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벨릭스의 말을 따르면, 판결의 연기 동기는 판결의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법상의 용의주도함을 기하기 위해서 루시아의 증언을 기다리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평과 신중함을 보장하고자 한다는 이러한 구실은, 벨릭스가 바울이 돈을 줄 것을 바랐다는 행 24 : 26의 누가의 설명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벨릭스가 기독교에 관해 정통해 있었다면, 루시아를 기다리지 않고도 사건에 관해 토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울에게 어느 정도 자유( )을 주고, 친지들이( ) 그를 보살펴 주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한 사실을, 바울이 무죄라는 판단의 표시라고 본다면, 벨릭스는 바울을 놓아 주었어야 했다. 따라서 벨릭스가 재판을 연기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해타산이 개입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벨릭스는 바울이 놓여나기 위해 돈을 주기를 바라면서 구금 상태에 놓아 두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 억류와 관련하여 헨첸은, 저자가 바울이 무죄라는 인상을 주면서도 벨릭스로 하여금 사건을 바울의 무죄로 종결짓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벨릭스가 베스도나 아그립바가 그러할 것처럼(Cf. 행 25 : 18, 26 : 31) 바울이 죽음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는 것은 바울을 놓아 주어야 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게 된다. 따라서 누가는 재판 연기와 구금 조건 완화라는 타협적인 해결책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추정이긴 하다. 그러나 이 가설은 벨릭스 발언의 진실성을 확실한 것으로 먼저 고정시킨 다음에 사건의 추이를 그 발언에 근거하여 해석하는 약점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사건의 골격이 먼저 있고 난 다음, 그에 맞춰 저자가 벨릭스의 발언을 본문에서와 같이 제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여하튼 누가의 서술에 의하면, 두 개의 다른 동기가 이야기에 첨가된다. 벨릭스가 바울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행 24 : 24b, 27).
III.
실제로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바울에게 관심을 보인다 : "며칠 후 벨릭스가 유대 여자인 자기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내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관해서 들었다"(행 24 : 24). 저자는 로마 사람인 벨릭스의 아내가 유대인임을 명시적으로 밝혀 적고 있다. 벨릭스는 왕가의 여자 셋과 결혼을 했는데, 그들 중 둘은 알려져 있다. 첫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다. 이로서 벨릭스는 안토니우스의 손녀 사위가 되는 셈이다. 셋째 부인이 여기에 등장하는 드루실라로,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의 누이의 딸이다. 그녀는 콤마게네(Commag se)의 왕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Antiochus IV Epiphane)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러나 에피파네스가 할례를 거부했으므로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52년에 그녀는 열네 살에 에메사(Em se)의 왕인 아지주스(Azizus)와 결혼했다. 결혼 후, 드루실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벨릭스는 구부로(Chypre) 섬의 마술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과 결혼하도록 이 여자를 설득한다. 그녀는 유대 여자가 이방인과 결혼하기를 금하는 율법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버리고 벨릭스와 결혼하게 된다. 이 파렴치한 결혼은 결국 유대인들의 기억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누가의 서술에 의하면, 벨릭스는 바울을 데려오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24절b). 벨릭스의 결혼에 얽힌 몰염치한 행위를 기억한다면, 그가 기독교, 또는 유대 종교와 같은 것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 어쩐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지적인 호기심이 그로 하여금 바울과 대화를 나누게 했다고 할지라도, 만남 끝의 그의 행동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바울이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벨릭스는 두려운 생각이 나서 '이제 그만 하고 가 보시오. 또 기회가 있으면 당신을 부르겠소'하고 말했다"(행 24 : 25). 바울이 '정의와 절제( , 자기 극복)와 심판'에 관하여 이야기 하자, 벨릭스는 두려워하며 대화를 중단하게 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정의의 법칙을 모두 어긴 사람이, 파렴치한 계교를 꾸며 유부녀를 남편에게서 빼앗은 사람이, 바울의 단순한 몇 마디 말에 겁을 먹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인간 정신의 변화와 그 향방이란 것이 수수께끼 같은 것이어서, 그러한 주제들에 관해 낯선 사람이 거론한다는 사실이 이 로마인 권력자를 거북하게 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 등의 역사가가 전하는 벨릭스의 모습을, 그처럼 진지하고 다소곳한 사도행전 속의 인물과 일치시켜 고려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저자의 적극적인 묘사와 이야기 속의 개입을 상정해야 할 것이다.
'정의, 절제, 그리고 장차 올 심판'은 사도 시대 이후 설교의 중요 주제를 이룬다. 여기 나타난 단어 '절제( , 자기 극복)'가 함축하고 있는 정확한 의미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누가는 헤롯가(家) 사람들의 문란한 결혼 풍습에 민감했으며, 돈과 관련된 불의에도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저간의 사정이 '절제'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를 여기서 저자가 구사할 수 있게 만든 연유일 것이다. 더욱이 누가는 벨릭스가 뇌물을 원했다고 쓰고 있다 : "동시에 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바라고 바울을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행 24 : 26). 로마법(lex Julia)은 뇌물 수수(授受)를 금하고 있지만, 실제의 현실은 그러한 법적 요구와는 별개로 전개되었다. 지방의 로마 관원들이 죄수를 풀어주는 대가로 돈을 강요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네로가 취임 연설에서 행정 부처에서 돈으로 매수하는 관습을 없애겠다고 약속을 할 정도로, 뇌물을 주는 행위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요세푸스의 저술에는 이러한 뇌물 수수 관행에 관한 증언이 나온다. 예를 들면, 유대 총독 알비누스(Albinus)의 행적에 관한 서술에서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그는 공적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개인의 재산을 사취하고 남용하며, 엄청난 세금으로 온 국민을 짓눌렀을 뿐 아니라, 지역 산헤드린이나 전임 총독에 의해 구금된 강도들을 몸값을 받고 풀어 주었다. 따라서 돈을 주지 않은 자들만이 죄인으로 감옥에 남아있었다."
26절을 보면, 벨릭스는 바울이 어느 정도의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저자는 이미 언급한 구제금을 가져왔다는 말 때문에(Cf. 행 24 : 17) 벨릭스가 바울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추정한 것으로 진술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바울의 재정 형편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도 없고 추정 근거도 없다. 그가 구제금을 가지고 있었든지, 아니면 기독교인 친구들이나 친척 등의 도움을 받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바울에게 있어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은 벨릭스가 총독 자리를 물러날 때까지 이 년(二年)간 계속된다. 누가에 의하면, 그 사이에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바울을 감옥에 가뒀다고 말한다 : "이 년이 지난 후에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후임으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벨릭스는 유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을 그대로 감금해 두었다"(행 24 : 27).
여기 '이 년'은 벨릭스의 임기를 가리킬 수도 있고, 바울이 구금되어 있던 기간, 즉 그가 가이사랴에 머문 기간을 가리킬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이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던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술의 맥락에 의하면 누가가 햇수를 계산하는 산정의 기준, 또는 중심은 바울의 억류 기간이고, 그 기간 산정에서 총독의 교체가 일종의 보조적 눈금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구금 기간을 총독의 교체와 관련하여 계산하였다는 것이다. 이 총독의 교체는 바울의 가이사랴 체류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저자에 의하면 벨릭스가 바울을 감옥에 가둔 것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 묘사를 그대로 승인할 경우 벨릭스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고려해 볼 수 있다. 벨릭스는 로마로 떠나면서 자신의 통치에 대해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어떠한 비난도 받기를 원치 않았을 수 있다. 유대인과 시리아인 사이의 분쟁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는 저자의 제시된 억류 동기는 납득할 만한 것일 수 있다.
이같은 이유로 벨릭스가 재판을 연기한 것이 길어져, 바울은 판결이 없는 상태에서 구금을 당해야만 했다. 엄밀히 말해서 판결 없이 구금된 이 상황은 그것 자체가 일종의 형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벨릭스는 이렇게 동결시켰던 바울 사건을, 아마도 첨부된 보고서와 함께, 후임자인 베스도에게 넘긴다.
Ⅵ.
위에서 검토한 여러 장면들에서 저자는 더둘로라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있는 고소인들을 대항하여 자신의 무죄를 웅변적으로 변론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장면들 중에서 바울이 벨릭스 앞에 출두한 장면과 벨릭스와 드루실라 부부와의 대화 장면 등의 연출은 저자의 문학적인 기교에 의해 채색될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누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이 장면들을 생동감 있게 재구성했을 것이다 : '연설가인 더둘로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바울이 벨릭스 앞에 출두했으나 재판은 연기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모호한 상황은 이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저자는 이와 같은 간략하고 건조한 사실, 그리고 어쩌면 그에 수반된 단편적인 전승들을 근거로, 사도 바울이 겪은 재판의 다채로운 모습들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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