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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1차 선교여행과 그 결과

에반젤(복음) 2022. 3. 27. 01:50

바울의 1차 선교여행과 그 결과


-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13:4-15:29)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신약학)

 

사도행전 13:4-14:23은 바울의 1차 선교여행으로 알려진 본문이다. 이 여행은 누가복음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14:27에서 내레이터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또 하나의 민족적인 장벽을 넘어야 했는데, 그 장벽은 15장의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다루어진다.

구브로에서의 선교: 바예수와의 격돌(13:4-12)

구브로 선교는 바예수(아람어로 ‘예수 또는 여호수아의 아들’을 의미한다)라 불리는 유대인 마술사와 바울의 격돌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바예수는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적하고 총독이 믿지 못하도록 역공을 펼친다(13:7-8). 이에 ‘바울로도 알려진 사울’(여기서 이름이 바뀐다)은 바예수에게 욕설을 퍼붓고 소경이 되라는 저주를 내리면서 직접적인 반격에 나서는데, 이는 마술사를 억제하는 것을 넘어서 총독이 복음을 순조롭게 들을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다. 확실히 총독은 바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바울의 메시지를 믿게 되었고(13:12), 결국 바울과 바예수의 대결은 바울의 승리, 즉 하나님의 복음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이 경쟁에서의 승리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이 일 이후 바울이 그의 새로운 선교적 권위를 강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바울이 왕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는 예언이 아직까지는 성취되지 않았지만(9:15), 구브로에서 제일 높은 신분의 관리이자 총독인 서기오 바울에게 설교하고 결국 그를 회심시킴으로 그의 목적에 가까이 도달하게 된다(13:4, 12). 우리는 바예수의 이야기에서 바울의 비전이 성취되는 한 과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레이터는 바예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선교여행의 구성원들을 다시 한 번 언급한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점은 내레이터가 그 구성원들을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라고 언급한다는 것이다(13:13). 아마도 내레이터는 앞으로의 내러티브가 바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확실히 하려는 듯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울의 신분의 변화는 바울이 그의 선교에 있어서 대표적인 후원자 바나바(9:27, 11:26)를 그의 고향 땅인 구브로에서 능가한다는 사실로써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4:36).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의 선교(13:13-52)

이제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비시디아에 있는 한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16절)에게 연설을 한다. 그 연설은 이전에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그 어떤 설교들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이스라엘의 모든 성서(13:33, 35, 13:15, 27, 39-40)를 성취하는 데 필수적인(13:46) 것이었다는 확신을 강조한다(cf. 눅 24:44-45).

바울의 연설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단락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체류하던 시기로 시작해서 다윗의 통치를 거쳐 예수의 도래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하게 묘사한다(13:16-25). 두 번째 단락은 이스라엘의 최근의 역사를 다루는데, 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한 예수와 하나님이 그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내용이 포함된다(13:26-37). 마지막 단락은 간략한 결론으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죄사함이 제공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진다(13:38-41).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비난을 받은 회당의 지도자들(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의 지경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서 유력한 시민들을 모집한다(13:50).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떠나 버린다(13:51). 이러한 행동은 누가복음서에서 예수의 제자들(12제자, 9:5; 70인 제자, 10:11)이 보여준 선교의 특징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유대인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부정한 자들이라는 선언적 의미를 갖는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함(14:1-7)

바울과 바나바는 로마 속주인 갈라디아의 남쪽에 위치한 이고니온에서 루가오니아의 두 성인 루스드라와 더베까지 이동한다(14:1, 6, 11). 첫 번째 도시인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지역 회당에서 설교를 시작하고 다시 ‘그들의 통치자’와 함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분리된 반응을 경험한다. ‘수많은’ 청중들이 회심하여 신자가 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려고 공모한다(14:1-6). 일부 청중들의 회심과 유대인들의 박해가 반복되면서 내러티브의 세계는 점점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내레이터가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껏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의 12제자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사도라는 호칭이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분명히 사도로 불리는데, 아마도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도들과 동등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한 앞으로 이어질 그들의 사역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은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이 열리도록 하나님의 계획을 돕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루가오니아에서의 기적 행위(14:8-20)

바울이 루스드라 선교 도중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소생시킨 기적은 사도행전 3장에서 사도 베드로의 초기 선교를 생각나게 한다. 베드로와의 관련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울을 베드로와 동등하게 중요한 사도로 여기도록 기능한다. 비록 바울의 경우, 베드로가 1:21-22에서 제시했던 사도의 자격 기준과 맞아떨어지지는 않더라도, 그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증인이 되었고, 베드로와 예루살렘의 동료 사도들과 똑같이 기사와 이적을 베풀었다. 바예수 사건과 앉은뱅이를 소생시키는 기적 이후로 이제 바울은 베드로와 같은 ‘사도’로 독자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다(14:4, 14).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운명은 스데반과 동료들의 박해자로서의 자신의 이전의 역할에 대한 극적인 역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와 만나기 전, 바울(사울)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동시에 남녀 그리스도인들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는 예루살렘 폭도들을 지휘했다(7:58-8:3). 이제 여기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끌려서 성 밖으로 내쳐지고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은 신세가 되고 만다(14:19). 스데반의 시련과 잘 어울리지만, 바울의 최후 운명은 다르다. 그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하게 된다(14:20).

교회를 돌봄(14:21-28)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를 돌보는 사역의 형태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 교회에 지역 지도자들을 임명하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요소에 있어서, 바울은 14:22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요청은 누가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눅 9:23)고 한 말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요소에 있어서, 바울과 바나바는 23절에서 그 지역 교회들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을 선택하고 있다.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장로를 임명하는 장면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세움을 받았던 상황을 상기시킨다(13:2, 3). 그러나 이 경우에는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지역 교회에 주재하면서 교회의 일을 관장하도록 임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임명된 지도자들은 안디옥에서처럼 예언자들이나 교사들(13:1)이 아닌 ‘장로들’로 불린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발단: 이방인에 대한 안디옥과 예루살렘의 입장 차이(15:1-5)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으로부터 예루살렘교회 안에 할례받지 않은 자들과의 식탁교제를 반대하는 일단의 할례자들의 모임이 있음을 알고 있다. 11장에서 그들은 베드로의 증언으로 설득되었고,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을 기뻐하게 되었다(11:1-18). 그러나 예루살렘교회 안에 존재했던 특별한 한 그룹이 다시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 그룹은 이방인 회심자들의 믿음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행해졌던 유대인으로서의 사회 민족적인 확인절차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 문제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반대 입장은 이 부분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는 이전의 자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민족의 경계를 초월한다는 기본적인 확신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의 메신저들을 ‘이방의 빛을 삼아’(13:47)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었다’(14:27)는 사실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필수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이는 다음 부분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에 의해서 좀더 명료해질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론(15:6-29)

우리가 베드로와 야고보를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이 장면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지도력이 교체되는 과도기를 암시한다. 12장 이후 본문에서 사라졌던 베드로는(12:17) 여기 15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친히 주관하는 만남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며,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회의에서 마지막으로 말하는 사람은 야고보로서,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야고보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이방인들을 문제삼지 말아야 된다”고 결정한다. 흥미롭게도 그 동일한 동사는 마카비 시대에 셀류시드 왕 데메트리우스의 편지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축제와 성일을 지키는 것을 제한함으로 “아무도 유대인들에게 그 어떠한 것도 강요하거나 괴롭힐 권한이 없을 것”이라고 유대인들에게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방 당국으로부터 그들의 율법을 포기하라는 괴롭힘을 당하기 원치 않았던 것처럼, 야고보도 이방인들이 율법 이행을 강요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일종의 절충안을 내놓는데(29절), 그것은 비록 이방인 제자들이 민족적 표시인 할례로부터는 자유로울지라도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실천과 관련된 문제는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구하는 목적은 디아스포라의 혼합된 회중 안에서 유대 그리고 이방 성도들 사이의 교제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법령’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네 가지 항목을 금지하는데, 그것들은 우상으로부터 더러워진 것들(제사에 사용된 음식 같은 것), 음행, 목메어 죽인 것 그리고 피가 그것이다. 성서에서 그러한 규범은 노아의 계약(창 9:4)에서 모든 인류와 “육체의 생명은 피 가운데 있다”는 근본적인 전제에 기초하고 있고, 레위기의 성결법전(레 17:10-16; cf. 신 12:23)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거주하는 타국인에게도 오랫동안 적용돼 왔음을 보여준다.

결국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거나 모세의 율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고, 요긴한 것들 즉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단서조항이 첨부되어 편지로 정리되고, 그것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전달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15:30-16:4). 새로운 교회들은 모두 이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된다(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