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공동체)서신에 나타난 소망
1. 들어가는 말 신약 성서에서 '소망'이라는 개념은 헬라어로 '엘피스'라는 명사 형태로 주로 나타난다. 소망이라는 개념이 등장할 때, 소망은 자연스럽게 무엇을 소망하며 왜 그러한 소망이 필요한지 밝혀주기를 요구한다. 소망 또는 희망은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 힘의 근원이 되며 절망적인 현실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소망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실체성을 갖는다. 21 세기를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소망'이라는 주제는 다소 불안하고 암울한 색채를 띤 채 논의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떠한 미래가 전개될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불확실성에 당혹해 하기도 하고,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게 될 가능성에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 새로운 천년대를 앞둔 우리는 보다 밝은 전망을 제시해 주는 소망의 개념에 주목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를 가지며, 또 한편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가운데 우리는 얼마 있지 않아 새로운 밀레니움에 진입한다. 단순하게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그것은 어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 그리고 우리의 삶과 역사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궁구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의미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희망에 대한 담론을 시작하는 마당에 성서는 그것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성서 속에 표현되어 있는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나 그것을 비판하고 방향을 정립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 사도 바울의 친필 서신이면서 그 중 주요한 서신으로서 소망의 개념을 비교적 많이 말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기록된 순서를 따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2. 주요 바울서신에 나타난 소망의 개념 1)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서신 중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임박한 종말의 문제가 주제로 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임박한 종말을 설교하였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급진적인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당장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몇 가지 문제로 인하여 종말론적 신앙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당시 바울은 묵시적 종말론적 관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종말에 관련된 문제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소망을 잃지 않도록 권면한다. 먼저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는 서두, 즉 소위 '감사' 부분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보여주었음을 감사하며 기억한다고 말한다(살전 1:3). 바울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감사 부분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수신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수사를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쓰려는 서신의 본문 내용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 줄거리를 요약하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울 사도가 특별히 데살로니가전서의 감사 부분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더불어 소망의 인내를 한데 묶어서 언급한 것은 소망이 본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주제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소망의 주제가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지 '소망' 의 어휘가 나타나는 문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당시에 그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 바울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마음으로 가득차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한다 (살전 2:2-4절 참조). 바울의 이러한 언급은 바로 앞 소위 '선교 케리그마' (1: 9-10)로 일컬어지는 부분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현실에서 떠나 참되신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며,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늘로부터 재림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음을 천명한 연후에 등장한다. 즉 현실의 고단함이 지대하였지만 종말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그것을 기쁘게 참아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많이 받았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교인들의 대접을 받으면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바울은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면서(2:9)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끔찍히 사랑하고 보살피는 마음이 매우 컸다. 심지어는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할 만큼' (2:8) 사랑했다. 이렇게 전도하다가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2:17). 아마도 박해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 사도는 그들을 다시 보기를 심히 원했으나 사탄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소망에 대해서 말한다. 바울은 소망의 구체적 증거로서 그가 전도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물론 바울은 소망을 예수의 재림과 관련시킨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소망을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복음만을 열심히 증거하였고, 온갖 오해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기와 더불어 소망의 믿음을 공유하자고 권고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소망에 대해서 다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종말론적 이슈들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는 문맥에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5장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가 데살로니가를 떠나갔기 때문에 더욱 궁금해 하는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세 가지인데, 형제 사랑의 문제와 죽은 자들의 문제와 종말의 시기에 관한 문제가 그것이었다. 이 셋 중에서 소망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진 문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였다. 물론 형제 사랑의 문제도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종말이 다가왔다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들이 결국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결과를 드러내게 되었다는 현실적 비판을 주조로 하고 있어서 소망이 본격적으로 취급되지 않았을 뿐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이 곧 임할 것으로 믿었는데, 그리고 바울 사도로부터 그렇게 배웠는데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들 중에 죽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 일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은 혼란을 겪었고 그들의 운명에 관하여 의구심이 일었다. 교인들은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였다 (4:13).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슬퍼하며 불안해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위로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남아 있는 신자들보다 먼저 부활하여 주를 만나게 될 것임을 확신시켜 주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소망은 죽음의 절망과 슬픔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재림에의 기대와 연결되어 있다. 출구가 없는 듯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것을 초월해 미래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재림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묵시적 종말론의 주요한 이슈로 유대 묵시문학의 메시아 대망 사상에 맥이 닿아 있다. 재림의 문제는 시간적 종말론의 정점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의 절정에서 재림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 암울하면 암울할수록 그 때와 시기는 더 빨리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기대요 바람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이 도적같이 알지 못할 때에 올 것이며, 해산 고통이 임할 때와 같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바울 사도는 재림이 갑자기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루어질 것이지만, 믿는 자들은 어둠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밤과 어둠이라는 시간적 표지를 신실한 삶을 사는 것에 적용시켜 말한다. 즉 바울은 믿는 자들이 밤과 어둠에 속하지 않았으니, 자지 말고 깨어 근신하라고 권면한다 (5:5-6). 이러한 문맥에서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권고한다 (5:8).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종말의 때를 맞아 단단히 무장해야 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안심할 것은 하나님이 재림의 날에 믿는 자들로 진노를 당하게 하지 않고 깨든지 자든지 예수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기 때문이라고 재차 확신시킨다 (5:9-10). 바울은 이 부분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불안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소망의 굳건한 토대 위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자 한다. 또한 5장에 등장하는 소망의 문맥은 '주의 날' (5:2)을 근거로 한다. 주의 날은 구약 성서의 예언서들과 유대 묵시문학에 빈번히 등장하는 종말론적 개념이다. 주의 날은 하나님이 죄악과 절망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개입하여 들어오시는 날이다. 주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혼란과 불의가 종식되고 질서와 정의가 확립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전수되어 오는 주의 날에 대한 기대는 여기에서 바울이 알고 있는 소망의 내용이며 성격이 되고 있다. 2)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에서 바울 사도는 소망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편은 아니지만, 고전 13장 사랑장에서 소망을 다루고 있으며, 소망이라는 어휘는 나타나지 않지만 고전 15장 부활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소망에 관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열광주의적 신앙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열광주의적 신앙이 가져올 수 있는 패해를 시정하려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가 있다고 자랑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우쭐대는 신앙을 보여주었다 (고전 1: 5 참조). 이러한 영지주의적 성향과 은사주의적 편향성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울 사도가 이러한 교회를 향해서 말하고 싶어한 것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 미래적 소망을 간직하는 일이었다.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 교회였다. 분쟁의 문제 (1-4장), 근친 상간의 문제 (5장), 세상 법정에 형제 교인을 고소한 문제 (6장), 결혼 및 이혼의 문제 (7장), 우상 제물의 문제 (8, 10장), 성찬의 문제 (11장), 은사의 문제 (12-14장), 부활의 문제 (15장), 헌금의 문제 (16장) 등이 전체에 걸쳐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헌금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일종의 영지주의적 성향의 우월감과 열광주의적 성향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는 현재를 중시하고 미래를 무시하는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문제삼고 있는 문제 중 또 하나는 바울 사도의 사도적 권리에 관한 논의이다. 그것은 9장에서 다루어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보여주는 영지주의와 열광주의가 파생시키는 자유주의 내지 방종주의에 대해 경고하면서,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자이며 사도이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을 뿐임을 밝힌다. 다른 사도들이 아내를 동반하여 대접을 받으면서 불편함이 없이 선교 여행을 계속한 반면에, 사도 바울은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 그리고 바울 역시 먹고 마실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조금도 장애를 주고 싶지 않아서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바울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는" (9:9) 것은 바로 소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한 말임을 분명히 하면서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9:10)고 설명해 준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다소 역설적이다. 본문은 이 세상에서 일하는 자가 육신적 필요를 충족시켜 줄 양식을 얻을 소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정작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육신적 필요를 포기하면서 더 신령한 소득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소망은 영적이며 미래적 성격을 가진 소망의 개념으로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12-14장은 전체적으로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중간에 13장이 들어 있다. 13장은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에 관해서 독립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열광주의자들에게 사랑의 은사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13장은 전반적으로 사랑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사랑의 속성이 모든 것을 '바란다' (13:7)고 한 것이나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13:13)고 한 결론 부분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사랑과 소망은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소망이 사랑에 비해서 부차적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소망은 무분별한 은사들이 현실적 토대를 가지지 않고 초월성에 집착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보다 인격적이고 이타적이어야 할 것을 지탱시켜 주는 가치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소망은 무조건적으로 미래적인 성향을 띠고 있지 않다. 오히려 믿음과 사랑과 더불어 가장 탄탄한 실천적 현재를 지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믿는 것이 미래에 완성될 것을 알게 해 주는 그 어떤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전 15장에 나타난 소망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고전 15장은 주지하다시피 부활장이다. 부활은 앞 문맥인 12-14장의 은사장들과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다. 즉 성령론과 종말론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부활은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 여부를 논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 믿는 자들의 삶의 문제를 말하고 싶어 한다. 15장에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한 뒤에 (1-11절), 믿는 자의 부활과 그 속성에 대해서 길게 논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지주의적이고 열광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이란 이미 일어났으며 더 이상 미래의 부활은 없기 때문에 몸의 부활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고전 1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 여부에 관해 논구하려는 목적보다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지나치게 받아들인 실현된 종말론 (the overrealized eschatology)과 대결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바울 사도가 믿는 자의 미래적 부활을 강하게 붙잡고 있는 이유는 어려운 현실 상황을 반전시켜 줄 유일한 소망으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 사도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 ('소망'이 동사형으로 나타난다)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15:13)고 말함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삶을 초월하는 새로운 삶을 희구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은 '위험을 무릅쓴 삶' (15:30)이요, '날마다 죽는 삶' (15:31)이요, '맹수로 더불어 싸운 삶' (15:32)이요, '먹고 마시는 것을 참는 삶' (15:32)이요, '사망이 쏘는 삶' (15:55-56)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지 영적인 것만이어서는 안되며 어려움이 많았던 현실적인 삶을 보상하고 그것을 맛볼 수 있는(?) 구체적인 부활의 몸을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 (15:35-49 참조). 그리스도는 이러한 부활에 대한 증거와 보증으로서 부활의 '첫 열매' (15:20)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될 것이다" (15:22) 따라서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소망을 실현해 줄 원형적 인간 (the archetypal humanity)이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과거 (15:3-8)요, 부활의 현재 (15:17, 30-34)며, 부활의 미래 (15:51-54)이다. 다시 말해, 부활의 주로서 그리스도는 소망의 근원이 된다. 3)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는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회 사이에 발생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인하여 가혹한 눈물의 편지를 기록할 만큼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 서신이다. 바울 사도는 또한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고난을 당한 많은 경험을 수차례 (4:8-11; 6:4-10; 11:23-33) 소개하고 있으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사도됨을 확인시키려 한다(11:1-12:11). 바울이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위로'였던 것 같다. 고린도후서의 감사 부분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도의 위로와 고린도 교회의 위로를 연결하여 강조하고 있다(1: 3-6). 바울은 계속하여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1:7)고 말한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 사도의 사역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고난이나 위로에 있어 바울 사도를 괴롭게 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신뢰와 소망이 흔들리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난관을 당하여 "하나님만 의뢰함으로써" (1:8-10 참조) 극복하려 한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과거의 큰 사망에서 건지셨고, 현재의 고난에서 건져주시며, 미래의 환난에서 건져주실 분이기 때문이다 (1:10). 고후 3장에서 바울은 추천서를 받아 사도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추천을 받을 만한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간적인 추천에 의한 사도적 활동에 의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 편지이며 추천서라고 말하면서, 글자가 아닌 영에 의해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글자로 기록된 정죄의 율법을 전해 준 모세의 직분도 영광이 있었다면 영의 직분과 의의 직분을 맡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더욱 영광이 넘칠 것이라고 한다. 바울은 계속하여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한다" (3:12)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표명하고 있는 소망은 현실적인 모든 장애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고 꿰뚫어버리는 근거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직과 관련하여 온갖 수모와 오해를 받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만족스런 소망(3:5 참조)으로 인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고린도후서 5: 1-10 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종말론이 나타나고 있는 특별한 부분이다.바울은 바로 앞의 문맥에서 온갖 고난과 핍박에도 낙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말한다 (4:16-18). 이러한 소망은 5장에서 '장막집이 무너지는' 개인적 죽음을 맞을 때 오히려 그것을 담대히 받아들이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바울 사도는 종말에 대해서 말할 때 집단적-우주적-묵시적-먼 미래적 종말론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살전 4장; 고전 15장).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은 개인적-내세적-가까운 미래적 종말론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주는 압박감이 너무나 커서 그것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죽은 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행한 대로 선악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5:8-10).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면 주와 함께 거하게 되는 생명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같은 사실은 성령으로 보증되었다(5:5). 그런데 5:1-10에서 주목할 것은 개인적인 죽음의 순간에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에 대한 소망을 피력하고는 있지만, 몸의 부활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기다려야 할 문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재림의 지연 (the delay of the parousia)의 문제가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림의 지연 문제는 초대 교회에 심각한 신학적 혼란을 야기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설명과 대안이 모색되었음직 하다. 재림의 지연은 일반적으로 종말론을 비역사화시키고 (dehistoricized) 소망의 의미를 신령화시키는 (spiritualized)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서 묵시적-우주적 종말보다는 개인적-비역사적 종말에 강조점을 두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 로마서 로마서는 죄와 율법과 사망이 가져오는 절망적 상황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자연 세계에 이르기까지 믿음에 의한 새로운 삶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한다고 천명한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소망은 철저하게 믿음 중심적이다. 로마서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행위에 의한 의는 불완전한 자기의 (self-righteousness)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방법과 수단을 통해서 주어진 해답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 구원의 길이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에 대한 논리를 전개한 후 바울 사도는 4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구체적인 아브라함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 유대적 미드라쉬의 요체는 아브라함의 의가 할례의 행위보다 믿음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제인 소망과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이다. 아브라함은 창 12-22장의 이야기를 따라 읽어 보면, 갈대아 우르를 무조건 순종하여 떠났으며, 아브라함에게 노년에 약속한 아들에 대한 약속을 신뢰하였으며, 이삭을 희생 제물로 내어 주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17절)을 믿었으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18절). 즉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과는 관련이 없는 전적인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 근거한 소망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백 세가 된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 (여기서 믿음은 '소망'과 동의어로 사용된다)이 약하여지지 않았고" (19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롬 5:17; 히 11:19 참조) 것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믿음과 소망의 조상이 된 셈이다. 소망의 주제는 5장에서도 이어진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다 (5:2). 그것은 안정된 생활 중에서만이 아니라 환난이 온다 해도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5:3-4). 그 소망으로 인하여 믿는 자는 현재와 미래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게 넘치게 함으로써 보증된다 (5:5). 즉 소망은 현재의 환난을 극복하게 해 주는 원동력이며, 그 연장선 상에서 미래의 부끄러움은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 소망의 주제는 거의 고난과 관계되어 설명되고 있는데, 로마서 8장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8장 서두에서 바울 사도는 앞 장들에서 논의한 죄와 사망과 율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선포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믿는 자들을 해방하였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이제 참된 자유와 해방을 맛보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고난의 삶을 빗겨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죄와 고난이 믿는 자들을 옥죄고 있다. 믿는 자들은 성령에 의해서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8:14-17). 그러나 그 영광에 참예하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못박는다 (8:17). 물론 현재 믿는 자들이 받는 고난은 미래에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은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들이 살게 될 피조 세계에도 해당된다(8:18-19). 피조물들이 고대하며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더불어 창조의 참된 목적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세계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죄악을 위한 도구와 장소로 이용되었다면, 그래서 부패와 타락을 위한 종노릇을 해 왔다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탄식하며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를 보면 정말 자연 세계의 괴로움을 실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땅과 공기와 물과 하늘과 바다와 강과 산들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식물과 동물과 미생물과 더불어 함께 고통을 받고 있다. 생태계의 위기로 인하여 인간과 세계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다. 소망없는 세계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는 현실이다. 로마서 8장 18-25절은 피조물과 믿는 자들이 함께 탄식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소망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세계는 고난받고 있는 '몸'의 구속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몸의 구속을 통해 양자로서의 명실상부한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몸의 구속이란 현실 세계에서의 구체적인 회복된 삶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 이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미래의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적어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소망이란 이 문맥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 (8:24)이며 그것은 인내를 통해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소망은 단지 개인적이고 제한적인 차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전 우주적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운명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밝힌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미래는 아무런 기약도 없이 확신이나 기쁨도 없이 무작정 기다려야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믿는 자들의 현재에 역사한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이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고 확신으로 가득차 생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위하신다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는가?" (8:32)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이 현재에 당하는 어떠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8:35)도 견고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가 없다. 더 나아가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8:38-39).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견고한 소망은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준다(8:37).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로마서 9-11장에 나타나는 또 다른 소망의 개념을 보여준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방인에 의해서는 받아들여진 반면 (이방인들에게 유리한 복음이었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에 의해서는 거부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자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근심이 생겼고, 이러한 고민은 그의 선교 활동 내내 그를 괴롭힌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의는 단지 이방인들의 구원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을 포함한 온 세계 전체에 관계하는 것이라고 믿은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사 (salvation history) 안에서 유대인이 어떠한 방식과 시기에 구원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기뻐한다. 바울은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이 미루어질 것이지만 결국 종말의 때에 유대인은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될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1:33)라고 감탄하게 된다. 오묘한 하나님의 구원사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던져주며, 그것을 안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울서신은 기본적으로 직설법 (indicative) 과 명령법 (imperative)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실이 설명되고 난 뒤에 그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할 윤리적 책임을 또한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로마서는 12장부터 명령법의 구조를 보여주는데, 이 부분에서 바울은 소망과 관련된 권면을 포함시키고 있다. 먼저 바울 사도는 "소망 중에 즐거워할 것" (12:12)을 명령한다. 환난이 믿는 자의 삶을 고단하게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극복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신앙 윤리에 관한 일련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소망은 믿는 자의 당연하고 일상적인 신앙 생활에 포함될 신앙 요목이라는 말이다. 이는 또한 본받지 말아야 할 '이 세대' (12:2)와는 관계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세대' (this age)는 '오는 세대' (the age to come)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오는 세대'인 새로운 세상에 걸맞는 덕목으로서 소망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에 대한 권면은 명령법이 끝나는 15장에서 두 번 (4, 13절) 다시 언급된다. 이는 소위 '강한 자와 약한 자를 위한 권면' (14:1-15:13)에 해당되는 본문에서 발견된다. 당시 로마 교회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칭 강한 자들과 채소만 먹는 연약한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날을 중히 여기느냐의 문제를 가지고도 의견의 차이를 보이며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4:2-6). 바울은 이러한 로마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덕을 세우며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정신으로 살 것을 권면한다 (15:1-2). 이러한 문맥에서 바울은 이에 대한 예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된 삶과 더불어 하나됨을 기뻐하고 서로 협력할 것을 강조하는 구약 성서 말씀들을 인용한다 (15:5-12). 이는 서로 하나라는 것을 소망 안에서 알게 되면 갈등과 분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 되신다 (15:13). 3. 나가는 말 앞에서 우리는 바울의 주요 서신을 중심으로 소망의 개념이 어떻게 제시되고 전개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바울 사도는 다양한 상황과 문맥에서 소망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미래의 구원이나 부활과 같은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든지, 현재의 고난이나 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원동력으로 나타나든지 한다. 그러나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모든 소망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성령에 의해 보증되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을 이긴 소망 (부활)의 첫 열매이며, 성령은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소망의 영이며,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게 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이다. 바울의 신학과 윤리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많은 학자들의 시도가 있어 왔다. 물론 바울서신뿐만 아니라 신약 성서 전체가 종말론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신약 성서의 토대가 되는 구약 성서나 유대 묵시 문학이 중간 시기에 묵시적 종말론 (the apocalyptic eschatology)으로 더욱 급진적인 형태의 종말론으로 발전하면서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울서신은 전체적으로 보면 종말론적이지만, 개별적 서신들을 각각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상황에서 보게 되면 서로 다른 종말론적 관점을 보여 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갈라디아서나 빌레몬서같이 종말론적 관점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 서신들도 있다. 베커 (J.C. Beker)같은 학자는 바울서신을 종말론이라는 일관성 (coherence)을 통해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서로 다른 각각의 다양한 서신과 그 문맥에서 우연성 (contingency)을 띠면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같은 관점은 바울서신을 다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에서 바울서신에 나타난 소망의 개념을 그 문맥과 상황에 근거해서 살펴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소망의 신학이 가지는 일관성을 이해하도록 해 보자. 바울 사도는 종말론에 그 신학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인간론 등 모든 부문에 걸쳐서 종말론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근본적으로 바울의 종말론은 소망(희망)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의 종말론적 희망도 선취한다. 이것은 구약의 아브라함의 예에서 보듯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오직 인간의 희망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부활 사건을 통해 확증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힘이며,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해 현재적으로 보증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계속하여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 소망은 본질적으로 미래성을 가진다. 구원을 과거적 성취로서 이신칭의와 성취로서 성화와 미래적 성취로서 영화의 삼단계 내지 삼차원으로서 이해할 때, 소망은 보다 영화와 관계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영화의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 중에 거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고, 죄와 사망에서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고, 몸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직 소망스런 미래에 도달해 있지 못하다. 현재는 아직도 고난과 어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해결된 장미빛 소망은 오히려 그것과 상반되는 고통스런 현재로 인하여 더욱 역설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이미' (already)와 '아직 아니' (not yet)의 긴장 속에 놓여져 있음을 실감한다. 따라서 미래의 소망을 의심하게 만드는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공허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소망은 현재적 실체를 요구한다. 아직 오직 오지 않은 미래,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종말을 전망하면서 현재 여기에서 그 소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며 감옥 속에서도 기뻐하며 핍박과 멸시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성령은 우리가 고난의 현재를 소망 중에 살아갈 수 있는 경험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다. 성령은 '생명을 주는 영' (고전 15:45; 롬 8:2, 10)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부활의 첫 열매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현재의 고난에서 극복하게 만들어 준다. 성령은 소망을 현재적으로 보증하는 영이다 (고후 1:22; 5:5). 성령은 양자의 영으로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여 준다 (롬 8:15).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역사하여 바른 윤리적 생활을 살아가도록 도우신다 (롬 8:11). 이를 통해 믿는 자들은 구원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고통 가운데서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소망을 선취적으로 현재화하여 살아가는 존재다. 이것이 소망으로 소망되게 하는 힘이다. [출처] 바울(공동체)서신에 나타난 소망 |작성자 성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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