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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선교와 신학

에반젤(복음) 2022. 3. 27. 01:49

바울의 선교와 신학

Ⅰ. 서 론 

  사도 바울은 헬라-로마 세계에 기독교의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세기의 헬라-로마세계는 오늘날의 세계에 못지 않게 다양하고 급속한 변화와 혼란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은 때로는 복음의 토착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사람들과 싸웠고, 또 한편으로는 복음을 지나치게 왜곡시키려는 반대자들과 투쟁하면서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기독교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그리고 예수를 신으로 만들고 세계적인 종교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하고 교회의 조직강화에 앞장선 것이 사도 바울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된, 또는 인종적으로 유대인에만 적용되는 편협된 복음이 아니라 당시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복음으로 이해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모든 인류가 하나의 가족의 될 수 있다는 비젼을 그의 복음 이해를 통해서 보여 주었다. 급속한 변화의 위기에 직면한 현대인들은 바울을 모범으로 하여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어떻게 응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본 고에서는 바울의 선교와 신학에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초대교회의 신학을 집대성한 바울의 생애와 중요한 전환기인 개종의 전후 그리고 선교와 신학분야를 살펴보면서 바울의 신학세계를 알고자 한다.

 

  Ⅱ. 바울의 생애, 회심사건과 그 이후

 

  1. 출생과 젊은 시절

  바울이 출생한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빌레몬서 9절을 토대로 주후 10년 이내에 태어났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우리들에게 결코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의 이름 파울로스는 그를 로마의 어느 도시와 연관시키고 있다. 바울(사울)은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열심있는 자이며(행 22:3) 청결한 양심으로 선조때부터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고(딤후 1:3) 할례를 받았고 자랑할만한 베냐민 지파요 율법으로는 바리세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의 선두에서 핍박하던 사람이니 바리세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도무지 결점이 없는 사람이었다(빌 3:5-6).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다(갈 1:14).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행 22:26-28). 그는 자신의 유대적 배경을 자랑하며 "히브리인"이라고 부름으로서 이는 그가 도한 아람어도 말할 줄 알고 구약 성경을 히브리어로도 읽을 수 있는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서신에 나오는 스토아의 수사적 논쟁의 흔적들은 그가 헬라 교육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2. 회심 이전 다소의 바울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젊을 때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서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에게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는 그의 회심 직전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였다. 바울이 회심 전에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는 경우에 관한 한 그 증언은 너무나 생생한 상술을 지닌채 강렬하고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급진적인 회의주의를 의미하게 되어 버렸다. 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신빙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초기 예루살렘 거주론은 사도행전에 의해 강력히 입증되고 있고 바울이 그의 지난날의 바리새적 이력에 대해 이야기한 모든 것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누가의 증언가운데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바울이 몇 살에 예루살렘에 갔는가 하는 것 등은 단정지을 수 없다.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 전후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다. 바울은 그 사이에 어디에 있었는가? 그 문제는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 등에 나타나 있는 실제적 증언에 근거하여서만 결정되어질 수 있다. 고후 5:16에 '그리스도를 육체로 알았으나'라는 표현정도가 고작인데 그래서 바울이 예수를 수난 이전에 보았다고 추정할만한 어떤 명백한 증거도 없다. 그러나 서신의 침묵은 바울과 예수 사이에 어떠한 지속적 접촉도 특히 청년 바울의 예수에 대한 어떠한 적극적 박해도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한데 비록 바울이 예수를 팔레스틴에서 한번도 본 일이 없을지라도 그가 예수에 관해 듣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3. 다메섹 도상의 회심 순간

  바울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가운데 만남으로써 회심하게 되었다. 우선 첫째로 그 주체의 신체적 조직에서 그 경험에 대한 어떤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단은 아주 불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다메섹 체험을 환각으로 인정한다 할찌라도 그 근거를 사도 바울의 육체적 연약함으로서 찾아내려는 것을 충분하지 않다. 회심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로마서 7장과 바울이 율법 하에서 체험했다고 생각되는 불만족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죄의식은 가시없는 매로서 바울로 하여금 구주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었다는데 그 죄의식에 대해 말하자면 회심전의 바울이 진실로 죄의 회오리 아래 있었다는 아무증거가 없다. 한편 바울이 그가 박해했던 자들의 용감성에 호감을 느꼈다는 설은 지극히 수긍하기 곤란하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은 환상도 아니요, 단순한 표적도 아닌 진실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회심증언을 어떠한 도덕적 또는 심리적인 반대도 있을 수 없다. 한편 바울이 회심한 후의 첫 번째 친구는 다메섹의 아나니아였다.

 

  4.  회심 직후의 바울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회심 후 아나니아의 인도를 받아서 세례를 받았다. 회심을 체험한 바울은 아라비아로 갔다고 고백한다. 즉 회심하고 난 후의 첫여행은 예루살렘 여행이 아니라 아라비아 여행이었다. 사도행전은 아라비아의 여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상당한 기간을 다메섹의 회당에서 전도하고 있던 사실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다. 아라비아 여행의 범위는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 다소와 안디옥에서의 바울
  예루살렘을 떠난후 바울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갔다. 바나바는 바울이야 말로 안디옥의 이방인을 상대로 한 전도활동에 적임자라고 생각하였고 또 사실 그는 이미 그 적격성을 입증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뷰셑이나 하이트뮬러에 의해서 안디옥에 있는 기독교공동체에 커다란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2) 사도회의
  갈 2:1-10을 행 15:1-29과 자세하게 비교해보면 다른 난점이 생긴다. 첫째, 행15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바울적 원리를 지지한것 처럼 묘사하지만 갈2은 근본적인 상이점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3) 베드로를 책망함
  예루살렘 회의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돌아왔다. 한편 유대인 기독교 신자는 그들 조상 전래의 생활양식을 포기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한편 베드로가 새로 온 사람들이 두려워서 이방인의 교제에서 몸을 빼어 버렸다면 그는 그의 참 확신을 숨긴 것이 된다. 이대 바울이 질책할 필요를 느낀 것은 베드로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은 점이었다. 그 모순된 행동이 이방인 기독교신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베드로가 이방인 기독교도들로부터 몸을 도사린 그 영향이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울에게는 복음의 완전한 의미내용이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통해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근본적인 불일치가 확립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한 것은 베드로가 사람을 두려워해서 그의 올바른 원리를 숨겼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베드로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자세한 것은 확실히 알지 못한다.

 

  5. 회심 이후 바울과 예수

  1) 바울의 예수에 대한 증언
  바울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예수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 여기고서 그의 모든 생활을 그리스도가 하셨던 일과 그리스도가 계속하시고 있는 것들 위에다 구축하였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에는 역사적 인물 예수와 신적 하나님 그리스도 사이에 그노시스주의적 분리와 같은 그런 흔적은 조금도 없다. 바울의 증언은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주이며, 대주재로 인정했다.

  2) 바울과 초대 사도들의 완전한 일치
  바우어에 의하면 바울과 베드로는 기껏해야 단지 가협정을 수립하는데에 그쳤다. 진실로 그들은 원리상 뿌리깊은 차이에 의해서 분리되고 있다. 고대 카톨릭 교회가 바울 한사람만을 취하지 아니하고 또한 베드로 한사람을 취하지도 않고 어떻게 바울과 베드로를 함께 받아들여 교회의 기초를 그 위에 어찌 세울 수 있었겠는가? 바우어는 교회가 베드로와 바울 양자에 의해 이끌려 존속했다는 그 원리로서 그에 반대하여 제기된 근본적 반대론을 극복하는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우어는 순수하게 석의적 방법에 의해서 바울과 베드로의 투쟁이라는 가설을 바울 서신에 기초를 두고 수립했다. 
  3) 그리스도에게 복음을 직접 받았다는 의미
  바울이 갈리디아서에서 그의 복음을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실 예수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복음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바울에게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전승에 대해서 자기쪽에서 어느 정도는 무관심했음을 조금도 직접적으로는 표명하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데 있어서 먼저 인정해야할 것은 바울서신에서 예수의 말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사실이나 예수의 생애의 세부적인 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놀랄 만큼 적다는 사실이다. 흔히 바울은 예수에 관한 두가지 사실, 즉 죽음과 부활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하나 고전 11:23에서 그는 사소한 것조차 언급을 하고, 그것이 발생한 때를 '그가 배신자에 의해 넘겨지던 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윤곽이란 예수는 거처가 없이 선을 행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그런 자였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서 예수의 설교와 모범에 대한 언급이 적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과장에 지니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의심할 것도 없이 바울은 예수에 관해서 그가 서신을 쓰는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서 언급한 그 언급의 부수적 특징은 바울이 서신 안에서 가르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그 이상으로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4) 예수와 바울, 바울과 예수와의 일치
  예수와 바울과의 일치는 근대 자연주의적 비평에 의해서 인정된 복음서의 예수에 관한 설명의 모든 요소 요소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와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동일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부성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도 예수와 마찬가지였다. 세째로,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제시하는 점에서 예수와 동일하다. 그러면 바울과 예수의 진정한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나? 예수의 지상전도의 모든 사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울의 사색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바울의 종교는 구속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예수는 교사가 아니라 구속주였다. 확실히 바울의 신학과 종교를 분리한다는 사고방식은 버려야한다. 만일 예수가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죽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구속자라고 한다면 바울은 예수의 참 추종자일 수 있었다.

 

Ⅲ. 바울의 선교활동과 그 의의

 

  바울은 회심후 공중앞에서 회개한 사실을 간증하고 전환된 마음을 수습하고 앞날을 위한 준비로 아라비아에 은퇴하여 더욱 힘을 얻고 돌아와 유대인에게 예수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임을 전파하였으며, 안디옥교회에 초대 이방 선교사로 사역하게 된다.

 

  1. 바울의 선교활동

  1) 1차 선교여행
  1차 선교여행은 바나바와 같이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섬을 경유 소아시아 중남부 지방의 유다인 회당을 순방하면서 거기를 발판으로 선교하였다. 이 선교 활동 중 이방인 회심자와 유대인의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야기되어 유대교의 전통을 고집하는 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루살렘회의 때 이방인 선교에 관한 문제 협정을 지었다(행 13:4-14:28).

  2) 2차 선교여행
  2차 선교여행은 실라를 데리고 안디옥을 출발하여 드로아 바다를 건너 유럽 땅에 들어가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덴, 고린도에 이르러 1년 반 동안 머물렀다가 그 후에 에베소를 지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행 15:40-18:22).

  3) 3차 선교여행
  3차 선교여행은 소아시아의 내륙지방 갈라디아 부르기아 지방을 지나 에베소에 도착하여 거기서 3년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그 부근에서 선교하였다. 그 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가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 선교 여행에서 지중해 연안에 몇 개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신약성서에 포함된 바울의 서신도 많이 썼다(행 18:23-21:14).

  4) 로마선교여행
  3차 선교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반대파인 율법주의 자들의 선동과 모략으로 입건되어 가이사랴에 2년간 감금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인연이 되어 바울은 총독 벨렉스 베스도 그리고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후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갔다(행 21:17-24:27).

 

  2. 바울의 선교활동의 의의

  초대 기독교의 형성에 미친 바울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아마 교회들의 개척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러한 사역에 관련된 서신들을 남겼으며, 이 서신들의 기독교 정경의 일부가 됨으로써 기독교회의 새오할과 사상에 계속적인 영향을 결정적으로 미친 것이 더 큰 임무였는지도 모른다. 

 

Ⅳ.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주제별 바울의 신학

 

  세계적, 비율법적 기독교를 위한 바울의 영웅적 투쟁사는 치열하였다. 과연 바울은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였는가, 아니면 개조자였는가? 고도로 훈련된 그의 사상으로부터 나온 해석은 확실히 원시 기독교의 단순한 신앙을 무엇인가 좀 다른 형태로 나타낸 것이 사실이었다. 비록 바울이 그가 터득한 랍비적 교훈과 헬라적 경험으로부터 얻은 많은 것을 기독교 신학에로 옮겨 놓았다 할지라도 그의 깊은 기독교적 경험은 초대의 다른 제자들이 소유했던 것보다 더 심오한 통찰력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신학자 바울의 사상은 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상과 가끔 다른 것을 제시한다 할지라도, 기독교인으로서의 바울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

 

  1. 하나님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었다. 삼위일체도식은 성령, 그리스도, 하나님 순서로 나타나기도 하며(고전 12:4-6),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 순서로 보여지기도 하고(고후 13:13),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순서로 표현되기도 한다(엡 1:3-14).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고전 8:6; 엡 4:6). 바울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자주 아버지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이시다. 만물은 하나님에 의하여 섭리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사랑과 책망을 공유하신다. 하나님은 유일한 의지의 대상이시다. 그분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죽음가운데서 구속하신다.

 

  2.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고유 이름인 "예수"만으로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의미, 혹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 기독론에 주요 관심이 있음을 가리킨다.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혹은 "그의 아들"로 부르고 있다. 70인경에서 christos는 히브리어 masiah, 즉 "기름 부음 받음 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특히 부활하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해 훨씬 더 중요한 바울의 칭호는 퀴리오스(kyrios), 즉 "주"이다. 바울은 구약 성경, 특히 그가 구약성경 본문들을 인용하거나 설명하는 구절들에서 여호와에 대해 "퀴리오스"를 사용한다. 한편 그리스도 사건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 이라는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생애 및 부활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의 복합체를 가리키는 일종의 간단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했던 것은 (1) 칭의, (2) 구원, (3) 화해, (4) 속죄, (5) 구속, (6) 자유, (7) 성화, (8) 변화, (9) 새 창조, (10) 영화 사건이다.

 

  3. 성령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롬 8:9).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아신다(고전 2:10).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롬 8:9). 그래서 오직 성령으로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전 12:3). 성령은 생명과 자유의 영이시다(롬 8:2; 고전 3:17). 성령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매인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중보의 역활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시는 분이다. 신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고전 12:13),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며(엡 5:18),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가지고(롬 12:3이하; 고전 12:7이하),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갈 5:22-23).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갈 5:25).

 

  4. 인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또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계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연속성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다. 이것은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내용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론은 신론적 인간론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은 "이전"과 "그러나 지금"이라는 시간적 표현에 따른 종말론적인 존재의 변화에 기초한다(엡 2:11-13; 골 1:21-22; 3:7-8).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설정한 구분이다. 새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살려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처럼 고전 15:45; 성령처럼 고후 3:6). 바울에게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존재적인 것에서 활동적인 것으로 전진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은 활동개념이다. 인간은 능력이다. 인간은 행동하는 인격이다. 인간은 능동적이다. 새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인간"에서 "하는 인간"로 나아간다.

 

  5. 교회

  구속받은 신자들은 교회를 이룬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회를 소개한다. 가정교회와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이다.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다양한 용어를 사용한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영적 의미와 지역에 위치한다는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체들이 연결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전도하기와 가르치기를 중요한 기능으로 가진다. 또한 교회는 코이노니아이며 디아코니아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임무를 가진다. 그것은 예배와 봉사이다. 또한 교회는 성도를 향한 교제와 섬김을 이룬다. 이것은 인격과 물질의 사귐과 나눔으로 구성된다. 이때 성찬과 애찬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 교회는 사회를 향한 사명을 가진다. 또한 교회는 플레로마이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전달되어 교회를 충만하게 한다. 이 때문에 교회는 세상과 만물에 대하여 충만함을 전달하게 된다(엡 1:22-23). 한편 바울에게서 종말론과 교회론의 관계에 대한 주의 깊은 검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가 바울의 서신으로 이해되고 그의 성숙한 사상의 절정으로 보인다면, 그의 교회론이 주가 되어 종말론은 교회론 아래 포섭되기 때문이다.

 

Ⅴ. 결 론
 
  바울은 모든 환난에도 불구하고 전도를 굽히지 않은 위대한 전도자였으며, 많은 환경적인 난관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위대한 신학자였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후 13:8).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바울은 전도자였으며 신학자로 초대교회의 신학적 근간을 이루었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가교를 놓은 교회사에 위대한 신학자요 실천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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