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 로마의 주요 속주들에서의 선교(행 15:36-18:22)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신약학)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빌립보와 아테네, 고린도와 같은 지중해의 주요 도시들에서 바울이 행하는 성공적인 선교를 보고한다. 그러나 이런 성공적인 선교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조직적인 박해와 음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바울 선교의 빛과 그림자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공과 실패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 바울은 그의 여행 동역자들을 새롭게 정비한다. 첫 번째 여행의 동역자였던 바나바와는 마가 요한의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결별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새로운 동역자인 실라와 함께 그의 두 번째 선교여행을 시작한다.
바울과 실라의 빌립보 선교(16:1-40)
사도행전 내러티브의 주요한 동인 중 하나인 성령은 환상과 다른 수단들을 통해서 선교 일정을 이끈다. 그리고 여기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는 바울 일행의 여정을 마케도니아로 전환시키는 주체 역시 주의 영이라고 내레이터는 보고하고 있다.
빌립보에서 개종한 첫 번째 사람은 루디아라는 여성이었다. 비록 루디아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에 끌려 동조하게 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행 16:14). 루디아의 경우는 고넬료와 유비가 되는데, 고넬료는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방인 회심자이지만(10:1-48), 루디아는 유럽의 최초의 회심자인 셈이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복음을 증언할 때 루디아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주로 믿었다. 그 결과 그의 가정(오이코스)은 세례를 받고 바울에게 융숭한 환대를 제공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오이코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거대한 대가족 개념이면서 부를 상징한다. 루디아의 모범적인 헌신은 복음서에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섬기던 여성들(눅 8:2-3)의 이미지와 일치하는데, 그들은 적극적인 경제적 후원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루디아의 역할 역시 여성으로서 바울 사역의 옹호적 동지로서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어서 바울과 그의 일행은 점(占)을 쳐서 주인에게 큰 이득을 제공하는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여종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저희에게 전하는 자”(16:17)라고 며칠을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자, 바울이 그녀를 괴롭히는 귀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쫓는다. 이 사건은 바울 일행이 빌립보 감옥에 구금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또한 그 구금은 또 다른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한 과정으로 기능한다. 실제로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감옥에서 자유의 몸이 된다. 게다가 감옥에 있던 사람들은 지진이 발생해서 옥문이 열리는 경험뿐 아니라 바울과 실라의 설득력 있는 증언으로 감명을 받는다. 바울과 실라는 우선 감옥 내에 있는 동료 죄수들에게 그러고 나서는 지진으로 인해서 생긴 일을 조사하는 간수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한다. 결국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처를 씻기고, 그들은 이 간수의 ‘온 집’(행 16:30-33)에 복음을 전하고(16:32), 그의 ‘온 집’ 사람들은 모두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증거로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한다(34절). 바울은 자신이 감금된 것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빌립보서에서 언급한다(빌 1:12). 또한 우리는 이 장면에서 로마의 시민권자인 바울과 대면하게 된다. 바울과 실라의 이러한 신분은 ‘우리 로마 사람들’(16:21)이 받지 못할 풍습을 전한다는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주인 내외)의 고발을 일거에 제거해버린다. 이제 로마의 시민권자라는 신분을 드러낸 바울 일행을 통해 로마의 고위 계층과 시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장면들이 사도행전 내러티브에서 펼쳐질 것이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선교(17:1-15)
바울 일행은 에그나티아 도로(via Egnatian)를 따라 서쪽에 위치한 데살로니가에 도착한다. 이곳은 마케도니아에 있는 도시로서, 로마제국의 속주 가운데서도 중요한 인구밀집도시였다. 데살로니가에서의 이번 선교(17:1-9)는 베뢰아에서의 선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17:10-15).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떠나서 그날 밤에 베뢰아로 가서 사역을 시작한다(10절).
바울과 실라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선교는 그곳의 회당에서 유대교의 성서를 설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17:1-3, 10-11). 특히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는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만 할 것”(17:3)을 증명하고 바울이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강조한다. 이 두 곳에서는 적지 않은 귀족 계층의 여성들과 남성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17:4, 12). 이러한 반응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한 귀족 계층의 여성들과 유력한 남성들의 적대적인 모습(13:50)과는 정반대이다. 그레꼬-로마의 상류 사회에서 바울의 평판은 마케도니아에서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에서의 논쟁(17:16-34)
사도행전 저자에게 아테네는 고린도보다 더 중요한데, 그 까닭은 고린도가 세계를 향한 문이라면 아테네는 지혜를 향한 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테네는 문화의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찬 도시이기도 했다. 누가에 의하면,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그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게 된다(16절). 그래서 평소의 자신의 선교 전략과 동일하게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함과 동시에 광장에서도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바울은 에피큐러스 및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런 경우는 사도행전의 전 내러티브에서 특기할 만한데, 바울이 정기적으로 그레꼬-로마의 도시 생활의 센터에서 복음을 선포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테네의 바울이 빌립보(16:19)와 데살로니가(17:5)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는 달리, 헬라 철학자들과 예수의 몸의 부활에 대해서 토론을 시도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물론 그들은 바울을 향해서 ‘말쟁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지만(17:18), 그가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듣기 위해 그를 아레오바고로 붙잡아 갈 정도로 그와 그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을 보인다(21절).
아레오바고에 붙잡혀 온 바울은, 광장에 모인 청중들을 향해 “너희를 보니 매사에 종교성이 많도다”(22절)라는 말로 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시작한다. 물론 바울의 지적이 그들을 칭찬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바울은 자신이 아테네를 다녀보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신전의 단을 보았다(23절)고 고발하면서, 그들이 신봉하면서도 그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고 예배하는 그 신을 자신이 알려주겠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고 천지를 주관하며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공급하는 존재이다(24-25절).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속성을 아주 강도 높게 설명해준다. 바울의 탁월한 수사학적 전개에서, 그는 헬라의 철학자와 시인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전하는 사상을 옹호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한다”는 구절은 크레타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에게서, 그리고 “우리가 그의 소생이다”는 길리기아의 아라투스(Aratus)에게서 인용한다(28절). 비록 바울이 헬라의 사상들을 인용하지만 그는 헬라 철학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그 구절들을 활용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에 현존하고 있다고 확증하지만,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과 그가 창조한 이 세계로부터는 독립되어 있다고 설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범신론자는 아니다. 그가 구약성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울의 신학은 성서의 맥락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고린도 선교(18:1-22)
아테네를 떠난 후 바울은 폭이 좁은 지협을 통과해서 남쪽 헬라 영토 아가야의 행정 수도와, 아드리아해와 에게해 사이에 있는 중요한 상업 중심지인 고린도를 향하여 서쪽으로 나아간다. 그 곳에서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도착하는 실라와 디모데와 합류하게 되고(18:5), 또한 선교사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난다(18:1-3, 18).
전체적으로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선교는 예상할 만한 경로를 따른다: (1) 그는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함께 논쟁을 벌인다(18:4). (2) 그는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회당을 떠나 더 광범위한 이방인들과 접촉하게 된다. 특히 바울이 옷에서 먼지를 털어 내고 이방인들에게 전환함을 말해주는 그의 보복적인 행동을 유대인들이 ‘매도’하거나 ‘모독’하는 갈등의 세부 사항들은 이전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적대감을 반영한다(13:45-41). (3) 결국 바울은 다시 한 번 로마 법정에 서게 되고 불법을 행했다는 거짓 고소를 당한다(18:12-16).
선교의 과정에서 바울의 인내를 가능케 한 힘은 그리스 여정을 개시했던 것(16:6-10)과 같은 또 다른 밤중의 환상에 기인한다. 현재의 현현에서는 두려움을 견뎌내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 아래 고린도인들에게 설교하기를 계속하라고 그에게 용기를 주는데, 이 환상에서는 다른 곳과 달리 주께서 직접 말한다(18:9-10). 이것은 사도행전에서의 다른 환상들과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선교의 확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특별한 또 한 가지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당시 베드로의 증언 이후 야고보가 내린 결론적 진술(15:14)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관례적인 용어(라오스)가 나타나는데, 이제 그 용어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하나 된 백성(라오스)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18:10;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라오스)이 많음이라”]. 이와 같은 환상으로 고무된 바울은 고린도의 많은 백성들을 주께 데려오기 위하여 그 성에 여러 달 동안 정착한다(18:11).
이 여행 이야기에서 바울은 주인공으로 여전히 사역하지만, 그는 세 쌍의 동역자들에게서 도움을 받는데, 그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디모데와 에라스도(19:22), 그리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19:29)이다. 에라스도, 가이오, 그리고 아리스다고는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사람들로서 바울의 동역자들이 확대되고 있음을 반증해준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이라고 언급되는데(19:29), 16:9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이 도와달라고 바울에게 요청한 것이 이렇게 결실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세 쌍의 동역자들은 바울이 에베소를 잠시 떠난 후 독립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이 떠나 있는 동안(18:19), 에베소에서 새로운 사역을 관장한다. 또한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돌보게 한다. 그리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백성들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제자들이 말리고 있을 때, 바울의 선교를 방해하는 폭도들의 동요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아무리 멋진 영웅으로 등장해도, 바울 자신이 뛰어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장기간 체류한 후, 바울은 아시아 속주의 주도이며 상업도시로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에베소에 도착한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그곳에 와서 회당을 방문한다(18:18-19). 에베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하고, 바울은 안디옥, 갈라디아, 브루기아 지역으로 간다(18:20-23).
[출처]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작성자 성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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