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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배자의 삶 경외자

에반젤(복음) 2022. 3. 1. 02:18

[예배자의 삶 경외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경외의 참뜻"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경외'는 무엇을의미할까?'경외'에는 '두려워 하다'라는 뜻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경외는  자연적인 두려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자연적인 두려움은 위험이 임박한 상황에서 무서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라는 말씀에서 놀라는것도 그런 상태다.죄에대한 두려움도 경외와는 상관이 없다.

 

그중에서도 미신에 대한 두려움은 눈앞의 유혹은 겁내지 않으면서도 길을 건너는 토끼를 보면 불길한 징조라며 걱정스러워하는 태도를 말한다.육신의 두려움은 영혼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로마의 시인 스타티우스는 "의심의 시대에 두려움은 최악의 예언자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겁이많은 사람은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은 친구를 유혹하고 자신이 믿는 신을 부인한다.예수님은 세차례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말라고 경고하셨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카멜레온이 여러색으로 변신하는 이유는 지나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했다.두려움은 카멜레온이 몸 색깔을 바꾸듯이 믿음과 신념을 쉽게 저버리게 만든다.

 

육신의 두려움은 고통을 수반한다.사도 요한은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라고 말한다.

 

"형벌"을 뜻하는 헬라어"콜라시스"는 때로"지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두려움에는 지옥의 고통이 뒤따른다.

 

게다가 육신의 두려움은 매우 해롭다.

 

육신의 두려움은 의무를 피하개 만든다.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기도하는 것보다 도망을 선택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하다.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오리겐이 우상앞에 향을 피운것은 바로 두려움때문이었다.'경외'란 '거룩한 두려움'즉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존중하는 마음을 뜻한다.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신 눈길앞에 우리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태도

 

그것이 곧 경외함의 참뜻이다.한마디로 경외는 하나님과 우리의 무한한 차이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한 산에 임하자 모세는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라고 고백했다.

 

따라서 경솔하게 하나님앞에 나아가고 무례하고 부주의한 태도로  그분을 경배하는 것은 경외와는 거리가 멀다."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경외하는 모습과 경외의 대싱을 포함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경외는 가장 앞선 은혜 즉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뿌리신 첫번째 씨앗이다.

 

참 기독교인이라면 비록 믿음을 많이 전하지 못하고 확신이 부족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신자에게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고 선한 분이시다.

 

따라서 참 기독교인이라면 그분을 노엽게 하거나 혹시나 그분을 잃을까봐 늘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기독교인의 필수의무"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전5:7)'하나님 여호와'라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해야 한다(신28;58)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이성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수 없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없다.신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 본성으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

 

경외는 노예가 주인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자식의 공경심을 뜻한다.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경건한 자들은 자식이 아버지를 두려워하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악한 자들은 죄인이 재판관을 두려워하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여러가지의 은혜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면 이런마음이 더욱 귀하고 보배롭게 생각될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짝을 이루는 것에는 어떤것들이 있는지 자세히 실펴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짝을 이루는것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사랑과 짝을 이룬다(시145:19-20)

 

정숙한 아내는 남편을 노엽게 할까봐 두려워한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경외와 사랑은 반드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사랑은 영혼의 동작을 빠르게 만드는 '돛'과 같은 역할을 하고 경외는 영혼을 믿음안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바닥짐'과 같은 역할을 한다.경외심이 없는 사랑은 제멋대로일 가능성이 많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믿음'과 짝을 이룬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우리자신의 죄를 의식하면 무서워 떨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두려움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믿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우리는 두려워하면서도 신뢰한다.

 

이는 닻을 늘어뜨린 배가 바람에 흔들려도 닻줄에 연결되어 있어서 멀리 떠내려 가지 않는 것과 같다.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경외심을 하나로 묶어주셨다.

 

경외심은 진지한 마음을 잃지 않게 해주고 믿음의 기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경외심은 그물에 달린 납덩이처럼 주제넘게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주고 

 

사랑은 그믈에 달린 코르크처럼 절망으로 깊이 가라앉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신중함'과 짝을 이룬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다.

 

그런 사람은 다른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를 미리보고 잘 피해간다."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22:3)경외심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기 보다는 신중하게 만든다.

 

 넷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소망'과 짝을 이룬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33:18)경외하심이 소망을 꺾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경외심은 소망을 소중히 품어 안는다.경외심과 소망의 관계는 기름과 등불과의 관계와 같다.

 

경외심은 소망을 불타오르게 만든다.하나님의 정의를 두려워 할수록 그분의 지비를 소망하는마음은 더욱 커진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지않는 사람들도 소망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런 소망은 은혜로 주신 '좋은 소망'이 아니다.죄인들은 겉으로 '소망의 투구'를 쓴것처럼 꾸밀 수는 있지만 '의의흉배'는갖추지 못한다.

 

 다섯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근면함'과 짝을 이룬다.

 

 

하나님을 냉혹한 재판관으로 생각해서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주인이 준 달란트를 땅에 순긴 종처럼 자신의 의무를 소흘히 하기쉽다.참된 경외심은 근면한 태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참 신자는 두려워하면서도 기도하고 두려워하면사도 회개한다.경외심은 근면함을 북돋아준다.

 

새 신부는 단장하기 전에 신랑이 올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부지론히 

 

몸을 치장함으로써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한다.경외심은 늘 깨어서 성실하게 일할 수있는 마음을 갖게한다.

 

경외심은 나태를 용납하지 않는다.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죄인들이 지옥에서 느끼는 아주작은 고통보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데서 비롯하는 많은수고가 훨씬 견디기 쉽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예배자의 삶]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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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법은 어떠한 규정(規定)이 아니니라.

 

'성령님(하나님)의 인격적인 인도'라 정의 하여야 한다.

 

율법은 섬세한 부분을 처리하지 못하지만,(그렇다고 율법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 아님)율법은 옳고 그른 것은 설명하지만,상황에 따른 섬세한 부분까지, 영혼 깊이 상담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옳은 일을 하더라도언제, 어떤 순서로, 어느정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예를 들면,'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가르쳐 주지만,.

누가 가난한 자인지....

언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돌보아야 하는지....

어느 정도나 도와야 하는지....이런 것들을 충분하게 가르쳐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성령님)은 가능하시다. "인격者시요,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하나님(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기본 방법인 '성경묵상과 적용'의 낮아짐의 시간은

 

계율적이거나,교리적이거나,윤리학적이거나,원리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섬세하게 그날 그날 하나님(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적용이 이루어져야 하는것이다.

 

'성경 공부'와 '성경묵상'의 차이는'율법'과 '성령님의 인도' 만큼 차이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율법의 약점이 무엇이며, 성령의 법이 얼마나 유익하고 탁월한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성령의 법이 너무나 자유롭고 불안해서율법을 고수하려 하고, 규범이나 격식에 매이려고 하시는 분은 로마서 8장을 겸허하게 다시 여러번 묵상 할일이다.

 

보편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을 말할 때 "가르치고 인도하시고보혜사로서 상담해 주시고, 조명하시고, 양육하신다"고 하면서도,실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혼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면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된다.

 

목사님이나 교사들의 가르침이나 상담이나 양육은 안전하고,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면 걱정스러운가? 정녕코 아니다.

 

성령님은 완전하신 "인격체"이시다.성도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할 때,사람(목사님이나, 교사)은 그 과오를 쉽게 발견하거나 시정해 줄 수 없지만, 성령님은 능히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신다."성령님은 삼위 하나님이시며 인격자이시고 보혜사라는 사실"을 망각하면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사람이나 규정이나 무엇인가를 세우려고 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계신 것보다 성령님이 더 유익하다고 하시면서 성령님에게 모든 것을 인계하셨다.

 

(아래구절 참조)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4-

복음 사역 또한 성령님의 인도를 받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하시었다.(행 1:4,5,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 즉 "하나님께서 친히 영으로 내주,교통,충만함이 되심으로 오신 성령님"을 우리가 무엇이관대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성령님 보다 앞서서 열심을 내는 일은 하나님 뜻에 반(苌)하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일이다.

"성경공부, 설교, 상담, 제자훈련...성화, 구원, 전도, 교육...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법 아래로 가야 올바른 것"이리라.자기 열심은 성령을 거스를 수 도 있으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그리스도를아는 지식"을 얻지 못하게됨으로 영생의 참된 실재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믿음 안에 있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은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과 로마에까지 가는 의지를 발휘케하는 인도받은 열심을 내어 순교의 귀한 본이 되기도 했다.(행 20:13~21:16)

 

전자의 자기만족적 열심인지, 후자의 인도함을 받은 열심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