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스크랩]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7장

에반젤(복음) 2021. 12. 27. 05:44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7장

큰 음녀와 붉은 빛 짐승 (계17:1-18)

 

큰 음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로마를 가리킨다., 사치 음란 우상숭배 부정 등의 바벨론 사상이라. 마호메트교 불교 도교 등 이방종교를 가리킨다. 공산주의다. 온 세상에 편만한 로마 천주교다.”는 등의 견해가 있는데 이들을 포함하여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 세상과 및 거기에 속한 것을 총칭한다.(박윤선)”는 학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처럼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모든 악을 망라한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수한 사람을 타락시켜 자기 종을 만들고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은 바로 죄악된 세상입니다.

 

큰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자세히 보면 계 13장의 확대판입니다. 즉 일곱 머리에 열 뿔을 가졌고,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거나,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의 공생관계나, 어린양과 함께 한 성도들과 싸우는 것 등 계 13장 전반부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여러 면에서 같습니다. 즉 큰 음녀로 비유되는 세상이 붉은 빛 짐승으로 비유되는 자아적인 마음과 육체의 탐욕을 이용하여 온갖 악행을 하고 어린양과 성도를 대적하지만 말씀의 양육과정과(13:5) 기도와 고난을 통한 십자가 고난의 사랑을 묵상하는(16장)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동안 세상과 짝하던 마음이 변화됨으로 몸도 새 자아를 따라 합심하여 세상을 배척하게 됨을 보여 줍니다.

 

두 계시의 차이는 13장보다 17장이 더 상세하다는 점, 13장에서는 세상이 육체의 탐심을 부추겨 숭배토록 했는데(계13:14-15, 골3:5) 17장에서는 반대로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적극적으로 권세를 부린다는 점입니다. 붉은 빛 짐승의 최고의 활약기는 인간의 청춘기입니다. 이 둘은 서로 공생하는 윈윈관계입니다. 음녀 및 바벨론(세상)과 붉은 빛 짐승(청춘이나 육체의 정욕)과 육체의 일생(17:8-12)이라는 틀에서 17장을 보면 자연스럽게 해석이 될 것입니다.

 

 

큰 음녀의 정체 (계 17:1-7)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7.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국가로서의 바벨론은 요한이 계시록을 받기 전에 이미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바벨론이 상징하는바 죄악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음녀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을 죄의 노예로 만들어 지옥 백성을 삼고 하나님과 및 성도들을 대적하는 등 그 만행은 지금도 지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패역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죄에서 구원일 만큼(행2:40-41) 세상이야말로 사는 날 동안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고약한 대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시록 17-18장을 통해서 더 심도 있게 다루시며 우리에게 각성시켜 주고 계십니다. 즉 17장이 음녀인 세상의 정체와 그 미혹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18장은 바벨론을 비유로 하여 세상의 강력함과 죄악과 그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큰 음녀의 정체, 즉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1. 세상은 처리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1절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큰 음녀의 정체를 보여주는 자가 일곱 대접재앙을 행사한 일곱 천사 중의 하나임은 큰 음녀가 세상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세상은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과(갈5:24) 나아가 십자가 고난의 사랑을 묵상함을 통해 처리 받게 됨을 시사합니다(히12:2, 벧전2:21, 벧전4:1-2).

 

2. 세상의 미혹의 대상은 모두입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큰 음녀가 앉은 물의 의미는 15절에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한 말씀이 그 힌트입니다. 이 표현은 바벨탑 이후 혼란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으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시사합니다(계5:9, 10:11, 11:9, 13:7, 14:6, 계17:15). 이처럼 세상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타고 활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란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관점에서 봐도 세상은 미혹적입니다. 물이 육체적 사랑을 비유함에 쓰였는데(잠5:15-17) 여기 물은 집 안에만 있는 샘이나 우물 같은 순수한 부부의 애정이 아니라 문제는 바다와 같은 많은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탐욕은 누구라도 마실 수 있는 개방적이라는 점에서 타락의 대상에 차별이 없습니다. 정당한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추구하고 섬기면 그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3. 세상 문제는 우리에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 작은 음녀가 아닙니다. 이 음녀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아담 이래 이 미혹에 걸려들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수많은 인생들을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까지도 방심하는 순간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큰 음녀라는 것은 그만큼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여러 주제 중에서 음녀 문제가 큰 분량을 차지하며 여러 곳에서 빈번하게 강조되는 것도 세속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에게 당면한 큰 문제인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런 점에서 계시록은 성도를 세속에서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만드는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세상은 강력한 심판 하에 있습니다.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음녀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믿어야 함과 동시에(갈6:14),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했듯 미래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드려 가까이 하고 경배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롬6:13-14, 요일5:4), 나아가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깊이 묵상함으로 그 잔재까지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5. 육신에 속한 자들이 세상 정욕에 빠집니다.

 

2절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이 여자와 음행한 대상이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땅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육신에 속한 자들이 세상에 빠졌고(롬8:9), 특히 본 절의 평행법 문장에서 음행이란 포도주에 취하듯 세상에 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왕은 그 주권성이 시사하듯 우리가 원해서, 혹은 백성들의 피지배성이 시사하듯 세상의 영향력으로 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의인 노아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은혜를 받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창6:8).

 

6. 세상은 강한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포도주에 물을 타서 연하게 마셨습니다. 최소한 10배에서 20배 이상 물을 희석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마시면 취하거나 위장이나 간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음행의 포도주는 물에 타지 않은 포도주로서 금방 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맛을 보게 되면 그 미혹에 도취되어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만하지 말고 그 무엇보다 세상을 조심해야 합니다(잠5:4-5).

 

7. 세상은 우리를 시험합니다.

 

3절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가셨는데 마치 세례요한이 성령에 사로잡혀 광야에 있었고(눅1:80), 예수님께서도 성령께서 광야로 몰아내셔서 시험을 받게 하신(마4:1, 막1:12-13) 모습과 같습니다. 요한이 성령으로 광야로 가니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광야의 시험을 보여주는 오묘한 그림입니다(마4:1-2, 눅4:1-2).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처럼 세속과 세속적인 방법을 물리치시며 이기시기 바랍니다.

 

8. 세상이 육신적인 것을 타고 활동합니다.

 

3절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여자가 탄 붉은 빛 짐승은 앞에서 언급했듯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같이(계13:1-10) 이 붉은 빛 짐승이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면에서 기본적인 면이 같다는 점에서 인간의 육체나 육신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특히 붉다는 것은 인간의 청춘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세속은 육신의 생존기와 관계가 있는데 그 중에서 청춘의 시기일 때 가장 관계가 깊습니다(전11:9-10, 딤전6:11-12, 요일2:17). 에서가 세운 나라가 ‘에돔’인데 ‘붉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살던 에서가 받을 축복은 없습니다(창27:38-40). 육체를 가졌으니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세상과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9. 세상을 가까이 하면 육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이 흉악한 괴물의 모습은 바로 육신적인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가까이 하면 육신적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롬8:7-8).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했는데 그것이 바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성령의 전인 몸을 죄악으로 더럽게 하는 등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롬1:24-32).

 

10. 세상은 본능적인 육신과 호흡이 잘 맞습니다.

 

그 괴물은 “일곱 머리”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7은 사역의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머리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행하는 본능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본능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사는 것은 죄가 됩니다. 이런 머리를 가진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는 주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명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1. 세상은 육신적인 권세의 도움을 받습니다.

 

“열 뿔이 있으며” 뿔은 권세나 주관을 말하며, 열 10은 십진법에 있어서 만수입니다. 이처럼 육신적일수록 주관적 자아가 강합니다. 뿔이 두 개인 염소도 고집이 대단한데 뿔이 열 개 달렸으니 누가 그 고집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짐승이 음녀를 태우는 것을 보면 음녀를 위한 고집이므로 여자는 지치지 않은 천리마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12. 세상은 크게 부요한 모습입니다.

 

4절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자색 옷은 귀족이나 부자 중에서도 아주 부유한 자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눅16:19). 당시 비단의 가격이 금의 무게만큼 비쌌고 또 자주색 염료 역시 고가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직접 부요를 주지는 않지만 마음으로는 다 가지게 합니다. 미움 슬픔 간음 무절제 방탕 살인 비인권 외식 세속종교 돈 명예 권세 즐거움 등 욕심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십계명 모두 범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죄를 금지하는 법도 없습니다.

 

13. 세상은 강력한 지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붉은 빛 옷을 입고" 홍포는 왕이 입는 옷입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홍포를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했습니다. 큰 음녀가 권세자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지배력이 강합니다. 죄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든지 이 세속에 걸려들기만 하면 마음의 포로, 죄의 종이 됩니다(요8:34, 히3:7-8). 알콜 마약 도박 도색 도둑 오락 사이버 등 중독이 많은데 한 번 걸려들면 빠져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14. 세상은 놀라운 미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여기 꾸민다는 것은 치장을 말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것입니다(아4:9). 여성의 미모는 치장에 따라 달라지고 그 치장은 남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속은 썩었어도 그 미화성 때문에 아릅답게 보입니다(딤전6:9-10). 아담과 하와도 뱀의 미혹과 선악과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 금단의 열매를 먹었고, 멸망의 소돔성이 속은 썩었어도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보였습니다(창13:10). 롯이 패가망신한 이유입니다.

 

15. 세상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금잔은 성전이나 왕실에서 사용하는 귀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안의 내용물은 추한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중성입니다. 바알종교의 경우 겉으로는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는 그럴듯한 종교로 포장되어 있지만 안으로는 온갖 음행의 소굴이었습니다. 모압의 종교 역시 음행의 종교였습니다(민25:1-3). 이와 같이 은혜 받지 못하면 세상의 이중성에 속아 그것을 소유하면 금방 행복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만 같게 생각합니다.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약1:14, 잠7:21-27).

 

16. 세상은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입니다.

 

5절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이마는 그 인격이나 그 인격의 타이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마에 성령의 인이 쳐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여러 이름들도 그 본질을 암시합니다. 반대로 이마에 짐승의 표가 있다면 그는 아직 짐승 같이 본능을 따라서 사는 사람 즉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자의 이마에 기록된 여러 이름들은 큰 음녀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비밀이니 겉과 속이 달라 그럴듯해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큰 바벨론이니 사람들을 정복하여 죄의 종으로 만들고, 땅의 음녀들이니 하나님 외에 세상 것을 탐하게 하고, 가증한 것들의 어미이니 세상에서 모든 악한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세상의 본질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죄가 들어오거든 마음 고치려고 고민하지 말고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세상종교나 수양은 마음공부에 치중하지만 영적인 문제인 줄 모른다면 100년 해도 헛수고입니다. 사탄이 세상이라는 고깔을 쓰고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면 죄가 신기하게 사라집니다.

 

17. 세상은 성도를 시험 들게 하는 흉악한 것입니다.

 

6절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요한이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겼다는 표현에서 얼마나 의외의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없이 세상에게 먹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종들까지 세상에게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거룩한 성도들이 폭군도 아닌 이 여자에게 무수히 당했다는 것은 기이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부분의 해석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성도나 주의 종들을 영원히 이긴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성도들에게 늘 시험의 원인이더라는 뜻입니다. 그토록 귀히 쓰임을 받던 일군들도 조금 방심하는 순간 이 세속에게 넘어지거나 마음으로라도 자구만 당하더라는 것입니다. 여차하면 시험에 빠지고 넘어지고 좌절하고 바로 그것을 교훈하고자 한 것입니다(고전10:12, 벧전1:17, 잠7:25-27).

 

세상은 바로 왕과 같이 끝까지 추격하여 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도 같이 1차(B. C. 537) 2차(B.C. 458) 3차(B.C. 444)에 돌아온 것처럼 완악한 마음이라서 세속을 벗어나 하나님께 마음 드리며 살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18. 세상은 육체의 본능을 타고 역사합니다.

 

7절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이미 3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서 볼 수 있듯이(계13:1) 육신의 탐욕적이고 무소불위적으로 막강한 본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자가 탔다는 것은 세상이 본능을 타고 역사함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에게서 본능이 없다면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을 만큼 무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련하는 자들이 본능적인 것을 죽이기 위해서 금식하거나 없는 걸로 생각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하지만 인간의 본능은 육체가 사망해야 비로소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능은 죽일 성질이 아니라 건전한 범위 안에서 적절히 충족시키면서 통제하는 것입니다.

 

 

일곱 머리의 비밀 (계 17:7-11)

 

7.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7절)이라고 한 것처럼 오늘도 그 비밀을 해석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은 무엇일까요?

 

1. 범죄하기 쉬운 약점을 지닌 육신을 가리킵니다.

 

7절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한 대로 여자가 탄 존재가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입니다. 이미 설명 했듯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졌으며 공통적인 면이 많아 본문의 짐승이 동일한 육신의 정욕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17장에서 더 상세히 설명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등 잘 활용한다면 그만큼 보배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상과 사탄이 이용하는 등 그만큼 큰 약점은 없을 것입니다(계12:17, 마10:28, 마5:29-30, 딤전5:6). 이처럼 세상의 온갖 범죄는 세상이 이 육신적인 마음을 충동질해서 생긴 사건입니다. 세상과 육신은 불과 불나비와 같아서 만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될 대상입니다(요일5:21).

 

2. 이 짐승은 죽음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8절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문맥으로 보면 이 짐승은 앞의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을 가리킵니다. 내용으로 보면 상당히 모호하고 난해한 수수께끼 푸는 것과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몇 가지 힌트를 참고하면 이것은 전에는 있었습니다. 현재는 없습니다. 장차 나타납니다. 그리고 장차 나타나긴 하지만 다시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불신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요, 은혜 받지 못하고 아직 육신에 속한 성도들도 역시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도를 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원수이기에 장차는 영원히 멸망에 처해지고 말 그 어떤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육체의 사망 이야기입니다. 즉 우리가 세상에 나기 전에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자면 전에는 사망이 존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있었다가”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시방 없으나”의 뜻입니다.

 

그런데 육신이 영원하지 않기에 사망이 장차 나타납니다(사40:7-8). 그런데 이 짐승이 무저갱에서 나온다 했듯이 죽음은 무저갱과 같아서 모두를 데려가고 데려가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잠27:20). 무저갱에서 나왔으니 무저갱으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최후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두려움은 땅에 속한 사람 즉 불신자나 육신에 속한 믿음의 초보들이 느끼는 감정이지 생명책에 똑똑히 기록된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성도에게는 없는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깊은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성령의 은혜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빌1:23, 히2:15)

 

이처럼 죽음은 성도를 해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 재림 시에 죽음은 영원히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부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계21:4).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 한 것처럼 성도에게서 사망은 영원히 사라질 날이 옵니다. 이처럼 육신은 세상과 관련을 가지려고 할 뿐 아니라 죽음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세상을 위해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히9:27).

 

3. 육신은 끊임없는 난제 속에 살아갑니다.

 

9절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 뭔가 힌트를 주었는데 더 혼란에 빠져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근거로 해석하면 풀립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일곱 머리는 육신적인 것이나 육체의 본능을 가리킵니다. 이게 일곱 산이란 말인데 육신적인 문제가 왜 일곱 산일까요?

 

성경에서 산이란 어려운 난제를 상징합니다(슥4:7). 그런데 한 산이 아니고 일곱 산이니 7이 완전수라는 점에서 해결할 수 없는 혹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영속적 난제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죄는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셨듯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육체의 본능 역시 인격체 안에서 왕노릇합니다. 이런 난제의 일곱 산을 여자가 타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 세상정욕을 만나면 잘못하면 지옥에까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마5:29-30).

 

그 뿐 아니라 육체를 가졌기에 어떤 때는 가난으로 질병으로 사고로 전쟁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합니다. 이 때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육체를 떠나 비둘기 같이 훨훨 날아서 저 바다 끝에 가서 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만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난제는 죽음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일곱 산이 바로 죽음입니다.

 

4. 육체는 왕들이 나타나 여러 지배의 과정을 거칩니다.

 

10-11절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여기서는 일곱 머리를 일곱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육체는 일곱 산의 개념도 있고 일곱 왕의 개념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일곱이 아니라 일곱째 왕에서 여덟 째 왕이 나오니까 여덟 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곱 왕이라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7의 의미 때문입니다. 일곱 왕의 7은 사역의 완전수이므로 절대적 권력을 가졌습니다. 여덟왕인데도 일곱 왕이라 한 것은 마지막 여덟째 왕은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우리를 다스리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때 천국의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핑크스의 수수께기를 연상시키는 일곱 왕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했는데 이 여덟 왕들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잠시 정리해 보면 먼저 다섯 왕이 동시에 다스리다가 망했고, 현재는 여섯째 왕이 다스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일곱째 왕이 나타나 함께 공동통치하며 다스립니다.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했기 때문에 일곱째 왕은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왕입니다. 그런데 이 일곱째 왕에게서 마지막으로 또 한 왕이 나옵니다. 이 왕은 지난 시간에 설명한 대로 전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지만 장차는 나타날 왕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에 여덟째 왕이 누구인지 눈치 챘을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일생동안 이 왕들이 치레로 나타나 우리를 지배합니다.

 

먼저 다섯 왕은 청춘일 수록 더 강하게 우리를 지배하던 육신의 본능이나 거기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수요, 시험의 수요, 인간에게 5가지 감각(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있듯 고통과 시험을 주는 그런 류의 왕들입니다. 수 10장의 아모리의 다섯 왕을 여호수아가 지휘관들을 명하여 발로 밟았듯 잘 통제해야 육체의 본능이나 욕망 등입니다. 이렇게 다섯 왕에게 지배 받다가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 나므로 그 육체의 욕망의 왕들에게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섯 왕이 예수님 때문에 망하게(10절)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인데, 육체의 욕망이 사라진 후에 현재 다스리는 여섯째 왕은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롬8:9). 왜냐하면 마음을 지배하실 뿐 아니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한 것처럼 현재적 지배는 바로 성령의 지배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고후6:2). 그리고 여섯째 왕은 숫자로 6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것처럼 우리 영혼의 생기는 성령님이십니다. 여섯째 왕의 통치는 7째왕 8째왕이 와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럼 일곱째 왕은 무엇이며, 이 일곱째 왕에서 나오는 여덟째 왕은 무얼까요? 7번째와 8번째는 거기서 나올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7번째는 육체의 생명이고, 8번째는 사망의 세력입니다. 사망은 생명이 죽으면서 나타나는 것으로, 일곱째 왕인 늙음이 우리를 지배할 때 여덟째 왕인 사망도 그만큼 우리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10절, 계20:3, 눅4:13) 한 말씀이 바로 늙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성경에서 잠시 잠깐 얼마동안 등의 표현이 인생의 날이나 임종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계20:3, 눅4:13, 고후4:17-18, 욥21:13, 약4:14, 벧전1:24) .

 

비록 성도의 육체일지라도 그 안에 또 하나의 세력이 서서히, 반드시, 그러나 길지 않게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늙음의 세력이요, 그 7번에서 8번이 나왔다는 점에서 늙음에서 사망의 세력이 나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벧전1:24-25). 노년의 기간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에도 잠시 라고 한 것은 시간 개념이라기 보다 육체의 환난이 크다 해도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잠시라 한 성경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고후4:17-18).

 

성도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땅은 아무리 길어도 하룻길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노년기는 성령과 사망이 침투한 노구의 육체가 동시에 다스리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 했습니다(고후4:16). 그러나 끝이 아닙니다.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즉 사망이 멸망에 처해집니다(고전15:26). 이처럼 성도는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고 천국의 영광 속에 살다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육체까지도 영광의 형체로 덧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산으로 본 육체의 난제들이요, 또 왕으로 본 지배적 인생관입니다.

 

 

열 뿔의 비밀 (계 17:12-14)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육에 속한 사람이나 육신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거나 의지하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살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아라고 하는데 거듭난 이후에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아를 꺾으시는 수순에 들어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열 뿔의 비밀은 곧 자아의 비밀입니다.

 

마치 사울과 같이 완고해서는 안 됩니다(삼상15:23). 그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을 때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그러나 2년도 채 되지 못하여 자기를 위하여 군대를 만들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블레셋을 쳐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무엘이 기다리라는 7일을 참지 못하여 석양에 제사를 드리고,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기념비를 세우는 등 내 맘대로 행진곡에 맞추어 나가다가 결국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자아란 무엇입니까?

 

1.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자입니다.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열 명의 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10은 십진법에서 만수로 다 갖추어져 있고, 뿔은 권세나 권능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열 뿔은 곧 열 왕이라"(17:12) 했습니다. 계13:1에도 “그 열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했습니다. 일곱 머리에 일곱 왕관이 아니라 왕관이 뿔에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자아란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자율적인 권세를 가리키는데 열 뿔을 열 왕이라 한 걸 보면 보통 권세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교만방자하고 자유분방하고 자기가 법이고 이기적이며 호사스러운 독재자를 연상시킵니다. 제 맘대로 하는 권세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바로 자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 의존적으로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이런 자아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큰 문제입니다(벧후2:10).

 

2. 자아는 환경에 따라 그 세력이 다를 수 있습니다.

 

12절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왕이지만 나라가 없는 상황을 말씀합니다. 완고한 독재자라 할지라도 나라가 없으면 무력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아란 환경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를 보입니다. 모두 죄인이지만 성장과정이 좋았거나 어려움이 없는 환경 속에서는 자아의 세력이 크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갓난아이들도 어려서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라도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막무가내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아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도리어 시인하지 않기에 그 자아를 처리하기가 더 힘이 듭니다.

 

2. 자아는 소욕이나 환경과 결탁될 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2절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여기 “짐승으로 더불어” 라고 했듯이 육신의 소욕과 세상의 환경이나 유혹과 결탁했을 때 자아의 권세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마음에 감동 혹은 상처를 받았다든지 어떤 동기가 주어졌을 때 그 자아는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서운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동안 권세를 받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아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잠시 어려운 환경 속에 두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자아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특수환경을 통해서 우리 안의 잠재한 자아를 노출시켜 처리 대상으로 올려놓고 문제 삼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대로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셨기 때문에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며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악마의 기발한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자행자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나가야 할 거듭난 새 자아의 모습입니다. 여기 들짐승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붙여주신 악의 파트너입니다(시57:4).

 

3. 자아의 세력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여기 한 동안이란 처리하실 날이 있음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자아가 나타나면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 아래서 바꾸어질 수 있습니다. 야곱은 태생적인 자아의 사람이었지만 혹독한 연단 속에서 깨어지고 부수어졌습니다. 모세도 애굽의 왕자로서 한 동안 자기 권세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하려 했지만 40년의 연단 속에서 이제는 두 손 들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거대한 연단의 맷돌 속에서 부스러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혼자 결정해놓고 기도해 달라. 기도를 부탁하니 믿음 좋은 것 같아도 고생길이 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평범하지 않을수록 더 처리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잘 생기고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하고 가방끈 길고 돈 많고 권세와 능력도 많으면 많을수록 더 처리하기 힘듭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주장이 더 강하고 하나님께 좀체 순복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시고자 하실 때 그것은 한 동안일 뿐입니다. 자기 잘난 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4. 자아는 우리를 더욱 육신적이게 합니다.

 

13절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계13:15에도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더라는 비슷한 현상을 봅니다. 그들이란 열 뿔 즉 열 왕을 가리키고, 짐승은 붉은 빛 짐승을 가리킵니다. 계 13장의 세상정욕이 육체를 부추겨 세상사람 만들듯이, 자아 역시 육신적인 마음과 결합하여 한 뜻을 이룹니다. 그래서 자아가 어떤 마음과 결탁하느냐에 따라 세상주의 현실주의 도피주의 쾌락주의 민족주의가 되기도 하고 그 완고한 형태는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강력한 자아가 만들어집니다.

 

5. 자아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립합니다.

 

14절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여기 어린 양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기의 의로움과 노력 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혹은 어린 양에 반대되는 개념은 염소입니다. 자아란 고집불통 염소와 같습니다. 자아와 육신의 생각들이 결탁하여 더 강력히 하나니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여기 “더불어”는 맞상대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천상천하에 예수님을 맞상대하려는 자는 자아 빼고는 없습니다. 자아가 내 중심을 차지하려고 싸웁니다. 내가 더 크다고, 내가 더 옳다고, 내 뜻대로 해야 한다고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그런 싸움입니다. 교만한 사탄의 모습입니다(사14:12-14).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하셨습니다.

 

6. 그 어떤 자아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여기 어린 양 예수님을 자아의 주권보다 억만 배 강하신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으로 소개합니다. 만주의 주와 만왕의 왕이란 세상의 어떤 주나 왕도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기신다는 것은 전투적 용어로서 싸우실 것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자아가 열 뿔과 열 왕과 같을지라도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단8:25, 계19:16). 자아가 강할수록 훈련이 더 강합니다. 만약 대항하다가는 그들을 가루로 만드실 것입니다(눅20:18). 우리 주님의 능하시고 강한 연단의 손길 앞에서 두 손 들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7. 자아를 깨뜨리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여기 약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입니다(막3:13-14, 막5:18-19). 그들은 나를 따라오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밤이 맟게 기도하신 후 특별히 택하신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고 죽기를 약속한 진실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처럼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면서 날마다 자아를 내려놓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포기하고 순복함으로서 이처럼 자아는 깨뜨리는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자아를 이긴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아를 깨뜨리는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마16:24).

 

 

음녀를 불로 사름 (계 17:15-18)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18.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세상 음녀의 도구가 되고 어린양을 대적하기까지 하던 열 뿔과 붉은 빛 짐승이 완전히 돌변하여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괴물이나 짐승은 악한 이미지인데 이런 변화된 착한 괴물과 짐승도 있을까요? 이처럼 우리들이 취약 부분인 자아와 육신을 가졌지만 열심히 어린 양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순종하는 훈련을 하면(계17:14) 우리의 자아와 육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는 새 자아를 힘입어 몸과 함께 세상을 멀리하고 주를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새 자아의 도움을 몸이 입게 되면 하나님 제일주의의 경건한 삶으로 바뀝니다.

 

새 자아가 형성 되면 어떻게 됩니까?

 

1. 새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15절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여기 물 위에 앉았다는 것은 큰 음녀의 기초나 거처나 숙주 등 존재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려 주신 것이고, 물이 무엇인지 힌트를 주는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 의미하듯(창11:7-8) 하나님을 대적하던 바벨탑의 타락한 이념이 세상 음녀의 배경이란 말씀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 바벨탑의 후예답게 타락했기에 음녀와 같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등 이런 해설을 이 대목에서 할 때 다가오는 느낌은 새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여부로 자아의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2. 새 자아는 세속을 배척합니다.

 

16절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서부터 열 뿔 가진 붉은 빛 짐승이 음녀를 배반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열 뿔 가진 짐승이 음녀를 등에 업지 않습니다. 나아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사르며(레21:9) 하나님의 뜻대로 할 마음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사11:2-5).

 

이처럼 마음이 변화되어 새 자아가 형성되면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멀리하고 미워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말씀으로 경계하고 엎드려 성령의 불로 태우려고 합니다. 즉 벌거벗게 한다는 것은 수치를 뜻하고, 그 살을 먹음은 원수가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었다는 말씀처럼 극도의 원수지간을 나타나며, 불사름은 죄악의 잔재까지라도 청산하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새 자아의 모습이며, 이 일에 짐승 즉 육신도 새 자아의 도움을 받아 적극 협력합니다.

 

3. 자아를 내려놓으면 내적 갈등이 없습니다.

 

17절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여기 하나님의 뜻대로 할 마음이 바로 새 자아입니다. 자기 뜻대로는 옛 자아이고, 하나님의 뜻대로는 새 자아입니다. 이처럼 새 자아가 몸과 한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전에는 자아가 짐승과 하나 되었는데 이제는 새 자아와 짐승이 하나 됩니다. 그래서 새 자아의 새 의지를 힘입어 우리의 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일반적으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르는데(갈5:17) 자아가 변하면 육신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새 자아와 몸이 하나 되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마치 바벨론에 잡혀간 남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서로 손을 잡고 본토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고 땅을 다스림과 같이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 받은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4. 새 자아는 육체를 도와 온전하게 합니다.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그들의 나라란 열 뿔 열 왕으로 비유된 이제는 새 자아가 된 새 자아의 나라로 새 자아의 강한 의지를 암시하는 듯 보이며, 이 새 자아가 그 짐승을 굳건하게 세워 즉 몸의 역할을 바로 하게 하여 경건생활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의지가 새로워지면 몸은 자동으로 그 의지를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 드려 하나님을 섬기니 영적생활이 활기를 띠고 살아나게 됩니다(롬12:1-2).

 

5. 자아처리가 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성취될 때를 가리킵니다. 말씀이 응하기까지 라는 문구가 요셉에게 적용되었듯(시105:17-20), 요셉에게 꿈으로 약속하신 것이 온갖 연단을 통과한 후에 성취된 것과 같습니다. 내가 온전히 죽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충성할 수 있다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숙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행13:22).

 

6. 땅의 사람으로 되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18절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여기서 다시 큰 음녀의 강대함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잠시 승리했다고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라는 경고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힌트는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지 하늘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하심에서 하늘의 사람이 되면 더 이상 세상이 다가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13:14)하신 예언이 역사 속에 성취되었지만 다시는 세상이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과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온전히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